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일요일

(7)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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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용할 양식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세상에 살다보니 먹을 것도 생기고 또는 형편에 따라 기근이 나서 굶어 죽는 수도 있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때마다 끼니마다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기근이 날 때는 왜 못먹어 죽는가 할 것인데, 이는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주실 능력이 없어 못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안주시기로 작정하심이니 이는 인간의 원래 삶이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삶이 아니라 영계에서 영생하는 자의 삶으로서 현재의 이 삶은 범죄의 결과로 인한 죽음의 대가인 줄 인류로 알게 하려 하심이다.

이 자연계의 삶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이며 절대로 인류가 이를 정상적인 삶으로 받아들여서는[인식해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이를 알리심이다. 다시 말해 때마다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것처럼 하시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만큼 가까우시고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신다”[행 17:27]. 하나님 앞에서 품속의 아기와 같은 것이 우리 인생들이다.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KJV]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함과 같다.

그리스도 친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 6:55],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 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53,54] 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56] 하셨으므로 이는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으니 이로써 우리가 그 안에 있는 줄을 안다”[요일 2:5] 함과 맞물리는 말씀이다.

이는 곧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니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 것이다”[요 6:57] 하심과 직결된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고 내 계명을 지킨다”[요 14:21,23] 하셨으므로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보내심을 받은”[20:21] 대로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4:34] 것을 말씀하심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니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 것이다”[6:57]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산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이니,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에 있고, 그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데에 있고 이는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이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고 있는 자에 한하는 것이므로, 이상의 주님 말씀에 따르면 그렇지 못하게 되면 “생명도 없고” 즉 “영생을 가지지 못했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그를 다시 살리시지도” 못하니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무릇 산 자는 움직인다. 먹고 마시는 것도 산 자로서의 필수 요건이다. 움직이기 위해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죽은 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죽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입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갖다 대어 주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오직 산 자만이 목말라 하고 배고파 하니 먹고 마실 수 있다. 우리가 일단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굴레를 벗어나 의젓이 산 자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산 자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먹고 마셔 그로 말미암아 힘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힘을 얻어 움직여야 산 자다. 아무리 산 자라도 먹고 마심으로 힘을 얻지 못하면 움직일 수가 없으니 이는 다시 말해 갓난 아이가 젖을 못먹어 그냥 죽어버리고 마는 것과 같다. 고로 먹고 마시는 동작을 때마다 날마다 되풀이하여 이어가야 산 자다. 다시 말해 힘[생기]이 있어 움직여야, 움직여도 제대로 움직여야 산 자이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산 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즉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저절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저절로 살아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오늘날 대부분 아니 거의 전부의 소위 믿는 사람들,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진상대로 이야기하면 이들은 처음부터 믿지를 아니하면서도 믿는다고 착각하여 자기를 결과론적으로 속이고 있는 이들이 아니면 진정 믿었다 하더라도 결국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아 성경[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無知)로 인해 다시 말해 젖을 충분히 못먹어 마침내 “헛되이 믿어”[고전 15:2]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무서운 참극을 빚어내는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라”[:2] 하였는데, 이렇게 굳게 지키지 못하면 애초 믿어도 그것이 결국 헛되이 믿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구원을 얻지 못함이다. 즉 구원을 받았으나 그 구원이 헛되이 된다는 뜻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인데 믿음이 헛됨으로 돌아갔으니 구원 역시 헛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믿으면 구원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믿었으므로 구원된 것이다.

그러나 굳게 지키지 않음으로써 그 구원이 헛되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 했으니 “항상 복종함으로”[빌 2:12]써다. 즉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니, 지키는 것이 곧 복종이다. 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약 2:20,26]이라는 말과 같다. 영으로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으나 육[육체]으로는 아직 하나 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육으로도 하나 되어 있는 상태가 “몸의 구속” [롬 8:23]이다.

이는 첫 사람 아담의 창조 당시와 같으니 ①자연계에 속한 몸의 창조, ②그 육체 안에 거하게 될 영혼의 조성으로써 인간의 이중 구조[육체와 영혼], ③에덴낙원 창설, ④에덴낙원에 들어가 신령한 몸으로의 변환, ⑤여자 창조가 첫 사람 아담 당시에 해당되는 순서라면, 우리는 ①자연계에 속한 몸 격인 현재의 우리의 죽은 자로서의 상태, ②성령으로 그리스도께서 임하심으로 그리스와 하나 됨으로 인하여 이중 구조[나와 그리스도 또는 내 영혼과 성령], ③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거기서 우리가 거처할 처소를 마련하심[요 14:2,3], ④몸의 구속, ⑤명실 상부하게[영으로도 육으로도]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 됨을 통한 영원한 짝으로서의 결성(結成)이 된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의 경우와 마지막 아담의 경우와 약간 차이가 있는 것은, 전자에서는 ⑤이후에 시험 무대가 펼쳐져 그 결과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지만, 후자에서는 ③과 ④ 사이에 그런 시험 무대가 끼이게 됨이니 곧 이 세상이다. 시험하는 자도 같으니 사탄이다. 세상의 내용도 같으니, 선악과를 보암직하다 했으니 이는 “안목의 정욕”[요일 2:6]이요, 먹음직하다 했으니 이는 “육신의 정욕”[;26]이요, 지혜 있게 함직하다 했으니 이는 “이생의 자랑”[:26]이다.

그리고 시험하는 자 사탄의 경우, 전자에서는 아담보다 나중에 창조된 자로서 아담의 수하(手下)이었고 후자의 경우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이시나 사람[우리 인간의 대표]으로서는 사탄이 인간 위에 군림해 있는 현실에서 그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와 그 몸된 교회로서의 우리와의 차이가 첫 사람의 경우 남자와 여자 차이로서 대비(對比)되어 똑같은 양상을 띠는 것을 본다.

즉 아담은 사탄보다 먼저 창조되어 그 위에 있었으나 여자는 그런 영물(靈物)들보다 나중에 창조되었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사탄이 상대가 되지 않아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한 그대로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이 이 세상 지배자로서 우리 위해 군림해 있는 실정이다. 바로 이런 관계에서도 흡사하다기보다 똑같은 재연(再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의 영혼이 조성되고 에덴낙원이 창설되어 거기 들어가 신령한 몸이 되기까지의 간격은 우리로 말하면 성령으로 나서[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이 됨-고전 6:17] 몸의 구속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적 간격으로 나타난다. 이 기간에 우리는 아담처럼 스스로 범죄하여 죽음에 이를 것인가 아니면 거룩한 천사들처럼 되어 사탄 이하 악령들처럼 되는 것을 면하느냐가 결정된다. 아담이 범죄하지만 않았다면 우리 인간들 역시 에덴낙원에서 영물들이 걸러지고 솎아지고 추려진 것처럼 이 자연계에서가 아닌 거기 그 영계(靈界)에서 그렇게 걸러지는 작업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첫 사람 아담이 자기에게서 출생한 모든 인간들과 그리고 그 전에 있던 영물들을 함께 심판하는 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 자신이 범죄하게 되자 심판하는 자가 궐원(闕員, 缺員)이 되고 그 때문에 사탄과 악령들 일당은 아직까지도 세상에서 활동하는 꼴이 되어 있음이다. 재판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심으로 하여 심판자는 오셨으나 머리로서 오셨기에 그 몸을 구성하게 되는 교회가 그 숫자대로[지체 각 부분의 온전한 숫자대로] 채워져야 하므로 지금 그러한 완전한 숫자가 채워지기까지 대기 상태에 있음이다.

사탄은 그러므로 그러한 숫자가 채워지지 않도록 사력을 다하는 것이 오늘날의 그의 활동[인생들을 장악함으로써 믿는 이들을 시험하여 믿음의 대열로부터 탈락시키고자 하는] 양상이다. 그 몸을 구성하게 될 모든 지체들이 제대로 된 숫자로 짜맞추어질 때에는 그리스도의 모습[머리(그리스도)와 몸(교회로서의 우리들 각자)으로서의]은 완성되어 새 창조는 완료되고 마침내 그리스도께서는 재[심]판장의 자리에 앉게 되실 것이다.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 가까운 것을 보면 이제 그 때도 시간 문제임 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그 경륜과 섭리에는 한 치 오차도 없고 허술한 데가 없으시다. 시계바늘처럼 빈 틈 없이 정확히 돌아가는 시점의 연속으로 세상은 현재 진행되어 가는 것이다. 여기서 낙오하거나 탈락하지 않는 자 복이 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할 일이요 땅의 것을 생각할 것이 아니다[골 3:1,2].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일 일이다[:5]. 이런 사실을 대체적인 윤곽으로 정하여 마음에 담고 끈기 있게 성경을 읽음으로써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을 일이다. 첫 사람 아담이 애초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만 창조되고 영혼이 없을 때는 영생하는 자의 시각에서 보면 죽은 자였다. 물론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로 보면 산 자였으나 영생하지를 못하니 영생의 관점에서는 죽은 자인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 바로 이 죽음이 에덴낙원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다” 하고 경고하신 그 “죽음”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죽음의 세계에서의 일체의 세상 관심을 버리고 오직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할 일이다. 다시 말해 사람 살리는 일로서의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데에만 전심전력을 다할 일이다.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는 범죄라는 것이 없으니 자유 의지가 없고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개체적인 생명의 종료일 뿐 전체 종(種, 개면 개, 고양이면 고양이로서의)으로 말하면 신진대사(新陳代謝) 작용으로서 긍정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 의지를 지녀 자유 선택에 의한 행동이므로 영혼의 본질은 영원성에 있어 이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의 한시적 생명에 절대로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시한부(時限附) 생명을 극복하고자[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도] 자기 생명 보전에 급급하여 자기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니 이 자체가 영원한 생명의 법대로 하면 ‘죄’인 것이다.

그래서 이 “육신”[롬 7:14-8:13]을 성경은 “죄와 사망의 법”[8:2]이라 한다. 그래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한다”[히 2:15] 하는 것이다. 고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이 됨을 인해 죽었다가 살아난 자 인즉 죽음의 지배를 다시는 받지 아니하고 영구적으로 벗어났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므로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주관]하지 못할 줄을 앎”[롬 6:9]이라 함과 같다. 이와 같이 아무리 곱 백번 죽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다시 살아나고 산 자로서의 모든 영광을 남김없이 누린다는 사실을 잘 알므로 사자처럼 용맹해질 수 있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자연계를 먼저 지으시고 그와 대칭인 영계를 지으시게 된다. 자연계는 불교에서 말하는 덧없음[無常]의 대표적인 것이니 왜냐면 변천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자연계와 대칭되는 것이 영계(靈界)로서 ‘무상’과 대칭인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이다. 인간[아담]은 이 대칭되는 양면의 세계를 함께 다스리는 “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래서 함께 다스리려면 두 세계에 동시에 속해야 하므로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지으신 다음 나중에 인간의 영혼을 조성하신 것이다.

성경은 아담의 코에 하나님 친히 숨을 내쉬시는 것으로써 그렇게 하셨다고 했다. 즉 불어넣으신 생기(生氣)가 인간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영혼은 불멸이다. 말 그대로 불생불멸이니 영혼은 “영이신 하나님”[요 4:24]께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런 다음 이 영혼에 부합하게 영적인 세계를 창설하시니 곧 에덴낙원이다. 즉 사람은 이 자연계가 아닌 영계에서 살도록 되어 있으며 거기서 인간[아담]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것이다.

이렇게 영적인 육체가 됨으로써 영생이 가능하게 되었다. 영생은 그러므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닌 초자연적인 육체 곧 영적인 육체[신령한 몸]가 되어야 가능해지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 삶이 이런 육체가 영원성을 띠는 것으로 변함으로써만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럿이 함께 사는 것이므로 체계가 서고 조직을 갖춘 삶이어야 하므로 곧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든 피조물이 그 머리 아래에서 한 몸을 이룬 각 지체(肢體)가 됨으로써 바로 이런 이치로 여럿이 하나로 한 몸으로 움직여야 똑같이 평균되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음이다.

오늘의 인간고(人間苦)는 범죄의 산물(産物)이요 결과이다. 인간 구원은 범죄로 인한 현재의 불행으로부터 탈출하는 의미이므로, 인과론에서 원인을 규명해내면 결과는 나오는 것이고 원인을 제거하면 해답은 얻어지게 되어 있다. 먼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다시는 범죄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그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어 있다.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해 죽음이라는 비극적 참화가 생겼으니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의 요체이다. 단순히 죽지 않고 영생하자는 것이 목적일 수가 없다.

죽음은 결과이고 원인은 죄이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질 수 있는 영생이다.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범죄의 결과로 죽음이 왔으므로 이 죽음의 대가는 불변이기에 먼저 죽고 난 다음 다시 살아나야 하고, 다시 살아나게 되면 다시는 이전처럼 범죄하지 않는 것으로 해결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즉 구원의 줄거리는 두 가지이니, 하나는 죽지 않고 영생하는 것 그리고 범죄하지 않는 것이다.

둘은 불가분인지라 전자 없이 후자가 소용없고 후자가 빠지면 전자가 무의미하다. 아담이 죄로 인해 죽었고 죽음에 처해진 아담의 후손들이기에 죽은 자가 죽은 자들을 낳을 수밖에 없고 결코 산 자를 낳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현재의 상태다. 죽게 되어 있으면 반드시 죽고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이 법 정신이다. 만일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되면 질서 문란이 되어 그 법은 다시는 적용될 가치도 의미도 사라진다.

따라서 그 법이 그대로 활용되려면 죽게 된 자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 구원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는 결론이 된다. 방법은 오직 하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친히 그 어버이 자정(慈情)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것인데 그 살리시는 방법도 철저히 이 법질서 확립에서만 가능하므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각자를 위해 죽으신 다음 다시 살아나신 몸으로 우리 각 사람 안에 오셔서 영원히 나와 하나가 되시는 것으로써 이 난제(難題)를 푸신 것이다.

사람이 되시어 사람으로서는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까닭에 그 하나 되시는 이치를 따라 적법하게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다시 말해 그 하나 되심을 인하여 아버지 친히 아들을 살리실 수 있음이다. 이 다시 살아나심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으로 인한 결과이니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입증함이다. 그러나 그 스스로 살아나실 수 없고 아버지께서 살리셨고 이렇게 살리심도 하나님이시라고 자의적으로 마음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 되어 계시는 이치를 따라 합법적으로 살리심이었다.

왜냐면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이 나와 하나 되시기 위함이지만 나와 하나 되시기 전에 가장 먼저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나를 지으신 조물주이시므로 그 먼저 하나 되심이 우선이고 순서상 먼저 오므로 나와 하나 되심으로는 친히 죽으셨으나 아버지[하나님]와 하나 되심으로는 아버지께서 얼마든지 그 죽으신 아들을 살리실 수 있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은 이로써 그치지 않고 친히 내 안에 그 영으로 임하여 오심으로써 영원히 나와 하나 되심을 구체화, 실질화, 현실화하실 수 있음에서 드러난다.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있는 나는 과거의 그 ‘나’가 아니라 [일단 죽었기 때문에] 새로운 ‘나’가 되어 있음이니 이전과 같은 ‘나 홀로의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나’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혀 같을 수가 없다. 이전의 나는 ‘단(單) 나’이고 지금은 ‘복(複) 나’이다. 이전은 나 하나뿐이었으나 지금은 내가 ‘둘’이니 곧 그리스도와 나이다. 둘이 하나 되어 있는 구조다.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둘이 하나 되어 계시는’ 바로 그 모습을 따름이다.

그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과 같이 내가 너희 안에 너희는 내 안에 있다” 하셨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되어 있음을 적절히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래서 이렇게 전혀 다른 모습의 나 자신이기에 이전 것을 가리켜 “옛 사람”[골 3:9]이라 하고 현재의 나의 모습을 “새 사람”[:10]이라 한다. 별개의 존재다. 나는 그대로 ‘나’이지만 현재는 둘이 하나 되어 있는 관계로 아주 색다르다.

그래서 이렇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니 성령을 받음을 가리켜 “성령으로 난다”[to be born of the Spirit-요 3:5,6] 하고 다시 난다[거듭난다, to be born again-요 3:3] 하는 것이다. 과거 죄 짓던 나라는 것이 죽어 없어졌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구조로서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 되어 있는 터이므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갑과 을이 둘이 하나 되는 원리를 따름이다.

이리하여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상태로 나는 완전 복귀된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그리고 올바른 삶에 있어 선하게[모든 면에 좋은 것이 좋은 그대로] 사는 ‘일상생활’에 구원의 결과가 있는 것이지, 이런 진리를 모르는 세상 종교가 암중모색 중에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특정 ‘종교생활’을 영위함이 아닌 것이다. 즉 특정한 날에 특정 장소에 가서 특정인의 집례(執禮)로 특정 의식에 따라 일정한 예배를 드렸다고 하여 ‘구원 얻는 믿음’을 표시했다고 만족해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가르치시기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성령[Spirit]과 진리[truth]로 예배할 것이다”[요 4:24] 하셨다. “ 신령과 진정”이라는 우리말 번역은 이상의 핵심 의미를 간과하여 임의로 번역한 것으로서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는 해석이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바로 그 ‘영’으로써 그리고 진리 가운데[“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시는 분께서 오실 줄을 내가 아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요 4:25)이라 한 대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게 됨을 말씀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가 여기 이 산에서다, 혹은 예루살렘에서다" 하는 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하게 된다. “성전(聖殿)”이라는 특정 건물을 지어놓고 “여기서만 하나님을 뵐 수 있고 모실 수 있다” 등이 모두 같은 말이 된다. 믿는 사람의 그 육체가 성전이고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세상을 위한 제사장이고 그리고 그의 현재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고난의 표적과 대상이 되어 있는 몸 자체가 “살아 있는 제물”[롬 12:1]이다.

단지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절실한 필요에서 오는 것이다[히 3:12-14/4:1,11/10:23,24].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필요성에서, “약속하신 이는 신실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목적으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이는 목적이 분명하다. 단지 예배 차원에서 자기 믿음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물이 없다” 한 대로, 다시 말해 이 세상은 하나님 지으신 세계라고 해서 우리에게 호의적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해서[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라고 해서] 내 집 안마당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니 그것은 착각인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적지(敵地)다.

“원수”[마 13:28] 사탄이 이 세상의 지배자요 신으로 군림해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요 15:19] 하신 그대로다. 적지에서 우리는 전쟁 중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 하셨고 우리도 역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계 2:7,11,17,26/3:5,12,21/21:7].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세상을 악하다고 증언하는 까닭이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렇게 세상을 책망하시니까 미움을 받으신다 하 셨다[요 7:7].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도 유대인들을 악하다고 증언한 결과였다. 세례 요한이 미움을 받아 옥에 갇히고 목 벰을 당한 것도 옳지 않은 일을 옳지 않다고 말한 대가였다. 그렇게 말하지 않고 어찌 죄인을 회개시킬 수 있는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영생을 약속하는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오해하지 말 일이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일러주는 것이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불러일으키지만 그렇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은 증오심만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죄인임을 자각시켜 주지 않고는 상대를 구원함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즉 소수[경우에 따라 극소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절대 다수의 증오를 유발하는 것도 불사해야 하고 당연히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악령들이 “네피림”[인간 여자와의 관계에서 난 악령들(인간 남성으로 일시적으로 자신을 변환시켜)의 소생들-창 6:4]을 세상에 깔아놓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를 절대 다수로써 효과 있게 조성하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네피림”인만큼 일반인보다 여러 모로 출중한 데가 있어 세상에서 지도급 인사들로 대개 행세할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영향력은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지도자급 인물들이 모두 "네피림"이라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네피림”을 식별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만일 식별한다면 “네피림”은 “네피림”이 아닌 모든 인간족 즉 아담의 후손들을 더욱 효과 있게 핍박하여 멸절시킬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사탄으로서도 자기네 “네피림”을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잠입시켜 혼란과 혼돈을 효과적으로 부채질할 수도 없게 된다. 또 그렇게 되면 하나님 쪽에서 보면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자들을 걸러내어 심판하는 일에서도 차질이 있을 수 있다. 때로는 핍박하여 멸절하는 것보다 이런 내부로부터의 혼란상이 더욱 효과 있게 믿음을 무너뜨리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을 사탄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사람”들이 공동의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모시고 서로가 각 지체 노릇으로 한 몸의 이치대로 교제[사귐]하는 것이 교회다. 각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있는데다 그 자리에는 당연히 머리이신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와 함께 성령으로 계시므로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요 20:21] 집단으로서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4:34] 부지런히 일하는 가운데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개별적으로 함께 사는[일하는] 각자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서 또한 교회를 이루어 함께 사는[일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다. 여기서는 변함없이 그리스도 친히 교회의 머리로서 성령으로 함께 계신다. “참으로 다시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19,20] 하신 그 대로다.

히브리서에서의 경고처럼 “매일 피차 권면함으로써” 혹 어찌 될까 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필수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과 같이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매일 모이기’를 힘쓰자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의 주님 말씀대로 하면 우리가 서로 모여 합심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심이 분명하다. 그리고 많이 모인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고 단 두세 사람이라도 함께 모인다는 것에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시는 것이 또 분명하다.

모든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다. 행하기 위한 믿음인 것이다. 사람은 믿지[신뢰하지] 않고는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근거를 찾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 얻는다는 것은 특정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고 시인한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다시 사신 것을 나의 죽음 가운데에서 다시 사는 것으로 수용하게 되면 이상 설명과 같은 나의 향후 삶 자체를 관장하는 지배원리가 되는 까닭에 그 믿음에 따른 행함이 필연적이 게 된다.

다시 말해 그 행동 여하에 따라 그 믿음이 단지 관념적이냐 아니면 자기의 심혼을 기울여 승복하는 차원의 것이냐 하는 것이 판가름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헛것이라 했다[약 2:20,26]. 이 믿음에 따라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이 그 대표적 ‘행함’이다. 따라서 ‘대신 죽으심’의 구원론에 집착하는 이들은 당연히 이런 행함 특별히 자기 부인에 대해 거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

짝 짓는 즐거움도 이제는 부정되고[마 19:12/고전 7:1-40] 먹고 마시는 즐거움도 기꺼이 버리게 되어 있는데[고전 8:13-“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 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할 것이다”] 축복이 스미고 깃들 수 있는 이 세상 삶일 리가 없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사람 삶의 낙이 식욕, 성욕 빼면 별로 남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것은 자연계에 속한 동물적 삶이 향유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동물이 아닐뿐더러 영적 존재의 훨씬 고차원의 생명의 향락이 있음이다.

그러나 지금은 영계가 아니라 자연계이고 신령한 몸이 아니라 자연계에 속한 흙의 육체다. 차원이 전연 다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로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이를 초월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이 ‘산 자로서 죽은 자’이다. 과거 즉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였다. 단지 산 자로 착각했던 과거의 삶이었다. 고로 목마르다, 죽은 자다, 병에 걸려 있어 성한 몸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어야 그리스도께 나아와 ‘죽음 가 운데에서의 다시 살아난’ 산 자가 된다.

사람들은 이 자연계에 속한 삶이 정상적인 삶인데 단지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장차 임할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모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인식을 뿌리째 뽑아야 구원이 된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배우지 않고는 아무나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는 말씀이 이 때문이다[요 6:44,45]. 우리 각자의 선택은 분명하다.
무릇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이마다 “하나님, 저는 이 자연계에 속한 생명만 살다가 마치겠고 그 이상의 것 즉 영원한 생명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는 것이 된다. 과연 그 소원대로 되고 스스로 선택한데 따라 그 운명은 결정된다.
[극소수이지만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모든 일에 절대 순종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외면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사랑에 의한 순종이지 지식이 아닌 것이다(고전 8:1,3). 대개 이런 사람은 세상의 관점에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는 이들[고전 1:26] 중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어 영원한 세계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동경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살고자 아니하고 이 세상을 도리어 미워하게 된다.

이것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경망하게 여김을[to be mocked] 받지 아니하시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 것이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른즉 거둘 것”[갈 6:7-9]이라는 의미이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본능 위주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삶을 말하므로 이런 삶을 선호하는 것이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람 사는 도리[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에 어긋나는 것이면 죽음의 고통도 불사하는 진리 사랑, 하나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 그것은 그 반대 방향인 자기 사랑 곧 자기중심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만 세상에 알려져 있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그 다시 살아나신 것은 세상의 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믿는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셨으니 그 승천하신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의 눈에 그 부활이 감추어져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직 그 연장선(延長線) 상에 있다'는 것을 가리킴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어 있는 우리 자신이 아직 그와 같은 죽음[과 그 영역인 고통, 고난]의 연장선에 역시 놓여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성경은 우리가 “죽었다”[골 3:3] 하고 “우리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 하는 것이다[:3,4].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죽으신 덕[은혜]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천국에서는 물론]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용납되지 못한다.

천국과 이 세상이 전혀 성질이 다른 두 세계인데 이 세상에서 잘 살기도 하고 천국에서도 잘 산다는 것은 조리에 닿지 않는 말이요, 이 세상에서 내로라하고 산다면 오는 세상에서는 그 반대이고 이 세상에서 천국을 위하여 즉 천국 구성원들 만들기 위해 수고하는 이들만이 천국에서 삶의 낙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웃는 자 화가 있고[눅 6:24] 우는 자는 복이 있다 하셨으며[:21] 이 세상에서 부유한 이는 이미 자기 몫의 위로를 다 받아버렸으므로 오는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위로가 없다 하셨다[:25/16:25].

부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다 소모하였으므로 고갈되어버린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이 엄숙한 이치를 알리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우리들 믿는 이들도 그리스도의 육체로 살아나심은 보지 못하고 오직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임하시는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부활의 성경 기록을 믿는 고로 관계가 없다. 이는 우리가 영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나 있어[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여 한 영이 되어 있는”(고전 6:17) 사실이 우리의 성령 받음이다] 산 자가 되어 있으나 육체로는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으로 아직 있지 못하므로 죽음의 몸 즉 죽은 자로서 “죽어 있기”[골 3:3]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육체로는 아직 하나 되지 못한 상태다. 즉 모든 인생이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을 하고 있는 한은 “죽은” 자이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은 즉은 자 그대로이기 때문에 죽은 자이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산 자로서의 죽은 자이다. 산 자이지마는 죽은 자의 모습으로 있어야 죽은 자들을 구원해낼 수 있는 까닭이다. 고로 부득이한 일이지만 그러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큰 보람으로 자진해서 이 일에 뛰어들고 있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을 보는 순간 그 때는 우리의 몸도 그런 몸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이유다. 부활하신 직후 제자들은 그러면 어째서 보았던가, 그 때는 아직 하늘에 오르시기 전의 일이다. 그러면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은 왜인가, 그것은 해보다 더 빛나는 광채로만 보았지 실제의 모습은 감추어져 있어 실제의 그리스도의 몸은 볼 수 없었던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  단순 명료한 구원의 말씀

사람이 아무리 인위적인 교리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하는 일이 있어도 그래서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을 막아 사탄이 구원에의 길을 차단한다 하여도, “어린 아이들”[마 11:25]에게는 충분히 구원 받을만한 메시지가 되고도 남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면 “영이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요 4:24]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성령은 우리 모든 믿는 각자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요 진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정착되어져 있는 것이므로 그리스도 친히 진리이신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면 되는 일이요 오직 문제는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임하시는 것을 영접하여 모시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진리를 따라 행할 수 있는 순종이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니 이 순종은 사랑에서 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으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롬 5:8]에 대하여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니 이는 어린 아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 사랑이다. 곧 하나님의 모든 뜻[말씀]에 순종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말로는 물론 사랑한다고 하고 또는 자기 나름의 행동으로 그 ‘사랑’을 나타낸다고는 하나 어린 아이 같이 순수하게 사랑하는 이는 적은 것이다. 어린 아이라도 사랑은 할 수 있으니 어린 아이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나, 주님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 경고하신 대로, 경고하실 정도로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인 것이다.

왜냐면 교만이 그 걸림 돌이기 때문이다. 빈부귀천, 유무식을 막론하고 이렇게 교만이 그 어디서나 발견되는 현실이다. 일자무식의 거지라도 교만하기는 마찬가지다. 또 개중에는 어린 아이처럼 겸손한 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이 구원의 대상이다. 모든 범죄가 이 교만에서 오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엄마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 랑과 신뢰로 일관한다.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시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다”[요 5:42] 하셨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신의 근본적인 특징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14:31] 하셨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한다”[5:40] 하셨으니, 영생을 원하지 않는 자 누가 있으랴마는 영생은 원하되 자기중심으로써 원하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으므로 '하나님 중심으로' 원하지 않는 것이다. 피조물과 조물주 하나님과의 사이가 ‘머리와 몸’의 관계인데 머리를 인정하려 들지 않으니 그런 자기중심으로 영생해보아야 에덴낙원의 인간 비극이나 이 세상에서의 첫 살인극처럼[가인이 아벨을 죽인] 생명 세계를 생명의 낙 대신 죽음의 고통으로 물들일 것이니 그런 이들이 생명 세계에 용납될 리 없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걸러지고 추려지고 솎아내게 되어 있다. 영생은 원하면서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를 사랑하는 하나님 아들의 그런 사랑이 자기 생리에 맞지 않아 그래서 기피하고 싫어함이다. 엄마와 아기 관계에서 아기는 엄마 품속의 존재다. 우리 피조물은 영원히 그러하다. 그러므로 아기 자신이 자기를 위하지 않으려 하고 위할 수도 없는 것처럼, 영원히 우리 피조물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하심을 받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위할 필요가 없고 오직 하나님을 위할 뿐이니 이렇게 머리되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몸의 각 지체로서의 역할을 분담하여 이웃에게 봉사는 것을 가리켜 “보내심을[머리로부터]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기본 원리다. 둘이 하나 되는 이 원리가 사랑의 원리로서 항상 한 몸의 원리로 설명된다. 남녀 한 몸이 되어 한 몸의 원리가 아니라, 둘이 하나 되든 여럿이 한 머리를 모시어 하나가 되든 모두가 한 몸의 원리다. “어린 아이 같이 됨”은 무조건 머리의 지시를 따르고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이다. 고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라”[요 5:38] 하신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이의 그 보내심 받은 뜻대로만 하는 즉 자기중심이지 않고 오로지 머리되신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이시는 것이 자기중심인 자기[믿지 않는]와 맞을 리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한다 ”[:41] 하셨다. 사람의 영광은 자기중심의 영광이다. 스스로 얻으려는 영광이다. 스스로 구하지 않고 주시는 이의 것을 받아 누리는 영광이어야 한다. 나는 따라서 오로지 내 영광을 스스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상대의 영광만을 구하게 된다.

이것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다. 때문에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 하신 것이다.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벌써 심판을 받은” [3:18] 것이다. 따지고 캐고 묻고 할 것이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사탄 및 악령들의 속성 그대로를 드러냄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만드실 리는 없다.

오직 그 자유 선택으로 그런 성향을 자기 의지를 따라 후천적으로 나타냄이니 선천적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한번 자유를 주신 후 그 자유를 간섭하거나 강제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새 창조다. 단지 처음 창조에서 야기된 차질과 손상을 보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면 그냥 ‘구원’으로 그치겠지만 그 첫 창조를 폐하시고 아주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각 사람과 하나 되시는 크나큰 변혁인 것이다.

형태는 이전 것 그대로이나 실질적인 내용은 완전히 다르므로 ‘창조’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즉 우리 각자와 함께 하시는 차원에서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치르시고 이루신 것을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통하여 실제 내가 이룬 것으로 적응시켜 내 자신이 그렇게 치른 것이 되도록 만드신 구조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이전 피조물로서의 모든 것이 종료되고 폐기되어 매장된[장사된] 것을 말한다.

다시 부활하시는 것은 이전 것과는 전혀 다르게 새롭게 다시 나는 것 새 창조를 의미함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구원 문제 즉 내가 구원되었느냐 혹은 아니냐, 내가 계속 이 나의 구원에 집착해 있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하는 따위 쟁론에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는다. 죄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음 즉 죄에게 매여 있지 않음을 말한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에게 계속 매여 있지도 않으므로 이 세상 신의 부단한 공격 즉 시험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닌가.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의 약속" 등등의 성경상의 표현은 아담과 달리 우리는 죽음에서 출발하여 구원의 절대적 필요성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새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고로 아담이 그 자신의 생명을 지켜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롬 6:4]의 소유자로서 이 생명을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가 "우리 구원을 이룸"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아담은 불행히도 그 생명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를 팔아 넘긴 꼴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죄 아래 팔렸다” 한 것이다[롬 7:14].

사탄이 자기 위에 군림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아담을 그 본시 신분이 자기네와 같은 영계가 아니고 자연계 출신이라고 해서 경멸하고 조롱하여 마침내 그런 얕잡아보는 교만 가운데서 죽음으로 유인한 것을 기억하셔서 그런 것은 아니나, 어쨌든 그런 뜻도 포함되는 것처럼 되어 우리를 당장 하나님의 아들로서 낳으심이 우리의 새 창조다. 곧 하나님의 영을 ‘물려받아’ "우리 속에 하나님의 씨가 거하는"[요일 3:9] 현실로 바뀌어져 아버지 친히 내 안에 계시는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친 아들이다.

양자(養子)이기는 하나 하나님의 친 아들임에는 독생자(獨生子)나 양자나 다름이 없다. 우리를 “말씀으로 낳으심”[약 1:18]이니 우리 부모가 우리를 낳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육체로 낳는 것은 물질적인 것을 기계적으로 낳는 것으로서 비록 부모자식간의 의를 끊는다 해도 그 부모의 그 자식임에는 변함이 없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실 때는 하나님의 “말씀”[요 1:1]이신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어 사랑의 교제[사귐]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런 인격과 인격 간의 관계는 ‘사랑’ 아니면 ‘원수’다.

그래서 적극적인 사랑의 교제가 없게 되면 이 부모 자식 관계는 여지없이 깨어진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 저것도 아니면 메스꺼워 토해 내게 된다[계 3: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수 ”[빌 3:18]로 행하게 되고 그 종국은 “멸망”[:18]이다.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게 된다[롬 6:6/10:26,29].

고로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당히 행세하는 것이 ‘군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래서 그 위엄과 권능 앞에 그 신분을 아는 귀신들은 모두 창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인간 앞에서는 지극히 겸손하신 낮은 자의 자세로 임하셔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맛보신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 그리스도와 함께 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함께 된 당당한 아들들이지만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지만[히 2:11/요 20:17], 주님과 함께 된 고난의 종의 모습[히 5:8]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몸에 채움이니 곧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어"[사 53:12] 그 범죄자로서의 저주와 고난을 받음이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능력 있고 역사함이 많은 기도가 되는 것은, 바로 이같이 우리 자신이 그 제물[롬 12:1]의 소임[所任]을 다하기 때문이다.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사 53:12] 함과 같다. 그러므로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는, 내가 스스로 원하여 받는 고난이니, 의연히 그 고난을 받고 견딤이 우리의 마땅한 본분이다.

주님께서 고난 받으시는 그 과정에서 얼마나 당당하셨던가. 운명하시는 때에도 당당하셨다. 그러므로 이를 지켜 본 백부장은 "실로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막 15:39]고 진심으로 토로한 것이다. 우리의 당당함이 그렇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정상적이고 온전한 성숙된 믿음은 바로 이런 당당함에 있다. 약한 믿음에 혹 그런 의젓함이 약하게 나타날 수 있으나, 자기 안에 성령께서 계시므로 이런 당당함은 마땅히 나타내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해주시기를"[골 1:11] 바울이 "그치지 않고" 기도한 것이 그 때문이다. 이런 당당한 자세에 여전히 육신대로 살아 죄를 지을 수 없다. 당당한 자랑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할 수도 없다. 그런 명칭을 쓰기에 부끄러운 것이다. 분명히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자랑”[고전 15:31]이라 했다. 그 자랑을 두고 단언하기를 "나는 날 마다 죽노라!" 한 것이다.

얼마나 당당한가. 자랑은 당당함이다. 당당함이 없이는 자랑이라고 하지를 않는다. 육신대로 사는[롬 8:13] 것은 얼마나 비참하고 굴욕적인가. 기죽고 풀 죽어 거의 죽을 지경이라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한 것이다. 당당함이나 자랑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표현이요 자세다. 의젓함과는 천만리 거리로 떨어져 있다. 이런 비참 속에서 아직도 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여기심 받고 구원 얻었다고 주장하며 고집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이런 현실이 바울이 지적한 바로 "배도[背道-살후 2:3]이다. 그런 것을 믿는 사람 자신이 배도가 아니라 그렇게 일반적으로 가르치고 그것을 복음이라고 속이고 있는 전반적인 현상이 배도다. 그런 것을 믿음이라 착각하는 사람 자신은 아직도 구원이 무엇이지 믿음이 무 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그런 사람을 구원 얻은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풍조를 가리켜 배도라 한다. 역사 깊은 배도다. 진리인 것처럼 위장하여 뿌리가 단단히 박힌 전통을 자랑하는 배도다.

하나님 아들로서의 당당함으로 그 스스로 자진해서 취하는 고난의 삶인데, 육신대로 살아 육신에 매여[롬 8:12] 살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육신에 매여 삶으로써 육신 앞에서 그렇게 비명을 처절하게 내지르는 법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 아들로서의 당당함과 육신에게 갇혀 내지르는 절규 속에서 몸이 양 갈래로 찢어지는 것과 같은 영적 상태가 어찌 하나님의 아들로 새로 창조된 모습일 수 있는가! 육신대로 살아 그렇게 육신 가운데에서 처절한 몸부림을 치는 것은 고난 받기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에 죄에 종 노릇하는 모습이다[히 2:15].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와는 180도로 다르게 그 죽음의 고난을 스스로 취하려는 자이다. 스스로 취하므로, 당당한 것이다. 당당함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특권 의식 같은 것이다. 자유인으로서의 당당한 긍지다. 사람들을 살려내겠다 는 불 같은 의지가, 그 열정이 마침내 그렇게 일을 저지르는 순간에 그로 하여금 양 발로 딱 버티고 서 있게 만든다. 누가 그것을 막으랴.

이것이 주인 의식이다. 만유의 상속자로서의 주인 의식이다. 어느 토기장[土器匠]이 말하기를, "우리 엄친은 토기장으로서 불 때다가 돌아가셨다. 나 역시 그렇게 일하다가 장엄하게 생을 마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장엄하게 죽겠다는 그 "장엄"이라는 표현이 여기서의 '얼굴'이다. 자기 직업에 대해 얼마나 당당한 자부심으로 매일을 신바람 나게 살았고 또 이를 느끼기에 그런 표현이 나오겠는가! 바울은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라서 불철주야 각고면려(刻苦勉勵)하는 이들에다 우리 믿음의 달음질을 하는 사람들을 견주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함이니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는"[고전 9:25] 것이다 했다.

바로 그 차이뿐임을 강조했다. 각고면려함은 똑같으나 하나는 영원한 결실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으로 끝나는 그런 차이뿐이다. 하나님의 일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마치 구원 얻으면 천하를 이미 다 얻은 것처럼 천하 태평으로 세상 일에나 몰두하며 세상 사람들과 아무 다름 없이 자기 욕심 다 부리면서 하나님의 축복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구원이라 착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의미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바울은 "내가 다 이루었다 함이 아니요 오직 푯대를 향하여 우승하는 자가 뛰는 것처럼" 아직도 여전히 일관되게 달려가고 있다고 이를 표현한 것이다[빌 3:12]. 위의 그 토기장처럼 우리도 말할 필요가 있다. 아니, 그와 같이 매일 생활할 필요가 있다. 필요보다 그리 되어야만 마땅한 일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그리스도처럼 장엄하게 죽지 않으려는가. "다 이루었다"[요 19:30]ㅡ이 얼마나 장엄한 한마디이신가.

이상의 사실로써도 나타나듯이 세상 종교는 단지 피조물의 영역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은 창조자의 영역으로서 창조이다. 따라서 피조물의 관점으로 구원을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각자 자기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이해할 수 없음은 무리가 아니다. 은혜로 믿음으로써 구원 얻는다는 사실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내용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 종교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자기 구원을 목표하며 나아가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저 높은 곳에서부터" 내려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목표하여 하나님의 일에 온 몸을 던져 만신창이가 되어도 굴하지 않고 이루어 가는 의욕의 충천(衝天)함이다. 우리가 구원 얻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단순히 그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서 그 보내신 바 사명을 수행함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거룩하라[벧전 1:16], 거룩함의 열매를 이루라[롬 6:22] 한다고 자기 스스로 성결을 이루기 위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처음 우리가 죽은 상태에서 우리 구원을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있었던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아 산 자가 되고 나서는 우리 스스로 우리 구원을 이룬다는 것과는 의미가 아주 판이하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된 것이 아닌가. 거룩함도 이미 우리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그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믿고 그 거룩한 상태를 계속 유지 존속시켜 나가면 되는 것이니 우리의 구원을 믿는 것과 똑같다.

내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은 없다. 구원도 거룩함도 현재의 구원 받은 상태 즉 산 자가 되어 있는 것, 거룩해져 있는 것, 자기 부인이 되어져 있는 것을 계속 유지해가는 바로 그것이다. 계속 유지해간다고 해서 또 그것이 목표로 정해져 있다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보내심을 받은 그 목적을 이루는 그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거룩함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모습이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상태이다.

거룩함이란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사는 것이니[고후 5:15],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함과 같이[롬 14:7] 자기 부인이 거룩함과 같은 뜻이다.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 거룩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의 다시[거듭] 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조적으로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현실이다. 이 현실을 믿는 여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 자체는 아무리 더럽지 않고 깨끗하나 그것을 더럽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더러운 것이다[롬 14:20-23]. 인생 구원은 이미 완성된 것이나 이를 믿지 않는 자는 아무 효험이 없는 이치와 같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미 완성된 구원"으로 발효되지도 않고 통하지도 않는다. 그 "이미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전혀 의미가 없다.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자리에 들어서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거룩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거룩함을 이룰 수도 없다.

이것은 세상 종교와 같은 자기 세뇌, 자가 최면과는 다르다. 사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요구되는 것과, 진리가 아닌데도 진리처럼 믿어 자기를 기만하는 것과는 전혀 같지 않으니 둘을 혼동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미 이루어진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 사실의 엄청난 파급 효과가 믿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 이루어주신 구원이 새 창조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창조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처음 창조에서와 같이 한결같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그 말씀을 신뢰하지 않음으로써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사망[死亡]이라는 이 비극적 현실에서 구원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여기서 구원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원히 사랑하는 것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지 않고 그런 조건을 달지 않으면 첫 사람 아담의 행위를 되풀이하는 것이 될 것이므로 구원의 의미가 전혀 없게 된다.

우리를 구원하신 원동력이 사랑이다.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의 사랑이 아닌가.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그 증거를 두고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여전히 첫 사람 아담의 범죄와 죽음의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라는 보증이 되는데 이를 누가 방치해두려 할 것인가. 따라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랑을 보이는 사람에 한한다. 그리고 그 처음 사랑을 도중에 버리면 부르심은 받았으나 택하심은 받지 못한 결과가 된다.

택하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될 것을 미리 아시므로 그래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것을 보시므로 택하실 필요가 없어 택하시지 않음이다. 택하신다는 것은 그 믿음대로의 결실을 제대로 이룰 수 있도록 사전 조처를 취해주심을 말한다. 가령 주님 오실 때에 구원 얻기로 그렇게 택해진 자가 있으면 그가 온전히 구원될 때까지 주님의 오심을 일정 기간[시간] 늦추어주시는 그런 의미다.

그러면 왜 믿음을 중도에 버릴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불러주시느냐 하면, 공평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떻게 되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니 피조물 그 자신도 알지 못하고 오직 현재는 명백히 믿고 있고 순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은 믿으나 장차 어찌 될 줄 몰라 전전긍긍해할 필요도 없다. 왜냐면 하나님의 미리 아심도 각자 그 자유 의지대로 나타내는 것을 처음부터 아신다는 의미뿐이므로 자기 믿음이나 사랑이나 순종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그 누구의 간섭을 받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로 오로지 힘써 자기 마음을 지킬 일이다[잠 4:23]. 자기 마음을 지킴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지 못했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더욱 힘써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한 것이다. 굳게 했음에도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지”[:11] 못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사랑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자동적인 것도 아니다.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다. 즉 언제든지 버릴 수도 있고 유지할 수도 있는 완전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바탕에서 진행되는 것이 사랑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사랑하다가 그 사랑이 각종 시험에 의해 첫 사람 아담처럼 변할 수가 있는 터이다. 따라서 택하신 자라는 것은 그렇게 자기 의지로 그 사랑을 끝까지 지속시킨 결과를 나타내는 경우다. 이 끝까지 사랑을 지킨다는 것은 물론 끝까지 그렇게 지키도록 하나님께서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시는 것이 될 리가 없다. 간섭하시는 순간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단지 하나님은 그렇게 끝까지 사랑을 견지할 것을 미리 보시고 아셔서 그 미리 아신 것을 바탕으로 그 사랑 그대로 진행시키는 데에 그래서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도록 모든 것을 조정, 조절하시는 뜻이 "미리 택하심"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제에 의해 혹은 간섭에 의해 그 덕으로 영생하려고 하는 사람은 은혜라는 말, 믿음이라는 말을 다시 음미하고 공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단정하고 확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사람은 구원하실 의지가 없으시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하신 모든 것이 우리 구원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고전 2:9/약 1:12].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그래서 이웃을 사랑함이 없이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이 지어낸 교리가 육신대로 사는 것[롬 8:13]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받는다는 맹랑한 소리다.

그런 억지 주장으로 나가려니까 당연히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속으로도 그것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이므로 이 "미리 택하심"을 자기 구미에 맞도록 해석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절대적인 의지로 아무 조건 없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구원하신다 즉 남들은 다 안믿어도 믿게 하셨다는 그래서 심지어는[그 논리대로 하면 의당히]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것이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하는 데 능수(能手)이다.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성경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이미 그런 말씀의 혼잡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처럼, 천하를 속이는 자 사탄의 속임수가 원래부터 진실에 가깝게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유혹하는 까닭에 이런 사태가 지금고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선물이라면 사랑도 순종도 그러하여 완전히 인간 로봇으로 만드신다는 말이 아닌가!

부르심과 택하심이 있는 것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다는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앞에서 "제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자는 그 누구든 차별 없이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다시 말해 그 사랑이 중도에 가서 변할 줄을 알고 계시더라도 다 포용하심이다. 택하심이 미리 아시는 지식에 의함인 까닭에 혹 하나님의 그 미리 아심이 적중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그런 마음도 있으실 것이라 하면 너무 지나친 억단일까. 감히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폄훼하는 생각일까.

어쨌든 사랑은 항상 그 특징이 현재이다. 미래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다. 현재 사랑을 고백하는 이상 그리고 그것이 진심인 이상 거기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 그 자리에 이미 구원은 자리잡고 있는 것이고 그 누구도 이를 흔들 수 없고 뒤집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현재'가 시간이 지날수록 별다른 즉 처음과는 다른 '현재'로 바뀐다는 것이 비극이다. 바뀌지 않고 변함없이 '처음처럼'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 현실의 문제는 그 누구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사랑이 기계적이지 않고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닌 이상 계속 그러하다. 그럼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있는가. 나의 미래를 확언하고 미리 단정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아무도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할 사람은 없다. 왜냐 하면 항상 오늘 이 현재만을 장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험하는 자가 있고 거쳐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 있는 이상, 이 세상에서는 항상 그렇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 것 외에는 방도는 없다. 이 세상이 끝나고 영원 세상이 오면 그런 시험이 없다고 하셨으니까 그런 줄로 아는 것뿐이다. 이 세상에서 걸러질 것은 다 걸러졌고 솎아낼 것은 다 솎아졌기 때문이다. 이 세상 신(神) 사탄은 바로 그 역할을 하는데 일조한 셈이다. 자기 자신은 자기의 자유 의지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것이나 하나님께서 그런 그를 오히려 활용하신 결과다. 무릇 누구든지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일이다[히 10:31].

각자 자기의 구원을 이룬다고 혼자 팽개쳐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입학 시험을 치른다고 답안 작성하는 아이들 주위로 그 아이들의 성공 여부에 조바심 치는 많은 사람이 주위에 모여 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아이의 시험을 대신 치러주는 이는 없다. 마음 같으면야 당장 그렇게 하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야 입학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자기 실력을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신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 것이 바로 그와 같다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 "실력"은 다름아니라 하나님 믿고 사랑하는 데에서 우러나는 순종 유무이다.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되는 바로 그 순종[히 5:8],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서 걸어가신 그 길, 우리는 바로 그 발자취를 따라 뒤이어 가는 즉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과 함께 하는 걸음걸이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과 우리가 시험 받는 것과는 그 양상이 다르다. 즉 함께 하신다고 우리가 시험을 면하는 것도 아니고 감히 사탄이 범접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 신 사탄이 우리를 범하는 것과 시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악한 자가 우리를 건드리지도 못한다"[요일 5:18]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하나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다. 바로 이 하나 관계가 정상적으로 되어 있는가를 두드려보고 당겨보고 밀어보고 심지어는 망치로 때려보기도 하는 것이 시험하는 자의 시험인 셈이다. 평소 자기 연단을 게을리 함으로써 즉 바울이 피력한 대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고전 9:27] 일을 소홀히 하여 육신대로 사는 것이 나타나 있을 때 단번에 첫 사람 아담과 같은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런 경우에는 이 세상 신이 와서 우리를 “만지는” 정도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히 6:6/10:26,29] 것이 됨이다. 순간의 일에 만사가 망쳐질 수 있다는 엄중한 교훈을 우리는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의 범죄로 실감하고 있는 터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경고를 받았을 때 아담이야 장차 한 순간에 그 선악과를 입에 넣고 씹고 있을 것이야 꿈에라도 상상했겠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자로서 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인 줄 아는 자로서 누가 그렇게 막된 짓을 하겠느냐 할 것이다. 주님 비유에 말씀하셨듯이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에게 하지 않은" 그것이 바로 그런 행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롬 8:7] 육신의 일을 그대로 행할 때 곧 자기중심일 때 바로 그렇게 된다. 그 주님 비유에 나오는 멸망에 처해질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저희들이 언제 주님을 박대하고 소홀히 대접하였습니까?" 하고 자신 있게 항변할 정도의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 스스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함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하고 있었으니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육신대로 사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이 “죽는”[:13] 일인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심판대에 이르기 전에도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히 10:27] 그런 경우가 있다. 사람 따라 가지각색이므로 일률적으로 자기의 행위를 모르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 대목은 그런 개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은 없다. 믿어 주님을 사랑하고 성령을 그 안에 모신 사람들을 두고 하는 경고이다. 불행하게도 그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절대로 하나님께서 좌지우지하여 간섭하실 수가 없다. 위에 말한 학생들의 시험 치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내 마음은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잠 4:23].

하나님 친히 내 마음을 지키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간섭이 된다. 또 그렇게 되면 사랑이라는 것부터가 성립될 수가 없다. 이렇게 간섭을 하시거나 막아서 될 일이 아니고 완전히 우리에게 일임하신 상태이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게 되는 일도 벌어지는 것이다. 내 스스로 지킴으로써 되는 일이나 이를 내 공력(功力)이라 능력이라 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그러하다. 하나님의 주신 선물로 내가 생겨난 것이지 [나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내 스스로 생겨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나님 주신 것이니 하나님의 것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할 일이지 왜 건방지게 자기가 자기 것인 양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인가.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의 어리석음도 범죄한 아담의 어리석음도 이런 교만에 있다. 교만은 일종의 "미친 마음"[전 9:3]이다. 미칠 이유가 없는데도 과도한 자신감이 각자를 미치게 만드는 것일까. 우리의 새 창조에서도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지키고 내 마음을 지키고 내 믿음과 사랑과 순종을 지킬 충분한 힘을 공급하신 것이다.

따라서 내 힘이 아니니 오직 주님의 능력 그리고 은혜이다. 이치상으로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몸인데 내 것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무결하게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더구나 우리 구원은 하나님의 새 창조다. 새로 창조하시니 이런 인간 비극에 관한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을 더욱 완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 더 완벽할 수 없는 작품으로 완성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부족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계속 손을 쓰시고 간섭하셔야 되는 그런 것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 마음 하나만을 믿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 마음을 믿으시기 때문에 간섭하시지 않는다. 직접 간섭하시면 기계로 만들어 버리심이 되는데 그런 '마음'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신다 하겠는가. 오직 우리 마음 하나만을 기대하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즉 자기 의지를 따라 하나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마음, 아기가 엄마를 생각하듯 생각하는 마음 그 하나만을 바라보시고 인간을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을 기계적인 것으로 만드신다면, 인간 창조[더군다나 새 창조]의 모든 의미가 깨끗이 사라지는 판이므로 그렇게 하실 리가 없다. 육신이고 마귀고 세상이고 기타 모든 원수[눅 1:71]를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모든 능력을 모두 우리에게 주신 터이다. 여러 말 필요 없이 하나님 친히 내 안에 와서 계시는 터이다. 고로 모든 능력이다. 단, 나의 자유 의지만은 내 자주성, 독립성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나의 자유 의지를 시험하는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을 막으시거나 제지하시거나 그런 일은 않으신다.

만에 일이라도 내 자신 그 시험에 넘어가 첫 사람 아담처럼 하나님의 말씀보다 시험하는 자의 거짓말이나 속임수를 더 믿고 따르는 순간에서도 이를 억제하시지 않고 그냥 지켜보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켜보시는 그 마음은 과연 어떠하실까. 십자가에 다시 매달리시는 그런 고통이 아닐까. 그래서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으로 성령으로 표현하지 않는가! 그와 같이, 어찌 하실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 인간끼리의 사랑도 그런 경우 한번 변하기 시작하는 마음 억지로 붙들어 본들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런 배신을 당하는 본인 스스로가 잘 아는 것이다. 억지로 붙들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소용없는 줄 뻔히 알기 때문에 단지 속앓이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사랑이 아닌 것이다. 앞에서 자기 마음은 자기가 지킨다고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의미를 말함이다. 능력을 말함이 아니다. 지킬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것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지켜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단 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마음을 스스로 지키는 경우에 한하여 그렇게 막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심이다[빌 4:7]. 그러니 양면성이다. 내가 내 마음을 지키는 것도 사실이요 하나님 친히 내 마음을 지켜주시는 것도 현실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되어 나타나야지 어느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그 뜻이다.

§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면


참으로 인생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면 많은 사람이 그 어떤 것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당장 눈앞의 안락이나 쾌락을 위해 그런 영원한 것은 아랑곳도 하지 않는 괴이한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오늘날 세상 종교에 열심 내는 것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도를 닦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 버리고 그 삶의 낙쯤은 한 푼어치 가치도 여기지 않을 것이다. 가정을 결별하고 일체의 모든 것 다 버리고 불문(佛門)으로 들어가는 그런 정도의 열심이라도 없는가.

대학교수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모 대학 교수는 어느 고승(高僧)의 강의를 듣고는 그 길로 아내와 자식들을 다 털어버리고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버렸다. 그만한 열정도 없어 성경의 "자기 부인"이라는 한 마디에 맥을 못추어서야 어디 "하나님의 아들"커녕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칭호인들 감히 감당하겠는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고 하는 말은 왜 있는가.

이 말을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는 경고를 한 편지에서 함께 말했으니 이는 매우 의미가 깊다. 즉 그렇게 구원을 이룰 수 있는 힘이 내게 충분히 부여되어 있다는 뜻이다. 은혜로 주셨기 때문이다. 내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고로 이런 경고는 행위로 구원 얻으려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차도 주고 연료도 주고 단지 운전해 가라고 일러주는데 운전하기조차도 싫어 대신 운전해 주기를 바라는 망나니 짓과 같아야 하겠는가. 그런 사람을 구원하실 마음이 있으시겠는가. 당신이면 그렇게 하겠는가.

사람들은 여기서 의아하게 여길지 모른다. 즉 수도승(修道僧)들의 그만한 진리에의 구도자적 열정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지 않고 그런 곁길로 가도록 방치하시느냐 할 것이다. 영원한 가치를 욕구하는 것과 진리 자체를 알고자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다. 그 차이는 엄청나다. 전자는 자기중심의 욕구다. 같은 욕심이라도 영원한 것을 탐한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진리에 대한 욕구는 그런 욕심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시지 않고는 성령께서 인도하시지 않고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는 말씀 그대로다. 그가 만일 진리 탐구에서 그렇게 시작했다면 그는 미구(未久)에 반드시 하나님의 존재부터 알고자 하는 방향으로 틀게 될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 구원의 길을 갈망하는 것으로 고집스럽게 나간다면 이는 이미 한없는 자기중심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겸허하게 만물의 진상을 알고자 하는 것과 숫제 처음부터 하나님의 존재 여부쯤은 불문에 부치고 자기 스스로 진리를 찾아 대오각성하겠다는 것부터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는 척도(尺度)에서 이미 벗어나 있는 것이니 이것이 그 답이다. 단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사사로운 자기 욕망에도 그런 결단과 용기, 결의에 찬 의지를 단연코 나타내는데, 하물며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 자신을 영원하신 선물로 주시는 사랑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여 그 뜻대로 행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육신이 약하다"는 타령부터 할 것인가 하는 그 점이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한 몸 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해 '모두'가 '모두'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게 됨으로써 누구든 탐욕을 부릴 필요가 없도록 만드신 것이다. 모든 것이 자기 것, 자기 소유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실 때 모든 것을 소유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각자를 창조하신 것이다. 바로 그 설명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바로 이 목적 곧 우리 각자를 이렇게 새로 창조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  

§ 실감 나는 것


혹자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실감 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바울 같은 하나님[을] 사랑이 가능한가" 한다면 바울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사실, 따라서 "죄 용서가 많으면 사랑함도 많다"[눅 7:47]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으로 나타나는 내용이 내 골수에 그야말로 사무치게 되도록 수시로 명상하고 그리고 기도로 주님 앞에서 그 사실을 복창(復唱)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또 묻기를, "그러면 죄 용서가 많기 위해서는 미리 죄를 많이 지어두어야 한단 말인가" 할 것도 없습니다. 죄는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고, 질적으로 따지는 것은 죄와 죽음의 실상과 본질을 어느 정도로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르고 정확하게'라 해서 이에 대한 특별한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각자의 양심에 반영되어 있는 세상의 실상,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충분히 생각하면 할수록 밝아오게 됩니다.

죄는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일체의 언행(言行) 심사(心思)입니다. 그러므로 많고 적음에 관계 없습니다. 본질적인 것을 말함이니 "육신"[롬 7:14-8:13] 곧 죄의 몸[6:6]에 얽매여 있는 한은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으니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다. 용서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눅 7:47] 하신 것은 자기 죄를 느끼는 또는 통감(痛感)하고 자책(自責)하는 정도를 말씀하심입니다.


죄를 느끼면 느낄수록 자연스럽게 죽음의 실상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그만큼 더 넘치게 되고 사랑함이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이 반드시 사랑의 순종으로 결부되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고도 합니다. 죄를 죽음과 직결시켜 제대로 인식하게 될 때 우리를 위해 친히 죽음을 맛보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만큼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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