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26)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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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king melody in your heart to the Lord"


이는 우리말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엡 5:19]의 영역으로서 이 영역의 경우 뜻이 더 명료해진다 할까. 즉 노래한다는 것과 즐겁게 흥얼거린다는 것과는 의미상 차이가 나고 이 구절은 후자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기뻐 못견뎌 그런 가락이 절로 터져 나온다는 의미라 할까. 주님을 향하여 그렇게 즐거운 선율 혹은 가락을 뽑아낸다는 뜻은 사랑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즉 사랑의 노래이다.

구원을 해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어떤 의무감 즉 그렇게 해야 내 구원이 유지 보전된다는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딱히 노래 가사가 있어 그대로 불러야 하는 그런 것도 아니고, 오직 자연스러운 사랑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환희의 표현이 그와 같이 기쁜 가락이 되어 분출하는 것이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美人, the most beautiful person]이 있다 하자. 우리가 자연 환경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면서 그 풍광을 사랑하여 시도 나오고 음악도 나오고 음률이 되어 마음 속에서 흥얼거려지듯이 이 경우에는 오직 한 분 사람이시다.

첫 사람 아담은 애초 창조될 때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여자가 생겨나면서 남녀로 구분됨에 이르러 이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여자에게로 그 나머지 용장(勇壯)함은 아담에게 그대로 남겨져 분화(分化)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눈 앞에서 보는 효과를 내는 것이었다. 이런 위세가 얼마나 큰 것인지는 짐작할만 하다. 바로 이런 위치에서 첫 사람 아담 부부는 영계에 군림해 있었던 것이다.

그 곳 에덴낙원에서 창조된 영물들은 영역[KJV, NIV]으로 하면 영계(靈界) 곧 에덴낙원의 땅으로부터 지어졌고["out of the ground"][창 2:19] 인간이 자연계의 흙["from the dust of the ground"(:7)]으로 지어졌다는 표현과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모습도 성경의 표현과 같이 "각종 들 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19]였으므로 영물들[천사들]은 인간의 모습일 수가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뿐이지 여럿이 공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천사가 나타날 때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원 모습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니 그 모습대로 하면 마치 사람의 형상이 아닌 괴물 같은 것이 될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자(使者, 명령을 받고 심부름하는 이)로서는 사람에게 좋은 인상일 수가 없는 까닭에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신령한 몸으로 있던 아담에게는 물론 그런 인상이 아니었으나 우리는 현재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므로 사정이 다른 것이다. 그런 괴이한 형상을 감당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의 형상이 아닌 것은 우리들의 눈에는 무조건 괴물 같이 나타날 것이 아닌가. 아담이 그들 모두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계의 짐승의 모습 그대로 나타나면 짐승이라고 해서 하시(下視)와 냉대를 받을 것이다. "옛 뱀"[계 12:9/20:2/2:7]이라고 한 용(龍) 즉 이 세상 신(神, 현재는 그러하나 원래는 범죄 이전의 아담 아래 있던 자였다)인 사탄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자연계의 해당되는 짐승 꼭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고귀한 모습이 아닌 각종 기괴한 모습들로 나타나므로 각 영물에게 그 해당되는 특징을 따라 아담은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이렇게 이름[여기서는 별명과 같은 의미가 짙다]을 지어 주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인간의 눈에는 괴이쩍게 보여 자기의 짝이 되기에는 결코 호감이 가지 않는 인상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아담을 "도울 짝[helper]이 없었다"[:20, 우리만 "배필"은, 처음부터 남녀를 의미함이라는 번역자의 선입견에서 나온 오류]고 했다.

여기서 "짝"이라는 것은 생식(生殖)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마음을 터놓고 교제할 수 있는 사귐의 짝이었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나 범죄하여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도로 귀속됨으로써 문자 그대로 생식을 위한 관계로 되어 버린다. 그래서 이런 돕는 자 즉 짝으로서 여자가 창조된 것이고 이는 자연계의 동식물의 암수 구별에서 되어진 것이라 그 신체적 구조 역시 그런 형상을 따를 수밖에 없어 나중에 범죄 직후 그 아랫도리를 가리게 된다.

이렇게 여자로서 만드시지 않고는 아담과 꼭 닮은 인간을 창조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담이 영혼이 있게 되어 영적 존재가 되고 이에 부합하게 에덴낙원이라는 영계가 창설되고 거기서 아담을 위해 인격적 존재인 영물들이 창조되었는데 워낙 자기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서 최고 절정을 이루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므로 아담으로서는 그런 자연계의 동물들과 유사한 모양들로서는 도시 양에 차지 않아 하니, 아담 자신과 똑 같은 존재를 만드시기 위해서는 자연계에 암수 동물들의 창조와 같은 방법 즉 대칭형의 원리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그렇게 하시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치상 그렇게 닮은꼴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만일 별도로 지으신다면 아담 외에 또 하나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창조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하나뿐이어야 하는데 여기서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천국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이 모두가 애초 아담의 형상으로 환원된다면 모든 사람이 모두가 다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나타나는 모습이 될 것이다.

왜냐면 모두가 아름다움의 화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남성다움은 그 모든 행동에서 드러날 뿐이리라. 그러면 그 많은 사람이 다 하나 같이 아름답다면 서로의 식별은 어떻게 하겠는가 하면 영적으로 얼마든지 알게 되어 있다. 이 자연계에서도 사람의 지문 등이 서로 같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모습은 가장 아름다운 것을 총합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주님 혼자서의 모습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제각기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총합한 조화라 할 것이다.

왜냐면 나의 모습이 주님의 모습이고 주님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므로 그리고 각자가 모두가 다 그러하기 때문이요 그래서 '머리'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장 아름다우신 모습이라면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 즉 아담 이후 주님 오실 때까지 또는 세상 심판 때까지 태어나는 그 어떤 인간도 그 아름다움을 따를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군다나 이 세상 인간의 아름다움은 이 자연계에 속한 것이므로 이 자연계가 아닌 보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영계에서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에덴낙원의 식물도 성경은 표현하여 "보기에 아름답다"[창 2:9]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 아름다움은 동시에 남성적인 용장스러움으로도 나타나는 실로 변화무쌍한 것으로서 요한은 그 계시록에서 이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계 1:13].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계시는데 그 아름다우신 분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셨다고 할 때 그 정도로 완벽하게 나를 사랑하신다고 할 때 나는 과연 어떤 반응이 되어 나올까. 그것은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소화(消化)할 일이다. 왜냐면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나를 나타내리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요 14:21].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함"도 그 중의 하나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만유에 충만하시다고 한 것처럼 만유 안에, 만유 위에, 만유를 관통해 계시는 만유의 아버지이시고[엡 4:6] 아들께서는 만유이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골 3:11].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 모든 사람을 상대하시되 개별적으로 상대하심이 특징이시다.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천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그렇게 하시므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는 선입관으로 해서 사람처럼 생각하여 전체 우리를 상대하시면 개별적인 상대가 제한적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은 없이 오직 나와만 상대하시는 것처럼 되어 있는 관계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함이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시편에서는 "하늘에서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이 없습니다"[시 73:25]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영역 "to give Himself"처럼 "자기 자신을 주신(영원하신 선물로)"이라고 번역해야 의미가 완벽하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기본은 주님과 우리 각자와의 개별적인 사귐, 교제의 관계다. 전체 우리 모두를 지으셨다고 해서 절대로 전체로 상대하시는 것이 하나님 역사(役事)의 기본이 아닌 것이다. 왜냐면 첫 사람 아담 하나만을 지으셨지 여러 사람을 지으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도 아담과 동시에 만드시지 않았다. 여러 "짐승들"을 지으신 다음에 만드신 것이 여자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主)된 의식 또는 유일한 의식은 구원도 아니고 영생, 천국도 아니고 오직 내게 개별적으로 주신 선물로서의 주님 자신[the Lord Himself]이다.

왜냐면 구원을 받아 성령을 모시고 있어 아버지와 아들과의[요이 1:9] 개별적인 사귐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귐이 원활하지 못할 때 즉 성령을 근심하게 해드려 그 정도가 심하면 이 아름다운 관계가 파탄이 날 수 있으므로 그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파탄이 나지 않는다면 이 세상 신(神)인 사탄이 무엇 때문에 자기 자유 의지로 스스로 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험하는 일을 하겠는가.

우리를 시험하는 것[창 22:1/욥 1:12/2:6]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귀 그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욕구인 것이다. 그래서 믿음에는 왕도(王道)가 없다 함이다. 택하심 받은 사실은 나중에 이 세상을 떠날 때, 혹은 그 정도의 극심한 핍박을 받았어도 믿음을 지켰을 때[살전 1:4], 아니,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심판대에 가서나 확인될 수 있는 일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주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했어도 불법을 행하는 자로 낙인 찍혀 주님을 떠나가야 하는 운명임을 바로 주님의 심판대에서야 비로소 자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마 7:23].

누가 옳은 성경 해석을 하느냐 않느냐 하는데 문제가 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우리가 마땅한 도리를 따라 사랑하느냐 그 여부일 뿐이다. 지금 내가 아무리 잘 믿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있고 또는 색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여러 진리와 합치된다면 얼마든지 그것을 수용하고 이전 것은 다 버릴 지경에 이르더라도 아쉬울 것이 무엇인가.

나의 체면 때문에 지금까지 믿음 생활해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일편단심 지내 왔다면, 주님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여러 사람 앞에 무릎 꿇는[발을 씻어주기 위해] 것쯤 그것이 무엇이 대수인가. 내가 구원을 받았다, 아니면 그렇지 않고 종교 생활만 해왔다, 그것을 두고 티격태격할 일이 아니다. 왜냐면 믿음은 항상 오늘이 기준이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오늘 내가 믿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과거 내가 믿어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마 7:22] 하더라도 오늘 혹은 내일에 이르러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내게서 떠나가라"[:23] 하신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믿음은 사랑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이 기준이라 하는 것이다. 사랑은 항상 오늘에 있기에 그러하다.

과거 사랑도 오늘이 있음으로써 의미가 있고 미래의 사랑도 오늘을 근거로 하여 말할 수 있음이다. 그래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4] 했다. 그 다음의 구절이 그 이유다. 즉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확실"이 아니라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될"[히 3:13-15]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오늘날"을 강조하여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라" 한 것이다. 끝까지 견고하게 잡는다는 것은 바로 오늘의 연속을 말함이 아닌가.

그러나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언제나 강조하고 있는 바는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과 같이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이니 바로 이런 어린 아이 같음이 또한 모든 문제의 열쇠다. 비록 그런 "배도(背道)"[살후 2:3]가 판을 치고 홍수처럼 밀려나도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결과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그 사람만은 얼마든지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그 사실이다.

교회사상 역대 믿음의 선배들이 그와 같은 "어린 아이"의 믿음으로 하나님 사업의 대역사를 이룬 것이다. 영국 브리스톨의 조지 뮬러, 중국 선교의 헛슨 테일러, 미국의 찰즈 피니, 존 웨슬레 등 허다한 인물들이 그러하다. 그런 사람들이야 성령의 세례가 무엇이라 정의하여 믿든 혹은 아니 믿든 상관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기 부인과 거룩함을 이루는 성경의 진리 안에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뤄 그래서 "자기 구원을 이루어"[빌 2:12-이 말을 하면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빌 4:4) 했다] 나간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교리를 수용함에 있지 않고 다시 말해 성경 말씀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 구원이고 그렇지 못하면 구원이 아니고 하는 식의 그런 구별로 나타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나타내신 모든 말씀 순종에 있어 그 뜻을 행하는지 여부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믿음을 촉발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난 사실은 너무나 단순하여,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셨다"[갈 2:20]는 그것만으로도 능히 요약될 수 있음이다.

그리고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킨다"[요 14:23]는 말씀이야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더 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나를 위해 주셨다는 이 사실 하나만 제대로 믿고 그래서 당연지사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리하여 그 말씀을 지켜 나가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실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 같이 믿는 믿음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성령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기[행 5:32] 때문이다. 그런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은 당연히 순종할 줄을 아시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 같음"-이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겨 둘 일이다. 이상의 여러 말과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다 우리가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음에 있기 때문이다.
 

§ 산다는 것은 자기 부인하는 것

전도하는 것 즉 사람 살려 구원하는 일은 한 몸 체제 안에 끌어들여 공동체 의식으로 살도록 함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그런 한 몸의 구성원이 되어 있는 것을 의식하고 그대로 행하지[살지] 않으면 그 한 몸에 속해 있지 않다는 증거다. 반드시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자로서의 마땅한 도리대로 자기 부인을 하여 보내신[머리로부터 그래서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몸의 각 지체로서의] 자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요 20:21,22/4:34] 위해서만 전념해야 함이다.

물론 그런 공동체 의식으로서의 자기 부인만 누구나 실천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자기 부인 자체가 한 마디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은 둘이 하나를 이루어 상대가 자기를 위해 주기 때문에 나 역시 상대를 위해서 삶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인데 따라서 혼자로서는 절대로 자기 부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자기 부인을 가능하게 하는 둘이 하나됨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셔야만 되는 일이니 그리스도와 하나됨은 반드시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누구나 "죽은 자"[마 8:22]로서 산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게 되어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죽은 다음에 그 다음 단계로서만 산 자가 될 수 있기에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나되시기 위한 목적으로 나 위해 죽으신 것이니 그래서 그리스도와 하나됨이다. 그 하나됨을 인하여 나 역시 비로소 다시 살아날 수 있어 산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도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도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고후 5:14,15]. 자기 부인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도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님이니 이를 명심할 일이다. "일락(逸樂, pleasure)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다"[딤전 5:6] 함과 같다. 물론 당연히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남자든 여자든] 그러하다는 경고인 것이다.

우리 몸의 신체 구조를 보아서도 금방 알 수 있듯이 한 몸을 이루어 있는 머리든 몸[의 각 지체]이든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역할에만 충실히 하여 전체로서의 우리라는 자아를 실연하는 것이다. 고로 소아아(小我)로서의 자기를 부인하여 대아(大我)로서의 자기 구현(具現)을 함이 공동체 의식이다. 이공(李公) 순신(舜臣)을 우리가 공동체 의식으로 표현된 가장 이상적인 인간 삶이라고 상찬하거니와 이공은 그에게 맡겨진 임무[한 몸 체제에서의 지체로서의 역할 분담]에 그와 같이 충실하고 충성한 데에서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7년 전쟁 동안 [비록 명나라와 일본이 화친을 한답시고 전생이 소강 상태에 이른 기간에도 왜적이 이 강토에 있는 한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하여] 전투복을 벗고 지낸 적이 없었다. 여색(女色)을 가까지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전체 '우리'를 위해 살고 자기 자신 한 개인을 위해 살 수 없다는 평소의 신념에서 그러한 것이다. 영생은 창조자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든 피조물이 그 한 몸의 각 지체 역할을 하는 바로 그것을 말함이다.

자기 부인은 바로 그 구조로 사는 것을 말함이고 자기중심은 그런 체제를 스스로 부정하면서 마치 자기 혼자 사는 것처럼 나대는 교만이요 방자(放恣)함이다. 그런 못난 행위가 자기 이웃을 함부로 죽이는 짓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영물로서는 에덴낙원에서 자기 손위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하나님의 대리가 되어 주인이 되어[만물을 다스리는 자로서] 있는 인간[아담]을 죽음에 몰아놓은 살인행위가 그렇게 하여 나타났고, 최초의 인간으로서는 가인이 자기 손 아래인 아벨을 무참하게 죽임으로서 드러난 것이다.

이와 같이 불법, 무법의 인간 세상인지라 철저히 통제할 필요가 있어서 3운법칙이 인간 생애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악인의 가해 행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요 그 피해를 당하는 상대편에 있는 이를 사전에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죽은 자들을 살려 구원해 내어 이 한 몸 체제로 맞아들이는 일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으니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유 없이 옥죄고 얽매인 인간 삶이 무슨 의의가 있다고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할 것인가.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삶의 쾌락 가운데 있으면 그것은 필연코 자기중심이요 자기 부인이 아닌즉 "죽었다"[딤전 5:6] 하여 멸망의 대상임을 성경은 분명히 경고한 것이다. 고로 이러한 멸망을 당하지 않기 위해[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이다. 구원 받았다고 하여 영생은 이제 따놓은 당상이라 하여 태무심하고 그런 태평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나는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야말로 이기주의[자기중심]의 극치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는 이런 자기중심의 사람들만 양산해놓은 웃지 못할 비극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경고하신 말씀대로, "화 있을진저,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마 23:15] 그대로이다. 당시에도 그들은 율법이나 지키려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은 일절 배척하는 교인들만 양산시켰던 것이다. 오늘날 서기관[성경학자]과 바리새인들[신앙의 지도자들이라 자처하는]은 거꾸로 은혜로 즉 값없이 받는 선물로서의 구원을 선전하면 영생과는 상관없는 이기주의자들만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밭에 농작물은 보이지 않고 잡초만 무성하여 길길이 자라나 천하를 덮고 있는 지경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 나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 오늘날의 세례 요한들 역시 회개하라고 소리 높여 외칠 때가 온 것이다. 성경과는 완전히 뒤틀려진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들이 발호하고 있다. 나 혼자 구원 받았다고 태평으로 지내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힘쓰고 더욱 힘쓰는 것이 산 자로서의 마땅한 살아있는 증거요 할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롬 12:11] 하였다. 초대 교회는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다[행 1:14]. 그들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다시 강조하고 있다[2:42].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46].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한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24:16]고 했다. 이 모두 주님의 경고 말씀, "좁은 문과 길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심 그대로다.

사도들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 했다[롬 12:12].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고 했다[14:19].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전 15:58] 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쓴다고 했다[고후 5:9].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했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11] 했고,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했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했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라"[딛 3:8] 했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14] 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했고[딤후 2:15],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4:2] 했고, "주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했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를 힘쓰라"[엡 4:3] 했다.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다[벧후 1:5-7].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해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다 했고,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8-10]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는다 했으니 그렇지 않으면 실족하여 넘어진다는 뜻임을 누가 모르리요. "이같이 하면 우리 주님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신다"[:11] 했으니 천국에 얼마든지 들어가지 못할 수 있는 충분한 사유가 되는 것으로서 심각한 경고인데도 거의 전부가 이 경고를 외면하고 무시하니 어찌 무사하리요.

때문에 교회를 가르치는 사도로서의 베드로의 "힘씀"을 보라.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한다" 하고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한다"[:12,15] 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양 무리를 친다고 하면서 이런 힘씀과 애씀을 볼 수 있는가. 얼마나 성경에서, 진리에서 벗어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실감하게 하는 대목들이다.
 

죽음의 세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살인자 악마 사탄이 관장하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무슨 맛에 이 세상을 사랑하여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는 말인가. 성경에 그토록 경고하고 있음에도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정리해서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까닭이다. 아담이 그렇게 하여 죽음에 이르렀고 오늘과 같은 인간고를 야기시킨 것이다. 악령 사탄이 그렇게 하여 오늘날과 같은 비극적인 결말을 낸 것이 아닌가.

죽음의 현실에 "눈 뜨고"[행 26:18] 똑똑히 직시(直視)하라. 사탄이 인생들의 마음 눈을 어둡게 하고 있는[고후 4:4]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이 화급하다[행 26:18]. 칠흑 같이 어두워 지척을 분간 못하는 미망(迷妄)에서부터 탈출하는 것부터가 시급하다[:18]. 이렇게 눈 뜨게 하는 일에는 말씀 전달에 앞서 하나님 앞 제사장으로서의 성령 안에서의 간절한 기도,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긴요하다[6:4]. 오로지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현재 가진 것으로 족하게 여기는[히 13:5/딤전 6:8] 것이다.

오직 목적이 이 세상 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주제(主題) 파악을 제대로 못하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로서는 전부이고 믿는다고 하는 이들의 대부분이다. 헛다리 짚지 말 것이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는 것이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3] 책망하심과 같다. 성경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건만,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읽을 생각을 않으니 어찌 믿을 수 있는가.
 

§ 근본적 오류

에덴낙원이 자연계에 속한 한 동산이었다고 그릇되게 인식함에서부터 이미 첫 단추는 잘못 채워진 것이다. 이후 가해지는 해석[성경]이 올바른 것이 될 리가 없다. 성경은 에덴낙원이 자연계와 대칭[상칭]되는 영계임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데도 굳이 자연계라 고집하여 지금까지 그와 같이 억지로 무리하게 성경을 해석한 까닭은 악마 사탄이 이 진실을 인간으로부터 감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를 묵과하신 것은 인생들 자신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미 모든 내용을 충분히 밝혀 두시고 있는 이상, 이 자세한 내용을 구하지도 찾지도 두드리지도 않는데 가르쳐 주시고 깨닫도록 하신다면 간섭이 되고 강제가 되는 까닭이다. 이미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진리의 문을 열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이 약속대로 모든 일은 진행되는 것이다. 또 이런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진실이 실상 구원 얻는 데에는 하등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박학다식의 지식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분명히 하셨기 때문이다[마 18:3].

사탄이 사력을 다해 이 진실을 은폐하려 한 것은 이 진실[에덴낙원이 자연계가 아니라 영계였다는]이 알려질 경우 몇 가지 점으로 자신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첫째,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고후 11:4]을 받게 함으로써 멸망으로 몰아넣는 일에 논리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담이 신령한 세계에서의 신령한 몸이 아니라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죽을 때까지 처음부터 계속 있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비로소 영생하게 되는 것이라면 한번 구원 받음 즉 영생하게 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듦이기 때문에 한번 주신 영생은 불변이라는 생각이 합리적일 수 있게 된다.

그리 되면 성경에의 빈번한 엄중 경고에 둔감할 수 있음으로써 결과론적으로 그런 경고를 무시함으로 인하여 범죄에 빠지게 되고 결국 죽음[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백히 성경은 에덴낙원이 영계임을 그 곳의 선악과 나무나 생명과 나무가 모두 이 자연계에 속한 식물이 아니라 영계에 속한 것임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영계에 속한 식물이기 때문에 영생하게 하고 또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닌가. 성경을 액면 그대로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결과로 그렇게 명확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교리를 따르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는 이 사실이 사도들로 말미암아 진실 그대로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인간의 죽음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것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롬 5:12]. 범죄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고 영생은 이 자연법칙으로는 불가능하므로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었고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다는 것은 앞의 지적대로 에덴낙원이 신령한 세계[영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이 처음부터 신령한 몸으로 살았다가 범죄함으로써 죽어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애초 우리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먼저 창조된 까닭에]이 되었으므로 우리의 구원 받음 곧 영생하게 된 것은 아담의 범죄하기 전의 위치로 우리 각자를 되돌려놓으시는 의미가 된다. 우리도 아담과 같은 공평공정한 기회를 주심이다. 따라서 아담처럼 범죄하면 당연히 아담처럼 죽게 되어 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또 사탄이 이 성경적 사실을 왜곡시키려 한 둘째 이유는 에덴낙원이 영계이고 아담이 현재의 영물[천사]들과 같은 신령한 몸으로서 영물들 위에 군림해 있다가 사탄의 계략으로 오늘날과 같은 인간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실상을 알게 되면 사탄에 대한 증오심은 사탄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현재의 인간 삶[세상 삶]에 대한 혐오감으로 나타나고 사탄이 힘들이고 공들이고 있는 세상 사랑[세상 사랑은 멸망으로 직결됨을 성경은 가르치므로]을 현저게 퇴색시킬 우려가 있어 사탄의 목표에 차질을 빚어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사실대로 하면[에덴낙원이 영계이고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살았을진대] 사탄 등 악령들은 인간[아담] 아래에 있었으므로 현재의 우리 각자 역시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 각자 자신이 마지막 아담과 하나되어 있는 까닭에 당시 첫 사람 아담과 한 몸이 되어 있던 여자[하와, 이브]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을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과 같이 "이 세상 신(神)"이라 하여 또는 이 세상 지배자로 하여 위축되거나 할 필요가 없이 당당하게 맞서는 확고한 근거를 가일층 배가시킬 수 있어 사탄의 모든 시험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부터 달라지고 여유만만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앞서 설명한 대로 이런 지식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해서 "돌이켜 어린 아이들 같이 되어" 있는 이들에게 미칠 불이익은 없다. 구원 받는 근본 바탕을 이미 갖추어 있으므로 그런 지식이 있다고 해서 혹은 없다고 해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 있는" 이들에게 미칠 영향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은 것이다. 믿음의 근본은 사랑에 있고 사랑의 복종에 있는 까닭이다[고전 8:3/요 14:15,21,23].

한편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믿음의 담대함을 가지는 것은 보통 큰 자산(資産)이 아닌 것이다. 아직도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못하고 그렇게 되기 위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런 지식이야 말로 보통 도움이 아닌 것이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고 하는 말도 있듯이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영계의 천사들과 같은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으로서 영생하던 모습이 인간 본연의 모습임에 비추어 현재의 이 인생들의 몰골이 당연히 죽은 자의 것이 되어 있음은 두 말할 여지가 없는 터에 누가 이런 세상 삶을 사랑하겠는가. 이 진실을 감추기 위해 사탄이 지금까지 안간힘[-까님]을 다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천 수백 년을 지내오면서도 신학교, 신학이 이런 가장 초보적인 지식마저 마스터하지 못했으니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가르쳤고 따라서 성경에 병시되어 있는 것[예컨대 롬 5:12 등]을 사탄의 농간으로[물론 하나님의 묵인 아래-살후 2:11,12] 이 사실이 기록에서 사라지고 [물론 성경을 제외한 모든 기록을 말함이다] 언급되지 않는다 해서 "신학"이 일절 그 앞에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했고 이를 진실 그대로 밝혀주는 역할을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revelation]'를 '학문'으로 착각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결과다.

그렇다고 신학교, 신학생을 불신하고 백해무익이라는 뜻이 아니니 성경은 올바르게 가르치기만 한다면 누가 이를 거부하겠는가. 단지 거기에 권위를 두지 말라는 경고이니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그 자체로써 그 부적절함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진리를 가르치기커녕 오도(誤導)하기만 했지 백해무익과 같은 양상을 오늘날까지 보여 온 것이 아닌가. 천주교든 개신교든 모두 이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마 11:25,26] 하시고,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11:27] 하신 그대로다. 당시나 지금이나 글자도 모르는 어부와 같은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축에 속하고 성경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던 율법사나 서기관 바리새인 등은 모두 제외된 것과 같이 오늘날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각자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그 무엇보다 친근히 할 일이다.

세상에서 멸시당하는 부류들이 당당히 12 사도 중에 끼인 것이요 당시 존경을 받던 사계의 전문가 또는 유력자들은 전면 배제된 것이니 세상이 중시하는 위신이나 권위 같은 것은 안중(眼中)에도 없는 것이 성경이다. 이는 사람으로 난 것이 아니요 즉 인위적으로 꾸민 거짓말이 아니요, 외형적이고 외양을 중시하는 죄인 인간의 처사를 일절 개의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면 아무쪼록 당대의 성경 전문가 권위자들을 대거 수용하여 사도들을 삼았을 일이다.

진리 안에 자리잡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여,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대들의 할 일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요 20:21] 신분들이니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4:34] 이것이다. 이것이 "먹을 양식"[:34] 곧 생명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아니 받을 수 없게 되거든 바울 사도처럼 고난을 지천으로 받더라도 개의치 않고 진행시켜야 한다. 스데반처럼 죽음을 수반하는 것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꺼리지 않고"[행 20:27]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에서 오는 당연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판에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멸행위는 없다. 살고자 하는 마음은 세상에서 위신을 지키고 체통을 세우고 대접 받으며 안락한 삶을 꾀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 세상 신(神)인 악령을 상대로 하여 전쟁 중이고 피땀 흘려 수고하는 판에, 사람 살리는 죽음의 세상에서 내일조차도 명확하게 기약 못하는 판에 어찌 세상과 더불어 한 세상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리요. 무슨 시간이 남아 돌기에 그런 한가한 틈을 누리랴. 실상을 전연 모르면 혹 그렇다고 하거니와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런 실태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할 것인가. 나태요 병적인 것이요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닌가.

이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함이기는 하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아니니 왜냐면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해당되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즉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었으므로 산자로서의 마땅한 자세로 시종일관하라 함이다. 산 자로서의 자세 즉 살아있다는 증거는 이미 설명한 대로의 자기 부인이다. 그러면 과거 죽어 있던 자가 이제 산 자가 되어 있다고 그것을 전부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과거 에덴낙원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사탄과 같은 악령들 두 부류로 갈라놓던 분류 작업이 인간을 상대로 해서는 이제 한창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의인과 악인으로 분류함이다[마 13:49]. 영물들 가운데에서 이상 설명한 것과 같이 한 몸 체제로서의 생명의 법칙[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을 따르지 않을 경우 죽음[멸망]을 자취(自取, 自招)함이다. 따라서 우리의 경우 "구원을 이루지"[빌 2:12] 못함이다.

"나 자신을 구원하지"[딤전 4:16] 못한 결과가 된다는 의미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처로 잘못 아는 이가 오늘날 거의 전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은혜이나 오직 믿는 자 즉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한 몸 체제에서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에 기꺼이 복종하기로 작정하는 자에게만 한해서 베풀어지는 구원인 것이다. 아담이나 사탄과 같은 악령들이나 이 뜻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악령과 죄인이 되어 있는 명백한 선례가 있지 않은가.

그들이 그러하였으니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뜻을 따라 복종하는 경우에만 구원하시어 산 자가 되게 하심은 당연하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되도록 정하신 것이다. 이를 전혀 엉뚱하게 해석하여 미리 택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구원하신다는, 성경에 없고 상식과 이성에도 반(反)하는 교리를 만들어 사탄은 믿도록 조종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개신교의 일반적인 배도(背道)의 현상이다[살후 2:3].

그러므로 악인들의 멸망은 믿지 않았다기보다 자기 부인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나감으로써 복종하지 않은 결과인 것이다. 그래야 앞서 지적한 아담이나 악령들과 같은 선례들과 일관성이 있게 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신으로써 현재와 같은 비극적 결말을 맞았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라고 해서 그들과 결코 다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하심이었다[눅 5:32]. 회개는 다시는 죄를 안짓는 것을 말함이다[행 3:26].

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고후 5:15] 말함이니, 자기중심이 악이요 죄인 것이다. 자기중심에서 모든 욕심이 나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 까닭이다[약 1:15]. 죄가 무엇이며 의(義)가 무엇인가 할 때 가장 적절하게 설명되는 것이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인 것이다. 우리가 이공(李公) 순신(舜臣)의 예를 만인의 올바른 삶의 사표(師表)로 자주 거론하게 되는 이유다. 성경의 가르침과의 유일한 차이는 이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 의식은 단지 그 윤곽만을 말하는데 그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공 순신의 예에서도 훌륭히 입증되듯이 위대한 업적을 낳는 것읻]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그 본질을 말하므로 완벽하고 철저함을 기한다는 데에 있다.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외면하니 제대로 설명이 될 리가 없고 단지 그 언저리만 맴돌게 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력은 이공 순신의 경우에서 보듯이 한 나라는 물론 주변 국가[당시 명나라]에까지 그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만일 이공이 아니었더면 왜의 풍신수길은 한반도를 보급기지로 삼아 단번에 중국의 요동반도나 산동반도를 공략하여 성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철두철미한 공동체 의식의 발로로 이룩한 역사적 위업은 이공 순신만한 것을 찾기 어렵다. 왜냐면 그런 정신으로 일관하여 생을 빛낸 이들이야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지기수지만 그것이 역사적 성과로 드러난 예는 좀체로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위대한 역사적 교훈은 한민족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라 할 것이다. 이 은혜는 오늘날 온 세계에 전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니 왜냐면 지금까지 무시되어 온 '참 사는 인생 삶'의 법칙을 가장 적절하고 훌륭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올바르게 살 수 있고 인류를 구원해낼 수 있는 방안은 이공 순신이 구현해낸 공동체 의식에 있고 그 완벽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중심 골자인 것이다. 공동체 의식은 반드시 머리와 몸의 하나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비 구름이 덮인 날


비가 오는 날이나 비 구름이 덮인 날은 해를 볼 수 없다. 해가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늘에 있는 것이다. 단지 구름이 덮어 해를 볼 수 없을 따름이다. 공중에 악령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은 마치 비 구름 끼여 해를 볼 수 없는 그런 것과 같다. 해가 얼굴을 내밀지 않으니 마치 해가 없는 것처럼 주위가 그렇게 보인다. 이 세상 신(神)인 사탄이 하나님이 없다 하고 마치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처럼 시끌벅적하게 시위(示威)를 하는 통에 이 세상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 있는 그런 분위기다.

말하자면 애꾸눈 원숭이 동네에 있던 두 개의 성한 눈을 가진 원숭이가 외톨로서의 수모를 견디다 못해 자기 성한 눈 하나를 찔러 자기도 똑 같은 애꾸눈으로 스스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형국이다. 세상이 아무리 온통 애꾸눈이라 하더라도 애꾸눈은 어디까지나 불구요 성한 두 눈이 정상이다. 그러므로 온통 세상이 하나님이 마치 안계시는 것처럼 성경이 진리가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마치 이방인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은 모두 사탄과 그 아래 악령들이 공중에 포진하여 이 세상을 장악하여 부리고 있는 조화(造化)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사리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애꾸눈 세상이라 해서 그래서 홀로 외톨이로 성한 두 눈이라 해서 그 때문에 "원숭이" 대접을 못받는다고 자기마저 애꾸눈으로 만드는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당당하게 정상 상태로서의 원숭이로 제 값 제대로 유지하는 용기(勇氣) 즉 "담대함"[요 16:33]이 필요하다. 공중에 자리잡은 악령들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사악(邪惡)한 사기(詐氣)로 충만해 있음이다.

육체들만의 세계에서 사탄이 신으로 군림해 있는 권력은 가히 거의 절대적이다. "거대한 붉은 용"[계 12:3]이 세상을 자기 색깔로 말하자면 적화(赤化)하고 있어 ['공산(共産) 적화'를 말함이 아니다] 세상이 온통 붉은 색 일색(一色)인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이 글에서 필자는 사탄이 이 세상 신이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아로새겨 주기 위해 일부러 "이 세상 신 사탄"이라고 몇 번이고 대서특필하다시피 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거의 절대적인 그의 지배력으로 지금까지 용이 사탄이고 바로 그 에덴낙원에서의 "옛 뱀"이라는 사실을 용하게도 은폐할 수 있었다. 계시록에 두 번씩이나 마치 일부러 설명하고 알리기 위해 강조나 하듯이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계 12:9),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20:2) 해도, 에덴낙원의 뱀이 사탄이라고는 이제까지 [기록상으로는] 단 한 사람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성공적인 사탄의 작업이었던가!

인간을 눈 멀게 하는 것이 그 정도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그렇게 명백하게 기록해놓아도 그는 얼마든지 인간으로 하여금 그 기록을 믿지 못하도록 그래서 엉뚱한 해석으로 돌려놓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로 할 수 있음을 재확인시켜 주는 대목이 된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금방 알아챌 수 있는 것임에도 그렇게 살짝 점 하나 찍듯이 해서 차단시켜 놓으니까 그 해석상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처럼 벌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사탄의 권세"다[행 26:18]. 주님 자신께서도 이런 실태에 직면하시고 "이상하게 여기신[to marvel at-경탄하다, 놀라워하다]"[막 6:6]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하는 일들이 이 정도이니 부디 정신 차리고 어리석은 마음을 품지 말고 사탄의 조종에 좌지우지되어 어리석은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각자 각별히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이다. 요한 사도 역시 분명히 밝히기를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는 것"[요일 5:19]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탄이 저주 혹은 처벌을 받을 줄 알면서도 아담을 감히 살인하려 들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그런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인간을 영원히 자기 수하에 둘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포상된다고 혹은 자기에게 내린 그 저주를 면할 수 있다고 딴에는 승부 수를 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감히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내기를 할 수 있고 나름대로 승산이 있다고 자신한 것은 하나님께서 워낙 원리원칙의 하나님이시므로 이 원리원칙대로 하면 자기도 자신의 지혜로 능히 자기 앞날을 개척할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바로 욥기에 나타난 대로 인간을 시험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차질을 일으키면 되는 것이다. 즉 일정한 숫자의 구원 받을 자를 채우시려는[계 6:11] 하나님의 의도에 쐐기를 박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므로 감히 인간을 죽도록 버려두시지는 못할 것이라 상상했을까. 그런 것을 사탄이 상상할 수 있었다면 그러면 무엇을 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했을까. 이미 성경이 "사탄은 간교하다"[창 3:1]고 했기 때문에 그 죄악이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탄을 대하여 형벌의 장소로서의 불 못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만일 아담을 죽게 하시지 않으면 형평의 원칙에서 자기도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지 않을 줄로 기대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아직 불 못은 당시에는 없었고 아담 범죄 이후에야 조성되어 있었는지는 모르나 자기의 이전 죄악으로 인해[그 죄악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서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은 영물 자신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일이므로]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여 사전 예방책으로 그렇게 아담을 죽음에 몰아넣는 꼼수를 썼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속여 선악과를 먹게 하는 간 큰 짓을 해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지라 차마 인간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도로 돌아가도록 하시지 않고 무슨 수를 쓰실 것이 아닌가 하고 기대했을 수도 있다. 결국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원리원칙으로 움직이시고 따라서 공평공정하심을 표방하시므로 자기도 그 범죄대로 갚지 않으시고 눈 감아 주시리라 기대했음 직하다. 그래서 자기에게 형벌을 내리심으로써 저주하시는 일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원리원칙대로 하여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 창조의 근본 목적이 완전히 와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쉽사리 와해되도록 하시지는 않을 것이라 하여 딴에는 자기의 계획이 들어맞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사태가 확정되어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은 자기 계획대로 이루어져 간다고 속으로 은근히 부풀어 있어 자기의 속 깊은 꾀에 그 스스로도 감탄하는 자만심에 들떠 있다가 그야말로 추상 같은 전혀 예기치 않던 저주의 선고에 사탄은 아담이 낙담한 것만큼이나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을 수 있다.

그렇게 저주를 내리실 것은 내리시고 형벌을 하실 것은 지체없이 형벌을 하신다는 것은 그 원리원칙을 따라 하나님 친히 인간이 되셔서 그 죽음의 고통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친히 사람되심으로써 새 창조에 돌입하실 의향이시더라도 사탄으로서는 아무리 조물주로서 그 피조물에 대한 애착이 크시다 하지만 설마 조물주로서 피조물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신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또 그렇게 사람이 되시는 단계에까지 이르시더라도 결국 십자가 앞에 가서는 그 계획을 중도에 포기하심으로써 인간을 원리원칙대로 처분하시지 않으시게 되면 그 여파가 사탄 자신에게도 돌아오고 따라서 자기도 덕을 볼 것이라고 주님의 십자가 처형 마지막 순간에까지도 그런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나, 결국 그 길 그대로 완전히 자기를 바치시고 자기 앞에 놓여진 죽음의 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다 비우시기로 작정하실 때 사탄은 눈 앞이 캄캄했을 수 있다.

교만에 가득 찬 그런 억측은 나중에 천년 왕국이 끝날 무렵까지도 변치 않고 딴에는 자신에 찬 기대를 걸고 있음이 확실하다. 감히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겠지만, 이 바로 하나님께서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라 일하시고 모든 것을 관장하신다는 확고한 증거가 된다. 전지전능하시다는 이유로 해서 하나님 능력만을 과시하시거나 마음대로 독단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런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시므로, 영물 같은 존재로서 지식면에서 월등하다고 자부하는 자라면 능히 그런 하나님의 원리원칙을 빌미로 얼마든지 일을 꾸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것이다.

이렇게 원리원칙으로만 나가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그 말씀을 얼마든지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거짓말하실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뜻을 변경하심이 없다는 것,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특징이 있으심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이런 것을 기록한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보다, 차라리 그 자신을 믿지 않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인 것이다.

단지 사탄은 지식면으로만 출중했지 그 자신 자기중심으로서 인자를 베푸는 것은 눈곱만큼도 없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능히 헤아릴 줄 몰랐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 것이다. 사랑이라야 사랑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법이다. 그래서 이 사랑의 원리원칙대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시종일관하시니 사탄은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장차 인간이 되셔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계획은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그러하시랴 하고 자기 자신을 기준해서 판단하고 있었기에 그런 일을 하실 수 없으리라 지레 짐작한 셈이다.

십자가로 나아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가 바로 그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으나 정오가 되어서야 하늘이 빛을 잃기 시작했으니 말하자면 그 3시간 동안은 주님께서 다시 격심한 시험을 당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그 3시간 안에 주님은 그 자유 의지를 따라 얼마든지 그 십자가 고난에서 벗어나실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고통을 끝까지 견디시기로 결심하시는 정오쯤에 이미 모든 것이 결판 난 것으로 판명되자 갑자기 하늘은 빛을 잃었으니 모든 것은 이 주님의 죽으심에 그제 비로소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것은 또 그렇다고 치고 지금도 자신 만만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고 그 통에 많은 사람이 구원에 이르고 있기는 하나 자기가 시험하고 유혹하는데 따라서 얼마든지 그 구원 얻는 숫자를 일정하게 묶어두고 지속적으로 한정시킬 수 있다고 계산하고 있음이다. 천사들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지상으로 내려온 다음에도 이 자신감은 여전한 것이니, 이는 "천년 왕국" 마지막 판에 다시 무저갱[bottomless pit]에서 나와 세상을 미혹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계시록에, 종국에는 그가 붙잡혀 영원한 불 못으로 들어가게 되리라고 예언되어 있는 것을 그가 아직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하나님의 그런 예언 말씀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단적인 전횡專橫)으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원리원칙을 따라 그렇게 말씀하신 줄을 알므로 자기도 바로 그 원리원칙대로라면 얼마든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음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설마 그렇게 실제로 죽으시랴 하던 것과 똑같은 반신반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런 믿지 않음을 교만이라고 한다. 교만의 반대는 "어린 아이 같음"[마 18:3]이다. 고로 누구든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3] 하셨다. 이 교만에는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 넣는 앞뒤 분간 못하는 지독한 고집이 따른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사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살필 때 쉽사리 얻어지는 결론이다. 당연히 인간의 교만도 이를 따른다.

영계에 속한 것과 자연계에 속한 것

그렇다면 이 세상 신(神, 현재는 그러하나 원래는 범죄 이전의 아담 아래 있던 자였다)인 사탄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지게 되는 것으로서, 영물들의 형체의 규모다. 거대함이라 할까. 먼저 여기서 영에 대해 한마디 해야 할 것은, "영(靈)이라고 해서 반드시 형체가 없는 것이 아니니 형체가 없으시기로는 조물주 하나님뿐이시다. 다시 말해 무릇 피조물은 반드시 그 형체가 있게 마련이다. 조물주와 피조물의 차이는 이러한 형체 유무에서도 가름된다 하겠다.

모든 영물은 이 세상 신인 사탄처럼 가시적으로 나타나면 어마어마하게 큰 몸집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얘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이 너른 우주에서 그 정도의 크기야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로 치면 벌레 한 마리 정도일 것이다. 아담 역시 그렇게 에덴낙원에 있을 때는 그렇게 거대한 몸집을 하고 있었다고 여겨도 하자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로서의 정상 형태라 해도 좋은 것은, 인간은 자연계에 속한 존재가 되면서 이 자연 조건에 알맞도록 체격이 왜소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이 어쩌다가 마술에 걸려 개미처럼 작게 되었다는 그런 동화 속의 이야기를 연상할 수 있겠다. 왜냐면 이런 자연 조건에서 이 지구상에 생존하자면 부득불 그 크기를 조절하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 자연계에 처해 있는 모습은 정상적인 크기가 아니라 비극적으로 축소, 위축된 모양새라 단정해도 좋으리라. 약령들의 씨인 네피림이 거인족(巨人族)으로 나타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는 것은 아니고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육체가 워낙 왜소하므로 이에 대비할 때 거인이라는 것뿐이다. 자연계에 속한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그 애비가 영물로서 그것이 육체로 변환될 때는 거대한 육체의 인자(因子)로 부득불 드러나게 되어 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인자를 지닌 육체도 증식을 거듭함에 따라 원래의 모습은 차츰 사라지고 아담의 씨와 같은 형체 또는 규모로 조절되었으리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을 성경도 "큰 용"[계 12:9/20:2/2:7]이라고 했으니 크다는 사실을 유달리 부각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때문에 모든 영물이 사탄처럼 크다는 것이라기보다 사탄은 그 저주 받음을 인해[창 3:14] 유달리 비대하게 되었다고 알아들어야 하지 않을까. 사탄은 다른 영물들처럼 [천사든 악령이든] 이제는 전광석화와 같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은 "배로 기어 다니도록" 저주를 받은 까닭이다.

아무리 영계에 속한 일들이라도 우리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표현한 것이므로 그 의미를 얼마든지 유추해볼 수는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해 동작이 저주 받기 전보다 다시 말해 저주 받지 않은 일반적인 영물들보다 굼뜬 것이다. 비교적 굼뜨기 때문에라도 그 움직임이 인간들의 시야에 그냥 들어올 수 있어 그 모습이 포착될 수 있기에, 지금까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즉 자연계에 실존하는 것은 아닌데도 실존하는 여러 동물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이라는 이름으로 인간 세상에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흙을 먹게 되어 있는" 것도, 이 사실 다시 말해 더 이상 인간 앞에 불가시적 존재[다른 영물들처럼]로는 인정되지 못하고 가시적인 "용"으로서의 형태를 드러내는 요인이 되어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탄이 그렇게 저주는 받았지만 그 고유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 있는 그 특성을 따라 사람의 육체로는 변신 가능했다고 보는 것은 사탄 역시 그렇게 해서 인간 여자를 취하여 자기 씨를 만드는 짓을 했기 때문이다[창 6:4].

변형만 아니라 그 크기도 자유자재로 축소, 신장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악령들은 사람의 육체로 변형시킬 뿐더러 현재의 이 자연계에 거처하는 사람만한 크기로 축소시킬 수 있는 것이다. 천사들이 인간에게 나타날 때도 사람의 형상으로 변형한 후에야 나타나는 것을 보아도 이를 확인할 있는 일이다. 이런 것은 영물들의 능력에 속하는 일이다. 영물들은 그렇게 변형을 해도 보이지 않게 자신을 감출 수도 있는 반면 저주 받은 사탄은 그런 일이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그 차이일 것이다.

인간[아담] 역시 영물들과 같은 신령한 육체로 변형되어 있었으므로[에덴낙원에 들어온 후로] 역시 그런 조화(造化)가 가능한 몸이었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면, "자연계에 있을 때는 지금처럼 왜소한 육체이었다가 에덴낙원에 들어가서는 어마어마한 크기 즉 영물들과 직접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육체로 인간[아담]이 과연 변할 수 있었던가?" 할 것이나, 신령한 몸 자체가 그런 신축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성이 굉장한 것으로 보면 그리 어려운 질문일 수도 없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 몸을 확대시킨다 해도 이 자연계의 모든 육체의 크기에 한도가 있는 것처럼 그 세계에서도 역시 한도가 있을 것은 분명할 것이다. 즉 필요 이상으로 육체가 우람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탄의 몸집이 비대해진 것은 사탄이 그렇게 배로 기어 다니느라 너무 용을 쓰는 바람에 그러면서도 인간의 눈에는 띄지 않도록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에 그렇게 무리하게 움직이다보니 우리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말하면 '부어 오른 것'과 같은 것이 되어 병적으로 그리 된 것일까.

사탄이 인간의 눈에 띔으로써 덕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기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인생들은 자기의 모습을 봄으로 인해 비극적 현실을 절감하게 되고 구원을 더욱 앙망하게 될 것이니 자기의 속이고 시험하는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의 정체를 숨기기에 급급해온 터라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에덴낙원이 이 자연계인 것처럼 그리고 성경 창세기의 뱀은 자연계에 뱀으로서 사탄이 그 뱀을 통해서 말하고 행동한 것이라고 모두 믿게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명백히 그 "뱀"이 사탄이요 영계[에덴낙원]에서는 "용"의 형상으로 나타나 있음을 밝히고 있다[계 12:9/20:2/2:7]. 그럼에도 이를 믿지 않으니 어이 하리요. 성경이 읽기가 어려워서 오늘날까지 각종 이단이 생기고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아는 아이고 어는 어라고 밝히고 있건만 그 스스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일이 없고 하나님의 성령의 친히 계시해 주시는 것을 배우려 하지 않고 인위적인 교리만 수용하는 데에 급급해 왔으니 사탄이 그 마음 눈을 왕창 어둡게 하고 보지 못하도록 하니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육체'인지라 '영'으로서의 사탄 더군다나 이 세상 신으로 군림해 있는 상대에게 적수가 되지 못한다. 오직 성령으로만 악령 사탄을 이길 수 있는데 하나님의 성령을 떠나 있으니 속절없이 사탄의 밥이 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실상 이런 영계에 관한 일은 우리에게는 수박 겉 핥기다. 우리의 구원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시험하는 자의 그 정체를 알아보자는 뜻에서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영계에 속한 영물의 차이는 그 빠름에 있다 할까. 행동의 빠름만 아니라 머리 회전의 빠름. 지식 축적과 활용의 빠름, 그 활용과 응용 능력의 빠름 즉 오늘날 인간이 자랑하고 있는 그리고 날로 더욱 향상되고 있는 전산(電算) 속도와 같은 맥락이라 할까. 이런 말도,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주제넘은 것에 불과하다 할까. 오직 영계가 자연계와 대칭되는 위치에 있어 실존하는 세계인 것만 알지 그 이상은 우리의 지식 한계 밖이고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을 속여 죽음에 빠뜨린 죄로 저주 받은 사탄은 흙을 먹고 배로 기어 다니게 된다. 흙을 먹는다는 것은 자연계의 동물들처럼 영물들도 먹는 일이 있고 먹을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영물들이 일반적으로 먹는 것을 못먹고 그 대신 흙을 먹는 저주 받음이니 이 흙을 먹는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리고 저주 받기 전에는 자연계의 뱀처럼 배로 기어 다니지 않았던 사탄이 아담을 속임으로써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 다니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앞에서 대략 언급한 바 있다.

첫 사람 아담은 신령한 세계인 에덴낙원에 들어와 거기서 나는 신령한 식물로부터 나는 과일을 먹음으로써 그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될 수 있었다고 전제할 때, 사탄 역시 영물들 중의 하나로서 그 곳에서 나는 식물을 먹음으로써 자기의 신령한 몸을 가시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불가시적으로 만들기도 하는 등 조화를 부릴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부활하신 주님의 신령한 몸이 바로 그러하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이시다. 마지막 아담이시므로 첫 사람 아담의 위치에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해도 좋은 해석이 된다. 아담이 그 죽음의 대가를 다 지불하고 다시 살아났다면 그 몸은 당연히 범죄하기 이전의 그 신령한 몸으로 환원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령한 몸으로서의 부활인 것이다. 왜냐면 죽음의 대가를 치르기 전에는 죽은 자 곧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었음이다. 무릇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죽게 되어 있는 까닭에 "죽을 것이다" 하고 경고하신 것이다. 신령한 몸은 죽는 법이 없다. 영원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단지 그런 신령한 몸이 생명에 들어가지 못할 때는 생명으로서의 모든 낙과 희락, 평안을 상실함은 물론이고 그 반대[대칭, 상칭, 대립] 현상만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신령한 몸으로서의 죽음이다. 우리 인간들로 말하면, "둘째 사망"[계 2:11/20:6,14/21:8]이다. 그러나 아담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영계에 속한 영혼 또는 자연계에 애초 창조 당시에 속했던 몸과 나중에 변환하게 된 신령한 몸으로서의 이중 구조라는 특수성 때문에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환원되는 것으로서의 죽음이었던 것이다[롬 5:12].

사탄은 그 몸이 에덴낙원의 땅["ground"-영역, 우리말은 이를 구별하지 않고 그냥 "흙"("dust")으로 번역하고 있음]으로부터 신령한 몸으로 되어 나왔으므로 그 특징은 당연히 몸에서 광채가 나고 빛을 발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신령한 몸의 특질은 그렇다 하더라도 먹어야 자유자재로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데 정상적인 것을 먹지 못하고 그 대신 흙을 먹으니 먹는 낙이 없다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양상으로도[우리로 말하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 "흙"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우리가 영계 자체에 대한 지식이 없음이다. 그러나 어쨌든 "비정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 총체적인 결과로서의 하나가, 이 영물[사탄]이 인간의 눈에 뜨일 수밖에 없다는 그것이다. 상상상의 동물 또는 "영물"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세상 사람은 "해태"라는 것을 말하기도 하나 이것은 그 정체가 불명이다. 그러나 용(龍)만은 아주 친숙하게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이는 사탄이 그 자기 형체를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감출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냄이요 이 역시 배로 기어 다니는 것만 아니라 "흙"을 먹는 결과로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한 것이다.

용으로서의 모습은 감출 수 없었으나 사탄은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이므로 그 용이 바로 사탄이라는 사실만은 성경에 명백히 기록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능히 감추어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 증거는 지금까지 사탄이 에덴낙원의 그 "뱀"이요 계시록의 그 "큰 용"이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그렇게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이와 같이 엉뚱하게 믿는 것 이 자체가 참으로 희한한 일로서, 사탄의 실존과 활동을 역으로 충분히 충실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계시록에 있는 대로 하늘에 전쟁이 있어 천사들과 사탄 일당이 싸운다고 되어 있고 그 결과 사탄이 패퇴하여 하늘로부터 쫓겨난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과거 먹던 식물(植物)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니 말하자면 굶어죽는 것이 아니냐 하겠으나 이 지구상으로 추방당하는다는 것뿐이지 그들을 하나님께서 죽이시려는 목적은 없으니 에덴낙원의 식물을 먹지 못한다 해서 그 생명이 끊어지는 이른바 아사(餓死)하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영물들의 먹는 일은 이 자연계의 동식물처럼 생명과 직결되는 일은 없다고 단정해도 좋겠다. 그러나 하늘의 신령한 식물에서 나는 것을 먹지 못함으로써 그들의 몸을 감출 수도 있고 즉 보이지 않게도 할 수 있고 나타내기도 하는 등의 조화는 부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들이 신령한 식물(植物)을 먹이로 한다는 것은, 사람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식물로 주신다"[창 1:29] 하셨고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준다"[창 1:30] 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은 에덴낙원에서 나는 과일만 먹는 것이 아니고 자연계에서 나는 열매나 채소도 먹을 수 있는 존재였다고 하겠다. 부뢀하신 주님께서도 신령한 몸으로 계셨지만 우리가 먹는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신 사실에서도 확인된다[눅 24:43]. 그러나 주님은 이제 부활하셔서 아직 하늘에 오르시지도 않으셔서 땅에 그대로 계시는데 어째서 그렇게 사라지시기도 하고 나타나시기도 하는 등 자유자재로 하실 수 있느냐 할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신령한 몸으로 있던 육체가 자연계의 몸으로 되돌아가는]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연계에만 속한 육체로 환원되어 버렸지만 이제 주님의 부활로써 그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이 종료된 마당에, 다시 말해 그 선악과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된 지금에는 자연법칙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선악과를 먹기 직전 당시 아담의 그 상태대로의 육체의 모습을 띠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그 답이다. 이제 그런 능력을 계속적으로 유지하자면 에덴낙원의 그 신령한 식물의 열매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먹음으로써 육체의 힘을 나타내는 것과 같음이다.

그래서 하늘에서의 전쟁에서 패한 사탄 이하 악령들은 에덴낙원에서의 식물을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됨을 인하여 이제는 그로 말미암는 기력(氣力)이라 할까 생기(生氣)라 할까 하는 것을 제대로 갖출 수 없어, 그 몸을 감출 수가 없이 되었고 단지 빠르게 움직인다는 그 힘으로 일시 자취를 감출 수 있을 뿐이나 정상적으로 그 형태를 더 이상 숨길 수는 없으므로, 그 형태를 그대로 인간에게 노정(露呈)시키되 오직 스스로를 변형시킨 모습으로 즉 외계인 또는 외계인의 우주선 등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견이다. 어쨌든 현재의 그런 외계인 또는 UFO 등이 악령들의 형태 변환이라는 사실만은 확고하다.

그래서 사탄은 처음부터 그런 에덴낙원의 식물을 먹지 못하고 흙을 먹음을 인해 그 형태가 인간에게 드러나지지 않을 수 없는 "저주" 가운에 있었다고 할까. 그래서 자연계에는 실재하지 않으면서도 유일하게 소위 "영물(靈物. 지금 이 글에서 소개하는 바 천사들을 영물로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으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으로서)"로서의 용이라는 존재로 인간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다.

소위 "해태[본딧말로는 해치(??)로서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사자와 비슷하나 머리 가운데 뿔이 하나 있다는 상상의 동물로 국어사전에 정의되어 있음]"라는 영물은, 아마 사탄이 이와 같이 자기 정체가 드러나게 되니 자기 자신을 감추기 위해 "해태"라는 영물이 있는 듯이 그래서 "용"도 그런 영물의 일종이라는 뜻으로 인생들을 속일 목적으로 사탄 스스로가 인간에게 주입시킨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성경에서 자기를 가리켜 용이라고 밝힌데 대해서도, 세상에서 말하는 용이 사탄 자신이 아니라고 끝까지 인간을 속이기에 급급해온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성경에 그렇게 명백하게 사탄을 "용"이라 또는 "옛 뱀"이라고 밝혀 주고 있는데도 인간은 여전히 사탄을 용이 아닌 별개의 것으로만 알고 있고 성경에서 "용"이라 한 것은 단지 상징해서 표현한 것이라고만 알고 있으니 사탄이 얼마나 자기 정체를 가리고 숨기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겠다. 그렇게 마귀 사탄이 용으로서 이 지구 상공 위를 떠돌며 세상을 지배하는 이 세상 신으로 나돌아 다닌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인생들이 공포 속에 싸여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게 될 것이 아닌가. 바로 그런 점을 사탄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사탄이 바로 그 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과거와는 다르게 양상이 벌어지게 될 것이 아니냐 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은 역시 과거와 다르게 각종 관심을 빼앗을 노리개를 많이 만들어 둔 것이다. 이제는 TV에 넋을 빼앗기던 것은 옛 이야기고 컴퓨터보다도 "스마트 폰"에 점점 빠져들어간다고 한다. 다음은 이보다 더 한 그 무엇이 출현하여 완전히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사탄은 그런 따위의 염려는 숫제 하지 않아도 좋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런 간단한 사실조차도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제대로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오직 사탄의 장중에 사로잡혀 눈 뜬 장님 구실만 충실히 해온 것이다.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도 마귀 사탄을 그림으로 그려 보라 하면 타락한 천사라고만 여겨 날개 달린 시커먼 존재로만 그리지 용으로 표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천사는 날개가 없다. 천사[우리는 이를 영물 즉 영적 존재라고만 표현한다]와 그룹[cherub] 및 스랍[seraph]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날개는 이들만에게만 있다.

물론 천사도 사람 앞에서는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는 네피림을 생산할 때 악령들이 사람으로 나타나 그런 못된 짓을 하고는 다시 자기의 본 형태 즉 성경에 표현한 대로 "각종 들짐승"이나 "공중의 각종 새들" 중의 하나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뱀"이라고 했지만 영계의 영물로서 영계의 뱀이었고 실제는 용의 형상인 것처럼, 반드시 그 "각종 들짐승"이나 "공중의 각종 새"로서의 영물들의 형태가 자연계 동물들의 그 이름에 해당하는 그런 형태가 아닌 것이다.

성경에 "뱀"이라고 했지만 실제의 형태는 "용"이고 또한 "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처럼 직립보행(直立步行)이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저주를 받아 비로소 기게 된 것이다. 고로 천사는 날개가 없다. "들 짐승 또는 공중의 각종 날짐승"들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공중의 각종 새"라고 해서 날개가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스랍이나 그룹들에게 날개가 있는 것은 새처럼 공중을 날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번개처럼 움직이는 영물들인데, 자연계의 새들이라고 날개가 필요하겠는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로 그룹들의 설명에서 보듯이 그룹들의 날개는 용도가 전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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