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1일 일요일

이기는 경우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기 때문이니 살기를 바라고 전쟁에 임한 자로서 이기는 법은 없다






하나는 살고자 하여 문을 빠져 나가고
다른 하나는 죽고자 하여 문 안으로 들어온다.
무엇이 이런 차이가 나게 하는 것일까.
목숨이 아깝기는 마찬가지다.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는 현실 감각은 똑같다.
하나는 사지(死地)를 빠져 나가고 하나는 스스로 들어온다.

전쟁에 임해서 그러했거든 우리 모든 인류 역시 전쟁이다. 악령들과의 전쟁이다. 
악령이 이 세상을 휘어잡은 신(神)이니 전생의 양상은 뻔하다.
즉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즐기려는 자 사탄에게 굴종하여 패하고(눅 4:5-7)
사탄에게 절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뭉텅이로 안겨 주는 대가로서의 
삶의 고역, 환난, 죽음을 자초하는 자만이 그를 이기는 싸움이다. 
  
마지막 아담을 머리로 하여 우리는 뭉쳐진 군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군병"임을 사도 바울은 강조했고
"이기는 자"가 될 것을 마지막 아담께서는 명령하셨다.  
살고자 하는 자 죽교 죽고자 하는 자 살고 이긴다(死則生 生則死).
자연계에서의 육체적 전쟁에서나 초자연계에서의 영원 세계를 앞두고 벌이는 전쟁에서나
"사즉생 생즉사"의 원리와 원칙은 동일하다. 
다시 말해 싸우는 한 때의 죽음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서야 어찌 승리를 거두리요.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라고 하셨지 이 시한부 생명에서 호의호식 잘 살라고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죽는 것이, 함께 죽는 것이 옳다(義, 善) 하셨다.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구적으로 보존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는다고(요 12:25) 하셨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사는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 의식이다.
한 몸 체제하에서의 최대의 행복을 기약하는 삶의 유일한 방법이다.
이 이상 가는 삶의 지혜는 없다.
처음부터 이런 삶으로써 영생하게 하신 것이다.

한 몸 구조에서의 각자 자기 맡은 임무에 충실함이니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다 자기 구실이 있음이다.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적의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방어할 책무를 알았기에
백성과 함께 죽고자 하여 양산 군수 조영규는 동래성 북문 안으로 지체없이 들어 온 것이다.
반면에 경상우병사 이각은 그런 것 저런 것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자기 한 목숨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평소 그렇게 살아왔고 공동체 의식은 없었다. 
공동체 의식이 있으면 반드시 자기 소임에 충실함이 앞서므로 사리사욕을 챙길 여유가 없다.

우리 그리스도 사람의 공동체 의식은 머리되시는 마지막 아담과 함께 함이다.
그가 머리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이 되시고자 죄인(사형수)으로 그 죄의 대가를 우리 위해 받으셨으니
그리고 지금도 머리를 따라 고난 받는 교회의 고난을 함께 받으시니
몸은 머리와 함께 되기 위해서 받는 고난이요 
머리께서는 몸과 하나되심으로써 받으시는 죽음의 고난이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이다.

우리의 고난은 머리이신 마지막 아담께서 영광 중에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그 때에야 종결되는 것이고 그 때까지는 이 고난은 계속되는 것이다.
휴거라는 교리는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것이요 성경에는 없다. 장차 오는 고난으로부터 피하자는 뜻 외에는 없음이니 이 고난의 종식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심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고로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공중으로 들려 감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공중으로 들어 올려져 다시 세상에 오시는 영광의 주님을 뵙게 되는 순간에는 즉시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이 시작되는 때로서 세상에는 평화만 있고 고난은 물러간 다음이다. (적 그리스도의 "안전과 평안"(살전 5:3)은 거짓 구호이다.)

우리의 발걸음은 의당히 사지에 발을 내딛는, 날마다 그러한 발자취를 남기는
날마다 사형수로서의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눅 9:23),
"날마다 죽는"(고전 15:31) 생활인 것이다.
때문에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하고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생활 표준이다.
어떻게 하면 사는 것 같이 살아볼까 하는 데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어찌 하면 머리되시는 마지막 아담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하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이다(고전 5:9/7:32).
그를 사랑하고 그를 따라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전체를 위함으로 내가 위해지는 것뿐.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살고 로마서 7장에 살지 않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營問) 밖" 즉 세상 삶의 낙(樂) 밖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자" 한 그대로이니(히 13:13),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영문 밖에" 계시기 때문이다.


마귀와 그 일당이 거룩한 천사들과 일대 접전을 치르고 지상에 쫓겨난 것이 
1908년 6월 30일의 저 유명한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이다.
그 무렵 1873년 그리고 그 언저리에 어떤 이들은 미국 대륙에서 용을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용은 보이지 않는 영물 중 유일하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존재이니 저주 때문이다.
"흙을 먹게" 된 결과로서, 그것이 어떤 과정에 의해 그렇게 되는지 우리로서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 것은 없다.   
하늘의 전쟁이니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을 리 없고 몇 십년간 전개되었을 법하다. 

정신 없이 경황 없이 천사와 전쟁에 시달리다보니 자기 모습을 감추는 일에 소홀히 할 수도 있는 일.
하늘에서도 물론이고 이 지상 공중에서도 광범위하게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을 수 있다.
이러한 경황 없는 때는 다음 1908년 즉 용이 지상으로 내쫓길 당시에도 있었다(시베리아 퉁구스카 사건).
오랜 세월이 흘렀고 당시 전세계가 여기에 통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의 목격자의 목격담만 전해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은 사탄 당자의 손아귀에 모든 인류가 장악되어 있기 때문.
그래서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한 것이나 영구적으로는 그렇게 못하는 법.
수 십년이 지나서야 겨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나 이미 그 때는 중요 흔적은 사라진 뒤였다. 

용이 그 이전에 부득불 인간의 눈에 어쩌다 띄었을 때에는 "해룡(海龍)"이니 하여 우매한 민중을 속일 수가 있었지만
지금이야 어디 그런가. 정체가 여실히 드러나게 되어 있지만
그래도 "UFO"의 한 형태 즉 "UFO의 모선(母船)"이라고 얼버무리면 된다.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아래 NASA 촬영의 용의 사진이 사실상 압권이다. 
이 NASA 사진을 보고 방금 소개한 1873년의 용의 목격담이 댓글로 올려진 것이다.  
그 영문 댓글과 NASA 사진을 다시 올린다. 

NASA가 이 사진에 잡힌 것의 정체를 용이라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전연 문외한인 그들이다.
이 사진을 처음 공개한 사람도 "뱀 같은 형태의 UFO"라고만 하고 인터넷에 올린 것이다.
어쨌든 사상 처음으로 인류는 일대 수확을 한 셈이니 이 세상 신(神) 사탄을 사진에 담아놓을 수 있었기 때문. 
마지막 아담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는 지금 이 악한 자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영물로서 사진에 찍힌 것으로는 이 NASA 사진과
악령의 신체의 극소 부분에 해당하기는 하나 필자가 찍은 DPA만이 유일한 것이다.  
악령(영물)은 보이지 않고 형체가 없는 초자연계 육체가 기본이나
얼마든지 자연계 육체와 같은 성질로 변환하는 경우가 있어
DPA 발자국이라는 것은 그런 자연계 신체로 변모한 다음의 발자국 즉 그런 육체의 형적이다.
이렇게 발자국을 낼 수 있을 정도의 자연계 형상으로 변화한 형체의 극소 부분이 찍힌 것이다. 
왜 이와 같은 발자국을 남기고 또 그런 자연계 육체로서의 형태를 가끔 나타내는지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한 우리가 알 수는 없다. 



네이버 영어 사전 안내


이상은 아메리까 인디안의 목격담이고
아래는 미국의 한 농부의 증언을 당시 신문에 소개한 것을 옮긴 것












2016년 8월 18일 목요일

임진왜란 사적지 부산 동래성 북문(北門)의 인생 교훈



임진왜란 당시, 부산 동래성 북문을 통해 하나는 목숨이 아까워 도망쳐 나갔고(경상 우병사 이각), 다른 하나는 연로하신 어머니께 절하여 마지막 하직 인사를 고하고는 사지(死地)로 뛰어들어 동래부사 송상현과 합류해 전사한다(양산 군수 조영규). 이각은 도망 가다가 붙잡혀 도망자로서 결국엔 처형되어 후세에 길이길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조영규는 청사(靑史)에 그 떴떳한 이름을 빛내게 된다. 인생 삶의 명암이 교차했던 유적지다. 

조영규가 승전 없는(승전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도망치던 경상우수사 원균과 대조적으로 왜선 10척을 쳐부수었다는 그의 장계는 조정을 기망한 것임이 드러났으니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적과 조우했을 때에는 아군의 피해도 분명히 있어야 하거늘 전연 언급하지 않은 것 자체가 이를 증명) 죽음뿐임을 뻔히 알면서도 필마단기로 (이미 부하 기백명은 1차 입성 때 성내에 남겨졌고 노모님께 하직 인사를 고하고자 해서 일단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2차 입성에서는 혼자였다) 북문으로 치달으며 이미 성을 포위하고 있는 왜병들을 노호 질타하면서 성문 앞 가까이 이르자 왜병들도 감복하여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악령들"이니 "천사들"이니 해도 생소하고 어색한데 "귀신들"까지 들먹이니 요괴스럽다 할지 모르나, 그러면 성경에 "더러운 귀신"들을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도 요사스럽다 할 것인가. 그래서 인류 역사를 사탄의 기만사(欺瞞史)라 하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살아 오며 꾸며진 내력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생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하신 것도 아니고(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주 내에서 이뤄지는 일이지만), 이 세상 신(神) 사탄이 어떻게 인간을 속여 왔는지(계 12:9) 그 자초지종의 과정을 나타내는 기록들인 것이다. 처음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를 속인 데에서 발단된 역사이고 자연계 몸에 속한 인간 비극의 인간고(人間苦)이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들에게는 귀신의 초능력을 과대 포장하기까지 해서 공포에 떨게 하는 사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전파되기 시작하면서는 무신론을 만들어 내어 "귀신"에 대한 언급을 미신화(迷信化)함으로써 성경("귀신"을 말하는)의 품격을 떨어뜨리기에 혈안이었던 것이다. 이런 것은 이중 잣대도 자가당착도 아니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자의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음의 무궁무진함을 말하는 것이다. "모순"이라 함은 진실과 진리를 최고 가치로 인정하는 마당에서나 써 먹을 수 있는 단어다. 거짓에는 전혀 그런 기준이 없다. 처음부터 언어의 유희요 농간이니까.

처음부터 성경은 자연계와 초자연계가 대립되는 만물의 대칭 원리를 밝혀 왔다. 3위1체의 법칙이다. 지금까지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임금)는 그의 왕권을 동원하여 이 사실을 숨겨 왔던 뿐이다. 인간이 알려고 해도 차단한 것이 아니라,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게 이성의 눈을 감겨 왔다는 의미이다(고후 4:4). 그런 지식의 유무와는 관계 없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동안 손쓰시지 않았다. 인생들 스스로가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강제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사리(事理)와 이치를 밝힐 필요성이 대두되는 때이므로 이런 지식(3위1체의 원리)도 나타내어지도록 하신 것이다. 적 그리스도의 특징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하나님의 능력)을 능가하는 초능력을 과시하는 데에 있으므로(거짓이 가미되어 있는 것이기에 그 끝을 모른다는 데에 유념할 것-살후 2:9,10),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속이는 데에 있으므로, 그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이러한 최신 지식(인간 생애를 주관하는 3운법칙 등)도 소요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탄이 감추어 왔던 초자연계의 실재가 이제야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자연)과학이 그 자체의 한계성으로 인해 이 실상 하나 깨치지도 못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으스대어 왔으니 자조(自嘲) 섞인 한숨이 아니 나올 수가 없다.  



양산 군수 조 영규 관련 자료


2016년 8월 16일 화요일

열매 맺는 생산적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산의 수고와 이마에 땀 흘리는 수고를 병행해야ㅡ










"시온에서 안일한 자"(암 6:1)에게 화, 화, 화가 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자는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
멸망이니 열매 맺으라고 심은 나무가 열매를 내지 않으면 땅만 버리니까(눅 13:7)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
이는 연단, 징계를 말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이는 명령(계명-고전 7:19/계 12:17)이니, 주를 부인하면 주도 나를 부인하실 것.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얺으면 그러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음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는 것이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
이것은 바로 "불 못"을 말씀하심이며,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게 됨이 한 번 믿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명령(계명)인즉 다시 말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
동시성의 양면성임을 우리가 마음에 아로새겨 둘 일이다.
생명은 사랑인데 일방적인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내가 그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랑 안에 나는 없다.
그 사랑 안에 내가 속해 있지 않는데
어찌 그와 함께 사랑 가운데 영생을 누리랴ㅡ빈 말이다.
아들께서 친히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시거늘
당신이 무엇인데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인가.
계명을 지키지 않고 분부하시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지는 않으면서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엄두인들 내겠는가.
아들께서 그리고 우리가 지키도록 되어 있는 계명은,
방금 말씀하신 대로 사랑의 계명이니 
즉 동시성과 양면성의 사랑의 삶의 법칙이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하나되어 병을 이루는
이것이 영생인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행복 모두가 평등하게 자유와 평화, 행복을 누리는 
천국인 것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령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할 것이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다"(요 15:1) 



2016년 8월 15일 월요일

품위 있는 죽음으로 그려놓지 마치 그 죽음을 조롱이나 하듯ㅡ"성경이 지어낸" 것이라면







다시 강조하거니와
품위 있는 죽음으로 그려놓지
마치 그 죽음을 조롱이나 하듯 하는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하지 않는 법ㅡ
성경이 인간이 지어낸 것이라면









2016년 8월 14일 일요일

첫 단추 잘못 채운 줄 알았으면 확 풀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 새로 채워 나가야














핵심을 파악해야








창조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친히 사람되시고 십자가 죽음의 고통과 수치를 당하시지 않고도 얼마든지 인간을 살리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인간은 죽어야 하고 인간의 죄 값으로서의 죽음의 고통을 치르지 않고는 새로운 생명이 절대 불가능하기에 이 원리원칙, 생명의 법대로 따르신 것이다. 이런 내용은 인간이 절대로 지어낼 수 없다. 이 자체가 벌써 성경이 한 점의 거짓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또한 자체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고는 인간의 상상으로는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내용임을 다시 강조한다.

아드님께서도 기도하시기를, "아버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니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막 14:36) 하신 것이다. 즉 아드님 친히 우리 위한 이러한 사형수로서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지 않고도 인간 구원은 가능하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하셨다. 아드님 홀로 당하신 고통이 아니시다. '둘이 하나됨'의 이치를 따라 아드님과 하나되신 아버님 역시 똑같은 고통, 아니 아드님을 생각하시는 고통까지도 더 보태어 덤으로 얹어 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 외에는 원리원칙을 지키고 공평공정을 기하는 길이 달리 없음을 판단하시고 결행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 앞에 감읍(感泣)할 뿐이다. 이러한데 어찌 성경에 거짓이 있고 사람이 지어낸 것이 있다기에 그 핑게를 대고 성경을 괄세하고 백안시하는가.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한다"(잠 19:24)고 한 그대로다. "게으르다" ㅡ'자아중심'의 한 가지 묘사다. 자기를 위하는 일변도의 생각으로만 도취되어 있는 탓에, 머리를 굴려 이지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도무지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롬 12:9). 이 한 마디만으로도 족하다. 백 가지 의혹을 덮고도 남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확증된 바다(5:8).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한다고 하는 사도들이 거짓말을 하겠는가. 거짓말은 강제, 간섭이다. 

강제할 때에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몬 1:8,9).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한 것이라도 그것을 권력으로 강제할 때에는 사랑이 아니다. 구원의 말씀은 사랑 빼놓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깔벵이 비록 잠시라도 극소 지역에 한해서이지만 국가 권력을 휘둘렀을 때 그는 진리 편에 서 있지 않았음을 알아야 하는 것. 유독 그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모든 것이 그러하다. 가정에서의 자녀 교육도 일정 규범은 지키도록 해야 하나 그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서는 부모가 먼저 사랑으로 본을 보이지 않는 한 그 자녀들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데에는 완전히 역부족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어떤 일로 체벌할 때 추운 겨울 침구를 들고 밖에 나가 자도록 했다. 벌써 그렇게 하겠다고 경고를 주었건만 아들이 아버지를 우습게 본 것이다. 아들이 바깥에서 이불을 두르고 떨고 있을 때 아버지도 자기 침구를 들고 아들 옆에 누웠다. 둘은 밤 새도록 한 잠도 자지 못했다. 그 후 아들은 두 번 다시 아버지 명령을 거역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나를 위해 죽으심이 바로 그런 이치와 같다. 이야기의 주제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아무나 결행하지 못한다. 사랑만은 할 수 있다. 아무나 못하는 일을 기록해 놓았을 때에는 진정 생각 있는 사람일진대 이런 성경에 대하여 함부로 말을 못하는 법이다.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이 생각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하여 하나님 앞 제사장의 기도로써 악령들의 세력과 직접 부닥쳐 싸우지 않는 한 그 어떤 결과도 기대난망이다. 

거짓은 자아중심의 열매다. 사랑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됨에서 오는 것이요 유지되는 것이니 이러한 자기 부인의 바탕에서 상대만을 위하는데 어찌 상대를 감아 넘기려는 거짓말이 있을 수 있는가. 성경에 대한 관점을 새로 다시 정리해야 해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ㅡ "사람이 지어낸 것이라도 상대를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이야기를 꾸며댈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왜냐면 인간이 지어냈건 어찌 했건 하나님이라면 절대 지존의 경배의 대상으로서 그 종교의 중심인데, 사람으로서 그렇게 벌거벗은 채 피 흘리며 죽어가는 것으로는 절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죽어도 그렇게는 못한다는 것이다. 누가 그런 하나님을 절대로 가까이할 수 없는 경외의 대상으로 삼을까 하는 걱정부터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 그런 치욕의 죽음이 아니라도, 죽음 자체에만 의미를 둘진대 얼마든지 그럴싸한 죽음으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고로 그런 하나님으로는 천하 없는 거짓말쟁이라도 만들어놓을 수가 없다는 이 한 마디로써 충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모로든 가감 없는 진실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한 것이 성경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이런 진실 그대로의 묘사로 차마 그려내지 못하겠거든 그런 그림 그리는 일 자체를 아예 버릴 일이다. 거짓이 좋은 결과를 내는 법이 없다. 그런 거짓된 속이는 그림을 인하여 방금 말한 크나큰 진실을 본의 아니게 감추어 오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이 아니고는 절대로 하실 수 없는 형언도 못할 크나큰 진실 하나를 많은 대중으로부터 감추어 오지 않았는가! 그런 거짓은 사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사탄에게 농락당해 온 것이다. 그래도 그려야겠거든 그 십자가 뒷모습만 그려도 족하다. 

2016년 8월 7일 일요일

구원받지 않았으면서도 스스로 구원받은 것으로 자신을 속이는 이들이 많다




구원이 무엇이며 구원받는 것이 무엇이냐. 죽음에서 구원됨이니 곧 영생함이 구원이다. 죽음은 왜 왔느냐, 범죄에서 온 것이다(롬 5:12). 죄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범죄냐,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 곧 하나님의 계명, 율법 즉 그 모든 말씀의 근본 취지가 무엇이냐. 다름아니라 우리가 모두 행복하게 살도록 하심이다. 즉 하나님을 머리로 하고 우리 모든 피조물(영적인 존재)은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한 몸 체제에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을 보장함이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삶의 구조다.

여기서 영적인 존재라 함은 영물을 포함하여 우리 인생들을 말함인데 영물은 우리의 영역 밖이므로 예외다. 사람 사랑을 말한다. 사람 사랑은, 우리의 공통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여 그 사랑을 알고 즉 머리께서 그 몸된 우리를 사랑하시어 위하심을 알고 우리도 당연히 머리를 사랑하고 위함에서 그 지시 곧 모든 말씀을 따라 함께 지체되어 있는 이웃을 사랑함을 말한다. 고로 오늘날은(범죄 전의 아담 당시가 아닌) 이 이웃 사랑이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지 않는 부류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로 분류된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은 후자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을 깨달아 말씀에 순종하도록 인도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므로 전도와 기도의 대상이 되고 선행도 이 차원에서 행해지는 그런 차이가 있다. 이를 통틀어 "사람 사랑"이라 한다. 위의 설명처럼 세분하여 "형제 사랑"과 "전도, 선행"으로 나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부지런히 우리 인생들을 가르치신 모든 요강이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임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마 22:40).

바로 이런 하나님(머리) 사랑 및 사람(그 몸된) 사랑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범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허물이 완연하고 악령들의 범죄는 동료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음이 명백하다. 물론 그 범죄도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에 들어가려면 먼저 이러한 범죄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전제된다. 범죄의 원 뿌리는 자아중심이니 머리가 몸을 몸이 머리를 위하는 한 몸 체제에서 서로 둘이 하나를 이루어 있는 상대를 사랑함이 생명의 법인데 그래서 어느 누구도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자기를 위하니 이를 자아중심이라 한다. 머리는 몸 중심으로 살고 몸은 머리 중심이 되어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을 이룬 피조물 즉 그렇게 하나님을 위하고 함께 지체가 된 자기 이웃을 사랑하여 위하는 것이지 결코 자기를 위하지 않는 법이다.

이 자기를 위하지 않고 서로 상대를 위함이 행복의 유일한 열쇠가 되기 때문에 의(義, 올바른 것)라 하고 선(善, 좋은 것)이라 하는 것이며 거룩하다(聖潔) 하는 것이다. 고로 죽음은 범죄에서 왔고 죽음에서 해방되어 애초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받음이니까 무엇보다 범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즉 자아중심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선행은 이 자기를 부인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없이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이 자기를 부인함이 없는 외형적이고 피상적인 선행이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인간은 아담 이후 일제히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어 있듯이 이미 죽은 자이므로 죽은 자로서는 아무리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기 부인"일 수가 없다. 자기 부인은 산 자로서의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즉 머리와 몸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죽어 있어 한 몸 체제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인데 내게 무슨 머리와 몸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겠는가. 하나님은 살아 있는 분이신데 죽은 내가 어찌 하나님과 머리와 몸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니 첫째 내가 죽은 자이므로 사는 자부터 되어야 하고 둘째 더 다시는 자아중심이어서는 안되는 것, 이 두 가지를 해결하는 것이 구원이다. 행위(자기의 선행 또는 종교 행위)로 구원 얻을 자가 없다는 것은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으므로 먼저 산 자부터 되는 것이 선결 과제라 이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자아중심은 자기를 부인함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방금 설명한 것처럼 내가 죽은 자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머리와 몸의 관계로 되어 있지 않아 원천적으로 선을 행함이 불가능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함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자아중심 일변도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이미 죽은 자로서 산 자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아무리 선행을 해도 그 선행의 의미와 가치가 없는 까닭이다.

고로 첫째의 것을 해결함에는 죽은 자로서의 나 자신으로서는 나를 전연 어찌 할 도리가 없고 하나님 친히 개입하시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래서 불가피하게 필연적이 되는 것이 새롭게 나를 창조하심이고 그 방법이 다시 출생하는 것이다. 내가 부모로부터 육체로 탄생할 때에도 나의 의지로 난 것이 아닌 것처럼, 역시 나의 의지로 나를 새롭게 만들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의지로써 나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다시 출생하게 하시니 그래서 믿기만 하면 되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고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은혜일 수밖에 없어 은혜의 선물로 구원받는다 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첫째에 해당되는 것이고 둘째에 해당되는 것 역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니 즉 다시는 범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또다시 범죄를 하는 자는 아무리 살려놓아 보아야 재차 범죄하여 죽게 될 것이니 소용 없는 일이다. 고로 산 자로서 하나님과의 '머리와 몸' 관계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나의 의지도 함께 요구됨이다. 이 나의 의지는 처음부터 나를 산 자로 만드는 그런 의지가 아니라, 죽은 자가 산 자가 되는 일은 하나님의 의지로 이미 이루어진 바탕 위에서 비로소 요구되는 나의 의지이다. 왜 이런 나의 의지가 요구되는가 하면 앞서의 설명대로 둘이 하나됨 즉 머리와 몸의 사랑의 관계(서로가 서로를 위하는)에서는 반드시 사랑의 핵심인 자유 의지가 필수 불가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고 은혜로 구원 얻음에는 필수적인 것이 나의 의지 즉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구원의 은혜의 역사(하나님의 의지로 이루신, 나 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내 이름으로 죽으신)를 믿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함과 동시에 이러한 의지는 필연적으로 그 사랑에 감동하여 나도 사랑의 당연한 반응을 나타내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의지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요구되는 의지가 바로 "회개"이다. 고로 구원의 말씀을 전달할 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행 2:38) 한 것이다. 또한 구원의 말씀을 전파하실 때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마 4:17) 하셨지 "나를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 하시지 않았다. 바울 역시 전도할 때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이 명령"(행 17:30)이라 하였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 않았다.

회개는 믿음을 수반하고 믿음은 회개를 수반한다. 죄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죽어 있는 상태를 시인하고 이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한다. 즉 내가 죽은 자이고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는 도무지 살아서는 안되고 살 수도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믿음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살았다고 하여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착각하고 지내왔었다. 이런 맹신을 완전히 버림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을 대변하는 것이고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내가 몸 담고 있는 같은 또래의 인생들의 죽음의 세상임을 의미하기도 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상 설명과 같은 생명의 법칙에 어긋나게 나 자신을 위하여 산 것을 회개하여 뉘우쳐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 굳게 다짐하는 것이 회개다.

이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도 된다.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약속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의 나 위한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바치시는(갈 2:20) 실제 본보기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니 곧 하나님의 내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음이다(롬 5:8). 그러므로 믿음으로 당연히 나타날 행위(행함 곧 순종의 행위)를 내 스스로 약속하는 순간이다. 머리에게 순종하지 않는 몸이 없으니 그리 되면 한 몸일 수가 없음이다. 고로 회개는 나의 삶 전체를 주님이 소유로 바치는 시점이다. 당신 자신을 나의 선물로 내게 전부 주셨으니 그래서 영원토록 나를 위하시니(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종 노릇하는 것-갈 5:13) 나 자신이 역시 나의 주인님(그래서 "주님")의 소유가 되어 마땅하다. 내 것이 나의 주인의 소유인데 어찌 내 것인 양 나를 위해 내 마음대로 하고 내 마음대로 살리요.

이러한 회개를 한 연후에 죄 용서가 되는 회개의 세례에 임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무덤에 아주 완전히 장사 지내는 의식이 세례이니 그렇게 죽어 깨끗이 해결이 난 다음에야 성령을 거저 주시는 선물로 받아 모시게 된다. 즉 흔히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이다. 이것이 구원받음이다. 구원의 확신이다. 고로 이렇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대중 앞에서 공언하는 순간 그 삶은 다시는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내가 주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나를 주님께 바침으로써 주님의 것이 됨이다.

내 자신이 주님이 것이 되지 않고는 구원이 불가능하다. 둘이 하나됨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자동적으로 하나됨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사랑의 하나됨이지 기계적인 하나됨은 하나님의 생명의 일에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진실이다. 당연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아중심은 더 이상 발 붙일 데가 없다. 영원히 그러하다. 왜냐면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둘의 하나됨을 이룸으로써 새 생명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과거 나 혼자 자아중심으로 살던 때와는 180도 다른 삶(일상생활)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를 혼동하여 일방적인 하나님의 의지의 측면만 강조하여 구원되지 않았으면서도 다시 말해 성령의 선물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구원받았노라고 자기 기만에 취해 있다.

단 1%라도 자기를 위하여 산다고 생각될 때 구원받은 것이 아니니 새로 시작할 일이다. 빙산 일각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1%가 아니라 사실은 100% 자기를 위함이다. 성령을 받은 사실이 없는 것이니 소위 "구원의 확신"을 버릴 일이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이후로는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살겠고 더 다시는 죽어도 자아중심이 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위해 살아(이것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 2:20) 것이고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2:21)는 말을 진정으로 할 수 있을 그 때 비로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임하시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구원받음이 되는 것이요 자기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