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부산 동래성 북문을 통해 하나는 목숨이 아까워 도망쳐 나갔고(경상 우병사 이각), 다른 하나는 연로하신 어머니께 절하여 마지막 하직 인사를 고하고는 사지(死地)로 뛰어들어 동래부사 송상현과 합류해 전사한다(양산 군수 조영규). 이각은 도망 가다가 붙잡혀 도망자로서 결국엔 처형되어 후세에 길이길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조영규는 청사(靑史)에 그 떴떳한 이름을 빛내게 된다. 인생 삶의 명암이 교차했던 유적지다.
조영규가 승전 없는(승전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도망치던 경상우수사 원균과 대조적으로 왜선 10척을 쳐부수었다는 그의 장계는 조정을 기망한 것임이 드러났으니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적과 조우했을 때에는 아군의 피해도 분명히 있어야 하거늘 전연 언급하지 않은 것 자체가 이를 증명) 죽음뿐임을 뻔히 알면서도 필마단기로 (이미 부하 기백명은 1차 입성 때 성내에 남겨졌고 노모님께 하직 인사를 고하고자 해서 일단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2차 입성에서는 혼자였다) 북문으로 치달으며 이미 성을 포위하고 있는 왜병들을 노호 질타하면서 성문 앞 가까이 이르자 왜병들도 감복하여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악령들"이니 "천사들"이니 해도 생소하고 어색한데 "귀신들"까지 들먹이니 요괴스럽다 할지 모르나, 그러면 성경에 "더러운 귀신"들을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도 요사스럽다 할 것인가. 그래서 인류 역사를 사탄의 기만사(欺瞞史)라 하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살아 오며 꾸며진 내력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생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하신 것도 아니고(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주 내에서 이뤄지는 일이지만), 이 세상 신(神) 사탄이 어떻게 인간을 속여 왔는지(계 12:9) 그 자초지종의 과정을 나타내는 기록들인 것이다. 처음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를 속인 데에서 발단된 역사이고 자연계 몸에 속한 인간 비극의 인간고(人間苦)이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들에게는 귀신의 초능력을 과대 포장하기까지 해서 공포에 떨게 하는 사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전파되기 시작하면서는 무신론을 만들어 내어 "귀신"에 대한 언급을 미신화(迷信化)함으로써 성경("귀신"을 말하는)의 품격을 떨어뜨리기에 혈안이었던 것이다. 이런 것은 이중 잣대도 자가당착도 아니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자의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음의 무궁무진함을 말하는 것이다. "모순"이라 함은 진실과 진리를 최고 가치로 인정하는 마당에서나 써 먹을 수 있는 단어다. 거짓에는 전혀 그런 기준이 없다. 처음부터 언어의 유희요 농간이니까.
처음부터 성경은 자연계와 초자연계가 대립되는 만물의 대칭 원리를 밝혀 왔다. 3위1체의 법칙이다. 지금까지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임금)는 그의 왕권을 동원하여 이 사실을 숨겨 왔던 뿐이다. 인간이 알려고 해도 차단한 것이 아니라,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게 이성의 눈을 감겨 왔다는 의미이다(고후 4:4). 그런 지식의 유무와는 관계 없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동안 손쓰시지 않았다. 인생들 스스로가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강제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사리(事理)와 이치를 밝힐 필요성이 대두되는 때이므로 이런 지식(3위1체의 원리)도 나타내어지도록 하신 것이다. 적 그리스도의 특징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하나님의 능력)을 능가하는 초능력을 과시하는 데에 있으므로(거짓이 가미되어 있는 것이기에 그 끝을 모른다는 데에 유념할 것-살후 2:9,10),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속이는 데에 있으므로, 그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이러한 최신 지식(인간 생애를 주관하는 3운법칙 등)도 소요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탄이 감추어 왔던 초자연계의 실재가 이제야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자연)과학이 그 자체의 한계성으로 인해 이 실상 하나 깨치지도 못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으스대어 왔으니 자조(自嘲) 섞인 한숨이 아니 나올 수가 없다.
양산 군수 조 영규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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