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4일 일요일

나 자신, 나의 모든 소유와 결별함으로 인한 크나큰 엄청난 축복을 너무 몰라ㅡ

나 자신, 나의 모든 소유와 결별함으로 인한 크나큰 엄청난 축복을 너무 몰라ㅡ




주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 하시니
이것이야말로 마른 땅의 생명의 단 비 같은 진리인데도
구름 같이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갑은 을을 위해, 을은 갑 위해 사는 천국에서는 그 나라 헌법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신 그 말씀을
당시 제자들은 너무나 듣기 싫어
그간 목도한 놀라운 기적은 헌신짝 같이 던져 버리고
그렇게 미련 없이 주님 곁을 떠난 것입니다.
자아중심의 이 세상에서는 너무나 걸맞지 않는 생활 윤리였기에
다시 말해 세상 사랑, 세상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기에
영생의 기회도 던져 버리고 주저 없이 떠난 것입니다.
이런 자살 행위는 당시의 제자들만 아닙니다.
바로 오늘 이 현실의 우리 자화상입니다.

남자만 5천, 4천 하던 그 많은 인파는 어디로 가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믿음의 소유자는
바울 사도의 증언에 따르면 고작 500여 정도.
그들은 이 세상 어떠하든 즉 죽음이든 삶이든
고통이든 아니든 진리인 줄로 확신했기 때문에
주님은 그 마음을 아시고 그 부활하신 몸을
나타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청년 부자가 주님께 와서 영생의 길을 여쭈었을 때
우리가 아는 상식대로의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느냐 하시니
모두 지켰다는 대답을 들으시고
청년을 "사랑하시어" "네게 한 가지 부족함이 있다"
하시고 "모든 소유와 결별하라" 하시니
(시험해보고자 하심이 아니라
내 것은 모두의 것, 모두의 것이 내 것이기 때문ㅡ
이것이 만유를 상속하여 내 것으로 삼는
생명의 영원한 법칙이기 때문에 이를 가르치신 것이니,
내 것이라 고집하는 한 모두의 것을 내 소유로 할 수 없어,
주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도
나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어)
생명의 진리 즉 만유를 소유하는 부자되는 비법을 알려 주심에도
이 세상에 대한 한도 없이 미련스러운 미련을 버리지 못해
맥없이 떠나간 것입니다.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하시니
모든 제자가 말하기를 그러면 누가 구원 얻겠는가 하고
놀라 마지않았으니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주님을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듣자니
견딜 수 없어 솔직히 까놓고 여쭙기를
"구원 얻는 자가 적습니까?" 혹자가 질문하니,
바로 그 "좁은 문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말씀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가 예수님을 배척하고 믿지 않은 최대 이유는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달리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호령하는 영광의 메시아를 원했는데
도리어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형수로서 당신을 형상화하시니
곧바로 걸려 넘어진 것으로서 오늘날도 이렇게 걸려 넘어지는 이
슬프지만 너무나 많습니다. 현저히 도처에서 목도하게 됩니다.

사이비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않는 한, 성경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는 한
정통 보수의 기독교 진리가 나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 처럼 모든 일에 완벽해도
주님께서 친히 그를 사랑하실 정도였지만(막 10:21)
자기의 고집대로 하여 말씀에 응할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성경을 읽어 친히 가르치심을 받기에 부지런하라는 것입니다.
자아중심을 따르는 인위적인 교리를
무분별하게 의존하여 자살 들쥐(lemming)처럼
대중심리에 도취되어(절대 다수니까) 따라가다가는 필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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