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7일 일요일
구원받지 않았으면서도 스스로 구원받은 것으로 자신을 속이는 이들이 많다
구원이 무엇이며 구원받는 것이 무엇이냐. 죽음에서 구원됨이니 곧 영생함이 구원이다. 죽음은 왜 왔느냐, 범죄에서 온 것이다(롬 5:12). 죄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범죄냐,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 곧 하나님의 계명, 율법 즉 그 모든 말씀의 근본 취지가 무엇이냐. 다름아니라 우리가 모두 행복하게 살도록 하심이다. 즉 하나님을 머리로 하고 우리 모든 피조물(영적인 존재)은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한 몸 체제에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을 보장함이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삶의 구조다.
여기서 영적인 존재라 함은 영물을 포함하여 우리 인생들을 말함인데 영물은 우리의 영역 밖이므로 예외다. 사람 사랑을 말한다. 사람 사랑은, 우리의 공통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여 그 사랑을 알고 즉 머리께서 그 몸된 우리를 사랑하시어 위하심을 알고 우리도 당연히 머리를 사랑하고 위함에서 그 지시 곧 모든 말씀을 따라 함께 지체되어 있는 이웃을 사랑함을 말한다. 고로 오늘날은(범죄 전의 아담 당시가 아닌) 이 이웃 사랑이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지 않는 부류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로 분류된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은 후자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을 깨달아 말씀에 순종하도록 인도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므로 전도와 기도의 대상이 되고 선행도 이 차원에서 행해지는 그런 차이가 있다. 이를 통틀어 "사람 사랑"이라 한다. 위의 설명처럼 세분하여 "형제 사랑"과 "전도, 선행"으로 나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부지런히 우리 인생들을 가르치신 모든 요강이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임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마 22:40).
바로 이런 하나님(머리) 사랑 및 사람(그 몸된) 사랑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범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허물이 완연하고 악령들의 범죄는 동료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음이 명백하다. 물론 그 범죄도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에 들어가려면 먼저 이러한 범죄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전제된다. 범죄의 원 뿌리는 자아중심이니 머리가 몸을 몸이 머리를 위하는 한 몸 체제에서 서로 둘이 하나를 이루어 있는 상대를 사랑함이 생명의 법인데 그래서 어느 누구도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자기를 위하니 이를 자아중심이라 한다. 머리는 몸 중심으로 살고 몸은 머리 중심이 되어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을 이룬 피조물 즉 그렇게 하나님을 위하고 함께 지체가 된 자기 이웃을 사랑하여 위하는 것이지 결코 자기를 위하지 않는 법이다.
이 자기를 위하지 않고 서로 상대를 위함이 행복의 유일한 열쇠가 되기 때문에 의(義, 올바른 것)라 하고 선(善, 좋은 것)이라 하는 것이며 거룩하다(聖潔) 하는 것이다. 고로 죽음은 범죄에서 왔고 죽음에서 해방되어 애초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받음이니까 무엇보다 범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즉 자아중심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선행은 이 자기를 부인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없이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이 자기를 부인함이 없는 외형적이고 피상적인 선행이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인간은 아담 이후 일제히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어 있듯이 이미 죽은 자이므로 죽은 자로서는 아무리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기 부인"일 수가 없다. 자기 부인은 산 자로서의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즉 머리와 몸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죽어 있어 한 몸 체제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인데 내게 무슨 머리와 몸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겠는가. 하나님은 살아 있는 분이신데 죽은 내가 어찌 하나님과 머리와 몸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니 첫째 내가 죽은 자이므로 사는 자부터 되어야 하고 둘째 더 다시는 자아중심이어서는 안되는 것, 이 두 가지를 해결하는 것이 구원이다. 행위(자기의 선행 또는 종교 행위)로 구원 얻을 자가 없다는 것은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으므로 먼저 산 자부터 되는 것이 선결 과제라 이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자아중심은 자기를 부인함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방금 설명한 것처럼 내가 죽은 자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머리와 몸의 관계로 되어 있지 않아 원천적으로 선을 행함이 불가능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함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자아중심 일변도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이미 죽은 자로서 산 자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아무리 선행을 해도 그 선행의 의미와 가치가 없는 까닭이다.
고로 첫째의 것을 해결함에는 죽은 자로서의 나 자신으로서는 나를 전연 어찌 할 도리가 없고 하나님 친히 개입하시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래서 불가피하게 필연적이 되는 것이 새롭게 나를 창조하심이고 그 방법이 다시 출생하는 것이다. 내가 부모로부터 육체로 탄생할 때에도 나의 의지로 난 것이 아닌 것처럼, 역시 나의 의지로 나를 새롭게 만들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의지로써 나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다시 출생하게 하시니 그래서 믿기만 하면 되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고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은혜일 수밖에 없어 은혜의 선물로 구원받는다 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첫째에 해당되는 것이고 둘째에 해당되는 것 역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니 즉 다시는 범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또다시 범죄를 하는 자는 아무리 살려놓아 보아야 재차 범죄하여 죽게 될 것이니 소용 없는 일이다. 고로 산 자로서 하나님과의 '머리와 몸' 관계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나의 의지도 함께 요구됨이다. 이 나의 의지는 처음부터 나를 산 자로 만드는 그런 의지가 아니라, 죽은 자가 산 자가 되는 일은 하나님의 의지로 이미 이루어진 바탕 위에서 비로소 요구되는 나의 의지이다. 왜 이런 나의 의지가 요구되는가 하면 앞서의 설명대로 둘이 하나됨 즉 머리와 몸의 사랑의 관계(서로가 서로를 위하는)에서는 반드시 사랑의 핵심인 자유 의지가 필수 불가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고 은혜로 구원 얻음에는 필수적인 것이 나의 의지 즉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구원의 은혜의 역사(하나님의 의지로 이루신, 나 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내 이름으로 죽으신)를 믿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함과 동시에 이러한 의지는 필연적으로 그 사랑에 감동하여 나도 사랑의 당연한 반응을 나타내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의지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요구되는 의지가 바로 "회개"이다. 고로 구원의 말씀을 전달할 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행 2:38) 한 것이다. 또한 구원의 말씀을 전파하실 때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마 4:17) 하셨지 "나를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 하시지 않았다. 바울 역시 전도할 때 "회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이 명령"(행 17:30)이라 하였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 않았다.
회개는 믿음을 수반하고 믿음은 회개를 수반한다. 죄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죽어 있는 상태를 시인하고 이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한다. 즉 내가 죽은 자이고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는 도무지 살아서는 안되고 살 수도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믿음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살았다고 하여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착각하고 지내왔었다. 이런 맹신을 완전히 버림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을 대변하는 것이고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내가 몸 담고 있는 같은 또래의 인생들의 죽음의 세상임을 의미하기도 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상 설명과 같은 생명의 법칙에 어긋나게 나 자신을 위하여 산 것을 회개하여 뉘우쳐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 굳게 다짐하는 것이 회개다.
이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도 된다.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약속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의 나 위한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바치시는(갈 2:20) 실제 본보기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니 곧 하나님의 내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음이다(롬 5:8). 그러므로 믿음으로 당연히 나타날 행위(행함 곧 순종의 행위)를 내 스스로 약속하는 순간이다. 머리에게 순종하지 않는 몸이 없으니 그리 되면 한 몸일 수가 없음이다. 고로 회개는 나의 삶 전체를 주님이 소유로 바치는 시점이다. 당신 자신을 나의 선물로 내게 전부 주셨으니 그래서 영원토록 나를 위하시니(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종 노릇하는 것-갈 5:13) 나 자신이 역시 나의 주인님(그래서 "주님")의 소유가 되어 마땅하다. 내 것이 나의 주인의 소유인데 어찌 내 것인 양 나를 위해 내 마음대로 하고 내 마음대로 살리요.
이러한 회개를 한 연후에 죄 용서가 되는 회개의 세례에 임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무덤에 아주 완전히 장사 지내는 의식이 세례이니 그렇게 죽어 깨끗이 해결이 난 다음에야 성령을 거저 주시는 선물로 받아 모시게 된다. 즉 흔히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이다. 이것이 구원받음이다. 구원의 확신이다. 고로 이렇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대중 앞에서 공언하는 순간 그 삶은 다시는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내가 주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나를 주님께 바침으로써 주님의 것이 됨이다.
내 자신이 주님이 것이 되지 않고는 구원이 불가능하다. 둘이 하나됨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자동적으로 하나됨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사랑의 하나됨이지 기계적인 하나됨은 하나님의 생명의 일에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진실이다. 당연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아중심은 더 이상 발 붙일 데가 없다. 영원히 그러하다. 왜냐면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둘의 하나됨을 이룸으로써 새 생명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과거 나 혼자 자아중심으로 살던 때와는 180도 다른 삶(일상생활)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를 혼동하여 일방적인 하나님의 의지의 측면만 강조하여 구원되지 않았으면서도 다시 말해 성령의 선물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구원받았노라고 자기 기만에 취해 있다.
단 1%라도 자기를 위하여 산다고 생각될 때 구원받은 것이 아니니 새로 시작할 일이다. 빙산 일각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1%가 아니라 사실은 100% 자기를 위함이다. 성령을 받은 사실이 없는 것이니 소위 "구원의 확신"을 버릴 일이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이후로는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살겠고 더 다시는 죽어도 자아중심이 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위해 살아(이것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 2:20) 것이고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2:21)는 말을 진정으로 할 수 있을 그 때 비로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임하시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구원받음이 되는 것이요 자기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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