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잡록(雜錄, miscellanea) (28)
---------------------------------------------------------------------------------------------------------------------------


§  진화론, 무신론의 허구성과 조잡성

동식물 특별히 동물은 암수 한 쌍이 애초 생성된 것이다. 이는 엄밀히 대칭을 이루는 것으로서 먼저 수컷이 나오고 그 대칭으로서 똑 같은 형태의 암컷이 나온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암컷은 반드시 수컷과 닮은꼴로 나타나야 한다. 수컷이 진화하여 암컷이 되지 않았고 암컷이 진화하여 수컷이 된 적도 없다. 수컷이 생성된 그 즉시 그와 똑같은 암컷 역시 생성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야 새끼들을 낳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것들이 언제 무슨 시간이 있어 진화를 하겠는가.

당장이라도 새끼를 낳아야 진화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벌 것이 아닌가. 새끼를 낳지 못하면 그 한 마리의 개나 닭이나 침팬지나 수억 년 간이나 살았다는 말인가. 그래서 진화했다는 말인가. 아니, 그럼 죽었다고 치자. 그러면 그 다음에 새끼 없이 또 우연의 법칙에 의해 똑 같은 침팬지가 생겨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자주 우연히 생겨났다면 왜 지금은 그렇게 생겨나지 못하는가! 생각할수록 엉망진창의 논리가 진화론이다.

논리도 아닌 것을 합리적인 이론이라고 신주 단지처럼 절대 진리인 양 지금까지 진화론을 떠받들어 왔으니 우리 인간이란 것도 알고 보면 무던히도 앞뒤가 막힌 석두(石頭)다. 암컷은 그러므로 진화가 아니라 그 즉석에서 다시 말해 수컷이 생기자마자 만들어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암컷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으면 수컷 역시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즉 창조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둘이 한꺼번에 새끼를 낳도록 한다는 사전(事前) 기획, 설계, 고안에 의해 그렇게 한 쌍이 생겨난 아니, 창조된 것이 아닌가!

사람만 아니고, 침팬지이면 침팬지 한 종류만 아니다. 무릇 번식이 필요한 모든 동식물이 그렇게 암수 둘씩 한 쌍으로 창조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단 한 종류라도 이상 설명처럼 되자면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질 수밖에 즉 창조될 수밖에 없는데 동식물의 종류가 이 지구 상에 얼마나 많은가. 가령 그 숫자가 억[億]이라면 억 차례나 그렇게 번번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고 우연히 생겨났다고 정신 이상자와 같은 소리를 할 것인가.

이래도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진화론과 같은 어린 애 소꿉장난 같은 시답잖고 창피한 논리를 붙들고, 인간들이여, 으스댈 작정인가!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요 지배자인 악령 사탄[Satan]이 인간을 휘어잡고 조종하는 것이 이 정도다. 인생은 절대로 돌대가리로 창조되지 않았다, 오직 이 세상 사탄이 강제로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조금만 시각을 달리 해서 생각하더라도 당장 그 허구성이 드러나는 것을 지금까지 150년간이나 그것도 수십 억이 이 지상에 살면서도 이런 각도로 생각할 줄 몰랐었다.

더 정확히 말해 생각하는 것이 차단 당했다는 이 사실 자체가 엄청난 발견이 아닌가!  사탄이 이토록 인간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지식이 아닌가! 인간의 이제까지의 모든 지식과 발견을 통틀어도 그 충격으로 말하면 이 한 가지 사실만 못하다 할 것이다. 이 정보를 성경은 벌써 수 천년 전부터 인간에게 제공하고 있건만 인간 스스로가 이 같이 사탄에게 노예가 되어 이 정보를 소화시킬 수 없었으니, 아아 이 참상이여!

그래서 성경은 사탄이 인간의 마음의 눈을 감기고 있다고 확언하고 있다[고후 4:4/행 26:18]. 눈을 뜨지 못하니 코 앞에 있는 것도 당장 알지를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눈을 가리개로 막고 있는 자가 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사탄을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가? 물론 인간 자체로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인간은 육체요 악령 사탄은 신이다.

오직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그 방법이 어떤 것이었던가. 사랑의 방법이다. 즉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심["gave Himself for me"]"[갈 2:20]으로써다. 그냥 내게 주셨다[gave me Himself, or gave Himself to me] 하는 것과 나를 위하여 주셨다는[gave Himself for me] 차이는 어떤 것인가? 별 차이가 없다 하겠으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나를 위하여 주신 데에는 나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셨다는 의미가 강력하게 내포되어 있음을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그 강도(强度)와 심도(深度)가 더해지는 의미가 흥건하게 묻어 있음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나를 위해 죽으신 사실 그대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와 하나되심을 인해 나는 자기 부인을 거뜬하게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그 어느 인간도 할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하나님이라 하시더라도 이 같은 방법이 아니고는 달리 내가 자기 부인할 수 있는 길을 터주실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자기 부인은 반드시 죽음을 전제한 것이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 부인은 내가 산 자가 되어 그 산 자로서 다시는 자기를 위하지 않는 즉 자기중심의 죄의 사슬을 끊는 것인데 이와 같은 살아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산 자로서의 자기 부인이 불가능함이다. 즉 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죽으심은 두 가지 의미다. 그 첫째로 이와 같은 죽어야 마땅한 과정 혹은 절차를 나를 위하여 친히 치르셨다는 것이다.

한번 하나님께서 "죽을 것이다" 하셨으면 거기에는 죽음밖에는 없다. 바로 이 죽음을 거쳐야 그래서 일단 처음 창조가 종결되어야 살든 죽든 다음 과정으로 연이어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창조의 종결이라 함은 첫 사람 아담을 영생하는 즉 결코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드셨음에도 스스로 범죄하여[롬 5:12] 죽음에 빠짐으로써 죽은 자가 되었으니 첫 창조[인간 창조]로서는 모든 것이 무위(無爲)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처음 창조는 죽음으로 헛되이 종말을 맞은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밖에 없고 죽으면 만사가 끝난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창조도 이런 식으로 종결이다. 이는 우리 인간의 사고방식대로 하면 실패작이나, 하나님 친히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하신 것은 아니니 하나님께는 실패는 아니지만 그 대신 부득불 새 창조가 대두된 것이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다행히 이로 인하여 증명된 것이 있으니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자신께서 친히 피조물이 되심과 더불어 우리와 같은 인간의 육체를 가지심으로 죽음의 고통도 불사하신 사랑이시다.

둘째는 그렇게 죽으신 사실 그대로 내 안에서 성령으로 임하시어 나와 하나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와 악에서 해방되는 결과를 달성하신 것이다. 왜냐면 내 자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이 죽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기정 사실로 확고히 되어 있는 고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 명분도 터전도 필요도 없게 된 까닭이다. 죄악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기 중심으로서 스스로 머리가 되겠다는 망상인데 그 '자기'가 죽어 땅에 묻혀 장사 지내져 끝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인은 죽어야 하는 [왜냐면 생명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든 피조물이 그 한 몸의 각 지체 역할에 있는데 자기중심이 되어 머리의 지시를 어김으로써 이 한 몸 체제에서 스스로 이탈하였으니 그것이 죽음일 수밖에 없다] 필연적인 결과를 이 죽음[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으로써 이루어 '처음 창조의 종결'을 완전히 이로써 매듭 짓고, 이제는 새 창조의 새 질서[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어 그리스도를 중심하는] 아래 있게 됨으로써 영생하는 자로서 다시 출생한 것이다.

그러면 이상 두 가지로써 내게 대한 즉 '나의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은 완료된 것인가. 아니다.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은 영원무궁한 것이니[하나님께서 한번 하신 일은 모두가 영원한 것뿐이다] 다시 말해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되심이다. 영원히 그렇게 되심이다.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았던 과거는 종료되고 이제는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를 위하시는 존재로서 삶의 양상이 완전히 탈바꿈된 것이다.

나를 지으신 이께서 나를 위하시니 내가 나를 위하던 것보다 얼마나 더 이상적으로 내가 위해질 것인가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과거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이나 과거나 영원히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위하심은 불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실 때는 애초 인간을 창조하시던 때처럼 행복한 삶으로서의 영생을 기준하여 위하심인데 애초의 의도가 인간의 범죄로 빗나가게 된 지금은 그렇게 못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원래의 의미대로 우리를 위하실 수는 없으니 참된 의미에서의 우리를 위하심이 될 수가 없음도 사실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생명이신데 우리 인간은 죽은 자로서 사망 가운데 있는 현금의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위해 죽음을 맛보실 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생명이신 하나님과는 영영 남남이 된다.

그러므로 이상 사실들을 종합하면, 이전 삶[실은 삶이 아니라 죽음]과는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양상의 생명의 영역에 진정 속하는 진짜 삶을 살게 되었으니, 아담이 범죄하기 전처럼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의 구조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애초 인간을 창조하시던 당시 의도하시던 그대로 회복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친히 이러한 새로운[이전과는 180도로 다르니 즉 자기중심을 버렸으니] 삶을 살 수 있는 영원한 바탕[권세 또는 능력]이 되어 주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다.

이렇게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심으로써 나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나는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자기 부인이 나로 하여금 사탄과의 전쟁에서 사탄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언하는 말을 인하여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계 12:11] 한 바와 같다. 나 자신을 더 이상 위하지 않으니 내가 죽든 말든 고난을 받든 말든 나의 소관사가 아니고 오직 나의 관심사는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니[요 4:34] 이 곧 내가 이 세상에 보내심 받은 목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보내심 받은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고후 5:15]. 주님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말씀 가운데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줄 것이다"[계 2:10] 하셨다. 생명의 면류관이니 말씀 그대로 영생이다. 이렇게 죽기까지 충성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시다. 왜냐면 이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사랑과 사랑은 복종으로 직결된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믿음의 핵심을 이루므로 자기 부인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어서 필요한 경우 육체의 죽음이나 이 세상에서 고생스러운 삶 자체를 개의치 않음이니, 사실은 이 세상에서의 인간고(人間苦) 자체가 죽음의 영역이지 생명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죽음 일변도이기는 하나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그와 같이 생명을 던져 어떠한 고난도 죽음도 개의치 않는 선명한 결의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중요한 것이다.

§  "너희가 죽었고"


우리가 구원을 받아 산 자가 되어 있는 현실이나 또 하나의 엄연한 현실은 이 세상이 죽은 자의 세계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친히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으로 세상에 오신 것과 맞물린다. 죄는 죽음과 직결되어 있다. 죄를 회개하면 다시 말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경우 더 다시 죄인이 아니나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불가불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음을 성경이 설명하고 있다[7:14-8:1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죄를 지을 수가 없다["he cannot sin"-요일 3:9]"는 정반대되는 사실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한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선입관이 성경을 믿는다는 거의 모든 이들의 의식 구조를 사로잡고 있는 현실로 인해서 "계속하여 죄를 지을 수 없다"["he cannot go on sinning"-NIV]고까지 그 본디의 의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하고 있으나 어느 쪽으로 알아듣든 "죄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는 공통이다. 죄가 무엇이냐,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함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이 "죄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요한의 선언을 표현을 달리하여,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은 것으로서, 때문에 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어 산 자가 되어 있는 이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고후 5:14,15]. 때문에 우리 중에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 가운데]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죽는 자가 없다"[롬 14:7-9]고 아주 단정하여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해서 그가 죄인은 아니었다[요 8:46/히 4:15]. 이는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다"[요 7:18] 하심과 같은 뜻이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으신 것과 같은 양상이라 친히 설명하신 것이다[20:21]. 다시 말해 무릇 보내심을 받은 자는 오로지 그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생명이다[4:34]. "먹을 양식"[:32,34]이라 하셨으니 '생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바울 사도 역시 요한 사도의 설명을 받아 "우리 중에 죄 짓는 자 곧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아무 거리낌도 없이 망설임도 없이 단정해버린 것이다. "죄를 지을 수가 없음"[요일 2:1,29/3:6-10/5:18/고전 15:33,34/벧전 4:1/히 2:14,15/요삼 1:11/롬 2:7,10]이다.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으므로 십자가에서 당신과 나 위해 죽으셨던 것이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음이다[요 1:29]. 그렇게 하심으로써 나의 죽음과 저주에 동참하심[갈 3:13] 즉 하나 되심으로써 함께 하심이었다.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신"[사 53:12] 것이다. 죄를 짓는 죄인이 아니시지만 죄인처럼 "죄인의 하나"가 되신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처럼 되시어 죽은 자의 하나가 되셨다는 뜻이다.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 때문이다.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인간의 죄로 인해 그리고 장래가 창창하여 스스로로는 아무 죽을 이유가 없는 '어린 양'이 상징하고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 앞 어린 양", 화목 제물로서의 역할이셨던 것이다.

'우리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의 그런 역할과 사업을 그대로 물려받아 계승하고 있는 '그 몸의 각 지체로서의 우리'의 현재 역할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산 자이지만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강제로 우리에게 지우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에서 자진 자발적으로 이 아름다운[상대의 죽음의 고통을 함께 함(나눔)으로써 그 상대를 살리려는] 뜻을 받듦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영생하는 자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죽었다"[골 3:3]고 한 것이다. 그리고 "너희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3]. 다시 말해 이 죽음의 세상,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 참으로 산 자의 삶이 개입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현재 이 세상을 관장하고 있는 것은 죽음의 질서다. 죽음을 겨울에 비하고 생명을 봄에다 견준다면 봄과 겨울이 함께 찾아들 수 없음과 같다.

겨울은 어디까지나 겨울이라야 하고 봄은 겨울 뒤에 찾아오는 것이므로 생명의 움트는 것이 차디찬 눈 속과 얼음에 싸여 있다 해도 그 생명의 싹이 한겨울 바깥으로 얼굴을 내미는 법은 없다. 모든 것이 모두 자기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구원의 날이고 은혜의 때이지만[고후 6:5] 생명의 때는 아닌 것이다. 사망의 한 때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히 2:14]가 이 세상을 관할하는 신(神) 곧 지배자가 되어 있지 않은가[고후 4:4/요 14:30]. 아직은 "맨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로서의 사망"[고전 15:26]이 멸해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로서의 낙을 누리는 등 삶의 본연의 자태를 나타낸다면 이 세상에서이겠는가. 그렇다면 사망의 권세를 가진 이 세상의 신(神) 사탄과의 한판 싸움이라도 붙어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어느 모로 보나 지금은 죽음의 때, 죽음의 세상으로서 생명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해야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있고 구원 받아 산 자로서의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에 눈 뜨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는 것이다[요 6:45]. 이 사실을 배우지 못하면 절대로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가 없다[:65].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과거와 같은 이 세상에서의 삶 즉 살고자 하고 남 밑지지 않게 살기 위한 일체의 욕구와 기대와 희망을 완전히 접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얻기 위해 자기 전 소유를 다 들여 그 밭을 사들인다는 것으로써 천국을 말씀하신 것이다[마 13:44-46].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때가 오기 전에는 그는 알거지처럼 되어 지내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망대 비유를 말씀하셨으니[눅 14:28-33] 즉 미리부터 이를 단단히 각오하고 나중에 마음을 바꾸게 되어 한번 결정한 일을 취소하거나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경고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을 제대로 바로 파악하여 죽은 자로서 시종일관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 부인을 하니까 이상 설명한 대로 죽음의 지금 현실을 바로 수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전처럼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이 그대로 있어 영생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미워하는 자라야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라 경계하신 것이다[요 12:25].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죽은 자로서 일관되게 나가는 것이 "미워함"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자기 부인을 하여 이상 설명과 같이 죽은 자로 이 세상에서 매사 임하는 것을 가리킴이다.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니까 종교인에게는 걸림 돌이요 세상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미련한 것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고전 1:18,23].

그래서 천국 가는 것이 좁은 길, 좁은 문인즉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다. 그리고 들어가려고 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 경고하셨다[눅 13:24]. 이유가 이상 밝힌 대로의 '이 세상을 사랑함"[요일 2:15]에 있는 것이다. 죽음의 세상인데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어찌 이 세상을 사랑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겠는가. 한 때의 고난을 못참고 못견딘다고 하여 감히 죽음의 길을 스스로 택하겠는가. 만고에 둘도 없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랴.
 

§  하나님을 위하는 것

범죄하지 않는 동기가 멸망에 이르게 되지나 않을까,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데에서 그치면 그것은 자기중심이다. 자기 부인은 처음부터 자기에 대한 관심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이면 탈 없겠지", "이것은 해도 무방하겠지" 하는 생각부터 아예 없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남남으로" 생각하지 않음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어렵게 이해해서는 안된다. 어렵다고 할 아무 것도 실상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으므로 그 뜻을 따라 서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힘을 합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 당연한 도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오늘날 이 지경으로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뿐이다. 그것이 무슨 특별히 어려운 것이 있어서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게도 난데 없이 탐욕을 부리다가 즉 자기 자신을 위하다가[위해 살다가] 이렇게 변을 만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충분히 경고를 주셨음에도 그 경고를 무시한 결과다.

따라서 현재의 모든 불행과 죽음과 고난, 일견 혼돈으로 보이는 일체의 사실은 하나님의 교육 차원이라 생각해도 된다. 즉 실지 체험이요 현장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악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내고 모두를 불행에 빠뜨리는지 등에 대한 모든 사실을 미리 체험하게 하심이다. 이는 인간에게만 국한하는 것이고 영물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아는 고로 그런 것이 필요치 않았다는 차이뿐이다. 알면서도 악령들은 스스로 그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간 교만의 결과인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은 그냥 그대로 주변의 영물들이 조언(助言, counsel)해주는 대로 매사 처리해 가면 되는데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나님처럼 자기 스스로 지혜를 얻어 일을 처리하겠다는 분수에 넘치는 것을 생각하고 격에 어울리지 않는 욕심에 충동된 것이다. 사탄이 그렇게 충동 질을 한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그 선악과를 보았을 때 그 선악과 과일이 지혜 있게 함 직하다고 느껴졌다고 했다[창 3:6].

그러므로 그 원인이 탐욕에 있으니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사 57:17]. 즉 자기 스스로 자기를 위하려 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고후 5:15/롬 14:7]. 그뿐이다. 그렇게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러면 그렇게 살면 되는데 왜 복잡하게 여러 소리가 많은가 할 것인가. 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는가[고후 5:15].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가 생명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살면 간단하다 싶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렇게 할 힘이 없으니, 힘만 있으면 그렇게 살면 간단한데 힘이 없다보니 속수무책이다. 왜 힘이 없는고 하니 너나없이 인간은 모두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인간 피조물로는 완전 폐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패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상과 같은 탐욕에 의해 망쳐놓은, 망가뜨려놓은 것이다.

자유 의지가 들어 그렇게 작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유 의지가 부정적인 의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니 사랑의 핵심이 자유 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 자유 의지로 좋은 쪽을 택하면 되는데 엉뚱하게도 나쁜 쪽을 택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다. 무엇이 좋고 나쁜가 하는 것은 에덴낙원에서 주변의 영물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아담에게 조언(助言)해주게 되어 있었다. 즉 보좌 역할을 해 주므로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조언자 중의 하나가 사악한 자기중심에서 꾀를 부려 거짓말을 함으로써 인간을 속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나쁜 쪽을 택하도록 부추긴 것이다. 그 나쁜 것이 인간 스스로 판단할 때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그런 정도였다. 인간이 몰라서 사탄의 그런 꾀에 넘어갔다면 죽음에는 이르더라도 저주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머리와 몸 관계에서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땅히 순응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영물들이 아담에게 제공하기로 되어 있는 그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 외의 일체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만은 아담 자신이 잘 알고 이를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대리자 격이 되어 만물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이라는 이 사악한 조언자는 조언한답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련된 것으로써 속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이라고 그럴 듯하게 꾸며댄 것이다.

아담 자신을 상대하여 속임수를 쓴 것이 아니라 영물들보다 나중에 창조되어 만만하게 보이는 여자에게 그런 수작을 부린 것이다. 이럴 경우 여자는 마땅히 먼저 남자에게 의논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먼저 선약과를 따 먹은 다음에 남자에게 오히려 먹기를 권고하게 된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다. 남자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눅 3:38].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시므로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고전 11:3]. 머리의 지시를 따라야 한 몸으로서의 몸의 [각 지체] 역할이다.

당시 남자[아담]는 또 여자와 한 몸[남자에게서 여자가 났으므로-고전 11:8]이 되어 있던 터라 여자가 이미 먹고 또 먹기를 권하는 바람에 그것이 유혹으로 작용하여 함께 먹어 버린 것이다. 여자의 탐욕에 동참한 셈이다. 이래서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이 사악한 사탄의 탐욕[요 8:44] 곧 자기중심에 빨려들어간 것이다. 이는 인간 스스로 탐심을 품었다는 것이니 변명할 여지가 없고 자기 탓이다. 사탄은 자기 죄로 그 보응을 받지만 인간 역시 자기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음이다.

이와 같이 첫 사람 아담 부부가 에덴낙원이라는 영계에 살면서 신령한 몸으로 지내다가 이 지경이 되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에 관한 한 첫 창조는 완전히 폐기 상태로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영혼이 있어 영적 존재이므로 당연히 영계에서 영원히 사는 구비 요건 속에서 사는 것인데, 영원히 살지 못하는 이 자연계로 전락해 버렸으니 즉 애초의 그 자연계의 흙으로 조성된 위치로 도로 돌아와 버렸으니 모든 것은 도로무공으로 끝나 버린 것이다.

인간[아담]이 처음부터 영계에 있지 않고 신령한 몸으로 지내지 않았다면 비로소 그 영계로 들어가 신령한 몸이 되는 과정을 따르면 되겠지만, 이미 그 과정을 거친 다음이므로 하나님의 원리원칙주의 그리고 일사부재리에 의해 다시는 그 일을 반복할 수 없고 그래서 영영 첫 창조는 망쳐 버린 것이다. 따라서 다시는 영계에 들어가 신령한 몸이 될 수 없으니까 "죽은 자"[마 8:22]이다. 산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죽은 자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당연히 영생을 하게 되어 있는데 영생을 못하니 죽음이다. 자연계 동물에게는 이런 상황이면 죽은 것이 아니고 산 것이며 정상이지만 인간은 영적 존재이므로 이 자연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의미함이다. 앞에서 힘이 없다고 했는데 바로 이 '산 자로서의 힘'을 말함이다. 살아 있어야 힘이 있는 것이지 죽은 자에게 무슨 힘이 있는가. 산 자로서 산 자의 일을 하고 산 자답게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살아 있는 자로서의 힘이 없다는 그 뜻이다.
다시 말해 앞에서 지적한 대로 탐욕을 부리지 않고 자기중심 즉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으면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도 영생하는 바탕 위에서[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원 목적이니까] 비로소 언급할 수 있는 일인데, 영생하지 못하고 죽은 자가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쳐도 영생하지 못하고 죽을 바에야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래서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한 죽은 것이다.

첫 창조가 그와 같이 망가졌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새로 창조하시는 일을 시작하시게 된다. 그 새 창조의 첫 시작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그래서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세상 오신 목적 즉 새 창조의 의미를 설명하시면서 사람이 다시 나지[출생하지] 않으면 영생할 수 없다 하셨다[요 3:3]. 새로 창조되는 것을 새로 난다는 말씀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왜냐면 나란 존재는 이미 창조되어 있는 상태이고 육으로 출생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새 창조, 다시 난다는 말이 통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면 즉 성령을 받아 모시게 되면 성령으로 출생한다는 말과 걸맞게 이제 '나'란 존재는 영구적으로 그리스도와 나, 이렇게 둘이 하나되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나'란 존재가 이제는 완전히 구조가 다르다. 전에는 나의 영혼 혼자였으나 이제는 나의 영과 더불어 성령[롬 8:16] 곧 그리스도의 영께서 아버지의 영과 함께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아담이 애초 이 자연계에 속한 흙으로 조성된 다음 그 안에 영혼이 있게 되는 것과 똑같은 과정이다. 다시 말해 그 방법대로 새 창조에서 '새 영혼'이 다시 내게 [나를 새 창조에서 '새 육체'로 간주하면] 임하시는 그대로다. 곧 성령이시다. 왜냐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제 나는 아무리 내 속에 영혼이 있어 영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하는 까닭이다[고전 15:50].

그리고 내가 '새 육체'가 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고 이 '역사적' 사실은 그리스도 친히 그와 같이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써 그리스도와 내가 문자 그대로 둘이 하나되어 있는 까닭이다. 성령께서 임하여 오심으로써 내 자신이 '새 육체'가 되고 '새 영혼'이 주입되는 일이 [아담의 코에 하나님 친히 생기(生氣, the breath of life, 내쉬시는 숨)를 불어넣으심으로써 아담의 영혼이 생긴 것처럼] '동시에' 이루어짐이다.

그래서 나의 지금 형태는 아담이 영혼 없이 육체만으로 이 자연계의 흙으로 조성된 채로 있었던 상태 바로 그것이다. 고로 이런 상태이면 애초 아담이 그 육체만이 조성되어[영혼 없이] 영생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그런 상태와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영생을 못하니 죽은 자이다. 인간은 원래부터 영생하는 자로 창조된 것인데 현재 죽게 되어 있는 처지이니 죽은 자다. 산 자라고 하면 영생하는 자를 가리킴인데 영생하는 자가 아닌 까닭이다.

고로 전의 상태 즉 지금까지의 나의 상황은 육으로 난 것이고 이제 성령을 영원하신 선물로 받아 모시니 다시 나는 것이요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요 3:6] 하신 그대로다. 이는 두 가지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라 해석해도 무방하다. 하나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하는 것과 그냥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하는 두 가지다. 즉 아담이 먼저 육체가 창조되었다. 이는 육으로 난 것이다. 그 다음에 그 코에 하나님 친히 생기[내쉬시는 숨]를 불어 넣으시니 영혼이 생기면서 영으로 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고로 이 말씀은 아담이 애초 창조된 사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 복음서에서 "성령을 받으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제자들 앞에서 처음 아담에게 숨을 내쉬시는 형용을 하신 것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여 기술하고 있다[요 20:22]. 이렇게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된 마당에서 그 에덴낙원에 해당되는 곳은 어디냐.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친히 내 안에 계시니 우선은 내 안에 천국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내 안에 에덴낙원이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거기에 하나님 계시는 것이 중요하지 그 지으신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것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어느 시대에서든 이렇게 하나님 친히 인간의 육체 안에 영원히 사시는 [영원하신 선물로서] 것을 인생이 일찍이 경험한 적이 있었던가. 에덴낙원보다 더 나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옛 선지자들도 그 안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역사하시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단순히 인생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해 능력을 나타내신 것이지, 인생들 속에 영원히 사신다[to dwell]는 것과는 의미가 아주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내 안에 계시고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신다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새 창조로서의 항구적인 그리고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니 새 피조물로서의 '나'란 구조 자체를 이루어 계시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 친히 나와 하나되심이니 앞에서 지적한 대로 나는 처음 창조로서는 완전 폐물이 되어 버린 까닭이다. 따라서 새 창조에서 새 피조물로 내가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주님 친히 나와 더불어 '나'란 존재의 한 구성 인자(因子)를 이루시고 나와 영원히 불가분의 관계에 계심이니 왜냐면 그 죽으심이 나 자신의 죽음이어야 하고 그 다시 살아나심 역시 나의 새 삶, 새 생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그 중요한 에덴낙원에서의 조언자 역할은 누가 하는 것인가? 에덴낙원에 올라가야 그런 시중 드는 것도 있을 터인데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그런 조언을 들을 수 있는가? 누가 그 역할을 하는고 하면 바로 나와 함께 사시는 주님 친히 그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좋고[선] 나쁜[악] 것을 분별하여 내게 알려 주심이다. 단 이는 반드시 내가 주님께 여쭙고 기도로 말씀 드리는 경우에 한하고 자동적으로 내게 알려 주시는 법은 없다.

왜냐면 인격 대 인격 간의 사랑의 교제로 하나되어 계심이지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되게 되어 있는 구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게 "지혜[Wisdom]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 1:30]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도 그리스도를 가리켜 예언하기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政事)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Wonderful], 모사(謀士, 策士, 助言者; Counselor)[어떤 영역에는 Wonderful(Wise) Counselor라고 한 묶음의 뜻으로도 되어 있음],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이라 할 것이다"[사 9:6] 한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님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you (will) guide me with your counsel(instruction)"-이 영역대로 하면 "교훈"이 아니라 각 상황과 형편에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지혜"를 가리킨다]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실 것이니 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습니까,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이 없습니다"[시 73:23,24] 하여 성령으로 미리 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으니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시키시는 대로 하면 만사 태평이다.

어느 길로 갈까, 어떻게 할까 조금도 당황하거나 주저하거나 할 일이 하나도 없다. 이제 나는 탐욕으로부터 완전 해방되고 오직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여 이 세상에서 부지런히 사람 건지는 일, 이 하나님의 사업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내가 이 일에 주인이므로 즉 주님과 "함께 된" 주인이므로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오직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이 시험 거리가 되는데 영원한 생명을 제대로 맛보며 누리려면 이 세상에서 죽음과 고난[고난은 죽음의 영역에 속한다]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진미를 먼저 맛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 받으신 고난을 순종하심을 배워 주님은 온전하게 되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죽음과 고난[고난은 죽음의 영역]에 자진해서 들어감은 한 몸됨의 이치를 따름이다. 고통도 함께 즐거움도 함께 함이니 한 몸의 특성이기 때문이다[고전 12:26/롬 12:15]. 구원의 상대를 이 생명의 한 몸 체제에 끌어들여 한 몸으로서의 지체를 삼는 일이 인생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산 자로서 그 죽은 자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그 죽은 자로 하여금 나의 산 자로서의 생명에 동참하게 함이다. 따라서 그를 살리려면 부득불 나 자신 그 죽은 자의 고난[죽음의]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생명의 일은 악과의 전쟁, 사탄과의 한판 싸움이요 승부 겨루기다. 전쟁이 이왕 났으니 그래서 원수가 생겨나고 싸울 상대 즉 적(敵)이 있고 피아(彼我) 구별이 분명하니 오직 이기는 것밖에 없고 최후 승리를 위하여 모든 고난은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측면도 동시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의 좋은 군인으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딤후 2:3]고 한 것이다. 이상적인 군인은 전투밖에 생각하는 것이 없고 전쟁에서의 승리밖에 아는 것이 없다. 고난이니 악조건이니 죽음이니 극한 상황이니 하는 따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다"(마 18:4) 하셨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좋은]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곧 주 하나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 올바른 것, 올바른 사람 삶의 도리)를 행하며 인자(仁慈, 한 몸의 이치에서 지체 역할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함께 지체된 이웃을 위해주는 것)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to walk with] 것이 아니냐?"[미 6:8] 하심과 같다.

겸손과 대칭되는 것이 교만이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타락한] 마음대로 하게 내어 버려 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을 행하게 하심"[롬 1:28]이라 함과 같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우리말 어느 현대어 번역에서처럼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을 계속 마음에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사랑한다면 그 반대가 되니 항상 생각하며 사모하고 그리워함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여도 계속 그 마음에 하나님 인식하기를 싫어 한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음이다. 원천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담 이후 인간들이 계속 생겨날 때 아담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시켜 주었고 또 그 지으신 만물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롬 1:20].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과의 관계는 엄마와 아기의 관계이다. 아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엄마를 쳐다보는 처지다.

이것은 자주 독립성과는 별개다. 아이가 아무리 자주 독립성이 뛰어나다 해도 어린 아이로 있는 동안은 부득불 그 엄마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음이다. 그 스스로는 무엇이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당장 급한 먹을 것을 장만하겠는가, 요리를 할 줄 알겠는가, 시장 볼 줄을 알겠는가. 우리 피조물과 조물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는 완벽하게 지으신 것이다. 결코 하나님만을 쳐다보게 만드시지 않았다.

피조물로서 어린 아이 단계가 있고 어른의 단계가 있어 어린 아이로부터 차츰 어른의 단계로 진화하도록 지으시지 않았다. 만든 즉시 아주 완전한 말하자면 '어른'의 모습인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바로 그랬다. 그러므로 이 어린 아이와 엄마와의 관계는 영원하다. 영원에 영원을 거듭한다 해서 그 피조물이 자라나 '어른'되는 수는 없다. 이미 '어른'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이니 피조물과 창조자[조물주]의 차이다.

이는 머리가 몸이 될 수 없고 머리가 몸이 아닌 것과 같다. 머리 역할이 다르고 몸의 구실이 다른 것이다. 머리는 머리가 할 수 있는 영역 및 능력으로 몸을 위하고 몸은 몸으로서 할 수 있는 분야로써 머리에게 충성하는 것이니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구조다.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몸의 각 지체로서의 역할이다. 그 역할은 다름아니라 오로지 머리의 지시대로 행하여 머리의 뜻에 따름이다.

어버이와 자식 관계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들인지라 어버지의 지성과 능력은 노쇠함에 따라 퇴락해 가고 자식들은 장성함에 따라 왕년의 어버이를 능가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존재로 창조된 우리 인생들은 그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항상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한 몸 체제로 운영되는 생명 체제인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도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시는 외아들 하나님"이시라고 요한은 표현한 것이다.

성경에서 "겸손하다", "자기를 낮춘다" 등의 표현이 바로 엄마를 쳐다보는 어린 아이의 자세다. 만은 반대로 자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세이다. 엄마를 떠나서 어린 아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건만 그런 어리석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하나님 아니라도 자기 스스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탄이 타락한 것도 바로 그런 교만이었던 것이다[딤전 3:6]. 우리의 자주 독립성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무조건 순종하는 데에 가치가 있다.

우리의 능력은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능력을 말함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유 의지를 말함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능히 순종할 수 있는 그 절대적 자유이다. 내가 좋아해서 하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을 아니하는 것이 자유가 아닌가. 머리와 몸으로 분화된 한 몸 체제에서 머리를 위함으로써 머리를 절대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삶의 지혜일진대 내가 이 진리를 사랑하여 사수(死守)하려는 자유야말로 최고 경지의 자주 독립성의 발현(發現)이 아닌가.

사탄처럼 이 세상 많은 사람도 이를 혼동하는 것이니,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께 예속(隸屬)하는 것이라 하고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뛰쳐나오는 것이 자주 독립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뛰쳐나온들 이 피조물 세계 전부가 하나님의 품 속인데 제가 어디로 가서 있겠다는 말인가. 한없이 어리석은 일이니, 교만이 그렇게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다. 한 몸 체제에서 뛰쳐나오면 손이 발이 몸에서 떨어져 나감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체의 역할이 되게 많은 피조물들을 만드셨는데 눈이 혹은 코가 몸 전체의 일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생각은 이웃들을 강제로 자기 발 아래 두겠다는 욕심이니 곧 머리가 되겠다는 망상이다. 그리 되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들도 그런 생각을 품는다고 가정할 때 제각기 머리가 되려는 판이므로 모두가 지배권, 주도적 지위 쟁탈전에 뛰어드는 것이다. 인간 생애를 철칙으로 관장하는 3운법칙이 엄연히 시행되어 통제하는 중에서도 인류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은 피 비린내 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니 그 참상이 어떨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다. 엄마 품에 있는 어린 아이이니 그래서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 즉 엄마의 품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신 것이다. 그 스스로 엄마의 품이 싫다고 뛰쳐나갔지 않았는가. 그것이 자기를 낮추지 않음 즉 교만이 아닌가. 그래서 사탄은 사탄이 된 것이다. 엄마의 힘을 빌어 어린 아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린 아이인 인간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고 부정하려 한다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엄마가 자기를 위해주는 범위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영역은 처음부터 엄마의 일이다.

인간 범죄도 사탄의 범죄처럼 이렇게 엄마의 품을 어린 아이가 떠난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떠나는 마음이 곧 타락하는 마음이요 이런 비정상적인 데에서 정상적인 행동이 나와질 수가 없어 이를 두고 로마서에 "상실한 마음"이라 하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신다"고 한 것이다. 정상을 떠났으니 비정상일 수밖에 없다. 빛을 떠났으니 어두움일 수밖에 없고 지혜를 떠났으니 어리석음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외침은 눈을 떠 어두움에서 빛으로, 이 세상 신[神, 현재는 그러하나 원래는 범죄 이전의 아담 아래 있던 자였다]인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의미인 것이다[행 26:18].

그리하여 "죄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 받는" 것이다. 거룩하게 됨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머리가 되시는]를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 이것은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의지로써 우리 스스로 그렇게 살 때 이루어지는 일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믿는다고 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우리더러 "거룩하라"[엡 4:24/벧전 1:15,16/히 12:14/고후 7:1]고 명령할 리가 없다.

엄마 품을 떠난 어린 아이로서의 망령된 행동을 회개하여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를 널리 용서하시는 것이고 그리고 거룩함은 이런 겸손한 자세로 시종일관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순종하여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이니 곧 엄마의 품을 떠나 자행자지(自行自之)하겠다는 마음이 아주 사라지는 것을 말함이다. 어린 아이로서 오직 할 줄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엄마의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뿐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없다. 적어도 엄마 "품 속에 있을" 때 그렇다. 자기 발로 걸어 다니는 아이를 엄마 품 속에 안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안고 있다는 것은 제 스스로 걸어 다니지 못한다는 그 의미다. 그러므로 완전히 엄마가 아이를 위해 대신함이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과 그 조물주이신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이다. 아무리 피조물을 완벽하게 '어른'으로 창조하셔도 그를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께는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그 품 속의 아기"인 것이다. 

그렇게 일부러 지으셔서가 아니라 조물주와 피조물 관계의 특성이 그러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바로 이 특성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사랑의 원리 곧 생명의 법칙이 나오는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신 순간부터 그 법질서가 설정되고 확립되어 세워진 것이다. 영원한 삶의 법이다. 존재 법칙이다. 창조와 그 창조된 것을 유지하는 보존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엄마 품 속의 어린 아이가 항상 의식하는 것은 그 엄마의 품인 것처럼 우리 피조물은 그 삶의 원리 즉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것 외에 달리 있을 수 없다.

어린 아기가 엄마 품 속에서 지내야만 하는 것처럼 이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고 순리이다. 바로 이런 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 창조하시는 것이다. 즉 죄 가운데 죽은 우리를 위해 일체를 대신하셨다. 죽어야 하는 것, 그리고 죽어도 다시 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 다시 살아나는 일까지, 그리고 승천하는 일 등등 모든 일을 하나에서 백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대신하신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셨으니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시다는 의미요 앞으로 영원히 그렇게 하시게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선물로서 그 아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미이다. 따라서 이렇게 일체의 것으로 나를 대신하시니 나는 당연히 나를 위해서 할 일, 할 수 있는 일,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고후 5:15] 됨이고,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이라 한 것이다.

마땅히 유의할 것은 나를 대신하셨다고 해서 나는 면제되고 제외되었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니 나와 하나되신 위치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므로 주님께서 나 위해 하신 모든 일에 나 역시 빠짐없이 동참했다는 의미다. 나 위해 죽으셨으므로 나 역시 함께 죽은 것이다[고후 5:14/롬 6:6]. 그렇지 않으면 나 위해 하신 일체의 일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나를 위하신다고 해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몫까지 다 챙겨 대신하신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시 말해 나의 자유 의지는 일절 간섭하시지 않는다. 즉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사랑해 주시고 이웃을 사랑해 주시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자신을 위하신다는 뜻이 되니 어불성설이다. 모든 행동은 그 목적이 반드시 있는 법이다. 목적 없는 행동은 없다. 따라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행동은 무효가 된다. 무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는"[롬 14:7] 것이 없다면 바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신"[:8] 목적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당연히 우리를 위하신 죽음의 실효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 구원이든 기약할 수가 없다. 때문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 구원을 이루라"[빌 2:12-이 말을 하면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빌 4:4) 했다] 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즉 항상 복종하지 않으면 구원의 실효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목적이 사라지니 그것을 목적했던 행동 역시 동시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양면이 다 갖추어져야 동전으로서의 가치가 있는데 한 쪽만 있고 다른 한 쪽이 비어 있다면 그것은 더 다시 화폐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래서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한다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는"[:7] 것이라고 바울은 당연한 어조로 주저없이 강력히 피력한 것이다. 더 이상 손볼 데가 없는 온전한 피조물로 만드시지 않고는 하나님께 창조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무엇이든 창조하시면 그 피조물을 위해 최대한의 일을 마치신 다음의 일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 1:31]고 성경에 기록될 리가 없다.

피조물 스스로가 자기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미리 완결하시고 앞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함에 일말의 차질도 생기지 않도록 만반의 대처를 취해 주심으로써 그 창조는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창조된 즉시로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정해 주신 그대로 따르는 것뿐이다.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그 스스로 이 정하신 것을 따라 그 작정하신 삶의 이치를 스스로 판단하여 올바르고 좋은 것이므로 자진해서 하게 하심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과의 차이다.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한시적 생명체들이 하는 일이다. 따라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도록 만드신 것이 역시 우리의 새 창조 즉 구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여전히 이전처럼 "육신"[롬 7:14-8:13] 곧 "죄의 몸"[6:6]에 얽매여 죄에게 종살이를 하도록 방치해놓으실 리가 없다는 뜻이다. 오직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죄 짓기로 즉 자기를 위해 사는 방향으로 나가고 이에서 "돌이킬"[행 3:26] 의사가 없을 때 한하는 일이다.

또는 처음부터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과 구원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인위적인 종교[기독교] 교리에만 의존하여 스스로 믿는 자 또는 구원 얻은 자로 자처해온 결과일 뿐이다. 고로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계신 적도 없으나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믿는 경우, 자기 속에 능력이 없으므로 이전과 같이 변함없이 죄에게 종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연 자기가 믿음에 있는지를 스스로를 점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고후 13:5].

믿음에 있다는 증거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데에 있다[롬 14:7-9/고후 5:15]. 그렇지 못하면 천하 어떤 경우에 있더라도 아직도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지 못함 즉 구원은 평생 받아본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각종 기적을 스스로 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난 것이 아님을 단정할 수 있다. 그와 같이 명백하게 알 수 있지 않는 한 그렇게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말했을 리가 없다. 

왜냐면 둘이 하나됨은 반드시 갑은 을의 소유, 을은 갑의 소유가 되어 갑은 을의 뜻대로 살고 을은 갑의 뜻대로 사는 것이 필수 요건이기 때문이다. 한 몸이 되는 것도 당연히 이 이치를 따름이니 즉 여자의 몸의 남자의 것이요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으로서 자기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자기 몸이 더 이상 자기의 소유가 아니요 서로 한 몸을 이루어 있는 상대방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이라 부름도 바로 그 뜻이다. 조물주 하나님의 대신하심이다.

즉 나의 주인님, 나를 소유하신 소유주로 인정하는 것이어서 절대로 주인님의 원하시는 대로 명령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미 주님은 그와 같이 나에게 자기 자신을 선물로서 영원히 주신 터이다. 바로 그 사실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신 것이다. 고로 이렇게 확증해주셨으니[롬 5:8] 우리는 그 본을 따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여 오직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 우리의 본분이요 생명인 것이다[고후 5:15/요 4:34].

회개는 바로 과거의 자기중심으로 살던 하나님께 대한 배신 행위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향후로는 주인으로 모시어 절대 복종하겠다는 언약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고로 그 당초의 약속대로 행하여 충실하는 것이 생사를 가름하게 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감히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한"[행 5] 것이 되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멸망밖에 없다[행 5:4].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 한번 그렇게 완벽하게 피조물을 위한 모든 조처를 하셨다고 그 후로는 피조물을 위하시는 일을 손놓으시는 일이 없다.

처음에 그렇게 하심은 나중에도 시종여일하게 피조물을 위하시는 역할을 계속하신다는 보증 또는 보장하심이 되는 것이다. 왜냐면 처음 그렇게 잘 이루어놓으셨는데 그것이 다시 어찌 되도록 즉 망쳐지도록 방관하시거나 포기하실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의 설명대로 나의 태도 여하에 따라 움직이신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즉 내가 30배의 열매를 낼 열심만 내면 그 30배만 결실하도록 하실 수밖에 없고 100배의 열매를 맺을 의기와 각오로 임할 때에야 그 목적대로 100배의 결실이 가능하도록 능력을 베푸시는 것이다.

전혀 열매를 맺을 의사가 없고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나가기를 선호할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도 어찌하실 도리는 없는 것이다. 억지로 열매를 맺도록 하실 리 없다. 그래서 그 경우 어떻게 되느냐. 그 열매 없는 자를 내치시고 제하여 버리시는 것이다[요 15:2]. 다시 말해 우리의 반응 여하에 따라 하나님께서도 반응하시는 것이다. 즉 본을 보이심을 따라 우리가 따르지 않으면 머리와 몸[의 각 지체]의 관계가 단절될 수밖에 없음이다.

엄마 품 속의 어린 아이는 그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밖에 없고 그것이 곧 자기를 위함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한다고 위해지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곧 순종하는 것이 자기를 위함이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 아기가 엄마에게 예속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엄마는 아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시키지도 않는다. 아기가 할 수 없는 것은 엄마가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이치라고 할 것도 없지만]는 알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180도로 다르게 인식하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이는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조물주와 피조물의 정상적인 관계['엄마'와 그 품 속의 '아기']를 인식 못하고 하나님을 마치 우리와 같은 일개 피조물처럼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마가 아이에게 무엇을 하라고 일러줄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가 아이를 위해 주는 바탕 위에서 아이가 하기를 바라는 엄마의 시키는 말이니 곧 명령인 것이다. 우리로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이요 율법이시다[고전 9:21]. 모세의 율법과 혼동하지 말 것이다.

만일 여기서 아이가 엄마의 시키는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아이를 위하는 엄마의 계획에 차질이 생김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사람이 양식을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 4:4]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곧 법이요 원리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되지만, 기본적으로 그 의미는 바로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구원 받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든 이치는 같다.

즉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시는 바탕 위에서 우리가 순종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이므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라는[빌 2:12] 경고도 하나님의 은혜의 바탕이고 토대이지 우리 스스로 우리 힘으로 즉 우리 자신이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는 개념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고 또 나머지가 있다면 그렇게 하시므로 우리는 당연히 그 시키시는 대로 행하는 것 곧 순종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드림" 곧 그 뜻대로 행함이요 그 일을 온전히 이룸이요 그를 위해 사는 것이다[요 4:34/고후 5:15/롬 14:7-9].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이웃을 위하시듯이 나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뜻을 행하여 그 위하시는 것을 내가 마땅히 위하는 것으로 수용함이니 곧 한 몸을 이루어 있는 내 이웃을 사랑하여 그에게 행함이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지 않는 이는 이 한 몸 체제 속에 있지 않으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내 이웃"은 아니다. 원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 바로 이 한 몸 체제에서 살도록 만드셨으나 인간 스스로 머리를 마다하고 자기중심으로 나갔고 지금은 하나님마저 절대 다수가 부정하고 있는 터이다.

이것이 '이웃 사랑'의 개념이니, 내 스스로 내 이웃이 좋아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다. 이것이 우리 모든 행동의 기준이요 그 정확한 이해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행할 때는 자기 이름으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요 이는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자기중심으로 흘러갈 여지가 없다. 이렇게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고후 5:15/롬 14:8] 것이 자기 부인의 개념이다.

이 세상에서 다 자기를 위하고 나를 위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이 영원한 삶의 원리를 배반하랴? 세상은 세상이고 나는 나이다. 내가 세상을 따라야 할 책무도 부채도 없다. 세상에서는 세상 식으로 살고 세상 아닌 천국에서는 천국 식으로 산다면 죄와 악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영원한 삶의 법칙은 영원히 변할 수 없다. 영원히 변해서는 안되는 것이 이 법질서다. 따라서 세상이든 천국이든 그 법질서를 지키면 지키는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그것은 영구적으로 지키지 않는 것일 따름이다.

오히려 제대로 지키는가를 시험해 보고 다루어 보기 위하여 세상이라는 이런 곳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종교처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나를 구원하려 하지 않는 것이 이 새 창조의 의미다. 즉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실상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 은혜" 하고 "믿음, 믿음" 하지만 이것이 은혜요 믿음의 개념인 것이다. 즉 죽었기 때문에 일절 아무 것도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이 은혜요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나를 위하여 죽으시니, 그 이후로 되어지는 것 모두가 다 나를 위하심이다. 바로 그 의미가 내게 선물을 주심이요, 그것도 영원하신 선물로서, 영원히 내 안에 그리스도 친히 계시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하셨던 그 모든 의미대로 내 안에 나의 영혼과 더불어 자리잡아 계시니 즉 나 자신의 영혼처럼 되어 계시니,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내 스스로가 직접 그 일을 한 것이 된다. 즉 죽었고, 부활했고, 승천했고, 현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음이다[엡 2:6]. 그리고 현재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성령 강림으로]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은혜"라 하고 "믿음"으로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새 창조다. 앞에서 어린 아이가 아무리 자주 독립성이 뛰어나도 엄마 품 속에 있는 한은 엄마가 그를 위해 줄 수밖에 없고 또 그 품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자주 독립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한 것처럼,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고 그것을 못하는 것으로 오해 착각할 것은 없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아니하는 것이다. 내 스스로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자유다. 자주이고 독립이다. 나는 원치 않는데 하기를 강요당하고 나는 원하는데 하지 말도록 강제되는 것이 그 반대인 속박과 부자유의 개념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원해서 하고 원치 않는 것을 아니하는데 그것이 어찌 자주 독립이 아닌가. 다시 말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좋은 줄 알아 그 좋은 대로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는 것보다 나를 지으시고 나를 너무나도 잘 아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위하시는 것이지, 내가 나를 위하면 너무나 서툴러 오히려 나를 망치는 결과가 되므로 내 스스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고 따라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은 천하 없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엇을 내가 원하는 것이며 무엇을 내가 원치 않는 것인지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내가 죄에게 아직 종속되어 있는 모양 그대로 남겨 두시면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하셨다 하겠는가. 하나님의 일이 그 정도인 줄 아는가? 하나님의 창조가 그 정도로 빈약한 줄 아는가? 그렇게 하나님을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으니 당신의 구원도 그릇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으니 당신의 구원도 아주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어찌 구원이 되겠는가.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나 여전히 죄에게 종 노릇을 하는 일은 변함이 없고 그래서 죽고 난 다음에야 죄에게서 해방된다는 그런 따위의 것이 복음일 수가 없다.

이것은 자신의 탐욕을 합리화하기 위한 가장 비열한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성경에는 두 눈 씻고 보아도 없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다시는 자기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데[고후 5:15] 무슨 그런 잠꼬대 같은 말이 나올 수 있는가! 살리는 것 즉 생명을 주는 것은 몸과 머리로서 구성된 한 몸으로서의 올바른 행위이니 곧 머리를 위하고 머리의 지시를 따라 다른 지체들을 위하되 절대로 자기 자신은 위하지 않음이다.

불의한 자들은 자기는 물론 온 세상을 망치고 있되 그 사실을 그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우선 먹기에 곶감이 달다고 자기 탐욕이 그 눈을 가리고 있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머리도 무시하고 자기와 함께 된 몸의 각 지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이웃을 위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혼자만 살고 보겠다는 망상에 젖어 있으니 이는 머리와 몸의 체제로 되어 있는 생명에서 이탈하는 짓이다.

당장 손해 나는 것에만 전전긍긍하는 것이 나원균[원균을 원균 일개인의 소행으로 돌리지 않고 나도 역시 원균과 하나도 다를 바 없고 나를 원균의 당시 위치에 대입해놓으면 영락없이 원균의 행동 그대로였을 것이라는 뜻에서 "내가 원균이요" 하는 의미로 "나"원균이라 하는 것이다]의 태도요, 그런 당장의 손해에도 불구하고 한 몸 의식 즉 공동체 의식의 신념대로 사는 것을 인간의 진정한 가치라고 인정한 이공(李公) 순신(舜臣)은 스스로 그런 개인적인 재난을 감수하고 나간 것이다.

그런 인간 정신은 일대 위기에서나 그 빛을 제대로 드러내게 되므로 그런 위기가 자주 있지 않는 한, 세상에 그냥 묻혀 버려 그 고고(孤高)한 가치가 영원히 잊혀진 채로 깔려버려 그 위로 무심한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냥 굴러가는 것뿐이어서 이런 진귀한 역사적 교훈을 만나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순신 정신'이라 하여 이 역사적 교훈을 국가적 자산으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머리를 모신 지체들 각 부분인 것이다. 한 몸으로서의 한 신경 한 혈맥으로서의 역할은 내 안에 그리고 우리 각자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분히 수행되고 있는 터이다. 이보다 더 완벽한 한 몸됨의 구조는 없다. 이 세상 삶에서 사람 삶의 도리를 행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천국에서 그런 사람 도리를 하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요한 사도의 경고가 이를 입증한다[요일 4:20].

그런 사람들은 가차없이 걸러내실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영원 세세를 두고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 보임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는 큰 일에 충성하고 작은 일에 그렇지 못하면 큰 일에서도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구원에만 이르면 즉 천국에만 가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지 여부를 이 세상에서 보시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천국에 이르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주인 의식으로 스스로 앞장 서서 이 사람 사는 도리를 충실히 이행해 나가는지 여부를 살피려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증거를 나타내 보이지 못하는 이는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님을 그 스스로 증명함이다. 그런 상태가 되지 않으려면 순종하기를 힘쓸 것이다. 사도들은 힘쓰라고 애쓰라 경고하고 주님께서도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엄히 경계하셨는데 어째서 당신은 그 힘쓴다는 것을 복음과는 다른 그 무엇으로 이해하는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이런 사랑의 힘씀과 애씀을 "자력으로 구원 얻으려는 종교행위"로 착각하는 이는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성경을 새로 바르게 읽어야 한다. 성경에서 순종을 강조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 구원(your own salvation)을 이루라"[빌 2:12] 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필자는 "선구자[先驅者]"라고 부르고 있다. 사람 삶의 도리를 알고 그대로 실천하는데서 남보다 앞장 섰다는 그런 의미로 인식되기를 바람에서다.

이런 선구자는 말밖에 없는 입만 가지고 사는 사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과거 일제 강점 탄압 시절 민족의 선구자로서 허허 벌판 북녘 간도 땅을 종횡으로 누비며 독립운동한 사람들을 우리는 그렇게 부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기 부인을 하여 자기중심으로 나가지 말아서 "육신대로 살지"[롬 8:13] 않도록 극력 조심하라는 모든 성경의 경고는 이와 같은 사람 삶의 도리를 다하라는 그 의미밖에 아무 것도 없다. 사람 삶의 도리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나타나고 그 효험도 발휘되는 것이지 달리 어디서 나타낸단 말인가.

좋은 환경보다 그와는 반대로 이런 여의치 못한 환경과 조건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그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행하면 죽인다 하고 모든 핍박과 탄압을 가해오지만 단지 그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불법, 불의를 미워하기 때문에[히 1:9] 결단코 한사코 그런 불법과 불의에 동참하지 않을 바로 그 때가 중요하고 값진 것이라 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이 그런 것을 다루어보는 무대이기 때문에 시험하는 자 사탄의 활동도 시한부로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천국에서 자기 부인을 하며 육신대로 살지 않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무조건 삶의 쾌락을 자아 올리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모든 사람이 바로 그렇게 살아 한 몸으로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거기는 시험하는 자도 없다. 도대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자가 없다. 하나님이 계시지만 결단코 우리 위에 군림해 계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면 육신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제대로 분간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고로 하나님께서 손으로 가리키는 곳은 오직 이 세상 그리고 현재 이 시점(時點)이다. 여기서 육신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과 원수되지 않아야[롬 8:7] 참으로 그가 구원 받은 사람이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책사, 모사이시다. 왜 주님께 구하지 않는가? 왜 주님을 의식하지 않는가. 혼자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이 세상 살고자 함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함인데 주님의 일을 한다면서 주님께 일일이 여쭈어야지 왜 혼자 할 수 있는 듯이 하는가. 자동적으로 주님의 지혜가 내게 적용되는 구조라면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 경고하겠는가. 원수 악령들과 싸우는 마당인데 어찌 감히 독불장군으로 혼자서 싸우겠다고 나대는 것인가.

이는 전쟁중임을 의식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치열한 전투 현상에서는 아무도 혼자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얼마나 마음 든든한 조언자(助言者)이신데 그렇게 주님을 홀대하다시피 하여 종일 주님을 의식함이 이다지도 드문가? 아무리 해도 안된다 하지 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렇게 항상 주님께 기도하고 그 인도를 바라고 따르는 습관을 기어코 이루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라. 포기하면 안된다. 포기할 성질의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는 자기 생명을 포기함과 같은 것이다.

성경은 그런 경고로 차 있다. 야곱은 그 열 아들들이 요셉이 죽었다고 하며 제시하는 증거물을 받아들고 그들의 속임수를 그냥 믿고 주님께 기도하지 않았다. 여호수아도 기브온 주민이 속임수를 써서 왔을 때도 그들의 거짓된 각종 증거를 그냥 그대로 믿고 주님께 기도하지 않았다. 특별히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이 경고를 내리고 있다. "주님께 기도하지 않았다"고 책망한 것이다[수 9:14]. 전쟁할 때에는 반드시 주님께 여쭙고 그 인도를 받아 승리를 거듭하던 다윗도 그렇지 못한 즉 전쟁이 아닌 때에는 기도하지 않은 것이다.

그 마음 속에 사탄이 그런 충동 질을 했는데도 기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상당한 혹독한 보응을 받은 것이다. 즉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計數)하게 했다"[대상 21:1]는 것이 그 대목이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있으므로 이스라엘 병력이 과연 얼마만큼 되는가 하고 그 숫자를 세어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어 보라고 부하에게 명한 것이니, 요압이 다윗의 이 "미친" 마음을 제지하려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다윗은 유부녀 밧세바를 불러들여 일을 저질렀다[삼하 11:2]. 저지르고는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충실한 부하였던 그 남편을 죽게 만들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었다. 그러는 동안 한번도 다윗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선지자 나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 그 앞에서 나타날 때까지도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있었다. 전쟁에는 매번 전투에 하나님께 기도하던 습관이 그 무대와 장면을 한번 바꾸자 이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앞서 강조한 대로 생과 사를 가름 짓는 기도하는 습관이다. 그 외의 것은 참작할 필요가 없다. 이런 다윗의 범죄는 모세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은혜 시대에 있으므로 당시는 어린 아이였을 때라면 지금은 성장한 어른의 시대이다. 어른이 되어 어린 아이 짓을 하고 응석 부리면 그런 꼴불견도 없고 때로는 치명적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잊고 찾지 않은,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은 대가로 나타나는 결과는 오늘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똑같은 비중으로 큰 경고가 되고 있다. 두드러진 예만 들어도 이 정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고 말씀은 엄중하다.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으니 그 날 수는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렘 2:32].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라", "메시아 예수님을 믿으라" 하지 않았다. "회개하라" 했으니 즉 "돌이켜 악함을 버리라"[행 3:26] 한 것이다. 믿은 결과가 회개함이기 때문이다. 회개했으니 이제부터는 당연히 하나님의 모든 뜻에 복종하고 사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내가 맡은 분량을 따라 충실히 이행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받는 일을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심을 받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이다[요 20:21,22].

빌립보 간수[jailor]에게 바울과 실라가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할 때도[행 16:31] 복종을 강조한 것이니 그냥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지 않고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한 것이다. 주인으로 모실 때는 나의 절대적인 복종을 약속하는 것이요 이것이 없으면 믿는 것이 아니니 즉 그리스도를 절대 복종의 대상으로서의 주인님 즉 나의 소유주임을 믿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그 뜻대로 행하지 않았을 때 멸망의 자식이 됨을 주님은 강조하여 가르치신 것이다[마 7:21/25:45]. 그들은 다 그리스도를 알고 있고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터이지만 주님이라 부르는 말 그대로 복종하는 주인님으로 평소 모시지 않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않을 때 주님의 부인하심을 받는 것이다[눅 12:8,9/마 10:32/딤후 2:1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즉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심도 같은 뜻이다[눅 9:62].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 얻는 믿음은 그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라고 한 것인데 이 말씀이 그다지도 어려워 이런 경고를 하는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제외시키려고 했을 정도였던가. 얼마나 성경의 복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성경이 아닌 사람이 가르치는 교훈을 성경이라 착각하고 있었는지 알 만하다. 믿음 없이 사람이 행함으로만 절대로 구원 얻지 못한다. 동시에 행함이 없이 믿음으로만 역시 절대로 구원 얻지 못한다. 믿음 이전에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행함 즉 복종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써 진정 행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 하는 것이요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심이다. 그래서 믿으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회개하라"[행 17:30]고 하나님은 세상에 대하여 명령하신 것이다. 물론 회개는 단순한 행함 즉 복종만을 의미함은 아니다. 사랑에서 우러나는 자진자발적인 순종이니 하나님의 일을 나의 일,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는 순조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받으심이 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이다[롬 5:8]. 이 사랑을 알고 믿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복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한 몸으로서의 삶의 원리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 한 것은 사람 삶이란 것이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한 몸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인간고(人間苦)의 세상에서 이 세상을 사랑하여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 산다는 것은 삶의 낙을 추구하는 데에 있지 고통을 자취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다. 그래서 고난으로부터 멀리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생명으로부터 멀리 하려 한다는 뜻이 되므로 죽음의 재앙만이 있을 것임이다. 한 몸이니까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게 되는"(고전 12:26) 바로 그런 이치다.

§ 내 고향 천국

천국은 내 본향[고향]이니, 천국에서는 모두 신령한 몸이 되는 영계이므로 첫 사람 아담이 신령한 몸이 되어 있다가 범죄하여 이 자연계에 예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경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곧 어버이가 되심 역시 이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