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5일 토요일

(18)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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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질서

한마디로, 법과 질서의 아름다움 즉 선하고 올바른 것을 가르치고 그렇게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사람들이 되어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법과 계명이라는 것은 좋은 것[善]과 올바르지[義] 못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르쳐 올바르게 되도록 하려는 수단입니다[딤전 1:9].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서 “불법한 자, 복종치 아니하는 자, 경건치 아니한 자, 죄인, 거룩하지 아니한 자, 망령된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통하여 사람 사는 도리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제는 알게 되어 그 법과 질서를 사랑하여 지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9]고 했습니다. 따라서 법은 마땅한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으로서 이제 우리는 율법[계명]을 통해 사람답게 되는 것,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배워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우리도 배웠으니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알리는 것이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사명이고 소명입니다. 이렇게 정의(正義)가 강 같이 흘러 법과 질서가 확립되어 있는[이는 어디까지나 강제 즉 타율이 아닌 자율을 기반으로 하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나야[출생해야]” 합니다[요 3:3].

저주 받은 이 세상에서의 출생이라 저주의 질서를 따라 모든 피조물이 산고(産苦)의 진통(陣痛)을 필연적으로 겪게 되어 있습니다[롬 8:22]. 고로 우리의 고난 받음이 필수이고 또 필연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에서의 이 “오늘”의 의미는, 성경이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3] 했고, “오늘 너희가 그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광야 교회” 당시를 말함-행 7:38]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15] 한 데에서도 강조됩니다.

1907년 한국 부흥 이후 한국 교회는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선교사가 가르치거나 시킨 것도 아니고 한국 교회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초대교회가 매일 모인 것처럼 매일 모임의 양상이고 성령으로 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필요에 의해서 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에서 세계 각지로 선교사를 파송할 때 이 매임 모임 곧 한국의 새벽 기도회 같은 것을 시행하도록 할 일입니다.

모든 인생은 오늘밖에 없는 것이니 내일도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일정하게 일률적으로 그 정한 때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날짜를 정해서 모인다는 것도 실질적으로 무의미하고 우스운 일입니다. 제도적인 형식 그리고 상징적 의미에서 구약시대에 특정한 날[안식일 등]을 정하여 지키라고 하던 것과는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필요해서 모이므로 역시 현실을 감안해야 하는데 그 현실이 바로 인생에게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오늘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후도 어찌 될 것인지 누구도 확약 못합니다. 그래서 “너희 중 오늘이나 내일이나 아무 도시에 가 거기서 일 년을 지내며 장사하여 이득을 보겠다고 하는 이들이여,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다. 주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도 할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약 4:13,14] 한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모든 것이 ‘오늘’입니다. 내일이 보장되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또 “아버지의 이름”이라 함은 다름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니 곧 누구든지 믿으면 그 “믿는 모든 이의 아버지” 되심이 바로 그 “이름”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사도 서신에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 이 이름밖에 통하지 않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로서의 이름은 더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람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우리 아버지,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십니다[요 20:17]. 우리 기도의 대상은 “우리 아버지”십니다.

물론 "내게 구하면 내가 이룰 것이다"[요 14:14] 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아들의 모습이시고 아들의 모습이 아버지의 모습이므로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16:23] 하신 말씀을 풀이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둘이 하나로 계시는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응답하시듯이 하신다는 그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응답하시는 것은 아들의 이름으로 주시는 것이요, 아들께서 응답하시는 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하심"[14:13]입니다. 즉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는 모습으로서, 아버지도 아들도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의 아버지”[히 12:9]십니다. 인간[아담]의 영혼 창조도 하나님 친히 그 숨을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고 스랍이나 그룹 및 에덴낙원의 “동물” 즉 천사들 모두 영물들로서 하나님 친히 지으신 것입니다. 인간 구원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의 일원으로 구성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씩 개인이 독자적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라기보다 한 몸을 구성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지체(肢體) 찾기[만들기] 운동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은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하게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困憊, 힘이 없고 지쳐 몹시 고단함)할까 함"[사 57:16]이라 하신 데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슥 12:1]라 한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의 육체는 물론 만유로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닌 것이 없지만, 특별히 영의 아버지되심을 강조한 대목에 유의해야 합니다.

지정의(知情意)의 인격성을 갖춘 "모든 영의 아버지"[히 12:9]시라 하면서 "우리 육체의 아버지"[:9]와 대조시킨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육체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인식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을 육체로만 인식하여, '보이는' 육체의 아버지와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있지만, 실상 우리는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영혼이라는 인간의 이중 구조를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아버지를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영혼의 아버지를 인식함에 아무 장애가 없는 것이니 인식 나름이요 차이인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자연스럽게 기도할 일입니다. 형상이 없으신 영으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영혼도 형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ㄷ할 때 어색해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연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계는 우리 육체의 오관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가시화가 특징입니다.

그러나 자연계와 대립[대칭, 상칭]되어 있는 영계는 우리의 오관으로는 인지할 수 없습니다. 영계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스스로 우리 눈에 의도적으로 나타내 주어야 즉 가시화를 시켜야 우리 눈이 그들을 볼 수 있는 그런 극히 제약된 환경이 이 자연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처럼 영계에 있다면야 물론 이런 제약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몸이 신령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도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있으면서 아는 것과 이런 제약 속의 자연계의 몸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차이가 없을 수 없습니다. 현격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자꾸 따지려 들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몇 가지 기본적인 증거만으로도 충분하니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야"[마 8:3]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3] 경고하셨습니다. 영으로 나는 것은 영이고 육으로 나는 것은 육이니 우리가 영으로 다시 나야 한다는[요 3:6] 말씀은 인생들이 현재 이 자연계에 있어 죽은 자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처럼 영계에 있었다면 이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으니 해당이 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범죄하여 죽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영으로 다시 나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영원히 그리스도의 시대요 세상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 친히 영원히 그 아들의 형상으로 나타나시게 되어 있으므로 이제는 "볼 수 없는 아버지", "보이지 아니하시는 아버지"는 통할 수가 없습니다.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이신데[고후 4:4] 우리는 아버지를 그 형상 즉 사람의 형상으로 뵐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아들은 곧 아버지의 모습이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는 당연히 사람의 모습이십니다. 아들께서 영원히 이제는 사람이 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시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이심에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사람이 원래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이므로 이런 이중성에도 역시 부합하시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시면서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이신 이중 구조이십니다. 이 하나님이신 측면은 그 어느 누구도 뵐 수 없습니다[딤전 6:16].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어 계신 마당에, 아무리 우리 사람 사이라도 보는 것은 그 육체이지 영혼은 원래부터 볼 수 없으니 이상한 일도 어색한 일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 육체를 지니시게 되었으니 곧 사람의 육체이시나, 그 영혼은 하나님이시니 곧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은 영"[요 4:24]이신 것입니다. 이제 성령으로 내게 임하여 오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영원히 사시는 것은, 그러나 육체와 분리되어 그 영혼으로서가 아니니 영원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시고도 하고 또한 사람이시기도 한 주님을 내가 모시는 것은, 사람으로 말하면 마치 그 영혼만을 내 안에 성령으로 모시는 듯싶어도, 사람만 아니시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신지라 육체가 없으시고 따라서 사람처럼 영혼과 육체로서의 이중 구조가 아니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중 구조입니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로 분리해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고 반드시 불가분의 하나로서 움직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여 계시는 주님은 사람으로서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서 계십니까.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이시라는 점에서는 이중 구조이십니다. 사람으로서는 영혼[성령 곧 원래부터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은 영이시니까]과 육체[이제는 영원히 사람이시므로]의 이중 구조로 계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므로 그런 의미에서 또한 이중 구조이십니다.

그러나 이 이중 구조는 통일되고 연합되어 하나의 이중 구조이고 겹쳐진 이중 구조는 아니십니다. 왜냐면 사람으로서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이시지만 그리스도의 영[우리로 말하면 우리의 영 또는 영혼]은 성령으로서 하나님이시므로 바로 이 이중 구조를 가리켜 하나님[영]과 사람[육체]과의 이중 구조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일 이중 구조이지 이중 구조가 겹으로 둘로서 되어 있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하여 오실 때, 그 영으로는 하나님이시니까 얼마든지 '하나님'으로서['사람'이 아닌]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그리스도의 영]과 사람[그리스도의 육체]으로서의 불가분성의 이중 구조이시므로 영혼과 육체로 분리해서 움직이실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람으로서의 특징이니까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신 사람이신 이상 이 특성을 따라야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비록 성령으로 오셨지만 그 불가분성의 이중 구조 그대로 내 안에 오심입니다. 육체로 오시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 하겠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이 사람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하나님은 영이시므로]이신 특성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우리와의 차이이십니다. 우리의 영은 사람의 영이고 하나님의 영이 아니므로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이자 사람인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그러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실 때는,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으로 오시는 것이므로 사람은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로서 둘이 불가분이므로 비록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나 육체로 오신 것과 같은 완벽한 의미와 위치로 오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내 앞에 내가 모시고 있는 주님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하나님이시므로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실 수 있지만 그 모습과 특성은 엄연한 사람이십니다. 그리고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서의 불가분성 그대로입니다.

그렇다고 신령한 몸으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신령한 몸이라도 한꺼번에 여러 사람에게는 임하여 계실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비록 천사와 같은 영물들도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또 사람 안에 들어올 수도 없습니다. 가룟 유다 속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들어갔다고 한 것도[요 13:27]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부리는 귀신이 들어간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귀신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명령 아래 손발처럼 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마음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가득하였다"[행 5:3]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넣어 준[요 13:2] 자기중심의 악한 생각과 욕심을 두고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집어 넣어 준 것이니까]이라 할 수 있겠지만 요한 사도는 그렇게 표현하고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들어갔다" 했으니 일단 차별을 두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신령한 몸으로서 내 안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오시되 그 신령한 몸 그대로 오심과 같은 의미 그대로인 것이니 하나님[그리스도의 영]과 사람[그리스도의 육체]의 불가분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형상 곧 사람이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의 그 신령한 몸의 모습으로 항상 내 앞에 게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의 성령께서 계시지만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아버지 친히 주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즉 보이지는 않으시나 충분히 신령한 몸 그대로의 모습으로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분명히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마 6:9]이십니다. 만유에 충만해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시 제자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는 성령을 가리켜,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요 14:17]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위해["대신하셨다"는 우리말 번역은 오역],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셨으니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벧전 3:18] 했습니다. 다시 말해 죽으셨으나 육체로 죽으셨고 영혼은 그대로 계시므로 이는 사람의 이중 구조로서의 특징으로 우리 역시 죽어도 육체가 죽는 것이지 영혼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죽을 때도 육체는 그대로 썩어 멸해지나 영혼은 그대로 남아 있어 마지막 심판 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요 5:29]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속성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는 달라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애초 창조될 때 먼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조성되고 이 육체를 바탕으로 하여 영혼이 조성됩니다.

즉 육체 없이는 영혼이 조성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 구조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조성되면서부터는 육체가 영혼을 따릅니다. 그래서 육체 역시 영원한 속성의 영혼을 따라 영원한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변환됩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로 죽은 자가 되어 도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니, 그 대칭[상칭]성 원리를 따라 거꾸로 이제는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게 되어, 그래서 육신에 따르는 "죄와 사망의 법"[롬 8:2]이 우리 "속 사람"[롬 7:22] 즉 영혼을 압박하게 된 것입니다[:24].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 성령을 받아 모시게 되면서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와 영혼이 주도(主導)가 되어[육체로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육체["겉 사람"-고후 4:16]를 종속시키기에 이른 것입니다[고전 9:27]. 이렇게 하여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 사람 아담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생들의 근원으로서의 아담이 되어 계시니 그 신령한 몸을 따라[첫 사람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었던 것과 같이] 모든 인생도 이제는 당연히 신령한 몸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단 그 행한 결과를 따라 영생의 부활이기도 하고 심판의 부활이기도 하니 주님의 말씀대로 전자는 "선한 일을 행한" 결과로, 후자는 "악한 일을 행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롬 2:6]고 경고한 그대로이니,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7], "자기중심이 되어["당을 짓는다"는 우리말 번역 및 흠정영역(KJV)은 오역]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8] 심판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재차 강조하여 "악을 행하는 자에게" 심판이라 했고[:9], "선을 행하는 각자에게" 영생이라 한 것입니다[:10]. 그리고 다시 결론 내리기를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 즉 사람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그 행한 대로 곧이곧대로 그 행한 선악을 따라 판결하신다 한 것입니다[:11]. 이는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니 우리가 [이와 같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함과 같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우리가 제대로 된 선행을 하도록 즉 선을 행하도록 하시려 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셔서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라"[엡 2:10] 함과 같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대신하여"가 아닌]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어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함과 같습니다.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이 무엇이냐[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다름아니라 사는 법대로 사는 것, 올바르게 사는 것, 가장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함입니다. 살기는 살아도 자기도 망치고 남까지도 망치는 식으로 살아서는 차라리 죽고 살지 않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아담이 그래서 죽은 자가 되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이 그래서 사는 세계가 아닌 영원히 죽음의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계 14:11] 세계에 처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살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살 줄도 모르는데 살아보아야 자기도 그와 같이 망치고 주변을 온통 풍비박산(風飛雹散)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에게 행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짓거리 그리고 가인에 아벨을 죽인 데에서 입증된 사실입니다. 그렇게 남을 죽이라고 해치라고 피조물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는 법대로 사는 것이 곧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이요 죄 짓지 않는 것입니다.

살 줄도 모르면서 살았다고 덤벙대는 것이 악을 행하는 것 곧 죄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두철미 사는 법칙, 사랑의 법칙을 따라 사는 것이니 이것이 선을 행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생명과 사랑의 법칙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한 몸의 원리를 따라 몸과 머리의 관계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도 그 훌륭한 결과를 기리고 있는[그러나 행하기는 반대로 꺼리고 있는]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인 것입니다.

이 한 몸이 되어 있는 이치에서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는 그 어느 편도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니 이를 가리켜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삶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은 인간이 알고 있는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최고도의 도덕률, 윤리의 최고 강령인 것입니다. 그 이상 가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니 그것보다 더 한 것은 없는 까닭입니다. 형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니 이보다 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라"[요 15:12] 하셨고 이를 다시 설명하여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13] 하신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하셨고.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다시 말해 구원 받은 당연한 증거임을 다음 말씀으로써 분명히 하셨느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35]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소개하여 알리고 있는 요한 사도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 하여 이상의 그리스도의 명령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목적도 이러하고 구원을 얻기 위한 첫 단계로서의 회개도 이와 같이 살지 않은 것을 뉘우침이니 그러므로 가장 먼저 회개하라 하시는 것입니다[행 2:38/17:30].

지금까지 선행을 하지 않아도 믿는 형제 간의 사랑이 없어도 구원만은 받게 되어 있다고 스스로를 속여 온 모든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을 버려야 합니다. 거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다시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니 그 이상 가는 윤리 도덕은 없습니다. 최고 수준의 선을 행함이요 의를 행함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고 구원을 받았다 하고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자로서 아무도 살든 죽든 자기를 위하는 이는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입니다[롬 14ㅣ7-9].

이런 성경의 내용을 싫어하고 반기지 않는 이들은 아예 그리스도의 구원은 입밖에도 내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보아야 결국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되므로 자기에게도 절대로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다녔으나 이러한 자기 부인의 삶의 도리를 가르치셨을 때,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듣겠느냐"[요 6:60] 하고 모두 썰물처럼 빠져 나가 버렸습니다. 열두 사도들에게 "너희도 가겠느냐?"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 좁은 길이 영생에 이르는 것이라 하셨고 찾는 이가 적은데다 그나마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으므로" 들어가기를 "힘쓰라"[to strive, to make every effort] 하신 것입니다[눅 13:24]. 천국에서는 당연히 이런 자기 부인하는 것 자체가 삶의 쾌락이니 하지 말라고 누가 말려도 기꺼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거기서는 모두가 그와 같이 자기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사랑하는 이들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의 이 세상에서만은 이 자기 부인이 죽음의 길 즉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의 모습인 것이므로[9:23] 거의 모두가 기피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구원 얻는 데에 힘든 조건을 다신 것도 무거운 짐을 지우신 것도 아닙니다. 초대형 막강한 능력을 이미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구원부터 받게 하신 것입니다. 먼저 구원부터 받게 하시니 은혜이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고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입니다. 이는 올바르게 살 수 있는 능력부터 먼저 주시는 조처이신 것입니다. 당연히 이제 그 능력을 받은 뒤로는 올바르게 살 것을 기대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확고한 뜻이니 그래서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면 선을 행함이요 지키지 않으면 악을 행함이요 전자의 결과는 생명의 부활이요 후자의 결과는 심판의 부활입니다[요 5:29].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슨 불가능하고 엄청난 일도 아닙니다. 인생들이 워낙 죄를 물 마시듯이 하는 세상이고 자기중심으로써 부귀영화를 쌓아 왔으므로 상대적인 차이요 괴리인 것입니다. 멀리 내다보는 안목만 있고 그리고 코앞의 이해 관계에만 매달려 있지 않는 한 지극히 정상적인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 얻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성경은 이를 가리켜 “모두가 다 영생하기를 원하신다” 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벧후 3:9] 한 점에 유의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는 것과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나 “회개” 후의 영생을 강조하는 데에서는 일치합니다. 그냥 영생만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구원을 받아도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하는 것이며 이 구원을 이루는 것은 죄 짓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지으면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진리를 알아도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면 다시는 속죄하는 제물이 없는”[히 10:26]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망하지 않는 것이 영생이고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 말합니다[고후 5:15].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주님을 따를 수 없다 하신 대로 주님을 따를 수 없어 주님을 떠나 있는데 무슨 영생이 있습니까. 고로 이 하나님의 뜻 즉 모든 사람이 한 가족으로서 한 몸 체제에서 살 수 있도록 하신 그 뜻에 순응하는 것이 계명[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따라서 영생이고, 그런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으로써 자기 부인하는 그것이 선한 것이고 올바른 것이므로 천국에서는 모두가 자기 부인하는 터라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만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곳이어서 이 세상 지내는 동안만은 한 때 고난과 역경과 불이익을 불가불 받게 되고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 모든 시험과 유혹에 흔들림 없이 차질 없이 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 나가면 만사 태평인데, 시험을 받아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멈추고 자기중심을 나갈 때 모든 것은 전복(顚覆)되어 버립니다. 엎지른 물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절박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이라도 구원되면 내일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상에서 회개하고 죽은 강도와 같이 곧장 영생입니다.

영원한 구원이 이렇게 당장 오늘이라도 충분히 가능한 반면에 그 상황은 이렇듯이 절박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냥 태무심(殆無心)으로 태평스럽게 구원만 받고 영생할 줄로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상의 회개한 강도처럼 그냥 그렇게 죽으면 틀림없는 천국 행이나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에는 모든 것이 180도로 달라져야 합니다. 절대로 이전처럼 그런 생활 자세 그대로 나아가는 법이 아닙니다.

왜냐면 이제는 구원 받기 이전의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인식 지체가 180도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보는 눈, 듣는 귀, 말하는 입이 어제와는 전연 다른 새 사람의 새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그리스도입니다. 그 둘이 하나됨이 어떻게 하나로 나타나느냐 하면 나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나타내시는 구조입니다. 고로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지[빌 1:21] 과거처럼 나 자신이 아닙니다. 해서 다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즉 이제 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살려 구원해내는 것으로써 나의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한 결과가 드러나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와 저주, 죽음의 상태에서 구원되는 것이므로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주님의 고난의 의미와 같이 그 구원의 대상이 되어 있는 죄인과 함께 그 저주와 죽음, 고난을 함께 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약함”[고후 13:4]은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약하게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사실과 이 약함을 혼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음을 성경이 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13:4].  그러므로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라 한 것입니다[12:10]. '세상이 보는 견지에서' 약함으로 비추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으신 것을 '우리 중에' 누가 "약하신" 때문이라 말하겠습니까. 오히려 강하셨기 때문에 즉 "세상을 이기신"[요 16:33] 결과임을 우리로서는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죽음을 세상이 생명으로 착각하고 자기 부인과 같은 생명의 핵심되는 것을 자기 멸절과 같이 오해하는 것과 같이 진정 강함이 세상 눈에는 약함으로 비쳐지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약함은 약함 그대로이니 약한 것을 억지로 강함이라고 우기거나 자기를 기만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의 강함이 약한 데에서 온전해진다"[고후 12:9] 하신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하 무적이요 막강함 그 자체이지만, 필요에 따라서 약함도 넉넉히 수용할 수 있는 그 배포가 또한 강함으로 통함입니다. 다시 말해 약하다는 것은 약함 그대로의 의미이나 그 약함을 한 때나마 과감히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이 또한 강함의 또 다른 측면인 것입니다. 이 점 역시 간과할 일이 아닙니다.

§  주 기도문에서 “저희가 저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는 것과 같이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은 언뜻 보면 날마다 죄 짓고 용서를 비는 것과 같은 것으로 들리기 쉬우나, 사람들이 날마다 내게 죄를 짓고 해를 입히지는 않는 것과 같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근본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옛 죄를 용서하심 받은 것입니다[히 9:15/벧후 1:9]. 그러나 왕에게 거액의 빚을 탕감 받은 신하가 그런 은혜를 입고 나가서는 자기에게 소액의 빚을 진 동료를 대해서는 그 빚을 갚지 않는다고 무자비하게 가두어 빚 갚기를 독촉하자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그 탕감해 준 빚을 취소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18:22-35].

그렇다면 우리가 그와 같이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할 때에는 하나님께 죄 용서 받은 과거의 죄 용서가 취소되고 죄다 그대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에서 주안점은 내가 지은 죄의 용서가 아니라 내 이웃의 죄를 내가 용서하는 데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아무리 용서 받아도 내 스스로 용서하지 않는 한 나의 죄 용서가 의미가 없으니 죄 용서를 하나님께서 취소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끝 날까지 내게 죄 짓는 사람은 계속 생기게 마련이니 그 때마다 나는 그들을 용서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마땅합니다.

이는 나의 죄가 용서된 그대로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본을 보여 주신 것처럼 그리고 스데반이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본이 된 것처럼[행 7:60] 마땅히 그렇게 하여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 필수입니다. 이 모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하는 데에 의미가 있고 사는 데에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사는 데에 있다면 나의 삶을 방해하고 지장을 주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차원에서라도 손을 쓸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방해를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앙갚음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할지 모르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찾아 그런 악행을 버리도록 하여 모쪼록 생명에 이르도록 하는 일이 나의 유일한 임무이므로 당연히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천국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천국에서는 나에게 죄를 지을 사람도 악을 행할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악을 갚고 말고 할 것도 없어집니다.

뿐 아니라 내게 죄 지은 자를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가 그대로 있어 그 죄인이 구원 받을 수가 없다는 이치도 있으니 명심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구원이 목표이므로 스데반도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기를” 최후 순간에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축복을 빌어 주라 하심도 그 때문입니다. 그 악함 그대로 복 받아 잘 살라는 뜻이 아니라 “복”이라는 것은 영생하는 데에 있으므로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죽음의 이 세상에서 잘 살고 형통하는 것은 복으로서의 아무 의미가 없음은 기정 사실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이기는 것이 그런 이치에서입니다. 5리를 가자 하는데 10리를 가 주는 것이 그런 사람 구원해내는 차원이니 그것이 나의 구원 받은 후의 여생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편히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니, 살고자 하는 그런 것은 이러한 사람 사는 진리와 현재의 무섭도록 중대한 상황을 알 리가 없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천국에서는 일하는 것이 아니라[왜냐면 구원 받을 사람이 더 이상 없으므로] 사는 것이므로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한다면, 거기서는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므로 내게 죄 지을 사람도 없거니와 가정을 해서 있다손 치더라도 그 사람이 엄연히 나의 지체가 되어 내게 절대 불가결한 존재인데 그를 해롭게 하여 악으로 갚을 수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되면 나로서는 자해(自害) 행위가 되는 까닭입니다.

자기의 손가락을 한 때 잘못 놀렸다 해서 그 손가락을 망가뜨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는 곳이 아닙니다. 사는 곳이라면, 형제가 실족하게 되면 나는 평생 고기를 입에 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고전 8:13]. 사는 낙이 먹는 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나의 행복 추구권이 그렇게 방해 받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살리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기에 넉넉히 그렇게 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짝짓고 사는 데에 삶의 행복이 있다면, 성경에 가급적이면 혼자 지내라고 할 리도 없습니다[고전 7:26]. 여기서 바울은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단지 권고라고 말은 했지만 성령으로 난 것임을 명확히 한 것입니다[:40,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한다”]. 명령일 수 없는 이유는, 이미 결혼한 사람도 있어 그들로 말하면 이 “명령”[명령이라면]에 상당한 불안을 느껴 안정된 마음일 수가 없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부득불 결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기도 합니다. 어디까지나 믿음의 일, 사람 구원의 일은 스스로 즐겨서 하는 데에 있으므로 결단코 억지로 무리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래서 명령이 아니라고 했을 뿐이지 그 의미만은 심각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결혼할 부득이한 사정이 특별히 없는 한 누구든지 이 말씀을 주님의 ‘명령처럼[“명령으로가” 아닌]’ 받아들이는 것이 본인 당사자에게는 복된 일일 것입니다[:40, “내 뜻에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을 것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고 삶의 낙을 누리자는 것이 아니며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최선을 다할 일이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로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아”[눅 9:62]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데 어찌 그 나라에 들어갑니까. 그런 사람은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구원을 받는 둥 마는 둥 하는 엉거주춤하는 자세이므로 주님 친히 떨쳐 버리시기에 앞서[계 3:16], 삼킬 자를 두루 찾아 헤매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벧전 5:8] 먼저 이를 알고 결코 지나칠 리 없다고 판단해야 옳습니다.

이런 여러 말을 들으면 오늘날도 당시 주님 가르치실 때처럼 “이 말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하고 절대 다수가 반발할지 모르나,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주님 당시에는 이런 말씀을 듣고 그냥 물러가면 되었지만 지금은 이런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이단시하는 세상입니다. 당시에도 “많은” 제자들이 물러갔던 것은, 그들이 생각하고 주님을 따랐던 것과는 너무나 그 말씀의 근본 취지가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부인을 말씀하시므로 거기에 걸려 넘어지고 그것이 실족(失足)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한 사람들이므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자기 살과 피를 남들을 위해 무조건 제공하는 식의[:53] 주님의 교훈이니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로 지금이나 그 때나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살았다’ 착각하고 그래서 계속 그 착각 속에서 이 세상 살고자 하는 이, 그렇게 살면서 죽어서는 영생까지 얻어보겠다는 이는 누구나 그리스도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믿을 수가 없고 믿지 못하니 물론 구원도 없습니다. 설혹 어떻게 되어 믿었다 하더라도 불원장래 곧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면 심판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가 심판 때에 가서야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인데 이미 때는 늦습니다. 때문에 주님의 말씀도 “아버지에게서 듣고 배운” 사람이라야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지 아무나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신 것입니다[:45,65]. 단지 영생하고 싶다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재차 요약해서 정리하면, 사람 사는 것은 올바르게 살아야 즉 삶의 법질서를 따라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니 죄를 지으면서 자기 욕심대로 이기주의 개인주의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죄 많은 이 세상이지만, 하나님 지으신 피조물 인간 세계이므로 양심은 다 있어 그런 개인주의, 이기주의는 누구나 혐오하는 것이 그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 그런 양심의 작용으로 자기는 욕심을 내어도 다른 사람이 그런 욕심을 부릴 때는 손가락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한식(韓式) 가옥에서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른 나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그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위선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분명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뺄 것이다”[마 7:3-5/눅 6:41,42]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들보를 빼는 작업이 자기 부인이요 이 작업은 죽은 자로서는 절대 불가능하고 오직 “다시 나서” 산 자가 되어 있어야 되는 일입니다. “티”와 “들보”가 비교가 되지 않는 것처럼 티는 가지치기에 불과하고 들보는 뿌리째 뽑아 내는 작업입니다. 즉 지엽적(枝葉的)인 치유가 아니라 근절(根絶)입니다. 자기 부인이 아니면 죄[악, 불법, 불의]가 근절이 되지 않습니다. 새로 창조되어야 합니다. 이 새로 창조되는 방법이 각자 그리스도를 영원한 선물로 받아 소유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와 나’ 이렇게 둘이 하나 되어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니 죽음과 죄는 완전 근절입니다. 죽음을 토대로 하여 세워진 새 건물이 "새 생명"[롬 6:4]의 새로운 삶, 다시 출생해서 사는 삶, 새로 창조되어 사는 삶, 즉 나는 그리스도를 표방하여 살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표방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은 나 자신이고[그래서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셔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앉히시니 이 모두 내 이름으로 하신 것이요 영원히 그러하십니다]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갈 2:20/빌 1:21].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를 맞바꾸어 사는 삶은 가장 이상적인 삶이요 사랑의 낙 그 자체입니다. 진정한 짝의 개념입니다. 물론 상대가 가장 이상적일 때 그런 이상적인 삶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시므로 더할 수 없이 그런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십니다. 따라서 항상 핵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생도 구원도 능력도 그 무엇도 아니고 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우리의 논제와 주제는 항상 그리스도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입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지엽적인 것이 됩니다. 문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결론이 나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무릇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하는 성경입니다[고전 16:22]. 사랑 일변도인 줄만 알았는데 이런 무서운 저주가 있다는 것을 아마 새삼스럽게 깨닫고 놀랄 사람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주의 깊게 읽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 이 역시 양면성입니다. 사랑과 동시에 이런 무서운 저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처음부터 불의를 좋아하여 순종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실” 수가 없으니,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배우려고 하지를 않으니 하나님께서 억지로 그런 사람을 배우라고 붙들어 앉힐 수도 없는 일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오래 참으시며 그 회개를 기다리실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이상 은혜를 베푸실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냥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시는 것뿐인데 그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에덴낙원에서 저지른 소행이나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짓거리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모두를 불행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왜냐면 한 몸의 원리에서는 지체 하나라도 불행에 빠져 고통을 느끼게 되면 머리를 비롯해 모든 지체가 똑같은 고통에 휘말리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이마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원래 저주 속에 있는 인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저주를 겨우 면했는데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없다는 뜻과 같고 그리스도를 없앤다는[히 6:6] 소리이니 당연히 이전의 옛 저주로 환원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죽음의 세상으로 올바로 인식하는 것'과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것'은 대개 서로가 맞물려 있습니다.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그 양식(良識)대로 판단할 때 이런 악한 세상은 도무지 하나님 앞에서 허용이 되지 않는 죽음뿐임을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음을 본성으로 알게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할 것이라” 한 대로 하나님 앞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부지런히 힘쓰고[엡 6:18] 그 기도를 통해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행도 바로 이 “사람”어부(漁夫-fishers of men)의 일을 하는 차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미리 아시므로 누가 자기의 자유 의지로써 믿고 끝까지 충성할 것인지 아니할 것인지, 누가 선을 좋아하고 의를 사랑하는지 누가 불법을 미워하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지를 아십니다. 따라서 다루어볼 것도 말 것도 실상은 없지만,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고 전체 진행에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그냥 두시는 관계로 중도에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 배신하는 경우가 속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처음에는 회개하여 믿기로 작정하면 예외없이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런 예입니다. 처음부터 멸망할 자로 아셨지만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이 모두 그대로 이루어져야 하므로 말하자면 그런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이는 그렇게 정해졌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유 의지로 그렇게 행동할 줄을 미리 아셨기(豫知) 때문에 그렇게 되리라 미리 말씀하신(豫言) 것뿐입니다. 이러한 의미가 예정(豫定)입니다. 또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 역시 성경의 모든 경고를 귀 담아 듣고 마음에 명심하여 성경이 명한 대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스스로의 구원을 이룬”[빌 2:12] 결과입니다.

그렇게 할 것을 미리 아시고 거기 아무 차질이 없도록 주선해 주신 그 차이밖에 없습니다. 각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만 ‘미리 아시는’ 영역이나, 그 미리 아신다고 해서 그대로 처리해 버리시면, 피조물들이 오해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무 근거도 없이 멸망 또는 구원시키는 등 기분 내키시는 대로 하는 줄로 오해할 수 있으므로 이런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그런 결과를 스스로 나타내기까지 두고 보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공명정대, 공정공평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뜻과 그 하시는 일은 너무 명쾌하고 또렷하고 간결하고 명료하여 어려운 것도 복잡한 것도 까다로운 것도 신비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모두 상식 선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체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것은 주님의 기도에서 보듯이 ①아버지의 이름을 알리고 ②아버지의 나라를 알리고 ③아버지의 뜻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려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 의미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나라는 사람 사는 곳이 아니므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요 18:36] 하심과 같습니다. 즉 "여기" 다시 말해 이 자연계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존재로서 영혼을 지니고 있으므로 영계가 우리의 삶이 터전이요 보금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그렇게 살도록 창조하셨으나 현재와 같은 죽음의 불행에 빠져 구원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즉 범죄 행위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살아가는 삶의 올바른 도리대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선'과 '의'

이와 같이 선(善, 좋은 것]과 의(義, 올바른 것)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한 몸의 체제로 사는 것이 선이요 의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사랑하는"[히 1:9]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의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의와 선에 반대되고 역행하는 것이 죄, 악, 불의, 불법입니다. 그래서 의를 사랑하는 자는 "불법을 미워하게"[:9]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계속 하고 싶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한사코 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기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죽는 것만큼이나 되는 까닭에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면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죄를 미워하고 죄 짓기가 싫어지기 때문입니다. 죄가 철저히 미워지면 죽인다 해도 죄를 지을 수 없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자유입니다. 죄는 욕심이니 사사로운 욕망, 사욕(私慾)에서 죄가 잉태된다고 했습니다[약 1:15]. 그런 사람은 "불의를 좋아하니까"[살후 2:12] 죄를 짓게 됩니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데에서 오는 욕망입니다.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한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내 이웃을 위하여 품는 욕구가 바로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남 위해 사는 이가 어디 있느냐 합니다. 물론 현실은 그러합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다고 이 현실이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니니 잘못된 결과가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 우리가 아는 대로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느냐 하면 원래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양심도 이 점에서는 명확합니다. 즉 이기적인 것으로 나가면 양심의 가책이 있다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남이 이기적으로 나가도 그것을 옳게 보지 않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삶으로써 사사로운 욕심을 내는 것이 좋지[선] 않고 올바르지[의] 못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간은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가 옳은 것이고 어떤 정도를 넘어서야 올바르지 못한 것이냐 할 때 무조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그것이 옳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한 구석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빙산 일각이라 전체가 다 이기적이라는 표시요 증거입니다.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 무릇 삶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한 몸의 체제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 몸의 구조에서는 머리도 몸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 수가 없는 구조로 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것이지 머리도 몸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되어 있는 체제가 한 몸 구조입니다. 왜냐면 머리와 몸이 한데 붙어 하나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도 머리도 그리고 몸의 각 지체도 자기 역할을 다함으로써 그 한 몸에 붙어 있는 의미가 비로소 건재하게 됨이니, 머리도 몸도 그렇게 하나를 이룸으로써 '우리'라는 대아(大我)를 형성하게 됩니다.

"대아"라는 것은 말 그대로 바로 나 자신입니다. 전체를 이루어 '우리'가 되어 있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손이라면 몸의 전체가 나 곧 손을 위해 움직이는 구조입니다. 머리도 나 곧 손을 위하고 몸의 각 지체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 손으로서 머리를 비롯해 몸 전체를 위하고 몸의 각 지체를 위하는 것이므로 그들을 위한 삶이지 나 자신을 위하는 삶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머리를 위시해서 몸 전체 또는 몸의 각 지체 즉 내 이웃들이 나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즉 선(善)입니다. 이보다 더 훌륭하게 이상적으로 여럿이 다 함께 행복스럽게 사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의 것을 전체를 위해 바치고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으로서 인식할 때, 나만 아니라 나와 함께 한 나의 모든 이웃 역시 그렇게 인식하게 되므로, 나는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남의 것이 부러워 탐내어 도둑질을 하거나 그런 것이 없다 하여 시샘하거나 하는 일이 없이 그 나 아닌 남의 것을 얼마든지 내 것으로 영원히 누릴 수 있으니 이야말로 삶의 최고도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한 몸'으로서의 '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머리도 몸도 몸의 각 지체도 각자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아야 합니다. 즉 자기에 관한 한 자기 부인입니다. 왜냐면 이렇게 해야 한 몸의 이상적인 삶이 유지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을 올바르다, 옳다[義]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한 것에 역행하고 이와 같은 올바른 도리 즉 의를 행하지 않을 때의 일체를 죄, 악, 불의, 불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불법이라 하는 것은, 이 '선'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의라 하기 때문이니, 이는 이미 영원 불변의 법질서가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이를 어기니까, 불법, 무법, 탈법(脫法), 위법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를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당연하며, 여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불법[불의, 죄, 악]을 미워하고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은 자연 순리입니다. 선을 버리고 의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의 한 몸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생명에서 벗어남이요 이는 당연하게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친히 머리가 되어 계시는 '한 몸'의 구조에서 벗어나 있으니 죽음밖에 없음은 자명합니다. 이렇게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위해 사는 것을 가리켜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참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몸 의식에서 머리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며 머리를 위함으로써 머리의 지시를 따라 이웃을 위함입니다. 그런데 영물들 중 일부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해서 이 불의를 더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처음부터 범죄하는 자라 했고 그 영향을 받아 즉 꾐을 받아 아담 부부 역시 자기중심으로 행동하니 죽은 자가 되어 오늘날과 같은 죽음의 고난의 불행 속에서 구원을 바라게 된 오늘날의 인류입니다.

이러한데도 머리되시는 하나님부터 무시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 이는 언어도단입니다. 이것은 아주 '막가는' 판입니다. '막가' 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막가' 파 세상, '막가' 파 악인들입니다. 이 세상 문화는 막가 파 문화입니다. 이런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 삶을 사랑하여 이 세상에서 삶의 낙 또는 재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렇게 막가는 세상이라도 잘도 굴러가기만 한다는 것은 너무 유치한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이니 하나님께서 강권(强權)으로 통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 의지만은 일절 무(無) 간섭입니다. 한 꼬투리만큼이라도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심이 없습니다. 강권으로 통제한다면서도 강제하시지 않는다고 하느냐 한다면, 이 세상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기 때문에 통제하시는 것이고, 그 대신 영원한 삶의 결정 즉 영생이냐 아니면 영원한 형벌로서의 멸망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각자 개인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일절 강제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처음부터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한시적 목숨 부지하기 또는 연명하기는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으로서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른 결과일 뿐입니다[롬 5:12]. 이런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정상이 아닌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무의미한 것은 얼마든지 강제, 통제에다 철저히 간섭해야 합니다. 왜냐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데에서도 드러났듯이 가만 두면 인류 전체가 멸절 위기에 봉착해 있을 그런 판국이 되어 있는 지금의 비정상적인 상태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죽이려는 살의가 있어도 함부로 죽이지 못하도록 또는 회개하여 영생에 스스로 들어갈 준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주는 결과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반 조처를 취해 주시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철통 같은 강권 발동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의 철저한 하나님 통제의 증거 중 하나가 삼위일체의 법칙을 그 희한한 구조로써 증명하고 있는 3운법칙입니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의미

“노아 홍수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왜 그 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특별한 민족을 형성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편애하시는 듯 하는 인상을 주는가” 질문한다면 이렇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생은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고는 즉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지 않고는 이 인생 피조물이 영생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면 앞의 설명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기분 내키시는 대로 움직이시는 법이 없으니, 이는 원리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법질서 확립이 불가능하고 질서가 잡히지 않으면 그 어떤 세계도 존립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자연계에 자연법칙이 엄정하게 관장하고 있는 것이 그 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장차 어느 시점에 사람으로 오시게 되는데 창세기에 보면 사람의 마음이 금시금방 변덕을 부리고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꾀는 대로 줏대 없이 놀아납니다. 그렇다고 악령을 제거할 수도 없으니 악령과 인간[죄를 짓는 인생들]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악령을 없애시면 인간도 없어져야 하고 그리 되면 구원 얻을 사람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하지 않게 됨으로써 곧장 잊어 먹게 되고 그 결과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실 즈음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유야무야가 되어 그리스도[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기에 이를 예방하시는 차원에서가 그 하나의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쉬이 잊어 버리고 마음에 두지 않으므로,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되어 있음과 이 자연계에 속한 육신의 실상을 깨우치도록 하시는 등의 사전(事前) 예비 교육 과정[구원되기 위해서는]이 인생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비지식은 이스라엘 민족만 아니라 모든 여타 민족 인류 전체가 알아야 할 지식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대표로 선정하셔서 그런 필요한 교육을 대표적으로 실시하시기에 이른 것입니다. 셋째 이유로는 일단 구원 받은 사람들이 다소간에 집단을 이루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게 될 것인데 그 과정에서 어떤 사태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지 그런 사전(事前) 경고도 상징적으로 담겨져 있어 그런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역할도 겸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 황야를 통과하던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 하여 교회라고 칭한 것도 그런 의미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이스라엘 민족과 여타 민족 간의 차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경고 중의 하나가 “남은 자”의 구원입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많아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 받을 것”[롬 9:27]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남은 자가 아니었다면 이미 모두가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었을 것이라”[롬 9:29] 한 성경 대목도 같은 뜻입니다. 이 상징성은 주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제자들이 물러가고 다시는 함께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나고,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불러내셔서 사도로 삼으신 열둘 가운데 하나 곧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사실에서도 입증됩니다.

그리고 이 가룟 유다가 배반할 줄은 동료 사도들도 끝까지 알지 못할 정도로 특이한 점이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사건 다음에야, 돈궤를 맡았던 유다가 그 돈을 훔쳐가는 적이 있었음을 요한이 기억했을 뿐입니다. 당시는 그런 정도는 흔히 있는 일로 여겼을 법합니다. 주님의 고난 당하시는 시점이 다가올 때만 해도 그들은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입씨름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건이 나타내는 교훈은, 그런 선별된[주님께서 열둘로서 친히 불러내셨으므로] 그룹에서도 이탈자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대 모든 교회를 통해 공통적인 기정사실로 여겨 마땅할 정도로, 그와 같이 믿음에서 떠나는 자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의 자유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임의로 정하심으로써 되는 구원이요 멸망이요 이탈 또는 변절이라면 그런 “남은 자”라는 표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스스로 의를 사랑하거나 "불법을 좋아하는"[살후 2:12]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 것을 미리 아셨다는 것뿐입니다. 이 “남은 자”라는 언급은 믿지 않고 불복종하는 이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고 또 그런 사람들 앞에서 사도들이 인용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남은 자만 구원 얻는다고 나도 그 남은 자 축에 끼어 들지 않을까 하고 전전긍긍해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면”[빌2:12]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 한 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고 있다고 마음에 다지고 있는 한 자연 그와 같은 결과가 모든 언행에서 나타나는 법이니 바로 그것이 믿음이요 그렇게 하고 있는 한은 죄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있을 때 바로 그것이 죄이므로, 내가 나 위해 살지 않는다고 스스로 확신할 때는 죄일 수가 없고 불복종일 수 없는 것이므로 나는 구원 받은 기쁨과 평안 속에서 여유 만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현재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 스스로 알고 있음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있는 나의 소임인 줄 알아 나의 할 일을 다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요한 사도가 말한 바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행함”[요일 1:6,7] 입니다. 이렇게 내가 빛 가운데 행하고 있는 한 요한 사도가 그 편지에서 지적한 대로의 형제 사랑의 결여와 같은 죄를 내가 모를 때는 언제든지 이와 같이 일깨워 주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기에 나의 평안과 기쁨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의 죄에서는 그렇게 일깨워 주실 때 “범죄하지 아니하였다”[:10] 하거나 “죄 없다”[:8] 고집하는 대신 겸손히 회개하면 얼마든지 용서하실 줄을 알기 때문에[:9/2:1] 전혀 여기에 관해 초조해 하거나 전전긍긍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남은 자”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에게 주는 성경의 경고는 큽니다. 이미 에덴낙원의 비극적 사건으로써 “남은 자”가 충분히 설명되고 있는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 “남은 자”로써 이와 같이 걸러지고 솎아지지 않으면 천국에서도 에덴낙원에서와 같은 속임수의 악행이 벌어지고 거기 속아 넘어가는 불행의 고통이 계속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행을 제지하시지도 그리고 그 속아 넘어가는 불행을 막지도 못하실 것이니[왜냐면 일체의 간섭, 강제가 배제될 것이므로] 이 세상과 같은 뒤죽박죽이 이어질 것이므로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세상에서부터 철저하게 단속하심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미리 걸러내실 것은 다 걸러내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못하시느냐’ 하면 에덴낙원에서도 그렇게 하시지 못하였으므로 그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악령들의 범죄나 아담의 범죄나 손대실 수가 없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을 죽음에 빠뜨리는 순간에서도 아담이 그 스스로 그 속임수에 넘어감으로써 자기 묘혈(墓穴) 을 자기 스스로 파는 순간에서도 하나님은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셔서 그런 일이 생기지 못하도록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그 스스로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이니 즉 인간이나 영물들과 같은 영적 존재에게 그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권을 부여하신 이상 절대로 그 자유를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낙원에서 아무 손을 쓰실 수 없었고 그들[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아담]은 그 자유 그대로 자업자득의 결과를 거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 창조에서는 ‘이 세상에서’ 그런 모든 필요한 과정과 단계를 거치게 하셔서 그런 불행의 요소가 두 번 다시 천국에서는 재연되지 못하도록 하심이니 이 세상에서 그 자유대로 행하고 마음껏 나타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과 역경과 죽음이 닥쳐도 끝까지 의를 사랑하여 불법을 미워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심”[히 1:9]으로써 끝까지 그 십자가 고난의 길을 완주(完走)하심과 같은 것을 우리에게도 바라심은 당연합니다. 또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로 하여금 자기 좋아하는 대로 불의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삶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 [그러나 신기루에 불과한]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 및 각종 쾌락이라는 함정, 올무, 덫으로 이 세상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라는 것은 이러한 걸러 내는 작업에서 합격품으로 인정된 사람들을 의미하고 그 나머지는 불합격임을 나타냅니다. 그 남은 자가 소수냐 다수냐 하는 것은[주님께서는 이미 “적은 무리”라 하심으로써 소수임을 밝히셨으나-눅 12:32] 아무 문제가 될 것도 없으니 오직 각자의 자유 의지가 관건입니다. 완전한 자유를 주신 마당에 더 이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고 왈가왈부할 명분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광야 교회와 같이 60만[모세를 따라 이집트의 굴레를 벗어난 당시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장정] 대(對) 2[갈렙과 여호수아]라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런 60만이라는 영혼들의 불행이 일어나도록 애초 인간이라는 존재를 창조하셨느냐 하고 힐문하는 것도 사리에 닿지 않습니다. 왜냐면 ‘절대적인 완전한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이나 되게 하신 것과 같은 자유를 주신 다음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완전 자유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렇게 60만의 ‘하나님’이 생겨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자기 단독의 완전 자유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입니까. 그런 ‘다수의 하나님’이 아니었기에 망정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60만 아니라 그 이상의 ‘하나님’이 생겨나 자기 마음대로 하는 데에서야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능력만 제외하고는 하나님 같은 존재를 만드신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을 상대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와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천사라 하는 영물(靈物)들입니다. ‘하나님’이라 하면 상식적으로 홀로 존재하시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물론 당연하지만 그러나 그 '하나'의 의미가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로 하나되어 계심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인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는 했으나] 그래서 주위의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것으로 아는 까닭에 그렇지만, ‘하나님’도 다수(多數)가 되어 주변의 영향을 아니 받을 수 없다고 가정합시다.

그럴 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시험을 받기도 하고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우리 인간이 주변의 영향을 받고 시험도 받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고로 아무 차이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아담 내외가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꾐을 받을 때에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영물 중 하나로서 아담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아담에게는 그런 속이는 말을 못하고 자기네보다 나중 창조되어 비교적 만만했던 여자를 속인 것이니, 남자[아담]는 여자와 한 몸이므로 여자만 무너뜨리면 남자는 자연적으로 여자와 동화(同化)되어 같은 운명이 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예상한 것이 과연 적중된 것입니다.

아담은 비록 지식 면에서는 영물들에게 뒤지기 때문에 그들의 자문(諮問)을 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모든 주변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다스리는 신분이 되어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그 권위를 인정 받게 되어 있는데 그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 믿지 않고 거역하고 불복종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완전히 그 역할을 스스로 잃어 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위에 군림해 있었어도 그 스스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르는 자가 되어 버린 결과이므로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류가 현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권세와 지배 아래 들어간 것은 불가항력입니다.

세상이 있는 한 인간 위에 군림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및 악령들의 존재와 활동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세상이 끝나야 그들의 활동도 끝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천년 기간 통치하시더라도 그동안 감금당해 있던 무저갱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잠깐 풀려 나오는데 그 때 최후로 재기(再起)를 시도해보지만 실패로 끝난다고 성경은 예언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심판이고 그로써 생명과 죽음, 낙(樂)과 고(苦)의 영원한 대칭으로서의 세계가 정착됩니다. 생명의 낙의 세계는 다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칭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인 만큼 거기 걸맞게 “나그네”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 당당히 한 국가로서의 규모를 유지했으나 하나님 친히 이 민족의 왕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를 바라셨으므로[또 그것이 정상이므로-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는 이와 같이 밀접하고 그 무엇 하나 소원한 데가 없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의 국가들처럼 왕을 옹립하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성경상으로 나타난 가장 중요한 대목 중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물보다 크시기 때문에 그래서 그 크심에 합당하게 육체로 계시지 않고 영으로 계신 이유로 해서 우리 인간이 볼 수 없다는 것뿐이지 ‘사람’으로서의 의미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시라는 것은 사람과 똑같으시다는 의미입니다. 똑같으시다는 것은 그 “크시다”[능력 면에서 그리고 영이시라는 점에서]는 점만 빼고는 그러하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라 하면 우리 인간과 별개의 존재라는 선입견부터 먼저 가지는데 이런 인식 전환부터 시급합니다. 단지 우리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다는 것뿐이지 사람과 하나도 다름없고 차이가 없으시기 때문에 인간[아담]을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로 인식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우리 인간처럼 여겨 마땅하다는 것과 하나님을 우리 인간 피조물처럼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양립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우리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 즉 소원하기만 한 존재로 착각하는 것도 흠이요, 하나님을 마치 우리 인간처럼 착각하여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보다 크시고 영이시고 하는 등등으로 차이가 분명하심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못지 않게 심각한 흠이 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함께 아울러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해해야 마땅합니다. 설명을 하다보니 '양면성'으로 모든 것이 균형 있게 짜여져 있음이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경우에서도 왕을 별도로 세우시지 않고 친히 그 민족의 왕으로서 계시는데도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대하여 안타깝게 여기심이라 할까 서운해하심이라 할까 그런 뜻을 분명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린”[삼상 8:7] 것으로서 규정하시고, 그리고 이것이 “죄악”[12:17]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왕 즉 인간으로서의 왕을 구하니 “하나님을 버림”입니다. ‘하나님’의 실제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 관계보다 더 친숙한 관계에 계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할 때 그 존재와 활동의 의미의 성격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전지전능하시고 영이시라는 점만 제외하고는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이시라고 인지하면 충분하고 하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다음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인생 개개인에게 하나님처럼 가까운 사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부보다 부모 자식 사이보다 그 어느 인간보다 가까운 사랑의 관계임을 밝힌 것입니다. 인간이면 인간이 가깝지 인간 이외의 그 어떤 존재든 인간에 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창조주라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친히 그렇지 않음을 명백히 밝히신 것입니다. 즉 “하늘에서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 밖에 나의 사모할 분이 없습니다”[시 73:25]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하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 어떤 남녀의 사랑보다 그 어떤 부모 자식 간의 사랑보다 더 개인적이고 친밀하여 ‘가까운’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 하심도 그 좋은 예입니다[약 2:23]. 어찌 피조물이 조물주 하나님께 감히 벗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 "벗[친구]"이라 하신 것입니다[요 15:15].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시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친히 그와 같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사랑하시니 우리 또한 그 어느 인간보다 그 어느 피조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함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일 사람의 사랑이 하나님보다 더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 하다면 당연히 사람을 더 사랑함이 마땅하고 하나님께서도 당연히 이를 시인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서는 이를 막으실 이유도 없으니 피조물을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그 행복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개별적인[부부간, 부모 자식간 등] 사람의 사랑보다 월등하시기 때문에 실상 그대로를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나에게 가장 가까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우리는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 “형상”[고후 4:4]이신 아들의 모습으로 계시니 이 '사람'으로서의 하나님 모습은 이제 더 할 나위 없이 완벽하시고 우리에게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단지 멸망해 가는 죽음에 처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영생을 선물로 주심이 아닙니다. 그럴 바에야 애당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아담이 속아 넘어갈 그 때 막으시면 될 일입니다. 막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불가능한 것으로는 유일한 것입니다. 왜냐면 앞에서 지적한 대로 당신 자신을 부인[또는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딤후 2:13].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사람답게 피조물답게[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바대로] 사는 데에 있습니다.

즉 행복하게 살지 않으면 산다는 의미가 없으므로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는 것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므로 바로 그렇게 우리가 사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당연하니 그렇지 않다면 애초 처음부터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는 방법이 한 몸 체제 아에서의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범죄함으로써 영원한 멸망의 운명에 처해진 것도 자기 스스로 만든 결과로서 피조물답지 않게 행동한 자연적이고도 필연적 결말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수야 많든 적든 그와는 상관없이 단 몇이라도 생명체다운 삶의 질서를 제대로 지키는 피조물들[물론 우리와 같은 영적 존재를 가리킴이니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까닭]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중도에서 탈락하는 불상사가 일어남은 이러한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데에서 연유됩니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유 선택으로 살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유는, 당연히 얼마든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부여하신 까닭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을 가리키는 “새 창조”의 의미입니다. 창조는 완전무결하게 살 수 있는 완벽한 구조의 완결을 의미합니다. 능력은 충분한데 오직 우리의 의지가 문제입니다.


즉 여하한 일이 있어도 의를 사랑하고 불의, 불법을 미워하는 그 ‘사랑’과 ‘미움’이 요체입니다. 사랑하니까 그 사랑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을 자연 미워하게 됩니다. [이 반대되는 것을 미워하는 여기에는 물론 사람은 그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과 미움은 분명한 것이고 절대로 둘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 창조의 비극적 결과물인 죄'를 여전히 그대로 지으면서 즉 죄인으로 있으면서 구원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도 모르고 그 능력도 모르고 그 뜻은 더욱더 모르고 따라서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의 무지의 소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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