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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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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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히 순종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1] 

아나니아가 사울[바울]에게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어라”[행 22:16] 함과 같이 세례를 받음으로 죄 용서가 됩니다[2:38]. 그리고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우리를 회개하게 만들어 다시는 죄 짓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그러한 의지(意志)에 화답하셔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그리스도 친히 내가 죄 짓지 않도록 즉 능히 기쁨으로 순종하도록 하는 능력이 되어 계심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주님의 순종을 나의 순종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순종할 수 있게 능력이 친히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종은 어디까지나 나의 몫으로서 순종하겠다는 나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이 의지대로 순종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시종일관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은혜가 뒷받침이 되지 않고는 그리고 바탕이 되어 주지 않으면 나의 의지 자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이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만으로는 맥도 추지 못했습니다. 나의 의지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해 내랴!” 하는 죽음과 절망의 탄식만 나왔습니다[롬 7:24].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음으로써[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그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몸으로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여 오심으로써] 나를 포로로 하고 있던 이 “육신”[7:14-8:13] 곧 “죄의 몸이 멸해진”[6:6]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한 대로 죄를 짓게 되는 두 가지 요인 중에서 그 불가항력적인 부분을 완전히 파괴시킨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입니다. 그 부분이 완전 파괴되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그리고 죽은 다음에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써 “다시 출생했고[났고-요 3:3]” “새로 창조되었다”[고후 5:17]는 그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런 인간 개벽(開闢-천지개벽이 아닌)의 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새 창조는 아담이 애초 창조된 것과 같은 것이고 영물들이 처음 창조되던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단 내가 세상에 처음 태어나던 것과는 다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날 때는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인한 죽은 자로서 난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대답하시기를, “사람이 다시 나야 천국을 볼 수 있다”[요 3:3] 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출생한 나는 그와 같이 아담이 처음 갓 창조되어 나올 때와 같고 영물들이 애초 창조되던 것과 똑같고 하나도 다름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영생하는 자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 이상 손볼 것도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작품입니다. 이러한 완전 작품으로서 자유 의지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유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범죄했고 아담 역시 범죄한 결과 그 처음 영광에서 떨어져 나가 오늘의 이 결과 즉 인생의 비극적 현실 곧 구원이 필요하게 된 참상이 되어 있는 것과 같이, 나 역시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애초 창조되었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자기 자유 의지로써[즉 범죄하지 않음으로써] 거룩한 천사들은 끝까지 유지하여 오늘날 거룩한 천사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영물들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악령들로서 영원한 심판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게 된 그 차이입니다. 우리 역시 새 창조에 의해 애초 아담처럼 그리고 그 영물들처럼 완전무결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완전함이 바로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어 있는 구조의 현재 실상입니다. 고로 이대로 나의 의지로 줄곧 밀고 나가면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 등에 굴하지 않고 굽히지 않고 애초 회개할 때 하나님 앞에 순종해 나가기로 한 약속대로 충성껏 지켜 나가면 거룩한 천사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는 성경의 경고입니다. 내 스스로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유’의 의미요 개념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설명하게 됩니다. 때문에 천국은 사람마다 침입하여 들어간다[눅 16:16] 하셨으니 즉 쳐들어가 빼앗아 차지한다는[마 11:12]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왜냐면 이전에는 죽은 자로서 도무지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일 기력이나 생기가 없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능력과 생명력과 활력을 갖추어 있는 산 자가 되어 있음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능동적으로 적극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뜻을 행함으로써 결과론적으로 천국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운이 펄펄 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주님은 나를 위하시고 나는 주님을 위하게 되어 있으니 주님은 나의 것, 나는 주님의 것이 되어 있어 나는 주님을 위하기로 하고 주님은 나를 위하시는 것으로써 쌍방 약속이 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이것이 약속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일방적으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의 순종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언약의 피임을 명심할 일입니다. 물론 내가 회개하여 세례를 받을 때 죄 용서가 되는 것이니 이는 그 흘리신 피의 효력입니다. 말 그대로의 언약의 피, 약속의 피이므로 나는 그렇게 회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순종이 약속을 한 것이니 그 피[보혈(寶血)]가 그대로 적용된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그렇게 순종하기로 나의 회개로써 약속한 바이므로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바로 이러한 능력이 현실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어 있기 때문에 순종을 명하시는 것이고 순종이 가능함으로써 따라서 회개가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능히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순종을 명령하시지도 않고 따라서 회개도 필요하지 않고 심판도 없습니다.

회개는 과거 순종하지 아니한 것을 스스로 뉘우치고 이제부터는 순종하겠다는 다짐이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순종할 수 있음에도 아니한 것이 아니라 앞의 설명처럼 순종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과거 실상이었습니다. 아무리 순종할 의지가 있다 해도 순종할 힘이 없으면 못하는 법입니다. 그것이 죽은 자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죽은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곧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회개하라고 명령하시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행 17:30].

오직 그리스도 오시기까지만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 율법에서 명령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오심을 상징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체이시고 모세 율법은 그 그림자라 할지라도 그러나 실체가 오시기 전에는 그 그림자 되는 것이라도 지키는 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했던 송아지나 염소 등의 피를 언약의 피라 하였고 피를 뿌리기 전에 하나님의 언약 책을 읽었고 그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성을 띠는 그림자로서의 의미로 지킨 것이고 이제 그리스도 오신 후로 본격적으로 지키게 되고 따라서 영생을 얻게 되고 심판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행 17:30].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지킬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죄를 물어 심판을 한다거나, "과거 순종하지 않았음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순종하라"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의지는 있으나 힘이 없어 순종을 못했거나 의지도 힘도 없어 죄를 지었거나,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죄를 지은 것은 일반이니 모두 지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는 불복종이 없도록 스스로 결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오신 이후의 우리의 할 일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우리 인간의 영적 실태를 소상히 설명하면서 바울은 순종하려는 의사와 의지는 있으나 육신에 매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음을 설명한 것입니다[롬 7:14-25]. 이는 뒤집어서 말하면 순종할 의지가 없는 자는 아예 그리스도의 구원이 해당되지도 않는다는 의미를 강하게 함축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구원이라 하는 것이며[고전 2:9/약 2:5/1:12] 자기를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 그리고 구원임을[행 5:32/히 5:9]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죄를 짓지 않겠다는 즉 차후로는 순종하겠다는 회개의 바탕 위에서 죄 용서가 되는 것이요 이 죄 용서된 자리에 거룩하신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그렇지 않고는 성령께서 임하실 수 없고 따라서 구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믿음을 오해하여 위의 설명처럼 성경대로 믿지는 않고, 무턱대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일정 사실을 사실이라고 시인하기만 하면 그것이 믿음인 줄 착각합니다.

그래서 세례 받은 의미도 모른 채 세례 받고 그리고 성령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 하여 받은 줄로 스스로 알면 그것이 ‘믿음으로 받은 것’이라 하여 자신을 속이고, 구원 받은 사실이 없음에도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며 남들도 그렇게 가르침으로써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순종하겠다 다른 말로 바꾸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겠다는[고후 5:15] 결심이 없이 세례 아무리 받아도 죄 용서가 되지 않고 구원 받은 것이 아님을 명심할 일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가 미혹되어 마신(魔神)이라도 받으면 그것을 감히 "성령의 세례"라고 더욱 자기 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대로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결과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계시로 하나님 친히 가르쳐 주시지 않는 한 누구나 배울 수 없고[요 6:45] 따라서 아무든지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고[:65] 미리 선포하신 그대로임을 명심할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으니 하나님의 직접 가르치심에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원치 않으면 그 모든 것이 일체 소용이 없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이제부터는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기 때문에 능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구원 받은 것을 말함은 물론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출생한 것입니다[요 3:6]. 우리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신 것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성령으로 모심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히 6:6] 망령된 행동이 없이 끝까지 사랑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아"[벧전 3:15] 모시고 있는 것을 말함입니다.

내가 모신다고 모셔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때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려는 결심 그대로일 때 이 마음을 아시고 주님은 계속 계실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일단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임은 물론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것이 구원인데 그리스도를 못 박으니 자기 구원을 스스로 못 박아 죽여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런 경우 멸망밖에 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스스로 시험하여 확증하라 했고 이는 스스로 진단할 수 있음을 가리킴이니 즉 내 스스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지[고후 5:15] 능히 판단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줄을 너희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한 것입니다[고후 13:5]. 바로 이런 망령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의 행동이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나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러니 내 스스로 하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영생만을 욕심 내는 것은 이 생명의 대열에서 무조건 탈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라 한 것입니다[고전 16:22]. 여기에는 믿지 않는 자가 저주 받는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고 나를 위해 살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없습니다. 말 그대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으로 돌아가 버린 후[처음 믿을 때의 약속을 잊고] 이를 즉각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들의 위함, 사랑을 바라실 리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얼마든지 일방적인 사랑, 거저 주시기만 하는 사랑,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바라시지 않고 원하시지 않고 오직 베푸시기만 하시는 하나님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밑 빠진 독에 물 부으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다시 말해 그렇게 되면 한 몸으로서의 삶의 질서가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 한 몸으로서의 생명의 체제는 하나님 친히 그 머리로 계시므로 하나님 친히 관여되어 계십니다. 따라서 머리로서의 하나님은 머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아니하실 수 없으니 때문에 모든 지체에게 머리의 지시를 따르라는 의미에서 순종을 명령하시고 따라서 순종치 않았음을 회개하라 명하시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심판에 처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그런 불충, 불복하는 암적 존재들을 방치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로서의 그런 역할에 충실히 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 피조물들이 한 시도 불안해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만들어 놓으신 다음에 유야무야가 되게 방치하신다고 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과 판단과는 전혀 다르시기 때문에 어떻게 대중을 잡을지 모르게 되니, 이런 신뢰가 없이는 하나님을 영원히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경우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관계로 친근감을 가지기는 영 글러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다고 한 대로, 지혜와 지식 등 모든 면에서 능력의 차이만이 있다 뿐 모든 면에서 우리 사람과 같은 ‘마음’이신 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만드신 피조물이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신 이상,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대한의 여건을 조성해 주시는 것이 또한 만드심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그 최대한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 하나 되는 이치 곧 한 몸의 체제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요 따라서 이것이 생명의 법질서로 확립되어 있음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여럿이 하나 되는 것으로는 한 몸의 구조밖에 이상적인 것이 없으므로 이 이치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각자는 절대로 자기를 위해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한 몸' 구조에서는 상호 작용이 생명이고 어느 의미로든 일방적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전제 아래에서 하나님은 이 원칙을 따르셔서 만일 우리 중 누구든지 머리를 위하지 않을 때 이런 암적 존재는 종국적으로는 그 한 몸 체제에서 분리시켜야 더 큰 화를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격리시키게 됨은 당연하니 곧 심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신다는 말씀에 대하여 누구든지 이상하게 여길 때는 우리 자신 아직 이 생명의 원숙한 지식 가운데 있지 못하고 미숙한 탓이니 성경을 더 배워야 하고 성령의 계시를 사모해야 마땅합니다.

이런 한 몸 의식에서 이 세상에서는 삶의 낙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집니다. 왜냐면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는"[고전 12:26] 것이 한 몸됨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한 몸이 되어 있는 구조에 순응하지 않고 모두가 고난 고통 중에 있는데도[롬 8:22] 만일 자기 홀로 그 고난 중에서 면제되거나 제외되기를 바랄 때는 그 한 몸에 소속되지 않음을 스스로 입증함이 됩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예컨대 주님은 이 세상에서 내 생명을 미워하라 하시는데[요 12:25] 내가 만일 이 말씀을 믿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게 되는 데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러나 믿으면 비록 그것이 내게 고난으로 다가오고 죽음으로 끝나는 한이 나더라도 나는 그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미워하라” 하시는데도 나는 “아니요! 나는 사랑하렵니다” 하니까 당시 많은 제자들이 “이 말씀을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하고 물러간 것과 같은 꼴이 됩니다. 다시 말해 그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믿음 없는 실상을 내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체 증명되는 성경의 진실성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막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이같이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 성경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인하여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선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와 하나 되심으로써 곧 내가 주님과 합하여 한 영으로 되어 있는 관계로[고전 6:17], 권력자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할 때에 스스로 무엇을 말해야 할지 연구하지 말라 경고하신 것입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둘이므로 무슨 말할 것이든지 나를 통해 주님 친히 말씀하신다 함이니 내가 이 때 무엇을 궁리하거나 할 말을 사전에 준비하게 되면 도리어 방해가 되는 까닭입니다.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여 회당이나 옥에 넘겨 주고 임금들이나 권력자들 앞으로 끌어가게 되면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인데 너희는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미리 연구하지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口才)와 지혜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눅 21:12-15].

그 앞서 같은 말씀을 하신 것으로 누가는 기록하고 있는데 이 때는 성령께서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12:12]. 누가는 이렇게 거듭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라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10:20]. 여기서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다름아니라 그리스도이시고 그리고 동시에 아버지이심이 밝혀지고 있습니다[요이 1:9].

같은 내용으로 바울도 설명하고 있으니 즉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롬 8:9], “그리스도”[:9], “그리스도의 영”[:10], “그리스도를 살리신 이의 영”[:11] 곧 아버지이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곧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심을 별도의 “이름”[마 28:19]으로 나타낼 때 “성령”이시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도 성령이시고 그리스도께서도 성령이시니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신약시대에 와서 성경에 “성령”이시라 할 때는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심을 대체적으로 가리켜 나타낸 것임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위의 주님 말씀대로 하면, 빈 머리로 아무 생각 없이 오직 마음 가운데서의 쉬지 않는 기도로만 그런 막중한 천금 같은 기회를 대하라는 것이니, 이야말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런 것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입니다. 왕들이나 세력가 앞에 서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서 볼 때 그런 절호의 기회가 없습니다. 전파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장 효과 있게 설명함으로써 그들을 포섭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입니다.

고로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성 있게 말할까 하여 당연히 그 내용을 정리하고 설득력 있게 말하려고 궁리하고 연구함이 마땅합니다. 성경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오히려 그렇게 하라고 장려하고 명령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들 앞에 서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까. 성경의 진실성은 이와 같이 성경 자체가 증명하고 있으니 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실진대 이럴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고 빙자하여 그 진실성을 나타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구질구질한 것이 없어도[도리어 그런 것은 경우에 띠라 방해와 장애만 될 수 있으니 왜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 가짜가 진짜를 뺨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권위만으로 충분히 그 진실성이 증명되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런 자체 증명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절대로 손대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확실하게 자체 증명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확증되어 있는 이상, 하나님 친히 그 말씀을 순수하게 유지 보전시키실 것이 역시 확실하므로 이 외 기타 그 어떤 내용도 잡티가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기준하여, 성경대로 말하면 진리이고 진실이되, 이 성경에 어긋나게 나오는 그 무엇이든지 아무리 그 소위 화려한 "과학적 입증"이니 뭐니 하고 나타나도 필시 그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농락임을 한 눈에 간파할 수 있게 되는 지혜를 얻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니 마음에 새겨 둘 일입니다. 왜냐면 장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주님의 말씀대로 "택한 자라도 할 수만 있으면 넘어뜨릴" 아주 현란할 정도로 각종 증거를 내세우며 성경을 폄훼하고 그리스도를 격하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인즉 이 거센 초 강력 태풍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이 '성경의 자체 증명'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과학적 이론"으로 맞설 생각은 아예 접어야 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 꼭대기에 올라 앉아 있습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그런 이론 따위를 격파시킬 속임수가 무진장으로 그에게는 넘쳐 납니다. 성경의 '자체 증명'이라는 이 확고한 기준 위에 서 있으면 그야말로 만세반석입니다. 천하가 대홍수에 함몰되어 물이 태산 꼭대기를 다 뒤덮어도 항상 수면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천하무적의 노아의 방주 그 자체가 됩니다. 천하가 그 앞에 벌벌 떠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세력도 단 한 손가락 끝으로 간단히 막아낼 수 있는 위력입니다. 이런 자체 증명의 예는 성경 중에 이 외에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거니와 다른 것 예를 들어 무슨 과학적 증거니 하여 그런 것으로 성경의 진실성 즉 거짓이 없고 속임수가 없고 꾸밈이 없는 사실 그대로 진실 그대로 되어 있음을 증명하려 하지 말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또는 진실성을 손상하게 되는 역효과를 내게 됩니다. 왜냐면 그런 지식에서 얻는 결론은 영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이어서 여차한 경우 그 내용이 뒤바뀌게 되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결론 역시 거기 좌우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 불확실성에 근거한 것이 되므로 성경의 권위로 볼 때 아주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각자 직접 읽고 그 자체 내에서 그 증거를 찾을 일입니다. 유의해서 읽는 이에게는 즐비하게 널려져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씩 짚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경이 거짓말로 꾸며낸 것이라면 절대로 이런 내용을 성경에 담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면 성경이 진실에 근거하지 않고 지어낸 것일 경우, 위에서의 설명처럼 그런 지시대로 하다가는 영락없는 자멸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칠 것을 오히려 명령하고 있으니 그런 ‘거짓말로 만들어낸 종교’라면 자살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을 때는 그 어떤 인위적인 힘도 세력도 배척하고 무시하는[왜냐면 하나님의 일이므로 그런 인간적인 것에 좌우되지 않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웅변하는 것이니 사실 그대로 겸허하게 받드는 것이 최대의 지혜인 줄 알아야 합니다.

천추의 한이 될 어리석음을 모면하는 지혜이니 정신 차릴 일입니다. 이상과 같은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그 인도를 따라[그 말씀하신 대로] 스데반은 스스로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전혀 연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유대인들 앞에서 성령 충만한 강론을 한 것입니다[행 7:2].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성령의 말씀[성령께서 스데반을 통해 말씀하셨으니까]을 듣고 격분한 유대인들의 뭇 돌팔매질로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이 또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입니다. 곧이곧대로 진실성 그대로 가감 없이 전달하는 성경 기록자들의 자세가 입증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꾸며댄 것이 성경이라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통해 말했다 해놓고 감히 그런 성령 충만한 사람이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한 결과로 무참히 인간의 돌에 맞아 죽었다고 설정해 놓겠습니까. 그렇게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무참하게 죽었다고 이야기를 만들어놓았다고 칩시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교리를 만들어놓은 후로는 그 종교를 온 세상에 강력하게 전파할 시점에서 역시 그렇게 나약하게 하나님에 속한 일을 그런 식으로 거짓말로 꾸며대겠느냐 하는 그 뜻입니다. 강자의 논리만이 통하는 이 세상에서 그런 이 세상과는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므로 이는 과연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는 한 마디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너무 명백한 일이 아닙니까. 백성의 어른들로 자처하는 이들 앞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하고 좋은 기회라고 할 그런 자리이지만 주님 경고하신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 말씀을 전달한 결과로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거룩하시고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을 그렇게 악한 무리들이 처참하게 죽이는 광경을 정신이 멀쩡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감히 '지어낼'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진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또 그것이 진실 그대로이고 하나님의 뜻[그리스도의 고난 받음]이기 때문에 그런 처참한 일도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신 일이요 성경의 모든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주 강력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다른[이런 자체 증명 외의] 증거를 찾을 때는 오히려 그것이 화가 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 스데반의 죽음이 가감 없는 진실로서 기록된 것일진대 이야말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활동하심을 여실히 나타낸 그 확고부동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하나님은 절대 강자로서 인간이 이렇게 하는 것을 결단코 묵과하시지 않으리라 누구나 생각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거짓말이나 속임수와는 전연 거리가 멀고 이 자체만 해도 진실 그대로임을 웅변하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리스도의 우리 위하신 죽으심을 여과 없이 입증해 보이는 여러 사례[자체 증명] 중 하나입니다. 당신이 이런 판단에도 제대로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디인가 양식(良識)이 마비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렇게 마비시켜 놓기가 일쑤입니다. 죽음 직전에 스데반이 “보라! 인자(人子-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것이 보인다!”[:56] 하고 부르짖을 정도로 성령 충만했었고 바로 그 때문에도 무참히 살해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령 충만한 사람, 성령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을 죽이시게 하겠는가, 그러나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죽게 하신 것입니다. 또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스데반만 아니라 이 사건으로 해서 핍박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으며 죽임을 당했음을 그렇게 핍박한 당사자 중 하나인 사울[나중에 바울 사도] 자신이 증언한 것입니다[22:4]. 모든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죽음, 그것도 비참한 죽음, 그것도 성령 충만한 거룩한 사람의 죽음을 그렇게 그려놓았을 때는 이는 사람으로 난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명이니 이 사실 앞에서 옷깃을 여밀 일입니다. 왜냐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임을 확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달리 증거가 필요치 않는 확고한 증거입니다.

거짓말을 지어내고 속임수를 쓴다면 절대로 그런 기록을 남기지도 않거니와 지어내지도 않는 법입니다. 유사(有史) 이래 온 천하 중에 그런 거짓말쟁이는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거짓말은 억지로 믿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을 억지로 믿게 하려고 그런 식으로 지어낼 것인가를 생각할 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가장 충실한 종이요 일군으로서 하나님의 수족과도 같은데 그런 사람을 그렇게 무참하게 죽인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범하는 일로서 용납될 일이 아니라는 이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러한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일이 일어났으니, 거꾸로 말해서 이야말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말씀과 역사(役事)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범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 용인하시고 묵과하신 것입니다. 이 자체가 우리 인간의 상식적 판단을 뒤엎어버리는 것이기에 역으로 말해서 하나님 실존의 절대적인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바로 이 현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을 토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위해 그렇게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종 스데반이 당한 그런 죽음은 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로 이 스데반의 이같은 죽음을 통해서도, 고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성경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둥 같이 여기던 12 사도 중의 핵심 3 인물 가운데 하나인 야고보 사도 역시 아무 이유 없이 세상의 한 작은 나라의 지배자 헤롯의 불의한 칼날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친히 하시는 일을 대행하고 그 말씀을 전달한 하나님의 사람이 이와 같이 나약한 인간의 손에 죽는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기록하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니,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을 만들어 세상에 선전할 목적으로 거짓말로 꾸민 것이 이렇게 인간에게 속절없이 당하는 하나님으로 지어낼 까닭이 천하에 없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선전해서 무엇에 쓰겠다고 그런 거짓말을 만들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의 인간 위한 죽음은 사람이 지어낸 것이라고 칩시다. 속일 목적으로 아주 교묘하게 짜여진 '인간 구원'의 논리라 칩시다. 그렇다면 그런 구원을 전파하는 설교자만은 죽게 만들 거짓말쟁이는 천하에는 없다는 그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은 것이지만 그런 이론의 거짓말을 힘들여 만들어놓고는 그 거짓말을 진실인 것처럼 세상에 알리는 유력한 전파자를 그것도 비참하게 대중들로부터 맞아 죽도록 이야기를 꾸미지도 않거니와 설혹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쉬쉬하고 감출 일이요 이왕 처음부터 거짓말이니만큼 죽지 않았다고 하거나 할 일이지 그것을 그대로 대문짝처럼 소개할 거짓말쟁이 역시 천하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을 위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칩시다. 그런 거짓말을 믿는 집단에 속한 사람 더욱이 그런 교리를 강력하게 전했다는 대표적인 능력자를 허약하기 짝이 없도록 그리고 바로 그 교리를 전했다는 대가로서 무참하게 죽게 이야기를 꾸밀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그러면 그렇게 죽게 될 교인들이니, 그렇게 죽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누가 그런 종교를 믿겠기에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한다는 말입니까.

억울하게 나약하게 죽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 하나로써 충분하고, 그런 것을 믿는 추종자들까지 죽게 만들 이유도 없고 관련도 없고 뿐 아니라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 교세(敎勢)를 확산시켜야 할 와중에서 그 중심 사도 중 하나인 야고보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의 의미입니다. 거짓말이라면, 이렇게 죽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설정해놓을 이유도 없습니다. 죽을 이유도 밝혀놓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실이기에 그렇게 기록된 것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렇게 모두들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인간 삶이 한 몸의 구조로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그런 죽음들이 정당화된다 가정하더라도 고통을 당하는 것까지는 동참(同參) 차원에서 인정되더라도 그런 교리를 전파하게 되어 있는 그들의 입을 죽음으로써 영구적으로 막게 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지어낸 거짓말이라면 그런 거짓말쟁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인(義人)들은 고난 받고 핍박 받아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인(義人)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 발자취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몸된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 시작부터 즉 악인 가인이 의인 아벨을 죽이던 때부터 이런 종류 즉 악인에 의해 의인이 참살 당하는 살인극은 시작된 것입니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될 때 일어나는 것은 앞으로도 연년세세 그러하리라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인간이라고는 아담 부부와 오직 가인과 아벨 형제 단 둘인데도 그렇게 끔찍한 살인극이 벌어진 것이니 이 세상이 어떤 속성인가가 만천하에 입증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과 없이 그대로 기록하였으니 이 역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입니다. 사람이 상상해낸 '하나님'이라면 절대로 이렇게 만들 리가 없습니다. 일반적인 정서와는 전혀 거꾸로 정반대로 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살려고 하지 비참하게 죽는 것을 미화(美花)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사필귀정이라는 하나님을 가정하여 만들어낸 이상, 절대로 그런 기록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에 있으니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성경은 그 말씀이라는 사실이 확증됩니다.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이런 것을 당당히 기록했을 때는 인간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聖靈)의 감동으로 된 기록이 확증되어 있는 것이니 극력 주의를 기울일 일입니다. 그리고 교회 초창기에 이런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주님 오실 때까지는 하나님의 교회가 그렇게 핍박의 대상이 되어질 것을 미리 선언하신 의미가 됩니다.

이 세상이 진정 사람 사는 곳이라면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의인들의 사는 세상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으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죽음과 같이 의인들은 죽게 되어 있는 세상이므로 결단코 사람 삶의 장소와 때가 아닌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이 세상은 의인들의 고난을 통해 사람들이 구원되는 곳이요 그런 때이기에 그러합니다.

사람 사는 곳이 아니고 사는 때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들은 항상 소수이고 따라서 약하고[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고후 13:4] 항상 핍박의 대상이 되고[요 15:20] 따돌림 받는 표적이 됨을 미리 경고하신 것입니다. 경고하셨다는 것은 그 반대쪽으로는 결단코 마음을 먹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나와 내 말[가르치심]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이 세상에 다시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막 8:37] 경고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했습니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이 소수이어서 따라서 약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일진대 굳이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로 지어내어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할 리 만무합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폭력으로 제압하여 강제로 믿도록 만드는 것이 더 떳떳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 방법은 아니 쓰고 좀스럽고 쩨쩨하게 성경을 거짓말로 꾸미고 속임수로 지어내고 하는 따위의 일을 할 리 없습니다.

폭력으로 하지 않으니 속이고 거짓말로 하지 않을 것은 더욱 확실한 것입니다. 속이고 거짓말을 꾸며대고 지어내는 등의 일은 오직 억지로 믿게 만들고자 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므로, 그렇게 억지로 믿게 할 바에야 세상에서는 주먹이 제일이라고 말하는 대로 폭력, 무력을 쓰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처음부터 경고하셨으니 이는 결단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시라는 증명이니 귀 담아 들을 일입니다.

세상 권력자 앞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변호할 기회가 왔을 때 일절 미리 연구하지 말고 빈 마음, 빈 머리로 임하라는 명령을 통해 이미 우리는 하나님 친히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이 증명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임을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거짓말로 사람을 구원하시려 하겠습니까. 거짓말은 약한 자들의 소행입니다. 강한 자는 밀어붙이면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서 아니합니다.

"기독교가 과연 이 세상에서 세상 권력에 의존하지 않았던가?" 하고 되물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말 그대로 신이고 이 세상 지배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기독교의 이름을 빙자하는 가짜를 만들어 세상에서 기독교로 통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용인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용인하시는가,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을 걸러내시기 위함이니 곧 심판 차원에서 그렇게 하십니다[살후 2:12/요 3:18].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신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현재는 육체 즉 영물들처럼 신령한 몸이 아니고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므로 상대적인 의미입니다. 육체에 비하면 영물(靈物)들은 당당히 신들입니다. 인간[아담]이 에덴낙원에 있을 때는 물론 그렇지 않았고 아담이 그런 영물들 위에 군림해 있었으니 영물들보다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아담을 위해서 영물들이 창조되었던 것입니다[창 2:19]. 즉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권위로 세우심을 입은 아담의 보좌역으로 창조된 영물들입니다.

그러나 인간 아담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라 범죄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수하(手下)에 들어가버린 것이니 당시는 창조의 때로서 먼저 일을 저지르는 자가 나중에 그를 따르는 자 위에 서게 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연유입니다. 그러므로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신지라 이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인간을 속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불법자이지만 그 속임수에 넘어간 아담 역시 똑같이 범죄함으로써 같은 불법자가 된 이상, 이 인간들을 구원해 내시기 위해서는 부득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기득권을 인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처벌하시려면 인간 역시 처벌되어야 하므로 그렇게 되면 인간은 그 누구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구원을 위해 이러한 불법자들[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든 인간들이든]의 불법 행위를 당분간 용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로 이 세상의 실세(實勢)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활동이니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이미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의인들은 이 세상에서 세력화를 꾀할 수 없고 또 꾀해서도 안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써[고후 13:4]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 똑같은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가 세상 권력화한다면 결국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종속되는 의미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증언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 하셨습니다. 그러면 대답은 나온 것입니다. 이 세상 신으로서 지배자이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리스도의 복음[구원의 희소식]이라고 속일 만한 가짜를 만들어 세우는 것은 필연이고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니 때문에 이 세상 신이요 왕(王-요 14:30)입니다.

그래서 “온 천하를 속이는[꾀는] 자”[계 12:9]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그런 가짜[그리스도의 복음을 사칭하교 교회로 가장하는]가 없다면 없다는 그 자체가 이상한 일이 됩니다. 이런 사실을 밝히는 계시록[성경]에 창녀(娼女)라는 여자가 정절 있는 여자와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여자”는 여기서 교회[구원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이룬 한 몸으로서의 집합체]를 상징하는데, 여자는 여자이나 창녀라 하고 큰 권세를 받은 “짐승[그리스도를 적대하여 곧 세상에 나타날]” 위에 올라탔다 했으니 바로 그런 가짜를 지칭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곧 기독교라 하나 실제는 아닌 것이 세상에 군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짐승”이 자기 위에 올라 탄 그 “여자”를 나중에 미워하여 망하게 한다[계 17:16] 했으니, 이는 그 “여자”가 [가짜로서] 표방해 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제는 말살하는 단계가 왔기 때문입니다. 즉 이제까지 잘 이용해 먹다가 이제는 그 스스로가 “그리스도”로서 등장하여 최후 발악적으로 인류를 속여야 할 판이므로 당연히 그런 것입니다.

무신론은 이 글의 서두에서도 밝힌 것처럼 그런 주장에 어떤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직접 “하나님”으로 자처하자니 이제는 유신론이 자연 득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있는 현실을 우리 모두 직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가짜가 그리스도의 교회 행세를 하여 지금까지 세상에 군림해 온 것입니다.

가짜가 아닌 진짜로서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초대교회 때로부터 지금까지 핍박의 대상이 되어 왔으니 성경에서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여자”가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은 이미 창세기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을 여자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대결로서 묘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후손이 또한 원수지간으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여기가 상하게 되면 사람은 힘을 못쓰게 되어 그래서 “아킬레스 건(腱)-Achilles' tendon”이라는 말을 쓰기도 함]를 물게 되고 여자의 후손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머리를 짓밟아 최종 상처를 주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창 3:15].

남자는 비록 여자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게 되었지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원인인데도 남자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사이를 원수지간으로 설정하시지 않고 여자와의 관계로 정립하셨으므로 여자가 교회를 상징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자를 교회 상징으로 본다면 그러면 상대적으로 남자는 그리스도의 상징이 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만일 남자를 그렇게 꾀었다면 문제가 달라졌을 것은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그리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보다 먼저 창조되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손위이므로 아담은 일개 영물에 불과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에 호락호락 넘어가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보다 나중에 창조된 여자를 만만하게 보고 꾀었던 것이며 여자만 꾀면 여자와 한 몸됨을 인하여 남자 역시 불가피하게 여자와 동화되어 같은 범죄를 하게 되리라 계산한 것인데 역시 예상대로 적중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와의 한 몸 즉 하나 됨으로 인한 “따라 범죄”, “따라 죽음”이라는 의미의 색채가 강합니다. 때문에 성경도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4] 했습니다. 그러나 죄는 경중(輕重)이 없으니 같은 죽음입니다.

남자의 씨[후손]와 “여자의 씨[후손]”

그리고 그리스도를 또한 “여자의 후손”이라고도 하셨으니 무릇 사람은 “남자의 씨”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후손”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씨”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영물로서 영물은 원래 성별이 없는데 어떻게 씨가 있느냐 하겠는데 이 사실을 “네피림”[창 6:4]으로써 성경은 설명했습니다. 즉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관계하고 낳은 자식들임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능력 있는 영물들인지라 얼마든지 그렇게 사람의 육체[남자]로 스스로를 변신시켜 인간 여자를 취하여 생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천사들이 인간에게 나타날 때에도 그 고유의 형상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그 ‘자식들’이 사람의 육체를 입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의 영혼은 악령의 씨입니다. 아담의 씨와는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 나눌 때 핵심이 되는 것은 영혼이요 육체는 단지 물질로서 부수적인 것임이 드러납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본원적인 것으로서의 영적인 것은 남자[부친]에게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여자[모친]의 것으로는 육체를 물려받는 것입니다. 물론 여자[하와, 그리스어 Hawwah]의 육체도 남자[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남녀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역할 분담 차원에서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영혼은 물론 하나님의 창조에 속한 것이나 그런 영혼이 조성되는 필수 요인이 남자에게서 나온다는 그 뜻입니다. 어느 연구 결과에 보니 육체적 요소로서의 90%이상이 모친에게서 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남녀 동률로 나와야 하는데 여자 쪽으로 현저히 기울어져 있으니 이는 앞서의 설명대로 육체는 모친에게서 물려받는 대신 [부친의 것은 겨우 10% 미만의 것으로 받고] 육체 외의 요인 즉 영적인 것을 부친에게서 물려받는다는 사실을 드러냄입니다. 때문에 네피림도 인간[아담]의 씨가 아니라 즉 적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후손이라 하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도 아담의 씨가 아닌 여자의 후손이라 하신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의 육체를 물려받았으니 사람이기는 분명하나 전자는 악령의 분신으로서 악령 그 자체이고, 후자 즉 그리스도의 경우는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친히 여자의 태를 통해 세상에 오신 것이므로 단지 인간의 육체만을 받으신 [여자에게서] 경우이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면 위에 지적한 그 "10% 미만"의 것은 어찌 되는가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므로 즉석에서 만드셔도 충분한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아들들”[욥 1:6/창 6:2]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피조물 즉 하나님의 소생(所生)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영물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낳고 낳아짐으로써 생긴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 속한 동물로 치면 한 종류씩 대표적으로 하나만을 '친히' 만드셨기 때문입니다[창 2:19]. 하나님께서 이렇게 직접 창조하셨다는 의미에서 6일 이전에 창조된 영물 즉 “그룹”, “스랍”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욥 38:7] 합니다.

“독생자(獨生子)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과는 다릅니다. 왜냐면 아들께서는 친히 하나님으로서 이런 “하나님의 아들들”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아버지의 형상”-고후 4:4]을 통해 이런 영물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아담]은 비록 영혼은 하나님께서 친히 조성하셨으나 처음부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되고 나중에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터이므로 소재(素材)가 다릅니다.

영물들은 영계인 에덴낙원의 “땅[ground]”을 소재로 하여 친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요 인간 육체는 자연계의 “흙[dust]”이 소재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어 있고 직접 “아들”이라고는 불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됨에 있으니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영[성령]을 영원한 선물로 받아 모심입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말하면 부친[여자 곧 모친의 육체도 남자(아담)에게서 났으므로]의 육체를 물려받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물려받은" 의미가 되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래서 이 점에서는 동일한 의미가 되므로 "하나님의 씨"[요일 3:9]라 한 것입니다. 애초 첫 사람 아담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영계에 속한 영혼을 아울러 지니게 된 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의 정점(頂點)을 이룸과 동시에 자연계와 대칭인 영계의 시발점(始發點) 다시 말해 그 대칭형의 축(軸)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로서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던 것인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꾐에 속아 넘어가 그 아래에 들어감으로써 거꾸로 되어 실질적인 신분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인간이 “남자의 씨”라는 사실은 이 “네피림”에서도 입증됩니다. 즉 인간 여자의 태에서 낳은 자식이지만 “여자의 후손”이라 하시지 않고 유독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후손[씨]”이라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과도 일치합니다.

즉 그리스도만을 “여자의 씨[후손]”라 하신 것이니 모든 인생이 다 여자의 씨이기도 한다면 유독 그런 이름 즉 “여자의 씨”라고 부르실 리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유일무이의 존재이시므로 여기서도 역시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는지라 “여자의 씨”로서는 유일무이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영물[이 경우 남자 구실을 한]이나 인간 남자의 개입이 없이 순수하게 여자 자체적으로 낳은 사람[자식 곧 씨, sees]이라는 의미입니다.

여자 스스로 인간을 탄생시킬 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 밝혀지는 의미는 여자 역할은 남자의 씨를 받아 그 씨에게 인간 육체를 입혀 줌에 있다는 그런 뜻이 명백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즉 영으로[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인간 여자의 태에 친히 드셔서[그래서 “마리아에게 잉태된 이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하였고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신다”(눅 3:5) 한 것임] 그 태를 통해 세상에 나오시니 사람 곧 사람의 육체가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태어나신[인간 여자의 태를 통해 나신] 이상 영원히 이 사실은 변할 수 없어 영원히 사람이시고 사람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영[하나님은 영이시므로]으로서 단지 인간 여자의 태를 통하심을 인하여 사람의 육체를 입으셨으므로 영원히 하나님 그대로 계심 즉 하나님의 아들로 계심 역시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요 사람, 사람이시요 하나님이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의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사람이신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비록 인간 여자와 관계했지만 사람[남자]의 육체로 일시 스스로를 변신한 것뿐입니다. 그런 짓을 한 다음에는 즉시 영물로서의 본연의 상태로 스스로를 환원시키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인간 여자의 태를 통해 사람의 육체가 되셨으므로 영원히 사람으로 계시는 그런 차이입니다. 영원히 사람이 되시지 않고는 나와 영원히 하나로서 존재하실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일시적으로 사람이 되신다면 나 역시 일시적으로만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니 그러면 영원한 구원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 피조물 인간에 대한 극진하신 어버이 사랑이 이런 일까지 마다하시지 않고 감행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의 씨는 남자의 것이고 육체를 받아 태어나게 하는 것은 여자의 몫이 되어 있는 것이 모든 자연계에 속한 육체[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의 암수[남녀] 체제에서의 그 역할 분담입니다.

이는 암수[남녀]가 동시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대칭성으로 차례를 따라 즉 먼저 창조된 것을 기본형으로 하고 그 대칭형으로서 나머지가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여자의 육체도 남자에게서[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절취하셔서 그것을 소재로 여자를 지으셨으므로]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물의 모든 암컷은 수컷보다 나중에 만들어졌고 또한 수컷으로부터 난 것임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하는 것은 성(性)의 우열(優劣)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이 애초 창조될 때 남녀로 동시에 창조되었다면 모르겠지만, 처음 남자도 여자도 아닌 단지 '온전한 육체[남녀가 구분되지 않은]'로서 아담이 창조되었고 훨씬 나중에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는 형식으로 창조되었으므로, 근본인 아담을 따라 어버이 자식 관계를 표현하다보니 그리고 이 아담이 남자가 됨으로 인하여[사람은 이제는 여자 아니면 남자이므로] 그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녀 성별이 없는 것이 “온전하다”는 것은, 남녀 양성의 특성을 따라 분리되면 남성도 여성도 상대(相對)의 성의 보완을 절대 필요로 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온전하지 못하므로 그런 남녀 성별이 되어 있지 않은 천사들과 같이 되어 있었던 상태를 온전한 것으로 보아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온전한 몸으로 아담은 처음 창조되었던 것이며 우리가 영원 세계에 들어가 살 때 즉 신령한 몸일 때에는 이런 온전한 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왜냐면 그 때 가서는 결혼하는 일이 없는 까닭이니 한 몸이 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명백하니, 가령 주님의 신령한 몸이 남자의 몸이라면 그러면 그 대칭으로서의 여자의 몸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랑이라 했으니 그러면 그 신부라고 지칭되어 있는 교회 즉 우리 모두가 그렇다고 여자의 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불합리는 영원한 천국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  오늘날 미확인 비행물체[UFO]라 하여 나타나는 것들은 이들 악령들의 변신술(變身術)일 뿐입니다. 과학 문명이 뒤쳐져 있던 이전 시대에는 한반도와 중원(中原) 일원에서 소위 "신선(神仙)"이라는 것으로 변신해서 인간을 속였던 전과(前科)과 있습니다. 인간이 “빨리 왕래하는” 등의 교통 통신의 발달과 여러 가지 면으로 “지식이 더하게” 될 것을 다니엘이 이미 이 때를 가리켜 예언한 것처럼[단 12:4], 적 그리스도의 출현에 즈음하여 전세계를 한꺼번에 휘어잡아 통일시키는 데에는 이런 과학시대의 천문[그나마도 한정된] 지식에 편승하여 소위 "외계 문명권"의 "외계인"으로 자처하여 변신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파되면 즉시 이 세상은 끝난다고 하셨는데[마 24:14] 정히 이 마지막 때를 가리킨 다니엘의 예언[단 12:4]이 오늘날 성취되었으니 손에 움켜 쥐듯이 우리는 오늘과 미래를 꿰뚫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성경이 그와 같이 명백하게 미리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문명이 완만하게 발전해 왔다면 정확히 그 시점을 집어내기가 어렵겠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에서부터 마치 용수철 튀어 오르듯이 화산 폭발처럼 보란 듯이 갑작스럽게 과학 지식이 오늘 내일이 다르게 발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추세가 지금까지 연속되어 이어지고 있으므로 정히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20세기 전후를 가리킴이 분명하고 지금은 21세기에 접어들었으니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이 때를 지목하여 미리 밝힌 “하늘의 전쟁”[계 12:7]도 종료되어 마귀는 이 지상으로 영원히 쫓겨 내려온 다음이라는 것은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로서 나타나 있습니다. 이 때를 즈음하여 대비하라는 뜻으로 성경은 멸망의 아들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살후 2:1-12].

혹자는 성경을 잘못 읽어 초대 교회 당시라도 당장 주님 오실 듯이 바울 사도 등이 착각했다고 하나, 사실은 당시 사도들의 편지[성경]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 항상 예언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바울의 그런 표현은 바로 오늘의 사태를 두고 그와 같이 나타낸 것인데도 이를 간과하기 때문에 그런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이러한 급박한 오늘의 사정은 이미 복음이 온 세계에 거의 다 전파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올 것이라”[마 10:23] 하셨으니 이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번역과 반포가 거진 다 완료되었으므로 세부적으로 각 동네를 누비며 샅샅이 복음을 침투시키는 작업은 주님 말씀대로 끝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복음 전파는 끝난 지금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인쇄술이 발달하여 성경 배포가 말하자면 오늘날 복음 전파의 주요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설명해온 대로 성경 보급 외에는 복음 아닌 복음처럼 전파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의 정확한 구원의 도리가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 일은 비교적 삽시간에 달성될 수 있으니 성경이 이미 곳곳에 배포되어 있는 상태이고 각종 소위 문명의 이기가 널리 활용되고 있는 때이기에 그러합니다. 각자는 성경을 전에 없이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성경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울이 지적한 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고후 11:4]을 전파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이비, 가짜들을 처처에 심어 놓은 것입니다[마 13:24-30]. 고로 오늘날 똑바로 하나님 말씀 전도를 받으려면 반드시 성경을 통해서만 성령의 계시[하나님의 가르치심-요 6:45]를 받을 일입니다.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말씀을 잡아 비틀고 “혼잡하게”[고후 2:17] 하여 이단 사상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온통 물들여 놓았지만 성경 내용 자체는 손댈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즉 이미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은 실질적으로 온 세상에 전파되어 있어 누구든지 찾으면 찾을 수 있고 들을 귀가 있으면 듣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각자는 그리스도 복음의 그 정확한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살후 2:9,10] 임하는 악한 자의 출현은 때가 찼고 따라서 그 출현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고로 이제는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하는” 즉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시는”[:11,12] 조처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役事)하게 하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11] 함과 같습니다. 성경이 처처에 널려 있어도 성경을 읽으려는 마음조차 없는 것이 모두 이런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연유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에 해당됩니다. “유혹을 역사하심으로 거짓 것을 믿게 하시는” 무서운 올무와 함정과 덫에 걸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너무 늦기 전에 경고를 받을 일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후손”을 가리켜 “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장차 나타날 자”[계 17:8]라 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환생, 전생, 윤회 따위는 이런 네피림을 기준해서 말하는 것이고 구원의 대상인 아담의 후손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곁들여 또 하나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악령들의 소위 인간 혼백 불러 올리기 수법입니다. 이것은 죽은 인간의 혼백이 아니라[“네피림”의 경우 혹 사실일지 모르나]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이미 설명했듯이 그 증거가 사울 왕이 점쟁이인 여인을 통해 사무엘 선지자의 혼백을 불러 올리는 것처럼 조작해내는 장면입니다. 이 광경을 성경이 묘사할 때, 불려져 올라오는 것을 영들[엘로힘, "gods"]이라 하여 복수 취급을 하고 있으니[우리말의 특성상 우리 번역에서는 단/복수 구별을 아니하였으나] 이로써 귀신들의 조화임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왕상 28:13].

즉 진짜 사무엘의 혼이 아니라 그런 것으로 위장하는 귀신들의 술수인 것입니다. 사무엘의 혼백이라면 당연히 단수이어야 하는데 복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니 한 사람의 혼백이므로 단수일 뿐이지 복수일 턱이 없습니다. 누가 무엇이라 해도 이는 상식 차원입니다. 소위 "환생"이니 무엇이니 해도 거기에 속아 넘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이와 같이 그런 것이 속임수임을 이미 확증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속성

의인이 고난 받는 세상이므로 그러면 악인은 제 세상인 양 산다는 것인가 할 때, 의인이 고난 받는데 도리어 악인이 형통하고 삶의 낙을 누린다는 것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용납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함을 성경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일시적으로는 좋은 것 같이 보이는 그 모든 것이 정작 악인에게 도리어 함정, 덫, 올무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걸려 악인이 구원 받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걸러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형통함으로써 세상 사는 재미가 그런 걸러내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을 하신 것도 하박국 선지자가 악인이 이 세상에서 형통한다는 그런 불평을 했기 때문입니다[합 2:1-4]. 그러면 악인이 그렇게 세상에서 형통하게 되는 재미로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를 용납하신다는 말인가 하면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악령들이 현재 악행하는 것이나 악인들이 죄를 짓는 것이나, 망하여 없어질 세상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악인의 형통이 그와 같이 자연스러운 '함정'이 되지 않으려면 악령들이나 악인들이나 악행하는 족족 처벌 받도록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 받을 사람들마저 구원 받지 못하는 결과가 됩니다. 왜냐면 그런 악인들 중에도 구원 받을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고로 구원될 사람들이 다 구원되도록까지는 부득불 악인들은 형통할 수 있도록 허용이 되어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묵과하신다는 뜻이지 그것을 정당시한다는 뜻은 아니니, 그래서 이 세상에서 부유하여 잘 사는 이들은 자기 위로를 이미 다 받고 오는 세상에서는 아무 위로도 없다고 미리 경고하셨습니다[눅 6:24/16:25].

이 세상에서 웃는 자는 화가 있으니 장차 울게 될 것이나 우는 자는 복이 있으니 장차 웃게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6:21,25]. 운다는 것은 이 세상의 실상(實相)이 그러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실상에 직면해 있을 때는 그 실상에 대한 이유를 구명(究明)하려 하게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게 되는 고로 웃게 된다 하신 것입니다. 장차 웃게 되는 자는 예외 없이 울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므로 그 공통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울다가 그 해결점을 찾아 구원 받게 되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주변 이웃들의 구원을 위한 심한 통곡과 눈물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히 5:7]. 그러므로 지금은 그리스도와 그 교회가 발꿈치를 물리는 때로서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힘을 전혀 쓰지 못하는 때이니 오직 고난 받음을 통해 사람 살리는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하나님의 막강하신 구원의 능력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사람들에 대하여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도무지 사람 사는 장소가 아니고 사는 때가 아님을 거듭 강조합니다. 오직 우리 인간의 대표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사람 건지시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곳일 따름입니다. 사람 살리는 일을 이 세상의 신이요 지배자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서는 한사코 방해하는 일이므로 자연 충돌이 불가피하고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과의 전쟁 마당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고난입니다. 전쟁에 임하는 자가 고난 받기를 꺼려 하여 전투를 그만 두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 살리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 피조물 세계를 창조 당시부터 운영해 오시던 방법 그대로 한 몸된 이치 곧 하나 되는 원리로 집행하심에 있으니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의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피조물 중에 단 하나라도 고통 중에 있으면 머리를 위시해서 몸의 모든 지체가 하나같이 그 고통 중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간 범죄와 죽음으로 해서 땅까지 저주를 받았고[창 2:17]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고통하며 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함께 신음[진통(陣痛), 출산할 때의 고통-롬 8:22] 중에 있습니다. 그런즉 이 세상이 삶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 자연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왜냐면 살고자 하면 한 몸의 구조 아래에서 다 함께 예외 없이 풍성하게 살아야 하는데 이 세상은 고해(苦海)라고 하듯이 그리고 누해(淚海), 사해(死海)라고 부를 만 하듯이 고통의 세상이므로 나 혼자 잘 살겠다는 망상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됩니다. 피조물이 다 함께 고통 중에 있는데 나는 그 고통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한 몸의 체제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하나님의 생명의 영역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증명이 됩니다. 피조물만 아니라 그리스도 친히 그 몸된 교회를 통해 남은 고난 중에 계시니[행 9:4] 하나님께서도 피조물과 머리와 몸의 관계를 인하여 아직도 고난 중에 계시니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로 넉넉히 죄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하는 데에서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진 사실을 믿는 데에서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 데에서 드러납니다[요 12:25]. 사실을 사실대로 믿기 때문에[내가 죽은 것은 사실이 아니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사실이니,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사실이고 그 죽으심이 나와 하나 되시기 위한 죽음이라는 것 또한 진실이며 내 안에 친히 성령으로 임하셔서 나와 하나 되어 계심이 또한 그러하므로] 그렇게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마 8:22/골 2:13/엡 2:1] 우리의 죽음에 동참하신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이렇게 함께 죽으심은 다시 살아나실 때에 나와 함께 살아나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나와 하나 되시기 위함이니 이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나와 함께 사심입니다. 내가 장차 죽을[멸망 받을] 자이기 때문에 그 장차 죽을 죽음[멸망할 것]을 대신 죽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기를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가 받을 멸망을 대신 받으신 것이라고까지 확대 해석합니다. 아주 잘못된 성경 풀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대신 멸망하셔야" 하는 것이니 우선 말조차 되지 않을뿐더러 말이 되려면 "멸망하셨으므로" 다시는 어떤 경우에서든 살아나실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라는 의미 자체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하는 죄까지 짓게 됩니다.

우리가 죽은 자로서 그리고 이 죽음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빚어진 것이어서[롬 5:12,17] 도저히 우리 자신으로서는 산 자가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를 그와 같이 자기와 하나 됨을 통해 살리려 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영물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멸망의 운명에 처해지는 것이 그로서는 "죽음"의 의미이지만, 범죄한 첫 사람 아담으로서는 영혼과 육체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비록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육체로 변환되어 신령한 육체로 있었어도]와 영계에 속한 영혼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담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가 버리는 것을 말함었습니다.

왜냐면 그렇게 되면 한시적인 생명이므로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죽으면 멸망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기" 전의 즉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의 신령한 몸으로 되돌리는 것 다시 말해 산 자가 되어 있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우리가 그 때 당시의 아담처럼 신령한 몸이 되어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 바가 되어 동시에 현재 하늘에 있으면서도 땅에 위치해 있는 이중 구조처럼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으로써 된 특이한 것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 하나님 우편에 현재 계시나 성령으로는 이 땅에 다시 오시어[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 계시는 이중의 의미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라는 이중 구조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 역시 하늘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신령한 몸으로 있고, 땅에서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존재함입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이치를 따라 이루어진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아들의 모습이 되어 계시고 세상에 계시는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모습이 되어 계셨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요 15:24/14:9]. 그런즉 나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와 있는 것이 바로 나의 구원의 모습인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땅[이 지구 즉 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다시 세상으로 보내심을 입어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있다는 뜻과 같습니다. 왜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어 있느냐 하면 일하기 위해 즉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기 위함이니 곧 죽음의 고난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의 고난을 받기 위해서는 이런 육체라야만 하고 그래야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육체를 통해 그 남은 고난을 마저 채우시게 됩니다.

악령들이 그런 신령한 몸으로 고난 받게 되는 것은 영원한 불 못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불 못이라는 데 자체가 영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천사들도 지금 고통 중에 있다는 것은[롬 8:22], 범죄하여 저주 가운데 있는 악령들과는 달리[어떤 종류의 저주인지는 성경이 밝히지도 않고 밝힐 필요도 없으나 단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범죄로 저주를 받은 사실로써 추측하는 것] 생명의 낙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 하나 고난 중에 있는 인생들과 한 몸 체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고통 역시 어떤 종류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으나 성경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로 아는 것뿐이요 실상 이 정도의 지식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한 것입니다. 한 몸의 원리에서 함께 모두 고통 중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운다는 것도, 그리스도 친히 이 고난을 다 감당하실 수 없어 우리가 나누어 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와 그리스도께서 몸과 머리의 관계로 있으므로 몸이 머리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의미인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 자체가 우리들 자신을 위하심이므로 우리 자신이 이를 나누어 짐으로써 앞으로 구원 받을 사람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하나로서 그 괴로움에 동참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런 고난을 통해서야 그들의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구원이 우리의 고난 받음에 기인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친히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 남으신 고난으로써 "일하시기"[고후 6:1]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어 있으니 이 경우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롬 8:17]의 의미가 선명히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를 산 자로 만드시는 데에 있고 그러나 이렇게 산 자가 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결과이므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 이 관계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면 하나로서의 구조 자체가 유명무실(有名無實)이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완전 결렬되는 그런 특수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딤후 2:12/눅 12:8,9/마 10:32]. 우리를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만드시기까지만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이요 몫입니다. 우리의 몫이라고 해서 우리의 능력이 아니니 이 능력은 하나에서 백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 곧 선물입니다.

우리 자신이 저절로 생겨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역시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로서 거저 주신 것이지 그들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낸 것은 아닌 것입니다. 나의 몫이요 책임이라는 것은, 나의 의지[그래서 “자유 의지”라 합니다]를 따라 하나님 주신 선물로서의 생명[력]이신 그리스도를 내가 버릴 수도 있고 내 스스로 끝까지 모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보존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아담이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자기에게 선물로 주신 생명[영생]을 스스로 버린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서 스스로 버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버리게 되니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지"[빌 2:12] 못함이 됩니다. 버리지 않고 스스로 지키면 내 자신의 “구원을 이루게”[빌 2:12] 됩니다. 지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즉 보내신 뜻을 충실히 행하는 것입니다[요 20:21,22/4:34].

이는 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갑은 전적으로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보전한다, 생명을 지킨다, 사랑과 믿음을 지킨다는 등의 모든 의미가 그리스도를 내 안에 항상 모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유동성이 있고 고정적으로 고착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엡 3:17] 구한다고 했고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라"[벧전 3:15] 경고한 것이니, 이미 내 마음에 계시고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주님으로 삼고 있는 현실이지만, 계속하라는 그 뜻으로 절대적인 자유 의지의 나의 마음의 변동으로 얼마든지 지속하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달리 표현하여 성경은 "그리스도를 얻으려 한다"[빌 3:8],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9], "그리스도를 알려고 한다"[:10], 내가 "부활에 이르려 한다"[:11]는 등의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12]라 하고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13] 하고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가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12] 한 것입니다.

어찌 들으면 마치 아직도 구원 얻지 못한 자가 자기 행위로써 구원 얻으려 하는 것처럼 들리기 좋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은혜로 믿음으로써 선물로서 얻은 구원의 특징인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마음으로 믿었으며[롬 10:9]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고[고후 1:22]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계시기[엡 3:17]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계시는 위치가 우리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롬 1:28].
다시 말해 피조물된 우리 인간의 삶 자체, 일상생활 자체가 하나님을 의식함으로써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일방적인 것은 없으니 우리만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우리를 그렇게 위하시는 위치에 영원히 계시어 그 위치에서 움직이시는 까닭입니다[시 139:17,18/40:5]. 이는 백 번 강조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시지 자기를 위하심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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