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8)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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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아담]의 비극적 실상

이렇게 현재의 자연계에 대칭되는 영계를 만드신 다음 사람을 거기 두셔서 그곳 식물의 열매를 먹게 하셨습니다. 그 실과를 먹으면 “영생하게” 되는 생명나무도 있을 정도이므로 거기 나는 식물은 모두 능력 있는 신령(神靈)한 식물이기에, 먹으면 자연계의 육체로 되어 있는 인간[아담]의 육체를 신령한 육체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설명도 우리가 영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우리의 이 자연계를 기준으로 하여 판단함으로써 실상 파악을 그르칠 수도 있는지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선악과 나무 열매는 먹는 것을 금하셨으나 생명과 나무는 먹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것으로도 최초의 사람 아담은 이미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령한 몸은 더 다시는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므로 죽어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가 아니라 영생할 수 있는 능력의 육체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법칙에 전연 구애되지 않는 육체이므로 공중에 떠다닐 수도 있고 바다 속을 마음대로 유영(遊泳)할 수도 있고 구름을 타고 다닌다고 해서 이상한 말일 수 없습니다.

그 몸을 자유자재로 신축(伸縮)할 수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야말로 만능(萬能)의 몸입니다. 그러면 왜 "선[善, 좋은 것]과 악[惡, 나쁜 것]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 하셨느냐 하면 이유가 있습니다. 아담의 몸은 처음에 자연계에 속한 흙을 소재(素材)로 하여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영계인 에덴동산에 살기 시작하여 그 몸이 신령한 몸이 되면서 이전의 그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잔재(殘滓)가 선악과(善惡果) 나무라는 형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아담은 영혼과 육체의 이중(二重) 구조입니다.  그리고 육체도 처음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리고 그 다음의 '신령한 육체'라는 점에서도 이중 구조로서 서로 대칭입니다. 이 경우 육체[자연계에 속한]가 영혼[영계에 속하게 되어 있는]을 따른 것입니다. 아담을 자연계에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아담의 영혼에 부합하게 영계로서의 에덴낙원을 창설하셨고 거기에 아담을 두셨으므로 이제는 아담의 영혼을 따라 영계가 주무대(主舞臺)가 된 까닭입니다.

인간 아담이 이와 같이 이중 구조가 되어 있었던 것은 자연계 생물의 정점(頂點)과 영계의 출발점(出發點)으로서 자연계와 영계를 아울러 다스리기 위함이라고 앞에서 지적했습니다. 아담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고 그래서 "만물을 다스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에도 속하고 영계에도 속한 유일한 독보적 존재였습니다. 나중에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신 이중 구조로서의 유일무이한 독보적 존재가 되시는 근거가 된다고도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이와 같이 짜여져 있었다기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때 이러한 인간의 이중 구조로서의 특성을 따르신 것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인간[아담]의 이중 구조를 상징하는 두 그루의 특성 있는 나무가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과[生命果] 나무"였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리 되면 선악과나무는 인간의 자연계에 속한 속성, 생명나무는 영계에 속한 속성을 각각 상징하게 됩니다.

에덴 동산이라는 영계는 처음부터 인간을 위해 창조된 것이므로 인간의 이러한 이중 구조를 상징하는 그런 나무가 동산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아담이 이 에덴낙원에 들어와 그 곳의 신령한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신령한 몸으로 변화했다는 것만은 명백하고 따라서 선악과나무 열매를 먹을 때는 다름아닌 이전의 그 자연계에 속하는 육체로 귀속(歸屬) 또는 회귀(回歸)해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있다가 신령한 몸이 되어 있는 터이므로 이제 또다시 자연계에 속한 썩을 몸이 되어 흙으로 되돌아가게 될 때는 항구적이 되어 영생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에 불복하여 스스로 선악과를 먹고 말씀대로 죽게 됩니다. 즉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어 신령한 몸을 영영 상실하게 됩니다.

그 죽음이 오늘날 모든 인간의 죽음의 현실입니다[롬 5:12]. 이렇게 명백하게 성경이 서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죽음”이니 하는 당치도 않는 해석을 내리고 있으니, 모름지기 성경은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읽는 법이요 그렇지 않고 인간적으로 학문 차원에서 접근하면 어린애라도 능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눈이 가려져 절대로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눈을 가리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학문 차원에서 접근하는데 성령께서 개입하실 리 없습니다.

이 두 그루 이색적인 나무가 아담의 이중 구조를 상징하여 세워진 것이라면 아담이 신령한 몸이 된 것은 그 동산의 여러 식물들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된 결과이나, 이제 선악과 나무를 먹어 아담의 몸이 자연계의 육체가 된 다음부터는 이 생명나무를 먹지 않는 한 신령한 몸으로 다시 복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먹어서는 안되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므로 멸망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먹게 하심으로써 되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계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없고 또한 아담 스스로 먹도록 방치하실 수도 없으니, 이미 선악과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게 되어 있는 처지에 죽을 것이 다시 사는 것이어서는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따라서 이제는 부득불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영생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얼마 동안 지냈는지는 성경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설혹 밝힌다고 해도 거기는 영계이므로 우리가 알아듣지도 못할 일입니다. 자연계와 영계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아직 생기기 전일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홀로 지내는 것이 마땅치 않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돕는 자를 만들어 주겠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말 성경 번역은 "배필"이라 했는데 이는 그 "돕는 자"가 여자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번역자 마음대로 처리한 오류입니다. 영역으로는 단순히 돕는 자 즉 "helper"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 선입관에 의한 편견입니다. 자기 생각을 완전히 비운 빈 마음으로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이 됩니다. 원래의 뜻은 그냥 "돕는 자"[helper]입니다. 말하자면 ‘짝’의 개념 곧 ‘한 쌍’으로서의 개념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양면성 또는 대칭 개념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는 것과 같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지으신 것이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에덴낙원의 "동물"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물(靈物)들은 처음부터 인간 아담을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혼자 적적할 것이므로 벗 삼아 지내도록 하시려는 배려인 것입니다. 아담은 이 때 남자도 여자도 아니므로 단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그 근본이라는 속성 하나만으로도 그리고 그 몸 자체가 막강한 능력의 신령한 육체이므로 주변 영물들의 도움으로 능히 자기의 닮은꼴[자식] 생산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반드시 여자가 생기지 않더라도 아담 혼자서라도 자녀 생산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되니 이 점에 유의할 일입니다.

바로 이런 동물들 중에서 자기 마음에 맞는 짝을 아담 스스로 택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계인 에덴 동산의 "땅[“out of the ground”-영역, 우리말 번역은 “흙”]"을 소재로 하여 동물들을 만드시니[인간 아담은 자연계의 "흙[dust]"을 소재로 하여 만드셨음], 그 동물은 이 자연계에 속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동물이 아니라 영적 동물 즉 영물들입니다. 이미 영적 식물은 창조하셨으므로 그래서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도 있는 것입니다.

이 영계의 동물들은 자연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각종 동물들로서 성경이 표현하고 있으니[창 2:19] 다시 말해 자연계의 각종 동물의 대칭형으로서의 영물들입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이 그 대칭형이니 곧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물고기 즉 해중(海中) 생물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자연계의 바다에 해당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과 대칭되는 것이 없다는 그런 뜻이니, 물은 자연계의 속성으로서, 자연계라기보다 자연계에 속한 생물의 속성이라 할 것입니다.

물[水]과 대칭되는 것을 불[火]이라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 영적(靈的)인 것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불이 자주 표현되고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불꽃 중에 임하신다 했고 영물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용으로서 이 세상에서 목도되는 것도 불이 그 형상을 장식하고 있고, 인간과 영물들이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받고 들어가게 되는 곳이 "불의 못[lake of fire]"이라 함도 그렇습니다.

"불의 땅"과 같은 것으로 표현하지 않고 물과 관계된 "못"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도 특이합니다. 그렇다고 영계에 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에덴으로부터 발원된 강이 에덴 동산을 적시며 흐르고 그리고는 그 동산에서부터 네 갈래로 나누어져 각처로 흐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하면 그 흐르는 강명(江名) 중에 오늘날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엿보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에덴이 이 자연계가 아니냐 할 것이지만, 그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아담이 그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되어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었으므로 에덴낙원이 아닌 이 자연계에서 살게 되는데 자연계에 이르러 보니 영계는 아니지만 그 에덴 땅과 비슷하게 강도 흐르고 있는지라 그 강에게 에덴 동산에 있을 때의 이름을 기억하여 이름을 붙여 준 것입니다. 당시는 아담 부부 외에는 사람이 없는 때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들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것이고 바로 그 일대가 아담 내외가 자연계에 추방되어 살게 된 곳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 내외는 자기 후손들에게 이런 비극적 결말의 자초지종을 알려 주었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말도록 경계한 것이 여러 민족 간에 그대로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남아 있는 결과로, 창세기와 비슷한 내용들이 세계 곳곳에 담겨져 전설로 전해오게 된 내력입니다. 성경 내용이 고대로부터 각지에 전해 내려오는 여러 가지 전설들을 종합한 것에 불과하다는 일부 학자들의 무식한 말이야말로 본말전도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대홍수가 나서 "노아"와 그 식구 7명만 살아남게 되는데 그래도 그 이름이 여전히 남겠느냐 하겠지만 그 역시 대답은 간단합니다. 노아의 방주(方舟, 네 모가 난 모양의 배)가 그 많은 동물들을 싣고 여기저기 떠다닌 것도 아니고 거의 한 곳에 떠 있었을 것입니다. 홍수 물이 빠지면서 노아의 방주는 애초 홍수가 나기 시작했던 당시 거의 그 자리에 고스란히 착지했을 것이니 홍수 전의 지형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달라져 있었다고 해도, 노아는 그 메소포타이야를 중심으로 인종이 불어나면서 사람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어도 노아는 아담의 가르침을 항상 명심한다는 차원에서 아담이 살던 그 곳을 떠나지 않았으리라 추측함도 전혀 억측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들이 세계 각처로 흩어져 살기 시작한 것은 노아 홍수 이후 바벨 탑을 쌓아 올리려고 할 무렵 하나님이 인생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결과로 된 것인즉 노아 홍수 이전에는 아담이 살던 곳을 중심으로 한데 모여 살았다 해서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가인만은 살인자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으므로 따로 떨어져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당대에 아담의 가르침을 마음에 가장 잘 명심하고 아담의 경고를 제대로 수용한 결과로 그와 같이 대홍수 중에 살아 남았던 것이므로, 아담이 살던 곳 다시 말해 아담이 지어놓은 유프라테 강변을 떠나지 않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담부터 노아까지의 역대 주인공들의 나이를 계산해보아도 대략 그런 결론이 되어 나옵니다.

즉 죄인으로서의 대표 격으로 아담이 죽은 때나 의인으로서의 대표 격인 에녹이 당시로서는 요사(夭死)한 무렵이나 거의 같은 때입니다. 이런 대조적인 두 가지 죽음을 유심히 관찰해 온 노아의 마음이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쪽으로 뜻을 세우고 아담의 비극을 마음에 두며 살았으리라는 결론입니다. "에덴"이라는 이름 역시 아담이 어느 특정 지역이라기보다 자기 살던 땅 이름을 그렇게 지어 불렀음이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창 4:16] 함으로써 드러납니다.

그러면 왜 이제까지 그런 지명이 남아 있지 못하느냐 하면, 노아 홍수 이후로 지형이 바뀌었을 수 있고 또한 아담이 아닌 노아로서는 굳이 그런 이름을 또 다시 새로이 붙여 줄 아무 명분도 찾지 못한 까닭입니다. 강 역시 바로 그 강이 홍수 이후 그대로 남아 흘렀다고 볼 수 없고 그와 유사한 강이 흐르므로 홍수 이전의 그 유프라테 강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강은 그렇게 그 자태를 드러내고 흘렀겠지만 땅은 홍수 이전과 같은 형태로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  영물로서의 동물들과 자연계의 동물들은 비록 대칭을 이루고 있으나 영계와 자연계와의 격차가 큰 만큼 그 형태 역시 다를 수밖에 없음은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 자연계에 대칭되는 것으로서 "뱀"이라고 창세기[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신약 성경인 요한계시록에서는 "용(龍)"으로도 명시되어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용"으로 표기하면서도 "옛 뱀"이라고 하여 그 실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으니 곧 "창세기에 나오는 그 뱀"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씩이나 같은 말로써 강조하여 밝히고 있습니다[계 12:9/20:2]. 인간 아담을 위하여 창조되어 사람과 상대하고 또한 영물들인지라 그 모든 영적 동물들은 사람처럼 직립보행이지 자연계의 동물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역시 네 발 달린 용의 모습으로서, 즉 직립보행 시에는 앞발은 손처럼 뒷발은 다리처럼 역할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물들은 자연계의 짐승처럼 걸어 다니는 습성이 아니라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므로  생김새도 같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뱀" 다시 말해 "용"이 인간 아담을 속여 죽음에 빠뜨린 결과로 저주를 받는데 "배로 움직이는" 것도 포함되니 이로 보아서도 용이 처음에는 걸어 다니는 영물이지 기어 다니는 것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성경이 이 영물에 대해 이와 같이 설명하는 것은 인간의 현재의 불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룹”이나 “스랍”과 같은 영물들과는 달라 생략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에덴낙원의 영물들이 바로 오늘날 “천사”라고 불리는 존재입니다.

천사를 표현할 때 날개 달린 것으로 나타내나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요 앞에서 언급한 "그룹"이나 "스랍"들과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무슨 자연계에 속한 날짐승이기에 날개가 있어 날아다닌다는 말입니까. 이와 같이 아담이 처음 자연계에 속한 흙으로 육체가 지어진 후에도 상당한 시간적[이 시간이 몇 년 단위인지 몇 십, 백, 천 단위인지 또는 그 이상인지 우리가 현재로는 알 수 없습니다] 흐름이 계속되었지만 여자는 아직 창조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로 보아서도 처음부터 사람을 남녀로 지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를 창조하게 되는 계기를 창세기는 그 만드신 영물들 중에 아무도 아담의 짝[돕는 자]이 될 만한 자가 없어서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 영적 동물은 당연히 암수 구별이 없으니 오직 ‘한 종류 한 개체(個體)’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아담]도 영적(靈的) 존재가 되어 있는 관계로[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이렇게 혼자 있는 아담을 위해 그 짝을 만들어 주시려고 여러 영물들을 지으셨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짝 하나를 만들어 주시기 위해 여러 영물들을 지으신 것은 아니고 아담을 우두머리로 하는 한 몸 체제에서의 여러 지체들 성격으로 날짐승, 가축류, 들짐승 등의 구별로 해서 여럿을 만드신 것이고 그 중에 하나라도 아담에 맞으면 그가 아담의 짝[돕는 자]이 되는 것입니다. 애초 사람[아담]도 [영적 존재인 영물들처럼] 처음부터 남녀로 구분되어 있는 육체로 창조되지 않았음을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습니다.

다시 말해 아담의 육체가 남자의 형태가 아니라 영물들과 같은 그런 단일 개체[성별이 없는]의 육체였던 사실이 드러납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지으시는데 어찌 양성 구별이 없는 육체가 만들어질 수 있느냐 하겠으나 사람과 짐승은 다르다는 것은 그 속에 영혼을 조성하시는 사실로써 충분히 입증됩니다. 처음부터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지내게 되도록 의도하시고 지으신 것이므로 인간의 피부는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처럼 털에 싸이지 않았습니다.

매끈한 그대로의 생김새로서 이는 신령한 몸의 빛에 둘러싸이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입니다. 고로 아담이 창조될 때 남자로서의 신체적 특징을 갖춘 몸이 아니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남자로서의 육체였다면 당연히 여자도 함께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 창조는 없이 먼저 영혼부터 지으셨고[아담의 코에 친히 생기(the breath of life)를 불어 넣으심으로써] 그런 후에 다시 에덴낙원을 창설하셨고 그런 후에야 "사람[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신 것입니다.

마치 이제서야 뒤늦게 생각이 나신 듯이 말씀을 하셨지만 그래도 여자는 창조하지 않으시고 그런 영물들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짝이 될 만한 것을 아담이 찾지 못하므로 즉 자기의 짝으로는 모두를 퇴짜를 놓았기 때문에 비로소 여자가 창조된 것입니다. 남녀로서의 신체적 특징은 훨씬 나중에 남자에게서 여자가 창조될 때 이루어집니다. 아담을 처음부터 남자의 특징으로 된 육체로 지으셨다면 당연히 아담의 창조와 동시에 여자를 만드셨을 것입니다.

왜냐면 남자만 덩그렇게 만드시고는 나중에 가서야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실 것도 없이 여자를 만드시면 될 일인 것입니다. 또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에도 여자를 만드시지도 않고 영물들을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 영물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아담을 위해 각종 영물들을 지으신 다음에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는가 살피셨다고 했습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우리로 말하면 별명을 지어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라 하겠습니다. 그 특징대로 이름을 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심히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아담]의 안목과는 달리 그렇게 모두가 동물들의 형태이니 사람의 눈에 들 수가 없고 거저 기기묘묘하게[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게] 생겨 아담 스스로 생각할 때에도 자기의 짝으로 생각하기는 미흡하다 여겼음이 분명합니다.

감히 별명을 지어 부르지 못할 정도의 애착이 가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자기와 같은 그런 아름다움은 지니지 못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천사들이 사람에게 나타날 때에는 사람의 형상을 하게 되는데, 이는 애초 에덴낙원에 있었던 아담과는 달리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린 인생들인지라 그런 영물들의 고유의 형상에는 인생들이 익숙하지 못할뿐더러, 무슨 괴이한 괴물처럼 여겨질 것이므로 그냥 사람으로 스스로를 변환시켜 나타낸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나타나게 될 때는 그 본연의 모습대로 영광의 빛에 싸여 나타나야 정상이므로 그런 신령한 몸의 영광 앞에서는 사람으로 나타나도 어떤 때는 우리 육체가 감당하지 못하여 혼절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계 1:17/단 8:27,18]. 그러므로 평범한 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나사렛 동네의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날 때에도 단지 한 남자[새파랗게 젊은]의 모습이었고 요한의 부친 사가랴에게 나타날 때에는 평범한 남자의 모습이기는 하나 아무도 없어야 할 지성소(至聖所)에서 불현듯이 나타났으므로 놀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눅 1:12].

그러므로 아무리 영물이라고 하나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서의 사람의 아름다움에는 비할 수 없으니 그래서 악령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혹했다 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창 6:2]. 그래서 아담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때 비로소 여자를 만들 작정을 하시게 됩니다. 왜냐면 아담과 같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나타내는 똑같은 사람이기 위해서는 자연계의 동물들을 암수 구별해서 만드신 그 방법을 부득불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담을 만드신 방법대로 또 한 사람을 만드신다 해도 어느 모로든 차이가 있게 마련이라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똑같은 대칭형으로 닮은꼴을 만드시기 위해서는 아담을 소재[갈빗대 하나]로 해서 대칭꼴로 만드심으로써 여자의 형태로 만드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아담은 남자로서의 신체적 특성을 나타내게 됩니다. 성격도 모양도 동시에 변모하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남녀로 나누어진 상태이므로 이전 완벽한 아름다움, 완벽한 성품에 비하면 부분적이 되어[양쪽으로 갈라진 그 한 면만 취함으로써] 남녀가 상호 보완 관계로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초의 사람 창조가 이러하여 성별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장차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 영물들과 함께 살 때에는 이런 성별이 영원히 사라지게 됨은 당연합니다. 애초 아담이 창조되었을 당시와 같은 그리고 영물들이 창조되었던 그 기준을 따라 비로소 완전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현재는 남자 아니면 여자로서 남자는 여자의 측면이 모자라고 여자는 남자의 측면으로 볼 때 그만큼 부족함이 있는 개체들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삶의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천사들[영물들]과 같이 된다고 하셨습니다[눅 20:36]. 그러면 여자가 없었다고 가정해서 아담이 영물들 중 어느 하나와 짝이 되어 있다면 자식은 어떻게 낳을 것이냐 할 것입니다. 이 경우 즉 남자의 육체가 아닌 ‘완전한 육체’로서의 아담은 이미 언급한 대로 그 속에 남녀로서의 종합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온전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막강한 능력의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는데다 주변에 아담을 돕는 역시 능력 있는 영물들이 있는지라 자연계에 속한 방법이 아닌 영적 방법으로 얼마든지 자식들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런 것을 계속 가정해서 이야기하는 목적은 에덴낙원이 영계이고 아담 내외가 거기서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범죄하여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대해 여러 가지로 부질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필요 없는 반론을 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 아님을 독자께서 이해해 주시기 바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어떤 종류든 호기심과는 관련이 없고 그 정도로 한가한 처지도 아닌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남녀로 되어 있는 인간 구조만 알고 있어 여러 편견과 선입관이 작용하는 까닭에 이해에 혼돈이 와서 그런 것이지 성경대로 이해하기에 익숙해지면 아무 문제될 것도 실상 없습니다. 여자가 생긴 후 범죄함으로써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회귀해 버렸지만, 남녀가 그렇게 범죄 않고 영계인 에덴낙원에 머물러 있었다 가정해도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방법대로는 자식들을 생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 고상하고 차원 높은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것은, 신령한 몸으로서 막강한 능력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범죄하여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면서 이제는 별 수 없이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의 생식 방법 그대로를 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한 대목의 상세한 사연입니다. 그 자세한 내력을 이상과 같이 창세기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아담 내외는 벗었으나 벗은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이 알몸뚱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기준해서 하는 말이기에 그렇습니다. 

신령한 몸으로 지내던 영광은 과거사가 되어 버렸으므로 그 당시 사실을 기준해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속한 현재의 인간 육체는 당연히 옷을 입어야 하므로 이 기준에서 보면 당시는 벌거벗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이었기에 현란한 오색(五色) 광채로 싸여져 있었으니, 오늘날 인간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당시의 광채[빛의 옷]를 대신하는 습성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인간을 영적 존재로서의 신령한 육체로 만드시기 위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처음 만드실 때도 자연계에 속한 동물처럼 털북숭이로 피부를 입히시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신령한 몸이 되면 빛의 옷을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털이란 것은 자연계의 조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므로 인간은 이 자연계에서 살지 않을 것이므로 그런 털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털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를 자연계의 동물과 비교 연구한 이들의 말에 의하면 여러 모로 다름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벗을 때 그 벗은 것을 부끄러워한 것은 당시 아담 부부가 그 선악과를 먹어 버림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애초의 육체로 서서히 돌아오면서 신령한 몸으로서의 광채를 잃게 되자 금방 드러나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성별(性別)로 된 구조 형태를 부끄러워한 까닭입니다. 영물들은 이런 몸이 아니므로 영물들을 의식한 상대적인 모멸이요 수치입니다. 따라서 같은 영적 존재로서 하등 세계인 자연계에 속한 동물과 같은 신체적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을 그런 영물들의 세계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니 보통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영물들 위에 군림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다스리는 자로서의 체통이 서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변환되면서 그 빛을 잃게 되자 부리나케 무화과 잎사귀를 뜯어 아랫도리를 가리게 됩니다. 바로 그런 수치심이 이 자연계의 육체로 돌아와서도 그대로 남아 있어 아무리 더운 열대지방에서 아무리 미개해도 아랫도리는 가릴 줄 압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가리켜 주님은 솔로몬의 영광으로 지은 옷으로 입은 옷도 들의 백합화만도 못하다 하신 것이니 이런 비극적 참상을 지적하신 것입니다[마 8:29].

에덴낙원의 동물들은 용과 같이 그 특유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현재 사람 앞에 나타날 때는 항상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갖춘다고 이미 지적했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어떤 물질로도 또는 정교한 기계의 ‘우주선(宇宙船)’ 형태로도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그만큼 고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영물들의 신령한 육체입니다. 첫 사람 아담도 그와 같은 신령한 몸을 한 때 지녔으나 범죄의 결과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극히 초라한 모양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영물로서의 천사들이 사람의 형태를 취하여 나타나는 것은 만일 그 고유의 형태를 취한다면 그 기괴한 형상은 고사하고 우선 그 엄청난 부피에 접하여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그런 불필요한 부작용을 일으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왕 스스로를 변신시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을 바에야 사람의 형태로 나타남이 안전합니다. 우리가 장차 신령한 몸으로 나타나게 되면 역시 그런 부피 또는 무게로 정상화될 것은 당연합니다.

현재 인간의 몸은 자연계의 제반 여건에 적합하도록 된 최소한의 모습만을 갖추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치 어떤 잉어가 어항에서 자라면 8cm만 자라고 수족관에서는 최고 25cm만 자라고 강(江)에서는 90 내지 120cm까지 자란다고 하는 그런 관찰 결과가 나타내는 의미와 똑같습니다. 동화(童話) 같은 이야기가 아니니, 우리의 애당초 보금자리는 이 자연계가 아니라 영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자연계에서 새처럼 공중에 날지도 못하여 새만도 못하고, 물고기처럼 바다 속에 유영하지도 못하여 물고기만도 못한 몸이니 마치 어항 속에서 평생을 마치는 그런 처참한 죽음의 몰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물로서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에서 인간 앞에서 신(神) 노릇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물들은 스스로 신축 작용을 할 수 있어 자신의 형태를 축소 확대할 수도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거의 무궁무진한 조화를 부립니다. 번개 같이 움직이고 공중에 마음대로 비행하는 것은 물론이며 바다 속에서도 공중처럼 자유자재합니다. 자연법칙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대칭성이라는 것은 원래 하나로 있던 것이 상반된 것으로 양립해 있는 모양새이므로 본질은 같으나 성질은 정반대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원래의 형태[신령한 몸]를 상실하고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굼벵이처럼 움직이고 조금만 물리적 힘을 가해도 빠개질 정도로 나약하다는 것은 이 자체만 해도 보통 비극적 현실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죽음’의 비극 가운데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고자 하는 데에도 뜻이 없고 오직 산 자가 되는 것밖에 없으며, 내 자신 산 자가 되었으면 다른 사람 역시 산 자가 되도록 하는 이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습니다.

그 외의 일이란 것은 이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일을 방해하는 결과만 초래하므로 백해무익입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나 하는 것만 정확히 살피면 그 나머지 대답은 일사천리 청산유수 같이 흘러 나올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으면 모든 해답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만 설명을 해도 모든 명암(明暗) 은 아주 선명하게 갈라져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2. 인생은 어디로 가나

양자 택일입니다. 하나는 영원한 축복으로, 다른 하나는 영원한 저주로 들어가게 됩니다. 모든 인생은 이 둘 중 어느 방향으로든 반드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종착지가 아닌 것입니다. 출발점으로서, 지금 어느 방향으로든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이라도 갑자기 나 개인으로서의 이 세상 종말이 닥치면 그 둘 중 어느 하나로서 종착점이 정해지게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시급하고 절박한 상태에 우리 각자가 놓여 있는지 알 만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시간 바른 방향으로 틀어 잡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완결된 것도 아닙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인간은 범죄하여 자기 스스로를 망쳐 버린 결과 하나님의 새 창조가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새 창조가 완결되어야 다시 말해 개개인의 창조의 역사가 끝나야 이 세상도 끝나게 되고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의 대칭성으로 영원히 양분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창조의 진행형입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役事)가 미완성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로써 각 사람을 개인별로 구원해 내는 일이 아직 마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일이 마치자마자 이 세상은 종결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즉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행복으로 들어가게 되고 또 어떤 이는 영원한 멸망의 불행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무리 자기의 자유 선택에 의한 결과라 하지만 그러나 스스로 멸망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므로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이 그렇게 영원 멸망에 들어가는 것이 과연 좋은가 하고 의문을 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로서의 우리가 아무리 정의 관념이 투철하다 해도 하나님 이상으로 투철할 수는 없고, 판단력이 출중하다 해도 하나님 이상으로 출중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불의를 미워하고 불공평 불공정을 혐오한다 해도 하나님 이상으로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아무리 약해도 사람보다는 강하고 아무리 미련해도 사람보다는 지혜로우시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올바르신 판단 그리고 지혜에 맡기는 것이 우리로서는 지혜입니다. 이 이상으로 마음 쓰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처음 주제넘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악령이 되어 있는 것처럼 그런 아주 위험한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피조물로서의 지식과 지혜와 판단과 이해의 한도와 한계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수를 지킨다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어린 아이로 있을 때의 판단력과 어른이 되었을 때의 이해력에는 차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전제하시고, "세상 끝이 되는 그 날과 때는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리원칙대로 하시고 그래서 공명정대 공정공평하시고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정도의 지식만 해도 현재 우리에게는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진 소임에만 전력을 다하는 것이 최 우선으로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 한계성도 이와 같이 현재 자연계에 있을 때뿐이므로 신령한 몸을 입게 될 때와는 판단 능력에 큰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때까지 모든 진상에 대한 궁금증을 유보해 두어도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아는 지식, 지금까지 설명해온 것만 해도 우리가 마땅히 얻어야 할 정보로서는 충분하고도 남는 가치가 됩니다. 이 정보를 통해 스스로 결정하는 일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피조물은 조물주 하나님의 분신(分身)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의 몸이라 하더라도 예를 들어 암세포라면 반드시 제거해야 전체를 위해 잘하는 일이 됩니다. 내 몸이라고 해서 그냥 두면 전체 몸을 해치게 됩니다. 결국 내 몸에 해로운 것이므로 아무리 내 몸의 일부라 하더라도 그것은 내게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 원수가 된다 하였습니다[롬 8:27]. 하나님 앞에서 그런 영적(靈的)인 암세포가 바로 죄입니다.

그 죄를 회개하여 버리지 않으면 그 죄가 가는 데로 따라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에 위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셔서 그 스스로의 운명을 요리(料理)하도록 완전히 일임(一任)하여 맡기신 이상, 또한 충분히 판단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모든 지각을 주신 이상, 당사자 본인들로서 누구를 원망할 처지는 결코 아닙니다. 법칙대로 되어지고 원리원칙대로 되어가는 것뿐입니다.

또 가령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이런 일에 불의하다 즉 옳지 않으시다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렇다고 우리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그렇게 하신 것도 한번 확립해 두신 원리원칙을 친히 무시하시지 않고 하나님 자신을 스스로 잡아 얽매듯이 할 정도로 철두철미하시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심으로 된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요구하겠습니까. 그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고 그 이상 우리가 바랄 것은 실상 없는 것입니다.

현재의 이 세계는 창조가 완결되어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 단계는 차후에 옵니다. 지금은 그러므로 창조가 진행 중인 것이니 새로 창조되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인생들이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고 가름하는 때입니다. 불가항력으로 어디인가 끌려가는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인생 각자가 자기 운명을 자기 스스로 결정한다는 이 지식은 굉장한 무게를 지닙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어떻게 되고 무엇을 하는 그런 것을 여기서 말하지 않습니다. 이 지극히 짧은 한 순간과 같은 생애는 가히 운명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3운법칙에서도 보듯이 이 세상에서의 한평생은 철저히 제약되어 있습니다.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고로 오직 문제는 영원한 세계를 어떻게 보내느냐, 행복이냐 불행이냐 그 대칭성의 의미가 지금 이 세상에서 내 스스로 자유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 의미가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 행보(行步)는 대개 알다시피 그리고 3운법칙으로 증명되었듯이 제한적이고 이미 정해진 각본대로 되어집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이 모두 자기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지이든 자기 의지와는 상관이 없든[즉 자기 의지에 반하든] 이 자기중심의 거센 파도에 한꺼번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될 것이므로 죽고 사는 것도 뒤죽박죽이 되고 혼란을 극하게 될 것이기에 이를 엄정히 통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람을 죽이고 싶어도 그 사람이 죽을 때가 아니면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을 해칠 수 있도록 처음부터 허용되지 않는 한 절대로 손 댈 수 없도록 되어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사람 한 평생은 미리부터 정해져 있게 됩니다. 그러나 현재의 창조 작업이 모두 완료된 영원한 세계에서는 어떤 상태로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별개로 나타납니다. 그 때 되어질 운명은 오늘 이 세상에서 각자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행운보다 영원한 세계에서의 처지가 더 크고 중요한데 이 짧은 이생에서의 운명도 좌지우지 못하는데 어찌 이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일을 내 스스로 좌우한다는 말이냐 하겠으나, 앞에서의 설명대로 지금은 임시 방편으로서의 강제 수단과 통제가 필요하나 영원 세계에서의 본격적인 삶은 사랑으로 운영되므로 사랑은 절대 자유가 보장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이 세상에서 스스로의 선택에 완전 일임되고 나의 선택 여하에 따라 결정됨은 당연합니다.

나의 자유 의지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을 정하는 것이 아니고 [왜냐면 이 세상 삶은 무의미하므로] 오직 영원 세계에서의 나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자유 의지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삶은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일시적인 것이므로 수(數)에 칠 가치도 실제 없습니다. 영원 세계에 비하면 감히 견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어디인지도 모르게 가지는 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 방향을 정하여 가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과연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람으로 제대로 대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임의로 각 사람의 운명을 정하시는 것이 아니니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내 운명은 내 손에 있다는 사실만 숙지하면 “인생을 절반은 알아 버렸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느냐 아니면 그릇된 쪽 즉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만 스스로 정확하게 판단하면 됩니다.

내일도 기약할 수 없는 인생 목숨입니다. 이 내용을 알고자 하면 다시 역사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인생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배경과 그 까닭 즉 과거를 알아야 현재와 미래를 미루어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고 하고 이런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의 불행을 가리켜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말합니다. 내게만은 “역사가 되풀이되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것이니 내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역량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유 선택의 결정은 하나님께서도 절대로 간섭하시지 못합니다. 간섭 또는 강제하시게 되면 당신께서 하신 일을 친히 부정하는 결과가 되므로 그렇습니다. 왜냐면 자유를 주셔 놓고도 간섭하시게 되면 이율배반이 됩니다. 하나님께는 일사부재리만 있고 이율배반은 없습니다. 철두철미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시는 것은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불가피합니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저다지도 집요하게 인생 멸망을 획책하는 것도 이 하나님의 변경될 수 없는 원리원칙주의를 딴에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 했으니 이것은 말 그대로 피동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이미 그렇게 빠져 들어가는 사람은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불의를 좋아하는 것으로 판명이 났기 때문에 이미 자율권은 행사했으므로 그에 관한 한 강제, 간섭은 없고 오직 그 스스로 선택한데 따라 멸망만이 남아 있는 상태를 그렇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 당자 자신은 의기양양해 할지 모르나 결국 그것은 파멸로 들어가는 지름길임이라는 뜻을 나타낸 것에 불과합니다. 또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도 우리 자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부지부식간에 그와 같이 인도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스스로 하나님의 인도를 앙망(仰望)하고 기도하는 경우에 그와 같이 나를 이끄신다는 뜻이니 이 점 혼동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독립성을 구가하는 자유인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강제 간섭하시지 않고 따라서 우리가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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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의 삶이 주동적(主動的)이어야 하고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원히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 바로 영생이므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시키는"[고후 10:5] 것이 핵심이 됩니다.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생각'이 곧 '사람'입니다. 그 생각하는 향방을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을 백 번 강조해서 마땅합니다.

항상 우리의 마음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집중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만 보고 바다 물 위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거센 풍랑을 보고 그 발이 물 속으로 사정없이 빠져 들어간 것이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도,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도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살전 5:16-18] 것도 이 '그리스도 의식'의 일환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18]입니다.

3. 현재의 나의 좌표(座標)는 어디인가


그러므로 내가 어떤 불가항력의 힘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지금 흐르는 시간에 편승하여 걸어가고 있는데 내가 지금 처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상태에 있으며 나의 주위 환경은 어떤 것인지 즉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 등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 정보는 역시 다른 어디에도 있지 않고 성경에 있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역사를 자신 있게 모든 권위를 가지고 말해 주는 것은 성경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이 경우 "권위"라는 것은 그 진실성 여부가 문제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는 어차피 앞서 언급한 “용(龍)”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현재 처해 있고, 이 세상의 지배자가 용 곧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서 온 천하를 속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현재 위치는 그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용" 자체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알려진 이름이므로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는 주제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진실이 아니기에 그렇지, 진실을 말함이라면 모두가 다 믿게 되어 있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증거만 있으면 누가 믿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증거를 대어 주어도 도대체 알려는 의욕 자체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그 뜻입니다.

다시 말해 진실과 진리는 그 스스로 알려고 하지 않는 한 즉 흥미를 가지고 스스로 찾지 않는 한 진리 스스로가 “날 좀 알아 다오” 하고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알고자 하는 마음과 화합이 되어야 두 손바닥이 서로 마주쳐 소리가 나듯이 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내 아무리 진리를 찾고자 해도 진리가 거기 없으면 소용이 없고, 진리가 아무리 있어도 내 스스로 이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역시 그 진리가 내게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 사람이 진리를 스스로 알려고 하지 않으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그 진리를 알려 준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눅 16:31]. 이런 사람은 그 마음 먹은 대로 즉 진리를 안다고 해도, 그 진리대로 행할 마음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런 사람은 그 스스로 그렇게 되어 걸어가는 것이고, 그렇게 스스로 걸어가는 것이므로 "내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고 불안해하지도 않습니다. 옆에서 누가 그리로 가면 안된다고 일러 준다 해도 무관심이고 태평입니다. 그 말을 믿지도 않거니와 흥미가 없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 세상

그러므로 성경을 믿지 않는 것도 그것이 믿을 만한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정작 관심이 없어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이 하자는 대로 또는 대중의 휩쓸림에 따라가는 사람으로서 주견도 없고 있더라도 자기 신념을 관철할 의지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자주성과 독립심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여 처리하도록 하심인데, 그 스스로 기계인 양 처신하니 스스로 악을 좋아하여 악을 행하는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됨은 당연합니다.

같은 속성이라는 것은 자기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밖에 모릅니다. 원래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가리켜 동물의 속성이라 합니다. 동물은 자기 종족을 퍼뜨리는 그런 기계적 충동으로 말미암는 한 가지 목적의 행동밖에 없습니다.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 그런 목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닌데, 그런 식으로 나가는 것을 스스로 택하므로 이는 악이 좋아서 악을 행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악을 좋아하도록 만드시지도 않았고, 선[좋은 것]을 알고 의[올바른 것]를 행하도록 창조하셨으나 단지 자기 스스로 좋아서 하도록 그래서 자유를 주셨다는 것이 흠이라면 유일한 흠이라 할 수 있으나 자유를 주신 것을 누가 감히 흠이라 하겠습니까. 악인들도 자유는 한사코 원합니다. 심지어는 자유를 속박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실상이 아닙니까. 이렇게 자유를 충분히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자유를 빌미로 악한 자기의 마음대로 자기 좋아하는 대로 자기중심으로 나가니 그런 것을 스스로 택한 경우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런 경우 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대개 악한 자가 그런 속성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처럼 몰라서 그렇게 악을 행하는 경우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고 인도하십니다. 이 경우는 강제도 간섭도 아닌 것입니다. 미리 아심을 따라 그렇게 이끌어 주면 따를 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우리 피조물의 기준으로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과 판단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들께서도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아시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셨으니[마 24:36] 현재는 천사보다 못한 우리가 이런 저런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것만 알면 됩니다. 하나님이 그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 이웃을 생각한답시고 "하나님, 왜 그렇게 하십니까,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며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하는 것에다 감히 비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말한 대로,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해서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겠지만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는가.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는가. 토기(土器)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는가.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시고자 하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묵인하시고 또한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해 그 영광의 부유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랴”[롬 9:19-23] 하면 그만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모두 선하시고 의로우시다[올바르시다]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신령한 몸을 입고 나면 충분히 이해하게 되고 ‘하신 일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이 비록 현재라 할지라도 충분히 인정하고도 남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충분히 확증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힐난할 자가 없습니다.

이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원리원칙을 지키시고 공명정대 공정공평하게 일을 하시는지 그 엄정하심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친히 사람이 되시고 그런 사람으로서의 죽음의 고통을 맛보시는 부끄러움을 불사하시는 정도라면 나머지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뜻을 받들어 우리는 오직 기도와 말씀 전달과 봉사로써 사람들이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달리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이라도 복음 전파만 끝나면 내일이라도 끝날 세상인데[마 24:14]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한다고 하셨습니다[요 12:25].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요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요일 2:15].

세상 사랑은 자기 사랑이므로 자기를 위해 사는 것으로서[고후 5:15]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 사랑은 원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부추기는 것이요 그가 목표하는 것이므로 이 원수를 증오할진대 증오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일은 경시하고 외면하게 됩니다. 결국 “참고 선을 행함”이 없으므로 영생에 이르지 못합니다[롬 2:7].

그러면 결국 구원을 얻기 위해 선을 행함이 아니냐 하겠지만 전혀 다릅니다. 구원을 얻은 그 힘으로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해야 될 일인데도 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 경우에는 첫 사람 아담이 영생하도록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영생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결과를 낸 것처럼 그렇게 됩니다. 아담도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마땅히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몸된 지체로서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해(自害), 자멸행위입니다. 아담은 그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을 받아 즉 그 꾐에 넘어가 그 거짓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고 따른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의 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꾀었다 하나 멀쩡한 이지력을 가지고도 그런 거짓말에 넘어간 아담이므로 당연히 허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범죄로 죽음에 이른 것이 오늘날의 인생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부를 우리 피조물 인간을 위해 내어 주셨다는 확증입니다.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신 대로 이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 하실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머지 모든 일은 이를 미루어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나 창조자가 하는 일을 피조물 너희들은 몰라도 되고 알 필요도 없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뿐이다”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이니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 나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으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다”[요 15:14,15] 하심과 같습니다. 현재 자연계에 위치한 우리로서 이 정도 이 이상으로 알 것은 없습니다. 성경에 가르치신 대로 알면 충분합니다.

이 세상의 신(神)

이 세상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냐 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포함한 만유(萬有)의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 따로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각종 신들이 예로부터 있어 사람들이 그 우상(偶像)을 만들고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 세상 신이 그런 짓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신입니다. 그런 만큼 세상 일이 올바로 굴러갈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질서와는 다릅니다. 3운법칙에서 보듯이 철두철미하게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는 세상 질서입니다.

단지 비록 한 때나마 악인들이 승승장구한다는 뜻입니다. 성경도 이를 당연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사악한 활동 또는 악인들의 횡포를 묵과하시느냐 하면 앞에서의 설명대로 첫 사람 아담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라 범죄함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스스로를 종속시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있는 한 그들 위에 군림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머리이고 악인들이 그 몸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한 몸됨은 사랑의 한 몸 구조가 아니고 강제적인 체제이므로 이 세상의 조직과 같은 것이니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한 몸의 원리'와는 전혀 별개입니다. 그러므로 몸의 위치에 있는 악인들이 존속하는 한 그 머리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붙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왜 악인들이 있는가 하면 구원 얻을 사람은 다 구원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의 배려 때문입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으니 단 하나도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 악인들 중에서 구원 얻는 자가 생기고 비로소 그들이 의인들이 됩니다. 악을 행하니 악인이요 죄를 지으니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 중에 회개하여 의인이 되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이 악인의 세상은 당분간 존속되어야 하고 악인들이 있으니까 그들의 머리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그 일당인 악령들 역시 부득불 이 세상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령들의 사악한 활동은 세상 악인들의 사악한 삶과 맞물려 있어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되어진 일을 따라 그것을 자연스럽게 풀어 가시는 것이지 억지로 무리하게 강제하거나 간섭해서 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철두철미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잘 알기 때문에 이런 공명정대 공정공평한 바탕에서는 얼마든지 자기의 계획도 수립되고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완전히 실패자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향후 전개되는 천년 기간에까지 이르러도 최후 마지막으로 그런 시도를 하게 된다고 성경은 예고하고 있으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말씀을 믿을 리가 없습니다.

나의 좌표를 정하는 일에 직간접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곧 용(龍)입니다. 아무리 가상(假想) 동물이라고 세상은 알고 있지만 동서양을 통틀어 이 존재처럼 널리 알려져 있는 것도 많지 않습니다. 가상 동물이라 할 때는 세상 사람은 신화(神話)나 전설과 연관 짓습니다. 그러나 용은 실제의 존재입니다. 일반적으로 신화나 전설이라 하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앞에서 언급한 “네피림”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영혼이 그 육체에 거처를 삼는 것처럼 우리 안에 상주(常住)하시므로[요이 1:9] 우리 육체가 그 성전(聖殿)이 되어 있고 이를 가리켜 "만인을 상대로 하는 기도의 집"(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이라 명명하셨습니다[막 11:17].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란 역어(譯語)는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집'이란 뜻이 되므로 올바른 번역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을 그렇게 표현하셨으므로 우리 각자의 몸이 역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모든 믿는 사람의 본이 되는 사도들의 삶은 먼저 기도고, 그 다음이 말씀을 전함이었습니다[행 6:4].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은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하나님께로서 받아 가르치는 위치입니다. 이 제사장은 제물과 성전을 온전히 갖추고 있습니다. 자기 몸이 "살아있는 제물"[롬 12:1]이요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심으로써 성전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이 성전의 이름이 "만인을 위한 기도의 집"입니다.

그런 만큼 명실상부하게 "만인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서의 소임을 다함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중의 하나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라"[마 7:21] 하신 그 "뜻 행함"입니다. 악령들은 그들의 마지막 단계로서의 속임수로 소위 "외계"에 있는 "외계인"들은 인간보다 오래 전에 인간급의 생물체들이 진화해서 그렇게 고도의 문명을 누리며 발전시켜 왔다는 등의 거짓말을 늘어놓을 듯합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스스로를 변환할 수 있는 몸으로 진화하였다는 등의 속임수를 쓸지 모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이들 영물들은 에덴낙원에서 아담 이후 아담을 섬기기 위해 창조된 생물체이기 때문에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도 자유자재로 변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앞에서도 밝혔습니다. 인간이 애초 그런 능력을 구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영광스럽게 창조되었으나 인간 스스로 그 영광을 버리고 범죄한 결과 이전 지녔던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르지 못하는[롬 3:23] 존재가 현재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그렇게 창조되었으나 인간 스스로 무엄하게도 자기 자유의지로 내다 버린 신령한 몸인지라 다시는 그 영광 가운데로 복귀할 수 없고 오직 새로 창조하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새 창조 외에 그 어떤 무슨 말을 하든 또 그 권위를 나타내느라 그 어떤 능력과 기적을 나타내 보이든(성경은 그것을 “거짓된 것”이라 미리 귀띔해 해 주고 있습니다-살후 2:3-12) 그것은 한마디로 속임수요 그 외에는 전혀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판단의 척도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 곧 진실성은 그 자체 증명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평소 부지런히 읽어두어 그 확실성을 마음에 새겨두라는 경고입니다.

대칭성으로서의 반(反) 물질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합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광대한 우주는 있다고 합니다. 천문대의 망원 렌즈를 통해 보니 있음이 알려졌습니다. 그러면 이 광대한 우주를 지은 창조자이므로 그 창조자는 우주보다 크다는 논리입니다. 우주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데 우주의 창조자이므로 우주보다 당연히 크실 터이니 눈에 잡힐 리 만무합니다. 우주가 우리의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창조자도 있다 없다 하고 가름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주도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처지에 우주보다 더 큰 존재는 보는 것으로는 더욱 확인할 수 없습니다.

고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한마디로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정도 못하고 그렇다고 확인도 못한다”고 말할 것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하는 것만은 요즈음 용어로 “과학적”이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왜냐면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결론은 버리고 다른 차원에서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가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靈, spirit)이시라고 하셨습니다[요 4:24]. 영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실체를 모릅니다. 단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존재는 하는 것이 영이라 하겠습니다. 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광막한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이시니 이와 같이 크신 하나님은 영으로 계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완벽한 존재 형태입니다. 영으로 계시면 이 우주 안에 계실 수 있고 우주를 꿰뚫어[관통해] 계실 수 있고 우주 위에 계실 수 있게 되니[엡 4:6] 자연 그런 결론입니다.

영이 아닌 육체[또는 일정 형태]로는 이렇게 계시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가장 미세한 미립자 가운데에서도 계실 수 있는 것이 영의 특질입니다. 그러한 자유자재(自由自在)가 바로 영의 특성입니다. 고로 가장 완전한 의미의 존립 방식이 영인 것입니다. 천사들도 영이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물로서의 영이므로 일정 공간을 유지하는 그런 형체[우리로 말하면 육체]가 있게 마련이나 창조주로서의 영이실 때는 차원이 아주 다릅니다.

우리도 신령한 몸을 입으면 천사들과 같은 그런 영으로서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영물(靈物)들은 원래 신령한 몸으로 존재하던 첫 사람 아담을 위해 그와 교류하기 위해 창조되었던 것입니다[창 2:19]. 우리는 무릇 존재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그런 전제부터 틀렸습니다. 존재는 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것은 공기입니다. 그러니 이 자연계에도 그런 존재가 있음이 명백하니 그러므로 단지 보이지 않는다고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경망합니다.

보이지 않는 공기도 움직일 때가 있는데 그 때는 바람이라고 하여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존재는 일정한 모양과 부피를 갖추어야 볼 수 있게 됩니다. 고로 같은 물질이라도 분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 각 분자가 자유로이 유동함으로써 그런 모양과 부피를 갖추지 못하는 경우 예컨대 공기나 가스 등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볼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고 비과학적인 결론이 됩니다.

앞에서 아담이 여자가 생김으로써 남자가 되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애당초 아담이 창조될 때는 남자로서의 신체적 특성을 지니지 않은 남녀[여자가 생김으로써 장차 구별되어질]의 특성을 골고루 지닌 완벽한 몸이었으니 영물들이 바로 그런 몸[영적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남녀로서의 상대적 구분이 없이 오직 한 개체로서만 존재합니다. 인간 아담도 여자가 생김으로써 남자가 되었으므로 인간을 대표적으로 가리킬 때는 아담[최초로 생긴 인간]을 가리키는지라 남성(男性)으로 받습니다.

나중에 이 아담이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이제부터 인간이라고 하면 반드시 남녀 어느 쪽이든 성별을 밝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인간일 수가 없게 된 까닭에] 이런 인간으로서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인간적인 표현[언어]으로 나타낼 때는, 애초의 아담[나중에 남자가 되는]을 중심으로 하여 대표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표현할 때에도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된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났기 때문에 근본이 아니므로 그 대표성을 굳이 여성(女性)으로 나타낼 이유가 없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람 수를 세어도 남자를 위주로 하는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기술(記述)하고 있습니다[막 6:44/행 4:4]. 이는 남성 우월주의에서가 아니라 애초 창조된 자연 그대로의 사리(事理)를 따른 대표성을 가리킴입니다. 때문에 혹 여자가 비하되는 폐단이 있을까 하여 성경은 분명히 밝히기를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인해 났고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다”[고전 11:11,12] 하여 남녀 차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소위 양성 평등과는 개념이 다릅니다. 위에서 밝힌 대로의 창조의 질서를 따르고 지키는 것이 자연 순리이므로 대칭 관계에서 대소, 주종, 인과 관계는 엄연한 현실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를 뒤집으려고 함은 성경의 권위를 훼파하려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간계일 뿐입니다. 성경의 권위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데에도 활용하려는 흉계입니다. 남녀 평등을 고정 지식화함으로써 자식 생산에 남녀 양성이 모두 균등하게 관여한다는 이론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성(父性)으로서의 남자가 필요 없이 홀로 태어나신 그리스도의 의미를 무산시킬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왜냐면 이미 설명한 대로 모성(母性)으로서의 여자의 역할은 애초 아담[남자]에게서 물려받은 육체를 자식에게 대 물림함에 있는데 남자까지도 이 육체 조성에 균등하게 기여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론이 허위임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이미 설명한 대로의 네피림의 출생 경로가 그 하나입니다.


이 갑, 을, 병 대칭성의 법칙[또는 삼위 일체의 원리]은 물질만 아니라 인간의 관념의 세계에서도 엄존합니다. 선악 관념, 생사 관념에서 보듯이 ‘깊다’는 것은 ‘얕다’는 개념을 동시에 떠올리지 않고는 그 어느 쪽도 개념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동시에 떠올리는 것이 병이 되고 그 둘의 개념은 갑과 을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원리는 3운법칙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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