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1일 일요일

이기는 경우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기 때문이니 살기를 바라고 전쟁에 임한 자로서 이기는 법은 없다






하나는 살고자 하여 문을 빠져 나가고
다른 하나는 죽고자 하여 문 안으로 들어온다.
무엇이 이런 차이가 나게 하는 것일까.
목숨이 아깝기는 마찬가지다.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는 현실 감각은 똑같다.
하나는 사지(死地)를 빠져 나가고 하나는 스스로 들어온다.

전쟁에 임해서 그러했거든 우리 모든 인류 역시 전쟁이다. 악령들과의 전쟁이다. 
악령이 이 세상을 휘어잡은 신(神)이니 전생의 양상은 뻔하다.
즉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즐기려는 자 사탄에게 굴종하여 패하고(눅 4:5-7)
사탄에게 절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뭉텅이로 안겨 주는 대가로서의 
삶의 고역, 환난, 죽음을 자초하는 자만이 그를 이기는 싸움이다. 
  
마지막 아담을 머리로 하여 우리는 뭉쳐진 군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군병"임을 사도 바울은 강조했고
"이기는 자"가 될 것을 마지막 아담께서는 명령하셨다.  
살고자 하는 자 죽교 죽고자 하는 자 살고 이긴다(死則生 生則死).
자연계에서의 육체적 전쟁에서나 초자연계에서의 영원 세계를 앞두고 벌이는 전쟁에서나
"사즉생 생즉사"의 원리와 원칙은 동일하다. 
다시 말해 싸우는 한 때의 죽음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서야 어찌 승리를 거두리요.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라고 하셨지 이 시한부 생명에서 호의호식 잘 살라고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죽는 것이, 함께 죽는 것이 옳다(義, 善) 하셨다.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구적으로 보존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는다고(요 12:25) 하셨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사는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 의식이다.
한 몸 체제하에서의 최대의 행복을 기약하는 삶의 유일한 방법이다.
이 이상 가는 삶의 지혜는 없다.
처음부터 이런 삶으로써 영생하게 하신 것이다.

한 몸 구조에서의 각자 자기 맡은 임무에 충실함이니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다 자기 구실이 있음이다.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적의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방어할 책무를 알았기에
백성과 함께 죽고자 하여 양산 군수 조영규는 동래성 북문 안으로 지체없이 들어 온 것이다.
반면에 경상우병사 이각은 그런 것 저런 것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자기 한 목숨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평소 그렇게 살아왔고 공동체 의식은 없었다. 
공동체 의식이 있으면 반드시 자기 소임에 충실함이 앞서므로 사리사욕을 챙길 여유가 없다.

우리 그리스도 사람의 공동체 의식은 머리되시는 마지막 아담과 함께 함이다.
그가 머리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이 되시고자 죄인(사형수)으로 그 죄의 대가를 우리 위해 받으셨으니
그리고 지금도 머리를 따라 고난 받는 교회의 고난을 함께 받으시니
몸은 머리와 함께 되기 위해서 받는 고난이요 
머리께서는 몸과 하나되심으로써 받으시는 죽음의 고난이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이다.

우리의 고난은 머리이신 마지막 아담께서 영광 중에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그 때에야 종결되는 것이고 그 때까지는 이 고난은 계속되는 것이다.
휴거라는 교리는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것이요 성경에는 없다. 장차 오는 고난으로부터 피하자는 뜻 외에는 없음이니 이 고난의 종식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심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고로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공중으로 들려 감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공중으로 들어 올려져 다시 세상에 오시는 영광의 주님을 뵙게 되는 순간에는 즉시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이 시작되는 때로서 세상에는 평화만 있고 고난은 물러간 다음이다. (적 그리스도의 "안전과 평안"(살전 5:3)은 거짓 구호이다.)

우리의 발걸음은 의당히 사지에 발을 내딛는, 날마다 그러한 발자취를 남기는
날마다 사형수로서의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눅 9:23),
"날마다 죽는"(고전 15:31) 생활인 것이다.
때문에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하고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생활 표준이다.
어떻게 하면 사는 것 같이 살아볼까 하는 데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어찌 하면 머리되시는 마지막 아담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하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이다(고전 5:9/7:32).
그를 사랑하고 그를 따라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전체를 위함으로 내가 위해지는 것뿐.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살고 로마서 7장에 살지 않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營問) 밖" 즉 세상 삶의 낙(樂) 밖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자" 한 그대로이니(히 13:13),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영문 밖에" 계시기 때문이다.


마귀와 그 일당이 거룩한 천사들과 일대 접전을 치르고 지상에 쫓겨난 것이 
1908년 6월 30일의 저 유명한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이다.
그 무렵 1873년 그리고 그 언저리에 어떤 이들은 미국 대륙에서 용을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용은 보이지 않는 영물 중 유일하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존재이니 저주 때문이다.
"흙을 먹게" 된 결과로서, 그것이 어떤 과정에 의해 그렇게 되는지 우리로서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 것은 없다.   
하늘의 전쟁이니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을 리 없고 몇 십년간 전개되었을 법하다. 

정신 없이 경황 없이 천사와 전쟁에 시달리다보니 자기 모습을 감추는 일에 소홀히 할 수도 있는 일.
하늘에서도 물론이고 이 지상 공중에서도 광범위하게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을 수 있다.
이러한 경황 없는 때는 다음 1908년 즉 용이 지상으로 내쫓길 당시에도 있었다(시베리아 퉁구스카 사건).
오랜 세월이 흘렀고 당시 전세계가 여기에 통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의 목격자의 목격담만 전해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은 사탄 당자의 손아귀에 모든 인류가 장악되어 있기 때문.
그래서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한 것이나 영구적으로는 그렇게 못하는 법.
수 십년이 지나서야 겨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나 이미 그 때는 중요 흔적은 사라진 뒤였다. 

용이 그 이전에 부득불 인간의 눈에 어쩌다 띄었을 때에는 "해룡(海龍)"이니 하여 우매한 민중을 속일 수가 있었지만
지금이야 어디 그런가. 정체가 여실히 드러나게 되어 있지만
그래도 "UFO"의 한 형태 즉 "UFO의 모선(母船)"이라고 얼버무리면 된다.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아래 NASA 촬영의 용의 사진이 사실상 압권이다. 
이 NASA 사진을 보고 방금 소개한 1873년의 용의 목격담이 댓글로 올려진 것이다.  
그 영문 댓글과 NASA 사진을 다시 올린다. 

NASA가 이 사진에 잡힌 것의 정체를 용이라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전연 문외한인 그들이다.
이 사진을 처음 공개한 사람도 "뱀 같은 형태의 UFO"라고만 하고 인터넷에 올린 것이다.
어쨌든 사상 처음으로 인류는 일대 수확을 한 셈이니 이 세상 신(神) 사탄을 사진에 담아놓을 수 있었기 때문. 
마지막 아담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는 지금 이 악한 자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영물로서 사진에 찍힌 것으로는 이 NASA 사진과
악령의 신체의 극소 부분에 해당하기는 하나 필자가 찍은 DPA만이 유일한 것이다.  
악령(영물)은 보이지 않고 형체가 없는 초자연계 육체가 기본이나
얼마든지 자연계 육체와 같은 성질로 변환하는 경우가 있어
DPA 발자국이라는 것은 그런 자연계 신체로 변모한 다음의 발자국 즉 그런 육체의 형적이다.
이렇게 발자국을 낼 수 있을 정도의 자연계 형상으로 변화한 형체의 극소 부분이 찍힌 것이다. 
왜 이와 같은 발자국을 남기고 또 그런 자연계 육체로서의 형태를 가끔 나타내는지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한 우리가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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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아메리까 인디안의 목격담이고
아래는 미국의 한 농부의 증언을 당시 신문에 소개한 것을 옮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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