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13)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별을 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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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심판의 의미

고로 심판은 이제 정식으로 정상적인 삶에 들어가기 전에 행복한 삶에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정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의 인간 삶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과 고난, 저주의 불행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해서 저주를 당한 것이라기보다 앞에서의 설명대로 스스로 취한 결과를 따름이었습니다.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사람들은 육신 때문에 죄 짓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불의를 좋아해서 그런 것입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던 인간 아담이 아름다운 영계[에덴낙원]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다가 먹어서는 안되는 것을 방자하게 먹음으로 인하여 다시 낙원으로부터 추방됨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니 그 자체가 인간 아담에게는 저주입니다. 신령한 몸으로 신령한 세계에 살도록 되어 있다가 자연계에 속하게 되니 죽음도 죽음이지만 그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담 스스로 벌어놓은 불행한 결과로서의 죽음인지라 그래서 구원이 현실적으로 필요하게 되었으므로 그 불행한 결과만 벗겨 주면 되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구원이 필요 없었을 것이요 범죄의 결과로 죽지 않았다면 우리가 영생을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로 구원은 그 죽음에 벗어나 산 자가 되는 것, 그리고 산 자로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영구적으로 죄를 짓지 않아도 되도록 우리의 현실 문제로서의 “육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불의를 좋아하여 죄 짓는 악인들은 육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계에 있어 아담처럼 살았어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범죄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기로 작정하는 이가 아니고는 "육신" 타령을 할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한낱 핑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를 짓는 것을 슬퍼하여 육신을 탓하는 이는 그리스도 앞으로 오기만 하면 당장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는, 또다시 죽음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 즉 죄를 짓지 않는 것[능히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을 이미 주셨으므로] 등 그 나머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서 아담이 범죄한 것처럼 우리 역시 범죄할 수 있는 것이요 그렇게 되면 그가 죽음에 이른 것처럼 우리 역시 죽음이되 이제는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 이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니 즉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담과 같은 죄를 지어도 면죄가 되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으니 그렇게 되면 아담과의 형평 관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차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어 있다는 것이고 아담은 단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창조되었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 자연계에 속해 있다는 것이고 아담은 영계에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도 우리가 구원되자니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나 위해 사람이 되신 후 그 성령으로 오셔서 영원히 나와 결속되시는 방법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어도, 반드시 내 이름으로, 즉 내가 죽어 있으니 나와 함께 죽으신 다음 함께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리원칙 고수 차원에서 볼 때 이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원리원칙대로가 아니면 절대로 하나님은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자연계에 속한 동물은 자기 종족 보존을 위한 자기중심 곧 자기 씨만 퍼뜨리면 된다는 그런 목적 달성밖에 없는 것이고 그 또한 기계적인 것이라 그것만 달성되면 더 이상 욕구는 없습니다. 그 욕망도 그러므로 극히 제한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에게 해를 끼친다거나 하는 그런 일이 없고[잡아 먹고 먹히는 것도 오직 종족 보전을 위한 기계적 작동일 뿐] 인간만이 악행을 하는 것입니다. 한없는 욕망을 채우고자 합니다.

욕망을 채워도 순리를 따르지 않고 무리까지 감행하는 것입니다. 한 몸의 이치를 기준으로 하면 자연스럽게 모든 욕구가 다 채워질 뿐 아니라 무한대로까지 채워지는데도 자기 부인은 않고 무작정 근시안적(近視眼的)으로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만 하니 억지로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을 처치해서 없애야 달성할 수 있다고 착각함이니 보통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실수라면 얼마든지 용납이 되지만 의도적으로 그렇게 빗나가는 것입니다.

고집을 부리고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데에서야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구원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해당되고[고전 2:9/약 2:5/1:12]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행 5:32/히 5:9] 명시합니다. 죄와 악, 불의와 불법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모든 성향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이는 한 몸 구조로서의 이러한 생명의 법칙에 정면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법칙을 사랑하여 또는 그 법칙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뜻을 행하고 말씀대로 순종하게 되면 영물들로 치면 거룩한 천사들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막된 악령들이 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천사들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들을 새로 더 낫게 손보셔서 아름답게 또는 더 낫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애초 만드신 그대로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구원되어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더 이상 우리를 손보실 것이 없습니다. 단지 현재는 우리가 이 자연계에 속한 초라한 몸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 친히 우리 위해 이 자연계에 속한 죄 있는 모양의 몸을 입으시고 아버지의 일을 하신 그 발자취를 따라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우리 본분을 다하는 의미입니다. 이 일만 마치면 신령한 몸으로 덧입게 됩니다[고후 5:4].

그러므로 이미 범죄한 결과에 대한 죽음을 해결하지 않고는 될 수 없기에 그러나 죽으면 그만이고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까닭에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이 되시고 우리 위해 친히 우리의 죽음에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죽으시는 것만 아니라 함께 다시 살아나셔야 내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몸이 되어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도 현실이고 내가 살아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말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명백히 살아 있지만 동시에 내가 죽었던 몸으로서 죽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실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요 옛 사람으로서는 죽어 땅 속에 묻힌[당시 유대인의 관습대로 바위 굴 속에 시신을 두고 돌 문으로 굳게 닫아 놓는] 것입니다.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 양면성입니다. 따라서 “옛 사람”으로서의 내가 죽은 것을 확실히 하면 할수록 나는 “새 사람”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생기 발랄해집니다.

반면 그 죽은 것이 희미하면 살아 있는 것도 희미해지고 그 죽은 것이 죽은 것처럼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살아 있는 것 역시 산 것처럼 나타나지 않고 기운 없어 거의 죽게 되어 있는 빈사 상태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이 상태가 그대로 지속되면 말 그대로 나는 영원히 죽어 있게 됩니다. 과거 그리스도를 모르던 때와 같이 “죽은 자”[마 8:22]로서 영원히 남게 됩니다. 상대적이기 때문에 이 또한 양면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시기 전에 자기가 그렇게 죽으실 것을 미리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셨습니다. 참으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같은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사랑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한 어버이의 사랑입니다. 어버이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죄는 값없이 즉 내 쪽에서의 일체의 노력도 없었지만 용서하신 것입니다. 사랑만이 이룰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이 나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는 그렇게 죽고 다시 그 죽음 가운데서 살아나야 즉 내가 현재 다시 살아나 있어야 생명이고 죽음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다시 살아나 있어야 그 죽음으로서의 죄의 대가(代價) 청산이 현실적인 의미가 되는 것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현재 내 자신이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면, ‘나를 대신하는 죽음’이 있을 때 내가 죽을 것을 ‘나를 대신한 죽음’ 덕에 내가 죽지 않을 수 있다고 하겠지만, 현재 내가 죽어 있는 자이므로 그 나 대신한 죽음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현재 살아 있어야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어 내 죄의 청산(淸算)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하신 그 죽음은 동시에 나를 다시 살리시는 근거도 마땅히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즉 내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려면, 그 죽으심도 나와 함께 죽으심이 되고 다시 살아나신 것도 나와 함께 살아나신 것이 되어 나와 하나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시려고 그렇게 죽으신 것이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이 나 위해 죽어 주신 것은 나와 함께 죽으시고 나와 함께 다시 살아나심이고, 따라서 이제는 나와 영원히 하나가 되어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다시 살아나신 그 분께서 앞으로 하시는 모든 일 전체가 다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위해서 하시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현재 살아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 된 것이고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를 이룬 삶이 구조이니,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밑바탕으로 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다는 즉 구원되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 한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즉 구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의 죄는 과거의 내가 여전히 살아 있어 나를 위해 사는 것인즉 내가 여전히 죄를 짓고 있으면 과거의 나 곧 “옛 사람”이 그대로 살고 있어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지도 않다는 뜻이고 이는 내가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지 않았으면서도 구원 받은 줄로 착각하고 아무 준비 없이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비참한 일이 됩니다. 만일 그 나 위해 죽으신 것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라면 나는 새로 창조되지 않아도 그냥 그 죽으심 하나만 가지고 구원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이를 “새로운 창조”라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나 대신하여 죽으신 사실만으로 나는 충분히 영생할 수 있으니까 굳이 새 창조라 이름 붙일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면 왜 “새 창조”라 하느냐 하면 친히 나와 하나 되심으로 이제부터는 ‘나’라는 존재가 ‘이 분’과 ‘나’ 이렇게 둘이서 하나 되어 있는 복합 체제,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 이전에 나 혼자 존재하던 것과는 전혀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영혼과 육체의 새로운 이중 구조로서, 나와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되어 있는 존재로 내가 현재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존재하는 것’과 ‘둘이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이미 설명했듯이 지나간 죄의 대가 청산의 의미에서 내가 반드시 죽어야 하고 그렇게 죽은 다음에 다시 출생해서 살아 있는 순서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되어 있는 구조로 내가 다시 출생 것이므로 이는 내가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완벽한 장치로서, 첫 사람 아담이 창조될 때처럼 불가항력으로 부득불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요인들이 제거되어 있는 의미가 굉장한 것입니다.

이제 죄를 지을 때는 내가 "불의를 좋아하는"[갈후 2:12/요 3:19] 경우에 한해서 오직 고의적으로 짓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전에는 이런 이중 구조로서의 ‘나’가 아니고 나 단 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이 분과 하나된 ‘나’이므로 이전 것을 “옛 사람”, 지금의 나는 “ 새 사람”으로 얼마든지 당당히 부를 수 있는 것이며, 무릇 창조는 전에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인격성을 지닌 두 개체(個體)가 하나로 한 육체의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창조이고, 창조라도 이전의 모든 창조와는 양상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과정은 같고 본질은 같을지라도] "새 창조"입니다[고후 5:17]. 이중 구조로 말하면 이전에는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중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 자신이 ‘육체’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영혼’이 되시는 그런 새로운 체제입니다. 따라서 새 창조라고 해서 전연 별개의 양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이전의 방식과 틀에 맞춘 안전한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하시는 일은 완전무결하여 나중에 더 이상 손볼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새 창조의 필요성이 생겼을 뿐입니다. 고로 이전 창조 그대로 두고 꼭 손볼 부분만 보심으로써 완연하게 다른 것 즉 이전에는 없던 것을 새로 있게 하신 것이 다름아닌 그리스도와 나와의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로서의 '나' 그리고 '그리스도'의 존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나는 완전히 불가분인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은 새 창조에서의 자의식(自意識, self-consciousness)입니다. 그러므로 새 창조라 하더라도 이전 방식과 과정을 따르는 것이어야 하며 또 그럼으로써 이전 것과 어색하지 않은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현재의 나 자신이라는 것도 이전 창조의 잔여(殘餘), 잔재이기 때문입니다.

"잔여, 잔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우리가 현재 애초 하나님 창조하신 대로의 산 자 곧 영생하는 자가 아니라 죽게 되어 있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창조 당시의 원형 그대로가 아니고 실질 없는 형상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아담 창조 당시의 아담의 육체로 보시고 그 아담의 영혼 격으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시어 육체과 영혼의 이중 구조를 구성하시게 되었으니 그래서 둘이 하나됨으로써 영원히 함께 '우리'는 '하나'로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충분히 인식시켜 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리스도 의식"이라는 용어를 중점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구원을 “다시 나는[거듭나는("to be born again")-요 3:3]” 것이라고 설명하신 것은 이전에 났던(出生) 것이 일단 종결된 그 다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종결이라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여전히 살고 있으면서 단지 그리스도의 나 대신하신 죽음 때문에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산다 할 때 이를 두고 “다시 난다”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난다”고 할 때는 죽었다가 다시 난다 즉 다시 출생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져 나의 “옛 사람”이 종결된 다음 “새 사람”으로 다시 출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 대신하신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한 나의 죽음’이 구원입니다. 함께 죽음이므로 그 이후로는 계속 “함께”가 됩니다. 즉 “함께 다시 살아남”, “함께 하늘에서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 있음”[엡 2:5,6]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상에 오심 역시 내 자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다시 와 있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파송된 것’으로도 나타내신 것입니다[요 20:21,22].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이 나의 구원이니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 됨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순종이 필요하고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 당연시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갑과 을이 하나일 때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의미가 될 때는 내가 죄를 지어 여전히 죄인으로 있어도 구원된다고 하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 됩니다. 실제 그렇게 믿는 이들이 현재 절대 다수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나도 죽은 것이므로, 죽은 자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벧전 4:1]. "자기를 위해 살"[고후 5:15] 그 자기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아 "죽은 자"[마 8:22]였으니 그 때도 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산 자가 된 다음에 그 죽음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가리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기준을 과거 영생하던[아담이] 것에 두는 것이고 그래서 죽은 자요 죄인이라는 것이나, 지금은 그 기준을 현재 영생하는 자로 내가 새로이 창조된 것에다 두기 때문에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난다”[요 3:6,8] 하심은 그렇게 다시 나게 되는 방법을 말씀하심입니다. 즉 내가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에, 내가 ‘육체’라면 그리스도 친히 내 ‘영혼’이 되시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는 까닭입니다. 아담의 창조와 똑같은 과정을 밟은 것입니다. 아담의 경우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창조하셨으니 현재 내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있음과 같고, 그 후에 아담에게 영혼을 조성하셨으니 이제 이런 자연계에 속한 나의 육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친히 임하여 오심이 바로 그 아담이 영혼 조성과 똑같은 모양새요 순서입니다.

이와 같이 나와 하나 되시기 위하여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시니 이제는 문자 그대로 내가 죽고 다시 살아난 것이 되어 영원히 산 자가 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로서 다시 출생하여 살아있는 자입니다. 과거 ‘죽은 자’로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내져 그래서 종결 짓고, 이제는 새 생명 가운데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서[주님은 나의 것으로서] 서로 삶을 맞바꾸어 사는 체제로 새로 창조되어 ‘사는 자’입니다.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그 분과 온전히 하나를 이루고 있으므로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감시해서가 아니라 그 분은 나를 위하시고 나는 그 분을 위하여 사는 구조와 체제 때문입니다. 죄는 나 자신의 욕심대로 사는 것 즉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인데, 내가 나 자신을 위함보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으로서 그 분이 나를 더 잘 위하실 것이므로 구태여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나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습니다.

그래서도 이제 나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가 없을[요일 3:6,9] 뿐 아니라, 그 분과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내짐으로 해서 나를 위해 살 그 ‘나’라는 것이 이제는 죽어 이미 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 분을 내가 성령으로 내 마음에 모심으로써 현실화, 구체화하였습니다. 마음에 모신다는 것은 내 육체에 무슨 기계적인 것처럼 계심이 아니라 나의 의식 속에 항상 계신다는 뜻입니다. 고로 우리는 이 마음을 항상 지켜야[잠 4:23] 즉 이 의식 속에서 사는 것이니 특별히 이 세상에서 그러합니다.

그 다시 살아나심과 당연히 하나 되어 함께 하는 것이므로 나는 나의 죄 값으로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난 자가 되어 있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나의 죄 값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나의 죄는 용서되어 있는 것으로서, 바로 그와 같이 그 분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진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장차[세례 받은 후에] 주님과 함께 살 것임을 확실히 하는 증표로서 세례(洗罪禮式)를 받습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 용서가 되니 “옛 죄 깨끗케 하심”[벧후 1:9]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바 그 아름다우신 사람을 내 것 즉 선물로서 받아 모시는 나의 ‘깨끗한 자리’ 만들기입니다. 내 스스로 나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완전히 깨끗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 피로써 씻어 주신 것입니다. 살인죄도 좋고 그 어떤 죄도 좋고 용서 못받을 죄는 없습니다.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마 12:32] 외에는 다 용서됩니다.

세례의 의미가 “죄를 씻는”[洗罪-행 22:16] 예식이라는 의미로도 이해하면 적당합니다. 성경의 원 의미는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었다 해도, 우리가 이런 의미로 사용한다 해서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번역상의 혼란[편 가르기]을 야기시켜 불신자들에게 의아심을 미리부터 안겨 주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이제 ‘하늘의 별을 따오는 일’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하늘 사람은 그 영광의 몸[사람으로서의 몸]으로는 하늘에 계시나 성령[하나님으로서의 영]으로는 지금 이 세상에 계시고 바로 내 앞에 계십니다.

고로 내가 "내 별이라" 하고 손을 내밀어 하늘의 별을 따기로 마음 먹는 순간 내 안에 얼마든지 오실 수 있고 금방 와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상 설명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 하늘 사람을 볼 때 내 사람, ‘내 별’이라고 확신을 하게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이시므로, 사람은 육체인지라 사람과 사람 사이는 일 대 일로서 당사자와만 관계하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로 시작하고 마치는 까닭입니다.

이제 하늘의 별을 딴 다음에는 내 소유로서의 하늘 사람을 내 안에 모신 관계로 내 자신 별과 같이 되어 있고 또 내 스스로 온 세상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福音)을 알려 주어 그들도 하늘의 이 자기 별을 선물로 받아 별들이 되도록 하는 일 그리고 별들을 만드는 일을 위임 받아 나와 함께 사시는 하늘 사람과 더불어 공동 작업을 펴는 것이 교회의 본무(本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당히 ‘별 사람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별을 따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별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별을 만드는 일에서는 내 안의 별 사람, 하늘 사람으로 말미암는 힘, 능력, 권능이 필수임은 물론입니다. 왜냐면 그 힘으로써 이런 일을 능히 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이요, 내 자신 그 별 사람을 내 안에 모심으로 그 별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별을 먹고 마시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별"이라는 의미로 별스럽게 갖다 붙인다 할지 모르나, 그만큼 그리스도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알자는 취지로 말하는 것뿐입니다.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므로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 것이다”[요 6:53-57] 하셨습니다.

이 ‘별을 먹고 마시는’ 것은 힘써 내 자신을 항상 깨끗하게 하여 이 깨끗하고 아름다우신 분을 나와 함께 사시는 데에 추호의 불편도 없게 만들어 드리는 끊임 없는 작업과도 관련이 있어 내가 해야 할 책무가 되어 있음은 당연합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이 아름다우신 분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시는”[히 1:9] 줄을 알면 나도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해야 즉 올바르게 살아야[의(義)를 행해야] 선을 행해야 이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요일 2:29] 것은 명약관화입니다.

이 깨끗하고 아름다우신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같으신 하나님으로서 이 천지 만물을 다 만드신 것이므로 말하자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십니다[사 9:6]. 우리를 만드신 그 어버이 사랑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되심을 인하여 그래서 우리와 함께 사람되심을 인하여, 친히 그 아버지께 '우리와 함께 된 같은 아들"로 자처(自處)하시는 한없는 사랑을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친히 아버지의 "맏아들"[롬 8:29]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이 하나님의 아들을 내게 주시는 선물로서 성령으로 받아 모심으로써 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아버지 친히 그 아들과 더불어 내 안에 임하셔서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시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이는 아버지이십니다. 이런 면에서 아들께서는 어디까지나 아들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로서의 본분을 다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자제[子弟, children of God]들이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다”[요일 3:1]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 ”자녀“를 ”자제들[children]“이라 한 것은 남녀 개념을 불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해본 것입니다. 왜냐면 부활 때에는 이런 남녀 성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눅 20:35,36].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롬 8:14,19,26/갈 3:26]“입니다.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으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님을 향하여 이 희망[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이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요일 3:2,3].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는 것이니 죄는 불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없이 하시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우리가 아는 바니 그에게는 죄가 없으십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함"[:6]입니다. “우리 죄를 없이 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죄에서의 구원”을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8,9] 함과 같습니다.

성경의 적(敵)은 우리의 편견과 선입관입니다. 그런 성향이 있는 이들이 성경을 가까이하면 무의미한 일만 됩니다. “아이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다”[요일 3:1-8] 했으니, 성경은 모든 일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하며 어정쩡한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명백하게 죄 짓는 것을 성경은 철저히 금합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선입견입니다. “간다”고 말해도 “온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스스로 굳게 믿는’ 편견입니다. 사도 요한이 경고하고 있는 이런 “미혹하는 자들”은 오늘날 천하에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와 나는 분명 ‘둘’입니다. 그러나 ‘하나’이니, ‘영혼’과 ‘육체’처럼 불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요 그리스도께서도 ‘하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불가분의 관계로 계시고 나는 그리스도와 불가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나와 둘로서의 하나로 계시고 나도 그리스도와 둘로서의 하나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관계를 내 스스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하나로서의 둘’ 또는 ‘둘로서의 하나’가 아닙니다. 그렇게는 형성되어지는 일이 아닌 것은 '사랑으로서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내 쪽에서의 노력 즉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고후 5:10]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함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내 스스로 나의 택하심을 더욱 힘써 굳게 하라 경고했으니, 이 “더욱 힘쓴다”는 말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로 말하면,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에 해당됩니다.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하는 나 자신의 이욕(利慾)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구원을 스스로 이루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이 나의 구원이므로 이 하나 됨을 공고히 하고 시험이나 유혹을 받아 나 자신을 위함이 없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 때[고후 5:15] 그것이 곧 ‘사는 것’이요 따라서 ‘구원을 이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니 곧 나를 세상에 보내신[요 20:21] 그 분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의 일을 이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려고[요 4:34] “더욱 힘쓰는” 것이 됩니다. 고로 나를 위해 살지 않으니 나의 구원을 목표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결과론적으로 나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고 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내 스스로 굳게 한다는 것뿐입니다. ‘결과론’과 ‘목적 삼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성경의 경고는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자신의 구원을 이룸"과는 아주 의미가 다릅니다.

여기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되 누구의 힘으로 이루느냐 하는 것으로써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것이니, 그 둘을 가름하는 관건이 되고 그 특성을 정합니다. 내가 내 힘으로 이루려 한다면 이룰 수도 없거니와 나 자신을 위하고 나의 구원을 목표하는 것이 됩니다.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을 이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성령]의 능력으로 이루게 될 때는 말 그대로 그리스도 친히 자기의 일을 나를 통해  이루시는 형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고후 6:1] 것이 되어 그리스도의 일에만 매달리는 것이어서 이미 내가 구원 받았음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 있으므로 나의 구원이 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다른 사람이 구원을 얻도록 모든 힘을 기울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어 있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내가 일하지 않을 경우[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 경우-고후 5:15] 그리스도와 하나가 아니고 분리되어 있음을 말하는 까닭에 구원이 되지를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경우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아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함이므로 내 스스로에게 달린 문제로 그래서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 결과가 되니 당연히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스스로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은 “두렵고 떨라”는 말에만 매달리는 편향성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을 경외함[the fear of the Lord]과 성령의 위로"[행 9:31]라는 표현 중에서 그 후자가 아닌 전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마땅히 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니, 주님을 두려워함은 그 원리원칙주의,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의 공정공평성 앞에서 떠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고 오직 그 행위대로 응보하시는[벧전 1:17] 하나님이시니 즉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펴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시기"[계 2:23]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대목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시라는 정반대되는 개념도 있는 것입니다. 평형되고 균형 잡힌 인식을 해야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강조하게 되면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항상 양면성을 찾아 제대로 의미 파악이 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두렵고 떨라”는 대목이 있는 같은 편지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되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함으로써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되어야 제대로 된 구원의 기쁨이 됩니다. 주님 안에 있으니 이미 구원 받은 것입니다.

구원 받은 기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룸이니, 이는 모순이 아니고 그 오묘한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말 그대로의 뜻이지 별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항상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그뿐이니, 이 “두렵고 떨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는 말을 반드시 동시에 생각할 일입니다. 베드로도 이렇게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지” 않으면 “언제든 실족할 수 있음”[벧후 1:10-13]을 경고한 것입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너희가 이것을 모두 알고 이미 진리에 섰지만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한다” 했고, 자기가 “육신에 있는 동안에는” 교회로 하여금 이것을 “항상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긴다”[:11-13]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니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고 한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이런 “믿음의 결국이 곧 영혼의 구원”입니다[:9]. 곧 이렇게 함으로써 “너희 구원을 이룬다”[빌 2:12]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관계를 내 스스로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더욱 노력하느냐 하면 나와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계속 유지함이니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고후 5:15] “더욱 힘씀”입니다. 오순절 날 당일 성령이 임하실 때 베드로와 사도들은 성령 충만하여 다음과 같이 성령의 임하심 곧 우리 구원의 의미를 밝힌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을 가리켜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다" 하였고 이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심으로써 주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신다" 하였으며 이를 다시 결론 내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21-36] 한 것입니다. 이는 나중에 공회와 대제사장 앞에서 다시 증언하여 강조하기를, 그리스도를 "임금과 구주가 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여 죄 용서하심을 얻게 하신다"[행 5:31] 함과 같습니다.

여기서 명백하게 사도들은 "주님[주인, 소유주의 개념]과 그리스도", "임금[절대 복종의 대상으로서의 머리의 의미]과 구주"로 나누어 설명한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일방적으로 구원(救援) 일색(一色)의 의미로 그리스도를 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심과 동시에 나 또한 반드시 그리스도를 위해야 둘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를 위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요 이것이 “자기 부인”[마 16:24]이니 이 자기 부인은 주님께서 친히 나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신다는 것은 창조 당시부터 확립되어 있던 그리고 영원히 변치 않을 삶[생명]의 법질서 차원에서 하는 말이니 따라서 나 역시 당연히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야만[고후 5:15] 하는 것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었던 특수 상황으로서의 현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중심의 과거 삶은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해 종결되었으니 다시는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게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아 나 자신을 위해 살 과거 삶의 그 '나'라는 것이 죽음[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해]으로써 멸절된 것입니다. 이는 죽으실 이유도 없고 죽으실 수도 없고 죽으시면 안되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어 '죽으셨다'는 그 엄연한 역사적 사실의 의미인 것입니다. 바로 나와 함께 죽으신 의미이니 그래서 역시 나와 함께 다시 살아나신 현실이 되어 오늘 내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심으로써 구체화하고 실질화하였고 인하여 문자 그대로 나는 죽었고 동시에 다시 살아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어 있는 당연 결과입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것은 '육체[나 자신]' 안에 '영혼[성령]'이라는 불가분성의 이중 구조로서 그러하시니 틀림없는 '둘이 하나됨'의 관계요 육체는 영혼에게 절대 복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 했고 그 이유를 들어 주님 친히 나를 위한 모든 염려하는 일을 도맡아 하신다고 한 것입니다[벧전 5:7].

오직 내가 할 염려는 주님의 일을 위한 것입니다. 나의 일은 주님께서 하시고 나는 주님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로 감사함으로써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하여 바울 자신도 철저히 그러했지만 그 대신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염려한다 했으니,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한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만을 위해 일하시고 우리만을 위해 사신다고 하면 그러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실 때의 그 "일"은 무슨 뜻인가 한다면, 바로 '우리만을 위하시는' 그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만유를 창조하심으로써 이제는 피조물을 거느리시는 하나님이 되셨으니 피조물과의 사랑 관계에서 영구적으로 하나님 당신 자신을 위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가 다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하시는 것 일색입니다.

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결과론적으로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일을 한다니 결국 그러면 우리 자신의 구원을 목적함이 아니냐 하겠는데, 갑과 을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이치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갑이 을을 위해도 결국은 갑 자신을 위함입니다. 왜냐면 갑이 을을 위하는 것만큼 을이 갑 자기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국 갑 자신을 위함이 아니냐 하겠지만 같은 듯싶어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내가 나를 직접 위하면 나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되지만 내가 내 이웃을 위함으로써 나를 위하는 결과를 간접적으로 내면 나와 함께 내 이웃까지 위하는 결과가 되어 내가 나 혼자 위하는 것보다 몇 곱절의 무한대로 나를 위하는 효과를 거두는 것입니다. 그 내 이웃이 하나만 아니라 여러 수만, 수십만이라면 내가 나를 직접 혼자 위하는 것보다 수만, 수십만 배로 나를 위하는 효과를 내는 것이니 이야말로 삶의 지혜입니다.

즉 한 몸 체제로 사는 것이 바로 이런 사람 삶의 최고도의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자기가 여러 배로 위해지도록 만드는 슬기입니다. 고로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자력(自力) 구원 즉 자기 힘과 노력으로 구원 얻으려 하는 것과는 아주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하늘과 땅 차이로 다릅니다. 이 모든 차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그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체를 보아도 머리는 몸의 다른 지체와는 아주 다릅니다. 모든 의지 활동과 같은 중추 기능이 머리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손이 아무리 출중하게 생겨 그 기능이 우수해도 머리 역할은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든 인간 그리고 영물들의 머리되시는 분은 우리를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할입니다. 사람마다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세상 종교는 손도 발도 머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망상이요 억측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각자 모신다고 하는 것은 각자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서 모신다는 의미이니 완연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인간 각자가 부처가 된다는 것은 각자 모두 머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왜 그리스도께서 머리로서 그렇게 우리 속에 위치해 계시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 즉 인과(因果) 관계가 분명하나 부처가 된다는 말은 그들 나름대로의 결과만 말하는 것뿐입니다.

원인이 없습니다. 이는 제일 원인이신 조물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무상(無常)한 결과만을 들추는 것과 똑같은 궤적(軌跡)을 그리는 것뿐입니다. 결과만을 이야기하더라도 틀린 것은 상대적인 의미로서의 '생멸 전변(生滅轉變)이 없는 상주(常住)함'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죽 "무상"은 이 자연계를 지칭할 따름이요 영계가 있어 대칭[상칭, 대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으니, 손뼉 소리를 내고자 하나 한 손 바닥만 아무리 휘둘러본들 소리가 날 리 없습니다. 말을 한다고 해서 다 말이 되는 것이 아님과 같이 논리를 내세운다고 해서 그것이 논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을 가리켜 나는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해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시 16:8] 주님은 나를 위해 사시는 목적으로 나를 그 품에 품으시는[행 2:25] 이 둘이 하나로서 조화하고 상합하여 된 것이므로 삶 그 자체 즉 일상생활이 우리의 구원이요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의식[self-consciousness]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의식의 영원한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더욱 힘쓰고”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도” 우리 능력으로 이룸이 아닙니다. 능력과 의지는 별개입니다. 이루려는 의지는 어디까지나 나의 의지지만 그렇게 이룰 수 있는 능력은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신 또 이루고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현재의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지 않았으면 나는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나 위해 죽으시지 않았다면 더욱 그러하고, 나 위해 다시 살아나심이 없었다면 나의 구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이미 나 위해 이루신 것을 내가 스스로 믿음으로써[이 믿음은 나의 소관사로서 나의 의지의 영역임] 응용하고 적용하고 하는 것뿐인데 어찌하여 자력 구원이라 할 것입니까. 의미부터 정확히 파악하고 나서 이렇다 저렇다 비판할 일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아담이나 영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스스로 순종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범죄의 결과 마침내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능력이 없었다면 그런 죽음의 대가가 적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이전에는 순종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회개하라 명령하실 수가 없었습니다[행 17:30]. 물론 심판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생명의 능력이 되어 주셔서 나를 산 자가 되게 하셨으므로 그 생명의 능력 곧 산 자로서의 힘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능히 순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능력이란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그 사실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이룰 수 있다 함입니다. 앞의 설명대로 하면 불가항력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던 처지로부터 완전 해방시키셔서 이제는 오로지 나의 자유 선택에 의해 죄를 짓든 안짓든 스스로 죽음에 이르든 않든 양자 택일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제는 내 스스로 죄를 짓지 않으면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아담처럼 하지만 않으면 그대로 곧장 내처 영생입니다.

더 손볼 것도 또는 하나님의 능력이 새삼스럽게 더 추가될 것도 없습니다. 영생하도록 나를 새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생하도록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만드셨지만 그 스스로 범죄한 결과로 그는 멸망에 이르게 된 것과 같고, 또 스스로 범죄하지 않은 결과로 현재의 거룩한 천사들은 “거룩한 천사”로 남아 있게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얼마든지 내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또는 순종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이미 이루셨기 때문에 믿는 나에게 순종하기를 기대하시고 또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에게 회개하기를 명령하시고 그래서 선을 행하도록 분부하시고 회개하여 악을 버리라고 명하십니다.

고로 나는 “거룩한 천사들”처럼 될 수 있기도 하고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순전히 나 자신에게 달린 문제라는 뜻입니다. 아담처럼 범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담이 만일 그 지경이 되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경우 다시는 이전처럼 죽을 짓을 하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하고 다시는 범죄하지 않게 된다고 가정했을 때, 나 역시 그와 같이 범죄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비록 아담 자신은 아니지만 아담이 당했고 또 거쳐 온 전말(顚末)을 이제 성경을 통해 소상히 알고 아담과 같은 경고를 받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의 '생활'이십니다. 사는 '방법'이시기도 합니다. 어떻게 사느냐. '그리스도'로써 삽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인식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새로 해야 합니다. 사람이 먹고 마심으로써 목숨을 이어 가며 생활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나를 먹고 마시는 자는 그 안에 생명이 있다" 하신 것입니다[요 6:48-65]. 먹고 마셔야 사람은 삽니다. 살기 위해 먹는지 먹기 위해 사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내게 그런 의미가 되십니다.

자의식을 그리스도 의식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된 자의 정확한 자의식이 바로 그리스도 의식인 것입니다. 영원히 그러합니다. "아니, 나는 어디까지나 나이고 그리스도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이신데 어째서 영원히 그렇다고 하느냐" 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계시기 때문이니 "그리스도"의 의미가 바로 그러한 것이므로 이 사실은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뜻이 아니라면 절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분명 사람이시지만 하나님으로 여전히 영원히 계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의 영원한 자의식이 되시기 위함 다시 말해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의식으로 살도록 하려 하심입니다. 물론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내게 관한 한 홍길동[내 이름이 홍길동이라면] 의식으로 사십니다. 둘은 분명히 둘입니다. 그러나 하나로서 존재하는 데에, 삼위일체 원리의 원리됨이 있는 것입니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의 말은 맞습니다. 빛이 입자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사실'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이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이시지 내가 아니신 것입니다. 이는 백 번 강조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이 입자라는 것도 사실이지만 파동이라는 보어의 주장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둘로서의 입자와 파동이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 없으니 그 둘이 빛으로 존재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아인슈타인이 빛은 입자일 뿐이라고 고집하면 그는 '틀렸다'는 영원한 낙인이 찍혀지게 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절대로 나란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자의식은 과거에 속합니다. 그리스도 의식이 새로 창조된 이들의 새 세계에서는 삶입니다. 자의식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처럼 자의식이 그리스도 의식으로 옷을 덧입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옷을 벗으며 부끄러운 알몸뚱이 수치를 면할 수 없습니다.

옷을 벗고는 사람 세계에 나아가 설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듯이 생명 세계에서 용납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영원히 그리스도 의식으로 천국에서 살고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도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 남아 있으려면 반드시 그렇게 그리스도 의식으로 살아야 하고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이시라고 합니다[골 3:4]. 사랑으로 하나됨이니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그 말씀대로 그 계명대로 행하고 지키는 것이 필수이고[요 14:21,23] 그렇지 못하면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한 말 그대로 무산(霧散)됩니다.

"영혼 없는 육체가 죽은 것"[약 2:26]과 같이 그리스도 없는 나는 죽은 자입니다. 나는 육체요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새 창조의 구조로서, 우리 구원의 본의적(本義的)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개념 없이 그냥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해서 죽으셨으니"[이런 뜻으로 번역한 우리말 성경은 오류입니다] 나 따로 그리스도 따로로서 나는 그냥 감사하고 영생할 줄 알고 이전처럼 사는 것이라고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 일입니다.

§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은 사랑을 말하는 것이요 이 사랑은 한 몸됨의 삶의 법질서에서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 친히 이 법질서를 따라 뜻하시고 말씀하시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그 말씀 자체가 법이고 생명이 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위해 그리고 순종하는 자들을 위하여 구원이 예비되었고[고전 2:9] 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속성을 모르고 믿음에 의한 행함마저 거부한다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고 나니 내 보따리 내놓으라 하는 것과 같은 망상일 뿐입니다. 5리까지 가 주니 이왕 내친 김에 10리까지 가 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몫이지만 믿는 것은 나의 몫이요 이 구원된 사실을 근거로 하여 복종하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피조물이 복종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대신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아담의 죽음을 통해 확증된 것입니다.

§  초대교회 이후 300년 가량 계속되던 핍박이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그쳐지기가 무섭게 거대한 세력의 사이비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교회 박멸의 술책을 바꾼 것입니다. 위협을 해도 안되니까 이제는 협박과 회유책 양면으로 나온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의 기운은 초대교회에서부터도 왕성하게 태동되고 있었으나 거대한 세상 종교로는 나타나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그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야고보서나 기타 사도 서신에서 경고한 바와 같은 “행함이 없는 믿음”의 고질화가 시작됩니다. 그 결과 사도들의 편지들을 모아 오늘날의 신약성경을 만들 때도, 이와 같이 행함을 강조하는 대목이 특별히 눈에 띄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등을 한동안 신약성경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얼마나 교회가 급속도로 세속화하기 시작하고 믿음에서 떠나 타락해 갔는지 그 실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연히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미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을 의식하고 “나를 보내신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요 4:34]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래서 주님께서 이를 매일 먹는 “양식”[:34]으로 표현하신 것처럼 끼니때마다 먹는 양식과 같이 항상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는”[고전 9:27] 작업이 필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는” 것이 합당합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음이니 우리가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골 3:1-4].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일 것이니 곧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의 죄입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위하고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들로 인해 하나님 진노가 임합니다. 우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렇게 행했으나 이제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릴 것이니 곧 분, 악의, 훼방, 입의 부끄러운 말들이요 또한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릴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새 피조물답게 행할 일입니다[:5-10]. 말하자면 항상 내 앞에 계시는 주님에게서 영적인 눈을 떼지 않고 믿음의 물 위로 걸어가는 자세여야 합니다[마 14:28].

천국에서는 이런 “더욱 힘써 나의 택하심을 굳게 하는” 일이 필요 없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는” 일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이 세상에 있는 동안만은 쉴 새 없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전쟁하는 마당이요 따라서 시험의 무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별은 한번 따는 것으로 종결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따는’ 것은 매일 매시 쉬지 않고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요 6:54].

항상 눈을 들어 주님을 내 곁으로 모시는 즉 쉴 새 없이 “따기” 위해 위를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동시성에서 주님은 바로 내 앞에 계셔 주십니다[행 2:25]. 내 안에 계시지 않아서 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성령으로 이미 계시기 때문에 '사랑의 동시성'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쉴 새 없이 따는 동작을 취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갈 때 주님을 응시하지 않고 주변의 성난 바람에 한눈 팔 때 바다 위를 걸어가던 그의 믿음의 발걸음은 금방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을 경계 삼아야 합니다[마 14:28].

주님은 이미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밝히셔서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것이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을 것이라"[계 3:20] 하신 것입니다. 계시록은 세상 불신자들에게 주시는 메시기가 아닙니다.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치 불신자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촉구하시는 듯한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지만 항상 우리의 일상생활이 이렇게 그리스도를 매일 매시 모셔들이는 모양새가 되어 있음을 이와 같이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나는 매일 매시 의식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나를 한데 묶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로 동여매는 일을 내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능력은 그대로 나타나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동시에 움직이는 양면성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을 것이라"는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동시성과 양면성이 아니라면 "나는 그로 더불어 먹는다"는 말씀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러 이를 도치(倒置)시켜 "그는 나로 더불어 먹게 된다"는 말씀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3운법칙의 SN형과 OT형의 3과 19의 도치 형태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일방적인 주동(主動)이 아니고 양쪽이 동시에 작동되는 주인 의식입니다.

끼니 때마다 식사하듯이, 또는 수시로 먹고 마시듯이 해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요 4:34]이라고 하신 것처럼 나도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으므로 그렇게 함이 당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하늘에서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만큼 내가 사모할 분이 없다”[시 73:25] 한 대로,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나의 별, 나의 하늘 사람”이라 표현함에 무슨 하자가 있습니까.

내가 가장 사랑함으로써 나와 평생 같이 사는 사람을 가리켜 “내가 하늘의 별을 땄다”고 말한다 해서 무슨 흠이 있으랴 하는 것입니다. 실제 주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리고 성령으로 땅에 계시고 모든 믿는 사람에게 가장 이상적인 사람으로서의 ‘사랑’이 되어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별”이라 찬양하고 “나의 별을 땄다” 하고 “나의 별을 매일 매시 따는 낙을 누린다”고 하고 "나의 별을 매일 먹고 마심으로 힘을 얻고 무한한 행복을 느끼노라" 하면 멋있는 것이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계시기 때문에 내가 “딸” 수 있는 것이니 왜냐면 성령으로 친히 내 안에 임하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성령으로 내 마음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따기 위해서는 나는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면 나는 이 아름다우신 분과 사랑 관계에 있어야 하나로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고 그래야 영원히 사는데 하나님이 계신 줄도 모르고 살았고 나의 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었으니 이를 회개하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위하고 주님은 나를 위하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 다시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랑의 관계로써 영원히 하나를 이루는 일을 매일 매시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영생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 목적이요 그렇게 둘이 하나로서 사는 것이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다"[살전 5:10] 한 것입니다.

둘이 하나로서 함께 사는 데에는 남녀 한 몸으로 결합함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듯이 그래서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으로 여자가 주인이요 여자의 몸은 남자가 주인으로서 남자의 소유로 변함을 따라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이[고전 7:4],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로서 "한 영으로 합할"[고전 6:17] 때는 나의 삶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이니 곧 주님의 삶이 나의 것, 나의 삶은 주님의 것이 되어,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가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자기 자신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이라 하는 것입니다. 고로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모든 일에 나를 대신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으니 왜냐면 나 역시 똑같이 주님을 대신하는 삶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내가 스스로 나의 삶을 살되 둘이서 하나를 이룬 나의 상대[그리스도]의 삶을 산다는 것이지 이전 과거처럼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다는 그 차이입니다. 나의 삶을 사는 것은 나의 상대이신 주님 친히 살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됨이니 이런 하나됨을 가리켜 ‘사랑’이라 총칭하는 것입니다. 남녀 육체의 한 몸으로서의 사랑도 나와 그리스도와의 한 영 됨도 ‘하나 됨’에서는 그 이치가 똑같고 차이가 없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핵심이니 이를 명심해야 합니다. 왜 우리 인생이 구원을 논하게 되었느냐, 왜 죽음이 왔고 이런 불행한 삶이 와서 행복하고 영원한 삶을 희구하게 되었느냐, 그 본질적인 원인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성경은 다음 한 마디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님의 사자(使者, 천사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이 부리신다는 차원에서는 악령일 수도 있습니다-삼상 16:14)가 곧 치니 충(蟲, worms)이 먹어 죽었다”[행 12:23] 한 것입니다.

한 사람[아담]의 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는데[롬 5:12] 그 죄가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죽었다“는 말을 여기서 성경은 ”그의 마지막 숨을 쉬었다“는 말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 ”벌레“라는 것이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나 어쨌든 그런 것은 상관없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였다“는 이 대목이 요체입니다. 다시 말해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보좌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을 하니 백성들이 크게 소리 지르기를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며 신처럼 떠받들 때 마치 자기가 신이나 된 것처럼 영광을 자기 스스로 취했다는 것이니 다름아니라 자기중심 곧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죄의 본질임을 여기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관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이미 확립된 생명의 법질서임을 이미 밝혔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친히 만드신 피조물을 인간 부모가 그 자식들 위하는 것처럼 위하십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을 위하는 것은 피조물 자신이 아니라 그를 만드신 하나님이시니 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으니 그 아무 것도 할 줄도 모르고 자기 생명 보전할 줄도 모르는 갓난 아기를 전적으로 도맡아 먹이고 입히고 잠 재우고 하는 등의 일체의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로 역시 당연한 것은 피조물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 말씀 순종하고 그 뜻대로 맞추어 범사에 행동하는 것이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보아야 별 것 아닙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피조물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니 이에 마음을 맞추어 나도 역시 나의 동료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 곧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마 22:40]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이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웃인 인간 피조물을 죽게 했고, 아담은 모든 피조물이 몸이요 그 지체이고 하나님은 머리로 계시는 한 몸의 이치로 사는 생명의 법칙에서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복한 것이니 이 불순종은 결국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이웃의 살인 행위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그 증거가 이 지구상에 사람 생기자마자 제일 먼저 저질러진 가인의 살인(殺人) 행위입니다[창 4:8]. 그러므로 생명의 법칙, 삶의 법질서는 이미 확고하게 서 있고 그 판결을 따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도록 운명이 결정되어 있고 아담은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그 방법인 것입니다. 새 피조물된 우리에게 그러한 것이니, 왜냐면 이전의 삶의 양식 혹은 방법은 범죄로 인간이 죽게 됨에 이르러 이미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를 따라 쓸모가 없게 되었음입니다.

즉 산 자로서 그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 생명의 법질서를 따라야 하는데 따르지 않음으로써 일단 죽음으로 낙착되었는지라 두 번 다시 이를 어떻게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만일 되돌린다면 법 자체가 유명무실이 되어 질서가 무너집니다. 한번 세운 질서가 무너지면 그 뒤로는 그 어떤 질서든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사부재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진퇴양난의 참으로 곤혹스러운 처지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유일한 돌파구는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죽음의 고통과 함께 하심으로써 앞의 설명처럼 우리 각자와 하나가 되시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은 단지 영생을 베푸시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고, 제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그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게 하는 방법이므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 결과로 영생의 약속을 받게 하심입니다[히 10:36/요일 2:25]. 무조건 자기를 위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를 ‘자기중심’이라 하고 그렇지 않고 위의 설명대로 사람 사는 올바른 방법대로 사는 것을 ‘자기 부인’이라 합니다. 

“나는 너를 위해 존재하고 너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 너와 나는 둘이지만 하나이니 너는 항상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본다. 따라서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나는 너를 위해 그렇게 한다. 너는 나를 위해 살고 나는 너를 위해 산다. 너는 나의 삶을 살고 나는 너의 삶을 산다. 이와 같이 우리는 불가분이니 네가 있는 곳이면 내가 있고 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네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네가 가면 나도 가고 내 가는 곳에 너도 나와 함께 가고 있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이니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분리해서 존재할 수 없다. 네 생각이 나의 생각이고 네 마음이 나의 마음이고 너의 일이 나의 일이다. 그래서 죽어 있는 너와 하나되려고 내가 죽었으니 따라서 너는 나와 함께 죽은 것이며, 그러나 내가 아버지와 하나됨을 인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살리실 때 나와 하나됨을 인하여 너도 나와 함께 살아난 것이다" 하는 것이니, "과거 함께 죽었다,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내용만 빼고는 생기발랄한 남녀라면 누구나 사랑 가운데서 서로 말할 수 있는 영락없는 사랑의 노래, 사랑의 언어입니다.

바로 이런 관계가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니 곧 구원입니다. 따라서 이런 관계를 벗어나는 그 어떤 내용이든 구원일 수가 없고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죄악일 뿐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어도 여전히 죄인이면서도 구원은 변할 수 없다”는 따위의 말은 성경에는 없는 전혀 엉뚱한 소리들이니 이런 미혹에서 벗어날 일입니다. 고로 “하늘 사람”, “별 사람”, “별을 딴다”는 등의 표현은 한낱 낭만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서의 개인적인 친밀한 사랑[시 73:25]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어떻게 하면 실감 나게 표현할까 하여 이런 시도를 해본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 사람’은 우리와 같은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이 아니라 몸에서부터 광채가 나는 신령한 몸이십니다. 첫 사람 아담이 바로 이와 같은 몸으로 에덴낙원이라는 신령한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처음부터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범죄하여 죽음이 옴으로써 이와 같은 연약하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첫 사람 아담은 그 의미가 사라졌으므로 별다른 또 하나의 아담[그러나 이런 의미의 아담의 뜻은 그리스도로서 충분하니 "마지막 아담"이시라 하는 것]으로서의 의미가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되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방법밖에는 없고 이 역시 이 단 한 번뿐으로 또다시 계속 될 수는 없기에 “마지막”이라는 말이 붙게 됩니다. 처음 것과 마지막 것 즉 대칭되는 것끼리의 조화 곧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름입니다.

빛이 나는 신령한 몸은 천체(天體)로 치면 발광체(發光體)입니다. 하늘의 별들도 발광체임에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만일 밤하늘 공중에 그와 같이 신령한 몸으로 머물러 있다든지 움직인다면 별과 같이 빛나거나 혜성(彗星)과 같이 움직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늘의 사람을 ‘살아 있는 하늘의 별’이라 해서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기 때문에 단지 물체뿐인 그런 하늘의 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영물들로서의 악령들은 그 신령한 몸에서 빛을 내므로 소위 "UFO"로 위장하여 자신들을 나타낼 때 밤이라면 마치 별들처럼 빛나는 것입니다. 이 하늘의 사람을 내가 소유하게 되면 나의 몸 역시 그 분처럼 그리고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해와 같이 빛나게"[마 13:43] 됩니다. 내가 그 사람을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당연 변화입니다. 곧 “지혜 있는 자는 하늘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함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위의 것을 항상 생각하여 "별을 따는" 사람은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항상 별을 만드는 사람이니, 많은 사람을 옳은 데[righteousness]로 이끌어 또 그들로 하여금 역시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이끌게 하여 장차 그들로 별과 같이 비취게 만들 것이니 당연히 그러합니다. 그리고 “별을 먹는 사람”이라 한 것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요 6:53-55]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별을 먹는다”는 것은 땅의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마음을 두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있음을 말함이니, 이는 지금까지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신음하며 함께 고통 당하며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우리도 속으로 신음하며["to groan"]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을 말함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 얻었으니 보이는 소망이 소망일 수 없고[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고 있음이니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을 말하고 [롬 8:21-25], “참고 선을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2:7]. 고로 이 세상에서의 우리가 유일하게 할 일은 많은 별[장차 별과 같이 비취게 될 사람들]을 만드는 일입니다. 별과 같이 해와 같이 빛날 사람들을 만드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고후 6:1].

많은 사람을 옳음, 올바름[義]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올바르게, 한 몸 체제에서 살자,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하신 머리로 모시고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이 공동체 의식 가운데 살자는 공동체 의식 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바영사회’]”의 골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의식 운동'이기도 함은 당연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이니 그 방법은 간단히 우리 각자가 거처하는 곳을 위주하므로 '집 교회 운동'이기도 합니다.

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과연 하늘의 여러 별 즉 천체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명백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이 모든 천체는 인간 세계 즉 천하 만국을 위해 “분정(分定)하신[to divide]-신 4:19”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 대한 정보가 이런 별들로 나타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 용도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체를 우상 숭배로서 위하고 그 앞에 절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 때 “그의 별”이 나타났다고 하여 예루살렘으로 찾아 왔던 “동방(東方) 사람들”이 말한 것을 성경이 그대로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각 사람을 상대하는 그런 별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별 하나에 여러 사람이 관련되어 있거나 사람 하나에 여러 별이 관련되어 있거나 여하튼 인생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니, 바로 그런 의미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별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예수님 나실 때 하늘의 별을 보고 동방에서 찾아 왔다고 했고 예루살렘에 이르자 그 별이 문득 나타나 베들레헴 그 탄생하신 곳으로 이동하여 길을 안내했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별들은 천하 인간들을 위해 배분 할당하신 것입니다[신 4:19]. 그냥 덩그렇게 공중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이 세상의 인간들과 밀접한 관련이 지어져 유기적(有機的) 상합(相合) 속에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군왕이나 특별한 지배자가 태어나는 경우 영물들[천사든 혹은 악령이든]이 그런 특정된 별들과 상관되는 곳에 위치하여 모종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위치"라는 것은 이 지구상에서의 지상 관측을 기준하는 것입니다. 점성술이라는 것도 영물(靈物)들이 그런 계측(計測)의 일단(一端)을 인간들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천사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으니 악령들의 짓입니다. 단지 이런 추단(推斷)은 위의 성경 구절을 근거로 해보는 것이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는 전혀 갖고 있지 않으니 꼳 단정할 수는 없으나, "유대인의 왕으로 난 이의 별" 그리고 그 "별이 움직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런 영물의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물들의 신령한 몸은 말 그대로 발광체인 것입니다. 밤 하늘의 발광체는 오늘날처럼 천문학적 지식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별들로서 인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설명하는 것과 같은 영물들의 존재를 그들이 알 턱이 없습니다. 물론 모든 천체는 광막한 우주를 무대로 하여 정렬되고 운행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 크기도 우리가 감히 감도 잡지 못할 정도이지만 이 지구가 모든 우주의 중심이므로 지구를 기준하여 관측되는 구조라고 하겠습니다.

각종 천체가 발산시키는 유형 무형의 우주선(宇宙線)에 의해 그와 같이 정밀 정교하게 그 모든 천체들은 지구의 인생들과 직간접적인 관련이 맺어져 있고, 또 인생들을 위해 창조된 영물들이므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단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구가 우주 중심이라는 것은 성경에 의거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지구를 그 발등상으로 삼으신다 했으므로 하나님이 서 계시는 위치가 말하자면 이 지구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한 쪽 끝에 위치해 있는 지구이므로 지구를 중심으로 부채꼴 형태로 우주가 전개 또는 산개(散開)되어 있다고 할까, 그런 것이겠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이 최고 정점으로서 그 이상으로 그 위에 가는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디다. 막강한 능력의 영물들도 인간을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따라서 외계인이 있고 외계 문명이 있다는 둥 황당하게 지어내어 인생들을 속이려는 악령들의 기만 술책에 말려들지 않도록 할 일입니다.

모든 사실은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게 되면 다 알도록 되어 있습니다[고전 13:12]. 그리고 성경은 그 어떤 형태든지 점술(占術)을 단죄하고 있습니다. 별 점을 치든 무슨 점을 하든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니 회개하지 않으면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 같이 됩니다. 이 부부는 회개 없이 영원 속으로 들어갔으니 멸망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 일을 들은 모든 교회가 크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11].

멸망이 아니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 살리는 일하기 위해 남아 있는 것이고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 자체를 무서워할 리 없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 한 것입니다[빌 1:21]. 그러므로 “크게 두려워했다”는 것은 멸망을 목도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성경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한 것도 멸망과 직결된 경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점술을 금하시는 것은 인생의 길흉화복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데 있는데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을 목적하는 것이므로 죄악이 되는 까닭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죽음처럼 주님의 뜻이면 당연히 죽는 것이 의(義)가 되는데 주님과 그 복음 전파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기 장래에 관해 궁금히 여기는 것은 불순하니 자기 자신을 위함이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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