2016년 7월 30일 토요일

萬法歸一 其一何處(만법귀일 기일하처) (재수록)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2,3).

하나님의 뜻은 "기록한 말씀"(고전 4:6)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므로 항상 성경을 가까이하는 것이 필수이다. 성경 내용을 다 안다고 해서 절대로 성경을 덮어둘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부지런히 탐독함으로써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가 "너희가 진리에 (이미) 섰으나 항상 너희로 다시 기억나게 하려 한다"고 강조했듯이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도록 해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으로 마땅히 살고 로마서 7장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과거에로의 회귀 이상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감이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하고 바울이 책망한 것과 같다. "어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 뜻대로 행할까" 하는 것이, 아내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마음 쓰는 정도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고전 7:33,34) 마땅한 것. 

전자와 후자의 둘이 서로 충돌할 때를 가리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마 10:37) 경고하신 것이다. 말씀을 소홀히 하는 자는 하나님을 소홀히 하는 것이요 이는 자기 "구원을 (소홀히 하여) 등한히 여기는"(히 2:3) 것이 됨이니 "어찌 피하리요"(:3). 자기 "구원"을 소홀히 하는 자에게 닥치는 "피치 못할"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이와 같이 바울 사도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 생활의 잣대(尺度)를 세워 준 것이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이 표준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당장 자아중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즉각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새롭게 함"이다.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함"이요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함"이다. 

주님을 어떻게 해야 기쁘시게 해드릴까,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대로 행함일까 하고 기도 중에 항상 마음을 조리(調理)하고 정리하기를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 여러 번 강조했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일하기 위해 있고, 이 일을 방해하는 악령(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의 세력과 싸우는 오직 이 일만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외의 것으로써 "마음이 분산되어서는"(고전 7:33) 안되는 것. 오매 불망, 일심추월(一心秋月)로 이쪽으로만 생각을 맞추어 정리 정돈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萬法歸一 其一何處(만법귀일 기일하처). 모든 것이 하나로서 시작되었고 하나로서 유지 존속되며 그 하나로 역시 돌아가는 것은 분명한데, 그 하나가 어디인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처음 초자연계 몸으로 영생하는 인간이었으나 범죄함으로 이 지경이 되었은즉 요 모양으로 살 수는 도저히 없는 것. 이제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나타나셨고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때 가서야 우리가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될 것인즉 그 때 비로소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다. 어디서 왔는지가 분명하고 어디로 가는지가 명백하니 현재 나의 좌표가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일하고 싸우는 것 외에는 일체의 의미를 찾지 말 것이다.


유수한 한학자로서 "인생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죽도록 고민하던 중 성경을 읽다가 "나 위해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목에 이르러 크게 목 놓아 울고 그 아내와 함께 믿음에 들어 온 후 자기도 한 때 심각하게 물들었던 아편 중독자 치료를 겸한 전도 활동에 나선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 내외는 7년 동안이나 한 번도 옷 벗고 잔 적이 없었다. 자다가도 그 보살피는 영혼들을 위해 그리고 산적해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해 어느 때든지 일어나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이공(李公) 순신(舜臣)은 임진란 7년간 전투복장(戰服)으로 항상 지냈고 여잭(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 대목이 연상된다. 전쟁에서 오직 이기는 것이 목적이요 그 외에는 달리 생각이 있을 수 없음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병(軍兵)들인 것이다(딤후 2:3). 

나는 모든 꿈이 이루어진 삶 속에서 그 서막(序幕)으로 피 땀 흘려 싸우며 일하는 중에 있노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2,3).

하나님의 뜻은 "기록한 말씀"(고전 4:6)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므로 항상 성경을 가까이하는 것이 필수이다. 성경 내용을 다 안다고 해서 절대로 성경을 덮어둘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부지런히 탐독함으로써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가 "너희가 진리에 (이미) 섰으나 항상 너희로 다시 기억나게 하려 한다"고 강조했듯이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도록 해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으로 마땅히 살고 로마서 7장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과거에로의 회귀 이상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감이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하고 바울이 책망한 것과 같다. "어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 뜻대로 행할까" 하는 것이, 아내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마음 쓰는 정도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고전 7:33,34) 마땅한 것. 

전자와 후자의 둘이 서로 충돌할 때를 가리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마 10:37) 경고하신 것이다. 말씀을 소홀히 하는 자는 하나님을 소홀히 하는 것이요 이는 자기 "구원을 (소홀히 하여) 등한히 여기는"(히 2:3) 것이 됨이니 "어찌 피하리요"(:3). 자기 "구원"을 소홀히 하는 자에게 닥치는 "피치 못할"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이와 같이 바울 사도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 생활의 잣대(尺度)를 세워 준 것이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이 표준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당장 자아중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즉각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새롭게 함"이다.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함"이요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함"이다. 

주님을 어떻게 해야 기쁘시게 해드릴까,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대로 행함일까 하고 기도 중에 항상 마음을 조리(調理)하고 정리하기를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 여러 번 강조했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일하기 위해 있고, 이 일을 방해하는 악령(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의 세력과 싸우는 오직 이 일만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외의 것으로써 "마음이 분산되어서는"(고전 7:33) 안되는 것. 오매 불망, 일심추월(一心秋月)로 이쪽으로만 생각을 맞추어 정리 정돈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萬法歸一 其一何處(만법귀일 기일하처). 모든 것이 하나로서 시작되었고 하나로서 유지 존속되며 그 하나로 역시 돌아가는 것은 분명한데, 그 하나가 어디인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처음 초자연계 몸으로 영생하는 인간이었으나 범죄함으로 이 지경이 되었은즉 요 모양으로 살 수는 도저히 없는 것. 이제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나타나셨고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때 가서야 우리가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될 것인즉 그 때 비로소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다. 어디서 왔는지가 분명하고 어디로 가는지가 명백하니 현재 나의 좌표가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일하고 싸우는 것 외에는 일체의 의미를 찾지 말 것이다.


유수한 한학자로서 "인생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죽도록 고민하던 중 성경을 읽다가 "나 위해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목에 이르러 크게 목 놓아 울고 그 아내와 함께 믿음에 들어 온 후 자기도 한 때 심각하게 물들었던 아편 중독자 치료를 겸한 전도 활동에 나선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 내외는 7년 동안이나 한 번도 옷 벗고 잔 적이 없었다. 자다가도 그 보살피는 영혼들을 위해 그리고 산적해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해 어느 때든지 일어나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이공(李公) 순신(舜臣)은 임진란 7년간 전투복장(戰服)으로 항상 지냈고 여잭(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 대목이 연상된다. 전쟁에서 오직 이기는 것이 목적이요 그 외에는 달리 생각이 있을 수 없음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병(軍兵)들인 것이다(딤후 2:3). 

2016년 7월 29일 금요일

구원받음은 올바른 삶(일상생활)으로써 결정(結晶)되는 것



주님의 것이 나의 것이니까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어 내가 구원된 것이다. 고로 모름지기 구원된 자는 나의 것은 주님의 것이 되어 있음을 철두철미 인식해야 하는 것이며 나를 위해서는 일거수 일투족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결의로 일상생활을 하게 된다. 주님께 매사 여쭙고 하는 것도 그 때문. 주인님의 일을 종으로서 주인의 뜻대로 하는 자세로 해야지 종의 뜻대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매사 주인의 지시를 받들어 하는 일인즉 사전(事前)에 일단 주님께 여쭙고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필수. 여호수아가 매사 철저히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을 성경은 책망하고 있다(수 9:14).

육체의 우리 인간들로서의 종과 주인의 관계라면 주인이 매번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를 내림에 따라 종이 움직이게 되는데,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주님께서는 보이시지 않고 나의 귀로는 그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연계 육체(나)와 성령(주님)과의 관계이므로 그리고 핵심이 사랑인즉 내가 반드시 주님께 먼저 아뢰고 나서 무엇을 하든지 하게 되어 있는 방식이라면 방식이라 하겠다. 더군다나 사랑으로써 적극성으로 능동적으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움직이는 터이기에 이는 당연지사다.

그리고 이 짧은 세상에서 삶의 쾌락을 도모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망념이고, 사람 살리는 가장 우선적인 시급한 일만을 하게 되어 있는 단기간의 지극히 짧은 금 쪽 같이 소중한 시간들이다. 그런즉, 내가 구원받아 새 생명 가운데 있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것'(주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 등)을 '내 것'으로 함으로써 되는 것이므로, 이러한 관계는 '내 것'을 '주님의 것'으로서 위의 설명대로 내 스스로 매일 매시간 매순간 바침의 동시성과 양면성이 이루어짐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느냐 하면 어떤 결단이 요구될 때, "나는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의 뜻대로만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인즉 내 만일 나의 자의대로 무슨 일이든 행하게 되면, 그 순간 나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됨으로써 '병'이라는 하나를 이루는 3위1체의 원리에 반(反)하게 되며 그 관계가 몽땅 깨뜨려져 와해되는 순간이다. 내가 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데 어찌 주님의 것(그 죽으심, 부활 등)을 내 것으로 삼는 구원이 지속되겠는가. 그런즉 내 스스로 나의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끊어 자결행위에 들어가는 망령된 짓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는 한에는 한 순간도 자아중심으로 나아가는 망념을 품을 수 없다.


"사탄은 이 순간도 내게 절하라고 즉 자아중심으로 나가라고 어르며 협박해대지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죽는 것도 유익하다'. 내가 이 짧은 지상(地上)의 한 생애에서 삶에 탐닉되어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하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산 제물'(롬 12:1)로서 '날마다 죽는 것'(고전 15:31)이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사업의 특징이므로 사탄이 겁 주는 죽음이여 얼마든지 오라, 내가 죽어주리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고 현재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것인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워'(골 1:24) '그 죽으심을 짊어지는'(고후 4:10) 것이 내가 기쁘게 감당할 나의 과업이다" 하고 매번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2016년 7월 26일 화요일

荒野(황야) 같은, 아니 死海(사해)와 같은 세상임에 눈 떠야 구출돼






오늘날 적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가장하며 등장하는 때로서
막강한 초능력으로 한 몫 보려는 때이므로
하나님의 초능력은 기도 응답으로 나타나시는 것 외에는
마치 악령들과 경쟁이나 하듯이 나타나시지는 않는 것.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능력은 거의 없고
온 세상이 적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나탸내는 악령들의 초능력뿐이니
이 사실을 명백히 하지 않으면 악령의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으로
착각하여 그들을 따르게 될 것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하나님의 최고도의 관심은 바로 당신









2016년 7월 25일 월요일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우리가 듣기도 하고 눈으로 보기도 하고 주목하기도 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느니라"(요일 1:1)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마 28:20) 







아인슈타인은 틀렸지만 보어나 아인슈타인이나 1급 기본 정보에 대해서는 전면 백지 상태였다 (재수록/수정)






아인슈타인(향하여 좌측)과 걷고 있는 보어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은 틀렸고 보어는 몰랐다"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상보성 원리를 끝내 수용하지 않아 틀린 것이고, 보어는 만물의 상보성은 알았으나 짝을 이룬 그 양자 관계가 主從(주종), 因果(인과), 大小(대소), 先後(선후) 관계에 있음을 다시 말해 3위1체의 원리(3운법칙으로 검증된)를 몰라, 만물이 "결과"인즉 그 "원인"인 창조자의 실존이 필연이데도 이를 성경대로 믿지 않았으니 몰라도 한참 몰랐던 것이다. 창조주를 모르는데 가히 무엇을 "안다"고 할 것인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 1:7ㅡ잠언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솔로몬이 쓴 글이 아니던가)함과 같다.  "지식의 근본"을 모르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 9:25)!

모름지기 모든 인생들은 자기의 뿌리인 청조자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뿌리 없이 무슨 나무가 있고 더군다나 열매란 것이 있으리요. 지식이 없으니("지식의 근본"을 모르니까) 이 세상 신(神) 악마에게 철저히 농락 당하는 비극에서 헤어나지 못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원수의 정체를 모르는데 감히 그 원수를 對敵(대적)하리라고 언감생심 마음이나 먹으랴. 그대들 과학자가 혐오하고 기피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정작 創造神(창조신)이 아니라 被造物神(피조물신)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神(고후 4:4)들을 만드셨으니 곧 자연계와 양립되는 초자연계의 超能力者(초능력자)들이다. 이런 용어도 인간이 자연계 존재가 됨으로써 빚어진 비극의 여파로 생긴 것이다. 왜냐면 인간(아담)은 이들을 지휘 통솔함으로써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지식(지식은 곧바로 능력으로 통한다) 면으로는 이들 靈物(영물)들이 인간(아담)보다는 優位(우위)에 있었던 것. 창조 序列(서열)상으로는 그리고 位階(위계)로는 아담이 월등한데 대한 양자간(인간과 영물)의 조화, 통일, 配合(배합), 균형을 위한 창조자의 배려이셨다. 그러나 영물들 중의 君長(군장, prince) 중 하나인 용(자연계 동물인 뱀의 초자연계 대칭형)이 아담을 시기하여 下剋上(하극상)으로 인간(아담)을 죽음에 빠뜨림으로써 즉 오늘과 같은 자연계 존재가 되게 함으로써(당시 아담에게 죽음은 자연계 존재로 되돌아가는 것) 자기 手下(수하)에 넣어 틀어쥐고 아담의 位(위)를 찬탈코자 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찌 찬탈이 가능하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철저히 공평공정하게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을 버리시지 않는 한 그래서 인간 아래의 모든 피조물들을 湮滅(인멸)하시지 않는 한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 철저한 원리원칙을 지키심은,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함께 죽음의 곤욕을 치르시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에서도 입증이 되고 있다. 

사탄(龍, 이는 고유의 이름이 아니고 인간의 "적대자"라는 별명)이라는 피조물 하나쯤 그냥 없애버리셔도 물 한 방울 떨어져 물결 이는 정도의 파장밖에 될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義(의)로우심은 그렇게 하시는 것을 스스로 수용치 않으시는 것이다. 용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사람이 되시어 인간을 위한 희생양이 되시려는 의향까지는 능히 짚어볼 수 있었으나 고통을 끝내 견디지 못하시고 '십자가 죽으심을 통한 인간 구원'에서 도중 하차하실 것으로만 예상했던 것이다. 그 자신의 자아중심의 속성으로는 자기 부인의 사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보다 앞서 필연적으로 이러한 결과(친히 희생양이 되시는)를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담의 범죄를 유야무야로 덮고 넘어가실 줄로 먼저 예상한 것이었으나, 아담이 스스로 취한 죽음에 일절 개입하시지 않고 원리원칙대로 오히려 저주까지 하시니 첫 예상부터 빗나간 셈이다. 사탄 자신도 당연히 저주를 받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죽음의 인간과 하나되시려는)를 결국 확인하게 되지만, 그 정도이실 줄은 차마 예상 못한 것. 예상했다면 처음부터 아담에 대한 殺意(살의)를 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끝까지 지금까지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이후에도 요행수를 바라는 것이니 그가 이렇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기대를 거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구리가 어느 쪽으로 뛸지는 개구리 자신도 예상할 수 없다는 것과 같아 보이는 것이(사탄에게) 인간의 이 자유의지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는 것도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기보다 일종의 권모술수처럼 여겨지는 것일까. 하나님의 자기 부인의 사랑을 이해 못함과 같은 그런 이해 못함(자아중심의 특성상)의 한도일까. 

이상이 오늘날과 같은 자연계 몸이 되어 인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당치도 않은 소위 UFO와 같은 이들 惡靈(악령) 패거리의 거짓과 속임수에 쩔쩔 매고 있는 비극의 사연이고 내력이다. 쩔쩔 맨다는 것은 이런 속임수를 창조신의 초능력으로 오인하여 경배 수준에 이르러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때문에 (자연)과학자들은 한사코 이를 부인하려 들지만 현실적인 거대한 怒濤(노도)를 이겨낼 재주는 없는 것. 조만간 두 손 들고 白旗(백기) 들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는 너무 늦을 수 있다. 被造物神의 계략에 완전히 말려드는 순간일 테니까. 지금 이 때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사리판단하여 성경의 진리 가운데로 歸順(귀순)하지 않는 한 희망은 없다.

이런 내용은 성경 외에는 이 세상의 그 어느 무엇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당연 사실일 수밖에 없는 것은 龍(용, dragon)이 이 세상 神으로서 온 세상을 꼼짝 못하게 한 손에 장악하고 있으매 누가 감히 혀를 놀리랴. 단지 성경만큼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손을 못대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용의 장악력으로 얼마든지 인간의 눈을 어둡게 할 수 있으니 다시 말해 방금 밝힌 성경의 내용을 왜곡되게 알도록 차단시켜 온 것. 그 결과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이런 (성경의) 기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교묘하게도 성경 외에는 기록상으로는 전해 오는 문헌이 없다는 것을 기화로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전 인류를 속이는데 성공하여 이 21세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런 철통 같은 장악력에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놀라워하셨다(막 6:6-"to marvel at"). 

초대교회가 당연히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두 대목만 들어도 충분하다. 바울 사도의 롬 5:12이니 곧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는 것으로서, 아담이 사망하지 않았으면 靈物들처럼 오늘날도 아담이 생존해 있다는 의미가 되니 자연계 목숨의 最長(최장) 수명의 한도가 천년 가까운 므두셀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수명은 950년 노아의 생애가 3운법칙에 의해 증명된 바로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아담이 초자연계 몸이 아니었다면 바울의 이와 같은 표현이 불가능한 것. 

그리고 요한 사도의 계 20:2/12:9, "옛 뱀"이란 표현이다. 이는 누가 보아도 "창세기에 나오는 바로 그 뱀"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요한은 그 짧은 계시록에서 마치 의도적인 것처럼 연달아 계속해서 이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도 이와 같은 성경의 설명 외에는 그리고 초대교회 사도들 외에는 아담이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다고 밝힌 역사가 없다. 유대인들도 알 까닭이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모든 실상과 진리를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를 배척한 마당에 무슨 수로 알 수 있으랴. 모세 시대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맞기 위한 일체의 준비 기간인데 이런 지식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또 그런 선지자들이 알고 있었느냐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3운법칙이나 3위1체 법칙이 알려지는 것도 이 21세기이니까.

묻건대, 이제 와서 이 성경적 사실을 이와 같이 밝히고 있는 것이 놀라운가, 아니면 이제까지 사탄이 철통 같이 감출 수 있었던 것이 놀라운가. 그럼에도 구원받음에는 이런 지식 유무가 아무 관련이 없으므로, 이런 無知(무지)의 현실을 하나님께서 묵과해 오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악한 자가 창조주로 가장하여 가능한 한의 모든 초능력을 동원하여 최후 발악적으로 기만하는 시대에 도달해 있으므로 더 이상의 묵인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시는 것이다. 이런 가장 중요한 인간으로서의 기본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닐스 보어여 그대에게 "몰랐다"고 하는 말이 틀렸는가.




위 사진 출처:

2016년 7월 24일 일요일

우주 구석구석이 샅샅이 쓸어 찾아보아도 "우연 발생"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fashomo"의 발음은 나라마다 다 틀려
파쇼모에 가까운 발음은 이태리어, 폴란드어 정도. 라틴어도 맞지 않음
"fas homo"로 해도, "파스 호모"라는 동일한 발음을 얻기 어려워.
"trinihomo, trini homo"는 비교적 양호한 편.
trini는 영어 trinity의 라틴어 원말인 trinitas의 어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다.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고후 5:9-11).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요 5:29).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이 선을 행하라고 하심이다. 죽은 자였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을 행함이다. 선과 의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순종하지 않았으므로) 그 대가로써 아담은 죽었고 영물들 중의 악령들은 멸망의 운명을 자초한 것이다. 우리도 아담의 창조처럼 창조되었으니(새 창조로) 당연히 영생이다. 영생하는 자 즉 이성적인 영원히 사는 존재로서 선과 의를 행함은 필수이다. 왜냐면 그렇게 해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할 바에야 영원히 존재한들 무슨 의미인가. 그런 존재들이야 불 못에 부지기수로 있지 않을 것인가. 새 창조를 받지 않고 다시 출생한 것이 아니라면 특수 사정에 의해 범죄해도 어느 정도 용납된다 할지 어떨지 모르나 엄정하게 우리는 새로 창조된 것이다. 

이는 범죄 전의 아담처럼 또는 (일부가) 범죄하기 전의 영물들처럼 선을 행하게 되어 있는 즉 거룩하고 의롭게 창조되었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악령이나 죄인 인간을 만드시지 않은 것이다. 고로 우리도 당연히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새로) 창조되었고 선을 행하게 되어 있고(둘이 하나됨의 머리와 몸 관계의 이치를 따르는 생명의 법칙을 지킴으로써) 그렇지 못하면 옛 시절 아담처럼 또는 악령들처럼 범죄로 멸망하게(아담은 죽음으로써 즉 자연계 몸으로써 일단락됐으나 우리는 이미 죽음의 단계를 거쳐 새로 창조되었으므로 영물들처럼 영원 멸망에 해당될 뿐 두 번 다시 죽음은 없다) 되어 있는 것이야 당연사리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실 때 우리가 "행한 선과 악"을 따라 심판하시는 것이다(롬 2:7-10). 이 말은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안믿었느냐 하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는 하나 믿어도 순종하지 않고 처음에는 믿었다가도 나중에 얼마 뒤 범죄하는 수가 허다하니(마 7:21) 결국은 믿음의 열매인 선을 행했느냐 아니면 자아중심이 되어 악을 행했느냐로 영원 운명이 가름된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믿지 않는 자는 그 믿지 않았다는 것에다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있는 즉 생명의 법칙을 따라 살 수 있는 기회 곧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하나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이를 스스로 거부한 것이므로,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 동일 범주에 속해 심판 받는 것이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이 심판 때 그리스도를 믿는지 여부로써 심판 받는 줄 착각하고 있다. 이는 성경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인지가 둔해서 성경을 그렇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지 않을 때 즉각적으로 사탄이 개입하게 되어 있으므로 사탄의 농락 때문이다. 그런 농락을 당해도 회개 않고 여전히 자아중심으로 나간 결과로 하나님도 당연히 그를 버리신 상태다. 물론 회개하면 되는 것인데 이 회개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인 우리가 중보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될 수 있는 것이니 우리의 기도가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록 약속하셨어도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기도가 필요함을 에스겔서에서 누차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데 우리 역시 하나님을 위하는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동시성, 양면성의 이치를 따름이다. 일방적으로 되어지는 일은 없다. 이것이 생명의 법과 질서다. 법과 질서는 아름다운 것이니 조화와 통일을 토대로 한 한 몸됨의 행복의 평등과 평균됨을 영원토록 보장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이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 하신 말씀을 수록한 요한 사도는 마치 그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도 하는 듯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한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요일 3:14)고 한 것이다. 이는 "믿음"의 열매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임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형제 사랑은 당연히 포함된다고 하는 뜻이다. 다시 말해 믿음의 속성을 말함이니 "사랑으로써 역사되는 믿음"(갈 5:6)이기 때문이다. 

2016년 7월 19일 화요일

이순신 정신 선양운동 국내외 천거 인물 (2)




주식으로 번 돈 450억을 50년간에 걸쳐 전액 사회에 환원시키기로 작정한 졸업을 앞둔 한 대학 4년생이 있었다. 어제 조선일보(인터넷판) 첫 머리 기사로 났기에 블로그에 주소를 옮겨 소개해 두었더니 기사가 모두 삭제되어없어졌다. 주인공이 철회 삭체 요청을 한 모양인데 세상에 드러나기를 싫어하여 평소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는 바 모처럼 조선일보의 취재진이 기회를 잡았으나 아쉽게도 사라져버렸다. 우리서는 아쉬우나 주인공으로서는 당연한 조처라 하겠다. 그러나 그냥 덮어둘 수는 없어 기사를 읽은 기억을 더듬여 여기 옮겨놓으나 건성으로 읽었기 때문에 이름 석자를 알아두지 못했다. 그러나 한 손이 하는 것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 나 이 역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권유를 따라 일찍부터 주식 투자에 관심이 많았고 그동안 이에 관해 여러 방면으로 연구를 많이 해왔다고 한다. 군에 입대해서도 휴가를 나올 때는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제대할 때에는 수익이 2억 정도 되었다는 것으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학생 신분으로 홍콩의 주식 관련 회사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는 것. 어쨌든 이제는 450억의 자산가가 되었고 그리고 주식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런 결심을 한 것이다. 자신의 노후자금, 부모님 봉양을 위하고 외국유학을 위한 것으로 일부 남겨두는 것 외에는 전액 기부라고 한다. 어릴 때에는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고생하던 중 자신도 자신이려니와 양친을 제대로 봉양해드리지 못할까 싶어 더욱 고민하게 된 효자. 그래서 당시 수백만원으로 주식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것. 현대판 고려장을 서슴치 않는 요즘 젊은이들 세대에 비하면 아주 신선한 쳥량제다. 

그 전에도 새상에 알려지지 않은 장학사업을 해왔다는 것이다. 장학 관련만 아니라 복지 재단 등 그동안 기부해 온 금액만 해도 17~20억 정도였다는 것으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지금 기부하는 것보다 좀더 많은 자산을 늘인 다음에 해도 늦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지금부터라도 일찍 돕는 것이 더 나을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대구 태생. 어쨌든 이 정도로나마 소개하게 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런 젊은이가 많은 삶에 귀감이 될 것을 확신하여 잠시 시간을 낸 것이다. 








이순신 정신 선양운동 국내외 천거 인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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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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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5/09/2016050901799.html



2016년 7월 14일 목요일

구원은 "받았으나" "멸망한다"ㅡ이런 말은 성경에 없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여러분을 위하여 열심 내는 것은 여러분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다"(고후 11:2). 필자든 그 어느 누구든 3운법칙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말하며 여러분 앞에 나타난다 해도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맺어주려는 중매자의 역할뿐이다. 신부가 중매자와 살지 않는다. 중매해주고 떠날 뿐이다. 존 번얀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에서 전도자는 구원의 말씀만을 전달해주고 떠났다.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전도를 받은 자 자신의 몫이다. 정확히 말하면 중매를 받은 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언제나 핵심이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기름 부으심 즉 우리가 영원하신 선물로 받아 모신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 하였다(요일 2:20,27). 교과서는 성경이요 선생님은 성령이시다.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시다. 홀로가 아니라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계시어 아버지와 하나로 움직이시므로 예수님이라 하지 못하고 또는 아버지시라고도 못하고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통하시는 것이다.

고로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은 세상에 계실 때 말씀을 가르치시던 그 분이시니 곧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우신 "성령"이시다(요 16:13). 유명인에게 하나님의 말씀 해석을 의존하면 그가 아는 만큼밖에는 진리 가운데 인도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 의지하여 기도 중에 성경을 부지런히 상고한다면 보다 풍성한 모든 것으로도 인도하시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직접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가르친다고 하는 것이다(골 3:16). 한 사람만의 역할이 아니다. 누구나 누구에게든지 가르칠 수 있는 것임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물론 특별히 그런 "은사"(gift)를 받는 경우는 있다(롬 12:7). 그러나 이 경우 한 사람만을 지목하지 않았다. 교회 내에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이 얼마든지 다수일 수 있다. 가령 예언을 하는 은사라면 예언으로 교회를 섬기지 가르치는 일을 겸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경계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원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니 누구든지 누구에게나 교회로 모일 때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가르친다고 해서 반드시 강대상을 앞에 놓고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도 없다. 대화 중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머리로서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모든 교회의 주인이시다. 유일한 주인이시다. 각 사람을 통해서 즉 성령의 은사(선물)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는 사도들이 직접 듣고 보고 배운 사실에 대하여 전달자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성경으로 그 모든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 성령께서 친히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시는 시대이다. 누구든지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진리의 문임을 친히 약속하셨다. 하나님께 100을 구하면 그 구하고 믿은 대로 100을 주실 것이다. 단 30을 구하면 그 구한 대로 30을 주신다. 30을 구하는데 100을 주시는 법이 없다. 항상 나의 선택을 따라 되어지고 주실 수밖에 없는 것이 3위1체의 원리에 따른 구조다. 그래서 사랑의 주인 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랑은 한계를 모르고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주는 것이므로 자신을 주는 것 이상 가는 것은 없는 법. 그래서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이상으로 큰 사랑은 없다 하신 것이다. 

또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다. 바울, 베드로 사도 모두 "여러분이 이미 진리에 통달해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들로 다시 기억나게 하려고 힘쓴다"는 말을 함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하여 들은 바 말씀이 어느 새 "새어나갈"(히 2:1) 수 있음을 경고하고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하면 어찌 피하리요" 한 것이다. 등한히 하는 죄과는 크다. 몰라서가 아니다. 알면서도 다 알았다고 태무심으로 지낸 허물이다. 사랑은 항상 그 주안점이 오늘이다. 내일도 어제도 아니다. 마음은 자유 의지를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의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반성하고 회개하라"(계 2:5)는 것이 오늘날 성령의 끊임없는 경고이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말씀 전달자)로 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음"(마 7:22)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지 못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 이유는 오늘에 살지 않고 어제에 살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제가 아니다. 어제의 연장이라는 말은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이 있게 하는 기틀은 되어주었어도 오늘과 어제는 엄연히 별개다. 그래서 현재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19). 열매를 기다리는 단계에서는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것을 다 하신 다음이다. 즉 구원해주신 은혜의 토대 위에서 남은 것은 나의 몫인데 이 내 몫을 수행함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경우다. 그러므로 참으로 구원 받았는지의 여부는 그 열매로 알게 되는 것이다(:20).  

그러면 구원을 받았는데도 멸망이냐 한다면, 그런 말 자체가 있을 수 없다. 오늘 열매가 없어 멸망하는 것이지 어제 열매가 있었던 것으로는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멸망하는 자에게는, 과거 어느 때 한 번 구원을 받은 적이 있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다. 구원을 못받았기 때문에 멸망인 것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고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갈 5:6) 것이고 사랑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에 있다ㅡ이 답변으로 충분한 것이다. 어제 믿어 사랑으로 열매를 맺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구원을 받은 것이다. 오늘은 엄연히 오늘이다. 오늘 열매가 없으면 열매는 없는 것이다. 어제의 열매로 대신하거나 보충되지 않는다. 어제는 어제 믿어 열매 맺어 구원 얻은 것이고 오늘은 오늘 열매 맺어 구원 얻은 것이지 어제 구원 얻어 오늘 열매 없음으로 멸망했다(당장의 불의의 사고나 돌연사 등)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오늘 믿지 않음으로써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만 통할 뿐이다. 

오늘을 강조할 때는 당연히 <오늘의 삶>을 말한다. 구원은 삶에 있다. 믿음에 있지도 않고 은혜에 있지도 않다. 은혜로써 구원은 받았지만 은혜 자체가 구원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죽어주셨지만 내 스스로 믿지 않는 한 한낱 그림의 떡이니 무용지물이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믿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맺는 열매다. 즉 죽은 자로 있다가 산 자가 되어 새 생명 가운데 살기 시작하는 사랑(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사람에 대한)의 삶이다. '삶'이 없으면 '죽은 것'이지 별 수 있는가. 

사랑은 오늘일 뿐아니라 100%의 자기 부인이다. 자아중심의 100% 부정이다. 1%(이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판단일 수밖에 없지만)라도 자기를 위함이 있다고 느껴질 때 실상 그것은 이미 100% 자아중심이라는 증거다. 열매 맺는 것을 30배, 60배, 100배 등 차등을 두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나는 그러면 60 정도로 만족하리라" 한다면 그것은 열매 맺음에서는 0%다. 나로서는 100%를 지향하지만 그 결과가 30 혹은 60 또는 100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뿐이니 오해하지 말 것이다. 

"구원은 받았지만 멸망할 수 있다"는 말은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필연성에서 '사랑의 오늘의 삶'을 강조하여 경고하는 경우에는 혹 쓸 수 있을지 몰라도 기본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구원은 영생인즉 한 번 정하신 구원이 이랬다 저랬다 번복될 수 없는 까닭이다.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때 약속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무의미인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약속으로 구원 얻은 것이다. 약속을 했으면 약속을 그대로 지켜야 그 약속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때에는 약속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니, 그래서 영생을 성경은 "약속"이라 한 것이다. 내 쪽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 상대방이 지키라고 강요할 수 없는 것이 약속의 성격이다. 하나님 일방적으로 지키시는 영생의 약속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수 차례에 걸쳐 강조하심으로써 경고를 주신 것이다.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데 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의 본으로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거함과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하신 그대로다. 그 사랑 안에 거하면 즉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될 것"(롬 11:22)이라는 경고이신 것이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다는 것이다". 

2016년 7월 11일 월요일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시는데 약자, 비겁자로 만드실 리 있는가



그러면 그것을 어째서 창조라 하겠는가. 
새 창조도 처음 창조와 똑같은 창조다.
"구원"을 두고서 편의상 붙인 이름이 아니다.  
새 창조라 했으면 처음 창조와 똑같은 창조로 알아야지 
하나님을 무시하고 격하시켜도 분수가 있다.

우리의 약함은 그리스도의 "약하심"(고후 13:4)과 같다.
약하시기 때문이 죄인들이 손에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것.
그것 외에는 일절 약하심이 없었고 우리도 당연히 그렇다.
바울 사도가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 한 것도 같은 의미다.
핍박 받고 옥중에 갇히고 매 맞는 등 온갖 수모와 고통ㅡ
이는 실질적으로 너무나 막강하여 대적할 자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육체적으로 약함으로써 고난 받는 것으로
최후 승리를 얻도록 미리 조처하신 까닭이다.  
그럼에도 이런 강자로서의 천금같은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고
멸망할 헛된 세상과 더불어 강자가 되기를 바라
금력, 권력, 지력(智力)을 탐하는 모든 자에게 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