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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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복음과 세상 종교와의 근본적 차이
이 기회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
어느 종교와도 다른 차이를 말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창조에
있다. 첫 창조에서 인간은 실패작이었다.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실패한 결과가 오늘과 같은 인간의
죽음과 고통[人間苦]이다.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실패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끝까지 묻게 된다. 그래서 죽음과 고난이다. 처음부터
인간을 죽도록 만드시지 않았음에 유의할 일이다[롬 5:12].
따라서 불행하게 살도록 만드시지도
않았다. 인간 스스로 불러들인 화근이고 재앙이다. 이와 같이
인간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손써주시니 ‘은혜“라 한다. 그리고 이 은혜를
새 창조로 이루어주시니 그래서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이므로 피조물인 우리 자신이
손 끝 하나 까딱할 일이 없이 하나님 단독으로 이루신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의미의 믿음이
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 정도로까지 사랑하시어 자기
외아들을 주셨으니 누구든지 “이 아들을 믿으면”[요 3:16]
영생한다 하셨고 “이 사실을 믿으면”이라고 하시지 않았다.
아들을 믿는 믿음이 무엇이냐. 말 그대로 그를 신뢰하는 일체를
말한다. 다른 말로, 사랑하여 그 모든 지시와 말씀대로 따르는
것 즉 순종을 말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탓이었다. 어떤 이유로 믿지 않았든지 간에
여하튼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을 믿지 않았으므로 먹고서는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어야 구원되고 첫 사람 아담도
믿었어야 죽지 않는 것이었다. 아담은 처음에 말씀을 믿었다.
때문에 먹지 않음으로써 죽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믿지 않게 될 때 죽어버렸다. 우리 역시 믿음으로써
구원되어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 현재에 있는데, 장차
마음이 변하여 아담처럼 믿지 않을 때에는 당연히 죽는 자일
수밖에 없다.
앞에서 아담의 죽음이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아담 자신의 실패라 했었다. 믿지 않은 책임을
져서 죽음에 이른 것이다. 우리 역시 현재는 산 자로서 구원
받은 상태이나 아담처럼 믿지 않을 때는 산 자로서의 위치를
잃고 다시 죽은 자가 될 것은 뻔하다. 아담에게는 “죽고
사는 것이 네게 달렸으니 죽지 않도록 네 자신을 지켜 끝까지
산 자가 되어 있도록 하라” 하셨다. 바로 그 뜻으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네가 죽을 것이라” 하신 것이다. 지금 나에게
주시는 경고 역시 내용으로는 똑같다.
“구원이 네게 달렸으니 구원과
무관한 자가 되지 않도록 네 자신을 지켜 끝까지 네 구원을
유지 보전하라”는 것이 다름아닌 “네 구원을 이루라”[빌
2:12]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산 자로 만드셨다. 죽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이 아담 자신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신 것이다. 이런 경우는 영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스스로의 생사가 영물들 각자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에
일부는 거룩한 천사들로 현재까지 그리고 영원히 존속하게
되었고 그 나머지는 사탄과 같이 악령들이 되어 영원한 멸망의
대상이 되어 있는 오늘의 현실이다.
악이라는 것은 다름아니라 이와
같이 스스로의 순종 여부로 좌우된 것이고 판가름 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새 창조에서 역시 나의 생사(生死)는 그와
같이 내게 달려 있음이다. 나 스스로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이것이 자유 의지의 의미다. 아담은 자신을 죽인
것이고 사탄 역시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낸 것이다.
나 역시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영원히 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요 12:25] 하셨다. 내가 내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요 내가 내 생명을 스스로 미워하는 것이다. 누가 또는
그 무엇이 나를 대신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 스스로 내 생명 사랑하여 잃지 않으면 누가 빼앗아 갈
자가 없다.
자기 부인이 무엇이냐, 주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을 이름이니
곧 다시는 우리 산 자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 말함이다[고후
5:15/롬 14:7-9]. 따라서 이렇게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자는
“우리[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고 구원 받았노라 하는 이들]
중에 [아무도] 없다”[롬 14:7]고 바울은 단정, 단언, 확언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산 자로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나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롬 14:7-9/고후 5:15]. 성경을 읽어도 바로 읽고
전체를 조감(鳥瞰)해서 보고 한 귀퉁이만 살핌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편식(偏食)함으로써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되게 하지 말 것이다. 귀에 다는 것은 귀고리뿐이고 코에
다는 것은 코걸이일 뿐이다. 한 말씀이 서로 다른 상반된
풀이가 될 수 없다. 자기를 부인하라는[마 16:24] 경고를 하시기
전에 이미 주님은 사람 삶의 도리를 설명하신 것이다.
즉 주님께서 장차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것을 미리 말씀하실 때 이를 인간적으로만 생각하여
“왜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베드로가 동정하는 투로 거들며 나왔을
때 당장 불호령을 내리시듯 제자들을 향하시고[막 8:33]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치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23]
하신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무리와 제자들을
부르시고 이 자기 부인으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으로서
자기중심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니 곧 자기 부인이다. 이것이 원래부터의
삶의 법질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는 사랑으로 둘이 하나 되는 관계다. 바로 이
관계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허물어졌는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창조로 다시 복원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목적
즉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밝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으로 명백히
한 것이다[고후 5:15/롬 14:7-9].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다”[마 16:25] 하신 그대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하심과 같다.
이와 같이 세상을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 사랑하지 않고 당연히 이런 데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게 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론이지만 그래도
자모(慈母)와 같으신 자상스러우심에서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라는 등의 경고 말씀을 하신 것인데, 이것을 무슨
큰 엄청난 것인 양 착각하여 자기 자신의 일을 그르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미혹된 실태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아질 수 있는 모든 일들인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친절하셔서 도가
지나침으로 해서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그런 일은 하나님께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미련하심이 사람의 지혜보다는 낫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의 강함보다는 낫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고전 1:25]. 진리는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자에게 열려지고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언제나 어두움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할 것이니, 이미 그와 같은 약속을 하셨으므로
이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것이 그런
두드리는 행위인 것이다. 인간을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신 이상 하나님의 모든 말씀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믿음에서 수년간에 걸쳐 성경
읽기를 하루 4,5시간씩 하면서 "두드린" 결과로 이런
정도나마 말씀을 음미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고 있음을 필자는
감히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지 않는
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것을 지금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터이다.
그래서 자연계에 처해 있는 인생
실상을 논할 때 영생하고자 하는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냥
죽는 것이 현실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좋은 줄은 알지만
지금까지 그것을 실천 못하고 우선 자기부터 살고 싶어 하여
전쟁과 살육이 끊이지 않는다. 개인 간에도 그렇고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분명히 이 지상의 짐승들과 다르다. 육체적으로는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확연히 다르다. 그 다르다는
것 중에서 두드러진 것이 위에 말한 그런 자기 모순과 욕구
불만이다.
사랑을 실천 못하고 영생하지 못함이다.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비애 그리고 사랑을 따라 실천하지
못함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삶이다. 사람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면 이런 극심한 자기 모순이 있을 리가 없다.
자기 의사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양심이라는 기계 장치가
달라붙어 있어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우연히 생겨난 것이
인간이라면 양심이 아주 없거나 있으면 아주 철저히 양심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율배반 속에서 허덕이는 것이
피조물이라는 증거인 것이다.
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되어 인간은 오래 살면 7,80년
그렇지 않으면 유년기에, 심하면 태어나자마자 죽어가기도
한다. 죽은 후에 아무도 다시 살아났다고 알려주는 이가 없으니
그렇게 해서 죽고 죽는 것만 되풀이되어 오늘날까지 지내오고
있는 것이 인류 역사다. 그런데 이런 인간 역사에 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선포된 것이다. 인간 역사 생긴 이래 아무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록은 없다.
오직 그만이 성경 신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이나 그 때나 유대인들처럼 그의 부활
즉 다시 살아났다는 기록을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유대인들도
믿으면 신약을 성경이라 할 것이나 믿지 않기 때문에 성경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믿지 않으면 그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그러면 신약 자체가 진실인지의 여부 그것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대개 거짓말이란 것 그리고 속임수란
것은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거짓말도 미래 지향적일 수는 없다. 왜냐면 거짓이란
것은 역사가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탄로 나게 마련이기에
그렇다. 그런 탄로는 숙명적인 것이므로 반드시 현재, 현세를
목적한 속임수라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현세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는다, 박해를 받는다는 등등의 내용이 바로 그런 것이다.
특이하다면 특이한 것이, 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다시 살아난 모습으로 다시 세상에 나타날
때까지 시종일관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 점이 주목할 만하다.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가 그 살아난 바로 그 모습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 현세 즉 이 세상과는 적대 관계에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적대적이라 함은 그리스도 재림시까지는 일방적으로
당한다는 것을 뜻함이니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 핍박과
환난 등 모든 고난의 표적이 됨을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
앞에서 모든 속임수는 이 현세적인
이해관계와 연루되어 있다고 전제하였거니와 전혀 그런 점이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이 세상을 부정하는 것으로
일관할 뿐 아니라, 그렇게 다시 살아났다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그 살아나 있는 모습을 나타내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득세(得勢)한다 즉 자기네 세상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성경이 지어낸 소리라면 이런 것이야말로
자승자박하는 말만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진실 그대로이고
일점 거짓이라고는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렇게 나타나는 모습까지 상세히
묘사해두고 있다. 즉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 얼마 동안
지체하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다시 세상에 나타날 때는
그렇게 하늘로 올라간 모습 그대로 하늘에서부터 내려온다고
한 것이다. 구름에 가려진 채 올라갔는데 역시 구름을 타고
온다고 한 것이다(마 24:50/26:64/막 13:26/14:62/눅 21:27/계 1:7).
일부러 그 당시의 다시 살아난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상세 히 밝혀 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특이한 점이다. 만일 그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거짓이고
속임수라면 이런 식으로 거짓을 지어내고 속이려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분명한 답을 내어놓아야, 성경이 옳다 그르다 또는
진실이다 아니다 가부간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진실이
아니고 거짓 말이라면 왜 그렇게 세상을 부정하고 세상에서
전혀 이해관계를 찾지 않을까.
또 그렇게 되기를 그 살아났다는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라는 단서든 조건이든 붙일까.
이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로 유일한 답은 있다.
아니,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이고 진실이기
때문이라는 것, 이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것이 거짓이고
속임수라면 반드시 많은 사람을 미혹해서 이 현세에서 세력화를
꿈꾸는 것이 되도록 함에 있다. 그런 것이 모든 거짓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 이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이들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핍박의 대상이 되어
오고 있다. 핍박 받지 않은 적이 없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다. 성경대로 하면 장차 보다 더 큰 대규모의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의
권세가 깨어진다”[단 12:7]고 했다. 이제 그러한 때가 박두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문자 그대로 즉 성경에서 이른 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핍박에서 시작하여
핍박으로 끝날 참이다.
그리고 그 성경에서 그렇게 예언한
대로 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유일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살아난 모습으로 세상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이제 이 부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
그러냐 하면 그리스도 이후 과거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드러나는 판이다. 그것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양단간에 드러나게 되어 있음이다. 그리스도가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인 것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는 것이요, 진실이고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논쟁은 끝나는 것이나 그 때 가서 믿기에는 때가 이미
늦은 것이다.
세상은 로마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로 행세하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로마 카톨릭이 실상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 그렇게 상징화해서 나타내고 있는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그 종교집단이 가르치고 있는 것 즉 그 교리가
성경과는 터무니없이 별개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것이
가짜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권력을 쥐고 세상 나라들을 한
때 호령했던 것이다.
이것만 해도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예언한 것과는 아주 상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상치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교회로 자처할 수
있겠는가. 이런 거대한 종교 세력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행세하여
가짜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또한 못지 않게 심상치
않은 구실을 하는 것이니 곧 이런 가짜가 판치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실성, 성경의 진실성, 그리스도 부활의
진실성을 측면 증명하고 있다 즉 방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그것이 가짜라는 증거의
몇 가지를 들면 마리아 숭배, 연옥, 인간 사제(司祭)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 등이 되겠는데, 이런 것이 모두 성경과 배치되는
것이다. 성경과 배치되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 하나 실상은 믿지 않는 세상 종교 중 하나에 불과함을
스스로 드러냄이다. 마리아를 그와 같이 숭배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란 이름으로 축출한 이 종교집단은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는 세상’
역할을 한 것이다.
마리아 숭배니 연옥이니 인간 사제에게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따위의 종교 행위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 안에 계시게 되는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믿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 친히 계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계셔주시는데 마리아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연옥이란 것이 왜 필요하며 내 안에 계신 대제사장 그리스도께
나아가 기도하고 회개하고 고백하면 되는 것이지 인간 사제에게는
왜 나아가 이른바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세상이
알기를 이런 세상의 종교 집단이 기독교라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혼동하기 때문에 그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지적하는 것뿐이다. 이런 가짜의 형태로서는 비단 로마
카톨릭만 아니다. 세상이 개신교라고 부르고 있는 일부 집단들
역시 그런 형태가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풀이해놓은 자기 해석을 가지고 성경의 내용이라
선전할 때 그것은 똑같은 가짜다. 전통이야 여러 수천 년을
내려오더라도 사탄이 여전히 이 세상 지배자로 있는 한 그런
전통을 입에 담을 일이 아니다. 사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에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런 가짜가 성경의 진실성을 방증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령의 존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성경을 위주한다고 하면서 그 성경 내용과
어긋나게 말하고 가르치고 더군다나 그런 집단이 오히려
세상에서 승승장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이 세상을 현재 지배하고 있는 악령의 짓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 단독의 상상에서 이런 무질서와
혼란이 이 정도로까지 일어나지는 않는 법이다.
다시 말해 이런 비상한 머리는 인간은
활용하지도 못하고 비록 엉뚱하게 성경을 해석하더라도 그것을
그렇게 세상에서 세력화하여 왕성하게 떨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무조건 성경에 어긋나는 것을 사탄적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사탄의 실존을 명백히 하고 있고 그 사탄은 인생을
파멸시키기 위해 작심하고 있고 원래부터 거짓말로 속이는
자라고 성경에서 명시하고 있는 마당에 또 이 세상을 직접
주관하는 지배자요 신(神)이므로 이상과 같은 결론밖에 더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거짓말이라면 그 거짓말이 목표하는
이 세상에서의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 법인데, 이와는 전혀
동떨어진 것으로서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 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고전 15:19]]로 자처하는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 따라서 그
진실성이다. 위의 바울의 말도 부활을 근거로 해서 한 말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하고 전제한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관한 한 전적으로 아무 것도 기대하는 바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게 기대하는 것이 일절 없는데
거짓말을 해서는 무엇하며 속임수는 무엇 때문에 하겠는가.
단순히 말 장난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할 것인가? 초대교회
당시부터 믿음의 사람들이 핍박 받아 죽어 나가고 혹독한
탄압의 표적이 되어 있는 마당에 그런 말 장난을 할 한가한
여유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유의할 것은 이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난 것이 또한 특이하다는 점이다. 죽었다가 그냥
살아났다고 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 술 더 떠서 그 부활한
모습, 상태를 그려낸 것이다.
그냥 살았다고 해도 믿을까 말까
하는데 그 부활한 몸이 신령한 몸 즉 물질적인 몸이면서도
물질계를 초월한 영적인 몸으로 나타낸다면 더욱더 못믿을
말만 하는 것이 아닌가. 거짓말을 과연 이런 식으로 하겠는가.
다시 살아났다고 했으니 그 다시 살아난 사실을 강조하고
구별하기 위해 그렇게 꾸며댔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꾸며댔다고
해서 이득이 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리 부활을 강조하느라고
그런 식으로 둘러대더라도 사람들이 믿어주는 것이 문제인데
그냥 살아났다 해도 믿지 않을 일이거늘 다시 살아났다면서
그런 황당한 이야기까지 보태어 늘어놓으면 더 믿지 않을
것이니 그래도 그런 거짓말을 믿기를 바란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내용 자체가 진실이어서 그렇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또 정신 나간 사람이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그렇게 절묘하게 꾸며댈 리도 만무하다. 아예 그런
재주를 부릴 줄 모른다고 해야 알아듣기 쉬운 말일 것이리라.
그리고 그렇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모습만 그려놓았을
뿐 그에 대한 일언반구 설명 한 마디도 성경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는 것이 또 그렇다. 시종일관 거저 담담하게 기술하고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거짓말로 꾸며댄 것이라면 그렇게 꾸며댄
의도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즉 부활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강조점을 반드시 한 줄 정도라도 삽입해
넣었어야 할 일이다.
더군다나 앞에서 말한 대로 그렇게
해놓으면 믿을 것도 더 믿지 못할 것이라는 위험 부담을 안고
그렇게 꾸며댔으니 반드시 그에 대한 해명 한두 마디 정도는
쓸 법한 것이다. 그러나 일절 그런 것이 없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생전에 나타낸 기적과는 별개다. 살았을 때 기적을 나타냈으니
그 부활한 몸도 색다르게 표현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당위성도
없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엄청난 기적을
말함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렇게 일부러 그 부활한
몸이 신령한 몸이었다 하여 그 부활을 안믿는 사람이 믿을
것도 아니다. 죽기 전의 몸과는 다른 점을 부각시킬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부활한 후 하늘로 오르는 모습도 그냥 하늘로
올라갔다는 식으로 기술만 해놓고 있으니 그것도 속이는
거짓말로 꾸며댄 것이라면 의당히 그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살아났다면 그냥 살아있는 대로 이 땅 위에 그 살아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야 정상이므로, 그렇게 세상에 남아
있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했으면 그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났다 해놓고는
몇 번 제자들을 만나본 후로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그려놓고
있다. 이것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그렇게 얼마라도 세상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이유를 설명해두어야
그렇잖아도 부활 자체가 황당한 이야기로서 믿을까 말까
하는데 그나마도 이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치에 합당한 것이
된다. 그래서 왜 그렇게 하늘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지를 반드시
설명을 하게 되어 있다. 그 후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일절 없다.
그러니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록한 사람 자신도 왜 그렇게 좀 더 상당 기간 세상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지를 모르는 그런 인상을 풍기고
있을 정도다.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거짓말로 이런 것을 꾸며대었다면 그 살아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상당 기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났음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모로 장황할 정도로 그 살아났음을 목도하고
믿은 사람들의 증언이라 하여 그런 이야기들을 또한 꾸며
나열해놓았을 법하다.
다른 것도 그럴 듯하게 둘러대는
거짓말쟁이가 그런 거짓말 소설쯤이야 얼마든지 쓸 수 있는
터이다. 그러나 성경 기록에서도 증언이라고는 극소수다.
이 역시 부활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더 증언할
필요가 없는 기정사실이기에 그런 증언을 일일이 수록하고
챙길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부활을 일일이 증언하는
증거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으면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증언을 낱낱이 챙겼을 것이지만[이야기를 만들어 꾸몄을
것이지만] 그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증거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증언 외의
나머지 사람들의 증언들은 과감히 생략해 버린 것이다. 바울의
서신에 보면 500여 형제들에게 나타났다고 했는데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 500여명 외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믿은 자에게만 부활을 나타내셨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부활을 나타내심에 차별을 두실 이유도 필요도 없기 때문이고
일시에 모인 자리에서 그 부활을 나타내시는 일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당시 믿은 사람을 500명으로
한정했다는 것 역시 거짓일 수 없다는 증거가 된다. 500명
정도니까 500명이라고 기록했을 따름이기게 그러하다. 거짓말이라면
왜 500명으로 한정하겠는가. 숫자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리고 부활 후 40일간에 걸쳐 세상에 머물러 있었다고 했는데
거짓말이라면 그런 말도 할 필요가 없다. 어떤 목적이
있어 40일간이라 했으면 그에 대한 설명 역시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그런 대목이 없다.
이는 진실 그대로의 기록임을 추가해서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실이고 절대로 거짓이 아니며 속임수가
아니라면 나머지 모든 성경 기록이 진실임을 자동적으로
입증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부활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그 가운데 아무 것도
인간이 지어낸 것이 감히 끼어 들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추악한 인간의 거짓말이 그 거룩하신
말씀에 끼어 들도록 용인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의 진실성을 다른
것으로 입증하려고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그 점을 고려하셔서 이렇게 네 사람[사복음서의 기록자]의
기록이 증언하도록 조처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로
있던 마태 같은 이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다른 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기록을 하였으나 정작 부활하신 사실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그 대강만 적어놓고 있을 뿐이다. 주님의 부활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 부활하심이 너무나 분명한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이기에 특별히 강조하여 자세히
기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 외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증언하는 것은 여러 모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증언한다고 하는 네 복음서 기술자들의
증언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짓말이라면 서로
입을 맞추지 이럴 수가 있는가. 대개 그 무렵에 기록된 것인데
이렇게 서로 다르다면 이것이 진실이더라도 후세에 책잡힐
일이 될까 하여 일치되도록 했을 것이 아닌가. 당장에는 아니더라도
후대에 와서라도 그런 점을 염려하여 내용이 일치하도록
손질을 했을 것이지만 손대는 것을 극력 기피한 것이 드러난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왜 증언들이
일치하지 않고 서로 엇갈리느냐 할 것이 아닌가. 그러기 때문에
나는 못믿겠다, 신뢰할 수 없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거짓말이고
속임수라면 한 사람이 자담해서 그런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이지 여러 사람이 더군다나 우리가 아는 대로는 네 사람이나
나서서 집필할 까닭이 없다. 거짓말이라면 그 거짓말의 일관성을
위해서라도 한 사람 외에는 쓰지 못하게 즉 지어내지 못하게
밀약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네 사람인데다 그 네 사람
각각의 증언들이 일치하지도 않다. 직접 그 성경 기록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부활에 관한 기록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관련된
것만 해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 역시 부활의 진실성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 사실을 증인들의 증언대로
받아 쓰는 사람들은 그저 그 증언하는 대로 적기만 하고 후에
고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로 짜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사실을 지어내었을 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진실일 때에만 가능한 일임을 우리는 경험과
상식으로 알고 있다. 보는 관점이 달라서도 다를 수 있고
기억력의 차이나 혼돈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본의 아니게
말이 잘못 나가서도 그럴 수 있다. 오늘날, 같은 사건을 다루더라도
취재 기자들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게 마련인 것과도 같다.
거짓말이고 지어낸 것이라면 앞에서도
지적 했지만 사전에 입을 맞추기 때문에 일치되고 균일한
내용이 되는 법이다. 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근간을 이룬다. 죽으심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부활이 함께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례 받음도 이 죽음과 부활을 함께 증언하는 것이요 믿는
사람들이 모일 때에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도 이 죽으심과
동시에 부활을 함께 나타내는 것이다. 성찬식이 그리스도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라
했는데 죽으심에만 한하는 것이 될 수 없고 다시 살아나심도
함께 똑같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창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필연적으로
부활과 관계 있다고 했는데 다시 말해 다시 살아나심이 없으면
죽으심 또한 무의미함을 밝혔는데[고전 15:14,17,18] 이것이
새 창조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새 창조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처음 창조로서의 인간은 완전한 실패자가 된 것이다.
즉 아담 스스로 생명 아닌 죽음에 함몰하고 행복의 근원과는
거리가 먼 죄악의 구렁텅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런 인생을 새로이 창조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창조하시느냐 하면 나란 존재의 구조를 일변시켜
완전히 바꾸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이 ‘사람되시는’ 것이 바로 새 창조의
서막이다. 그리고 그 죽으심과 부활은 그 극치 또는 정점을
이룬다. 그리고 그렇게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 사람되어
계시는 그대로 즉 사람으로서 내 안에 오셔서 나란 존재를
영원히 구성하시는 것이 그 정점의 시작이다.
그리고 몸의 구속이 나의 구원의
종막이 된다. 현재는 이 새 창조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 와중에서
탈락하는 자도 생기고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떪으로
구원을 이루는”[빌 2:12] 자도 생겨 저절로 분류가 된다. 영물들이
거룩한 천사들과 사탄을 위시한 악령들로 분류되듯이 갈라져
나간다. 인간의 이와 같은 분류는 그리스도 오신 후부터 시작된
것이니 말씀을 들음에서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써
1차 분류가 되고, 믿은 후에 다시 2차 분류가 진행되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12] 하는 것이다.
친히 사람이 되신 것은 내가 사람이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되신 것이다. 따라서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내 이름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내 이름으로 영원히 존재하심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연스럽게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사심으로 나란 존재를 구성하시게 된 것이다.
이제 나란 존재는 그리스도와의 둘이다. 혼자가 아니다. 이것은
영원히 그러하다. 나란 존재가 둘로서의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새 창조다. 새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난다, 다시 난다 하는 표현이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아들로 출생한 것이다. 둘이 하나 되는
원리원칙이 있다. 그 둘은 각기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그 둘을 이루어 있는 자기 상대를 위한다는 것이 그 철칙이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둘이 하나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 한다. 자기를 위주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표현되는 것이다.
몸과 머리의 구조요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 2:20]이라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뜻이니 바로 자기 부인을 가리킴이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자동적이라 하는 것은 바울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으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한 대로 그렇게 되도록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설정된 것이다.
그래서 단언하기를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죽는 자도 없다"
하였다. "우리가 죽어도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거나
죽는다"(롬 14:7) 하였다. 이것이 "믿는 것"이다.
우리 믿음이 여기서 충심으로 "아멘!" 하지 않으면
그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니다. 그는 아직도 믿지 않는 것이다.
이 점 깊이 유의할 일이다. 이렇게 되어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가 믿음에 있는가
스스로 시험해볼 것은, 넉넉히 시험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고후
13:5).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산다고
자각할 때 믿음에 있지 않음을 입증함이 되는 까닭이다.
‘나’라는 것은 이렇게 해서 즉
새 창조로서 척결되는 것이다. 조물주께서 이런 방식이 아니면
아니 되기 때문에 이 방식을 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 수양하고 마음공부하고 공덕을 쌓아올린다고 변화되지
않는다. 즉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될
수가 없는 것이다. 신령한 몸 즉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런
몸이 되어야 죽지 않고 영생할 수가 있는데 자기 수양으로
그런 신령한 몸이 어떻게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죽은 다음에 되는가. 죽으면 그만인데
어떻게 되어 나온다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비록 죽더라도 그 안에 계신
아버지의 영이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처럼 나를 살리신다
한 것이다[롬 8:11]. 왜냐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면 그것은
곧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런 변화 없이 인간 스스로가 자기를 변화시켜 신령한 몸을
만들고 그래서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 영생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러면 그 안에 성령을
모시면 이 세상에서 변화를 받을 일이 아닌가 하겠지만 그
이유 또한 분명하다. 나는 지금 당장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으니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 신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우리 위하신 죽음의 고난을 다 받지 않으시고 우리 새로
창조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몫으로 일부 남겨 놓으신
셈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와 하나가 되셨으므로
우리와 함께 받으시는 몫으로 남겨 놓으시고 이제는 그 몸된
우리 각자의 육체를 통하여 나머지 고난을 마저 채우시는
의미이다. 머리와 몸을 이루고 있으니 하나로서 이는 당연하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여야 하고 이 세상에서
그 끝을 보아야 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지금은 일하는 때이지
사는 때가 아니다. 이마에 땀 흘려 수고하는 때이고 해산의
진통으로 새 생명 탄생시키는 때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는 측면이 또한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
역시 그런 온전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아버지의
아들들로서는 이는 필수이다. 이렇게 모든 면으로 네 귀가
딱 들어맞게 되어 있는 믿음으로 얻는 우리 구원의 구조이다.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 얻음이니
구원 받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되었다는 의미요 하나님의
아들되었다는 것은 이미 구원이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들됨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통해서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받으라" 하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신 것이다. 고로 이
세상에서의 구원의 의미는 생명의 낙을 누리자는 데에 있지
않고 고난 받으며 일하고자 함에 있다. 성령 받음이 그리스도를
향후 '나라는 존재'의 영원한 구성 요소로 받아 모심이요
이 곧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니 하나님의 아들됨인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믿음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믿지 못하면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천만마디의 백 번 설명도 다 무용지물 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을 논리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덮어놓고 믿으라고만 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성경은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유일한 책이다. 성경을 직접 읽기를 힘쓰고 다른
사람이 성경 풀이한 것에 매달리지 말라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명성이 있고 평판이 자자한
사람의 해석이라도 그것이 얼마든지 성령으로 나지 않을
수 있다. 고로 성령으로 났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각자가
성경을 읽음으로써 성령의 “계시”[요 16:12-15/눅 10:21,22/
고전 2:9/요 6:44,45,65/고전 2:13,14/마 16:17]를 받음으로써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일이다. 주님의 12제자 중 하나가 가룟 유다였다는
점을 항상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도라면 말씀에 관한 한
그 권위를 누가 부정하겠는가.
항상 주님을 모시고 말씀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 한 위치인데도 모든 교회에 경고를
삼기 위하시는 뜻으로도 유다를 그렇게 12사도의 하나로 택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의 그런 권위 있는 자리에 얼마든지
사탄의 종자(從者)들이 위치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경계하심이다.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삶이기도 한 때문이다. 그런 삶의 끝은 알다시피
죽음이고 그리고 내일도 기약하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 본연의
삶의 터전이 아닌 것이다. 신령한 몸이 되어 신령한 세계에
살아 영생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리고 사랑의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삶은 사랑도 아니고 영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 것인가.
부지런을 다하여 수고하고 해산의 고난을 통해 사람 살리는
일에만 여생을 다 바쳐 일하는 것이 세상 사랑하지 않음이다.
이 세상이 죽음이기 때문이요 사람
살리는 것이 급선무로 대두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양심대로
논한다면 우리가 보내심을 받았다고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연히 사람 구원해내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하는
우리 처지다. 이것이 종교와 구원과의 차이, 될 일도 아닌데도
부질없이 자기 힘으로 영생에 이르고자 하려는 망상과 하나님의
새 창조에 의한 그래서 오직 그 이루신 일을 믿기만 하면
되는 그리스도의 복음과의 차이다.
이 세상 산 다음에 죽어서는 그
어떤 과학적인 보장도 없고 혹 영생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만이 지배하는[그러나 심취하면 확신이 생기나 그
확신 자체가 진리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세상사를
통해 알고 있다] 세상 종교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은 믿기만 하면 금방 얻는 구원이요 또 그 구원이
너무나 엄청나면서도 확실하다. 그렇기에 설혹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 수 있다고 해도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갖
영화를 지금 이 시각부터 누릴 수 있다고 해도 기꺼이 반납해야
할 절박한[인생들 구원이 시급하므로] 상황이 아닌가.
그 모든 것 다 팽개치고 훌훌 벗어던지고
[왜냐면 생명이란 영원한 것이고 지금 아니라도 얼마든지
장차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세상은 한정되고 심판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으므로 이웃의 운명이 시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어떤 고초를 무릅쓰고라도 이 세상에서의 한 생애 다하는
날까지 이 사람 건지는 일에만 전념해야 마땅하다는 이 양심의
명령대로 순응해야 마음의 기쁨과 평안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구원 얻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기록이 모든 면에서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그런 기록은, 진실이 아니고는
그렇게 기록될 수가 없음을 자체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요
거짓말이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기록하여 두지 않는 법인데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개인적인 주관[판단]이
아니냐 하겠지만 그 여부는 직접 성경을 편견 없이 읽어보는
것으로써 해결될 일이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중 단 하나라도 거짓말이 섞이게 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그 모든 기록을 철저히 관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인 문제 해결은 ‘성경상으로 나타나져
있는 하나님’의 실존 여부부터 분명히 하 는 일이다. 이슬람교는
유일신으로서 창조신을 믿지만 성경 대신 자기네 경전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가름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니 성경에 거짓이 섞여 있느냐 여부로써 판가름되는데,
결국 앞에서 지적한 대로 ‘거짓말일 것 같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즉 ‘참말이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기준으로 가닥을 잡아 나가도
가름하기가 결코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전부가 진실 그대로의
기록이든가 아니면 처음부터 일부는 진실인 것도 포함되어
있지만 전체 내용으로는 거짓이든가 둘 중 하나다.
그리고 유의할 것은 전체 내용이
거짓일 경우 그렇게 거짓으로 꾸며대는 목적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니 이를 재차 강조한다. 성경이 거짓이라고
가정(假定)했을 때 그 거짓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을 때는
그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함이 된다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다시 말해 거짓으로 꾸민 인간의 말이 아니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이다. 힌두교의 소위 성자들은
고행을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일반인들로부터 받는 추앙은
대단하다.
따라서 이는 자기 부인과는 다른
차원의 세상 사랑인 것이다. 힌두교가 모든 신자들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릇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자기를 부인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자기 부인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을 지속시키라는 의미이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다시 살아난
상태에 있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건져내어야 할 사람의 수효는
너무나 많다. 그 일을 다 감당하려면 비록 내가 천년을 살
수 있는 기간을 허락 받았더라 하더라도 그 천년을 몽땅 바쳐
단 한 사람이라도 건져내기 위해서만 [아무리 고생 길에 자진
접어드는 것이더라도] 그래서 그 일에만 평생을 헌신하여야
마땅하다고 여길 그런 것이 우리 양심이 아닌가. 하나님 주신
천부적인 것이 이 양심이니 천상의 음성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에게는 성문화(成文化)하여 내리신 율법의
역할을 이방인들에게는 그 양심이 넉넉히 대신한다고 밝힌
것이다[롬 2:14].
이 양심으로 말하면 오늘날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하는 바울이 말한 대로의 "몽학선생(유치원
선생)"[갈 3:24] 즉 안내자 구실을 하는 것이다. 왜냐면
저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터라 남이 자기 죄를 지적해주지
않아도 평소 그 스스로 자기가 죄인임을 대부분의 사람이
자인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그래서 이 양심의 가책에
견디다 못하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그 해결책을 두루
찾아 헤매게 되고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무거운 짐 진
자에게 편안한 휴식처,안식처가 되시므로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요 20:21]고 친히 말씀해주시는 마당에 우리가
무슨 달리 할 말이 있는가. 그리고 일 하는 자가 무슨 조건을
다는 등 회피성 발언을 할 수 있는가. 환난을 피하고 어쩌고
그런 말을 할 위치가 아닌 것이다. 죽음이면 죽음을 통해서
그 어떤 고난도 불사하고 이 유익하고 보람찬 일에 스스로
정진할 일이다. 세상 종교는 자기 구원을 위해서라면 입산수도도,
가정을 버림도 마다하지 않고 불에라도 뛰어 들어가라 하면
그대로 순종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불쌍한 사람들을 건져내는
우리의 일에서랴. 이런 인생 구원의 절박성을 안다면 그 영향은
모든 면에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방탕한 것이기 때문에
술 취하지 말라”는 것도 여기 속한다. 일하는 터에 방탕이
무엇인가. 주님 말씀대로 지금은 울 때이지 웃을 때가 아니며
위로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때이니 배부를 수가 없다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생명의 낙을 누리게 되어 있는
세계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그것은 미래에 속하는 것이다.
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철부지하게 우선 당장은 배부르고 좋으면 웃음이 나오고
즐겁다는 그런 피상적인 위로는 단연코 사절해야 하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그런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술로써 잊어버리고
묻어 버려야 하는 때가 아니라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때이다. 그러므로 아침부터 밤까지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다른 사람 구원]이
유일한 주제(主題)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하면서 바울
사도는 “내 형제 내 골육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란다”[롬 9:3] 한 것이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 무엇으로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셨다. “이 세상 목숨 가지고
천하를 얻는 것이라면 원도 한도 없다” 할지 모르나 현재의
이 자연계에 속한 목숨을 목숨[영생]으로 인정하시지를 않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닌가. 정작 목숨은 따로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목숨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심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목숨은 그래서 동물적 생명이라
하는 것이다.
‘동물적’ 생명이고 ‘인간적’
생명은 아니다. 인간적 생명에는 영물들의 생명도 포함된다.
인간에게 영혼을 조성하심으로 영원성을 띠게 됨으로써 여기
걸맞게 인간을 보좌할 영물(靈物)들도 ‘영원한’ 존재로
창조하셨던 것이다[창 2:19]. 아담이 이 자연계의 흙으로 육체로만
조성되어 있을 때 그것이 ‘동물적 생명’이었다. 그러나
다시 그 육체에 영혼을 조성하신 것이니 그 육체[코]에 하나님의
숨[生氣, the breath of life]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인간적 생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범죄하여 선악과를 먹고
난 후부터는 애초의 그 ‘동물적 생명’으로 되돌아오고
‘인간적 생명’은 오히려 상실하게 되었으니 그래서 죽음이요
죽은 자인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목숨"이란
것은 이 ‘ 인간적 생명’을 가리키심이다. ‘동물적 생명’은
이 땅의 동식물에만 적용되는 것이지 영혼을 가지고 인격성을
지녀 자유 의지를 구가하는 인간에게는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는다”[요
12:25] 하실 때의 그 목숨은 이 동물적 생명의 특성을 가리키신
것이고, 여기서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잃으면 무엇이
유익이냐” 하실 때는 이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심이다.
그러나 동물적 생명이나 인간 생명이나
생명은 생명이니 그렇지 않다면 어찌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리스도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실 수 있었겠는가. 단지
인간 개체로서의 생명이 영원하다는 뜻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니, 생명은 원래 중단되는 일이 없는 것인데 사람만은
처음에는 영원한 생명 가운데 있다가 범죄 결과 나중에 동물적
생명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 복구됨으로써 진정 인간적 생명에 부합한 신령한
몸을 입게 됨으로 누리는 생명이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애초 동물적 생명으로 창조된
것은 자연계에 속한 존재이기도 하고 아울러 영계에 속한
존재이기도 하기 위해 영혼이 조성되어 그래서 인간적 생명을
소유하게 되어 영원히 살게 되어 있었으나 에덴낙원에서의
범죄 행위로 인하여 죽게 되자 결국 이러한 처음의 동물적
생명으로 환원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의 구원은 현재의
이 자연계에 속한 목숨을 애초 아담이 창조될 때 그 동물적
생명으로 간주하시고 당시 영혼을 조성하심으로써 아담을
인간적 생명으로 변환시키시던 방법을 원용(援用)하심이니
곧 성령[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을
영원한 선물로 우리 각자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영혼’
격이 되심이다. 우리 구원의 절묘함이 여기에도 있다. 때문에
“성령을 받으라”[20:22] 하실 때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 넣으시던
시늉을 해 보이신 것이다.
§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그러면
천하태평인가. 내가 현재 위치한 무대는 이 세상이다.
베드로의 말처럼 시험하는 자가 포효하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 헤매는 그런 곳이니[벧전 5:8] 그가 이 세상의
지배자로 군림해 있음이다. 요한 사도는 “이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있음”[요일 5:19]을 항상 상기시켜 주고 있다. 천하태평이란
말도 맞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함도 성경의
경고다. 둘을 조화시키는 것은 나 자신에게 달렸다. 전쟁
상황인데도 천하태평일 수는 없다.
세상 종교처럼 장래에 혹 구원 받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 아래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애 터지게 포교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자기
종교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못하는 터에 남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다시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믿는 종교가
좋다느니 하는 소리를 감히 하고 다닐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교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이기주의로서,
자기 종교를 세력화하려는 것이거나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구원에 도움이 될까 해서다. 자신의 행위로써 구원 얻어보려는
전형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내가 구원 얻어 그
생명력을 누리고 있을 경우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이 세상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일개 종교로 오인되도록
모조품을 만들어 그 세력을 확장시켜 거대 종교 집단으로
발전시켜 온 것은 그로서는 당연한 짓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를 앞장서서 핍박하고 탄압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 세상 신이 가짜를 내세우고 세상 종교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고 말씀을 종교로 오인하도록 하는
데에서 성공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전과 변함없이
확립되어 있고 그리고 “자기 백성을 아시므로”[딤후 2:19],
누구든지 두드리는 자에게 진리의 문은 열리게 되어 있고
찾는 자는 찾게 하시고 구하는 자에게 주시게 되어 있다.
그러면 이 진리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 그 현재 누리는 바 생명력을 어떻게 발휘하도록
되어 있는가. 우리가 구원 받았으면 이는 물에 빠진 것이
건져지고 화염 속에 있다가 구출되는 획기적 사건이다. 현재
즉시 구원을 받는 것이어서, 물에 빠진 자가 건짐을 받고
화염 속에서 구출되는 것과 같으므로 그렇게 구출된 사람은
이웃 역시 그렇게 구출되도록 전력을 다 기울이는 것이 마땅한
자세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일에 관여하고
한눈 팔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여
세상 삶에 빠져 지내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이
사람 구출 작업을 전력을 다해 방해하는 세상의 지배자인
사탄에게 장악되어 있는 세상 사람들인지라 사탄의 편에
서서 이 구원 사업에 적대 세력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구출
작업을 벌임에는 갖가지 고난이 따름은 필지이다. 이 모든
고난을 극복하면서 진행시켜야 한다.
그런 장애와 방해가 있다고 그 구출작업을
절대로 그만 둘 수 없다[행 4:19].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되는
것으로서, 나와 같은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하시는
작업에 내가 참여하는 것인즉, 아들된 도리로서 결단코 소홀히
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랑 가운데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하는 일이므로, 어떤 죽음의 대가가 따르고 역경이
닥치더라도 이를 끝까지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 믿음이다.
물론 처음부터 사랑의 일이므로
여기에는 제한이나 기준이나 그런 것은 없으니 한마디로
무한대다. 사랑이 많으면 그만큼 열매도 많을 것이고 적으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열매 맺는 양상을 보더라 도 혹자는
30배, 60배인데 반해 어떤 이는 100배의 결실을 한다. 그러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 아니, 맺어야 하는 것은 필수이다.
열매가 없으면 열매 없다는 이유로 그 나무는 찍혀 버린다[눅
13:7/롬 11:22/딛 3:14/벧후 1:8/마 3:10/7:16/21:43/요 15:2,8,16].
열매가 없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의미와 동일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자로 간주되어 제거되는
것이다. 열매 맺는 바탕은 자기 부인인 것이니, 자기의 십자가
죽으심을 가리켜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고[요 12:24],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 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하신 점에 주목할
일이다.
생명 가운데 있어도 그 생명을 버려야
할 때는 버려야 그것이 진정 생명인 것이니, 주님께서 바로
그와 같이 하셨고 우리도 주님을 따라 그 과정을 통과하고
그 순서를 밟는 것이다. 곧 이 세상이 그 "생명 버리는"[요
10:18] 장소요 때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17,18]
하심과 같다. 사람 살리는 기회는 오직 이 세상에서의 단
한번뿐이니 그 의미의 중요성으로 보아서는 영원한 삶의
낙을 누리는 것과도 맞먹는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영원한 세상에서의 각자의
운명이 이 세상에서의 각자의 행적(行蹟)과 직결되어 있기에
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 “참고 선을 행해야” [롬 2:7,10] 영생으로
보답하시고 자기 부인이 없이 악행 즉 이전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면”[고후 5:15]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무
효험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롬 2:8,9]. “결국 그러면 ‘자기의
행위로 얻는 구원’이지 어찌 ‘믿음으로 은혜로 얻는 구원’이
될 수 있느냐” 할지 모르나,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영생 얻어 천국 가는 것으로 많은
사람이 착각하지만, 새로운 창조로써 우리 각자를 ‘산 자’
되게 하시는 것, ‘산 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의 목적[롬 14:7-9/고후 5:15]으로서 성경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으로 확정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목적에 부합하는 열매를
맺지 못할 때 구원은 무효가 됨은 당연하다. 이 사실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할 것 이요 사람
앞에서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할 것”[딤후 2:12/마 10:32,33/눅
12:8,9]이라 하심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 주님의 부인하심을 받는다
함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는 선고를 받게 되는 것을 가리키심이다.
이 때 사람들은 심판대 앞에서 주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했다[:22]. 삼판대 앞에서 감히 거짓말을 할 수눈 없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주님을 안다고 했으나 주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저들을 부인하신 것이다. 고로 이 말씀은
세상의 일반 불신자들을 가리키심이 아니라 교회 중의 사람들에게
주신 경고다.
맹자는 “평담지심(平澹[淡]之心)”을
역설했다.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며 욕심이 없음이 인생
삶의 기본이요 근간이라는 의미다. 정(正) 자세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자를 포함해서 당시대의 인간 사조가 어떤 흐름으로
귀결하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욕심이 있은즉 인간의 마음은 수라장이 된다.
욕심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괴롭고 강압적으로 무리를
해서라도 즉 남의 것을 뺏어서라도 욕심을 채우려 하니 상대의
원망은 하늘을 찌르고 자기는 양심의 가책에 짓눌려 편안하지가
않다.
그래서 불교나 유교 철학이나 그
무엇이든 무릇 생각하는 자로서 이 점에 공통으로 수긍하고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다. 욕심은 한이 없어 이 우주를 다
채우고도 그래도 더 채울 듯 싶으나 현실이 그렇지를 않은
것이다. 채워도 억지로 채우려는 것이 되니 고민이요 못채워도
못채우니 또 번민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못채워서도
한(恨), 채워서도 짐[負擔]을 느끼도록 인생들을 창조하셨을
리 만무한 것이다.
하나님을 머리로 삼고 모든 피조물이
그 한 몸을 이룬 각 지체 역할을 하면 그런 문제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한 몸의 구조로 살도록 모든 피조물[특히
인격성을 지닌 이지적이고도 영적인 존재]을 만드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내 것이 되고 그리고 나는 모두의 것이
되어 나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없다. 내 것이 아니면서도 내
것으로 가장 이상적이게 누릴 수 있는 것이 이 한 몸 체제다.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는 것이 영원한 생활 법칙으로서
여기에는 당연히 자기 부인이 철칙으로 되어 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아야 그렇게
모든 이웃의 모든 것으로 내 자신 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오로지 내 이웃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아야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고후 5:15] 자연스럽게 그렇게
됨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고
자기를 위하시지 않으심으로써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체제에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삶의 구조인 것이다.
이 이상 가는 것은 생각하려야 할
수가 없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앞에 지적한 대로 ‘평담지심’을 잃게 되고 서로 간에 욕심으로써
으르렁거리며 평생토록 이 모양이 된다. 다시 설명하지만
이러한 한 몸 구조에서는 욕심 부릴 것이 없다. 욕심을 내지
않아도 내 이웃들이 모두 나를 자기처럼 생각해서 척척 대령
(待令)해주기 때문이다. 머리를 위시해서 내 이웃들이 나의
삶을 충족하게 꾸려가 주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함보다 말할 수
없이 여러 배로 너무나 잘 위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도 이처럼 더 잘 위할 수가 없다. 나보다 더 잘 그리고
완벽하게 위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나 자신을 위함으로써
나를 망칠 것인가. 그러므로 자기 부인은 절대 다수의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무조건의 자기 부정이 아니라
가장 실질적이고도 합리적인 사고 방식으로서 자기를 가장
잘 위할 수 있는 최고 무비(無比)의 지혜일 따름이다.
나를 위할 수 있는 100의 방법이
있는데 1 또는 2에 불과한 의 방법을 고집스럽게 따르고자
할 이유가 무엇인가. 재차 강조하지만 그것이 바로 정신 나간
일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들을 어리석게 만들지
않으셨는데 왜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여 범죄[이런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대로 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위할 때 그것이 범죄이다]하게 되는가
하면, “교만” 때문이라고 성경은 지체 없이 진단한다[딤전
3:6].
그리고 “어리석다”고 말할 것은
물론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하심과 같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치 못한 자가 이와 같다”[:21] 하셨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하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고후 5:15] 곧 머리되신 하나님을 위함으로써 함께
지체된 내 이웃을 위함을 가리킴이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라 하는 것이다[롬 14:7-9/고후 5:15/갈 2:20]. 무릇 생명
있는 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는 자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되어 있으니 비록 죽인대도
그리고 어떤 고난이 있다 하더라도 그와 같이 초지일관하지
않으면 자기 생명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써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하는
것이다. 주님 친히 우리가 “우리 생명을 잃게 된다”고 확언해주셨기
때문이다[요 12:25].
여기서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이니 “내가 온 것은 양 (羊)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하셨음이다. 즉 그런 생명을
받았지만 도리어 잃게 된다는 말씀이시다. 이미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생명을 얻게 하려고 내가 왔다” 하실 리도
없다. 그래서 오셔서 생명을 주신 것이다. 주셨지만 이 생명을
주셨다가 도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잃어버리는
경우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그렇게 된다[12:25].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영생토록 보존하게[to
keep] 된다[:25]. 그러므로 내 스스로 유지[보전, 보존]하느냐
아니면 스스로 잃느냐 하는 두 가지 기로(岐路)다. 한번 잃으면
그것을 되찾아 주시는 일은 없다. 왜냐면 아담의 범죄로 한번
잃었다가 가까스로 즉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위해 죽으시기까지
함으로써 겨우 회복되어 생명을 얻게 된 것인데, 그 보전하는
방법[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을 알면서도
그 알고 있는 지식을 따라 행동하지 않았으니 비록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 가정하더라도 앞으로 얼마든지 되풀이해서 그런 “조심하지”[고전
10:12] 않는 행동을 할 것이기에 가망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결과다.
특정 사실을 믿는 것 즉 그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수용하는 것으로만 그칠 수 없고 그런 지식이
있어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위하심을 믿었으니[신뢰했으니]
다시는 과거처럼 나를 위해서는 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여전히 나를 위하면서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한다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
고로 이렇게 나를 위하는 이가 계시고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으로서
틀림없이 그리고 풍족, 풍성하게 능히 이루신다는 확신이
있기에 내 가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이다.
비록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이 오고
고난이 닥칠지라도 그것이 모두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인 줄 알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나 자신을 끝까지
위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내 스스로 이에 대해 자신을 편달하지 않으면 즉 여전히 “육신대로
살면 죽는”[롬 8:13]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과
지혜가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이 사실이
현실로 내 안에서 이루어짐이다.
이와 같이 내 스스로 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나를 부인하시게 된다. 왜냐면 내가 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주님을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죄 짓는 것이다. 고로 내가 여전히 육신대로 살아
죄를 짓는 죄인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만 "믿으면"["믿음"의
참 뜻도 모르면서도 다 아는 듯이] 나를 의롭다 하심으로써
구원된다는 것은 인생들을 구원 얻지 못하게 백방으로 방해하는
사탄이 만들어낸 종교 교리일 뿐이다.
사탄이 만든 종교 교리로 말하면
오늘날 로마 카톨릭이 그러하고 더불어 개신교의 대부분이
그런 세상 종교 역할을 하고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곧 희소식이니 종교일 수가 없다. 왜냐면 세상에 종교가
많고 그들 모두 성경과는 어긋난 상치된 내용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라 표방하여도 성경에 가르치는
대로 가르치지 않고 강조하지 않는 것은 세상 종교로 일괄
취급하게 된다. 범죄하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는다 할 수 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가. 그것은 보통 모순이 아니다.
개신교가 그러한 물이 들어 있다는
것은, 이상 설명과 같이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였고,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되므로 우리가 이와 같이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여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라”[고후 5:9-11]는 것이 바울이
강조하여 가르친 바였는데,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의 교회”라
표방하는 곳에서는 전혀 그런 점을 역설하여 가르치지 않는
데에 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생(前生)”이란
것을 함부로 말하나 실제대로 말하면 “전생”이 바로 이
세상이다. 다시 말해 장차 자기에게 태일 세계가 영원한 고통의
불 못이건 극락의 천국이건 자신 스스로가 그러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 취하는 각자의 자세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물론 이것은 통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그렇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그와 같이 올바른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제대로 살도록 만드심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으니
마땅히 산 자로서의 일을 기쁘고도 즐겁게 주인 의식으로
하는 것이다. 죽은 자에게 산 자의 일을 강요하는 법이 없다.
그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강요한다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산 자에게도 통하지 않으니 사랑으로써 모든
것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이를 강요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은 기쁨으로 주인 의식으로 스스로
앞장 서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희석시키기 위하여
이 세상 신 사탄은 “전생”이니 “윤회”니 하는 것을 지어내어
퍼뜨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세우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그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명백히 보이신 대로 이 세상에서는
제사장의 모습이요 희생제물의 모습이다. 달리 모습이 있을
수 없다. 이런 모습으로 일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한 가지로 지냈고 세상과 운명을 같이하고자
당신 스스로 선택하였다는 점에서 응분의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하셨는데 또 무슨 심판 이야기냐 한다면, 이 말씀을 들은
그대로 기록한 이가 요한인데, 그러면 이 말씀을 요한은 어떻게
들었는가 하는 것을 그 편지에서 명백히 하고 있으니, 즉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한다"(요일
3:14) 한 것이다.
이 사랑이 곧 앞에서 지적한 열매
맺음이다. 다시 말해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야 하고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으로 인정되지를 않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것이라 한 것이다[약 2:20,26].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다.
하나님 사랑함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셔 그 모든 지시대로
따름이요 이웃 사랑은 그와 같이 한 몸을 이룬 피조물로서
각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머리의 지시를 따라 서로 간에
봉사함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함이니 이렇게
되면 전체가 ‘우리’로서 하나 되어 자동적으로 자기 자신이
위해지게 되고 더 풍성하게 위해지는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을
기반으로 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 얻기를 열망하시니 그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 즉 뜻을 이루어드림이 사람 구출하는 작업 즉 기도와 말씀
전달이요 전도 차원에서의 선행이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본보기로서의 선행이기도 하다.
악을 선으로 갚고 이김으로써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전함이다. 그래서 바울은 과거 도둑질하던
이들은 이제는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선한 직업을 가지라고
했다. 일을 하는 것도 이 세상 생명을 사랑하여 삶의 낙을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위함이니 그것이 목적이다.
그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는 자가 그 육신의 것만 채워주려
할 것인가. 먼저 이 세상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이 세상 신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출되어 산 자가 되게 해주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 아닌가. 모든 선행도 기도와 전도로 달성되는
사람 구원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종교와의 차이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신데 종교가
될 수 없다. 종교는 신불(神佛)을 예배함에 있고 그런 예배는
그 신불 앞에서 경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세상 어느
종교를 보아도 그런 경배가 빠져 있는 것은 없다. 모조리
특정 우상이나 표적물을 정해놓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나 우상숭배에서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있다. 천주교가 이에서 예외일 수 없다. 사제들이 이른바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섬김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지 경배하는 일은 없다. 옛 시절 다니엘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 메대 파사의 다리우스왕에 이르러서도 예루살렘
성전 쪽을 향해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씩 무릎 꿇고
기도했었지 그 쪽을 향해 경배를 하지는 않은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도 그런 경배를 언급한 데는 아무 데도 없다. 그것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시라 어느 방향이든 성령으로
충만해 계시므로 특정 방향을 두고 그 쪽에다 경배할 수 없음이다.
특정 방향 즉 한 방향을 놓고 경배한다는
것은 그 예배의 대상이 어떤 형체를 띠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요 이는 곧 조물주가 아닌 피조물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피조물의 특징은, 그것이 우리와 같은 자연계의 몸을
지니든 천사들처럼 영계의 존재이든 형태를 지녀 일정 공간을
차지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종교는 그렇게 경배하는 것이니
실상 그들은 피조물인 마귀를 섬기기 때문이다.
사람이셨던 예수님께서 그런 경배를
받으신 것으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동시에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천하신 후에는 우리가 아는 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의 바울에게 그리고 운명하기 직전의 스데반에게
나타나신 것 외에는 그런 영광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기록이
없다. 그 경우에도 바울이나 스데반이나 그 앞에 경배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사람'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신) 주님을 모시고
매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경배다. 내 안에 계시지만
동시에 이 우주 간에 충만해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는 그것이 경배가 아니라 기도 드림이므로 무릎을
꿇고 하는 것이지만 어느 한 방향만을 향해 경배하는 자세는
아닌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대표로서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하셨는가.
우리가 따라야 할 본으로서 어떤 것을 본이셨는가.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지 경배하는 모습은 보이시지
않았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니...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행 7:48]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세상 종교와의 차이는
여기서도 드러난다 할 것이다. 개신교는 특정한 것을 안치해놓고
그 앞에다 절하지는 않으나 그 대신 건물을 세워놓고 하나님의
성전이라 곧잘 선전한다. 그 안에 무엇을 안치했거나
건물만을 세웠거나 100보 50보 차이다. 성령 충만하여 분명히
선언한 스데반은 이러한 모든 종교 행위를 규탄한 것이다.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하기까지 했지만 그 성령의 선언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 주님의 재림
주님의 사람 되심 그리고 하나님이심은
그 재림에서 나타난다. 성경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만
기술하고 있지 그 재림의 이유에 대한 어떤 설명도 하고 있지
않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성경은 사실 그대로만 정직하게
진실되게 기록한 것이지 그것을 꾸미고 보태고 빼고 하여
인위적으로 조작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만일 인간이 만들어낸
기록이라면 반드시 예수님의 이 다시 오심에 대한 설명을
달아놓았을 것이다.
모슬렘 제국의 최대 영걸이라 지칭되는
악발(akbar)은 비록 회교도이지만 지능지수는 높아 회교도답지
않게 모든 종교를 균형되게 취급하여 그 교리를 다 듣고자
하였고 그래서 각종 종교지도자들을 불러 강의를 들은 후
나중에 천주교 신부를 불러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 온다.
"그대들의 교리가 가장 마음에 들지만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해가 되지 않아 개종할 마음이 없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셨다면 또 지금은 사람이
아니시라면 다시 오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신데다
다시 살아나신 사람이시므로 살아 계신 사람이 처음 태어나신
이 지구 땅 덩어리를 떠나 계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직 필요에 따라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고"
있는 사실을 성경은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행 3:21). "만유(萬有)를
회복하실 때까지"라 했지만, 만유를 회복하시면 되는
것이지 왜 다시 오셔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부연해 설명하지
않았다.
<사람이시기 때문에>라는 단
이 한마디만 달아 두어도 모든 것이 풀릴 만하지만 생략해
버린 것이다. 생략한 것은 당연히 주님이 사람이시므로 세상에
다시 오셔야만 할 것이 아니냐 하는 아주 간단한 해명으로서,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우리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악발은 그
같은 질문에 대한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심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답에 궁한 것이다.
사람이시라도 한번 하늘에 오르시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왜 다시 오실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살아나셨다면 이 세상에 그 다시 사신
몸 그대로 지금까지 계셔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 생각이
미쳐야 하는 것이다. 계속 계셔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시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고 그 목적이 끝나는 시기가 오면 당연히
이 지상에 오셔서 그 부활하신 몸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자태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유일한
사람이신데 다른 사람은 다 죽는데도 홀로 계속 살아 계시면
그 자체가 '눈에 보이는 구원'처럼 되어 더 이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될 수가 없음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모든
바람직한 일들이 무효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구원 얻을
사람은 다 구원을 얻고 그리하여 인간의 범죄타락으로 야기된
모든 망가진 것들이 원상대로 회복되는 일이 이같이 종료되면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일도 끝나게 되므로 그제서야 나타나신다.
더 이상 이같이 다시 살아나신 몸임에도
불구하고 지상에 계속 계시는 것을 감출 필요가 없게 되어
자연스럽게 그 때 지상에 나타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 모든 기록이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어야 한다"는
종류의 토를 번거롭게 달아두지도 않는 법이다. 왜 그러냐
하면 또 그에 대한 해명을 번거롭게 해야 하는 꼬투리를 스스로
제공하는 ‘부질없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 왜 하늘이
그를 받아두지 않으면 아니 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어야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그를 받아둔다는 것은 이 지상에 계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함이요,
어느 "때까지"라고 시한을 정해둔 것은 그 때가 되면
다시 이 지상에 오신다는 것을 말함이다. 물론 육체로 오심을
말하는 것이다(성령으로는 지금까지 계속 계시지만). 이런
점으로써도 성경은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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