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42)

잡록(雜錄, miscellanea)
--------------------------------------------------------------------------------------------------------------------------- 



§  세상에서의 고난과 죽음

에덴낙원에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주의를 주신 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사람이 자연계의 몸으로 환원되어 버려 자연계의 생물처럼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선악[좋고 나쁨]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인간이 자기중심으로 화하여 즉 그 좋고 나쁨 지식을 자기 위주로만 활용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가하기도 하고 살인행위를 서슴지 않게 될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아담 부부는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게 된다. 인간이 나자마자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죽이는 참극이 일어나고 그 최초의 죽음을 아담 부부는 직접 목도하게 된다. 그 후 이런 종류의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악행은 성행하였으나 노아의 대홍수로 노아 일가 외 그리고 그 방주 안의 생물 외에는 모든 인류와 생물이 멸절하기까지 단 한 건의 살인 사건만이 역시 가인의 피를 물려받은 자에 의해 재차 생기기 전에는 없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 즉 선악과를 먹은 자기중심의 결과가 살인행위로 이어진다는 사실만 최초로 아담 부부에게 확인시키고 그 사실을 아담 스스로 그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알리게 하심이었다. 이는 죄와 죽음의 인간 세계에 하나님의 강권 발동이 없으면 즉 강제로 간섭하고 개입하시지 않으면 이 세상이 그나마도 존속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노아 홍수 이후에 사람이 짐승의 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신 것으로 보아 그 때까지는 짐승들도 약육강식이 아니라 식물을 먹이로 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노아 이후 인간 사회는 급격히 인구 수가 불어남으로써 살인극과 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가 일어나 당시의 인류가 멸망했지만 오늘날은 죄가 그보다 덜해 멸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살인은 단 두 건에 불과했어도 멸망했으니, 오늘날은 살인 사건이 날마다 하루에 얼마 꼴로 일어나니 벌써 망하고도 남았을 일이지만 이냥 이대로 지탱해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억지로 붙드시는 격이다. 이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심이니 구원 얻을 사람은 단 하나라도 다 구원 헏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이신 것이다.

그런즉 이미 오래 전에 망하려면 망하고도 남았을 세상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나타내심이니 이런 세상에 연연하지 말라는 경고이시다. 벌써 사라졌어야 할 세상인 것이다. 따라서 다시 말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없을 것이 있는 것이니 오직 목적은 단 하나라도 이 죽음의 멸망으로부터 구원해낸다는 것이므로 구원의 일 외에는 이 세상의 의미가 아주 없다는 결론에 쉽게 이른다. 사람이 죽을 뻔하다가 요행히 살아나면 죽은 목숨이라 치고 그 나머지 삶을 유익하게 보낸다 함과 같이, 멸망한 세상이라 치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처신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고로 인생 구원에 관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문제에도 골몰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면 "구원"은, 죽지 않고 영생한다는 단순한 그런 것을 목적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올바르게 살지 못하여 이러한 구원을 얻어야 할 정도의 비극적 현실을 자아낸 것이므로, 이 결과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 결과를 야기시킨 원인을 제거함이 상식이다. 즉 올바르게 사는 것이 구원의 요체이다. 영생만을 얻으면 된다는 그런 일은 절대로 용납될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단 올바르게 살 수 있는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새 창조 곧 다시 출생함이 필연적이라는 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수가 되는 것이다.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다[행 4:12]. 구원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오직 거기에만 골몰하라는 것은 방금 설명한 대로 먼저 인간이 되는 것부터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 사는 법부터 배우지 않으면 그 어떤 인간 활동도 건설적이 되지 못하고 파괴적인 결과만 초래하는 까닭이다.

사람 사는 기본 도리가 무엇이냐, 머리와 몸 관계로 특징 짓는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이다. 가정을 바로 이끌기 위해서는 가장(家長)이 있어야 하고 한 단체를 통솔하기 위해서는 단체 장이 있어야 하고 나라를 위해서는 국가 수반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류의 이상 사회를 위해서는 인류를 창조하신 어버이로서의 위치에 계시는 조물주[창조자] 하나님이 그 이상적인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셨으면 왜 이런 불행한 인생들을 만드셨느냐 하지 말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지 않고 그 어떤 질의응답도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영생하고[결코 죽지 않고] 그러한 한 몸의 체제에서 모두가 평균되게 행복하게 살도록 인생들을 만드신 것이나 인간 스스로가 그 자유 의지로써 올바른 삶의 도리를 지키지 못함에서 현재의 인간 세계에 이런 비극적 실상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 삶이 이상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람 삶의 올바른 도리를 따르는 것이어야 하므로 이 구원의 일이 가장 우선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그 뜻이다.

이러한데 또 하나의 엄연한 현실을 말하면, 이러한 인생 구원을 방해하는 반대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여 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니, 그 주동자는 처음부터 인간의 원수가 되었던 이 세상의 신이요 지배자[왕]로서의 악령 사탄인 것이다. 말 그대로 그는 신[영]인지라 육체의 한계를 지닌[이 모두 범죄의 결말이다] 우리 인간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위치다. 그 어느 누구도 인생 중에는 그를 필적할 만한 자가 없다.

인생 구원을 방해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데 하나님 앞에서 감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 하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필요악으로서 딴에는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악인을 걸러내는 작업에 긴요한 몫을 하고 있는 격이다. 하나님도 악인이 구원되는 것이 뜻이 아니므로 바로 이 점에서 사탄 등 악령들의 행위가 당분간 한시적으로 용납 또는 허용이 됨이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 뜻이지 악인을 그 악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시려는 것은 아니니 만일 그렇다면 사탄 등 악령들도 구원되어야 하고 그 무엇보다 아담이 그렇게 범죄했다고 죽은 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으리라. 다시 말해 사는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자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 실탄이 장전된 총을 주는 것이니 어른에게는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것이나 아이에는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 증거가 에덴낙원에서의 악령 사탄의 살인 행위[인간을 그 거짓말로써 죽음에 빠뜨렸으므로], 인간 세상이 열리는 벽두부처 가인의 살인행위[아우 아벨을 죽이는]이다.

마땅히 사는 법대로 살지 않는 것이 죄요 악, 불법 불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만 얻으면 제일이고 그저 그뿐이라는 것은 미신일 수밖에 없다. 올바르게 사는 도리를 배워 먼저 인간부터 되는 것이 인생 첫걸음인데 이런 초보를 익히지 못하고 인생 수명 100년인들 무슨 소용인가. 사회에 폐해만 끼칠 뿐이다. 그런 인생은 차라리 없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르게 사는 것이 곧 영생에 이르는 길임을 가르치는 것이니 곧 성경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공(李公) 순신(舜臣)의 생애를 본으로 삼는 이순신정신 선양운동도 펼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 의식, '하나'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을 앙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국민을 도탄에서 건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세상의 일에 관심을 두어 정작 중요한 구원문제는 등한히 할 정도의 어리석은 일을 할 우리네가 아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 바로 이와 같은 올바른 삶을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죄의 결과가 죽음인데, 자연계의 몸으로 전락함으로 인하여 오는 생로병사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보다도 더 해를 끼치는 것이 사랑 없음 곧 자기만을 생각하는 욕심인 것이다. 서로간에 대한 무관심과 시기와 미움 등에서 야기되는 갖가지 고통과 죽음의 고난이다. 이것은 생로병사가 없는 영계에서도 죄가 존재하게 된 이유다. 나라는 존재는 실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왜냐면 나 외의 또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존(獨存)이다.

나 혼자 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로서는 나밖에 없다. 그래서 독존(獨尊)이다. 나만이 지니는 의 가치는 나로서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몸의 이치이다. 신체의 구조를 보라, 필요 없는 것이 없고 세포 하나라도 다 있어야 할 곳에 반드시 있게 되는 절대 필요한 존재들이다. 필요하지 않다면 처음부터 생겨나지를 않았을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필요해서이다. 이런 독보(獨步), 독존의 존재가 그 자주 독립성을 얼마든지 그대로 발휘하면서도 모든 이들과 조화롭게 하나처럼 존재하여 조화된 삶의 안락을 누릴 수 있는 것이 한 몸 구조인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면서도 또한 모든 사람을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주인 격의 비밀이다. 즉 사랑으로 하나됨인 것이다. 이 사랑은 만물을 지으신 조물주께서 그 어버이 사랑으로 친히 머리 역할을 하심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서로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유일하게 신뢰하실 수 있는데, 더군다나 이제는 영원히 확증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사람되심과 그 십자가 죽으심의 사랑이다.

머리 중심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모든 생각을 하는 것이 그 유일한 확실한 삶의 방법이요 제각기의 역할이다. 왜냐면 머리 친히 절대로 영원히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그 만드신 피조물들을 위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증몀하고 우리에게 확실한 믿음[신뢰]의 근거를 주는 것이 3위1체의 원리다. 법칙은 항구적이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그것이 법칙 또는 원리로 작용할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100프로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 구원은 고로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 해방을 동시에 의미함은 당연하다. 많은 사람이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으로만 인식하여 죄를 어느 정도 지어도 영생에는 이른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큰 오산(誤算)이다. 죄는 어느 정도 짓는 것이나 노골적으로 내놓고 짓는 것이나 큰 죄나 작은 죄나 그 본질은 같으니 즉 자기중심이고 이 자기중심은 얼마든지 큰 죄 즉 살인행위로 확대될 수 있는 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남은 물론 죄의 고리를 그 뿌리에서부터 끊어 버리는 데 있으므로 후자 없이 전자만 있을 수 없고 후자가 없다면 전자도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내가 당하게 되어 있는 이러한 모든 종류의 죽음 즉 자연계의 몸이 됨으로써 죽는 죽음과 죄로 인하여 저질러지는 사랑 없음의 결과로 빚어지는 모든 고통과 고난의 죽음을 아울러 포함하는 것이었다.

또한 상징적인 의미도 있으니 십자가 처형은 당시 세상 권력에서 내릴 수 있는 중죄인에 대한 극형의 형태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모든 인간이 받는 사형 즉 극형에 해당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야만스럽게 사형에 처하는 방법이 과연 옳으냐 하는 것을 떠나서,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죽음의 고통을 또한 상징하는 것이기에, 그것이 인간 모든 죄의 결과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십자가 고난의 뜻은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 교회에 남겨두셨으니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원천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어 있음이다. 이것이 역대 교회사를 통하여 많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박해를 받고 죽음을 맞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연유이다. 영생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이 세상의 신이요 지배자요 인간의 원수인 사탄의 목적이므로, 온갖 야만적인 방법으로 세상은 믿는 사람들을 이같이 탄압하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가 헤롯왕에게 피살된 것을 위시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으로서의 스데반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돌팔매질을 무더기로 당하여 무참하게 절명하는 등의 이런 모든 끔찍한 일들이 그 후로 연달아 끊임없이 연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스데반은 그렇게 죽어가면서 외쳤다. "보라! 하늘이 열리면서 그 분[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이 보인다!". 이는 그런 죽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임을 나타냄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죽음의 고난이기에 하나됨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죄는 자기중심이니만치 자기 욕심[약 1:15] 외에는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므로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필연이니 그 자신 그런 고통으로 보응되는 것 역시 숙명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은, 그러한 죄의 결과가 빚어내는 모든 고통을 망라한 것이어야 함은 마땅한 일이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와 같은 아버지의 일을 나의 일로 삼아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같은 발자취를 따라 사람 살려 구원해내는 일을 수행하게 됨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을 만인간에게 소개하여 알리고 하나님 앞의 제사장으로서 간구와 기도를 본무(本務)로 삼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부터 영원히 존재하여 행복한 삶을 살도록 창조된 터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떨치지 못함과 동시에 그러한 영원하고도 행복한 원래의 세계[에덴낙원]를 동경하여 마치 이 세상 역시 그런 것으로 착각하는 환상 속에서 한평생 세월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 심리요 정서다.

그래서 어두운 그리고 부자유의 이 세상 삶이지만 마치 영원할 것같은 착각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이 행복한 세계인 것같은 환상으로 사니 세상에 연연하고 그 미련을 자못 끊지 못하나, 사실대로 실상을 바로 알고 그 올바른 인식 아래에서 과연 인간답게 처신해야 하는 것이니, 자기 자신의 미래의 운명을 지혜롭게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말을 맺자면, 무조건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죽음의 지름길이다.

생명의 길은 그 반대다. 자기는 전혀 위하지 않고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위하고 나와 똑같이 하나님이 지으신 내 이웃을 위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함이다. 3위1체 원리에서 갑, 을 양자가 병을 이루어 3자가 서로 바꾸어 가면 종 노릇, 주인 노릇을 번갈아 하는 완전 조화를 말함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위하고 내 이웃을 위함으로써 나를 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조물주께서 피조물을 만드신 사실에서 운용되는 진리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만 위해질 뿐 아니라 전체가 아울러 위해짐으로써 다 함께 한 몸처럼 사는 이상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은 엄마 품의 아기가 아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위할 줄을 몰라서 위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엄마에게 위임한 상태다. 그 스스로 자기 의지로써 위임한 것이 아니라 엄마가 자기를 낳았으니까 낳은 즉시 그렇게 자연적으로 위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자기는 자기를 위할 것이 없고 다만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면 만사가 형통이다. 조물주께서 나를 만드셨으니까 자연적으로 나를 위하시게 되어 있는 것이므로 나는 조물주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면 되는 것뿐이다.

무엇이라 시키시는고 하면, "네 자신을 위하지 말고 내 시키는 대로 하여 나를 기쁘게 해주어 내 속을 썩이지 말라"는 그 분부뿐이다. 이는 엄마가 아기에게 하고 싶은 말 그대로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므로 그 피조물인 우리는 영원히 그 품속의 아기다. 아무리 영원 세월 우리가 존재하여 연륜을 쌓는다 할지라도 조물주께서는 변함없이 영원하시고 한결같으시니 그러하다. 자연계에서나 태어나고 철이 들고 자라고 숙성해지는 과정이 있는데 그것은 육체가 물질이기 때문에 그러하지만 영원세계에서는 영적으로 이미 완전한 존재로 창조된 그 상태 그 위치 그대로이므로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다. 자체적인 즉 개별적인 발전이나 진화는 필요없고 한데 어울려 공동체 내에서의 이상적인 상호 상승(上乘) 작용을 하게 되므로 바로 그것이 그런 효과를 충분히 내고도 남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저절로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논리에서는 이 진실이 통하지 않는다. 다 각각 자기 자신을 위할 터이므로, 오늘날과 같은 각종 인간 비극이 일어남을 우리는 신물이 나도록 목도하고 있는데 바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연히 생겨났을 경우의 이 세상이란

이런 자기중심의 세계에서는 그래도 창조주 하나님의 통제가 있어서라도 질서가 유지되지만[3운법칙과 같은] 절로 생겨난 인간 사회는 한번 사회를 이루어보기도 전에 자멸하게 되도록 되어 있다. 비록 만행으로 가까스로 유지된다 가정하더라도 절망뿐임을 금방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뿐이다. 왜냐면 통제가 되지 않는 까닭이다. 저마다 제각기 자기가 머리가 되려는 북새통에 그래서 자멸만 일찍 재촉하게 된다 함이다.

그렇게 절로 생겨난 세상이요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데에서는 미래가 없는 것이다. 무신론과 창조신을 부정하는 세상 종교가 성행하는 것도 저절로 그렇게 되어서가 아니라 악령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신이기 때문이고 또 사탄이 신 노릇을 하는 것도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탄이 신이라는 것은 영물들을 "영(靈)"[히 1:14]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지 영물들이야 일개 피조물이지 그들이 무슨 창조주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조물주의 피조물 창조를 부정하면서도 영계를 주장하여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더욱 허망한 생각이다.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으니 역시 자기중심이요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인데 각자의 자기 노력으로 차원 높은 일정 수준에 이르고자 하는 것부터가 만인에게는 공평하게 적용될 수 없으니 이는 능력이 있는 자만 구원이 된다는 적자 생존의 냉혹한 자연법칙만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는데다 그렇게 일정 수준에 달했다 하더라도 그 이후의 문제가 다시 대두될 것인데도 이에 대해서는 전연 대처가 없는 것이 그들의 종교 교리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한 몸 체제를 설명하고 있으므로 그 논리가 정연하다. 장차 전개될 생명의 세계가 가히 어떠할 것인지도 충분히 설명이 될 뿐 아니라 오늘날 그와 같이 살지 못하는 인생들과 이 세상을 단죄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않는 오늘날 세상의 이른바 기독교는 창조신을 부정하는 타 종교와 똑같이 세상 종교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도 믿고 성경도 믿고 그리스도도 다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부인에 의한 공동체 의식을 주장하지 않고 무조건 "믿으면 영생한다"는 미신만 붙들고 있는 까닭이다.

무신론이야 물론이디만 유신론이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신을 부정하는 세상에서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을 시인하면 그 자체가 무슨 공덕이나 되는 양 생각하는 것도 똑같은 미신이다. 또 다른 같은 종교 집단에서는 더욱더 진리에서 치우쳐버려 그리스도로만도 모자라 그 모친이라고 하여 "마리아"까지 더 첨가시켜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이런 모든 기인한 현상[가짜가 진짜보다 더 성황을 이루고 세력화가 되어 있는]은 그 배후의 사탄의 실존과 활동만을 더 부각시켜 주는 것뿐이다.

모든 인간 악의 뿌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하는 자기중심[혹은 자기 집착이니 세상에서 말하는 아집(我執)도 이런 유형이 아니라고 억지로 각을 세울 필요는 없다]인데 이 자기중심이 여전히 변함없이 작동하는 한, 자기 힘으로써 자기가 원하는 일정 수준에 이르렀다고 가정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의 최고도의 발산이요 구현이다. 자기가 없어져야 자기중심이 종료되는데 살아 있고 살아 있어도 최고의 행복을 누리며 꽃 피운다는 망상을 하니 [이는 실제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해서 그렇다고 전제해서 하는 말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현재 목도하고 있는 모든 자기중심의 폐해와 완연한 모순이 된다.

무엇이든 그 본질을 무시하고서 논의될 수 없는 것이니, 자기중심의 본질이 여지없이 유감없이 숨김 없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이 세상인데, 그것이 아무리 스스로 발전하고 최고도로 그 힘을 발휘하는 세계라면 어째서 그것이 만인에게 행복을 주는 "자기 부정(自己否定) "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강력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자기라는 것을 제거해야 그런 만인 평등의 행복이 가능한 것인데 자기중심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떻게 자기가 없어질 수 있어 만인평등의 행복이 꾀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본질이 사라져야 하는데 본질이 그대로 있으니 어찌 그 반대되는 현상을 나타낼 재주가 있겠느냐 하는 의문 제기인 까닭이다.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자기 부정[아집(소아[小我]에 집착하여 자신만을 내세워 버팀)을 끊는 것과 같은]과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과는 차원부터 다르다. 전자는 각종 인식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시켜 자기 자신에 대한 각종 집착을 끊게 하려는 노력으로 그칠 뿐이지만 그래서 번뇌·속박에서 벗어나 속세간의 근심이 없는 편안한 심경에 이른다지만[그들은 이를 해탈 또는 열반이라 한다], 자기 부인은 자기에게로 향하던 모든 욕구와 욕망을 자기가 아닌 타(他)에게로 방향을 틀어 바꾸는 것뿐이다.

그 "타"라는 대상은 '나'와 연관을 맺되 머리 및 몸의 각 지체를 이루어 있는 '하나'로서의 유기체다.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와 같이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자기를 위하지 않고 내 상대만을 위하므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대신 나의 이웃이 모두 같은 원리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를 포함해서 모두를 내가 그렇게 하듯이 위하므로 당연히 나도 그들이 위하는바 대상 중에 포함되니, 머리를 위시해서 모두들 나를 위해주는 판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니까 "자기 부인"이다.

나는 '나 자신'이라는 하나를 위하지 않는 대신, 내 이웃의 숫자가 가령 억(億)이라면 내가 나를 위할 수 있는 그 억 배로써 내가 위해지는 것이다. 어느 것이 나은가.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어느 편을 당신은 가히 합리적이고 실제적이라 판단하려는가. 내 스스로 "심신 중에 사물을 주재하는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 집착" 즉 아집을 끊기 위해 "나(自我)라는 실체가 없다"고 아무리 스스로를 세뇌(洗腦)시켜도 그 효과면에서나 방법론에서나 이 "자기 부인"을 따르지 못한다.

자기를 부정하려 함도 자기를 위해 하는 자기중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면 처음부터 자기를 위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을 동시에 위한다고 해도 그 속에 자기가 포함되어 있음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자기를 위함으로 시작되었으니 끝도 역시 자기를 위하는 자기중심이다. 때문에 철저히 자기를 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구원이요 영생이요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에 들어가는[십자가에서 회개하여 죽어 영생한 회개한 강조처럼] 것이 희소식 즉 복음(福音)이다.

믿고 은혜로 선물로서의 구원을 받음이 바로 여기에 그 뜻이 있다. 자기를 일절 위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고후 5:15/롬 14:7-9].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 얻었다고 하여 공짜로 영생을 거저 주워 얻은 것처럼 하고 그렇게 소위 "믿은" 뒤로는 즉 "구원 받은" 뒤로는 여전히 이전처럼 거침없이 자기를 위해 사는 자기중심일 때, 그 "믿음" 또는 "구원"이야말로 "열반"이나 "해탈"과 같은 순수한 미신일 뿐이다.

그래도 불교를 믿는 이들은 양심은 지키려고 한다. 반면에 이 기독교인들은 양심을 지키려고 하는 그런 순수성까지도 없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양심대로 살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자기 세뇌를 단단히 시켜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가 성경에 있다고들 말한다. 성경 어디에 있는가, 바울 같은 대사도까지도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탄식을 했다고 말들을 한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불교 교리는 이에 비하면 "인간 노력"이라는 상식에나마 머물러 있지만,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도 없이 저급하기까지 하다는 비판을 받아도 유구무언이다.

산 자로서의 마땅한 노력이 있어야 그는 산 자이다. 왜냐면 죽은 자는 활동을 못하지만 산 자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움직일 때에는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어디를 향하여 가든 무엇을 하든 그렇다. 그 방향이 그리고 일하는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있지 않고 앞의 설명처럼 유일하게 이웃을 위함에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선인(善人)이고 의인(義人)이고 성인(聖人)이지 누구를 가리켜 말함인가.

이것이 정상 상태에서의 "인간 노력"이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인간 노력"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함이다. 남을 위한다고 해도 거기 자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앞서 지적했다. 자기가 포함되어 있는 이상 "빙산 일각"이라는 말처럼 그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자기중심이다. "동시에 남을 위한다"는 것은 구실, 핑계에 불과할 뿐이다. 정직하지 않다. "남을 위하기도 한다"는 들러리를 세웠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철저히 죽어도 살아도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하니[롬 14:7-9]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한 몸의 지체된 이웃을 위함이다[요 13:34].

머리께서 우리를 위하심에서 죽기까지 충성하셨으니 우리도 한 몸을 이룬 믿음의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다[요일 3:16]. 이렇게 죽도록 충성함이니[계 2:10], 누구를 위함인가. 자기를 위함인가, 자기 구원을 위함인가. "자기 부인"에서 죽도록 충성함이 아닌가. 다시 말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하고 함께 지체된 이들을 위함에서 죽기까지 충성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니 이 마땅히 산 자로서의 "행함"[약 2:20,26]이 아닌가.

산 자로서 영생하도록 새로 창조된 터이므로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리스도[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와 머리와 몸이라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 있으므로 그야말로 불사불멸(不死不滅)이라 신바람 나게 휘파람 불며 어깨 춤추며 일함이니 왜냐면 비록 죽기까지 해도 세상의 핍박과 탄압과 환난의 표적이 되고 대상이 되어도 영원히 그 결과가 남는 보람찬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처럼 신나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기의 "자랑"이라고 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고 승리의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

불교의 교리는 개별 성취다. 나란 것은 스스로 어떤 경지에 이르러 일정 목표 수준이 되면 그것은 말 그대로 자기만의 세계 구축이지 자기 외의 다른 사람의 세계와 수평적 연결이 언급됨이 없다. 즉 앞에서 말한 대로 이웃을 위함으로써 자기를 위하면 자기를 포함해서 그 이웃도 함께 위하는 것이고 조물주[머리로서의]를 위하는 차원에서 이웃을 위함으로써 자기를 위하게 되면 전체를 위함과 동시에 전체를 포함시켜 자기를 위함이 되지만, 각자 자기 개인의 행복을 위해 특정 경지에 이르러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 결과는 어디까지나 자기 한 개인에 머문다.

전체적으로 함께 하는 아무런 근거가 마련되어져 있지가 않다. 나도 그 경지에 이르고 저 사람, 이 사람도 그런 경지에 이르렀으니 같은 경지를 이룬 상황에서 공통점을 상호 공유하지 않겠느냐 하는 그저 막연한 상상만이 아닌 논리적 현실적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없다"이다. 각자 자기중심으로 있으면 각자 자기 색깔이 있게 마련이다. 독존, 독존의 자기 개성이니 이는 영원한 것이다. 고로 조물주 없이 이런 각자의 자주 독립성을 지니게 되므로 더구나 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성을 지니게 되니 아무리 공통 목표로서의 일정 경지에 이른다 해도 이는 간단히 말해 각자가 각자 나름대로의 신[神] 즉 조물주가 되는 것이다.

조물주라고 별 것이 아니다. 자기 단독으로 무엇을 만들어냈을 때 그것이 창조행위다[인간의 창의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터가 아닌가]. 이렇게 각자가 조물주가 되어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 운영한다 할 때 그 여러 피조물[그들 조물주들에 의해 창조된] 세계가 과연 상호 충돌하지 않으리라 누가 보장하는가. 처음부터 통일이 되지 않고 '제각각'이었지 않은가. 제각기 자기 색채가 있고 특징이 있으므로 그런 다종다양성의 것을 누가 하나로 조화시키고 통일시키겠는가.

그러면 서로 머리가 되려고 그래서 맹주가 되려고 아귀 다툼을 버릴 것이 아닌가. 그러면 별수 없이 현재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세태의 재판(再版)이 될 뿐이다. 규모만 더 거대해진 형태로 달라졌을 뿐 본질은 같으니 더 심각한 아비규환으로 도리없이 전락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규정하기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한 것이다. 현재만 고민스러워 하고 그 다음의 미래는 아무 대처가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현재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가상적인 것이고 현실적일 수가 없다. 과거를 무시한 현재는 또한 공중에 뜬 것이므로 이것도 이야기로 치면 허망하기 짝이 없다. 과거란 원인을 말하고 현재는 그 결과를 이르는 것이고 장래의 일은 그 결과의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원인 없는 결과 없듯이 조물주 없이는 이런 엄청나게 정교하고 치밀하고 통일성을 갖춘 현실 세계의 경이(驚異)는 애당초 생겨나지를 않는 법이다.
 

§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 받음도 은헤

당신을 구원 받았다고 믿는가. 그러면 당신은 다시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일만 하게 되어 있다. 이 시간 어떻게 할지, 어떻게 해야 그 뜻을 이루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며[요 4:34], 그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인지[고전 7:32/고후 5:9] 여쭙고 그 일이 주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는대로 행할 것이다. 왜냐면 당신의 마음대로 쓰고 당신의 원하는 대로 보낼 시간이란 단 1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히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러면 당신은 구원 받지 않은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도중에 있다. 둘 중 하나다. 이외 달리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 당신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영멸(永滅)과 영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내가 이미 여기서 당신에게 경고를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묻노니, 당신은 그렇게 주님께 여쭙고 주님의 뜻이라고 하여 행하는 일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는가, 아니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마지 못해 하는 것인가.

당신의 마음이 지금 우울한가. 명랑한가 하는 것을 살펴도 그 지렛대가 될 수 있으니 성경은 항상 기뻐하고[빌 4:4/살전 5:16]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살전 5:18] 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인가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가 하지 말라. 주님은 단계적으로 어린 아이 손잡아 이끄시듯이 하신다. 한 단계, 한 단계씩 완벽함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다만 당신의 그러하다는,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만 나타내 뵈어 드릴 일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마음만 있으면 하는 것이지 억지로 시키시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상태로 당신 자신부터가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주님이 당신을 가리켜, "항상 저 모양이니 난들 어쩔 도리가 없다" 하시는 말씀을 듣기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된다 즉 구원 얻는다고 알고 있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는" 것을 성경은 명시한다.

다시 말하면 "받음과 동시에 주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동시에 "그리스도를 위하여"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주는 측면"이다. 이쯤 되면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껏 나는 무조건 받는 것으로만 알았다. 이와 같이 동시에 또한 주는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다면 잘못 알아도 아주 크게 잘못 안 것이다. 이 잘못 아는 큰 이유는 구원이란 것부터 잘못 안 때문이다. 구원이 무엇이냐. 아니, 은혜로 얻는 구원이 무엇이냐. 죄인의 신분에서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변화한 것을 말함이다. 내가 평생 노력한들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보겠는가. 이것은 틀림없이 내 힘으로 된 것도 아니고 어느 인간의 힘으로 된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죄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기심 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말은 바로 말하고 소리는 바로 내어야 한다. 어정쩡하게 알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성경대로 말하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  우리의 고난은 아이 낳는 기쁨을 위한 산고(産苦)

구원만 받으면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이 아님을 다시 강조한다. 새 창조는 새롭게 사는 법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새로 지으심 받았기 때문에 "이전 것은 지나갔다,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후 5:17] 하지 않는가. 이전의 삶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한낱 잠꼬대에 불과하다고 인식했던 그 사고방식[자기 부인]을 따르지 않는 것이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지름길임을 뒤늦게야 깨닫게 된 것이다.

과거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자기 부인]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생명의 법칙임을 알게 되고 실제 그렇게 되도록 모든 조처가 취해지고 장치가 마련되고 토대가 완전히 영구하게 잡히고 온전히 그런 구조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음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도 되는, 항상 그리고 영원히 사랑의 상대방을 위해 사는 삶으로 정착되고 확정된 것을 보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누리는 삶이다.

단순하다. 즉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니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요, 단지 이 세상에서는 죽음의 세계요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 그런 생명의 법대로 살면 이 세상의 생리 즉 죽음의 생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서로 상극이 되어 조합이 안되고 조화가 되지 않아 그에 따른 역행으로 말미암는 '고난'이 필수라는 그것뿐이다. 이 차이만 알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것이 비록 '고난'인 줄 알면서도, 다시 말하거니와, '고난인 줄 알면서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 길을 자진해서 택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이 이웃의 생명 건져내는 유일한 통로요 방도이기 때문이다. '고난'만을 생각하면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사람 낳는 산고의 고통이 지나면 사람이 탄생함을 인하여 그 고통 다 잊어 버린다고 주님 친히 말씀하신 대로, 아이를 낳는 그 기쁨과 보람 때문에 그 산고(産苦)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이 세상 고난 받음이 바로 이 이유에서다. 아이 낳으려면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고 그것 생각하면 누가 아이를 낳으려고 하겠는가.

그 '고통'을 생각하지 않고 '아이'를 생각하니 그 고난을 견디고 참을 수 있음이 아닌가. 바로 이것이 또한 "받는바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히 2:10/5:8.9]. 항상 말하지만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고통을 생각하지 말고 아이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적절하고 유익한 비유이다. 고통만 생각하면 그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이를 갖고 싶으면 그 고통을 용감하게 통과하는 욕구가 생긴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음이 이와 같으므로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것이고 당연한 것이며 절대로 "이상한 일"[벧전 4:12]이 아니다. 물론 이 산고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괴롭게 하시기 위해 정해진 것은 아니다. 여인이 이런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은 여자가 에덴낙원에서 벌어놓은 죄의 결과요 그 저주다. 이것도 저주라고 해서 저주 내리신 것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짐승은 어느 정도 새끼를 낳을 때는 그런 산고가 있을 것이나 인간은 이 지상에서 살도록 처음부터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동물들이 새끼나 알을 낳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측면이 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남자가 받은 저주 역시 그 이마에 땀 흘리는 것이 에덴낙원에 있었더면 그런 수고가 없었을 것이지만 이 지상에 사는 일반 동물들과는 달리 이 자연계에 살도록 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 이 자연계에 있다보니 그렇게 힘들여 일하지 않고는 먹고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된 자연스러운 결과다. 날짐승은 창고에 거두어 들이지도 않고 들의 꽃은 길쌈도 아니하지만 그 입은 옷이 솔로몬의 지극한 영화로 해 입은 옷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인자[즉 사람]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신 것은 바로 이 뜻 외에는 없는 것이다. 왜 머리 두실 곳이 없겠는가. 머리를 두면 두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인간이 정상적으로 삶을 누리는 그런 세상, 그런 세계가 아니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영계에 있어야 할 인간이 이 자연계에 위치해 있는 비애를 인간의 대표 곧 마지막 아담으로서 토로하신 가장 정확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세상이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생존하고자 발버둥치면 칠수록 몸부림하면 할수록 짓는 것은 죄밖에 없게 된다. 그래 놓고는 살기 좋다고 한다. 멸망할 일만 벌어놓고 있는데 무엇이 살기 좋다는 말인가. 눈이 감겨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사탄이 그 눈을 감겨놓으니 볼 수가 없다. "끄는 그대로 끌려 가는"[고전 12:2] 노예의 신세였다. 자주성도 없고 탈출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스스로 "자유인이라", "독립하였다" 하나 실은 사탄에게 포로되어 있었고 노예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살려고 하고 삶의 낙을 누리려고 하면 짓는 것은 죄밖에 없고 사탄의 노예되는 것밖에 없으니 비록 고난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참 자유인이 되고 독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매여 있다고,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 죽어도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한다고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데 어찌 자유인이라 하느냐 하는 이는,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은 주인 노릇하면서도 사랑의 상대에게 종 노릇하는 것이다. 주인 노릇이라는 것은 사랑이 상대의 섬김을 받는 까닭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탄에게 종 노릇하는 것은 일방적인 것으로서 사탄은 섬김만을 강요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나만을 위하시는 것이므로 나도 주님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으로 종 노릇하는 영원한 관계이다. 주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하셨으니 이는 아들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아버지께서 움직이시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니 이런 것이 '사랑의 종 노릇'이 아닌가. 주인 노릇한다는 말은 또한 내가 자진해서 하는 일이라는 의미다. 사랑이 바로 그런 것이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할 것이다'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기를, '주님은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할 것이다.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는 것이다"[히 13:5-6]. 여기서 "돕는 이시라" 했다. 그러면 나는 나의 일을 하고 주님은 나를 도우신다는 뜻이 아닌가 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여전히 위하고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라는 그런 취지로 말하는 것인데 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돕는다"는 것은 그 뜻을 새길 때 "위하는" 것이다. 위할 때는 자기를 위하면 그것은 위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고로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하는 것과 나의 상대를 위하는 것이 상충할 때는 나를 위하는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이다. 위하는 상대방이 없을 때는 그렇지 않지만, 위하는 자가 지정되어 있고 내가 그를 위하는 '위하는 이'로서의 역할이 맡겨져 있을 때는 절대로 나를 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종이 주인을 위하는데 절대로 자기를 위하는 일을 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나는 서로 위하는 사이이므로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주님은 나만 위하시고 나는 주님만을 위해드린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전처럼 내 자신의 일을 하고 내 자신을 위해 사는데 주님께서 그런 나를 이제 위하신다는 그런 뜻이 될 수가 없다. 주님과 내가 사랑으로 하나되어 있는데 내가 자신을 위하여 죽거나 살거나 하게 되어 있지 않은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성경은 이미 선언한 것이다[롬 14:7/고후 5:15].

고로 나는 주님을 위하지 않는데도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데도 주님은 나를 위하신다는 것은 아예부터 있을 수가 없다. 내가 내 자신을 위하는 그것은 생명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주님께서 나를 도우실 수 없는 것은 생명의 법칙을 어기는 것을 도우시는 격이 되므로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돕는다"라는 말의 뜻을 이 세상 삶의 기준대로 해석하고 영원한 생명의 법칙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는 까닭에 그런 혼동이 생긴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바 "하나님은 나의 돕는 이"시라는 의미는 일시적으로 돕는 자가 아니라 영속적인 영원한 돕는 이시라는 뜻이므로 하나님께서 항상 변함없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우리는 또 영원히 하나님을 위하여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이 다름 아닌 생명의 법칙인 것이다. 하나님의 법칙은 상식 수준이다. 상식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친숙해 있는 양심의 소리에서 어긋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상식 수준의 생명의 법칙이지만 우리가 현재 처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라는 한계성 때문에 그것이 별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던 것이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와 같은 사람으로서 바로 '내'가 되어주셔서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하여 이 사실을 믿는 이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게 되었으니, 나의 인식 세계가 달라졌고 사람 자체가 달라졌고 환경과 여건이 180도로 변화한 것이다. 종전과 같은 안목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변화는 오직 믿음으로써다. 믿고 안믿고의 여부가 이렇듯이 획기적인 변화와 차이를 가름한다.
 


§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아버지의 대를 잇고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는 상속자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 다음으로 하는 주인 노릇이다. 이것은 굉장한 권리다. 그러나 세상에 권리는 있어도 의무와 책임이 없는 일을 보았던가. 그런 것은 한마디로 없다. 그 책무를 다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빌 1:29]이다. 하나님의 아들된 것이 먼 미래의 일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은혜로 얻는 구원"이라 하고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은혜이고 믿음이니까 현장에서 즉시 받는 것이다. 무슨 시간이 필요한가.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은혜란 것은 내가 무엇을 할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닌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시간을 요한다. 시간을 요하므로 그 즉시 받는 것이 될 수가 없다. 어쩌면 평생 가도 그 결과를 모를 수도 있다. 죽어 심판대에 가보아야 내가 한 일이 과연 합격인지의 여부가 판가름 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은혜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므로 그 즉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되는 것이다. 이를 아무도 의심하거나 검증하라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을 누가 왈가왈부할 것인가. 이미 선포되었는데 여러 잡소리 군소리가 필요치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으니 온 우주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의 아들로 통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리는 이미 얻어놓은 것이고 당장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 아들로서의 책무 이행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 책무 이행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서야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그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고 이 세상에서 이 시간 어디서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니 당장 그 하나님 아들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지당하다. 자꾸 책무만 이야기하는데 그 권리란 것은 무엇인가, 그 권리란 것도 가시적인 것으로 누릴 수 있어야 책무도 가시적인 것으로 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권리와 동시에 책무요, 책무와 동시에 권리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도 나름이다. 일률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책무라는 것이 권리를 일시 제한하는 특성을 지닌다면 바로 그 경우이다. 권리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유보되는 것이 책무 이행에 불가피할 때 바로 그러하다. 그리고 그런 기회와 환경과 제반 조건이 이 세상에 국한한다고 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감당해야 할 바로 그 책무, 하나님 아들로서의 '책무'의 성격이다.

그러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바로 그 사례다. 친히 본으로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로서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를 명확히 지적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게 하셨다" 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려면 하나님 아들로서의 권리와 영광은 잠시 유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약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막강하심과 우주 천하 무적의 모든 것을 다 버리시고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그 책무를 다하셨다.

이 책무 이행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순종"이란 이름으로 별도로 부른다.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책무이고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하여 아버지 대신 주인 노릇을 하니까 즉 아버지의 모든 것을 물려 받으니까 어떻게 되는가. 아버지의 것이 나의 것이라면 그 아버지의 것을 위해 아버지께서 일하시고 수고하시는 것을 나도 그와 같이 수고한다고 해서 틀린 말인가. 이것이 아들로서의 할 일 곧 책무 이행인 것이다. 즉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난날 내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멸망으로 직행하고 있을 때 내가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구원을 받은 것처럼 그래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처럼 그렇게 세상 사람들 즉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려내는 이 일이 아닌가. 방금도 말하기를 구원 받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 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것은 내 것이다. 고로 나는 나의 것을 위하여 나의 것 얻기 위하여 나의 일을 한다 - 이 말이 틀린 말인가.

물론 나의 것이기 때문에 나의 일을 한다고 자기중심으로는 오해하지 말 것이다. 내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과 머리' 관계에서야 비로소 "내 것"이라는 말을 진실로 할 수 있게 된다. 이 관계에서가 아니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자기중심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인 의식으로, 주인으로서 상속자로서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일을 이 세상에서 밖에는 할 수 없으므로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라도 강행하는 것이다. 바로 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요 그 십자가에 고난 받으신 모습이 아니신가.

나도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된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된 아들"이다. 이것은 상상도 못할 그야말로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경천동지할 사건이지만 그러나 현실이다. 나는 그래서 이 현실을 사는 것이다. 이 현실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사람이 현실을 떠나서 무엇을 하겠는가. 현실을 떠나서 단 한 발자국인들 옮길 수 있는가. 현실을 따름이다. 이 현실을 따르는 발걸음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음"인 것이다. 나는 이상주의자도 아니고 공상가도 아닌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지극히 현실주의자다. 현실에 입각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엄연한 현실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  성도(聖徒, saint)와 성인(聖人, saint)

영역에서의 "saint'를 우리말 번역으로 "성도'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다. 성경 그대로 영역에서나 우리말 번역에서나 말 그대로 성인들이라 함이 옳다. 왜냐면 성경이 우리를 성인들이 되라고 가르치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 했고[엡 4:24/벧전 1:15,16/히 12:14/고후 7:1]이러한 성인들이 되지 않으면 영생에 들어갈 수 없음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롬 6:22]이라고 못박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데 성인 곧 거룩한 사람들이 안될 수 없다. 성인이라 하는 것은 말하자면 자기를 부인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남들을 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 머리도시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이웃들을 대하고 그들을 위하는 위치에 있는 까닭이다[고후 5:15/롬 14:7-9]. 그러므로 자기 부인을 강조하고 우리 마음에 새기고 성경의 명령대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일에 스스로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성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옳은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자기를 부인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온 것이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명백한 "배도(背道)"[살후 2:3]이다. 거룩하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뵐 수 없다고 하는데[히 12:14]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거룩하지 않으면 영생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롬 6:22].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이어서 영생으로 보응하신다"[롬 2:7] 즉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신다"[:6] 한 것이다.

의인 즉 성인은 세상에서 환난이 많다[시 34:19]. 의인은 고난이 많고 악인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이 처음으로 열리던 그 시작 때부터 나타난 것이니 이는 향후 세상이라는 것이 이러한 속성을 띠고 있음을 보임이었고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한 모세 율법 시대에서도 당연히 그러했었다. 왜냐면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들은 핍박의 대상이었고 고난의 관문을 거침에서 예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상징하는 생애로서는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다윗의 고난, 이집트의 제2인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자가 되기 전에 요셉이 받은 고난, 욥이 받은 고난, 세례 요한의 죽음[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니까-눅 16:1;6] 이 있다. 십일조를 충실히 내는 등으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히 순복(順服)하면 세상에서 부유하게 된다고 모세의 율법이 가르치는 시대였고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는[이 모두 악인에 대한 형벌과 심판의 차원] 그런 그림자 시대였음에도 또는 그런 그림자로서의 역할에 걸맞게 의인들은 환난을 당한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환난을 당하지 않은 솔로몬은 그 종말이 비극적이다. 즉 그가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위함으로써[롬 1:25] 이방인들로서 자기 처첩이 된 여인들을 하나님보다 더 기쁘게 하기 위해 우상들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가 이를 회개하였다는 기록인 없으니 우리는 솔로몬의 장래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회개하지 않는 범죄는 반드시 멸망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그렇게 범죄하여 즉결처분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행 5:1] 그들이 회개할 수 있었다는 언급은 없으니 멸망이다.

솔로몬 역시 그러하리라고 단정해도 이를 반박할 아무 근거가 없다. 오직 우리는 솔로몬을 통해 경고를 받고 있을 뿐이다. 솔로몬이 지은 전도서와 잠언과 아가가 성경으로서 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솔로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지혜였기 때문이다. 고로 이런 글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양면성을 갖는다고 보아야 할까. 하나님의 말씀이심과 동시에 솔로몬 개인으로 보면 우리에게 주는 경고가 됨이다.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빌 2:12]. 나도 아담 같이 되지 않는다고 말 못하고 솔로몬처럼 범죄하지 않는다고 장담 못하는 터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그래서 그 글이 솔로몬의 잠언이라 하여 버젓이 성경에까지 수록3되어 있어도, 정작 본인은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모른다는 이 엄숙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오직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는 것뿐이다.

아담과 여자는 몸과 머리 관계

아담에게서 여자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다[고전 11:3]. 부모는 머리요 자식[들]은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요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시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다[:3].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지으셨으므로[히 1:2] 하나님의 아들 친히 아담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아담에게서 여자가 났으므로 아담 자신이 여자를 만든 의미도 되기 때문에 아담[남자]이 여자의 머리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하나님[이 경우 아들]께서 아담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역시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아담을 만드셨으니 이는 아담이 여자를 내되[존재하게 하되] 아담이 아닌 하나님 친히 그렇게 하신 것과 같은 이치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모심 즉 그리스도를 모심으로써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함이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났다는 것을 나타냄이다. 그러나 여자를 남자[아담]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여자"라 하듯이 그리스도를 "아버지"라 하지 않는다.

왜냐면 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아버지 친히 아들 안에 그리고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심으로서 둘은 하나되어 계시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나는 아버지에게서 난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신 아들 독생자[외아들]와 함께 아들되고 함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 있음이다[롬 8:17]. 우리의 창조자 아들께서도 그러나 우리와 함께 형제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했으나[히 2:11], 그러나 동시에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children)라"[:13] 하신 것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하는 데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롬 8:17-21].

몸으로서 머리의 지시에 따르는 것, 이것이 한 몸 체제 안에서의 생명 즉 삶 자체이다. 이것이 생명의 법질서로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이 질서에서 벗어날 때 악 즉 좋은 것[선]에 대립되는 좋지 않은 것이 된다. 죄 즉 불법 다시 말해 법을 어김이 된다. 자기중심으로서 이러한 고유의 본디부터의 생명에서 벗어나 있던 우리가 생명의 체제로 돌아오는 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다. 영생을 얻어 가지는 단순히 그런 것이 성경에서 밝혀 설명하는 구원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람의 특징을 가리켜[이 특징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 즉 구원 받지 못한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소유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다"[롬 14:7-9] 한 것이다.

우리가 "주님"이라 부를 때에는, "나의 주인이시요 나를 소유하신 분이니 무조건 그 뜻대로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의미가 된다. 상전을 섬기는 모든 종, 하인은 실제 그러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를 때에는 당연히 그러하다. 때문에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마 7:21]고 분명히 경계하시고 선을 그으신 것이다. 한 때는 당당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었다.

능력도 행하고 귀신도 그 명령에 따를 정도였었다[:22]. 그러나 처음처럼 하지 않고 중도에 그 마음이 변하여 입으로는 이전처럼 "주님"이라고 불러 변함이 없었으나 그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지 않고 자기의 일을 하는 자기중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천국은 주인의 나라다. 내 나라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인과 종의 관계도 세상에서와 같은 자기중심이 아닌 만큼 주인 친히 사랑으로 하나됨에서 머리와 몸의 관계로 모든 것을 처리하시므로 먼저 몸을 위하시는 본을 보여주셨으니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다시 말해 전적으로 우리 피조물을 위하시는 것이 머리로서의 조물주[창조자] 곧 하나님 사랑이다.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 교류, 교제, 사귐이 항상 그 주제(主題)다. 영원히 몸과 머리 관계다. 죽는 판이 나더라도 천하 없는 그 무엇이 나를 위협해도 한 몸 구조에서의 몸[의 각 지체]된 나는 나의 머리의 지시에만 절대 복종할 따름이다. 나는 이렇게 하여 죽는 한이 나더라도 나의 소속은 머리를 중심으로 하는 한 몸에 있으므로 머리를 비롯해 온 몸이 건재하고 있는 한에는 나는 영원히 죽지 않으며 비록 죽더라도 필연코 영광스럽게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아무도 자기를 위해 죽거나 사는 자가 없고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소유이다" 하고 말하는 의미이다.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 즉 그리스도의 소유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리 "주님, 주님" 하고 불러도[눅 6:46] 한 몸 관계에서는 떨어져 있으니 이는 생명에서 떨어져 있는 의미인지라 생명의 세계인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무척 당연한 결론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되풀이되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모든 글의 유일한 목적은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을 의심없이 확고하게 마음에 아로새기라는 그 취지 외에는 더 있을 수 없다.

주님 또는 주인의 종으로서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요 4:34] 것에 주야로 노심초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보내심을 받은"[20:21] 것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이는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영원히 그러하다. 왜냐면 이 자체가 생명이요 삶의 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먹는 양식"이니[4:34] 양식을 먹지 않으면 죽지만 그렇다고 내가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여 억지로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면 생명의 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할 정도가 아닌가.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오로지 주인되시는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노심초사하되 즉 "두렵고 떨림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되"[빌 2:12] "내가 먹을 양식"[:34]이라 하신 대로 그것이 바로 나의 삶이요 삶의 낙인지라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위해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로 나아가시면서도 아버지와 하나되심의 생명의 한 몸 관계에 있어 그 즐거움이 넘쳐 나셨으므로 "내 기쁨을 내 평안을 너희들에게 준다"[요 14:27/15:11/16:33] 하시고 함께 나누실 정도였던 것이다.

이 모두 믿음의 영역이다. 믿지 않으면 천하 없이 좋은 것도 모두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것이요 믿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의인의 고난을 받는다 함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왜 세상에서 의인은 고난만 받는 듯이 보이고 오히려 악인만이 창성하고 흥하는지를 하나님께 질의하였을 때 주신 대답이신 것이니 곧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하심이었다. 믿음으로 구원 얻고 또한 시종 내내 믿음으로 이 세상 견디고 이기는 것이다.

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시다[골 3:4].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계된 일은 일체가 아버지와 직결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둘이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또 믿음의 내 형제와 관계된 일은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으니 그와 그리스도는 둘이 하나되어 있음이다. 고로 그를 멸시함은 그리스도를 멸시함이다[마 25:45]. 그리스도께서 내 생명이실진대 그리스도를 멸시함은 내 생명을 중요시하지 않음이니 자기 생명을 중요시하지 않는 자에게 생명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멸망인 것이다[:45].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왜 그리스도께서 내 생명이시냐 하면 하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이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둘이 하나됨에서 그 하나를 이룬 상대가 바로 자기 생명이고 자기 자신이 자기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과 하나를 이루지 못하지만[하나님과 사람이므로] 그러나 전체 피조물과 하나님은 하나를 이루고 모든 인간과 하나님은 하나를 이루어 있음이다.

물론 처음 창조하실 때 그렇다는 의미요 지금은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죽은 자가 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한 이 '하나'를 이루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은 우리와의 하나를 이루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기 위함이신 것이다.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 있으므로 하나일 수가 없다. 그러나 원래 만물이나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 피조물과 조물주 하나님과의 둘이 하나되는 이치를 따르심이므로 이 새 창조에서도 당연히 이 둘이 하나됨을 이치를 따라 그래서 우리와의 하나임을 전제로 하고 우리의 죽음에 함께 하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니,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기고 작정하는 자 즉 회개하는 자에게만 베풀어지는 구원이다. 그래서 그렇게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로 작정하고 약속하는 이에게 친히 성령으로 임하시어 실제적으로 그와 하나가 되어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둘이 하나되어 있는 관계에서는 자기 자신이 자기 생명이 아니라 자기와 하나를 이루고 있는 상대가 자기 생명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이 되어 계시는 이유다.

또한 앞에서 지적한 대로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와도 하나되어 계시니 그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거나 무시하여 경멸하면 자기 생명[그리스도]를 그와 같이 경멸함이니 자기 생명을 경시하는 자에게 그 멸시당하는 생명이 계속하여 함께 있어 주기는 틀린 것이다. 자기 부인을 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즉 구원과는 무관하게 된다 경고하심도 이 때문이니 상대를 위하지 자기 자신을 위하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고후 5:15/롬 14:7-9] 것이 자기 부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의식이 바로 자기 인식, 자아 의식이다.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머리의 상대는 몸이요 몸의 상대는 머리이다. 몸은 머리를 의식하고 머리는 몸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항상 그리스도를 의식하고 사랑하고 그 뜻을 따르고 그의 일을 하는 데에만 전심전력을 다함이다. 이는 영원히 그렇다. 이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기장 이상적인 삶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가운데 언행심사 일체를 하는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모두 같은 뜻이다[골 3:17/고전 10:31/벧전 4:10,11][요 14:10/5:19]. 모든 일에 주님께 여쭙고 하든지 안하든지 하고,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만 일을 하기로 영원히 그리고 순간순간마다 작정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라 하고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 2:20] 것이라 하는 것이다.

세상사, 인간사, 그리고 나 개인의 일 역시 물론 항상 양면성을 띠고 있다. 이 그림들은 그러한 사실 또는 진리를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고로 인식 전환, 마음 돌리기가 중요하고 사람 삶이 핵심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절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 것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여 순종하면 영생과 영원한 영광을 반드시 얻게 되기 때문이다. '반드시'다. 아무 조건이 없고 오직 나 자신에 달려 있을 뿐이다.

성경에 미리 택하신 자만 결국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 미리 정하심은 미리 아심에 있고 이 미리 아심은 내 스스로 나의 자유 의지로써 내 운명을 어떻게 정할 것을 아신다 함이니 전적으로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운명"이라는 개념 수정이 필요한 것이다. 운명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타율로 인식해 왔지만 사실은 이와 같이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각자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마지막 심판이 순수하게 각자가 어떻게 행동했느냐 하는 것으로써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처가 처음부터 취해지는 것이라면 마지막 심판이 있을 의미가 없다. 그냥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만 될 것이므로 아예 그런 말은 있을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이 창조주를 믿지 않으려 하고 굳이 부인하려 하는 이유가 자기를 속박하고 자유를 제지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처음부터 잘못된 인식인 것이다.

이 "마지막 심판" 자체가 그 해답이다. 하나님께서 임의로 어떤 기준을 정하셔서 거기에 맞으면 영생, 어긋나면 멸망이 아니니, 하나님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과 안녕이 기준이 되어 있음이다. 하나님을 우리 악한 인간처럼 자기중심으로 착각하는 심각한 오류다. 처음부터 첫 단추 잘못 끼우니 제대로 무제가 풀려질 리가 없다. 말귀를 바로 알아들어야 하는데 이와 같이 이런 간단한 것을 두고도 사탄의 최면술 암시에 걸려 전연 엉뚱한 것으로 해석해치우는 인생들의 비극, 종 살이, 노예의 속박, 타율이 이 정도다.

정작 자기 편이 되어[어느 어버이가 자식을 위하지 않고 자식 편이 되지 않으랴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그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의 어버이신 것이니 인간의 자식 사랑, 짐승의 새끼 사랑이 그 증명이다] 자기를 전적으로 위하시는 창조자는 굳이 부인하려 하고 자기중심의 사탄에게 현실적으로 구금되어 있어 부자유의 절정 속에 갇혀 있는 실상은 깨닫지 못하니 다시 한번 인생의 노예 상태를 통탄하지 않을 수 없음이여!

가히 할 말을 잃을, 잊을 정도다. 편견과 선입견의 노예가 또한 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일이다. 때문에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지 않고는 절대로 사람이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하신 것이다[요 6:44,45,65/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6:17]. 이는 구원의 지식이 무슨 엄청나고 고답적이고 심오하여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방해가 이와 같으므로 사탄의 세력을 깨뜨려주시는 은혜를 말함이다. 악한 자에게 이런 진리를 깨우쳐 주실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야 범죄했다고 해서 아담도 죽지 말아야 하고 사탄 등 악령들도 영원 멸망으로부터 해제되어야 할 일이다. 

그래서 회개하는 자에 한해서 언제나 구원이 임하고[행 2:38]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이요 그런 이들을 위해 준비하신 구원이라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행 5:32/롬 6:16/16:26/요 3:36/히 4:11/5:8/벧전 1:2/고전 2:9/약 2:5/1:12]. 이는 인과율에 적합한 것이니 왜냐면 현재의 인간고, 인간 비극이 아담의 범죄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아담처럼 범죄하는 자 즉 회개 않고 이전처럼 연속해서 범죄할 경우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는 양자 관계로서 둘이 따로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이고 하나로서 표현됨이다. 범죄함으로써 오늘날의 죽음의 고난에 직면하여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으므로[롬 5:12] 즉 '원인'이 되어 있는지라, 그 구원이라는 '결과'는 반드시 이 최초의 '원인' 즉 범죄함이 다시는 없어야 함은 너무나 지당한 것이다. 이런 인과율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해석하여 자멸에 이르는 이들이 많다. 인과율은 과학적 법칙임을 3위1체의 법칙이 증명하고 있다[이 3위1체 원리를 확증하는 것이 3운법칙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하지 않으니 미신에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낮 같이 존재하시는 창조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도 미신이요 세상 종교도 당연히 이런 관점으로도 미신이다. 하나님도 성경도 다 시인한다는 기독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고 그런 것을 믿을 때 미신이 됨은 마찬가지다. 미신의 기준은 유신론이요 무신론이냐 하는 따위의 그런 것에 있지 않고 현존하는 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실상을 실상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모든 것이 미신인 것이다.

따라서 각자에게 양면성의 원리에 따르는 해결이 있으니 오직 영원한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음이다. 지금 이 세상은 오직 그런 것을 정하기 위한 유일한 기회이다. 그리고 이 양면성의 진리는 지금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니 곧 구원을 받아 산 자가 되어 있어도 시험을 받아 범죄하면 아담처럼 죽는 자가 되는 것이고 사탄 등 악령들처럼 영원 멸망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되"[빌 4:4] 동시에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어야"[2:12] 하는 양면성을 이 그림은 말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어느 때든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여 멸망하기"[3:18,19] 때문이다. 이 양면성의 진리를 간단히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리고 항상 일깨워주는 것이 '이솝의 얼굴'이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의 '마지막'이라는 의미 역시 중요하다. 즉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써 각자의 자유 선택에 의해 나타나는 결과를 보시고 최종 심판하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