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를 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27] 하신 말씀을 우리는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 인간으로서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자체가 한 마디로 말해 전적으로 불가능입니다. 위에서의 설명처럼 우리 각자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그 어떤 피조물보다[비록 우리를 낳아 기른 부모보다도] 가까우신 분이시나, 일단 범죄하여 죽어 버린 터이므로 그 결과가 이렇게 심각합니다. 바로 말해서 '죽음의 실상'입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마 11:25,26]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고"[딤전 2:4]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고"[벧후 3:9]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행 17:27]이기는 하나,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엄격히 한정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이 바로 그 설명이고 증거입니다. 따라서 영원히 앞으로도, 범죄한 자는 살지 못하고 구원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종일관성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질서가 확립될 수가 없습니다. 중도에 뜻을 바꾸시거나 중지하시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함으로써 스스로 그 악행을 버릴 마음이 없으면[행 3:26] 구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살후 3:2] 함도 그 때문입니다.
이러한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에도[항시 핍박 대상이 되므로 믿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게 될 정도로까지 세상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는] 불구하고 소위 "기독교"라는 이름의 세상 종교가 세상에서 세력화하고 때때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신비하기까지 한 일이라고 했으나, "이 세상의 신(神)"[고후 4:4]이 하는 일이니까 "신비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자체가 성경의 진실성을 또 다른 차원[측면]에서 증명하는 증거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의 이 세상 신의 존재를 그와 같은 "기이한" 현상들이 부각시키고 그 활동을 이와 같이 역력히 입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이비들이 세력화함으로써 어중이떠중이로 몰려 든 소위 "믿는 이들"의 행동거지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에 속한 종교일 뿐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구원 얻은 사람들의 교회는 아니기 때문이니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가짜들을 많이 만들어 둔 결과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심은 그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구원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뜻인데,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마 25:12]고 부인하실 때는 내게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고 하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다"[:3] 했으니 하나님을 사랑해야 구원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그 모든 계명과 말씀을 지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요 14: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居處)를 그와 함께 할 것이다"[요 14:23] 하시면서 거듭 이 사실을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지 않고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성령으로 임하여 오시지를 않음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23]. 성령을 받지 못하니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지 못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 되지 않으므로 죄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죄 용서 전에 회개하기를 명령하십니다[행 2:38/17:30]. 회개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에서 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창조
그러면 처음으로 돌아가, 이와 같이 물은 이미 창조되어 있었고 물이 땅을 엄청나게 뒤덮고 있었으므로 땅은 그 형체도 찾지 못하여 “비어 있다”[void]는 표현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오늘날 과학시대가 되어도 그런 현상을 몇 마디로 요약해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수천 년 전의 기록으로서 당시에 가장 걸맞는 인간 언어로 압축하자니 그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룹"과 "스랍"들이 창조되었던 당시의 자연계가 와해되어 있던 모습입니다.
여기서 "자연계"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생물들이 살고 있던 땅과 관련된 일체의 것을 총칭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6일 창조"가 시작됩니다. 이 6일 창조의 모든 설명은 인간 구원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략된 부분은 인간과 무관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룹"과 "스랍"들은 인생 구원과 직접 관계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는 영물(靈物)이 이제 곧 설명되겠는데, 만일 그 타락한 "그룹"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면 반드시 그 이전 세계[지금은 와해된]에 대한 설명이 있었을 것이고 결코 생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 맨 첫머리에 나오는 대목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셨다"[1장 1절]입니다. 그리고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2절] 했고, 이미 물은 존재하여 그 "수면(水面) 위에서"[2절] 성령께서 움직이셨다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세기 시작하면서 "6일 창조"의 과정이 순서대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땅을 창조하셨다" 또는 "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나올 법한데도 대뜸 "수면"이라는 말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땅을 창조하셨다는 말 대신 오히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다" 하고 있습니다. 이는 확실히 "창조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일견 어긋나게 표현된 1절과 2절의 간격은 천하 그 어떤 거짓말쟁이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진실, 사실 그대로 기록할 때에만 한해서 나타나는 기묘한 모양새입니다.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음이 역력합니다. 그래서 그 행간의 의미를 위에서처럼 설명한 것입니다. 이 대목을 처음 기록하게 된 사람 자신이 생략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대로 써 나갔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인간의 원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6일 창조의 피조물입니다. 6일 창조에서 제1일에 빛이 생겨나고 그 빛으로 인한 주야(晝夜)가 정해져 이로써 "6일 창조"의 그 "6일"이 세어집니다. 이와 같은 날 수로서의 제2일에 그 엄청난 물이 정리되면서 아래와 위로 나누어집니다. 이 때 “하늘”이 생깁니다. 제3일에 아래 쪽의 물이 한 곳으로 몰려 가 바다를 형성하게 되고 마침내 육지가 드러나며 그 육지에는 식물이 무성하게 됩니다.
제4일에 태양이 빛나게 되며 그로써 주야(晝夜)가 생기고 따라서 사계절과 연월일(年月日) 등이 정해집니다. 제5일에 바다에는 해중(海中) 생물, 공중의 조류(鳥類)가 창조됩니다. 제6일에 육지의 동물과 사람이 창조됩니다. 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고 성경은 밝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 순식간에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 말씀대로 온전히 이루기까지 상당 기간이 요할 수도 있습니다.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을 굳이 하루의 낮 즉 우리가 아는 대로의 대략 12시간으로 한정하는 것이므로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의 24시간 주야[day and night]는 제4일에서야 해와 달의 광명이 있게 되면서부터 그제야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마치 제1일에 창조된 광명이 명멸(明滅, flickering, blinking)이라도 하는 듯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 하면서 마치 우리 인간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는 것과 같은 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의 과정을 밟아가신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 1:18].
순식간에 이루어졌다고도 하지 않고 상당 기간이 걸렸다고 하지도 않고 단지 물이 있고 어두움이 있고 땅은 “형태 없이 비어 있다가”[성경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으나 실상 그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는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앞에서의 지적대로 굳이 이해하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는데 그 빛으로써 나누어진 “낮”과 “밤”의 차이로 “하루” 즉 “제1일”이 되었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 수를 세어 가고 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주야 개념과는 별개의 것임이 확인됩니다.
앞에서 6일 창조 이전의 세계가 있어 그 세계의 낮과 밤 그리고 아침과 저녁을 기준하여 6일 창조[창세기에 기록된 대로]의 날 수가 세어진 것이라는 말을 했지만, 이미 그 세계는 와해되고 없는 상태에서 이 6일 창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와해된 상태를 "어두움"으로 나타냈고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시면서 6일 창조가 개시되며 이 새로 생긴 빛을 중심으로 낮고 밤 그리고 아침과 저녁이 이루어집니다.
어두움은 이미 있고 빛은 새로 생겼고 이 어두움과 빛을 나누면서 낮과 밤으로 구분하고 있으므로 이전 세계의 그 낮과 밤이 다시 복원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서이지만, 좌우지간에 이 정도로 하고 덮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의 지식으로도 그 한계성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이니 굳이 알고자 할 필요가 없음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런데 모세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안식일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일하시고 제7일에 안식(安息)하셨으니[쉬셨으니] 그래서 우리가 아는 대로의 제7일 즉 토요일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그 창세기의 날 수 셈하는 것이 우리가 아는 대로의 하루 24시간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4일째 창조된 태양 광이 이 지구상의 생물을 지배함으로써 인간이 이해하는 대로의 시간 관념이 정착되고 그런 인식을 따라 하나님 창조의 내력을 설명하여 표현하자니까 그와 같은 “낮”과 “밤”, “아침”과 “저녁”을 구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날” 수를 세어 간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날 수를 세어 가신 방식을 따른 그 제7일에 안식하셨으므로 그렇게 인간이 아는 대로의 7일째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지, 창조의 6일간이 인간이 아는 대로의 시간 개념이라 단정할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창세기 기록은 그 기록대로만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불완전한[왜냐면 자연계에 속한 우리의 육체이므로] 현재에 처해 있음에도 무엇이든 억지로 알려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마치 꽃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고 동식물이 어떤 식으로 창조되었는지 일일이 알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영계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함부로 부정하고 있는 우리 주제에 무엇을 제대로 알 수 있다기에 꼬치꼬치 따지고 또는 우기겠습니까. 6일 창조와 그 제7일째 날에 쉬셨다는 안식일 개념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의 일을 모두 끝마치고 쉬셨으나 인간의 범죄로 인해 다시금 창조의 일을 계속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새 창조의 일이 인간 구원이고 따라서 지금도 하나님은 그 일을 계속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인생들에게 알리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한 가지 이유이고, 나머지 다른 이유로는 하나님의 것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지 하나님의 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자기중심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도 내 것이라 착각하게 됨에 이르러 이런 잘못된 인식부터 바로잡아 주는 것이 구원의 첫걸음이기에 그렇게 사전(事前) 교육 차원에서 모세 율법을 세우시고 이를 지키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심으로써 내 것이 있고 따라서 내 것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이 사람 삶의 기본 자세인 것입니다[욥 1:21].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머리이시고 모든 피조물은 그렇게 머리를 모신 한 몸 체제라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머리의 지시를 받아 머리의 뜻대로 서로를 위하는 것이 삶의 법질서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도, 내가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아 그리스도를 내 것으로 누리되 그 누리는 생명력으로써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으로 말미암아 한 몸으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삶을 누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즉 머리께서는 그 몸된 각 지체에게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시고 또한 각 지체는 그 받은 선물로써 머리에게 각자 자기 자신을 드리는 의미입니다.
자기 이웃에게 서로 간에 자신을 주는 한 몸, 하나로서의 순환[한 육체로서의 혈액 순환처럼] 운동에 기초한 원활한 삶의 법칙을 따름이 우리의 구원 곧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삶의 본질입니다. 이리하여 처음 시작한 자리에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하여 결국 원래의 제자리에 돌아오니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일종의 원(圓) 운동이 되어 하나로서의 움직임, 한 몸으로서의 형태를 이룹니다.
처음에는 자기를 위하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나 결국 돌아오기는 자기를 위하는 방향이 되어 되돌아 온다는 이치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칭성 원리, 삼위일체의 법칙도 모두 이러한 '원 운동'이라 하겠습니다. 즉 '하나'로서의 움직임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마 16:24/눅 14:27-33] 것[self-denial] 즉 내가 나를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도[고후 5:15], 자기로서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분명하나 그 대신 그 이웃이 자기를 위해 주니 자기가 부인되지 않습니다.
원 운동에서는 자기를 부인해도 부인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자신으로서는 분명히 반드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지 않는 쪽으로 무한정 끝없이 가고 있지만 그래서 자기를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하는데도 그 남들을 모조리 다 거쳐 다 포용하고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니 그 남 위하느라고 거쳐 온 모든 남들 곧 이웃들을 모조리 휩쓸어 내게로 몰아오는 격이 되는 그런 결과론입니다.
강제로 억지로 빼앗아 자기에게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초조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사랑함으로써 전부를 사로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선진화(先進化)된 삶의 기법(技法)입니다. 선진이란 것은 앞서 가는 것 즉 더 나은 것, 최상의 것, 언제나 최신(最新)의 것이니 다시 말해 최고 최상의 지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시종일관 의도적으로는 남을 위하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부인”입니다.
결과론적으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바다에 그물을 던질 때는 항상 자기와는 반대 방향으로 던지지만 결국은 그 그물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지 않고는 안되는, 끌어오는 수밖에는 없는 당위성과 같은 것이라 할까요. 항상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요 12:25] 것으로 일관하지만 그 결과는 항상 자기를 위하는 것으로 나타나 되돌아오는 것이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결과물입니다. 왜냐면 "자기 부인"은 사랑의 대명사라 할 수도 있고 그 핵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엡 5:28]. 아무도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의식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이는 없습니다. 일향(一向)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고 자기를 의식하는 마음이 없지만 그것이 결국 '자기 사랑'으로 되돌아온다 즉 보답된다는 그 뜻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부터 사랑하는 자기중심은 도리어 자기를 망치는 것으로서 자기를 미워하는 결말로 낙착됩니다.
앞에서 "선진 기법"이라는 말을 했지만 자기중심은 자기를 위하는 가장 졸렬한 방법입니다. 거꾸로 되어지는 일을 택함이기에 그렇습니다. 각자 모두가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을 두고 ‘원(圓) 운동’이라 했지만, 왜 '원'이 되느냐 하면 원을 작도할 때 자기[시발점]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나가되 결국 원점(原點)으로 되돌아오기에 그렇습니다. 원이 그려지는 이치로서 자기에게서 멀리 가면 갈수록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 큰 원이 그려집니다.
더 많은 면적을 포용하여 차지하게 되어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무한대로 나가면 무한대의 것을 차지한다는 논리가 됩니다. 이는 욕심이 많아 그런 것이 아니라 욕심이 없어 즉 자기를 중심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눅 6:38]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헤아린다"는 것은 원을 크게 그리면 그릴수록 원의 포용 면적은 비례하여 넓어진다는 것이요 작게 그리면 그릴수록 좁아진다는 의미 그대로입니다. 부자 청년에게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막 10:21] 하신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그 부자 청년과 같이 세상 모든 사람은 거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진이 아니라 후진의 방법만 항상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주위를 감동시킴으로 사랑을 받아 아낌없이 퍼부어 주려는 마음을 사게[얻게] 됩니다. 그러나 구두쇠처럼 자기만 생각할 경우 미움을 받아 경원시되고 아무도 그를 돌볼 생각을 아니합니다. 스스로를 옥죄고 최대한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우선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더라도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되므로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팔짱을 끼고 있으면 자기밖에는 소유하는 것이 없지만 팔을 뻗쳐 남을 안아 끌어당길 때는 나 자신과 남을 한꺼번에 차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뻗는 팔이 무한정 길어지는 요술이라도 부린다면 무한대로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자기와 똑같은 것으로 안아서 거두어 들일 수 있으니 사랑이 바로 그런 요술을 부리는 셈입니다. 바로 이것이 삶의 영원한 법질서로서 영원히 변경될 수 없고 우리는 이렇게 살도록 처음부터 창조된 것이요 새 창조도 당연히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살지 않을 때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후 5:15] 때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에서 탈락하고 이탈하는 결과를 낳게 됨은 당연합니다. 바로 이런 삶의 이치를 미리 가르치시기 위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셨으므로, 그래서 안식일 개념에는 6일간의 천지 창조와 제7일의 안식 개념만 아니라, 그런 것과는 일견 상관이 없는 "새 창조"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을 유월절로서 기념하는 의미도 함께 가미되어 있습니다[신 5:15].
물론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부활 어간(於間)의 3일이라는 일자(日字)를 상세히 분석해 보면 '제7일로서의 안식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고 아주 절묘하게 녹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6일간 일하셨고 7일째 쉬셨으니까 너희도 무조건 그 날은 자기 일을 중지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써만 보내는 거룩한 날로 대대로 삼으라"는 의미와는 아주 다릅니다. 과거처럼 죽은 자가 아니요 새로 창조된 다시 출생한 자로서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삶을 의미하므로 그렇습니다.
왜냐면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친히 자기 자신을 우리 각자에게 전적으로 바치시고 선물로 주시어 성령으로 각자 안에 계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7일만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날이 아니라 1주 7일 모두가 그러합니다. 다시 말해 7일 모두가 '안식일'의 의미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안식일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철저하고 완벽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의 원래의 의미를 고스란히 그대로 물려받아 지키는 까닭이니,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삶이기에 그렇습니다. 특정 부분만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라 전부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전부가 바로 나의 것이기에 내가 성령을 현재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圓)으로 상징되는 '하나', 한 몸의 의미입니다. 원은 어느 것이 머리이고 어느 것이 꼬리인지 어느 것이 첫 가닥이고 그 끝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형태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만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친히 영원히 우리를 섬기시는 이로서[눅 22:27] 위치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밤낮 사흘"
그리스도의 "3일 후 부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부분['밤낮 사흘']의 내용은 필자 자신의 글이 아니고 토레이(R.A.Torrey) 박사의 글을 번역하여 소개한다고 한 어느 인터넷 기사(記事)에서 그대로 옮긴 것임을 밝혀둡니다. 일반적으로 알기로는 주님께서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유대'인의 날짜 세는 관습에 따라 금, 토, 일 3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나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 12;40] 하신 말씀대로라면 이는 착오입니다.
즉 "밤과 낮"으로 분명히 명시하신 그런 의미로서의 "사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금요일이라 여기는 것도 "안식일 전 날"이라는 말 때문인데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주 토요일 안식일만 아니라 또 다른 안식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유월절로써 시작되는 1주간 즉 7일(이것을 "무교절"이라 함) 중에 그 첫날이 역시 안식일로 되어 있습니다. 주간 첫날 즉 일요일이 아닌, 유월절을 포함한 무교절로서의 1주간 그 첫날은 그것이 그 주의 무슨 요일(曜日)이 되든 무조건 안식일입니다[출 12:16/레 23:7/민 28:16-18].
이를 "유월절 안식일"이라 합니다. 고로 "안식일 전날"이라 한 것은 이 '유월절 안식일' 전날이고 '일반 안식일'(토요일) 전날(금요일)이 아닌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의 안식일이 '일반 안식일'(토요일)인지, 아니면 '유월절 안식일'(그 해의 유태력 7월 15일 목요일)이었는지는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곧 요한이 지적한 대로[요 19:14]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입니다.
고로 '유월절 안식일'의 전날로서 그 해에는 '유월절 안식일'이 목요일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바로 수요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의 일상적인 시간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이 아니라 밤이 되기 전에 식사를 하신 것이라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양을 잡던 그 시간 즉 14일 "해질 때에"[출 12:6]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바쳐졌던 모든 유월절 양들은 모두 상징에 불과하였지만, 하나님의 진짜 유월절 양(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로 그 시간에 "바쳐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 양에 관한 모든 것은 주님께 관한 예표(豫表)입니다. 그래서 흠 없으신 어린 양으로서[출 12:5], '유대'력[曆]으로 7월 10일에 "취택"(출 12:3)되셨으니, 왜냐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6일 전[요 12:1] 즉 목요일의 6일 전인 금요일 '여리고'에서 '베다니'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즉 토요일 다시 말해 그 달 10일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고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은 '베다니'로 온 다음날(요 12:12,13) 즉 토요일이 되니 '유대'력으로는 7월 10일입니다.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주님을 은 30을 받고 팔게 된 날도 같은 날입니다[마 26:15,16/막 14:3-11]. 주님께서 붙들리신 것은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의 만찬 후였으니 만찬은 금요일 오후 즉 해 질 무렵, 혹은 해 진 후 토요일('유대'력) 이른 때였으므로 그 만찬 후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아가 모의를 한 날은 '유대'력 7월 10일이 됩니다.
이 "은 30"은 그 날 죽일 희생 양 즉 예수님께 대한 가격을 정한 것이 되어 이 가격으로 율법을 따라 양(羊)을 사게 되는 의미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희생 양"을 죽이는 대제사장에게 그렇게 넘겨지신 것이 바로 그 때로서 '유대'력 10일에 이 일이 일어났음이 분명합니다. 부지중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따라 그들은 그 "희생 양"을 구약에서 예언한 정확히 그대로 값 매김을 한 것입니다[마 26:15/슥 11:12].
그리고 돌아가셨을 때 예언 그대로 뼈는 하나도 부러뜨려지지 않고 보존되었습니다[요 19:36/출 12:46/민 9:12/시 34:20]. 또 '유대'력 7월 14일 늦은 시간 즉 해질녘 곧 15일의 시작 직전에 돌아가셨습니다[출 12:6]. 주님께서 '유월절 안식일' 직전에 돌아가심으로써 성경의 예언은 세세한 부분에까지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이 금요일이라면 이상과 같이 성경 예언은 여러 모로 어긋나게 됩니다.
이는 "사흘 낮과 밤을 땅 속에서 지내신 그리스도"라는 그의 글에서 토레이 박사가 내린 결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문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주후 30년 곧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널리 인정되는 그 해 유월절은 달(月)이 만월인 4윌 6일 목요일이었습니다. 그 날이 금요일이라고 믿어 왔던 연대학자들은 주후 30년의 유월절이 목요일이었다는 사실에 당황하여 십자가 고난이 주후 33년에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아도 그 해 역시 만월은 목요일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대로 주님께서 '유월절'이 아닌 '유월절 예비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사흘 낮과 밤을 무덤에 계셨을 당시 '유월절 예비일'이 수요일이었고 유월절 안식일은 목요일이었으며, 따라서 주님의 부활은 금요일 다음의 토요일 안식 후 그 주 첫날인 일요일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수요일 해질녘에 돌아가셨고 그로부터 72시간 즉 사흘 낮과 밤이 종료되는 그 주 첫 날의 시작(토요일 해질녘) 이후에 무덤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여자들이 새벽 일찍 무덤에 가니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돌을 굴러내어 그 위에 앉았다 했는데[마 28:1-7], 천사가 돌을 굴린 것은 여자들을 위해서고 나중에 제자들도 와서 확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덤 자체는 이미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전에 벌써 부활하셔서 무덤 밖에 계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몸은 신령한 육체이므로 나중에 제자들이 문을 잠갔어도 들어오신 것처럼 돌 문이야 그대로 막혀 있건 굴러 치워져 있건 아무 상관 없이 무덤에서 나가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 안식 후 첫날이라 했는데 그 새벽 일찍 여인들이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유월절 안식 후 그 다음날에 가지 않고 제7일 안식일 다음날까지 기다린 것은 주님께서 "내가 밤과 낮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 하신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살아나실 줄 믿고 갔다면 그 시신에 사용하기로 한 약품은 무엇이며 다시 살아나시는데 그 약품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겠지만, 실상 당시의 그들은 확신이 아니라 반신반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주님의 무덤을 찾을 때의 심정은 예의 차원에서라도 그런 것을 가지고 가야 했습니다. 어쨌든 생전의 말씀 중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여태껏 없었으니 어찌 되었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으로 그러나 동시에 그 반대가 될 경우도 함께 생각해서 그런 물품을 준비하여 무덤으로 갔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여간 여자들은 정확히 그 "사흘 밤 사흘 낮"이란 날 수를 세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누가 시신을 훔쳐가지 않았나 의심했는데 이것은 반신반의하면서 시신에 쓸 약품을 준비해온 것과 같은 심리상태라 하겠습니다. 날 수는 세고 있었어도 확신은 서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나 '나인'성(城) 과부의 아들의 예는 다른 사람 죽은 것을 살리신 경우이고 주님 죽으신 것은 능히 그들에게 잡히시지 않아도 되지만 자진해서 잡히심으로써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므로 그렇게 친히 살아나실까 하는 의구심이 들만도 했습니다. 여인들이 날 수를 세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수요일이 정확하다는 결론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여인들이 가면서 "누가 우리를 위해 돌을 굴려줄꼬" 한 것은 금요일에는 가지 않았고 지금 가는 길이 초행이었음이 분명해집니다. [여기까지가 토레이 박사가 쓴 내용입니다].
안식일[安息日ㅡSabbath]에 대해
"안식일"이란, 일주 가운데 토요일 하루를 쉬도록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를 통해 분부하신데 따른 것입니다. 쉰다는 것은 그 날에 온 국민이 일체의 일을 중지하고 손놓는다는 의미인데 자연 그 날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하게 됩니다. 이 안식일은 6일에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쉬시고 제7일에 쉬신(안식하신) 데에서 이를 기념하고, 동시에 이집트에서 종 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던 날 양(羊)을 잡아 이스라엘 각 가정의 집 문설주에다 발라놓으면 당시 이집트에 임한 국가적 재앙[각 가정의 장자 몰살]을 면할 수 있어 이 때로부터 유대인들은 이 날을 유월절로 지키는데 이를 또한 기념하는(신 5:15)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서는 일하심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쉬심 그리고 우리 인생으로서는 마귀에게 매여 종 살이 하던 데로부터의 해방 즉 노예의 고역(苦役)으로부터의 자유, 이 둘을 함께 의미함이 됩니다. 그러나 인류 구속사(救贖史)를 볼 때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신 대로, 그 6일 창조가 다시 인간의 새 창조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이상 두 가지로 합성(合成)된 본질적 의미입니다.
유월절에 잡힌 양은 바로 이 새 창조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의미하는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 이렇게 두 가지 뜻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첫 창조와 새 창조를 아울러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첫 창조는 인간(아담)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무의미하게 된 것이므로, 새롭게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으면 안되었으니 고로 하나님의 안식이라면 두 창조를 동시에 거론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안식은 첫 창조를 마치신 후의 안식만 아니라 새 창조를 완성하신 후의 안식을 함께 의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측면의 창조와 안식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요일이 수요일이냐, 금요일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위에서 언급이 된 것처럼,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과의 관계에서도 뚜렷이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은 매주 토요일 안식일(일반 안식일) 외에도 또 다른 안식일을 지켰던 것입니다.
즉 유월절로써 시작되는 무교절(無酵節)(누룩 없이 만든 떡을 그 일주간 먹음) 그 일주간(7일)에서 그 첫날은 그 날이 그 주의 무슨 요일이든 상관없이 언제나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래서 이 경우의 안식일을 설명 편의상 '유월절 안식일"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일반 안식일이 있고 유월절 안식일이 별도로 있는 것은, 위의 설명처럼 첫 창조와 새 창조가 구분되어 있고 따라서 첫 창조로서 끝날 일인데도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메시아로 말미암는 새 창조가 불가피하게 되자 바로 이 창조의 과업이 계속 수행 중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무조건 첫 창조의 안식일 휴식에만 매달려 이 새 창조의 의미를 무시해 버림에서 오는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킨 것이 주님과의 대화[안식일에 관한]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대해 여러 번 주님께서 '유대'인들과 충돌하시는데, 그 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 또는 설명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이 됩니다. 즉 조물주 하나님은 그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위하시고 우리 피조물은 조물주 하나님을 위하게 되어 있는 생명의 기본 원리를 어김에서 범죄가 유발된 것인즉,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 모두 자기중심 일변도로 되어 버려 하나님을 위함이 조금도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 삶의 근본 도리임을 외형적으로나마 가르치신다는 의미가 함유되어 있는 것이 안식일의 '창조와 안식' 개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자신을 위한 일체의 일은 중단하고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 날로 정하신 것으로서 그러나 이는 초보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것이지 실상은 일주 단 하루만 아니라 일주 전체,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 다시 말해 이웃을 위하는 것이어야 함이 이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명백해졌는데도 이를 알지 못한 유대인들과의 알력이었던 것입니다. 이웃을 위한다는 것은, 내 이웃 역시 자기의 이웃인 나를 위하는 것이 되므로 실은 나 자신이 위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체로서의 우리가 다 함께 위해지는 다 같이 행복해지는 최대한의 지혜인 것임은 앞에서도 설명했습니다.
이와 같이 안식일 개념이 하나님의 처음 창조만 아니라 새 창조도 아울러 포함하는 까닭에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그 새 창조가 지금 한창 진행 중임이 명료해진 까닭으로 현재는 모두가 달려들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시기로서 안식은 이후의 일이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우리의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사업 일색으로서 곧 사람 살리고 건져내는 일입니다. 때문에 새 창조가 진행 중인 이 때, 이전처럼 특정한 날을 정하여 안식일이라 선포하고 그 날에만 주님의 일을 하는 날로 정하는 것은 유대교와 같은 종교의식으로나 의미 있을 뿐이지 전혀 우리에게는 해당되지도 않는 무의미한 일임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일주 일일만 주님의 것이 아니라 7일 모두가 주님의 것이요 10의 1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즉 10프로만 아니라 100프로 모두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된 새로운 삶을 출발시키는 것은, 과거 나 자신이라는 존재가 죽었고 지금은 그리스도를 위하는(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므로) "새 생명"[롬 6:4]의 삶 일변도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체의 구별이 없어진 것입니다. 오직 구별은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사신다는 그것뿐입니다.
제 3일에 즉 사흘만에 부활하신 이유
이 두 가지 의미의 안식일 개념이 바로 주님의 3일만의 부활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왜 꼭 "사흘만"일까, 단 하루만에 살아나셔도 되는 일입니다. 이 또한 부활과 기타 성경 기록이 인간이 무턱대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님을 웅변합니다. 부활이 사흘 동안이나 지체했다는 거짓말보다 단 하루만에 금방 살아나셨다는 거짓말 쪽이 더 능력 있음 직하게 그래서 믿음직하게 보일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일부러 어떤 의도가 있어 "사흘만"이라고 설정했으면 의도적으로 그렇게 "사흘"이라고 한데 대한 그럴싸한 설명이 붙게 마련입니다.
부활이 거짓말이라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일절 그런 설명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라는 것입니다. 왜 3일만인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새 창조와 첫 창조와의 관계를 이로써 하나님께서 설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양의 죽음이 상징하는 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이제 우리는 새 창조를 입은 새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들(養子)이 됩니다. 새 창조가 필요하게 된 것은 첫 창조에서 인간의 범죄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차질이 빚어진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에 이르고 멸망에 이르렀으니 당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하시다 말고 부득불 새롭게 인간을 창조하시느라 다시 일에 뛰어드신 격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마치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신 것처럼 새 창조의 일이 그 때 완수된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새 창조의 일을 완수하시고 안식하신 것입니다.
완수하셨으니 곧 "다 이루셨으니" 그 다음은 안식일 것이야 당연합니다. 그리스도께 '죽으심'의 의미는 우리의 새 창조 작업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것이 목요일인데 즉 수요일 저녁에서부터 시작하여 목요일 저녁까지의 하루 동안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오는 것이 금요일로서 이는 평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토요일이므로 이는 또 일반 안식일입니다. 이 안식일은 말할 것도 없이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6일 창조를 마치신 이후의 하나님의 안식을 상징합니다.
묘한 것은 그리고 여기서 의미 심장한 것은 이 두 안식일 사이에 평일 금요일이 개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래서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즉 안식일 하루, 평일 하루, 그리고 다시 안식일 하루입니다. 그러나 이 두 안식일이 그 의미가 아주 다른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새 창조'와 '첫 창조'의 차이입니다. 새 창조는 인간에 대한 것으로 한정되어 있고 첫 창조는 총체적인 일반 창조입니다. 모든 것을 그 때 다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식 측면에서 볼 때, 새 창조가 먼저 오고 그래서 일을 완수하신 후 쉬신 그 다음에 일반적인 창조(먼저 있었던)의 안식이 오는 순서로 되어 있으니, 이것이 "사흘 후의 부활"의 의미요 이상과 같은 '안식일 하루, 평일 하루, 그리고 다시 안식일 하루'로 된 배열의 의미입니다. 즉 총체적인 창조는 이미 6일 창조로 끝난 것이고 그래서 7일째는 쉬시는데 불행히도 다시 새 창조로써 일을 새로 시작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그래서 이 새 창조가 끝남으로써 진정한 총체적 의미의 창조의 안식이 시작되었다는 그 뜻입니다.
즉 새 창조가 완결됨으로써 이전의 그 총체적 창조의 대단원이 이제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되고 종결되는 것이니, 그래서 새 창조의 안식이 먼저 오고 그 총체적 창조의 안식이 맨 나중에 오게 됩니다. 원래는 이렇지 않은 것이니, 인간 범죄만 없었더라면 새 창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안식도 한번만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구원이라는 새 작업이 완수되어야 하는 절대적 필요성에서 새 창조가 시작되고 그리고 그것이 완결됨으로 인해 거기 따른 안식(하나님의 창조 작업이 완수되었음을 고하는)이 필요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완수됨으로써 그 총체적인 창조의 완결이 이제 비로소 처음으로 그 '완전 종결'을 고하게 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의 그 사흘 기간에 그 일반적 안식일이 개입해 있음으로써 그것이 상징하는 바 의미가 이렇듯이 큽니다. 문제는 다시 말하지만 그 두 안식일 사이에 끼인 평일(금요일)이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평일이라는 것은 안식일과 대비해 볼 때, 더구나 이 두 안식일 사이에 끼인 그 성격상 분명 그것은 쉬는 날이 아닌 "일하는" 날로서의 의미입니다. 의미의 핵심은 여기에 있어 이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새 창조의 과업은 종결되셨으나 그러나 대단원의 창조 즉 총체적인 창조가 종결되어 끝나기 전에 아직도 여전히 "일하는" 기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머리되신 예수님께서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는 바로 오늘날의 이 세상에서의 교회 기간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아들들이면 당연히 아버지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그 상속자된 도리이자 의무이고 받은 바 특권입니다.
우리 자신 하나님의 이 새 창조로 말미암아 새로 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됨으로 인해 이 아버지의 새 창조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그렇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우리 각자의 몸에 채우는 일차적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로서는 아버지의 일이요 따라서 우리는 그 아들들로서 당연히 아버지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안식일 사이에 끼인 평일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일 다음에 일반 안식일이 오는 것은, 이와 같이 새 창조로서의 사람들 구원해내는 일[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몸된 교회가 함께 일하는-고후 6:1]이 종결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모든 창조 작업이 완결됨을 상징하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신 날은 천하없어도 반드시 수요일이어야 하며 수요일이 '유월절의 예비일'에 해당되어지는 해에 돌아가도록 모든 것이 짜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해야 위의 설명대로 유월절 안식일 후의 평일 그리고 그 다음의 일반적인 안식일이라는 순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과 평일의 배열 또는 위치가 평일, 일반 안식일, 유월절 안식일이 되어도 안되고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이 겹쳐져도 안되는 일입니다. 일반 안식일이 먼저 오고 그 이후에 유월절 안식일이 와도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의미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일반 안식일이 가리키는 바 총체적인 창조가 전부 무효화하고 새 창조가 전부를 차지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어 버리므로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총체적인 것은 그대로 두고 오직 인간만을 새로 창조하시는 손보심으로 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창조라 하더라도 온통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창조의 안식은 잠깐 유보하시고 먼저 새 창조 즉 인간을 새 피조물로 만드시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지고 비로소 총체적인 창조가 종결되는 것처럼 그런 형식을 취해야 제대로 된 순서이고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유월절 안식일이 먼저 오고 먼저 오되 그 후에 반드시 평일이 끼어 있어 "일하는" 기간이 상징되어야 하고 그리고 총체적인 창조가 종결되어 안식을 맞는 그런 상징성이 충분히 완벽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도 그런 의미에서는 안식일이어서도 안되고 반드시 안식 후 첫날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도 유월절 안식 후 첫날이어도 안되고 유월절 안식일을 먼저 보내고 일반 안식일도 마친 그 첫날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앞서 설명한 유월절 안식 후 평일의 의미가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의 순서대로 그리고 그 둘을 겸하여 모두 종료한다는 것은 새 창조이든 총체적 창조 즉 첫 창조이든 모든 창조의 주체이신 조물주로서 이제 필요한 모든 창조를 끝내시고 안식에 들어가심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 두 안식을 종료한 후 첫 날이라야 하는 것은 "일하는 평일(두 안식일 사이에 끼인 그 '3일' 안에 포함된 평일)"로서의 의미를 살려, 하나님께서 계속 그 교회를 통해 일하심을 상징하고 있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구원의 작업 즉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 모두 구원되는 일이 다 끝난 다음에는 최종 안식이 선포되는데 그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제까지도 일하시는"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들"(고전 3:9)이라 한 것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라고 한 표현된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새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므로 총체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는 오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벧전 1:12)이라 했고, 하나님의 이런 오묘하신 섭리와 경륜은 사람이야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며, 모든 것이 이와 같이 빈 틈 없이 아름답게 원리원칙을 따라 짜여져 있음을 그 한 귀퉁이나마 이렇게 잠시 들여다보고 맛보게 되는 우리의 즐거움은 크고 이로써 적잖게 힘을 얻게 됩니다.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의 절묘한 배치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사이에 두 종류의 안식일이 끼이는데 하나는 '유월절 안식일' 그리고 '일반적인 안식일'로서, 전자는 주님께서 우리를 새 피조물로 만드시기 위한 "일하심" 즉 '새 창조'를 "다 이루시고서"(요 19:30) 이전에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제7일"째 쉬신 것처럼 쉬신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그럼으로써 이제는 모든 창조[새 창조를 포함하여]를 끝내시고 완결하시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말하자면 안식일 개념에서 그 첫째의 것 즉 애초의 "6일" 창조 후 안식하심과 같은 의미의 '창조 작업 후 그 완성에 따른 쉼' 즉 안식에 해당됩니다.
이전 창조나 새 창조나 창조임에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는 안식일의 두번째 의미 즉 하나님께서 쉬시니 우리도 쉬는 것 다시 말해 죄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됨으로써 편히 안식하는 것, 곧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으므로 너의 하나님이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신다"(신 5:15)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첫번째 의미는 말할 것도 없이 천지창조에서 "6일" 창조를 마치시고 "7일"째에 쉬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새 창조의 완결을 고하는 유월절 안식일이 목요일이고 그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을 격(隔)하는 경계로서의 금요일은 첫 안식일 즉 "6일" 창조의 완료가 인간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미완성이 아닌 미완성'이 되어 버려 하나님께서 부득불 새로 창조의 일을 하실 수밖에 없는 저간의 사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새로 일하실 수밖에 없는 사실을 가리킴이니,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이미 천명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새 창조가 완료되었으므로 이제 진정한 의미의 "6일" 창조가 완료되었다는 점에서 토요일의 일반 안식이 중복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반적인 안식일은 이와 같이 안식일 그 자체에도 의미가 분명하지만 그 안식일 이후 첫날이 되는 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함으로 비로소 산 자가 되어 산 자로서 "일하게" 되는 그 첫날을 의미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6일 창조의 그 첫날부터 창조의 일을 시작하신 것처럼 주님은 교회로서의 우리들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머리로 하여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서 사람 구원하는 일에 새롭게 뛰어드는 계기를 처음으로 맞는 의미가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양면성 즉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이신 두 측면을 동시에 나타내심이니 '하나님'으로서는 그와 같이 창조를 완료하심입니다. 사흘간 "땅 속에 계심으로써"[마 12:40] 이상 설명과 같은 상징성을 통해 이 사실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제 살아나실 때에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심이니,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아버지의 새 창조의 일에 동참하여 사람 살리는 일에 뛰어드는 형국입니다. 곧 "안식 후 첫날"의 상징성입니다.
이제 이렇게 "일하는" 날들 이후의 안식은 이제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우리가 마치는 그 날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 하는 그 날 들어가게 되는 것임을 성경은 명백히 밝히고 이를 가리켜 "저 안식에 들어간다"(히 4:3) 한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주제를 가지고 주님을 공박할 때, "너희는 하나님이 창조를 다 마치고 이제 안식하시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아버지께서 쉬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범죄로 인하여 지금도 일하시는 과정이시고 나도 그렇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니 너희가 악하게 고집하는 그런 주장은 실상 실효가 없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도 인간 구원의 종료가 아직 끝나지 않아 여전히 우리가 사람들을 구원해낼 막중한 책임을 그 몸된 교회로서 지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 와중에 있으므로 구태여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특정일로 정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으니까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이 명백히 강조된 언급이 "한 날을 더 중히 여기지 않고 모든 날을 똑 같이 여기는"(롬 14:5)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한 날을 중시하는 것과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것에 대하여 옳고 옳지 않은 이분법으로 가르지 않고, 오직 강조하기를 특정일을 중히 여겨도 또는 중히 여기지 않아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사는 일념으로 하면 형제간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오직 견해 차이로 해서 교회 내의 불필요한 분열에 휘말리지 말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의 날"이라고 특별히 표현된 것은 있으나 이는 유대인 안식일의 대안(代案)으로 삼으라는 의미가 아니니, 그런 것은 이제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날"로서 기념하는 정도는 가하나 그것을 다른 날보다 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안식일 지키는 것이나 십일조 바치는 것이나,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무조건 내게 속한 것이니 모두가 내 것이라는 자기중심 일변도의 사고방식을 타파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실 처음부터의 영원한 진리 즉 우리의 전부, 우리 존재 자체가 조물주 하나님의 것이라는(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것이니 이는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그러함) 사실을 부분적으로나마 미리 일깨우는 한가지 방편으로 그렇게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것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7일 중의 하루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7일의 7일 모두, 일년 365일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고 내 것은 없는 것이 영원한 진리임을 알고 있습니다. 나의 소유의 1/10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100프로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인 줄 아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게 주신 선물로서 주님의 것이 다 내 것이 되었으므로 그렇습니다. 이 진리를 달리 표현하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이가 없고 죽는 이도 없다"(롬 14:7)가 됩니다.
이 언급에 다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고 아주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9/10는 내 것이다 또는 7일 중 6일만은 내 것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내 것이 어디 있으며 나의 9/10가 어디 있고 나의 6일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직도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1/10, 하나님의 안식일(7일 중의 1일) 등을 고집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루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모든 날이 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나의 영과 육체가 다 주님의 것입니다[고전 7:23]. 혹자 이를 두고 "그렇다면 내 것과 하나님의 것과의 경계가 불분명해지지 않는가. 주님의 날[이전의 안식일 개념]도 지킬 것 없고 십일조도 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면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로 답하게 됩니다.
이 경우 그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는 법이 없으니 그래야 그런 표현이 조리 있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것이 대관절 어디 있는가? 아직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실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논하는가?" 하는 반문이 그 답변이 될 수 있습니다. 내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니 즉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고 섬기는 차원이 아니면 나는 한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새 피조물" 됨입니다.
나를 위하는 몫은 주님이 담당하시기 때문이니 그것이 내게 영원한 선물로 자신을 주신 즉 성령을 주신 의미입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나의 개인적인 소유로 즉 하나님 주신 개인적인 선물로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곧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생명과 사랑의 원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나를 위하심은 나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사실로써 충분히 입증되어 더 이상 증거를 요하지 않습니다.
창조(새 창조)의 차원에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나를 위하시는 사실은 영원무궁 변하심이 없습니다. 고로 이런 의미에서도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에 걸쳐 또는 두 의미가 동시에 두루 겹쳐지는 "사흘 밤 사흘 낮"에 의한 그리스도의 수요일 수난(受難)은 정확한 것입니다. 왜냐면 이는 첫 창조와 새 창조의 관계와 우리의 자세를 명확히 마치 그림을 그려 주듯이 나타내고 있는 까닭이니, 새 창조를 떠나서는 첫 창조가 완결될 수 없고 첫 창조를 무시하고서 새 창조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새 창조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은”[창 3:17] 것도 6일 창조 이전의 그 “어두움”, “공허”, “혼돈”과 유사한 것이니, 6일 창조 이전의 혼돈으로 다시 돌아와 버린 셈입니다. 6일 창조의 클라이맥스[정점]로서의 인간이 이와 같이 망가져 버림으로 인하여 창조를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새 창조"입니다. 따라서 인간 이하의 모든 피조물도 그 영향을 그대로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는 것이 현재의 모든 피조물의 “고통과 신음”[롬 8:22]입니다.
이 모두 하나님 친히 느끼시는 쓰라림과 괴로움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것이요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고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새 창조가 완료되었으며[마치 산모가 진통을 하듯이-요 16:20,21], 그 나머지의 정리 작업 곧 이 새 창조에 따른 개별적인 인간 구원은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하나 곧 한 몸 체제이니까 그 중의 하나라도 고통 중에 있으면 머리를 위시해서 전부가 다 고통일 것이야 뻔합니다[고전 12:26].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하는 데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고통 속에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롬 8:19-23] 함과 같습니다. 이 “신음과 고통”은 해산(解産) 중의 진통(陣痛)임을 말합니다[KJV, NKJV, NIV 등의 영역].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 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을 받음으로써 각자는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즉 사랑 가운데 끝까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 창조는 드디어 완료됩니다. 이 "완료"라는 것은 영물(靈物)들을 완벽하게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거룩한 천사들”은 그 창조가 완료된 상태이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및 악령 일당은 실패작[자기 자신 실패한, 거룩한 천사들에 비한다면]임과 같은 의미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실패하신 것이 아니라 인격성을 갖춘 피조물에게 완전한 자유 선택권을 주심으로써 그 스스로 자기를 완성[완료]하게 하심인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악령 일당은 그 스스로의 불복종으로 이에 미치지 못한 결과를 낳으니 결론적으로 말해 그 스스로를 실패작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경우 첫 사람 아담과는 다르니, 이유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의 ‘실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성공’ 사례도 있음이니, 사람은 하나뿐이었음에 반해 영물들은 여럿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하나[혹은 남녀 한 쌍]만 만드셨고 그 둘이 똑같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어 영구히 못쓰게 된 까닭에 새로 창조의 일을 시작하시지 않으면 안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새 창조의 결실이 이루어지며 따라서 그 중에는 온전히 결실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중도(中途) 하차(下車) 즉 실패작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영물 중에 “거룩한 천사들”이 생기고 동시에 “악령”들이 생기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대칭 개념에서 선한[좋은] 것이 있으면 악한[나쁜] 것이 있게 마련인데 그런 영원한 구별을 각자의 자유 의지로 그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 짓는 것입니다. 만일 당시 인간이 아담 부부만 있지 않고 많은 인생들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었다면 또는 아담 부부가 범죄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인간들을 출생시킬 수 있었다면 그래서 그 가운데 악인(惡人)들이 생겨나고 의인(義人)들이 생겨나 구분되어졌다면 하나님의 새 창조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영물들의 경우처럼 “거룩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로 정리되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고는 오직 아담 내외뿐인데 범죄함으로써 인간 자체가 죽음에 함몰되었기 때문에 새 창조가 필연적이게 된 것입니다. 이 새 창조는 선별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하나하나씩 진행하게 됩니다. 이로써 인생들 역시 이제는 “거룩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로[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로 영물들이 구분된 것처럼] 각자 자기의 자유 선택에 의해 스스로를 분류시키는 선별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영물들의 그런 작업은 이미 완료되었고 이제는 오직 인간들을 상대로 그와 같은 작업이 진행 중인 것이 현재의 시점(時點)입니다.
자유(自由), 자유인
그래서 안식일은 하나님이 제7일에 쉬셨다는 사실과 아울러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 즉 노예의 삶으로부터 자유 해방을 기념하는 것이 되어 있는 이중(二重)의 의미를 지녔던 것입니다. 즉 한 때 완료였으나[아담의 범죄 전] 현재는 새 창조[아담의 범죄 후 아담이 죽은 자가 되어 버렸으므로]의 측면에서 아직 완료되지 못하고 진행 중임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이 새 창조의 역사(役事)는 완결되었으나 인생 각자 개별적으로는 아직 정착되지 못하고 정착되어 가는 단계에 있어 진행 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 작업의 이러한 종결의 날을 고대하고 있고[롬 8:19] 현재 그 시점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리, 정비, 정돈으로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되풀이 강조이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일이 아직 정착(定着) 단계에 있지 않고[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구원해 가시는 터이므로] 현재 진행 중이고 우리는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에서 도태되고 걸러지느냐 아니면 창조의 최종 완성 단계로 하나님과 그리고 기타 구원 얻은 사람들과 함께 안식에 들어가느냐[히 4:3] 하는 시기에 처해 있어, 자기 운명을 각자는 자기 스스로 정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범죄했다고 억지로 멸망으로 끌려간다고 인식할 일이 아니라 죽음과 생명, 선과 악이라는 영원한 대칭 면에서 어느 쪽으로든 그 한 부분이 스스로 되어 가고 있고,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각자 자기의 자유 선택으로 그렇게 되어 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상은 새로 창조[아담이나 영물들이 애초 창조된 것처럼]된 사람들에 관한 것이고, 처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스스로 “악한 사람”이라는 범주에 속함을 자처하는 터이므로 그런 분류로 직행하는 결과가 됨은 당연합니다[요 3:18].
그러므로 인간 구원은 자기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결정되는 것임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 스스로 결정함이라는 것은 좋은 것(善)을 스스로 따르고 올바른 것(義)을 사랑하는 것이 그 기준이 됨을 말합니다. 즉 스스로를 선한 자로 만들고 의로운 자로 세우겠다는 의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인으로 분류됩니다. 그런 의지가 있을 때 새 창조가 적응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는 것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했고[히 4:10]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 한 것입니다.
오늘날 만연된 그릇된 풍조는 이미 구원 받았다고 하여 태평으로 지내는 데에 있습니다. 순종치 아니한 본에 빠지지 않도록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는 성경의 경고와는 전적으로 다르니, 성경대로의 구원을 믿지 않고 인간의 헛된 종교 교리를 믿고 있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애초 사람을 지으실 때 의도하신 바와 같은 서로 사랑하는 삶의 법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만이 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으로써 이 그리스도의 시대에서 분류됩니다.
의지와 능력은 별개입니다. 능력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의지는 우리 각자 인간이 능히 나타낼 수 있는 인간 고유의 것입니다.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는 자유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 의지라는 말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기의 의지를 따라 자기를 그렇게 스스로 분류시키는 결과가 되도록 처음부터 정하신 것이니, 자기 스스로 악인되기를 택했으므로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할 일이 아닙니다.
악과 선, 낙(樂)과 고(苦)라는 영원한 대칭으로 존재할 뿐이므로 죽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있음과 없음의 대칭 관계는 과거에 없었음[창조되지 않았음]과 현재의 있음[창조되어 존재함]으로써 이미 확고히 되어져 있으므로 달리로는 형성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있고 없음의 대칭 관계는 이미 종료된 것이니,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창조로써 모든 것은 과거에는 '없다가' 지금은 '있는' 것으로서만 형성되어 있어 대칭성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만의 '변화' 즉 대칭 개념으로 분류되는 것뿐입니다. 강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자유를 주셔서 스스로의 결정으로 그렇게 되도록 하심이니 그래서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원망할 대상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백히 드러납니다. 올바른 것[의]을 좋아하고 선[좋은 것]을 사랑하여 이를 행하는 것 즉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삶의 법대로 사는 것이니 삶의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받들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사람의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셨다”[히 1:9] 함이 바로 이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를 따라 행하심으로 우리의 본이 되시고 그렇게 자기를 따라 오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기준에서 벗어나면 생명과 선과 의의 대열에서 낙오하고 탈락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대신 그 반대 편에 영원히 위치하게 됩니다. 이 모두 스스로의 결정에서 되어지는 일이므로 "두렵고 떨"[빌 2:12] 것은 당연합니다. 스스로의 결정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설명한 대로 지금은 창조가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진행 중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도 일하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 믿었다가도 나중에 얼마든지 믿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진행 중이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험에 우리 스스로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어느 방향으로 완결되는지가 결정됩니다. 영물들은 이미 완결되어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로서 현재 분류되어 있으며 이는 영원히 변치 못합니다. 우리 역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지"[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여부를 따라 이와 같이 대칭적인 의미로 분류가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것이 이 세상에서 의[올바른 일]를 행하고 선[좋은 일]을 행함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것이고 그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하고 올바른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타의 모든 선행도 이와 같은 영혼 구원의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영원세계에서의 생명과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기로에 서 있는데 이보다 의미 있는 일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생명을 얻도록 하는 일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옳은 것이고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영원세계가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지금 이 때가 창조가 완료된 때라면 모르거니와 영원한 운명이 각자의 자유 선택에 따른 결과로 각자를 기다리고 있는 엄숙한 현실 앞에서는, 그런 영원한 대칭 관계로서의 선과 악, 생명과 죽음, 낙(樂)과 고(苦)가 양립해 있을 것인즉 그 올바르고 좋은 편을 택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이끌어 주는 것이 유일무이의 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타 선행도 바로 이렇게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차원에서만 이루어져야 마땅한 것이니 왜냐면 그 외의 것 즉 이 세상에 속한 일시적인 것은 영원성에 비하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것을 버리고 그런 의미심장한 것을 알면서도 무의미한 것을 택하는 것 자체가 악(惡)입니다. 그것은 진정 내 이웃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분대로 사는 것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이기심, 개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지 못하고 죄 많고 악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누구나 양심만은 지니고 있기에 이 세상에서도 그런 개인주의적 성향은 누구에게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장치하신 인간 양심이 바로 그런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때문에 현재의 이런 악한 인간 사회도 공동체 의식을 최고 가치로 여깁니다. 그렇게 으뜸으로는 치지만 그리고 양심의 가책에도 불구하고 인간 양심대로는 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스스로 푸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뿐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렇게 공동체 의식으로 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주는 희소식 곧 복된 소식(福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입니다.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으니 배부를 것”[마 5:6]이라 하셨습니다.
무릇 올바른 것, 옳은 것, 마땅한 것, 합당한 것[빌 4:8], 사람 사는 도리로서의 모든 정의 관념이 투철하여 그런 세상을 바라고 지향하는 그 누구든지 이 희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그것은 당연히 올바른 것밖에 없고 선한[좋은] 것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이 모든 좋은 것, 올바른 것의 창조자이시기에 그렇습니다. 바로 말해 ‘한 몸’의 원리가 사람 사는 법질서입니다. 그래서 의[義] 즉 옳다고 하고 선(善) 즉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몸으로 사는 것이니 여기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로서, 바로 자기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관계이니, 나 자신으로 말하면 머리도 나를 위하고 몸 전체가 나를 위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고로 나 역시 자연적으로 나를 위하지 않고 머리를 위하고 몸 전체를 위함으로써 몸의 각 지체를 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역시 동시성이고 양면성의 이치를 따릅니다.
왜냐면 모두가 나를 위하니 내가 나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결코 억지나 무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성경은 “자기(自己) 부인(否認)”이라 합니다. 한 몸의 원리에서는 자기 부인이 핵심입니다. 각자가 자기를 위하다가는 모두가 따로따로 놀아나 한 몸으로서의 정상적인 기능을 못합니다. 나를 위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자연적으로 위해지는 삶의 최고 지혜입니다.
바로 이런 최고 지혜로 사는 삶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불가능하다는 유토피아(理想鄕)를 이룰 수 있게 되니 곧 천국입니다. 다시 말해 완전무결한 이상향 건설의 역군을 모집하고 그 대열에 동참하자는 호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傳播)입니다. 물론 세상 종교도 그런 이상향을 목표합니다. 누구나 영생하기를 바라고 그런 사랑의 세계를 염원합니다. 그러나 망상에 그치고 염원에 불과하여 공허한 것이므로 실제 상황과 구별해야 합니다.
만유의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렇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으니, 공중에 뜬 누각일 뿐 실제 상황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막연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금까지의 설명 그대로 논리가 정연합니다. 어느 모로 보나 합리성과 타당성이 뚜렷합니다.
반면에 세상 종교는 가르친다고 하는 자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아리송하고 가닥이 잘 잡히지 않고 애매 모호하여 막연하고 추상적임을 본성으로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것을 말하려 하니 자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중심으로 각자가 나가는 한은 이상향은 불가능한데, 그러면 어떻게 자기 부인을 도출해낼 수 있느냐, 여기서 세상 종교는 딴에는 그럴 듯한 이론을 전개한다 하나 그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자기 스스로 본성으로 느낄 정도입니다.
이런 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기 세뇌, 자가 최면일 뿐입니다. 극악스럽게 달려드는 자기중심이라는 마물(魔物) 곧 자아(自我)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또 그런 가정 아래 자기 부인을 이루어보려는 애잔한 시도를 하게 되어도, 엄연히 현실적 존재인 자기라는 것을 스스로 부정한다고 그 자기가 없어질 리 없으니 자기 마취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느냐 하면 그 방법은 창조적이고 과학적입니다.
과학적이라 함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절대로 썩음을 피할 수 없고 면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적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나의 현재의 죽음의 상태에 동참하심으로 나와 하나 된 관계에서 죽으시고, 그렇게 하나 되어 있음을 기정사실화한 바탕 위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친히 그 영으로써 내 안에 임하심으로써 그 '나와 하나 되심'을 현실화, 구체화하는 것이 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영혼을 받아 태어나는 그런 방식이라 할 것입니다. 원래 사람이 육체만 물려받는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태(胎)가 남자의 씨를 받음으로써 인간의 육체를 형성시키더라도 반드시 영혼이 따로 조성되어져야 사람이 됩니다. 남자의 씨를 받아야 그 씨를 통해 독자적인 영혼이 조성될 수 있는 것이며 이 영혼 탄생은 즉석에서의 하나님의 별도의 창조로 이루어집니다[창 2:7/히 12:9/사 57;16/슥 12:1].
그러므로 육체는 어머니의 육체를 물려받으나 그 영혼만은 아버지의 씨를 받음으로써만 비로소 조성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남녀 양성 중에서 어느 것 하나가 먼저 생겼고 그 먼저 생긴 것이 근본 또는 근원이 되고 그 후로부터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바로 그 근원 또는 근본의 “씨”가 되어야 함이 자연 순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머지 성(性) 역시 이 ‘근본’에서 나오기는 마찬가지이기에 그렇습니다.
고로 남녀 양성의 "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반(反) 과학적 고집일 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남자[부친]의 씨이고, 육체만 여자[모친]로부터 물려받는데, 애초 최초의 여자 역시 남자[아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육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영혼이 그 육체에 첨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아담이 그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a living being]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았다”고 할 때의 ‘산다’는 것은 ‘영생’을 가리킵니다. 무릇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존재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는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이미 아담은 영혼 없이 육체만으로 창조되었을 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살아 있음은 이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의 생명과 같은 것으로서 영생하지는 못하는 것이니 한시적 생명입니다. 이런 생명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니 무의미할 뿐입니다.
보기 나름이요 인식하기
나름이니 항구적인 실패로 보느냐, 악착 같은 끈기로 보느냐,
후자로 보는 것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함이다-"with all perseverance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따라서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은 우리의 생명이다
악착 같이 끈기 있게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함이다-"with all perseverance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따라서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은 우리의 생명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