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39)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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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이 세상에서 지상 동물처럼 죽어가므로 단명한 존재인 줄 착각할 수 있으나 이 지상 동물 하나만을 두고 얘기할 때 가령 고양이라면 이 고양이는 애초 창조되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니 그 고양이가 이 고양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마치 사람 세포가 부지런히 신진대사를 되풀이해서 죽고 새로 나고 하여 한 인간을 존속시켜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오직 사람만은 이런 동물들과는 달라 그 안에 영이 있기 때문에 동물에게는 이런 신진대사와 같은 현상을 단순히 신진대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죽으리라"는 말씀도 여기 근거한다. 이런 측면을 살필 때 인간은 자기의 이러한 상이한 처지를 살펴 당연히 이 죽음에 대한 회의를 품고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도 눈이 어두워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답답한 일이다. 이같이 창조 시점부터 무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니 그 영원토록 존재할 위치가 중요하다. 3위1체의 양면 대칭성 원리에 따라 이미 생명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는 사실이 에덴낙원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명명백백히 되었다.

따라서 영원한 고난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역시 이 원리에 따라 영원한 세계와 한시적인 세계와의 대칭이 불가피하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의 존재의 성격이 불가피하게 하나는 생명의 낙이요 그 반대 쪽은 죽음의 고난으로 분류되게 마련인데 그 특성[결과]을 짓는 실마리[원인]가 반드시 있는 법이다. 즉 죽음의 고난이 첫 시작으로 잡으면 그 다음에 오는 본질은 생명의 낙이 된다. 반면 첫 시작이 생명의 낙이면 그 다음에 오는 존재의 특질은 죽음이다.

죽음밖에 없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너는 살아서 네 좋은 것을 받았고" 하신 말씀이 곧 그것이다. 세상에서 위로를 받았으므로 이후 연이어지는 영원성의 특질은 불행히도 죽음이다. 이에 반하여 처음에 죽음의 환난으로 특징 지은 삶은 그 후 연이어지는 영원한 특질은 생명의 낙이다. 이 양면은 모두 각자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가항력으로 그렇게 분류되는 것은 여기서 제외된다. 평생을 거지로 살아도 그 욕구만은 이 세상에서 한번 잘 살아보자는 데에 있다면 그는 의당히 '처음의 생명의 낙'으로 분류된다.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목적을 따라 의도적으로 고난을 택할 때 '처음부터의 고난'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고난은 필연이고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생명의 낙을 누리는 세상 사랑은 극력 회피해야 할 것이 된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가 먼저 고난을 받고 그 후에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눅 24:26]고 하셨는데, 이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희생제물로서의 고난만 아니라,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제대로 된 시작을 본으로 보이심이니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먼저 고난을 받고 그 후에 각자의 영광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순서이기도 함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만물의 구성 원리인 3위1체의 법칙에서도 필연적으로 그러함을 여기서 재차 강조하게 된다. 이런 원리를 따라 미리부터 인간이 애초 범죄하게 되고 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사망에 이르게 되었고 이같이 사망이 옴으로써 이 사망으로부터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역시 이런 구조로 말미암는 것이 가장 무난한 것으로 드러난 것뿐이다.


왜냐면 이 원리대로가 아니면 우리의 구원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님 위한 이 세상에서의 고난에 적극성을 나타내고 기뻐할 일이다. 왜냐면 만유 구조의 원리에 따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정상적인 궤도 운행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지으신 만물 만사가 이같이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일분 일초도 틀림이 없는 정밀한 시계처럼 이지러짐이 없다.

초년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이 있다. 영원한 생명에 비할 때 이 세상에서의 삶은 적절한 비유는 안되겠지만[영원에 비하면 일점만도 못하므로] 그런 "초년"에 해당하겠다. 그리고 '초년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 받음에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판단된다. 역경 가운데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 곧 순종을 검증 받는 것이 그 중요한 의미의 첫째요, 영원한 생명의 쾌락을 누릴 것인데 반해 그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과 고난을 맛보는 것은 오직 이 세상뿐이므로 그러한 고난의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이 그 둘째다.

이러한 의미는 그 중요성에 있어서 이루 표현할 수 없이 막중한 것이다. 이는 멸망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한세상 살다가 오는 세계에서 영원토록 고난 받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와 같이 밤 낮의 구별이 명확하듯 하나님 지으시고 관장하시는 세계의 대칭적 양상과 그 의미는 아주 철저하다. 이 세상에서 한세상 마음대로 사는 것[마음대로 산다고 해도 욥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 아래에서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위로 받을 수 없는 데도 억지로 위로 받는 행위"로서 극히 어리석은 것이다[눅 16:25/6:24].

영원한 쪽에 생명의 낙을 걸어야 정상인데, 오히려 한 순간의 낙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도리어 영원한 쪽에다 고난을 걸어두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데에서 빚어진 당연 결과다. 지금은 만물 곧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통하며 탄식하는 기간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정하신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대로 순순히 따르는 것이 좋은 것이다. 무엇이 잘 났다고 감히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하려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밀고 들어가는 것[to press into]이라 하셨고 강제로 빼앗아 차지하는 것["the violent take it by force"]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가만히 앉아 있는 채로 들려져 들어가거나 천국은 따놓은 당상이라며 한가히 어슬렁거리다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약탈자가 경비 망을 뚫고 들어가 약탈하거나 아니면 집으로 쳐들어가 강제로 그 집에 무조건 눌러 앉는 것과 같은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왜 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까. 이는 아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호전적이고 쟁투적인 자세를 뜻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말함이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고난의 장본이다. 생명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무한 낙의 근본이 되지만 생명이 아닌 사망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거꾸로 고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고난이고 고통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무릅쓰고 자기 부인을 사수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표현하실 수밖에는 없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진해서 그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저돌적으로 폭력적으로 나간다는 것이지 억지로 하는 마지 못해 그렇게 하게 된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닌 것이다.

자신 없는 약자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감이 아주 충만한 강자가 취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의 행동이다. 그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가. 구원 받음에서 온다. 그리스도 친히 나의 생명이 되어 계시는 데에서 온다. 그러면 왜 쟁취하듯이 천국에 들어가는가. 악령 사탄이 이 세상의 신으로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유가 인생들의 멸망에 있는데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데 있으므로 사탄과의 충돌은 필연이고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절대로 편안하게 수월하게 수동적인 인간형이 받아 누리는 그런 유형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피동적인 사람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유는 명백하다. 사랑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고 사랑은 항상 피동적이고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을 태생적으로 싫어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주인의식이라 하지 않는가. 사랑은 말하자면 피차 상호간의 주인의식이라 할 수 있다.

상대를 견제하고 강제하는 뜻에서의 주인 의식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 원해서 기쁘게 주체적으로 이루어가는 성향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오해하여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는 이 말씀은 정반대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 받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차원이다.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사랑의 차원인 것이다. 하나님의 단독적인 창조행위이므로 우리 피조물로서는 새로 출생하는 일에 철저히 피동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창조된 그 순간부터는 완전히 국면이 바뀌어져 수동적이 아닌 능동, 적극성으로 변하는 것이다. 왜냐면 새로 창조되어 그 생명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그런 것이다. 바로 이런 살아 움직임 즉 산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우리 구원이므로, 처음부터 회개가 필요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는 절대로 구원되지 못하는 것이기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 4:17] 하신 것이다. 믿으면 영생한다는 말로 바울 사도 역시 전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회개하라는 것이 온 세상에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이심을[행 17:30] 알린 것이다.

말하자면 이 사랑의 행위들은 생명체가 그 생명력을 약동시키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명력이 약동하지 않을 때 그래서 계속 피동적인 자세만을 고집할 때 그를 만드신 이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즉 내가 무엇을 제작하여 만들었는데 그래서 목적대로 움직이도록 장치해서 모든 작업을 끝냈는데 시동을 시켜보니까 그대로 작동하지를 않는다면 나는 실패한 작품이라고 판정을 내릴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피조물의 능동적인 행동의 중심이 곧 사랑이다. 생명 체제 자체가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피조물 중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함께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위해 움직이는 사랑의 행동일 뿐이므로 그러하다. 우리의 구원은 새 피조물됨에 있고 이 새 피조물의 가장 기본적인 행동은 사랑이고 사랑이 그 생명력이므로 이 사랑을 나타내지 않을 때 그것은 새 피조물로서의 "불량품"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더 이상 새 피조물로서 존속할 이유가 없게 됨을 명심할 일이다.

더 이상 새 피조물로서 존속해 있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구원 역시 없다. 우리의 구원은 새 피조물됨에 있다고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셨으나 나 자신이 들어 나의 구원을 스스로 망치는 것이다. 회개하라는 조물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것도 자기를 위해 이미 이뤄놓으신 구원을 자기 스스로 망침이다. 그러므로 이를 가리켜 성경은 자기가 자기의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표현한다.

믿어 회개하는 것도 자기 몫으로서의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이요 믿은 후에도 사랑의 마음이 변하여 즉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써[계 2:4,5] 또는 처음 믿음을 저버림으로써 심판을 받아[딤전 5:12] 멸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구원을 내 스스로 이룸이다. 구원의 양면성 또는 동시성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이를 구원하시는 법이 없다[행 5:32/롬 6:16/16:26/요 3:36/히 4:11/5:8/벧전 1:2/고전 2:9/약 2:5/1:12].

왜냐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까닭에 아담이 범죄하여 오늘날처럼 모든 인생들이 죽은 자가 되어 있으므로, 이 죽음에서 건져내는 것이 우리 구원이므로 당연히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만을 골라 구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 얻는다 하심은[요 3:16] 바로 이러한 사랑의 순종을 전제하신 의미임을 바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 까닭에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셨다[6:44,65].

"누구든지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5:24]는 말씀을 세상에 알린 요한 사도도 그 말씀을 그 편지로써 정확하게 풀이하여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사망에 생명으로 옮긴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한 것이다[요일 3:14].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한 것이다. "항상 복종함"으로써 그렇게 하라고 했으므로[:12-이 말을 하면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4:4] 했다] 복종하면 되는 것이다.

이 복종이 무엇인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사랑의 행위, 사랑으로써의 모든 "행함"[고전 16:14], 야고보의 그 "행함"인 것이다. "참고 선을 행해야 영생한다"[롬 2:7]는 그 "행함"이다. 이렇게 사랑은 자기 부인을 동반한다기보다 그 뿌리고 토대이다. 자기 부인이 없이는 사랑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 사랑 없는[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니 자기 부인을 밑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그 자체가 고난이요 고통이다. 왜냐면 세상은 자기중심이어서 마찰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물러나게 된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 먹을 양식이요 음료"라는 자기 부인의 말씀을 하셨을 때 많은 제자들이 그 속 뜻을 알아채고 두 번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이런 실정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구원 받는 사람이 적습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힘쓰라" 하셨다. "들어가기를 힘써도 못하는 자가 많다"는 경고를 하셨다.

자기 구원을 위해 힘쓰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살리는 일의 자기 부인을 힘쓰라는 것이다. 그렇게 힘쓰지 않을 때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결과론적으로는 같은 의미가 아닌가 할지 모르나, 같은 서울에 가더라도, 자기 경비로 가는 것과 누가 차를 대어주어 그냥 가는 것이 같을 수가 없다. 또 서울에 가지 못하는 경우를 보아도, 자비를 들였는데도 가지 못하는 것이나 차비를 대어주어 갔으나 못가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이루어주셨으나 자기 스스로 구원을 이루지 못할 때가 그런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사랑이 좋은 것인 줄은 알지만 자기 부인이 그 사랑의 뿌리인지라 이 세상에서는 필히 고난과 고통을 수반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때문에 자기 부인을 기피함으로써 문제를 야기시킨다. 문제될 것도 아닌데 문제시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의 삶이 이 세상 현실에서 과연 가능한가에 대해서 그 가능성부터 또는 그 여부부터 따지려 하지 말고, 정말 성경이 그런 의미의 내용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부터 확정 지을 일이다.
만일 성경이 확실히 그렇게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심증이 가거든 그 때는 이것이 거짓없는 무서운 현실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눈 뜨기 바란다. 왜냐면 이렇게 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자기 부인을 엄연한 현실적 조건으로 내세우는 곳에서는 거짓말이나 속임수라든가 하는 것이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실 그대로의 것을 말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런 자기 부인을 말하지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엄연히 진실인데 이 진실을 외면할 수 있는가. 자기 부인에 대한 성경의 증언이 진실인가 아닌가 그 여부부터 가장 먼저 따질 일이다. 그 나머지 것은 훨씬 나중에 따져도 늦지를 않을 터이기에 그렇다. 그런 의미로 성경에 씌어져 있음이 확실하고 확정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성경처럼 무서운 진실의 책은 없음을 다시 강조한다. 시퍼런 진실 그대로의 책이요 예언이므로 마땅히 그 무엇보다도 성경을 두려워할 일이다. 왜냐면 심판대에 가면 이 책이 당신을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고 일체의 핑계를 당신으로 하여금 못하도록 봉쇄할 것이기에 그렇다.

이 세상에서 겪는 이 자기 부인으로 인한 고난은 순수히 사랑이 그 뿌리이므로 즉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내 이웃을 위한 것이요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므로 철저히 보람차고 떳떳한 일이다. 내가 내 자신의 구원을 위하고 내 자신의 상급을 위하고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한다고 해도 그것은 가히 해볼 만한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영원한 고통인 불 못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한번 그런 기회가 있다" 하고 "누구든 희망자는 나서라"고 한다고 가정할 때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백배사례하고 희망할 것이다.

이 세상 짧은 목숨의 그 수천, 수만 배가 되는 기간에 걸쳐 그렇게 고난을 참으라고 해도 기꺼이 춤을 추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나설 것이다. 그런 일을 아직 당해보지 않은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너무 모르고 생각이 없어도 너무 생각이 없다. 황금보석의 귀한 가치를 모르니 그저 내다 버리는 형국이다. 나중에 그 가치를 뒤늦게 알아 천지 사방을 헤매도 그 때는 영영 찾지도 구경도 못하게 되어 있다. 하물며 자기 자신의 구원도 아니고 영광도 아니고 떳떳하게 참으로 장쾌하게 남들의 구원을 위해 받는 고난일진대 이 얼마나 보람찬 일인가!

영광은 고난의 관문을 통과해야[눅 24:26] 

일 다음에 안식이 오고, 해산의 수고 다음에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이전의 수고를 잊는다 하셨다. 애초부터 이런 순서가 세상 창조의 필연적인 요소는 물론 아니었으나 창조 후에 빚어진 일련의 과정[범죄]이 결국은 이런 단계를 심화시킨 것이다. 그래서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 뒤에 오는 '더 풍성함'은 없다 하셨다. 배가 고파보아야 배 부름의 축복을 알게 되고 갈증을 겪어보아야 물의 고마움을 알게 되고, 일하는 수고로움을 거친 다음에야 성취감이란 기쁨을 더하게 되고 병들어 사경을 헤매어보아야 건강을 제대로 뜻있게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죄악으로 인한 혹독한 시련을 겪어보아야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현재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그런 무대이다.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하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세상이란 환경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사람 살만한 좋은 세상이라고 착각해서는 인된다. 세상 사람을 '죽은 자'라고 규정하신 분은 세상에 오신 조물주 하나님이시다. '죽은 자들의 세상'에 미련을 가짐은 하나님도 성경도 모르는 이들의 망상이다.

큰 덩치의 인간이 티끌보다 더 작은 병원균의 침략을 받고 맥없이 목숨을 내어놓는 그런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이니, 이 육신이란 성경 말씀대로 '티끌' 곧 '흙'이기 때문이다. 불시에 큰 중량이 내리 떨어져 인간을 덮쳐도 그 순간 숨이 끊어지는 인생이다. 이런 연약한 육체의 인간을 지어놓으시고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실 하나님도 아니시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영원성을 지닌 몸으로 인간을 변환시키신 것이다.

그 핵심적인 장치가 바로 에덴낙원이라는 별개의 환경이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리고 물론 영역에도 "동산"이라 하고 "garden"이라 하지만 여기서는 계시록에 "하나님의 낙원"이란 말씀이 있듯이 "낙원"이란 말로 대체하기로 한다]. "네가 죽으리라" 하신 것은 곧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바로 그 뜻이다[창 3:19]. 인간이 에덴낙원에 있는 동안은 다시 말해 신령한 몸으로 있는 한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인간에게 '네가 죽으리라'는 경고를 내리실 리 없다. 인간이 '죽음'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인간 세상에 '죽음'이란 것이 아벨의 몸이 썩어 흙으로 돌아가서야 실감하게 된 것임을 감안하면, 아벨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죽음'이란 개념이 등장한 것을 볼 때 이 '죽음'이란 것은 바로 그와 같이 "몸이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 그 에덴낙원이 이런 자연계가 아니라 영적인 영계였음을 밝히는 대목이 된다. 그러므로 이런 "죽음"의 현상은 먼저 지으심 받은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의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을 통해 아담이 익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 '죽음'이 인간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던 것이다. 이 세상은 영존할 수 없는 필멸의 일시적 또는 한시적 임시 세계라는 것은, 이런 연약한 육신의 삶이므로 영원하지 못한 그 허망함 때문에도 그렇고, 사탄이 이 세상의 지배자 곧 '임금'이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에 어긋난 삶을 영위하는 반역의 세계라는 사실에서도 그렇다.

이런 적지(敵地) 또는 이미 남의 영토가 되어 있는 곳에서 이 곳의 생활 풍토와는 전혀 다른 생활 양식을 선전함은[요 18;36] 해당 지역의 증오와 적개심을 촉발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다[7:7].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환란이 그러하다. 의인은 악인에게 기증스러움이 되고 악인은 의인에게 가증함이 된다는 성경의 말씀대로이다. 의의 승리의 개가는 목숨까지 내던지는 악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얻어지는 결과이다.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위상은 '그리스도의 군인(軍人)' 바로 그것이다[계 12:11]. 다른 말로 "이기는 자"로 계시록에 묘사되고 있다. 반면 멸망에 들어가는 이들을 가리켜서는 "두려워하는 자들["cowardice"]"로 나타내고 있다. "대장부답게 강건하라"는 성경의 경고와 상통하는 경구(警句)다. 군인으로서의 책무와 사명을 다하기 위해 만가지 고난을 인내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등줄기가 휘도록 이마에 땀흘리며 일하고, 인간 고통 중에 최악 중의 하나라는 해산의 수고가 필연이다.

왜 이런 수고가 사람을 건져내는 사업에 필연적이냐 하면, 지금은 건강을 구가하는 때가 아니요 사경을 헤매는 와병 중, 수술 중에 있어 그 수술 부위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 즉 각 지체가 같은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하고자 하는 영혼들이 현재 불신 중에 당하는 죄인으로서의 고난을 내 몸에 나누어 짊어져야, 내가 가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을 그 사람도 나누어 받을 수 있는 바탕을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와 내가 하나되는 이치에서 모든 구원의 일이 진척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뜻은, 바로 제물로서의 어린양이 당하는 고난으로서 원래 인간의 죄악이나 그 보응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면서도 즉 자기 자신의 잘못이나 그에 상응한 대가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만을 위함이었음과 같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그러하신 고난에 그 몸으로서 참예함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 친히 인생과 하나 되는 위치에 계셔야 이같이 하나 됨을 인하여 생명이신 자기를 따라 인생도 당신의 생명에 동참하여 살 수 있게 될 것이므로 이 하나됨의 전단계로 죄악의 사망 중에 있는 인생과 불가불 먼저 하나 되시는 순서를 밟아 친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고 인생이 당하는 고난을 함께 받으신 것이다. 죄도 없으시고 따라서 그 자신은 죄의 보응도 아니면서도 같은 고난을 받으셨으니 이는 곧 우리가 당할 죽음을 우리 위해 지시는 따라서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게 하심이었다.

그러나 본시부터의 아버지 하나님과 또한 하나 되심[이제는 인생과 하나 되심과 동시에]을 인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영광의 부활을 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런 특성의 고난을 이 세상을 지내는 동안 받아 그리스도의 완성된 인류 구속 사업을 따라 사람을 건져내는 우리의 일을 활성화하고 효능화한다는 데 있은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하는 갖가지 고난을 기피할 까닭이 없으며 오히려 열두 사도들처럼 기뻐해야 할 일이다[행 5:41].

이는 주님께서 그런 고난을 당하거든 "기뻐 뛰놀라"[눅 6:23] 하셨을 정도의 영광스러운 포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사리적으로 온당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고난과 불이익과 수모를 두려워하고 오히려 하나님 모르는 세상 사람들 틈에 끼여 희희낙락 좋아하며 그런 불의의 세상을 사랑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단죄를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할 것을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게 언제나 바라시는 것이다. 또 그 잣대를 따라 인생을 심판하실 것을 분명히 하셨다. '믿음' 여부를 묻는 본질적 의미 이외의 갖가지 변명을 붙여 자기를 합리화하려 해도 이에 대해 성경이 명백히 단죄하는 죄목은 한결같이 오직 "믿지 않음"이다[히 3:18,9/4:2].
 

고통 속의 세계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니"[롬 8:22]. 이 세상이 사람 사는 데가 아니라는 것은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도 확정되고 있다. 고통하는 데에 무슨 낙이 있다는 말인가.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고통 중에 탄식하는데 인간만이 희희낙락하고 있다. 희희낙락할 아무 것도 없건마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눈이 멀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희희낙락하는 것도 육체 가운데서의 낙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벌써 육체 구조부터가 동물과 다르기 때문에 진화론을 신주같이 떠받드는 이들도, 진화를 해도 어떻게 단기간에 이렇게 판이하게 다르게 진화할 수 있는가에 와서는 맥이 풀려버린다고 한다. 왜냐면 이런 별난 차이에서는 진화론 자체가 맥을 못추기 때문이다. 정작 진화론을 안다고 하는 이들은 이와 같이 진땀을 빼는데도,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일반 대중들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광신(狂信)한다.

무턱대고 남의 말만 믿고 스스로 생각해보려는 주인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소위 신학박사니 교수니 하는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만 터무니없이 맹종하고 스스로 성경을 보며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을 생각은 없는 것이다. 성령은 이미 이를 경고하여 베뢰아 사람들을 칭찬하고 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고상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행 17:11,12] 했다.

이렇게 인간이 지상 동물과 판이하게 다른 특징을 지니면서도 느끼는 삶의 낙은 그렇다고 지상 동물에 비하여 별반 월등한 것도 없다. 뿐 아니라 이미 지적한 대로 피조물 자체가 그것이 자연계에 속하든 영계에 속하든 실상대로 말하면 생명의 정상적인 희락 중에 있지 않고 고통 가운데에서 신음[groaning] 중에 있기 때문이다[롬 8:22].

만일 피조물이 이런 상황에 있지 않고 인간의 범죄로 인한 저주를 땅이 받지 않은 상태라면 그래서 이 세상이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면 우리가 주님과 이렇게 함께 있다는 사실은 지금으로서의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생명의 엄청난 낙을 누리는 그 느낌 그 황홀경 속에 휩싸여 있을 것이지만 죽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런 경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기껏해야 식도락의 낙, 성적인 낙, 휴면의 낙 그런 정도다. 그것도 빈약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으니 각종 고난과 고통이 수시로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영락없는 야곱의 형 에서의 "팥죽 한 그릇"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사는 낙 때문에 영생을 놓친다, 이런 세상에 속한 일에 신경을 쓰다보니 영원한 생명을 놓친다, 이런 어리석음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분명히 이 위험을 경고하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 중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 중의 또 하나로, "재리의 유혹"이라 우리말로 번역된 <재물의 속임수>[deceitfulness of riches]다. 간단히 말해서 돈이면 다 되는 줄 알고 돈, 돈, 돈에 미쳐 쫓아다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돈 벌기 위해 악착같이 밤잠 못자고 먹을 것 못먹고 노는 것 다 참은 끝에 번듯한 공장을 차려놓았지만 뜻밖에 불치병에 걸렸다. 몸져눕고 보니 그동안 먹지 못하고 놀지 못하고 바득바득 살아온 것이 너무 후회스럽고 통탄스러워 의사에게 "내 전재산의 절반이라도 주겠으니 날 좀 살려 주" 하고 매달렸으나 인력으로 못하는 일이라 결국 그 병으로 죽어 버렸다.

죽고 나니 여자는 남자가 죽기 바쁘게 새 남자를 얻어 살므로 결국 그 사람은 죽자사자 돈 번 것이 그 남자를 위해 벌어놓은 재물이 되고 말았다는 그런 실화가 있다. 재물이 이 사람을 속인 것이다. 재물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다"[살전 5:10] 했는데,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아무리 사랑하고 친한 사람과 함께 있어도 그저 그런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주님과의 험께 함"은 하늘 땅 차이라 할 것이다.

오죽하면 시편에 성령으로 기록하기를, "하늘에서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습니까. 땅에서 주님 외에 내가 사모할 이 없다" 했겠는가. 하늘, 에덴낙원-그 좋은 "천국"이 아닌가. 지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좋고 좋은 세계가 아닌가. 지금 우리 처지로서는 그 하늘나라의 한 모금 공기를 들여 마신다 해도 색다른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하나님 나라의 축복도 주님과 내가 함께 있는 그 황홀경 그 행복의 극치에는 감히 견줄 수도 없다는 것이 이 시편의 뜻이다.

인간 중에 누가 이런 지식을 지녀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이렇게 단언하셨으니 우리는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이다. 어찌 찬미, 신령한 노래가 없을 수 있으랴[골 3:16/엡 5:19].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이다"[히 13:15].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는 것[빌 1:29]-이것은 두 개가 항상 평행선을 이루어 있는 철도의 레일과 같다. 고난 받지 않으려거든 믿지 말 일이요 믿으려거든 고난 받음을 각오할 일이다. 사도시대의 초대교회가 세워지기가 무섭게 핍박은 왔고 사도 중 기둥 같이 여김을 받은 셋 중 하나인 야곱이 즉각 죽임을 당하여 칼날에 희생된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빗발치듯 하는 돌무더기 속에서 죽음을 당한다.

'믿음과 동시에 고난'이라는 사실을 입증함이었다. 고난은 믿음과 더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요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고난이 구원 얻는 필수요건이라는 말은 아니다. 믿는 것 자체가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가운데서 받는 고난이다. 사람 살리는 일은 교회를 통하여 수행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의 연장선상에서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고난이다. 고난-희생의 고난 없이는 인간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구원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

구원 받기 위한 고난도 아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인간 구원의 일에 동참하는 뜻에서 필수 불가결하게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은 세상 종교가 흉내 낼 수 없는 일이다. 이것 자체가 성경이 진실의 기록이요 성경이 나타내는 모든 것이 구원의 참된 진리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거짓은 감히 이런 내용을 지어낼 수 없다. 거짓은 언제나 자기중심, 즉 욕심이 그 뿌리이기 때문이다. 즉 거짓말로 속임으로써 이득이 있어야 하는데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얻는 이득이란 없기 때문이다.

<구원 받기 위한다>는 그런 이득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구원 얻은 자로서 그같은 고난으로 이 세상 삶을 일관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영생 복락(福樂)을 누리도록 처음부터 창조된 인간이기에 인간 본성 자체가 고난을 달가워하지 않고 반기지 않는다. 때문에 거짓말쟁이는 처음부터 이런 말, 이런 내용을 의식적으로 쓰지 않는 법이다. 그것이 진리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말로써 거짓말이 성공한 역사가 없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고난을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반드시 고난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나타냄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믿지를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간주된다는 것뿐이다. 영원한 생명보다 이 세상 삶이 더 좋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고난 받음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특성 즉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구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됨'은 '같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하나'로 통함을 뜻하는 것이다.

고난도, 영광도, 사람 구원하여 살려내시는 주님의 일에서도, 모두 '함께 나눔'이다. 이 하나됨은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냥 주님께서 우리 위하여 고난 받으셨으므로 우리는 그 덕에 구원을 얻는다는 단순한 그런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그런 정도라면 세상 종교가 내세우는 비현실적인 가공의 것으로 조작해낸 구원이 되겠지만, 진실로 우리의 구원은 진실과 진리에 입각한 구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막연한 인간 상상에 의한 속임수가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제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당면한 현실문제인 인간 고난에 대한 합리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손에 꽉 잡히는 느낌의 이상적인 해결책임을 스스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과 고난의 불가분성을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절대로 가공(假空)의 것이 아닌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진실임을 입증하는 절대적인 확고한 부동(不動)의 증거가 되고 있다. 현실적인 이 세상과 원수되고 세상으로부터 따돌림 받는 그런 총체적인 고난을 통한 구원은[믿음과 고난이 불가분이기 때문에] 인간 본성이 가장 꺼리는 것인데 그런 장애를 공공연히 표방하면서 나타나는 속임수나 거짓은 이 천하에는 없음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난 받음을 이런 감격스러운 인식 아래 수용하고 감내할 일이다. 이렇게 고난 받음이 필연적이라면, 마치 교회가 현재의 세상을 정복이나 했고 그 배후의 핵심 세력인 사탄을 포박이나 한 것처럼 그래서 다시는 핍박을 받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 종교의 형태를 취해야 옳겠는가, 자문자답해볼 일이다. 핍박 받으면 하시라도 접수되고 파괴될 웅장한 교회당은 왜 짓는 것인가. 이 하나만 해도 열 가지를 말한다.

성경처럼 사랑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리를 한 데가 없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하고 말을 하면서도 말하지 아니하는 듯 내밀히 나타내는 이 사랑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가장 명확하다. 세상 종교는 이같은 사랑에 대한 설명이 없다. 몰라서라기보다 사탄의 속임수이기 때문에 사랑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반드시 성경에 나타나시는 대로의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하고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시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일부러 유야무야로 흐려놓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이 사랑이 그 뿌리인 것이다.
 

욥의 고난

욥의 고난은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 즉 성경에서 언급되는 "택하심"과 무관하지 않다. 사탄이 하나님께 욥에 대하여 항변하기를 "하나님께서 욥에게 울타리를 쳐주시니까 욥이 저런 믿음이 있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좋다, 어디 네 마음대로 그러면 욥을 시험해보려무나. 그렇게 네가 안달이 나 있다면" 하고 허락하시는데 과연 욥의 믿음, 사랑은 그 스스로의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만드셨거나 그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예정하셨기 때문이 아님을 자체 증명한 것이다.

이런 시험은 욥 한 사람의 경우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인간을 시험하는 한 이유가 되는 것을 밝히고자 함이었으므로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임하는 모든 고통스러운 시험에 대한 자초지종인 이다. 일시적으로 고통스러울 뿐이지 더 큰 영광으로 입히시는 한 가지 방법 즉 통과의례로 삼으신 것이다. 마치 병 낫기 위해서는 쓴 약을 먹는 고통을 받아야 이후 보다 건강하고 온전한 몸으로 삶을 누리게 됨과 같다.

무슨 일에든 성공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고통의 수련을 겪어야 마침내 명예의 월계관을 쓰는 그런 이치와 같다. 세계 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우승한 우리 선수가 이런 우승의 영예를 얻기 전 훈련을 할 때 일면 죽고 싶기도 한 완전히 마라톤 자체를 포기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정도의 거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참아왔다고 실토한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사람들을 살리는 이유 외에도 이렇게 불가불 우리 자신의 영광에 들어가는 일과도 관련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들어가는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긴 우리의 고난을 이렇게 나누어 생각할 수도 있고 통틀어 하나로 묶어놓고 생각해도 그 의미는 서로 통일되고 조화되어 그것이 그것이지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나, 나누어 생각해보면 그 다목적의 깊은 의미를 새길 수 있게 되고 우리의 고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어 좋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또 하나의 의미를 추가한다면 우리의 순종을 온전하게 한다는 측면을 덧붙일 수 있다.

일면 같은 의미로 보이지만 이 사실을 성경은 우리 주님과 연계시켜 밝히고 있으므로 우리 역시 이를 더욱 확대하여 그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즉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 경우는 우리의 택하심에 관한 것으로서, "아들이시라도 그 받으신 고난으로 온전케 되셨다"고 한 히브리서에서의 언급은 우리가 하나님 아들로서 받는 당연한 자질 판정과 관련된 것으로 분류해 보게 된다. 자질 여부라고 해서 오해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면 누구나 나타낼 수 있는 사랑에 관련된 것이니까.

즉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순종으로 이어지고 사랑 없음이 불순종과 직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오로지 요구하는 자질이 이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 외에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엄청나게 보이던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첫째 하나님을 네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둘째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함으로 요약됨이다. 이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이 단 한가지 사실 때문이다.

부모가 우리를 낳고 기르셨으니 '부모 공경' 당연하고 나와 같이 똑같이 낳아 기르신 내 형제자매들이니 즉 내 골육이라 그리고 나와 똑같이 내 부모의 자정이 그들에게도 가 있는지라 '형제 우애' 또한 당연하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전부다. 아주 단순 명료하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없다. 엄마가 아기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던가. 단순히 엄마 시키는대로 하라는 것 이외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꼭 이와 같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으니까. 이유는 오직 이 한 가지다. 그러므로 이미 구약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아, 주님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곧 주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를 행하며[to act justly]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同行]이 아니냐"[미 6:8] 하신 것이다. 의로운 것[公義]을 행하며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매일 사는 것, 그것이다.

의로운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의 법질서를 따름이다. 모두 사랑 일색이지 달리 다른 뜻이 없다. 그래서 신약에 "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요일 5:3] 했다. '계명 지키기'란 말만 나오면, "은혜, 믿음, 값없이 얻는 구원"을 일방적으로 아니 편벽되게 편파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은 무조건 거부감을 나타내는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부터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침 받은 탓이다.

잘못 교육 받았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숫제 그것은 구원부터가 아니다. 구원이 아닌 것을 구원으로 지금까지 착각해온 것이다. 욥을 사탄이 시험하게 된 동기는 욥의 자주적인 의사 즉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택하심에 따라 받는 축복이라고 오해하는 데 있었다. "택하심"에 대한 오해는 사탄만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하나님 택하셨다면 내가 아무렇게 살아도 결국은 구원될 것이요 택함 못받았으면 내 아무리 발버둥쳐도 구원 못받는다는 일종의 자포자기식의 구원관인데 순수하게 사탄에게서 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는" 의미는 지구 마지막 날의 "환난의 때를 감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실 것이다" 하신 말씀에서 완연하게 드러난다. 즉 택하신다는 것은 믿음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 믿음을 따라 넉넉히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제반 사정과 여건들을 그런 쪽으로 조정, 조절해주신다는 의미이다. 이는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신다는 의미와는 차원이 완연하게 다르다.

그렇게 조절해주시기 위해서는 누가 믿음을 끝까지 지킬 것인지 누가 그렇지를 않을 것인지에 대한 사전(事前) 지식 즉 미리 아심이 필수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미리 아시고[예지] 그것을 토대로 하여 미리 정하시는[예정] 것이다.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는 그 악한 날들을 감해주시지 않으면 즉 그 악한 날들과 접점(接點)이 될 구원의 마지막 날의 종점(終點)을 조금 더 연장시켜 그 악한 날의 시점(始點)을 좀 더 뒤로 물려주시지 않으면, 그 무렵해서 믿음에 들어오게 될 그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게 되므로 구원의 날들을 연장시키고 악한 날들을 그만큼 단축시킴으로써 그 사이 구원받을 사람은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조처하신다는 의미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이다. 당초의 예정대로 하면 이미 악한 날이 시작되었어야 할 그런 시기다. 그런데 처음부터 예상하시던 대로 아직도 구원 얻을 사람들이 남아 있으므로 악한 날의 시일이 약간 늦추어지고 있는 오늘 이 시점임을 모든 사람들은 알아야 하는 것이다. 때가 이처럼 절박하다. 언제까지나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오고야 말 세상의 마지막이 이제 오늘 우리 세대에 임박해 있는 터이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그 의미가 다르다. 이미 그 겉모양부터가 다르다. 날로 그 성장속도가 빨라지는 각종 과학문명의 이기(利器) 발달이 그것이다. "이로운 기구"라 하지만 이 세상 육체에 우리가 속했을 때를 말함이고 신령한 몸이 되어 만능이 되면 한낱 장난감일 뿐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장난감에 몰두해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과 같이 된다. 이런 지식에 비례해서 급속도로 무너져가는 기존 가치의 질서 체계를 주목할 일이다.

한마디로 혼돈 일색이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팽이 모습이다. 잠시 비틀거리다가 곧 총 스톱으로 끝날 것이다. 더 다시는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다. '알카에다'라는 개인 조직에 의해 세계 최대강국마저 휘청거리는 것이 그 단적 예가 된다. 이런 극한 혼돈은 그 필연적 귀결로 "평화와 안정"[살전 5:3]과 세계적 질서를 약속하는 가시적인 초능력자의 출현을 갈망하게 되어 있고 이를 기화로 바울이 말한바 "악한 자"는 군림할 것이다.

종교통일을 그 최 우선 과제 중 하나로 채택할 것이므로 적 그리스도의 자작(自作) 종교에 순응하지 않는 것은 그 무엇이든 '사탄'으로 간주하여 박멸할 것이다. 계시록에 교회를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같은 '여자'로 나타내면서도 '음녀'[harlot]라고 하는 것이 등장한다. 교회의 원수 노릇을 하므로 다 같이 사탄에게 속하면서도 '짐승'[beast]이 이 '음녀'를 진멸시킨다고 되어 있다. 같은 사탄의 패거리인데 그럴 수가 있느냐 하겠지만 그 명칭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 행세를 한 말 그대로 '음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음녀가 표방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박멸시켜 그 이름으로 행세하는 종교 자체를 없앤다는 뜻이다. 모름지기 이에 대비하여야 한다. 이미 그 날이 시작되었다고 치고 하루하루를 엮어 나가야 차질이 없다. "집교회" 운동을 늦게나마 전개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그리스도 교회가 핍박에 대비하는 방법은 초대교회가 보여준 그 외의 더 나은 또 다른 방법이 없다.
 

영원을 갈망하는 인간

사람이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영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고,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인간 스스로에 의해 [이는 다시 인간이 절대적인 자주 독립성의 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존재로 지어졌음을 말한다] 죽음에 들어 있음을 입증한다. 영원히 살지 못하니 죽음이지 달리 이름 붙이지 못한다. 영생할 수 있다는 이 말은 다시 만물의 대칭성 원리 또는 3위1체의 법칙에 의해 영원한 불행의 멸망이 각 사람을 기다리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 자체를 두고 말해도, 인간의 내부 깊숙하게 그런 영생에 대한 갈망이 있고 또 영원한 멸망에 대해 두려움이 없다면 그런 것이 생길 필요도 없는 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그런 실상 내지 실존을 암시하는 것이다. 아무리 영생이나 영원한 멸망과 같은 내세가 없다 하고 조물주의 존재도 부인하는 사람도 죽을 임시에 가서는 몹시 불안해하는 사람이 거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째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 자체가 신비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악행에 대해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렷다!" 하는 양심의 소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 덩어리인 것이다. 이 경우 '신비'라고 하는 것은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 쓰는 말로서 이는 다시 말하면 다름 아닌 조물주의 낙인, 인간을 조물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제조인(製造印)으로서의 낙인(烙印)인 것이다.

그런 양심의 추상같은 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또 인간의 행동을 보면 그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신비에 속한다. 만일 인간이 어리석고 무지무식한 일부 인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저절로 진화에 의해 그런 양심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진화란 말에 걸맞게 그 양심대로 행하지 결코 어긋나게 행동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진화란 무엇인가. 순수하게 기계적인 작용[이지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자연 현상에 의하여]으로 보다 나은 단계로 진보 발전한다는 것을 두고 사람들이 지어낸 것인데, 그렇다면 양심이란 것도 그런 진화의 범주에 속하므로 결코 그런 진보 발전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이 나와야 그런 진화라는 이론과 일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한 양심의 작용에 반하여 악한 행동이 그것도 다반사로 튀어나오는 것이 인간의 실상일진대 이는 절대로 인간이 그런 진화에 의해 생겨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화에 역행하는 결과를 낫는 '진화'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일 뿐이다. 이에 대한 오직 유일한 합리적인 이유는, 성경대로 조물주의 창조로 생겨난 것이 인간이고 이런 양심에 어긋나는 인간 행위도 성경에 말씀하시는바 인간 범죄 타락에 의한 것이라는 데 있다.

문제를 정직하게 놓고 해결해가는 정직한 태도가 문제 해결의 열쇠다. 당치도 않게 자기 편견을 따라 그것을 고집하다보면 그는 평생 진리에 이르기는 글렀다.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기 편견과 고집을 따라 문제를 공연히 어렵게 만들고 따라서 자멸의 길만 걸어갈 뿐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해석도 그렇다.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구원관은 하나님이 그 초능력으로 그리고 그 무한대의 사랑으로 인간이 받을 죄의 형벌 곧 영원한 멸망을 자기의 한 때 고난 받으심 즉 인간으로 나셔서 인간으로서 우리가 받을 멸망의 고통을 '대신' 받으셨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만 하면 된다는 지극히 수박 겉 핥기 식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자기 해석이다.

그런 수박 겉 핥기 식에 만족하고 있는 까닭은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되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이것을 내 안에 그리스도 계시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다는 말로써 표현하고 있다. 더 낫게 실상에 가깝게 표현하자면 "아버지 안에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나, 내 안에 그리스도"[요 14;20]-이렇게 된다. '그리스도 안의 나, 내 안의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의 나, 내 안의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는 그 뜻이다.

내가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과 사귐에서 오는 불가분의 하나 관계가 곧 우리의 구원이다[요일 1:3/요이 1:9]. 내 안에 오셔서 영원히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시니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고 그 부활하심이 내 부활이고 현재 아버지 우편에 계시는 위치가 바로 나의 현재 위치이기 때문에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이루시고 지금 그렇게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고 그에 따라 당연히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는 것뿐이니 그래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다.

그렇게 계신 주님이 지금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것을 '보는 것'[요 6:40]이 구원이다. 그냥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것을 보고 기꺼이 내 안에 '모셔들임'으로 내 구원은 완결된다. 모셔들이지 않는 이들은 그러한 의미의 정확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성인 중의 하나로만 잘못 아는 까닭이다. 또는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형벌을 받으신 줄로 잘못 보기 때문이다.

'모셔들이는' 조건이 있다. 즉 회개인데, 이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되 당신의 전부를 다 바쳐 사랑하시므로 그것을 십자가 고난으로써 입증해주셨으므로 나도 이제부터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과 함께 약속하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당연히 살아야 할 대로 살지 아니한 모든 일체의 언행심사를 가슴 아파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순서이다.

그렇게 오직 주님만을 순종하겠다는 결의에 차 있을 때 나의 약속을 수용해주시고 주님께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나는 명실 상부하게 구원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난다고 즉 다시 출생한다고 금시 금방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르다. 처음부터 성령 충만한 사람도 있고 그 성장 단계가 느린 사람도 있다. 물론 전자는 주님 안에서 성장하는 진보 속도가 빠르다.

그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다. 열매를 더욱 많이 맺을 수 있는 가능성도 많다. 그만큼 그에게는 위험 부담도 적다는[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허점을 노려 시험하는 까닭에 그런 사람은 악한 자가 실로 만지지도 못하므로] 크나큰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진보가 느린 사람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믿음이 약한" 사람도 용납하고 물리치지 말 것을 바울은 교회에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진보 발전 즉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 그가 끝까지 충성할 것이라는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것은 그의 충성이 부실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탄은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자로서 그의 시험하는 수단은 다종 다양하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의 경고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는"[고전 10:12] 것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 즉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되시어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시어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 하였다.
 

고난과 죽음

아기는 엄마가 대신 판단해주고 위해주는 것이다. 아기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 세상에 난 지 얼마 안되어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기 스스로 판단할 때 자기에게 해로울 것같아 아니하려고 해도 엄마가 매를 들어서라도 하도록 하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좋을 것같아 하고 싶어도 엄마가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아야 하며 억지로라도 하려고 한다면 회초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최고의 지혜인 솔로몬은 매를 들어야 함을 가르친다.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 친히 주신 지혜로 한 말이기에 우리는 그를 최고 지혜라 하는 것이다. "너희는 매를 순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이를 순종하라"[미 6:9] 하였고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사 1:5] 하는 말씀이 다 그러하고,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낼 것이라"[잠 22:15] 하였고,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회초리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한다. 그를 회초리로 치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할 것이다. 회초리와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한다"[29:13-15] 함이 그러하다.

기기(器機)의 발달에서는 옛 사람이 우리보다 못하지만 인간사의 지모와 지략 그 지혜에서는 변함이 없고 오히려 지금 시대는 퇴화하고 역행하는 사조(思潮)를 타고 있다. 이 세상은 사탄의 직할(直轄) 아래 있으므로 모든 것이 그가 목적하는 바 즉 적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삶의 범절(凡節)과 지혜에서는 옛사람이 월등한 것은 질서 없이는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 친히 주신 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를 부단히 스스로 다스리지 않으면 헝클어지고 흐트러지는 것은 상례(常例)다.

하나님 품 속에 있는 피조물이다. 천지 만물을 지으신 조물주이신 아들께서도 아버지 품 속에 계신다고 했다. 업고 안고 하는 모습은 사랑의 원리 면에서 통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는 일방적으로 안고 안기는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아들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는 아들보다 크신 것이다[요 14:28] . 그리고 하나님은 "만물보다 크시다"[10:29]. 굳이 "업는다"는 표현을 하자면, 큰 자와 작은 자의 관계에서 작은 자가 큰 자를 업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안는 것인데 아들이 아버지를 "업고" 피조물이 조물주를 "업는다"고 할 때 작은 자는 큰 자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즉 큰 자는 작은 자를 통해 자기를 나타낼 수 있음을 업히는 모습으로 묘사할 수 있겠다. 업고 있는 모습을 보는 자는 주로 업고 있는 자를 보는 것이지 업힌 자를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업었다는 그 사실만 볼 따름이고 정작 보는 것은 업은 자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업은 자가 업힌 자의 형상 역할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분량이 우리를 통해 마저 채워진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모습은 아직도 우리 가운데서 세상을 향하여 계속 나타나지고 있는 터이다. 고로 이 세상에서는 고난과 죽음이 정상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죄 가운데에서' 그런 고난과 죽음이 정상이지만,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이기 때문에' 고난과 죽음이 정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오셨고 죄인으로서의 모습으로 나를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죽음을 맛보시기 위함이었으니 나 역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서 이 세상에서 당연히 그러하다.

그래서 엄마 앞에서의 아기처럼,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장래[영원한 세계에서의 행복]를 위해서 하시는 일이므로 기꺼이 반기며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지만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해가 되기 때문에 금하시는 것이니 역시 기쁨으로 이에 순종하여 따름이다.

근본적으로 이 악한 세상에서 의인은 고난 받고 죽음에 이르게 되어 있으니 만일 의인이 이 세상에서 대접 받고 존귀하게 되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의롭다는 의미가 되는데 아무도 이 세상을 그렇게 보는 이는 없다. 만일 이런 악한 세상, 세대에서 그렇게 대접 받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세상과 한가지로 한 무리, 한 패거리가 되어 있다는 증거 이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이 즉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다" 하신 것이다[눅 6:26]. 믿음의 형제들은 칭찬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 세상에서 언제나 소수이다. 세상도 물론 착한 행실을 보고 칭찬한다. 그러나 그들의 죄를 말하고 회개하라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주장이므로 우리가 아무리 착한 행실을 보이더라도 좋아할 리 없다. 악인은 그 악 자체를 좋아하므로 자기가 즐기는 것을 막으려 하는 자를 반길 리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착한" 일이라 하더라도 자기에게 해가 되고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내버리는 것이다. 달지 않고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착함이 그들에게 선[좋은 것]이 될 수 없고 악[나쁜 것]만 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악인은 의인에게 아주 싫은 혐오가 되고 질색이라 하는 것처럼 악인 역시 의인에 대하여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양심의 소리가 있어 선악을 제대로 분별하고 오히려 악한 자기 자신을 책망한다고 하나, 이미 그들의 양심은 대개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서야 자기 자신을 후회하고 자기 자신이 가증스러워 이를 갈며 후회하겠지만 우선 당장 이 세상에서는 양심에 관한 한 당장은 바늘 구멍 하나도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러나 양심은 기계적인 것이므로 죽을 리도 없고 마비가 된다 해도 일시적으로 작동이 멈추어져서 마비되었다고 하지 언제라도 양심의 가책은 되살아난다. 일시적이나마 그렇게 마비된 양심으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측정하니 제대로 사물을 볼 수가 없다. 성경은 이런 상태를 양심이 화인(火印) 맞았다 즉 불로 지져졌다고 표현한다[딤전 4:2].

고난과 죽음은 이상 설명처럼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면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면으로서의 의미가 바로 사람 살리는 일임을 이미 설명했거니와 이 적극적인 면에서는 아이 낳는 즉 사람 낳는 해산의 고통의 불가피성이 있고 그리고 땀 흘려 일함으로써 그 낳은 자식들을 비롯한 식구 먹여 살리기의 긍정적인 것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일은 벌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뜻이니 첫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결과로서의 불행 속에 현재 모든 인류가 처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세상도 변치 아니하였고 사탄도 변치 아니하였고 하나님의 말씀도 변함이 없으시다. "믿음에 계속 거하라"[행 14:22]고 바울이 각 교회로 다니며 준 이 격려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 것도 오늘날 변함이 없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악인이 의인에게 가증함이 된다면 의인은 악인에게 가증스러운 존재이다. "내가 세상을 악하다 증언하므로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을 구원하려면, 그 죄인으로서의 실상을 깨닫게 하려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 나그네길임과 동시에 전장(戰場)이다. 세상을 주름 잡고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조종하는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과의 쟁투이니, 핍박이 아니면 쾌락과 세상 염려와 잘 살고자 하는 재리(財理)의 유혹, 또 그것이 아니면 핍박,이런 악순환은 이천 년 동안 변함없이 연이어졌고 앞으로도 주님 오시기까지는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사(戰士)들인데 전투원 치고 편안하고 안락한 전쟁을 기대하는 자는 없다. 자유세계라고 그래서 북한이나 중국과 달리 자유로이 예배 보고 복음 활동을 한다고 사탄이 여기서는 잠을 자거나 힘을 잃은 것도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북한에 못지 않게 많은 영혼들이 이 남한에서 영적으로 질식사하고 있는 실상을 알아야 한다. 당장 나타나는 눈 앞의 고통이건 보이지 않는 형태로의 고사(枯死)이건, 영원한 멸망에 직면한 급박한 전쟁이라는 차원에서는 경중의 차이가 없고 우열의 차이도 없다.

박해의 피로 얼룩진 교회사

이같은 핍박의 역사는 교회 초두부터 시작되었으니 말 다 한 것 아닌가. 무엇이든 시작하는 때가 중요하니 왜냐면 그 시작하는 모습 자체가 앞으로 연이어질 그 성격과 특성을 규정 짓기 때문이다. 인간의 일이라면 초년에는 고생을 하더라도 말년에 이르러 형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일진대 문제가 완전히 다르다. 즉 초기부터 나타나는 현상이 끝까지 계속하여 연이어지는 일종의 예언, 예시(豫示)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사람 나면서부터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그것도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고 죽이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비극으로 시작된 인류 역사일진대 그 종말 역시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 대량 살육으로 끝난다[계 19:21].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도 많은 의인들의 피가 흘려지게 되어 있다[13:15]. 핍박 받는 교회다. 하나님의 능력은 여전하여 부당하게 구금 당한 베드로를 천사의 손으로 넉넉히 구원을 해내셨지만 헤롯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죽은 단지 그리스도의 사도 중 하나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죽임을 당한 야고보 사도 그리고 스데반 집사를 위시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는 갓 시작 때부터 그렇게 세상에서 버림 받으며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부터 세상에서 박해를 받아 온 것이다. 그런 흐름이 오늘날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니 이는 당연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사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니 왜냐면 지금은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본 받는"[빌 3:10]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써 번개의 번쩍임 같은 순식간의 부활의 시간이 닥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죽음 가운데서의 부활로서, 모든 고난 받은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 부활의 양상을 띠고 있으므로,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그 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필수적임은 당연하다.

고로 지금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고난 받는 때이지 영광 중의 부활의 때가 아닌 것이다. 때문에 초대교회 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동족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들로서 믿는 사람은 역시 자기 동족으로부터 권력자들에 의해 극심한 핍박을 받다가 사탄이 그 전술을 바꾸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위장한 사이비를 활용함에 이르러서는 그 사이비에 의해 극심한 핍박을 받은 것이다. 이런 사이비는 세상 종교의 형태를 띠므로 필연적으로 세상의 정치 권력을 등에 없으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이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행세를 하므로 세상은 그 사이비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착각하여 인정하고 그 사이비로부터 핍박 받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존재마저 거의 부정 당하는 형편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세상 종교가 정치 권력화하면 그것이 곧 무소불위의 존재로 군림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는 주체가 되게 마련이다. 세상 권력을 쥐고 자기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한 전력이 있는 그 무엇이든 아무리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자처하더라도 그것은 세상 종교로 단정하면 된다. 사탄이 지배자 노릇하는 이 세상과 벗하니 이는 곧 사탄과 합작하는 것이요 사탄의 편이라는 뜻이니 그 안에 진리가 깃들 수가 없는 것이다.

애초에 바울이 아시아 쪽으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예수님의 영께서 이를 막으셨다고 사도행전에 밝히고 있다. 실상 유럽 쪽은 미개인들이 할거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일 여지가 있었으나 아시아 쪽으로는 인도의 인도교를 비롯하여 불교가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유교나 도교 등의 온갖 미신과 종교행위가 성행하므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여지가 상대적으로 미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의 진로는 동이 아니라 서로 방향을 틀었고 그 이후 300년 가량 지난 다음에는 앞에서 지적한 정치 권력을 등에 진 사이비(似而非)가 등장하여 전 유럽을 장악하게 된다.

이 사이비 종교 세력[기독교를 표방한] 앞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여러 모로 핍박을 받다가, 이른바 종교 개혁이 일어나 이 사이비로부터 연결 고리를 끊기는 했으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항상 극소수의 무리들로서 남아 명맥을 이어오던 중, 정치적인 이유로 해서 그런 사이비 종교와 단절한 영국이지만 오직 정치적인 동기여서 내용상으로는 대부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그대로였다. 역시 이 때문에 핍박을 받아오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신대륙을 찾아 서진(西進)하게 된다.
신대륙에서의 복음 활동은 미국의 유명한 풀턴 스트리트[街]의 기도운동을 일어켰고 그 무렵 찰즈 피니 같은 일군들도 나타나 많은 사람을 회개시켰던 때가 19세기였고, 그 이전 18세기에는 영국의 웨슬레를 중심으로 한 영적 각성운동과 모라비아 지방[존 허스가 믿음을 위해 순절한 결과로]의 복음 선교 운동이 일어났다. 그 정도로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잠시 세상에서 그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드러내었을 뿐 핍박과 억압의 굴레에서 숨도 제대로 못쉴 만큼 박해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미국교회 부흥의 여파로 열심 있는 선교사들이 동양으로 눈을 돌려 한국에도 그들의 발걸음이 미쳐지자, 한국은 예로부터 불교와 유교가 성행하였지만 워낙 그 토양이 좋아 뒤늦게 전파된 복음이 그 뿌리를 잘 내려 오늘날 이같은 상황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천 년 장구한 세월을 지내오면서 특별히 손꼽을 만한 괄목할 영적 대각성 운동["부흥 운동"]은 영국, 모라비아[옛 첵코슬로바키아 중부지방], 미국 그리고 한국을 겨우 손꼽을 정도다.

한국을 비롯해 이런 모든 곳의 영적 각성 운동은 기도회로 시작하든가 아니면 기도 중에 그 명맥을 이어간 그런 공통점을 지닌다. 특별히 한국 부흥운동은 주한 선교사들의 특별한 기도 집회로 시작하여 일어난 점에서 그 어느 곳보다 특기할 만하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가 이런 기도집회로써 각 선교지에 나아가 일을 추진한다면 제2, 제3의 이런 한국부흥운동을 각 선교지에서마다 일으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사명과 책임감은 중요하다. 회개운동을 통하여 기도하는 교회, 말씀을 모든 권위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 교회, 땅 끝까지 나아가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서의 위상(位相)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빛이 발한다고 믿은 동쪽으로만 달려 나온 민족, 그래서 진리를 상징하는 광명의 흰 빛을 나타내는 흰 옷을 즐겨 입은 민족, 예의범절을 알고 인간의 죽음에 대해 남다른 철학적 사색을 하여 죽은 사람을 성대한 예의를 갖추어 떠나보내는 장엄한 장례식으로 인근 각국에 이름이 나 있었으니 진리에 대한 남다른 열망과 애정을 표시하였던 민족으로서 이제 하나님의 광명의 진리를 받았으므로 흔쾌히 나서서 복음을 외칠 때가 온 것이다.

한반도 교회가 총력을 기울여 광활한 아시아 아프리까 각처로 나가게 되면 그리스도 복음의 서진(西進)은 이제 한국을 중간 지점으로 하여 대대적인 서진으로써 세계 일주는 끝나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현재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다시피 된 것도 이와 같이 영국의 부흥운동 그리고 미국에의 청교도 이민으로 인한 것이니 주님 나신 무렵을 세계 기원으로 정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래서 때로는 존재하는가 조차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되면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으로 이 세상 위에 그 움직임의 형적을 뚜렷이 남기고 있는 것이다. 위클리프[1320?-84]의 라틴어 성경 번역[영역], 구텐베르그[1398?-1468]의 인쇄술에 의한 성경 보급[그가 가장 먼저 찍은 것이 성경이었다]이 그 윤활유 구실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 천년 가까이 순절(殉節)의 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 명맥은 줄기차게 이어져온 것이다.

이 피 흘림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본다. 소위 공산혁명의 여파로 구소련권을 위시하여 중국, 베트남, 북한 등지(等地)에서 흘리는 믿음의 현재들의 고귀한 피는 많은 사람의 구원의 역사에 활력이 되고 있는 터이다. 그럴수록 사탄의 방해 작전은 집요하게 전개되어 왔다. 핍박으로 되지 않으면 갖가지 사이비, 속임수로 일관해 왔다. 유사 단체, 집단, 세상 종교를 만들어 구원에의 길을 차단시켜 온 것이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 남으신 고난에 참예함으로써 세상 구원 즉 다른 모든 사람들의 구원의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고난 받음, 핍박 받음 없이 교회 발전은 없다. 세상을 위한 제사장의 역할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각자의 몸이 그 희생제물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핍박한 것처럼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 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된다.

이제 대대적인 핍박의 때가 또한 기다리고 있으니 스스로 신으로 자처하면서 악한 자가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하리라는 예언대로 대대적인 박해의 선풍이 몰아치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 "성도의 권세가 깨어지는" 데에까지 이른 후에 주님께서 부활의 영광으로 임하실 것이다. 주님의 재림은 이러한 고난 받은 성도들의 부활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우리의 부활은 주님의 부활과 한가지로 나타나는 것이니 우리의 죽음이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일치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계시지 않고 하늘에 지금까지 계신 것은 [물론 성령으로 우리 각자 안에 계시는 것과는 다르다] 이같이 그 몸된 교회의 고난 받는 일이 원활하고 온전히 수행되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 과업이 완수될 때 주님께서 다시 세상에 강림하시게 된다. 부활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그 다시 살아나신 몸으로 세상에 계셔야 세상에 보여지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은 이유로 잠시 "하늘이 주님을 받아두었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이 이유 때문에 세상은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뵐 수가 없었는데 이제 교회의 모든 고난의 수업(修業)이 완료될 때 주님은 어김없이 일초도 지체없이 바로 그 시각 영광 중에 나타나실 것이니 주님과 함께 죽음의 고난을 받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신 후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聖徒, saints)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고 했다.

이 때 부활한 성인[saints]들은 주님 오시기 이전에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세상에서 갖가지 고난을 받던 이들이다. 이들은 주님께서 이렇게 나타나실 때 그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이들보다 먼저 부활하여 그 모든 앞서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나타나고, 그 때까지 살아남아 고난 받으며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던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목도하게 되는 그 순간 그들의 몸도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순서가 다 정해져 있어 그 차례대로 모든 일은 진행되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하는 때이다. 주님께서 우리 위하여 본을 보이신 대로 고난 후의 영광의 순서를 밟아가는 것이다.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난이다. 영광의 전제 조건인 고난이다. 영원히 이기는 자로서의 이김이다. 세상에서 이기는 것은 적을 제압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성도들의 이김은 자기 신념을 끝까지 유지 보존하면서 나타내는 순종이 삶에 있다.

이것이 당연함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사람은 그 육체적인 힘에 그 진정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그 영혼의 힘 곧 정신력에 있음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런 표면적인 힘으로는 우주 천하 그 어느 누구도 당할 사람이 없는 것은 불문가지다. 고로 그 진정한 싸움과 이김은 이 정신력 여하에 있는 것이다.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한다"[히 1:9]는 것은 죽도록 즉 죽음에 이르러도 미워한다는 뜻이니 그리 되자면 당연히 그런 고난에 그런 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이란 것이 이런 특성을 띠기 때문에 의당히 그것은 이기는 것이지 약해서 죽는 것도 고난 받는 것도 아님은 너무나 당연하다. 고로 그리스도인의 강함 곧 이김은 이 세상에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한"[히 1:9] 결과로 "약한 자로서" 고난 받고 죽는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시기를 세 번이나 기도할 때 주님께서 주신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고후 12:9] 하심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네게 베푸는 은혜가 이 이상 더 풍족할 수 없음을 알라. 내가 네게 큰 교훈을 가르침이니 즉 내 힘과 이기는 이김은 이같이 약한 데에서 입증되는 것이다" 하시는 말씀이 된다. 그래서 십자가로 나아가기로 굳게 마음을 정하시고 나아가실 때 이미 주님은 "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하신 것이다. 세상의 전쟁은 육체적인 것이므로 당연히 힘이 세다는 것은 그 외형적인 물리적 힘을 말함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적인 강함을 제일 첫째로 치는 것이다.

왜냐면 환경 여건이 좋으면 누구나 힘 안들이고 이길 수는 있기 때문이다. 고로 그런 것을 가지고 진정 누가 더 세냐 않느냐 가름할 수는 없는 일인 줄은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강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 여하를 묻는 것일 수밖에 없다. 세상사야 전쟁에 패하면 그만이고 영원히 약자로 취급 받지만 그래도 그런 정신적인 의기(意氣)를 높이 살진대 하물며 당당한 천하무적의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있어서랴.

하나님의 아들됨은 세상 그 어느 일에도 감히 견줄 수 없다. 당연히 '고난'과 '약함'과 '죽음'을 두고 승부를 가름하게 되는 것이다. 힘으로 말하면 아무리 사탄이라 해도 우리와는 일방적인 싸움이 되어 절대로 그가 우리를 이길 수 없으므로 이런 싸움은 무의미하다 하여 사탄 자신이 싸움을 걸어올 까닭이 없다. 싱겁게 끝날 한판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기득권 다 팽개치고 일대 일의 맨 주먹으로 한 판 겨루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우리의 고난이요 죽음인 것이다.

가진 무기로 치면 상대가 안되어 일방적으로 이기고 지는 판국이므로, 양편 그 그런 외적(外的)인 것은 다 벗어던지고 오직 알몸과 맨주먹으로 겨루어보자는 그런 형국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막강한 하나님 아들로서의 나와 사탄과의 일전(一戰)인 것이다. 사탄이라고 해서 특별한 영물도 아니다. 단지 에덴낙원 중의 한 "짐승"으로서 인간이 범죄하여 이렇게 자연계에 속한 존재가 되다보니 상대적인[사탄은 여전히 영물이므로] 우위를 차지하여 이 세상 신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이 대답을 받자 "나는 현재의 내 이 약함을 자랑한다"고 외친 것이다. 곧 약할 그 때가 온전히 강함이라 즉 순수한 의미에서 강함임을 믿는다는 뜻이다. 누구나 순수한 힘, 강함을 자랑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값진 것으로 여기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고난 받음으로 그런 뿌듯한 보람 속에 사는 것이다. 때문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한다"[고후 12:10] 한 것이다.

이런 바울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니,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13] 한 것은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소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전천후(全天候)로 기뻐하는 자'들이다. 바울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함과 같다. 또한 "모든 일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것이 그 뜻이다. 십자가로 나아가시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친다"[요 14:27/15:11/16:33] 하신 것이 다 그 때문이다. 우리의 본으로서 그렇게 우리 앞서 가신 것이다.

사탄과의 전쟁이다. 전쟁은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하는 것이므로 적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거니와 내 자신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만신창이가 되어도 이기면 되는 것이다. 그 이기는 것 하나 바라보고 모든 곤욕을 감내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사탄과의 전쟁중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이 본래 우리 인간의 것이었으나 사탄이 흉계를 써서 아담 위에 걸터앉아 이 세상에 군림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는 마지막 아담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실지(失地) 회복이라 할까, 그 전쟁인 것이다. 죄로 얼룩진 것으로부터의 "만유 회복"[행 3:21]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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