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 (9)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한다"[눅 22:28,29] 하신 것은 이 천년 통치 기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이스라엘 12지파는 따로 구별되는 일은 없습니다. 상징적인 의미로만 남습니다[계 21:12].

적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인류는 거의 다 사라지고[왜냐면 모든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이마나 오른손에 받아 있을 것이므로-계 20:4]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미 그 전에 순절을 당하여 없을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살아 남을 사람들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가운데 극소수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들이 자녀를 낳고 하여 천년 수(壽)를 하게 된다는 그런 뜻이 됩니다. 열두 사도들만 아니라, 이스라엘에 속하든 이방인에 속하든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골 1:24] 고난을 받아 죽은 사람들은 그 때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됩니다[딤후 2:7].

때문에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룰 것"[눅 21:32]이라 하신 대로, 그 때 곧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과 구별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다스리고 있는 이 세상을 "이 세대[this generation]"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나라"[:31]라고도 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 후의 천국 곧 하늘 나라와 구별되는 대목이기는 하나 역시 그 나라도 하나님 나라임에는 마찬가지입니다. 둘을 혼동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눅 17:21]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니 "천국에 들어가기"[마 7:21] 전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이 제대로 가닥을 잡아가면서 읽어야 하는 대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성경을 친근히 하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알아지게 되는 것이니 문제는 될 것이 없습니다.

생명-죄 짓지 않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고후 5:15]. 다시 말해 우리 위해 죽으심 즉 구원하심은 우리를 살리시려 함입니다. 따라서 이제 정상적으로 사는 것은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에 있습니다. 즉 머리와 몸의 관계를 이루어 모든 피조물이 한 몸을 이루어 사는 것이 최대의 행복을 기약할 수 있는 삶의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기에 그렇습니다.

다시는 나 자신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순수하게 나 자신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 즉 내 자신이 그대로 행하고 행하지 않는데 따라 정해지는 것이니 하면 하는 것이고 아니하면 아니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살면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안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산 자가 되어 있어도 내 스스로 나를 위해 살아 죽음의 길을 택하면 그 선택대로 죽음에 이를 것은 필지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구원을 기계적인 구원, 자동적으로 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인간에게 그 어떤 자유든 허락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도 범죄했다고 해서 죽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완전히 자유를 박탈당한 그저 하나의 기계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태를 좋아할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기계되기를 자임하고 자청하는 양상이기 자가당착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내가 또다시 나 자신을 위해 살게 되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므로 죽는 길입니다. 그래서 “네 자신을 구원하라,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는 당연합니다[딤전 4:16/빌 2:12]. 만일 이것이 강제로 되는 것이라면 또는 기계적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라면 즉 내가 그렇게 하기 위하여 내 편에서의 결심과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되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이라면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얼마든지 나 자신을 위해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원래부터 하나님 정하신 삶[영생]이라는 것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니 한 몸의 체제에서야 가능한 삶이기에 반드시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 위해 살고 따라서 그 지시대로 행하여 함께 지체된 이웃들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체제가 인간[아담]의 범죄로 깨어진 결과 우리 모두가 죽은 자가 되어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와 같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우리 각자를 다시 살리셔서 이왕의 그 영원한 삶의 법칙 즉 한 몸 구조를 다시금 이루어 있는 체제에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도록[고후 5:15] 우리 각자를 새로 만드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모든 장치를 마련해 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완벽한 장치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시지 않았다면 도저히 이런 일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능해진 것이니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의 몫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이 기계적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결심과 의지에 좌우되는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믿어야 구원되고, 이 믿음은 회개하는 것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어" 감입니다. 죄는 나를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불법이고 불의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선(善, 좋은 것)이고 의(義) 곧 올바름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영원히 나의 생명이 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골 3:3,4].

내 생명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나 자신이 아닙니다. 과거 알지 못할 때는 나 자신인 줄 착각하여 나 자신을 중심하여 위주로 하고 그 본위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런 미망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즉 내가 내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당연히 옳고 좋은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당연히 죽음이니 나쁘고[惡] 옳지 못한[不義]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논리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항상 생명이므로 의로운 것 즉 올바른 것이요 좋은 것입니다. 생명에 어긋나는 것은 언제나 죄(罪), 악, 불의, 불법(不法)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그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일을 하는데 누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억지로 막아보아야 또 그런 자해, 자멸 행위를 시도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왜냐면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여 그대로 행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분명 자살 행위이건만 자기는 그것이 좋아서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래서 범죄자가 되어 멸망의 운명에 처해진 것이고 아담이 그래서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선례를 통해 확실한 하나님의 의지를 읽게 됩니다. 즉 그들의 본을 따르면 확실하게 죽음이니 이는 철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니 항상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여 땅의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골 3:1-4].

경고는 우리의 자유 의지로 그 반대 방향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기 때문에 나오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강조한 대로 경고가 경고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인이 되고 구원 받은 증거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죽음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생명인 줄 알아 그 아는 대로 행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믿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죄 많고 악한 세상이니까 여기에서 삶의 낙을 누린다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고, 그래서 믿음 하나로써 사람들이 구원됨을 기뻐하시고 이 믿음은 곧바로 사랑에서 우러나는 순종과["사랑으로써 역사(役事)하는 믿음"이니까-갈 5:6]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것이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로 치시는 뜻이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죽지 않고 영생하게 하시는 데에만 있지 않고 더 근본적인 데에 있음을 밝히어 나타내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늘날 국가간의 원조에서 빈궁에 처한 나라 사람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은 어려울 때마다 양곡을 배급하여 허기를 채워 주는 데에만 있지 않고 식량 증산을 위한 제대로 된 농업 기술과 방법을 가르쳐 스스로 자립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데에 있음과 같은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도 영생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고 삶을 행복하게 하는데 있으며 일부만 행복하게 사는 데에 있지 않고 모든 인생들이 너 나 차별없이 똑같이 공평공정하게 행복되게 사는데 있으니, 그 방법으로는 한 몸 구조에서 사는 것 이상 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그 방법이 최고임을 가르쳐 그 가르쳐 준 대로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 무엇보다 바라시는 것이니 이것이 그 가장 중요한 첫째 가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살되 올바르고[義] 선(善)하게 살도록 즉 애초 우리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살기를 바라셔서, 이것을 바로 하나님의 율법, 계명, 명령, 지시, 말씀으로서 인생들에게 내리신 것이요 이것을 삶[생명]의 법질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복종을 원하시고 선을 행함과 의를 행함이 믿음의 결과가 되어 마땅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이 있는 자는 영생으로 보답하시고[롬 2:7,10] 그렇지 않는 경우 하나님의 분노와 환난과 곤고로 보응될 수밖에 없습니다[:8,9]. 그러므로 가장 중요하고 제일 첫째로 원하시는 이 의미를 따라,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 세상 삶을 사랑하여 생명의 낙을 즐기려 하지 않고 오직 올바르게 사는 것으로서 생명의 구원의 핵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즉 믿음에 따라 당연히 나타나져야 할 복종의 행함이 과연 나타나 결실을 하느냐 하는 것부터 먼저 따지고 가장 우선적으로 그 제대로 된 열매를 찾으시는 것이니, 따라서 그런 열매가 없을 때는 영생도 사실상 필요가 없게 되는 당연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삶과 사랑의 법질서를 지킨 영물들은 거룩한 천사들로 남아 있고 그 나머지 즉 법질서대로 따르지 않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모든 악령들은 영원한 멸망을 앞두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들도 이 시험하는 무대로서의 세상에서 의인과 악인으로 분류되고 있는 현재의 실정에 비추어,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니 이 두려워하고 떤다는 것은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도 두렵고 떨림으로 임했습니다[고전 2:2-5]. 따라서 이렇게 가르치고 이런 자세였던 바울이므로 그 자신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 나간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 인도로 그의 서신에서 보는 바와 같은 각종 심각한 경고를 말한 것입니다. 때문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다"[엡 5:18] 하는 것도 그런 경고의 일례입니다. 술에 "충만하여" 천지를 분간 못하고 세월아 가거라 오거라 하고 시간을 보낼 절대로 그런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자기 생사를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순간들이 오늘 이 세상에서의 하루 하루입니다.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가름 짓는다는 이 단 한 가지 사실만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도 이 세상의 모든 시간들을 절대로 그런 식으로는 그 누구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피조물이라면 하나님의 손에 자기 운명이 달려 있다는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시간을 허비합니다. 아니면 스스로 자기 길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그런 영원한 세계는 없고 단지 이 세상으로 한정된다는 미련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때문에 아무쪼록 즐겁게 살다가 끝내자는 것으로 [실상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조종되어] 일관하기 때문에 모두 성경의 절박하고도 심각한 경고와는 전혀 무관하게 행동하는 것이니 실은 이 자체가 엄청난 비극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다시 이에 대한 적절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즉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먹을 것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너희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상속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히 12:16,17] 했습니다.

이렇게 전제한 후, 그림자로서의 의미가 되어 있는 모세 시대와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그 실체가 되어 있는]의 시대를 비교하여 오늘 이 시대가 더욱 엄중함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즉 모세 시대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검은 구름과 흑암(黑暗)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18,19] 등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어,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했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할 것이라 하신 명령을 저들이 견디지 못하여, 그 보이는 바가 그렇듯이 무서운 것이어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했음"[:20,21]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시대는, 시온산,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 무수(無數)한 천사들의 희락(喜樂)의 총회(總會),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장자(長子)들의 교회, 만민의 심판자[the Judge]이신 하나님,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새 언약의 중보(仲保, Mediator)이신 예수님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22-24(NIV)]의 시대이므로, 모세 시대에 "땅에서 경고한 자를 거역한 저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히 12:25] 하여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25]는 엄중한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지만 이제는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게 되어 있는"[:26] 시대로서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永存)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과 변동될 것을 말함임], 때문에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함"[:26-28]을 강조하고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29]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고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거니와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으로써 멸망이 그 결말"[3:18,19]임을 경고하면서도 동시에 같은 편지에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고 강조하였으니, 이는 산 자[구원 받음으로써]로서의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영원히 사는 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명의 기쁨을 말한 것입니다. 더 다시는 우리가 죽은 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산 자이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을 합니다. 죽은 자로 있는 동안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시험을 받아 아담처럼 얼마든지 죽을 수가 있고, 스스로의 자유 선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기타 악령들처럼 얼마든지 영원한 멸망에 들어갈 수가 있으니 당연히 두려워하고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고는 "죽은 자"[마 8:22]에게는 전연 해당되지를 않습니다.

그와 같이 성경에서 경고하는 대로 두렵고 떪으로써 "조심하면"[고전 10:12] 되는 것이지 성경이 그 이상으로 달리 무슨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 이상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든가 전전긍긍해 한다든지 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역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됨"[마 18:3]으로써 천국에 들어가는 자세입니다. 성경에서 지시하는 그대로 "항상 복종하기를"[빌 2:12] 힘쓰고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힘쓰면"[고후 5:9] 그래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면"[히 12:28] 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쁘게 해 주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모두 행함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라고 야고보서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만 아니라 바울, 베드로 등 모두가 같은 내용과 어조로 경고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으로서 가시화(可視化)하고 인격화(人格化)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핀셋 또는 젓가락으로 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명료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생명이다, 무엇이 죽음이다 하고 얼마든지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고 지적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단지 그렇게 믿을 수 있을 때 그렇다는 것이고 믿지 못하면 불행히도 그렇지 못합니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어느 끝이 어디에 가 붙어 있는지 종잡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이 세상 살고자 하는 마음의 고집이 죽어라 하고 말씀을 액면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탓입니다.

그러므로 한사코 자기를 위하지 말고 자기를 위해 살지 말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의 골자입니다. 길이 분명히 보여졌으니 길로만 가고 길 아닌 것은 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분명히 길인 줄 알았으면서도 그 길을 벗어나는 일이 실제 가능합니다. 중도에 아담의 마음이 변할 줄이야 자기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 예상할 수 없다는 점에 우리가 “두려워하고 떨어야”[롬 11:20/빌 2:12/] 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선 줄로 안 즉시 넘어질까 조심하지[고전 10:12] 않는 한 그렇게 됩니다.

죽은 자로서의 우리 육체에 그리스도 친히 임하여 오심으로써 우리 각자가 다시 출생하니까[요 3:3]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면 생명[영생]이 있고 안계시면 없습니다[요일 5:12/롬 6:23]. 말하자면 우리 생명이 인격화되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계시니까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일은 일절 없고 순수하게 사람과 사람 관계로서 사랑의 사귐의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써 인격화, 가시화되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돌릴 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은혜이고 단지 믿기만 하면 되는 것도, 결코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것이 아니니 왜냐면 우리 각자 스스로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어도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요 3:16] 하는 것이니, 이 뜻이 중요합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신뢰하고 사랑하고 교제하는[사귀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정 사실을 믿는 것이라면 자동적이고 기계적이라 할 수도 있으나 ‘한 사람’을 믿는 것이라고[요 3:16] 명백히 하신 이상 모든 문제는 나의 사랑의 사귐[교제]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은 항상 능동성을 띠고 적극적이고 주동적이므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주인 의식입니다. 내 스스로 좋아서[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요 그런 만큼 일의 한도가 없습니다. 하고 또 하고 끝을 모르는 것이 모든 사랑의 특징입니다. 사랑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사랑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 자신을 바치는[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15:13]. 다시 말해 나 자신이 내게 머물러 있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상대에게 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나를 사랑하여 자신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므로 나 역시 주님을 사랑하여 나 자신을 바치는[드리는] 것이 나의 믿음의 의미임을 천명한 것입니다[갈 2:20]. 베이컨[1561-1626]이 “자연은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에게만 정복당한다”는 말을 했는데, 사랑이 바로 그와 같고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이 양면성의 원리는 모든 일에 두루 통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 자연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면 자연은 반드시 인간에게 그 앙갚음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 한 몸으로 존재하는 존립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 창조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창조를 하실 때는 바로 이 한 몸의 원리를 따라 존재하고 창성(昌盛)하도록 하신 것이고, 우리의 구원으로서의 새 창조도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심으로써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머리와 몸은 대칭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머리가 되시고 아들은 몸이 되십니다. 영혼과 육체 관계도 그렇고 전체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 역시 머리와 몸의 관계입니다. 또는 신랑[그리스도]과 신부[교회]와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피로[이 피는 나 위해 흘리신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의 죽으심을 의미하므로] 나를 사심으로써 내게 자신을 주셨습니다. 또는 내게 자신을 주심으로써 즉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그 흘리신 피로 나를 사들이시고 자기 소유로 삼으신 것입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강조한 대로 이는 기계적인 것이 아닙니다. 개인 대 개인, 인격 대 인격 간의 관계로서 자발적인 의사 즉 자기 의지로 선택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나를 강제로 또는 나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소유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가 주님께 나 자신을 드릴 때에만 한해서 나를 소유하시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 주님의 것, 주님의 소유가 되어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려는 의지가 없는 한 나 역시 주님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선물로 받아 구원을 향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은 주님을 선물로 받음입니다. 그래서 나의 소유, 나의 것이 되시기 때문에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고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이 내가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 되어 있음으로써 나의 구원이 되어 있습니다[엡 2:6]. 그의 생명이 내 것이므로 내게 영생이 있다는 것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옯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양면성 혹은 동시성(同時性)을 항상 명심할 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양면성에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말로써 바울은 이방인에게 전도한 것입니다[행 17:30]. 회개하지 않고는 죄 용서도 없고 성령도 받지 못합니다[행 2:38/3:19]. 회개는 순종하겠다는 다짐, 결의 그리고 약속인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위해 살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고후 5:15] 데에서만 가능합니다.

주님을 내가 부인하면 나도 주님이 부인하시지 않을 수 없는[딤후 2:12/눅 12:8,9/마 10:32] 이런 양면성은 당연히 이 세상에서만 적용됩니다. 아직 마지막 심판 때가 되지 않아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불 못이라는 양면성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 세상은 시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영물들은 그런 시험을 거쳤으므로 거룩한 천사들은 영원히 거룩한 천사들로 남게 되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하여 악령들은 영원히 악령들로서 영원한 유황 불 못에서 지내게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거기는 세세토록 올라가는 고난의 연기가 있다고 했습니다[계 14:11].

지금은 인간의 차례입니다. 당시 영물들이 그렇게 양분되어 갈라진 것처럼 우리 인생들도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과 의인으로 영원히 나누어지게 됩니다. 일단 나누어진 다음에는 다시는 변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이런 시험도 없고 걸러내고 솎아내는 작업도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작업 현장이 이 세상이므로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린다면서 정신없이 지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의 일입니까. 어리석은 일입니까.

요즘 천국에 갔다 왔다고 말하는 한 아이의 소감이 책으로 엮어져 나와 많은 사람이 읽고 있다는데, 그런 사건이 생기기 전에는 자기의 죽은 누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다가 거기서 그 죽은 누나라는 영에게서 얻어 들은 모든 정보가 그런 사건이 일어난 후 실제 알아본 결과 사실과 일치하게 확인되었다고 해서 그가 다녀 온 그 소위 “천국”이 진실이었다고 선전이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인생들을 속일 능력이 있습니다.

과거에도 이런 유사한 짓들을 악령들은 많이 자행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속임수라면 왜 하나님께서 이를 방치해 두시느냐 하면, 방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 아래 되어지는 일들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한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요 “진리를 사랑하지 아니하여 구원 얻지 못할” 사람이 그 속임수의 상대가 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시는 것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9-12] 한 그대로입니다. 앞에서 악한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갖가지 함정, 올무, 덫이 있다고 밝힌 바와 같은 내용입니다. 즉 심판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속임수입니다. 오직 구원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되는 것이요, 그 외로는 그 어떤 것이든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이며 속임수로서 무조건 방해 공작임을 아는 것도 “구원에 이르는 지혜”[딤후 3:15]입니다.

§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이 왔습니다. 범죄하지 않았다면 그는 영생하는 몸이었습니다[롬 5:12/고전 15:21]. 그래서 죽은 인간[아담]이 죽음의 비극적 실상을 알아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범죄하지[범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일체의 것] 않을 거에요” 하고 슬피 울며[아담이 울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인간의 모든 비통과 불행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이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다시는 범죄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원리원칙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거든. 원리원칙을 어기고 내 맘대로 너를 용서할 수는 없어. 너 역시 원리원칙을 어기고 네 죽을 일을 스스로 벌어들였으므로 모든 것은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야. 너를 용서하고 너를 다시 영원히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너와 같이 되어 너와 하나 됨으로써, 이 원리원칙을 지켜 어기지 않도록 한 후에 너를 용서하는 길밖에 없어. 그러므로 내가 너처럼 저주 받은 몸으로 죽어야 하고 그 고통을 다 받아야 돼. 네가 진정으로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면, 그렇게 약속하면 내가 비록 죽음의 고통을 받는 한이 나더라도 너를 위해 그렇게 해 줄 용의가 있어. 그렇게 약속하겠어? 그러면 기다려”.

때가 되자 이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되셔서 우리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하신 대로 모든 것을 이제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약속을 지킬 차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자신이 엮어 입은 무화과 잎을 벗겨 버리시고 피 묻은 양[자연계에 속한 동물로서의]의 가죽을 입히신 것은 바로 이 피로 세운 언약(言約, 약속)이신 것입니다. 이를 상징하여 나타내고 다시 확인한 것이 모세 율법에서의 "피로 세우신 옛 언약"입니다[히 9:20].

이는 상징적인 것으로서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신 바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해 붓는 것”[눅 22:20]이라 하신 것을 나타냅니다. 고로 우리의 구원은 “새 언약”입니다. 어디까지나 약속의 성격을 지닙니다. 약속은 쌍방이 다 이행해야 효력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구원은 선물의 특성을 지닙니다.


즉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임하여 오셔서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시는 것이니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를 영원히 구성하시는 구성 인자(因子)가 되어 계시는 것입니다. 즉 나의 영혼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어 계십니다. 이는 우리가 인간 육체가 되어 사람으로 태어날 때 부모의 육체를 선물 받고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구원이 선물이라 하는 뜻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을 받아 모심 즉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모심이 구원입니다. 사람을 새로 창조하시고 다시 출생하게 하심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새로 창조하신다면 모든 인간 전부를 다 새로 창조하셔야 하지 않느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처음부터 우리의 구원 즉 새 창조는 약속으로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약속은 개별적이므로 이 약속에 대해 관심이 없을 때는 당연히 제외됩니다. 즉 이와 같이 약속하는 자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구원입니다.

새 창조가 아닌 처음 창조에서는 약속으로서 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처음 창조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잘 따를 줄로 기대하시고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리라 예상해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상하신 것과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미리 조종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경우 전자에 속하지 후자와는 무관합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친히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창 6:6] 함으로써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구원 받을 자, 구원 받지 못할 자를 구분해서 정하시고 미리 택하셨다는 깔벵의 주장은 이 성경 대목부터 부정하고 믿지 않은 불신의 결과입니다. 이와 같은 성경에 대한 무지 무식에서는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공연히 혼돈만 조장합니다. 한번 그르치면 모든 것에도 온당한 것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첫 단추 잘못 끼우면 모두가 글러집니다.

미리 택하심은 “미리 아심”[foreknowledge-벧전 1:2/롬 8:29/11:2]에서 정해집니다. 그 “미리 아심”은 확실히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단지 예상하는 것도 다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 미리 택하시고 정하시는 것은 미리 아시는 그 사람이 자기 믿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아무 장애가 없도록 그런 장애를 치우시는 데에 목적이 있지, 하나님 친히 그 사람을 믿도록 직접 조처하시는 것은 아니니 그렇게 되면 그것은 간섭, 강제가 되므로 미리 아신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의미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순종할 줄로 예상하시고 만드신 것이 악령들의 경우 완전히 빗나간 것입니다. 또 그렇게 빗나갈 것이라고 미리 아셨던 그 짐작이 빗나가기를 바라셨지만 그 짐작하신 것이 적중하였다는 그런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물들 중에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빗나가는 자가 생기고 인간도 처음부터 빗나간 것입니다. 고로 사람 만드셨음을 한탄하셨으므로 같은 일을 되풀이하실 리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그 “선물”을 다 주시지 않는 이유입니다. “회개해야”[행 2:38] 구원이 되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때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으라” 즉 “믿으라” 하지 않고 “회개하라”[17:30]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만 구원 얻게 됩니다. 믿는 자에 한정한 것입니다. 믿는 것에는 회개가 반드시 포함되고 회개 없으면 죄 용서가 되지 않고 죄 용서되지 않은 바탕에서는 성령을 받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2:38].

회개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범죄를 회개하는 것이므로 범죄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바로 이 약속을 끝까지 지키라는 말 외의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약속인 만큼 약속대로 하는 자에 한하여 구원입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히 10:36]이라 하였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 한해서 영생을 주신다”는 대목과 상통합니다[롬 2:7,10]. 영생은 그래서 약속입니다[요일 2:25/약 1:12/2:5]. 이리하여 주님은 나의 것[그래서 주님은 선물-요 4:10/행 2:38] 나는 주님의 것이니 나를 그 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행 20:28/계 5:9/]. 그러므로 주님은 나를 위하시고 나는 주님을 위하는 것이니 주님 위함이 곧 순종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 5:9] 함은 지당합니다.

성령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만 주시는[행 5:32] 선물이십니다[2:38]. 그리스도 친히 그 영으로 오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 짓는 것은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도 말씀대로 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순종하게 되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되 “항상 복종함”[빌 2:12]으로써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순종할 의사가 없고 여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회개를 해야 죄 용서가 되는데[행 2:38] 이 회개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명백해지고 애매 모호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고후 2:17] 것은 모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렇게 과거와는 달리 강력히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이방인[그리스인]에게 바울이 전도하면서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으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셔서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정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행 17:30,31] 함과 같습니다.

과거에는 회개가 무의미했던 것은 순종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이전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사망의 몸”[롬 7:24] 또는 “죄의 몸”[6:6]을 언급한 바 있는데 바로 그 요인을 말한 것입니다. 이 사망의 몸은, “죄와 사망의 법”[8:2]이 그 악명 높은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그 힘의 근원이요 온상(溫床)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나의 “옛 사람”이 죽음으로 인하여 “멸해진”[6:6] 즉 무기력화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의 구원 자체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사귐[교제]에 있는 관계로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것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해야 정확합니다. 사랑에는 그 어떤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것’이 존재할 수 없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와 사망의 몸의 무기력화하게 되는 것도 온전히 우리의 믿음에 달린 것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기계적인 것과는 상극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교류이기 때문입니다. 의지와 의지의 상호 맞바꿈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은혜”다, 그래서 “선물”이다, “값없이 받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등의 표현을 오해하는 이가 많은데, 오해하는 이유가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굴러오는 흥부의 박 덩이, 복 덩이처럼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박 덩이 복 덩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으로서의 복 덩이는 '사람'이십니다. 물건도 사랑해야 내가 가까이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또 사랑은 ‘한번 사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속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 사람’을 말합니다. 내게 영생이 되시고 죄를 이기는 능력이 되시고 나로 구원이 되게 하시는 한 사람 그리스도를 가리킴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사랑하여 항구적으로 사랑의 교제 속에 있어야 하며, 그 주체적인[‘나’라는 측면에서 보면] 원동력은 전적으로 내게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이 사랑을 버리면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버리는 것이 됨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미 그 ‘사람’으로서의 한 평생을 통하여 나 위해 자신을 영구적으로 주심으로써 확증하신 터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의 차례로서 내가 나의 사랑을 확증해야 하는 순서입니다. 즉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는 것이 바로 그 증명이 됩니다[롬 14:7-9].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중에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해 죽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단정, 아주 단언해 버린 것입니다[:7]. 오늘날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과는 하늘과 땅 차입니다. 바울이 말한 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고후 11:4]을 믿고 있는 결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약 3년간 가르치시다가 사람들이, 시기하여[막 15:10] 억지로 죄로 얽어 로마법에 의해 극형에 처해지게 하니,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면, 주님께서 세상을 악하다고 증언하시니까 세상의 미움을 받으실 수밖에 없습니다[요 7:7]. 그러나 유월절 희생 양 곧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유대인들이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그 날 그 시간에 때 맞추어[“해 질 때”-출 12:6] 돌아가신 것입니다. 유월절 희생 양이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상징한 것이므로 그 시각에 맞추어 돌아가시도록 빈 틈 없이 조정, 조절된 결과임은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종교를 보아도 교주(敎主)의 죽음 자체를 구원으로 삼는 일은 없습니다. 장수(長壽)를 하면서 그 생존 기간 열심히 포교(布敎)를 해도 세상에서 종교로 살아남을까 여부가 미지수라 할 것인데 하물며 일찌감치 죽어 없어져 버렸다면 그것은 여간 낭패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모르는 세상 사람의 눈으로 얼핏 보아도 색다른 것이고 특이한 것이어서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때문에 너무나 기이하다 할 일이요,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하신 말씀과 더불어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죽음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스스로 깨달을 만도 합니다. 이런 지식이 없어도 현장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로마 백부장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고 깊이 수긍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어느 세상 종교를 보아도 그 종교를 전파하는 시초에 그렇게 가짜, 사이비가 설쳐댄 적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다른 복음”, “다른 예수”라 하여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 할 정도로 이같이 놀랄 만큼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예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밝히는 대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과 활동을 그만큼 현실적으로 입증하는 강력한 사례요 그 증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관심 있게 눈여겨본다면 누구라도 이상과 같은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는 터인데도 관심을 가질 생각조차 아니하니 어찌 합니까.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에 있습니다. 창조이기 때문에 은혜라 하는 것이며 믿기만 하면 된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므로 우리 피조물로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단독 행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로의 변화이므로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새로 존재함입니다. 구원되는 내가 바로 그 새 창조의 대상이므로 그러면 내가 어떻게 변화하기에 전에는 없었고 지금은 존재하는 그런 상태인가 하면, 이전에는 나 홀로였으나 지금은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곧 “한 영으로 합하여”[고전 6:17] 둘이 하나로서 존재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즉 나의 구원은 내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되는 그 하나만으로 또는 하나님의 법정(法廷)에서 나를 의롭다고 선포하는 그런 따위로[그런 설명과 비슷한 것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을 영원하신 선물로 받아 모시는 사실에서 입증되듯이 “성령으로 사는 것이요 성령으로 행하는 것”[갈 5:25]을 말합니다. 즉 내가 아버지와 아들과 사귀는[교제] 데에 있습니다[요일 1:3].

육신대로 살면 죽게 되어 있으나 죽지 않고 사는[구원 받은] 것은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기 때문입니다[롬 8:13].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아들인 것 곧 구원 받은 것이니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됨에 있기 때문입니다[:14]. 아들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는 것이니 성령 곧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5]. 그래서 성령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을 증언하시는 것을 가리켜 “우리 영으로 더불어”[:16] 하신다 하였으니 이는 성령께서 내 영과 함께 즉 그리스도께서 그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심을 그와 같이 표현한 것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증으로 주셨다는 것은[고후 1:22/5:5]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을 때까지 기한부로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영원히 계시는 성령”[요 14:16]께서 그러한 보증의 역할도 하심을 뜻합니다. 왜냐면 나의 구원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는 그 이치를 따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심으로 구원하심이니, 아버지를 보면 아들을 보는 것이 됨이요 아들을 보면 그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이심과 같이[요 14:9/15:24], 나 역시 그리스도와 불가분으로서 그리스도를 보면 나를 보는 것이 되고 나를 보면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바울 되기 전]이 교회를 핍박할 때 “왜 나의 교회[혹은, 나의 제자들]를 핍박하느냐” 하시지 않고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내가 생명[영생]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요[요일 5:11] 그래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12] 하였습니다. 나의 구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장사 지내지고 그리하여 함께 다시 살아나 함께 하늘에 올라 함께 영광의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도와 나의 하나됨이 나의 구원이니, 어떤 생명[영생]이라는 특이한 무엇을 “엣다, 받아라” 하고 주시는 것도 아니고 생명 책에 내 이름이 일단 기록되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을 말함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는 상태를 기록한 것이 나의 생명 책 녹명(錄名)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 책에 기록되는 것도 언제든지 여차하면 지워질 수 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계 3:5/출 32:32].

왜냐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삶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된 것을 내 스스로 깨뜨리면 그 와해된 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 생명 책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는 결과인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 지내졌으므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내가 십자가에 죽은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기 때문이니 곧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으로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써 현실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즉 피 흘리심으로 이루어진 사실로서, 이 피로 세워진 “새 언약”[고전 11:25]을 따름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새 언약을 따르는 것인데 이 새 언약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옛 언약과 같은 성질을 지니는 것이므로 “새” 언약이라 합니다. 옛 언약의 어떤 점과 공통이냐 하면 말 그대로 약속인 것이니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여 지키는 경우에 그 피가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출 24:7].

당연히 새 언약 역시 하나님의 말씀 곧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자에 한해서 효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옛 죄에서 나를 깨끗하게 하심입니다. 비로소 죄 용서가 됩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려는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죄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죄 그대로 있고 죽음 가운데 있고 구원이 없습니다. 내가 현재 순종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앞으로 순종하겠다는 약속이 회개입니다.

말 그대로 새 “언약(言約)”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9] 성령의 선물은 순종하는 자들이 그 대상입니다[행 5:32]. 그리고 무릇 약속은 지키는 것이 그 핵심이므로 만일 지키지 않는 경우 약속 파기가 됩니다. 고로 나 자신의 구원을 필연적으로 내 스스로 이루는 의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빌 2:12]. 약속은 내가 지키는 것이요 나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나는 너의 것, 너는 나의 것’이라는 사랑의 약속입니다. ‘나는 네 것이니 너를 위하고 너는 내 것이니 나를 위한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위해 살고 너는 나를 위해 산다’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신다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을 내게 주신 사실로써 확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향후 영원토록 살겠다는 약속 위에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이룩하신 모든 것이 효험이 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처음 믿을 때의 회개를 이 약속대로 순종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간주하심이니 왜냐면 약속은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에 그 다짐과 결심을 액면대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애초의 약속대로 하지 않을 때는 주님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나 위하신 모든 공로가 내게는 무효가 될뿐더러 주님을 속였다는 단죄를 첨가시키는 의미까지 됩니다.

애초 그렇게 단죄하실 것도 없이 그런 실속 없는 약속은 주님께서 처음부터 받아들이시지 않음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아무리 세례 받고 자기는 구원 받았다고 공언해도 실제 구원 받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약속도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경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초의 결심대로 나가지 않고 중도에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생명의 근원이 이 마음을 지키는 여하에 달려 있다 하는 것입니다[잠 4:23]. ‘너는 나를 위해 사는 나의 것이고 나는 너를 위해 사는 너의 것’이라는 사실을 표현하여 “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아버지 계신다”는 말씀과 동일하여,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 되시는 이치로 나도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가리켜 또한 “내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 않고 나와 함께 계시는” 사실을 명백히 하셨습니다[요 8:29].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함께 계셔서 아버지의 일을 아들을 통해 하신 것처럼, 주님 역시 나를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주님 친히 나를 통해 자기 일을 이 세상에서 하시는 것입니다[20:21].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고후 6:1].

다시 말해 그리스도로 보아서는 자기 안에 아버지 사셔서 아버지 친히 그 일을 하시는 것이고 그리스도 자신께서 사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 이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에서 다시는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으로서[고후 5:15]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갈 2:20] 함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방해 요인인 과거의 나 곧 “옛 사람”은 십자가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어 이미 장사 지내진 것이어서 다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믿음 안에서만 실제 그렇다는 것이므로 믿음을 내가 중도에 버리는 경우 이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되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왜냐면 내가 믿음 안에 있지 않으면 내가 더 다시는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하게 되므로 더 이상 그리스도와 하나가 아닌즉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실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이 현상을 성경은 명백히 설명하여,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발로 밟는 것이라 하였고 그래서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분명히 밝혔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의 원수지간(怨?之間)을 내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런 사실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나 가상적으로 말한 것 즉 경고를 위한 경고"라는 말을 하지만, 이런 소리 역시 말의 혼탁이고 혼잡입니다. 세상에서도 이런 말의 혼잡을 용납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이런 것을 용인하실 리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명확히 구별됩니다. 따라서 이 사실이 뚜렷해져야 우리의 구원 역시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서로 정비례합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구별이 희미해지면 구원도 당연히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방해 요소가 “옛 사람”인데 그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이제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와의 하나 관계를 이루어 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그리스도 안에는 내가 살고 있는 "새 사람"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그 경계가 뚜렷하고 애매 모호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시 출생하고[요 3:3] 성령으로 나고[:5] 새로 창조되어[고후 5:17] “새 생명”[롬 6:4] 가운데 사는 것이 아주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연이어 말하기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20]이라 했습니다. 즉 내 안에 사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이 믿음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사시고 나를 오로지 위하시는 사실을 내가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그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내가 사는 것 즉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해 사시는 것이 되어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시는 의미가 되어 있음이니,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내게 주신” 것을 믿는 믿음이 원동력이 되어 즉 능력이 되어 나도 나 위해 살지 않고 주님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서 영원히 생존하게 됩니다. “옛 사람”은 나 혼자 사는 사람 그리고 삶이었고, “새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사는 삶, 둘이 함께 사는 삶이요 그것이 현재의 ‘나’라는 존재입니다. 영원히 이렇게 '둘로서 하나 되어' 사는 ‘사람’이 나는 되어 있습니다. 하나로서 살지만 실제는 둘로서의 내용으로 사는 삶이니 곧 그리스도와 나입니다. 즉 나는 그리스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나 위해 사시는 구조입니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임마뉴엘”[immanuel,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 또 사람되신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아들된 우리,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된 나]이라 하였습니다. 내 안의 성령으로 그렇게 됨이니 이 경우 성령은 나[나의 육체와 영혼 일체를 "육체"로 간주할 때]의 "영혼" 격이 되어 계심으로써 이루어져 있는 '하나'임을 이미 설명했습니다. 현재와 같은 '둘'이 아닌 '하나'만을 고집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밖에 모르던 “옛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The Hebrew word for "God," Elohim, which has an inherent plurality, has the function as a surname as in "Yahweh Elohim." The seeming contradiction of Elohim being "one" is solved by the fact that the Hebrew word for "one" is "echad "meaning compound unity, harmonious in direction and purpose; not "yachid" which means singularity.  출처는 아래 주소:
http://en.wikipedia.org/wiki/Trinity#God_identified_as_.22the_Son.22_in_the_Old_Testament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