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일요일

(3)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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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역 의무 (2)

우리의 이 땅은 이미 인간의 범죄로 저주 받았다[창 3:17]. 저주 받은 땅 위에서 어찌 살고자 하는가. 하나님의 축복 없이 어찌 살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가. 저주가 내린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 받아 살겠다는 것이 바로 억지요 자기 식대로 생각하며 고집하는 자기중심이 아닌가. 그러므로 개신교 중에서 하나님의 축복 운운하며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사기요 가짜다. 그리고도 구원된다고 속이니까 사기 행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거짓이 이 거짓된 세상에서는 번창하는 법이니 속이는 거짓말이 번창할 수 없다는 논리라면 왜 이 세상을 악하다 하고 이 세상의 지배자가 악령 사탄 마귀라고 말하겠는가.

사탄이 이 세상 지배자라로 해서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사탄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인생들을 속이고 있다 하고 소위 영매술(靈媒術, 영매가 매개가 되어 신령 또는 망령을 불러내는 등 소위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대화를 이루어지게 한다는 술수), 점성술 등을 사탄의 기만 행위라고 말하면서도 진리의 핵심 부문에 가서는 왕창 속이는 이단들도 사탄은 많이 만들어 두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것은 대동소이하다"는 따위의 결론을 내리게 하여 "종교는 하나다"는 식으로 말을 만들어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단들은 죄는 사람이나 영물이나 자기중심에서 오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사탄이 하나님의 지배권에 도전하여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복종하게 만든 결과라고 속인다. 즉 사탄이 죄의 장본이라고 하여 사탄을 하나님과 대등하게 만들어 이런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소위 "구원"이라고 내세움으로써 결과론적으로 사탄을 추켜세우는 짓을 하는 것이다. 세상은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속임수와 거짓으로 가득하다. 거짓은 항상 추악한 것이다. 이런 추악함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그 본성면에 문제가 있다.

이들은 또 주장하기를,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므로 사탄의 체제에 항거하라고 가르친다. 병역 의무를 죄악시한다. 전쟁은 살인행위이므로 병역은 전쟁과 연관된 것이므로 무조건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아전인수 격으로 말을 만들어 선전하고 이렇게 행함으로써 구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고 속인다. 딴에는 철저히 성경대로 한다고 표방하나 이와 같이 성경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 치우니 거짓과 속임수의 간교함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사탄이 하나님께 도전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서 하나님과 대등해 보겠다는 사탄의 속 내를 드러내어 그대로 대변(代辯)해 주는 것이 이들 이단들이다. 사탄은 그 손위인 인간[아담]에게 도전한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되어 보고자 한 것은 사탄이 아니라 그룹들 중의 하나인 계명성(啓明星, Lucifer)]이 그렇게 한 것이다[사 14:12].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神-고후 4:4)"이라는 것은 인간[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됨으로 인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있는데 대한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사탄 아래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영물은 아담을 위해 창조된 터이므로 우리 역시 비록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어 있어 그렇지, 사탄과 같은 영물들과는 동격이다. 대등한 위치에 있지만 단지 능력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이런 차이는 인생들을 섬기라고 보내신 천사들[히 1:14]이 강력하게 우리 구원 얻은 자들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는 까닭에 모두 상쇄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탄에게 밑지는 일은 아주 없다. 단지 아담처럼 스스로 그에게 절함으로써 복속(服屬)하지 않는 한 그러하다.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 나라들 가운데 있으면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가르친다[롬 13:1]. 그래서 충실한 납세자로서의 의무 이행도 이 때문이라 했다[:5]. 병역의 의무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일어나 전투 상황 처해서는 별개 문제다. 전쟁이 살인행위의 범주에 속하는 것만은 분명하고 이 인식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투 현장을 떠나라는 것은 아니다. 적군을 죽이기보다 차라리 적군에게 죽기를 바랄 때 항명이라 하여 영창에 가두거나 즉결 처분을 내릴 경우는 드물다.

왜냐면 전투하는 편이 오히려 편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고된[죽을 정도의] 임무를 맡기더라도 가용 인력을 총동원해서 가동시키는 것이 전쟁 당사자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투가 살인 행위라 하여 적과의 전투를 거부하는 사람은 전투보다 더 위험한 군대 내에서의 그 어떤 고역(苦役)이라도 담당할 결의에 차 있는 터이므로 그런 쪽을 택할 수 있는 것이다. 군대에 있다고 해서 전투로서의 살인 행위에 동참한다는 인식은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왜냐면 권세에 복종하는 의미도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살고자 하는 욕망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양심을 따른다는 의지 하나로 일관하는 까닭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누구보다 용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장점이 있으므로 단지 전투에 투입되는 것을 거부한다거나[거부한다면]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인력을 젖혀두고 제외시킨다는 것은 지휘관의 단견(短見), 단련(短慮)이라 할 것이다.

전쟁은 승리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사람을 살상하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님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 역시 자기가 속해 있는 국가 권력에 복종하는 자로서 전쟁으로서의 승리를 목적하는 데에서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 열성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이 만일 전쟁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고 살인행위 일변도로만 인식한다면 "군인[soldier]"이라는 말을 바울 사도가 입에 올리지도 않았으리라.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인"[딤후 2:3,4/몬 1:2]들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구약은 예외로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권세에 복종한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국법으로 정해져 있는 때에는 그것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권세가 아니라 인간들의 권세 남용, 오용, 악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런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는 답변만이 마땅히 있게 된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은 사는 데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단사설[세상 종교들도 사탄의 영역 아래에서 관장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역시 같지만]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하는 데에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느냐"[고후 5:15] 하는 자기 부인의 여부로써 판별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모든 죄와 악의 뿌리가 자기중심에 있기 때문이다[요 5:42-44]. 그리고 자기 부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아니하고 삶의 낙을 누리지 아니할진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사람 살리는 일밖에 없고 사람 구원하는 일에는 고난이 필수이다. 그러므로 고난 받게 되어 있고 죽게 되어 있는 사람 살리는 일을 위해서는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최적이다. 사람 살리는 일에 고난이 수반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이라는 표현 그대로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고난 받으심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삶이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내일도 기약 못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내일만 아니라 이 시간 후 어찌 될지도 아무도 모른다. 이런 불확실한 삶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데도 이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거의 구제불능에 가깝도록 마비된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니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쉬지 않는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천적으로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막 11:17]인 것이다.

이런 어찌 보면 하루살이 같은 목숨[왜냐면 이 시간 후의 일도 보장을 받지 못하고 그냥 안죽었으니까 오늘도 살아가는 격이므로]인지라 성경에서 인생들을 "죽은 자"[마 8:22]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죽은 자'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생을 만드실 리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존재마저 부정하려 드는 이들에게는 소용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재(實在)를 말하기 위해 이런 인생의 죽은 자와 다름 없는 극도의 불확실성의 인생 삶을 인식시킬 일이다.

이렇게 하자면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다 한 후 오직 하나님을 알라 하여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신다"[전 12:13,14] 한 것과 같은 결론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즉 내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여[갓나서도 죽고 10, 20, 30대에 죽어 나가는 것이 바로 그렇다] 이 세상이 인생 살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악간에 심판할[그래서 영원한 생사를 스스로 가름하는] 자료 만들기 위한 사전(事前) 단계의 조처[현재 세상에 있게 된]라는 데에 의미가 있음을 알도록 해야 함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 받는 의미가 명백하여 선악간에 행한 일을 따라 심판을 받는데[고후 5:10] 이 선악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이니 이 표준을 따라 심판하시는 것은 명백하다. 하나님이 선하시다 함은, 친히 머리가 되심으로써 그 피조물을 그런 한 몸 체제에서 각 지체 각 부분으로 대하시게 되어 몸과 머리 관계에서 결코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전적으로 우리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하심 즉 우리로 말하면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으심"[고후 5:15] 곧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심이다.

이것을 선이라 하고 의라 하는 것이다. 좋은 것을 선이라 하고 올바른 것을 의라 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실존(實存)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결론 즉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시어 전혀 우리를 위하시는 지라 하나님 계심으로써 우리에게 득이 되면 되었지 해(害)가 되고 손(損)이 될 일은 전혀 없는데 왜 굳이 하나님을 부정하려 하는가 반문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에게 득 될 일을 취하고 손해가 될 일을 버리는데 왜 굳이 하나님께 관해서만은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는가 하는 것이다.

무지해서 그런 것이다. 모르면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는가. 칸트 같은 철학자도 이런 관점에서 말했기 때문에 "요청 유신론"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왜냐면 우리의 행복한 삶에는 머리와 몸의 하나된 관계가 절대 필요하고 그래서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까닭에서다. 따라서 하나님이시라고 우리 자유를 억압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위하신다. 위하시면서 우리를 억압하신다는 것은 모순이므로 그런 일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각자 스스로 정하도록 하셨을 정도로 완전한 자유를 주셨다. 왜냐면 생명의 세계는 사랑의 세계이기에 그렇고 사랑은 자유 의지에 의한 결정으로 자유로이 선과 악을 스스로 택하도록 함이 요체다. 악이라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머리와 몸 관계의 구조에서 절대로 그 어느 누구도 즉 머리도 몸[의 각 지체]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도리어 자기 자신을 위함으로써 이 하나 관계를 깨뜨리는 일체의 언행심사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계심으로써 질서가 잡힐 뿐 아니라 영원한 미래의 행복이 보장된다. 왜 이러한 필요 불가결한 하나님의 존재를 일부러 제외시키려는 것인가. 이런 것이 망상이요 망동이다.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무신론이니 이런 사상의 배경 또는 그 정체는 사탄이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인생들에게 집어 넣어 주었다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칸트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이지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그 스스로는 회의론자가 되어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 만한 지각이 있어도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었다는[요 5:44] 결론이다. 이것이 하나님 믿지 않는 근본 이유이니[:40-44] 스스로 이 범주에 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 의와 선을 좋아하지 않는다 즉 자기중심을 더 선호한다, "불의를 더 좋아한다"[살후 2:12]는 뜻이다. 자기중심이기 때문이다[:43].

지식과 사랑은 별개임을 성경은 선언했다[고전 8:1]. 칸트는 그런 지식은 있었으나 의를 따르고 선을 좋아하는 사랑은 없었다는 의미이니 그가 스스로 지식 있다 하여 그 지식에 심취함으로써 "교만해진"[:1] 탓일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사탄 등 악령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범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위하고 그 지시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몸이 머리를 위함으로써 사랑하고 머리는 몸을 위함으로 사랑한다는 것이야 누가 모르겠는가.

자기 분신처럼 생각하고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니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렇게 자연스러운 결론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사랑 역시 하나님께서 먼저 본을 보이심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본을 따르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의 의미다. 이는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큰 자와 작은 자가 지니는 의미다. 즉 인(因)과 과(果), 대소, 주종 관계의 골자다. 작은 것이 큰 것으로부터 났으니 큰 것은 항상 본을 보임으로써 인도하고 작은 것은 그 본을 보고 배우며 따르는 입장이다. 그래서 하나가 된다.

이 하나가 됨은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나타나는 대로 원래의 큰 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작은 자를 내었기 때문에 현재 둘이 되어 양자 관계로 되어 있으므로 원래의 자기 모습을 유지 보전하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면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쁨[신실성]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一向, 꾸준히 한결같이) 미쁘시니[신실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다"[딤후 2:13] 함과 같다. 여기서의 "부인"은, 우리가 자주 쓰는 "부인[자기 부인]"이라는 말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신(神)을 부정한다" 할 때의 그런 "부정(否定)"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일 존재하지 않으면 이렇게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존치(存置시켜야 할 판인 창조신[하나님]의 존재인데[칸트가 말한 대로], 그런데 그런 창조자가 존재하신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는데 왜 그런 설명의 진위는 따지려 하지 않고 덮어놓고 부정하려고만 하는가. 그렇게 하면 결국 위에서 밝히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로서의 자기중심[자기를 사랑하므로 하나님 사랑하지 않음이니 자기중심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만 사는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의미밖에 없다.

이런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구원에서 제외된다. 왜냐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 우리가 현재 이렇게 구원이 필요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악령들[사탄을 위시한]은 영원 멸망에 처해진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실존은 그 만드신 만물로써 충분히 증명되어 있으므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롬 1:20]. 즉 심판 날에 가서 "나는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선을 행할 줄도 몰랐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확언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삶의 필요불가결성에서 찾게 되는 것이다. 몸과 머리의 관계가 아니고는 절대로 삶이 제대로 형성되고 운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계셔서 이런 한 몸 체제 즉 머리와 몸 관계로 풍성한 행복한 삶이 살아지도록 처음부터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 목적으로 만드셨으므로 그런 식으로 삶이 엮어지지 않으면 삶 자체의 의미가 사라진다는 것은 당연하다.

아름답게 만드셨는데 그 아름다워지는 방법을 무시하고 제대로 따르지 않으니 추하고 더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생명으로 만드셨는데 생명이 유지되는 방법을 무시하고 악과 죄를 범하고 불의를 더 좋아하고 불법한 행위를 하니 거기에 생명이 있을 까닭이 없다. 현실은 이런 거짓말로 지어내어 인생들을 속이는 자가 권력을 잡고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가 그런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을 충분한 이성(理性)과 상식과 양심과 판단력을 주셨기 때문에 그런 사탄의 거짓말을 제거하시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다고 하여 산 생애가 정상이 아니라 비극적인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도록 하는[요 6:45] 것이다. 삶이 아니라 죽음임을 알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죽음의 실상 다시 말해 삶의 낙을 상대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이들 말하자면 가난한 자를 믿음에 풍성하게 하신다는 의미가 그러하다[약 2:5]. 그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신다"[고전 1:27,28] 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면 영생이요 악을 행하면 심판이라 하니[롬 2:7-10] 마치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하겠지만 현저히 다르고 결코 같지를 않으니 그들은 사탄의 조종을 받아 알맹이는 빼고 겉껍질만 즉 내용 없는 형태만을 보여 주며 이것이 진리라 하기 때문이다. 내용이라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처음 창조가 망가졌으니 새 창조이다. 새로 창조하심을 입은 연후에 아담처럼 또는 영물들처럼 선과 악을 스스로 구별하여 자기의 영원한 생사를 가름 짓게 하시는 것이다.

아담을 제외한 우리는 그런 자유 선택이 없이 처음부터 죽은 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아담과 같이 또는 영물들과 같이 우리 역시 공평공정하게 스스로 선택해서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자유가 부여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선택할 여유도 없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 일단 모든 사람을 다 살려놓으시고 그 선악간에 행하는 결과를 보고 따져야 하지 않는가 할 것이다.

왜 믿는 사람만 한정해서 구원이 베풀어진다고 하는가. 이에 대한 이유는 명백하다. 아담이 범죄하여 이와 같이 인생들이 모두 죽은 자가 되어 있으니[영물들도 범죄함으로써 사탄 등 악령들은 영원 멸망에 처해 있는 상황인 것처럼] 이런 선례(先例)에서도 보듯이 범죄하여 죽을 수밖에 없을 인간은 아예 구원해보아야 소용이 없으므로 구원하실 필요도 이유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 이렇다 할 행함도 없이 그렇게 악하게 풀릴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할 것이다.

그것은 현재가 우리가 죄인의 상태에 있고 죽은 자가 되어 있어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으니 이를 보고 회개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이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겠다는 의지 표명인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그런데 이렇게 회개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스스로 불의를 좋아함이라는 증거이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의 혜택이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불평등이 아니라 사필귀정으로서 그 스스로가 만드는 결과이다. 그래서 어두움을 더 좋아하는 자는 빛으로 오기를 싫어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 하신 것이다[요 3:18]. 이는 물론 원칙론이다. 우리의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통해 그 믿지 않는 마음이 얼마든지 언제든지 믿는 마음으로 다듬어져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끝내 회개하지 않는 고집으로 일관할 때는 하나님은 무작정 기다려 주시지는 않는 것이다.

뿐 아니라 이미 믿음에 들어온 이들도 믿어 회개했다고 전부가 아니다.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불완전하고 미완성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에게 달린 문제로서 이렇게 회개한 대로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바를 제대로 수행하는지 그 결과에 따라 하나님의 최종 판결도 내려지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므로 우리가 주님의 이러한 두려우심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을 권한다"[고후 5:9-11] 한 것이다.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요 5:29]이라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런즉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악을 행하면 멸망, 선을 행하면 영생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임을 알 것이다. 죽은 자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오직 멸망밖에 없다. 우리의 구원은 먼저 우리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들어놓으시고 그 삶에 합당하게 선을 행하는지 여부를 살피시는 것이다. 선과 의를 행함이 무엇이냐,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행하여 그 자기 생명을 스스로 유지 보전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하나님을 머리로 하여 모든 피조물은 그 한 몸을 이룬 각 지체들로서 이렇게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자기 생명을 극대화시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대 만족과 행복으로 살 수 있는 까닭이다. 왜냐면 그렇게 한 몸 체제가 되어 있으면 그렇게 지체를 형성하고 있는 지체들의 숫자만큼이나 배가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반면에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가 자기를 위하게 되면 자기라는 단 하나의 것밖에 누릴 바가 없게 된다.

따라서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남 곧 내 이웃의 것이 탐 나게 되고 서로가 이러하니 서로를 해치고 죽이고 하는 망동이 일어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로의 인류 역사가 아니던가. 즉 용심이 죄를 낳는 것이다[약 1:15]. 이 모두 삶의 법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행진일 뿐이다. 바로 이런 어리석은 자멸행위의 자기중심을 가리켜 불의, 불법, 죄, 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몸 구조에서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것을 의(善, 올바른 것)라 하고 선(善, 좋은 것)이라 함이다.

바로 이와 같이 사람 삶의 도리를 따라 사는 것을 선을 행한다 함이다. 오늘날 세상에 가장 우선적으로 할 선행이 바로 사람 살리는 일이다. 즉 죽은 자의 탈을 벗어나 산 자가 되는 은혜를 입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그 뜻을 행함으로서 그 영혼들은 건져내는 일을 함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즉 그런 가장 우선적인 선을 행한다고 해도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위하지 않는 그런 선행이 없을 때 아무리 하나님의 선지자 노릇을 하고 큰 능력을 행했다 해도 그것은 피상적이라는 판정을 받게 된다.

왜냐면 그 뿌리가 결국은 자기중심임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했지만 그 믿음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고 중도에 자기를 위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것을 스스로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이 없음을 최종적으로 자체 증명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세상 종교의 선행은 죽은 자로서 선행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지 그것이 생명으로 이어질 수가 없다.

인격성을 갖추어 자유 선택이 보장되어 있는 인간이나 영물은 원리원칙을 따라 살게 되어 있다. 이 원리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난 것이다. 지금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고 영원토록 그러하다. 여자는 사탄의 꾐을 받을 때 원리원칙보다 눈에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으로 판단했다. 즉 사탄의 말을 음미하며 선악과를 보니 과연 그렇게 나타난 것이었다. 봄 직하고 먹음 직하고 지혜롭게 함 직한 탐스러운 모양새였다[창 ]. 즉 이생의 자랑[the pride of life], 안목[눈]의 정욕[the lust of the eyes], 육신의 정욕[the lust of the flesh]에 취한 것이다. 이 세가지는 요한 사도가 이 세상을 평할 때 그 특징을 말한 그대로다[요일 2:16].

그리고 아담 역시 범죄할 때 원리원칙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보다 여자의 애교 섞인 고운 자태와 및 여자가 선악과를 먹은 데도 당장 죽지 않았다는 데에 자극을 받고 고무된 것이다. 즉 피조물을 조물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경배하여 섬긴] 데에[롬 1:25]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당장 눈앞 그리고 코앞에 나타나는 대로의 것에 이끌리지 말 것이다. 오직 원리원칙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써 모든 것을 척결할 일이다.

이공 순신과 '나'원균을 우리가 대조하여 설명하는 것도 이공 순신은 당장의 이익보다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장래를 내다보는 안목에서 판단하고 실천했다는 그 사실에 있다. 당장 나타나는 눈앞 코앞의 일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거기에다 명줄을 거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행하는 것을 사람다움이라 믿었고 그래서 그 양심과 상식과 양식의 판단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로 매진하여 그런 구국의 위업을 성취한 것이다. 이는 넉넉히 제왕(帝王)의 역할이요 몫이라 할 것이다.

우리 피조물은 항상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 중심, 하나님 중심이다. 우리 피조물은 항상 원리원칙을 세워 나가야 하는 것이다. 정신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 원리원칙 또는 정신력 자체가 다름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도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받으심이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원리원칙 또는 정신력이 되어 계시는 것이다.

그저 영생이나 주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福音, 희소식]이 아니니 올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그 결과로 영생에 이르게 함이다. 그래서 "너희는 천하에 다녀 제자를 삼으라"[마 28:19] 하셨고 구원 얻는 것을 "내 제자가 되는 것"[눅 14:26]이라 가르치신 것이다. 단순히 영생을 얻는 방법이라면 굳이 제자라고 하실 이유가 없다. 스승이라 하고 제자라고 하는 사제지간(師弟之間)이 맺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양 무리를 치는 목자(牧者)를 가리켜 "본을 보이는"[벧전 5:3] 위치에 있다 한 것이다.

사람 사는 방법,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그리고 실제 본을 보이는 것이 모든 믿는 사람 즉 구원을 받은 사람의 본무(本務)이다. 그래서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으니 그 마지막이 영생"[롬 6:22]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살아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으로써[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그렇게 "참고 선을 행한"[롬 2:7] 결과가 영생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전과 같이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고후 5:15] 그리스도를 위해 사지 않을 때[롬 14:7-9] 비록 처음에는 믿어 순종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마음이 변해 버린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진노[wrath]와 분[indignation], 환난[tribulation]과 곤고[anguish]만이 있을 따름이다[2:8,9].

우리 구원을 보내심 받는 것으로 표현하심이 그 때문이다[요 20:21,22]. 이미 이 보내심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열 둘을 둘씩 짝지어 보내시고 70인을 역시 그렇게 하셨다. 보내실 때 최대한으로 단출하게 몸가짐을 하도록 명령하셨다. 이는 여행 중에 도둑이나 만나면 털릴 수밖에 없어서도 그렇지만 오직 말씀 전달하는 일에만 전념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한 지역에서는 아무 집이나 한 곳에 머물고 여기저기 옮기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는 그 지역에서는 그 집을 중심으로 교회가 결성되도록 하는 일을 미리 가르쳐 보이심이었다.

우리가 보내심을 받아 있는 자세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고 말씀 전하고 그리고 사람들을 살려 구원하는 차원에서 선행을 함이니 이 일 외에는 이 세상에서 신경 쓸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보내심을 받는 것은 영원히 그러하니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어 사는 몸과 머리의 관계로 사는 것이 생명[영생]이므로 작은 자[을]가 큰 자[갑]를 위하는 것을 가리켜 "복종"이라 하고 그리고 "보내심을 받는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갑은 을을 대리하고 을은 갑을 대리하며 갑은 을의 삶을 살고 을은 갑의 삶을 살아 작은 자 곧 몸[의 각 지체]은 항상 머리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보내심을 받았다고 딱 한정을 했으므로 그 보내신 이의 일을 하는 것으로 제한이 되어 있는 것이지 기타의 일 즉 자기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단지 우리를 죽은 자로부터 산 자가 되게 하시고 영생을 선물로 안겨 주시는 것으로 오해할 일이니 그렇게 영생을 주셨어도 그 사는 방법대로 살지 않음으로써 아담이 죽은 자가 되어 이렇게 우리가 구원의 대상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영생과 동시에 영생하는 방법을 지킬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고 그래서 그 여부를 묻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명령은 먼저 "회개하라"는 것이고 그 회개하는 경우에 "믿으면 영생한다"는 것이다[행 2:38]. 사람 사는 방법 또는 도리는,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이 된 체제에서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고후 5:15/롬 14:7-9]. 그렇게 자기 부인을 해야 몸과 머리로 하나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이와 같이 갑은 을만을 위해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영원한 진리를 구현해 보이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우리 위하신 십자가 고난의 죽음이신 것이다. 이런 것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결론으로 말하면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요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하나가 되어 사는 것임을 말한다. 즉 이와 같은 철저한 법질서를 따르는[자기를 위해서는 절대로 살 수 없으니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이미 법이요 질서로 확정되어 있음이다] 것이 '사랑'이요 그리고 '사는 것'이다.

아담은 이 사랑의 법대로 살지 않아 죽은 자가 되었고 악령들 역시 사랑이 없어 자기중심을 선호했기 때문에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는 현재 상태다. 고로 사랑은 항상 자기 부인을 전제하고 또한 토대로 하는 것이니 바로 삶의 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의 법질서가 되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이 법질서를 벗어나는 경우 자연스럽게 그 응징과 보응의 주체가 되시므로 "소멸하시는 불"이실 수밖에 없다[히 12:29].

그래서 구원의 도리는 아주 단순하고 간단명료하다는 것이다. 사랑은 그 누구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였다고 할까 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인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면 서로가 좋아하므로 네 없이는 내가 못산다는 막연한 개념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을 삶[생명]의 법질서 차원에서 확고하게 풀이한 것이다. 그 핵심을 드러내 증명해 보이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인 것이다[요일 3:16].

그래서 삶을 '사람 사랑'이라 하는데 이는 단순히 사랑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부인을 말하는 것으로서 때로는 고난과 죽음임을 비쳐 주는 단어인 것이다. 삶의 확고하고 엄정한 법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 인간 생활임을 말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리 헌신적으로 즉 자기 한 몸 바쳐 일생을 보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그것이 자기중심이 되고 자기 부인이 아닐 수가 있음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때 자기 부인이니, 자기를 부인한답시고 자기 구원이나 영생을 목표할 때는 그것이 자기 중심인 것이다.

사람의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자기 부인으로 비쳐져도 속인즉 자기 자신을 위함이므로 자기중심이요 자기 부인이 아닌 것이다. 자기 부인은 한 몸 체제에서 들어 있어 전적으로 머리를 위하고 자기와 함께 그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위한 삶이기에 자기 자신을 위할 여지도 없거니와 필요가 없어서 자기를 위하지 않음이다. 자기를 위해 주는 것은 머리가 담당하고 자기의 그 많은 이웃들이 맡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위하게 되면 나 자신이 나를 위하는 단 하나로서 그치지만['나'라는 것이 단 하나뿐이니까],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로서는 오직 머리를 위하고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내 이웃을 위하게 되면, 그래서 이런 질서 속에서 살고 이런 원리대로의 삶을 사랑하여 스스로 선택한 이들의 세계에서 나도 그 하나가 되어 있으면, 머리도 그 많은 숱한 지체들도 나를 위해 주는 바로 또 하나의 여러 나 자신들이 생겨나 일제히 나를 위해 주니 나는 그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나 자신을 보유하게 되고 향유하게 되는 것이니 이야말로 삶의 최고 지혜요 '사는' 방법이라 하지 않는가.

고로 공자가 사람 사는 법을 가르쳐 제자들을 삼았듯이 소크라테스가 역시 자기네가 믿는 "인도(人道)"를 가르쳐 그렇게 사는 생활의 법도를 가르쳤듯이 우리는 사람 삶의 원래의 도리 즉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몸과 머리 관계로 영원히 하나되어 풍성하고 행복하게 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의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서론, 본론, 결론이 있으니 서론은 왜 우리가 현재의 이러한 불행한 상태에 놓여져 구원을 앙망하게 되어 있는가 하는 그 점을 말하고 본론이라는 것은 그러므로 그 원인을 제거하고 정상 상태로 돌아가는 사는 법을 말함이다.

영생은 그 결론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기독교는 서론은 겨우 말하듯 말 듯이 하고 본론은 완전히 생략한 채 결론부터 꺼내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도 진실도 아니고 속이는 것이다. 거짓말로 기만하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신을 가르치는 것이다. 머리와 몸이 완전히 구비되어 있어야 제대로 된 온전한 형상인데 꼬리만을 말하고 혹은 몸뚱이만을 이야기하는 격이니 괴물이지 정상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허무일 뿐이다.

공자나 소크라테스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라 안개 속을 더듬듯이 막연하게 그런 삶의 도리를 양심상으로 깨달아 암중모색하듯이 했으니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머리를 인식하지 못하는데 몸과 머리의 관계가 정립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이 막연하게 좋다는 것만 알아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기는 했으나 그 핵심이 되고 진수(眞髓)가 되는 것을 몰랐기에 그 정도로 그쳤으니 완전한 사람 삶의 진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친히 그 '사는 본'을 보이셨고 또한 그것을 머리되시는 위치에서 나타내셨기 때문에 완벽한 진리다. 머리와 몸이 제대로 갖추어진 완전한 사람 사는 이치인 것이다. 마귀 사탄은 그런데도 영생만 뚝딱 얻어 챙기는 것으로 구원을 잘못 인식하도록 만들었고 이제까지 성공해 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이것이 용납되지 못한다. 용인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어길 때 무슨 천벌이라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핑계 댈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인생들인 죽은 자가 되어 있는데 이 죽은 자들을 구원하는 일은 오직 산 자만이 할 수 있는 일로서 사람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산 자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그런 산 자로서 어떻게 이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 처신하느냐 즉 마땅히 할 일을 해야 하는지를 친히 본으로서 보여 주신 것이다. 곧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으로 나아가시는 발자국이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는 죽은 자였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산 자가 되어 있으므로 산 자의 일을 함이 마땅하고 그 산 자의 일이란 것은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여 주신 그대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 힘써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발견되려 하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나도 그 죽음의 당연한 귀결로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빌 3:8-11]. 왜냐면 그리스도를 얻는 방법이 다름아닌 위의 설명과 같은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몸과 머리로 하나됨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이 을을 위하여 삶으로써 을은 갑의 것이 되고 을이 갑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갑이 을의 것이 되는 것인즉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도록 힘쓴다는 것이니 이는 곧 내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에만 가능해지는 일이다[고후 5:15]. 고로 사랑이나 삶이라는 것은 기계처럼 한번 결정되면 그대로 자동적으로 영속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함없이 나의 자유 의지와 선택에 따라 지속되어야 하는 성질인즉 이 시험 많은 세상에서 그 모든 시험에 굴하지 않고 이 지속하는 자세를 변치 않아야 하는 의무가 내게 있음은 당연하다. 바로 이 사실을 말함이다.

갑을 위해 을이 살고 갑의 뜻을 행하고 갑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요 4:34] 경우에만 갑 안에 을이 있고 을은 갑을 얻게 됨이다. 갑이 을을 위해 살고 을의 뜻을 행하고 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은 갑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 나를 구원하시고 산 자로 만드신 다음이 바로 오늘의 나의 현재 위치이다. 그래서 을인 나를 얻으셨고 을 안에 갑이 있게 되는 상태가, 주님은 나를 사셨고 나를 소유하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주인님, 소유주님으로 모시고 부르는 것이 내가 "주님"이라 부르는 이유다.

나를 강제로 얻으신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주님께 나 자신을 드림으로써 된 것이요,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심 다시 말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고 내가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된 것이니 자동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 된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의 나의 사랑의 의지의 발로요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이 나의 결단이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 핵심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얻어 있고 그 안에 현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의 설명대로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의 결과인즉 이러한 선택은 내 스스로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 취소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지 나의 손발을 묶어 요동도 못하게 하는 그런 강제가 아닌 것이다.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영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니만큼 강제로라도 나를 묶어 영생에 붙들어 매어 주시는 것이 좋지 않으냐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사랑은 절대적인 자유 선택 안에서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어야 하므로 이 사랑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즉 자기 마음대로 욕심대로 행하여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경우 그렇게 좋아하는 대로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물론 만고에도 없는 어리석음이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대로 되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두렵고 떨리는"[빌 2:12]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그 마음의 작용을 따라 행동한 결과로 아담은 죽은 자가 되었고 사탄은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번 실수가 아니라 너무나 명백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우쭐해져 저 잘났다는 맛에 교만해진 결과인즉, 한번 이렇게 마음 먹고 결정한 것은 영원을 두고도 돌이킬 수 없는 스스로의 성향을 정하는 것이어서[그러나 이것은 강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선택의 자유에 의한 것이다] 자기중심을 벗어나 자기 부인을 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 되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 말하지만 "두렵고 떨"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이 세상 현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부단히 우리 각자는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이러한 영원한 어리석음에 빠져 떨어지지 않도록 함이니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는"[눅 13:24/행 1:14/2:42,46/23:1/24:16/고전 5:9/15:58/고전 16:10/15:58/롬 14:19/12:12,13/고후 5:9/8:3/살전 4:1,11/골 1:29/4:2/빌 4:3/엡 4:3/6:18/갈 2:10/히 4:11/딛 3:8,14/딤후 2:15/4:2/유 1:3/벧후 1:5,10,15/3:14] 것이다. 이는 내 구원을 위하고 나의 영생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니, 우리는 이미 사랑 가운데 있어 나의 사랑의 상대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므로 사랑하는 이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은 사랑의 자연스러운 속성일 뿐이다. 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사실 혼동할 필요도 없으니 사랑을 아는 이면 다 이해하고도 남는 일이다. 사랑할 때 자기를 의식하면서 사랑하는 일은 없다. 그렇게 되면 자기 야심상으로도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라는 명확한 판정이 되어 천하의 이기주의자라는 지탄을 자기 양심으로부터 직접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면 도저히 그런 마음은 품을 수가 없게 된다. 오직 상대를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뿐이다. 의식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있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리려 할 의식적으로 나의 믿음 지키기, 구원 지키기, 영생을 놓치지 않기 등으로만 관심이 가고 신경을 쓰게 될 때 그것이 사랑도 믿음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 양심이 증언해 주고 있는 터이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는 것도 이러한 산 자로서의 당연한 산 자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신 대로 따라 행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산 자로서 그렇게 하셨으니 나 역시 이제는 의젓한 산 자로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렇게 산 자로서 마땅한 삶의 자세를 취하는 의미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해서 나의 구원을 목적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 일이다.

이는 "내 스스로 나의 구원을 이룬다"[2:12]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그렇게 산 자로서의 마땅히 할 일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결말을 말함이다. 물론 이런 산 자로서의 마땅한 자세가 아니어서 그런 결과를 내지 못할 때 이는 다름아니라 산 자가 아닌 죽은 자라는 뜻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밖에 더 되지 않으므로 죽은 자로서의 결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내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산 자로서 죽는 일이다.

자기 구원을 목적으로 그렇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는 것이라면 죽은 자로서 죽는 것이니 남도 못살리고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므로 그래서 행위로써는 아무도 구원되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기서 착각하는 것은 구원이라 하면 곧장 영생하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곧장 영생이다. 왜냐면 산 자로 새로이 창조된 까닭이다. 영생하는 자로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강도는 곧장 영생에 들어간 것이다.

그 경우 하나님의 미리 택하심을 따라 된 것이고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회개한 강도가 그 길로 요행히 살아났다고 가정해도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얼마동안 살았다 해도 그 믿음 버리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을 견지할 것을 미리 아셨다는 증거인 것이다. 미리 택하심이 이와 같이 미리 아시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하시는 일임을 이로써도 확증해 보이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보시기에 끝까지는 충성하지 못할 줄도 미리 아시지만 그래도 처음 믿을 때는 기꺼이 믿을 줄을[눅 8:13] 아시므로 그렇게 믿음에 들어오도록 조처하시는 경우도 함께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은 공평공정 차원이니 철저히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 절대로 우리의 구원에 하나님의 강제나 간섭이 개재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직 우리 스스로가 들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도 하고 망치기도 하는 것을 드려내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아담의 죽음 그리고 사탄 등 악령들의 멸망[장차 들어가게 될]의 전례(前例)가 있으므로 요지부동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으면 그리고 회개한 강도처럼 죽을 임시에 믿어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그렇게 구원 받아 산 자로서 행해야 할 일을 다함으로써 자기 믿음을 증명해 나타내는 것이 필수라고 함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목숨이라는 것은 한정해서 정해진 것도 아니니 내일도 모르고 이 시간 후의 일도 모른다. 짬없이 죽어 나가는 인생으로서 하나님은 충분히 경고를 하시고 있는 것이다. 갓나서 죽는 인생은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죽는다. 짬도 틈도 아무 여유도 없다. 참으로 죽기가 급한 것이다. 이렇게 죽는 것이 인생이라고 증명하듯이 죽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경고를 무시하고 무 대응으로 나가는 고집스러운 인생들이다.

10년 20년 30년을 살아 왜 이렇게 죽어 나가는 인생인지 생각할 기회는 얻은 인생들도 오늘 이 시간 후에는 죽어 나가는지 어쩐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용하게도 살아왔지만 이 후의 일부터는 아무도 모른다. 용한 점쟁이가 있어 언제 죽는다고 미리 일러 주는 일이 있다면야 그 동안까지는 무슨 일이든 안심하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기 때문에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지낸다. 그렇게 미리 아는 수가 있다면야 사람마다 그렇게 미리 알고 지내지 모르고 지내다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바람 같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에 눈뜨는 것이 사실상 지혜이다. 왜냐면 그것이 왜 그런가 하고 이유를 찾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 너무 허무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만 아니라 양심이 있어 자기 지은 허물에 대해서 스스로를 책망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선한 양심에 반(反)하여 악하게 행동한데 대한 자책감이 또한 보통이 아니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런 양심이라는 것은 인간 외적인 것에 의해 주입되었다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내리게 된다.

그래서 칸트는 이 인간의 양심[moral sense]이라는 내부적인 경이 그리고 천공에 빛나는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우주 천체의 경이에 대해 항상 경건한 마음을 지녔다고 전해 온다. 이런 사실에서 풍기는 신적인 권위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와 선을 따르는 것과는 별개다. 아무리 창조신의 존재를 대낮 같이 알아도 사탄 등 악령들처럼 또는 첫 사람 아담처럼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이런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 일에 무조건 머리를 박고 이 눈앞, 코앞의 일에 매달린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이 세상의 지배를 받는 악령 사탄의 인간 마음 조종에 휘둘리고 있다는 영락없는 증거다. 그렇지 않고는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인간이 이다지도 이런 죽음, 양심, 우주 만물의 엄정한 질서에 접하여 무감각일 수가 없다. 마치 인생의 죽음이 예외없이 일정 기한을 보장 받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그와 같은 양상으로 움직이고 있음이다.

마치 무엇에 뒤쫓기는 양으로 우우 몰려들고 몰려가고 있는 양상이다. 심각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올바른 결론을 내린다고 못하는 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 역시 얼마든지 또 그런 심각한 사색(思索) 유형의 인간이 되도록 마음을 조종하여 진리 아닌 전혀 엉뚱한 것을 가르쳐 이단 사상 또는 세상 종교를 창안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능히 그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일반적으로 그러하다는 얘기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누구나 생각하기만 하면 알 수 있고 또 풀[문제를] 수도 있는 이 죽음[백세 등 장수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나자마자 죽게 되는 그런 죽음]의 원인을 알고자 하는 것이 있어야 인생으로서 첫째 과제임을 일깨워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내일 일 이 시간 후의 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 처지에 무슨 시간이 남아 돈다고 사람 살리는 일도 하고 겸하여 이 세상 삶의 낙도 보고 한다는 것인가. 이런 판국에 세상을 사랑하여 이 짧은 목숨을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 사랑하는[요 12:25] 데에 바친다는 것은 믿음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즉시 그 순간부터 오직 사람 살리는 일에만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 이들의 정상적인 산 자로서의 모습인 것이다. 이 외에는 그 어떤 경우도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행 1:8] 하신 대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다름아니라 성령도 임하시지 않았고 권능도 없다는 뜻이니 성령을 받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없게 된다.

성령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우리가 영접하는 것이지 그리스도 영접 따로 있고 성령 받는 것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을 받으니 이것이 성령의 세례이다. 성령 충만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차고 넘치듯이 될 때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현상일 뿐이다. 성령이라 표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오실 때 홀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하나되신 모습으로 아버지와 함께 오시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라 또는 아버지라 단독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부르는 "이름"[마 28:19]일 뿐이다.

물의 세례는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이요 성령의 세례는 성령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리스도와 내가 온전히 하나됨을 이르는 것이요, 주님 친히 말씀하신 바 "내가 받을 세례"[눅 12:50]라는 것은 완전히 죽음의 고난 속에 함몰하시는 것을 가리키심이다. 거짓으로 죽은 체하거나 죽은 시늉만을 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심이다. "불의 세례"[마 3:11]는 완전히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함이다.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마 3:12/눅 3:17] 것이라 함이 그것이다.

"성령과 불로써의 세례"라 해서 성령의 세례가 곧 불 세례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세례 요한의 이 표현의 전후 문맥을 살필 일이다. 요한이 그런 표현을 할 때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주시는 "생명의 주(主, prince)"이심과 동시에 심판주(審判主)이신 양면성을 지니심을 밝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불의 세례가 성령의 세례라는 것을 고집하는 변명으로 성령으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신다고 주장하는데 모르는 소리다.

성령으로 우리가 정화(淨化)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믿음으로써 그래서 그 죽음을 상징하는 물[노아 홍수 당시 죄인들이 모두 수장(水葬)된 것처럼]에 빠지는 의식[세례 예식]을 함으로써 죄 용서가 되는 것처럼[행 2:38] 이미 정화된 상태에 성령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께서 임하시는 것이다. 정화할 필요가 있는 누추하고 더러운 곳에 성령께서 임하실 리가 없다는 사실에 왜 생각이 못미치는가.

이를 혼동하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도 마귀에게 사로잡힐 수 있다느니 혹은 귀신들의 활동 무대가 된다느니 하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모두 성경에 대한 무식 무지 탓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계시를 받음으로써 알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거나 학문적으로 해석하여 알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명심할 일이다[요 6:44,45,65/ 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1:25-27/16:17].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를 지키시므로[자기와 하나되어 있는 자를 지키시므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8]는 성경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말씀의 계시(啓示, revelation)는 부지런히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눅 11:10] 자에게 임하시는 것이다.

고로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내일 어찌 될지 모른다는 생각 아래 이 세상에서의 시간을 보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고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처럼 무모한 일은 세상에 또 없다 할 것이다.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요행수만 믿고 있으니 어찌 그것을 가히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죽은 사람은 극소수이고 사는 사람은 절대 다수이니 나도 그 다수에 들어가고 내일이라도 죽는 그런 소수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만의 생각일 뿐 실제 현실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으니 그 보내신 일을 하는 것이 유일한 이 세상에 있는 목적임을 명심하고 이에 충실할 것이다. 이 한정된 시간을 세상 사는 것에다 쏟아 붓는 미련함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내 시간이라고는 없고 오직 주님의 것이다. 항상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 사탄이 눈앞에 비쳐 주는 우선 보기에 좋고 먹을 만하고 당장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탐스러운 선악과에 현혹되지 말고 거기서 눈을 떼고 항상 멀리 보는 눈을 갖도록 스스로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정상 위치에 항상 붙들어 두도록 하기 위해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힘써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 하는 것이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며,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는 것이다"[신 4:9] 함과도 같다. 항상 잊어버릴 위험이 있고 내 마음에서 떠나게 되는 불상사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런 경고가 나올 까닭이 없다.

이스라엘 "광야 교회"[행 7:38]에서 그 60만 장정이 약속의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하고 중도에 목숨을 잃은 것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히 3:10] 그러했다 하였고,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되게 한 것과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한다"[고후 11:3] 한 것도 같은 뜻이다. 여기서도 사탄이 창세기[창 3:1]의 그 "옛 뱀"[계 12:9/20:2]임을 명시하고 있다. "뱀이 자기의 간계로" 그렇게 했다 했지 사탄이 그 간계로써 뱀을 조종하였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빌 4:7] 것이라 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지키시면 만사 해결이 아니냐 할지 모르나, 그리하면 했으므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지키신다 하신 것이다. "기도에 깨어"[마 26:41/막 14:38/눅 21:36/골 4:2/엡 6:18] 있는 것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깨어 있을 때 즉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지키신다 하신 것이다.

말을 바꾸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심으로써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빌 4:13].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결과다. 우리는 구원된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이니 이는 영원하다. 영원 세월을 보내도 이 은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은혜로 시작했으니 은혜 그대로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것은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니 일방적으로 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람이 죽지 않고 영생하느냐 하는 것은 차라리 사치스러운 생각이라 할 수 있으니 보다 더 시급한 것은 당장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함이다. 왜냐면 이 시간 후의 나의 일이 아무런 보장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뜬 구름 같고 아침에 끼었다가 흩어지는 안개가 아닌가. 나만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을 아무 근거가 실제는 없는 것이다. 단지 그런 것은 까맣게 잊고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하면 의식적으로 털어 버리고 이루러 생각하지 않으려는 뿌리 깊은 고질적인 병에 모두 걸려 있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사탄의 이 세상 지배라 하는 것이다. 사탄이 그렇게 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다면 이 정도의 지력(智力)과 이성(理性)의 힘을 갖춘 인간일진대 이미 오래 전에 즉 세상에 태어나 철들기 시작하면서 인생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어야 옳은 것이다. 나이 40줄에 들어 비로소 영적으로 지각(知覺)이 생겨 인생문제를 고민하게 되어도 영생하기 위해서라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이제 갓나서 죽게 되어 있는 그 인생의 위치에 서서 그 죽음의 근본 원인을 캐보려는 자세로 임해야 옳은 것이다.

이 근본 문제를 풀게 되면 영생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왜냐면 인간이 창조된 것이 영생하는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산(死産)되어 갓나자마자 죽어 나오는 인생이기에 이는 다시 말해 아담이 영적인 육체를 박탈당하고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도로 환원되어 버렸다는 것은 이 세상[자연계]에 발을 닿자마자 금방 죽어 버렸다는 의미와도 통하여 바로 그런 의미로도 얼마든지 우리가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냐면 갓나서 죽는 아기가 주변 여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죽은 것처럼 아담 역시 일단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자연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보니 불의의 어떤 물리적 사고 또는 화학적 변동으로 인하여 그 목숨이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갓난 아이가 죽는 것이아 그럴 경우 아담이 금방 죽는 경우에서나 그 여건은 얼마든지 같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아담은 그렇게 죽지 않고 천년 가까이 살 수 있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는 죽지 않도록 조처하시고 보살피시고 지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된다. 왜냐면 그를 통하여 인류가 다량으로 생산되어 온 지면을 채워야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 이치로서 만일 모든 생물 또는 인간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면 또는 아메바로부터 진화하여 어찌 되었다면 위에 지적한 그런 여건에 의해 얼마든지 일찍부터 멸종해 버렸을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결론으로 쉽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소위 "진화해" 나갈 시간적 여유마저도 없게 된다. 그러니 창조로써 만물이 이루어졌다는 것보다 더 엄청난 무리와 억지가 배합이 되어야 인간이 저절로 진화하여 생겨났다는 가설이 그나마도 숨통이 트이게 된다.

이런 가당치도 않은 무신론은 사탄의 획책이라고 했지만, 그리고 지금은 그가 만들어낸 적(敵) 그리스도를 출현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무신론을 걷어내고 유신론으로 새롭게 단장하는 시대라고 했지만, 사탄이 그렇게 창조신 하나님을 내세우는 것은 성경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 정 반대되는 것으로 완벽하게 치장하고 가장한 터일 것이므로 그 때 가서 아무리 창조자 하나님을 인정한다 해도 그 때 가서는 그것이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현재의 무신론적인 주장과 나을 것이 없게 될 것은 자명하다.

왜냐면 사람들은 그런 '가짜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지금 진짜 하나님을 부정하듯이 똑같은 동기에서 그리고 완고한 고집으로 일관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성경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나 그 때 가서 성경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나 성질은 같기 때문이다. 사탄의 거짓 속임수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구원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든지 구약은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구세주[메시아]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로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아니라는 데에 초점을 맞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도 모세, 마호메트 등과 동일한 참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단지 선지자 중의 하나로만 선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거니와 무릇 인생이라면 영생하려는 것 자체보다 나자마자 죽어 나가는 인생에 대한 숙제부터 가장 먼저 머리를 싸매서라도 풀어야 할 숙제가 각자에게 부과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갓나서 죽어 나가는 인생이 있다는 것으로만 해도 위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이건 기타 생물이건 저절로 우연히 생성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을 밝힌 그대로다. 그런즉 이미 설명되어진 삼위일체의 원리에 의해서 인과의 법칙[the law of causality]이 영원히 확정되어 있는 것임을 안 이상 제1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갓나서 죽는 것을 비롯해 현재의 모든 현상은 결과인 것이다. 그러면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당연히 제대로 순서를 밟아가는 것이 된다. 인과 관계를 인정하는 이상 반드시 모든 결과와 모든 원인의 제1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제1원인은 인간이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만큼 반드시 우리와 같이 지성과 이성을 갖춘 인격적 존재임이 금방 드러나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직 성경뿐이다. 그래서 적 그리스도도 이 구약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된다.

단지 앞에서 밝힌 대로 구약성경이 가리키는 그리스도가 현재의 우리가 아는 대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제 비로소 나타났다"는 것으로써 속일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참 것과 거짓 거의 구분은 그리스도 친히 미리 경고하시어 말씀하신 대로 자기중심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요 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 하신 그대로다.

물론 당연히 적 그리스도도 자기 부인으로 나타나고 자기중심으로는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자기중심의 해악(害惡)은 모든 인생들이 다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성인 성현군자보다 월등한 최고의 성인(聖人)으로 자기를 분장할 것이야 물으나 마나이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마저 모방하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계 13:14]. 그러면 여기서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와 그 적 그리스도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한 자식을 두고 두 여인이 달라붙어 서로 자기 자식이라 할 때 솔로몬이 내렸던 판단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즉 먼저 자식에 대한 불붙는 듯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먼저 나서서 "이 자식을 죽이지 말고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 한 여인이 그 아기의 어머니였던 것이다[왕상 3:26]. 즉 우리 피조물에 대한 어버이 사랑을 이미 완벽하게 그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나타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변함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 사랑에 나의 사랑으로 보답하여 죽어도 살아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죽고 사는[롬 14:7-9] 이들만이 이 시험을 이길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중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으로 시종 일관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그 쪽으로 넘어가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니 오늘 이 시간 각자의 자세를 분명히 할 일이다. 적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진리를 알아도 이러한 자기중심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 차원이라 하셨기 때문이다[살후 2:12].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로 즉 죽지 않는 인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찰나적인 시한부 목숨으로 살아도 마치 영원히 사는 것과 같은 착각 속에서 사는 것이 인생들이다. 이런 착각 속에 살아 그리고도 이것이 마치 저절로 생겨나 그리 되는 것처럼 여기고 그리하여 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려고도 않고 허위단심 이 세상 살고자 하는 "미친 마음"[전 9:3]에 사는 것을 어리석다고 말해 보아야 통하지도 않는다.


성령께서 친히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시지 않으면 안되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도 "하나님과 함께 일함"[고전 3:9/고후 6:1]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필수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을 위한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함으로써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져 "눈을 뜨게"[행 26:18] 됨이다.

이 기도의 대상은 아직 믿지 않는 사람만 아니라 이미 믿은 사람도 당연히 포함된다. 믿음에 들어왔다고 해서 대수가 아닌 것이다. 얼마든지 자기의 옛 죄 깨끗케 하심을 잊어버릴 수 있으며[신 4:9/잠 4:23] 그리하여 "멀리 보지 못해"[벧후 1:9] 눈앞, 코앞의 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믿음에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마음의 눈이 멀어지기 시작하게 된다[고후 4:4].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른 자가 되고 열매 없는 자가 된다"[벧후 1:8].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10] 하였다. 이렇게 해야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게"[:10] 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11] 것이다. 열매가 없으니 당연 결과이다. 유실수(有實樹)를 심는 목적은 열매를 보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바라는 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려라, 땅만 버린다"[눅 13:7] 하여 그 나무는 마침내 "찍혀 버려지는"[:7/롬 11:22] 신세가 된다. 이 목적을 위해 "도끼는 이미 나무 뿌리에 놓여져 있음"[마 3:10]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열매 맺을 수 있는 자에게만 구원자이시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심판주심판(審判主)로만 남게 되시는[행 17:30] 양면성을 지니시므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그리스도 앞서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세례 요한은 그와 같이 세상에 알린 것이다[:10-12]. 즉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으니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려 하심인데[고후 5:15/롬 14:7-9] 이 목적에서 벗어나면 가차없이 찍혀 버림 받는 것 외에는 없다.

열매가 없는 나무의 당연한 결말이다. 생명의 환락은 보류하고 그와 반대로 죽음의 영역인 고난 속에 부대끼며 죽음의 결과로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이므로 "오래 참음"과 "인내"가 필요함은 필연이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한다"[롬 2:7,10] 했고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되어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지"[골 1:11] 않는 한 역시 열매는 없다.

이 기쁨이 없을 때는 스스로 원하고 사랑함으로써 행함이 아니라 마지못해 하는 것이 되어 이런 것이 곧 자기의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 하는 이른바 "율법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항상 기쁨과 평안이 그 특징임을 명심할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친히 그 십자가로 나아가시면서도 이 평안과 기쁨이 넘치셨기 때문에 낙담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나의 기쁨을 주노라, 나의 평안을 주노라"[요 14:27/15:11/16:33] 하신 것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율법행위로 구원 얻으려 하는 것'과의 차이는 이런 사랑의 기쁨과 평안이 있는지 여부로 가름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길 일이다. 종이 한 장과 같은 차이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차이다. '믿음'이 그런 차이를 만든다. 그러나 "종이 한 장 뒤집기와 같다"고 말할 때는 우리가 반드시 이 경고를 아로새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 것이니 피곤하지 아니할 때 때가 이르면 거둘 것이다"[갈 6:9].

그래서 베드로는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한다"[벧후 1:12],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긴다"[:13],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한다"[:15] 한 것이다. 듣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들으라고 말할 때에는 신바람이 나는 법이지만 듣기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대시하는 이들 앞에서 말할 때에는 문제가 다르다.

그래서 이미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저를 권유하시므로 제가 그 권유를 받았고 주님께서 저보다 강하시므로[많은 고난 중에서라도 말씀을 전달해야 마땅하다는 논리를 말씀하심에서] 저를 설득하시어 주님의 말씀을 제가 마침내 전달하게 되었으나 제가 그로 인하여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저를 조롱합니다"[렘 20:7] 한 것이다. "대저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때마다 그들에게 임할 강포[violence]와 멸망을 부르짖어 경고하나 오히려 이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제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8] 함과 같다.

때문에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9) 하였으니 그래서 다시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경고와 구원의 말씀을 세상에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 우리는 찬란한 영광의 미래를 바라보고 있으나 그들의 실상은 영원한[:11] 죽음과 고난의 "바깥 어두움"[마 22:13]에서의 "강포와 멸망"뿐임을 우리가 현저히 내다보고 있는 터에 어찌 경고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십자가의 죽음의 고난 길로 나아가시던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평안과 기쁨 속에서 세상을 이기시는 승리의 벅찬 감격에 겨워하신 것처럼[요 16:33]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하니 그래서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에 동참(同參)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내심 받는 것은 마치 늑대들 사이로 들어가는 양과 같은 겉으로의 모습이지만 실제는 오히려 "사자 같이"[잠 28:1] 용맹하고 담대한 것이다[행 4:29].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생명과 그 평안과 즐거움이 영원불멸이라는 믿음과 더불어 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이들의 처참한 비극적 실상이 우리로 하여금 가히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울이 피력한 대로 "단 몇이라도"[고전 9:22] 건져 내겠다는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 우리로 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일도 기약 못하는 인생이니 어찌 아니 그러하리요. 이 시간 후면 모든 것이 끝나고 그들의 처참한 죽음의 모든 실상이 드러나는 판인데 어찌 우리의 안위만 생각하여 그 경고를 하지 않으리요. "내게 능력 주시는 이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나의 신념 앞에서 나에게 맞서는 그 무엇이든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렘 20:11] 것이다.

기쁨과 평안은 생명력이다. 그 생명력이 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그와 같은 죽음의 십자가로 나아가게 만든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사탄은 항상 부정적인 생각을 넣어 주려고 시도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낙담하게 하고 의기 저상되게 만들려고 사력을 다하므로 그를 이기는 방법은 그러한 사탄의 시도에 우리가 한 시도 응하지 않고 동조하지 않음에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살전 5:16]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18] 것은 우리의 강과 같은 평안을 말함이니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좋은 것]을 이룰"[롬 8:28] 줄 앎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앙망(仰望, 우러러 바라며 신뢰함)하는 자는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지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는"[사 40:30,31] 것이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께서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지치지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신다"[:28,29] 하셨다.

이 생명력의 원동력은 무엇이냐, 사랑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원래 생명의 구조가 몸과 머리 관계에서 둘이 하나됨에서 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 구원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반응 또는 대응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말 그대로 둘이 하나가 됨이므로 자기 부인에서 오는 것이니 이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서 오는 자연적인 귀결이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신다는 믿음 위에서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고 성립되는 것이다.
 
간섭과 강제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강제'와 '간섭'이 아니 될 수 없다. 왜냐면 악한 것을 좋아하는데 그에 대한 보응을 하여 응징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악을 방치할 것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악은 그렇게 적당히 제재하면 되므로 모든 인생들 다 영생에 들어가게 할 수 있지 않으냐 하는데, 그런 일은 이 세상에서만 가능하지 자유의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랑의 세계는 완전 자유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불의를 좋아함으로써 자기에게 유익이 돌아가지 않는 것을 아는 지식을 습득하기에는 이 세상으로써 충분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다는 것은 영원을 통해서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칸트의 요청적 유신론이라는 것은 요청을 해서라도 즉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꾸어서 오더라도 만들어 놓아야 조화가 된다는 뜻이니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옳은 것인 줄 알지만 그래서 이성적 판단으로는 아무 하자가 없지만 자기중심의 성향을 버리려고 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의 가치를 앎으로써 세상 모든 것을 버릴 그런 결단이 없는 것이다. 칸트를 비롯해 모든 철학자들은 자기 이성을 자랑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이성적 판단으로는 창조신의 절대 통치가 필요함을 아는 것이다.


세상이 무엇이냐, 아무 것도 아닌데도 이 자기중심으로 흐르는 이들에게는 좋은 매력이 있는 것이다. 있다기보다 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중심의 특성은 눈앞, 코앞의 일만 보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없다는 데에 있다. 우선 배가 고프니 허기부터 면하고 보자는 것이다. 먹어야 하는 것, 안먹어야 하는 것을 가리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따라서 스스로 자진해서[마지 못해서가 아닌] 오래 참는 느긋함도 있을 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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