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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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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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리스도 의식(意識) 생활 운동"(Christ-conscious Life Movement)을 강조합니다. "Christian life"를 "Christ-conscious life"로 대체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오늘날 "Christian"은 천주교도 개신교도 기타 이단 종교도 공통으로 쓰는 이름이므로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그리스도 의식' 운동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일상 생활을 우리가 마땅히 영위해야 한다는 취지이니 이를 강조하는 의미의 운동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영욕(榮辱)을 함께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리스도 의식은 바로 자기 부인을 말합니다. 고로 '자기 부인 운동'이라 해도 하자는 없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 그리스도 의식 곧 자기 부인이 철저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이 이 기본 뜻에서 벗어나고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기 부인 즉 그리스도 의식 운동을 되살아나게 하고 회복시키고 부흥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 부흥운동, '자기 부인' 되찾기 운동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지금은 적(敵) 그리스도가 출현하여 성경의 그리스도를 말살하려는 책략을 쓰기 시작하는 때이므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그리스도 중심[나 중심이 아닌]의 삶을 힘써 생활하는 자세를 항상 견지해야 되겠다는 취지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라 한 대로, "이제는 재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한 대로, "산 자로서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고후 5:15]"이라 한 대로 "예수님께서 우리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라"[살전 5:10] 한 대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삶으로 일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단 한 분으로서의 사람으로서 마치 그 사람과만 상대해서 존재하시는 것처럼 함께 사시는 분입니다.

필요할 때에 함께 계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영원토록 짝의 개념으로 나와 함께 생활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무시하기 쉽고 간과하기 쉬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그리스도 의식 생활 운동[CCLM]입니다. 나와 함께 사시는 나의 단짝이신데도 엉뚱한 다른 사람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현재 위치는 신바람이 나는 삶입니다. 주님께서도 "아이들처럼 껑충껑충 뛰라"[to leap for joy]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눅 6:22,23] 하셨습니다. 이런 상징성이 돋보이는 명칭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상(賞)은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린다는 데에 그 특성이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이가 없는 까닭입니다[롬 14:7-9/고후 5:15]. 그러므로 이런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을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 이웃은 그런 상을 타고 나는 못탔다고 하여 마음에 켕기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됨이라 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한 몸입니다. 한 몸은 함께 함이니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게"[고전 12:26] 됩니다.

일심추월(一心秋月) 사면춘풍(四面春風) 혹은 사면춘풍 일심추월, 아무래도 좋습니다. 여기 이 여덟 마디 한자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마음 심(心)자입니다. 그래서 '사면춘풍'이라 하면 사방 천지에 봄바람이 살랑거린다는 뜻이 되지만 ‘심’자가 있음으로써 그 사람의 인격 자체가 마치 봄바람이 흩날리는 것과 같이 온후하다는 뜻으로 풀이가 됩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항상 사랑[仁德]의 사람이지만 그 마음의 높은 절개, 확고한 신념은 청명한 밤 하늘 휘영청 홀로 떠 있는 가을 보름달을 닮은 교교(皎皎)함 그리고 만유 위에 우뚝 선 고고(孤高)함을 드러내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이 글은, 올곧은 마음은 독야(獨也) 청청하나 모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한결같은 봄바람의 훈훈함이 감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비록 겉으로는 만인을 온화함으로 대하여 한결같은 친화력이 있으나 그 기개만은 항상 청청(靑靑)하여 충성심과 신념은 변함이 없다는 뜻도 되니 어느 쪽으로 읽든 좋은 것입니다. 또 이 ‘사면춘풍 일심추월’은 미워하고 사랑함이 분명함을 가리킴도 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죄(罪) 곧 불의(不義), 불법(不法)은 미워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바 사람 사는 올바른 도리는 사랑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도록 미워함입니다. 원수라도 사랑하지만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 생명을 미워함[요 12:25]에서는 철저합니다. 모든 불법, 불의는 자기 자신을 위함 곧 이기심, 개인주의에서 옵니다. 자기중심, 자기 위주, 자기 본위에서는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할 때는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 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데에서 인격은 나타납니다.  

정밀한 기계와 같은 엄밀한 법칙 적용이 인간 생애에 나타나 있는 것이 '트리니 호모[3運법칙]'입니다.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또 왜 살며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이런 생각이 가히 사람의 사람됨이라 하겠습니다. 이 글은 대충 이런 뜻을 바탕으로 하여 쓴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 사람다운 삶이 정작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람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며, 현재 있는 곳은 어디며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 세 가지 큰 묶음으로 나누어, 되도록 간결하게 설명해보려 합니다.

1. 사람은 어디서 왔나
2. 인생은 어디로 가나
3. 나의 현재 좌표(座標)는 어디인가

 

1. 사람은 어디서 왔나

내가 어디서 왔나 하면 부모가 나를 낳아서 났고 부모는 그 부모에게서 났고 이렇게 자꾸 거슬러 올라가면 한 조상으로서의 부모 한 쌍에 마침내 이릅니다. 그러면 그 인간 부모는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인데 남녀 한 쌍으로 동시에 생겨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을 낳을 수 있고 오늘의 내가 탄생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왜 반드시 쌍으로 생겨나야 했느냐, 이유는 자식을 낳기 위함인데 첫 사람이 처음부터 그렇게 쌍으로 생겨나되 한 순간에 둘이 한꺼번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가 생기고 나머지 하나가 나중에 생겨나야 합니다.

이유는 둘이 한꺼번에 똑같이 생겨나면 둘은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각기 다른 개체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그 둘이 아무리 합쳐도 자기와 같은 자식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자기네와 같은 자식을 생산하려면 그 둘이 애초 한 본질에서 나와야 합니다. 즉 둘이 똑같아야 자기네와 같은 자식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리 되자면 그 애초의 남녀는 어느 쪽이든 먼저 생겨난 것이 있고 그 다음에 그 나머지가 그 먼저 생긴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순서를 따라야 합니다. 다시 말해 대칭성의 이치로 생겨나야 합니다.

대칭성의 법칙

점이나 선, 면 또는 이것들로 된 도형이 어떤 기준되는 점, 선, 면을 중심으로 서로 맞서는 자리에 놓이는 경우 이것을 대칭이라 합니다. 미적 형식 원리의 하나로 수직 축을 중심한 좌우 두 부분이 서로 상응하는 관계에 있을 때 이를 대칭이라 합니다. 이는 수학적인 설명이고 상식적으로 말해 봅시다. 대칭형을 만들 때 먼저 기본형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기본형을 기준으로 해서 그와 대칭이 되는 것을 만듭니다. 신발이나 양말을 만들 때 이런 이치입니다.

그래서 대칭형으로는 반드시 먼저 있고 나중 있는 구별 또는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똑같다고 해서 아주 똑같은 것이 아니라 생성(生成)상 먼저 있고 나중 있는 차이에 따라 약간 다릅니다. 단 일분이라도 먼저 있었다면 나머지는 그보다 일분 늦게 나왔으니 먼저 있는 것이 크고 나중 생긴 것이 작습니다. 먼저 있는 것이 나중 생긴 것을 말하자면 “낳은” 것입니다. 자기가 있음으로써 다른 것 즉 자기의 닮은꼴이 생겨난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나중 생긴 것은 먼저 생긴 것을 따르게 마련입니다. 왜냐면 본질상 같은 것이므로 또 그 먼저 있던 것으로 인하여 작은 것이 생겨난 까닭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대칭성의 원리에서는 둘은 동등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작은 대소(大小) 관계를 이루고, 작은 것은 큰 것을 따르게 마련이라 주종(主從) 관계를 이룹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을 인하여 났기 때문에 인(因)과 과(果)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대칭성 원리에서의 불변의 법칙입니다.

자연 만물 만상(萬象) 그 어느 것 하나도 짝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대칭형의 원리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별도 제 짝이 있다고 합니다. ‘깊다’는 것은 ‘얕다’는 대칭 개념을 아울러 떠올려야 그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게 됩니다. 제대로의 의미 구실을 합니다. 자기 홀로로써는 아무 의미도 지닐 수 없습니다. 반드시 둘이 '함께' 작용해야 하는 '함께'가 특징입니다. 이런 것이 대칭성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했듯이 반드시 거기에는 대소, 주종, 인과의 개념이 개재됩니다.

남녀는 대칭 개념에서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소위 "양성 평등"의 ‘평등’은 따라서 과학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21세기 첨단 과학 시대에 이런 비과학적 사고방식이 팽배하는 것은 물질문명은 날로 진보하나 정신문화는 오히려 역비례로 퇴보한다는 증거입니다. 오늘과 내일 하루가 다르게 속도를 더해 가는 과학 문명 발달은 인류가 진보 발전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 삶이 편해지는 것 같아도 실상은 아닙니다.

그 단적인 증거가 2011년 3월 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첨단 과학 지식 발달의 총아 중 하나인 원자력발전소로 인한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생활을 축복하셔서 주시는 것이 아니니, 우리가 현재 자연계에 속한 어설픈 육체에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굉장한 것처럼 느껴져서 그렇지,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으면 이 모든 소위 문명의 이기(利器)들은 어린애 장난감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지금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다는 것이 비극적 현실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런 과학 발달은 오로지 목적이 있으니 주님 오시기 전 “멸망의 아들”[살후 3:2]이 그리스도로 참칭(僭稱)하고 나타날 것인데 그 “악한 자”가 나타나 보다 효과적이게 세계 통일을 하기 위한 수단과 방편의 목적뿐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마지막 때” 예언이 있는 것입니다. 남녀 평등의 비과학적 주장도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려면 아무래도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성경을 말살 또는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을 시도해야 하겠기에 남자에게서 여자가 창조된 사실과 그와 관련된 일련의 사실들을 부정하기 위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에 의한 것입니다.

그만큼 이 때가 다니엘의 예언 그대로 마지막 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양성 평등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나,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 사건으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하늘에서 추방된 이후 부쩍 성해지고 노도처럼 마치 ‘쓰나미’와 같이 급격하게 변모해가는 세태 중의 한 특징이 되어 있습니다. 악령이 조종하고 있지 않다면 이와 같이 범세계적으로 국가적인 법률로 이렇게 신속하게 양성 평등화 작업이 진척되어지고 보장되어질 리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 상식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자가 먼저든 여자가 먼저든 반드시 둘 중 하나가 먼저 생겨나고 나중에 나머지 하나가 생겨났기에 그렇습니다. 고로 평등일 수 없고 대소, 주종, 인과 관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이치를 따라 하는 주장이지 남성우월주의에서 나오는 발상이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은 양성 평등을 반박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얘기일 뿐입니다.

무릇 형상은 ‘겉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을 총칭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또한 “말씀(言語)”으로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상의 실체 또는 본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 형상 또는 형체가 실체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피조물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영(靈)으로서의 하나님이시만 그 ‘형상’으로서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형상으로 창조되신 아들께서 역시 형상으로서의 피조물을 만드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이 어찌 같은 본질이 되느냐 했는데 이렇게 ‘형상’이라는 의미에서는 본질이 같습니다. 아버지의 형상이신 아들께서 만물을 지으셨으니 그러므로 형상으로서의 아들에 의해 창조된 모든 것이 형상을 갖추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피조물로서의 특징은 제각기 자기 고유의 형상을 갖추었다는데 있습니다. 아버지의 형상은 아들이시고 아들의 형상은 그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실체로서의 아들께서는 영이시니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아버지 또한 영이십니다. 그러나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관계로 실체와 형상은 하나로서의 불가분성이 그 특징이므로 아들을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요 만물을 보는 것은 그 지으신 하나님으로서의 아들을 보는 것입니다. 동시에 아버지를 또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오묘함과 신기함 그리고 웅장함 또한 아름다움 등은 모두 실체로서의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요 대변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이는 설명이 필요치 않은 순수하게 상식 차원이기 때문에 성경은 단도직입(單刀直入)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들에게 보이셨음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으므로 저들이 핑계치 못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져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롬 1:18-21] 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한마디로 잘라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핑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충분히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알게 되어 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여유를 둘 것 없이 지체할 것도 없이 유예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진노"가 곧장 임한다고 했습니다. 무신론은 '핑계를 위한 핑계'일 뿐임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신론을 증명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 지적대로 하면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

왜 ‘어머니’가 아니고 ‘아버지’냐[혹은 ‘딸’이 아니고 ‘아들’이냐] 하면, 남녀 혹은 암수 성별은 피조물에 한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이라고 모두 그런 것은 아니고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만 한합니다. 이 자연계와 대칭되는 영계(靈界)에 속한 피조물들은 그런 성별이 없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양성(兩性)은 대대로 그리고 다량으로 자기 종류를 생산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렇게 양산(量産)될 때는 하나님의 직접 손길이 필요 없고 애초 하나님께서 설정해 두신 기계적 방법을 따르면 되는 것뿐입니다.

(같은 다량 생산이라도 인간만은 예외입니다. 왜냐면 인간은 이중 구조로서 육체만 아니라 영혼이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영혼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으로서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있다는 것은 자기의 고유성[우주에 하나밖에 없는]을 지닌다는 뜻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영물(靈物, 에덴낙원에서 창조된 거룩한 천사나 악령]들은 영적 존재로서 처음부터 그런 독자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자기와 같은 닮은꼴을 생산할 수 있는 목적의 성별(性別)이 없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와 “딸”이라는 표현은 없고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되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앞에서 사람으로 치면 남자든 여자든 그리고 동식물로 치면 암컷이든 수컷이든 반드시 한꺼번에 동시에 생기지 않고 먼저 그 중 하나가 [대표적으로] 생겨나고 그것을 기준해서 나머지 성(性)이 대칭적으로 순서를 따라 생겨났다 했는데, 바로 남성 즉 수컷이 먼저 생겨난 사실을 성경이 밝힘으로써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기 때문이라 말하게 됩니다.

즉 근본이 남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 대표성을 따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가부장제가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남성우월주의가 아니라 순리를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자연계와 대칭인 영계의 생명체에는 양성 구별이 없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에 대(代)를 이어 자기 종류를 존속시켜야 할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서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영계에 속한 생명체는 그러하나,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는 시한부 생명이라 대대로 자기 자신을 이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자기 증식을 목적으로 그 온전한 것을 양성으로 나누어 구별하게 되는 불가피성에서 그 각각[암수, 雌雄, 남녀]은 온전하지 못한 것이 되었고, 둘이 결합해서야만 그 애초의 온전함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고로 사람[아담]도 애초에는 온전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여자가 생겨야 할 필요성을 따라 남녀 양성으로 구별되면서 첫 사람 아담은 남자로 그 나머지 사람[아담으로부터 갈래 지어져 나온]은 여자로 구분되어진 것입니다.

그런즉 바로 이 근본을 따라 애초의 온전한 사람 아담[여자가 생기기 전의]을 기준하여 말하다보니까 아담이 현재는 남성이 되어 있으므로 부득불 “아버지” 또는 “아들”이라 표현되는 것뿐입니다. 왜냐면 '부모자식'지간임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데 그렇게 표현하자면 인간이 아는 대로의 언어를 따라야 하는 것이고 인간은 남자 아니면 여자이므로, 그래서 “어머니”와 “아들” 혹은 “어머니”와 “딸”이라 할 수도 없고 애초에 창조된 순서대로 그리고 그 '온전한 애초의 사람'의 성(性)을 따라 남성으로 표현하여 "아버지"라 하고 또한 일관성 있게 역시 "아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일 먼저 창조된 사람[아담]은 성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만 만드셨지 다른 사람을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즉 처음부터 성별이 있는 짝으로 둘을 만드시지 않은 것입니다. 한참 뒤 즉 아담에게 영혼도 조성되고 따라서 자연계와 상칭(相稱, 대칭, 대립 개념으로서의)이 되는 영계(靈界)로서의 에덴낙원도 창설되고 또 "사람이 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여 그 에덴낙원에 각종 동물들이 창조된 이후에야, 여자가 생겼고 그 때 비로소 남자로서의 신체적 구조가 형성되어져 남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용어와는 관계없이 품성 면으로 말하면[인간적으로 표현해서], 아버지니 아들이니 하여 남성으로 대표되어 호칭되어도 얼마든지 어머니 혹은 딸 등 여성으로서의 품성도 함께 갖추는 ‘온전한’ 의미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아담"을 먼저 만드시고 여자를 나중에 만드시되 "아담"을 소재(素材)로 하여 즉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것으로써 여자를 지으셨다 하고 있습니다.

갈빗대로써 어떻게 사람을 만드시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사요 그 능력에 속하는 일로서 우리가 관여하고 관심을 가질 일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근본인 "아담"을 기준하여 그 "아담"이 나중에 남자가 되고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이 근원을 따라 "아담"을 기준하여 설명하자니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를 빌리게 된 내력임을 거듭 밝힙니다. 남녀라는 양성 구조에서도 보듯이 만물은 대칭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만물이 대칭성 원리로 되어 있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이치로써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물을 지으셨다는 것이 확인되고 그 증거가 됩니다. 원래 하나님 한 분으로 계시다가 자기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여 ‘또 하나의 자기’를 ‘자기 형상’으로서 만드시니 곧 아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으로 치면, "낳으신" 것입니다. 무갈 제국의 영걸 악발[Akbar]은 하나님인데 어떻게 인간처럼 자식을 낳을 수 있느냐 했다지만 창조하신 것 즉 만드신 것을 그렇게 낳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와는 다른 무엇을 만드셨다면 "창조했다"는 말로써도 충분하지만 마치 인간이 자식을 낳아 자기의 닮은꼴을 생산하듯이 하나님도 자기의 닮은꼴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즉 또 한 분의 하나님을 만드셨으므로 이를 "낳으셨다"는 말로 나타내야 적절합니다. 만일 그 만드신 존재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낳았다"는 말이 필요 없겠지만, 똑같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리고 이 나중에 존재하게 되신 하나님께서 만유를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 외아들)"라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원리 측면에서 설명하면, 애초 홀로 계시던 모습을 ‘병’이라 하면 이제는 둘로 나누어져 ‘갑’과 ‘을’로 계신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임을 앞에서 이미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자기 형상으로 아들을 만드셨으므로 형상과 본체는 항상 불가분이라 하나로서 존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로 존재하시는 것을 가리켜 또한 ‘병’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들께서 창조주이시나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가능하게 됩니다.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대칭 구조라는 것은, 원래 하나로 존재했기 때문에 현재는 비록 그 하나가 둘로 되어 존재하나 애초의 그 하나로서의 속성임에는 변함이 없고 따라서 항상 둘이 하나로서 존재한다는 그 뜻입니다. 하나님의 경우 물론 기계적인 불가분은 아닙니다. 인격성을 지닌 둘 사이의 관계이시므로 자진 자발적인 사랑의 관계로 하나 되심입니다. 이 하나 됨을 좀 더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나 항상 하나로 존재하시므로 아들의 하시는 일이 곧 아버지의 하시는 일이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또한 아들의 하시는 일이 됩니다.

이는 앞에서의 설명대로 본체와 형상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본체’와 ‘형상’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불가분의 하나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들께서 만유를 창조하셨지만 아들 혼자가 아니라 항상 아버지와 '함께'입니다. 고로 아버지[실체]께서 아들[형체, 형상]로 말미암아 만유를 창조하셨다는 표현이 가능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실체 없는 형상이 있을 수 없고 형상 없이 실체가 있을 수 없음과 같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가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우리말에는 영어 parents에 해당되는 것이 부모, 양친으로서 이 경우 모두 복수이나 아버지 또는 어머니로서 단수로 지칭할 경우 "어버이"라는 말이 있으니(자주 사용하지는 않으나), "아버지" 대신에 "어버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어버이"라고 하면 단수이면서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동시에 의미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성경[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창조하신 이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의 정점(頂點)으로서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제 인간 이상으로 자연계에 속한 피조물은 더 만드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 창조로써 그 최고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의 창조에 관한 한 인간[아담] 창조로써 종결된 것이니 최고의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 자연계와 대칭되는 영계를 만드실 차례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그 기준점, 즉 상응하는 둘[두 세계]의 중심축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인간에 먼저 영혼을 만들어 넣으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영적(靈的)인 것의 시발점입니다. 창세기의 기록대로 하면 그 첫 사람의 코에 하나님께서 친히 숨[the breath]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를 생기(生氣, the breath of life)라 표현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므로 우리와 같은 육체가 있으실 리 없습니다. 숨을 내쉬셨다는 것은 육체로서의 인간을 기준해서 나타낸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발원(發源)된 것이므로 생명의 숨[生氣]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는 어디까지나 형상입니다. 영혼은 그 육체의 실체입니다. 아버지의 형상이신 아들께서 피조물을 만드셨으므로 피조물은 모두 형상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이시고 아버지의 형상이신 아들께서 지으신 피조물 곧 모든 ‘형상’들은 아들의 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상[아버지의]이신 아들께서 지으시니 모두가 형상 일색(一色)으로서, 그래서 그들 ‘형상’의 ‘실체’는 ‘형상’이 먼저 만들어진 다음의 순서가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영혼이 조성된 것입니다. 이 ‘형상’의 세계가 바로 자연계요 그 ‘실체’의 세계가 영계(靈界)인 셈입니다. 자연계라는 것은 이 지구를 비롯한 우주 천체의 모든 물질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형상]의 실체는 영계인 에덴낙원의 각종 짐승들로서 곧 영물(靈物)들입니다[창 2:19].

자연계와 대칭되는 세계로서 영계가 만들어지고 그 영계에서 당시 자연계의 생물과 대칭되는 영물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와 순서를 따름입니다. 그래서 첫째 영물들로서 성경에 나오는 대로 "그룹[cherub]"이나 "스랍[seraph]"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은 모두 날개를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이 날개는 그들 모두가 영물들인지라 이 자연계의 동물인 새처럼 날기 위한 목적이 아닌 다른 용도입니다.

그리고 이들 영물들의 존재는 그 이전에 자연계[현재의 자연계와는 별도인]가 생겨났고 그 대칭으로 생긴 영계의 생물체임이 드러납니다. 이들 영물들은 그들의 상징이 되고 대칭을 이루고 ‘형상’이 되어 있던 당시 자연계 생물[동물]들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창조된 “그룹”들 중의 하나가 교만해져서 범죄(犯罪)하게 됩니다. 그 범죄자는 형벌에 처해지고 그 서슬에 당시의 피조물 세계[자연계] 역시 와해됩니다.

영물 하나가 범죄했는데 왜 당시의 자연계까지 파괴되었는지 그 사유는 성경이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상 당시의 세계에 대해서는 성경이 일절 아무 내용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구원과 관계되는 것만 말하고 나머지는 생략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인생 구원이 시급한 것이지 그런 지식은 앞으로 영원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될 터이므로 지금 꼭 알 필요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들 "스랍"과 "그룹"들은 구약성경에도 등장하고 계시록에서도 나타납니다. “네 짐승과 24장로”[계 4:4,6]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욥은 천지 창조 때에 이들을 가리켜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KJV], all the angels(NIV)]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다”[욥 38:7] 했습니다. 이들 그룹 중에 한 교만한 자가 생겨 타락하게 되는데 “아침의 아들 계명성(啓明星)”[사 14:12]이라고 했습니다.

6일 창조 이전의 영적 피조물 즉 영물들을 가리켜 “아침의 아들[son of the morning]”들이라 하고 “새벽 별”들이라 하고 또 이 “계명성”은 영역으로는 “'Lucifer(Day Star)'-KJV,NKJV, 'morning star, son of the dawn'-NIV”이라 되어 있습니다. 결국 같은 본질의 존재들이라는 뜻입니다. 어찌했거나 이미 낮[day], 새벽[dawn], 아침[morning]이라는 의미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 등으로 보아 6일 창조 이전의 세계의 낮과 밤 그리고 아침과 저녁을 기준하여 6일 창조[창세기에 기록된 대로]의 날 수가 세어진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을 법합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6일 창조에서 빛과 어두움으로 나누어져 주야와 아침 저녁으로 구분되어질 때도 어두움은 처음부터 있던 어두움이요 빛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비로소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둘의 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가 이 대목을 해석하는 실마리가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런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끙끙 댈 필요는 없으니 앞에서 지적한 대로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땅”만 해도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셨다”[욥 38:4/시 104:5] 했고 “그 도량[measurements, dimensions]을 정하였었고 그 준승[measuring line]을 그 위에 띄웠었고 그 주초[footings, foundations]를 세웠었고 그 모퉁이 돌[cornerstone]을 놓았었다”[욥 38:5,6] 했지만, 6일 창조에서는 일절 이 “땅”의 창조와 함께 물의 창조에 관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그 이전에 물과 땅은 창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그런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형체]에 대한 실체가 바로 "그룹" 및 "스랍"과 같은 영물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땅의 기초를 놓으실"[:4] 때 "하나님의 아들들", 또는 "새벽 별들"이 "노래하고 기뻐하였다"[:7] 한 것은 땅을 창조하실 때 이미 그 영물들이 존재해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 땅이 창조되면서 역시 영물들도 함께 창조되었음을 말함이니 둘은 대칭 개념에서 하나로 묶어 표현되기 때문이요 시간적 격차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격차는 무의미한 것이니 왜냐면 둘은 불가분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자연계가 와해됨으로써 그 결과 창세기 제1장이 시작됩니다. 이전의 자연계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다는 것은 6일 창조 이전에 느닷없이 "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을 창조하셨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나중에 물로부터 뭍[ground]이 나왔다는 말이 있고 땅 역시 창조하셨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흑암이라면 물은 왜 처음부터 존재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설명이 성경에서 생략되고 있음을 우리는 이로써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의 진실성을 성경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자체 증명은 성경 곳곳에 산재해 있으나 성경의 첫머리에서부터 이미 이와 같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창세기부터 지어낸 것이라면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꾸며 낼 리 없습니다. 모든 거짓말과 속임수는 억지로 그 내용을 믿도록 만드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억지로 믿도록 하려는 흔적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 점은 곧 설명하겠으나 지금 이 창세기에서도 이왕 거짓말을 할 바에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말을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즉 그냥 땅과 물을 만드셨다든가 아니면 땅은 비어 있다 할 바에야 물에 대한 언급도 처음부터 꺼내지 말아야 하고 꺼낼 바에야 물부터 먼저 만드셨다 해야 제격입니다. 느닷없이 물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천지만물 곧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니 소위 “물의 신(水神)”으로서 국한될 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물부터 존재했는지 설명부터 생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말은 [거짓말이라 가정한다면] 하늘 아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이 아니라는 증명입니다. 이 글에서의 모든 설명은 처음부터 성경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성경의 진실성부터 먼저 말하는 것이 순서라 생각되어 이 점을 지적합니다. 성경은 절대로 억지로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 증거로서 하나만 우선 예로 들면, 예수님의 말씀에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겠다”[눅 9:26] 경고하신 대목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처음부터 자기 말을 억지로 믿게 하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를 믿도록 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면[거짓말을 하는 목적이 그런 강제에 있으므로] 절대로 이런 나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라도 이런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담대하라”[요 16:33] 하셨으므로 제자들의 사기를 북돋우어 주기 위해서라도 이런 말씀을 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끝까지 부끄러워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경고가 있는 것이니, 이는 이 세상에서는 끝까지 믿는 이들이 다수가 아닌 소수로서 약하고 핍박 받고 탄압 받고 따돌림 받고 대접 받지 못하게 되어 있음을 미리 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말씀은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고 하나님의 말씀이심이 분명하니 온 신경을 집중시켜 들을 일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시고는 이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난 말이거나 지어내고 꾸며댄 말이라면 간이 작고 마음이 졸여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니 이를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말은 "미리 말해 두는 것이므로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천하에 없는 거짓말쟁이라도 이런 말은 못하는 법입니다. 왜냐면 그의 거짓말의 유일한 목적은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든 자기 거짓말을 믿게 만드는데 있는 까닭입니다. 그 수단의 하나로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당할 것이나 담대하라”[요 16:33]는 뜻입니다. 이는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한은 그와 같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므로 불 난 데에다 부채질하는 격입니다. "그런 각오를 단단히 하고 믿으라"는 것이니 거짓말쟁이는 천하 없어도 이런 말을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한 때만 그러하다면 이런 말씀을 하실 리 없습니다. 그러면 반문하기를 "오늘날 혹은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과연 그런가?' 할 것입니다. 이는 나중에 설명을 하기로 합니다.

성경은 이상 사실을 강조하여, “너희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으며 능한 자가 많지 않으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 폐하려 하신다”[고전 1:26-28]고도 했습니다.

이로써도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의 거대 세력화와는 완전히 결별한 것이고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을 불사한다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식으로 말하겠습니까. 최대한으로 꾸미고 다듬어 듣기 좋고 구미에 당기는 말만 하지 이런 정나미 떨어지는 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에수님을 믿으면 영생하게 된다고 알려져 있으나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든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듣자 많은 제자가 물러가고 다시는 그를 따르지 않았다고 성경은 곧이곧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이제껏 따르던 사람들도 여차하면 스스로 물러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일부가 아니라 "다수"라고 성경은 명시해놓고 있습니다. 떠나갈 사람은 마음대로 떠나가고 남아 있으려면 남아 있으라는 뜻입니다. 억지로 붙들려고 하지 않겠고 억지로 모으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절대로 이 경우,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된 말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사람의 말일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거짓말하는 것은 억지로라도 사람을 모으는데 있고 믿도록 만드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반대입니다. 이런 성경에서 거짓이나 속임수를 찾으려는 것은 바다에 빠진 바늘을 찾으려는 것과 같은 무의미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은 길도 좁고 문도 작아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이들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라 하셨습니다. 또 성경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 눈과 귀를 어둡게 하셔서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막으시는 인생들이 있다" 했으니 즉 구원 얻지 못하게 막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자기의 악함을 끝내 뉘우치지 않는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악인들은 제외시킨다는 뜻이니 누가 과연 "나는 악인이나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다기에 그런 사람들만을 상대한다는 '거짓말'을 할 거짓말쟁이가 있으랴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도 없고 악인도 아니오" 하고 나설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이 할 터인데 그런 극소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속이려고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이 차라리 거짓말쟁이 자신이 그 스스로 "나는 하나님이라" 하는 편이 더 수월한 거짓말일 것입니다. 인생들의 죄악 중에 성경은 거짓말하는 것을 그런 죄목(罪目) 즉 악행(惡行) 중의 하나로 칩니다[계 21:8/딤전 1:10/골 3:9]. 인간[아담]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도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에 넘어갔던 탓입니다.

그래서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계 22:15]. 그러므로 거짓말을 경고하면서 스스로 거짓말을 지어낼 리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억지로 믿게 하려는 대목은 성경에 단 한 구석도 없습니다. 오히려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려드는 것을 이상 말씀에서 보듯이 명백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런 데에서는 당연히 폭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믿도록 하는 일은 전적으로 배제됩니다.

따라서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포교(布敎) 활동을 하는 것은 절대로 금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강제와 간섭이 되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들 앞에 나아가 진리를 설파하는 것은 그 개인의 구원을 바라는 뜻이지, 그 권력을 탐하여 그 권력에 의지하여 포교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되면 강압이 되는 까닭입니다. 물론 세력 있는 자들이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 영향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널리 선전되는 것을 마다할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파가 목적이고 누구든지 듣고 믿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남아 있어 고난 받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제로 믿게 하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차원부터 완전히 다릅니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아무나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요 6:65] 하신 대로 오히려 그런 부적합한 이들은 그리스도께 오지 못하도록 막으실 정도입니다. "믿기만 하면 은혜로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과,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 하신 말씀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자신을 그렇게 차별화를 시킵니다. 다시 말해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철저히 외면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위에 말한 "부적합한" 사람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기 행동을 뉘우치고 이제 다시는 과거와 같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관련된 약속은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있게 마련이니 하나님 앞에서 하는 약속입니다. 

쌍방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일로서 반드시 상대방이 있는 법이니 그 상대방이 원치 않는 것을 약속해 주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상대방은 그와 같이 자기에게 해 주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 바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거기 따라서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생의 약속은 아주 확실한 쌍방 약속이니, 우리의 회개가 바로 우리가 마땅히 하게 되어 있는 그런 약속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향후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 약속입니다[고후 5:15/롬 14:7-9].

이런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고 바로 이런 경우 부적합하고 악인이라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즉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는" 경우입니다. 거짓말과 속임수의 속성이 억지로 믿게 하는 데에 있을진대, 억지로 믿게 하는 데에는 국가 권력을 휘어잡아 그 힘을 빌어 하는 것처럼 손쉬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짓말하고 속여 성경을 꾸며대는 그런 따위 얕은 수작보다는 세상에서 거대 세력화하고 정치 세력화하는 당당한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더 수월합니다.

즉 성경이 거짓말이요 속임수라면 반드시 세상에서 권력화, 세력화를 꾀했을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극력 금기시하는 데에서는, 성경 자체를 억지로 꾸미고 지어내고 자시고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최초로 전할 때 교회의 기둥 같이 여기는 12사도 중의 핵심 인물이 셋인데 그 중 하나[야고보]가 세상 권력의 불의한 칼날에 희생되어도 일절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돌에 무참히 맞아 죽어도 남자만 3천명, 5천명이나 회개하여 근 일만 명의 병력(兵力)[남자만을 집계한 것]이 생겨도 그냥 그대로 그 핍박을 감수한 채 뿔뿔이 흩어지기만 하여 오직 진리의 전달에 몰두한 것만 보아도 이는 명백합니다. 세상 종교 같으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탄압하면 흩어지는 것뿐이지 뭉쳐 세력을 키우려 하지 않음으로써 본을 보여 향후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가 이를 따르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에서 유수의 종교로 세력을 떨치고 있고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있는 것은 인생들이 성경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왜곡되게 해석하여 자기 입맛대로 믿고 가르친 결과입니다. 이 자체가 하나의 놀라운 신비(神秘)로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활동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이 악령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으므로 그 증거가 됨으로써 성경의 진실성을 또한 나타내고 있는 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베드로에게 연거푸 세 번을 물으시고 "양들[그리고 어린 양들]을 먹이라" 말씀하신 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거니와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릴 것이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갈 것"[요 21:18]이라 하셨고, 요한은 이 말씀의 뜻을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19]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양떼들을 먹일 중책을 맡고 있는 으뜸 제자 중 하나인 베드로에게 이런 무저항주의의 죽음을 미리 말씀하셨을진대 그 나머지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제물에 사라져 버리고 이 세상에서는 자취도 없이 없어져 버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가짜 즉 사이비(似而非)로 말미암든 진실된 것으로 인함이든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흥왕(興旺)해  온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우리말 번역은 "임금"-요 12:31/14:30]라는 말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37] 하신 대로 아담의 씨로서의 우리 인생들로 치면 이 세상이 적지(敵地)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이전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압제 아래 있어 사정이 달랐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이미 에덴낙원에서부터 적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대로[창 3:15] 완전한 대결 상태가 되어 있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교회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대하여 적대 행위로 나타나고 세상은 따라서 교회에 대하여 적대 행위로 나오게 됨은 필연입니다.

위의 베드로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전에는 세상이 그를 적대시하지 못하였으나[동류(同類)이므로] 지금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므로[20:21,22]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행하시던 것처럼 사람 구원하는 일에 종사하는 즉시 세상의 적대적인 손은 뻗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포박되어 끌려가는 형상이고 이러한 식으로 해서 죽음을 맞게 될 것은 누구나 그리스도인이면 예외 없이 각오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렇게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배경이 되어 있는 온 세상을 상대하여 적으로 삼고[그리스도의 나라가 아니므로] 세상은 또한 그리스도와 그 교회를 적으로 삼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성경이 무슨 목적으로 거짓말을 할 것입니까. 나라가 다르다고 하여 그리스도 친히 순순히 포박이 되시고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시는 마당인데 무슨 거짓말이 의미가 있다고 속이고 말고 하겠습니까. 성경이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마다 베드로와 같은 죽음의 고난을 당할 것을 미리 말하고 있는 이상, 이런 고난을 말하는 데에서는 아예 거짓이나 속임수가 발 붙일 틈이 없다는 기본 상식만은 갖추는 것이 지혜입니다.

적대행위를 한다는 것은 이 적지[세상]에서 포로가 되어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손아귀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행 26:18].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도리어 세상 살고자 하여 허송 세월함이 하나님께 반역함이 되는 것인즉 당연히 그럴 경우 절대로 하나님 앞에 무사하지 못할 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전체 인류의 이름으로 규탄되어 마땅한 것이니, 왜냐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뜻, 모든 일이 우리 인생들을 위하시지 않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세로서 세상에 임하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삶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 세상이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대하여 적지이고 적대 행위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마 10:37-39] 하신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실 것이라"[요 12:25,26] 하심도 같은 뜻이고,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눅 14:26,27] 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은 영생을 얻기 위한 수단이거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는 방법이거나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 당시부터 확립되어 있는 '모든 피조물[인간을 비롯해서] 삶'의 기본 자세입니다. 다시 말해 기계적인 물질이나 생명체는 그 기계적 장치에 의해 하나님의 지혜를 닮아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생명의 신비"를 나타내고 있는 반면, 우리와 같은 인격적인 영적 존재는 하나님의 삶을 닮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철두철미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 체제에서의 지체(肢體)로서의 각자의 삶이 정상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왕 노릇하는 것과 같이 자기중심으로서, 자기 부인과는 완전히 방향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대적이 아니 될 수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부모의 소생이고 그 씨이기 때문임과 같으니 우리 스스로 세상에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심으로써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각 피조물[인간을 비롯한 영적 존재] 안에는 하나님께서 사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피조물들을 위하심이어서 하나님 안에는 그 피조물을 생각하는 것밖에 없으므로 즉 하나님 안에 피조물 있고 각 피조물 안에 하나님 계시는 이치를 따름이기에, 피조물[인격성을 갖추어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영물이나 인생들] 각자는 "내게 사는 것이 나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함이 원래부터의 피조물의 삶의 이치요 도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각자는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를 위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는 "자연계에서나 영계에서나 하나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내가 진정으로 사모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시니 하나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신다"[시 73:23,25]고 말하게 되어 있는 것이나, 영물들 중에 빗나가는 자가 생기고 그 중의 하나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넘어가 아담 역시 그런 오만하고 방만한 태도를 취하게 되어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본디의 자세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뜻입니다. 즉 처음 상태로 회복시키심이니,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을 구속이라 하는 바 “구속(救贖)”이라는 말은 상응한 대가를 지불하고 원래의 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입니다. 속량(贖良-redemption)은 몸값을 받고 종을 풀어 주어 양민(良民)이 되게 하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되찾음’, ‘되삼’, ‘속전(贖錢)을 내고 죄인을 구제함’ 등의 뜻입니다.

인간[아담]이 죄인으로 지으심 받지도 않았고 인간 창조 당시부터 종[속량, 구속이 필요한]의 운명을 타고 나지도 않았습니다. 중간에 일어난 돌발 사태로 인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원래의 상태로 회복함이 우리의 구원이고 특별히 "몸의 구속[redemption-롬 8:23]"이 그러합니다. 말 그대로 "몸"의 구속이니 이 "구속"의 결과로 현재와는 달리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이므로, 이전에는 아담이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간단히 “우리를 속(贖)한다”는 말로도 표현됩니다. 내 스스로 지불한 값이 아니고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해 지불하신 대가(代價) 곧 피 흘리심 즉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贖)한다고 할 때는 그렇게 속함을 받은 자는 그 값을 대신 치러 준 즉 속(贖)해 준 이의 당연한 소유가 됩니다. 좋은 예는 아니지만 미국 흑인노예 매매 때 그 흑인의 몸값을 누가 물어 주면 그렇게 대가를 지불한 자의 소유가 되었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우리말 번역은 "속전[딤전 2:6]"과 "대속물(代贖物-마 20:28/막 10:45)"로 분류하고 있으나, 영역[KJV, NIV]은 통일하여 "ransom"으로 번역하고 있고, 또 우리말 번역은 "구속[롬 3:24/고전 1:30/엡 4:30/딛 2:14/벧전 1:18]", "속량[눅 1:68/갈 3:13/4:5]"으로 나누고 있으나 영역[KJV, NIV]은 "redemption", "to redeem"으로 통일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가리켜 우리말 번역은 "속량하는 자"[행 7:35]라 했는데 영역은 "a deliverer[KJV], judge[NIV]"로 번역하고 있는 바, 그리스도를 "속량하는 자"라 하면 하자가 없겠지만 모세를 가리켜 그렇게 번역했으니 이는 오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속해 주셨으므로 나를 소유하신다 했으나 그러나 이는 자동적으로나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경우에만 그렇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주님"[나의 주인님, 나의 소유주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이유입니다. 즉 나 자신을 주님의 소유로서 드린다는 뜻이고 내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은즉 향후 절대적으로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만 살겠다는 약속으로써 나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이 아니라 나와 함께 죽으심이므로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하여 내 스스로 나의 죄 값을 치른 격입니다. 그러면 내가 나 자신을 속했으니 나 자신의 소유주가 나 자신이나, 그러나 이는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므로 그리스도 친히 나 위해 죽으신 결과인즉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것임에는 명백하나 내 스스로 나[나 자신의 것으로서의]를 주님께 드린다는 의미가 타당한 것입니다. 역시 '동시성'이고 '양면성'입니다.

이와 같이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니 그 창조하신 그대로의 본디의 모습이 무엇이냐 하면,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은 피조물[인격성을 갖춘 영적 존재로서 영물이든 인간이든]에게 가장 가까운 분으로서 짝이라고 하실 만한 위치에 계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짝'이라고 할 때는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됨에서 갑은 을을 위해 존재하고 을은 갑을 존재하는 그런 이치를 내포합니다. 즉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요 구조입니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저의 사모할 분이 없습니다"[시 73:25] 했습니다. "내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니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들고 계십니다"[:23] 함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영적 피조물[인격성을 지닌]에 관한 한 하나님과의 그 개별적인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또 피조물 전체를 이와 같이 대하신다고 나를 대하시는 면이 결코 소홀하심이 없습니다.

마치 나만을 위하시는 것과 같은 관계임을 위의 성경 구절은 밝혀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가리켜 그리스도께서는 "너희 머리터럭 하나라도 다 세시고 있다"[마 10:30] 하셨고,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져 죽지 않는다"[:29] 하셨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이 아니신 조물주 하나님의 특성이시자 능력이십니다. 우리 피조물은 절대로 이런 일이 불가능하므로 마치 하나님을 우리 피조물 중의 하나처럼 착각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이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를 생명처럼 마음 속에 각인해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와 같이 의식한다고 그것이 대수가 아닙니다. 우리로서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생명과 진리"이실 뿐 아니라 "길[방법, 수단, way]"[요 14:6]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6] 하심도 같은 의미입니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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