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9일 금요일

구원받음은 올바른 삶(일상생활)으로써 결정(結晶)되는 것



주님의 것이 나의 것이니까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어 내가 구원된 것이다. 고로 모름지기 구원된 자는 나의 것은 주님의 것이 되어 있음을 철두철미 인식해야 하는 것이며 나를 위해서는 일거수 일투족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결의로 일상생활을 하게 된다. 주님께 매사 여쭙고 하는 것도 그 때문. 주인님의 일을 종으로서 주인의 뜻대로 하는 자세로 해야지 종의 뜻대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매사 주인의 지시를 받들어 하는 일인즉 사전(事前)에 일단 주님께 여쭙고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필수. 여호수아가 매사 철저히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을 성경은 책망하고 있다(수 9:14).

육체의 우리 인간들로서의 종과 주인의 관계라면 주인이 매번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를 내림에 따라 종이 움직이게 되는데,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주님께서는 보이시지 않고 나의 귀로는 그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연계 육체(나)와 성령(주님)과의 관계이므로 그리고 핵심이 사랑인즉 내가 반드시 주님께 먼저 아뢰고 나서 무엇을 하든지 하게 되어 있는 방식이라면 방식이라 하겠다. 더군다나 사랑으로써 적극성으로 능동적으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움직이는 터이기에 이는 당연지사다.

그리고 이 짧은 세상에서 삶의 쾌락을 도모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망념이고, 사람 살리는 가장 우선적인 시급한 일만을 하게 되어 있는 단기간의 지극히 짧은 금 쪽 같이 소중한 시간들이다. 그런즉, 내가 구원받아 새 생명 가운데 있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것'(주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 등)을 '내 것'으로 함으로써 되는 것이므로, 이러한 관계는 '내 것'을 '주님의 것'으로서 위의 설명대로 내 스스로 매일 매시간 매순간 바침의 동시성과 양면성이 이루어짐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느냐 하면 어떤 결단이 요구될 때, "나는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의 뜻대로만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인즉 내 만일 나의 자의대로 무슨 일이든 행하게 되면, 그 순간 나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됨으로써 '병'이라는 하나를 이루는 3위1체의 원리에 반(反)하게 되며 그 관계가 몽땅 깨뜨려져 와해되는 순간이다. 내가 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데 어찌 주님의 것(그 죽으심, 부활 등)을 내 것으로 삼는 구원이 지속되겠는가. 그런즉 내 스스로 나의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끊어 자결행위에 들어가는 망령된 짓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는 한에는 한 순간도 자아중심으로 나아가는 망념을 품을 수 없다.


"사탄은 이 순간도 내게 절하라고 즉 자아중심으로 나가라고 어르며 협박해대지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죽는 것도 유익하다'. 내가 이 짧은 지상(地上)의 한 생애에서 삶에 탐닉되어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하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산 제물'(롬 12:1)로서 '날마다 죽는 것'(고전 15:31)이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사업의 특징이므로 사탄이 겁 주는 죽음이여 얼마든지 오라, 내가 죽어주리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고 현재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것인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워'(골 1:24) '그 죽으심을 짊어지는'(고후 4:10) 것이 내가 기쁘게 감당할 나의 과업이다" 하고 매번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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