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5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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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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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고통만은 나 위해 홀로 지시고

그리고 우리 인간의 죽음이 죄인으로서의 죽음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으로서의 최고 중형(重刑)인 십자가 죽으심을 나 위해 다시 말해 나와 함께 당하신 것입니다. 그 고통은 주님 친히 홀로 당하시고[아버지 또한 이에 동참하시어] 나는 그 고통을 당하지 않고 다만 그 죽음의 결과만을 내게 안겨 주신 것이므로 한없으신 사랑이요 은혜라 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선물로서 안겨 주신 것이요 오직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써 이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해서 그 죽음의 고통까지 함께 내가 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품속의 아기를 위해 모든 고통을 감내한 엄마의 사랑 그대로입니다. 6.25전쟁 당시 한 미군이 보니 엄동설한 중에 한 여자가 무엇을 가슴에 꼭 껴안은 채 쓰러져 동사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엄마가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 갓난 아기를 감싸놓고 자기는 그렇게 죽은 것이었습니다. 병사는 얼른 그 아기를 안아다 놓고 엄마의 시신은 거기 적당한 곳에다 묻어 주었습니다.

그 아기가 자라 청년이 된 다음에 그의 양부[그 미군]는 양자를 데리고 한국에 와 그 청년의 엄마의 산소를 찾았습니다. 청년은 자기 입은 옷을 다 벗어 그 초라한 무덤 위에 얹어놓고 그 무덤을 부둥켜 안고 몸부림치고 울부짖으며 "엄마, 얼마나 추웠어요, 엄마, 얼마나 추웠어요" 하고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2013년 3월 일본 북해도에서의 갑작스러운 폭설로 인명이 여럿 희생된 가운데, 오카타라는 53세 난 아버지가 9살 난 딸을 자기 오버코트를 벗어 감싸 줌으로써 살리고 자기는 동사했다는 이야기도 그와 같습니다. 이런 것이 어버이 사랑 즉 부성애(父性愛), 모성애(母性愛)입니다. 나 위하신 그리스도의 사랑, 그 십자가 죽으심의 고통이 그와 같습니다. 나를 위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시면서 운명하셨습니다.

못된 짓을 골라 하며 한다 하는 주먹 대장으로 원근(遠近) 각처에 이름이 자자하던 김익두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 사실을 처음 듣고 며칠을 울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결심하고 신학교에 들어가 백지(白紙) 졸업 시험지만 내고[워낙 글 공부를 아니했던 터라] 목사가 되어 만주 지방으로까지 나아가 능력을 행하며 각지에 교회를 세우고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해방된 후 공산정권에 협조하여 변절했다는 소문도 떠돌았으나 그 진상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유엔군이 북으로 진입할 때 그는 자기 교회당에서 숨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을 예언한 이사야의 글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疾苦, 病苦)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우리는 다 양(羊)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니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주 하나님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셔서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죄(贖罪)를 위한 희생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할 것이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사 53:4-12] 함과 같습니다.

우리의 죽음이 죄인으로서의 죽음이라는 뜻이니, 이는 다시 말해 범죄하지 않았다면 죽지 않고 사람[아담]은 영생하였으리라는 의미를 내포함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죽을 자로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았고 죄 짓는 자로도 인간을 처음에 만드시지 않은 것입니다. 의로운 자 즉 의를 행하는 자로서 그리고 영생하는 자로서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신 것인데 아담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롬 5:12,17].

그러면 이 자연계의 자연법칙으로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반드시 죽고 썩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영생한다니 웬 말이냐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에덴낙원이 영계이고 그 영계에서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존재해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 경고하신 그 죽음의 의미가 바로 이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어 버림을 말씀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범죄의 결과 저주를 선고하시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창 3:19] 하신 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이런 과학적 법칙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모름지기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외면하여 무시하고 덮어놓고 영생한다고만 하므로 미신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 망상의 결과입니다. 망상이 안되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과학적 근거를 대야 하는데 그런 근거가 전혀 없고 거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만 말할 뿐이니 어찌 망상이 아니리요. 그러면 성경은 그런 과학적 근거가 있는가 하겠지만, 창조가 바로 그런 자연계의 제반 법칙을 새로 출범시키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 구원이 다름아닌 새 창조인 것입니다. 그러나 새 창조라도 기존 법칙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거기 따르시는 것 즉 처음 창종를 기준하시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법칙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정하시는 일 즉 자신께서 창조로써 이미 일단 세워 놓으신 모든 법과 원리원칙이므로 그것에 어긋나게는 그 어떤 일도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친히 피조물 사람이 되셔서 그 육체가 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모든 고난을 다 당하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원리원칙에 솔선 수범으로 철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또한 우리도 그렇게 지키기를 바라십니다. 그렇지 않고 전지전능하시다 하여 스스로 무원칙으로 대중없이 마음대로 일을 하신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 뻔하니 피조물들이 대관절 불안해서 어찌 단 한 시인들 마음 놓고 삶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이라도 하나님이 별안간 마음이 변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고 전전긍긍해 할 것입니다.

오늘이라도 현재의 우주를 종이 구기듯이 박살 내어 버리고 새로 창조의 일을 시작하시면 어떻게 하나 밤낮없이 불안에 떨 것입니다. 그러나 철두철미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일하시고 자신까지도 그 한번 세우신 원칙에 스스로를 얽매실 정도로 충실하심을 보이시니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증거가 하나님의 아들의 우리 위한 사람되심과 고난 받으심이니 이제는 영원히 확증하신 바로서 더 이상 이 점에 대해 불안에 떨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한 영물도 하나님이 공명정대 공정공평하게 원리원칙대로 하시니 그렇다면 자기도 자기 자신의 계획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 성공을 미루어 볼 수 있다 자신하고 오늘날까지도 인간을 구원 받지 못하도록 혈안이 되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일정한 수효대로 구원 받지 못하면 이 세상은 언제까지나 굴러갈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자기도 이 세상이 존속하는 동안은 활동이 보장되고 마지막 심판을 무한정으로 지연시킬 수 있다고 딴에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일정한 숫자대로 구원받을 사람은 다 구원 받기 위해서만 이 세상이 오직 존재하는 것이고 그 구원 받을 숫자가 차게 되면 이 세상도 끝나게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마 24:14]. 이로써도 왜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시고 정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만합니다. 즉 믿고 순종하여 구원될 것을 미리 아시고[foreknowledge] 그 미리 아심을 따라 미리 택하시는[predestination]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작정 한정도 없이 사람들이 구원 얻기를 기다리시는 판이 날 것이니 이런 일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엉망진창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을 사람이 어느 시대에 얼마만큼 있을지 미리 아시므로 주님 다시 오시는 날도 거기 따라 맞추실[조정하실]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나님이 아무리 그렇게 하셔도 자기가 시험을 하면 대개 그 시험에 넘어가리라고 자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에덴에서 아담을 상대로 맛을 들여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무리 미리 아시고 택하셔도 우리 인생 각자의 자유 의지는 절대로 건드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역시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야 욥을 그렇게 시험할 리가 없습니다. 욥기의 기록이 이런 모든 사실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욥기를 통해 우리의 이러한 고난 받는 세상에서 믿음을 확고히 견지할 것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고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와 같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인생들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고 덤비며 세상에서 왕 노릇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의인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갖은 수단으로 압제하는 것이야 보통 일입니다.

그러나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잔혹하게 죽임으로써 위협을 가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버리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죽여보아야 그 죽은 자만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하는 것이지 자기에게 득이 될 일은 아닙니다. 때문에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너희에게 알리겠다.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를 두려워하라. 참새 다섯이 두 ‘앗사리온[화폐 단위의 하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않는다. 너희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눅 12:4-10] 하셨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아담의 불복종이 그 원인입니다. 죽음은 범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범죄하지 않았다면 결코 죽음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롬 5:12]. 원래 영생은 지금도 그렇지만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신령한 몸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아담은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인데 선악과를 먹음으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신령한 몸이 된다 함도 그 때문입니다. 이를 성경은 “몸의 구속(救贖-롬 8:23)”이라 합니다. 아담이나 영물이나 처음 창조될 때는 의롭게 살도록 그리고 영생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였으나 중간에 그 자신의 자유 선택과 결정으로 이렇게 죽음에 임한 것이니 그래서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우리 구원의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을 몸의 구속이라 할 때는, 처음부터 인간이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처음부터가 아니고 이제 비로소 신령한 몸이 되는 경우라면 절대로 “구속”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당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고 에덴낙원의 영물[지금 천사라 부르는 존재들]들도 인간[아담]을 위해 창조된 것으로서 자연계의 여러 동물들에 대칭되는 영계의 동물들인[창 2:19]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창세기의 “뱀”이니 곧 영물로서는 “용(龍)”[계 12:9/20:2]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입니다.

영계에 속한 존재로서 자연계에 대칭되는 것이므로 자연계의 뱀과는 전혀 다른 고차원의 ‘직립보행’이고 또한 그래서 “용”의 형상입니다. 이 용이 저주를 받아 비로소 배로 다니게 됩니다. 예컨대 영물들로서의 사자, 소 또는 독수리라면 자연계의 사자나 소나 독수리로 그 형상을 상상하면 착오입니다. 전혀 다른 아주 굉장한 모습들입니다. 사람의 형상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합니다. 그 어떤 영물도 이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을 수는 없으니 왜냐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는 그 누구도 창조되지 않았고 오직 인간[아담]에게만 해당되기에 그렇습니다.

자연계의 뱀은 처음부터 배로 다니는 것으로 창조되었기에 그 동작이 신속하나, 처음부터 직립보행으로 창조된 용으로서 비로소 배로 다니게 되니 굼뜨고 고통스럽기 말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굼뜬 동작으로 인해 인간의 눈에 간혹 띄어 세상 사람들이 용의 존재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흙을 먹는다"는 것도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되어 버렸다는 뜻을 내포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눈에도 자칫하면 보여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보이지 않게 신속하게 전속력으로 그 굼뜬 몸을 움직여야 하므로 참으로 보통 고통이 아닐 것입니다.

말 그대로 저주입니다. 인간이 남자는 이마에 땀 흘리며 뼈빠지도록 일을 해야 하고 여자는 죽을 변을 치르며 자녀를 낳는 고통과 맞먹는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유일하게 용이라는 "신비한"[성경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존재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알려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성경의 진실성과 따라서 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로의 하나님 계심을 또한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인간의 눈에 띄어졌기 때문에[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은 인간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용이라는 존재가 그 특이한 형상으로 인간 세상에 알려져 있음은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 용을 가리켜 성경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비록 성경을 믿는다고 해도[성경에는 두 번씩이나 그 사실을 밝히고 있음에도-계 12:9/20:2] 희한하게도 극소수일 뿐이니 이는 물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화 때문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얼마나 자기 정체를 숨기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그 증거입니다. 왜냐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이 악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고 확신하게 되면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줄어들게 되고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려는 것이 얼마나 헛된가를 알아 마귀의 각종 시험에 빠져들 확률이 그만큼 높지 않게 되므로 그에게는 낭패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성경을 모르므로 “가상(假想) 동물”이라고 하지만, 실제 목도되었기 때문에 그런 용의 이름과 형상이 드러나져 있는 것입니다. 만일 가상 동물이라면 용 하나만 상상해낼 리 없습니다. 용 외에도 몇몇 또는 상당수를 인간은 상상으로 만들어 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목도한 현실적 존재이므로 용 하나만 알려져 있습니다. 소위 “해태”라고 하는 등이 영물들도 있다고는 하나 용에 비해서는 비교도 안되리만큼 생소한 이름입니다.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자기 정체를 모쪼록 숨기기 위해 꾸며낸 그야말로 가상 동물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스스로 또는 다른 악령이 그들 나름대로의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인간의 눈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악령들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은 저주를 받지 않아 그와 같이 굼뜬 동작으로 인해 인간의 눈에 띄는 수는 전연 없으니, 모두 전광석화와 같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신령한 몸도 그와 같으므로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할 것이다”[마 24:27] 하셨습니다.


그러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렇게 저주는 받았지만 이 세상 지배자이므로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든지 주물럭거릴 수 있어 혹 자기 자신의 그런 모습이 인간의 눈에 띄더라도 “가상 동물로서의 용”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인생들을 속여 온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눈에 띄게 행동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혀 눈에 띄지 않도록 딴에는 죽을 힘을 다했지만 결국 발각되었으므로 우선 그렇게 땜질은 해놓았지만, 그것으로 안심한 것은 아니고 계속 눈에 띄지 않도록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소위 외계 문명권에서 비행해 오는 소위 외계인의 우주선으로서 어리석은 인생들을 속여 놓았으니 이전보다는 비교적 여유 있게 자기 모습에 대해 신경을 덜 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주 드러낼 수는 없는 처지이니 하나님의 저주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천사들을 “영”[히 1:14]이라고 성경이 밝히고 있으므로 영은 원래부터 보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시라 할 때는 보지 못하는 것이나] 영물들은 빨리 움직임으로써 또는 능력이 있어 그 몸의 일정한 수축 작용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주에 충만해 계실 수 있어 형체가 없으시나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차원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즉 실체와 형체로서의 구분이 가능하나] 피조물은 아무리 영이라도 그 형체[몸]를 지녔다는 것이 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질적으로 영[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므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것은 모르는 대로 유보하는[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게 되면 알아지므로] 것이 좋습니다.

영물들은 그 본래의 형상으로만 국한해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으므로 사람에게는 사람으로도 얼마든지 그 형상을 변형시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성경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신령한 몸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의도적으로 나타내려 하실 때 나타내시고 숨기실 때는 그야말로 연기 같이 사라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용으로서의 형태가 인간의 눈에 띈다는 것은 그가 저주 받아 “흙을 먹게”[창 3:14] 되어 있는 것과도 연관이 되어 있다고 이미 지적했습니다.

그 흙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그 흙을 먹게 됨으로써 마치 자연계에 속한 몸처럼 불가시적인 것에서부터 가시적인 몸으로 전락하였고 따라서 이 세상 신과 지배자로서 이 지구 상을 분주히 쏘다녀야 하지만[욥 1:7] 사람 눈을 피하기 위해 그런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빨리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임한 저주는 배로 다니는 것만 아니라 흙을 먹는 것이었는데 이 “흙”은 창세기 기록에서는 낯익은 것이니, 아담이 창조될 때 먼저 그 육체가 이 자연계의 흙으로 창조되었다 했기 때문입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육체는 이 흙이 그 근본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같은 영물들은 에덴낙원의 땅[“out of the ground”, 영역(英譯)과는 달리 우리말 번역은 "흙"으로 되어 있지만]을 소재로 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흙”과 “땅”의 차이입니다. 영계에도 동식물이 있으니 땅이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바로 그 땅으로써 영물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영계 전체가 영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표현됨은 당연합니다.

말하자면 금덩이가 있으면 그 일부를 떼어 무엇을 만들었다 할 때 그 만든 제품은 역시 금이지 딴 것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만드실 때 흙으로 지으셨으니 흙이라 함은 풍화작용의 소산물입니다. 그리고 풍화작용은 자연계에 한하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흙을 먹는다”는 것은, 자연계의 생물체가 자연계의 흙으로 조성되어[인간의 육체도 그렇게 창조되었으므로] 역시 자연계의 흙이 근본인 식물을 먹는 것과 같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흙을 먹는다고 함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면 됩니다.

비록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지만 그런 “흙”을 먹는 것이므로 그리고 무엇이든 먹으면 그 먹은 결과 또는 효과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음과 같이[아담 부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그 결과가 나타난 것처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흙”[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나]을 먹음으로써 나타난 결과도 다름아닌 애초의 영물로서의 불가시적인 몸이 가시적인 것 즉 자연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속한 것과 같은 형질로 변하게 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왜냐면 성경에서 영물들 창조를 표현할 때 자연계의 것과 일부러 구별하지 않고 있어 자연계와 대칭으로 되어 있어 본질[속성]은 비슷하다는 의미로 그렇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령들은 인간의 육체로 능히 그 몸을 변환시켜 육체적인 행동[자녀 생산]도 할 수 있었기에 네피림이 생성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받은 저주가 단순히 ‘맛 없는 흙을 먹는다’는 정도의 가벼운 것일 수는 없습니다.

다른 것은 먹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니 부득불 흙을 먹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으로서는 아주 원치 않는 결과를 낼 수밖에 없는 그런 의미가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저주의 결과가 될 줄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조물주 하나님 친히 인간이 되시고 인간으로서 그 모든 고난을 직접 받으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그 점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만 아니라 거룩한 천사들이나 그 어느 피조물["그룹"이나 "스랍" 등]도 감히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히 사람되실 리는 없고 그렇다고 “당신의 형상이고 모양”인 인간을 차마 멸하시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에서 저지른 일입니다. 철저히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일단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을 자기처럼 범죄하도록 하여 자기 아래 두면 인간이 마치 볼모[a hostage]처럼 되어 있으므로,  인간과 밀착되어 인간 위에 군림해 있는 [자기의 범죄를 뒤따라 인간도 범죄함으로써 이제는 그런 상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된 터라] 자기도 당연히 멸해질 수 없으리라 계산한 것입니다.

하므로 저주 같은 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음은 물론이니 저주의 종점은 죽음[멸망]이라 죽음을 전제하는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원리원칙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인간 위해 친히 죽으시는 정도로까지 나가실 리는 없고 그렇다면 아예 죽음과 저주 같은 것은 생략하시고 다른 방도를 찾으시리라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주하셨습니다.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계산이 완전히 빗나간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입니다.

저주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는 것입니다. 즉 어떤 목적을 이룰 때까지만 당분간 취하는 잠정 조치입니다. 그런 조처가 없을 때는, 곧바로 범죄자를 멸망에 이르게 하시든가 아니면 아예 그런 것이 없도록 하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저주가 분명히 내려진 이상 목적이 분명한 것이니 그것이 어떤 것이냐 할 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는 멸망에 들어가기 위한 전단계 조처이고, 인간에게는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확고한 결의가 표명된 것입니다.

인간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시고 인간과 똑같은 육체로서 인간이 당하는 죽음의 고난과 수치를 친히 당하시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나님이 이런 정도에까지 이를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그와 같은 엄청난 살인 행위도 감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하나님은 저주를 내리시게 됩니다. 이는 친히 사람되심으로까지 인생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심입니다.

이는 실로 형언할 수 없는 가이없는 사랑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십니다. 피조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하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딴에는 날벼락을 맞은 셈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결의에 찬 조처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아직도 일은 종결되지 않았다고 자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실 순간에 가서는 그 “수치”[히 12:2]와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시고 십자가로부터 내려오시는 것을 계속 상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결과를 잔뜩 고대하면서 그리스도의 골고다 행(行)을 지켜보기까지 이른 것인데, 그러나 이 때도 주님의 사랑의 의지는 확고하셨습니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가 그런 시험의 때였고 그 동안은 주님께서 얼마든지 마음을 바꾸실 수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오쯤에 이르자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의 마음이 꺾일 수 없다는 확정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하늘은 금방 빛을 잃었고 온 천지에 어두움이 짙게 깔려졌습니다.

일부 로마인들의 당시 기록에도 불가사의한 어두움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완전히 그 고집을 철회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구원 받을 사람의 숫자만 제대로 채워지지 않도록 전력을 다하면 자기 계획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망상 속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한사코 그런 실낱 같은 고집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리스도 재림하신 후 천년간 통치하실 그 순간까지도 이 지독한 자기중심의 고집을 꺾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계 20:3,7-9].

이렇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그가 믿을 리 없습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자라면 애당초 범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악착스러움이 이와 같습니다. 어쨌든 자기 능력을 믿는다기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원리원칙주의를 믿는다고 하는 말이 더 옳을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무리 악착스러워도, 하나님의 공명정대 공정공평하심 그리고 원리원칙을 따라서만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않는 한 감히 품을 수 없는 생각입니다.

다른 것은 안믿어도 하나님의 그런 품성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믿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자기 위치를 명명백백하게 모든 피조물들에게 처음부터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영물들은 충분한 지식이 있으므로 그런 점을 얼마든지 간파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피조물보다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은 피조물보다는 강하십니다[고전 1:25]. 이런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또 믿지 않습니다. 자기도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원리원칙만 제대로 고수된다면 그렇다는 것인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나님의 공평공정하심은 의심하지 않으므로] 자신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 대등한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공명정대 공정공평을 기준하고 전제할 때 그렇다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교만이 성경의 경고대로 패망의 지름길이 됩니다. 이런 교만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대체적으로 그런 교만이 있습니다. 영물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는 능력 면에서 비교도 안되지만 자기를 과신하고 있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는 뜻입니다. “스랍”이나 “그룹”들 즉 “새벽 별”들[욥 38:7] 중에서도 이런 교만한 자가 생겨[사 14:12]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15] 즉 무저갱(無低坑)에 수감(收監)되어 그 곳의 사자(使者) “아폴룐”[계 9:11]이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아, 주님께서 선한[좋은]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주 하나님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올바른 것]를 행하며 인자[인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同行-to walk with] 것이 아니냐"[미 6:8] 하신 것이니 겸손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겸손하지 않고는 순종이 없습니다. 자기를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의 토대가 없이는 순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그렇지 못한 자를 내치실 것이니 극히 "조심할"[고전 10:12] 일입니다. 겸손하지 않을 때는 교만한 것입니다. 둘 중 하나이지 중간은 없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마귀가 된 것은 그 교만 때문입니다[딤전 3:6]. 우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 하신 것은 어린 아이의 특성이 믿음, 사랑이기도 하지만 그 겸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택하신 열두 사도들을 보아도 그들은 한결같이 겸손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율법사 등도 많지만 그들은 그 쥐꼬리만한 지식을 가지고 자랑하고 남보다 많이 아는 체를 했기 때문에 그 중의 단 하나도 이 막중한 영예의 열두 사도에는 끼이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교만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은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babes, little children]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눅 10:21]이라는 엄숙한 사실 앞에 우리는 마땅히 옷깃을 여며야 합니다.

그 때 당시에만 그런 사람들에게 진리를 나타내 주신 것으로 한정해서 생각하면 큰 낭패를 당합니다. 그 때 그런 이들에게 그와 같이 나타내어 주셨던 진리를 이제 우리는 아무 거침없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큰 오판이 됩니다. 지금도 그런 뜻은 변하실 리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소위 "우리 위한 대신 죽으심"을 성경의 가르침인 양 받아들이는 것이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으면 만사 형통이냐 하면 함께 죽음의 원래 의미가 자기 부인이므로 자기를 부인함이 없으면 그 역시 헛된 믿음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니까 즉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으니 교만이 깃들 여지가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겸손은 마음에 있지 태도나 표정에 있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항상 날마다 사형장으로 나가는 사형 틀[기구]로서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런 형국이라야 하는 것입니다[눅 9:23]. 모든 삶, 자기 존재 자체를 종결하려는 마당에 교만한 생각이 들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어린 아이들 또는 겸손한 자에게 진리를 나타내신다는 것은 교만한 자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예로써도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무리 정확히 알아도[진리는 워낙 간단 명료하므로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지식이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래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는"[고전 8:1] 것이라 했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된다"[:2] 한 것이니 곧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올바른 지식이 있어 그 지식대로 믿어 처음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로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어도" 심판대에 가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는 멸망의 선고를 받게 된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런 비극적 결말을 당하느냐 하면 그 이유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고"[:24] 그렇지 않으면 무너진다 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고 죽은 것"[약 2:20,26]이라 함과 같습니다. 행함이 무엇이냐 하면 "계명 지키는 것"[요일 2:3,4/3:22-24/5:2,3/15:10/요 14:15,21,23/15:10,12/13:34/계 12:17/고전 7:19/롬 13:9]입니다. 무슨 계명이냐,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2]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 계명을 지키게[요 14:15,23]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15:10]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하기를 "하나님의 인자[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요일 4:8]와 엄위[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므로-히 12:29]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가 된다"[롬 11:22]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킴이요 지키지 않으면 그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여 도리어 엄위(嚴威)에 해당되어 우리도 찍히는 바가 되고 하나님께서 "아끼지 아니하실"[:21]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니[요 14:21]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낸다" 하셨으므로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이가 구원될 리가 만무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고전 2:9]이라 했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 구원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하게 하시는"[:9] 것입니다[약 2:5/1:12/행 5:32/히 5:8].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먼저 자기중심을 살던 것을 "회개하는"[행 2:38] 것이 첫째입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고후 5:15] 작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면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 용서가 되고 그렇게 죄 용서가 된 깨끗해진 바탕이 된 내 안에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행 2:38]. 그리고 나서는 회개할 때 약속한 대로 그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니 곧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삶으로써 즉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계명, 그 말씀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요 14:15,21,23/15:10,12/13:34]. 그래야 그리스도의 사랑[인자-롬 11:22] 안에 거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아껴보지 아니하시고 찍어 버리심과 같이 찍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롬 11:21,22].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다음의 이유도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즉 에덴낙원에서 당시의 영물들이 아담을 위해 창조되었던 만큼, 영물들 중에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이 분류되었고 악령들은 영원 멸망에 처해혔으니 이러한 결과가 죄를 지음으로써 된 것이므로, 아담 역시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이기에 결단코 살아나지 않아야 영물들과의 평형이 유지됩니다. 사람이라고 해서 결코 더 나은 특별 처우(處遇)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친히 사람되시고 인생들의 죽음에 동참하시는 대가를 지불하심으로써 인생들을 구원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공명정대 공정공평하심이 증명된다 할 수 없으니 어디까지나 영물들이나 과거 아담처럼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결정으로 각자의 그 영원한 운명이 정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나님 친히 사랑이 되셔서 사람과 같이 되시고 그 모든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려 하는 것은 사리(事理)에 맞습니다마는, 그렇다면 반드시 자기 자유 의지에 의하여 순종하게 되는지 제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자청했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좋다”고 허락하심으로 인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자기 전력을 다하여 인간을 시험하기[속이고 꾀는 등] 위한 방편으로 인간을 지배하며 조종하는 등의 필요한 일을 합법적으로 보장 받고 있다는 그 뜻입니다. 욥을 시험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철두철미 원리원칙대로 모든 일을 하신다는 의미이고 그 증거입니다. 일개 피조물이라고 해서 “네 까짓 게 뭐라고 하나님의 하는 일에 대하여 참견하려 들고 왈가왈부냐” 하시는 법은 절대로 없으십니다.

피조물이 충분히 납득이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강제로 밀어붙이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같이 끝까지 자기 계획대로 되리라고 환상[이는 우리가 하는 말이고 그로서는 자신이 있어 하는 일입니다]을 품는 것도 이 하나님의 철저한 원리원칙에 따라 움직이시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탈락되도록 되어 있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이루는 일은 그러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우리 각자와의 개인적인 승패 겨루기와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최종 구원의 약속을 받는 것은 “이기는 자”[계 2:7,11,17,26/3:5,12,21/12:11/21:7]임을 계시록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만드신 피조물들을 전체적으로 너무나 이쁘게 그리고 측은하게[범죄의 경우] 보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측면에서 할 수 있는 말이고, 또 다른 측면이신 "소멸하시는 불"[히 12:29]로서 말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인하여 항상 악령[영에게 육체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것]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가 아니고는 필요한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는 불리한 여건에 있어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갖가지 당치도 않은 오해에 빠져 있게 됩니다. 이런 오해는 성경을 백 번이라도 통독(通讀)하는 가운데에서 해소될 수 있습니다. 성경만이 정직하고 거짓을 모르고, 사람은 대체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물이 들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오염된 것에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첫 사람 아담을 죽음에 빠뜨린 살인행위를 하였으니 이에 상응한 저주를 내리게 되셨고 이는 어디까지나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취하신 응분의 조처이셨으나, 앞서 지적한 대로 인간 구원을 전제하신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되 역시 질서 확립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일이니, 따라서 악령들의 용서는 불가한 것이고 영원한 형벌밖에 없음과 같이 우리가 이와 같이 크나큰 구원을 등한시할[히 2:3] 때 당연히 임할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진노 등에 관해 여러 말씀이 있고 그런 갖가지 표현[“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 등]은 이러한 질서 확립 차원에서 마땅한 현실입니다. 사람들을 그 모든 악행에 대해 심판을 하시는 것도 사람되심을 인함이니[요 5:27] 곧 "[마지막] 아담"이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아담이 범죄한 영물들과 인간들을 다스려 심판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 자신 범죄로 죽음에 이르렀으니 모든 것이 중단된 상태에 있었는데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두가 회복된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그 자신을 우리 위해 바치셔서 우리 위해 죽음까지 맛보신 그 사랑이 또한 우리의 심판주[審判主, 재판장]가 되시기에 충분한 자격이 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실 정도의 사랑이시니 그 친히 우리를 심판하시는 일에 절대로 올바르지 못한 것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멸망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즉 만 가지로 재어 보아도 도무지 용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만부득이 멸망에 처해지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대로 모든 일이 반드시 되어질 것입니다. 그 말씀에 벗어나게 긍휼히 여기시거나 자비를 베푸시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당장이라도 영원한 불 못의 형벌에 처해질 수 있지만[마 25:41] 그러나 이 세상에서 속이고 시험하는 자가 되어 있어야 하는 필요악에 의해 아직까지 활동의 자유가 잠정적으로 허용되어 있는 것으로서, 하늘에서도 그 어디서도 그 어느 피조물도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서 제 마음대로 하는 위치에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오직 철저히 인간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 일 외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하는 것은 일절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것도 그런 차원입니다. 오로지 인간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함으로써만 자기 명줄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딴에는 믿고 있는 터에 이 인생 구원을 방해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하므로 현재와 같은 구원 방해 작업은 당연하고 아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무신론을 퍼뜨린 것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방해 공작의 일환일 뿐입니다.

이제 서서히 지금까지 활용해 왔던 이 무신론의 장막을 걷어내고 자기가 대신 들어앉아 하나님 자리에 위치해 있음으로써 또다른 양상의 마지막 속임수를 실시하려는 단계입니다[살후 2:4]. 그러면 우리나 그들이나 다 같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터에 어떻게 그 진위(眞僞)가 구별되느냐 하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지"[히 1:9] 여부로써 가려집니다. 곧 그리스도의 토대 위에 세워진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느냐 여부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완벽한 구조의 자기 부인 체제가 확립되어 있음을 확인했으니 이를 고수해 나가면 됩니다. 더 이상으로 나은 월등한 체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이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나타난다 해도 같은 내용이라면 나중에 오는 것은 모방한 것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점을 다른 것 즉 요란하게 나타나는 기적 등으로 보충 보완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핵심 사항은 그 내용이니 외적인 그런 것에 좌우될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이 모두 그런 가짜에 넘어간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으니[살후 2:10] 그 합리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은 이미 1908년[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을 시점으로 하늘의 전쟁이 끝나고 지상으로 추방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추방된 것도 하나님의 미리 하신 말씀과 그 뜻대로 구원 얻은 사람의 숫자가 이제 거의 다 채워져 가고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벌어진 현상입니다.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로 달아오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제 이 지상[공중은 물론 달[月]까지도 포함해서]에 한정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1908년 이후로 인류의 대량 살상 행위가 자행되어 1,2차 세계 대전과 더불어 각종 사고 사건들이 연발하여 인명 살상이 그 1908년을 기점으로 하여 부쩍 극성을 피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를 제대로 분별하여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덴낙원에서의 아담 당시는 무엇이든 먼저 하는 자가 나중에 그를 따라 하는 즉 그 본을 따르는 자 위에 위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위치가 막강하므로 영물들은 아담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뒤를 이어 또는 그를 뒤따라 그 영향력에 좌우되어[그 거짓말을 수용하여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어기는 똑같은 범죄에 속하니 거꾸로 이제는 인간 위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군림하게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담이 범죄의 결과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영물 그대로인지라 육체는 “영”[히 1:14]에게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 세상이 존속하는 한[인간 세상이 존속한다는 것은 구원 얻을 사람이 아직 그 숫자가 채워지지 않았다는 의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마지막 심판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고[왜냐면 아직 심판이 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와 같이 결사적으로 인간 구원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의 방해 활동을 강제로 제압하지는 않으시니 하나님께서는 원리원칙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실 필요도 없으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좋은 것]이 되고 있는 까닭입니다[롬 8:28].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그런 활동 자체가 일정 부분 기여하는 바가 없는 것이 아니니 욥의 시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영물들이나 인간들 즉 모든 이성적 피조물들은 철저히 자기 자유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미리 아신다는 차이입니다.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역 이용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이 미리 안다는 것은 인간이라도 무릇 무엇을 만들 때는 그 제작품이 어떤 결과를 처음부터 예측하고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이 제조자로서는 누구에게나 공통입니다.

단지 인간은 그 규모와 범위가 좁고 한정되었다는 것이고 그리고 생물이 아닌 물건, 물질이라는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무한대이시며 인격적인 생명체를 만드셨다는 그 차이뿐입니다. 따라서 인간 역시 그 만드는 것에 대하여 사전(事前)의 충분한 지식이 없으면 무엇이든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미리 예상하는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안심하고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만들어 놓은 것이 도리어 해가 될 경우 처음부터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도 그런 차원이라고 보면 이해 가능한 것입니다.

에덴낙원이 영계라는 것은 창세기만 아니라 로마서나 요한 계시록 또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밝히고 있으나 두어 가지 두드러진 것을 말해보면 창세기에서 선악과나무, 생명나무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 식물은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 영적인 생명체입니다. 이런 영적인 존재가 이 자연계에 있다고 해석한다면 에덴낙원이 영계라고 하는 것보다 더 황당한 것이 됩니다. 성경을 신화(神話)처럼 취급하는 망령된 일이 됩니다.

“신화” 취급하는 망동을 피하려면 그런 영적인 나무가 있는 에덴낙원을 영계라고 정직하게 인정할 일입니다.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것이 분명한 것은 “뱀”이 사람처럼 대화할 리가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요한 계시록에서도 의도적으로 밝히듯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옛 뱀”이라는 표현을 두 번씩이나 연달아 하고 있으니[계 12:9/20:2], 그냥 “뱀”이라 하지 않고 “옛 뱀”이라 했을 때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성경[창세기]을 읽는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입니다.

“창세기에 나왔던 바로 그 뱀”이라는 뜻입니다. 항상 강조하지만, 선입관과 편견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성령의 계시를 통한[요 16:13] 하나님의 친히 가르치심을 가로막는 요인이 됩니다. 그리고 같은 동식물이라도 자연계에 속한 것과 영계에 속한 것이 대칭을 이루어 서로 그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역시 밝히고 있으니 곧 “큰 용(龍)” 또는 “용”이라 한 것이니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성경이 이와 같이 명백히 밝히고 있음에도 이를 믿지 않으니 믿지 않는 다음에야 속수무책입니다. 백가지 방안이 무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엄청난 구원을 베푸셨지만 믿지를 않으니 구제불능입니다.

이 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가리켜 성경이 다른 영물들보다 “더욱 저주를 받았다”[창 3:14]고 하셨으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같은 망동 이전에 이미 상당수 영물(靈物)들이 악한 생각을 품고 자기중심으로 행하여 범죄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고 그 중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가장 간교하다”[3:1] 한 것입니다.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14]이라 했는데 이는 ‘해당되는 모든’이라는 성경적 표현법이라 할 것입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신다”[행 2:17] 함과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만민[all people, 욜 2:28]”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마다 성령의 선물을 주심이 아니고 해당되는 모든 이들 즉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에덴낙원의 짐승들이 많은데 그 중에 "육축[가축]" 종류 그리고 "들짐승" 가운데에도 더러 악령들이 끼어[그 스스로 되어 있는 것]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과거 지은 죄과에 더 겹쳐 아담을 속여 죽음에 빠뜨리는 짓까지 했으니 “더욱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악령들은 범죄 결과 어떤 저주를 받았는지는 성경이 말하지 않으니 우리 역시 알아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믿는다는 이들조차도 용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임을 믿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야 성경 지식이 없으므로 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이집트 등에서는 예로부터 그들의 신(神)들을 얼굴은 짐승이고 형상은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드러났으나 이런 모든 것은 인간을 속이기 위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작품들이므로 부질없이 성경과 연관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고로 이 세상이 인간 삶의 고장이 아님이 다시 드러납니다. ① 사람의 본디 삶은 천사들과 같이 신령한 몸으로 사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계에 속한 굼뜨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양새로 지내도록 하나님께서 애초 창조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어 있으면서 새처럼 날 수도 없고 물고기처럼 바다 속을 휘젓고 다닐 수도 없는 실로 서글프기 짝이 없는 몸으로써 만물 즉 새나 물고기 등을 아울러 다스릴 수 없으니 그렇게 만드시지도 않은 것입니다. 범죄의 결과 죽음에 이른 탓에 이런 구차한 몸이 되어 있는데 이런 몸으로 산답시고 이 세상에서 모든 위로를 다 받아 버리는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없습니다.

②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그 아래의 영물 일당이 지배자로 군림하여 인생들을 노예로 삼고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 말하면 인간을 이와 같은 비극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장본인이요 원흉입니다. 이런 원수의 압제 아래에서 무슨 덕을 보겠다고 그에게 절하며[눅 4:7]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할 것입니까. 그래서 이 세상 삶을 냉소하고 백안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떠한 육체적 고통이라도 감내하는 것이 마땅하지,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고사하고 "사람의 아들(人子)"로서도 절대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③ 삶[영생]의 기본 구조는 한 몸의 원리에 있습니다. 한 몸 구조에서는 영광스러우면 다 함께 영광스럽고 웃으면 다 함께 웃고 울면 다 함께 울고[롬 12:15] 고통을 당하면 다 함께 고통을 나누어 분담하여[고전 12:25,26] 희로애락을 모두가 함께 공유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철저한 개인주의이고 제각기 자기를 위해 사는 죄악의 세상이므로 살벌하기 짝이 없습니다. 요행히 흥하면 다행이나 한번 패가망신하면 그 후로는 누구도 알아 주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멋 모르고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누리려 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러나 한 몸의 체제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존재하므로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서의 공존, 공영, 공생입니다. 아무리 내가 낮더라도 높임을 받으니 왜냐면 거기서는 머리가 모든 지체의 종으로서 섬기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의 위함을 받는 존재이니 말하자면 머리 이상의 존귀함을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자유와 평등의 체제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자주 독립이면서도 높낮이 우열의 차이가 없습니다. 살려면 이런 환경에서 이렇게 대접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가 아닌 ‘우리’라고 해서 머리에 또는 전체 몸에 종속되어 개성이 있을 수 없다는 착각은 어림도 없는 망상입니다. 사랑[愛]이란 그래서 원래 서로 섬기는 것을 말함입니다. 따라서 한 몸의 원리에서는 지체의 각 부분이 일억이라는 숫자가 있다면 나 혼자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보다 일억 배의 풍성한 확장, 확대, 확충된 삶을 사니 이야말로 삶의 최대 지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하나로서 존재하니 분쟁, 시기, 다툼도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억 배’의 자기 자신이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이런 이상향에서의 삶을 잠시 받는 고난이 견디기 어렵다고 포기하고, 이런 죽음과 고통과 불확실성의 환경에서 무슨 살맛이 난다고 세상에 빌붙어, 한 세상 소위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산다고 망령된 말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사람은 성경도 믿지 않고 자기 식대로 해석하여 미신을 믿을 뿐 아니라 상식조차도 없는 어리석음입니다.

왜냐면 축복 받아 잘 사는 것이라면 그러면 악인도 잘 사는데 그럴진대 그 악인들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축복을 받아 잘 사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축복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것인가요? 당연히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이 세상의 최고 갑부로 모두 살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고로 이런 생각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서나 나올 법한 우스꽝스러운 철부지의 망상인데도 이런 사이비 이단을 가르치면 칙사 대접을 하듯이 모두 환영하니 이런 것이 바로 세상의 속성입니다.

④ 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은 오늘이라도 복음 전파가 완료되면 내일이라도 끝나는 것입니다[마 24:14]. 세상의 존립 이유는 오직 이것뿐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고자 버둥대다니 이 무슨 광란(狂亂)입니까. 복음 전파만 완료되면 당장이라도 세상이 마무리 짓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유일하게 할 일이라고는 사람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 기도하고 복음 전하는 것[행 6:4] 외에 달리 목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세상에 태어나는 이들마다 태평으로 살라고 깔아 주신 멍석이 아니라 구원 받을 사람들을 골라내기 위해 즉 알곡은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까부르기 위해 펴놓은 자리입니다. 이 작업만 끝나면 언제든지 둘둘 말아 치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작업이 완료되어 가고 있는 단계입니다.

⑤ 그리고 양심상의 문제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 스스로 이런 죽음에서 구원되고 구출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멸망의 위기 속에서 갈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며 죽음의 고통 가운데 아우성이요 비탄과 낙담 가운데 몸부림치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의해 눈이 가려져 앞을 보지 못해서 이 지경인데, 당연히 이들을 구출하려 나서야지 도리어 방치하고 무시하고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축복 받았다고 편안하고 안락하게 산다는 마음을 감히 먹고 있다니 이야말로 최고 악질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기주의가 없습니다.

만일 다른 이들이 그렇게 했다면 나 자신 이런 구원의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와 헌신적인 말씀 전파로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로서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살고 말고 따위에는 일절 관심 없이 오직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일에만 두 팔 걷어붙이고 여생을 보내는 것이 “미치지 않은 마음”[전 9:3]이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었다 하면서 그와 같은 미신 가운데서 소위 "하나님의 축복" 받아 산다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도 경멸의 시선을 보냅니다.

양심으로나 상식으로나 납득이 가지 않는 일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죄인 구원”이라는 맹신 아래 양심의 가책마저도 느끼지 않는 최고의 이기주의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지만 그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작업은 일방적이지 않으니 사랑의 작업이기 때문으로 사랑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의 교류 곧 교제인 것이니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이라고 요한 사도는 정확히 정의한 것입니다[요일 1:3].

“하나님의 죄인 구원”이라는 것은, 스스로 죄인인 줄 알아 죽을 수밖에 없음을 잘 아는데 나 위해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으므로 그토록 나를 사랑하신 분을 위해 삶으로서 다시는 과거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죄를 짓지 않겠다]고 회개하는 이들을 구원하신다는 의미에서 “죄인을 부르려고”[마 9:13] 오셨다 한 것이지, 죄인으로 자처하여 죄를 여전히 짓고 있는 상태 그대로를 달랑 들어 구원의 자리에 앉히는 것을 의미함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 종교에 빠진 이들은 그래도 양심만은 살아 있어 소박한 면이 있기에 정이라도 가지만 이런 부류에 속하는 이들은 일정한 날 일정 장소에 가서 죄 용서 받으면 그뿐이라는 새 종교에 취해 있으니 양심도 마비되어 있는 터라 참으로 뻔뻔스러운 자세로 임하여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가 일쑤니 구제 불능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그리 되었은즉 이제라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고 모든 진리는 하나님 친히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직접 성경을 읽을 일입니다.

그리스도 의식은 몸과 머리 관계에서 몸의 머리 의식, 영혼과 육체 관계에서 육체의 영혼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필수 불가결이니 둘은 불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인간 관계보다 밀접한 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처음 창조에서부터 그러한 생명과 삶이 영원한 법칙이니 즉 둘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원리로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로 존재하는 구조입니다. 이를 영물들 중에 일부가 어김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생겨났고 그 영향을 받아 아담 역시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

"우리 자신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복종함으로써 이루어야"[빌 2:12] 함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로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완벽한 것임을 십자가 상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에 들어간 강도의 사례로써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눅 23:43]. 단지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구원 받은 즉시 이 세상에 남아 있어 그 "새 생명"[롬 6:4]을 살든가, 아니면 이 세상이 아닌 "낙원"에서 "새 생명"을 살든가 "새 생명" 가운데에서 산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새 생명" 가운데 사는 삶의 특징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후 5:15]는 데에 있고, 여기서는 그 어떤 경우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는 것이 처음 그리스도를 믿을 때의 회개인 것입니다. 즉 모세 율법 시대의 "첫 언약"[또는 옛 언약-히 8:7/9:1,15,18]과 같은 성격의 그리스도의 "새 언약"(言約-눅 22:20/고전 11:25/고후 3:6/히 8:8,13/9:15/12:24) 아래 있는 것입니다.

즉 구약[첫 언약, 옛 언약] 때나 신약[새 언약] 때나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그에 상응해서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은혜의 성격이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이니, 곧 우리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어 가능하게 하심에 있으니 곧 창조에 속하는 일이 우리 구원의 성격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창조하거나 새로 창조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첫 언약 때의 하나님의 율법[계명]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이미 아담의 범죄로 우리 모든 인생들이 죽은 자이므로 다시 산 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출생하는 새 창조가 필요했는데 그리스도 오시기 전 모세 율법 시대에는 아직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인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 율법"[고전 9:21/요 13:34]의 그림자의 형태로서 임시 방편으로 모세 율법이 그 역할을 한 것이어서, 그런 모세의 율법을 준수함이 구원을 이루지는 못한 것입니다[롬 3:27,28].

그러므로 아담이 이 "생명의 법"[8:2]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죽음에 이른 결과로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되어 이제 마침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으므로, 반드시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되어 있음은 당연하여 따라서 회개해야만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그래서 순종할 수 있는 힘[성령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심으로써 되는 일이므로 이 생명의 법칙을 "생명의 성령의 법"[:2]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그 회개한 강도는 낙원에 들어가서 순종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낙원에 들어가든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우리이든 또는 아직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이든, 이제는 일단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다음이므로 전적으로 자기 자유에 따라 믿든 믿지 않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므로 그에 따라 심판이 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행 17:31].

영원히 하나님께서 간섭, 강제하시지 않는 가운데 사랑의 순종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 그리스도 오신 후의 일변(一變)된 각 사람의 위치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경우에는 순수하게 자기의 자유 선택에 의한 것이므로 따라서 마지막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혹여 이 회개한 강도처럼 임종시에 뒤늦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향후 여하한 일이 있어도 순종하겠다는 결의를 나타내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지시고 내 죄벌을 받으신 사실을 믿는다고 구원이 되지 않습니다. 임종 중에 있는 이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경우 전도인은 이 점을 명확히 해서 주지시켜야 합니다. 그 강도는 이미 그런 순종을 확실하게 피력한 사실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는 현장에서 서서 구경하는 백성과 당국자들은 "그가 남을 구원했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거든 자기도 구원해야 할 것이다"[눅 23:35] 하며 비웃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던 군인들도 "당신이 만일 유대인의 왕이거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 하며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악행을 한 자[회개한 강도가 아닌]도,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고 비방하였으나, 그 회개한 강도만은 오히려 그러한 자기 동료에게 "네가 동일한 단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분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하면서 꾸짖었다"[23:40,41]고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즉 믿음대로 하면 죄인만이 형벌을 받아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니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을 행한 의인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을 행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기와 같이 죄인처럼 죽으시니 그 스스로의 생각에 자세한 연유는 알지 못하나 무언가 자기와의 동질성(同質性)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현재 이루고 계시는 자기와의 하나됨을 몸소 느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으로서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면 감히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저를 생각해 주십시오"[눅 23:42] 할 수가 없는 것이나, 무엇인지 분명히 말할 수는 없되 분명 그리스도와의 일체감(一體感)을 느껴 그런 믿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그리스도께서 무슨 명령을 하시든지 그대로 수행하겠다는 결연한 의미가 표명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하였으나 범죄한 자기네와 같이 그리스도 친히 똑같은 중죄인이라는 명목으로 처벌되시고 순순히 이에 응하시어 죽음을 받아들이시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그와 같은 자신을 얻었음이 명백합니다.

그래서 희망이 생기게 된 것이니 이로써 그는 참으로 회개하였고 절대 복종하리라는 결단을 하기에 이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거니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심중(心中)을 읽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을 받고 있는 사이비 곧 이단들은 성경과 비슷한 내용으로 가르치면서도 핵심 부분에 가서는 완전히 딴 것으로 말하거나 무시해 버리는 수법을 씁니다.

가령 "내가 이제껏 살아온 내 마음의 악하고 더러운 생각대로 살면 망할 것이므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여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내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는 말은 하면서도, 아담처럼 범죄할 때는 아담처럼 영락없이 죽음[이제는 멸망]에 이른다는 경고는 철저히 외면하는 그런 종류의 생각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이비의 특징은 한결같이 이 세상 삶을 사랑하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은 헛되고 없어지는 것이라 하면서도 이 세상 삶의 낙을 여전히 누리므로 자기 부인에 관한 일체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가 "성령의 위로와 주님을 경외하는"[행 9:31] 가운데 균형을 잡아 나갔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성령의 위로" 일색으로만 쏠려 있습니다.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심각한 경고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사이비 이단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우리의 넘치는 기쁨과 평안은 자기 부인을 하는 가운데에서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나아가시면서 나의 평안, 나의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요 14:27/15:11/16:33]고 오히려 낙심 중의 제자들을 위로하심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평안과 기쁨은 반드시 의(義) 곧 의로운 행위 즉 순종 다시 말해 "선을 행함"[롬 2:7,10]과 겸하는 것입니다[롬 14:17]. 이런 요소가 결해 있는 것은 단지 죽음으로 몰아가는 함정과 올무로서의 세상 삶의 낙의 일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과 비슷하게 말하더라도 그래서 진짜 같이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이와 같은 맹점, 허점이 있고 실속 없이 겉만 번지르르 합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무자비하게 시험하는 자로서 "우는 사자 같이 질풍 같이 쏘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벧전 5:8] 현실을 잊게 만드는 모든 것이 속임수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도 바울처럼 잘 믿을 수는 없다고 볼 수 있는 오늘날의 우리인데,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했으면, 그런 바울이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룬 사실을 우리가 외면할 것입니까. 그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순간 넘어질까 조심한"[고전 10:12] 사실을 우리가 감히 무시할 것입니까. 무슨 경고든지 경고를 무시하게 되면 반드시 걸려 들게 되어 있고 무사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로서 그렇게 자기가 조종하고 있는 사이비 이단들을 형통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사이비들이 모든 일에 잘되고 잘 나가는 것을 두고 의아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날은 정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 기적"[살후 2:9]의 시대이므로 놀라워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러합니다. 난데없이 마리아를 숭앙하여 마리아는 그들이 말하는 바의 소위 "원죄"가 없다고 하는 세상 종교가 지금까지 가장 큰 종교 세력으로 확고하게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 것도 그 예입니다.  

능히 순종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2]    

무릇 죄라는 것은 자기를 위함에서 또는 자기를 위해 사는 데에서 옵니다[고후 5:15].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약 1:15].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아 자기를 위하지 않는 데에서 죄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이른바 세상 삶을 완전히 접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과거처럼 이 세상을 살려니까 다시 말해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려고 하니까 죄를 이길 수 없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변명하기를 "육신이 연약하다"고 말합니다.

죄가 다름아니라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인데 그래서 죄를 스스로 “오라, 오라” 하고 불러들이는 판인데 죄를 이기지 못함이야 당연합니다. “육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않았으니 육신에게 포로되어 있는 것이야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으로서는 로마서 7장을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라고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단지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그리스도인이라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것만 다릅니다.

구원 받지 못했으면서도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고 있으니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종교인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인이라 하고 구원 받았다고 하나 구원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자기 부인을 하는데 죄가 깃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심을 믿으니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 자기 부인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래서 자기 부인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용납되지 않고 아니, 산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는 세상에서 그러면 무엇을 목적하고 이 세상에 있는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하고 나와 함께 ‘지체’된 내 이웃을 위하는 일관된 자세 아래, 장차 영광스러운 ‘한 몸’의 이상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밖에는 할 일이 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상 지적한 바와 같은 아주 상식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해 내고자 하는 그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단 몇이라도 건지겠다는[고전 9:22] 그 일념으로 이 세상에서의 황금 같은 시간을 쪼개어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예하기 위함"[고전 9:23]이라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는 "참예하지 못함"이니 불참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영생하지 못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려 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고 성경에 분명히 못박아 주셨기 때문입니다[요 20:21,22/4:34].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주셨고 주시면서 그 언약의 피로 나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주님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강제적으로는 결단코 자기의 것으로 삼으시지 않으십니다. 이는 내 스스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따르지 않는 한 주님의 것이 될 수 없고, 이는 또 당연히 주님 역시 내 것이 되실 수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내 스스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 이 세상에서의 행보(行步)가 아니면 나는 구원과는 천만리 밖의 거리에 있습니다.

내가 주님 것이 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내 것이 될 수가 없으므로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갈 5:6] 믿음입니다. 생명의 원리는 이 사랑의 법칙을 말합니다. 고로 주님께서 나 위해 자신을 주시는 즉 내게 자신을 통째로 선물로서 주시는 사랑의 본을 보이심으로써 나와의 사랑 관계를 먼저 시작하셨으니, 나는 나의 사랑으로써 주님께 나 자신을 드리는[사랑은 사랑으로써 호응하고 화답하는 것] 순서입니다.

그래서 나도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나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주님을 위해 죽음[주님의 일을 하고 그 뜻을 행함]으로써 즉 주님의 고난에 참예[동참, 교제, fellowship]하여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빌 3:19,11]. 약속 이행인 것입니다. 내가 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주님의 약속 이행도 불가능하게 되어 버립니다. 이미 이 사실은 모세 율법 시대의 “언약의 피”로써 확정된 것임을 앞에서도 설명했습니다.

사랑은 쌍방[양방]이 동시에 움직이는 관계입니다. 사랑은 일종의 약속입니다. 상대방을 생각하고 상대방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 생각하는 동안은 자기를 위해 생각함이 없습니다. 자기 부인은 따라서 항구적인 사랑으로서 영원히 자기를 생각하지 않음입니다. 한 몸의 이치에서 영원히 살므로, 내 머리께서 그리고 내 이웃이 나를 항상 더 잘 위해 주는 고로 내가 나를 위할 틈도 없고 짬도 없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복 입지 않은 자가 쫓겨나는 비유로써 이를 주님은 경고하신 것입니다[마 22:11] .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라면[이것은 약속일 수 없어] 쫓겨날 리가 없습니다. 상호간의 교류가 아니라면 쫓겨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복 입는 것도 무슨 버거운 일이 아니라 왕궁에서 마련해 놓은 예복을 집어 가져다가 입는 것밖에 없으니 오직 마땅히 할 일을 지적하신 것뿐입니다. 즉 나를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자기를 나에게 영원히 주셨으니 나도 나 자신을 자진해서 영원히 주님께 드리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내 것이 되니 이것이 구원입니다. 주님을 선물로 받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받는 것과 주는 것이 동시입니다. 받기만 할 수도 없고 주기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받은 즉시 나도 주고 주는 즉시 나는 받습니다. 나를 부인함으로써 주님만을 위하는 것이 그래서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이 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 곧 구원인 것입니다[고후 5:15].

선물인 주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랑의 힘으로써 나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니 '내 스스로의 힘'으로 주님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그 생명력'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뜻대로 행함입니다. 우리가 주님 위해 죽는다는 것은 주님 위해 산다는 그 뜻입니다[롬 14:7-9]. 목숨과 나 자신의 전부를 주님의 것으로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 친히 그렇게 하셨기에 그렇습니다.

같이 움직인다 하더라도 같은 규모일 수는 없습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아들이신 주님께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요 14:28] 하심과 같습니다. 엄마와 아기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지만 사랑하는 방법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엄마는 아기를 위해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하는 것이지만 아기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단지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이 엄마를 위하는 최선, 최대의 방법입니다.

엄마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엄마가 말하는 대로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이 바로 아기가 ‘엄마를 위해 하는 최대의 것’입니다.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마구 울어대는 그런 것이 사랑입니다. “엄마 없이는 난 못살아!” 하는 것이 그 사랑의 고백입니다. 실상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상대가 자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만 그런가,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실종되면 그 부모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몇 년이고 가업을 접어둔 채 아이 찾기에만 나서는 그런 부정(父情), 모정(母情)이 모두 그와 같습니다.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이 바로 그것입니다[눅 15:20]. 인생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어버이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죽은 자식 다시 살리고자 하시는 마음, 잃은 자식 다시 찾으시려는 마음”[:32]이니 이런 아버지의 마음과 같이 하지 않는 자식을 어찌 자식이라 하리요. 우리가 바로 이런 심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요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입니다[고후 6:1].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보내신 이를 보고 믿는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요 6:29,30,40]. 이는 곧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는 것이라 함과 같은 뜻입니다[ 20:21]. 믿고 구원 얻는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곧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우리 ‘구원’을 ‘우리가 세상에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으로 말씀하심이 그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고후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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