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새로 창조를 받고 싶고 다시 출생하가 원하거든 이 선물을 받으십시오. 그를 성령으로 받으면 됩니다. 오늘 이 시간도 가능합니다. 이 자연계 몸은 오늘 이 시간이라도 무엇을 잘못 먹어도 죽어버리고 당장 무슨 사고라도 나면 곧장 썩어갈 수 있는 몸입니다. 향후 백년을 산다 한들 그 시간이 끝나면 몸은 노쇠하고 썩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도 보장 받지 못하는 목숨인데 오늘날 아무리 소위 문명이 발달하여 편리하게 살게 되었다 한들 내 죽어 사라지면 그만이고 오늘 세상 하직하면 그만인데 무슨 소용이고 무슨 의미가 있답디까.
그러므로 그런 데에 신기루 잡듯이 홀린듯이 귀한 시간 허비하며 쫓아다니지 마시고 당장 오늘 죽을지라도 모르니 모를 수도 있으니 여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장담 못하니,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일에 일차적으로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일이 지혜가 아닌가요. 방법이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어떻게 그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 하시는가요.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라 하면 창조자를 의미하고 창조자를 그 누구도 인간이라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이 이 만유를 지을 리가 없지요. 그러면 나라도 만유를 지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인간 아닌 다른 특별한 존재가 지어야 한다는 말인데 왜 인간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인간처럼 보인다면 그 존재가 설혹 인간이 아니더라도 이 너른 우주에 비하면 먼지만도 못할 것인데 그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만유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사람은 논리적인 사고하여 그 사고력으로 행동하는 존재인데 이 결론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겠지요.
그래서 무신론은 논리의 빈약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의 허점, 불합리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 같은 소위 석학, 그 어떤 내로라 하는 인물이든지 유신론자만 빼고는 다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천재라고 하는 아인슈타인도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했다는 즉 유신론자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그 천재성이 한 마디로 젖먹이 어린 아이와 같은 수준입니다. 그런 어린 아이는 하나님이고 무엇이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엄마만 알아보고 젖이나 물고 그것뿐입니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논리에서 벗어나 있으니 당연한 결론이지요. 어린 아이는 엄마와 젖은 잘 알아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도 자기가 관심 두는 분야는 잘 압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와 젖 이상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 같이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도 자기 분야 그 이상으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창조자가 존재하시고 그는 우리 눈에 볼 수 없는 보여서는 안되는(왜냐면 보이면 아까 그 먼지만도 못한 존재일 테니까) 분이시기에 창조신 즉 신 곧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신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먼저 손꼽히는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보인다 안보인다 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창조된 피조물 즉 결과물로써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롬 1:20). 공기 곧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그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결과물 즉 바람이 분다는 것으로써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신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하나님되심 즉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저들이 핑계치 못한다"(롬 1:20)고 솔로몬의 명판(名判)을 내리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 이상으로는 백 마디 천 마디 만 마디로 말을 만들어보아야 "핑계하지 못한다"는 블랙홀에 다 들어가게 되어 흔적도 찾지 못하는 운명입니다. 자, 불가항력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으니(왜냐면 그 결과물인 만유가 존재하고 그 중에 나라는 존재가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니)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가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기에,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은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무엇을 우리 인간에게 가르치고 있느냐,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이 한 분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 개개인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위의 성경 구절과 같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내개 주시는 개인적 선물이시니까 바로 나의 소유가 되십니다. 나와 불가분, 나 없이 그 분 즉 '그리스도' 없고 '그리스도' 없이 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물이 짝으로 되어 있듯이 이렇게 둘이서 하나로 존재하는 짝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짝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켜 새 창조, 재 출생이라 합니다.
어떤 모양새로 짝이냐, 신체 구조에서 머리와 몸이 짝으로 되어 있듯이, 사람의 구조에서 영혼과 육체가 짝이 되어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둘로서의 하나'입니다. 그는 나요 나는 그입니다. 그러나 물론 나는 그가 아니요 그 역시 내가 아니십니다. 아닌데도 둘이 하나되어 있는 것이 머리와 몸의 하나됨이요 영혼과 육체의 하나됨이요 남자와 여자의 한 몸됨이요 파동성과 입자성의 전혀 다른 성질로서의 하나됨이 빛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됨입니다.
원래부터 이 하나되는 이치로써 창조자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신 것입니다. 즉 머리는 하나님이시요 만물은 그 몸입니다. 신체의 구조상 머리는 몸(의 각 지체)을 위하게 되어 있고 몸의 각 지체는 일제히 머리를 위함으로써 각 지체 상호간 위하게 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하나님 안에 만물 있고 만물 안에 하나님 계시는 체제입니다. 양자간의 이 하나됨의 체제를 이룸에는 반드시 법칙이 존재합니다. 다름아니라 머리이신 하나님은 몸인 만유 즉 피조물을 위하시고 따라서 당연히 피조물은 머리이신 하나님을 위하는 것, 이것입니다.
즉 머리 없는, 머리에서 떨어져 나간 몸에다가 새로 머리를 얹어주시고 영혼이 없는 육체에다 영혼을 다시 불어넣어주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나 개인'에게 주시는 선물이십니다. 아담이 애초 창조될 때 영혼이 없었습니다. 육체만 있었으니 이미 창조되어 있는 자연계 동물들처럼 그리고 오늘날 보는 이성 없는 짐승들처럼 그런 육체만 있었던 것인데 영혼을 입으로 불어 넣으셨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인간의 육체를 복제 기술로 만들어 내어도 영혼 없는 육체로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등 허풀을 떨 일이 아닙니다.
즉 머리 없는, 머리에서 떨어져 나간 몸에다가 새로 머리를 얹어주시고 영혼이 없는 육체에다 영혼을 다시 불어넣어주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나 개인'에게 주시는 선물이십니다. 아담이 애초 창조될 때 영혼이 없었습니다. 육체만 있었으니 이미 창조되어 있는 자연계 동물들처럼 그리고 오늘날 보는 이성 없는 짐승들처럼 그런 육체만 있었던 것인데 영혼을 입으로 불어 넣으셨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인간의 육체를 복제 기술로 만들어 내어도 영혼 없는 육체로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등 허풀을 떨 일이 아닙니다.
이 법칙대로 하면 모든 피조물이 똑같이 하나님 안에 있어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평등을 100% 향유하는 최고 절정의 행복한 삶이 보장됩니다. 아무리 낮은 위치에 있어도 하나이므로 다시 말해 머리와 하나이므로 머리처럼 대접을 받는다는 이 뜻입니다. 다른 아무 이유가 없고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여럿이 존재하면서도 마치 하나처럼 존재하므로 완벽한 이상향적 삶의 구현입니다. 이 이상가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생명의 법칙(하나님 편에서 보면 계명이요 그 피조물인 우리 편에서 보면 순종으로 인식되는)을 첫 사람 아담이 어긴 결과가 바로 오늘날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오늘 이 시간 후도 보장 받지 못하는' 비극적 결과입니다. 그래서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머리를 위하니까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하지 않습니다. 머리이신 하나님께서도 몸으로서의 그 피조물을 위하시지 자기를 위하시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멋모르고 자기만 위해 살아 온(실상은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만 치달아 왔던) 무지무식한 일체의 소행을 뉘우치고 오로지 이 법칙대로 살겠다는 결의가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입니다. 회개든 참회든 뉘우침이든 그 어떤 용어를 쓰든 뜻만은 동일합니다.
이 회개가 명백하고 순수할 때 오늘 이 시간도 나는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머리(성령으로 내게 임하시는 그리스도)와 몸(그 성령을 받아 모시는 나)의 관계, 영혼(성령)과 육체(나 자신)의 관계가 재설정되기에 이르러 애초 인간을 창조하시던 상황으로 완전 회복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연계 육체의 비극적인 결말을 청산하고 신 창조, 재 출생의 120 %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것부터 해결하십시오.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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