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일요일

(9)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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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그리스도


사람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으로서는, ①아버지와 '함께'라기보다 '하나로' 계시기 때문에 사람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고 하시는' 모든 것이 다 아버지께서 '계시고 하시는' 것이며 바로 그런 의미라는 것에 한정시켜 이해하면 간단합니다. 그리고 ②나에게만 마치 나 한 사람에게만 함께 계셔 주시는 것과 같은 동일한 의미로 모든 믿는[그리고 사랑하여 복종하는] 사람에게도 함께 하실 수 있다는 점만 알면 됩니다.

이런 일은 사람은 또는 피조물은 할 수 없고 오직 영이신 하나님에게만 가능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늘에서 육체[신령한 몸]로는 하늘에 계시지만 영으로 얼마든지 이 땅에 계시고 그리고 이 우주에 충만해 계시고 당연히 또한 내 안에 계시는 일이 가능하십니다. 이 사실은 ②와 같다고 할 수 있으나 별개의 ③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사람이시면서도 즉 육체를 지니시면서도 하나님이시므로 그리스도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외에는 사람으로서만 주님을 인식하면 충분합니다.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아담이 살 때에는 이런 '나와 같은 사람'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막강한 능력과 신령한 몸이니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고서는 즉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정착되면서부터는 차질이 빚어지기 시작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제 죽은 자로서의 나를 산 자로 만드시기 위해 필요불가결하게 사람이 되셨으니 바로 사람이시고, 위의 세 가지 측면 외에는 하나님으로 인식함으로써 혹시라도 야기되는 혼돈이나 혼동에 휘말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시라고 확정 지어 생각하면 필요 없이 헷갈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아버지께서도 아들과 하나로 계시므로 비록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시나 사람이신 아들로써 항상 당신 자신을 이제는 나타내시므로 아버지의 모습은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며 별다르게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려는 헷갈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아들의 모습으로써 아버지께서는 자기를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 그리스도'로서 항상 인식할 일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설명하기를 내게 가장 가까우신 사람이라 한 것입니다. 바로 나 자신처럼 되어 계시고 또 하나의 나 자신이라 해도 좋고 제2의 나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 모두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으니 말 그대로 한 머리를 모시고 있는 한 몸의 여러 지체(肢體)들이므로 나는 문자 그대로 '거대한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체 중에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역할을 하고 또 그런 위치에 있어도 누구든 평등하게 이 '거대한 몸'을 가리켜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머리를 포함해서 모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의미이고 누구나 그렇게 똑같이 말할 수 있고 여기에는 결코 아무런 하자가 없으니 실로 진정한 평등입니다. 아주 이상적인 평등 관계로서 차별이 없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제2의 나 자신이 되어 계시므로 그렇습니다. 과장된 표현도 아니고 에누리 없는 사실 그대로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마 25:45]라고 하셨지만 이 세상에서 그렇게 '보인다'는 것뿐이지 지금 설명처럼 평등하므로 우열의 차이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머리]를 "또 다른 나 자신"이라 진정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정보를 부지런히 캐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즐거움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게 되면 그에 대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관련 서적을 부지런히 탐독하게 되는 것 그 이상입니다. 구약성경에 "우리가 힘써 하나님을 알자" 했고, 신약성경에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함은 그래서 지당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害)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빌 3:7-9]이라 한 것입니다. 바울만이 그렇게 심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응당 사람이라면 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정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의 또 하나의 모습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2의 나 자신이 되어 계시니 나 자신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으므로 인간의 모든 관계보다 가장 첫째로 꼽는 것입니다. 굳이 인간 관계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 자신으로 계시기 때문이니 영혼과 육체 관계요 머리와 몸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한 관계는 없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불가분입니다. 그렇게 영원히 정착하도록 나를 새롭게 만드셨음을 아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사람은 사람이시되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으로서 유일하신 분이시고 그러니 유일하게 현재 보이시지 않는 사람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시라고 해도 아무 하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로 계시는 것과 똑같이 한 사람으로서 나와 함께 지금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요 16:7] 하셨습니다. 육체로 계시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 하셨으니 이는 육체와 함께 계시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을뿐더러 모든 사람에게 언제 어디서든 그렇게 계실 수 있으니 "더 유익하다" 하신 것입니다.
 
§ 지금은 "세상 끝"의 끝

사탄은 이 세상 신으로서 인간 구원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 방해 작업이 성공하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업의 일환으로 세상 종교를 만들어둔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후로 그렇게 만들어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일에 혼돈과 혼 동을 느끼게 하여 구원의 길을 차단코자 함이다. 그래서 그런 책략의 하나로 성경과 비슷한 말을 미리 만들어 두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진리나 세상 종교나 내용이 엇비슷한 것은 한 흐름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므로 한 가지만 옳다 즉 성경만 옳다고 할 것이 아니라 세상 종교 역시 옳다는 증거로서 세상 종교를 믿어도 인간은 구원된다"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모든 것이 덧없어[無常] "무너지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법칙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역시 자연법칙이다. 자연계의 생명체가 그렇다. 죽고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동물적 목숨이기 때문이다. 어미 애비 고양이는 죽고 그러나 그 새끼 고양이가 이어져서 그 애초의 조상 고양이 모습을 이어간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뿐인 동식물에 한한다. 우리 인간 중 그 어느 누구가 자기 자식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이어져 간다고 말하는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만 성경에 말씀하셨지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성경이 가르친 데도 없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목적이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다. 이 사실이 확실함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스스로 된 고자도 있으니 천국을 위해 고자가 되는 것으로서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말씀이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고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시대는 끝났음을 밝히심이다.

그렇다고 생육하고 번성하지 말라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제는 말씀 그대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따라서 고자가 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시작됨을 선포하심이다. 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렇게 끝나고 시작됨인가. 이제는 추수기로서 수확하여 거둘 때이기에 그러하다[요 4:35]. 지금은 구원 받는 때이고[고후 6:3] 믿지 않는 이는 심판을 받는 때인 것이다[요 3:18/살후 2:12].

그런 구원과 심판의 때가 오늘날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에 마치 아직 마지막 때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나 그리스도 오신 후로부터 "세상 끝"[히 9:26]은 이미 시작된 것이며 오늘날은 단지 그 시작은 이미 지나갔고 그 끝[마 24:3]일 뿐이다. 끝이든 시작이든 "마지막 때"[단 12:4]라는 것만은 같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셔야 하겠기에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것이지 오신 다음에는 그런 시대 혹은 그런 명령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그와 같이 종결된 것이다.

따라서 세상 종교가 말하는 것은 오직 이 자연계에 한정해서 말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현저한 차이다. 그들도 물론 영적인 것을 말하고는 있으나[왜냐면 자연계와 영계로 된 양면성의 현실은 무시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명백하게 자연계와 영계라는 대립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고 또 설명하지도 못한다. 왜냐면 처음부터 인생은 무상(無常)하다, 덧없다고만 설정하고 못을 박아 버렸으니 이 못을 빼내면 그들의 종교의 전체 구조가 송두리째 허물어지는 까닭이다.

인생은 죽음으로써 끝나고 자식은 자식대로 나와는 별개의 존재이다. 비록 몸은 물려받았지만 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 자식으로서의 별개의 존재다. 이것이 자연계에 속한 다른 생명체와 다른 점이다. 그들 동식물은 육체뿐인지라 그렇게 자기 모습, 즉 자기 존재를 대대로 이어가는 것이지만 인간은 아무도 그렇게 자기가 대대로 이어져 간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영생하고자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슬퍼하는 것이고 종교라는 것까지 생겨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 사실은 이 자연계와는 별도로 영계에 속한 영혼이라는 즉 육체와는 대칭[상칭]적인 존재가 엄연히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자연계의 동식물에게는 없고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영혼이다. 어째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일까. 자연계와 영계의 대칭 구조에서 인간이 전자의 종결이고 후자의 시작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양 세계를 다 통할하여 다스리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까닭이다.

내 영혼과 자식의 영혼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자식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 것이다. 짐승과 사람의 이런 차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 짐승에게는 없는 이 영혼의 기원과 유래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자연계에 속한 짐승에게는 없는 것이므로 이 영혼이란 실체가 자연계에 속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자연계에 속한 것이라면 짐승에게도 이런 영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영혼의 기원 즉 왜 생겨났는지는 오직 성경만이 그 해답을 준다.

그래서 세상 종교는 진리에 터전하지 않고 오직 지어낸 사탄의 황당한 거짓말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와 같이 대칭적 개념으로 말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소위 연기론(緣起論)을 말함으로써 마치 인과율에 충실한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하고 세상은 또 그렇게 인식해 주고 있으나, 이 인과 관계는 3위1체 법칙에서 나타나는 대칭성 원리에서 오는 것이다. 이 3위1체 원리는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이라는 대립 구도를 시발점으로 하는데, 이와 같이 제1원인을 무시하고 부정함으로써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움에 무슨 진리가 묻어 나겠는가.

그러나 그런 세상 종교인들에게 전도할 때 사탄이 지은 종교니까 믿으면 안된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도 믿지 않는데 사탄을 믿을 리도 없고 오히려 그런 말을 하면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이니 불부터 먼저 끄도록 해야 할 것이므로 그런 무식한 말은 절대로 삼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탄 운운" 하는 것은 성경을 믿어[믿어도 '어설프게'가 '제대로' 믿어] 이런 설명도 통하는 이들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니 유의할 일이다.

자연계가 있으니 이 자연계와 대칭적인 별다른 세계가 있는 것이다. 이 대칭 개념에서 인과율이 나온다. 즉 먼저 있고 나중 있고 하는 것과의 차이인데 '먼저 있는 것'으로부터 그와 대칭적인 '나중 있는 것'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칭성을 띄더라도 먼저 있고 나중 있는 차이, 즉 크고 작은 차이, 주된 것과 거기 종속되어 있는 것과의 차이가 두드러지니 부모와 자식 관계도 여기서 생기는 것이다.
 
§ 유대인들이라도 모르는 사실

에덴낙원이 영계였고 아담이 거기서 신령한 몸으로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창세기에 성령의 감동으로 밝혀져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나,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신 말씀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도 이런 유대인의 관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이 사실에 눈뜨지 못하고 있으니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이런 사실을 대체적으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개인적으로는 알고 있었더라도 그것이 기록상 나타나지는 않았으므로] 시편에 인간을 왜 이와 같이 “허무하게 만드셨는가”[시 89:47] 하는 탄식을 잘못 이해한 때문이다. 시편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하셨다는 사실만은 진실 그대로다. 또 그 사실을 두고 한탄하는 것도 현재의 인간 비극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하자가 없으나,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현재의 인생 삶이 허무하다”고 자의적 해석을 내린다면 잘못인 것이다.

그렇게 창조하시어 허무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아담]이 범죄한 결과로 허무해진 것이다[롬 5:12]. 고로 이 시편 구절은 현재의 인간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정상이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그 앞 절에 "주님의 진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습니까"[시 89:46]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인간을 진노 아래에서 만드신 것이 아닐진대, 이렇게 허무하게 된 짧은 인생 삶과 하나님의 진노와의 관련성을 규명하게 되어 있음은 필연이다.

그러나 이렇게 연관해서 생각하지는 않고 “허무하다”와 “하나님의 진노”를 단편적으로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시늉만 하다가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계에 거주할 신령한 몸으로 만드실 의도이셨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씀을 하신 것도 자연계에서가 아닌 에덴낙원에 아담이 거처하고 있을 때였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창조하신 것이 영물들이었다. 이런 영물들은 이미 선과 악으로 분류되어 거룩한 천사들과 사탄과 같은 악령들로 현재 위치해 있고, 영물들이 그런 선별 작업이 완료된 것처럼 지금 이 세상은 인간들이 바로 그런 선별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죄인이요 심판 대상이기 때문에 그런 선별이 불가능했으므로 그런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시어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이유는 그리스도 곧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기”[:31] 때문이다.

심판이 가능해졌다는 것은 이제는 전인류가 다 죄인이 아니라 개중에는 의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그 중에서 악인을 골라내는 것이 심판인 것이다. 이는 모두가 의인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두가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의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바로 그런 "허물치 않으시던"[:30] 과거 시대에 속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성경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벧전 3:20]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옥에 있는 영들”로서, 그리스도 친히 “그 영으로” 그들에게 가셔서 “전파하셨다”[:19]고 했다. 부활하신 후에 그렇게 하셨는지 아니면 부활 전에 그렇게 하셨는지 현재로는[영원한 나라에 가면 모든 것이 명백히 알아지게 되나] 불명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알게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우리의 구원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까닭이다. 우리의 구원과 직접 연관이 없는 것은 성경은 생략해버리고 있다. 창세기에서 물이 왜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또는 땅이 왜 물 속에 들어 있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음이 그 예이다.

이런 것도 모두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지 인간들이 임의로 거짓말로 또는 이것저것 맞추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자체 증명하는 것 중의 하나다. 처음부터 지어낸 이야기라면 반드시 그런 “물”과 물 속의 땅의 내력을 억지로라도 만들어 내려고 했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 것이 거짓말하는 자의 속성인 것이다. 완벽함을 가장하는 것이므로 그런 어중간하고 어수선한 구석을 의식적으로도 남기려 하지 않는 법이다.

이렇게 우선 보기에도 나사 빠진 기계 모양으로 어설프게 나타나 있는 형태가 바로 진리의 강점이요 진실의 증거가 된다. 왜냐면 모든 것을 진실대로 밝히시는 이의 의도가 명백하여 어떤 사실은 밝히고 어떤 사실은 일부러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우리 구원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인간들이 앎으로써 덕될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인간 두뇌의 작용이라 제한을 받는데 또 겹쳐 모든 지식이 있는 악령들이 그런 것을 빌미로 하여 엉뚱한 거짓말을 지어내어 그렇잖아도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하는 터에 더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남녀가 생겨났던 것도 영물들 가운데에는 아무도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창 2:20]. 다시 말해 자녀 생산이 목적이 아니라 짝으로서의 교제가 남녀 성별의 의미였던 것이다. 신령한 몸이었으므로 동물과 같은 그런 방식이 아니더라도 신령한 몸의 능력으로서 얼마든지 자식 생산의 방법이 있는 것이다. 여자가 생기지 않았더라도 아담[이 경우 남자도 여자도 아닌 또는 남성과 여성을 골고루 구비한] 혼자로도 그런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가능한 일이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애초 창조된 근본으로서]라 특유의 생산 기능이 있거나 이미 그 자체 내에 남녀 특질을 내장하고 있기에 주변 영물들의 도움을 입으면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하여 죽은 자로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만 한정되어 버리자, 이미 남녀 양성으로 구분되어 있겠다 그래서 부득불 자연계에 속한 동물과 같은 방법으로 자녀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천국에서는 더 이상 결혼하는 일이 없다 하셨고 천사들과 같이 된다 하셨으므로 남녀 성별이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다.

천국에서는 이제 더 이상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고 “몸의 구속”을 받아 신령한 몸이 된 마당에 그리고 결혼하는 일이 없으니 그런 남녀 별로 육체의 한 몸됨이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여자가 생겨났을 때 성경은 이에 의미를 부여하기를,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것이다”[창 2:24] 하였다. 이런 언급도 어디까지나 기준은 현재 인간의 이 자연계에 속한 상태에 두는 것이다. 범죄하기 전 그 신령한 몸으로 있을 때의 상황을 말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운 줄 몰랐다”[:25]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왜냐면 이런 지적은 현재 인간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을 기준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담 부부만으로 한정되고 그것도 처음 창조되었을 당시 얼마간뿐이었기 때문이다. 범죄 전 당시 아담부부는 자녀를 생산하지 않았었고 또 이 자연계와는 달라 영계의 시간 단위가 어떤 것인지는 현재 우리로서 알 수가 없으나 그 세월을 지난 후 이 자연계에 속한 세상에서 자녀를 낳기 시작한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죽음에 이르지 않았으리라는 것은[롬 5:12]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죽음이 필연이기 때문이다. 고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는 경고 말씀의 그 “죽음”은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영구적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하심이 확연히 드러난다. 고로 인간으로서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있는 한은 죽음이요 따라서 죽은 자이므로 주님께서 그렇게 모든 인생을 “죽은 자”[마 8:22/골 2:13]라 하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이 여럿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주님의 부활하신 몸이 신령한 몸이셨던 것이다. 마지막 아담이시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마치 아담이 그렇게 죽어 다시 살아남과 같은 의미가 되는 까닭이다.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은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난 사실이 됨은 물론이다. 고로 죽음의 대가를 완전히 치른 다음의 다시 살아남은 범죄 전의 몸의 상태로 회복됨을 의미함은 당연하다.

그런 ‘회복된’ 상태의 몸이 바로 신령한 몸이셨던 것이다. 그리고 사탄을 성경은 “옛 뱀”[계 12:9/20:2]이라고 거듭해서 분명히 말하여 에덴낙원이 영계임을 밝히고 있다. 왜냐면 창세기의 그 “뱀”이 에덴낙원의 땅[“ground”, 자연계에 속한 땅의 흙(“dust”)으로 인간이 창조된 것과 대조하여 밝혀 영역(英譯)은 이 둘을 명확히 구별하고 있음]을 소재(素材)로 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영계에 거처할 수가 없으므로 아담 역시 신령한 몸으로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창세기 기록이 바로 이 모든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이유는 이미 동식물이 창조되어 있는데도 단지 에덴낙원을 창설하셨다고 해서 되풀이해서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실" 리는 없기 때문이다. 창조는 무에서부터의 유의 창출이기 때문이다. 즉 이전에 없던 것을 만드심이니 뱀을 또다시 만드실 리가 없고 에덴낙원에서 만드신 것은 자연계의 뱀과 대칭으로서의 에덴낙원의 “뱀”이니 영물(靈物)인지라 그래서 성경은 “용(龍)”[계 12:9/20:2]이라 하는 것이다.

용과 뱀은 겉 모양은 비슷하나 완연히 다른 별개의 존재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뱀”이라 하였으므로 자연계와 대칭 관계를 이루고 있는 영계(靈界)로서의 에덴낙원임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에덴낙원의 식물도 생명나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등으로 대표되는 것이니 이들 모두가 신령한 식물이다. 영생하게 하는 정도의 나무인데 어찌 아니라 하리요. 그리고 사람의 영혼은 불멸이다. 영원성을 지니는 영혼에다 한시적인 육체의 생명과 결합시키실 리가 없다.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죽음을 용인하시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이 아담의 범죄 탓임을 분명히 했다[롬 5:12]. 그러므로 아담은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존재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우리 위해 사람되신 주님께서는 “죽은 자”로서의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연출하신 것이니 곧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이시다. 그래서 그런 죽은 자의 모습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이사야 53장 예언은 묘사한 것이다.

§  미리 아심, 미리 택하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미리 아시는 자를 미리 택하신다[벧전 1:2/롬 8:29]. 우리 각자 자신의 자유 의지를 따라 어떻게 행할 것을 미리 보신다는 의미이므로 우리로서는 전혀 그것을 하나님의 간섭이라 보지 않는 것이다. 각자의 운명은 그래서 각자가 결정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시는 것도 또는 현재 간섭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모든 일도 아니다. 최종 결정자가 순수하게 자기 자신이라는 의미가 이 "미리 아신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로마서에 있는 대로,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낼 때 이집트 왕 바로의 마음을 하나님이 완고하게 하신 것도 이 미리 아심에서 나는 것이니 처음부터 바로는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거역하는 유형의 인간임을 그 스스로 증명하는 것에 불과함이었다. 그런 인간형이기 때문에 그렇게 완고하게 만드셨다는 것이 바울의 설명이다. 자기 자유 의지로 얼마든지 그 바로 왕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억지로 그 의지를 꺾으셔서 당시 상황에 맞도록 행동하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가 그렇게 나아가게 되어 있는 것을 미리 아시고 그런 무대에서 그런 역할을 맡게 하신 것이다.

일찍부터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세상에 태어나 선하고 악한 것을 행할 기회도 없었지만 이렇게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에 따라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였다"는 사실로 나타난 것이다. 야곱도 처음부터 거짓되고 사악하고 탐욕스러웠으나 그러나 진리를 알고 나서는 그 모든 전비(前非)를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된 반면, 에서 같은 경우는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는 ("팥죽 한 그릇"이라는 말 그대로 아무리 장난 같은 일이라 할지라도 자기 마음에 있는 그대로의 표출이기에 그래서 중요하고 그것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세상 지내면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무시하게 되어 있는 인간형이었던 것이다.

그런 인간형이 있다는 것이라기보다 결과론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에서는 이방인 여자를 아내로 삼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부모의 경고도 무시하고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삼아버렸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을 이미 미리 아셨다는[foreknowledge-롬 8:29] 것이 하나님의 미리 택하심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 떨지 않고 완전 무시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미리 아시고 "에서를 미워하셨다" 하신 것이다.

반면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줄을 미리 보시고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말씀을 하시게 되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그 후의 행적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이 미리 택하셨기 때문에 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하는 그 부모의 말을 듣지 않게 되고 야곱은 그렇게 믿음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유의지로써 각자 그렇게 자기 길을 택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렇게 되도록 즉 하나는 그 믿음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정하시고 다른 하나는 그 믿음 없는 대로 즉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길로 풀리는 길로 정하신 것이다.

이 정하신다는 것이 각자의 자유 의지의 간섭이 아니니, 예를 들어 믿는 자의 경우 그 믿음대로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조처를 취해주시지 않으면 사탄의 방해와 각종 장애로 그 믿음의 길이 막혀질 수 있는 상황에서 그 길을 미리 정비해 놓으실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즉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자기 자유 의지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만 미리 정리, 정비해두시는 것을 일컬어 “미리 택하심”이라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인생 각자 자기 자유 의지대로 행동하고 빈번한 각종 사고사건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것이 세상 일인데 그렇게 미리 정비해주시는 일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 믿음대로 우리 앞 길을 스스로 헤쳐 갈 수 있겠는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복음은 회개 다음에 얻는 은혜, 또는 회개와 동시에 얻는 은혜이기 때문에 이 회개의 성격상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의 법질서에 대한 순종을 전제로 하는 또는 수반하는 구원이다. 성경에 "믿어 순종에 이르게"[롬 16:26] 한다는 표현이 나타내는 의미는 절대적이다. 즉 순종은 믿음을 의미하고 믿음은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즉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순종이니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그래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다. 순종은 이런 사랑의 순종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조물주께서 그 피조물을 사랑하시니 그 뜻을 받들어 피조물 상호간에 사랑하는" 것이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은 자기 부인에서 나오게 된다. 자기 부인이 없이는 서로 사랑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자기 부인은 주님께서 나를 전적으로 위하시므로 나도 주님을 전적으로 위하는 이 기본 토대 위에서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주님을 우리 모두의 공동의 머리로 모셔서 다 같이 한 몸이 되어 있는 구조이기에 필연적이고 또한 가능하다. 몸과 머리 관계에서는 서로 상대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적이다. 재론을 요하지 않으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구조의 특성상 그러하기 때문이다.

머리 없이 몸, 몸 없이 머리가 존재하는 것부터가 불가능인 것이다. 단지 우리의 경우 신체와 같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기에 성경에 그와 같이 경고가 많은 것이다. 마음은 항상 유동적이고 각자 자기의 의지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심하여 처음의 자세를 견지하기에 전심전력을 다하면 잘 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든 자기 마음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닦달하여 "지키는"[잠 4:23] 것이 필수이다. 아담이 감히 선악과를 먹으리라고 꿈엔들 생각했으랴.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 '현실' 앞에서 "두렵고 떨라"[빌 2:12]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지 못하니까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12]는 것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12] 하고 "네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는 것이다. 우리가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지켜야 헛되이 믿지 않는 것이 되고 그래야 "구원을 얻을 것"[고전 15:2]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구원을 과거 완료된 뜻으로는 일언 반구도 없다. 모두 미래 지향적이다. 이는 우리의 믿음의 의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원인'을 제공하고 그 '결과'는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현재의 '원인'을 가능하게 한 것은, 과거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그 '원인'의 '결과'라는 역시 엄정한 인과(因果) 관계에 있는 것이다. 때로는 결과가 원인이 되기도 하고 원인이 결과이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에서나 이런 인과 관계는 예외 없이 분명한 것이다.

삶의 이치, 그 법질서는 다른 데에 있지 않고 이와 같이 몸과 머리 관계에 있는 것이다. 죄와 악, 불의, 불법은 이 이치를 지키지 않아서 생기는 결과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삶의 구조와 그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서는 세상 그 어느 종교에서도 구경할 수 없다. 모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세상 종교를 따르는 정당한 사유(事由)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대안(代案)은 내어 놓지 못하고, 단지 수박 겉 핥기만으로 그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을 단지 이상적인 따라서 추상적인 기준으로만 정해서 저 멀리 세워두고 바라다보기만 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福音, 좋은 소식)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자기 자신을 다 들여 위하신다는 증명이기에 그 몸의 각 지체를 이룬 우리 각 사람은 얼마든지 그 몸의 지체로서 절대적인 복종을 할 수 있고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바로 "율법의 요구"[롬 8:4]. 그래서 성경은 이 율법의 요구가 폐기되었다 하지 않고 이루어졌다 하고 이루어진다 했으며[:4] 이루어지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이루어진다[:2,4]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한 모든 문제는 순수하게 우리의 믿음에 있고 사랑에 있다 함이다. 믿지 않기 때문에 사랑함이 없고 사랑하지 않으므로 자기 부인이 없는 것이다. 이는 한 몸 체제 안에 있지 않고 자기 홀로 외따로 떨어져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생명에서 제외되어 있으니 당연히 생명의 일 즉 복종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는 행동은 오직 죽음이요 그리고 죄로서, 자기중심이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이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심판대 앞에까지 이른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서 자기의 생명을 이 세상에서 미워한다고 해서, 무조건 자기를 혹사한다거나 자기를 학대한다거나 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될 일이니 그런 것과는 차원부터가 다르다. 자기 부인이란 것은 자기를 자기 소유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내가 나의 것이 아닌 동시에 나는 엄연히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것으로서 잘 간수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 모든 것은 주님 친히 먼저 그 자신을 내게 선물로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즉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자기를 위하면서도 주님을 위한다고 자기 자신까지 기만할 경우도 없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때는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치시는 대로 행함 즉 사사로운 이해관계 없이 오직 주님만을 위한다는 의지와 인식 아래 행동하면 얼마든지 그런 혼돈에 사로잡히지 않고 넉넉히 자유인의 행동이 될 수 있다. 항상 모든 일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고 기도하면서 주님과의 사랑 가운데서의 끊임없는 복된 교제를 이어 나가면 그것으로 풍족하고 만족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헛된 생각에 대해 항상 자신을 경계하고 닦달해 나가면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나가고 그리스도의 군인된 임무로서의 고난을 기피하지 않으면 그런 부질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겨를이 없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음을 설명하면서 바울이 말한바 "율법의 요구"(롬 8:4)가 바로 이 생명과 사랑의 법인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한 것도 이 사랑의 법질서를 지키지 못함에서 온 탄식이었다.

모세 율법과 하나님의 율법을 혼동하지 말 것이다. 성경에 이를 명시하지 않고 설명해 나간 대목이 더러 있는데 이런 것은 전후 문맥을 살펴가면 혼동할 이유도 사실은 되지 않는다. 모세 율법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계율이지만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유효한 것으로서 그리스도 오시기까지의 예비 교육 차원에서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그림자' 격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하나님이 율법은 처음부터 즉 창조 당시부터 시행되어 오는 그래서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사람 삶의 기본 도리 곧 생명과 사랑의 법질서인 것이다.

그래서 “그림자”로서의 모세 율법 즉 바울이 말한 대로 “날을 지키고 달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하는 등의 상징에 불과한 것은 “참 실체”이신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어 있음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기 붙잡혀 얽매여 그런 것들을 지키려고 하는 일부 미개(未開)한 이들로 말미암아 야기된 교회 분란의 문제 해결을 위해 바울이 그와 같이 “율법”의 폐기를 강조한 것이지 사랑의 법질서 자체를 언급한 것은 아니니 이런 것을 제대로 분간 못하여 엉뚱하게 해석하는 오늘날 모든 종교인들의 해석은 실로 한심하고 천부당만부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법마저 모세 율법처럼 여겨 한꺼번에 몰아 청소해버리려는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있음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점에서 명백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 아니니, 애매 모호하게 남겨둘 리가 만무하다. 성경을 통독하면 얼마든지 명료하게 모든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인데 어찌 달리 나타날 수 있으리요. "남을 사랑하는 이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하였고,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어 있다"고 하였고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롬 13:8-10)는 등의 모든 대목이 바로 이러한 정확한 설명 그대로이다.

모세의 율법과 사랑의 법질서 자체를 엉뚱하게도 혼동하여, 그림자에 불과한 모세의 율법에서 벗어나라는 당시에만 해당되는 바울의 설명을 오늘날 난데없이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착각하니, 발뿌리에 채이는 돌을 걷어찬다는 것이 신고 있던 신발까지 날려 보내는 꼴이 되어 한 쪽 발은 맨발로 사는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일부 기독교회로 자처하고 있는 집단들의 현재 모습이다.

이렇게 실질적이고 핵 적인 내용을 빠뜨렸으니 꾸민다는 것이 겉 모양뿐이다. 그래서 더욱더 종교 형태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교회 건물의 장중함과 화려함을 나타내려 하고 교인 숫자 자랑이나 하고 소위 성직자라 하여 그 권위만 내세우려 든다. 완전히 세상 종교의 하나로 끼어 들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배도(背道)”[살후 2:3]이다. 그러나 이런 배도의 현상이 적(敵) 그리스도 출현 전에 먼저 온다는 것이지, 배도 중에 적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말은 아니니, 우리는 오늘날 계시록에 예언된 대로 "두 감람나무"의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이다.

야곱과 에서로써 우리에게 주는 경고는 에서는 "이같이 크신 은혜를 등한히 여기는"[히 2:3] 결과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열매 맺지 못하는 자는 내치시고 "열매 맺는"[마 21:43] 이들이 대신 차지하는 것이다. 먼저 받은 사람은 그 "면류관을 빼앗기고"[계 3:11] 다른 사람이 차지하는 것이 에서와 야곱이 주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을 것이다" 하신 대로다.

하나님의 나라를 얼마든지 "빼앗길" 수 있는 것이다. 빼앗기는 것은 이미 받은 자이거나 받기로 작정된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의미는 같다. 둘 다 "빼앗긴다"는 점에서는 공통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천국은 스스로 쳐들어가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 하셨다[눅 16:16/마 11:12]. 다시 강조하거니와 빼앗아 차지하고 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키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는 것이 천국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이 아닌가.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 경고하심이다. 이 바로 생명으로 들어가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길"[마 7:14]이 아닌가. 그래서 성경은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스스로 이루라"[빌 2:12]는 것이다.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하였다. 이렇게 힘쓰는 방법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는"[벧후 1:5-7] 것이라 하였다. "이런 것이 흡족하게 있어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8] 것이다.

열매 맺는 방법이 이런 것이다. "더욱 힘씀"이다. 즉 절대로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안되는 것이다.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탄이 얼마나 함정을 파놓았기에 그래서 그 목적대로 달성했기에 거의 모든 사람이 한번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면 그 길로 만사태평인 것처럼 여겨 세상 일에만 몰두하게 만들었는가. 단지 믿음이 있다는 증거로[믿으면 구원된다는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받아 들여 겉 핥기로 알아놓고는] 일주 한두 번 교회당에 나가 주는 것으로써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충성, 사람으로 착각한다.

또다시 '산 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있는데 또 무슨 '산 자'가 될 필요가 만고에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 경우 '산 자'로서 마땅한 자세, 태도, 즉 '산 자'로서의 당연한 삶을 나타내어 보이라는 것이 아닌가. 이전처럼 죽은 자의 행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열매다. 나무를 심었으면 그 해당이 되는 실과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아 산 자가 되었으면 그 산 자다운 바 곧 실천할 것을 마땅히 실천해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열매다.

이 열매 맺음이 바로 구원하시는 목적인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산 자로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9] 것이다. 그래서 이 열매 맺음 곧 우리를 산 자로 만드신 목적에 대해 명백히 경고하시어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눅 13:7] 하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마 7:22] 이 열매를 엉뚱한 데 즉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말함]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22] 그런 것에다 결부시킨다. 열매 맺음은 자기 부인인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를 위해 산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닌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21]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시는]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열매 맺는 바탕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거기에다 30배든 60배든 100배든[마 13:8] 결실이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이 아니면 어쨌든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음이다. 과원 주인이 열매를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모든 할 일, 해야 할, 필요한 일을 다 했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가 열매 맺기를 바라실 때는 우리가 구원될 수 있는 모든 요건을 넘치도록 충분히 채워주심으로써 하나님으로서의 몫은 남김없이 다 이루셨음을 의미한다.

오직 내게 달린 것이다. 나 자신에게 달려 있어 나 아니고는 안되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몫이기 때문에 주인으로서의 하나님은 열매를 기다리시는 것이요 그래서 열매가 없으면 이제까지 하나님 친히 이루신 모든 것 즉 나의 구원, 산 자로 만드심, 다시 출생함, 새로 창조하심 등 모든 일을 모두 무효로 돌리시는 것이니 곧 "어찌 땅만 버리느냐, 나무를 찍어 없애라" 하심이다. 이 열매 맺는 일은 과수원 주인이 하는 일이 아니라 나무 스스로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하는 일을 주인이 할 수 있다면 나무를 찍어버리라 하지 않을 것이다. 나무가 한 그루 덩그렇게 세워져 있다는 것은 우리로 말하면 우리 구원의 완성을 말함이다. 그래서 완결이기 때문에 하나님 친히 완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오직 그 이미 이루어진 사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 우리 구원이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고 이루어야 할 일이지만 우리 자신 죽은 자였기 때문에 일절 할 수 없었던 것을 우리를 위해 친히 해 주셨기 때문에 은혜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산 자로서 당연히 산 자답게 움직이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니 곧 자기를 나무로 세워 주시고 가꾸어 주시고 공들여 주신 주인을 위해 열매 맺는 일이다. 이 일을 우리가 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면 죽어 있었기 때문에 일절 움직일 수가 없고 따라서 일절 그런 산 자에 관련된 일은 하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은 것이다.

오직 빛을 들이댐으로써 어두움이 어두움이라는 실상이 드러나듯이 그래서 스스로가 어두움을 알게 되듯이, 죄인되고 죽음밖에 없는 현실을 절감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선하시고 신령한 세계에 속한[롬 7:12,14] 하나님의 생명의 법질서 즉 계명과 율법을 알도록 하시고 인생들로 맛보도록 해야 하는 것이고, 이 목적으로 모세 율법[일정한 절차를 따라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써 상징된]의 여러 가지 규정과 예법(禮法)을 지키도록 하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율법[계명]을 또한 맛보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죽은 자이므로 지킬 수가 없다] 우리 인생들이 생명의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되고 죽은 자임을 일깨워 주어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시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됨으로써 이러한 생명의 원리원칙이 되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비로소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내가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이 주님의 비유에 따르면 '나무로 세워진' 사실을 말함이다.

그러나 우리 구원은 새 창조로서 새 창조는 이로써 끝난 것이다. 이는 아담이 영원히 사는 자로 창조되어 혹은 영물들 역시 영원히 사는 피조물로 창조된 것과 같음이다. 사탄 등 영물들이나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가 미완성이라 범죄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창조를 "6일만에" 모두 마치시고 안식하신 것이다. 우리의 구원 즉 새 창조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끝난 것이다. 죽으시기까지가 문제였었다.

부활은 그렇게 일단 죽으셨으므로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죽으심으로써 모든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반드시 부활이 있어야 이 양면으로 인해서 우리 구원이 완결됨이다[고전 15:14-18].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죽으시기까지가 고비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죽으심을 완성하심으로써 이미 일은 다 끝났으므로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처음부터 죽은 자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나 위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되시어 내 죄를 짊어지시고 그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내가 마땅히 할 일[의당히 죽어야 하고 죽었으면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 등]을 하셨다는 것은 "나 대신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해도 말은 맞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내 이름으로 내가 하는 듯이 그 모든 과정을 밟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으로 끝나는 데에 "그리스도 나 대신하신 죽음"으로 교리를 삼는 악폐인 것이다. 반드시 내가 죽었다는[고후 5:14/갈 5:24]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필수 불가결한 구원의 양면성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간단한 사실을 가지고 사탄은 후자[내가 함께 죽음]를 가리고 감추고 전자[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셨다는 단순히 그 사실 하나]만 부각시켜 이단사설을 만든 것이다.

나 위해 즉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실제는 나와 함께 죽으시는 의미에서 그렇게 내가 치를 일을 나를 대신하여 치러 주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내 안에 그렇게 나 위해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한 사람으로서 임하여 오심으로써 현실화, 구체화, 실제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부활하셔야 그래서 나와 하나가 되시는 것이 나의 구원인 것이다. 이렇듯이 하나님 단독의 일이기 때문에 나를 새로 창조하심이고 다시 출생케 하심이다.

그러나 아담이라는 '나무'가 세워지고 사탄이라는 '나무'가 세워진 것은, 즉 창조된 것은 열매를 맺도록 하심 다시 말해 생명의 체제로서의 한 몸의 원리 곧 하나님 친히 우리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 몸의 각 지체로서 영원히 둘 또는 양면이[혹은 대칭(상칭)을 이루는 대립성을 띤] 하나로 존재함으로써 3위1체 원리를 따른 영원히 행복한 삶의 낙을 누리는 산 자로서의 마땅한 본분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열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를 위해 산다는 이 기본 법칙을 따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열매 맺지 않았고 거룩한 천사들이 열매를 맺은 본이 되어 있는 현실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른"[벧후 1:8] 데에 있음을 베드로는 명백히 했다. 이는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3] 하는 경고와 맞물린다. 그리스도를 알기에 마땅히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에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한번 믿었다 하고 구원받았답시고 태평으로 지내는 사람은 우리의 다시 출생함, 새로 창조되는 것을 마치 육체로 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를 구별하셨다[요 3:6].

그리고 육으로 나는 것이나 성령으로 나는 것이나 자살 행위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둘 다 공통이다. 육으로 나도 자기가 자기 육체의 목숨을 끊으면 그만이다. 그러면 성령으로 난 경우의 자살 행위는 무엇이냐 할 때, 자기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자기 발로 밟고 자기 스스로 다시 십자가에 못박음이다[히 6:6/10:26,29]. 이것은 육으로 난 경우의 자살 행위가 아니라 성령으로 난 경우의 자해(自害) 행위이므로 실제 그런 상황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앞에서 말한 대로 자기중심이 되어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고후 5:15] 사는 것이 아닐 바로 그 경우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니 아들을 아는 이가 아버지 외에는 없고 아버지를 아는 이는 아들과 아들께서 계시해 주시는 자 외에는 없다고 하셨으므로-마 11:27] 찾고 구하고 두드림으로써[눅 11:9,10] 부지런을 다하지 않고 게으른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을 알 까닭이 없으므로 세상에 마음이 있고 결국 자기를 위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있음이다. 사람으로서 사는 낙이 없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그것이 영적이든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것이든 사는 낙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있든가 아니면 저것이 있든가 하나는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으니 이는 물과 불을 함께 섞어 가지려는 불가능과 같다. 반드시 둘 중 하나만 남게 되고 다른 나머지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 불이 강하면 물을 핥을 것이요 물이 강하면 불을 꺼뜨릴 것이다. 두 대립되는 성질이다. 이는 빛을 파동이라고 인식하여 그렇게 다루면 절대로 입자로 나타나지 않고 또 입자로 인식하여 실험하면 반드시 입자로만 드러내지고 파동으로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이 둘은 하나로서 조화하는 것이고 결코 상치되지 않는 것이라고 믿어 주창한 것이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끝까지 이를 수용하지 않은 채 죽었다. 오늘도 서로 대립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보어의 편이 약간 우세하다고만 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 3윈1체의 원리가 3운법칙으로 증명됨으로써 보어의 주장이 옳은 것이라고 영원히 확고하게 손을 들어 준 것이다. 보어는 중국에 여행 갔다 와서는 소위 음양이론에 깊이 심취했었다.

중국 철학의 음양 이원론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당연히 그렇게 되어 있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을 구명(究明)한 것으로서 처음부터 무슨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단지 이를 증명할 수 없었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각광(脚光, spotlight)을 받지 못했는데, 물리학에서 물질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지면서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보어가 인정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보어는 3위일체 원리를 그 정확한 것으로서 알지는 못했으나 그의 상보성 원리로 부분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상보성 원리는 3위1체의 원리의 일단(一端)을 말한 것이다.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확신은 했으나 그 역시 증명하지는 못한 것이다. 증명했다면 아인슈타인도 그와 논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논란에 휩쓸리다가 결론도 보지 못한 채 타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보성 이론을 입증해 준 것이 3위1체 원리요 이 삼위일체 원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 3운법칙인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인과론도 함께 증명해 준 것이다.

§ 무조건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은 생명에서 이탈하는 행위다.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러하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실 때부터 시작된 엄정한 삶[생명]의 법질서이니 머리와 몸 관계에서의 하나로서의 체제가 삶[생명]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몸을 위하니 몸은 당연히 머리를 위해야 제격이고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그 한 몸 체제 곧 생명이 체제에서 분리시킴이다. 그것이 죽음 즉 죄[자기중심 곧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의 값[대가, 보응]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무엇을 명령하시든 또는 그 어떤 계명이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위하고 우리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 구원도 "산 자로서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목적임[고후 5:15/롬 14:7-9]을 밝히고 있지 않는가. 예를 들어 우리가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룸"[빌 2:12]도 바로 그 전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위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원을 이룸"이다. 이상한 말 같으나 결코 이상한 말이 아님은 우리가 사는 것[죽는 것이 아닌]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고전 10:31] 말에나 일에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골 3:17] 그리스도를 위함 삶이기 때문이다[갈 2:20].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순리이다. 우리가 워낙 그동안 죄 가운데 살아 자기중심이 삶의 본 모습, 참 모습인 양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나 실은 그 정반대다. 아주 제대로 된 삶의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하게 이루어 주리라고 약속을 하시지만 반드시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심이 그 한 예이다[겔 36:37].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약속하신 것인데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면 하나님은 믿음직스럽지 못하시고 우리가 보채야 겨우 이루어주시는 것처럼 착각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럴 리가 없다.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시고 또 약속하시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그렇게 기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한다는 그 뜻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그렇게 기도한다면 방금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못미더워 보채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을 이룸도 이와 같이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니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 이름으로 하는[천사들이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그들의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친히 하시는 일로서 성경에 표현되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어도] 산답시고 살아왔지만 열심을 내고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르면 그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부지런히 일함으로써 생을 꾸려 왔는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바로 그와 같은 자세가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는다"[벧후 1:8]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우리가 이전에 우리 자신을 위해 살던 때 게으름을 피움으로서 가난하게 되고 자신을 망친다고 믿었던 바로 그 결과가 현재의 우리에게 똑같이 임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말씀, 내용, 명령은 헛말, 헛구호가 아닌 것이다. 진실 그대로 사실 그대로 영원한 삶의 진리를 진솔하게 밝힌 것인데 너무나 우리의 선입관, 편견으로써 무시함으로서 거의 자멸 행위를 자초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스스로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이와 같이 삶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에 있고 그래서 갑은 을의 삶을 살고 을은 갑의 삶을 살아 둘이 영원히 하나로서 사는 것이므로 그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그것이 양식이므로[4:34]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굶어 죽는 판이 나는 것이야 자명하다.

영적으로 굶어 죽음이니 곧 영생에 이르지 못함, 우리 구원의 무효화이다. 아담이 사는 자로 창조되었으나 그 스스로의 행위로 인해 그 산 자로서의 현실을 당장 무효화시키고 죽은 자가 되어 버린 것과 같은 이치다[롬 5:12]. 사탄 등 악령들이 그렇게 되어 이제는 영원히 멸망하는 자가 되어 있음과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결과론적으로 죽음이니 우리의 구원은 산 자가 됨에 있고 영생하는 것이 생명 가운데에 있는 것인데 우리 스스로 이렇게 생명에서 벗어나니 죽음을 자취함이요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 생명을 이루라 함이 아닌가.

아담에게는 생명을 받아 엄연히 산 자이지만 그 스스로 그 생명을 이루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곧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분부이셨던 것이다. 그 스스로 생명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 스스로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닌가. 누가 뺏은 것도 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이 창조를 취소시키신 것도 아니다. 피조물 스스로 즉 아담이나 사탄이나 악령들이 자기들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 함이 당연하다.

모든 일은 양면성을 지니고 동시성을 지닌다고 함이 옳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 우리가 스스로 이루는 일로 양분된다. 하나님으로서는 우리를 위해서 하셨다. 이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부분이 우리에게 부과된 셈이다. 셈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러하다. 영원히 그러한 생명의 법질서다. 즉 우리가 살리심을 받아 산 자가 되어 새 창조하심을 입고 다시 출생한 상태이라면 마땅히 산 자로서의 본분, 본무를 다함이니 그것이 바로 한 몸 체제에서 오직 머리를 위함 즉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 곧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롬 14:7-9/고후 5:15].

그렇게 살지 않으면 여전히 죽음의 행각(行脚)일 뿐이니 그래서 이것이 우리의 구원을 우리 스스로 이룸이다. 우리가 하는 것, 하게 되어 있는 것은 모조리 하나 남기없이 전부가 다 하나님을 위함이다. 왜냐면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친히 하시기도 하고 그 피조물을 통해서 하시기도 하고 그런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내가 그에게 하지 않은 것은 이 한 몸 체제에서 내가 할 몫을 하지 않은 것이므로 내 스스로를 생명의 체제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가 되니 "나는 너희를 모른다"[마 25:45] 하시는 것이다.

알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면 알고 나면 이것처럼 자연스러운 또 당연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살지도 않은데다가 갑자기 180도 전환을 하자니 충격이 아닐 수 없음이다. 그래서 자기 혼자만의 축복이라 하여 자기중심으로 자기에 맡겨진 의미[이웃에게 구제하라는 목적으로]의 재산의 부유함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누리는 것으로 착각해왔던 부자 청년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과연 구원을 얻겠습니까?"[막 10:25] 한 것이다.

한 마디로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현재]으로서는 할 수 없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니 지리를 가르치시고 그것이 정상인 줄로 깨닫게 해 주시면 될 일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알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66]하고 떠난 "많은" 제자들만이 경솔해서 자기 운명을 망친 것이지 알고 나면 충격을 받을 일도 놀랄 일도 어려울 일도 없다.

경솔함이 탈이다. 사탄 역시 제 잘난 맛에 경솔했던 것이다.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담지 못한다. 한번 실수가 아니라, 사탄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런 행세로 일관하는 것을 보아서도 그 스스로 그런 불의한 길을 좋아한 것이 입증됨이다[살후 2:12]. 버림으로써 백배[이는 '곱절'의 완전 수(數)다]나 도로 받는 것이 자기 부인이고 이와 같이 삶의 법도를 준수함으로써 얻는 상[reward, prize]이요 보답이다.

그러면 그런 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 어찌 되느냐, 그냥 그런 상만 못받았다 뿐이지 그냥 그대로 사느냐 하면 천만에, 죽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가 상급(賞給)을 뜻함이 아니라 곧바로 생명과 직결되고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인데 왜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잘난 체하여 내가 더 많이 아는 척하여 자멸에 이른다는 말인가. 그것이 상급이든 생명 자체이든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일체의 행위 즉 자기중심은 용납되지 않는 것을 성경은 그렇게도 누누이 되풀이하여 가르치고 있건만 왜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인가.

만일 영생을 그대로 지니고 상급만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상급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득이고 명예이고 그러니 자기중심이다. 그런 자기중심의 일을 성경이 시킨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결론읻. 그래서 성경의 진리는 사람의 학문으로[알고 보면 너무나 간결하므로 학문이라 할 것조차도 실은 없는 것이다]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가르쳐 주셔야[요 6:45] 계시해 주셔야[요 6:44,45,65/ 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1:25-27/16:17] 안다고 하신 것이다.

학문이라 해도 어렵다고 할 것인데 계시라고 하니 더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할 것이다.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계시는 어린 아이 같은 이들에게 하나님 친히 나타내 주시는 것임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눅 10:21]. 그래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신 것이다[마 18:3]. 그러면 어린 아이들만 모아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믿게 하셨던가? 한번도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 성경에 없다. 당연하다. 사탄이 호시탐탐 노리는 이 세상에 어린 아이들이 믿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모진 핍박이나 환란을 견딜 인내와 대담성과 장부(丈夫-고전 16:13) 같음이 있는가? 어린 아이는 그 부모가 전도하여 교육시킴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방법은 성령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갈망하는 가운데 부지런을 다함으로써 계시를 받아 깨닫기를 힘씀에 있으니 세상 학문처럼 문구에 집착하여 여러 번 강조했다고[예를 들어 바울이 당시 교회 상황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어려 차례 반복해서 강조했다고 하여] 그것이 중요한 것인 줄 알아 낭패를 보는 것이다. 성령의 가르치심은 단 한 번 나오는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벧후 1:8] 하는 이런 구절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몸과 머리 관계


“우리에게 일용(日用)할 양식을 주시는”[막 6:11] 분으로 하나님을 밝히셨다. 매일 먹을 양식[곡식이 아니라 입에 직접 넣을 수 있는 먹을 것]을 주시는 것이니 이는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것과 같은 모습이시다. 바로 이런 매일의 동작은 우리가 양식을 먹음으로 인하여 산다는 의미와 통한다. 
먹고 마시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므로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 것이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요 6:55-58] 하셨다.

“조상들이 먹었다”는 것은 과거 광야교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려 온 만나를 먹은 사실을 가리키심이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人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印) 치신 자다”[:27] 하심과 같다. “썩지 않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킴이신가를 사람들이 알아듣고 여쭙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4:34] 하셨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 하심과 같이, 하늘로서 내리신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그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형상과 실체와의 관계이기도 하다. 형상이라는 것은 항상 실체를 나타내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고후 4:4].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들이다.

실체로서의 영혼의 형상이 육체임과 같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보낸다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신 것이다. 이는 아담의 코에 숨[生氣, the breath of life]을 내쉬심으로써 아담 안에 영혼을 만드실 때와 똑같은 동작이시다. 이로써 우리 각자 곧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 안에 그리스도라는 영혼 즉 ‘실체’를 성령으로 받아 모시고 있는 이들인 것이다. 형상 스스로가 일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말하고 일하는 것를 형상은 단지 나타내는 구실을 할 뿐이다.

그래서 형상은 언제나 영원히 실체로부터 "보내심"을 받는 역할이다. 왜냐면 '실체'를 나타내는 말, 동작 등 ‘일체의 표현’이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요 1:1]이시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이렇게 실체와 형상의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만유 곧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이요 표현인 것이다[롬 1:20]. 아담이 애초 만유를 다스리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시라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담의 유일한 권위였던 것이다. 기타 면에서는 처음부터 영계의 땅[“ground”-창 1:20, 인간 창조의 “흙(dust)"과는 표현부터가 달라]을 소재로 하여 창조된 영물(靈物)들이 모든 지식에서는 월등하다. 오직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왕권의 홀(笏, scepter)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자신부터 말씀을 벗어나고 거역한 자가 되어버렸으니 그 죄의 결과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이로 인하여 온 땅이 저주를 받는 등 요동 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인생 구원의 요건이 된 것 역시 마땅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과 순종의 뿌리는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증이 된다[롬 5:8]. 그래서 믿어야 구원된다는 조건이 제시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믿음에서 떨어지면 구원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마련이다.

처음 사랑을 버리면[계 2:4] 자기 구원 역시 버림이 된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것이다. 육체 없는 영혼이 죽은 자가 됨과 같이 영혼 없는 육체 역시 죽은 것이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 그 형상 노릇 못하고 머리에 대하여 몸 역할을 못하면 죽은 것이니, 힘써 형상 노릇을 하도록 몸이 지체 노릇을 하도록 자기 스스로를 편달하는 것이 "구원을 이룸"[빌 2:12]이다.

이는 세상 종교에서 자기 완성을 이루어야 구제된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차원부터 다르다. 이미 설명한 대로 그들은 '몸과 머리'로서의 관계가 설정됨이 없다. 그냥 막연히 사람이 해탈하여 자유인이 되면 그것으로 이상 세계는 이루어진다는 식이다.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이 몸과 머리의 설정은 영원한 미래에 대한 확실한 삶의 보장을 설명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애매 모호하게, "현재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하면 영생하여 행복하게 산다"는 말이야 아무 구체성도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된다.

그러나 몸과 머리의 체제로 영원히 살게 된다고 하게 되면 그 영원한 세계에 가보지 않았지만 그 세계가 어떻게 운영되고 그 성격이 어떠할지는 지금 우리가 이 현재에 처해 있어도 확연하게 알 수 있음이니, 현재 우리의 신체 구조를 보아서도 넉넉히 상상이 가고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비단 영원 세계에서만 아니라 현재 이 세상에서도 그런 삶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니 신체의 조직과 같이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해 살면 그것으로 충분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복음의 확실성과 구체성은 이것이 단지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고 인식하는 것과 같이 이상론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자기를 전부 바친 머리로서의 영원히 확고한 자세]으로써 확증된 토대 위에 우리 각 사람이 그 지체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다. 단지 이 이치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사실을 "믿어야" 함이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이다.

세상 그 어느 종교도 이런 몸과 머리 관계를 말해도 그것이 추상적으로 끝나는 공리공론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같은 확고한 증거[머리가 그 몸을 위해서만 오로지 사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이토록 의미 심장한 것이다. 단순히 우리 죄 위한 '하나님의 희생 제물'로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 덕에 천국에 들어가 영생한다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머리와 몸의 관계처럼 이상적인 인간 삶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을 수 없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단지 말뿐인 이상론으로만 그치지 않는]이 일찍이 제시된 적이 없음을 명심할 일이다. 때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한 것이다. 이런 말이야 세상 그 어느 종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구 구체적인 방법과 설명을 절대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친히 그 창조주로서의 사랑과 결단으로 이룩하신 이 머리와 몸의 관계에 의한 유일한 방안(方案)뿐인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이상적인 것인가. 우리가 알아듣기에 아무 거침이 없고 실천하기에 아무 걸림이 없으니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서의 사랑[love]으로써 시종 일관하기 때문이다. 원래 둘이 하나됨을 가리켜 사랑이라 하는 것이고 이 이치는 3위1체의 원리에서 나온 것으로서 영원무궁한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니 유일무이(唯一無二) 할 수밖에 없고 가장 이상적일 것은 말하나마나다. 성경은 이런 둘이 하나됨으로써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이 '몸과 머리' 관계를 말하고 이로써 이 이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라는 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런 아름다운 삶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가로지르는 이들의 "발길이여, 실로 아름답도다"[롬 10:15] 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하신 주님께서는 그 “보내심 받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4:34] 하셨던 것이다. 몸의 각 지체는 머리의 보내심을 받는 자들이다. 그 역할이요 아름다운 구실인 것이다. 생명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 생명을 유지 보전하는 방법으로서의 '몸과 머리' 관계의 이치는 영원히 아름다운 것이다. 창조하실 때부터 이런 실체와 형상, 머리와 몸 관계로 모든 것을 만드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뒤이어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 것이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다. 내가 너희로 노력치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다”[요 4:35-38] 하셨다.

“이미 삯을 받고”[:36] 일터에 보내짐과, 그런 삯을 받지 못하고 일하도록 요구되는 것과의 차이다. “곡식을 먼저 받아야”[딤후 2:6] 그것으로 끼니를 제대로 채우고 배를 불린 다음에 힘을 내어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을 받은 그 기쁨과 평안, 그 힘과 능력으로 일하는 것이지,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선을 행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구원이 우선 목표이므로 동기가 불순하여 위선이 된다.

자기 구원이라는 목표만 달성하면 더 다시는 그런 선을 행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게 된다고 해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할 근거가 없는 까닭이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여 멸망에 이르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 즉 하나님 주시는 것을 무조건 받아 챙기기만 하면 그것이 그대로 영생으로 이어진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은 성경조차 읽기 싫어하는 게으름의 표상(表象)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왜냐면 성경 그 어느 곳을 훑어도 그런 뜻으로 구원을 설명한 데가 없는데 그런 말을 하기 때문이다.

“예복”[마 22:12] 입지 않은 비유 말씀은 우리의 구원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라는 이기주의적인 생각에 철퇴를 내리는 청천벽력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런 일방적인 것으로 잔치 주인을 착각한 결과다. 주인인 왕은 하례객이 없어 하객을 만들고자 하는 심산인데, 이 사람은 그런 주인의 고민은 외면하고, 잔치에는 사람이 들끓어야 하기 때문에 왕이 마구잡이로 아무나 끌어들인 것이라는 자기 판단만 의지하고 천연덕스럽게 평상복 그대로 앉아 있는 뻔뻔스러움을 보인 것이다.

왕궁에서 장만하는 예복이므로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그 예복을 집어 걸치기만 하면 된다. 자기로서 부담될 일은 하나도 없다. 오직 그런 마음의 있고 없음의 차이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런 마음인 것이다. 다른 필요한 것은 하나님 친히 다 장만하시고 마련하신 것이다. 주인을 배려하는 마음, 감사하게 생각하는 마음-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를 따름이다. 이런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못하는 여기에서 많은 사람이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히 2:3]의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자멸(自滅)을 재촉하는 것이다.

구원은 일방적이 아니라, 앞에서 아버지로 인하여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는다는 것으로 아버지와의 불가분성을 밝혀 설명하신 것처럼 쌍방간의 약속 또는 계약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내가 먹을 양식”은 곧바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는 영원히 그러하고 이 세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낙이요 생명의 진수(眞髓)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생명의 양식으로 오셔서 우리 위해 죽으심을 기념하는[“주님의 죽으심을 주님 오실 때까지 전하는”-고전 11:26] 유일한 의식으로서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하는데,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 몸에서 흘리신 피를 가리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 22:20/고전 11:25]”이라 하셨다. 즉 약속[言約], 쌍방간의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 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으므로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것이니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전 11:27-29] 경고하고 있음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지”[고후 5:15/롬 14:7-9] 않으면 이 의식에 참예할 수가 없고 이를 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의 죽으심 곧 하나님의 구원에 참예함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당연한 결론이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다”[고전 11:30] 함은 이 쌍방 약속의 엄중함을 말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교회에서 멋모르고 세례 받고 성찬식에 참예하였는데 그런 것도 다 해당이 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믿지 않고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기로[고후 5:15] 작정함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면 그것은 종교 의식이지 구원 받은 자의 믿음의 행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구원 받은 자로서 즉 회개함으로써 죽어도 살아도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고 죽기로 하나님 앞에 약속한 이로서 그렇게 방만한 태도로 성찬식에 임하면 그렇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다시 말하기를 “그렇게 엄중하다면 과연 누가 믿으려고 선뜻 달려들 것인가” 한다면, 그러면 그런 엄중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스스로 영원한 멸망인 줄 알면서 그 멸망을 택할 것인가.

참으로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면, 설혹 이 세상에서의 평생을 잔혹한 고생 가운데 보낸다 하더라도 이를 마다하지 아니할 것 인가. 아무 희망도 없이 영원히 고난 가운데 보내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그런 고생살이가 훨씬 나은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지금까지 설명해오면서 "사랑 없음이 항상 문제"라고 한 것이다. 사랑이 있으면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어떤 엄중함도 그것을 엄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법이다.

이는 달리 말해 믿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갈 5:6]. 고로 고요한 명상 가운데 사랑을 반추(反芻)해볼 일이다. 생명의 핵이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선하신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니[히 12:29] 항상 성경은 하나님의 양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롬 11:22]다. “자기 자신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갈 2:20] 하나님의 아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롬 8:32] 한 대로 그런 아버지시다.


그러나, 얼마든지 나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꺾어버리시고 찍어버리실”[롬 11:21,22] 하나님이시다. 왜냐면 하나님은 철두철미 공공의 이익을 밝히시는 질서 확립의 주체이시므로 사사로운 개인 사정을 고려에 두시는 일이 없으시기에 이는 당연한 것이다. 단 뉘우치고 돌이키는 자에게는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신다. 모세의 인도를 따라 광야로 나아가던 이스라엘이 “열 번”[민 14:22-24]이나 하나님을 “근심하시게”[엡 4: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했으나 이를 오래 참으셨지만, 그러나 한도에 이르자 더 다시는 용납하지 않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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