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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孟子]의 말
사람 사는 옳은 도리를 옛 성현 군자들은 가르쳤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방법'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런 것이 옳은 도리라는 것쯤은 사람마다 자기 양심을 따라 다 알기는 알지만 문제는 그 방법을 몰랐는데 이 방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 창조에 의해서만 가능하므로 그러하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길이다" 하신 것이다.
맹자가 양[梁] 나라 혜왕[惠王]을 보러 오니 왕이 반가이 맞아 말하기를, "이렇게 불원천리하고 오신 것은 장차 저희 나라를 유익되게 하려 하심이겠지요" 하니 맹자가 대답했다. "어찌하여 왕은 이익되는 것만 말씀하시는지요. 제가 말씀 드리려는 것은 오직 '인'[仁]과 '의'[義]뿐이외다[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하필왈리 역유인의이이의]" 하였다.
맹자는 다시 말하기를, "왕은 '어찌 해야 나라에 유익되게 할꼬' 하고, 윗사람은 어찌 해야 가문에 유익되게 할꼬' 하고, 아래 백성은 '어찌 해야 내 자신에 유익되게 할꼬' 하여, 상하가 모두 자기 유익만을 찾다 보면 나라는 위태로워집니다[王曰 何以利吾國 大夫曰 何以利吾家 士庶人曰 何以利吾身 上下交征利 而國危矣-왕왈 하이리오국 대부왈 하이리오가 사서인왈 하이리오신 상하교정리 이국위의]" 했다.
그래서 "사람 사는 도리"라고 앞에서 말한 것이다. 하나님 지으신 세계이니 그리스도를 알든 모르든 사람 사는 이치와 그 옳은 도리는 똑같다. 맹자가 한 말도 인간의 보편적인 양심의 소리를 따라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또 모든 인간이 그와 같이 양심의 가르침을 받아 그 인간 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고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맹자의 그 말을 듣고 혜왕도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즉 맹자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얘기다.
알아듣기는 했어도 그 때 잠시뿐이다. 세상 사람 누구나 그러하다. 성경은 바로 이 자기중심 즉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을 죄라 하고 악이라고 바로 지적해 주는 것이다. 이 자기중심을 척결하지 않고 자기 부인이 되지 않으면 맹자 공자가 말하는 이상향은 실현 불가능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양심이 명령하는 바로 이 같은 자기 부인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자신의 유익을 찾으면 다시 말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자기 욕심을 찾다 보면, 가정이든 사회든 국가든 망하지 않을 재주가 없다. 사람은 모름지기 올바르게[義] 살아야 한다. 그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한 몸의 이치 곧 공동체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의(義)이다. 한 몸으로서 사는 이치이기 때문에 이는 또 서로를 사랑하며[仁] 사는 것이다. 즉 한 몸의 이치에서 각 지체가 서로를 아끼며 위함이다.
각 지체(肢體)가 자기의 분신(分身)으로서의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仁)과 의(義)이다. 이것이 곧 양심의 소리이다. 하나님께서 각 인간 속에 그런 기계 장치를 설정해두셔서 그 경보음(警報音)을 내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성문화(成文化)한 것이 모세로 나타난 율법이다. 곧 "인생아, 주께서 선(善)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곧 주 하나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 義)를 행하며 인자(仁慈, 仁)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to walk with God]이 아니냐?"[미 6:8] 하심과 같다.
비록 세상 사람이 모두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기중심이지만 그래도 이러한 공동체 의식이 있어 그 인식도의 유무 또는 여하에 따라 국가 사회의 부침과 기복이 대개 정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인식이 강한 민족일수록 그 수명도 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옳게 사는 도리(義)가 한 몸됨을 인식하는 공동체 의식인데 무릇 공동체에는 모름지기 그 머리가 있게 마련이다. 가정에 가장(家長)이 있고 단체에는 장(長)이 있고 나라에는 국가 원수가 있다.
그러면 이 우주에는 반드시 조물주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즉 머리 없이 제아무리 한 몸임을 주장하고 고취해 보아야 그 옳은 도리가 먹혀 들지를 않는다. 그래서 위의 말씀에서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그래서 공자나 맹자나 그 사람 사는 도리를 아무리 외치고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그 말을 모두가 옳은 줄은 알아들으면서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옳다고 여기지 않는 자 없었던 것은 그것이 각자의 양심의 소리와 일치하기 때문에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감히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공맹(孔孟)의 도(道)가 모르는 것을 일깨워줌이 아니라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단시 환기시켜 주는 것이어서 별달리 흥미가 가지 않고, 머리는 말하지 않고 지체끼리만 통하는, 전체가 아닌 부분적인 것을 말함으로써 실익(實益)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유익이 없으면 내세에서의 약속이라도 분명해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모두가 인식한 결과다.
맹자의 말대로 사람마다 이욕(利慾)를 탐하는 것은 자기중심의 죄성(罪性)을 말함이고 이는 종국적으로는 파멸에 이르는 한없이 지혜 없음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어리석음 곧 자기중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자기 부인"밖에 없다. 불교 철학도 이런 관점에서 몰아(沒我), 무아(無我) 등의 표현으로 이를 설명하려는 것이니, 이는 모두 하나님의 음성 곧 인간 양심의 소리를 벗어날 수 없음을 가리킨다.
과거 역사의 교훈에서 우리는 그 생생한 교훈을 얻고 있다. 임진란 당시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대조적인 인식과 사상, 인생 철학이 빚어낸 결과가 상대적인 명암(明暗)으로 너무나 선명하고 극명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공 순신의 철두철미한 생활 이념인 공동체 의식 즉 '우리' 의식에서 그 '머리'의 역할을 하는 군주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로 철저했는지 알 수 있음은 퍽 흥미로운 일이다.
즉 이공은 그 전란의 혼돈 속에서도 임금의 제일(祭日)에는 반드시 그 날을 기억하여 북향 재배(北向再拜)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 의식에는 그 같은 '머리' 의식이 필수적이고 필연인 것이다. 임금이야 잘났든 못났든 그래서 자기를 일부러 파멸시키려는 용렬한 군주이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머리로서의 대접을 함으로써 그 철저한 공동체 의식의 뼈대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보신을 하고 기회주의로 임하는 불순한 야심은 일절 없이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편단심으로 일관함으로써 그와 같이 그 한 몸으로 국가의 운명을 걸머지고 그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무인 출신이고 가는 곳마다 전승을 거둔 점에서도 같고 백성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은 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녔지만 개인적인 야심을 품었던 이성계와는 달랐다. 이공은 그런 사욕(私慾)이 없었다. 그렇게 전란 중에서도 임금 있는 곳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충성심에 그런 사사로운 욕심이 들어올 수 없었고, 바로 그런 철저한 공동체 의식이 그로 하여금 두 번씩이나 한반도를 중원 천지까지 포함시켜 일대 위기에서 구출하는 위업을 성취한 것이다. 곧 한산도 대첩과 명량 해전이다.
반면 '나'원균[자기중심의 측면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예외없이 원균이라는 뜻이다]은 범인으로서의 평범한 자기중심 성향을 그대로 노출시켜, 그런 이욕(利慾)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해독을 끼쳐 자기와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 한 나라 전체, 한 세상 전부를 파멸에 몰아 넣을 수 있는지 그 실례를 유감없이 드러내어 입증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삶의 뼈대는 '인'과 '의'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류 사회라는 거대한 한 몸을 이루어 있는 각자 즉 모든 지체가 마음에 아로새겨 각기 자기 소임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머리'의 책무다. 고로 구원은 지체(肢體)된 개인의 소관사가 아니고 '머리'되신 하나님의 일이다. 조물주 하나님의 일은 바꾸어 말하면 창조의 역사(役事)다. 즉 새로운 창조가 아니고는 현재의 불행으로 얼룩져 폐기될 운명에 처해진 인생을 구원할 방도가 아주 없는 것이다.
'머리'는 하나뿐이다. 이렇게 자연만물과 그에 딸린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자연법칙 아래 움직인다는 것은 머리로서의 조물주께서 단 하나이시라는 증거이다. 만약 둘 또는 그 이상이 독립적으로 또는 독자적으로 움직인다면 이런 일률적인 규칙성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머리'로서의 역할도 또 그 '머리'가 나타내는 구원도 오직 하나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둘이시니 곧 아버지와 아들로 계신다. 그러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둘이 하나되어 계심이니 이를 "하나의 하나님"[One God]이시라 하는 것이다. '한 분의 하나님'과는 완연히 다른 개념이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이질적인 것이면 안된다. 동질[同質]의 것이어야 머리와 몸으로서의 원만한 기능이 가능해진다. 고로 우리가 사람이므로 우리의 머리되시는 이도 사람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어 주신 것이다. 하기야 조물주와 피조물은 동질이지 이질(異質)이 아니니 조물주에게서 피조물이 창조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 즉 새 창조에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애초 산 자로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이 범죄로써 죽은 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 친히 그 같은 '산 자[인간]'가 되시지 않고는 그래서 그 '산 자'로서의 영으로 우리 '죽은 자'된 각자 속에 영원히 계심으로써[그래서 "선물"이시라 한다] 우리 각자가 다시 '산 자'로 환원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고로 그 '산 자'는 '죽은 자'와 동질로서의 인간이지 않으면 안되므로 사람이 되신 것이다. 조물주로서의 얼마나 크신 은혜요 어버이로서의 사랑이신가.
과거에는 인간이 영계인 에덴낙원에 있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인간이 영계에 있는 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괴리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그 영계로부터 축출되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된 뒤로부터는 그래서 순전하게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면서부터는 조물주 하나님과는 원천적으로 분리된 것이다. 고로 이 머리와 몸의 관계가 복구되지 않고는 도저히 인간 삶의 행복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가장 첫째로 죽는 마당인데 무슨 행복이 있을 것인가. 행복은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 율법을 통하여 희생 제물의 위한 죽음이 상징했던 것과 같이 죽어야 할 것은 가장 먼저 죽음을 치르고 나서야 살든지 행복하든지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우리 위하신 죽으심이다. 이로써 죄의 대가[죽음]와 함께 죄의 뿌리 자체가 척결됨이다. 즉 죄에게 매여 있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됨이다[롬 8:2].
그런즉 이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육신이어서 죄를 짓는 죄의 노예가 아니라[7:24] 내 스스로 자유 의지에 의한 결정에서만 죄를 지으면 짓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처럼 자기 스스로 선택에 의해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불복하는 그런 원 상태로 복구된 것이다. 주님 말씀에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킨다" 하셨다[요 14:15,24]. 따라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 곧 죄다. 위의 말씀대로 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다.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 한 것이다. 곧 믿는 것이 주님 사람함이요 주님의 뜻대로 행함이요 그의 일을 하는 것이요 그 계명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런즉 믿는 자가 구원 얻는 것인즉 주님 사랑 않고 주님 뜻을 행하지 않고[마 7:21] "항상 복종"[빌 2:12]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을 버리는 행위이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함은 당연하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의 구원을 이루라"[:12] 한 것이다.
믿고 구원 받았으니 믿음이 사랑이요 복종이요 그 뜻 행함이니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 "구원을 이룸"이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고 멸망에 이른다 한 것이다[고전 16:22]. 이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강조한 바울 자신의 경고임을 명심할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 구원을 향유하는 모든 사람이 한 몸의 원리에서 각자 지체 역할을 하여 그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영으로 자기 안에 모시고 있으니 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이상향이 실현된 것이니 곧 천국,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인생 구원은 단순히 믿어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룬 이상적인 인간 사회를 형성하여 그 일원이 되어 그 지체로서의 구실을 다함 즉 '인'과 '의'를 유감없이 실천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역할대로 못하면 머리되어 주신 그 은혜를 멸시함이 될 뿐 아니라 스스로 그 한 몸됨에서 이탈함이니 그 스스로 자기 자유 의지로 결정하여 하는 일인데 이를 누가 막으랴. 아담처럼 생명에서 끊어져 죽은 자가 될 뿐이다.
"두렵고 떨린다"는 것은 항상 시험자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는 오늘날 이 세상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전철을 다시는 밟지 말아야 한다는 그 각오를 말함이다. 첫 사람 아담도 그렇게 해서 범죄하였고 악령 사탄의 범죄도 그렇게 자기중심으로 나간 끝에 되어진 결과인즉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내 스스로 잘못하면 나도 그들의 뒤를 잇는 어리석음에 얼마든지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의 인용 말씀에서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한 것이다. 겸손이라 하는 것은 교만하지 않음이다. 이 세상 신은 교만 때문에 그렇게 악령이 되어 있는 운명으로 자신을 함몰시켰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의 잘못될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두려워하고 떨어야" 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정상적인 "두렵고 떨림"은, 이 말을 하면서도 바울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빌 4:4) 했던 대로 항상 기뻐하는 가운데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 역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라 할 수 있다. 두렵고 떨라고 해 놓고는 같은 편지에서 금방 또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하고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고 힘써 강조하고 역설하고 있음이다. 이 모든 것이 꾸며낸 인간의 이야기이고 교리라면 절대로 이런 투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우리의 구원이 그 살아 있으신 하나님 말씀으로 되는 것이고 그리고 성경의 말씀대로 시험하는 자 사탄이 존재하여 항상 틈을 노리고 있다는 현실 앞에서 실상 그대로를 가감없이 그리고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말한 것임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나의 자주 독립성은 인격성을 지닌 내게 생명과 같은 것이지만 바로 이 자주 독립성 때문에 또한 사탄은 사탄이 되고 아담은 그 스스로의 불행을 자초하였으니 바로 이 자주 독립성이 야기시킬 수 있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좋은 것만 있지 않고 그렇다고 나쁜 것만 있지 않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도 그러하다. 좋은 것만 아니고 그렇다고 나쁜 것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물론 영원토록 즉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 '인'과 '의'를 행하고 이루면서 사는 것이어야 사람다운 삶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바로 이같이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인데 이렇게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데 어떻게 천국에서 살 수 있는가. 그래서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이 죽은 것이고 헛것이라고 야고보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없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심도 그 뜻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누구도 이 '인'과 '의'를 행할 수 없다. '인'과 '의'를 지켜야 한다고 알기는 알고 가르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행한다고 해도 그것이 '인'과 '의'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왜냐면 자기 부인이라는 토대 위에서 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모세로 나타난 율법이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먼저 있었던 것이다.
공자와 맹자 기타 그 누구든지 일찍이 인류가 배출한 그 어떤 인물이든 '인'과 '의'를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면 자기 부인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이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자기가 부인되어야만 달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주장하고 가르친 것은 외형상으로 나타나는 공동체 의식 즉 한 몸 의식의 중요성을 일깨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치유의 방책은 아니었으니, 그래서 이마저 힘이 들어 맹자나 공자나 모두 자기 뜻을 세상이 알아주지 못한다 하고 실의 중에 낙향하지 않았던가.
또 비록 그런 이상향적 인간 삶의 도리가 실천된다고 아무리 가정하더라도 그것으로 인간이 구원은 받지 못한다. 왜냐면 인간은 그 겉 모양만 보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그 진상과 실질을 아시기 때문이다. 사람 자체가 변해야 함이니 이렇게 되자면 다시 출생하는 즉 성령으로 나는 것밖에 없는 까닭이다[요 3:3]. 영생해야 사는 것이지 내일 일도 모르고 이 세상 지내면서 그런 사람 사는 도리만 붙들고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들 공맹(孔孟)은 현실에 입각하지 않은 이상주의자에 불과하고 그 말을 귀 담아 듣지 않은 당시대인들은 훨씬 현실적인 감각의 소유자였다고 할까. 공맹의 말이라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기계적으로 장치해 두신 양심의 소리를 되뇌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 '의'와 '인'을 행하지 않으면 영원토록 행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므로 그런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주님더러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마 7:21]. 항상 복종한다는 것이 바로 이 인과 의를 행함이다. 행하되 내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는 능력으로 행함이니 곧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 친히 사심으로써 그 인과 의를 친히 행하시게 되는 의미이다. 이것이 나의 "항상 복종"이다. 즉 머리를 각자 모시고 그 머리의 이름으로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한 몸으로서의 구조와 체제를 이룬 공동체로서 사는 삶이다.
한 몸의 이치에서 그 어느 지체가 자기 이름으로 움직일 수 있는가. 모두가 다 머리의 이름으로 하는 행동이 아닌가.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 안에 성령의 선물을 받아 모셔야 한다는 이치다. 그래야 구원이 되는 것이니 구원이 되어야 '인'과 '의'를 제대로 행할 수 있음이다. 천국은 '인'과 '의'를 행하는 사람들만의 세계인 까닭이다. 그냥 구원만 받으면 자동적으로 천국 간다는 발상은 얼마나 진리에서 동떨어진 인간 망상이요 교리인가! 이런 것이 미신이다.
그들은 구원의 복음이 아닌 미신을 믿고 있는 것이다. 미신은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을 실지로 그런 줄을 착각하고 믿는 일체의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이 세상을 주관하고 지배하는 이 세상 신으로 군림해 있는 사탄의 방해 공작 때문이다. 이 악한 영은 인간의 원수이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 '세상' 자체가 그의 주무기[主武器]이다. 그의 시험에서 이는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이다[눅 4:6,7].
무릇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는"[히 1:9] 자라면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 원수의 계략에 말려들 수가 없다. 죽기를 한하고 그의 기도(企圖)를 분쇄하는 것이다. 불의에 대한 적개심을 불 같이 태워야 하는 것이다.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아야"[계 12:11] 함이다. 다 같이 피조물이면서 내가 무엇 때문에 그에게 굽혀 들고 질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 나는 새 피조물이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자를 가리켜 요한 계시록은 "이기는 자[to overcome]"라 한 것이다.
이 세상의 실상, 그 정체를 잘 드러낸 표현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은 이 세상 신(神, 현재는 그러하나 원래는 범죄 이전의 아담 아래 있던 자)인 사탄의 마수(魔手)가 뻗치지 않는 데가 없어 완전히 그 장악하에 있으니 그리스도께 속하는 순간 그와의 대결[전쟁]이 시작되는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다. 첫 사람 아담이 그에게 무릎을 꿇은 것만 해도 원통한 일인데 나까지 들어 그 악한(惡漢)에게 굴종(屈從)하랴.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고 살아 있지 않는 편이 나으리. 하나님의 아들된 나로서 그런 불의한 역도(逆徒)의 수괴(首魁)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지혜는 그 겉 모양으로 드러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그 배경과 배후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다. 이것이 이 세상을 보는 지혜의 눈이다. 이 세상의 배후와 배경은 이 세상 신인 사탄과 악령들 일당 일색(一色)인 것이다. 이 세상 신은 가장(假裝)의 명수(名手)이다. 속이는 자의 특징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세상에 군림해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정의를 표방하고 있음은 무리가 아니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무엇이든 이를 볼 때 양의 탈을 쓴 이리로서 인식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그 탈만 보고 본다고 하지 말고 그 탈 속에 감추어진 이리를 간파하는 것이 식자(識者)의 눈, 배워서 아는 자, 알기 때문에 힘이 있는 자의 안목이다.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 사물의 이치를 모르는 이는 속이기 쉽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말이 옛부터 있는 것이다. 성경을 통하여 성령의 계시로 알게 된 것은 그 알고 있는 만큼의 지혜와 지식과 힘을 보유함이니 그것을 발휘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틀림없이 믿지 않는 불신자다. 머리 속에 입력만 시켜놓고 그것을 전연 활용하지 못하니 그러하다. 그 경우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나 당신은 믿는다고 자처했기 때문에 그렇게 머리 속에 넣어둔 것이지 전혀 믿지 않는 것이라면 군소리, 잡소리라고 아예 무시해 버렸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믿지는 않으므로 활용을 않는 것이다. 활용할 믿음이 없는 까닭이다.
당신의 그 많은 성경 지식은 그러므로 당신 자신을 속이는데 활용되고 있을 뿐이니 각성할 일이다. 믿지도 않으면서도 믿는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음이다. 고로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사람들을 천국에 들여보내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피조물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새 세계 창건에 있으시다. 첫 창조에서 그렇게 의도하셨으나 인격성을 지닌 일부 피조물들의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으로 그와 같은 체제가 구성되지 못해 이제 새 창조에 착수하시고 이제 그 완결 다시 말해 생명의 법질서를 사랑하는 자들의 숫자가 채워지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오늘날이다. 모든 것은 경각간에 쉬 끝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인(仁)과 의(義)를 사랑하는[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성격] 즉 생명의 법질서를 사랑하는 자를 확보하심이다. 바로 그런 구성원으로써 행복한 이상 세계가 건립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검증 결과는 이 세상에서 미리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하여 나타내어지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온전한 참 의미의 '인'과 '의'를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자기 부인을 지속하지 않는 이들은 예외없이 다 탈락하게 되어 있다.
또다시 자기중심으로 회귀하는지의 여부를 다루어 보시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무대요 시험대다. 이 세상은 고로 시험 무대로서의 의미밖에는 의미가 없다. 우리의 구원은 과거에 그 같이 '인'과 '의'를 행할 수 없던 것을 이제는 능히 행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선행을 위하여 지으심 받은 것이라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엡 2:10].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들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후 5:15].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 자연히 '인'과 '의'를 행하게 되어 있음이다.
따라서 이 뜻을 따라 인과 의를 행하지 않을 경우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을 끝까지 나타내지 않는 경우 그 사람은 구원에 관한 한 아무 희망이 없음은 당연하다. 왜냐면 구원은 멸망에 처한 사람 불쌍히 여기셔서 생명을 얻게 하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영원한 행복의 삶이 가능한 세계 구축에 있으므로 그런 장래성이 없는 사람을 그 나라에 들여보내실 리 없으니 그렇다.
그런 사람은 또다시 거기 가서도 이 세상과 같은 난장판을 이루고 말 것이기에 미리 차단할 필요가 있음이다. 그런 사람의 장래는 이 세상 시험대에서 자연스럽게 걸러지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그 같이 모진 인생 고난 받으셔서 이룩하신 일인데 한 치라도 소홀히 하실 리가 없다. 철저히 걸러내시고 솎아내시고 추려내실 것이다. 왜냐면 그런 나를 위하신 그 죽음의 고난 자체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뜻을 행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동인(動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무 사랑의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아무 미래도 희망도 없음을 그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같이 최종적으로 솎아내고 걸러내고 하는 등의 모든 일을 하시는 것은 그 충분히 감당할 힘을 무한정으로 베푸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은혜이니 믿음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 얻음은 다시 말해 '산 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죽은 자'로부터 '산 자'가 되었다. 그렇게 구원을 얻은 다음 왜 탈락하느냐 하면 역시 자기 자유 의지로 인하여 '산 자'가 다시 '죽은 자'가 되어 버린 결과다.
첫 사람 아담과 똑같은 경우다. 아담의 범죄에서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아담이 범죄한 것은 아담에게 무엇이 부족하여 된 것이 아니다. 힘이 모자라 된 것도 아니었다. 또 사탄이 범죄하게 된 것도 힘이 모자라 부득이 한 사정이 있어 된 것이 아니다. 사탄이나 아담이나 오직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그렇게 스스로 비극적 결말을 초래한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으니 우리에게 벅찬 시험이나 그런 성질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우리의 자유 선택권에 의한 것일 뿐이다. 한 마디로 어리석음이다. 처음부터 어리석어서 어리석게 되는 것이 아니라 대개 교만에서 그런 어리석음이 나온다. 모든 범죄는 이런 교만에서 나온다고 보아야 옳다. 교만하지 않다면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고 가볍게 여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처음부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런 마음 자세가 화근을 불러오고 그것이 곧 교만이다.
자기가 무엇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말인가. 아담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크게 "두려워하고 떨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나 자신 그 사탄이나 아담보다 나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까닭이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런 아담의 경우와는 다른 특별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기를 착각한다. 그러나 이는 근거없는 것이요 자기중심적인 욕심의 발로일 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베드로가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경고할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 그렇게 성경의 모든 경고에 착실히 유념하고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을 "미리 아시고" 그래서 "미리 정하심"이 바로 "택하심"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겸손히 네 하나님['네가 소유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시니 곧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나만을 위하시는 하나님이시란 뜻]과 함께 행하는 것" 즉 보조를 맞추는 것, 함께 사는 것, 함께 행동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기 때문이라"[잠 4:22] 했다. 고로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 마음을 지키고 단속하고 추스르고 연마하고 등등 모든 것을 해야 함은 마땅하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믿음 생활을 "우승하기 위한 달리기"에 견주지 않았는가! 자기 마음을 지키는 데에는 주님과의 간단 없는 교류, 교제, 사귐 외에 이상적인 방법이 없고 그것이 유일하다. 왜냐면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순종 가운데서 하는 것이다. 교류라는 것이 우리로서는 순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갑과 을의 관계에서 내가 주님을 위하는 것을 "순종"이라 한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함이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힘 자체이시다. 그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셨다.
그리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세상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구원 얻을 사람의 숫자가 다 채워지면 이 세상은 사라질 것인데 이 세상에 그 어떤 관심도 둘 필요가 없고 오직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만 전념해야 할 일이기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것이다. '인'과 '의'를 행하여 이 사람 사는[영원히 살지 않으면 사는 것 자체가 될 수 없다] 방법을 전파하여 널리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
공자와 맹자가 무엇 때문에 중원 천지를 열심히 돌아다녔던가. 그들나름대로 사람 사는 도리라고 철석 같이 믿어 사명감을 가지고 그러했다. 우리는 더욱 더한 사명감을 가지고 더 신바람 나게 다녀야 할 것이 아닌가. 앞에서 이 세상 신의 적대 행위를 말했다. 고로 이 세상의 권력과 영화를 자기 무기로 삼고 있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처럼 그래서 무지막지한 폭력으로써 달려든 것처럼 그런 식으로 살기등등하게 우리 모두를 상대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세상을 방패로 하여 하나님의 성도들을 적대하는 이 세상 신의 공략 중 하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체적인 폭력 기타 육체적인 위해(危害)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라는 대의(大義) 명분(名分)으로 바꾸어 주시고 전환시켜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우리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희생 제물로 삼으심과 똑같은 격으로 올려 주심이다. 왜냐면 머리와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함"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미리 말씀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두려워할 만하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미리 하신 것이다. 물론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두려워 말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다만 그런 현실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내용은 거의 비슷한 '인'과 '의'를 전파한 사람들이지만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이 세상 신이 그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지 않은 탓이다.
적 그리스도 자신이 그런 것을 표방하고 나설 정도이니까 그 자체로는 인간이 구원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정작 바로 그 '인'과 '의'를 능히 실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사적으로 단호하게 철퇴로 내려찍는 것이니 바로 인간 구원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장 피 비린내 나는 살육이 감행되는 것은 예상해야 한다. 아무 이유 없이 헤롯 왕이 열두 사도 중 하나인 야고보를 칼로 죽인 것이 그 예다.
그리고 스데반이 그렇게 죽임을 당한 것이고 그 이후로 전체 교회에 대한 핍박이 감행되었다. 이런 것이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다. 사탄과 교회의 전쟁 양상이다. 지금은 그에게 발꿈치를 물리는 상황이고 곧 이어 우리의 발이 그 머리를 짓밟는 단계가 오게 된다[마 22:44/롬 16:20]. 세상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이고 어느 시대에서나 똑같은 양상이다. 오늘날 북한 교회가 바로 그런 양상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그렇게 물리적으로 핍박을 가해 오는 것만 아니다. 세상이 이 세상 신의 지배 아래 완전 장악되어 있다는 증거야 다른 데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여기서도 세 가지로 들 수 있는 것은 첫째, 성경이 그렇게 간결하고도 확실하여 누가 읽어도 분명한 내용으로 된 것인데도 마치 극히 어렵고 애매 모호한 것처럼 전혀 엉뚱하게 성경을 해석하여 종교 집단을 만들어놓고 세상에서 거대한 세력권으로 권력화해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도저히 인간으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인간을 그렇게 마음대로 조종하여 부리는 이 세상 신의 짓이 아니고는 절대로 있을 수 없기에 단언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사람들이 이지를 지닌 지성적 존재임에도 이렇게 내일도 기약 못하고 불확실한 장래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미래에 대하여 너무나 태무심하고 무신경이라는 것 자체기 기이하다는 것이다. 이 역시 이 세상 신에게 조종 당하지 않고는 인생 스스로는 도저히 이렇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셋째는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이 역시 위에서 지적한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그런 무신경과 같은 것으로서 성경도 믿고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다 안다고 하며 자기를 구원 얻었다 하면서도 주위 영혼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하여 마음을 빼앗기고 마치 하나님도 없는 것처럼 영원한 멸망도 없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이 사실이 실로 괴이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상적인 판단과 이성으로는 즉 그 스스로로는 도저히 이렇게 될 수가 없고 필연적으로 이 세상 신의 조종에 의함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 신이 아니라면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일 것이나, 우리는 이 세상 신인 사탄을 알고 있으므로 그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고 있음이다. 주님도 세상에 오셔서 그들의 비정상적인 "믿지 않음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고 한 바로 그런 기이(奇異)함인 것이다.
이렇게도 철통 같이 에워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봉쇄해놓고 있는 이 세상 신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자를 가리켜 "사람마다 침입하여 들어간다" 하셨고 그렇게 침입하는 자가 "빼앗는 것"[마 11:12]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적다 하셨다. 그 좁은 길과 좁은 문이 생명으로 통하는 것인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자신도 들어가고자 애를 쓰나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신 점에서 우리를 크게 정신 차리게 만든다. 애를 써도 못한다 - "그렇게 심각한가!" 하는 마음이 안들 수가 없음이다.
안일한 것을 찾고 편하고 수월한 길을 찾으려고 할 때 우리는 탈락하고 낙오되니 바로 그 경우를 말씀하심이다. 이런 설명을 듣고 자꾸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그만큼 우리 구원 문제에 집착하라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 할 필요는 없다. 구원 문제에 집착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이웃의 구원 문제에 집착함이다. 이것이 곧 좁은 길, 좁은 문이다. 세상 사람은 다 사는 맛을 즐기고 누리면서 웃음이 만발한데 우리는 사람들을 구원해내려고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땀 흘리고 해산의 수고를 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이김으로써 세상이 보기에는 미련스럽기 한량없는 자로 비쳐져 조롱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자로서 그 상식과 양심대로 판단하는 인간 이성에 비추어 주위의 모든 사람은 당장 영원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이 뻔한데 그래서 그들을 구원해내는 것이 평생 걸려도 못다 할 것 같은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상황에 아예 그 일에는 손놓고 편안하게 자기 개인 생활에 한 눈을 팔고 있다는 것, 즉 열매 없다는 것은[눅 8:14] 우리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바다.
더군다나 우리의 현재 위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음은 그 믿음이 없거나 아니면 노골적인 불복종의 막된 아들일 것이니 그런 아들을 어느 아버지가 원하리요. 순종하니까 아들이지 순종하지 않는데 아들이 될 리도 없다. 믿으면 모든 말씀을 다 믿는 것이지 이것은 믿고 저것은 믿지 않고,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저것은 상징적으로만 해석하고, 이 같이 입맛대로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용납될 수도 없다.
성경에 기록된 그 무엇이든 예사로 듣지 말고 마음에 새겨 듣고 곰곰이 생각하고 명상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굳힐 일이다. 자기 운명은 자기 손에 달린 것이요 그 누구도 억지로 간섭하거나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망하게 하는 것은 사람도 아니요 이 세상 신(神)인 사탄과 같은 악령도 아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다. 이 세상 신에 대한 최소한의 분개심(憤慨心)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인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다. 이러한 원수에게 한 발짝이라도 양보할 수 있느냐 하는 의협심이 최소한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아담 아래 있던 자로서 그 불법, 불의로 인간 위에 올라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중심이 어느 정도로까지 추(醜)할 수 있는지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 행티와 함께 드러나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렇게 구원 받는 이들 중에서 탈락할 수 있고 낙오될 수 있다면 세상 종교가 자기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자기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무엇이냐?" 할 것이다. 그 다르기가 하늘 땅 차이다. 다시 말해 오늘 믿고 구원 얻은 사람은 내일 죽는다고 해도 그는 곧장 천국에 들어간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그 즉석에서 회개하여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세상 종교는 이런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새 창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는 산 자 곧 영원히 사는 자로 만드심이니 죽는 자로 만드심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은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지만 자기의 구원을 위해 선행을 하는 그런 위선(僞善)이 없다. 자기 구원을 위해 노력하지 않음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통한 능력 곧 구원 받음의 기쁨 가운데서 그 힘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같은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라 하면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빌 4:4]고 했음에서도 드러난다.
산 자로서의 넘치는 생명력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므로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그 원동력인데 세상 종교는 이런 자기 부인이 있을 리 없다. 단 중도에 시험을 받아 그 마음이 다시 완고해져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 회개하지 않을 때 그 결말은 불문가지이므로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그 강도처럼 죽을 임시에 가서 믿는 것이 좋겠다 할 것인가? 이미 그 생각부터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커녕 구원도 받지 못한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인데 그렇게 여전히 자기를 위한다면 어떻게 구원이 되겠는가.
세상 종교가 처음부터 자기 구원을 위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같이 자기를 위하지 않는 데에서 출발하고 시작하는 것이니 이를 두고서도 하늘과 땅 차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았으니 구원 받은 자답게 살고 행동하기를 요구하는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오늘 믿고 내일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나 오늘 믿어 구원 받아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살 사람이나 구원 받았으므로 구원 받은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는 균일하고 하나도 다름이 없다.
"살면 되는 것이지 구원 받은 자답게 사는 것이 있고 구원 받은 자가 아닌 삶이 따로 있는가?" 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차이가 있어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빛과 어두움의 차이, 생명과 죽음의 차이다. 즉 구원 얻은 다음의 삶은 자기 부인이고 구원되지 않은 삶의 특징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은 몸과 머리로서 하나로서의 체제 속에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기 때문에 그래서 머리 친히 우리 각 지체를 위하신다는 신뢰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부인인 것이다.
맹자가 '인'과 '의'를 말한 것은, "인생아, 주님께서 선(善)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곧 주 하나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 義)를 행하며 인자(仁慈, 仁)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하는 대목에서의 바로 그 '인'과 '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양심과 지성과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다 말씀하시는 바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는 새 창조의 생명력을 갖추어 있음이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
다시 말해 이 세상이 그리고 이 세상 가운데 처한 내가 '자기 부인'된 실상을 깨달아야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이다. 내 스스로 자기 부인할 것도 없이 자기 부인하려고 애쓰고 힘쓰고 끙끙 앓을 것도 없이 이미 그렇게 무자비하게 '자기 부인'된, 무참하게 극형에 처해진 실상을 보고 그리스도께 달려나온다는 뜻이다. 또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그런 상태에 있음을 자각하고 있어야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이다. 베드로는 어떻게 했던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진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고 금방 자신의 죄인 됨을 통렬히 느끼지 않았던가. 그래서 부지중 "저를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눅 5:8] 한 것이다.
때문에 12제자들에게 많은 제자들이 스스로 물러가 버린 것처럼 "너희도 가려느냐?" 하실 때, "생명의 말씀이 계신데 저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하고 베드로는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빌립도 간수[jailor]도 홀연히 나타나진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 앞에서 바울과 실라 앞에서 무서워하여 떨며 엎드리고 나서 부하 직원들이 사태를 수습하느라 부산하게 북새통이 되어 있는 현장을 벗어나 나가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되겠습니까"[행 16:30]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죄인되어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의 실상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확인시켜 주시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니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결딴이 난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벌써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친히 죽으심으로써 항구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내가 부인되어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믿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믿음에는 그 믿은 사실을 따라 취해지는 행동이 필요불가결이다. 그런 행함이 없을 때는 당연히 그것은 믿지 않는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를 다시 설명하여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은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임이라"[고후 5:14] 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결과를 내는가? 말할 것도 없이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고후 5:15]이라 한 그대로다. 이렇게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미 '자기가 부인된' 사실 즉 '죽은 것'을 알고 그리스도께 왔으므로 그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보고 왔으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고 자기의 죽음을 본다는 말이나, 자기가 죽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보는 것이나, 약간의 인식상의 차이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지만 본질은 같은 것이다] 나를 위한다는 것은 이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오직 그런 죽은 나를 위해 즉 그 죽은 내가 되시기 위해 고맙게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바로 그 분을 위해 살고 그 분의 종이 되어 그 분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 하는 것뿐이라는 사랑의 마음이 우러날 때 비로소 그것이 믿음이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구원의 표현이요 그 결과이다. 즉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함이다[요 12:25].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 죽든 살든 주님의 것이니 그 뜻대로 이루어 드림이 곧 내게 사는 것이다[롬 14:7/빌 1:21].
물론 자기 부인이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세상은 앞에서 말한 대로 죽음이요 그 죽음 가운데서 나도 역시 죽은 것을 알고 즉 자기 부인된 것을 알고 그리스도께 나온 것이다. 그런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알고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내가 아직도 세상에 있다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형태로 남아 있겠는가, 아니면 죽은 형태로 남아 있겠는가. 물론 전자가 아니라 후자가 아니랴. 그래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자기 부인은 생명의 세계인 천국에서는 거꾸로 나타난다. 즉 무한한 생명의 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만은 죽음으로 나타난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것이 생명의 법칙의 영원한 핵심인데도 세상은 이를 기피한다. 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수용하지 않는 교만인 것이다. 진정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이시다.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함은 내가 나를 부인함이다.
즉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을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 부인은 온통 자기중심인 이 세상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생겨나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만은 명백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만 통용될 뿐이다. "생명을 사랑한다"[벧전 3:10]는 말은 할 수 있다. 단 이 경우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말이니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의미를 떠나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이 자기중심에 대한 상대적인 의미의 상대적인 용어요 표현이라고 했거니와, 이 세상에서 나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나 자신을 하늘처럼 위하고 살아온 것이다. 그것이 자기중심이다. 바로 그 하늘처럼 위하던 나 자신이 무참하게 무너진 것을 보는 것이 믿는 눈으로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따라서 내 모습으로 내 이름으로 그렇게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을 볼 때는 과거 하늘처럼 위하던 나 자신의 자리에 그리스도 친히 임하셔서 그 나 자신이 위치하던 자리가 그리스도로 대체된 것을 보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시다. 그런즉 나 자신이 무너진 것을 보니 자기 부인이요 나 대신 그리스도로 대체된 것을 보니 또한 자기 부인이다.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자연계의 짐승처럼 나 위주로 즉 짐승의 본능으로 살던 것이 완전히 무너지니 이 곧 자기 부인이다. 원래의 영원한 삶의 본질과 핵심으로 되돌아 왔으니 이 곧 자기 부인이다.
이렇게 그 자식을 위하시는 어버이 사랑으로 그와 같은 인생 최고의 희생으로서의 고통을 우리 각자를 위해 당하신 그 사랑을 어찌 아니 알릴 것인가. "이 사람도 들으라! 저기 저 사람도 들으라! 당신 자신을 위하여 조물주 하나님께서 어머니 아버지 같은 심정으로 아니, 그보다 더 완벽한 어버이 심령으로 죽으신 저 십자가를 보는가! 아는가! 그래서 또 하나의 당신 자신으로서 다시 살아나 영원히 존재하셔서 오직 당신이 '당신에게 주신 선물로서의 이 그리스도'를 영접해 모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심을 아는가, 모르는가?" 하고 외치는 그런 열정도 없다면 어찌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 안다고 하리요!
이 자연계에 속한 인간 육체는 애초 창조되었던 고유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음을 뒤집어쓴 모습에 불과하다. 바로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죽음을 뒤집어쓴 것이니 어찌 죽음이 아니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찌 자기 부인이 없을 것인가. 죽은 자신을 위해 살아 무엇하나? 죽을 것은 죽어 마땅하고 그 죽은 것은 다시 살아날 수도 없거니와 살 필요도 없지 않은가. 또 우리가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되어 그 죄의 대가로 죽은 것이니, 아담의 죄의 대가도 그렇지마는 나의 범죄의 대가이기도 하다.
내가 죄에게 팔려 내 속에서 나를 지배하는 죄의 법이 나를 죄를 짓도록 만든 것이다. 바울이 모세 율법을 설명하면서 대변해준 그 죽음의 비명이요 탄식이다[롬 7:24]. 그래서 내가 신령한 몸이 되지 않는 한, 이 육체의 생명은 내 자신이 증오해야 하는 증오의 대상이다. 증오한다고 해서 내 몸을 천대하고 학대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런 육체로 영위(營爲)되는 삶 자체를 증오하여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신령한 몸이 되면 내가 내 생명을 미워하려 해도 미워할 수가 없게 된다. 왜냐면 인간 고유의 신령한 몸으로써 누리는 생명으로서 원래의 생명이고 가증스러운 것도 기피할 것도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런 신령한 몸이 되면 철저히 생명과 사랑의 원리원칙의 지배를 받는 몸이기 때문에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체제로 되어 있어 내가 나를 미워하든 사랑하든 관계 없이 나 아닌 내 이웃이 나를 즉 내 생명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완벽한 사랑으로 사랑해주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내 생명을 미워하고, 사랑하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된다. 오직 이 세상에서 이렇게 무의미한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입고 있는 현재의 내 생명을 미워함이다. 이 미움은 내가 이런 생명으로는 절대로 살려고 하지 않으려는 결의에 있다.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미워하는 것이다. 죄를 미워하고 모든 불복종과 범죄의 원천인 교만을 미워하고 그 결과로서의 한없는 어리석음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함이다. 그리고 원천적으로 사랑과 생명의 법은 내가 나를 사랑하고 위하지 않게 되어 있다. 영원히 그러하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미워하라 할 것도 없다. 이 세상이기 때문에 내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다. 영원히 나는 나를 위하지 않게 되어 있고 사랑하지 않게 되어 있다. 내 것, 내 소유라고 하던 것은 영원히 나의 인식 세계에서 사라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원리의 핵심은 자기 부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으시다. 모두가 한결 같이 하나 같이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는 생명과 사랑의 원리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사는 것이요 '인(仁)'과 '의(義)'를 따라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이 말을 하면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빌 4:4) 했다]는 경고는 구원 받은 자답게 살라는 것이다. 산 자답게 살라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셨으니 산 자답게 사는 것은 백 번 강조해도 좋다. 산 자이니까 항상 기뻐함은 당연하다.
생명을 현재 누리고 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함"[:4]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나 동시에 "두렵고 떨림"[2:12] 역시 현실이니 "조심하지"[고전 10:12] 않으면 넘어지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니 모순될 것도 없고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산 자는 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는 죽은 자로 비쳐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백 아니면 흑이므로, 흑이 백으로 비쳐지고 백이라고 고집하게 되면 백은 부득불 흑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상대성을 띠고 대칭을 유지해야 하므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자기 고유의 색깔을 지키려고 하면 같은 색깔이 되므로 대칭성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사망인 이 세상이 생명으로 위장(僞裝)하니 정작 생명은 죽음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면 사망과 생명의 대결에서 사망이 생명을 위장하는 목적이 있음이니, 그것은 생명도 사망처럼 비쳐지게 유도함으로써 자기도 생명처럼 당당히 처신할 뿐 아니라 생명과 사망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한 색깔로 나타나 생명으로 꾸민 자기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함인즉 이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도 생명은 이 세상에서 철저히 '죽음'으로 시종일관하게 마련이다.
구원 받은 자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의 실상이 아직도 구원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거나, 시험하는 자의 시험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정욕에 맞도록 억지 해석을 하고 있어 첫 사람 아담처럼 속아 넘어간 것이 되어 있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달려들어 믿는 자로서의 마땅한 구실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계 3:16] 결국 버림을 받는 것밖에 없다. 밖에 버려져 불사름이 될 것밖에 없다[히 6:8/요 15:6/눅 3:17].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로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고 그리고 심판자로서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눅 3:16].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27] 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여도 제대로 즉 아버지께서 알게 하여 주시는 대로 다시 말해 성령의 계시로 알아야 하는 것이지 인간이 설명한 바를 믿고 따른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믿고 구원 받는 일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를 오직 아시는 아버지께서 알게 하여 주시지 않으면 즉 이끄시지 않으면 가르치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나아와 "주님"이라고 부르고 일정한 소위 '믿음'의 의식에 참예한다고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고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언제든지 바로 깨닫게 되기를 힘써야 함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성경의 진실성을 믿는다고 해서 다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친히 가르치심을 받아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않는 한 그것은 한낱 바울이 경고한 대로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일 뿐이다. 참으로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도 방금 살펴 본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구원 받은 자답지 못하게 처신함으로써 탈락하는 이들이 많은데 하물며 처음부터 제대로 된 길을 따라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못한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이제는 찾지 않아도 되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성경에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고 약속하셨다[요 14:21]. 자기를 나타내신다고 하신 것은 우리가 더 배울 것이 있고 알아야 할 것이 있고 따라서 두드리고 찾고 구해야 함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야 구원 받은 자답게 처신하지 못했다고 해서 "예복 입지 않은" 자로 분류되어 중간에 축출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양면성과 동시성을 말함이니 양쪽이 다 함께 동시에 움직인다는 뜻으로서 일방적인 사랑 즉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나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고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 14]는 사실을 되새겨 들을 일이다. 과거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이기커녕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으로 말미암아 "오호라, 이 곤고한 인생아!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7:24] 하고 장탄식만 되풀이했을 따름이다. 이런 상태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이들이 다시 말해 아버지께로부터 가르치심을 받지 못하고 아버지께서 인도하심이 없는데도 스스로 그리스도께 왔다고 자부하고 그래서 자기 딴에는 구원 받은 줄로 알고는, 자기 식으로 스스로 이 대목을 해석하여 "바울도 구원 받았으나 이렇게 영혼의 장탄식(長歎息)으로 부르짖었다"고 억지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 단추 잘못 끼우니 성경 해석이 온통 난장판이고 어지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성경이 어렵다고 선전하는 꼴이 되어 다른 사람마저 성경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는 결과가 된다. 본의 아니게 사탄의 사주를 받는 것뿐이니 이 세상 신(神)에게 멋대로 휘둘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것이 그러한 과거의 "몸의 행실"[8:13]을 죽일 수 있다는 이 사실이다. "오호라! 이 곤고한 자여!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랴!" 하던 것과는 영 딴판이다.
그야말로 영혼의 천지 개벽을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전 9:27] 하지 않았는가. 이런 바르게 잡혀진 가닥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처럼 간단명료한 것도 없다. 그 전체 윤곽이 너무나 단순하여 일견 싱겁기까지 할 정도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그보다 더 복잡한 것도 없을 것이니 왜냐면 생명과 관계된 것이므로 생명은 어느 경우에서나 신비하기 때문이다. 들에 핀 야생화 하나라도 그 생명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누가 있는가. 그래서 생명의 신비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윤곽만은 너무나 뚜렷하여 아주 간단명료하다. 눈에 들어오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구원의 진리가 이와 같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알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그 분명한 윤곽만 잡고 그 생명의 도리를 모두에게 알려서 구원 받을 사람은 다 구원을 받게 하는 것만이 시급하다. 그래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 불의하고 사탄이 지배 관장하는 이 꼴사나운 세상을 빨리 끝나게 하는 것이 유일무이의 관심사요 목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이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다[롬 8:14]. 성령의 인도라는 것은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말한다.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다[고후 5:15]. 성령을 모셨으니 이는 곧 하나님을 모심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심이다[요이 1:9]. 그리스도와 나는 한 영으로 항상 함께 살아 영원히 함께 행동한다. 그렇다고 주님께서는 결단코 나를 강제하시지 않는다. 이 사실을 항상 유념하고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강제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항상 그 인도를 바라고 구해야 함을 뜻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함이 그런 뜻도 포함된다. 결단코 홀로 있거나 생활한다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착각일 수 없으나 구원 받은 사람은 새 피조물로서의 구조요 체제이니 완전히 다르다. 사람이 무엇을 잘못해서 무사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자답게 처신하라는 것은 처음 사랑을 그대로 견지하라는 경고가 된다.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다시 말해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시면 되는 그것이 구원이므로 성령께서 처음 사랑 그대로 내 안에 모시면 그 이상 더 바랄 것 없으니 그 사랑 즉 인자 안에 거하라는[롬 11:22]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찍히는 바 될 것이다"{:23}.
그러므로 계시록에 "너를 책망할 것이 있으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 하신 것이다. 교회는 개인이 모여 된 것이므로 교회에 주시는 것은 각 개인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는 "내가 말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막 13:37]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세상 종교의 특징은 개인을 중요시하지 않고 교회를 의인화[擬人化]하는데 있다. 왜냐면 천하보다 더 귀한 개인의 생명이라는 것은 애당초부터 관심 밖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면서 이러한 풍조가 교회에 깔려 있으면 그 교회는 세상 종교가 되어 버렸다고 단정하면 틀림없다. 거기서는 더 이상 성령께서 임하여 계시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이 다 하나님의 성전임을 가르친다. 성령을 모시고 있는 까닭이다. 성령을 모시는 사실을 가리켜 주님은 그 배[腹]에서 생명수 강들이 흘러 내리리라 하시지 않았던가. 그 배라고 하셨으면 개인을 말씀하신 것이지 집단으로서의 '교회'에 그런 "배"가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을 각자는 모시고 있다고 했다[요이 1:9]. 성령께서 계시는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니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아니시란 말인가?
그러므로 각 사람은 처음 믿을 때 지닌 처음 사랑 그대로 지니면 그것이 곧 "구원을 이룸"이다. 그 외로 달리 무엇이 있어 이루어야 함이 아니다. 처음 믿을 때 회개하였고 그 회개하고 세례 받은 바탕 위에 성령께서 임하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 상태 그대로 유지되면 성령께서 그대로 계심은 당연하다. 왜냐면 일단 임하셨으니 달리 다른 조건을 요구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임하실 때의 그대로의 조건과 환경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으면 그대로 머무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단 다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는 처음 보조 그대로 맞추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고후 5:15/롬 14:7/갈 2:20/빌 1:21]. 그것이 성령을 받아 모시게 되는 전제 조건이요 받아 모시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물론 믿음 안에서는 자라는 것이 있고 또 지식의 풍성함도 기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핵심적인 기조[基調]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 항상 문제가 된다. 사랑이 식어지면 모든 것이 멈추어진다.
모든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사랑이 건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처음처럼" 하라는 경고이다. 변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처음 사랑"의 유지이다. 때문에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 한 것이다. 그러한 개인이 모여 한 몸을 이룸이 교회이므로 개인을 중요시함과 동시에 교회의 의미를 소홀히 하지 않으며 한 몸을 강조함과 동시에 개인의 구원과 개인 차원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개인으로 구성된 한 몸된 교회 구조이므로 여기에는 특별히 사도직이라 하여 소위 평신도보다 더 나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몸의 지체의 역할로서 멏은 사도로 세우시고 교사로 세우시는 등 "화목하게 하는 직책"[고후 5:18]을 주신 것이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한 그대로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 편지에서 밝힌 모든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특별히 그가 사도라고 해서 그에게만 한정된 특별한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바울은 특별히 세우심을 받은 사람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요구를 하신다는 생각을 성경을 잘못 아는 이가 있을까 하여 하는 말이다.
바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함이다. 그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오직 한 마디로 요약된다. 곧 우리 모두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해서만 사는 것 바로 이것이다[고후 5:15]. 이는 우리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은 목적이다. 바로 이것이 없으면 누구나 구원 받은 자라 할 수가 없다[롬 14:7,8].
바울이 나타낸 그 열정과
고난 받음과 애씀과 모든 수고가 바로 이 사실을 둘러싼 그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한 대로다. 그러니까 바울과
같은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이니까 그렇고 우리 일반인들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상은 사탄에게서 오는 것이지
하나님 정하신 뜻은 아니니 이는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다.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는 것은 특별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되는 까닭이다. 그리스도만 머리로 삼고 그 외의 모두는 그
머리를 모신 몸의 각 지체일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지시고] 친히 십자가에 참혹한 죽음을 죽으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지고 죽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고 말한다. 내용인즉 옳은 것이다. 내가 직접 죽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명백히 대신 죽으신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런 표현의 배경에는 "대신 죽으셨으니까 나는 이제는 죽지 않아도 된다"라는 의미가 깔려 있게 마련이므로 이렇게 되면 큰 오해인 것이다.
"나는 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의 그 "대신 죽으심"의 의미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나도 함께 죽게 만드셨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성경을 명백한 표현으로 '대신 죽으셨다'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오늘날 이런 표현을 쓰면서 많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죄의 몸이 멸해진"[롬 6:6] 사실을 수용하려 들지 않게 되었다. 성경은 전혀 그런 의미로는 가르친 일이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 부활이 내 부활, 그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일이 모두 내가 그렇게 되어 있는 현실이 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에 있는 것이며 이 하나됨은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내 안에 영원하신 선물로 임하여 오셔서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심이기 때문에 즉 이제는 나라는 존재가 이전처럼 홀로가 아니라 이중 구조['그리스도와 나' 즉 이전의 '영혼과 육체'처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 창조로서 이렇게 되어 있으니꺄 창조는 영원한 것이고 도중에 변할 수 없는 것이어서 영원이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그리스도와 나라는 이중 구조인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만이시라도 안되고 사람만이시라도 결코 될 수 없는 일이다. 왜냐면 이 하나되심은 내용으로는 사람이시기 때문이고 방법으로는 즉 나와 문자 그대로 하나이시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오셔야 하는 것이어서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한 영"[고전 6:17]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남녀가 한 몸이 되는 것과 대조시켜 한 표현이다. 성령으로 오시는 데에는 하나님이시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사람이시지만 또한 분명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라 얼마든지 영[성령]으로써 육체[사람으로서의]로서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실 수 있음이다. 즉 성령으로 내게 오셨지만 실제는 그 육체와 영혼 모두로써 내 안에 오신 유일하게 독특한 의미이신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일찍이 있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새로운 창조이시다. 창조하신 순간부터는 영원히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 곧 성령으로 계시면 이는 내 영혼이 내 육체에 깃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계심에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나 영만이 아니시고 육체와 더불어 함께 거하시는 의미가 되므로 주님께서 떠나실 때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Comforter, Helper, 성령, 우리말 번역으로 保惠師]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다"[요 16:7] 하신 것이다.
성령으로 임하시면 한 날 한 시 세계 그 어느 곳에서든 믿는 각자와 함께 계실 수 있음이다. 왜냐면 영원히 개개인에게 주시는 개별적인 선물이 친히 되시어 믿는 각 사람과 함께 사시는 까닭이다. 마치 나에게만 계시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다른 형제들에게도 똑같이 계시고 그들 각 사람과 함께 사심이다. 육체로 계실 때에는 베드로[예루살렘에 있는 경우]에게 함께 계시면 이방인 중에 나가 있는 바울에게는 함께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원리원칙에 사는 삶
그리스도의 왕권이 확고함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심"[히 1:9]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 세상 삶도 자세히 보면 원리원칙에 충실하는 것과 중도에 이해관계에 밀려 변절하는 것과의 두 양대 세력간의 각축장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임진란 때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사례에서 충분히 음미할 수 있다. '나'원균은 임기응변으로 자기 실속만 차려 나라를 망치려다 말았고 이공은 자기 신념 따라 삶의 원리원칙에 충실하였고 그 결과 나라를 건지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렇게 대조적으로 상반된 삶의 즉각적인 결과로 그 가치가 적나라하게 입증되기로는 인류 역사상 흔히 볼 수 없는 진귀한 사례에 속한다. 인생 삶의 이런 양상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은 동일한 인간 세계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예를 들어 그런 '나'원균 같은 인간들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고 '나'원균 같은 사람들을 강제할 수 없는 것처럼 딴 사람으로 개조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걸러내고 솎아내고 추려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런 작업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보듯이 핍박을 통하여 걸러내고, 세상 쾌락이란 것을 통하여 걸러내고, 이 세상에서 잘 살려고 하는 재물의 유혹에서 걸러지고, 이 세상에서의 각종 염려와 신경 쓰이는 일로써 걸러지는 것이다. 원리원칙을 지키고 어떤 일이 있어도 옳다고 믿는 자기 신념 따라 시종일관하게 살기를 바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 삶의 마땅한 도리라고 평소 그런 사고방식으로 지내는 사람은 이런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면 관심이 생기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면 '나'원균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거 잘 됐다, 감사하다, 이제는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좋구나" 하는 정도로 구원 얻은 사실에만 환영 일색이다. 그러나 이공 같은 유형의 인물은 구원도 구원이지만 나 위해 죽으실 정도로 즉 죽어야 하는 것이 필연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친히 그 죽음을 담당하셨다는 사실에 큰 충격과 감명을 받는 것이다.
죽어야 하는 것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다시 사는 법이 없다. 그래서 "나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그 사랑의 절대적인[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의미를 깨닫게 하는 데에 결정적이 되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고 그 사랑을 알지 못한 채 그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고 어긋나게 살아온 것을 뉘우치고 반성하며 이제 후로는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삶을 살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원천적으로 인간은 옳고 그름을 안다. 그 안에 양심이 있어 그런 정도의 교육은 다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삶의 원리를 무시하고 자기에게 닥치는 눈 앞의 이익, 코 앞에 닥친 이해관계에 좌우되어 자기 양심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어긋나게 행동이 나타나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일 수가 없다. '사람답게 사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결국은 행복하게 사는 지혜임은 이미 지적한바 있다.
옳고 바른 도리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것을 말함이다. 성경이 "평균되게 하는"[고후 8:13,14] 것을 강조하는 이유다.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다"[고후 8:15] 함과 같다. 다시 말해 머리와 몸으로 구분되어 기능을 하는 한 몸 관계인 것이다. 나 혼자만의 이익을 찾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도 해가 되는 것이므로 미련한 짓이니 이것이 죄요 악이다.
지금까지 사람답게 살지 못한 인간에게도 회개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런 회개의 기회마저 박차 버리면 그것은 앞으로 영원을 통해 기회를 준다 해도 결코 그 회개할 기회가 무익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에 이 한번의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리면 그것으로 영영 끝이 되는 이유가 된다. 한번만의 기회라고 인색하다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근본적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일, 관계되는 모든 것이 실상 아무리 중요하고 요긴한 의미라 하더라도 그 이치는 이같이 지극히 평범한 상식 수준을 결코 넘지 않는다. 그 특징인 것이다. 또한 조물주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은 개개인이 다 다르나 이 공통점 하나로 인간을 교육시키고 일깨우시기에 충분한 것이다. 소위 잘 났건 못났건, 많이 배웠건 무식하건, 존귀하고 부유하건 그렇지 않건, 조물주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가지고 사람을 따지고 저울질하실 턱이 없다.
오직 관심을 두시는 바는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행동하느냐의 여부이다. 한번 옳다고 믿는 것은 그 믿는 바대로 시종일관하여 나가느냐, 아니면 중도에 그 믿음을 헌신짝처럼 내버려 오직 자기만을 위하는 짐승같은 즉 사람답지 못한 일을 하느냐 그 여부만을 알고자 하심이다. 몰라서 알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 앞에서 그것이 확증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 피조물이 함께 더불어 존재하는 세계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말했지만 원칙에 충실하고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복음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처음은 잘 모르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고 하면 우선 그 원리원칙이 중시된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끼게 되어 있다. 그 원칙을 무시하지 못하여 당신께서 우리 위해 죽으시는 고통도 불사할 정도라면 철저한 원리원칙 즉 정의로써 이 세상을 주관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입증명함이 되기 때문이다.
고로 이 죽으심의 역사적 사실과 현실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들을 일이지 절대로 허수하게 들을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 하나만 해도 감동거리는 충분히 된다고 스스로 판단하게 되며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 어느 종교가 죽어 마땅한 인생을 위해서 그 형벌을 받아 죽는다는 내용이 있던가. 그러므로 그런 정도의 하나님이라면 한가지를 알면 나머지 백가지를 알 수 있다고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 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과연 믿을 만하고, 사랑할 만하고, 신뢰할 만하고, 위하여 충성을 바칠 만하고 위하여 죽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본성으로 알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아니, 그런 내용을 전하는 성경이라면 그 하나님은 전심전력으로 귀기울여 경청할 가치가 있고 그런 성경이라면 그 내용을 밤을 새워서라도 살펴보고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특출한 인간성을 지적함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절대 다수의 인간이 하나님 창조의 애초의 정상적인 인간성에서 벗어나 있으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 유형에는 야곱형과 에서형이 있고 또다른 면으로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이순신 유형, 다른 하나는 원균 유형이다. 옳다고 믿는 바대로 변치 않는 신념을 가지고 임하는 삶이 있고, 형편 따라 시류를 타고 편한 대로 생활하고자 하는 즉 자기 이욕(利慾)을 따라가는 삶의 상반된 두 가지 형으로 대별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자의 유형을 찾으신다는 내용이 성경의 모든 경고의 골자이다.
전자에 속하는 것이 야곱형이다. 진지하게 인생문제를 생각하는 것이다. 인과율에 입각하여 그 원인을 캐려는 자세다. 원인 없는 결과 없는데 왜 오늘과 같은 결과가 있는지 그 원인을 알아내려 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이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자이다. 그와 같이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대응하시고 보답하시는 것이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centurion] 고넬료도 그런 찾고 구하고 두드린 결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심을 받은 것이다.
후자에 속하는 유형도 어느 때든지 회개하면 전자의 유형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 전환은 타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하는 문제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명령하시고 회개의 기회를 풍성히 베푸시는 것이다. 고로 이 세상은 회개의 기회를 주는 곳이기도 하다. 기회의 장[場]이다.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차별도 없고 제한도 없다. '누구든지 오라'이다. 다만 사람다운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지 의인을 찾으시는 것은 아니며 죄인은 부르시되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람답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는 죄인이고 의인이고의 차이와는 다르다. 사람다운 것이 무엇이냐, 한 마디로 에서형이 아니라는 뜻이다. 야곱의 형 에서는[창 25:27/히 12:16] 육체적인 삶의 낙에 휩쓸려 사람으로서 마땅히 생각하는 데에 써야 할 황금 같은 기회를 모두 날려버린 데에 그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사람이면 마땅히 사람다워야지 왜 짐승처럼 되어 당장의 육체적인 본능적 욕구에 놀아나느라 허송세월할 것인가.
우선 당장은 그러한 사람이 인기가 있고 이 세상 지내기는 편하다. 부친인 이삭도 그러한 에서를 좋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실 수밖에 없다. 그 결말은 당장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조만간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런 두 가지 유형은 기질의 차이가 아니다. 이공(李公) 순신(舜臣)은 행동파에 속하지 사색, 은둔파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 정신적 영적 자세만은 항상 진지하게 생각한 다음의 판단으로써 좌고우면(左顧右眄, 이쪽저쪽을 돌아본다는 뜻으로 앞뒤를 재고 망설임)하지 않고 일로 전진하는 유형이었다.
보기 나름
인식하기 나름이니 항구적인 실패로 보느냐, 악착 같은 끈기로
보느냐, 후자로 본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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