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5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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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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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위복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신(神)이요 지배자로서 우리를 핍박하여 발꿈치를 무는 것은 사실이나 이런 것이 전화위복으로 변환되는 것이니 즉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위해 죽을 수 있고[주님께서 내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갈 2:20] 고난 받을 수 있는 천금 같은 절호의 기회로 삼음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는” 것입니다[빌 2:12]. 사랑의 교제이니까 즉 주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셔서 그런 고난을 받으시려고 처음부터 작정하셨는지를 조금이라도 그 만분의 일이나마 맛보려 하는 것은 지당하고 또 굉장한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과 나와의 약속은 같은 수준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약속을 믿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입니다. 이런 공통점을 두고 약속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약속 이행은 무슨 엄청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하게 되어 있는 것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하시는 일을 다 수행한 후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 마땅히 할 것을 한 것뿐"이라 생각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눅 17:10].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에 비례해서 이와 같은 막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곧 “영원하신 성령으로 인하여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능히 우리로 하여금 우리 양심으로써 죽은 행실에서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히 9:14] 것입니다. 믿음에 비례한다는 것은 사랑에 비례한다는 뜻이니 그래서 30, 60, 100배의 결실의 차이가 생깁니다[막 4:20].

한 몸의 구조에서는 자기 부인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각 지체가 자기 자신을 위한다고 가정할 때 더 이상 한 몸으로 기능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몸을 이루는 데에는 이 자기 부인이 필수입니다. 물론 이 세상은 죄 많은 곳이므로 이런 생명의 이치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움직여도 세상이 잘도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세상 사람은 그런 착각 속에 살지만 이는 큰 오해이니] 앞에서 강조한 바 구원 받을 사람들 다 구원되기까지 하나님의 강제 통제에 의해 가까스로 지속되는 것뿐입니다.

그런 철저한 통제의 예가 앞에서 소개한 인간 생애의 법칙[‘트리니 호모’, 3운법칙]입니다. “가까스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에 거의 이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계를 넘어서면 지체 없이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머무시지 않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이시라고 한 반면에 또한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시라고 한 것에 유념할 일입니다. 양면성입니다. 어느 쪽으로든 이지러지지 않는 평형 속의 조화가 하나님의 특성이십니다. 피조물은 대개 이런 조화를 이상적으로 이루지 못합니다.

세상이 그러하다고 우리 역시 거기 따라 자기중심으로 나가고 자기를 위해 살 때에는 세상과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역조(逆調)의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다운 늠름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인데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약한 자로 만드실 리 없고 죄 짓는 자로 만드실 리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상속자 곧 만유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때에 따라 환경 여건에 따라 우왕좌왕하여 흔들리면 그 집 일이 어찌 제대로 서리요. 하나님께서 철두철미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시니 아들들 또한 아버지를 닮아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과연 부지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그래서도 우리의 구원은 약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 시험하는 자가 있어 세상을 시험 무대라 하는 것입니다.

시험하는 자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사악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일을 추진하는 자유 의지[이 자유에서는 인간도 마찬가지]를 구사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에 그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 스스로 원하는 작업이니, 여기서도 양면성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악행도 일정량 현재로서는 기여하는 바가 있다고 앞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 양면성에 대해 더 덧붙인다면, 주님 친히 우리를 지키시므로 악한 자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한다 했지만[요일 5:18] 무엇이든 일방적인 것은 없으니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할 때에 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행하고 악한 자를 따르고 있는데도 악한 자를 막아 주신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또는 바꾸어 말해서 우리 스스로 악을 미워하고 의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때 그 행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하고자 하는 우리의 뜻, 의지에 맞추어 하나님께서 친히 능력을 베푸심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런 것이 양면성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이룬 줄 착각하기 쉬우나 실은 하나님께서 일일이 역사(役事)하심으로 되어지는 것이니 공연히 부질없이 우쭐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철두철미 은혜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또 철두철미 우리 자신의 의지입니다. 시종일관 사랑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만드신 바요 그래서 우리 자신부터가 하나님 주신 선물이 아닌 것이 없으니 당연한 이치라 하겠습니다.

자연계의 동식물을 보아도 그들의 삶이 나타내는 지혜는 인간도 가히 따르지 못할 놀랄 정도입니다. 그러면 그 스스로의 지혜나 이성으로 그렇게 된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그 안에 장치되어 있기 때문에 그 능력을 기계적으로 그대로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즉 하나님 주신 것이요 선물입니다. 선물이지만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셔서 스스로 움직이도록 하셨으므로 그 선물로 주신 것을 올바르게 사용했는지를 따지시게 됩니다.

즉 우리의 자세 여하로 그 결과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고 이를 하나님은 절대로 간섭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 운명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영적 존재로서 말 그대로 우리 스스로의 자유 선택권이 있어 미워하고 사랑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대로 의사를 나타낸다는 그 차이입니다. 그 차이뿐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그 힘으로 일을 이룬다는 데에서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지 그것을 나 자신의 힘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하거나 그것으로 으스대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 같이 겸손할 일입니다. 또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자연계에 속한 생물체 자체가 그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솜씨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냄이 되어 있음과 같습니다.

그들의 생활 양태는 겉으로[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 그리고 능력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우리 인간처럼 아무 것도 스스로 선택해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순전히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건만 그와 같은 놀라운 마치 이성이 있고 지성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그런 것이 작동되어 그런 경탄할만한 힘을 나타내는 것처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처럼 그들 스스로 머리를 짜내어 하지 않는 것이니 본능으로 그런 것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 본능적 작용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져 알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핑계치 못한다”[롬 1:20]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성적이고 이성적이면서도, 아주 지성적이지 못한 행티를 드러내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것 모두가 교만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실상 그 모든 피조물과 불가분의 관계에 계시고 그토록 밀착해 계십니다. 때문에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다”[행 17:27] 했습니다. 바로 코앞에 우리 눈앞에 계시니 우리의 육체 자체가 하나님 주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그래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起動)하면서 존재한다” 했고, 바울은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所生)이라 하니 그 말이 옳다”[:28] 한 것입니다.

소생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그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단지 우리 마음만은 자유를 주셨으므로 그래서 자유 의지를 우리가 행사하는 것이니 말 그대로 자유인지라 하나님께서 바늘 끝만큼도 간섭, 강제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자유를 주시면 말 그대로 자유이지 그 이상 이하의 의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만물보다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렘 17:9]이라 했습니다.
왜냐면 만물은 하나님 지으신 것으로서 다 깨끗하나 사람의 마음만은 완전한 자유를 주시고 이를 보장하시므로 자기 선택에 따라 되어지는 것이기에 악하게 마음 먹으면 악함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원래는 그렇게 창조하시지 않았으나 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롬 5:12]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면서 육신이 인간을 사로잡아 자기중심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7:14-8:13] 그렇게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라 한 것입니다.

인간의 이 자유로써 스스로 악인이 되기도 하고 죄인이 되어 멸망 또는 죽음에 이르기도 하고 그리스도를 믿어 의인이 되며 거룩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자유를 주셨다’는 그 사실뿐입니다. 그래서 이 악함을 “부패함” 즉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 고장 난 것 즉 애초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라 한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 자유의 속성을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여” 오신다 했고 믿음은 우리 “마음의 역사(役事)”[롬 10:9/엡 3:17]라 했고 따라서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자유 곧 자율성은 변함이 없으므로 그래서 얼마든지 중도에 어느 때든 마음이 변할 수 있는 까닭에 바울은 “예수님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도록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불신자가 아닌 교회를 위한 기도에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시라도 변할 수 있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 역시 양면성을 말함이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고 우리 마음이 자동적으로 되어질 일은 아닙니다. 또 지금까지의 설명대로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 의도대로 역시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일방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양면성’이라 합니다.

하나님 친히 보장해 주신 자유이기에 그렇습니다. 기계적인 생물체야 당연히 하나님의 일방적 처사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만은[영물들 역시] 인격성을 지니므로 그래서 자유 의지가 있어 일방적이 아니고 양면성의 원리가 항상 적용됩니다. 때문에 구약 성경에, “주님께서 나를 돌이키시면 제가 돌이킬 수 있겠습니다” 하는 표현이 가능해집니다. 어찌 보면 완전히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표현한 것과 같은 인상을 주고 또 그렇게 착각될 정도이나, 실상은 분명하고 합당한 당연 사리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쓰고 애쓴다고 해서 우리 힘으로 그렇게 되어지는 것처럼 오해할 일이 아니니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혜임을 명심할 일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마치 내 힘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처럼 착각하여 왈가왈부 말도 많고 멸망에 이르는 억지 해석도 많습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것도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이다지도 왜곡함이 없다면 애당초부터 이런 글을 쓰려 하고 그리고 힘써 강조하고 또 강조하려고 마음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복음 전파가 시작된 지도 이천 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설명이니 풀이니 해설이니 하는 말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존재하지 않고 그가 활동을 하지 않고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로서 군림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연륜이 가령 몇 만 년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와 같이 복음을 방해하고 사람들의 구원을 사력을 다해 저지하는 한 이런 현상은 그대로일 것이고 불가피할 것입니다. 성경은 거룩하라[이 거룩함이 다름아닌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 위해 사는 것입니다]고 명령하는데도 거룩하지 않아도 구원 얻는다 하고 죄를 여전히 짓지만 천국에는 들어간다고 하고 그것이 은혜라 하고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 하고 갖가지 거짓말과 속임수와 지어낸 말들이 난무하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방금 지적했듯이 당연한 결과입니다.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활동하고 있다는 산 증거입니다. 이런 것들이 그 증거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있으니 그 있는 증거가 나타날 것이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없어야 그런 형적이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자기의 정체를 극력 감춘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효과를 노리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존재한다고 하면 당연히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 활동을 저지하려 한다는 것이 기정사실일 것이므로 숱한 가짜와 사이비들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짓거리로서 당연시되어 따라서 속아 넘어가는 일이 별로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가 그와 같이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무시될 때에는 또는 과소평가될 때에는, 오히려 이런 각종 혼란과 혼잡이 하나님의 말씀의 부실(不實)에서 연유되는 것으로 착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탓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런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노림수요 전술입니다.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입니다. 또 하나님 계시는 것조차도 모르거나 일부러 부인함으로써 인간 스스로 저절로 생겨나 무엇을 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드는 세상 종교[이 역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작품입니다]를 우리가 미신이라 하는 것도 결코 무리일 수가 없습니다.

전혀 진실에 터전한 주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그런 종교인들은 결국 본의 아니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라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결과가 됩니다.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인격적인 영물로 보지 않으며 성경에 나오는 귀신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지 않는 판이니 그들이 믿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를 믿는 것밖에 아무 것도 믿는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우리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먹고 마시고 호흡하고 사는 존재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마시고 호흡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도한 대로의 내용 그대로입니다[행 17:28].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 안에 생명이 없다”[요 6:53] 하신 그 먹고 마시는 것도 의미는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먹어야 하는 것이지 누가 나를 먹여 주지는 않습니다. 또 강제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먹고 싶어서 먹고, 하고 싶어서 하는 완전 자유 가운데 취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구원된다 함도 앞에서 설명한 ‘마음’의 자유, 자율성 때문입니다. 기계적으로 구원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구원되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그래서 한번 일단 믿었고 구원되었으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처럼 강변합니다. 기계적인 것은 우리로서는 강제입니다. 자유를 주셔 놓고도 간섭하시면 이것은 모순이 됩니다. 하나님은 모순되는 일을 아니하시니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이는 당연합니다.

오직 원리원칙, 일사부재리, 공명정대, 공정공평 등과 같은 의미만 하나님께 통합니다. 고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되기를 원하시나[딤전 2:4/벧후 3:9] 강제로는 하실 수 없습니다. 각자 스스로 '악을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기 때문에' 영생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렇지 않고 악을 좋아해도 영생을 주신다면 그 결과는 에덴낙원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을 속여 죽음에 빠뜨리고 오늘날과 같은 이런 불행의 북새통에 이르게 되는 것의 되풀이일 것이니, 누가 이런 불행의 재판(再版)을 바라리요!

§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신다고 되어 있지만 실은 모든 천사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천사들을 통해 역사하심이 바로 친히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수족처럼 되어 움직이게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모두의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에서 하나님은 우리 모든 피조물의 수족처럼 되어 움직이시니 ‘아기와 엄마’와의 관계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만큼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앞의 설명처럼 불가분입니다. 조물주께서는 피조물을 위하시고 피조물은 조물주 하나님을 위한다는 생명의 법질서를 따름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을 비롯해 우리 인간을 위시해서 모든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골 3:17]. 즉 하나님 친히 하시는 격식을 취합니다. 우리 역시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모든 말에나 일에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게 됩니다[골 3:17].

소돔 고모라 멸망 때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대화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창 18:22]. 이 때도 천사가 하나님을 대역(代役)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가리켜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히 13:2] 했습니다. 천사들을 대했다는 뜻이니, 하나님을 대면하였다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살 자가 없다는 말이 성경에 있듯이 이는 대면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대면 자체가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괴력의 삼손을 낳은 부모가 천사를 대면하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했으니 죽겠다, 운운” 한 것도 천사를 대면한 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천사가 하나님을 대행(代行)한 것입니다. 시내 산에 나타나시던 모습도 천사가 이 역할을 대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행 7:38]라 밝혔고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다”[행 7:53] 했습니다.

이는 또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그 하시는 모든 일이 피조물을 위하심이지 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당신 자신을 스스로 위하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하는 것은 피조물이 대행(代行)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피조물을 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대행하심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 됨 곧 한 몸 체제에서의 삶의 지혜요 철칙임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습니다. 즉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구조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고는 한 몸의 원리를 따라 살 수 없는 까닭입니다. 우리 신체를 보아도 만일 머리는 머리대로 몸은 몸대로 각 지체는 각 지체대로 따로따로 논다면 한 몸이라 하지 못함과 같습니다. 한 몸이 구성될 수가 없습니다. 역할 역시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자기 부인이라 합니다. '한 몸' 의식, '우리' 의식,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공동체 의식이라 합니다.

이 자기 부인이야말로 이런 공동체 삶의 원리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우리 각자 자기 자신과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제대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똘똘 뭉친 하나인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이요 분신(分身)들입니다. 원래가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부인을 자기 부정 즉 자기를 아주 말살하는 그런 무엇으로 곡해하니 성경에 대한 무지도 보통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즉 자기를 확대, 확장, 확충하는 방법이요 그리고 정정당당한 수단입니다. 만고에 변할 수 없는 생명의 원리요 법칙입니다. 그리고 최고 지혜, 삶의 최고도의 슬기입니다. 이 한 몸의 원리에 반하는 것이 곧 죄요 악이고 불의, 불법입니다. 자기를 위하고 자기중심으로 나가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일체의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기주의 개인주의 이기심 등이 물론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 한 몸의 이치대로 사는 것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것 곧 성경에서 말하는 의(義)입니다. 그리고 좋은 것이므로 성경에 강조하고 있는 바 “선(善)을 행함”이요 이렇게 행해야 영생입니다[롬 2:7].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실” 때는 바로 이같은 사람 삶의 원리를 따라 행하는 경우에 한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은 그와 같이 해야 행복하게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아니 할 때에는 영생커녕 살 수도 없습니다.

왜냐면 사는 방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산다는 것은 사는 방법을 따르고 이치를 따르고 그 원리를 따르고 그 법칙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잘들 살고만 있지 않으냐 하겠으나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사는 것이 아니라 즉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뿐이니 이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살아진다는 것은 피동적으로 움직임을 뜻합니다. 제 스스로 사는 것같이 보여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타의에 의해 수동적인 삶의 모양새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조종해서도 그렇지만, 원래 이런 악한 인생의 삶은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니므로 강제로 통제하시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자유’는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즉 영원히 행복하게 살든가 영원히 불행하게 고난 가운데에서 지새게 되든가 그 자유 선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철저히 통제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인생들이 마음대로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남을 파괴시킬 것이니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인들 이런 것을 가히 용납하겠습니까.

바로 이런 하나님의 철통 같은 통제[간섭]를 증명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 생애의 법칙[트리니 호모, trini homo]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의 삶은 철저히 간섭하시고 통제하시나 영원한 운명 즉 영원한 세계에서의 삶은 완전 자유 선택이라는 이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런 인간 생애의 법칙에서도 드러나듯이 수치(數値)상으로 한 치 어긋남도 없이 여러 톱니바퀴가 서로 이가 맞물려 한 치 오차 없이 돌아가듯이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트리니 호모’는 바로 그 증명입니다.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고 있는 천체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마치 인간 생애가 그러한 천체(天體)를 이루고 있는 각 개체인 것처럼 아주 정밀하게 그 생애의 시종(始終)과 흥망성쇠가 어울려져 한 거대한 ‘인간’ 천체를 이루어 소리 없이 운행되어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천체 운행의 기막힌 정밀성과 무서우리만치 정확한 그 통일성의 조화를 망원경을 대고 구경하는 이들은 극소수입니다. 그러나 이 인간 생애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이 정밀성과 정확성, 통일성으로 이루어지는 조화는 초등학교 학생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는 실로 천체 관측 이상의 장관(壯觀)이 되어 있습니다.

죄의 속성과 정체를 알려면

죄의 실상과 정체를 알려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에게 어떻게 하였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 실속만 차리려 하고 남[이웃]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든지 말든지 오불관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만드신 만물을 똑같이 차별 없이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데 제 욕심으로 그런 피조물 중의 하나라도 자기 잘 되기 위해서는 죽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니 그런 것이 악한 것이요 올바르지 못한[不義] 것이요 그래서 죄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고후 5:15].

여럿이 함께 있으면 함께 잘 살아야지 혼자만 살고 남은 죽어도 좋다는 것은 악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습니다. 왜냐면 자해(自害) 행위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눈이 없어도 팔이 없어도 다리가 없어도 살 수 있다 함과 같습니다. 내 이웃들이 바로 그런 나의 지체들인 것입니다. 여럿이 모두 나 자신과 같이 되어 살면 그 여럿의 숫자만큼이나 배가(倍加)된 삶을 사는데 혼자 남아 어떻게 살겠다는 것입니까.

그래도 살겠다니 바보의 고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으신 여럿이 함께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두 그 몸을 이루는 지체처럼 되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럴진대 지체 하나로서 자기 혼자 어떻게 산다는 말입니까. 이런 고집은 결국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행위에서 보듯이 인간을 자기 아래에 두고 자기는 위에 올라 앉아 모두를 종으로 삼아 머리가 되겠다는 생각인데, 자기는 위에 앉아 자유롭겠지만 자기 외의 모두는 자유롭지 못한데 그런 남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다고 살고 살아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법대로 살아야, 즉 최대한의 행복을 보장하는 한 몸의 원리로 살아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 사는 법’대로 살지 않아 아담이 죽었고 우리는 그 결과로 해서 죽은 자가 되었으므로 다음에 산 자가 되어 살 때에는 반드시 법대로 살겠다는 다짐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행 2:38]. 왜냐면 또 범죄하여 죽게 되면 살려 준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 살려 주는 것도 보통으로 살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은 불가능한 일이니 일단 한번 죽었으므로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죽었는데도 살아나는 것은 불법입니다. 법질서 확립에 그런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입니다. 위배되는 일이므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질서를 그대로 확립하면서도 살리시는 일은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되심으로써 인생들 각자와 하나가 되시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시기 위해서는 나와 함께 죽으신 후 함께 다시 살아나시는 과정이 필수이므로, 죄인으로서의 내가 받아 마땅한 저주와 죽음의 고난을 전부 고스란히 당하시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십자가 고난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나 위해 당해 주신 것입니다. 즉 어떤 일이 있어도 나로 하여금 죄 짓지 말고 삶의 법도대로 살도록 하려 하심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도록 하시려고 나를 위해 죽으셨던 것입니다[고후 5:15].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을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는 그 모든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의 고통을 홀로 당하시지 않으면 안되었으니 그렇게 죽음을 당하신 그대로 살아나시어 내 안에 성령으로[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오시어 영원히 나와 하나되시는 절차였던 것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나와 함께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것이지, 나를 대신하신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나는 그 죽음의 고통 없이[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홀로 다 담당하셨으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결과를 얻게 되는 망극하신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질고를 지시고 나의 슬픔을 당하셨고[사 53:4], 나의 허물을 인하여 찔리셨고[:5], 나의 죄악을 인하여 상하셨고,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해 징계를 받으셨고, 내가 나음을 입기 위해 채찍에 맞으시어 나의 죄악을 담당하셨고[:6], "마땅히 형벌 받을 나의 허물을 인하여 고문을 당하고 끌려 가셔서 산자의 땅에서 끊어지셨고[:7], 나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심으로써 나를 의롭게 하셨고[:11],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심으로써 나의 죄를 지신 것이요 범죄자인 나를 위해 기도하신[:12]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제는 사람이 되셨으므로 "그리스도"라고도 불려지시나]께서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되시므로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머리를 위하는 삶으로서 통일되므로 머리를 위해 사는 것이고, 그리고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 십자가 고난으로 확증되었다시피 우리 각자에게 이미 자기 자신을 선물로 안겨 주신 것입니다. 즉 우리만 머리를 위함이 아니라 머리께서 친히 그 몸된 우리만을[자기를 위하심이 없이] 위하십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머리도 몸도 결단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이가 없으니 위할 수도 없고 위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한 몸됨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한 몸을 이루지 못하면 여럿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려 서로 서먹서먹해지는 것은 고사하고 다투게 되고 결국 자기에게 방해된다고 하여 제거하게 되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 부부를 죽음에 빠뜨린 것이나 가인이 이유 없이 아벨을 죽인 것이 그 증명입니다.
“이유 없다”는 것은 상대가 자기를 해치려고 하지 않았어도 자기가 먼저 그 상대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위함으로써 범죄가 구성되어 아담이 죽게 되었고, 따라서 이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이니, 이제 살게 될 때는 마땅히 자기를 위해 살지 말아야 즉 죄 짓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친히 그런 고통을 당하셨는데 즉 그 정도로까지 하셔서 우리를 살려 주셨는데 또 죽을 짓을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나님으로서는 아무리 몇 번이고 살려 주시고 싶더라도 나머지 여럿을 불행하게 만들고 죽는 데에까지도 이르게 할 것이니 그 나머지 모든 피조물의 이름으로라도 그런 악한 자들을 격리시키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피조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시고 우리 피조물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생명으로부터의 격리이므로 죽음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낙으로부터 격리됨이니 죽음의 고통, 고난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그들을 잡아 격리시키심이라기보다 이미 그렇게 되도록 원리원칙이 정해져 있는데 악인들 그 스스로 그런 결과를 자초한 것이니 자업자득입니다. 또 이런 일은 사전 경고 없이 진행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에덴낙원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범죄와 아담의 범죄로써 학습 효과를 얻고 있고 이로써 경고를 충분히 받고 있습니다.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현존하는 인생들의 작태로써 충분히 그 해독(害毒)의 측면에서 실증(實證)이 되고 있습니다. 고로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양심[이 삶의 법질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인간 내부에 설정해 두신 기계적 장치]을 통하여 하나님은 충분히 경고하시고 있는 터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한 명백한 말씀으로써 경계에 경계를 거듭하시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면서도 여전히 죄인으로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어 구원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살인자가 되고 범죄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만이 할 수 있는 거짓말이니 그에게 조종되어 그런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을 받아 그런 반(反) 양심 반 성경적인 주장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주관하여 그 지배자가 되어 있고 이 세상 신(神)이 되어 전횡(專橫)한다 하더라도,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런 불법, 불의에 약하게 굴(屈)해서 그 편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런 일이 일어나므로 성경은 그와 같이 거의 경고로 가득한 것입니다. 아담의 실례(實例)에서도 이는 확인되었으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와 같이 끈질기게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억지 주장, 거짓말 등이 온 세상에 만연해 있는 것을 대하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과 활동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피부로 느끼는 것과 같은 기분이 됩니다. 인간 자체만으로는 도저히 이런 정도일 수가 없다고 생각되는 까닭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을 조종한다고 해도 인간의 자유 의지는 건드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압제 아래 있다고 해도 인간의 자유 의지는 간섭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인간 생애를 철통 같이 통제하신다고 해도 인간의 자유 의지만은 한 치도 좌우하시거나 어찌하시지 않음과 같습니다.

이 자유 의지는 앞에서의 설명대로 나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것이고 거기 한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여하와는 무관합니다. 영원한 것이 근본적인 것이고 이에 비하면 시한부의 이 세상 삶은 부수적이고 따라서 무의미한 것입니다. 왜냐면 영원한 운명에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까닭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그렇다는 것이고, 영향을 끼치는 것이 당연히 있습니다. 다름아니라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는 그 결과가 바로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유일한 핵심입니다.

이는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하여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 따라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자유 의지가 통제되는 것은 이 세상 삶에 관해서이고, 동시에 나의 자유가 간섭 당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는 영원한 본격적인 삶 또는 고난에 대해서 그러합니다. 영원한 나의 운명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어떻게 되는 것이야 내일 일도 약속 못하는 주제에 아무 비중도 실려질 수가 없음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랴” 하신 것입니다[마 16:26].

§  “육신의 약함”[마 26:41]은 자연계에 속한 우리 육체가 우리 영혼의 욕구에 미치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서에 말하는 그런 “육신” 곧 “죄의 몸”[롬 6:6]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고로 우리 육체가 우리 영혼과 부합하려면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이 아니고 신령한 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영혼을 먼저 조성한 다음에 에덴낙원이라는 영계를 인간을 위해 창설하시고 그 몸이 신령한 몸이 되게 하셨으나 범죄로써 죽음에 이르자 신령한 육체를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고로 그런 의미의 “육신의 약함”을 말씀하신 것이고, 대다수가 착각하는 대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 육신의 약함”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의 핑계 삼아 말하는 "육신"은 ‘약함’도 ‘강함’도 일절 관계 없고 오직 ‘멸해지느냐, 않느냐’ 하는 것으로 좌우되고 이 “멸해지는”[롬 6:6]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니 곧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면에서는, 이 육신은 약하기커녕 절대적인 힘을 과시합니다[7:24].

약한 것은 우리 영혼이니 즉 “내 속 사람”을 말합니다[롬 7:22]. 처음에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였으나 후에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이 영원한 존재인 영혼에 걸맞게 영계를 창설하셨고 그 영계에다 영혼이 있어 영적 존재가 되어 있는 인간[아담]을 두셔서 그 영혼을 따라 신령한 몸 즉 영적인 몸이 되게 하셨으나 그래서 영혼이 주도적 역할이었으나 이제는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니 거꾸로 되어 영혼이 육체에 종속되고 육체[육신]가 주도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원래부터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롬 7:10-여기서의 계명 또는 율법은, 할례나 기타 여러 가지 의식 준수를 명하는 모세 율법과는 별개의 개념-고전 9:21]이었고 그래서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나[롬 7:12], 그런 신령한 율법이 내게 생명은 주지 못하고 ”나 자신이 육신에 속해 죄 아래 팔려 있음”[롬 7:14]을 일깨워 주는 역할만 한 것입니다. 그 역할밖에 못하므로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연약하여 [생명을 주는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롬 8:3]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육신으로 인하여 율법을 지킬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롬 7:10] 한 그대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율법 혹은 계명은 원래부터 지키면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요 여기에는 한 치의 변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고전 9:21] 한 것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새 계명"[요 13:34]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당연히 모세가 전한 바 할례를 받는다든가 날[days]과 달[months]과 해[years]와 절기[seasons]를 지키는[갈 4:10] 등의 제도적인 것을 준수하는 것[그리스도 오신 후 지키도록 명령하실 새 계명에 대한 그림자로서의 역할이어서 그리스도 오시면 폐해질 것] 즉 모세 율법과는 구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생명인데 지키지 못했으니 즉 지키는 데에 실패했으니 이는 자기를 위하려는 성향이 그대로 나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못하던 것을 하나님은 하시는 것이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을 단죄하셔서[롬 8:4] 즉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게 함으로써 이 죽음을 인하여 다시는 내가 그 육신[육신이 죽어 ”죄의 몸이 멸해졌으므로“-6:6]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따라 행하게 됨으로써 이제는 넉넉히 율법[계명,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을 순종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율법의 요구”는 충분히 내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8:4].

즉 생명의 율법,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고전 7:19/롬 13:9/요일 2:3,4/3:22-24/5:2,3/15:10/계 12:17/요 14:15,21,23/15:10,12/13:34]으로써 생명을 유지 보전하게 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을 이루는 것"을 말함이지, "구원을 얻는[구원되지 못했다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자는 능동적인 측면, 후자는 피동적인 측면의 우리 구원의 양면성입니다. 후자의 피동적인 면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독자적인 창조의 영역이므로 그렇습니다.

전자의 능동적인 면은 악령들이 범죄함으로 멸망의 운명으로, 거룩한 천사들이 범죄하지 않음으로써 거룩한 천사들로 남게 되어 있는 그 동일한 과정과 단계를 따름입니다. 이는 무릇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피조물이면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는 관문(關門)입니다. 첫 사람 아담도 이 관문에서 탈락하여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계명]을 지킨다는 것에 과민 반응을 일으킬 아무런 이유도 성경상으로는 없습니다.

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즉 선을 행함으로써 우리가 영생하게 된다는 것은 미리부터 바울이 확언해 두어 전제하고 있는 사실입니다[2:7,10]. 따라서 ①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음”[2:13]이라고 확언해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②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3:20] 한 명백히 상반된 두 대목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할 때,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차이입니다.

②는 믿기 전 ‘죽은 자’로서의 상태, ①은 원래부터 정해져 있는 생명의 법질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산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 따라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으니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 이 차이입니다. ①은 원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정상 상태일 경우이고 ②는 우리가 지금 정상이 아니라 죽은 자로서의 비정상 상태에서 도저히 정상과 같은 상태로는 적용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죽은 자가 아무리 율법을 행해도 구원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율법대로 행하는 자 즉 ‘선을 행하는“[2:7,10] 자가 당연히 영생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즉 우리에게 관한 한 하나님의 율법[모세 율법이 아니니, 모세 율법은 "지킬 수가 있는 것"으로서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을 상징한 것임]의 소임(所任)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나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데에 있었고[율법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후인 지금은 "나에게 생명을 주는"[롬 7:10-율법을 지키고 행함으로써]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고 후자의 경우 내가 얼마든지 지킬 수 있게 된 까닭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명백히 갈라놓은 것은 ①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순종과 ② 그리스도 안에서의 순종입니다. ①에서는 순종이 불가능하므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순종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 다음 비로소 순종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하 역대 모든 믿음의 인물들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특정 사항에 대해서 그렇게 순종한 것이고 하나님의 율법 또는 계명이라는 일반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었음에 유의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종의 사람이었으니, 이는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그들은 그와 같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장차 오시게 되면 당연히 그 계명에 순종하게 될 것을 미리 그렇게 나타내었기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다윗의 범죄 행위가 대표적인 것이니, 곧 우리야의 아내를 건드리는 간음죄와 곁들여 우리야까지 제거하는 살인죄가 그것입니다[삼하 11:3-23].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런 일은 당연히 용납되지 않고 만일 이러하다면 그는 처음부터 믿는 이도 아닐뿐더러 가령 믿는 이라면 "짐짓 범하는 죄"에 해당되어 영원히 용서가 없게 됩니다[히 6:6/10:26,29].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 것은 순종하겠다는 약속[회개] 아래 되어진 일입니다.

고로 이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당연히 순종하게 되어 있고 또 순종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성령의 능력으로] 내 안에 계셔 가능해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줄 알아야 그리스도를 찾게 되고 그리스도 앞으로 오게 될 것이므로, 과거의 율법[모세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은 그래서 “내게 대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고”[:10], “죄가 계명으로써 나를 죽인”[:11]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나의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해 선한 계명[율법]으로 인해 나를 죽게 만든” 것이었고, “이 계명으로 인해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13] 한 것입니다. 결국 내게 생명을 주도록 되어 있는 율법[하나님의 계명대로 하면 그것이 사는 것이므로 창조 때부터 생명의 법질서로 정착되어 있는]이 나의 “육신”으로 인해 아무 생명의 일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육신으로 인해 연약하여”[8:3]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이 할 수 없는 그 생명의 일을 하나님은 하시는 것이니 곧 죄로 인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신을 단죄하셔서”[:3] 죽음에 이르게 하심으로써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해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육신으로 인해 생명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을 가리켜 “전의 계명이 연약하여 무익하므로 폐하였다”[히 7:18] 하였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한다”[:19] 한 것입니다.

여기서의 율법은 할례 등을 명령한 모세 율법을 가리킵니다. 할례나 기타 제사[제물 바치는] 드리는 예법을 준수하도록 명한 모세 율법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이 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혼동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문맥상 구별이 용이하므로 성경은 그런 차이를 굳이 설명하지 않고 있지만, 이를 알지 못하고 혼동하는 이들이 있으니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를 악용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당시나 오늘이나 묵과할 수 없는 실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 “전(前)의 계명”[:18]이라 명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계명이므로 지금의 계명과 당연히 구별됩니다. 언약 자체가 “첫 언약”과 “새 언약”으로 변경된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제사 직분이 바뀌었으니 율법도 바뀌어짐”[:12]은 당연합니다. 어떻게 바뀌어졌느냐 하면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입니다.

그 내용은 다름아닌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40]이라 말씀하신 그대로의 내용입니다. 오히려 더 엄격합니다. 왜냐면 과거에는 그냥 맛보기 즉 ‘형체’로만 보이신 그림자 시대의 것이고 이제는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이루시고 또한 말씀하신 것이므로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의 실질적인 내용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름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자기를 다 바쳐 주심으로써 사랑하심인즉[갈 2:20] 곧 자기 부인[막 8:34]를 토대로 하여 계명을 지킴이요 그에 따르는 순종입니다. 즉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입니다.

우리 ‘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이 연약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여 죄에게 종 노릇함”[히 2:15]이었다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 함은, 자기 아들을 죽게 하심으로써 이루신 것입니다[롬 8:3]. 다시 말해 그 육신 즉 “죄의 몸이 멸해짐”[6:6]으로써입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나와 하나 되시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므로 즉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므로 그 모든 생명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살았기 때문에[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해 살았으므로 이제는 나를 위하는 일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친히 영원히 담당하시는 까닭에 내가 나를 위하지 않고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며 오직 '나를 위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입니다. 

앞에서 과거의 경우보다 더 엄정한 내용이라고 했는데 살았을 때는 엄정, 엄격한 것이나 이제는 죽었으니 아무 것도 엄정한 것이 없고 오히려 자연스럽고 손쉬운 일이 되었습니다. 물론 믿음에 있을 때에 한하는 말입니다. 믿지 않고는 바늘 끝만큼도 아무 일이든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믿음이 핵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아브라함도 믿음으로[당시에도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는 할 수 있으므로] 넉넉히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물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근거한 것이지 그들의 믿음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강조한 것과 같이 모든 믿음은 반드시 행동이 뒷받침이 됩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는 까닭입니다. 약을 믿지 않는데 그 약을 어떻게 쓸 수 있습니까. 약을 복용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음은 그 약을 신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행동화한 믿음[약 2:21]을 본으로 삼으라 한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다"[롬 4:2] 하는 것과 또 혼동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즉 앞에서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이 자기 행위로써 구원 얻으려 하는 것이어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행위"이지만 현격한 의미의 차이입니다. 물론 당연히 아브라함은 그런 종류의 "행위"[:2] 또는 행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기 전에 자기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안다는 것은 이 세상 자체가 즉 죄인 인생들의 이 세계가 죽음이지 결코 생명이 아니고 삶의 터전이 아님을 동시에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아닌 곳에서 생명을 찾고 누리려 함이 보통 바보 짓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을 기피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생명의 계명을 짐스러워 하는 것은 대개 그 뿌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세상 사랑에서 기인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 믿지 않음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오직 일하는 곳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와 함께 일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고후 6:1] 곳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대표이십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아담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마지막 아담을 따라서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 계실 때 행하신 그대로 우리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됨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입니다. 따라서 주님[우리의 주인, 소유주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이 하는 대로 일심동체로 따르게 되어 있는 그 종]께서 일하셨으니 우리도 일하고 일하신 대로 일하고, 그런즉 일하는 대신 삶의 낙을 누리는 시늉이라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죄를 짓지 않음이라 했는데 주인을 위해 살고 죽는 즉 그 명령을 준행하는 것으로써 그 삶을 삼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종[下人]입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냥 호칭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서로 종 노릇 함입니다[갈 5:13].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에 호응하고 반응함입니다. 그 외에는 달리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마 18:3].

어린 아이는 엄마의 사랑 속에 있으므로 사랑을 가장 잘 이해하는 위치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이 사랑의 순수함을 차츰 잃어가게 됩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다”[눅 22:27] 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러하심을 선포하심입니다. 왜냐면 자기 자신을 우리 각자에게 영원한 선물로 이미 주셨기[갈 2:20] 때문입니다. 구원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의 선물로 받는 것이며 나는 그렇게 선물로 받았으니 나 자신을 또한 사랑의 선물로 주님께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나를 섬겨 나만을 위해 사시고 활동하시고 존재하시고 나는 또한 주님을 섬겨 주님만을 위해 살고 움직이고 존재합니다. 고로 주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요, 주님 일하시는데 내가 일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축복 받았다고 호의호식 잘 살고 태평하고 편안하다는 것은 주님과 하나 되지 못함 곧 머리로 모시지 않고 모든 믿음의 형제들과 한 몸을 이루지 못함 즉 구원과는 전혀 무관함을 내 스스로 증명함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대가족의 일원이 됨을 말합니다. 아버지를 중심한 아들들입니다. 한 몸의 구조입니다. 아버지께서 머리이십니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이 사실은 한결같이 강조되고 있습니다[대하 13:12/골 2:19/1:18/엡 1:22/4:15,16/5:23/계 1:5/고전 11:3]. 고로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입니다[고후 6:1].   

그러므로 정리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양면성으로서 하나님의 측면에서는 완결이지만[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하신 것-요 19:30] 우리 측면에서는 완결 단계가 아니라 최종 완결 국면으로 현재 진행 중입니다. 남은 것은 악인과 의인을 선별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스랍과 그룹 등 영물들의 선별 작업은 완료되었으므로 이 이상 진행되지 않고 에덴낙원에서의 영물들 솎아내고 걸러내는 것도 이미 완료되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고 이제는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오직 남은 것은 인간들 중의 선악 여부를 가려 내는 일입니다. 이상 영물들은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모두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렇게 특정 기간을 통해 그런 선별 작업이 일단락될 수 있었으나 인간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기 때문에 일정 기간을 두고 낳고 낳아짐으로써 세상에 나타나므로 일정 세월이 요구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으로써 모든 필요한 작업은 끝나고 이후로는 영원히 모든 것은 하나님의 완성품으로서 영존하게 됩니다. 이 이상 변동은 없습니다.

항상 모든 일은 양면으로만 한정됩니다. 즉 대칭형만을 이루고 유지하는 것이니, 제3, 제4 등등의 연속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 자연계도 6일 창조 이전과 이후로써 양 세계로만 한정되고 더 다시 계속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으로써 이 세상이 종결된 후로는 새로운 국면의 대칭형 즉 양면성으로 영원히 정착되는 것이니 곧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천국과 영원한 형벌의 불 못입니다.

그리하여 그룹과 스랍 중에서 악한 자가 걸러졌고 에덴낙원의 영물들도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로 구분되어졌고 현재 인간이 그렇게 선별 작업의 대상이 되어 악인과 의인들로 현재 나누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렇게 의인들을 골라내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애초 하나님의 계획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많은 인간들이 생성되어져 그들 중에서 의인과 악인을 분류하시는 것이었으나 아담 자신이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르자 부득불 구원의 필요성이 생겼던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고 현재와 같은 죽음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구원 자체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의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을 만들고자 하심입니다. 영원히 정착된 삶, 생명의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 이 작업은 필수입니다. 이 세상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도 따라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사람들에 한하는 것이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도 바로 이를 기준해서 다시 선별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양과 염소를 좌우편에 갈라놓는다고 하셨습니다[마 25:32].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하고 행하지 않고 하는 것으로써 가름하셨으므로 이들은 모두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마 25:40,45]. 즉 "하나님 집에서의 심판"[벧전 4:17]입니다. 때문에 처음부터 믿지 않는 이들은 구원에서 당연히 제외됩니다. 믿고 회개하는 자들만이 이 구원에 들어올 수 있고, 구원에 들어온 사람들 역시 자기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사는 것 즉 삶의 낙을 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들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일하는 것에 의의가 있음이 분명해집니다. 그런데도 이를 곡해하여, 악인들을 걸러내기 위해 함정, 올무, 덫이 되어 있는 세상 삶의 낙을, 소위 "하나님의 축복 받아 형통하는 것"이라 하여,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되는 이들이 많으니 화급하게 이 미련함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내가 죄인을 부르려고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왔다” 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으니 모두가 죄인입니다. '과거 죄인이었으나 그러나 현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인하여 의인이 되어 있게' 하셨으니, 의인으로서 살겠다고 결심하고 그 결의대로 끝까지 나아가는 자에 한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시 그 영원한 효력을 발생시키게 됩니다.

따라서 아무리 처음에는 의롭게 살자고 다짐했다 하더라도 중도에 변절하는[히 10:38] 사람은 아끼지 않고[롬 11:21] 탈락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구원”의 정의(定義)부터 각자 명확히 인식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 뜻은 주님의 말씀 가운데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다” 했을 때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습니다[마 8:19/눅 9:58].

이는 죽은 자로서의 인간이 이 세상에 머리 둘 만한 곳도 없는 것과 같이 결단코 삶의 낙을 누릴 장소가 아님을 강조하신 것이고, 그래서 “죽은 자들로 저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마 8:22/눅 9:60]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로서의 세상을 뒤로 하고 산 자로서 사람 살리는 일을 하리라고 방향을 정했어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눅 9:62] 하셨으니 즉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아무 열매가 없는 까닭입니다. 일은 한다고 시늉을 해도 작업 능률이 오르지 않아 해가 지도록 해 놓은 결과 즉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열매 맺는 비유에서 드러나듯이, 주님을 믿어도 핍박을 받을 때 넘어지기도 하고 아니면 그 믿음을 지키다가도 이 세상의 염려에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 사는 낙 혹은 각종 쾌락에 마음을 빼앗기고 돈 벌겠다는 데에 마음을 빼앗기면 열매 맺힐 마음도 시간도 사라집니다[마 13:22/막 4:19/눅 8:14].

그래서 천국은 내 스스로 쳐들어가 힘으로 밀어부처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눅 16:16/마 11:12]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 가르치신 기도[주기도문]는 일하는 자의 기도이지 삶을 향유하는 자의 기도가 아님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특징이므로, “우리” 아버지, 그리고 “저희들”에게 어떻게 해 주십사 하는 것이지 “나” 개인에 대한 욕구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개인적으로 이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되고 잘 살고 형통하기를 바라는 내용은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우리' 즉 공동체 다시 말해 한 몸의 체제에서 모든 것은 이루어집니다. 그 단적 증거가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구함입니다. 다시 말해 내일까지 먹을 양식도 아닙니다. 오늘 먹을 양식입니다. 이는 사실 그대로이니 인생 중 그 누구도 자기의 이 세상 목숨이 내일까지 보장되었다고 말을 못하는 상황입니다.

10대, 20대, 30대 시도 때도 짬도 없이 죽어 나갑니다. 오늘도 어찌 될 줄 모르는 것이 인생인데 어찌 삶을 구가(謳歌)한다 하리요.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이 “일용할 양식”이란 말씀이 내포하는 의미는 이렇듯이 막중합니다. 그러므로 삶의 낙을 누리지 못할 바에야 일하는 것밖에 더 없습니다. 어떤 일인가 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널리 알리는[아버지의 이름 거룩히 여김 받으시고-hallowed be Thy name] 일입니다.

사랑스러우신 하나님, 귀하고 소중하신 가족적이신 "아버지"로서의 그 이름을 알림으로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우리의 삶의 무대임을 인식하게 만드는[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고-Thy kingdom come]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생명임을 알아 뜻대로 순종하도록[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Thy will be done] 가르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한 몸 체제로서의 삶입니다.

즉 자기 부인이니 절대로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함께 지체된 내 이웃을 위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 있는 목적이 사울을 바울로 만드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작업함에 있는 까닭입니다. 이런 모든 일을 중단 없이 할 수 있도록 시험에 들지 않아 범죄하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범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자유 선택에 의한 것이므로 시험에 들어도 내 욕심에 끌려 내 스스로 미혹됨이니[약 1:14] 전적으로 내게 달린 것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힘 주시지 않고 은혜 베푸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우리 스스로 되어지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누차 강조한 대로 ’나의 의지‘와 ’그 의지대로 이루는 것‘은 별개입니다. 내 의지대로 밀어붙이니 내 힘으로 그렇게 된 줄로 알지만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이 능력과 은혜를 구함이 마땅합니다. 그것도 나 자신을 위해서 구하는 의미가 아니라 전체 우리를 위해 다시 말해 형제들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이루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구하기만 한다고 이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 스스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그리고 죄 짓지 않도록 확고한 결의에 차 있지 않는 한 그런 기도는 무의미하니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매일 즉 바로 오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도 오늘, 순종도 오늘입니다. 오늘 현재를 기준합니다. 과거 내가 능력을 행했다, 믿음이 좋았다는 것으로 저울질되지 않습니다[마 7:22,23]. 사랑이 그러합니다. 영원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먹는 것은 매일의 동작입니다. 미리 먹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일상생활입니다. "나를 먹는 자라야 나로 인하여 산다"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요 6:57].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나의 믿음의 의지에 언제나 좌우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각종 병을 고치시면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으로 이를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마지막 마무리는, 이런 일을 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지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잠시 한 때뿐이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께 있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이 한 때의 핍박과 방해에 개의치 않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 말씀 드리며 스스로 또한 다짐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으니 그러면 바울이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hunger]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다”[고전 4:11]고 했으니 모순이 아니냐 할 것이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의 모든 활동은 이 세상에서나 영원한 천국에서나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데에 있어 머리의 지시를 받들어 한 몸에 속한 지체로서의 기능을 원활히 하는 데에 있으므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하나님께 양식을 ‘구걸하는’ 식으로[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래서 그런 기도를 부담으로 인식하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구하는 목적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이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는 데에 있고 먹고 산다는 데에 있지 않으므로 만약 굶는 것이 경우에 따라 주님께 영광이 된다면 그 굶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주님의 일을 함에 있는 까닭에 그 고난에 동참함은 때로는 바울처럼 굶고 주리고 헐벗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 뜻은 다음 대목에서도 명확히 나타납니다. 즉 “종들이여,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上典)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遺業)의 상(賞)[the reward of the inheritance, 상속받는 것으로써 보답되는 것]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골 3:22-24]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순간 이후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때부터 나의 모든 활동과 일체의 움직임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것이니 곧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9] 의미입니다. 따라서 먹어도 마셔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골 3:17], 말에나 일에나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고전 10:31].

베드로가 “각각 은사(恩賜)[성령의 선물]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직이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벧전 4:10,11]이라 함이 바로 이 뜻입니다. 이 바로 정작 사람 사는 또는 모든 피조물이 진정으로 영생을 누리는 방법 그 자체입니다.

즉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면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요 14:10/5:19] 하심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우리 역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으로 둘이 하나 되어 있음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는 방법을 모르고 무조건 살면 사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리를 깨달은 자로서 사는 법대로 올바르게 살게 되는 법을 안 것입니다. 즉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한 몸으로서의 머리와 몸[몸의 지체]의 구조 안에서의 삶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을 받는 것이 상(賞, reward-골 3:24)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여러 편지에서 이 “상”에 대하여 자주 말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영생 외에 무슨 특별한 상급과 같은 무엇이 있는 것처럼 억지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도 구원은 이미 받아 놓았고 개인적으로 상 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어린 아이의 상식으로도 이해 못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며 선전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이해 못할진대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는데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은 어린 아이라도 능히 깨닫고 구원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말씀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상 타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타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야말로 다시는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신[고후 5:15]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이 만드는 전형적인 “말씀 혼잡”[2:17]이 됩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항상 강조하는 “상”[reward]은 영생 그 자체이니, 영생은 약속이기 때문입니다[요일 2:25/약 1:12/2:5]. 뜻을 행해야 하므로 그 뜻을 행한 사람이 받는 것이기 때문에 뜻을 행한데 대한 당연한 보답, 보응[reward]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상속 받는 것을 상[“유업의 상”]이라고 하였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으로써 구원 받은 것인데 상속자가 아닌 아들이 없습니다. 고로 "약속을 받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꼭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는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다"[히 10:35,36] 한 것입니다. 즉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요 그렇게 "구원을 이루게 됨"이 "상"입니다. 왜냐면 내가 구원을 이루었다고 내 힘으로 이루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은 앞에서 누차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하나님 주시지 않고는 내 스스로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는 것이요, 하나님 주시지 않으면 내 스스로 아무 것도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니 나는 스스로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은 은혜로 주시는 것이며, "내 스스로 빼앗아 차지하는 천국"[마 11:12/눅 16:16]임과 동시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천국"[눅 12:32]입니다. 극과 극의 대립처럼 보이는 전혀 상반된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하나의 의미이니 이것이 '삼위일체 원리'의 둘이 하나되는 오묘(奧妙)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이루라"는 말과 그 뜻이 아무 하자가 없는데도, 자기 취향과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그릇된 선입견, 편견을 가지고 감히 성경에 달려드니 진리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2천년의 전통적인 해석"에 권위를 두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의 계시'는 그런 '인간의 연륜(年輪)'과는 전혀 별개임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이 그렇게 믿고 극소수의 사람이 달리 믿는 경우도 "성령이 계시"에 관한 한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일만 명이 있어도 성령의 계시는 오직 그 중의 단 한 사람에게만 나타날 수 있고 나머지는 모두 무지(無知) 가운데 버려두실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천 년 아니라 일만 년이 흘러가도 구원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령의 가르치심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 이미 그렇게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로 진리를 말씀하신다고 선포하신 이상에는[눅 10:21,22/고전 2:9/요 6:44,45,65/고전 2:13,14/마 16:17] 인간의 지식과 지혜 등으로 말씀을 깨치려 하는 사람은 일만 년이 흘러간다 해도 진리에는 이를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 일하는 것이라”[요 6:28] 대답하셨으니, 이는 곧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함을 가리키심입니다. 즉 앞에서 말한 대로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되니 자연 그렇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 받음을 우리가 이 세상에 보내심 받아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과 동일시하신 것과 같습니다[20:21,22/4:34].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약하게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완벽 그 자체입니다. 새 창조 역시 물론입니다. “약하다” 하지 말고 ‘믿지  않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지,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무용지물입니다.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래서 “항상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 믿음은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회개가 개재됨이니 즉 앞으로는 철저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의가 충만해야 함을 명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셔서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다”[행 14:17] 한 것이라든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신다”[마 5:45] 말씀하신 것은, 해는 자연적으로 비추니 비추는 것이고 비도 때가 되면 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는 하나님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밭에 나가 일한다고 해서 수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적당량의 햇볕과 비를 흡수해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우주에서 무엇이든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고는 되는 것이 없고 자연히 저절로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가 하니까 해지는 것으로 알지만 결단코 그렇지 않고 우리 머리 털까지 다 세시고 참새 한 마리도 몇 마리인지 다 챙기셔서 그 죽고 사는 것을 관장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우리로서 이런 모든 것에 대하여 구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나 덮어놓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려는 그런 의식으로써 즉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의지(意志)로써 구하는 것이 "구함"의 의미입니다. 그냥 달라고 구할 바에야 차라리 구하지 않는 것이 낳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생명이고 삶 자체이므로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자기를 위해서 구한다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의식(意識)은 전혀 배제되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몇 번이고 강조하셔서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하시는 것은 무조건 달라고[우리 자신을 위해서] 구함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실상과 진리를 알게 하셨으므로 그렇게 알게 해 주신 대로 즉 배운 대로] 구하고 기도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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