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5일 토요일

잡록(雜錄, miscellanea)ㅡ(1)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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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 받는 세상

서울 어느 아파트의 관리인을 하고 있는 어떤 이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거기 새벽마다 교회에 새벽 기도를 부지런히 다니는 한 할머니 교인이 있어 하루는 하는 말이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산다"면서 우유로 목욕하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더라는 것이다. 오래 전 모두 고생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그 노파에 대한 평소의 좋은 감정이 싹 가시더라고 했다. 이런 것이 "철 모르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는 아무리 새벽 기도 나가보아야 다리 운동만 될 뿐이다.   

하나님의 저주 받은 세상. 그러나 그 저주의 고통을 하나님 친히 함께 하시니 그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그리스도 단독으로 당하신 고난이 아니라 아버지 친히 그 아들을 통하여 똑같게 당하신 고난이다. 그리고 현재도 그 교회를 통하여 그 남으신 고난을 함께 마저 채우시는 고난이다. 고난을 남겨두신 것은 그 교회를 위하심이니 우리와 하나되어 계심을 입증함이기 때문에 또 그리스도의 고난이므로 인간 구원에 이것은 필수적이고 필연적이다.

이런 고난의 때이므로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통하며 신음한다고 분명하게 밝혔다[롬 8:22]. 그래서 만물 곧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아니, 학수고대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세상은 한마디로 해서 고난의 세계다. 생명에는 고난이 없다. 있을 수가 없다. 고난은 죽음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한가지 사실만 보아도 이 세상이 생명의 세계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터이다. 생명이 아닌 곳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순리가 아니라 역행이다.

역행하는 것이 성공할 리 없고 형통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순리에 역행하는 것이므로 진노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이시다[요 12:25]. 세상의 생명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인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이지 본질상 생명이 아니다. 생명인 것처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속여왔기 때문이지 생명과는 천만리 거리밖에 있다. 인간의 범죄로 저주 받은 땅이다. 이렇게 저주 받은 땅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그 생명의 곳이야 말한들 무엇하리요.

고난의 세계에서 고난 받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생명의 세계에서 고난 받으면 억울하고 눈 앞이 캄캄할 일이지만 죽음과 고난의 세계에서 당연히 받고 있는 것을 받고 있는데 당황해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소망 없이 고난 중에 허덕이는 인생들을 향하여 불 일 듯 하는 연민의 정으로 그들과 함께 고난 받으며 그들을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고자 불철주야로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 이른바 생명 있는 자의 당연한 도리가 아니리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당연한 도리를 따라 행하라는 당연한 말씀이시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고난의 세상인 줄 알면서도 그래도 이 한 순간만이라도 고난을 면해 보자는 구차한 생각에서 발버둥칠 따름이지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포수에게 쫓기던 타조가 꽁무니는 하늘로 치켜들고 머리만 숨긴 채 온 몸은 그대로 노출시킨 것과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이런 아귀다툼에서 죄를 짓고 죽음의 노예로 더욱 죄어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이런 모든 속박에서 자유롭게 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부자연스럽고 부자유스러운 자세를 버리고 어차피 당하는 죽음은 죽음으로, 고난은 고난으로 당당히 맞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고난과 죽음의 비극 속에서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인애와 자비다. 그리고 용서다. 용서이지마는 대가 없는 용서는 없다. 법 집행에 필수불가결이다. 죄를 응징하는 것은 법대로요 따라서 용서도 당연히 법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죄를 지어도 법 집행이 없고 응징이 없다면 죄가 죄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죄가 죄될 수밖에 없음을 하나님은 모세 율법을 통해 인간 세계에 명확히 나타내신 것이다.

이 모세 율법은 따라서 법대로 용서됨을 강력 시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교육해오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더라도 모든 세상 사람이 이 모세 율법을 통하여 이런 하나님의 의지를 읽을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터이다. 다시 말해, 피 흘림이 없이는 용서가 없다. 누군가 목숨을 내어놓지 않으면 죄의 용서가 없다. 그리고 죄의 결과 즉 응보는 죽음이다. 이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의 형상으로 보면 모세 율법은 그 등 쪽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앞 쪽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 누구도 사람을 대할 때 등을 상대로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앞 쪽에 얼굴의 인상이 있고 얼굴에 눈빛이, 입의 말이 있고 희로애락 모든 표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 쪽 없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등 쪽은 앞 쪽을 지탱시켜 주는 척추가 중심이 되어 있는 곳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법질서 의지로서 구약 율법은 그 가치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이 말은 모세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 대체된 것이다. 그림자였으므로 실체가 오신 다음에는 그 그림자에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여기서 '의미'라고 말한 것은 구원에 관련한 것이다. 구원에 관한 한 모세의 율법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따르듯이 그리스도 구원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의미와 그런 가치로서는 모세 율법이 언제나 당당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신약성경과 더불어 쌍벽으로 나란히 비치되는 것이 구약성경이다. 물론 구약성경이 그리스도께 관한 모든 것을 예언하였다는 사실에서 그 점에서 그 가치는 막강하다. 더불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그림자로서의 가치 또한 우리는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용서는 그 죄인을 위한 죽음 곧 피 흘림이 없이는 저주 받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엄정한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고난 그 죽으심이 필연적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릇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의 뿌리가 된 것이다. 죽어야 할 인생들을 살리고 건져내는 일에는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이같은 고난과 죽음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진리가 태산같은 무게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람 살리는 고귀한 직무가 이 예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고 벗어날 수도 없다. 이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알아야 하는 것이다.

편안하게 이 세상 살면서 삶의 낙을 누리면서 인생들을 구출할 수 없다는 이 사실 또는 현실을 각자 마음 깊이 아로새겨야 할 것이다. 바울이 그토록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의 기로에서 서 있던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던 유대인은 사람의 앞 쪽을 보지 않고 등 쪽만 보기로 고집하는 어리석음이었다. 반면에 오늘날은 등 쪽은 무시하고 앞 쪽만 보려고 고집을 부려 동일한 어리석음과 파멸을 자초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법질서를 무시하고 법 준수 없이 구원만 받으려고 하는 이상한 풍조, 퇴폐적 사상의 조류(潮流)이다. 생명의 법을 지키지 않아서 즉 사랑을 하지 않음으로 현재의 죽음에 이르러 범법자가 되어 용서가 필요한 마당에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출현하셨는데, 이 사실을 무시하고 여전히 법을 어기면서도 구원을 받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경고하여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것, 헛것이라 한 것이다.

모세의 율법 이후에 그리스도의 구원이 나타난 것은 그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바탕으로 하여 죄를 인식시키시고 따라서 죽은 자가 되어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하시고 이를 바탕으로 용서하시고, 용서하실 뿐 아니라 그런 율법만으로는 율법 준수[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를 요구할 수 없었던 것을[롬 8:3]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율법 준수가 가능하도록 모든 필요한 능력과 힘을 부여하여[:2,13] 능히 준수할 수 있게 함인데[:4], 거꾸로 은혜가 그 율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것과 은혜 아래 있는 것과의 차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죽은 자를 상대함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안에서의 산 자를 상대함이다. 또한 율법의 개념에서도 유대인에게 나타나지는 것과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과의 차이 또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율법은 모세 율법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은 물론이나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다시 교회를 혼란케 했기 때문에 바울로 하여금 그 편지에서 그토록 율법과 은혜에 대한 강조를 거듭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모세의 율법은 망각 속에 젖혀져 있다. 시대가 완전 따다. 그러나 법은 언제 어디서나 엄연히 존재한다. 이 피조물 세계가 있고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한 존재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번 창조하신 것이 없어지거나 할 이유도 없다. 없어지거나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헛되다는 결론이 되고, 헛된 일을 하시는 것이 용인된다면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는 것밖에 안되므로 법이 유야무야가 되는 그런 일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존재하시는 것만큼이나 영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로 이 생명의 법질서, 사랑의 법질서는 영원히 폐하여지지 않는다. 그것이 확립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그 무척이나 어려우신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기까지 했는데 없어지거나 폐해진다니 말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법질서를 지금 이 세상에서는 지키지 않아도 되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면 지킨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 법질서 준수 여부를 가름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가름하시는 것은 그 믿음 유무를 가름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 믿음의 진위 여부가 가려지는 것이다. 참으로 믿음에 있으면 법 준수가 그리스도의 구원이 애초 지향하고 목표한 대로 정상 가동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않고 피상적으로 믿거나 뿌리 내려 정착하지 못한 믿음이라면 법 준수가 없는 쪽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는 전연 무관하여 죄인과 죽은 자로서의 자기 홀로 있으므로 심판밖에 의식하는 것이 없고 죄의 깨달음밖에 없으니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음이다[롬 3:19,20].

그러나 은혜 아래 있을 때에는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고[갈 5:18]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하게[롬 6:14] 된다. 바울이 이 은혜와 율법에 관한 것을 그 편지에서 강조한 것은 앞서 지적한 대로 당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할례를 비롯한 모세의 율법까지도 지켜야 한다는 이단 사설이 만연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을 필요성에서였지만 현재는 그런 상황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바울의 역설을 엉뚱하게 해석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법도 지킴을 강조해야 할 판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렇게 극좌(極左)가 아니면 극우로 치우치도록 만들어 둘 다 못쓰게 만드는 데에 명수라 할까.
 

§ 이 세상에서의 숙명적 고난

성경에 모든 피조물이 [우리 인간과] 함께 고통 받으며 함께 탄식하여 신음 중에 있다고 했다[롬 8:22]. 이는 만물 모두가 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러하며, 구원 받아야 할 인간이 고통 중에 있기 때문에 울면 함께 울고 웃으면 함께 웃는 것이 이 하나로서 구성되고 구조를 이룬 세계의 특성인지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만일 구원의 여망이 없이 이 세상 신(神)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처럼 곧장 멸망에 이를 "멸망의 자식"들이라면 이런 "함께 고통, 함께 신음함"이 있을 턱이 없다.

멸망으로 그 운명이 정해져 있는 까닭에 생명 가운데 있는 존재들과는 완전히 남남이라 하나가 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현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당하는 고난은 우리 죄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하는 고난이다. 이는 무엇이니 해도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아 있다는 확증이 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구원 받지 않고 아직 구원 받아야 하는 처지라면 우리 죄는 그대로 있을 것이므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 고난도 모두 우리의 죄 값으로 인한 것일 수밖에 없다.

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죄가 그대로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이같이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통 중에 있는 현실이라면 이 세상이 절대로 삶과 생명의 세계가 아니고 문자 그대로 죽음의 세계임을 입증함이다. 고통이란 것은 원래 죽음에 속한 것이지 생명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마치 이 세상이 생명의 세계인 것처럼 삶의 쾌락 속에 젖어 있는 이는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정작 죽은 것이다[딤전 5:6].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부유한 자는 이미 자기 위로를 이 세상에서 다 받아버렸으므로 오는 세상에서는 받을 위로가 없다[눅 6:24]. "위로"는 생명의 낙을 의미함인데 이 위로가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이 고통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하시지 않았는가.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그 부유함을 자기 소유로 착각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을 말한다.

거지 나사로 앞에서 그 부자는 그렇게 했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대에 부한 자를 명하여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선한 일에 힘써 나누어주는 데에 진력하라고 가르치라 지시한 것이다[딤전 6:17].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맡겨진 청지기로서의 의미이지 결코 자기가 누릴 자기 소유의 개념으로 주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의 경우, 천국 들어가기 어려운 그 "부자"는 그런 잘못된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을 두고 말씀하심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 재물을 다 흩어 주라고 하신 것이다.

미국의 어떤 소위 "신유(神愈) 부흥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답게 부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면서 당시의 명품 자가용을 몇 대씩이나 소유하면서 전 가족이 운전하고 다녔던 적이 있었다. 그가 그렇게 믿는 근거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요삼 1:2]는 구절이었다. 오늘날 국내에서도 소위 3박자 구원이라는 말을 퍼뜨리고 다니는 모 종교인과도 같다.

설혹 그 구절이 그런 물질적 형통을 의미한 것이라고 만의 하나라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위에 인용한 구절과 같이 나누어주기 위함이지 이 세상에서 자기 홀로 형통하고 잘 살라는 뜻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일등 가는 부자는 모두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를 않으니, 그러면 이는 하나님을 믿고 축복 받아 잘 사는 사람들도 세상에서 하나님 믿지 않고 이 세상 신(神)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도움으로[눅 4:7] 형통해 있는 이들보다 더 못하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면 결국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 신"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우세하고 더 상위에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퍼뜨리고 선전하는 전파자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앞잡이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만들면서 이 세상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도구 노릇을 자청하며 나타내는 소위 병 고침, 기적들이 어디서 연유된 것인지 그 스스로 증명함이 아닌가.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은 아닌 것이다.

"육신대로 살고자"[롬 8:13] 하는 것은, 죽지 않고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고통밖에 없는 죽음의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니 웬 말인가. 무리요 억지이니 반드시 불상사는 따놓은 당상이다. 그래서 죽는다고 성경이 경고함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무리하게 이같이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질서와 뜻에 고의적으로 거역하여 범죄를 계속하면서도 영생만은 욕심이 나서 "육신대로는 살아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라는 사람의 교리를 지어내어 가르친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가짜가 진짜를 뺨칠 수는 없다. 가짜는 어디까지니 진짜의 등에 업혀 진짜 덕에 이득을 보겠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가짜는 아무리 활개를 쳐도 진짜의 그늘 아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가짜가 진짜를 뺨치는 유일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된 것이다.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신(神)임을 있는 그대로의 실상으로 입증해주는 것이다. 이 세상을 주관하는 신이 아니고는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상 설명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이나 진수(眞髓)보다 더 월등하게 세력을 떨쳐 무지무식한 사람 즉 외양으로만 판단하는 이들에게는 가짜가 아닌 진짜처럼 나타나는 가짜, 즉 '복음이 아닌 종교'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좌우로 쌍벽을 이루고 있는 장관을 이루고 있으니, 좌에는 마리아의 도움을 비는 종교가 있고 우에는 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은 틀림 없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거창하게 바벨탑을 쌓아 군림하고 있다.

마치 거대한 우상의 신상(身像)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의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는 세력은 그 옆에 눈에도 잘 띄지도 않게 형체도 미미하게 놓여져 있는 놀라운 실태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놀라워할 일은 아니니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해두셨고 이런 현상에 속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 현실은 이 세상 신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이 인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나타내고 이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성경이므로 성경의 진실성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그 어느 종교도 이런 사실을 말하는 데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 종교도 같은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고 인자와 자비를 가르치지 않느냐 할 것이다. 종교만 아니라 그런 사람 삶의 기본을 마다하고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때를 따라 자의적으로 그것을 어기기도 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는 바람에 드러내놓고 열심히 말하지 않을 뿐이다. 열을 내어 그런 것을 강조하다보면 위선자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새삼스러운 것이 못된다. 세상 종교와 그리스도 복음과의 차이는 전자는 자기 구원을 목표로 선행을 하는 것이고 후자는 구원을 받은 그 살아 있는 힘을 바탕으로 선행을 힘쓰는 데에 있다.

자기중심과 자기 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자는 선행으로 표방하면서도 실제는 선행이 아님이 드러난다. 왜냐면 자기 구원이 목표이니까 자기중심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자기중심인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서 선행을 함으로써 이웃 사랑을 나타내어야 하는데 자기 구원이 최우선이므로 남을 돌볼 여유가 없으며 있다고 해도 자기 구원을 위한 수단과 방편에 지나지 않으므로 가식이요 위선일 뿐이다.

가뜩이나 자기중심인데 그 위에다가 허위(虛僞)라는 죄목(罪目)을 더한다고 할까. 즉 아무리 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작부터 죄에서 출발했으니 그 종말이 역시 죄이지 별 것이 될 수가 없다. 자기 구원을 의식하지 않고 행해야 선행이다. 진심으로 그 목표가 자기 이웃을 위함이라야 선행인 것이다.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구원을 목표로 즉 선행을 해야 구원이 된다는 것으로써 선행을 독려하고 장려하는 것은 사람들을 더욱 더한 위선자로 키우는 것밖에 하는 일이 없다.

자기 구원을 의식하지 않으려면 자기 구원의 필요성이 없어져야 가능하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고 죽어지면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 자기 구원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러면 결과론적으로 선행은 불가능한 것이다. 불가능한 선행을 선행이라 억지로 우긴다면 그런 위선이 없고 자기 기만이 없다. 세상 종교와 그리스도 복음과의 차이는 그러므로 후자는 머리와 몸통을 다 구비한 반면에 전자는 머리 없이 몸통만을 유지하려고 헛되이 애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머리가 있음으로써 사지를 움직여 비로소 전체가 살아서 활동하게 되는데 머리는 없이 몸통만으로 움직이려 하니 망상이고 망상인데도 그것을 끝까지 고집하니 미신이다. 아니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정상적인 순서를 따라 되는 일임에 반하여, 세상 종교는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역으로 순서를 밟아 나가려는 헛된 수고이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사람 사는 도리를 행해 나가는 것인데, 거꾸로 사람 사는 도리를 따름으로써 그것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 되면 자기 스스로 무슨 신이나 되는 것인 양 자기를 어찌 해보겠다는 뜻이 되는데 자기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구태여 선행을 하지 않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 방법을 따르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속절없이 현재의 인생 그대로가 아닌가. 그런즉 무릇 선행 곧 자비와 인자와 사랑이라는 것은 일절 자기 자신과는 무관하게 내 이웃의 행복과 안녕만을 위함이어야 하는 것이다. 해탈, 열반 등 아무리 이름 좋은 것도 그것이 애초 자기를 구원하려고 하는 데에서 출발한 이상 그 결말이 필경은 자기중심으로 낙착된다고 해서 논리상 하자가 있는가?

현재의 인간 상태는 비참하다. 그래서 구원을 열망하는 인생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희구하고 행복을 추구하여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죽은 후에라도 이루겠다는 원초적인 바람은 간절한 것이다. 때문에 이런 간절한 기대를 안고 시작하는 그 어떤 인간의 노력도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이다. 죽음이 죽음을 낳고 생명이 생명을 낳는 것이지 죽음이 생명을 낳을 리 없다. 자기중심은 자기중심만을 낳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천적으로 이 자기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자기중심과는 전혀 그 시발점부터 다른 그 무엇이 없는 한 구원 즉 영원한 생명과 행복은 없다 하는 것이다. 설혹 영생은 한다 쳐도 그 생명이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냐 하는 것이다. 행복은 서로 사랑함에 있다는 것쯤이야 우리 본성이 가르치는 바다. 사랑과 자기중심은 물과 기름 사이다. 절대로 함께 할 수가 없는 양자 사이다. 또 행복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사랑으로 서로 하나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생명이 존속될 리도 만무하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않고 의심하니 혹여 내 이웃이 나를 어찌하지나 않을까 하는 의혹에 밤낮 시달리는 통에 편안한 잠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그 의심스러운 내 이웃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렇게 되면 나와 이웃 사이는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가 되고 그리 되면 너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절박감에서 헤어날 수 없고 이 고통에서 헤어나기 위해서라도 나는 먼저 내 이웃에게 선수를 쳐야 즉 그 화근을 먼저 없애 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모두가 다 똑같이 품게 된다.


나만 아니라 내 이웃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인즉 이런 인간 세계가 과연 얼마나 지탱할지는 상식에 속한다. 다시 말해 공동 파멸이다. 공동묘지만 다 함께 만드는 꼴이다. 그리고 사랑 없는 삶을 상상해보라. 산다는 것 자체가 지겹다. 그러니 그런 데에서 영생이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이 찰나같은 세상 삶도 외로울 때는 한없이 지겨워 자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영생하되 행복해야 하고 행복하되 영생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두 가지를 다 갖춘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다 갖춘 바탕 위에서 행복을 영원히 존속시키는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실천이란 것도 별 것 아니다. 한 몸의 이치대로 스스로 자기 구실을 따라 충실히 작동하는 것이다. 이 충실히 작동하는 것이 곧 자기 부인이다.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라면 자기 부인이라 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기 자유 의지를 따라 그렇게 자기를 조절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그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 자기중심이다.

현재의 나의 실상이 영생도 아니고 행복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내 힘으로 나를 영생하도록 만들겠는가. 그래서 구원이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힘으로 안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공을 들이는가. 그것은 도로무공[徒勞無功]이요 망상이다. 슬기라고는 없다. 헛된 교만의 극치다. 그러면 만사 틀렸다고 손 놓고만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근본부터 현재의 불행이라는 결과의 그 원인부터 따지고 거슬러 올라가라는 것이다.

근본 없는 결실이 없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 우리 인생 그리고 현재의 이런 불행은 결실이요 결과이다. 우리의 원대로 되어 있고 아무 하자가 없다면야 결실이고 결과고 따질 일이 아니라 할지 모르나 분명 우리가 바라는 대로는 되지 않고 있으니, 어떤 불가항력적인 사태의 결실이요 결과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 어떤 사태라는 원인 규명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의 실마리를 푸는 첫 단계가 아닐 것인가.

그 원인 규명을 조물주와 피조물 관계에서 찾는 것이다.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결실로서 조물주의 창조가 윈인이 되어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만물이 이를 입증한다. 이런 증거를 무시하고서는 그 어떤 결말도 있을 수 없는데 마치 있는 것처럼 착각들을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서 이 조물주 하나님의 새 창조로서 우리 구원은 단번에 해결되는 것이다.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은 우리 인생의 딜레마를 조물주께서 모르실 리 없다. 그래서 우리 처지가 되어 주셔서 바로 우리 위치에서 문제 해결을 해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이다.

반면 또 하나의 사이비(似而非)는, 구원을 받았으니 선행이 필요 없다는 해괴한 궤변이다. 이것은 선행을 어디까지나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한 수단 방법으로 밖에는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선행이란 것이 어째서 구원의 수단이란 말인가. 사람 삶의 기본 바탕이 아닌가. 그 법질서가 아닌가. 자연 만물이 자연법칙을 스스로 준수해야 유지 존속되듯이 사람 삶도 사랑이 없으면 유지 존속이 불가능한 것이다. 바로 사람 삶의 기본 법칙인 것이다.

오늘날 이런 괴상망측한 교리가 판을 치고 있다. 구원을 목표하는 수단으로 선행을 인식하는 종교적 발상에서 그와 같은 인간이 만든 교리 즉 선행이 필요 없다는 발상이 생겨났으니 그런 주장이 집단화할 때 그것이 세상 종교이다. 소위 "기독교"라는 간판을 내건 종교다. 종교는 구원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얻는 구원이고 행위로써 구원 얻는 것이 아님을 천만번을 외쳐도 여전히 종교다. 구원을 받았으니 선행이 강조될 필요가 없다는 그들의 교리가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심은 사람답게 살라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지 못한 결과로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이다. 즉 영생을 상실한 것이다. 영생만 아니라 행복해질 수 있는 터전을 완전 상실한 것이다. 죄는 피조물답게 살지 못함을 가리킨다. 범죄가 바로 그 생명의 법질서에서 벗어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다시 사람답게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애당초부터 구원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닌가. 그럴 때는 다시는 속죄하는 제물이 없다고 성경은 단언했다.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다.

그러므로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치지 않고 구원만 즉 영생 얻는 것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상 종교의 형태이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도 구원도 아니다. 믿음으로써 구원된다는 또 하나의 인간이 만든 교리일 뿐이다. 믿음이라는 의미부터 바로 알지 못한 결과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이루신 내용을 믿음이니 자기중심으로서의 자기 자신이 완전히 죽어 무덤에 묻힌 것을 믿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다.

자기가 죽었으니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을 때에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 살아난 것이기에[그래서 성령을 받아 모셔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이룸이다] 둘이 하나이므로 이전처럼 나 홀로가 아니므로 반드시 둘이 하나되는 원리를 따라 주님은 나 위해 사시고 나는 주님 위해 사는 법도를 따름이다. 이는 처음 창조 때부터 아니, 아버지 친히 아들을 낳으시던[만드시던] 때부터의 생명의 법칙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를 이룬 상태에서는 머리와 몸이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머리도 몸도 절대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를 이룬 상대를 위하여 사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법질서다. 몸을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한다. 머리로서의 하나님께서 그 몸된 각 지체를 위하심은 자기 자신을 전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십자가 죽으심이 그 증거다. 그 사랑의 증거다. 그리고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이 원리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됨으로써도 충분히 설명됨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즉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는"[고전 7:4] 것이 둘이 하나됨의 원리다. 이 경우 남녀 한 몸되는 이치다.

이러한 조물주와 피조물의 하나됨을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우리 피조물의 생명이시다. 생명이시므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 수 없는 터이다. 생명과 분리되어 있는 것을 어찌 생명체라 할 수 있는가. 고로 우리가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행함이다. 그래서 역대 인물들로서 믿음이 있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과 동행[同行-to walk with]하였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움직인다 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함께 하는 것 즉 함께 사는 것이 "사는 것"이다. 이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머리이신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마치 혼자 살 수 있듯이 망령된 행동을 함으로 해서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결과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은 이같이 함께 하고 함께 사는 원상태로의 회복이요 환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원상태로의 복귀를 나타내지 않는 모든 것은 그 무슨 어떤 변명을 해도 믿음도 아니고 은혜로 된 구원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틀림이 없고 빈 틈 없이 확실하여 그대로만 하면 반드시 나타내게 되어 있는 것인데, 그 반드시 나타내게 되어 있는 결과를 나타내지 않으니 이는 하나님의 잘못일 리는 없고 우리 인간의 잘못일 수밖에 없다. 즉 믿으라 했음에도 믿지 않은 결과다. 자기는 아무리 믿는다고 우겨도 실제는 믿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함 즉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가. 앞에서 남녀 둘이 한 몸됨에서 설명되었듯이 둘이 하나되어 있는 관계와 위치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직 나를 위하시니 나는 의당히 그리스도를 위함이다. 내가 나의 삶을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피조물은 제각기 자기 맡은 분량과 은사를 따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살아주시는 까닭이니 즉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이상으로 풍성하게 날마다 때마다 일마다 그들을 거두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룩한" 천사들이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친히 하시는 것이 되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나중에 알고 보면 천사가 한 것으로 되어 있어 그렇게 설명이 되어 나타난다. 또 천사가 한 것이지만 하나님 친히 하신 것으로 되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이상과 같은 이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러하니 이웃이 나를 위함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게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 친히 나를 위하시는 것으로 나타남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내 이웃을 통하여[이웃이 아니면 친히 그 일을 얼마든지 담당하시는 것이니 피조물에게만 매여 계시지 않음이다] 그렇게 항상 나를 위하시는 것이다. 단지 내 이웃을 통하여 나를 위하시는 뜻은 그것이 삶의 기본 바탕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정상적인 삶의 법질서를 준수하도록 하시는 차원에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 받은 사람들의 생활 수칙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골 3:17]이 아닌가.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이니[갈 2:20] 곧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고[빌 1:21]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그런즉 공동체 의식의 삶이 그렇듯이 즉 우리를 위함으로써 종국적으로 나 자신을 위함이 되듯이 자기 부인이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 아내[혹은 남편]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한 것이다.

남편은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명령한 다음 그렇게 설명한 것이다. 왜냐면 남편이 아내와 하나됨 즉 한 몸됨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의 이치를 따른 것이고 단지 육체적인 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은 무조건 자기 희생이라는 불합리한 말이 아니라 각자 자기에게 태인 몫대로 사는 삶의 지혜이되 자기를 오히려 최대한으로 확장, 확충, 확대시켜 사는 진실로 "풍성한 삶"[요 10:10]이 되는 것이다.

어째서 이 최고의 지혜를 외면하는 것인가. 결국 자기를 위하니 어쨌든 종국적으로는 자기중심이 아니냐고 할 것인가. 성경에 우리가 구원된 바탕 위에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각자 자기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고 하는 것을 가리켜 결국 자기중심이 아닌가 하는 말과 같다. 분명히 날아야 하는 것은 이미 구원된 다음에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이니 처음부터 구원 받으려고 모든 일을 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이 차이만은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구원 받은 다음이니 자기 구원은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이미 얻은 구원을 유지 존속시킨다는 의미뿐이다. 그 유지 존속시키는 힘이 이미 구원 받은 사실에서 나온다는 이 근본적인 차이다. 힘이 있어야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있다. 유지 존속시킬 수 있다.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할 수도 없고 제 자리만 맴돌 뿐이다. 이 힘이 다른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데에서 오는 것이다. 이 힘의 유무(有無) 차이다.

이 힘이란 그러므로 내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은혜로 얻은 것이다. 은혜의 구원,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의 결과다. 은혜로 시작되었으니 은혜로 시종일관된다. 즉 그 끝도 은혜다. 나의 힘이나 내가 이룬 공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 중심으로서 내가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얻은 것이니 둘이 하나됨은 갑은 을만을 위하고 을은 갑만을 위함이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나만을 위하셔서 주신 은혜 즉 자기 자신을 바쳐 이루신 공로에 의한 구원이니 이제부터는 나도 이 법질서를 따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함이다.

따라서 이제 구원 받은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도 실제는 나 자신을 위함이라기보다 나를 그렇게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겉으로는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나의 구원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림이다. 이것이 곧 자기 아내를 자기 목숨을 다하여[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위하심 같이] 사랑하되 이는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함이라고 한 의미인 것이다.

아내 남편은 육체적으로 한 몸이 되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아내를 위함은 자기와 하나된 아내를 위함이니 아내가 자기와 하나되어 있으므로 곧 자기를 위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하나의 나 자신이 아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이다. 곧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나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주님의 뜻을 이룸이다.

그것이 또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의 뜻은 나의 구원이고 이 뜻을 이루어드림이 또한 나의 구원이다. 같은 모양이나 측면이 다른 것이니 만물 만상은 양면성으로 되어 있음이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자기만을 위하는 자기중심일 수가 없다. 그런 자기중심과는 완연하게 차이가 드러나고 근본부터 다르다. 시작부터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매사 그 근본 뿌리부터 생각하라는 것이다.

근본 없는 결실이 없고 이유 없는 결과가 없다. 혼동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나 혼자인 줄로만 착각하여 내게 사는 것이 나 자신이었고 다른 아무도 아니었으나 이제 진실을 알고 실상을 알고 보면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이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사는 줄로 알고 그렇게 살아 왔으나[실제는 죽음이니 동물적 생명으로는 사는 것이지만 인간은 동물일 수가 없다] 이제는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습관을 따라 그리 된 것이므로 새로 시작 못할 것도 없다. 그렇게 인식하면 되는 것이고 그 인식대로 살면 그것이 또 관습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내가 사는 것으로서 삶의 기쁨과 평안을 누려 왔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사는 것으로써 한없는 삶의 낙을 맛보기 시작하는 것이 새 피조물된 자의 본질이자 특권이다. 3위1체의 원리는 갑을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나 서로 그렇게 위함으로써 병으로서의 '둘이 하나'인 삶을 살게 되니 갑을 위함이 을로서는 을 자기를 위함이요 갑 역시 을을 위함이 갑 자기를 위함이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함이라 하는 것이다. 갑은 을을 전적으로 위하나 실은 을로 인하여 자기가 충실히 위해짐이다. 을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그 방향을 상대로만 향하는 것이니 상대는 또한 그 방향을 내게로만 틀어주는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나를 위하고 너는 내가 되어 나는 네가 되어 사는 것이니 이처럼 행복하고 완벽한 이상적인 삶이 없다. 하나로만 사는 것보다 둘이 하나되어 사는 거싱 이렇게도 행복하고 즐겁다.

더군다나 이루 수도 셀 수 없는 많은 무리가 한 머리를 중심으로 조화 통일시켜 그렇게 살 때에는 바로 그 많은 숫자의 내 이웃이 바로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사실에 비추어볼 때 나란 실체가 없다고 억지로 비틀어 자기를 세뇌시키려 하는 것이 얼마나 처량하고도 처절할 만큼 빈약한 논리요 허망한 것인지 절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닌가. 오직 차이는 머리되시는 조물주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마치 자기라는 것이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것과 같은 억지 논리로써 무리하게 꿰어 맞추려는 데에 있는 것이다.

내가 곧 부처요 만유가 다 부처이고 따라서 만유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논리를 아무리 주장을 해보아도 우리를 지으신 어버이로서의 하나님을 머리로 삼는 한 몸 체제 안에서의 자기부인만큼 눈부신 논리가 될 수 없다. 마치 바람 잡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처음 움켜 쥐었다고 손바닥을 움츠려 쥘 때에는 확실히 무엇인가 잡았다고 인식이 드나 실제 손바닥을 펴보면 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런 논리 자체가 안개 잡 듯 바람 잡 듯한데 어찌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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