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6일 수요일

각급 학교에서는 인류의 수치인 진화론을 더 이상 거론하지 말 것이다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과 상호 검증 관계의 3위1체 원리가 내린 최종 판정


http://517-517.blogspot.kr/2015/12/20_24.html
인간 생애의 법칙 상세 설명(링크ㅡ클릭)




아인슈타인과 보어와의 세기적인 논쟁에서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으로 검증된 3위1체의 원리는 아인슈타인이 틀렸다고 최종 판정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x미립자와 y미립자와의 "다운 스핀(down spin)"과 "엎 스핀(up spin)"으로 나타나는 "양자 얽힘" 현상에서, 두 입자가 짝을 이룬 하나이기 때문에 3위1체 법칙으로 밝혀진 바 '둘이면서 하나(unity as duality)', '하나이면서 둘'(duality as unity)임을 드러낸 것뿐으로, 빛보다 결코 빠른 것은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기존 주장이 옳은 것임을 천명해 주었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
독일 태생의 미국 이론물리학자그의 일반 상대성이론은 현대
물리학에 혁명적인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21년 광전효과
관한 기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ㅡ위키백과에서 인용

닐스 보어(1885년 10월 7일 ~ 1962년11월 18일)
원자 구조의 이해와 양자역학의 성립에 기여한 덴마크의 물리학자.
훗날 이 업적으로 
192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코펜하겐의 그의
연구소에서 많은 물리학자들과 공동으로 일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물리학자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진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에 의해서도 검증되고 있는 3위1체 원리의 도식(圖式)


3위1체 원리와 상호 검증 관계에 있는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의 구조도(構造圖)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과 3위1체 원리가 내리는 더욱 중요한 최종 판정
파생자(派生者)와 피(被)파생자와의 인과(因果), 주종(主從), 대소(大小), 선후(先後)의 양자 관계에서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ㅡ무신론이냐, 유신론이냐
전자가 그르고 후자가 옳다
(진화론은 무신론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과율이 또한 최종 확정되었다

갑, 을, 병 3각 구도(tripod)의 3위1체의 법칙에서
갑이 있으니 반드시 을은 있게 마련이다
결과가 있음 자체가 원인이 있다는 증거, 증명이 된다
후자의 입증이 전자이므로 후자를 굳이 입증하려 할 필요가 없다


자연계가 있으니 초자연계(또는 반자연계)가 있게 마련이다
후자를 증명하려 할 필요가 없다ㅡ자체 증명이다
초자연계의 실상은 자연계의 영역으로서는 구명(究明) 불가능이다
3위1체 법칙(the law of Trinity) 자체가 그 구명이요 증거다
3운(運)법칙은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융합 포괄하는 것이므로 자연계 법칙에 의한 실험 대상의 범주를 초월하고 있다 
각급 학교에서는 인류의 수치인 진화론을 걷어치우고 인간 生涯의 법칙 곧 3운법칙(trini homo)을 가르쳐라
그리고 만유의 법칙인 3위1체의 원리를 습득하게 하라
이것이 인류 자구책(自救策)의 첫 단계요 제일보(第一步)이다 

왜 "인류의 수치"가 되느냐
인간과 이 세상 지배자인 악령과는 적대 관계에 있어
그가 지금까지 무신론, 진화론 등으로써 속여 왔기 때문이다.
인생들을 제압하여 어찌 하든 멸망에 빠뜨리기 위한 혈안으로
이와 같은 진화론을 믿도록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염치도 없게 유신론으로 다시 슬그머니 넘어가려는 과정에 있다.
이유인즉 그 전통적인 속임수로 자신을 창조주로 가장하려 함이다.
인류가 일찍이 구경하지 못한 전무후무한 기적 즉 초능력으로
모든 인생들의 넋을 송두리째 빼놓으려고 덤빌 것이다.
이제까지 무신론자들은 성경의 기적적 사실을 물고 늘어져
성경의 진실성을 공박해 왔지만 그런 기적이 유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작동에 대처하기 위해 악령의 사주에 의해
유신론이 재등장하여 세상을 좌우지하기 전에 
성경적 사실을 통해 창조주의 건재하심을 먼저 밝혀
인생들로 하여금 대처하게 하려 하심이 
이 3운법칙으로 검증되는 3위1체의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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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 상식으로 나가면 대과(大過) 없는데...
길 건너편으로 가는 방법 좀 말해 주겠소? 하니까 
이 바보야, 벌써 거기 가 있잖아! 하는 소리인데
둘 다 상식이 실종된 것은 마찬가지ㅡ
후자는 상대방 기준으로 말하지 않고 자기 기준으로 말하며 오히려 나무라고 있는 것
몰상식, 무상식에 대한 그림을 찾다가 발견해서 올림
학문이나 이론이나 무엇이든 상식을 기반으로 해야 ㅡ

보어나 아인슈타인이나 모두 상식을 무시한 데에서 온 불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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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면서 전부를 아는 듯이 한 
    우리 모두 그 오만을 버려야

    (자연)과학자들도 지적(知的) 오만을 버릴 때가 되었다. 우리가 아는 과학은 자연과학이다. 여기서 밝히는 것은, 자연계와 대칭으로 병립하고 있는 초자연계의 실존이므로 자연과학만을 전부라 착각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다. 이를 3위1체의 원리가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법칙을 구명(究明)하는 과학이니 얼마나 흥미 진진한 분야인가. 가히 학문의 제왕이라 할 것이다. 단지 역설하는 것은 진화론은 그런 자연과학 축에도 들지 못하는 억설일 뿐이라는 것. 무신(여기서 말하는 無神은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주 부정)론을 전제하고 세워진 인간의 망상이라는 점이다. 초자연계를 입증하고 인과율을 확증하고 따라서 만물 창조의 제1원인으로서의 창조신을 증명한 3위1체 원리로써 그런 억측에 불과한 진화론을 완전히 그 밑둥지에서부터 와해시켰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자연계와 초자연계, 만물과 그 조물주 이러한 양면성 혹은 대칭 관계를 입증함은 자연 과학으로서는 당연히 한계 밖이고 그 소관사가 될 수가 없다. "양자 얽힘"에서의 "다운 스핀", "엎 스핀'의 현상도 바로 이런 진실을 석명하는 간단한 예에 불과한 것이건만, 예의 초자연계의 실존과 이 3위1체의 원리에 대해 무지하다보니까 "신(神)의 입자"라는 둥 허둥대는 것을 보라. 빛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지론마저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지금 착각하고 있는 판이다. 

    (자연)과학자로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 식으로 그와 같이 완전히 손 놓고 있는 처지일 수밖에 없는 것은, 3위1체 원리는 초자연계와 자연계 양면을 망라하는 유일무이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런 독보적인 것을 입증하는 것이 3운법칙 곧 인간 생애의 법칙인데, 왜냐면 그 원리를,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 그리고 "양자 얽힘"에서의 짝을 이룬  소립자 간의 상호 도치성(倒置性) 즉 정반대되는 양상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 현상처럼, 역시 그런 동일한 현상을 꼭 그대로 노정(露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리학적 측면에서의 이상 두 발견(빛의 두 상반된 성질 및 양자 얽힘에서의 두 소립자 간의 반응)을 두고 자연계밖에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자연과학자들이 갈팡질팡하며(3위1체 원리에 대해 무지하니까) 해석을 못내리는데 반하여, 이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은 그림을 그린 듯이 그 회한한 절묘한 구조로써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3위1체의 원리 도식(圖式)을 하나도 축내지 않고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3위1체 원리와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은 상호 검증 관계에 있다는 것을 누차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계밖에 없다, 자연법칙밖에 없다는 편견, 선입관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과 진리는 자연법칙으로써만 재단(栽斷)될 수 있다는 부질없는 그리고 한정도 없는 오만이 낳은 기형아가 바로 진화론임을 알라는 것이 3위1체의 법칙이 주는 경고인 것이다. 진화론이라고 하는 대신 생물 환경 적응 관련 내용으로 자기 정체를 확실히 하게 된다면 생물학적 관찰에 따른 저간의 눈부신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게 된다. 그런데 얼토당토않게 진화(to evolve)라고 해버리니 그런 과학적 연구 결과조차도 함께 무의미해지고 묻혀 버리게 되는 것이다. 

    진화론을 "인류의 수치"라고 하는 것은 무신론이 원래 인간을 지배하는 악령의 수작에 의한 것이고 어떤 근거든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진화론은 이 무신론의 이른바 "과학적 증거" 또는 그 아류로서 그동안 잘 써먹어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 세상 신인 그가 느닷없이 유신론으로 180도 전환하여 속이려 들려는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음이다. "속인다"는 뜻은 그 자신이 이제는 창조신으로 군림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손바닥을 바로 펴도 "진리", 그 똑같은 손바닥을 금방 뒤집어도 여전히 "진리"로 여기도록 하는 그야말로 인류를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 하여 그 가증스러움을 더하니 어찌 "인류의 수치"라는 탄식이 아니 나오겠는가. 

    이처럼 진화론이 무신론(성경의 창조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이 진화론이라는 등식이 되어 있으므로 "진화"의 이른바 "과학적 증거"가 대관절 어떤 것이기에 그러는 것인지 너그럽게 또는 여유를 두고 알아 볼려고 할 필요도 없이,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으로 검증된 3위1체의 원리로 무신론이 여지 없이 분쇄된 이상에는 진화론도 따라서 그러함이 불을 보듯 하기에, 굳이 각론에까지 들어갈 것도 없이 단도직입으로 결론부터 말하고 끝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생물의 모든 종은 창조 당시 그대로다. 진화할 것도 퇴화할 것도 없다. 인간만이 그 범죄로 즉 자업자득으로 초자연계 존재로부터 자연계 존재로 퇴화해 있을 따름이다. 앞으로 이 세상 지배자 용(龍)은, 인간이 영생하는 자로 "진화" 과정 중에 있고 소위 외계인이 그 먼저 진화된 본보기로서 인류의 이러한 진화를 돕기 위해 먼 나들이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그 주특기인 거짓말을 전개해 나갈 듯한데, 그렇지 않고는 창조신으로 가장하게 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3위1체 원리에 의한 '둘이 하나됨'을 근거로 하는 "자기 부인"의 진리를 사랑함으로써 이를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아중심의 욕심대로 고집해 나가는 그 누구든지 간에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것으로 낙인찍혀, 적 그리스도의 대대적인 속임수에 말려들어 가는 "하나님의 심판"(:12)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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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초자연" 과학의 시대


과학은 말 그대로 자연과학이다. 자연법칙에 관한 연구 분야다. 따라서 초자연계에 대한 것은 그 누구 못지 않은 문외한들의 연구 영역이다. 우리 중 아무도 초자연계에 관해 아는 사람이 없다. 자연계에 한정해서도 모르는 바가 아는 것보다 너무 많은 실정인데 하물며 자연계를 초월하는 영역이랴. 자연계와 양자 관계로 대립되어 초(또는 반)자연계가 실존함을 드러내는 것이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으로 검증된 3위1체 원리다. 실재한다는 것만 이제는 알게 되었지 실제 아는 바가 없지만 실존함을 전제할 수 있게 되니까 말하자면 반은 알게 된 셈이라 할까.

이렇게 반만 알고서는, 나머지는 우리 인간이 이 자연계 육체로 남아 있는 한에는, 절대로 모르게 될 수도 있다. 왜냐면 영역이 다르니까 접근 자체를 못하는 까닭이다. 오직 양자 관계가 대칭성을 이루어 그 반대 성질을 지니고 있는 고로 자연계의 제반 법칙을 통해 유추함으로써 어느 정도 윤곽만은 해득할 수 있게 될지 몰라도 그것도 미지수인 것은 곧 이 세상, 이 세대(this generation)가 종료되고 다음 세대가 도래할 것이기에 그러하다.

다음 세대에 가서는 모든 지식에 이를 것도 같다. 그 때는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일시적(한정적) 치세(治世)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자연계가 이 자연계와 더불어 쌍(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빨리 인지하면 할수록 지금이라도 자연과학계에 상당 부분 일종의 기여는 하게 될 것만은 기대해볼 만하다 생각된다. 자연계 하나로써 초자연계의 영역에까지 넘보려 한 것이 다윈의 오만이라 할까 무지이다. 자연계밖에 모르는 상황에서 이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자연계만 존재한다고 믿고 그렇게 전제를 하니까 여러 가지 시행 착오에 직면하게 되고 숙제란 것을 남겨 두면서 유리 방황하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의 저간 사정이다. 그러나 이제는 양면 세계의 완벽한 구조를 알았으니 새 시대를 열 채비를 갖추어야 함이 마땅한 것. 과학이라는 학문이 확실한 뼈대가 형성된 것도 아이러니하게도 다윈의 진화론을 중심한 것이어서 150년 남짓이다. 아이러니하다 함은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계로만 한정된 지식'의 인간의 사고 방식 속에서 급조된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창조론과 맞서기까지 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빚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단정에까지 이르게 되어, 이 황당한 날조된 이야기를 어이없게도 진리로 자리 매김을 하여 각급 학교에서 가르쳐 왔으니 어찌 기막힌 일이 아닌가.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진화론에 대한 내용을 삭제한다는 소식을 보고 첨단 과학을 자랑한다는 미국인들이 한국을 비아냥거리는 것을 보아서도 이  황당무계(진화론)가 얼마나 인류의 지성을 마비시켰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영국의 저명한 ‘네이처’지에 "창조론자들에게 굴복하는 한국"이라는 기사가 게재되자 국내 보도 기관도 일제히 장단 맞추어 "네이처의 '韓, 창조론에 항복' 기사에 미국 네티즌 조롱 줄지어",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다", "모든 생명은 스스로 진화…창조론은 비과학적 허구" 등 창조론을 공격하기에 바빴다. 물론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자연계 과학자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못꿀 "초자연계 과학"이다.

논쟁할 필요가 없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우주가 언제 어떻게 생성되었고 지구상의 생명체가 어떻게 생겨나 진화했는가를 밝히는 것은 인류에게 영원한 숙제가 되어 있다" 함은 자연과학에 한정되어 있는 현실적 비극에 속한 넋두리다. 인간은 처음부터 초자연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이 자연계 육체는 참극 그 자체인데 이를 깨닫지 못하니 인류여, 언제까지 이러려는가.

진화론이 무신론으로 통하고 처음부터 그 바탕 속에서 배양되어 왔다는 것은, 다윈이 비글호 항해 중 자연의 기이한 변화에 접하자 창조주의 창조의 영광을 재삼 확인하지는 못하고, 대신 지금까지 의심 없이 믿어 온 "지적 설계론"을 통째로 버렸기 때문이다. 나이 29세 때다. 그 지적 방황은 계속되어 말년에는 불가지론자로 완전히 돌아서버렸다. "페일리의 지적 설계론은 자연 선택의 법칙이 발견된 마당에 구식이 되어버려 이제는 의미가 없게 되었다(The old argument of design in nature, as given by Paley, which formerly seemed to me so conclusive, fails, now that the law of natural selection has been discovered)"고 선언한 것이다.

페일리(William Paley)의 논증이라는 것은, 지적 능력의 시계공이 있었기 때문에 시계의 설계가 가능해졌다는 것으로서 지극히 상식에 속한다. 따라서 시계보다 더 정밀한 우주의 설계도 지적인 창조자의 개입이 필연이라는 상식을 다윈은 미련없이 벗어 던진 것이다. 비글호 항해 이후 그렇게 된다. 그래서 "구약성경이 거짓이요 야훼는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는 폭군이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 이후의 무지개 징조나 기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역사가 모조리 거짓이어서 힌두교 경전이나 야만인들의 토속 신앙보다 더 나을 바 없다"고 공언했다.

때문에 진화론이 처음부터 "무신론적 기반 위에 세워진 바벨탑"이라 하는 것이다. 과연 진화론의 그 후 행적은 무신론과 밀착되어 왔었다. 얼굴은 다윈이고 몸은 원숭이가 되어 있는 만화가의 그림은 이러한 진화론의 색깔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니 즉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것이 진화론의 일반적인 통념이다. 창조주를 부정하니 자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 신자라고 하면서 진화론을 주장하거나 믿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진화론에 대해서나 기독교에 대해서나 둘 다 무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신론은 '성경에서 명시하는 창조주'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이다. 신이라 하면 창조신을 가리키고 성경에 이른 대로 "하나"밖에 없으시다. 이 "하나"는 히브리어의 특이한 표현으로 복수로서의 하나를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 군소 종교에서 말하는 신, 무슬림이 말하는 신과는 구별되어 마땅하다. 여기서 말하는 무신론은 다시 강조하거니와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으로 검증되어 있는 3위1체 원리를 밝히고 있는 성경적 사실을 부정하는 일체의 것을 말함이다. 이와 같이 애초의 건전한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남으로써 시작된 진화론인즉 무신론과 동일시하게 됨은 불가피한 것이다.

노벨(1833-96)과 다윈(1809-82)은 동시대 인물이다. 20세기 초로서, 다니엘(단 12:4)이 "마지막 때"로 예언한 그 시점(時點)의 시작이다. 다니엘 예언의 초점은 교통 통신의 급속한 발전 및 각종 지식의 발달에 맞추어져 있다. 이에 발 맞추어 다윈의 진화론이 한 몫 끼어 들게 된 것은, 이러한 발달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그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앞둔 사전 포석이다. 전체 세계 인류를 한 동아리로 묶어 효과 있게 통제 조종할 수 있는 수단 방법이다.

이러한 인지 발달은, 우리가 원래의 초자연계 육체로 환원되면, 아무 것도 아닌 그야말로 종이 한 장 휴지 조각만큼의 위력도 없어진다. 자연계에 속하다보니까 이런 하찮고 구차한 기구 기기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화론은 장차 어떤 구실을 할 것인가. 필자의 판단으로는 ufo 등의 소위 "외계인", "외계 문명"으로 접속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즉 외계인은 인간과 같은 존재가 "진화"한 결과다, 그러므로 그런 "진화"로써 인간도 영생할 수 있다고 속이는 데에 활용되지 않을까 거의 결론에 이르고 있다.

다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 형제, 친구들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바 믿지 않는 이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만 할 것인가, 이것은 가증스러운 교리(성경을 지칭)다...성경과 기독교는 자연법칙을 알 길이 없었던 고대인들의 생각일 뿐이다. 확고한 자연 법칙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기적을 더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The more we know of the fixed laws of nature the more incredible do miracles become.)... 당시 사람들은 무지함으로 그 믿는 일에 우리가 거의 상상도 못할 정도로 경솔했음을 알므로 … 기독교가 신의 계시라는 것을 점진적으로 불신하게 되었다(I gradually came to disbelieve in Christianity as a divine revelation.)"ㅡ완전한 무신론이다. 

그렇다. 다윈이 안 것은 자연법칙이다. 그것뿐이다. 자연계만 안 것에 그쳤다. 그만 아니라 모든 과학자들이 이 틀에 완전히 묶여 있다. 반(反)입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지만 그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에는 백년하청이다. 3위1체의 원리를 통해 시야를 크게 넓힐 때이다. 이제는 자연계에만 얽매이는 구시대적 발상에서 벗어날 때가 되고도 남았다. 이 때 진화론을 각자의 뇌리에서 불식함으로 척결하지 못하면 적 그리스도 즉 인류의 원수가 창조주로 가장하기 시작할 때 색다른 진화론에 휘말려 그 때는 오도가도 못하고 고스란히 그물에 고기 잡히듯 걸려 들게 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인류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현란한 각종 기적의 전시장처럼 되어 완전히 넋을 빼놓게 될 것이다. 이런 미혹을 KJV 영역으로는 "strong delusion"이라 번역하고 있다. 오죽하면 "할 수만 있다면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 들 것"이라 하셨겠는가. 태풍 앞에 초목이 쑥대밭이 되 듯하는 꼴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너나 없이 미친 듯이 그 기적 앞에 굴복하여 "창조자의 영광을 우럴어 대한다"고 광란하게 될 것이나 실제는 영물(靈物, 천사, 악령)들 고유의 초능력을 대함일 뿐이니 속지 말 것이다. 대단한 것도 아닌 그들의 능력이 자연계 존재로 전락한 인간에게는 마치 하늘처럼 엄청난 것으로 보여 나타남은 당연하다. 


기적 즉 초능력이라면 죽는 시늉을 하고 무조건 신적(神的) 외경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자연계 육체로 퇴락해버린 인간의 비극적 참상이다. 진화론은 인간의 진화를 말하지만 실상은 이렇게 퇴화가 되어 있음을 성경의 초과학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초능력의 기세를 몰아 "마지막 아담"(고전 15:45)과 한 영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도리어 "사탄의 패거리"로 뒤집어 씌워 대대적 살륙을 감행하게 될 것이다(요 16:2). 우리 위해 십자가 죽음을 취하신 마지막 아담의 뒤를 따르는(눅 9:23) 그 날의 순절(殉節)을 예상하고 매사 임할 일이다.    

그리고 적 그리스도는 "최첨단 과학"이라는 간판을 자유자재로 내걸고 구사할 것이다. 그러나 150년간이나 과학의 정수(精髓)처럼 여겨 온 진화론이 허구였음이 까발겨지는 오늘날 그 '학습 효과'를 얻은 우리로서는, 무조건 과학이라면 사족을 못쓰던 구습을 청산하고 성경의 진실에 위배되는 일체의 것이 거짓이요 속임수(이 세상 신인 악령에 의한)임을 꿰뚫는 지혜를 얻었으니 성경에서 벗어난 것이면 그 어떤 것에도 현혹되지 말기를 최종 당부 드리는 것이다.  

과학 기술이 무척이나 빠르게 발달하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자연계에 한정된 것이다. 고로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우주나 생명의 기원에 대해 제대로 해석하려면 당시대의 지식 수준에 한정되어 지식의 변천 발달을 따라 갱신에 갱신을 거듭해야만 하고 "과학에 바탕을 둔 진화론"이라 큰 소리쳐도 외짝, 외다리의 절름발이이지 완벽한 양다리 보행일 수가 없다. 단순 명료한 데에 힘이 실려 있다. 속이는 자 악령은 복잡하게 어질러 놓는 것이 그가 애용하는 전통적 수법이다. 아담 부부도 간단하게 생각하면 될 것을 제법 똑똑한 척하려다가 파멸에 이른 것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논쟁하거나 종교와 과학이라는 논리의 대립 양상으로 언제나 평행선을 긋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자연과학 이론은 인간이나 종교가 만든 게 아니라 자연 법칙을 따름이어야 하고 자연법칙에 의해서만 그 이론이 설명되어야 하고 그 결과는 실제로 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그 연구의 결실은 항상 잠정적이라 대체될 개연성을 지니기에 비판도 가능해야 한다"는 자연과학의 특성도 말 그대로 단지 외짝인 자연계에만 기반을 두고 있을 따름이기에 그러하다.

인간의 지식 습득이 자연계로 한정되어 있음은 초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완벽한 기능 가동에 비해 너무나도 느리고 굼뜬 실상이라, 산으로 치면 그 정상에 오르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땀을 쏟는 것과 같다. 그 고행과도  방불한 연구 결과 끝에 겨우 초자연계의 실재를 증명하였다고 개가를 부를 정도가 되면, 이미 초자연계의 실존을 입증하는 3위1체의 원리는 헬리콥터로 거뜬하게 정상에 착지함과 같은 형국이다. 

과연 어느 쪽이 과학이란 용어를 담기에 적절한가. 앞에서 말한 "과학적 특성"은 자연계에만 국한된 것임에 비해, 생명의 창조에 대해 이미 완벽한 해답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검증, 대체, 수정, 보완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 오직 영원불변인 것이다. 이것이 초자연계 진실의 특징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증거에 의해 언제든지 수정이 되고 보완될 수 있는 자연과학의 이론"이 아니라 당장 폐기되어야 하는 속임수인 것이다. 인간의 속임수가 아니라 초월적 전재 즉 초자연계 존재인 악령들의 노림수이다. 초자연계의 진실은 어떤 증거가 제시될 필요도 없고 수정되거나 보완될 필요도 없는 최종 확정적인 것이니 여러 가지 제한으로 묶여 있는 자연법칙 관련 이론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계속 변하고 수정이 되거나 폐기될 수밖에 없는 자연과학 이론의 특성에 구애될 이유도 없다. 진화론은 처음부터 객관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설명될 수도 없는 운명이다. 진리 진실을 처음부터 외면하는 바탕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적 관점의 허구성만 잔뜩 짊어지고 허둥댈 뿐이다. 그러나 이런 따위를 적 그리스도는 요긴하게 써 먹을 것같다. 

실제 진화론은 소위 "진화 증거"들을 수집하여 다른 학자들의 비판을 통해 공인된다 하더라도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자기와 자기를 비교하는 꼴이니 발전이 없다. 자연계 현상의 한계를 따라 계속 맴돌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사탄의 수중에서만 놀아날 뿐이다. 부디 자기 분수를 알 일이다. 따라서 초자연계의 존재를 실증하는 3위1체 원리는 자연과학적 논리밖에 알지 못하는 과학자들에게 공인을 받을 필요도 없는 것으로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으로써 그 권위가 인정되고 있음이다.


따라서 자연계에만 한정되어 있는 진화론과 성경은 서로 반박하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인류가 이루어놓은 많은 지식 체계"도 자연계에만 한정되어 있으므로,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연구라면 쓸모가 없어,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진화" 다시 말해 생태 변화 또는 적응에 대한 (자연)과학적 설명에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일은 진화론을 신봉하는(진리 아닌 것을 무조건 믿는 속성에서는 미신과 같다) 자연계 과학자들의 몫이 아니라 초자연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해야 하나 불행히도 한계 밖이니 어찌 할 것인가. 소모적인 논쟁에 휘말릴 것이 아니라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으로 검증된 3위1체 원리의 진리를 수락하느냐 않느냐 양자 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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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름지기 현재의 자기 좌표를 정확히 파악해야


"상식은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 지식, 판단력을 말하나 사회에 따라서 상식이 다르다"(위키 백과) 했는데 너무 안일한 정의다. 인류 공통의 상식은 하나뿐이니 양심과도 결부되어 있어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불변인데 이를 생략해버린 것이다. 예컨대 도덕, 인륜 등으로 표현됨이 그것이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상식이 없다"고 할 때는, 특정 부면에 관한 한 논리의 빈약성 내지 마비를 말한다. 즉 아래와 같다.

만일 우리 복음(福音, glad tidings, 좋은 소식, 희소식, 복된 소식, 반가운 소식)이 가려졌으면(to be hid, veiled) 망하는 자들에게 가려진 것이니, 그들 중 이 세상 신(神)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to blind)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고후 4:3,4) 

세계 최고 지성이라 하는 이들도 무신론자가 많은데 그러면 그들 모두가 비논리적이냐 반문하겠지만, 물론이다.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이성과 지성이 타의, 타력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을 때다. 그 때는 아무리 천재라 날고 뛰는 재주가 출중해도 속수무책이다. 자기보다 막강한 힘에 의해 속박되는 것은 당연하다. 신체적이든 지성적으로든 힘의 대소에서 차이가 현저할 때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 인간 세계가 이 막강한 초능력의 초자연계 존재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 성경적 사실을 믿고 안믿고는 자유다. 아무리 설명해도 수용하지 않으면 억지로 납득시킬 수는 없으니 그 때는 간단히 말해 "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단지 그 윤곽을 잡을 수 있을 만한 기틀을 잡아주는 것이 성경을 근거로 하는 3위1체의 원리이다. 자연계가 있으니 초자연계가 있게 마련이고 그 세계의 존재들이 있을 것은 필연적이고 그리고 그 대립(대칭) 국면에서 악인이 있고 선인(의인)이 있듯이 악령과 선한 영물(초자연적 존재)이 있게 됨도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악령들이 현재의 인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 등이 성경과 더불어 밝혀주고 있는 내용이다. 

이런 상황은 성경 외에는 아무데도 말해 주는 데가 없다. 오죽하면 신을 부정하는 종교인 불교가 지금까지도 문전성시를 이루겠는가. 그만큼 잘 나간다는 의미다. 창조신을 부정한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밝히는 이 3위1체의 원리가 못미더우면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을 자세히 들여다보라는 권고다. 그것을 열심히 연구할 필요는 없다. 너무 간결해서 단지 시간만 할애하면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 3운법칙만 해도 3위1체 원리를 검증하는 역할만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 성경의 진실성,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위치 등을 그대로 드러내어주고 있다.

이외의 왈가왈부 갑론을박은 시간 낭비다. 성경은 애 터지게 믿으라 사람들에게 권하거나 회유하지 않는다. 자유 의지를 일단 주셨으니 온전히 각자 몫이다. 그 누구도 관여할 수 없다. 영원한 운명은 각자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순수하게 각자에게 달렸다. 성경은 믿으라고 강압하지도 않는다. 역사상 기독교란 간판을 내걸고 세상의 군왕들 위에 군림하여 있는 종교는 있으나 성경은 그런 집단을 사이비라 규정한다. 왜냐면 세상의 지배자가 악령이라고 성경은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이 어떻게 모순될 수 있는가. 

이런 가짜가 진짜보다 득세하여 흥왕하고 있는 것도 이 세상이 위에 지적한 강압되고 있음의 증거 중 하나다. 어째서 진짜보다 가짜가 더 강할 수 있는가. 위와 같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모순되다고 믿으면 그 역시 그 믿는 대로 버려둘 수밖에 없다. 억지로 애잔하게 끌려고 하지 않는다. 강압하는 것치고 진리는 없다. 진리는 사랑에 있기 때문이고 사랑은 자유 의지가 필수 요건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직접 읽어보지도 않고 모순이니 어쩌니 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가 된다. 비판을 하고 싶거든 누구보다 열심히 성경을 읽을 일이다. 무작정 비판하기는 쉬우나 정확하게 일침을 가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믿지 않으니 내버려 둔다고 해서 방관하는 일은 없다. 하나님 앞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이 일을 소홀히 할 때 소위 "믿는" 자들의 생명은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의심해볼 만하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했다. 나 혼자만 구원받으면 됐다고 하는 것부터가 구원 받지 못한 증거다. 말씀을 전할 때도 설득시키려고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 논쟁에 휘말리는 것도 금물이다. 능력은 말에 있지 않고, 말에 앞서 기도에 있는 것이다. 기도는 보통의 기도가 아니라 산고, 산통(産痛), 해산의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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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적 진화론, 진화론적 창조론ㅡ악마의 꼼수가 될 듯

필자의 소견으로는 영물(靈物) 악당(惡黨)들 즉 악령(惡靈)들이 진화론적 창조론(또는 창조론적 진화론)으로 끌고 가지 않을까 싶어진다. 왜냐 하면 용이 창조신으로 가장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공을 들여 온 DDFO(Devils' Disguised Flying Object)를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UFO(unidentified flying object) 대신 DDFO 또는 DFO라 한 것이다. 그런즉 6일 창조 이전에 창조되었던 인간류(類)가 그동안 외계로 이동하여 진화를 거쳐 현재의 소위 "외계인"이 되어 있고, 이들은 그런 진화의 결과, 영생 진입 과정 중이라든가 영생에 이미 들어갔다든가 얼마든지 말을 꾸며내면(소위 첨단 과학 기술을 통해 각종 속임수로서의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면서) 되는 일이다.

그리고 저들의 소위 "외계인"으로서의 그런 기괴한 모양새도 적당히 그 까닭을 둘러대면 못할 말도 없게 된다(거짓말은 원래 그 끝이 없으니 지어내기만 하면 되는 까닭). 지금까지 나타난 DDFO(UFO) 중 인간의 형체로 되어 있는 것들은 악령들의 변장술이거나 직접 만들어낸 로봇이거나 어쨌든 그들은 초능력이므로 다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도 저들의 지시(노하우)를 따르기만 하면 영생은 식은 죽 먹기가 된다는 식으로 속일 법하다. 

물론 인간이나 그런 소위 "초인간(외계인)"이나 모두 동일한 피조물로서 창조자의 작품이라고 둘러대면 그런 적당히 섞어놓은 짬뽕이기에 완벽한 창조론적 진화론이 되는 것이다. 진화론의 허술한 빈 틈을 짜 집기를 하려면 창조론을 동원하면 되고 성경적 창조론을 무너뜨리려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진화론으로 보충시키면 될 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계속 주장하는 것처럼 이런 모든 기만 술책에 직면해서도 우리가 일단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면 대과(大過) 없다는 결론이다. 아담 부부가 범죄한 것도 상식을 벗어난 까닭이다. 상식은 또한 직감적이어서 단순 간단 명료하다. 여기에다 군 살을 붙이기 시작하면 빗나가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된다. 여자가 남자와 먼저 의논해야 하는데도 하지 않은 것 역시 상식 이탈이다. 아담이 자기보다 먼저 창조되었으니까 자기보다 월등하지 못할 리는 없다. 그리고 용이 더 가까우냐 아담(남자)이 더 가까우냐 할 때 당연히 남자가 자기에게는 1차적인 의논 상대이지 "뱀"이 더 가까울 수 없는 것이다. 이 역시 상식이다.

여자가 그 죽음의 선악과를 먹어도 당장 쓰러지거나 죽거나 하지 않자 아담이 여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에서도, 죽음이 당장 오는 수도 있고 시간을 두고 오는 수도 있다고 판단하는 것 역시 상식이다. 그리고 남자나 여자 둘 모두에게 해당되는 몰상식은, 인간이 하나님되는 것을 걱정하여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거짓말을 하실 필요 없이 실제 그런 위험한 피조물이라면 그 하나쯤 없애도 무방하여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생각이 미쳐지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또 창조하시면 될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서 무엇이 두려워 거짓말을 하시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처음부터 약자의 짓이지 강자의 할 일은 아니다. 악령들이 인간을 속이는 것도 원천적인 인간의 신분이 그들 위에 군림해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 자연계에 속한 존재로 전락하여 힘으로는 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어도 그 잠재성은 그러하므로, 실질적으로 악령들은 인간 앞에 약자의 신분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므로 그 배경에 하나님 친히 위치해 계심이다. 그렇지 않다면 직접 인간을 처치해 없애거나 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속임수, 거짓말이란 편법을 쓰는 것이다.

그 외 여러 가지로도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하나님은 구질구질하게 거짓말로써 피조물을 대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 상식인데도, 그냥 아무 비판 없이 용(龍)의 달변에 속아 넘어간 아담 부부. 큰 가닥을 잡는 것이 상식의 위력이다. 그렇지 않고 지엽적인 것에 딸려 또는 빨려 들어가면 몰상식으로 진행하게 되어 있다. 위에 지적한 것처럼 큰 가닥으로 판단을 내려 처음부터 용의 말을 궁색한 설명이라 하여 퇴짜를 놓으면 간단한 일인데도 용의 말을 따라 지엽적인 것으로 끌려가다(말려들다) 보니 종착점은 결국 이리도 못하고 저리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하는 즉 상대의 거짓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는 것. 사탄이 시키는 대로(가리키는 대로) 눈을 들어 그 선악과 실과를 보니 "과연!" 하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된다.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상대가 논리적으로 밀려 할 말이 없게 되면 인신 공격 등 외적인 것에다 호소하여 압박해오게 마련이다. 이미 그 때는 판정 패를 만회하기 위한 발악이라 해도 좋다. 그 때는 더 이상 말려들지 말고 그냥 버려두면 된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조리 정연하게 논리 있는 설명으로 설파해 나가자 그 상대인 유대인들은 할 말을 잃게 되면서 급기야 폭력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논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대의 승복 없이 말로써 이기려 하면 아무런 결론에도 이르지 못하는 백해무익이다. 이미 상대는 어떤 논리에도 순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음이다.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口材)와 지혜를 주게 될 것이다"(눅 21:15)하신 대로 말을 끝냈으면 그것으로 그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저들의 페이스가 되어버려 만신창이만 된다. 변박할 수 없도록 만든다고 해서 그 대가는 무엇인가. 저들의 승복인가. 아니다. 스데반처럼 신체적 위해가 따를 수 있다. 그럴 때면 그대로 당하는 것밖에 없다. 왜냐 하면 스데반도 당시 그렇게 하여 숨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충만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도 고난 받아 목숨까지 잃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사이비 이단 즉 거짓말쟁이들은 이런 일을 못한다. 죽어도 이런 기록을 남기지는 못한다. 이것 역시 그러므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다. 거짓말은 아무쪼록 감언이설로 속여 넘기는 것이 목적이므로 감히 자기네가 선전하려고 하는 하나님일진대 이런 "약한 하나님"의 인상을 주려고는 꿈에도 생각 못함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약하심이다. 왜 약하심이냐, 사랑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래서 "약하셨다"고 성경은 명시한다. 사랑 때문에 그러하시다면 그러면 더더욱 거짓이나 속임수가 개입될 바늘 구멍만큼의 틈도 없다. 왜냐 하니 사랑의 속성에는 "거짓이 없는" 까닭이다(롬 12:9). 사랑하기 때문에 이러하실 정도 즉 약하신 하나님이 되실 정도라면 거기에는 일절 거짓이나 속임수가 없음을 천번 만번 믿어도 좋다.

인간 이전에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 피조물이 있을 리 없다. 이 역시 상식이다. 왜냐 하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창조의 최정점, 절정이다. 그 후로도 그 전에도 인간 이상의 피조물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룹"과 "스랍"들은 하나님 친히 이용하시기 위해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함과 같이) 제일 먼저 만드셨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 피조물로서는 인간 위에 올라서는 것이 없다. 앞으로 악령들이 속여 올지라도 이 굵직한 전제 아래 풀어나가면 복잡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성경은 인간이 진화커녕 퇴화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초자연계에 속한 영광의 몸으로부터 이 초라한 자연계 몸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런즉 멀쩡한 이런 속임수로서의 진화론은 앞으로 다른 이름으로 그 생태 변화 적응을 적절히 표현하는 명칭으로 부르면 모르거니와, 현재와 같은 이대로의 "진화"라는 말 자체로는 무신론과 동일시되므로 성경과는 절대로 화해할 수 없는 터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무신론"은 성경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을 말함임을 진화론을 옹호하는 분들은 알아야. 다아윈을 무신론자라 하는 것은 그런 관점에서다. 그는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그의 진화론을 전개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3운법칙으로 검증되는 3위1체 원리가 성경에서 나왔으므로 "무신론이 무너지면 진화론도 함께 무너진다" 하는 것이고 이 법칙이 "진화론의 사망을 알리는 조종(弔鐘) 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다...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라"(신 4:35,39) 함과 같으니, "이 세상 신(神)"은 피조물로서의 신이요, 아담 아래 있던 영물을 말함이요 세상 종교가 위하는 신들은 이런 영물들인 것이다. 진화론은 성경의 창조자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그 뜻이다.


진화이면 진화이고 창조면 창조이지 진화론적 창조도 창조론적 진화도 역시 있을 수 없다. 그래도 한국이 세계 최초로 고교 교과서에서 진화론과 관련된 것을 빼 버린다고 하니 과연 역사적 문화적 전통이 있는 나라답다고 해야 할지. 무신론을 믿든 유신론을 믿든 어쨌든 거짓말을 뒤늦게나마 인정하고 그런 수치스러움을 본보기로 앞장 서서 말소시키려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체면과 긍지를 세웠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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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원으로부터 인간을 창조하심ㅡ유인원이 진화한 것 아니다


출처(조선일보 기사를 읽고 뉴욕타임즈에서 옮긴 것):

Cryptotora thamicola라는 학명의 이 눈 먼 암굴 물고기(cave fish)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암벽의 90도 경사진 데를 네발 짐승처럼 올라가는 것이 태국에서 목격되었다. 그래서 물고기로부터 뭍의 네발 짐승으로 어떻게 "진화"되었느냐 하는 과정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라고 자연 과학자들은 흥분하고 있으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이 이렇게 되어 있다ㅡ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었다"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고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1:20-29]

그러므로 물고기, 날짐승, 뭍짐승, 사람의 순서다. 다시 말해 물고기로부터 날짐승, 날짐승으로부터 뭍짐승을 만드시고 뭍짐승으로부터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뭍의 짐승 중 원숭이 즉 유인원으로부터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니 이 암굴 고기는 위의 날개 형태의 지느러미라 할까 발 형태라 할까 하는 것은 그대로 있고 아래의 (지느러미) 형태의 것은 발이 되도록 만드신 것이 날짐승이다. 그리고 다시 이 날짐승으로부터 날개마저 발이 되도록 네발 가진 짐승을 만드시니 이 뭍짐승 중에서 직립 보행과 방불한 형태의 고릴라, 침팬지 류를 만드시고 이를 토대로 사람을 만드시기에 이른다. 이렇게 과정을 거쳐 만드시는 것이 무어 그리 이상한가. 창세기에서 말하는 "6일"은 우리가 아는 대로의 365일이 아닌 것임을 그 앞 서술에서 확인된다.  

성경이 "6일"이라 한다 해서 우리가 아는 "6일"로 이해하는 것부터가 성경을 읽을 줄 모르는 것이다. 그 6일이 도대체 얼마의 기간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4계절이 생기기 이전부터 그런 날(日)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면 족하다. 그것조차 알려고 한다면 과분한 것이니 우리의 처지가 지금 자연계에 속한 하릴없는 육체임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일거에 묵사발로 만들 수 있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처음부터 이런 자연계 육체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악령이나 천사와 같은 초자연 육체로 창조되어 있었음을 성경이 밝히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신학자들이 이를 인정했던가? 아니다. 여전히 에덴 동산을 자연계의 한 동산쯤으로 착각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래서 상식적 근거 위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시 무엇을 만드실 때에는(지금도 그러하나 사실상 이제는 현재 진행 중인 사람의 새 창조와 새 하늘, 새 땅 외에는 창조가 끝났지만) 창조이다. 고로 이미 자연계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 클라이맥스로 인간을 만드셨는데 그 인간을 위해 똑같은 자연계 동산을 만드시겠는가. 자연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창설하심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대칭성(짝)으로 모든 것을 만드시고 존재하게 하신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 3위1체 원리인 것이다. 자연계적 사실에만 시야를 국한시키니 항상 시행착오만 되풀이하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 짝이다. 남자와 여자, 짝이다. 인체도 좌, 우 양면으로 짝이다. 사람을 만드실 때도 먼저 좌면 좌, 우면 우 한 쪽을 만드시고 다른 쪽을 맞추는 식으로 만드신 것이라 생각된다. 별들도 제 짝이 있다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러한 짝으로 만물이 되어 있는 것을 밝힌 것이 3위1체 법칙인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 사실을 확정적으로 말하지 못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던 것이라 해도 동양의 음양 사상이나 현대 물리학에서의 보어의 상보성 원리 겨우 그 정도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도 이런 사실을 확정적으로 규명해내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도 끝까지 보어의 주장에 동조하지 못한 것을 보라. 성질이 정반대인데 어떻게 그런 둘이 하나로 조화 일치할 수 있느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 성격에서 보어의 상보성도 음양 이원론도 그 둘의 관계를 제대로 규명해내지 못한 것이다. 

즉 이 대칭 국면의 정반대되는 성질의 화합이 하나님 친히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모자(母子) 관계를 형성하고 계심을 기반으로 하는 것으로서 바로 그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유를 지으셨다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둘은 대등할 수가 없다. 대등하면 하나로 존립 불가능이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파생됨으로써 비로소 하나일 수가 있는 것이다. 3위1체 원리는 바로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 그 핵심이다. 양면성 구조는 이미 음양론으로나 상보성으로나 세상에 알려져 있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직 이 양자 관계가 원인과 결과, 실체와 형체 등 주종 관계로 있음을 주제로 삼는 것이 3위1체 원리다. 파생시킨 자와 파생된 자와의 관계를 편의상 "모자 관계"라 한다. 양성을 다 포함시켰으므로 듣기에도 수월하다.  

따라서 이와 같이 만물이 짝으로 되어 있음을 기정사실화할진대 하나를 알면 그 다른 하나에 대해 그 존재 어부를 따지려 할 필요가 없다는 여기에 또한 강조점이 두어지게 된다. 자연 만물이 있으면 초자연계의 존재는 필연이니 이를 증명하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요, 자연계와 초자연계라는 짝으로 되어 있는 세계일진대 역시 같은 논리로 이들 결과물과 이 결과를 파생시킨 창조주가 엄존하신다는 것은 물으나마나, 따지나마나, 생각하나마나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자연계 지식으로는 만년을 간다 한들 초자연계의 실상을 알 재주가 없다. 우리가 초자연계 육체의 존재로 환원되어야 비로소 알게 되어 있는 그런 환경이다. 그런즉 초자연계의 초능력을 행사하는 판에 이런 인간을 대상으로 무슨 진화를 가히 들먹일 수 있느냐 그 얘기다. 이래서 3위1체 법칙의 비중이 그토록 크고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립되고 있는 둘 사이의 정반대의 성질, 이것이 바로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양자 얽힘"의 "엎 스핀"과 "다운 스핀"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의 SN유형과 OT유형 간의 3과 19라는 숫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3과 19는 지금 지적하는 이러한 두 정반대되는 성질의 완전한 도치(倒置, inversion) 형태를 그대로 드러내어주는 것이다.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드신 원숭이를 토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원숭이, 침판지, 고릴라는 그대로 오늘날도 존속해 있고 사람은 사람대로 번식한 것이다. 저런 물고기도 오늘날에도 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니, 자다가 봉창 두드림과 같은 일은 이제는 그만 두고 자연과확자들은 영원 세계를 흠모하여 영생의 문을 두드릴 일이다. 진정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6일 창조의 그 하루가 우리가 인식하는 날수로는 얼마의 세월이 소요되었든지 간에 그런 것을 우리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으니 그리 되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정작 달은 보지 못함이 된다. 달을 본다는 말은 "창조는 그래서 완료되었고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성경의 결론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적 사실은 수용하지 않고 진화는 아직도 계속된다고 하니 웃기는 일이 아닌가.      

성경 욥기에 "우박 창고, 눈 곳간, 운운" 하는 것을 두고도 말을 만드는 이들이 있다. 그 표현이 옛날 과학적 지식이 없던 시절 일식, 월식을 가리켜 하늘의 개가 해나 달을 삼켰다가 뱉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런 유치함이 아니냐는 뜻인데 그 자신 그런 똑같은 유치함에 싸여 있는 줄은 모른다. 하나님을 보여달라 하는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그런 유치함과 똑같은 것이다. 창조주로서의 위치와 그 피조물인 인간으로서의 처지와의 차이도 구분할 줄 모르는 무지인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 관련 설명도 인간을 기준하지 않고는 어찌 묘사가 가능하겠는가. 천사와 같은 영물이 아니라 인간이 그 대상이 아닌가. 옛 사람과 현대인의 지식의 차이가 있는데 모든 시대인에게 공통된 이해를 기대한다면 현대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대하는 당시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로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여자가 끼이지 않느냐 하고 항의하는 것과 같다. 항의라도 하면 좋지만 내가 잘 났다는 식으로 그런 표현을 쓰는 성경을 골동품의 가부장제도의 유산이라고 비하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인간의 교만이라 하는 것이다. 이 오만함이 모든 일에서도 그렇지만 인간 구원에 최대의 장애 요인인 것이다. 인간의 의식 구조를 따라 부모 자식을 논하는데 이를 모자 관계라 하겠는가. 어쨌든 인간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아담의 대표성을 따라 일관되게 "아버지"와 "아들"로 통일시킴이다. 첫 사람 아담이 인간의 대표가 아닌가. 닮은꼴은 먼저 원형(본형)이 있고나서야 생기는 것이다. 아담의 닮은꼴이라야 만족을 하겠기에 그 닮은꼴을 기왕 만드신 자연계 동물들의 암수 생성법에 따라 만드시니 비로소 남녀가 된 것이요 아담이 남자이기 때문에 남성 위주로 대표성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남녀 구분은 영원 세상에서는 사라지는 것이니, 생식을 목표로 한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것처럼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모든 것을 창조하심이다. 동물과 식물은 짝이요 영물들과 아담이 또한 짝이니 다스림을 받는 자와 다스리는 자와의 관계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같다. 성경은 아담 부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고 되어 있다. 아담 부부가 초자연계 몸이 되어 찬란한 광채로 둘러싸인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후 문맥으로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성경은 군소리, 잡소리를 하지 않는다.

단지 현재의 자연계 몸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을 기준하여 서술하다보니 현재는 옷을 입어야 몸을 가리는지라 그래서 "부끄럽다'라는 말을 동원한 것이다. 왜 부끄러운가, 천사(영물)들은 그런 남녀 구분이 없는데 자기네는 하등 세계인 자연계의 동물들이 암수로 나누어져 있듯이 그런 모양새를 띠고 있었음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완전하고 후자는 남과 여로 나누어져 불완전함이 측면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식 작용도 영원히 사라지고 없는 영원 세계에서 천사보다 못한 불완전한 남녀 유별이 지속될 이유가 없다.  

"우박 창고", "눈 곳간"이란 표현도 우리 인간은 무엇이든 창고나 곳간에에 쌓아놓고 물건을 쓰듯이 우박도 눈도 필요한 때에 따라 언제나 다함이 없이 내리니 그런 식의 표현밖에 없지 않은가. 즉 "우박이나 눈이 생성되는 과정을 네가 지켜 보았느냐"는 의미로서 거대한 자연계의 경이가 그렇게 표현된 것으로 알면 손가락을 봄이 안되고 정상적으로 달을 봄이 되는 것이다.

한 몸 구조에서 각 지체가 하는 모든 일은 머리의 지시를 받아 그 지시대로 행함이므로 머리가 그 지체를 통하여 친히 함과 같은 의미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것으로 묘사된 모든 말씀과 능력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대행한 것이다. 천사들은 그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 이름으로 말에나 일에나 행하는 것이 같은 이유이다. 그리고 머리되시는 이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 이름으로 즉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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