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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방송 설교
어느 목사의 라디오 방송 설교를 들으니 그 목사가 주일 설교를 한다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중에, 가룟 유다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주님께서 최후 만찬 후 사도들의 발을 씻기실 때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씻어주셨다는 ‘성경에 없는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어떤 교부[敎父]가 그 설교 중에 “가장 먼저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다음에 차례로 나머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고 언급했다면서 이를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교부’는 물론 그 목사도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기 입으로 증명하는 꼴이 되었다.
그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그 설교를 아무 비판 없이 들을 것은 물론이고 그리고 직접 성경을 읽지 않는 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면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기를 저녁 [만찬]을 잡수신 후 그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고 되어 있고 가룟 유다는 이미 주님께서 제자들과 식사 중에 빵 한 조각을 주님으로부터 받고서는 곧장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 목사는 평소 성경을 읽는 대신 성경에 대하여 써놓은 다른 사람들의 설교나 주석에 의존하고 있고 있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그는 거짓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런 거짓말에 넘어간 것이다. 오늘날 이런 현상이 어찌 그 목사 한 사람에게만 그치랴. 많은 사람이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더군다나 성경을 왜곡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두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경을 배우려 하지 않고 성경연구를 어떤 학문 차원에서나 접근하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대로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인간이 지어낸 말에다 자기의 영원한 구원의 명(命)줄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이비에게 사로잡히지 않으려거든 누구나 일심으로 성경을 읽을 일이다. 탐욕이 우상 숭배로서[골 3:5],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위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성령의 가르치심보다 사람이 가르치거나 또는 말한 것을 더 숭상하는 것은 분명히 일종의 우상숭배다. 신상(身像)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 절하는 것만이 우상 숭배가 아닌 것이다. “교부[敎父]”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검증 받은 것인가.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런 실수도 가끔 있는 것이지 당신은 없느냐?" 할 것이다. 그런 사소한 일에다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데에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성경을 너무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룟 유다의 발부터 먼저 씻으셨다는 것은 순전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이렇게 지어내는 데에서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마리아가 자녀를 두었다고 하는 성경보다 사람의 생각을 앞세워 마리아가 동정녀라는 치명적인 거짓말도 지어낸 것이 아닌가.
§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분을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하셨는데도, 선지자로 있었다고 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등 각종 능력을 행했다고 해서 자기는 틀림없으리라 여기던 많은 사람이 결국 멸망에 이른다고 하신 것이다[마 7:21/25:45]. 오히려 그들에게는 애초에 그 믿음 좋았던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베드로든 바울이든 요한이든 범죄하는 자는 멸망인 것이다. 그들이라고 또는 12사도라고 특별히 봐주시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바울 역시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함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한다"[고전 9:17] 했고,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다.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the terror of the Lord]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다"[고후 5:9-11] 한 것이다.
죄 짓지 않는 것은 이전처럼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고 나를 100% 사랑하시어 당신 자신을 전부 내게 주시고 지금도 당시와 똑같게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세상에 그의 보내심을 받음으로써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먹는 양식[먹지 않으면 그 생명은 끝나는 것이니 우리의 구원도 끝나는 것이다]으로 삼음에 있는 것이니[요 20:21,22/4:34], 바울 자신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룬"[빌 2:12] 것임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3] 함으로써 스스로 확인한 것이다.
이런 것이 구원을 이룸이요 믿음인 것이다. 우리는 구원 얻는 믿음을 무턱대고 아무 근거도 없이 안일하게 여겨온 것이다. 이는 영락없는 자살행위인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여자가[남자는 여자에게 넘어가] 완전히 사탄의 농락에 빠져 들어간 아담처럼 그렇게 사탄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는 실상을 "눈뜨지"[행 26:18] 않는 한 미래에 대한 희망은 없다. 이렇게 사탄에게 붙잡혀 있다가 그 압제에서 벗어난 순간 사탄 일당[이 세상의 배경이 되어 있는]과의 치열한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다.
인류사(人類史)는 이 사탄과의 전쟁 상황인 것이다. 처음부터 전쟁이 선포된 것이다[창 3:15,16]. 말하자면 적진(敵陣)에서 벌어지는 전투다. 원래 우리의 땅 곧 인간의 세계였으나[아담이 영계와 자연계를 아우르며 다스리는] 어리석게 범죄함으로써 자기 아래에 있던 사탄에게 절하여 굽히고 들어간 결과다. 그래서 우리는 지극히 처참한 죽음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몰골이 되면서 사탄 등 악령들은 상대적으로 신(神)들로서 군림하게 된 것이다. 한국이 과거 일제에게 강점당하여 도리어 주인이 쫓겨나고 강도들이 들어와 판을 치던 바로 그런 판국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실상을 바로 알아야 구원도 된다. 장차 세상이 멸망한다는 정확한 정보를 직접 받고도 이를 믿지 않을 때 소돔 고모라와 함께 멸망당한 롯의 두 사위들과 같이 되는 것이다[19:14]. 세상을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롯의 처는 소돔 고모라를 빠져 나가면서도 즉 구출은 되었지만 그래서 발걸음은 구원 받은 상태에 있지만 마음만은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중도에 모든 것은 물거품으로 돌아가 좌절된 것이다.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롯의 처가 되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고개를 돌리는 것도 간단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현장에서 즉결 처분을 당한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에 된 일이니,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다"[행 5:3] 한 대로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죽음도 한 순간의 마음의 변절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고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그 모든 편지에서 그렇게 강조한 바울 사도는 거침없이 선포한 것이다. 여기에는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지 않았다. 딴에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저주를 받아 멸망에 들어가는 이들이 "많기"[마 7:21/25:45]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얻는 구원임에는 영원히 변함이 없되 그 믿음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를 밝힌 것이다. 그래서 역시 "참고 선을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고 악을 행하는 자는 멸망한다"고 한 것이지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하지 않았다[롬 2:7-10].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악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 선을 행하는 자는 영생의 부활에 이른다"[요 5:29]고 하셨다.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줄 것이다" 하셨다[계 2:23].
교회에 경고를 주신 것이지 세상에게 경고를 주신 것이 아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더욱 그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다. 왜냐면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되는 것이지 그 행한 행위를 따라 심판 받아 멸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은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산 자가 됨에 있는 것이다. 선을 행하지 않을 때 다 된 구원이지만 다 된 밥에 코 빠지는 격으로 만사휴의가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성경은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건만 사람들이 성경을 읽음으로써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을 생각은 않고, 무조건 사람의 거짓말에만 귀를 기울인 탓이다.
삼위일체 원리의 도식에서도 보듯이 일방적이지 않다. 쌍방 교류로서의 하나됨이다. '갑'에서 '을'로 화살표가 그려진 채로 한결같이 진행하여 이는 영원히 불변이지만 동시에 '을'로부터도 '갑'으로 역류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는 '병'을 통하기 때문에 역류가 아니라 순류(順流)인 것이다. 하나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병'이 존재함으로써 '갑'과 '을'의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를 제대로 나타내는 것이 이 3위1체의 원리의 도식이다. 갑과 을은 말 그대로 이렇게 함으로써 상보(相補)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계명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하나님의 계명은 주님 친히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신 대로 첫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함이다[마 22:40].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새 계명”에는 하나님을 그와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빠져 있고 오직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하셨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첫째 계명은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다. 둘째 계명은 그와 같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가 한 몸을 이룸이니 곧 하나님을 공동의 머리로 모시는 한 몸 체제를 이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는 이들은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구원되지 못한 자에게 그런 새 계명을 주시는 법이 없다. 왜냐면 한 몸 안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몸을 구성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가 없음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는 것은 무엇이냐.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기 때문에 나와 하나 되실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되셨다. 왜 사람이 되셨느냐 하면 나와 함께 죽으시고 그리고 함께 다시 살아나신 바탕 위에서 나와 이렇게 영원히 하나가 되셔서 영원히 나를 위해서만 사시고 모든 일을 하시고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선물이시라[요 4:10], 성령으로 내게 오심을 선물이시라 하는 것이다[행 8:20/2:38].
선물은 영원한 것이요 그리고 내 것 즉 나의 소유이다. 다시 말해 나를 위해 존재함이다. 그와 같이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하시는 분으로 계심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 자신을 위하심[영원히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누가 위하느냐 하면 내가 위하는 것이니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까닭이요 아버지께서 위하시니 아버지와 처음부터 하나 되어 계시는 까닭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누가 위하느냐 할 때 당연히 아들께서 아버지를 위하시니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아들보다 크시니 아버지께로부터 아들께서 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보다 크신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위하심을 받기에는 당연히 아들로서는 부족하시다. 왜냐면 '작으신' 아들께서 '크신' 아버지를 위하시지만 작고 큼의 차이로 해서 충분히 아버지를 위하실 수 없다는 그런 차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버지는 원래부터 홀로 계시던 분이시다. 홀로 계셨다는 것은 아무 부족함이 없이 자존(自存)해 계셨다는 의미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다[I am what I am]” 하셨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고로 아들로부터 위하심을 받지 않으셔도 아무 부족함이 없으시니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오직 아버지와 아들과의 원활한 관계 또는 아버지께서 애초 홀로 존재하시던 그 모습을 계속 유지하시기 위한 방편으로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는 것으로 정하신 것뿐이다.
따라서 아들께서 존재하신 이후로는 아버지께서는 오직 아들만을 위하시지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다. 그래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갑과 을의 사랑으로 하나 됨이 영원한 생명과 사랑[둘이 하나 됨]의 법질서로 정착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각자 모시고 있으나, 장차 신령한 몸으로 계시는 그리스도를 대하게 될 것이니 그 때는 우리 몸도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도록 정해져 있는 상태다.
말 그대로 나와 그리스도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 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은 나를 볼 때 혹은 나 자신이 나[육체]를 대할 때 둘의 모습이 아니요 단 하나의 모습뿐이지만, 실제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둘이다. 모습[형상]은 하나이나 실체는 그리스도와 둘이다. 이것이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로서의 모습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모습이시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므로 둘이신 것과 같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은 생략하시고 둘째 계명 즉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새 계명을 받는 구원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 관계에 있어 그리스도 친히 자기 자신처럼 되어 자기와 함께 계시므로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계시는 하나님[아버지]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이미 사랑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사랑과 구원은 이렇게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사람으로서의 짝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시기도 하므로 모든 사람이 다 이 한 분 짝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니 머리되신 그리스도시다. 한 몸을 이루고 있으니 머리를 비롯해 모든 지체가 바로 나 자신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함이요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신 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사랑함이니 즉 자기를 부인한 바탕 위에서 다시 말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9] 토대 위에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명령과 계명과 말씀과 지시를 따라 사랑함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고로 여전히 죄인으로서 육신 가운데 살면서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으므로 죄를 지을 수가 없다[요일 2:1/3:6-10/5:18/고전 15:34/ 벧전 4:1]. 죄는 개인적인 사적(私的)인 욕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약 1:15].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약 1:15] 것이기에 그렇다.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심은 아담 창조 때 자연계에 속한 육체 안에 영혼이 조성되던 과정을 따르는 것으로서, 현재 자연계에 속한 나 자신은 아담의 육체[애초 창조된 대로의 자연계에 속한]에 해당되는 것이고 성령께서는 그 영혼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아담의 영혼 창조 당시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신 형용을 하시느라 숨을 내쉬시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요 20:21,22]. 그러나 이 성령의 의미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심으로써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필연이었으니 왜냐면 인간은 아담 범죄 후 죽음의 대가를 치르고 있어 일단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죽은 다음의 다시 살아남인데 인간 스스로 이렇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관계로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대표로서의 마지막 아담 그리고 제2의 나, 또 하나의 나 자신으로서 사람이 되심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나와 함께 죽으시고 함께 다시 살아나심을 친히 이루셨다. 새 창조는 옛[처음] 창조의 폐기에서 비롯됨은 당연하다. 고로 처음 창조의 잔재 또는 유물로서의 죽음과 죄를 완전히 청산하고 척결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 창조에서 죄와 죽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피조물 즉 영물과 인간의 소행(所行)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원인[죄]과 결과[죽음]를 한꺼번에 처결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아담을 창조하셨듯이 우리 각자를 새로 창조하시는 것이다.
즉 죄와 죽음에서의 완전 해방이다. 사탄은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만들 때, 죄 문제는 빼고 죽음 문제 하나만 다루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죄를 짓는 따라서 죽음은 여전히 그 결과가 되는, 따라서 구원이 될 수 없는 이름만의 구원을 조작해내어 믿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개신교의 교리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인간이 만든 것이지 성경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닌 것이다.
세상 종교와 똑같은 것으로서, 단지 속이는 정도가 심하니 그리 하고도 스스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자처하고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속임수의 폐해가 크다. 죽음으로써 옛 창조가 폐기되었고 다시 살아남으로써 새 창조가 이룩된 것이다. 고로 옛 창조 그대로가 새 창조에 반영될 수도 될 리도 없다. 다시 말해 향후 죄 짓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 우리 구원의 본질임을 재차 강조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원리원칙에 철저하신가.
한번 죽기로 되어 있으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고 그 외의 달리 방법은 없음이다. 그 것이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의 의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우리 모두 죽은 자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은 죽음의 세계이고 생명의 세계는 아니다. 이 사실부터 먼저 아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배우는 것이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끄심]이다[요 6:65].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힘은 이러한 ‘죽은 세상’에 대하여 ‘죽음’이니 세상의 죽음의 일에 관여하거나 연루되지 않음을 가리킴이다.
생명의 일이 죽음의 일에 관계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는 비명을 올릴 수 있는 자만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롬 8:2]. 감히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임하여 오셔서 사신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는가. 물론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시다. 이는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법대로 처리하심을 가리킴이다. 내 몸이란 것은 전적으로 나를 위하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는 이가 없고 보호하며 양육하는 것이다[엡 5:29].
바로 그와 같이 나를 전적으로 위하시는 분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데 누가 이를 마다하고 싫어하겠는가. 그럴 바에야 자기 몸을 싫어하고 마다할 일이다. 가령 내 몸이라 하더라도 자연법칙을 따라야지 덮어놓고 내 몸을 나를 위하지는 않는다. 내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과식한다든지 하면 나는 병을 자초하고 죽음까지 부르는 것과 똑같이 내가 생명의 법칙대로 따르지 않고 자의적(恣意的)으로 행동할 때 무사할 리가 없다.
그래도 무사하다면 그 자체가 심히 괴이한 일이 될 것이 아닌가. 무턱대고,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인간은 본래 죄 많고 어쩔 수 없이 불결하다는 선입관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런 것도 일종의 믿음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믿음"이 있는 한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여지가 그 대신 없다. 그런 생각을 넣어주는 자가 바로 사탄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사람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에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시는 것이다. 거룩할 수 있기 때문에 거룩하라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우리는 거룩하게 되어 있다[롬 6:22]. 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니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요[고후 5:15] 다시는 이와 같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으로써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거룩함인 것이다.
이것 믿지 못하면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구름 잡듯이 하고 바람 잡듯이 하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처음부터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는 사실을 가리켜 하는 표현이다. "거룩한" 천사들이라 함도 마찬가지 의미다. 우리가 범죄하지 않는 것 즉 “육신대로 살지”[롬 8:13] 않는 것은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므로 그렇고 또한 과거의 나란 존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도 함께 죽어[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 되어 있는 이상] 과거의 한 생애가 이미 무덤에 장자 지내져 완전히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생애가 끝장 난 것이다.
믿는 것은 이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그것은 믿음도 구원도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신 이후로부터] 나를 위해 살 아무 근거도 이유도 핑계도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나 자신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믿기 않기” 때문이다. 사탄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닌 "부정(否定)하는" 것으로 즉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또는 생명의 낙을 일절 버리도록 강제하는 것처럼 인식하도록 만든 것이다.
현재 엄연히 생존해 있는데 어찌 부정할 수 있고, 살기 위해 즉 삶의 낙을 누리기 위해 생명체가 되어 있는데 자기를 부정하다니 말이 되는가. 자기 부인은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진해서 기쁨으로 하는 것이다. 사탄의 꼬드김으로 아주 잘못된 인식으로 성경의 "자기 부인"을 모두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주님 친히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고 나를 따를 수 없다” 하신 것은 주님과 하나 됨을 인하여 주님 친히 나를 위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은 물론이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의 양면성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죽음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 있기 때문에, 이 다시 살아남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있음이니, 이 다시 살아난 삶의 구조가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위함에 있는 것이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는 나의 소유가 되시어 영원히 내게 주신 선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 자연적으로 또한 나를 위하는 않는 관계로 자기 부인이 되는 것이다.
덮어놓고 자기가 죽은 줄을 알라, 자기를 죽여라, 자기 부정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는 줄을 아는데 자기를 위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자기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자기를 자신보다 더 잘 아시어 더 잘 위하시는데 누가 자기를 서투르게 위할 마음을 먹겠는가. 자기를 지으신 이가 자기를 위하심보다는, 아무래도 자기는 서투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자기 부인은 불교에서 말하는 대로 “‘나’라는 것이 없다, 현재의 ‘나’는 참다운 ‘나’가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나’가 아니다” 등의 허공의 메아리 같은 소리보다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절대로 나를 위하지 않는 그래서 사나운 짐승과 같은 ‘나’를 영원히 박멸시키는 구체적인 방법인 것이다. 이런 짐승 같은 나를 잘 길들이려 할 것이 아니라 [실제 길들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깨끗이 죽음으로써 처단해버리고 이제는 영원히 나를 위하지 않는 구조로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이 될 일이다. 그러므로 야수 같고 맹수 같은 ‘나’와 ‘나’와의 대립이 아니라 공동의 머리[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룬 ‘나’와 ‘나’와의 융화, 조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허황된 논리, 종교 교리를 버리고 그리스도께 나아와 하나님의 품속으로 돌아오는 것이 오직 시급하다. 이와 같이 "자기 부인"이 실제로 말하면 생명의 법칙이고 생명의 낙을 누리는 지름길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고난 고통으로 비쳐지는 것은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이요 고난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세상에 처해 있는 한은 이 지배 원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에 순응하면서 사람 살리는 사업에 임하는 것이다.
혹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구원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생명의 일이므로 나의 생명으로 그 사람 건지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죽음의 고난과 가장 먼저 함께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순서다. 그래야 그 사람도 나의 생명과 하나 됨을 인하여 구원될 수 있는 그런 이치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이 원리를 우리는 따름이다. 둘이 하나 됨 곧 사랑의 원리다.
캐나다의 앤 프레스턴[Ann Preston] 같은 이는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아이가 엄마 아빠 따르듯이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엄마, 엄마, 아 빠, 아빠 하듯 “아버지[하나님]”를 부르며 매사 기도로 임해서 ‘기도 응답의 사람’, ‘놀라운 믿음의 사람’, ‘아일랜드 출신의 성녀(聖女)’로 만 96년의 독신 생활을 살다 간 하녀 출신의 평범한 가정부였다. 그가 죽을 때는 그가 살던 토론토 시장은 물론 인근국의 미합중국 대통령까지 조문을 왔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만인의 칭송과 애도 속에 가는 이런 것이 부러워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의 기도생활이 그만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그는 시장 보러 갈 때도 “아버지, 무엇을 살까요?” 저녁 준비를 해도 “아버지, 오늘은 무슨 반 찬으로 준비할까요?” 하고 말 그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만일 어떤 신들린 점장이가 있어 자기가 위하는 영(靈)에게 무슨 일이든 묻고 한다면, 그런 것과는 차원부터 다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일편단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요 4:34] 차원에서 그렇게 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기도의 사람이 된 것도 사연이 있었다. 젊을 때 남의 집 가정부로 일하면서[그는 평생 가정부였다] 마루 바닥을 일껏 닦아놓으면 짓궂기 말할 수 없는 주인 집 아 녀석들이 비 오는 날 신고 쏘다니던 장화 그대로 벗지도 않고 들어와서는 짓밟고 나가버리는 판이었다.
이럴 때면 앤은 그의 아일랜드 기질답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열화 같이 성을 냈다. 이런 암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하루는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듣는데 “항상 기뻐하라, 매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8]는 말씀을 듣고는 “아버지,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나 종일 집 일에 매달리느라 기도할 틈이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고 기도한 결과, 일하면서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다는 응답을 받고는 그 길로 그와 같은 기도 생활에 들어간 것이 계기였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삶의 무한한 기쁨이요 평안이요 낙인 줄 스스로 터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누구든지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경고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다. 스콧틀란드의 여대생 헬렌[Helen Ewan]은 대학 캠퍼스 내에서도 이름 난 ‘그리스도의 향기(香氣)’였다. 남학생들이 모여 음담패설을 늘어놓다가도 그가 지나가면 뚝 그칠 정도였다. 그는 옷 가게에 갈 때에도 무슨 옷이 좋을지 반드시 주님께 여쭙곤 했었다.
아편전쟁 당시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는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먼저 주님의 의향을 여쭙고 난 다음에 했다. 그가 귀신 쫓아내는 목사로 더 유명했던 것은 어느날 갑자기 특별한 능력을 받아서가 아니라 가정예배를 보던 중 갑자기 그 아내가 귀신 들려 안하던 짓을 하는 것을 보고 놀라 며칠 금식 기도를 한 후 믿음으로 귀신을 명하여 귀신을 쫓아내게 되면서 시작된 능력이었다. 그는 그 이후 여생을 믿기 전의 자기처럼 아편에 중독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환자들을 상대로 한 복음 전도 사업에 바쳤다.
이상과 같이 역대의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그 사랑 가운데에서 제대로 된 삶의 의미를 찾고 흡족히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상으로 나타난 이런 믿음의 인재(人材)들은 이루 거론하기조차도 벅찰 정도로 무수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낯설다 하고 어색해하는 법이다. 제대로 알려면 알고자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기미조차 없다. 이러니 어찌 믿음에 이를 수가 있는가.
영생 하나에만 욕심 내어 덤비는데 성경은 이런 이들을 일찌감치 차단시켜 들어 오지 못하게 막고 있음을 성경은 이미 여러 차례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저들에게 비유로 말하기를,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 하였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들에게 이루었으니 일렀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다”[마 13:13-15] 하심과 같다.
이슬람교만 아니라 세상 종교에 무슨 특별한 심오한 진리가 스며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흉내 내어 그리스도의 교회로 자처하는 로마 카톨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마리아를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정도이니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의 오의(奧義)는 건드리지도 못하고 그 껍질만 부여잡고 몸부림치니 여러 가지 당치도 않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 이들 세상 종교의 공통점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둘이 하나 됨”이 모든 생존의 원리이다.
인격적인 피조물에게는 이것이 ‘사랑’으로서 작용된다. 그리고 물질계를 포함하는 만물로서는 3위1체 원리로 작용한다. ‘양면성의 원리’라 대칭성 원리라 하기도 하고 ‘짝’의 원리라고도 한다. 그리스도 오신 후 “한 남편에 한 아내”[딤전 3:1,12/딛 1:6]라는 것도 여기서 나온다. 그리고 부부가 되어 있는 사람 외에는 절대로 부부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남녀의 풍기 문란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생존의 원리를 어지럽히는데 대한 양심의 준엄한 선고인 것이다.
결혼을 굳게 맹세한 사이라 할지라도 혼전(婚前) 교접(交接)이 죄가 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므로 자기 욕심에 못이겨 무엇이든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일은 더 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그렇다. 살아도 죽어도 주님 위함이다[롬 14:7-9]. 내 스스로 욕심 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생리적 욕구든 무엇이든 욕심은 욕심이다. "먹든 마시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고전 10:31] 것이 생명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인생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이 이 자연계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의 결과로 이런 곳에 처해 있으니 이 자체가 죽음이므로 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말해 인간이 원래 위치해 있던 곳으로 복귀하는 것을 말함인데도, 여전히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남녀 교접을 쾌락으로 삼는 것을 인생 본연의 생명의 낙이라 착각하고 마호메트 자신이 20명 안팎의 처첩을 거느리고 살았고 또 그 추종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 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하여 교회가 형성되어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이들이 한 몸의 각 지체를 이룬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머리와 몸은 둘이 하나 됨이다. 머리와 몸의 대칭 관계다. 머리는 하나요 몸의 지체는 여럿이다. 그러나 한 몸을 구성하고 있고 머리 또한 그 몸과 더불어 한 몸인 것이니, 고로 언제나 ‘둘이 하나 됨’이다. 셋 또는 넷이 또는 여럿이 하나 됨을 이루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양자(兩者) 관계다.
이 ‘둘의 하나 됨’은 서로 상대가 된다는 뜻으로서 상대가 단수냐 복수냐 하는 것으로 구애되지 않는다. 단수 대(對) 단수 또는 단수 대 복수일 수도 있다. 상대가 복수일 때는 이미 개별적으로 반드시 1 대 1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 때에 한한다. 고로 기본 원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둘로서 하나 됨’이다. 그래서 한 남편의 한 아내이지 한 남편에 여럿의 아내이거나 한 아내에 여러 남편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한 아내[남편]에 여러 남편[아내]의 관계도 결국 둘[남편과 아내]이 하나 됨이 아니냐 하겠지만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견지에서 보면 한 사람[아담,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다는 사실에 근거하므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이지 한 남자와 여러 여자 또는 한 여자와 여러 남자가 한 몸이 될 수는 없다. 아담과 똑같은 인간이 나와야 할 필요성에서[그리고 이 경우 여러 인간이 필요 없었고] 그리고 그 똑같은 두 인간을 구별함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기본은 둘로써 이루어지는 하나다. 조물주와 피조물 관계에서도 태초에 아버지께서 아들 하나를 당신 자신을 소재로 하여 만드심[낳으심]으로써 된 것이니 형상으로 만드셨으므로 형상은 오직 하나이지 둘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물주와 피조물 관계도 1 대 1의 양자 관계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도 그리스도와 1 대 1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 그리고 그 몸의 각 지체의 관계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남녀 관계도 1 대 1이지 단수 대 복수로 형성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신랑]와 교회[신부] 관계는 이미 개개인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어 1 대 1의 관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와 같이 한 머리에 몸의 많은 지체를 이룸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 신체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각 지체와 머리는 이미 1 대 1의 관계가 되어 여러 지체의 지시를 받지 않고 머리와 한 신경으로 연결되어 머리의 지시만을 직접 받아 수행하는 구조다.
불교와 달리 천주교와 이슬람교는 무력(武力)으로 포교하는 종교다. 이들은 이 세상 지배자가 악령 사탄이란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탄의 속임수에 말려든 증거다. 사탄을 사탄으로 바로 보지 못하니 적을 이기는 것은 먼저 적을 정확히 아는 것인데 어떻게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속절없이 그 지배 아래 드는 것이다.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인데 사탄 편이 되지 않 고서는 세상 권력을 행사하는 것조차도 불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렇기 때문에 세상 권력을 등에 업지 않는다. 세상 권력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지만, 세상에서는 사탄이 직접 그 권력을 행사하는 터이므로 그래서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터에 사탄의 자리에 들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무릇 권력은 올바른 편에서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데에 의미가 있으므로[롬 13:1] 국가가 부과하는 세금을 충실히 납부하고 기타 국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법을 핑계 대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도록 명령하거나 종용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순종하여 따르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하게 된다.
주님께서 세상 권력자 로마 총독에게 증언하신 바와 같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하신 것이다. 불교는 무력으로 세상을 제압하려고는 하지 않으나 세상 권력을 타는 것은 선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만이 처음부터 세상[사탄이 그 배후 조종자인]의 적대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어서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을 각오하고 감수하는 것이지, 세상 권력에 편승하지 않는 종교가 단 하나도 없다.
성경적 위치에서 보면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다. 이와 같이 물과 기름 사이가 성경과 이 세상이다. 유대인의 유대교도 같은 종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터이기에 세상을 적대시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사탄의 존재를 알 리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만 사탄이 이 세상 신인 것을 알게 되므로] 이런 '세상 종교'의 안목으로는, 세상은 단지 무지하고 미개하므로 그들의 교리로써 세상 사람들을 소위 “무명(無明)”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개화(開化)시킨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뿐이다.
유대교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세상 종교로 변질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말하는 그들의 모세 율법인데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니 자연적으로 그렇게 된 결과다. 때문에 세상 종교는 무엇보다 권력을 잡을 필요를 느끼는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포교의 지름길로 알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세상 종교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의 하나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일 진리가 아니라면 초대교회 당시 사도 야고보가 죽임을 당한 즉시로 무력(武力)에 호소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 권력을 잡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지금 이슬람 권에서 전도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세상 기준에서 보면 정상이다. 바울이나 12 사도가 초대교회를 세운 것이 당시는 이렇게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전도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주님 오실 때까지는 세상이 변할 리가 없다. 사탄은 그 때까지는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다. 사탄이 신이라는 것은 앞서의 설명대로 상대적인 것이니 우리 인간이 영계의 신령한 몸을 잃고 자연계에 속한 초라한 육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이라 해서 무슨 초월적인 막강한 존재가 아니라 나와 같은 일개의 피조물이다. 한 때 아담 당시에는 이런 막강한 영물들 위에 군림해 있던 막강한 인간이었다. 범죄의 결과 죽은 자가 되면서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개개인이 바로 막강한 마지막 아담의 위치에 원상 복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는 목적이 있어 자연계에 속한 몸 그대로다. 그리스도께서 목적이 계시어 우리와 같은 육체로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은 의미다.
즉 사람들을 건져내기 위한 목적이다. 우리의 싸움은 이 목적 달성에 있다. 아무리 육체적으로는 핍박을 받아 고난과 죽음의 표적이 되어도 우리 목적을 달성하면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이기는 자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고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이 세상에서는 이 목적을 위해 죽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요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의 이김은 우리를 육체적으로 박멸하는 데에 그래서 세상에서 우리 존재를 말살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런 일은 사탄이 감히 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서 오는 것이므로 손댈 수 없다.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감히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8]. 그가 이기는 이김은 우리의 목적을 좌절시킴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야 만신창이가 되더라도[바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일부러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는 것이 기본인 것이다] 사람들을 건져내는 일에 성공하면 그것이 승리다.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복음 전도 설교를 한다고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보내심을 받은"[요 20:21] 자로서만 그와 같이 사람 살리는 일 곧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둘이 하나됨의 이치를 따름이니 곧 몸과 머리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를 않고 오직 보내신 이를 위해 살아 그 뜻을 행함이므로 자기 부인이 필수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없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할 수도 없거니와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여러 수십만의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다고 해도 자기 부인의 토대 위에서가 아니면 성령의 나타나심이 되어질 수가 없다. 성령의 역사(役事)로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 16:8]. 우리가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전 3:9/고후 6:1] 것인데, 자기 부인 없이[자기 부인이라야 성령께서 함께 하심이니 왜냐면 둘이 하나된 관계에서 움직여야 하는 까닭이다] 혼자 아무리 외치고 해보아야 구원의 역사(役事)는 없다. 믿겠다고 하는 이들이 나타나도 그것은 세상 종교[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인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지 구원 받은 사람을 탄생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자연계가 인간 살의 터전이 아님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인생이 뿌리 내리고 살 고장이 아닌 이렇게 자연계에 속하여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세상은,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를 역전시켜 전화위복되게 하여 희생 제물로서의 삶을 살고 그래서 사람 건져내는 구실을 다하는 데에만 이용될 뿐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자연계에 속한 몸이니,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죽고 또 고난 받는 역할로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 위하여 본을 보이신 대로 그 발자취를 따름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하면 이런 세상도 천금 같은 기회로 삼아 아주 의미심장한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음이다. 오히려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보다 어느 면으로는 더한 가치의 의미로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 가운데 있고 믿음이 있으면 이 자체가 무한 보람을 주는 것이고 따라서 즐거움이 되는 것이지 불만스럽고 억지로 하는 일은 아닌 것이다. 주님께서 자기 일을 억지로 하셨다면 아예 처음부터 세상에 오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님께서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시라 해서 우리의 이 처지와는 아무래도 다르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비록 영으로는(롬 1:4)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으로는 우리 몸과 하나도 차이가 없으셨던 것이다. 시험을 받아도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고 그 당하신 모든 것이 우리와 조금도 차이가 없으신 완전한 사람의 위치에 계셨다. 이러한 몸으로 "죄가 없으셨으니" 우리 역시 내 안에 성령께서 계셔서 주님과 항상 마주 보며 사랑 가운데 즐겁게 사는 삶이면 얼마든지 우리가 죄에게 다시는 굴하지 않고 노예되지 않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로마서에도 말했듯이, 원래는 깨끗하나 그것을 깨끗하지 않다 여기면 즉 그렇게 믿으면 그 믿음대로 되어 그 깨끗한 것이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자면 둔갑을 하는 것이다. 희한하지 않은가. 둔갑한다고 해서 그 원래의 성질을 스스로 변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에게 작용되는 그 영향력만은 그렇게 변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믿음의 특징이다. 100을 믿으면 100의 결과를 내는데 그 100을 내는 역량이 있음에도 겨우 20을 내는 것으로만 잘못 믿으면 천하 없어도 100이 아닌 30도 아닌 오직 20 이상의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것이 믿음의 특성이다.
이런 것이 '믿음'이다. 믿음 아닌 것은 이렇게 둔갑할 리가 없으나 믿음만은 이렇게 자유자재로 되는 성질을 띠고 있다. 그래서 주님 말씀에 이 산더러 바다에 옮겨져 거기 심어져라 하면 그대로 된다 하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를 시험하기 위해 그렇게 “믿어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단순히 그렇게 되나 안되나 또는 실제 그렇게 나타내 보여 자기를 과시할 요량으로 그런 일을 명할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되는 일이다. 인격성을 갖춘 우리 모든 피조물이 바로 그와 같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하나되는 이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모든 일을 하게 되어 있음이다. 따라서 그런 불순한 동기에는 자연만물이 응해주지도 않는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시험이요 자기 과시욕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믿음의 특성만은 항상 곰곰이 묵상할 일이다.
세상에서 비록 육신적인 낙은 멀리하지만[죽음의 세상에서 삶의 낙을 취하려는 무리한 짓은 불가하므로] 그 대신 영적인 생명이 누리는 영적 삶의 낙은 있음이니 주님과 사귐에서 오는 사랑의 기쁨, 사랑의 평안이다. 그 한없는 영적인 여유 가운데서 그 모든 고통을 다 마치신 후 (마치셨다고 해서 그 고통이 금방 사라진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영혼이 떠나가시면서는 그 고통 역시 사라짐은 당연하다)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신 것이다.
영혼의 여유가 있다 해서 물론 그 육체적인 고통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대로, “사람이 어떤 시험을 당하든지 그 시험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내셔서 그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 했는데 그 의미는 여기에 해당된다 하겠다. 주님 당하신 모든 것 중에 하나라도 초인적이 무엇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성경을 오해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렇다면 항상 당신의 사람되심을 강조하여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 하실 리가 없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 한없는 순수한 사랑인데 그 사랑으로 그같은 초인적이라 할 만한 고통을 견디셨다 하면 그 말은 옳다. 우리 역시 동일하신 성령 안에 행하면 그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 자신의 힘이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능력, 하나님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부들이시다. 우리 마음대로 그 내용을 적당히 주물럭거려 만들어내는 어떤 소재(素材)도 아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가 지켜 행하여야 하는 법질서이다.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지켜야 할 법질서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중 자기 비위에 맞는 몇 가지만 골라잡는 그 무엇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이는 자멸행위다. 성경은 한 가지 일을 두고 이를 자세히 풀이하여 그 여러 모를 다 열거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그냥 사실대로만 기록해놓은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우리가 성경의 진실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왜냐 하면 설명 없이 사실 그대로만 기록하는 것으로 일관했으니, 이는 주관적인 해석으로써 임의로 빼고 더하고 손질하여 다듬는 일이 없이 객관적인 사실 그대로만 기술해 놓았음을 드러내는 훌륭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여러 모를 아울러 전체를 맞추어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성경을 부지런히 많이 읽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 10:17].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 4:4]고 하셨으니 성경을 읽음이 바로 그러하다. 매일 먹고 마시듯이 성경을 그렇게 가까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경 기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주님은 같은 내용이라도 자주 되풀이해서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한번 듣거나 읽고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듣고 또 들음으로써 익혀야 하는 것임을 나타내심이다. 더구나 마귀가, 한 번 들은 말씀을 새가 와서 씨를 쪼아 먹듯이 먹어치워 그 말씀의 씨가 뿌리 내려 싹이 돋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하는 실상을 알면서도 그에 대한 대처를 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자살 행위가 된다.
§ 종교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의 틀 안에 가두어놓지 말라. 종교와는 전연 격에 맞지 않다. 차원부터가 다르다. 종교의 틀 안에 넣어두려고 함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종교의 틀에서 끄집어 내라. 그래야 복음으로서의 참 맛을 보게 된다. 종교의 틀 안에만 가두어놓으면 종교밖에 얻는 것이 없고 그것은 도리어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를 잃는 것이 된다. 종교가 구원만 목표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답게 사는 데에 있는 까닭이다.
인간 자력(自力)으로는 구원이 되지 않으니 오직 새 창조에 의해서만 죽지 않고 사는 것 즉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새 창조이니까 새 피조물로서 '사는' 것이며 그렇게 새롭게 창조되어 사니까 죽음은 자연적으로 사라지니 그래서 죽지 않게 되었으니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고로 새 창조를 떠나서는 인간은 구원이나 영생이란 말을 끄집어내지도 못하게 되어 있다. 성경은 이렇게 새 창조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니까, 그 새 창조 차원에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만일 구원만이 목표였다면 다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애초부터 구원이 목표였기 때문에 또 다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이 격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구원이 취소된다 즉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즉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도 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새 창조가 그 원래의 의미이므로, 첫 창조에서 영물(靈物) 중에 "뱀"[계 12:9/20:2] 즉 사탄이 범죄하여 멸망에 이르는 운명을 스스로 초래하고 인간 아담이 또한 그 간교한 꾀에 넘어가 범죄하여 역시 죽음에 이른 것처럼 그와 같이 그들처럼 범죄하면 멸망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범죄하는 것을 성경은 다른 표현으로 "육신대로 사는 것"(롬 8:13)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세상 종교적 관점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착각하여, '행함'을 강조하기만 하면 마치 인간의 공로 즉 도덕적 종교적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처럼 이해하여 논란을 벌이려는 사람이 있는데, 성경은 구원이라는 제1단계는 훨씬 뛰어넘어 제2단계에 머물러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아직도 제1단계에 세상 종교처럼 머물러 있으니 포인트가 맞지 않고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미묘한 그러나 근본적인 중대한 차이를 이해 못하고 무시해 버리면 서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새 창조에서는 제1단계는 생략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왜냐 하면 처음부터 논의 대상이 될 수가 없음이니 이는 [구원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고 오직 새 피조물됨으로써 풀려질 수 있는 일이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새 창조에서는 새 생명을 의미하므로(이전의 삶과 죽음은 일단락된 연후의 작업이므로) 구원은 자연적으로 해결되어 있어 그 사실을 기반으로 새 삶을 강조하고 순종을 필수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상태에 미달하고 다시 범죄할 때는 첫 창조의 "옛 사람" 차원에서가 아니라 새 창조의 "새 사람" 차원에서 범죄하고 멸망을 자초하는 것을 경고함이기 때문에 성경은 이를 가리켜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의 미래형으로 구원을 표현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죽음에 놓여 있는 인간으로서 우선 당면문제가 죽지 않는 것이므로 이에 따라 성경도 그에 준하여 구원을 받았다(죽지 않게 되었다) 하는 과거형으로 나타내는 것은 마땅하다.
또 같은 의미에서 구원을 이루라(죽지 않게 되어 있음을 놓치는 결과를 스스로 낼 수 있으므로)는 경고도 하는 등 미래형으로도 표현하는 것이고, 구원 받아 있다, 영생을 지니고 있다(새 피조물로 되어 있으니까)는 현재형으로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차이다. 이것이 '구원된 상태에서의 구원을 이룸'이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행위 곧 순종이 엄정히 요구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최종적인 단계로서의 천국 들어가는 것으로만 착각하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에서 보듯이 시험 받은 단계가 남아 있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탄이 우리를 시험할 때 헛물만 켜는 것이 아닌가. 그도 자유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지 로봇이 아니다. 자기 자유 의지로 움직일 때는 목표하는 바가 있는 것이니 곧 우리로 믿지 못하게 함에 있고, 믿으면 그 믿음을 무너뜨리려 함에 있다. 믿는 자 곧 구원 받은 자에게 사탄이 시험이 있는 것이지 믿지 않는 이들은 이미 사탄의 손아귀에 있으므로 시험할 이유가 없다. 시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이런 사탄의 시험 자체가 우리가 “우리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함을 웅변하고 있는 터에 어찌하여 이를 이해 못한다고 하는가.
영원한 행복을 위해 도를 닦는다고 하는 것이 세상 종교다.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다. 그러나 자기도 자기지만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함께 닦는다고 한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자기 행복부터 먼저 구하고 그 다음이 남의 몫이다. 왜냐면 내가 먼저 알아야 남에게도 알릴 수가 있으니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먼저 오는 순서다. 고로 남까지 위한다는 말은 핑계고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할 작정으로 하는 말은 아니더라도 결과론적으로 거짓말이 되니 그런 말은 아니함만 못하다.
결국 자기 행복을 찾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다. 자기중심이다. 행복을 찾는 일에서 자기가 먼저 찾아야 남의 몫도 챙겨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겠는가. 찾는다는 것은 아직 못구했다는 말이고 확실하게 길이라는 것을 못찾아 길을 더듬는다는 의미다. 길을 더듬는 소경이 같은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는가. 자기 스스로 이 길이 확실히 그 길인 줄 알아야 남을 인도할 수 있다. 자기는 또 무슨 재주로 그 길을 찾으려고 하나? 도를 닦았으면. 그 길이다 혹은 저 길이다 하고 남에게 확실하게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못하고 스스로 가서 찾으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종교다. 스스로 찾기를 지금까지 여러 백년 천년이나 걸리고 있다. 적어도 도를 깨쳤다고 하면 그 도 즉 진리가 이것이다 하고 알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 제각기 자기가 스스로 찾으라고 하는 판이라면 그것은 아직도 드러내놓고 "이것"이라 는 확실한 것을 못찾았다는 증명이다. 그래서 그 종교가 시작한 그 때부터 그 시작한 당자가 그렇게 찾아 노심초사하여 도를 깨쳤다는 그 날부터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각자가 찾느라 부산해하고 더러는 못찾겠다고 포기하기도 하는 형편이니 그것이 무슨 진리의 발견인가.
발견도 못했으면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말인들 할 수 있는가. 세상 종교의 기막힌 모순은 이런 데에서도 얼른 찾아질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은 없다 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는 세상 종교의 공허함을 드러내는 증거다. 자기가 천하의 주인이니까[자기만의 고 유의 세계에서] 자기 스스로가 무엇이든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의 행복을 위해 도를 닦고 수양을 하는 것과, 그렇게 도를 안닦아도 처음부터 자기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구별해보라.
말하자면 공자와 악당의 괴수 도척의 차이를 말해보라는 것이다. 자기의 행복을 위한다는 점에서는 같지 않은가. 우리가 이공 순신과 주공 단의 공덕심 즉 공동체 의식을 높이 찬양하여 그런 공동체 의식이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창출해냈는지를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터이지만 자기 중심이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그들은 양심을 따라 사람 삶의 이치를 깨달아 그대로 좌우고면(左右顧眄, 이쪽저쪽을 돌아보며 앞뒤를 재고 망설인다는 뜻). 좌고우면. 없이 실천함으로써 그런 삶의 이치의 위대함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는 데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만 해도 그와 같이 위대한 결과를 낳는 것이 사람 삶의 이치로서의 공동체 의식 즉 몸과 머리의 관계다. 주공도 이공도 일절 개인적인 야욕이 없어 잘 났든 못났든 머리로서의 임금의 위치를 인정해 주고 그 체제에 충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스로 자기 능력을 앞세워 왕조를 둘러 엎고 자기가 최고 지위에 오르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이런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의 철저한 의식이 만인의 귀감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실체가 아닌 그림자에 불과한데도 그런 지대한 효과를 내었거든 하물며 실체로서의 사람 사는 법이야 얼마나 더한 생명의 길이겠는가.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그런 의식 속에서의 그런 생활 자체가 인생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자기중심이기에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자기중심을 가리켜 성경에 천하에 의인은 없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고 하나도 없다 단언한 것이다[롬 3:10-12].
스스로 구원 받으려고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죄다.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누차 설명한 것처럼 자기가 먼저 구원된 다음이라야 그 구원되었다는 이치를 이웃에게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자기만을 위하지 않고 남까지 위하노라고 해도 처음에는 자기를 위해 구원을 찾는 법이니 그런즉 이 자기중심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자기도 위하고 남도 위하고 두 가지를 다 할 수 없는 것이 만유의 법칙의 특징이다.
항상 흐름은 일방적으로 흐르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3위1체 원리에서 갑과 을 사이에 연결되는 화살표 방향은 항상 고정되어 있는 직류 곧 일방적이다. 을에서 갑으로 향하는 흐름은 오직 병을 통해서다. 고로 갑 자신으로 보아서는 항상 을을 위하는 것으로만 고정되어 있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그러므로 자기도 위하고 남도 위한다는 것은 오직 말뿐인 결국 거짓말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자기를 위하는 동안은 의도 선도 행할 수 없고 항상 죄와 죽음에 위치해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자기부인이 되도록 즉 일절 자기를 위해 살지 않도록 함에 있다[고후 5:15/롬 14:7-9]. 자기를 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산 자부터 되게 함에 있다. 죽은 자를 무조건 살려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은혜라,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 그래서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 자가 되고나서부터는 무조건 자기부인이므로 다시 말해 자기 구원을 위해서는 일절 할 것이 없으므로 이제야 비로소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산다고 하는 자는 자기를 위하지 않고 머리를 위하고 머리의 지시를 따라 내 이웃 곧 함께 지체된 형제들을 위해 사는 것뿐이다. 그것이 한 몸 체제에서 머리와 몸의 관계인 것이다. 우리의 신체 구조가 그 증거이고 증명이다. 이렇게 산 자가 되었지만 나의 자유 의지는 그대로다. 즉 하나님께서 새 창조로써 우리를 인간 로봇으로는 만드시지 않은 것이다. 설혹 자신을 로봇으로 여겼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랑을 강요하기 때문이다[고후 1:4].
물론 강제로 사랑하도록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랑 아니면 그리스도와의 일절 관계가 없다는 그 뜻을 말함이다. 오직 사랑의 길밖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방법이 없다는 의미다. 사랑은 기계적인 것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미워할 수 있으면서도 스스로 사랑하는 데에 사랑의 의미가 있음이다. 즉 자유 의지가 보장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사랑 때문이니 사랑으로라야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것 자체가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자기를 완전히 비워 송두리째 상대방에게 선물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선물이라 하고 성령을 선물이라 하며 "그리스도를 선물"[요 4:10]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의 구원이 은혜가 되고 믿기만 하면 되고 값없이 거저 주신다는 표현이 성립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한 몸 구조와 체제로 하나 되어 사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기의 자유 의지로 사랑해서 스스로 좋아해서 상대를 위하면 좋으나 만일 그렇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랑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아니할 수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이미 나타나 있으니 곧 아담의 죽음이요 현재 오늘날 모든 인류의 기막힌 죽음의 현실이요 이미 확정되어 있는 사탄 등 악령들의 영원 멸망의 운명이다. 그 스스로 정한 비극적 운명이다. 그들의 전철을 얼마든지 밟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복종하여[그들은 복종하지 않아 그렇게 된 까닭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함이다. 구원의 양면성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이고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함이니 이는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위하는 구조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구원하셨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다. 몸과 머리 서로가 상대방을 위해 일체의 언행심사를 하고 사는 것이다. 이제 후로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고후 5:15/롬 14:7-9]. 이것이 성경을 바로 읽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성경을 정확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으로 일관하는 이들에게 어렵게만 보이는 것이 성경이다. 어렵다기보다 도대체 보이지를 않는데 어찌하리요[고후 4:4].
그러나 자기 부인으로 나가는 이들에게 성경처럼 간단명료한 것이 없고 그동안 선입견에 비하면 성경처럼 너무 단순하여 싱거운 것도 없다. 이것도 상대성 이론에 속한다. 상대를 따라 달리 나타나는 것이다. 같은 대전이라는 지명도 서울에 위치해 있으면 남쪽이고 부산에 있으면 북쪽이다. 같은 땅인데도 이렇게 방향이 정반대일 수 있느냐 하고 이상하게 여길 것은 하나도 없다. 두 개의 열차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이제 막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내가 한 쪽 열차에 타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어느 차가 소리없이 움직이는지 분간을 못한다. 이 때는 일정한 기준을 정해야 즉 한 쪽을 정지를 시켜야 상대 쪽의 운동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도를 닦든지 안닦든지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다. 한 쪽은 영원한 것을 바라기 때문에 다르다고 한다. 내 자체가 영원하지 않은데 내가 바란다고 해서 영원할 수 있는가. 사람치고 누가 영원히 사는 것을 마다 하랴. 그러므로 그렇게 바란다는 점에서는, 도를 닦으며 바라는 것이나 닦지 않으면서도 바라는 것이나 똑같고 아무 것도 다르지 않다. 그런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이란 존재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나?” 하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생겨났다. “애초 그 최초의 사람이 어디서 생겨났나?” 하는 그 질문이다. 안보았으니 모른다고 대답할 것인가? 모른다고 대답할 때는 그 최초의 사람 곧 인류 조상은 "창조되었다"는 답을 유발(誘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모든 것은 뒤틀리게 된다. 시작이 확고해야 결과도 확고하게 되는데, 시작부터도 "모른다"고 얼버무리니 당신네 종교인이 하고 있는 그 영원한 행복 추구의 결말도 애매 모호할 것이라는 답변밖에 없을 터이다.
이런 예단(豫斷)은 운명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저절로 생겨났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 증거를 대라는 것이다. 우연히 생겨났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름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렇게 우연히 생겨나는 수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그 증거가 된다. 이렇게 단순히 우연히 생겨나는 것을 두고, "몇 백만 년만에 한번 있을까 하는 정도"라고 절대로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당신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이미 그렇게 규정하는 순간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 된다. 당신의 상상에 불과하다는 그 소리다. 인위적이라 함은 이미 '우연'을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함이다. 무릇 인위적이라 하는 것은 계획과 목표를 함유하기 때문에 그렇다. 고로 인위적으로 무엇을 설정하려는 것 자체가 우연에 의해 생겨났다는 당신의 주장을 당신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가 되니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말할 것이 못된다는 증거다. 때문에 지금 이 시간도 그렇게 우연히 생성되는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아니, 절대적이 된다. 따라서 결론은 그 증거가 없다는 것이고 증거 없는 것은 한낱 공리공론일 따름이다. 고로 인간이 우연히 생겨났다는 당신의 주장이 공허하다는 그것만이 증명이 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인간 각자 스스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다는 구도(構圖)가 벌써 그 큰 구석에서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깨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조물주를 인정하면 조물주 친히 그 행복의 조건을 마련해놓으시고 있는 까닭에 각자는 오직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자기가 자기 행복을 위한다는 허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당신이 행복을 추구하는 일체의 노력은 남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것이라고 물론 규정 지을 것이다. 왜냐면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은 이기주의의 또다른 형티이고, 이런 자기중심은 근본적으로 욕심을 잉태하고 욕심은 피차간의 파멸을 초래한다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당신의 노력은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변명하고 싶어할 터이므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를 위해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남이 내게 무엇을 어떻게 하든 일절 거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절해고도 같은 데에서 혼자 사는 게 제일 적당하다고 할 것이다.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은 필연이고 그러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는 방법 말인데, 가령 예를 들어 정신적인 만 족 혹은 쾌락 같은 것이다. 자기 마음에 속한 일이니 이웃에게 전혀 영향이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혼자서는 살 수 없어 부득이 여럿이 함께 살면서 행복을 추구함인데, 여럿이 있다 보니 어차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이 행복의 조건에서 모든 사람이 나와 같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주위와 나와의 차이가 없으면 좋은데 그렇게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차이가 있게 마련이라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남이 내게 해를 끼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내가 구축해놓은 나의 행복이라는 것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나는 내 이웃과 함께 하는 데에서 나의 행복을 꾸릴 수 있는데 이웃과 내가 격차가 이토록 심히 벌어지므로 나 혼자만의 행복이 절대적인 의미로 작용하지를 못한다. 항상 내가 대하는 상대에 따라 유동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행복은 결과론적으로 말해서 의미가 없다. '일체유심조'라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고 해서 그런 저런 외부 영향력에 대해 오불관언으로 대할 것인가.
마음만 평정시키면 될까. 나는 나대로의 행복을 찾았다고 하지만 상대는 남을 괴롭히는 것으로 낙을 삼으니 딴에는 그런 것이 자기 행복인 것이다.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행복 추구이지만 그 사람은 그런 제한을 두지 않는 채로 즐기는 행복 추구이다. 나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으로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사람은 나와 정반대다. 이래도 나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여전히 그런 자기 행동을 뉘우칠 기미가 없다. 행복은 아무래도 남과 함께 하는 데에서 출발하는데[혼자서는 외로워 못사니까] 이렇게 남과의 관계가 부조화를 이루니 어떻게 할 것인가.
행복은 첫째 사람은 영원성을 사모하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야 한다. 둘째는 서로 사랑 가운데 일치하게 한 몸 의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간단히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행복은 없다. 도를 닦으면 이 두 가지 조건이 채워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어떻게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달리 어찌 된다고 하는 것은 아주 비과학적이므로 미신이다. 그런 몽상에 불과한 것을 진리처럼 따르는 사람은 한마디로 구제 불능에 가깝다.
서로 사랑하는 문제라면 이미 대답은 나와 있다. 인간은 수 천 년을 지내와도 여전히 이 꼴 이 모양으로 모두 자기중심의 변함없는 생활로 오늘도 해는 저물어 가고 있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아무 변화도 없으니 그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시작이 단단해야 그 결과도 확고한 것이 될 수 있다. 시작이 논리적이지 못하면 그 결과란 것도 비논리의 횡설수설이 된다. 시작이 현실에 근거하지 못하면 그 추구하는 결과도 비현실이라 한낱 잠꼬대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연계에 속한 인생은 영원성을 논할 수조차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시작부터 비과학적이 되어 버렸다. 윤회, 환생 이런 것이 영원은 아니다. 가령 윤회, 환생이 있다 쳐도 일단 살다가 어차피 죽어야 하는 것이므로 영원은 아니다. 그러면 자연계의 대칭으로서의 영계가 있고 그 영계의 법칙으로 영원성을 거론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그러면 그런 대칭성의 원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우주에는 엄밀한 고안과 기획과 설계가 작동하고 있음을 당신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된다.
바로 인생보다 월등히 우수하고 고차원적인 한 지성적 존재가 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당신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살지 못하고 이 현실처럼 짬도 없이 죽어 나가는 판이라면 모든 사람이 한 몸처럼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에서 산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이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여 도를 닦고 하는 등의 일체의 노력이 모두 허황하다는 얘기가 된다. 영원히 살지 못할 바에야 그렇다는 얘기다.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그렇다. 이리저리 하면 그래서 그것을 성취하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것은 말의 희롱에 그칠 뿐이다. 성경처럼 과학적 논리의 배경이 일절 없으니 그런 것이다. 말 잔치이고 심하게 말하면, 말 장난일 뿐이다. 성경이 과학적 논리라고 했지만 “창조” 이상으로 과학적 논리는 없다. 모든 문제를 자석(磁石)처럼 끌어당겨 한 곳으로 집결시켜 통일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훌륭히 논리이고 그 이상 가는 합리성과 타당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신이 존재한다고 전제부터 하고 난 다음에 차분히 그 논리성 여부를 검토해볼 일이다.
모든 과학적 사실은 일단 가설을 내세우고 그 가설에 입각하여 거기 맞추어 하나씩 풀어 나갈 때 그 진실성 여부가 확정 지어지는 것이다.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것부터 먼저 전제한 일이 없었으니 한번 그렇게 시도해보라고 권유한다. 필 자도 이런 식으로 해서 성경의 논리가 정연함을 발견하였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악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그런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행위가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고 조물주를 위하지 않는 데에 있으므로 그것 자체가 죄악의 근원이라는 데에 있다.
그것은 왜 그런가. 조물주 친히 그 피조물을 피조물 스스로가 자기를 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위하시므로, 피조물 스스로 자기를 위할 필요가 없이 오직 조물주께서 지으신 피조물 즉 자기 동료들을 위해주라는 것이 조물주의 뜻이요 확고 불변의 생명의 법질서인데도, 그래서 그런 조물주의 뜻을 위함이 진정 그 이웃을 위함인데도, 그렇게 하지는 않고 자기 생각을 따라 이웃을 위한다고 위하나 그 위함이 실상 그 이웃을 위함이 아니므로 그것이 선 일 수도 없고 의로움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조물주를 왜 인정하지 않는가 하는 그것부터 답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다.
조물주에 대한 증거는 피조물로서의 만물 바로 그것이다. 고로 교만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일개 피조물로서 의식적으로 조물주를 부정한다는 것은 보통 교만이 아니다. 교만은 자기 외의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교만은 나만 아니라 남들도 전부가 아니면 그 일부라도[다소간에] 그 속에 품고 있을 것이므로, 상호 충돌이 불가피하고 거기서 빚어지는 여파가 전부에게 미치는 법인데 어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왜냐면 교만은 지배욕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자기가 으뜸이므로 자연 남들은 자기 수하(手下)에 들어와야 양에 차는 것이다.
세상 종교의 허와 실을 논하려면
어떤 종교인은 이런 말을 했다. "눈만 뜨고 보면 사바세계가 그대로 극락세계가 된다. 그러니 절대의 세계를 딴 데 가서 찾으려 하지 말고 자기 마음의 눈을 뜨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진정한 불교도 혹은 기독교도라면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생활태도를 본 받아야 한다. 정신이 병든 것은 물질 때문이다. 종교인이 청정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려면 최저의 생활로 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 여유 있는 물질은 반드시 사회로 환원해야 죄를 덜 짓게 된다".
"부처님과 예수님의 생활 태도"라 했으니 무소유를 말한 것 같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속된 것을 초탈한 자세라 할 것인가. 그들이 말하는 "무소유"가 평민들에게는 한낱 그림의 떡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 특수 계층은 기거할 일정 장소가 있다. 거기 가면 먹을 것이 있다. 그런 정도로 의식주가 보장된다면 평민들도 상당수가 그런 무소유의 생활을 즐길 수 있을지 모른다. 노숙자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런 특수 계층이 무료 급식을 받으며 기거하는 곳에는 그런 노숙자들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러니 일반인들에게는 그런 "무소유"라는 말도 배부른 소리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이라는 말이 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현실'이 '절대'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자기네 종교라 하나, 절대라는 것은 없다. 모두가 상대성을 지닌 대칭형으로 되어 있다. 절대 진리는 있다. 진리는 하나뿐이라는 사실에서 그렇다. '나'라는 개성은 절대이다. 나라는 개성은 나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의 절대는 있다. 그러나, 진리가 있으면 진리 아닌 거짓이 있다. 이 둘이 병존한다. 때문에 홀로로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절대는 없다” 하는 것이다.
나라는 개인도 나라는 결과를 있게 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이는 상대성이다. 인과론은 이 상대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들이 의미하는 "절대"란 것은 '이것' 혹은 '저것' 외에는 달리 없다는 의미이다. 그 말대로 하면 현실이 절대이므로 현실 외에 달리 무엇을 찾지도 구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현실이 곧 극락이라 하니 그렇다. 물질 때문에 정신이 병든다는 말도 거기서 나온다. 물욕[物慾] 없이 살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개개의 만물은 그 자체로서 절대이다. 왜냐면 똑같은 두 개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만 절대란 말을 쓰지 그 외로는 달리 쓰지 못한다. 모든 개개의 만물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 그대로다. 그래서 이런 것을 모순투성이라 규정한다. 논리가 정연하지 않은 횡설수설이기 때문이다. 3위1체의 원리는 이 절대성과 상대성을 엄밀히 구별하여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3위1체의 원리는 3운법칙이 증명하고 있는 바다.
죄란 것은 더 짓고 덜 짓는 것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더 지어도 덜 지어도 죄의 뿌리는 같다. 아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 죄다. 죄의 개념부터 확실치 않으니 다른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왜냐면 죄에서 불행이 잉태되기 때문이다. 죄는 욕심에서 나온다. 욕심이 있는 한 그것이 크든 작든 물질적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관계 없이 죄다. 크고 작은 것으로 또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구별하는 것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오만한 것은 물욕과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물욕 없이 살아도 오만하게 산다면 청정이고 올바름이고 전혀 의미가 없다. 오만함은 자기의 잘 난 맛에 사는 것이므로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오만하지 않은 이웃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나 물욕을 통해서 주는 것이나 매일반이다. 고통을 끼치기는 마찬가지다. 아이가 제 어버이보다 더 잘 안다고 부모 말을 듣지 않는 것이 그런 예다.
"현실이 절대"라는 가정(假定)부터가 허공에 뜬 것으로 실체가 없다. 그 말은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는 말인데, 마음이 무엇인가. 정신, 마음, 의지[意志] 모두 한 동아리다. 다시 말해 사람의 인격성 그 자체다.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도 그러하다"[잠 23:7] 한 그대로다. 핵심을 이야기하면, 마음이란 것은 인간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고 인간이 전부라는 그 뜻이고 인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그 소리다.
이는 다시 말해 인간은 저절로 생겨났다는 그 주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 주장대로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만 따지면 그 주장이라는 것이 단순한 궤변인가 아니면 일리가 있는 것인가, 당장 판가름이 난다. 그렇지를 않고 그들이 말하는 대목 하나하나에 치중하여 반론을 제기하려 하면, 끝없는 말 잔치에만 빠지고 말을 위한 말이 되어버려 다 함께 수렁에 빠져 밑도 끝도 없는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근본 뿌리만 들추어내면 나머지는 저절로 딸려 나오게 되어 있다. 고로 그들의 그런 주장은 인간이 피조물이 아니라는 데에 있으므로, 그 점만 지적해주는 것 외에는, 말다운 말 즉 말만을 위한 말이 아니라 의사 소통을 위한 말이 처음부터 될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답은 무엇이냐. 그들의 주장은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으므로 성경에 아주 간단히 표현한 것처럼 만물을 보라는 것이다. 왜냐면 만물이 그 만드신 조물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물주를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이 될 때는 어찌 되는가. 성경에서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달리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나 해설이나 해석이나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성경이 어떠한 것이냐 하는 것은 그 여러 '자체 증명'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충분한 답이 된다. 성경이 그 답이라는 것은 성경의 자체 증명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성경이 진실이냐, 아니면 인간이 꾸며낸 거짓말, 속임수냐 하는 그 여부만을 가리면 되는 것인데, 그 정확한 판가름을 해주는 것이 바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인 것이다.
즉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자가 성경을 꾸며낸 것이라면 결단코 성경의 이런 혹은 저런 대목들이 있을 수가 없다는 그 여러 가지 사실들을 지적함이다. 그런 것은 성경을 편견 없이 선입견 없이 읽는 자에게는 도처에서 발견되어 나타난다. 이 선입견이 성경을 바로 읽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장벽이요 방해인 것이다. 비단 종교인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을 이야기할 일이다. 다시 말해 성경이 거짓일 수 없고 속임수로 씌어질 수 없음을 그 스스로 그 내용으로써 자체적으로 입증함이다.
그런 대목을 낱낱이 말해주면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에는 주님의 직접 면전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항상 의식하여, 반드시 기도하여 구하면서 그 적절한 말씀에 따라 인식 전환을 유도할 수 있는 합당한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필수임을 잊지 말 것이다. 주님을 앞에 모시면서 어째서 주님께 이에 대해 일언반구 말씀 드림이 없이 감히 일을 진행하고자 할 것인가!
보기 나름
인식하기 나름이니 항구적인 실패로 보느냐, 악착 같은 끈기로
보느냐, 후자로 본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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