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5일 월요일

그 우렁찬 최강자의 포효ㅡ"약함"의 미학(美學)

그 우렁찬 최강자의 포효ㅡ"약함"의 미학(美學)



아담과 마귀와의 전쟁*(註).
아담 수하였던 마귀가 하극상하여 아담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현재와 같은 자연계 몸으로 전락하게 한 것.
물론 아담 스스로 하나님 말씀에 불복함이 되어 이 꼴이 났으므로
쌍벌(雙罰)주의에 의해 그 경과대로 마귀가 이 세상 신으로 군림.

전쟁은 일방적이면 아예 일어나지를 않아.
폐물이 된 아담의 자리를 친히 이어 받으시고 사람되신
메시아 곧 대칭 아담께서는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이 되시어도 천하무적.
따라서 일개 피조물인 마귀가 그 적수가 안돼. 상대가 되지 못함.

이 경우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강자가 약자의 위치에 서야 대등해지는데
그 방법이 바로 자진해서 고난을 감수하는 인내ㅡ이것.
동네 북처럼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되 끝까지 인내하는 것.
그래서 자진, 자칭 "약자"는
이 인내로써 승부를 거는 것.
성경이 인내를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

선을 행해도 "참고" 선을 행하는 것(롬 2:7).
그래서 대칭 아담께서도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후 13:4) 했고
따라서 우리도 당연히 "그 안에서의 약함"(:4)을 고수해야.
누가 제일 잘 참느냐 시합이나 하듯이ㅡ.

초지 관철, 불굴 신념ㅡ이것이 과연 진정한 강자요 승자.
그래서 바울 사도가 자기의 육체적 결함, 약함에 대해
주님께 그 의미를 기도로써 여쭈어 본 결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함으로써 온전해지는 것이다"(고후 12:9).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노라" 한 것.

이야말로 진정한 강자의 사자후가 아닌가!
천하무적 강자의 위풍당당이 아닌가.
싸워보지도 않고 벌써 이기고 들어가는 승전가(勝戰歌)이다.
최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개선문 통과다.

고로 이 세상 지배자 마귀에게 굴종하여
거지처럼 한 푼 더 얻어 차지하려고 쩔쩔 매듯이
세상 삶에 연연 모쪼록 잘 살아보자고
(진정 잘 사는 것도 아니건만)
바둥바둥대는 꼴로는 절대로 천국에 가지 못함이 명약관화다.

마귀를 이김에 무슨 초인적인 것을 바라시는 것도 아니다.
단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듯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참는 것, 인내, 많이 참는 것, 끝까지 견디는 것.
사랑으로서의 인내ㅡ이 인내만을 요구하심인데
이것 하나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자를 누가 반기리요.
나 자신이라도 독자 여러분 자신이라도 이를 반기겠는가.

진리를 사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말씀 고수하고 그 진리 사수하는 것쯤
삼척동자라도 할 수 있고 일자 무식꾼도 할 수 있고
남녀노소 누구나 사랑이 있는 한에는
넉넉히 하고도 남을 일이다.
사랑이 그 원동력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생 자체가 여기서는 목적이 아니다.
사랑의 인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라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다"(고후 12:10).
약할 그 때가 곧 나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약자의 구차한 변명이나 궤변이 아니다.
진실 그대로의 영원한 진리이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다.
마귀가 가장 난처해하는 순간이 바로 이 때인 것이다.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를 찾지 못하는 가장 난감해지는 순간이다.
가장 깊은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순간이다.
반면에 우리는 쾌재를 부르짖는 순간인 것이다.
독자여, 이 사실을 깊이 깊이 명심하시라.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다.

요한 계시록에 구원 받은 자를 

"이기는 자"로 색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이유다.






주(註)
아담과 마귀와의 전쟁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 











이 때에는 기뻐 뛰놀라 
즉 껑충껑충 길길이 뛰라고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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