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30일 토요일

萬法歸一 其一何處(만법귀일 기일하처) (재수록)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2,3).

하나님의 뜻은 "기록한 말씀"(고전 4:6)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므로 항상 성경을 가까이하는 것이 필수이다. 성경 내용을 다 안다고 해서 절대로 성경을 덮어둘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부지런히 탐독함으로써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가 "너희가 진리에 (이미) 섰으나 항상 너희로 다시 기억나게 하려 한다"고 강조했듯이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도록 해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으로 마땅히 살고 로마서 7장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과거에로의 회귀 이상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감이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하고 바울이 책망한 것과 같다. "어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 뜻대로 행할까" 하는 것이, 아내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마음 쓰는 정도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고전 7:33,34) 마땅한 것. 

전자와 후자의 둘이 서로 충돌할 때를 가리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마 10:37) 경고하신 것이다. 말씀을 소홀히 하는 자는 하나님을 소홀히 하는 것이요 이는 자기 "구원을 (소홀히 하여) 등한히 여기는"(히 2:3) 것이 됨이니 "어찌 피하리요"(:3). 자기 "구원"을 소홀히 하는 자에게 닥치는 "피치 못할"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이와 같이 바울 사도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 생활의 잣대(尺度)를 세워 준 것이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이 표준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당장 자아중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즉각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새롭게 함"이다.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함"이요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함"이다. 

주님을 어떻게 해야 기쁘시게 해드릴까,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대로 행함일까 하고 기도 중에 항상 마음을 조리(調理)하고 정리하기를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 여러 번 강조했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일하기 위해 있고, 이 일을 방해하는 악령(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의 세력과 싸우는 오직 이 일만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외의 것으로써 "마음이 분산되어서는"(고전 7:33) 안되는 것. 오매 불망, 일심추월(一心秋月)로 이쪽으로만 생각을 맞추어 정리 정돈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萬法歸一 其一何處(만법귀일 기일하처). 모든 것이 하나로서 시작되었고 하나로서 유지 존속되며 그 하나로 역시 돌아가는 것은 분명한데, 그 하나가 어디인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처음 초자연계 몸으로 영생하는 인간이었으나 범죄함으로 이 지경이 되었은즉 요 모양으로 살 수는 도저히 없는 것. 이제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나타나셨고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때 가서야 우리가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될 것인즉 그 때 비로소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다. 어디서 왔는지가 분명하고 어디로 가는지가 명백하니 현재 나의 좌표가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일하고 싸우는 것 외에는 일체의 의미를 찾지 말 것이다.


유수한 한학자로서 "인생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죽도록 고민하던 중 성경을 읽다가 "나 위해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목에 이르러 크게 목 놓아 울고 그 아내와 함께 믿음에 들어 온 후 자기도 한 때 심각하게 물들었던 아편 중독자 치료를 겸한 전도 활동에 나선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 내외는 7년 동안이나 한 번도 옷 벗고 잔 적이 없었다. 자다가도 그 보살피는 영혼들을 위해 그리고 산적해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해 어느 때든지 일어나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이공(李公) 순신(舜臣)은 임진란 7년간 전투복장(戰服)으로 항상 지냈고 여잭(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 대목이 연상된다. 전쟁에서 오직 이기는 것이 목적이요 그 외에는 달리 생각이 있을 수 없음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병(軍兵)들인 것이다(딤후 2:3). 

나는 모든 꿈이 이루어진 삶 속에서 그 서막(序幕)으로 피 땀 흘려 싸우며 일하는 중에 있노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2,3).

하나님의 뜻은 "기록한 말씀"(고전 4:6)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므로 항상 성경을 가까이하는 것이 필수이다. 성경 내용을 다 안다고 해서 절대로 성경을 덮어둘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부지런히 탐독함으로써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가 "너희가 진리에 (이미) 섰으나 항상 너희로 다시 기억나게 하려 한다"고 강조했듯이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도록 해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으로 마땅히 살고 로마서 7장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과거에로의 회귀 이상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감이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하고 바울이 책망한 것과 같다. "어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 뜻대로 행할까" 하는 것이, 아내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마음 쓰는 정도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고전 7:33,34) 마땅한 것. 

전자와 후자의 둘이 서로 충돌할 때를 가리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마 10:37) 경고하신 것이다. 말씀을 소홀히 하는 자는 하나님을 소홀히 하는 것이요 이는 자기 "구원을 (소홀히 하여) 등한히 여기는"(히 2:3) 것이 됨이니 "어찌 피하리요"(:3). 자기 "구원"을 소홀히 하는 자에게 닥치는 "피치 못할"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이와 같이 바울 사도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 생활의 잣대(尺度)를 세워 준 것이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이 표준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당장 자아중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즉각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새롭게 함"이다.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함"이요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함"이다. 

주님을 어떻게 해야 기쁘시게 해드릴까,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대로 행함일까 하고 기도 중에 항상 마음을 조리(調理)하고 정리하기를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 여러 번 강조했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일하기 위해 있고, 이 일을 방해하는 악령(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의 세력과 싸우는 오직 이 일만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외의 것으로써 "마음이 분산되어서는"(고전 7:33) 안되는 것. 오매 불망, 일심추월(一心秋月)로 이쪽으로만 생각을 맞추어 정리 정돈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萬法歸一 其一何處(만법귀일 기일하처). 모든 것이 하나로서 시작되었고 하나로서 유지 존속되며 그 하나로 역시 돌아가는 것은 분명한데, 그 하나가 어디인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처음 초자연계 몸으로 영생하는 인간이었으나 범죄함으로 이 지경이 되었은즉 요 모양으로 살 수는 도저히 없는 것. 이제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나타나셨고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때 가서야 우리가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될 것인즉 그 때 비로소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다. 어디서 왔는지가 분명하고 어디로 가는지가 명백하니 현재 나의 좌표가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일하고 싸우는 것 외에는 일체의 의미를 찾지 말 것이다.


유수한 한학자로서 "인생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죽도록 고민하던 중 성경을 읽다가 "나 위해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목에 이르러 크게 목 놓아 울고 그 아내와 함께 믿음에 들어 온 후 자기도 한 때 심각하게 물들었던 아편 중독자 치료를 겸한 전도 활동에 나선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 내외는 7년 동안이나 한 번도 옷 벗고 잔 적이 없었다. 자다가도 그 보살피는 영혼들을 위해 그리고 산적해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해 어느 때든지 일어나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이공(李公) 순신(舜臣)은 임진란 7년간 전투복장(戰服)으로 항상 지냈고 여잭(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 대목이 연상된다. 전쟁에서 오직 이기는 것이 목적이요 그 외에는 달리 생각이 있을 수 없음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병(軍兵)들인 것이다(딤후 2:3). 

2016년 7월 29일 금요일

구원받음은 올바른 삶(일상생활)으로써 결정(結晶)되는 것



주님의 것이 나의 것이니까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어 내가 구원된 것이다. 고로 모름지기 구원된 자는 나의 것은 주님의 것이 되어 있음을 철두철미 인식해야 하는 것이며 나를 위해서는 일거수 일투족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결의로 일상생활을 하게 된다. 주님께 매사 여쭙고 하는 것도 그 때문. 주인님의 일을 종으로서 주인의 뜻대로 하는 자세로 해야지 종의 뜻대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매사 주인의 지시를 받들어 하는 일인즉 사전(事前)에 일단 주님께 여쭙고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필수. 여호수아가 매사 철저히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을 성경은 책망하고 있다(수 9:14).

육체의 우리 인간들로서의 종과 주인의 관계라면 주인이 매번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를 내림에 따라 종이 움직이게 되는데,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주님께서는 보이시지 않고 나의 귀로는 그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연계 육체(나)와 성령(주님)과의 관계이므로 그리고 핵심이 사랑인즉 내가 반드시 주님께 먼저 아뢰고 나서 무엇을 하든지 하게 되어 있는 방식이라면 방식이라 하겠다. 더군다나 사랑으로써 적극성으로 능동적으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움직이는 터이기에 이는 당연지사다.

그리고 이 짧은 세상에서 삶의 쾌락을 도모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망념이고, 사람 살리는 가장 우선적인 시급한 일만을 하게 되어 있는 단기간의 지극히 짧은 금 쪽 같이 소중한 시간들이다. 그런즉, 내가 구원받아 새 생명 가운데 있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것'(주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 등)을 '내 것'으로 함으로써 되는 것이므로, 이러한 관계는 '내 것'을 '주님의 것'으로서 위의 설명대로 내 스스로 매일 매시간 매순간 바침의 동시성과 양면성이 이루어짐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느냐 하면 어떤 결단이 요구될 때, "나는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의 뜻대로만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인즉 내 만일 나의 자의대로 무슨 일이든 행하게 되면, 그 순간 나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됨으로써 '병'이라는 하나를 이루는 3위1체의 원리에 반(反)하게 되며 그 관계가 몽땅 깨뜨려져 와해되는 순간이다. 내가 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데 어찌 주님의 것(그 죽으심, 부활 등)을 내 것으로 삼는 구원이 지속되겠는가. 그런즉 내 스스로 나의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끊어 자결행위에 들어가는 망령된 짓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는 한에는 한 순간도 자아중심으로 나아가는 망념을 품을 수 없다.


"사탄은 이 순간도 내게 절하라고 즉 자아중심으로 나가라고 어르며 협박해대지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죽는 것도 유익하다'. 내가 이 짧은 지상(地上)의 한 생애에서 삶에 탐닉되어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하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산 제물'(롬 12:1)로서 '날마다 죽는 것'(고전 15:31)이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사업의 특징이므로 사탄이 겁 주는 죽음이여 얼마든지 오라, 내가 죽어주리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고 현재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것인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워'(골 1:24) '그 죽으심을 짊어지는'(고후 4:10) 것이 내가 기쁘게 감당할 나의 과업이다" 하고 매번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2016년 7월 26일 화요일

荒野(황야) 같은, 아니 死海(사해)와 같은 세상임에 눈 떠야 구출돼






오늘날 적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가장하며 등장하는 때로서
막강한 초능력으로 한 몫 보려는 때이므로
하나님의 초능력은 기도 응답으로 나타나시는 것 외에는
마치 악령들과 경쟁이나 하듯이 나타나시지는 않는 것.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능력은 거의 없고
온 세상이 적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나탸내는 악령들의 초능력뿐이니
이 사실을 명백히 하지 않으면 악령의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으로
착각하여 그들을 따르게 될 것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하나님의 최고도의 관심은 바로 당신









2016년 7월 25일 월요일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우리가 듣기도 하고 눈으로 보기도 하고 주목하기도 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느니라"(요일 1:1)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마 28:20) 







아인슈타인은 틀렸지만 보어나 아인슈타인이나 1급 기본 정보에 대해서는 전면 백지 상태였다 (재수록/수정)






아인슈타인(향하여 좌측)과 걷고 있는 보어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은 틀렸고 보어는 몰랐다"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상보성 원리를 끝내 수용하지 않아 틀린 것이고, 보어는 만물의 상보성은 알았으나 짝을 이룬 그 양자 관계가 主從(주종), 因果(인과), 大小(대소), 先後(선후) 관계에 있음을 다시 말해 3위1체의 원리(3운법칙으로 검증된)를 몰라, 만물이 "결과"인즉 그 "원인"인 창조자의 실존이 필연이데도 이를 성경대로 믿지 않았으니 몰라도 한참 몰랐던 것이다. 창조주를 모르는데 가히 무엇을 "안다"고 할 것인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 1:7ㅡ잠언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솔로몬이 쓴 글이 아니던가)함과 같다.  "지식의 근본"을 모르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 9:25)!

모름지기 모든 인생들은 자기의 뿌리인 청조자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뿌리 없이 무슨 나무가 있고 더군다나 열매란 것이 있으리요. 지식이 없으니("지식의 근본"을 모르니까) 이 세상 신(神) 악마에게 철저히 농락 당하는 비극에서 헤어나지 못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원수의 정체를 모르는데 감히 그 원수를 對敵(대적)하리라고 언감생심 마음이나 먹으랴. 그대들 과학자가 혐오하고 기피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정작 創造神(창조신)이 아니라 被造物神(피조물신)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神(고후 4:4)들을 만드셨으니 곧 자연계와 양립되는 초자연계의 超能力者(초능력자)들이다. 이런 용어도 인간이 자연계 존재가 됨으로써 빚어진 비극의 여파로 생긴 것이다. 왜냐면 인간(아담)은 이들을 지휘 통솔함으로써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지식(지식은 곧바로 능력으로 통한다) 면으로는 이들 靈物(영물)들이 인간(아담)보다는 優位(우위)에 있었던 것. 창조 序列(서열)상으로는 그리고 位階(위계)로는 아담이 월등한데 대한 양자간(인간과 영물)의 조화, 통일, 配合(배합), 균형을 위한 창조자의 배려이셨다. 그러나 영물들 중의 君長(군장, prince) 중 하나인 용(자연계 동물인 뱀의 초자연계 대칭형)이 아담을 시기하여 下剋上(하극상)으로 인간(아담)을 죽음에 빠뜨림으로써 즉 오늘과 같은 자연계 존재가 되게 함으로써(당시 아담에게 죽음은 자연계 존재로 되돌아가는 것) 자기 手下(수하)에 넣어 틀어쥐고 아담의 位(위)를 찬탈코자 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찌 찬탈이 가능하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철저히 공평공정하게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을 버리시지 않는 한 그래서 인간 아래의 모든 피조물들을 湮滅(인멸)하시지 않는 한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 철저한 원리원칙을 지키심은,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함께 죽음의 곤욕을 치르시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에서도 입증이 되고 있다. 

사탄(龍, 이는 고유의 이름이 아니고 인간의 "적대자"라는 별명)이라는 피조물 하나쯤 그냥 없애버리셔도 물 한 방울 떨어져 물결 이는 정도의 파장밖에 될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義(의)로우심은 그렇게 하시는 것을 스스로 수용치 않으시는 것이다. 용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사람이 되시어 인간을 위한 희생양이 되시려는 의향까지는 능히 짚어볼 수 있었으나 고통을 끝내 견디지 못하시고 '십자가 죽으심을 통한 인간 구원'에서 도중 하차하실 것으로만 예상했던 것이다. 그 자신의 자아중심의 속성으로는 자기 부인의 사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보다 앞서 필연적으로 이러한 결과(친히 희생양이 되시는)를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담의 범죄를 유야무야로 덮고 넘어가실 줄로 먼저 예상한 것이었으나, 아담이 스스로 취한 죽음에 일절 개입하시지 않고 원리원칙대로 오히려 저주까지 하시니 첫 예상부터 빗나간 셈이다. 사탄 자신도 당연히 저주를 받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죽음의 인간과 하나되시려는)를 결국 확인하게 되지만, 그 정도이실 줄은 차마 예상 못한 것. 예상했다면 처음부터 아담에 대한 殺意(살의)를 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끝까지 지금까지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이후에도 요행수를 바라는 것이니 그가 이렇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기대를 거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구리가 어느 쪽으로 뛸지는 개구리 자신도 예상할 수 없다는 것과 같아 보이는 것이(사탄에게) 인간의 이 자유의지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는 것도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기보다 일종의 권모술수처럼 여겨지는 것일까. 하나님의 자기 부인의 사랑을 이해 못함과 같은 그런 이해 못함(자아중심의 특성상)의 한도일까. 

이상이 오늘날과 같은 자연계 몸이 되어 인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당치도 않은 소위 UFO와 같은 이들 惡靈(악령) 패거리의 거짓과 속임수에 쩔쩔 매고 있는 비극의 사연이고 내력이다. 쩔쩔 맨다는 것은 이런 속임수를 창조신의 초능력으로 오인하여 경배 수준에 이르러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때문에 (자연)과학자들은 한사코 이를 부인하려 들지만 현실적인 거대한 怒濤(노도)를 이겨낼 재주는 없는 것. 조만간 두 손 들고 白旗(백기) 들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는 너무 늦을 수 있다. 被造物神의 계략에 완전히 말려드는 순간일 테니까. 지금 이 때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사리판단하여 성경의 진리 가운데로 歸順(귀순)하지 않는 한 희망은 없다.

이런 내용은 성경 외에는 이 세상의 그 어느 무엇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당연 사실일 수밖에 없는 것은 龍(용, dragon)이 이 세상 神으로서 온 세상을 꼼짝 못하게 한 손에 장악하고 있으매 누가 감히 혀를 놀리랴. 단지 성경만큼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손을 못대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용의 장악력으로 얼마든지 인간의 눈을 어둡게 할 수 있으니 다시 말해 방금 밝힌 성경의 내용을 왜곡되게 알도록 차단시켜 온 것. 그 결과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이런 (성경의) 기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교묘하게도 성경 외에는 기록상으로는 전해 오는 문헌이 없다는 것을 기화로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전 인류를 속이는데 성공하여 이 21세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런 철통 같은 장악력에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놀라워하셨다(막 6:6-"to marvel at"). 

초대교회가 당연히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두 대목만 들어도 충분하다. 바울 사도의 롬 5:12이니 곧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는 것으로서, 아담이 사망하지 않았으면 靈物들처럼 오늘날도 아담이 생존해 있다는 의미가 되니 자연계 목숨의 最長(최장) 수명의 한도가 천년 가까운 므두셀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수명은 950년 노아의 생애가 3운법칙에 의해 증명된 바로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아담이 초자연계 몸이 아니었다면 바울의 이와 같은 표현이 불가능한 것. 

그리고 요한 사도의 계 20:2/12:9, "옛 뱀"이란 표현이다. 이는 누가 보아도 "창세기에 나오는 바로 그 뱀"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요한은 그 짧은 계시록에서 마치 의도적인 것처럼 연달아 계속해서 이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도 이와 같은 성경의 설명 외에는 그리고 초대교회 사도들 외에는 아담이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다고 밝힌 역사가 없다. 유대인들도 알 까닭이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모든 실상과 진리를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를 배척한 마당에 무슨 수로 알 수 있으랴. 모세 시대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맞기 위한 일체의 준비 기간인데 이런 지식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또 그런 선지자들이 알고 있었느냐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3운법칙이나 3위1체 법칙이 알려지는 것도 이 21세기이니까.

묻건대, 이제 와서 이 성경적 사실을 이와 같이 밝히고 있는 것이 놀라운가, 아니면 이제까지 사탄이 철통 같이 감출 수 있었던 것이 놀라운가. 그럼에도 구원받음에는 이런 지식 유무가 아무 관련이 없으므로, 이런 無知(무지)의 현실을 하나님께서 묵과해 오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악한 자가 창조주로 가장하여 가능한 한의 모든 초능력을 동원하여 최후 발악적으로 기만하는 시대에 도달해 있으므로 더 이상의 묵인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시는 것이다. 이런 가장 중요한 인간으로서의 기본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닐스 보어여 그대에게 "몰랐다"고 하는 말이 틀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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