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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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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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것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주심으로써 동시에 나를 자기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나에게 자신을 영원한 선물로 주셨는데 그 피 값으로 나를 사들이시고 자기 소유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강제로 나를 소유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 그를 사랑하여 나 자신을 그와 같이 바칠 때 그래서 매일 매시 드리는 삶을 살 때 그 때 비로소 자기의 소유로 삼으심이 됩니다.

따라서 이는 사랑에 달린 문제이고 마음은 수시로 변할 수 있어 사랑하지 않을 때 소유 관계도 변경될 수 있으므로 구원 역시 같은 결과를 초래함은 당연합니다. 여기서 믿음이 왔다 갔다 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한번 믿은 후에 그 믿음을 버리게 되면 이는 그 사람에 관한 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히 6:6/10:26,29] 것이 되어 영구적으로 회복 불능이 됩니다. 그러므로 믿었다가 그 믿음을 버린 후에 다시 믿는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순수하게 나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이므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는 당연합니다. 우리 스스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린 다음이라야 주님께서는 우리를 소유하시는 것이므로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릅니다. 주(主)라는 것은 나를 소유하신 주인, 임자, 소유주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이스라엘 앞에서 외칠 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both Lord and Christ”행 2:36]고 했으니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구주[Christ]라고만 오해합니다. 구원자이심과 더불어 반드시 주님이심을 마음에 아로새겨야 합니다. 단지 명칭이 “주님”이신 줄로만 아는데 이 잘못된 인식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절대적 순종의 대상이십니다. 성경대로 믿어야 구원됩니다. 인간의 종교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처럼 착각하는 이가 너무나 많으니 직접 성경을 읽지 않은 허물이 큽니다. 주님을 무조건 사랑의 주체로만 즉 나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시는 일변도로만 오해하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의 주체이심과 더불어 나의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우리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희생 양 정도로만 그래서 구원자[그리스도, Christ]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두려우심[고후 5:10,11]을 간과합니다. 주님은 심판주[審判主, 재판장]로서 우리가 절대 복종해야 할 우리의 주인님[主人, Lord]이십니다. 우리의 “왕”[요 18:36,37]이십니다. 임금의 명령을 받고도 이를 수행하지 않을 때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은 서로 주고 받는 것으로서 교류, 교제, 사귐이라는 뜻 풀이를 다른 각도로 설명해서 그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반드시 이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서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뜻과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르고 복종하겠다는 충성의 맹세를 받으시는 임금으로서 주인으로서 수용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 사실을 다시 강조합니다. 즉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셔서 죄 용서 받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오른손으로 높이심으로 임금과 구주[Prince and Savior]를 삼으셨다”[5:31] 한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세상의 임금[prince of this world-요 12:30]이요 주님은 우리의 임금님[Prince of life-행 3:15]이십니다. 차이는 전자는 강제적인 폭군으로서의 독재자요 후자의 경우 오직 우리가 사랑으로써 순종하지 않는 한 순종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되지 않으니 임금님[주님]도 되시지 않고 따라서 당연히 구원자도 되시지 않습니다. 전연 관계가 없다는 그 뜻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심판하시는가 할 때, 자유를 주셨으므로 그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했는지 여부에 따라 그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신데 따라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단정할 수 있게 됩니다.

미리 택하셔서 믿게 해놓으시고 믿지 않는다고 해서 형벌을 가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천국으로부터 죄인을 걸러내기 위한 목적입니다[벧전 4:18/롬 3:7]. 천국에서 걸러낼 작업을 이 세상에부터 시작하는 그 차이뿐입니다. 천국에서 그런 작업을 하려면 모든 사람이 다 일단 구원 받아야 합니다. 그럴 필요 없이 이 세상에서부터 불의한 자를 걸러내고 그 나머지 즉 경건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이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것과 같이 우리도 의로워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요일 2:29].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은 이렇게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할 수 있도록[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산 자가 되어 생명력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단순히 생명[영생]을 얻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롬 2:7,10]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 얻기 전에는 어느 인생도 선을 행할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의를 선하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는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성경에서 "의를 행하는 자는 없다" 하고 따라서 자기 행위로 구원 얻는 자가 아무도 없다 하는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왜냐면 은혜로 선물로서의 구원을 받으면 의인이 되며 산 자로서의 생명력[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 자신께서 바로 그 능력이 되심]이 있어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할 수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선과 의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데에서 말하는 것으로서 피상적인 것이고 엄격히 말해서 선과 의가 아니니 진정으로 선이 되고 의가 되려면 자기 부인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이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선과 의를 행하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해서 하는 것일 때 그것이 비로소 선과 의를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선을 행할 수 있다고 그래서 구원이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산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인된 위치에서 죽은 자로서의 죽음의 대가부터 치러야 합니다. 사람은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법질서 확립의 엄정성 또는 공정성을 훼손하게 됩니다. 죽게 되어 있으면 반드시 죽는 것으로 일단락되어져야 하고 살아나는 것이 없어야 "범죄자는 죽으리라"는 법질서 확립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법칙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경우 죽는다는 질서가 정착됩니다. 그렇지 않고 죽었다가 살아나면 그 법이 유명무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에서 특별히 자유 의지를 지닌 영적 존재[인간이나 영물들]로서는 그런 자유 선택에 따른 결말이 분명하고 엄정하게 처리되지 않으면 모든 질서가 흔들리게 되니 피조물 자신들도 조물주를 첫째 신뢰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면 어떤 원리원칙이 엄격하게 설정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없어지면 없어졌지 하나님의 계명, 율법, 말씀 그리고 그 뜻만은 절대로 변경될 수 없다는 확고한 선례를 따라 모든 것이 차질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생명입니다[마 5:18/히 6:17,18]. 그러므로 아담이 죽었고 악령들은 장차 반드시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로 인하여 인간의 육체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속해 버려 "죄의 몸"에 구속(拘束)되어 있으니 죄를 저지르고 있는 현실만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현행범으로서의 처벌은 불가피합니다[롬 7:5-8:13].

그러므로 무조건하고 법질서의 엄정을 기하기 위해 이런 범죄 행위[고의적이 아니라 육신에 사로잡혀 저지른 불가항력으로 지은 죄라 하더라도]는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지어도 "불의를 좋아해서"[살후 2:12/요 3:18-20]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히 10:26] 경우가 있으니 이런 사람들은 악령들이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는 선례(先例)를 따라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이렇게 제외되는 현상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처음부터 믿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첫째입니다[요 3:18-20]. 일단 처음에는 믿음에 들어오나 중간에 가서 마음이 변하여 그런 곁길로 접어드는 것이 그 둘째입니다[히 6:6/10:26,29]. 육신으로 인하여 불가항력으로 죄를 짓는 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원죄(原罪)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경우 "나는 아담처럼 하지 않았을 것인데 아담 때문에 공연히 우리마저 억울하게 당한다"는 불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불만을 하나님께서 그냥 지나치실 리 없거니와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있는 빈 틈도 절대로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즉 앞서 설명한 대로 우리의 구원은 아담의 범죄 전 상태로 우리를 되돌려 놓으시는 조처[의 일환]입니다. 그래서 범죄하여 죽게 되어 있는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요구를 이룸으로써 모든 구원 얻을 인간은 일단 자기 죄로 인하여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음이 되고,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에는 나를 사로잡아 강제로 죄 짓게 만드는 육신 곧 "죄의 몸을 파괴시켜"[롬 6:6] 더 다시는 "육신"에 포로되지 않도록 자유 해방시키는 조처가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써 그런 "육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하여 이미 파괴된 상태에서 다시 사는 것 즉 다시 출생함이므로, 더 다시는 그런 소위 "원죄"에 사로잡혀 있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상태로 모든 인간이[누구든지 원하면 다시 말해 자신만은 아담처럼 범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복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새 창조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처음 창조되던 것처럼 우리도 개별적으로 새로이 하나씩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소위 "원죄"는 구원 받은 자에게는 더 이상 작용할 수 없도록 완전 조처가 취해진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불평불만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아담처럼 자기 자신의 자유 선택에 의해 죄를 짓든지 아니면 거룩한 천사들처럼 시종일관 순종을 유지하여 거룩한 자 곧 의인으로 남게 되든지 양자 택일입니다. 아담만 아니라 아담의 허리에서 난 일체의 모든 인간이 아담과 똑같은 기회가 부여되었은즉 이제는 그 어떤 불평불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그 스스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불의를 좋아해서 순종하지 않을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의미의 구원의 대상이 되지 않고 제외됨은 마땅합니다. 왜냐면 구원되어보아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또는 아담처럼 죄 짓고 멸망하여 원점으로 되돌아갈 터인데 그런 소용없는 일을 부질없이 하실 필요가 없기에 그래서 악인은 구원되지 못하도록 막으신다고 성경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 하는 것입니다[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그러므로 세상 종교가 단지 선을 행하면 구원된다고 하는 것은 이상과 같은 가장 합리적인 구원의 순서와 단계를 완전 무시하고 제멋대로 인간의 망상대로만 하는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없이 자기의 행함[선행]으로 구원될 인생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먼저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죽어야 하고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방식이 필수적인데 그런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는 방법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은 이제까지 누차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인하여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리고 그 부활이 나의 다시 살아남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짐에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외에 인생이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했습니다[행 4:12]. 오직 이 방법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즉 우리 역시 아담의 범죄하기 전 원위치로 복귀해 있지만, 단지 차이는 이 세상이 에덴낙원과 같은 영계가 아닌 대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만 창조된 아담과 달리 거기 그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의 친 아들"들이 되어 있는 자격을 처음부터 부여하신 채 우리를 새로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만유를 한 손에 거머쥐고 호령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입니다. 현재 그렇습니다[요일 3:1-3]. 그런 신분에서 이 세상에서의 우리 임무를 다해가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라든가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의 세력과 싸우는 것 등이 모두 이런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서 행하는 모든 과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는 그 누구도 적수가 되지 못하니, 일부러 처지를 바꾸어, 우리가 "약한 자"[고후 13:4] 중에 처하고 상대는 강한 자로서 겨루는 우열입니다.

이것이 대칭[상칭, 대립] 개념입니다. 서로 다르기는 해도 일방적으로 쏠리기만 하면 대칭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양 갈래 즉 대칭으로 세계가 나누어지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예고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대칭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로서 반대 위치에 서게 되는 상호간의 내용이 됩니다. 그래서 영원한 복과 낙(福樂)이라면 그 대칭되는 쪽은 그 반대되는 온갖 의미인 곧 고난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유 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삶의 본질이 사랑이어서 모두 한 몸의 체제를 이루어 사는 것을 말할진대 이상의 분류는 필연적입니다. 왜냐면 기계처럼 움직이는 데에서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은 좁아 찾는 사람이 적어 천국에 들어가는 이가 언제 어디서나 소수를 이루고 있는 반면, 멸망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절대 다수를 구성하게 되어 있는 현실은 모두 스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양심의 가르침을 따라 사람 삶이 사랑에 있다는 엄중한 하나님의 법질서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이들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마음대로 해도 자기중심으로 그렇게 마음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으로써 자기 마음대로 나가는 이들이 있어 양쪽으로 나눠집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좋아하는 대로 결과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지(理智)를 따라 하나님도 알고 본성으로 자기 양심의 가책도 있으니 사람 사는 도리를 모두 알고 있으므로[롬 1:20/2:1,15] 우리는 단지 다시 한번 더 상기시켜 주는 것일 따름입니다. 자기중심으로써 마음대로 나가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과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이세상입니다. 전자는 이 세상 산다고 살고 있고 후자는 이 세상이 도저히 사람 사는 곳이 아님을 안다는 그 차이도 있습니다.

법질서가 없는 세계는 없으니 그러면 이렇게 정반대로 나가는 양편의 사람들이 받는 상벌(賞罰)은 어찌 되는가, 그것은 당장 내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혹 있기도 하나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여기에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져 있는 것입니다.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해도' 그리고 "불의를 좋아해도" 그것이 억지로 강제해서 되지 않도록 즉 철저히 자기의 자유 선택을 따라 되어지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상벌이 금방 즉시즉시로 나타나면 인간의 행위에 대한 그 본색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벌은 유보되어야 하고, 오히려 의를 행하면 할수록 불이익만 받는 것으로 그리고 불법을 좋아하면 그대로 무사태평으로 한 세상 잘 지내는 것처럼 되어야 그것이 진정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야 나중에 나타나질 상벌에 대하여 불평불만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불의를 좋아하는 이들인 전반적으로 많고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인간의 원수인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서, 자기 편을 많이 만들어 수적(數的)으로 압도함으로써 그 월등한 분위기에 짓눌려 인생들로 하여금 의를 행하지 못하게 하고 선을 행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구원 얻지 못하도록 하려는 술책도 물론 포함됩니다. 그래서 미리부터 경고하시기를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좁은 길, 좁은 문을 통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공 순신의 생애에서 보듯이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이들은 이와 같이 생리적으로 악한 세상에서[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함으로써도 그 이유의 하나가 되어 있는] 환영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의도적으로 기를 쓰고 방해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그렇다는 의미이니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같은 의로운 샮을 강조해도 만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의 복음 차원에서 그렇게 하면 본격적으로 박해를 가해올 것은 필지(必至)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각자는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영원 세월을 결정하기 위한 이 찰라 같은 세상입니다. 이 생래적으로 악하고 전반적으로 불의한 세상이 존재하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단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인간 삶 또는 생애를 통제하는 것이 3운법칙입니다. 이런 악한 세계이나 여기는 나름대로의 질서가 이와 같이 확고하게 확립되어 있으므로 무질서의 세계가 아닙니다.

자기중심으로 나간 이들이 택한 세계는 이기주의만 팽배하고 이웃을 고려하는 일이 일절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고난 고통을 가하나 이 자체가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모두가 원수들입니다. 사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세상이 왜 이런고 하고 모두가 탄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왜 이런고 할 것은 아니니 전혀 그렇지 않은 세계도 있는 것입니다. 곧 영원한 사랑 속에서 화기(和氣) 충만한 가운데 사는 한 몸 체제에서 사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 들어가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이런 정상적으로 사람 사는 도리를 사랑하여 어떤 유혹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신념대로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몸과 머리의 한 몸 관계가 정상적인 사람 사는 도리이므로 가장 먼저 하나님[머리되시는]께 충성한 이들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행함으로써 조금도 이탈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 스스로가 택한 대로 그런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은 이들은 절대로 이런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 7:21]. 정반대 개념의 이런 두 가지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각자 자기 스스로가 선택해서 된 것이 그렇게 현실화되어 나타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진정 여기서 소위 전생(前生)의 업보(業報)라는 말이 통용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런 말을 써서는 안되는 것은 그런 것은 앞서 설명한 인간 별종(別種) 네피림에 관해서만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난의 세계와는 달리 복과 낙을 누리는 세계의 사람들 역시 전생[바로 이 세상을 가리키는 말]에서 온갖 고난 중에서도 오직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의 결과로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苦)의 세계와 낙[樂]의 세계로 양분해서 정착되어 있는 것이 영원한 현실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양 세계가 영원하다 했고 그 이상으로는 더 언급이 없으니 우리 역시 영원하다는 의미를 그대로 수용하고 더 이상 알려고 할 것도 없습니다.

현재의 일만이 발등에 떨어진 불입니다. 다른 데에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단지 이 금생(今生)의 일이 영원한 내생에게는 전생(前生)으로서 내세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만 마음에 아로새길 뿐입니다. 다시 간추리면, 영원한 불 못 속에서의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오르는"[계 14:11] 세상이 영원히 연속되는 '현실'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예외'가 되어 있는 것이 그 세계에 비하면 소수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세계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인데, 이 모든 현실이 오로지 각자의 자유 선택에 의한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순수하게 각자 자기의 자유 선택에 의해 되어졌기 때문에 그런 고난의 세계 속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은 그 장본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현실 앞에서 또한 "슬피 울며 이를 가는"[눅 13:28] 것입니다. 고통스러워 이를 가는지 그다지도 어리석었던 자기 자신이 스스로 저주할 정도로 원망스러워 이를 가는지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영원성이 지속되면서 그 영원 세월 속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양분되어 나타나 있는 두 세계의 대칭 관계는 우리가 아는 대로의 마지막 심판 이후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변할 수 없는 사실 안에서의 변화일 뿐입니다. 실상 그런 변화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우리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렇게 슬피 울고 이를 갈 것이라는 경고 앞에서 우리 발 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것이 급선무요 이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의 관장(管掌) 아래 되어지는 일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좋게] 하실 것인즉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일임(一任)함이 최고 지혜입니다. 천국에서 악인[불의한 죄인들]을 걸러낼 것을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선별 작업을 끝낸다고 했지만, 천국에서 만일 그런 선별 작업을 진행하다고 가정할 때 무슨 기준으로 사람들을 솎아내고 추려낼 것인가 그 기준이 무엇일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안 믿음일까요? 그 믿은 결과로서의 "행함"[롬 2:6-10/계 20:12,13/고후 5:9-11/딤전 4:16/행 3:26/요일 3:22/약 2:20,21,24,26]을 두고 판단할 것입니다. 바로 그 기준을 이 세상에서 들이대는 것인데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는 구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한 몸의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모든 지시[말씀, 율법-고전 9:21, 계명-요 13:34]에 절대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단 하나의 지체라도 만일 머리의 지시에 불응한다 가상할 때 그것은 곧 몸의 질병을 의미하여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는 순간이 됩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곧 그 몸으로부터의 분리, 격리를 말합니다. 머리 또는 전체 몸과는 일절 관계가 없어지는 의미가 불복종입니다. 따라서 구원에서의 분리이니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리의 뜻,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모든 피조물을 위하심에 있습니다. 이 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상대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떤 악이든 개재할 틈이 없습니다. 자기 중심이 되어 자기만 위하고 이웃을 돌보지 않는 것이 악이요 죄, 불의, 불법인 것입니다. 한 몸의 체제에서는 절대로 자기를 위함이 없고 오직 머리를 위하고 머리의 지시를 따라 함께 지체되어 있는 이웃들을 위함입니다. 이것이 선을 행함이요 의를 행함입니다.

그러므로 심판하실 때 "선을 행했느냐. 악을 행했느냐"[롬 2:7-10] 여부를 따지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회개하는 것은 이와 같이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바로 '선'이고 '의'이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 계명, 율법을 어기고 그 뜻을 행하지 않고 그 일을 이루지 않고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하신 하나님의 일체의 일을 사절한다는 뜻이니 이 바로 자멸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 것을 거절하면서 나 위하신 구원은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나를 위해 이루신 구원 즉 영생도 반납하는 행위가 됨은 자명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가 스스로 선택한데 따라 최종 승인의 재가를 하시고 날인 서명하시는 격이므로 내 스스로가 들어 나의 구원을 망치는 것이니 그래서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서릿발 같은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 여전히 죄인으로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 받고 구원 받고 영생 얻는다는 당치도 않은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합니다. 잘못 배우고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순종하겠다는 약속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임금과 구주가 되신 이유가 회개함으로써 죄 용서 받기 위함”이라고 위에서 베드로는 성령의 말씀으로써 단정한 것입니다. 고로 나는 오로지 나의 주인의 소유로서 주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어 있어 복종이 그 생명입니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는 주님 친히 당신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시고 그것을 확증하셨고 이제 오로지 나를 위해 사시고 일하시고 활동하심으로 영원히 나의 소유가 되어 주신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적인 결과요 열매입니다. 동시에 서로 주고 받음이 사랑입니다. 일방적으로 주는 것일 때에는 사랑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주는 이 편에서 보면 사랑일지 모르나 일방적으로 받는 쪽에서 보면 전혀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기본 구조이므로 이와 같이 일방적으로 사랑만 받고 사랑을 줄 줄을 모르는 경우 그는 그 한 몸 조직에서 불필요할 뿐 아니라 도리어 암적 존재가 됩니다. 그 한 사람의 사랑 없음으로 끝나지 않고 주위에 해독을 끼치게 됩니다. 그 증거가 에덴낙원에서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소행입니다. 인간[아담]을 속여 죽음에 빠뜨려 지금까지 온갖 비극적 혼란을 야기시킨 사실에서 입증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결과를 낳는 죄, 악, 불법, 불의 곧 자기 자신을 위하고 사랑하는 일체에 대해 적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니 미워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앞에서 밝혔습니다. 악을 미워하니 이 세상에서의 악은 또 선을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이 선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자기편이 아닐뿐더러 양심의 가책마저 받으니 편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좋아한다면 그것은 이미 악의 편이 아니고 선의 편입니다. 악한 세상이 선을 미워하여 핍박하고 고통을 주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인간과 악령과의 싸움 곧 전쟁이 이렇게 해서도 생기는 것입니다[창 3:15]. 이 세상 신(神)이요 지배자인 악령이 불구대천의 인간 원수입니다. 에덴낙원에서 인간을 죽음에 빠뜨린 원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원수가 관장하는 이 세상에 우리의 애착이 갈 리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구원 받은 사람의 의식의 특징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고 구원 받은 증거를 잃어 버린 증거입니다[요일 2:15].

이 세상에서 악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기는 이김은 이미 설명했지만, ‘약한 데에서 이기는 힘’입니다[고후 12:9].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나의 능력은 말 그대로 천하무적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아니라 그 누구도 내게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작 싸움이 될 때에는 정신력 혹은 지조(志操) 차원에서의 싸움입니다. 다시 말해 힘의 강약(强弱)으로는 그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으니 영적이고 정신적인 힘의 여하로써 승부가 결정됩니다.

그리 되자면 천하무적의 하나님의 아들은 약한 자가 되어야 하고, 도무지 상대가 될 수 없는 그 적수(敵手)는 도리어 강한 자의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약하고 강하냐 하면 육체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약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막강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입니다. 그리스도 친히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이 되시어 죽으신 바로 그 이치를 따름이빈다. 그래서 우리들 천하무적의 강자는 그런 영적이고 정신적인 지조 면에서 그런 모든 약한 처지와 환경에서도 굳건하게 그 절개(節介)를 그대로 유지하느냐 아니면 꺾이느냐 하는 것으로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꺾이면 약해서 지는 것이요 굴하지 않으면 명실 상부하게 강자 그대로임이 입증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처음 의도하신 그대로 초지일관으로 십자가 고난의 잔을 남김 없이 다 마시고 비우심으로써 최고 강자[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서]로서의 자질을 유감 없이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현재 바로 그런 위치에 있습니다. 온갖 고난과 불이익을 받아도 불의를 좋아하는 원수에게 그가 충동 질을 하는 악에 동조하지 않고 그가 미워하는 선과 의를 끝까지 사수하고 버리지 않는 것이 결국 그를 이기는 승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악을 선으로 이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끝까지 의인들은 고난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에서 막강한 신(神)이요 지배자 노릇을 하게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이 세상이 종막을 고해야 그의 활동도 종결됩니다. 그러므로 의인들의 고난은 필연입니다.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 불우하게 지내는 것은[딤후 3:12]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다시 말해 의인이 그것도 이유 없이 악인에게 죽임을 당할 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이미 완연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복음 전파가 시급하고 사도 중의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될 시점에 기둥 같이 여기던 3 사람 중 하나인 야고보 사도가 세상 임금의 불의한 칼날에 쓰러진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는 모두 의인(義人)이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사랑하여 살자니까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악의 유혹이 뒤따르게 되어 원수에게 목덜미를 잡히게 됩니다. 자기 부인에 대하여 반발하고 “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은 된다는 등의 망발을 일삼는 것이 모두 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즉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에게 발목이 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유의하라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 기계적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달린 일이니까 여차하면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고[빌 2:12] 자기를 구원하라는 것입니다[딤전 4:16]. 이는 나 자신의 구원을 목적하라는 뜻이 아니니, 그렇게 말하는 바울 자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니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언하거니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2,3]고 증언한 바와 같습니다.

이는 모세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한 이스라엘의 크나큰 범죄 앞에서, “그러나 합당히 여기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지 못할진대 주님의 기록하신 책에서 제 이름을 지워 버려 주십시오”[출 32:32] 함과 같은 심령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the affection]”[빌 1:8]입니다. 어버이 심령입니다. 우리도 이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16]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일하다보면 바울이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갈 6:17]을 가진다고 한 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아들딸을 위하여 지극 정성으로 공을 들이고 공을 쌓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함이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어버이 심령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도 그 열매 맺는 것이 주님의 말씀대로 30배, 60배, 100배와 같은 차이가 나게 되어 있음도 이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그 마음이 강렬하고 그 강도에 따라 보다 열심히 일하게 되니 그 일한 결과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일률적으로 일정한 수준에까지 이르도록 강압하시지는 않습니다. 오직 각자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심정을 닮으려는 열성에 따라 좌우됩니다. 오직 기준은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에 있습니다. 이 기준에서 벗어나면 구원 자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면 바로 이와 같이 되도록 우리를 위해 죽으심[고후 5:15/롬 14:9] 곧 우리를 구원하심인데 우리가 이러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그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요인은 주님의 경고 말씀과 같이, 이생[세상]의 염려, 재리(財利)[재리의 유혹]와 이 세상에서 즐기며 누리려고 하는 일락[逸樂, pleasure of life,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이 막혀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게 되는 데에 있습니다[막 4:18/마 13:22/눅 8:14]. 여기에 빠져 지내는 것이 믿음을 버림과 같은 거의 그런 지경을 말함인데 이를 즉각 회개하지 않으면 회개할 기회를 영구히 놓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에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는 현상이 위의 말씀에서 지적하신 내용입니다. 고로 이런 것이 마음에 들어올 때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마 16:23‘/막 8:33] 하신 것처럼 마음속으로 일갈하고 그런 관심에서 즉각 돌이키는 데에 승리가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후 10:3-6]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陣)을 파(破)하는 강력(强力)”이라 하였고, 그 방법으로 말하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것”[:6]이라 했습니다. 이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다”[잠 4:23] 함과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입니다.

어떤 것을 가리켜 "열매 맺는 것"이냐 할 때, 사람의 생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이 못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모든 것 즉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이루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30, 60, 100배 등의 차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몇 사람에게 전도를 했다든가 기도를 얼마만큼 했다든가 금식을 얼마 정도 했다든가 하는 것으로 잣대를 갖다 댈 일은 아닙니다. 그런 모든 일을 하고도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열매 없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자신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단지 내 스스로 양심껏 판단하기를 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고후 5:15] 것을 확정한 바탕 위에서 모든 것을 하되 그래서 힘쓰는 중에 “더욱 힘쓰는”[벧후 1:10]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그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는 데에는 한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한계나 한정을 둔다면 그것은 진정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 사랑의 특질입니다.

왜냐면 사랑이 자기 생명이기 때문이니 그 사랑하는 상대에게 자기 생명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막연하고 애매 모호한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의 자세 바로 그것이고 그 이하 이상도 아닙니다. 그대로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특이한 사람이 아니시고 우리와 똑같은 분이십니다. 단지 성령으로 계시다는 것만이 우리와의 차이이실 뿐입니다.

생각이 제 멋대로 흘러가는 대로 방치해 두면 절대로 안됩니다. 철저한 통제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킨다는 위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유 의지입니다. 이 의지는 하나님께서도 간섭 못하시는데[친히 그렇게 만드셨으므로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는 것-딤후 2:13]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든 그 무엇이든 그 어떤 피조물들도 손대지 못합니다. 결국 전적으로 책임이 내게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무리 아담 부부를 속였다 하나 그들 각자의 자유 의지로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고 그 거짓말에 넘어가지 아니할 수 있는데도 넘어갔으니 반드시 책임 추궁이 따르게 마련이었고 그래서 저주를 받았으며 결국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누구를 원망할 것도 탓할 것도 없고 오직 나 자신에 달린 일입니다. 내 스스로 분발하여 정진하고 또 정진할 일입니다.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내는 열심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은 이 세상에서는 상대적으로 우리가 약하므로[고후 13:4] 이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면에서의 승리를 목표하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가 되려고 작심하고 한사코 나가기만 하면 “이기는 자”[계 2:7,11,17,26/3:5,12,21/21:7]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의지가 확고하면 자연스럽게 따르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과거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우리 의지로 될 수 없었습니다.

죽은 자로서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능력을 펼 수가 없었으니 이유는 생명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롬 7:24,25].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당히 “다시 나서[出生-요 3:3] 산 자가 되어 있으므로 즉 그리스도 친히 내 생명이 되어 계시므로[골 3:4] 마음만 먹으면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되고도 남습니다. 당연히 ”참고“[롬 2:7] ”인내함으로써“[눅 8:15/히 10:36]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모순된 것이 있을 수 없으니, 그렇게 되면 말씀으로서의 권위는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이 무엇 때문에 “구원을 이루라”고 했는지 그 뜻이 무엇인지 확연히 밝혀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구원을 목적하라는 것이 아니니 이에 대해서는 모세에게 대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 답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확언하시기를,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생명 책)에서 지워 버린다”[출 32:33]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연히 그리스도 오신 후라고 해서 변경될 수 없습니다. 우리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구속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은 반드시 일관된 것이니,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든 그것은 이미 확립하신 뜻을 따라 이루어 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도 생명 책에 관한 언급이 대여섯 번이나 나오는 중에,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할 것”[계 3:5]이라 하신 것입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굴(屈)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대적하지 못하여 죄를 짓는 자는 모세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생명 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 버리신다는 의미입니다. “반드시 흐리지 않는다”는 말씀은 흐릴 수도 있다, 지워 버릴 수도 있는 사실을 전제한다는 의미임은 누구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시인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그와 같이 이기는 자가 되어 주님을 시인하는 경우에 한합니다[딤후 2:12/눅 12:8,9/마 10:32].

생명 책과 죄는 상극(相剋)입니다. 죄는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과 생명이 절대로 뒤섞일 수 없습니다. 고로 죄 짓는 자는 반드시 죽는 것이고 죽을 자, 죽은 자, 죽는 자가 생명 책에 기록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를 짓는 한 그리스도의 구원은 내게만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는 분명 죄인입니다. 누구나 죄인입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의인을 부르려고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왔다”[마 9:13] 하셨습니다.

의인은 없기 때문입니다[롬 3:10]. 그러면 “의인 아벨”[마 23:35], 또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 시대 인물인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 받은" 것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그들의 의인됨은 그리스도를 떠나서 된 그 스스로의 의인됨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근거로 한 "믿음으로 된 의"입니다. 따라서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하심을 받을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를 미리 상징하여 나타내시고 가르치신 의미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에서 하나님의 율법 아래에서 [그리스도 없이] 꼼짝없이 죄인된 실상을 설명한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아벨도 그 누구든 간에 육신에게 포로되어 죄와 사망의 법에 갇혀 있는 실상 그대로인 것입니다. 다윗이 충복 우리아 부부를 상대로 야수 같은 간음과 살인을 저질러 범죄한 것도 그 실상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그 모든 육신에서 진정 해방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절대로 그런 범죄가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고의적으로 범한 죄로 당장 낙인 찍혀 영원히 죄 용서가 불가능합니다[히 6:6/10:26,29]. 왜냐면 완전한 자유 해방을 시켜 주셨는데도 과거와 같은 죄를 지었으므로 믿음이 없다는 결론에 이름과 동시에 고의성이 인정되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천사들처럼 될 수 있는데도 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악령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면 해답이 나옵니다.

여러 번 설명한 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과 활동은 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로 되어져 나가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활동에서 역력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 자체가 바로 그 증명입니다. 즉 성경에서 그렇게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있는데도 그 핵심적인 것을 부정하는 가짜가 횡행하고 가짜 교리가 절대 진리인 양 행세하는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라 표방하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대표적인 종교로 군림해 온 역사가 있고 현재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가짜가 이렇게 세력화한 것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놀라움[s wonder]이니 이 놀라움은 인간 외적인 것이기에 그렇고 따라서 신적(神的)인 것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에 감히 이렇게 그 반대되는 것으로 도전하다니! 그래서 인간의 원수로 작용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곧 이 세상 신(神)의 작용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생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마리아에게 자녀가 있다고 밝혔는데 억지로 동정녀라 추켜 세우고 그래 놓고서는 마리아를 위합니다.

동정녀를 만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마리아를 그리스도 대신으로 위하려는 속셈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셈이 아니라면 굳이 성경 기록을 무시해가면서 그래서 결과론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완전히 짓밟으면서까지 마리아를 평생 처녀라, 죽을 때도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식으로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만 그렇게 위하지 않는다 뿐이지 성경을 곡해하여 완전히 무시하기는 똑같습니다.

소위 "그리스도의 우리 대신하신 죽음"이라는 교리를 내걸고 그래서 자기 부인을 한결같이 부인합니다. 자기 부인을 부인하니 그것은 자기중심입니다. 모든 악과 죄는 이 자기를 위함,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데에 있습니다. 모으지 않으면 헤치는 것이라고 분명히 기준을 정해 주셨습니다[마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 하신 것입니다. 흑 아니면 백입니다. 오직 이분법으로 가름됩니다. 진리가 아니면 일체가 거짓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예를 들어 바울 사도는 한 날을 중히 여기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이들 사이의 분쟁을 말하면서 진리의 기준을 그렇게 특정한 날을 중히 여기는 여부에 두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런 성령으로 난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사분오열로 쪼개져 나갑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선동에 따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의 기준 즉 진리가 무엇이냐, "산 자들로서 다시는 저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사는 것"[고후 5:15]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이고 유일한 주제입니다.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는 것은 무조건 죄요 악입니다. 왜냐면 몸과 머리의 관계로 이루어진 한 몸 체제에서 그 한 몸에서 이탈할 때에만 그렇게 자기중심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과거 한국에 선교사로 나온 어떤 이는 이 자기 부인에 대해 자기 체험으로 응수했습니다. 해군으로 있을 때인데 동료 하나가 너무나 짓궂게 굴어 참다못해 마침내 한 방에 때려 눕혀 맛을 보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으로 살면 이 세상을 살지 못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자기 부인은 현실과는 너무나 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이 그런 것을 실제 응용하라고 자기 부인을 말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면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까. 그와 다른 예를 말하겠습니다. 역시 이 사람도 수병(水兵) 생활을 하는데 우리의 새벽기도회처럼 매일 아침에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본 주변 동료들은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야비한 행동으로 나왔습니다. 그 기도하는 등어리에다 대고 노골적으로 오물투성이의 군화를 벗어 동댕이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병은 얼굴 표정 하나 구기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럴 때마다 번번이 그 구두를 깨끗이 닦아 반짝반짝 예쁘게 만들어 그 임자 곁에 놓아 두었습니다. 결국 그 동료는 완전 굴복했습니다. 그 자신 믿음에 들어가 그 둘은 함께 기도하는 사이가 되어 주변의 믿지 않는 동료들을 위해 통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멀지 않아 전체 함선에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 장교와 더불어 많은 수병들이 믿음에 들어왔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지 어정쩡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니까 이것도 저것도 못됩니다. 5리를 가 달라고 하면 적극적으로 10리를 가 주는 것이 그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여 이런 비천한 몸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함 단 이 목적 하나뿐입니다[요 20:21/4:34].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이룸이 무엇이냐, 아무쪼록 단 몇 사람이라도 힘을 다해 구원해내고자 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것이 목적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구원을 방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와 반대로 사람을 건지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전투는 우리의 승리고 끝납니다. 패배로 끝날 전투야 처음부터 싸우지 않음만 못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야비한 행동을 취한다면 우리는 그에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십자가 죽음까지 불사해야"[빌 2:8] 과연 이러한 전투에서 전투원다운 자세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 했는데 이 복종의 의미가 무엇이냐, 사람 살리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12] 했는데 그 복종의 의미가 바로 그렇습니다. 목적 의식을 분명히 할 일입니다. 목적 없이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다움도 아니고 삶의 가치도 모르는 것입니다. 싸울 때는 화끈하게 싸우고 일할 때는 일해야 쉴 때 제대로 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일에 동참한 후에야 "쉬는" 안식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히 4:10]. 지금은 하나님 친히 일하시는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고 있는 때입니다[고전 3:9/고후 6:1].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에루살렘 성 밖 골고다로 나아가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신 것처럼 이는 모세 율법에서 희생 양을 잡을 때의 모양새였음]으로 나아가는[히 13:13] 우리의 자세가 일하는 자세입니다.

예의 그 수병은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목적 의식이 분명했으니 자기가 왜 구원 받았는지 그리고 왜 이 세상에 남아 있는지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경우입니다. 한편 그 선교사로 왔던 사람은 그만큼 "알지 못하고" 믿는 자로 자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저것 아니면 이것으로 분명히 태도를 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결과가 되어 그 당연한 결말을 "피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마저 빼앗기게 됩니다[눅 8:18/마 25:29]. 생명 아니면 죽음, 영생 아니면 멸망입니다.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자는 무익한 종으로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게"[마 25:30] 됩니다. 이런 것은 생명의 세계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으니 멸망의 자리입니다. 이공 순신은 목적 의식이 분명하게 산 삶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목적 의식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자기 부인에 있어 머리를 위하고 함께 지체된 전체를 위함이므로 그렇습니다. 이공은 그리스도를 아직 알지 못했던 이들 중의 하나입니다.

마귀가 이와 같이 일마다 인생 구원의 일을 방해하고 사력을 다해 저지하는 이런 일이 감히 하나님 앞에서 용납이 되는가 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신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즉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말씀을 숨기시고 어떤 이에는 나타내십니다[눅 10:21,22]. 적 그리스도의 출현도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 차원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살후 2:12]. 바로 그런 일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부리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악령들을 부리십니다[히 1:14]. 전자는 자진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후자는 마지못해 움직이는 그 차이입니다. 후자는 순수하게 자기중심의 동기에서 움직입니다. 악인의 모든 행동이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선이 되지 못하고 악이 되므로 그래서 심판을 면하지 못하니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롬 2:7-10]. 우리를 구원하심은 선을 행하도록 하심이니 선이 무엇이냐, 바로 사람 사는 도리 그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는 법도 모른 채 사는 법은 없습니다. 살면 되는 것이지 사는 법도 있느냐 하겠지만 그러면 왜 아담은 죽은 자가 되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왜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느냐 반문하게 됩니다. 머리와 몸 관계에서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것이니 그렇지 못할 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를 죽게 만든 것이고 세상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죽이고 해치는 일인데 이런 것을 두고 어찌 사람 사는 방법이라고 할 것입니까.

즉 한 몸 체제에서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사람 사는 법입니다. 그러나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자기중심으로 나갔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고 멸망의 운명을 그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앞의 예화(例話)에서 그 수병은 그 짓궂은 친구를 반드시 낚아야 할 "사람 물고기"[마 4:19]로 인식한 것이고, 그 선교사는 그 버릇 없는 동료를 자기의 사생활을 침범하는 자로 보았다는 그 차이입니다. 전자는 자기 목적이 오직 사람 구원하는 일에 있다고 믿었고, 후자는 그 마음이 단지 미래에 누릴 영생 하나로 만족하고 있었다는데 있습니다.

세상 살고자 하니까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니까"[요 12:25] 자기 삶에 대한 방해로만 그 상대를 인식하니까 한방 때려 눕힘으로써 시원해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살 만하다고 느낀 것입니다. 목적 의식이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살 만한데도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살려고 하지 말라,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영생을 보전한다 하고 경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살 만한 데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닌데 왜 굳이 살려고 합니까.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사람 살 곳이 아닌데 머물러 있다면 오직 목적은 사람 살리는 것이요 이를 한사코 방해하려는 마귀와 싸우는 것, 이것밖에 달리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싸워 이기기 위해 일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지 그 외에 무엇에 정신을 팔고 있을 것입니까. 답답하다는 소리가 어찌 아니 나오리요. 몰라서 그러하니 부지런히 성경을 읽을 일입니다.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자에게만 진리의 문은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수병은 자기를 괴롭히는 그 동료를 낚으려는 것으로써 이미 성령의 감동으로 목포를 정했기 때문에 그를 구원해낼 수 있다는 믿음의 기쁜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그렇게 그 친구의 군화를 닦아 주고 빤질빤질 윤이 나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기쁨으로 해야 그것이 믿음이고 사랑입니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심으로써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기를 구한"[골 1:11] 것이 그 때문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러한 사람 살려내는 일일 방해하기 위해 우리에게 온갖 야비한 짓으로 우리를 괴롭게 하여 이 일을 결국 중단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는 우리와의 전쟁에서 이것이 목적이고 이를 이루면 그로서는 승리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이 사람 살리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라붙어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내 몸은 비록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손 쳐도 내가 목적하던 그 사람을 구원해내었다면 나는 완전히 내 목적을 이루었으니 승리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완전 패배입니다. 나의 몸뚱이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도 그는 땅을 치면서 쓰라린 참패의 울분을 토로할 것입니다. 나는 그 십자가에서 찬연히 부활한 몸으로 스스로 일어나게 되어 있으므로 그런 것쯤이야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셨으니 이야말로 마지막 아담으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기신 승리의 쾌재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사태를 직시해야 합니다.

소원하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지 원치 않는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얻었다고 전부가 아니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나를 사랑하는 자를 나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어 줄 것이다" 하셨습니다[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것"[:21]이라 밝히셨습니다. 완료가 아니라 진행형입니다. 이런 진행은 이 세상 다할 때까지 계속되는 성질의 것입니다. 사랑의 특성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와서 말씀의 씨앗을 빼앗는다는 것은 처음 믿을 때에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회성이 아닙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미 믿어 구원되어 있는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그렇게 합니다. 결실을 하는 좋은 땅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렇게 정해 주셔서가 아니라 그 "좋다"는 의미는 자기 마음을 지켜 그 말씀을 항상 묵상함으로써[시 1:2] 결코 놓치지 않으려 하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각자 자신의 굳은 의지를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부터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입니다. 심드렁하게 여긴다면 그렇게 스스로 애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을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이런 진리의 일단을 피력한 것입니다. 항상 자기 마음을 지킬 일이니 그래서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이라는 말을 만든 것입니다. 내 앞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죽도록 사랑하는 법을 배웁시다. 그리스도 친히 참으로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심으로 이미 본을 보이셨습니다.

선을 행하라 하니 선을 행해야 하고 자기 부인을 하라 하니 자기 부인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그런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자세에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실로 "무익한 종"이 될 따름입니다. 왜 선을 행하게 되어 있느냐, 왜 자기 부인이 필요한가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충심으로부터 "이제 알았다, 그래서 그렇구나!" 하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인 의식이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5리를 가 달라고 강요할 때 흔쾌히 10, 20리도 동행해 주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런 여유에서 능력이 용솟음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자율성의 복종 위에야 주님의 능력이 임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현저한 대표적인 예로서 이공 순신의 자율성 즉 주인 의식을 높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이냐 무엇이라 하든 주변 상황이야 어찌 돌아가든 자기의 신념대로 여유 만만하게 살아간 그 품격을 높이 치게 됩니다.

인식전환이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보는 눈에 따라 만사 그리고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 자세가 확 바뀌어 버립니다. 같은 사람, 같은 사물인데도 어제 대하던 것과 오늘 대하는 것이 완연하게 바뀝니다. 이것이 보는 것과 그렇지 못함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하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 하신 것입니다.

보는 것을 영생에 비유한다면 소경되는 것은 멸망이니, 이와 같이 믿지 않는 이들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3:18]. 내가 왜 세상에 있는가 이 점을 깊이 명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그 이치를 터득하여 명확한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비틀거리며 걸어서는 발부리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이라 넘어지니 마땅히 조심해야 합니다[고전 10:12]. 믿느냐, 믿지 않느냐 양단간의 결정은 한번 내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에 내리는 것이 좋고 그래서 자신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해 온 대로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한 대로[고전 13:7] 신뢰를 말하기도 합니다. 신뢰는 순종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신뢰와 사랑에서 나타나는 순종 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시지 않습니다. 각 ‘지체’로서 ‘머리’를 신뢰하지 않고는 ‘한 몸’으로서의 기능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이나 아브라함의 그런 마음이라면 그리스도 오셨을 때 의당히 믿고 그 말씀을 따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어 있는 바탕입니다. 바로 이런 바탕을 보시고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지만 그와 같이 의인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의롭다 하심도 그리스도를 전제한 것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장차 그리스도 오시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미리 내다보신 결과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기로 되어 있다면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인으로 인정하실 리 없습니다.

성경에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롬 3:10] 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나타냅니다. 즉 그리스도 오실 것을 전제하지 않는 한 아무도 의인될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가인에게 죽은 아벨이나 아브라함이나 노아나 기타 그 어느 누구든지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하여 의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특징이, 아벨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처럼 오직 믿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밝힌 대로 이미 우리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죽은 자이지 산 자가 아닙니다. ①“육체의 무할례”[골 2:13]로 죽었고 ②그래서[또한] 우리 자신의 “허물”[엡 2:5], “범죄”[골 2:13]로 죽은 것입니다. 육체의 무할례를 다른 말로 “육신”[롬 7:5-8:13]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아담]이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있었으나 범죄[불순종]로 즉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다시 돌아와 버린 까닭에 다시 지니게 된 이 육체의 본능적 특질 즉 자기중심의 성향을 말합니다.

따라서 죄인이지 의인은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 등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의인들이 그래서 죄 중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이지 그 행위를 두고 의인이라 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아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아니므로 자기중심을 척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그런 끔찍한 범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모든 것은 실질적인 자유,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자기중심을 오히려 미워할 정도의 완벽함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모두가 다 완벽한 것이지 불완전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죄인 아닌 의인,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고 새 피조물로서 옛 것은 지나가고[고후 5:17] 그리하여 “옛 사람”은 죽었으며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 충분히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의인들은 모두 믿음으로 된 것으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구원 얻을 것이므로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라도 이와 같이 믿고 순종하는[모세 율법을 따라 혹은 양심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자에게는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인이기는 하나[그리스도 오시기 전이므로] "믿음으로 된" 의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시기 전과 오신 후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 오심을 기준으로 할 때는 그 이전에는 모두 죄인이요 오심으로써 그래서 그 영[성령]을 영접해 모심으로써 의인이 되는 것이므로 “의인은 없다”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라 한 대로 당시의 의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하나 제대로 죄 짓지 않는 순종은 불가능했었습니다. 육체의 무할례로 인한 피치 못할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었으니 하나님 친히 그렇게 의롭다 하셨으므로 의인이 되어 있는 말하자면 '선언적인 의미의 의인'이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특정한 것을 시키시는 대로[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던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이행하는 그런 순종은 가능했으나,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그런 순종은 요구하실 수도 없었고 실상 할 수도 없었던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오시기까지는 죄를 허물치 않으셨고 회개하라 명령하시지도 않은 것이니[행 17:30] 모두가 죄인이므로 죄대로 심판하신다면 심판의 대상이 아닌 자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수용해 주셔서[고전 2:9] 그 믿음을 의로 인정해 주신 것이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의 사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속성이 여기서도 드러나는 바 즉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함이지 단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고 그 말씀[약속]이 진실되다는 정도로 그치는 일정[특정] 지식을 가리킴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의미하는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기 전 어제까지는 죄인이었으나 믿은 오늘 나는 죄인이 아닌 어엿한 의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사랑하는 고로 그 모든 뜻을 행하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 오직 그 일을 함이 낙이 되어 있음으로써 된 변화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회개해야 되는 것이고 믿어야 되는 것이고 따라서 아무라도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주님 친히 명시해 주신 것입니다[요 6:65].

“누구든지[whosoever]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는다"[요 3:16] 하실 때의 이 “누구든지”는 죄인[불의를 좋아하여 죄를 버리지 않는]이라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로”[히 1:9-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작정하는 즉 회개하는 이면 누구든지 그렇다는 의미이니,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는 '제약하고 한정하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한정성과 제약성은,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고[행 5:32] 영원한 구원이 근원이 되시고[히 5:9],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 마련하신 구원이라는[고전 2:9/약 2:5/1:12] 등의 말씀으로 이미 확정되어 있는 터입니다. 또 실상 이런 ‘죄인’은 믿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 믿는다는 것은 특정 사실[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돌아가셨다는]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 즉 ‘한 사람’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을 말함임을 명백히 하신 까닭입니다[요 3:16-“그를 믿으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을 믿는다는 뜻이요 따라서 이 경우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믿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내 죄가 그 분을 그처럼 죽으시게 만들고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음을 잘 아는 고로,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고 영원히 버림을 의미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죄인[자기 죄를 버릴 마음이 없고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마음이 없는]은 본원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할 때 말로만 사랑한다 하고 어떤 형식을 갖추어 그것을 사랑의 표징이라고 한다면 그는 대번 비열한 위선자로 낙인 찍힐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런 짓을 않으면서 하나님께는 감히 하려고 하는 이들이 오늘날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라면서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요란한 기악(器樂)을 울려대며 “하나님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불신자가 처음 교회당에 나와서 그런 소음에 기겁을 하고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합니다.

충실한 교회 집회 참석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 즉 사람들 구원해내는 일에는 열정도 흥미도 없습니다. 주님 당시의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 등을 위선자라고 준열히 꾸짖으신 것처럼 이런 모든 것이 위선자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 이 세상에서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4:34] 것을 말합니다.

즉 다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9] 것을 말함이니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양심상 가책이 온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니고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님을 뒤늦기 전, 때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위선자들을 하나님은 솎아내시려는 것이니, 예수님 앞서 보내심을 받은 세례 요한이 외친 것처럼 시급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마 3:7-9] 일입니다.

세례 요한만 아니라 사도 바울 역시 바로 그런 메시지로 복음 전파를 했습니다. “먼저 다메섹에서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전파하였다”[행 26:20]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지 않고 회개하라 명하셨다고[17:30]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한 엄청난 무지(無知) 탓에 잘못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 얻으라고만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핵심은 빼 버리고 겉껍질, 빈 깡통만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하기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으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셔서 회개하라 하셨다”[:30] 했습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公義)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31] 하여 그리스도를 ‘구원자’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심판주[審判主, 재판장]’라는 사실에 역점을 둔 것입니다.

왜냐 하면 회개하기만 하면, 구원은 그리스도의 우리 위하신 죽음으로 이미 이루어놓으신 것이어서 믿기만 하면 되기에, 회개는 나의 결심과 의지로 되는 것이지만 믿는 것은 이에 비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의지를 수반한다는 것은 이 회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즉 순종하고 아니하고의 결심이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함부로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왜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하게 된다”[롬 2:7,10] 하였고, “거하든지[살든지] 떠나든지[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니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했는지 여기서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의인이면서도 죄인 또는 죄인이지마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할 수 있었던 말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런 대목이 많은 사람에게 생소하게 들리는 것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두지 않고 사람의 말을 더 믿기 때문이요, 성령의 계시로 성경을 읽으려 하지 않고 소위 신학(神學)으로 성경을 멋대로 풀이해 간 당연 결과입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우리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단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다"[눅 10:22] 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主宰)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21] 하시며 "성령으로 기뻐하시면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23]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크신 은혜요 따라서 복이 되는지를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보기는 보았지만 "하나님의 구원"[2:30]으로는 보지 않았기 때문이요,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알기는 해도 정작 구원은 받지 못하니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0:22].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은 혈육(血肉, flesh and blood) 곧 인간으로 나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나타내 주셔야[마 16:17]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이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숨기시고" 어떤 이에게는 "나타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어떤 이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시지 않느냐 하면 세상에서 내로라는 "지혜 있는 자"들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 그러면 나타내시느냐 하면 "어린 아이"들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과는 정반대입니다. 앞에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에 대해 설명했지만 이 역시 그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이 거짓말로 지어낸 것이라면 "숨기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선별해서 속이는 대상이 소수의 지혜 있는 자들이 아니라 다수의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이라면 그런 어중이떠중이 많은 사람을 모아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모아가지고 폭동이나 일으켜 세상을 뒤집어 엎으려고 그렇게 할까요.

그렇게 세력화를 도모한다면 왜 처음부터 절대 소수이고 열세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한결같이 부끄러워할 정도가 될 것이라는 경고는 웬 말입니까. 도무지 사람의 말일 수도 없고 더군다나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히려 소위 지혜 있다고 하는 자들은 교만하므로 그런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그렇게 교만한 티를 낼 아무 것도 없는 겸손한 자들을 부르신다는 뜻이라면, 이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신(神)의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라"[요 6:65,44]는 말씀에서 이미 그런 자체 증명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는 없습니다. 혹 자기 거짓말을 믿도록 일부러 자극을 주기 위해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라 했다면, 제자들이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할 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울고 싶은데 뺨까지 때리는 것이 됩니다.

아닌게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는 많은 제자가 물러가고 다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보고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기까지 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약 올리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런 정도로 믿는 사람의 수(數)에 연연하지 않고 일절 관심이 없으신 것을 나타냅니다. 지금까지 따르던 이들이 다 예수님을 떠나고 오직 열 둘만 남았다고 해도 그 열 둘 중에도 떠나가려면 얼마든지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열 두 제자가 모두 떠나가도 좋다는 것입니다. 오직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만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이들은 절대로 수용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 표명입니다. 아무도 안와도 일절 괘념치 않겠다는 것이니, 이런 말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시니까 하실 수 있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천하 없는 거짓말도 혹은 거짓말쟁이도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는 일은 없습니다.

극히 조심할 것은 하나님께서 "숨기시는"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교만함을 회개하지 않는 한 절대로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의지이십니다. 천하 없어도 그런 사람은 구원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데 어찌 하리요. 그리고 소위 "지식" 가지고 "지혜" 가지고 "똑똑하다는 것" 가지고는 절대로 구원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일등 최고 부자가 되나, 아무나 대통령이 되나. 맞습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나타내시고 숨기시는 것이 분명하고 그리고 그렇게 하는 대상자가 분명히 정해져 있어 갈라놓을 때는 절대로 그 어떤 속임수나 거짓말이나 지어내고 꾸며대고 조작해놓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더더군다나 인간의 말일 수가 없고, 그 자체로도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믿은 베드로더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마 16:17]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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