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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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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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구원은 말 그대로 새 창조다. 새로 창조를 하시는 마당에 옛[처음] 창조의 잔재를 그냥 남기고 하시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당연히 창조가 아닌 것이다. 성경이 이를 가리켜 “창조”라고 할 리가 없다. 따라서 “다시 난다”[거듭난다, to be born again]는 표현도 불가능하다. 처음 난 것으로는 하자가 있기 때문에 ‘다시 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성령의 법”이 과거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하는 것이다. 해방시켰으니 더 다시는 이전처럼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이지 않는다.

그냥 성령의 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다. 즉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하나 됨으로써 일어난 변화다. 즉 ①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 모든 근거가 무너졌고, ②그리스도와 둘이 하나 되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니 내가 나를 다시는 위할 필요가 없어졌고, ③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이치를 통해 또한 나 자신이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터라 죽음이 다시는 나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므로 아무리 죽어도 반드시 살아날 것이기에 죽어도 죄를 짓지 않고 죽어도 오직 선을 행하고 의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기로 작정한 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을 행하는 것 곧 생명의 법질서대로 따름은 산 자가 하고 지키는 일이지 죽은 자가 지키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 죽은 자이므로 지킬 수도 없거니와 그 지키는 의미가 전연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물주 하나님의 새 창조에 의하여 값없이 거저 주신 선물 성령으로 인하여 산 자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제 비로소 의미 있게 이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는 자, 또는 지켜야만 하는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비로소 이 지키고 지키지 않음은 절대적인 의미가 되는 것이니 지키면 그대로 영생이거니와 지키지 않으면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처럼 되고 범죄하여 즉음에 이른 아담처럼 되는 것이다. “도둑질하던 자는 다시는 도둑질하지 말고 제 손으로 수고하는 선한 직업을 가져 가난한 이들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라”[엡 4:28] 한 것도 이전의 삶과 그리스도를 알고 믿은 다음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도둑질하던 자가 이제는 않는 것은 자기 구원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 자기를 구원하신 즉 자기를 사랑하시어 십자가 죽음의 고난도 불사하시고 자신을 송두리째 영원하신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행 20:28]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고자 함이니[요 4:34]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기[20:21]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는 데에서는 도둑질하던 자가 그런 짓을 않기로 하는 것이나, 지금까지 자기중심으로 행동하다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기로 하는 것이나, 아무 차이가 없다.

경중(輕重)의 구별도 없다. 도둑질은 가볍고 자기중심으로 살던 것은 무겁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왜냐면 전자나 후자나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이 그 근본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도둑질하던 자가 도둑질을 하지 않고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일하는 것이 마땅할진대, 지금까지 자기중심으로 살던 것을 버리고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역시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만일 믿는다고 하는 자가 여전히 도둑질을 할 때 그를 두고 믿음이 없는 자 혹은 구원 받지 못한 자라고 단정한다면, 자기 부인이 없고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를 그와 같이 구원 받지 못한 자, 믿음이 없는 자로 낙인 찍어도 아무 하자가 없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롬 14:7-9'고후 5:15]. 단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멸망하지 않도록 조처하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아담 자신부터 죽지 않게 조처하셨을 것이요 또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다 자동적으로 구원되게 하셨을 것이지 믿는 자에게만 한정하실 리도 없다] 그 목적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즉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 다” 하시고 “성령을 받으라” 하셨기 때문이다[:21,22]. 보내심을 받은 자는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보내신 자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데에[4:34] 그 삶의 의의가 있으니 주님께서는 이것을 자신의 잡수시는 양식이라 하셨다. 바로 이것이 세상 종교와 그리스도 복음과의 차이다. 즉 전자는 인생 구원 하나에만 머문다. 시종일관 그것만이 핵심 주제요 과제다.

이 하나만 이루면 모든 것이 해결 난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된 다음의 일을 논하는 것이니 즉 구원된 결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아들로서의 아버지[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못이루고 즉 순종하고 순종하지 않고 하는 것으로 좌우되어 이것이 핵심이 된다. 이 차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세상 일에 대한 욕심 즉 육신에 매여 쩔쩔 매게 되는 것이 세상 종교의 특징이다.

소위 득도(得道)하였다 하여 “성불(成佛)하지 말라”는 팻말을 암자에 달아놓고 지냈다는 승려도 있다는데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최면 또는 세뇌시킨 일정한 심리 상태에 들어간 것뿐이다. 타조가 사냥꾼에게 쫓기다 다급하여 모래 속에 머리를 박고는 안도한다는 이야기에서 보듯이 일시적인 미봉책이요 일종의 자기 기만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도 아직도 여전히 육신에 사는[롬 8:13] 사람은 세상 종교에 속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이 성취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현재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군림해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군림’이라 할 때는 강제력을 행사하고 섬김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비해 사랑으로 섬기는 자세를 취하니 즉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존재하다”[눅 22:27]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되어 있다. ‘군림’이 권위와 능력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전에 가장 기본되고 핵심이 되는 것이 사랑으로 섬김이 앞서는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로서 사랑이 그 본질이고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섬김이기 때문이다.

고로 서로가 동시에 주인이고 종의 역할이다. 그래서 그 가장 핵심이 되는 ‘사랑’을 이 세상에서 우리 각자는 나타내고 그것부터 체득하게 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그런즉 저마다 자기중심이 되어 주인만 되려 하고 종이 되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세상에서 사랑으로 일관하자니 그 자연스러운 현상은 영락없이 세상에서 "약한 자"로서의 모습이다. 이 약함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처럼[고후 13:4] 사람을 구원해내는 일에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12:9] 하신 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한다” 했으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10] 하였고,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였다. 고로 이 약함은 부득불 환경에 의해 아직 미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을 구해낸다는 목적을 가진 스스로 필요해서 취하는 약함이므로 강한 자로서의 군림과는 별개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족답게 스스로 받는 고난이다. 아들께서 고난을 받으시므로 아버지 친히 또한 고난 받으심이다. 이렇게 함께 고난 받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아들께서 이에 순응하신 것이다. 사랑의 법칙에서는 이를 두고 ‘아들 친히 원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같은 의미로 우리 고난을 ‘우리 스스로 원해서 받는 것’으로 말하게 된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의 뜻이요 아들은 아버지의 원하시는 것을 행함을 그 삶 또는 생명의 본분으로 삼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 위해 또한 그렇게 하신다.
 

§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는 사랑의 법칙이 어째서 생명의 법질서가 되는가 하면 이것이 행복한 삶의 절대 조건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이라는 것은 만물이 하나[하나님]에서 난지라 한 몸의 구조가 되어 그 구조대로만 살면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형성되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을 말함이다. 한 몸의 이치에서는 몸의 모든 지체 그 각 부분이 서로 다르지만 머리의 지시대로 하나처럼 움직여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구조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팔은 팔대로 혼자가 아니고 손은 손대로 홀로 있지 않고 팔이나 손이나 눈이나 입이나 단지 '한 사람'으로서의 대아(大我)를 형성하여 홀로 혼자서만 존재해 있을 때보다 그 지체(肢體) 수(數)만큼이나 갑절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을 행복이라 하고 “풍성한 삶”이라(요 10:10) 한다. 따라서 한 지체 그 각 부분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 혼자 살게 된다는 말도 어폐가 있고 아예 존재 의의가 없다. 이렇게 모두가 하나를 이룰 때 '한 사람', '한 몸'으로서 합동하여 움직여 종합미(綜合美)를 이루는 굉장한 삶의 누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고로 각자는 자기를 위함이 없이 모두 자기 이웃을 위한다. 물론 가장 첫째로 머리를 위한다. 이 머리를 위함으로써 각자 자기 이웃을 위하게 되는 것이 한 몸의 이치다.

머리는 그 모든 지체를 조화시키고 통일시키고 증대시키는 중심 역할이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한다. 이같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구조에서는 각자는 자기를 위할 수도 없고 위해서도 안되며 위한다고 덕될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쓸모가 없어질 뿐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하는 자가 없다. 이렇게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성경에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쓸모없는 짓을 하는 것을 가리켜 자기중심이라 하고 이 바로 죄, 악, 불법, 불의이다.

둘이 하나 됨을 설명함으로써 생명의 법질서까지 밝혀졌는데 어쨌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께서 이같이 사랑 가운데 영원히 둘로 하 나 되어 계시므로 아들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지만 아버지와 하나 되심은 영원불변이다. 때문에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는 한 아들께서 죽어 있으실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리고 둘이 하나 되는 관계에서는 3위1체 원리를 따라, 대칭을 이루고 있는 둘은 반드시 먼저 있고 나중 있는 자로 구분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대소(大小) 관계, 주종(主從) 관계가 엄정하니 한 마디로, 인과 관계다.

그래서 큰 자는 작은 자를 인도하고 작은 자는 큰 자를 따르게 마련이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니 죽으신 아들께서 아버지를 따르시게 됨은 정한 이치이고 그리하여 불가불 다시 살아나시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따라서 이는 기적도 아니고 신비도 아니고 가장 합리적인 일의 순서를 따라 이루어진 것뿐이다. 기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능력의 표현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우리 인간의 눈에는 경이(驚異) 아닌 것이 없고 이런 경이를 가리켜 기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설명한 대로 창조주 하나님은 그 능력을 따라 즉흥적으로 만사를 좌지우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라서만 모든 일을 행하시므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로 신뢰하게 되는 바탕이 되고 또한 두려워 하는 토대가 됨은 당연하다. 남녀가 대칭형이라는 것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고 그래서 남자는 크고 여자는 작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다. 머리라는 것은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정이라는 것은 모든 공동체의 가장 기본되는 단위이므로, 무릇 한 집단 곧 공동체를 이루어 있을 때는 반드시 머리가 존재해야 그 전체가 정상 운영이 된다.

그래서 단체장(團體長)이라는 것은 필수이다. 가정이 그 기본 단위이므로 가장(家長)이 있음은 물론이다. 남녀는 절대로 대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남성우월주의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위에서 설명한 대로의 자연 순리가 그렇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은 인간과는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인간 위에 강압적으로 군림하여 인간을 압박하고 조종하는 자이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이런 양성평등이라는 해괴한 이론을 전개시켜 성경 말살을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 신이다. 육체인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한 그의 수중에서 놀아나고 그를 대적(對敵)할 수 없으며 결국은 그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비운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동안 악한 마음으로 남자들이 가장이라는 핑계를 앞세워 아내들을 상대로 폭군처럼 행동하고 여자들을 경시한 것을 생각한다면 요즈음 양성평등이라는 반발도 어찌 보면 정당하다고 할지 모르나 법이란 것은 쌍방이 동시에 지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어느 일방이라도 지켜 그렇게 희생정신을 발휘해야 그나마도 질서가 유지되는데 다른 쪽이 그런다고 이쪽마저 범법으로 나온다면 그 사회는 파경이다. 성경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함과 동시에,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몸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것 같이 아내들을 위하여 남편들은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임하라고 명령하고 있다(엡 5:24).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도 했다(:28).

사랑의 원리에서 이는 당연하다. 갑이 을을 위하지만 을이 또한 갑을 위하므로 결국 그 위함이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니 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설혹 상대가 나를 위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 생명의 법질서를 어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함이다(롬 2:7). 이 세상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참고 행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원한 세계에서는 남녀 구별 자체가 사라지니 이런 부부관계는 영원히 종식된다. 그러나 이 자연계에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우리가 존재하는 한 자연 순리를 따라 이 관계는 파기될 수 없고 여기서 벗어날 때 파국은 필연이다.

이 대칭성에 의한 인과율 즉 삼위일체의 법칙[Trinity Principle]을 동양에서는 특별히 중국 일원에서 음양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양은 크고 음은 작다는 대소 관계를 알아냈다. 이는 무슨 큰 발견이 아니라 만물을 주의 깊게 면밀히 따져보면 자연적으로 터득하게 되어 있는 이치다. 동양의 철학적 정신적인 측면과는 달리 물질과학문명을 일찍부터 발달시킨 서양에서는 현대에 이르러 원자 구조를 알아내기에 이르러 양전하를 띤 원자핵과 음전하를 띤 전자가 대칭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드러났다.

따라서 이 역시 머저 생기고(因) 나중 생긴(果) 이치를 따른 3위1체 원리로 대소, 주종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를 구성하고 있을 때 부득불 제3의 존재가 탄생하게 마련이다. 둘이 어떤 때는 합치고 어떤 때는 분리되고 하는 가변성이 있다면 이 둘은 절대로 하나라고 할 리 없다. 그러나 갑과 을이라는 둘이지만 불가분의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을 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을이 함께 있기 때문이요 을이라 할 수 없는 것은 갑이 함께 하는 '하나'로서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하나'로서 별개처럼 존재하는 양상을 가리켜 '제3의 존재'라 하는 것이다. '갑'과 '을'에 비할 때 결코 별개의 존재가 아니지만 '갑'과 '을'이 합하여 된 존재이므로 다시 말해 갑과 을이 독립해서 존재하기를 거부하므로 이를 '갑'이라 또는 '을'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에 별개처럼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어 그리 되는 것이다. 그래서 편의상 이 제3의 존재를 '병(丙)'이라 하게 된다. 이것이 삼위일체(三 位一體)의 원리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일시이원삼위일체(一始二元三位一體)라 할 것이다. 하나에서 시작하여 둘이 되고 그 둘이 하나로 존재하니 그 '둘' 및 그 둘이 합한 그 '하나'가 모두 별개처럼 나타나므로 그래서 셋이고 그러나 그렇게 셋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 본질이 애초부터 하나였고 현재는 둘로 독립되어 있다는 그런 의미이다. 이 '병'의 존재가 음양에서는 "음양조화"로 표현된다 하겠고, 원자 구조에서는 음전하도 양전하도 아닌 전기적으로 평형을 유지하는 "원자"가 이를 나타낸다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이렇게 된다. "성령"이라고 대체적으로 표현될 때 그렇게 하나로 계심을 드러내고, 때로는 아들, 때로는 아버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이시라는 점에서는 공통이시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서 "성령"이라 하면 이와 같이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그리스도를 대개 지칭한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내용인즉 그리고 실질적인 의미인즉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반드시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모습의 성령이시므로 그리스도라고 단독으로 지칭하실 수는 없기 때문에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함께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아들과 하나로 계심과 같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와 개별적으로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새 창조에 의한 새 피조물됨이다. 이것이 새 창조의 내용이다. 이천 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오늘날의 나와 관련이 되느냐고 질문하지만, 바로 이렇게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하나가 되시는 까닭에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바로 직접적인 인과 관계로 내게 직결되어 있음이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만물이 나의 소유가 되어 있음이니 갑은 을의 것이요 을은 갑의 것이 됨이 둘이 하나 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요 17:10). 그래서 우리를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된 만물의 상속자”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된 아들들”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리스도 친히 우리를 형제들(우리말로는 "아우들")이라 부르시는 것이다(히 2:11).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친히 우리를 한 아버지 아래에서의 친 형제로 삼으심이다.

사랑의 엄청난 진실이다. 한 몸의 이치에서 우리 각자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따라서 한 머리를 모신 완전한 한 몸의 구조가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머리를 위함으로써 몸의 각 지체를 위하게 되고 형제들을 위함으로써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하게 되는 것이니, 한 몸을 이룬 형제들을 "뜨겁게"(벧전 1:22)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바로 나 자신이 되어 한 몸,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왕이라" 증언하셨다(요 18:37). 그리고 "이를 위하여 내가 났고 세상에 왔다" 하셨다. 그리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분명히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마 12:28) 하셨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할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 17:20,21) 하셨다. 동시에 말씀하시기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눅 16:16) 하셨다.

"침입"이다. 즉 우락부락하게 강제로 밀치고 들어가는 것임을 의미하심이다. 마태 역시 이 말씀을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있으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마 11:12)고 하신 것으로 기록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마 7:21) 하셨다는 말씀과 같은 뜻이다. 빌라도 앞에서 증언하실 때 "내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았다" 하시지 않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신 점에 유의할 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왕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 나라의 왕을 모시고 나는 그 국민이니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성립되어 있음이다. 그러나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다. 이는 내가 현재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와 똑같은 의미이다. 구원의 피동성과 능동성을 가리키심이다.

국법을 지키지 않고 어떻게 그 나라 국민이 될 수 있는가. 피동성이란 것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 것도 아니요 구원을 내 능력과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요 오직 새 창조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단지 이 은혜로 된 것을 믿음으로 받기만 하는 것이므로 피동적이다. 믿음에는 아무런 나의 애씀이니 힘씀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정작 힘쓰고 애씀이 필요한 때가 있으니 곧 구원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단계다.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서 그렇게 된다.

일을 하는 자로서 힘쓰고 애쓰지 않고 자가 어디 있는가. 놀면서 노는 식으로 일하는 자를 보았던가. 이것이 구원의 능동성이다. 즉 우리 스스로 침입해 들어가고 빼앗아 차지하는 그런 형국이다. 이 둘을 혼동하지 말 일이다. 구원을 이룬다고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함이 당연하고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처럼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자기를 위해 살 때에ㅣ는 그래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어도"(마 7:22) 결과론적으로 "불법을 행하고"(:23) 있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어찌 구원이 되는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데 어찌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할 것인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믿고 복종하기로 약속했어도 중도에 그 마음을 변하여 입으로는 여전히 주님이라 불러도 주인의 종처럼 살지는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즉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다시 말해 피동적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구원이 되지 않으니, 어찌 “구원을 이룸”이 아닌가.

말하자면 나라는 세워졌고 그래서 나는 그 국민이 되어 있으나 내 스스로 왕에 대한 즉 국가에 대한 반역죄를 저지르면 그 국가에서 추방되는 것은 당연하니(추방이 아니라 바로 극형 감이다) 바로 그와 같은 이치를 말씀하심이다. 이 세상 지배자요 왕이 되어 있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에게 절하여 육신대로 살아(롬 8:13) 왕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 일을 방해함이 어찌 그런 반역죄에 해당되지 않는가.

그래서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신 것이다. "주님, 주님" 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능력도 행하는 등의 일을 가리킴이다.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 얼마나 좋기에 그런 정도의 능력을 행하겠는가. 그러나 그 믿음에 행함이 없는 것이라 죽은 것이다(약 2:17). 여기서 행함은 능력 행함이 아니라 육신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을 가리킴이다. 때문에 과거 그런 능력을 행한 사람들이지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그런 믿음을 자랑하고 의지하고 현재에는 육신대로 살고 있었다는 증거다. 과거 적의 믿음을 의지하면서 자기는 구원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믿음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에 언제나 현재를 기준하는 것이지 과거를 기준하지 않는 법이다(빌 3:13). 주님께서는 그 비유로써 과거와 현재의 구분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 또는 '구원'은 이 경계를 분명히 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의 믿음을 현재의 믿음으로 착각해서는 안되는 까닭이다.
 

§  성경은 우리를 완전 무장한 군인으로 묘사해놓고 있다(엡 6:11/빌 2:25/딤후 2:3). 그렇다, 이 세상은 전쟁 중이다. 이 세상 신(神- 고후 4:4)이 첫 사람 아담을 꾀어 죽음에 이르게 한 이후로 인간과 이 세상 신 사탄은 전쟁에 돌입한 사실을 하나님 친히 선언하신 것이다[창 3:15].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과거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아닌 한") 이 세상 신에게 완전히 포로로 예속되어 있는 상태다.

완전히 그 수중에 놀아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모든 인생이 다 그러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그렇다. 다시 세상 앞에 외치는 것이니, 사람은 이런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되며 이런 상태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무쪼록 잘 살아보려고 헛된 노력 기울이지 말고 가장 먼저 시급한 것이 눈 뜨고 사물을 제대로 보는 일이다. 우리가 과연 창조자 하나님의 피조물인가 이것부터 해결하고 볼 일이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 파생되고 또 해결되는 것이다. 단 성경에서 가리키고 가르치는 하나님이라야 한다. 고로 성경의 진실성을 또한 가장 먼저 규명하는 것이 급선무다. 성경의 진실은 그 자체 증명에 있다. 따라서 이 자체 증명은 각자가 스스로 성경을 열심히 읽어보지 않고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슬람 경전도 유일신을 말하고 아브라함, 모세 등 구약의 주인공들을 모두 실존 인물로 믿는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런 경우 먼저 온 것이 진실이고 나중에 오는 것이 모방이다.

적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성격을 지닌다. 나중에 옴으로써 “최종 완결”이라 자처할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미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 선포하신 이상 만일 진리가 아니고 생명이 아니시라면 이런 엄청난 거짓말도 없을 것이니 그리스도를 당장 사이비라고 규정해야 옳다. 그렇지 않고 동격의 선지자로 대우하면서 “그러나 내가 최종 그리스도”라는 식으로 나가면 필연적으로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 폭로함이 된다.

진리에는 모순이 없음을 명심할 것이다. 사람이든 영물이든 모름지기 삶은 사랑으로 살아야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셨다. 사랑이 영원한 나라의 법질서다. 그 나라의 헌법이다. 이 세상은 별도의 세계가 아니다. 이 생명의 법칙이 관장하는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이다. 따라서 이 생명과 사랑의 법질서를 지키지 않는 이 세상은 그 가운데에서 반역의 무리 즉 역도(逆徒)들의 세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질서를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조종하는 악령들에게 동조 가담하는 것이 됨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나님의 법질서에 대한 반역자로 취급되는 것이다. 천국은 현재 우리에게 임해져 있다. 누구든 원하는 자는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나 원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순되는 궤변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감당 못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여기고 그 고통에서 헤매는 자 는 누구나 올 수 있다. 아무나 올 수 없다는 것은 세상에서 그런 무거운 짐 지고 허덕이는 것 없이 그냥 이 세상 사는 낙에 취해 있으면서도 영생까지 얻어 보겠다는 욕심이라면 결단코 들어올 수 없다는 얘기다.

단지 영생만을 얻고 싶어 오는 것이 동기라면 회개가 없으므로 가장 첫째로 자기 죄가 용서되지 못한다. 따라서 깨끗하지 못한 그런 곳에 성령께서 임하실 수 없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세상에서 살 생각은 아주 접고(왜냐면 사람 사는 곳이 아니기에)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르겠다는 즉 삶의 법칙인 그 말씀 따라서만 살겠다는 결의가 있거든 얼마든지 오라는 것이다. 이 세상이 우리가 살 만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함이 없이 자기중심으로 일관하는 사람 삶의 모양새를 보아서도 분명하다. 더구나 양심상으로 느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살지 못한다는 비극적 사실을 보아도 익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불멸인 고귀한 영혼을 연약한 이런 육체, 자연계에 속한 육신에다 담고 허우적거리는 꼴이 현재의 인생이다. 시초에는 그렇지 않았다. 천사들과 같은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이었다. 신령한 몸은 이런 육신이 없다.

성경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다”고 했다. 풀은 시들고 꽃은 말라 떨어지는 이런 육체로써 사람을 지으실 리 만무하다. 사람의 영혼은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이 아니라 영적인 몸과 짝을 이루어야 정상이다. 그래서 번개 같이 움직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혹은 나타나기도 하여 자유자재로 자기 형태를 변형시키며 공중에도 바다 속에서도 휘젓고 다녀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이 소위 “외계인”이라고 속이며(이는 그리스도 다시 오시기 전의 마지막 속임수다) 곳곳에 그 초자연적인 형태의 모습들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그런 신령한 몸이어야 하는 것이다.

허공에서는 떨어져 박살이 나니 새만도 못하고 물 속에서는 가라앉으니 고기만도 못한 현재의 인생이다. 그들을 다스리기커녕 그들만도 못한 따분한 비극적 신세의 주인공이 인생이다. 사람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였다면 왜 새처럼 날고 물 속에서도 마음대로 유영하지 못해 물에서는 빠져 죽고 허공에서는 떨어져 죽도록 진화하지 못했는가. 왜 이런 것을 극복하는 몸으로는 진화하지 못했던가. 진화라는 가설이 얼마나 인위적이고 황당한 것인지 다른 이론 다 그만 두고라도 이런 평범한 상식적인 것만 짚어도 능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다른 동물과 달라 정신이니 하는 지능 면에서 월등한 쪽으로 진화한 것일진대 그런 지능으로까지 진화하면서, 그런 지능보다 못한 육체적인 이런 구조(새처럼 물고기처럼 공중에서 물 속에서도 생존 가능한)로는 왜 진화하지 못했느냐 하는 그 소리다. 정상 논리로 말하면 이런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진화보다 그런 육체적 측면으로 먼저 진화했어야 당연 순리가 아닌가. 정신적인 측면은 육체의 것보다 훨씬 고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진화론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순투성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아는 대로의 자연법칙은 모순되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모순이 있다는 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 망상에 불과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육체 측면에서의 진화는 정신적인 것보다 지극히 근본적인 생존 문제다. 이렇게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도 해결 못하게 진화하였다니 과시 소라도 웃을 일이 아닌가. 이런 가설을 절대 진리인 양 대소 교육기관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으니, 개돼지인들 지능이 있다면 이런 어리석기 한량 없는 인간을 얼마나 가소롭다 하겠는가.

사탄의 인간 농락이 이런 수준이다. 정신 차릴 일이다. 모두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휘말려 이렇게 인간이 어리석게 된 것이다. 현재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완전히 이 세상 신의 족쇄에 채워져 있다. 이 세상 신 사탄의 조종만 아니더라도 인간은 절대로 이런 수준의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육체가 어찌 신(神)을 대적할 수 있으리요. 이 신에게 지금 얽매여 있는 것이다.

얽매여 있어도 인간은 자유 의지를 엄연히 지닌 존재다. 하나님도 이 자유를 통제하시거나 간섭하시지 못하는 터에 일개 피조물 사탄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어떤 이유로 이렇게 인생들이 사탄에게 노예가 되어 있으냐 하면 그 자유 의지로 “불의를 좋아하기”[살후 2:12)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즉 인간이 먼저 사탄과 동조하기 때문에 사탄은 이에 보조를 맞출 수 있음이다. 에덴낙원에서 사탄이 여자를 꾈 때도 처음부터 인간이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그런데도 여자 스스로가 사탄의 말에 솔깃하여 따라 하니까 그래서 범죄하게 되고 그 결과 죽음이 온 것이다(롬 5:12). 언필칭 "자유, 자유!" 하지만 그래서 심지어는 그 자유가 구속당한다고 하여 눈앞에 훤히 보이는 그 “지으신 만물”[롬 1:20)이라는 확고한 증거를 두고도(로마의 세네카까지도, "우리가 마음이란 것을 구경 못함과 같이 신도 보지 못했을 것이나 그러나 신은 그 모든 창조물을 통해서 볼 수 있 다"고 했다) 조물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렇게 철저히 이 세상 신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는 사실에 눈뜨지 못하니 천지를 분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안다고 자랑도 하지만 정작 자기의 영원한 운명에 관해서만은 아무 것도 모르고 오히려 단단히 속고 있는 것이니 얼마나 비극적 참상이냐. 이것이 오늘날 모든 인생의 실상이다. 이를 현실로서 직시하는 사람들이 그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해도 그 증언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헛소리를 한다 하고 미친 사람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이 이 세상이다.

이 세상 신이 장악하여 조종하고 있는 터에, 그런 증언을 만인이 수용할 수 있도록 이 세상 신(神)이 그냥 좌시하고 있을 턱이 없다. 대칭 원리에 의해서 악령이 있으면 선한 영들이 있으니 곧 성경에 "거룩한 천사들"이라고 말씀하신 그런 존재다. 이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온 인간들을 수호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악령들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온 이들은 그들이 딴 짓을 하지 못한다.

단지 앞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 스스로가 동의하고 동조하는 경우에만 간섭하고 강제력을 발휘한다. 왜냐면 인간이나 악령이나 같은 방향으로 나감으로써 보조가 맞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 스스로 사탄을 따르려는 의지가 분명하므로 악령이나 악인이나 코드가 맞기 때문이다. 이미 이들 선과 악으로 대칭되는 영들은 한 바탕 격전을 치르고 난 뒤(계 12:7) 현재 악령들은 이 우주 전쟁에서 패배한 상태가 되어 이 지구상으로 쫓겨나 있다.

하늘에서 지구로 추방당했다 하여 이 지구에만 그 활동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는 않고 지구에 부속되어 있는 달까지 포함해서 또는 태양계까지 그들의 영역으로 삼고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소위 “외계인”이나 “외계 문명” 따위로 위장하여 특유의 기만술을 한껏 과시하고 있는데 변화무쌍한 그들의 능력에 대처할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외에는 없음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기어이 속이려 들면 속아 넘어가지 않고는 안된다.

그리고 모든 거짓은 일정 시간이 경과해야 드러나게 되어 있고 당장에는 그 누구도 그 진상을 폭로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야 누가 감히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를 쓰려고 하겠는가. 때문에 나만은 그렇지 않으리라 장담할 일이 못되고, 다시는 이 세상 신(神)에게 허망하게 속지 않으려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외에는 아주 방법이 없다. 그리고 죄가 있으면 다시 말해 내가 나 자신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려는 마음이 있는 한, 이 세상 신(神-고후 4:4)에게 대문짝 다 열어 놓고 침입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꼴이 된다.


죄는 자기중심으로 즉 육신대로 사는(롬 8:13) 그것이다. 자기 부인만이 이 세상 신의 직접 책동을 막는 최고의 방책이 된다.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의 나 위해 죽으심 즉 그리스도와의 함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나의 죽음 앞에서 이 세상 신(神)은 일절 그 힘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벧전 4:1). 자기 부인만이 자기중심과 상극(相剋)을 이룬다. 비로소 맞서는 대칭형이 된다. 그러나 자기중심일 때는, 이 세상 신이 곧 자기중심의 화신(化身) 격이므로 금방 이 세상 신에게 흡수되어 버린다.

육신대로 사는 것은 자기중심이 되어 있음을 말하므로 곧 이 세상 신에게 매여 있음을 의미하는 까닭에 이 세상 신 사탄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은 멸망"이라 한 것이다(빌 3:18,19). 우리 위하신 죽음으로 내가 이미 죽어 매장되어 있는데 자기중심이 되어 다시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을 하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원수”일 수밖에 없다. 그 죽으심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죽음’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자기의 죽음 즉 자기 부인 다시 말해 "육신대로 사는 것이 죽음"(롬 8:13)이라는 경고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는 자기 무덤 자기가 파는 격이다. 이 세상 신을 환영하는 꼴이 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단순히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의 죽음으로만 인식하고 그침으로써 빚는 비극이다.

이는 그리스도 복음의 일부분만을 절취(折取)하여 활용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동전이나 지폐의 일면만 쓰겠다는 것과 같아 그 효용 가치가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이 됨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지 않으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없고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실 수가 없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셨다는 단순한 그 사실 하나만으로 "구원 운운" 하는데 이는 겉 다르고 속 다른 표리부동한 것으로서 겉으로는 근사하게 보이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적응될 수가 없다.

따라서 복음일 수가 없고 바울이 경고한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 되는 것으로 허무하게 끝난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그 무엇에 연연해서 육신대로 그냥 살고자 하는가. 한 때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잠시 한 때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라면 영생은 고사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인격적 자질마저 결여되었다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사람까지 구원하시는 것이라면 이 세상 모든 인생들을 다 구원하시지 어찌하여 소수 즉 믿는 자만 구원하시려 하실 것인가.

"소수"가 의미하는 내용은 그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있음을 왜 알지 못하는가. 그래서 영생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라 한 것이다(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그래서 구원은 순종하는 자에게 해당된다(행 5:32/히 5:8). 믿음은 순종과 동의어다(롬 1:56:16/16:26/요 3:36/히 4:11/벧전 1:2).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 탐욕의 근원을 철저히 완벽하게 봉쇄하고 척결하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은 수저 금 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나는 것보다 더한 모든 것을 이미 소유한 자로서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로 다시 나게 하시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나와 하나 되심을 인하여 과거 내가 나 자신을 위하던 것을 이제는 주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맡으시어 이전에 내가 나를 위하던 것보다 더 완벽하고 철저하게 나를 위하시는 것이기에 그러하고, 되돌아갈 다리를 끊어 버리듯이 다시 자기를 위할 일체의 근거를 자신의 죽음으로(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 곧 나와 함께 죽으심이 됨으로) 없애버림으로써 역시 그러한 것이다.

이중, 삼중으로 구축된 완벽한 철벽 구조다. 그리고 이 나의 죽음 즉 나를 위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기 부인과만 관련된 의미만 아니다. 과거 내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해결이기도 하다(롬 3:25/히 9:15). 죽음으로써 청산한 죄의 값이다. 이는 하나님의 철저한 원리원칙주의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우리의 범죄를 허용하시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심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중 삼중으로 완벽한 조처를 취하셨으니 이는 당연한 결론이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는 죽어야 한다는 취지이니 그 결과가 소위 “원죄”이든 현행범이든 한 덩어리로 모두 한꺼번에 척결하심이다. 따라서 “원죄를 인해 죄를 짓는다”느니 하는 따위의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죄에 대한 개념부터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자기중심으로서 바로 인식해야 함이다. 아담의 범죄 동기가 자기가 자기를 위함이었다. 하나님처럼 되어 보고자 하는 욕구였다.

다음에는 선악과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니 즉 선악과를 먹은 결과이다.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애초 신령한 몸으로 영생하기로 되어 있던 아담 부부의 몸이 자연계로 되돌려져버린 것이다. 성경 그 대목의 전후 문장을 잘 음미해보면 그 명확한 윤곽이 드러나진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옴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본능 즉 자기중심으로 화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소위 "원죄(原罪)"에 해당되는 개념이라 해도 좋다.

그 이전에는 그러면 그런 속성이 없었느냐 하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있어 인간의 그런 원초적인 것 즉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의 근원이 선악과 나무로 집적(集積)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다. 에덴낙원 자체가 영계이고 이 자연계가 아닌 것이다. 당시는 영계와 자연계가 맞붙었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이러한 사실을 성경 그 주변의 여러 대목은 명확히 나타내주고 있다. 그래서 아담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아도 주변 영물(靈物-창 2:19)들이 사람(아담)을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그 역할을 하게 되어 있던 터였다.

사탄 곧 현재의 이 세상 신(神-고후 4:4)은 그 역할을 하는 체 하며 사람을 속인 것이다. 때문에 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옆에 생명나무가 있었고, 이는 상대적으로 인간의 영적인 요소를 상징하고 있어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계 2:7). 선악과 나무가 애초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육체를 상징하고 있던 것과 대칭적이다. 단 그 때 당시 아담이 그렇게 범죄한 후 "생명나무 실과를 먹어 영생하게 될까 한다" 하신 것은, 범죄 한 상태에 있으므로 그런 속성으로 영생해본들 사탄 등 악령들처럼 될 것밖에 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죽게 되어 있으므로 죽게 예정된 자는 마땅히 죽어야 법질서 확립이 된다. 죽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구원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덴낙원으로부터 인간을 추방하시고 장차 그리스도로서 나타나게 될 구원을 기다리게 하신 것이다. 사탄은 20세기에 들어 과거 전혀 목도하지 못했던 대규모의 살육극을 빚어내도록 혼돈을 조장시켰다. 끊임없는 전쟁과 혼란이다. 사탄이 이런 것을 노려 시도하는 까닭은 세계를 극도의 불안에 몰아넣어 세계 평화와 질서를 갈망하도록 함에 있다.

그래서 이른바 인류의 구세주로 자신을 미화하여 혜성처럼 지상에 나타나 마지막 시도의 대규모로써 세상을 미혹하려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미리 예견해놓고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살후 2:3-12). 우리의 관심은 전쟁 없는 세상을 염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살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모든 사람이 다 충분히 들을 수 있도록, 촉박하지만 충분한 시간 여유를 더 달라는 여기에 우리의 기도의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 것이다.
대살육전이 일어 나기 전에 충분히 말씀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교회가 이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합심 기도할 때이다. 한번 때 놓치면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으로 기도로 임할 때다. "오늘날 네가 왕후의 지위에 오르게 됨이 바로 이런 때를 위함이 아니냐" 한 것처럼 오늘 내가 구원 받은 것이 이 때를 당하여 일심으로 합심기도를 힘쓰도록 그리고 전도의 소임을 다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던가.

§ <힘씀과 애씀>의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성격 차이


우리의 모든 '행함'은 구원 받은 기쁨 중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요 우리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실 일이니 주님이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은 '최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함이라 하는데, 옳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며 <우리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어떻게 하면 최상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ㅡ하는 것입니다[고전 7:32].

물론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최고, 최상의 것을 요구하시거나 더더욱이나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단지 주님께 대한 우리 자신의 사랑요구하십니다. 주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길 열망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몫으로서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나타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 받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 받아 그리스도를 사랑하다보니 자연 그런 갈망이 생깁니다. 성경에, 5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10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는 이에게 웃옷을 주고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을 돌려주라는 말씀이 있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상대는 나를 사랑함이 없이 나를 위압하고 내게 강요를 하는데 반하여 나는 그를 구원함이 목적이므로 서로 목적이 달라 나는 나대로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최고 선[좋고 바람직한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함은 그 영혼이 구원 얻기를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불쌍히 여김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 왜냐면 이 세상에서의 나의 본무(本務)가 이 한세상 편하게 위풍당당으로 살자는 것이 아니라 모쪼록 단 <한 사람>이라도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내고 영생에 들어가도록 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정할 수 없는 갈망, 열망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열망하시니까 나도 하나님의 이 사랑을 닮는 것입니다. 이 주체할 수 없는 열망이 나를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데 난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열망, 갈망이 있다는 것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의 사랑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도 이렇게 인식하기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르게 의미가 나타납니다.

이 심경의 일단을 피력한 것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니,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는 바, 곧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롬 9:1-3]라고 한 바울의 말입니다. 따라서 내 행동도 자연스럽게 완전히 뒤바뀌어져 나타나게 됩니다.

인식 차이-사랑의 유무 차이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하라 하시니 마지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타율적인 것과, 이같이 사랑으로 자율적으로 하는 것, 이 엄청난 차이는 똑같은 행동을 해도 자유인과 노예가 나타내는 의미로서 각기 상반된 것입니다. 구원 받은 것과, 구원 얻지 못하고 구원의 진리를 모르고 있는 것과의 현격한 차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오직 그 말씀을 알아듣고 받아들일 마음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물론 정상 상태입니다. 정상이 아닌 것을 말씀하실 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은혜로 받고(행위로써가 아닌) 그 결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그런 의미인데, 그리스도께서 어떤 명령을 주실 때 바로 이 뜻으로 말씀하심입니다. 사랑ㅡ"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받아 값없이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그래서 모든 소 원 다 풀고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있으니 넉넉히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순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삶은 이런 당연 귀결을 따름입니다. 넉넉히 소유한 자의 여유요 아량입니다. 사랑은 사람 생명을 살리는 것이지 결코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버려두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므로 그렇습니다. 이런 모든 명령은 구원 받기 위한 조건 또는 목적으로 말씀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즉 행하면 구원이 된다든가 또는 행하지 못할 줄을 알게 함으로써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하신다든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 행하라고 주시는 삶의 도리입니다.

단지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만 확실합니다. 행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행하지 않을 때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전자는 말 그대로 자기 행위로 구원된다는 그 뜻이요 후자는 오로지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전자로는 절대로 구원이 되지 못한다고 확언했습니다.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입니다. 세상 종교가 그런 되지도 못할 불가능을 택하니 오직 바람 잡는 격입니다. 

거저 목숨이 붙어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자기 혼자 살듯이 이웃을 그렇게 해치는 것이 결코 삶의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삶의 도리일 수 없습니다. 나는 그를 죽이지만 내가 죽이는 그 상대가 나라고 가정하면 단박에 알아지는 이치입니다. 고로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원통할 것인가를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지 못하는 미련함이 곧 악함입니다.

모세 시대의 율법은 그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으니 곧 죄를 깨닫게 하는 데에 하나님의 율법으로서의 그 소임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이 단지 그 역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다름아니라 머리되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몸의 각 지체된 내 이웃을 나 역시 그 중 하나의 지체된 자로서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머리의 지시를 하는 데에 있음이니,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으로서 복잡한 것도 어려운 것도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그 율법에 접할 때는 나 자신 죽음을 무서워하여 무조건 살고자 하는 마음이 나를 지배하였던 관계로[히 2:15] 나 자신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직접 구원을 갈망하게 만든다는 그 차이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심으로써 그를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시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인하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생명의 법질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생명의 법 곧 모든 말씀을 시키시는 대로 할 수 있는 그 생명력을 받음이니 곧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계시어 그 능력이 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믿는" 것은 수용하는데 "회개하는" 것은 생략합니다. 회개는 순종하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순종할 마음이 아예 처음부터 없는 이들이 그렇게 회개를 중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뿌리와 둥지 사이입니다, 뿌리 없는 둥지 없고 둥지 없는 뿌리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 둘은 하나이므로.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 구원 받기 위해 평생 끙끙거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 위해 죽으실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니 그렇게 죽으시는 순간 그 순간-'평생토록'이 아니라 그 '순간', 우리의 구원은 단번에 해결되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때문에 주님 앞에서 '최선'의 삶을 살든 '최고'를 목표로 하든 그 때문에 부담감을 느끼고 억지로 하여, 기쁨으로 즉 하고 싶어서 열정으로 열망으로 하는 것이 없을 때, 그것은 주님 앞에서 전혀 무의미하고 마치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처럼 되어 장애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바울입니다. 그토록 "힘에 지나도록" 고난을 받아도 그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열정은 다시 고난 속으로 뛰어들게 한 것이니 단 "몇몇 사람이라도 건져내기" 위함이었기에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구원 얻음과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에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반되는 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가진 재산 처분하여 가난한 이웃 돌보는 그런 목표 하나도 달갑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지로 하다가 성령을 모독하는 대죄(大罪)로까지 이어져 멸망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듣는 이들과 모든 교회가 다 크게 두려워했습니다[행 5:1-11]. 은혜로 값없이 구원 받아 영원하고도 찬란한 세상을 통째로 다 소유하여 누리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한 백년 세월인들 왜 뚝 잘라내어 이웃을 위해 송두리째 바치는 것을 주저하겠습니까. 거기 비하면 손바닥만도 못한 땅이 아깝고, 속옷, 겉옷이 아깝고 10리 가주는 것이 원통해 사랑으로 그 사람 영생으로 건져 올리려는 좋은 기회 놓치고 그 일을 마다하다가 영원토록 후회할 일을 감히 만들 것입니까.

이같이 사랑이 없다는 것은 모두 믿지 않는, 믿지 못하는 연유에서입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 말한 것은 간단히 말해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 믿음이 살았느냐 죽었느냐 가늠해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 사랑 유무를 스스로 지켜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이런 '죽은 믿음' 운운한 것도 먼저 사랑이란 주제를 놓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형제 사랑 없는 것은 죽음 안에 있음"(요일 3:14)이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요한은 더 구체적으로 나아가, "보이는 형제 사랑이 없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이 있으랴", 즉 형제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사랑도 빈 말, 다시 말 해 하나님 믿는다는 것도 빈 소리라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때문에 "말세에 악이 창궐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 하신 후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 24:12,13] 경고하셨으니 사랑이 없다는 것은 "믿음 없다"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것은 "죽은 교회"라는 뜻이고 "믿음"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는 것이니 자기도 믿음이 없으면서 남의 믿음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의 경고처럼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이른바 '있는 이'들을 칙사대접하는 곳일수록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가장 핵심되는 알맹이를 빼 버린 껍데기 형상에 불과합니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말처럼, "믿음을 지킨다" 하면 소극적인 의미로만 들려지기 쉬우나, 처음 믿음 즉 처음 사랑을 계속 유지한다는 뜻이니 사랑은 항상 능동적이요, 적극적이요, 언제나 넘치는 활력의 운동력, 생명력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10달란트 받은 이는 그것으로 10달란트를 늘린데 반해 한 달란트 받은 이는 그 한 달란트지만 그것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그 한 달란트마저 잃는 그런 비극과 같습니다. 이같이 주인의 뜻을 모른다는 것은, 왕의 잔치에 초청받은 자가 왕을 생각함이 없이 즉 왕의 잔치에 걸맞게 왕의 잔치를 축하해주는 예복을 입어야 함에도 이를 무시하고 자기 배만 채우기 위해 잔치 자리에 앉았다가 뒤늦게 쫓겨남과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난의 삶을 장려함도 아니요 찬양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가피한 고난의 현실을 직시하고 "고난에 함께 참예하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함입니다. 영광도 함께, 고난도 함께 나 눔이니, 주님과 함께 나누고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나눔입니다. "다윗처럼 악기에 맞춰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않는다"(암 6:5)는 경고 또는 "몸을 가졌으니 갇힌 자들을 생각하라" 명령도 이와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 받음은 "함께 나누는" 차원만이 아닌 갖가지 귀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니 기쁨으로 의미있게 맞이하고 결단코 위축될 일이 아니라는 그런 설명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3)는 그 취지입니다. 또 오해하지 말 것은, "사랑, 사랑" 하니까 사랑만이 최고요 모든 것의 궁극점인 줄 알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사랑을 베풀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아 그래서 소위 "종교 통합"도 외치나, 사랑은 산 자만이 나타내는 산 증거이지 죽은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설명한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죽음과 삶의 전환점이요 기로(岐路)인데 이 전환점을 통과하지 않는 그 무엇이든 죽음 그대로 있는 죽은 자의 몸부림일 뿐입니다. 양심을 따라(양심이 원래 이 사랑을 외치므로) 행하니 마음이 편하고, (그러나 양심의 소리는 그리스도 이전의 모세 율법과 같고 구원 자체는 아닌 것-롬 2:14,15) 아울러 막연하나마 영생의 희망도 있는 듯 보이고 그래서 사랑의 행위를 줄곧 강조하는 것이 세상 종교입니다.

그러나 영생에 대한 희망일 뿐이지, 영생을 현재 누리는 즉 구원 받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므로 그리스도 없이 자기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으로서 안개 움켜쥐려는 것이므로 이를 반드시 분간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관문을 통과한 이들 중에서만 사랑의 유무를 묻는 것이지, 이 "양(羊)의 문(門)"(요 10:8)을 통과하지 않는 그 어떤 이른바 "사랑"도 그 정체를 벗겨보면 모두 절도죄, 강도죄(:8)의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그 본성이 "양을 죽이고 도망가게 함"에 있으므로 자기중심일 뿐입니다.

고로 여기서 논외로 치는 것이니, 이른바 사랑을 표방하며 접근하는 세상 종교의 정체를 밝히신 것입니다. 죄의 청산을 전제하지 않는 용서, 용서를 전제하지 않는 화해-모두 여전한 무법자, 불법자의 주장으로 자기중심에 한 치도 벗어남이 없습니다. 실물과 영판 닮았으나 그러나 내용 없는 속임수, 빈 껍데기뿐인 거짓입니다. 법질서를 어김으로 인하여 온 우주에 파국을 불러 일으킨데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아주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오만의 절정을 이루는 소행들이 이런 이들의 소위 "사랑"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우선 편하고 좋습니다. 그들의 소위 "사랑"으로 굶주림도 면하고 병도 치료하고 서로 미워하지 않고 미소 띠고 사니 현세에서는 그럭저럭 좋은데 사후 영원세계에선 어찌할 것입니까. 법질서 주관자가 죄 청산 여부를 추상 같이 심문하실 때에 대비가 전혀 없으니 헛수고입니다. 사랑은 산 자만이 하는 것으로서 산 자답게 살아 그 생명을 지속시키는 방법입니다. 이 경우의 사랑은 사랑의 원리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좋아하는” 감정만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심이 그 핵입니다. 머리와 몸의 이치로 움직이는 관계로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여럿이 하나가 되어 움직일 때는 결단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영원한 철칙입니다. 고로 영생을 갈망하는 자가 그런 영생이라는 대가를 바라고 세상 종교를 믿으며 선행을 하게 되는데, 이 경우 단지 양심의 가책을 따라 행하는 것이지 그래서 마음은 편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잠재웠으니까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선행은 결코 어떤 대가를 바라고서 하는 일이 원래 아닌 것이니 앞에서 밝힌 대로 산 자가 그 삶을 즐기고 누리는 단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수단은 아니지만 영생을 누리는 방법인 까닭에 무릇 산 자는 이 선행[사랑의 행위]이 없이는 죽은 자가 되는 것이야 말하나마나입니다. 죽은 자의 증거만 될 것뿐입니다. 인간은 현재 죽은 자라는 뜻이고 영물로서는 장차 죽음의 세계에 처할 것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뜻은, 원래 영계에서 살고 있어야 할 산 자가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측면에서 하는 말이고[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가], 스스로 된 죽음의 처지도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러하셨고 그 몸으로서 우리가 그 뒤를 현재 잇고 있습니다. 사랑의 행위가 영생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은 산 자에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요, 산 자가 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죽은 자로서 시작한 관계로 스스로 산 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 창조하심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니, 일단 스스로 죽음에 이른 자는 그 죽은 자를 새로 살리시는 법은 없기에 그렇고 이는 철두철미 원리원칙을 따라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원리원칙에 따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는 그 친히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실 수밖에 없으시고 내가 이미 죽은 자이므로 나의 죽음에 동참하심으로써 우리 죄악의 형벌을 짊어지시고 그런 다음 다시 살아나시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고로 여기서 핵심은 그 ‘죽으심’ 자체보다는 ‘그렇게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심’에 있고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 됨에 있습니다[고전 15:14,17,18]. 그러므로 우리 구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에 있어 함께 살아난다는 것은 하나되어 살아남이니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됨에는 3위1체 원리에 따라 상보적이어서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하는 사는 머리와 몸 관계가 주축입니다. 따라서 나는 절대적으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롬 14:7-9/고후 5:15]. 그런 사람이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고 바울은 아주 칼로 자르듯이 단언한 것입니다.
 
§ 세상이 어두움이요 사탄의 권세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의 특성이라 할까, 정체라 할까, 어쨌든 그 실 상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인데, 성경은 이것을 한마디로, "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다"[요일 5:19] 했고, 이 악한 자가 사람들의 마음 눈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차단한다 했고[고후 4:4], 세상의 부귀영화가 다 자기 수중에 있다고 할[눅 4:6] 정도이기에 이 세상의 "임금"(王)이라 하신[요 14:30] 것입니다.

곧 사탄이라고 하는 영물(靈物)로서 영물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신(神)처럼 군림해 있는 자입니다. 자연법칙을 초월하고 구애받지 않는 것을 '초자연적'이라 하는데 이런 초자연적인 영물인데다 합법적으로 인간 위에 군림하여 왕 노릇하고 있으니 가히 그 막강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자의 속성을 가리켜 그리스도께서는 "거짓의 아비 (元組)"라 하셨으니 창조 이후 모든 거짓은 그가 시초요 그 발단이니 에덴낙원에서 인간을 속인 데에서도 그 특성이 역력히 드러났던 "옛 뱀"[계 12:9/20:2]으로서, 당초 인간 수하(手下)에 있던 자가 반역한 것입니다.

그 속임수로써 인간을 이런 흙의 몸 즉 "죽음의 몸"으로 전락시켰으니 이를 두고 시역(弑逆)의 근본이라 할 만합니다. 자기를 포함한 모든 영물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아담 곧 자기 손위인 인간에 대한 시역입니다. 어쨌든 그의 막강한 힘은 상대적인 것으로서 인간이 초자연세계에서 추방되어 초자연성을 잃고 나니 그의 초자연적인 힘이 초자연적이지 못한 인간에게는 거의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악한 자에 대한 상세한 풀이가 아니라, 그의 속성이 자기중심이요 따라서 죄와 악이요 그래서 온갖 거짓의 아비가 되어 있으니,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힘의 본질도 바로 그런 <거짓 일색>이라는 이 엄연한 현실을 상기하자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말 하는 모든 인간의 사상, 사고방식 등이 모두 그 뿌리가 사탄에게 있고 그 속임수로부터 나온다는 이 점을 언제나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흑백으로 갈라놓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한결 간편하고 단순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는 것은 무조건 하고 사탄으로부터 나온 것이다-얼마나 간단합니까.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세상은 저렇게 말하는데 어느 쪽이 옳으냐, 물론 어린 아이 같이 성경을 일단 믿으면 그보다 더 좋은 방패막이는 없지만, 우리의 이성을 총동원하여 가장 합리적인 쪽을 택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은 특정 지식에다 그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상식>에다 두는 것입니다. 가령 이순신을 비하하고 원균을 추켜세우는 오늘날 이순신과 원균 중 과연 누가 흑이고 백이냐 할 때,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여러 정황으로 보아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면 그렇게 확신이 되어지는 쪽 인물이 이 문제를 올바르게 풀어갈 수 있는 판단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시각과 관점은 혼돈에 빠질 수 있어 그 기준을 엉뚱한 데에다 둘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쪽 주장 다 공평하게 다루어보면 그 중 보다 합리적인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경우에서도 가장 <합리적으로> 그 인물을 대변하는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이치에 합당한 쪽을 따르는 것이 그런 오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지름길이니, 둘 중 반드시 하나는 이치에 맞게 되어있고 다른 하나는 이치에 맞지 않도록 설정되어 있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둘 다 이치에 맞는다면야 애당초 두 주장이 서로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은혜로 거저 얻는 구원>과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힘쓰고 애씀>의 명확한 구별도 그렇습니다. 역시 이런 문제도 그 초점 즉 판단의 기준을 어디에다 두느냐에 따라 동서(東西)가 나뉩니다. 가령 동쪽을 가야 하는데 서족으로만 잘못 방향을 잡아 내달으니 평생 가도 해결을 못하게 됩니다. 가령 '힘쓰고 애씀'에다 기준을 둔다면 은혜 이전에는 힘쓰고 애썼으나 은혜를 안 다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론으로 낙착되는데 이건 위험천만의 잘못된 판단입니다.

또 성경과도 어긋나니 성경은 힘쓰고 애쓰라 했기 때문인데 그래서 "성경은 어렵다"는 [실상은 어렵기커녕 어리 아이라도 믿고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된 하나님의 말씀이건만] 결론으로 더욱 미궁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 읽을 맛까지 잃으니 더 문제가 큽니다. 기준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와 이제 알고 있을 때의 차이, 바꾸어 말하면 "힘쓰고 애씀"은 그 때나 이 때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와 지금 알고 있`을 때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따라서 그 현격한 차이는 그 때와 이 때의 "힘쓰고 애쓰는" 목표의 차이로 다시 나타납니다. 즉 무엇을 위한 "힘쓰고 애씀"이냐, 전자에서는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서 자기중심이었고 후자에서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함이니 온전히 사랑의 원리에서라는 이 차이입니다. 아내 남편이 서로 사랑하는 표현이 바로 "어찌 해야 아내/남편을 기쁘게 해줄꼬?"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이 부부는 "힘쓰고 애쓰는" 것입니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바로 여기 이 자리에다 아내/남편 대신에 그리스도를 대입시 키는 것- 바로 이 차이를 아는 것이 구원 받음의 여부를 아는 일입니다. 아내/남편의 한 몸됨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내가 한 영 되어 있는 실체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니까 그림자는 실체에게 당연히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양보 정도가 아니라 적법(適法)한 조처입니다. 사랑에는 원래 한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신 대로 자기 전 존재를 다하는 사랑이니,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나를 구원하셨고[갈 2:20] 지금도 여전하시니 나 또한 그렇게 주(主: 주인ㅡ섬김의 대상이란 뜻)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형제이니 그 형제 위해 우리가 목숨을 버림이 당연하다"[롬 14:15/요일 3:16], 성경이 거침없이 물 흐르듯 하는 어조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힘쓰고 애씀"이 어느 한계까지냐, 바로 목숨을 버리기까지입니다. 이것이 인격 완성, 자기 완성,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인간적 노력입니다. 인간적 노력이라고 해서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자기 도취의 그런 것이 아니라 순리를 따르는 것이니 곧 하나님 주시는 능력을 따라 나의 최선을 다함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하는 것이므로 완전을 기할 수 있고 기필코 이룰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능력이라면 한정이 있고 또 사람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공평공정하게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평등하게 받아 누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증되었지만[롬 5:8] 사람이 이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구원이 임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살후 3:2] 한 대로 모든 사람이 믿지 않는다 함은 사랑의 반응을 제대로 나타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믿는 자이고 그래야 구원이 되는 것이고 또한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이니, 순종하지 않는 자가 구원될 수 없는 것은 가인 같은 자가 아무리 구원되어보아야 그가 하는 일은 아벨을 죽인 가인의 일밖에는 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리 없습니다. 첫 사람이지만 아담이 죽음에 이른 것이 그 때문입니다. 이미 이렇게 선례(先例)가 확고하게 세워졌은즉 앞으로의 모든 일이 이 선례를 따라 진행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정상적인 사랑으로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고 여전히 이기적인 것을 뉘우치지 않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성(同時性)입니다.

저쪽에서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면 나도 그 사랑을 배워 같은 수준으로 즉 한계가 없이 사랑해야 하는 것이니 그 정확한 척도는 우리 모두의 머리로서 ①하나님을 사랑하되 ②나의 전 존재를 다하여 사랑함입니다. 왜냐면 불완전한 사람과 달리 하나님은 완벽하시므로 우리의 그러한 사랑을 수용하시기에 충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사랑을 몰라주시거나 놓치시거나 오해하시는 따위의 일이 일절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만 만족하고 그 스스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으니, 그 증거는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지 않는 데에서 나타납니다. 즉 종의 자세를 취하여 시키는 대로 할 뿐 자율적으로 자진해서 앞장 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주인 의식이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며 순종도 아닙니다. 당연히 구원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믿음을 오해하여 믿는 자로 자처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자기를 속이고 있습니다.

또 이런 것을 “믿음”이라 착각하여 끝내 회개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것을 마땅히 경계해야 합니다. 한계를 모르는 사랑이라 함은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는’ 대칭 원리에 의한 사랑의 생명의 법칙이기에 시종일관해서 주인 의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시키는 대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뿐이지만 주인은 자기 일이므로 그 한계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런 한계 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복음 전하기에 진력한 본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토록 고난을 많이 받은 것도 이런 사랑의 열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 한 것처럼,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이는 성령의 지시란 뜻이 아니라 성령으로 난 예언이란 의미-행 21:11) 바울이 당할 불이익을 예고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기를 눈물로 만류했지만 바울의 그같은 열심을 꺾지 못했습니다. 이런 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애쓰고 힘쓴" 이가 없다 하겠는데, 또 그처럼 '은혜로써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역설한 이도 없다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기 때문에 그런 열심이 당연하고 우리이기 때문에 그런 열심에서 예외일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랑이 무엇인지 겪어보지 못한 이들의 '차지도 덥지도 않음'을 증명할 뿐입니다. 토하여 내침을 당할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계 3:16]. 죄와 죽음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하는데(왜냐면 하나님께서 나 위해 모든 것을 하시니까) 거꾸로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았다는 이것이 죄입니다. 평생 산 속에서 살아 하나님 욕도 않았고 더더욱 우상 앞에 절하지도 않았고 사람이라곤 만난 적도 없으니 따라서 남에게 해 입힌 적도 없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즉 나를 위해서 평생 그렇게 하고 있다면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멸망하게 됩니다.

왜냐,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그렇게 했다는 그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과 하나 됨에서 분리됨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니 나도 하나님을 위해야 하나님과 내가 일치가 되고 하나가 되는데, 내가 나 자신을 위함에 지나지 않아 하나가 되어 있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분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그 생명 안에 있어 자연스럽게 내가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는데, 반대로 분리되어 있으니 생명의 반대 현상인 죽음이 나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래서 죽을 수밖에 없던 나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목숨을 버 리신 것이 바로 이 원리를 따라 내가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에덴낙원에서처럼 그런 불행과 비극이 다시는 생기지 못하게 하는 길이요, 때문에 이를 가리켜 "하나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했습니다. 이 원리를 따라 행하지 않을 때 다시 사탄의 뒤를 따르는 [아담이 맨 처음 그랬던 것과 같이]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이런 "힘쓰고 애씀"은 믿음을 지킴이요 선한 싸움을 싸움이요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것이라 이 "힘쓰고 애씀"을 따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발 2:12] 것이 됩니다. 왜냐면 끊임없이 유혹자 또는 시험하는 자 사탄이 포효하는 사자처럼 부단히 맹공격을 가해오기 때문입니다[벧전 5:8]. 그래서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하는 것입니다[벧후 1:10].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교회 역사의 그 첫 페이지에서 이 실상이 적나라하게 공개된 바 있습니다.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했다" 한 베드로의 입을 통한 성령의 선고 앞에서 당시 교회는 떨었습니다. 크게 떨며 두려워한 것입니다[행 5:1-11]. 그래서 "오늘이라 하는 동안에 피차 권고하라"[히 3:13] 했고 "섰다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힘쓰고 애씀"이 있고 목숨 버리는 정도에까지 와도 그러나 그것이 내 공덕일 수 없는 것은 그런 "힘쓰고 애씀"을 가시화하게 하고 힘을 붙여주는 것은, 나의 그 "힘쓰고 애씀" 자체가 아니라, 나만을 위해(그리스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나타내시는 그리스도의 "힘쓰시고 애쓰심"의 은혜, 그 사랑, 그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나는 주님을 위하고 주님은 나를 위하시는' 영원한 삶의 구조입니다. 주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는 일을 도맡으시니 나는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 나는 그 대신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서만 모든 "힘쓰고 애씀"을 다함입니다. 과거 나 자신을 위 해, 내 구원을 위해 그렇게 수고하던 것과는 180도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힘쓰고 애씀"을 다한 연후에 "나는 무익한 종(an unprofitable[unworthy] servant)이라 내 할 일을 다했을 뿐"[눅 17:10]이라고 말해야 이치에 맞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시니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 주님을 위함인데 그것이 무슨 공로냐, 이것입니다. 내가 이런 생명의 법칙을 지키게 되는 원인이, 나와 하나 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주신] 주님의 사랑을 믿음으로써 <은혜로 구원된>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므로, 소위 "행위로 구원 얻는다"는 따위의 표현은 내 아무리 "힘쓰고 애씀"이 있어도 해당이 되지를 않습니다. 고로 같은 "힘쓰고 애씀"이지만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차이가 이렇게 전혀 다를 정도로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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