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4일 목요일

구원은 "받았으나" "멸망한다"ㅡ이런 말은 성경에 없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여러분을 위하여 열심 내는 것은 여러분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다"(고후 11:2). 필자든 그 어느 누구든 3운법칙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말하며 여러분 앞에 나타난다 해도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맺어주려는 중매자의 역할뿐이다. 신부가 중매자와 살지 않는다. 중매해주고 떠날 뿐이다. 존 번얀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에서 전도자는 구원의 말씀만을 전달해주고 떠났다.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전도를 받은 자 자신의 몫이다. 정확히 말하면 중매를 받은 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언제나 핵심이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기름 부으심 즉 우리가 영원하신 선물로 받아 모신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 하였다(요일 2:20,27). 교과서는 성경이요 선생님은 성령이시다.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시다. 홀로가 아니라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계시어 아버지와 하나로 움직이시므로 예수님이라 하지 못하고 또는 아버지시라고도 못하고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통하시는 것이다.

고로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은 세상에 계실 때 말씀을 가르치시던 그 분이시니 곧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우신 "성령"이시다(요 16:13). 유명인에게 하나님의 말씀 해석을 의존하면 그가 아는 만큼밖에는 진리 가운데 인도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 의지하여 기도 중에 성경을 부지런히 상고한다면 보다 풍성한 모든 것으로도 인도하시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직접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가르친다고 하는 것이다(골 3:16). 한 사람만의 역할이 아니다. 누구나 누구에게든지 가르칠 수 있는 것임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물론 특별히 그런 "은사"(gift)를 받는 경우는 있다(롬 12:7). 그러나 이 경우 한 사람만을 지목하지 않았다. 교회 내에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이 얼마든지 다수일 수 있다. 가령 예언을 하는 은사라면 예언으로 교회를 섬기지 가르치는 일을 겸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경계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원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니 누구든지 누구에게나 교회로 모일 때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가르친다고 해서 반드시 강대상을 앞에 놓고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도 없다. 대화 중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머리로서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모든 교회의 주인이시다. 유일한 주인이시다. 각 사람을 통해서 즉 성령의 은사(선물)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는 사도들이 직접 듣고 보고 배운 사실에 대하여 전달자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성경으로 그 모든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 성령께서 친히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시는 시대이다. 누구든지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진리의 문임을 친히 약속하셨다. 하나님께 100을 구하면 그 구하고 믿은 대로 100을 주실 것이다. 단 30을 구하면 그 구한 대로 30을 주신다. 30을 구하는데 100을 주시는 법이 없다. 항상 나의 선택을 따라 되어지고 주실 수밖에 없는 것이 3위1체의 원리에 따른 구조다. 그래서 사랑의 주인 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랑은 한계를 모르고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주는 것이므로 자신을 주는 것 이상 가는 것은 없는 법. 그래서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이상으로 큰 사랑은 없다 하신 것이다. 

또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다. 바울, 베드로 사도 모두 "여러분이 이미 진리에 통달해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들로 다시 기억나게 하려고 힘쓴다"는 말을 함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하여 들은 바 말씀이 어느 새 "새어나갈"(히 2:1) 수 있음을 경고하고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하면 어찌 피하리요" 한 것이다. 등한히 하는 죄과는 크다. 몰라서가 아니다. 알면서도 다 알았다고 태무심으로 지낸 허물이다. 사랑은 항상 그 주안점이 오늘이다. 내일도 어제도 아니다. 마음은 자유 의지를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의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반성하고 회개하라"(계 2:5)는 것이 오늘날 성령의 끊임없는 경고이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말씀 전달자)로 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음"(마 7:22)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지 못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 이유는 오늘에 살지 않고 어제에 살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제가 아니다. 어제의 연장이라는 말은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이 있게 하는 기틀은 되어주었어도 오늘과 어제는 엄연히 별개다. 그래서 현재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19). 열매를 기다리는 단계에서는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것을 다 하신 다음이다. 즉 구원해주신 은혜의 토대 위에서 남은 것은 나의 몫인데 이 내 몫을 수행함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경우다. 그러므로 참으로 구원 받았는지의 여부는 그 열매로 알게 되는 것이다(:20).  

그러면 구원을 받았는데도 멸망이냐 한다면, 그런 말 자체가 있을 수 없다. 오늘 열매가 없어 멸망하는 것이지 어제 열매가 있었던 것으로는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멸망하는 자에게는, 과거 어느 때 한 번 구원을 받은 적이 있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다. 구원을 못받았기 때문에 멸망인 것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고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갈 5:6) 것이고 사랑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에 있다ㅡ이 답변으로 충분한 것이다. 어제 믿어 사랑으로 열매를 맺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구원을 받은 것이다. 오늘은 엄연히 오늘이다. 오늘 열매가 없으면 열매는 없는 것이다. 어제의 열매로 대신하거나 보충되지 않는다. 어제는 어제 믿어 열매 맺어 구원 얻은 것이고 오늘은 오늘 열매 맺어 구원 얻은 것이지 어제 구원 얻어 오늘 열매 없음으로 멸망했다(당장의 불의의 사고나 돌연사 등)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오늘 믿지 않음으로써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만 통할 뿐이다. 

오늘을 강조할 때는 당연히 <오늘의 삶>을 말한다. 구원은 삶에 있다. 믿음에 있지도 않고 은혜에 있지도 않다. 은혜로써 구원은 받았지만 은혜 자체가 구원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죽어주셨지만 내 스스로 믿지 않는 한 한낱 그림의 떡이니 무용지물이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믿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맺는 열매다. 즉 죽은 자로 있다가 산 자가 되어 새 생명 가운데 살기 시작하는 사랑(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사람에 대한)의 삶이다. '삶'이 없으면 '죽은 것'이지 별 수 있는가. 

사랑은 오늘일 뿐아니라 100%의 자기 부인이다. 자아중심의 100% 부정이다. 1%(이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판단일 수밖에 없지만)라도 자기를 위함이 있다고 느껴질 때 실상 그것은 이미 100% 자아중심이라는 증거다. 열매 맺는 것을 30배, 60배, 100배 등 차등을 두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나는 그러면 60 정도로 만족하리라" 한다면 그것은 열매 맺음에서는 0%다. 나로서는 100%를 지향하지만 그 결과가 30 혹은 60 또는 100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뿐이니 오해하지 말 것이다. 

"구원은 받았지만 멸망할 수 있다"는 말은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필연성에서 '사랑의 오늘의 삶'을 강조하여 경고하는 경우에는 혹 쓸 수 있을지 몰라도 기본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구원은 영생인즉 한 번 정하신 구원이 이랬다 저랬다 번복될 수 없는 까닭이다.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때 약속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무의미인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약속으로 구원 얻은 것이다. 약속을 했으면 약속을 그대로 지켜야 그 약속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때에는 약속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니, 그래서 영생을 성경은 "약속"이라 한 것이다. 내 쪽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 상대방이 지키라고 강요할 수 없는 것이 약속의 성격이다. 하나님 일방적으로 지키시는 영생의 약속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수 차례에 걸쳐 강조하심으로써 경고를 주신 것이다.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데 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의 본으로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거함과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하신 그대로다. 그 사랑 안에 거하면 즉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될 것"(롬 11:22)이라는 경고이신 것이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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