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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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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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인간[겹 인간]

이제는 그리스도와 내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복수 인간, 이중 구조의 “새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구원 받음이라 합니다. 새 창조입니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선물이시니 그로 말미암는 우리의 '구원' 역시 “선물”[롬 6:23]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이 “선물”이되 물질이 아니라 인격성을 지닌 엄연히 ‘한 사람’이십니다. 따라서 죄는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일체의 것이니 죄를 지으면 그리스도와의 분리를 뜻함이므로 죄는 “그 이름이라도 부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엡 5:3].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크게 오해하고 있으니 구원 아닌 것을 구원이라 착각하고 자기를 속이고 있어 영생을 사람 곧 그리스도 아닌 무슨 사물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미망(迷妄)에서 한시 바삐 깨어날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나의 불가분성은 육체와 영혼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영혼과 육체로서의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육체로서의 나도 인격성을 갖춘 자주 독립성의 개인이므로 이 관계를 ‘사랑으로 하나 되는’ 관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후로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를 이전처럼 나 혼자로서의 일원화(一元化)된 개체로 여기지 않고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주인, 소유주]과 함께 이원화(二元化)로 의식할 일입니다. '이원화'라기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대칭 원리에서의 대소, 주종 관계입니다. 그러나 또 사랑의 원리에서의 한 몸 체제의 삶의 법질서를 따라 말하면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서로에게 사랑으로 종 노릇하는 영원히 복된 몸가 머리 관계입니다. 이런 것이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이와 같이 사랑으로 시작되고 진행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그 종결은 영원하여 끝이 없은즉 우리의 사랑의 의지 또한 주체 의식으로서의 주된 요건을 이루는 까닭에 천국은 사람마다 침입하여 들어가는[눅 16:16] 곳이라 하셨고 빼앗아 차지하는[마 11:12] 것이라고 아주 적절한 표현을 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렇게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움직이지 않는 이마다 천국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특징은, 내가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되"[빌 2:12] 절대로 나를 위하지 않고 나를 위해 살지 않는 원칙에 입각하므로, 나 자신의 구원을 목적하고 천국 들어가는 것 자체를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주님을 위하고 나와 한 몸을 이룬 동료 지체로서의 이웃을 위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자기 부인으로 일관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움직이되 옛 사람일 때와는 180도로 달리 오직 나와 하나 되신 그리스도를 위하는 차원에서 모든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에나 일에나 주님의 이름으로 하고[골 3:17]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함으로써[고전 10:31] 머리와 몸으로 하나 되어 있는 생명의 영원한 체제를 애지중지하여 고수하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행합니다. 따라서 모든 일에 주님께 여쭙고 쉴 새 없이 기도하는 것이며,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하는 것 이상으로 주시되 얼마든지 주시나 주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음과 같이 주님 역시 주님 자신을 위하시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마땅한 의지 작용[순종]을 대신(代身)하실 리 없습니다. 이는 생명의 법질서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절대 하실 수 없으니 사람의 헛된 말에 속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 법칙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이 법칙을 벗어나는 일을 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나를 위하신다고 해서 나의 순종이나 믿음이나 그런 것을 대신하시면 그것은 나를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망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내가 순종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순종을 해도 그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현실이 죽음이기 때문에 이 죽음을 면하기 위해 즉 생명을 얻기 위한 순종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이 결코 순종이 될 수 없으니 왜냐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즉 자기중심이었습니다. 모름지기 순종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심인데 오히려 나 자신을 위하고 나의 구원을 목적하는 것이므로 순종일 수가 없습니다.

순종은 그러므로 자기 부인의 토대 위에서 하는 법인데 자기 부인이 되지 않으니 순종하려는 것 즉 죄 짓지 않으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죄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구원을 목적하여 자기를 위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곧 자기중심입니다. 그런즉 죄의 본질과 성격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 이름으로 하는 일체가 죄입니다. 그 목적이 자기 자신의 특정 목적을 위함이라면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됩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완전히 망각의 늪에 빠뜨려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는, 이 자기중심 곧 옛 사람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무덤 속에 완전히 끌어 묻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믿어 순종하는 차원에서의 과거 [그리스도 오시기 전] 순종은 믿는다는 차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셨지만[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삭을 바치려고 한 것-히 11:17-19/약 2:21] 실제 의를 이루는 즉 자기 구원을 이루는 다시 말해 그렇게 행함으로써 그 순종이 자기에게 구원이 되는 의미의 순종은 아닌 것입니다.

순종은 산 자 곧 생명 가운데 있는 자가 그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으로서의 법칙 준수가 그 원래의 뜻입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순종이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를 때의 나의 순종은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종은 산 자의 일이지 죽은 자의 일이 아닙니다. 산 자의 특징은 살아 있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일차적으로 사는 것이 목적이므로 모든 일들이 이 살고자 하는 즉 자기 자신을 위함에 집중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행위로는 구원을 이룰 수가 없다 함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함이니 왜냐면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위해 구원을 이루려 할 것이 없이 하나님 친히 이미 그 창조 행위로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나는 단지 이를 수용하기만 하면 즉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 일절 나 자신을 위해서는 그 무엇이든[구원 얻고자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하지 못하도록 하심이 우리가 은혜로 얻는 구원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를 완전히 빗나가게 해석하도록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만들어 마치 아무 행함이 없어도 그냥 팔짱만 끼고 있어도 구원은 공짜로 들어오는  복 덩어리인 양 착각하게 만든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의 종교 교리입니다. 물론 이렇게 우리가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데에는 일절 우리의 행위, 행함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손을 빌어 이루어지는 창조는 없습니다. 하나님 홀로 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음으로 선물로서 새 창조함을 입었으니 당연히 아담처럼 또는 과거의 영물들처럼 비로소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행위에 의해 우리의 운명을 결정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정은 단순히 생명의 법대로 사람 삶의 도리대로 살 것이냐 여부를 묻고 그것을 직접 행동으로 증명하라는 것뿐입니다. 도대체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무슨 한 몸으로서의 지체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까. 다름아니라 바로 그런 지체 역할을 하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 역할을 못해 죽은 자가 된 것이고 영물들 중의 악령등 역시 그런 마땅히 할 일을 아니하고 거부했기 때문에 장차 임할 생명의 세계에서 제외되고 영원한 불 못에만 태이게 된 것입니다. 반면 거룩한 천사들은 그 역할에 충실하기로 뜻을 굳게 세웠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든 처음부터 믿지 않는 이들이든 이 세상에서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 짓는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에 있습니다.

즉 믿지 않는 이들은 그 스스로 순종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대로 하나님의 새 창조를 입어 다시 출생하여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들됨 소임을 다하고 머리에 대한 지체 역할을 충실히 하면 될 일을 자기 고집대로 즉 자기의 자유 의사에 따른 선택으로 이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편 믿음에 돌어온 이들 역시 처음에는 복종하기로 뜻을 세워 하나님 앞에 약속을 했다가 중도에 그 마음이 아담처럼 변하여 스스로 그 은혜를 저 버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방법을 취하기 때문에 심판대에 가기까지도 이를 의식하지 못하다가 청천벽력 같은 멸망의 선고를 받게 되는 일이 "많다"[마 7:22]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경우 그 믿음에 나타나지는 행함[순종]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었으니, 그 믿음의 의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상징하고 표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믿음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났으니 그것은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실제 그는 묵묵히 모리아 산상으로 올라가 아들을 결박하고 그 위에다 칼을 집어 드는 순간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것이 행함이 아니고 무엇이 행함입니까.

야고보서에 아브라함이 그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한 것은[약 2:21] 그 행함이 그 믿음을 나타내고 증명해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아브라함이 그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믿지 않는 것으로 성경에 낙인 찍혔을 것입니다. 바로 그 뜻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참된 것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우리의 행함 즉 순종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소위 "믿음"은 죽은 것, 헛것이라 했습니다[:20,26].

우리가 이전에는 죽은 자였지 산 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값없이 은혜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써 산 자가 된 다음부터 즉 구원된 다음 당연히 요구되는 것은 이 생명의 법질서를 따라 사는 것 곧 계명 지킴 즉 하나님의 말씀 순종입니다. 구원되었으므로 더 다시는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 비로소 순종다운 순종을 하게 됩니다. 순종은 원래부터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생명의 법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타내는 순종이 된 것입니다. 고로 순종의 원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믿음의 참 뜻과 구원의 의미를 성경을 직접 읽고 성령의 가르치심을 직접 받음으로써 알아야 합니다. 바울로부터 정확한 복음의 해설을 듣고도 베뢰아 사람들은 그대로 주는대로 받아 삼키려 하지 않고 일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그 옳은 판단과 진단을 받으려 했고[행 17:11,12] 이는 두고두고 성경의 칭찬이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 신(神-고후 4:4)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하에 있음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인으로서[딤후 2:3] 항상 전투 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이 다 그러하므로 한 머리를 모신 한 몸의 구조인지라 한 몸임을 의식하여 모이기를 힘쓰는 것 역시 필수 불가결입니다[히 10:25]. 머리를 의식하니 한 몸을 이룬 지체 곧 내 이웃을 의식함은 정한 이치입니다.

모세 시대와 같이 하나님의 안식일이라 하여 율법 준수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필요를 따라 모이는 것이니 일주 한번만 아니라 필요한 대로 매일 모인[행 2:46/히 3:13] 초대교회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날[마지막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했으니 초대교회 때처럼 한다 해서 지나칠 것도 흠될 것도 없습니다. 특정한 날을 정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예배가 일상생활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惡心)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라"[3:12] 한 대로 얼마든지 "조심하지"[고전 10:12] 않으면 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모이는 목적 중 하나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우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기"[히 3:13] 위함이니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도록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히 10:23,24] 목적인 것입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바울 사도가 직접 그 댭변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 한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갈 1:9] 한 것과 같은 강도(强度)의 경고입니다. 믿어도 "조심하지 않고 넘어지면" 얼마든지 "저주"요 "멸망"[빌 3:19]입니다. 이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오직 그 경우에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히 3:14].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물이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을"[10:26]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경고는 "오늘"을 기준합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to harden, 성미가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 하지 말라[히 3:7,8]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믿기만 하면 되는 은혜와 선물로서 거저 주시는 구원을 전했지만 그러한 구원의 실상을, 그리스도를 처음 믿어 사랑해도 중간에 그 마음이 변하여 사랑하지 않으면[계 2:4,5] 저주를 받는 것으로 설명했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심"[롬 2:6]으로써, "참고 선을 행하면 영생이요 자기중심으로 나가[self-seeking, selfish, "당을 지어"는 오역] 악을 행하면 멸망이라고[:7-10]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만 아니라 모든 성경의 일관된 논조입니다.

선행(善行)

세상 종교의 선행과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 구원 받은 사람의 선행과는 어떻게 다른가 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만 아니라 모든 이성적(理性的)인 피조물을 만드실 때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양심을 주신 것만 해도 그 증명입니다. 그러나 양심과 함께 자유 의지를 주셔서 양심 따라 자율로 행동하게 하셨습니다. 양심의 평안 또는 가책이 그 증거입니다. 즉 양심 따라 행하면 평안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행복과 삶의 희락을 추구하는 종교로서 세상 종교가 선행을 장려함은 당연합니다. 악행을 하라고 부추기는 종교는 없습니다. 또 악행을 칭찬하는 인간 사회는 없습니다. 선행이 다 좋은 줄 압니다. 사람은 같고 양심도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지으신 인생들이니 다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공통점 즉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나 종교에서 말하는 것이나 똑같이 의미하는 것은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선행을 해야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선행만 아니라 그런 세상 종교에서 가르치는 일정한 교리가 있습니다. 즉 자기네가 받드는 교주(敎主)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은 성경과 다릅니다. 가르침은 달라도 선행을 강조하니 공통성이 있고 그래서 결국 구원은 다 받게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깁니다. 차이를 말하라면 세상 종교는 주먹구구식이고 성경의 말씀은 과학적입니다.

과학적이라 함은 자연법칙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무릇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썩게 마련입니다. 고로 이 썩는 육체로써 영생에 이른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므로 비과학적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막연한 희망, 망상에 속합니다. 마음에 그렇게 바란다고 영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경과의 차이는, 성경은 하나님의 새 창조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창조는 무(無)에서부터의 유(有)의 생성입니다. 그러므로 없었던 법칙을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창조”이니, 처음 창조를 근거로 해서 다시 말해 처음 창조에서 이미 확립되어 있는 기존 법칙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일인즉, 기존 법질서를 무시하고서 되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자연법칙을 무시하는 새로운 법칙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기반으로 하는 새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런 몸을 가지고도 영생에 들어간다는 황당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혈(血)과 육(肉)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고전 15:50]고 성경은 못을 박은 것입니다. 원래 자연법칙을 비롯해 모든 법질서는 창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까지나 과학이고 과학에 기초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하시는 일들이 과학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함은 과장됨이 없는 자연스러운 필연적 결론입니다.

바로 이 과학적 원리원칙에 근거하여 그리고 이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고 사람으로서의 최고 형벌 곧 극형(極刑)인 십자가 죽으심을 우리 위해 당하시지 않으면 안된 것입니다. 이런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가 살인죄에 해당됨을 나타내고[죄의 값은 죽음이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죄가 경중의 차별이 없이 극형 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왜냐면 그 뿌리가 자기중심이니 이 자기를 위주하고 본위로 한다는 것은 결국 내 이웃 즉 타 생명의 파괴 행위에 이름은 가인이 아무 이유 없이 아우 아벨을 죽임으로써 증명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위해 죽으셔도 죄인으로서 형벌 받는 양식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인간 사회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죄를 지으셔서 죽으신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의 시기와 로마인들의 식민지 억압 차원에서 정당하지 못한 죄목(罪目)을 쓰시고 부당한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어린 양" 곧 희생 양이시라는 의미 그대로 죄 없이 죽으심 곧 순수하게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죄 있는 나와 함께 하나가 되시기 위해서는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 있는 죄인의 모양으로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친히 사람되심으로써 그와 같은 죽음의 고통을 불가불 맛보시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직 사랑 하나로써 이루신 것입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그 만드신 피조물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신 터였으므로 그 사랑의 본을 친히 모범으로 즉 솔선 수범하여 보여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즉 우리 모두 이 본을 따라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시기도 합니다[요 13:34]. 따라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왕좌왕하거나 부질없이 갑론을박할 필요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친히 본을 보여 주신 대로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히 주시는 “새 계명”으로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자신을 다 바쳐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사랑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을 바탕으로 하는 아버지께 대한 순종이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해서만 모든 것을 하시는 사랑입니다. 때문에 "이로서 우리가 사랑을 안다"고 성경은 확언하고 있습니다[요일 3:16].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서, 한번 이루시고 나타내시고 결정하신 것은 영원무궁한 결정 그리고 법질서로 확정되어 버립니다. 이 역시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게 되면 그와 같은 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영원히 사람으로서 이제부터 온전히 우리만을 위하시게 되어 있는 위치에 계심을 온 천하에 확증해 보이신 것입니다. 이제 비로소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만유를 창조하실 때부터 즉 피조물을 만드심으로써 조물주 또는 창조자가 되시면서부터 확립하신 모든 ‘존재의 법칙’입니다. 즉 창조주는 피조물을 위하시고 따라서 피조물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의당히 조물주 하나님을 위함으로써 같은 피조물로서의 자기 이웃을 위하도록 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조물주 친히 머리가 되시고 각 피조물은 그 머리를 모신 한 몸으로서의 각 지체들의 위치인 것입니다. 조물주 친히 피조물 각자를 위하시고 또 피조물 각자는 조물주를 위하는 차원에서 자기 이웃 즉 동료 피조물들을 위하게 되어 있는 체제이므로,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아도 자기를 지으신 조물주께서 자기를 위해 주시고 이웃들이 조물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를 위해 주는 터이므로 자기가 자기를 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모두가 다 자기를 위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일사불란한 ‘서로 위하는 체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라도 여기에서 이탈하여 자기를 위하게 되면 차질이 생길 것은 뻔합니다. 정밀한 구조의 여러 기계가 일제히 돌아가다가 갑자기 그 중 하나가 동작을 정지하게 되면 전체가 결국 정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됨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각 피조물은 서로를 신뢰하여 절대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 조물주를 위하고 자기 이웃을 위하게 되어 있는 데가 천국이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할 자, 그렇게 하지 않을 자를 가려내어 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사람은 그 누구든 차별없이 이 세상에서부터 솎아내고 추려내고 걸려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함보다 자기가 더 잘 위해지니 구차하게 자기를 위할 필요성이 없어서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면 1로서 그치지만 자기 이웃이 만일 일만이라면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의 1만배로 확대, 확장, 확충되는 효과가 되니 왜 어리석게 1을 취하고 그 10000을 버릴 것입니까.

무한히 어리석은 일을 왜 할 것입니까. 자기가 그렇게 아주 이상적으로 위해지는데 왜 자기를 위함으로써 그 이상적인 방법을 버릴 것입니까. 그런데도 교만한 생각이 들어 여기서 이탈자가 생긴 것이니, 영물들 가운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이 생기고, 그런 영향을 받아 덩달아 또한 외람되고 시건방진 오판을 하여 아담 내와 역시 범죄하게 되어 그 정당한 보응을 받은 것이 오늘날의 모든 인생 불행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이 모두 다름아닌 '한 몸'의 구조가 생명 체제임을 말합니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몸의 각 지체는 머리의 지시를 받아 자기와 이웃하고 있는 다른 지체를 위하게[자기 역할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되어 있는 이상적인 삶의 구조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 서로 사랑하고 선행을 하는 기본 뼈대요 틀입니다. 이런 과학적인 체제가 아니고 그냥 막연하게 선행을 하고 이웃을 배려하라는 등의 가르침은 마치 공중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허망한 것으로서 논리적 근거도 합리적 바탕도 없습니다.

왜냐면 성경 말씀과 같은 손에 꽉 쥐이는 것이 없는 막연한 주먹구구 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하나님 가르치심은 정밀한 기계와 같아서 그 확실성과 구체성은 다른 무엇으로든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또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소위 선행과 성경에서 가르치고 강조하는 "선을 행함"[롬 2:7,10]과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와 같이 모든 인생들 각자를 상대로 자신을 주셨으니 이는 다시 말해 ‘각 사람’을 그와 같이 위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왜냐면 이제는 친히 사람이 되어 계시는 까닭입니다. 물론 과거에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창조하시던 때부터 그러하신 하나님이 사랑이요 보살피심입니다. 이제는 그 사실이 손에 잡힐 듯이 확고하게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가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인간[아담]이 영계인 에덴낙원에 있을 때는 이렇게 구체화할 필요도 없이 자연 그대로 물 흐르듯 하는 순리를 따라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체제 그대로였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가 되어 이 자연계에 속하면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영계와는 달리 이 자연계는 사람 사는 곳이 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어색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처음부터 영계에 있어 보아서 별달리 이런 간격 또는 격차를 그리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을지 몰라도 아담의 소생으로서 줄곧 이 세상에서만 국한되어 사는 인생들로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하자면 모든 것이 어색하고 답답한 그런 현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아는 데에 지장이 있었다는 말은 아니나 아담이 영계인 에덴낙원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던 것과는 많은 차이 혹은 괴리 같은 것이 있어 에덴낙원에서와 같은 정도가 아니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장애가 이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어 주심으로써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이 친히 되어 주심으로써 구원의 차원에서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소통 면에서 일거에 완전 해소되었다는 의미가 큰 것입니다.

사람은 1대1로서 상관하지 여러 사람과 동시에 상관하지 못합니다. 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다른 여러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개인 상대, 직접 상대, 개별적으로 상대하시는 것이니 말하자면 짝과 같은 개념입니다. 그런 의미로 각 사람을 사랑하셔서 각 사람에게 자기를 영원한 선물로 주심이 그리스도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은 이렇게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主, 나의 주인 곧 소유주로)님으로 자기 안에 모시게 되는데 이 사실을 성경은 둘이 “합하여 한 영이 된다”[고전 6:17]고 표현합니다.

육체와 영혼과의 불가분성 바로 그런 이중 구조로서의 관계 그대로 내 안에 계심입니다.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영혼이시고 나[영혼과 육체 모두]는 그 육체와 같습니다. 나의 육체는 ‘나’라는 한 영혼의 집(家屋)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 집에 둘이 사는 격이 아니냐, 육체는 하나인데 영혼은 둘[성령과 나의 영혼이라고 하여]이라는 의미가 아니냐 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바로 '육체'의 모습이요 역할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이 '육체'에 대하여 '영혼'으로 계시는 것이 바로 새 창조의 구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완전하신 한 사람으로서 나와 하나 되어 계시나,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그렇게 우리 모든 사람 각자와 또한 하나 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육체인데 반해 하나님은 영이시니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것은 사람이 육체로 존재함과 같은 정상적인 모습으로 내 안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처럼 육체가 없으시므로[육체 즉 형상이라는 것은 피조물만의 특성] 하나님의 영이시라 해도 하나님이시고, 또 하나님이시라 해도 실제는 그리스도께서 엄연한 사람이시므로 영으로 계시는 것 자체가 우리 육체로 말하면 육체로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요 모양새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으므로 사람은 사람이시나 동시에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심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러나 이제는 어엿한 사람이시니, 그러므로 내 안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임하여 오셔서 나와 함께 사실 때에는 육체인 사람이 그 육체대로 내 안에 와서 함께 사는 것과 똑같은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능하신 일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영으로 내게 올 수 없으니 왜냐면 영혼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는지라 나와 단 둘이 함께 살려면 반드시 육체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으로서 나와 함께 그렇게 계셔도 모든 사람들과 일일이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똑같은 의미와 형태로 계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떠나실 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이라” 하셨습니다[요 16:7].

진실로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이제는 영원히 존재하게 되니 과거에 존재하던 내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나 혼자였으나 이제는 말 그대로 둘입니다.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사람으로서의 나의 육체는 그대로이나 그리스도와 나 이렇게 둘이 지금 한 육체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없던 존재입니다.

그래서 “창조”입니다. 과거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새로 생긴 까닭입니다. 과거에는 내가 단일 구조였다고 치면 이제는 이중(二重) 구조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은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입니다. 그러나 이 새 창조에서는 성령께서 '영혼' 격으로 계시고 나는 '육체' 격이 되어 역시 동일하게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와 구조의 이중 구조입니다. 왜냐면 이제 나는 과거처럼 더 이상 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영원히 엄마[하나님] 품속에 있는 아기의 모습입니다.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아버지의 모습이신지라 이는 사실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아기가 되어 있는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를 품속에 품고 계시는 아드님의 모습이 곧 아버님의 모습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요 14:9] 하심 꼭 그대로입니다. 나와 함께 사시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죽도록 사랑하신” 분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갈 2:20].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행복 그 자체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여 백년가약을 맺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나왔는데 남녀가 한 몸이 되면 둘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원리를 따릅니다.

이 사랑의 원리는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 이미 확립되어 있던 삶 또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즉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위하시고 피조물은 조물주를 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부터 홀로 계시던 분이시므로 무엇이 아쉬워서 피조물을 만드심으로써 자기를 위하도록 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자기를 위하시지 않아도 홀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피조물을 만드셨으니 전적으로 그 만드신 피조물만을 사랑스러워 하시고 위하시는 것이 낙(樂)이십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심이 일절 없습니다.

또 피조물로서는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시는데 자기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위하지 않게 됨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이 갑과 을로서의 둘이 하나 되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서로 상대를 위하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은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한다는 이치를 앞에서 한 몸의 원리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남녀 한 몸이 되는 것도 이 이치를 따라 남자의 몸은 여자가 주장하여 여자의 것이 되고 여자의 몸은 남자가 주장하여 남자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둘의 관계에서 각자는 더 이상 자기 몸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상대의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고전 7:4]. 만일 여기서 자기 몸이 자기 것이라고 딴 짓을 하면 간음죄가 성립되고 둘이 하나 되는 관계는 파탄이 납니다. “한 영”이 됨도 역시 둘이 하나 됨이니 이치는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몸이 아니라 영으로서 그러하니 즉 삶으로써 그렇게 됩니다. 즉 나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함이고, 그리스도의 삶은 나를 위하심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기를 부인하시고 나에게 당신의 전부를 선물로 주신 결과입니다. 상호간 전적으로 그렇게 살게 되어 있으니, 앞에서 말한 대로 믿음이 나를 자기 부인으로 만듭니다. 억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미 자기가 부인된 상태에서 그 터전 위에서 계속 사랑으로 자기 부인으로 살아 가게 되는 삶 자체입니다. 사는 것이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산다고 억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살면 그것이 곧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동적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니 내 스스로 끊임없이 나의 의지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의지가 '자기 부인'에 있다는 그 차이가, 나의 현재의 "새 창조"[고후 5:17/갈 6:15/요 3:5,7]에 의한 "새 사람"[골 3:10/엡 2:15/4:24]의 "새 생명"[롬 6:4]입니다. 그러므로 태초부터 피조물 인간이 창조되면서부터 현재의 이 새 창조에 걸쳐, 오로지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한 몸 체제에서 자기 부인으로써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하고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위해 사는 것'으로 완전히 인식을 고착화시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임하시어 영원히 나의 소유가 되어 계십니다. 나를 관할하고 통치하고 주장하기 위해 내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섬기시려고 내 안에 계심이니 그것이 "선물"이 되어 계시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와는 반대로 내가 섬기기 위해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있으니 의미는 상반되면서 그러나 조화 통일되어 있으므로 이것이 '양면성'과 '동시성'의 조화입니다. 내 스스로 자진해서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이미 설명한 대로 나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나를 그 피로 사신 그대로입니다[행 20:28]. 내가 주님의 소유이니 주님의 뜻대로 그 명령대로 그 계명대로 행하고 순종하게 됩니다. 또 주님은 나의 소유이시니 그래서 나를 위해 모든 필요한 일을 하셔서 내가 한 것이 되게 하시니 이는 종이 하는 일이지 주인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나를 전적으로 위하시는 분이 내 안에 계시는데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시니 내게 닥치는 그 어떤 것도 내게 이롭고 덕이 되는 것뿐이지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이 믿음으로 나는 범사에 곧 모든 일에 감하하게 됩니다[살전 5:18]. 그래서 항상 기뻐합니다[:16].

앞에서 주님과 내가 한 영이 되어 있는 모습을 엄마 품속의 아기라고 했듯이 주님께서 나의 소유로서 나 위해 모든 것을 하시는 것은 아기가 원하는 것을 엄마가 미리 알아서 처리해 주는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해서 스스로 주님께 무슨 지시를 하는 따위가 아닙니다. 이렇게 이제 둘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요 동시에 주인입니다. 주님을 “주(主)”라고 부르는 것은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라는 뜻으로서 나는 그 종, 하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로서는 당연히 절대 복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요 2-:21,22]. 나는 오로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사는 것이고 또 삶의 낙이요 주님은 나를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시는 것이 주님의 즐거움이 되십니다. 이와 같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나의 사랑하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나의 이웃을 위하는 삶을 사니 이것이 선행(善行)입니다. 인간을 애초 만드신 것이 서로 사랑하여 행복하게 살라고 하신 그 뜻 그대로입니다.

즉 한 몸 체제에서 자기 역할, 자기 소임을 이웃에게 무한대로 베푸는 것 이상으로 선(善)이 어디 있고 올바른(義) 일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 종교에서는 무리하게 자기를 없앤답시고 몰아(沒我), 무아(無我), 망아(忘我) 등을 부르짖으나 말뿐이지 실제 상황은 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아무리 없애려 하고 떨쳐 버리려 하고 잊어 버리려 하나 그리 되지를 않습니다. 더욱더 자기는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죽어야만 끝납니다.

그러나 죽으면 만사휴의(萬事休矣). 생명도 모든 것도 한꺼번에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을 것은 죽어 자기가 완전히 끝나 문자 그대로 망아(亡我)가 된 바탕 위에서 “다시 출생하는”[重生, 요 3:3] 것이 그리스도를 그와 같이 성령으로 모셔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니,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지고 함께 다시 살아났고 이제는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함께 앉아 있으니 이보다 더 완전한 몰아(沒我), 무아(無我)가 없습니다[엡 2:5,6].

이런 것이 진정한 그리고 철두철미한 자기 부인입니다. 사실과 진실 그대로의 몰아, 무아, 망(忘)아, 멸(滅)아입니다. 그래서 과학적이라 합니다. 조리가 정연하고 논리가 확실하고 모순이 없으며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순류(順流)입니다. 이보다 더 과학적인 방법 즉 영생의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종교의 선행을 주먹구구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흉내 내는 것뿐이지 본질은 그 언저리에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을 행함”과 종교에서 말하는 “선을 행함”이 이와 같이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전자는 자기를 위함이 아닌 반면 후자는 자기 구원을 위하므로 자기를 위함이 되어 여전히 자기중심이라는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 격입니다. 더욱 꼬여 들기만 하는 그런 것입니다. 불가불 자기 구원을 의식할 수밖에 없으니 그렇습니다. 깨끗이 죽어 버리고 난 다음 산뜻하게 새 기분, 새 환경, 새 분위기 속에서 새로 출발하는 새 삶이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후 5:17] 하는 것이 실감이 납니다.

창조와 새 창조의 상관성

영혼에 대한 언급이 나왔으니 더 보충 설명을 하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시고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는 동작을 별도로 취하셨습니다[요 20:21,22]. 이것은 바로 우리 구원이 새 창조의 의미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도 이와 같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육체를 만드신 다음에 영혼을 조성(造成)하실 때 바로 이와 같이 하셨습니다.

죽 아담의 코에 숨[生氣, "the breath of life"]을 불어 넣으시니 다시 말해 숨을 내쉬시는 동작을 취하심으로써 그 숨이 아담의 코에 들어가 사람이 생령(生靈-a living soul)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자연계의 동식물과 같은 기계적 생물체가 아니고 영적 존재로서 이지력과 인격성을 지니므로 영혼이 창조됨으로써 인간이 비로소 만들어집니다. 즉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죽은 자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영생을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영생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사람 안에 영혼이 조성되었습니다. 이 숨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이시므로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fe] 곧 생기(生氣)가 됩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고 육체가 없으신데 무슨 숨이냐 하겠지만 인간이 알아듣기 쉽도록 의인화(擬人化)하여 그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영혼은 영원합니다. 따라서 육체도 거기 부합하게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요 신령(神靈)한 즉 영적(靈的) 육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아담]을 위해 영계(靈界)로서의 에덴낙원이 창설됩니다. 원래 사람을 지으실 때 이와 같이 영생하는 존재로 만드실 의도이셨습니다. 이유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아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람 피부는 처음부터 이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의 피부처럼 털로 싸여져 있지 않았다고 이미 지적했습니다.

매끈한 피부 그대로 남겨 두신 것이니 신령한 몸이 되면 그 몸으로부터 광채가 발산하여 몸을 자동적으로 덮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을 만드신 다음 에덴 동쪽에 한 동산[과수원]을 만드시니 이 “에덴”은 원래 영계(靈界)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에덴낙원에 인간 아담을 두시니 아담은 그 곳의 과일을 먹음으로써 신령한 몸이 됩니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영생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중성(二重性)을 띠는 것이니,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지으심을 받은 후 다시 영혼을 지니게 되어 영적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이중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라 할까 아니면 인간이 자연계에서 영계로 옮겨 왔으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흔적이라 할까 아무튼 그래서 동산 중앙에 선악과 나무와 영생하게 하는 나무 즉 생명나무가 함께 두 그루 나란히 있게 된 것임을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선악과(善惡果)를 먹지 않도록 엄명하신 것입니다. 왜냐면 이 선악과를 먹으면 현재의 신령한 몸이 자연계에 속한 과거의 몸으로 돌아가 버려 영생이 불가능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영생하지 못하므로 인간으로서는 죽음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먹으면 죽는다 하신 것입니다. 이 때 영생하는 생명과를 먹지 말라 하시는 말씀을 아니 하신 것은 이미 아담은 영생하는 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는 생명과 나무 열매를 먹지 않도록 조처하신 것은 이미 선악과를 먹었으니 죽게 되어 있는 터이므로 죽어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한 결단코 한번 죽기로 작정된 인간이 살아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어겨 즉 말씀을 믿지 않음으로써 지키지 않았으니 근본적인 결함을 아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이런 결함으로써는 절대로 영생할 수 없고 영생해서도 안됩니다. 죽게 되었으니 죽는 것이지 인간 마음대로 죽었다가 살았다가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낙원[동산]으로부터 추방됩니다. 이 생명과 나무 과일은 그러므로 고의가 아닌 실수로 선악과 나무 열매를 먹든가[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은 기타 이유로 사람이 이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갈 위험에 빠질 어떤 특수한 경우에 [인간의 근원이 그러하므로] 그 생명과 나무 과일을 먹으면 치유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다가 이 영계에 들어와 지금 신령한 몸이 되어 있는데,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 다시금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되돌아와 버렸으므로, 모든 것은 한 번씩 해서 지나가면 그것으로 종료이고 되풀이된다는 것은 법질서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먹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받고도 그 스스로 먹음으로써 범죄한 결과로 그렇게 되었으니 그 생명과 나무를 먹고 다시 신령한 몸으로 회복된다는 것은 당치도 않고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가 비록 상징적으로 세워져 있다 하지만 단지 상징성을 띠는 것으로만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용도가 있을 것이나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므로 성경이 그 설명을 생략[창조에서 물에 대한 내력이 생략되어 있는 것과 같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용도가 있기 때문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할 것이라”[계 2:7]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영생하고 신령한 몸이 되어 있는 터에 생명나무 과일을 먹음으로 영생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10]을 주신다는 말씀도 있는 것을 보면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신다는 말씀도 그리스도 친히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골 3:4] 사실을 강조하여 나타내신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설명이 생략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억지로 그것을 알고자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령한 몸으로 우리가 변화될 때 그 때 가서 모든 것은 알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설명을 생략하고 있는 것은 우리 역시 그대로 덮어두는 것이 옳고 알고자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생략’ 중에는 계시록에서 “이기는 자들”을 위한 말씀 가운데에서도 몇 가지 드러나는데 “감추었던 만나”라든가, “흰 돌”[계 2:17]이라든가 “새벽 별”[계 2:28]이라든가, “하나님의 일곱 영”[계 3:1] 등등이라 할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그와 같이 범죄(犯罪)함으로써 즉 범법행위를 함으로써 영적인 몸을 박탈 당하니 역시 하나님의 일사부재리입니다. 이제 인간은 평상적(平常的)으로는 두 번 다시 신령한 몸을 입을 수 없게 되고 영생할 수 없으며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생의 죽음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아담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천년 가까이 살게 되지만 만년을 산들 별다른 의미가 있을 리 없습니다. 결국에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당시 인간이 천년 가까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한 때 지냈던 그 여력(餘力)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의 기후 조건이 장수하기에 적합했을 수도 있다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왜냐면 당시 세상이 대홍수로 멸망한 후로는[인간이 너무 악하여] 인생 수명이 급격하게 짧아졌기 때문입니다. 기후 변동이 있었다는 이유로는 지금은 당연시되는 무지개 형성이 노아 홍수 이전에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로도 입증됨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창조 당시 영혼이 조성되기 이전의 상태로 모든 인류가 현재 놓이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영혼 없이 육체로만 있던 당시 아담의 상태와 같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영혼은 존재하므로 다시 당시처럼 인간 안에 영혼을 생성시키실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 친히 그 영혼 역할을 자임하셔서 인간의 육체 안에 계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 하시고 당시 아담의 영혼을 만드실 때의 동작을 취하신 것입니다. 즉 숨을 내쉬셨습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이제 인간은 당시의 아담에게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영계인 에덴낙원으로 들어가 신령한 몸을 입고 영생하는 존재로 변화되었던 것과 똑같은 그런 충분하고도 완전한 위치에 복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요 이것이 창조 곧 새 창조입니다. 성령은 이미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의 영 다시 말해 사람으로 임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므로 아버지 친히 우리 안에 계심이니[요이 1:9] 그래서 "성령"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통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래서 이렇게 인간 안에 오심으로써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 안에 그렇게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맞물립니다. 믿어야 하고 믿어 회개하는 자에 한해서 그와 같이 새로 창조하시는 역사(役事)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와 긴밀히 맞물려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일을 하시고 처리하시는 하나님은 철두철미 원리원칙주의이십니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결코 아니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결단코 애매 모호하게 하심으로써 “덮어놓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는 일하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충분히 납득하여 충심으로 호응하고 승복하여 기꺼이 이를 따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을 애초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존재로 만드시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알고 싶어 하고 궁금해 하고 호기심이 많은 인간으로 만드셨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와 불가분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첫 사람을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지만 범죄로 인하여 그 영생도 무의미하게 되어 버렸으니 그래서 죽게 되어 있으면 죽음으로 끝나는 일이지 그것이 어떻게 사는 것으로 둔갑하여 이전 일이 다시 되풀이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어 그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는 것만으로는 나의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시어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일이 내게 모두 적용되어야 비로소 나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자는 죽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죽게 되어 있는 나의 죽음을 나와 함께 죽으신 것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죽으심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죽으신 전력(前歷)으로 내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나와 하나 되어 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죽으신 과거 경력만 아니라 살아 계시는 현재 위치로 내 안에 계시니 이는 나와 함께 살아나심이라, 이 때문에 나 역시 죽었지만 현재 살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죽었지만 살아 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비록 현재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있지만 그리스도를 선물로 내 안에 성령으로 모심으로써 과거 한 때 죽었던 몸이 되어 있는 실상이니 이 또한 동시에 중요합니다. 고로 나의 현재 생명은 과거의 죽음을 밑바탕으로 하는 삶입니다.

이 죽음이 없으면 절대로 현재의 생명[영생]이 없다는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즉 “옛 사람”의 죽음이 없으면 그리스도 안의 “새 사람”으로서의 삶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 죄를 나의 죽음으로써 청산하고 또한 이와 같이 나 자신 죽어 없어짐[즉 장사 지내짐]으로 해서 내가 나를 위하여 살 수 있는 모든 근거[죄를 지을 수 있는 바탕]가 소멸되어 있지 않는 한, 영생은 없다는 그 뜻입니다. 나를 위해 사는 근거란 다름아닌 ‘나 자신’인 것입니다.

과거 나 자신을 위해 살던 그 나라는 것이 이미 죽어 없어진 것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나의 죽음을 말하면서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내짐[무덤 속에 묻힘]을 강조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다시는 의식하지 않게 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죽어 없어졌으니까 그렇습니다. 죽어 없어졌으므로 내가 나를 위할 근거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고로 과거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삶으로써 각종 범죄를 짓고서는 영생은 아예 입에도 담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범죄는 모름지기 나 자신을 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고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나의 죽음은 과거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의 청산과 더불어 향후 죄를 지을 수 있는 일체의 근거가 말살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죽었던 자로서 다시 살아나 있는 삶이니 곧 현재의 나의 삶은 자기 부인이라는 토대 위에 세우진 건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을 버리고 이전처럼 자기중심으로 나갈 때는 이 건물의 토대 자체가 붕괴됩니다. 고로 구원도 생명도 아무 것도 없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요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내가 믿는 것이 바로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엉뚱하게도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과 “나를 대신하셨다”는 것과는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나를 대신하셨다고 믿어도 구원은 되나 단 조건이 있으니 그런 경우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어떻게 믿든 그 믿음의 핵심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고 본질이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이지, 교리를 만들고 그 교리의 수용 여하로 구원을 정하는 그런 일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음이 되기 위해 나 위하여 죽으심'을 믿는 의미도,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 과거 아담처럼 또는 나의 과거 생활처럼 죄 짓지 않기 위함 그래서 그 죄의 결과로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함인 까닭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고 믿어도 그것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 믿으면 자연적으로 나는 그토록 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지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는 법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아주 단순한 어린 아이 같은 반응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 시퍼렇게 살아 있다 가정해도[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의식이 없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만 있으면 절대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게 되기를 바라심에 있는 것이지 교조적(敎條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 자체가 구원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도[실상은,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얼마든지 자기를 위해 살고 따라서 얼마든지 범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이해하는 것이 옳고 안전하니 즉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나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고 바로 말하고 분명히 가르치고 명백히 배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 “우리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번역자의 잘못된 믿음 또는 편견이 낳은 오류입니다. 영역은 이 경우 반드시 “for”이지, “instead of” 또는 "on(in) behalf of"가 아닙니다. 번역하면 단순히 “위하여”이므로 확대 해석할 일이 아닙니다. 나 “때문에” 즉 나와 함께 죽으실 목적으로 죽으셨다는 그 뜻입니다. 고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는 것이므로 아담처럼 범죄하지 않는 것을 말함은 당연합니다.

나의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내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롬 6:6]. 어째서 그런가. 이에 대해 성경의 답은 아주 더없이 명백합니다. 즉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6], 바로 이것입니다. 처음은 그렇게 믿었어도 즉 범죄하지 않기로 했어도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신령한 몸을 입기 전 즉 “몸의 구속”[8:23]을 받기 전에 당연히 탈락, 낙오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죽을 인생 단지 불쌍히 여기셔서 영생하게 하심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담부터 그렇게 선악과를 먹지 못하도록 강제하시고 간섭하셨을 것입니다. 강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누가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대로’ 하도록 처음부터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의 개념입니다. 자유 의지를 완전 보장해 주신 의미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하나님은 간섭,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불 못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이 강제하셔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렇게 선택한 대로 되어지게 하시는 의미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정하셨으니까 “그렇게 하신다”는 표현이 될 뿐입니다. 마음대로 하도록 만드셨으므로, 반드시 죄는 강제로 짓지 못하도록 해서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짓지 않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를 미워하게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삶에 역행하는 암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생명에 역행하는 그런 것을 당연히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그런 것을 미워하십니다. 왜냐면 살도록 만드셨는데 죽을 짓을 하는 것을 곱게 보실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셨다”[히 1:9]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라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으로서 이것은 생명과 삶의 법질서에 벗어나는 것이라 그래서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이미 에덴낙원에서 본보기로 다 나타나졌고 드러나지고 입증된 것이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자기 범죄로 타 생명[인간의 생명]을 죽음에 빠뜨림으로써 그리고 아담은 그 스스로의 범죄로써 죽음을 자취함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아(自我) 집착이라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인생으로서 누구나 생각 있는 자이면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므로 무슨 심오한 것도 아니고 고매한 것도 아니고 일반 상식 수준입니다.

그래서 세상 종교도 이를 척결하고 타결한다고 하여 그들 나름의 이론을 내세우고 교리를 만들었지만 만유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니 않으니 완전히 첫 단추 잘못 끼운 것입니다. 그 이후의 결과야 보나마나 들으나마나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실존을 믿지 않는 것을 자기 스스로가 생각해도 무슨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그러면 너도 바보라는 말이냐" 하고 되물으실 그런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이가 적지 않으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 하나만으로도 스스로 생각할 때 무슨 대견한 것으로 여길지 모르나, 그 역시 그 자체만으로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미 지적했지만 구원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발로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런 끔찍한 일을 자행하는 것이 되느냐 하면, 답은 간단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을" 때[고후 5:15]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심도 바로 그 목적을 위함입니다. 왜냐면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지 않고는 이 자기 부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임은 이미 설명했습니다. 때문에 구원을 받았지만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논리가 충분히 성립되는 것입니다[빌 2:12].

왜냐면 믿는 것도 그리고 탈락되지 않는 것도 순수하게 나의 자유 의지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믿을 때 반드시 회개(悔改)가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세례를 받는 데에 이 회개가 필수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면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졌음을 확인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골 2:12/롬 6:4]. 이런 의미 없이 세례 아무리 받아도 구원이 안됩니다. 

고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과거의 모든 죄가 용서됩니다. 이는 당연하니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왔고 이런 모든 불행이 있게 되어 이렇게 구원의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행 2:38/17:30].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진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바탕 위에서만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가 용서됩니다[행 2:38]. 그 다음 순서가 성령의 세례 곧 성령 받아 모심입니다.

세례는 세죄예식(洗罪禮式)의 줄임 말로 활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즉 “죄를 씻는”[행 22:16], 과거의 죄가 용서되는 의식(儀式)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과거 죄가 용서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성령께서 임하심으로써 나는 더 이상 죽은 자로 머물지 않고 산 자[영생하는 자]가 되며 생명의 법칙 곧 삶의 법질서를 지킬 수가 있게 됩니다. 산 자로서 생명을 누릴 권리와 더불어 생명의 법질서를 지켜야 할 의무를 지게 됩니다. 명실상부하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자연계에 속한 몸의 건강을 위해서는 자연법칙을 지키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는 자동적으로 그 필요한 법칙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건강을 해치는 일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는 한 모두 기계적으로 안전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육체적 생명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하는 데에는 당연히 그 영생을 유지하는 법칙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법칙은 영원히 살도록 되어 있는 자 즉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자에 한하고 이 법칙을 지키고 안지키는 것은 순수히 자기 자신에게 달린 것임을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바로 그 생명의 법칙의 핵심이 자기 부인 즉 한 몸이 원활하게 가동되는 이치에서 지체(肢體)로서의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뿐, 아주 간결합니다. 간단명료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복잡해도 그것을 간추리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 모든 진리와 진실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진리는 그 자체 내에 합리성과 타당성과 논리성을 모두 함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없이 뒤죽박죽이면[지어낸 거짓말이나 속임수가 그렇지만]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는[모른다기보다 진실이 아니므로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까닭] 것을 말하므로 횡설수설이 되고 복잡한 것이 되어 듣는 자도 알쏭달쏭 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진리가 심오해서 그렇다는 자기 변명을 하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래서 자기를 위하면 죽고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으면 한 몸의 이치에서 머리되신 하나님의 모든 지시를 따르고 그 지시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므로 영원한 생명을 유지 보전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애초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것도 이 법칙을 어긴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즉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이 법칙을 따라 말씀하심인데 믿지 않고 듣지 않은 것입니다. 모두 인간을 위하시는 것이요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일절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당연히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아는 까닭에 이는 무조건적입니다. 그런데 듣지 않은 것입니다. 조물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그 때문에라도 복종할 이유는 충분히 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유로 복종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앞의 설명처럼 이지적인 인간으로 창조하셨으므로 이지적인 법칙 준수 차원에서 그 스스로 자진해서 자기 일로서 순종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나간 것이니 그래서 새 창조로써 인생들을 구원하실 때는 그런 불상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순종하는 자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한하여 그 재기(再起)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창조로서 하나님 친히 과거 아담을 지으실 때처럼 같은 동작을 취하셨다 했는데 그와 같이 나 자신을 아담 창조 당시의 '육체'로 보시고 '영혼' 조성 차원에서 성령을 주시는 것이나, 당시 아담의 육체는 영혼이 없는 단지 자연계에 속한 육체뿐으로서 무슨 의지 작용 같은 것은 없는 물질 또는 물체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숨을 일단 불어넣으시면 됩니다. 영혼을 조성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하셨으니 당연히 그렇게 되어 아담의 영혼은 조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새 창조에서의 그런 '육체' 역할을 하여 그런 위치에 있는 나 자신은 엄연히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존재입니다. 아담의 당시 육체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당시 아담의 육체는 어떤 다짐도 약속도 조건도 붙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영혼만 주입시키시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창조의 경우 나 자신을 상대해서는 반드시 나의 향후 순종 여부를 묻게 되십니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약속하고 다짐하는 경우에 한하여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이라고 명확히 밝힌 것입니다[행 5:32].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임하시는 것이 바로 구원 얻음이므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히 5:8] 사실을 성경은 명백하게 밝혀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순종의 의사 없이 세례 받은 이들은 그 세례가 절대로 자기를 구원하지도 않고 구원 받은 또는 믿음 있다는 증거도 될 수 없으니 자기를 속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한 몸의 원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 즉 한 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몸은 머리를 사랑하여 신뢰함으로써 머리의 지시를 따르고 또 머리는 몸을 사랑하여 그 몸의 각 지체(肢體)에게 사랑의 지시를 내립니다. 이렇게 사랑 가운데서 하나로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으니 자기가 지금 사랑 가운데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해볼 일입니다[고후 13:5].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 자유 의지로써 양자택일하여 스스로 결정하도록 처음부터 우리를 만드신 사실과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시종여일하시지 중도에 변경됨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얼마든지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그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고 전전긍긍해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만일 중도에  무엇이든 변경하신다면 그것은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예고가 되기에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그런 점이 엿보이면 그 어느 피조물도 마음 놓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처음 시작 때 나타내 보이신 것은 앞으로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입증함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은 그런 사실을 보고 그것을 기준하여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를 않고 이랬다 저랬다 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의 영(令)이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행하심과 나중에 행하심이 여일(如一)하고 영원히 변할 수 없음을 확정, 확약하시는 의미는 아주 중요합니다. 따라서 범죄하는 자가 처벌 받고 그 결과가 저주와 죽음이라는 것은 처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영물들에게 그렇게 적용되어 확증되었고 아담에게 또 그러하였으므로 그 이후 어떤 일이 있어도 이는 변경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의지(意志)이심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고 또한 확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를 지어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처음의 사실 곧 악령들과 아담에게 하신 일로써 확증되어 있는 법질서와는 영구적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Satan]적입니다. 아담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고 그냥 그 스스로 선택한 대로 죽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은 ‘구실’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런 ‘구실’을 미리 만들어 놓지도 않으시고 아담에게 여차여차하면 죽으리라 경고하시고 그래서 여차여차하니 죽게 하시는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결론이 되므로, 그런 일은 하나님께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허물을 돌리는 의미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아무리 약하셔도 그 지으신 사람보다는 강하고 아무리 어리석어 잘못하시는 일이 있다 해도 사람의 판단으로 그것이 들추어져 이렇다 저렇다 입에 씹힐 정도의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 우리 상식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해서 아담처럼 죄를 지어도 그 결과를 죽음으로 돌리지 않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범죄를 해도 그 죄를 묵과하시고 구원에는 이르게 한다는 주장이 황당한 것임이 밝혀진다는 그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마 5:17] 하신 것처럼,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현행범으로서의 모든 죄인에게 영생을 선물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죄를 이길 수 있어 죄를 짓지 않도록 모든 필요한 능력[생명력]을 은혜로 베푸시고자 함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를 없이 하신다는 의미이니[롬 11:27/요일 3:5] 곧 “마귀의 일을 멸하심”[요일 3:8]이요 “죄의 몸을 멸하심”[롬 6:6]입니다. 그리스도 친히 그 능력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그 뜻을 어기고 불복종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렀다면 우리 역시 여부없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은 이미 선포하신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무리하게 해석해보려는 그 누구든지 화가 있습니다.

죄는 회개해야 하며 버려야 하며 짓지 않아야 하는 것뿐입니다. 달리 그 어떤 의미도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이 사실만이 통합니다.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구원은, 우리가 “지나간 죄를 용서 받은”[히 9:15/벧후 1:9] 다음에 향후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값없이 베푸심에 있습니다. 이미 나타내신 하나님의 모든 원리원칙을 고수하시는 차원에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이지, 처음부터 그런 원칙을 따르시지 않고 무시하고 버리시고 마음대로 하실 요량이시라면 우리 위해 그런 처참하고도 부끄러운 죽음을 친히 당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 얻는 믿음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요 6:44,65]. 아버지께로부터 배워야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단계입니다. 그냥 영생하고 싶다고 영생이 욕심 난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욕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고 과정이 있고 법이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은 자요 이 세상이 따라서 죽음이라는 사실부터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는”[:45] 것입니다. 즉 바울의 설명대로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하는 탄식이 나와야 합니다. 내가 죽은 자이고 이 세상이 죽음 외에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알고 이를 믿은 다음에야[이것이 첫 단계 혹은 시작 단계] 그리스도를 믿을[마지막 단계] 수 있게 됩니다. 집을 지을 때 [집 짓기 전] 먼저 초석부터 놓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이 시작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초석 없이 집을 짓는 것과 같아 그 집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은 몸이고 세상이 죽음이라 곧 사라져 버릴 것이나 단지 구원 얻을 사람 구원 얻도록 그 목적으로 아직도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전에 이 사실부터 일깨워 주지 않으면 잘못 길을 인도함이 됩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아예 그리스도의 구원을 알려 주지 않음만 못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 죽은 내가 더 다시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행한 “죽은 행실”[히 6:1/9:14]을 회개하는 것이 필수이고 그리고 그 죽음의 짓거리들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그래서 내가 산 자가 되면 다른 죽은 이들 살리는 일밖에는 눈앞에 들어오지 않는 법입니다. 죽음의 세상임을 알았는데 과거에는 몰라서 눈이 감겨 보지 못해서 이 세상 살고자 하였지 이제 실상을 안 다음에야 이 죽음의 세상에 무엇 하자고 눈을 돌리겠습니까. 도리어 죽음의 세상과 함께 망하려고 세상과 어울리겠습니까.

아담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영생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왜냐면 아담으로 죄가 왔고 죄 때문에 죽음이 왔다 했으니[롬 5:12] 죄 짓지 않았다면 죽음도 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처음부터 영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을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영생하게 만드시지는 않았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죽을 것이라” 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써 네 영생을 네 스스로 지키라”는 말씀이십니다.

다시 말해 영생하게 하셨다고 무조건 그 어떤 경우에서든 불문하고 영생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부입니다. 여차여차하면 죽게 되고 여차여차하면 생명[영생]을 유지 보전하게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네 구원을 스스로 지키라” 하시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즉 “네 구원을 스스로 이루라”[빌 2:12]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키느냐.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써 지키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육신대로 살지[롬 8:13] 않음으로써 구원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선악과를 먹을 때 하나님처럼 되고자 그래서 스스로 눈이 밝아 선[좋고]과 악[상대적으로 나쁜 것]을 분별하자는 자기중심의 생각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아담 역시 여자의 권유를 받아들일 때 같은 생각이었으니 피조물[여자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조물주의 말씀보다 더 믿은 것입니다. 즉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육신”[롬 7:5-8:13]대로 사는 것 역시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육신대로 살지 않는 것은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함”[갈 5:25]에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을 말합니다[고후 5:15]. 따라서 우리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도록 하시려고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이라면, 그렇게 살면 구원을 지키는 것 곧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아담처럼 되어 그 생명을 스스로 잃는 것이고 생명 아닌 죽음을 스스로 벌어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경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영생을 주시고 ‘동시에’ 경고도 함께 주셔서 이리 저리 하면 생명 아닌 죽음이 된다 하심과 같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동시에 경고를 내리시기를 이리 저리 하면 구원이 아닌 여전히 죽음이 된다 하시는 것뿐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아담에게 취해진 조처는 앞으로 모든 인생들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조처이심을 미리 선포하심이니, 달리로는 그 무엇이든 있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죄를 지으면 아담처럼 죽는 것인데도 그것을 바꾸고 변경시키셔서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 때문에 우리의 죄를 처벌하시지 않고 그냥 묵과하신다는 의미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렵고 떠는"[빌 2:12]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고 떨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전례(前例)를 알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 죽음의 선악과를 입에 물고 깨물어 삼킬 줄 그 자신도 감히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미쳤다고 그 죽음의 과일을 내 입으로 씹겠는가" 하고 백번 스스로 맹세라도 했을 것입니다. 감히 그런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미치지도 않았건만 그 죽음의 선악과를 입에 물고 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결코 아담처럼 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아무도 없다는 데에 “두렵고 떨림”이 있습니다. 오직 아담을 거울 삼아 그같은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고전 10:12] 것 외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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