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30일 토요일

나는 모든 꿈이 이루어진 삶 속에서 그 서막(序幕)으로 피 땀 흘려 싸우며 일하는 중에 있노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2,3).

하나님의 뜻은 "기록한 말씀"(고전 4:6)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므로 항상 성경을 가까이하는 것이 필수이다. 성경 내용을 다 안다고 해서 절대로 성경을 덮어둘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부지런히 탐독함으로써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가 "너희가 진리에 (이미) 섰으나 항상 너희로 다시 기억나게 하려 한다"고 강조했듯이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도록 해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으로 마땅히 살고 로마서 7장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과거에로의 회귀 이상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받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감이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하고 바울이 책망한 것과 같다. "어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 뜻대로 행할까" 하는 것이, 아내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마음 쓰는 정도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고전 7:33,34) 마땅한 것. 

전자와 후자의 둘이 서로 충돌할 때를 가리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마 10:37) 경고하신 것이다. 말씀을 소홀히 하는 자는 하나님을 소홀히 하는 것이요 이는 자기 "구원을 (소홀히 하여) 등한히 여기는"(히 2:3) 것이 됨이니 "어찌 피하리요"(:3). 자기 "구원"을 소홀히 하는 자에게 닥치는 "피치 못할"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이와 같이 바울 사도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 생활의 잣대(尺度)를 세워 준 것이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이 표준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당장 자아중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즉각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새롭게 함"이다.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함"이요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함"이다. 

주님을 어떻게 해야 기쁘시게 해드릴까,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대로 행함일까 하고 기도 중에 항상 마음을 조리(調理)하고 정리하기를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 여러 번 강조했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일하기 위해 있고, 이 일을 방해하는 악령(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의 세력과 싸우는 오직 이 일만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외의 것으로써 "마음이 분산되어서는"(고전 7:33) 안되는 것. 오매 불망, 일심추월(一心秋月)로 이쪽으로만 생각을 맞추어 정리 정돈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萬法歸一 其一何處(만법귀일 기일하처). 모든 것이 하나로서 시작되었고 하나로서 유지 존속되며 그 하나로 역시 돌아가는 것은 분명한데, 그 하나가 어디인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처음 초자연계 몸으로 영생하는 인간이었으나 범죄함으로 이 지경이 되었은즉 요 모양으로 살 수는 도저히 없는 것. 이제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나타나셨고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때 가서야 우리가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될 것인즉 그 때 비로소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다. 어디서 왔는지가 분명하고 어디로 가는지가 명백하니 현재 나의 좌표가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일하고 싸우는 것 외에는 일체의 의미를 찾지 말 것이다.


유수한 한학자로서 "인생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죽도록 고민하던 중 성경을 읽다가 "나 위해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목에 이르러 크게 목 놓아 울고 그 아내와 함께 믿음에 들어 온 후 자기도 한 때 심각하게 물들었던 아편 중독자 치료를 겸한 전도 활동에 나선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 내외는 7년 동안이나 한 번도 옷 벗고 잔 적이 없었다. 자다가도 그 보살피는 영혼들을 위해 그리고 산적해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해 어느 때든지 일어나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이공(李公) 순신(舜臣)은 임진란 7년간 전투복장(戰服)으로 항상 지냈고 여잭(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 대목이 연상된다. 전쟁에서 오직 이기는 것이 목적이요 그 외에는 달리 생각이 있을 수 없음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병(軍兵)들인 것이다(딤후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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