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25)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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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면 그 속에 불의가 없다


베드로의 믿음을 밀 까부르듯 하려고 사탄이 베드로를 청구했으나 "내가 네 믿음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 하신 말씀을 상기하게 된다. 천하 없는 믿음이라도 사탄은 휴지 조각처럼 휙 한번 불면 그냥 날아가게 되어 있다. 그만큼 육체로서의 인간의 모든 것은 이 세상 신[神, 현재는 그러하나 원래는 범죄 이전의 아담 아래 있던 자였다]으로 군림해 있는 사탄 앞에 맥도 못추게 되어 있다.

고로 오직 성령을 통해 매사 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되고 따라서 쉬지 않는 기도로써만 이기는 것이다. 쉬지 않는 기도란 다름아니라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과의 쉬지 않는 대화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필요한 이성과 이지를 주셨다. 그러나 '육체'인 인간과 '영'인 사탄의 차이가 이렇게 엄청나다. 인간 범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 수 있다. 사탄은 인간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는 자기 마음대로 인간을 요리하여 믿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다.

핍박과 갖가지 유혹 즉 세상사에 대한 염려, 쾌락, 남 못지 않게 살고자 하는 욕구로서의 부(富)에 대한 집념 등이 모두 사탄의 촉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했다[계 12:9]. 육체와 영의 이런 상대적인 실상[우리가 육체이기 때문에 영인 사탄이 이런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므로]과 인간의 이런 어리석음을 미리 아는 것이 사탄의 그 같은 모든 막된 짓을 이기고 대처하는 지혜다.

그러나 아무리 사탄이 막강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동의 없이 그 스스로 강제하지는 못한다. 하나님도 강제하거나 간섭하시지 않는데 하물며 일개 피조물인 사탄이랴. 에덴낙원에서의 범죄도 인간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 저주를 받아도 똑 같이 받은 것이다. 그런즉 사탄을 두고 탓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그 역할은 있다. 범죄 요건에 그가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 이 세상 구조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그에 동조하지만 않으면 그 역시 맥을 못춘다. 그래서 성경에는 사탄에 대한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문제는 나 자신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자유 의지로써 사탄에게 동조해서인가? 동조하는 자가 있고 동조는 않으나 자력으로 그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해 발버둥치는 자가 있어 둘로 분류된다. 이스라엘이 모세 율법 아래 있어 교육을 끊임없이 받고 있었으나 그리스도 오시자 모두가 다 영접해 들인 것이 아니다. 일부 그것도 비율로 따지면 극소수에 불과했던 이들만이 빛으로 온 것이니, 어느 정도냐 하면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게 된 사실을 표준할 때 겨우 500여명 정도다[고전 15:6].

이런 소수의 무리라도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데에는 그들을 위한 기도가 필수이다. 이래서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절실하다 하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께 나아오는 데에는 그리고 그 이후 많은 사람이 믿음을 얻는 데에는 주님의 기도가 필수였고 지금도 주님은 기도하고 계시고 이 기도에 맞추어 즉 "성령 안에서"[엡 6:18/유 1:20] 우리 역시 제사장의 기도를 끊임없이 드려야 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완벽하고 그리고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고 그 뜻이 변하시지 않는다. 이것은 만유를 지으시고 운영하는 차원에서 당연한 요소이고 요건이다. 만일 창조주께서 이랬다 저랬다 하시거나 또는 거짓말을 하여 속이신다면 피조물이 어떻게 따르고 그 말씀을 시행하려 할 마음을 감히 품겠는가. 이 모두 상식 선에서 판단할 일이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시면 그 자체만으로도 먹어서는 안되는 충분한 사유가 된다. 왜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로서 정해 놓으신 것을 피조물이 왈가왈부할 것인가. 그것이 교만이다.

아담도 사탄처럼 교만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범죄는 교만에서 온다.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고 할 때는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셨을 때는 그렇게 자기 부인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을뿐더러 그리고 능히 그렇게 자기 부인하고 육신대로 살지 않고도 남을 충분한 힘을 공급하시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 부인은 아무도 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는 육신대로 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차 있으니 자기가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는 얼마나 큰 교만인가.

이와 같이 공급된 힘을 우리가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하시고 침노하는 자[the violent]가 "빼앗아 차지하는[to take it by force] 것"이라 하신 것이다[마 11:12]. 다시 말해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천국은 너무나 멀고 먼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손 닿을 데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써 이 죽음 문제[인간이 산 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죽음의 과정을 거쳐 죽고 난 다음이어야 하므로]가 해결된 것이다.

그리고 죄가 있으면 사탄과 한 통속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왜냐면 그는 처음부터 범죄하는 자이므로(요일 3:8) 범죄한다는 것은 그에게 속하고[:8] 그와 운명을 같이한다는 의미가 됨이다] 천국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데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자기 중심이라는 아성(牙城)이 무너진 까닭이다. 이제는 얼마든지 자기 부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는 이로서 영원히 내 안에 자리잡아 계시기 때문이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내 몸에 채우면 채울수록 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고후 4:10,11]. 그리스도의 능력이 총 가동이 되니 이야말로 완벽한 힘이 아닌가!

주님만 나를 위하심이 아니라 모든 형제가 다 나를 위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는 그 백배를 받는다 하셨다[막 10:30]. 초대 교회가 이 가르치심을 받들어 모든 물건을 함께 나누어 쓰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다[행 4:32].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주님께 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멸망에 이르게 되는 이유도 이 이치를 따름이다. 즉 믿음이 없다는 증거를 그 스스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으니 구원 받지 못했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구원은 '얻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것'인데, 구원을 받은 대로 '살지를 않았으니' 구원이 없고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실 리 만무하다.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위하시는 그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으로써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하지 않은 것은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 단정하시고 단죄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죄인은 죽어야 하니 가장 먼저 죽어야 한다는 그런 사실이 아니더라도, "죽기를 무서워하는"[히 2:15] 철의 장막으로 둘러쳐져 그 누구도 천국은 들어갈 엄두를 못냈었다. 주님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대로, 핍박이 일어나도 못들어가고, 쾌락이 들어오면 천국은 더욱 엄두를 못내고, 돈 벌어 잘 살자는 생각에 사로잡혀 열매를 못맺고, 이 세상 살자니까 각종 염려 때문에 결실치 못하는 자가 되고 그래서 천국은 너무나 우리 인간과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구원 받은 자는 힘이 있다. 그 받은 바 힘으로 이와 같은 철의 장막으로 둘러쳐진 사탄의 온갖 방해와 장애를 뛰어넘어 천국으로 물밀 듯이 들어가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다. 사탄의 그 같은 방해하는 힘을 능히 압박하고 압도하여 그 장막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힘으로써 사탄의 그 온갖 방해를 물리치고 쳐서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다.

고로 성경에서 복음을 전할 때 "천국이 가까웠다"고 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게 힘으로써 천국을 빼앗을 수 있다는 의미를 말함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므로 동시에 "회개하라" 한 것이다.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을 때는 회개할 수가 없다. 왜냐면 회개한다고 해놓고 또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그것은 회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 받는 것이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것이 됨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 구원은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 두는' 것이 아니라 '능동 적극적으로 사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되었으니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사셨던가? 바로 그대로 사는 것이니 곧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몸으로서 사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그 뜻을 받들어 사는 것이다.

왜냐면 무릇 아들은 아버지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동류이고 동질[同質]이고 아버지의 것을 타고 난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으셔서 우리 위해 그 십자가 고난을 통해 우리 구원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보내심 받고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사람 살리는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업에 뛰어들고 있는 현재의 위치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삶이 가능하겠는가[고후 5:15/롬 14:7].

현재의 세상 문화는 실질적으로 사탄에게 속한 것이다. 사탄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신 노릇을 하며 자기 권위를 세우려는데 있지 않다. 그이 유일한 목적은 오직 인생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함에 있고 구원 얻지 못하게 함 오직 그것뿐이다.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세상에서 각종 상품들을 진열해 놓고 넋을 빼놓으려는 것이다. 존 번얀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에 나오는 세상이라는 이름의 시장(市場)에 나오는 각종 상품들이다.

주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 하셨다. 즉 먹고 마시는 것 자체이니 먹고 마시지 않으면 죽는 것과 같이 우리가 주님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진력함이 없으면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이와 같이 수고하면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니[벧후 1:11] 살았기 때문에 수고가 가능해짐이다. 왜냐면 죽은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법이 없는 까닭이다.

사람 살리는 일에만 그야말로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산 자의 일이요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런즉 공짜로 거저 주시는 것을 받아 챙기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구원을 이제까지 이해해 온 사람은 이 설명을 마치 "다른 복음"을 듣는 것처럼 여길지 모르나, 그러나 실상은 이제까지 그 자신이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따랐고 혹은 "다른 영"을 받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 보존한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내일 일도 기약 못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산다고 할 수 있는가. 인생 70도 못다 채우는 이 얼마나 많은가. 내일도 기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 세상에서 산다고 하는가. 진정 자유인으로서 사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은 것을 아니하는 데에 있다. 그러면 우리 구원된 사람은 과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기 싫은 대로 아니하는가? 당연히 그렇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만 구원 얻자니 해야 하고, 하고는 싶지만 구원을 받지 못할까 그것이 두려워 못한다면 당신은 아직 믿음에 들어오지 않았고 구원과는 멀어져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 구원을 가리켜 피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얻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 능동적으로 사는 것이라 했다. 억지로 사는 것이 있는가? 물론 죽지 못해 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그렇다는 애기이지 우리 구원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이다.

'얻는 것'과 '사는 것'과의 차이는 여기서도 드러난다. 얻는 것으로만 여기면 살기는 억지로 살고 죽지 못해 살아도 그 얻은 것 하나 때문에 참고 살아간다는 말이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산다고 할 때는 그 삶 자체를 즐기며 생명을 누리며 사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과 하나되어 사는 삶이다. 사랑은 항상 기쁨을 낳는다. 사랑 자체가 삶이요 삶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곧 생명인 까닭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심과 동시에 사랑이시라 함과 같다.

고난을 "참는다"든가, "참고 선을 행한다"든가 하는 말은 물론 성경에 있다. 그런 말만 있을 뿐 아니라 실제 주님은 십자가 고난으로 향하시면서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막 14:34] 하셨다. 육체는 원하지 않는 일이지만, 그 심령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 생명과 낙과 즐거움과 모든 가치를 삼으니, 그 진정 하고 싶은 것, 하고자 하는 것을 하시는 것이었다. 차이는 여기에 있다. 기도에 힘쓰고 복음을 전하고 남을 위해 그들로 하여금 구원 얻도록 하자니까 내 생명을 소홀히 여김이 되고 몽땅 바치고 희생하는 것이야 세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이 바로 자기 생명 미워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을 "얼마나 암울하고 얼마나 무미 건조한가!" 한다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치이다. 성령 안에서의 평안과 희락 그리고 의를 행함으로써의 넘치는 보람이 무척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롬 14:17]. 즉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기 싫은 일을 아니하는 자유인의 삶이다. 과거 세상과 더불어 살던 때와는 생사의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지고 뒤바꾸어진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의 이러한 기쁨을 최상급의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한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했다. 이런 고해(苦海)요 사해(死海)인 세상에서 이 정도의 보람과 기쁨을 누린다면 충분하지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리요. 이것 역시 영원한 천국을 바로 앞에 두고 바라며 누리는 풍성한 만족감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구원이나 영생 하나만 붙들고 억지로 하다시피 믿음 생활을 하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구원에 대한 소망이 있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은 세상에 대한 일체의 미련을 끊고 믿음에 다시 들어올 일이다. 왜냐면 처음부터 길을 잘못 잡아들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자유와 통한다[요 8:32/고후 3:17]. 자기 스스로 일을 찾아 헤매는 그 정도가 아니면 즐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며, 시키는 대로 하는 수준이면 억지로 하는 일로서 즉 자기 구원 하나에만 매달리는 것이 역력하므로 이는 구원 받은 것도 아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기 행위[종교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게 된다.
 

§ 성령 세례의 능력

간단히 말해 예수님을 믿는 이면 누구나 성령을 받는 것인데도 특별히 능력 있는 봉사 즉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성령으로 세례 받아야 능력으로 입혀진다는 '교리'는, 인위적인 교리일 뿐이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이런 교리를 내세우는 사람은 오순절 다락방에서의 성령 세례 받기 이전 즉 성령 강림 이전에도 이미 12 제자 혹은 다락방에 모인 약 120명되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임해 있었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 남들이 써 놓은 책이나 열심히 들여다 본 결과다.

그런 개인적인 견해를 성경으로 걸러내지 않고 여과 없이 받아들여 그대로 거기 흡수되어버린 탓이다. 한 개가 자빠지면 나머지 모두가 줄줄이 남김없이 쓰러지는 소위 도미노 식 도괴(倒壞) 현상과 같다. 처음 어떤 사람이 성경을 잘 읽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만 성경 풀이한 것을 기록해 두었는데 어쩌다가 유명인이 되자 그 유명세에 힘입어 그 글에다가 모든 다른 사람들이 권위를 두기 시작하여 대대로 이어져 내려옴과 같은 그런 것이다. 그 중에 누구든 성경을 제대로 읽기 시작하면 그 고리가 끊어질 법한데도 한결 같이 성경을 제대로 찾아 읽지 않는 것이다. 읽어도 그렇게 얻은 편견이나 선입관으로 읽기 때문에 제대로 읽혀질 리가 없다.

성령의 계시만을 앙망하면서 성경 그대로 읽으려면 기존의 모든 권위에 대한 도전 정신으로 읽지 않고는 안되는 남다른 각오가 요구되는 까닭에 누구도 그런 모험을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어디로든지 주님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는 그런 의지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성경을 장시간 읽으며 탐독함으로써 이단 사상에 흘러 버린 많은 사례들을 사탄은 만들어 놓고 있는 판이니 더욱 더 하다. 그러나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담근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금식에 지나쳐 광신에 흐르게 하고 기도에 지나치도록 하여 기도나 금식 자체를 꺼려하는 풍조를 만들어 놓는 일에 사탄은 이력이 난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서는 무엇이든 지나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하지 않아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인위적으로 사람의 열심으로만 잘못 길을 잡아든 까닭에 그런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것뿐이다. 이 점만 잘 파악하고 사탄이 끊임없이 백방으로 훼방하고 있다는 사실만 인식하면 그 어떤 혼돈도 일어날 수 없다. 사탄의 존재마저 많은 사람이 부정하고 있는 현실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 세례에 대하여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腹]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내릴 것이다" 하셨고, 요한은 이를 설명하여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했고 덧붙여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榮光)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했다"[요 7:38,39]고 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십자가 고난 끝에 운명하심을 말하는데 이는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保惠師, Comforter, helper)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다"[16:7] 하신 말씀과 일치한다.

"내가 가면"이라 하신 것은 "영광을 받으신다"는 의미와 동일하게 고난 받으심과 부활하심은 물론이고 승천하심을 동시에 나타낸다. 위의 교리를 내세우는 이들은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신 사실을 거론하는데 이는 성령의 세례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이 "숨을 내쉬심"과 관계 있음을 나타내 보이신 것뿐이다. 즉 새 창조의 의미임을 보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자연계에 속해 있는 육체 가운데 있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애초 이 자연계에 속한 흙으로 육체가 먼저 지으심 받은 뒤 그 코에 숨을 내쉬심으로써 영혼을 창조하신 사실을 되풀이하는 과정[새 창조이니까]임을 보이시는 것이었다. 이는 다름아니라 아담이 추방되었던 그 에덴낙원은 영계였다는 사실 그러므로 거기서 아담 내외는 영적인 몸 다시 말해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 영적인 존재로서 영혼이 엄연히 있는 우리 몸에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을 두고, 그 때 당시 아담에게 영혼을 조성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나타내어 표현하실 리가 없다. 즉 이제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은 그 첫 창조에서 첫 사람 아담에게 영혼이 존재하게 됨과 같은 양상임을 주님이 그렇게 "숨을 내쉬심"으로써 즉 아담에게 영혼을 조성하실 때의 동작처럼 아담의 코에 숨을 내쉬시는 혀용을 취하심으로써 나타내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에덴낙원이 이 자연계이고 아담이 처음부터 우리처럼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 있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첫 사람 아담의 범죄나 우리의 범죄나 모두 우리가 신령한 몸이 되어 영생하도록 하는 필수 과정이 된다는 뜻이 되므로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아담의 범죄가 필요악이 된다는 뜻으로서 그리 되면 아담의 범죄 행위에 그 어떤 책임도 부과될 수 없다. 저주를 받아서도 안되는 것이다.

또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더라도 자연계에서 천년 가까이 살다가 죽었을 것이니 [혹은 그 열 갑절, 백 갑절을 살았다 해도 의미는 마찬가지다] 그러면 영생하기 위해 신령한 몸이 될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때문에 아담이 범죄하기를 차라리 잘 했다는 기상천외한 해석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왜냐면 범죄했기 때문에 새 창조가 시작되고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까닭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음으로써 신령한 육체가 되어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요 이런 "혈과 육으로는 들어갈 수 없기"[고전 15:50]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 창조가 다시 되풀이되는 과정이 새 창조이다. 처음 창조가 인간 범죄로 말미암아 영구적으로 괴멸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서 영계로 옮겨졌는데 다시 그 영계에서 자연계로 도로 돌아와 버린 까닭이다. 그러나 이 되풀이되는 것도 한번으로 끝나고 다시 반복되지 않으니 모든 것은 양면성의 대칭 관계로 이루어짐이니 이것이 3위1체의 원리다. 삼위일체 원리에서는 대칭[상칭]성으로 양면으로만 짜여지지 3차, 4차 하고 끝없이 반복되어지는 일은 없다.

그래서 처음 창조에서 영혼 없는 아담의 육체에 하나님 친히 숨[우리말 번역은 "생기(生氣)", 영역은 "breath of life"]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다 즉 영혼을 조성해 주셨다 한 것처럼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이니, 아담이 영혼이 있어 영적 존재가 됨으로써 영계에 들어가 영생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새 창조에서 성령께서 그 당시의 '영혼' 격이시라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영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모습이 성령이시므로 성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를 우리의 의지로 [그러나 능력은 하나님의 것으로써] 지탱해 나갈 때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코에 숨을 내쉬신[to breathe] 것이다. 하나님의 숨이야 당연히 생명의 숨["breath of life"] 곧 생기(生氣)가 아니신가. 일부러 생기를 만드셔서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나님의 숨 자체가 생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니 우리 피조물의 육체처럼 무슨 숨[breath]이 있으시겠는가마는 우리 인간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느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야 성령께서 임하시게 되어 있는 명백한 성경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이 바로 그렇게 그리스도 친히 임하심으로 믿는 각자 안에 비로소 내재(內在)해 계심인데도, 그것이 아니고 그것은 오직 능력으로 덧입혀지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어째서 나올 수 있는지 기가 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구원 받는 자 따로 있고 일하는 자 따로 있다는 말이던가.

우리의 구원 자체가 일하라고 보내심 받는 의미이다[요 20:21]. 그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심 자체가 바로 그 일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시다. 능력이라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각자 안에 임하시면 그 임하신 대로 성령의 은사(선물]를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성령 자신께서 [그리스도 자신께서] 선물이시지만, 각자에게 임하실 때 각자를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 역할을 하게 하심이므로 그 지체 역할에 해당되는 것이 곧 "성령의 은사"["gift"]인 것이다. 병 고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등 바울이 그 편지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대로다[고전 12:8].

그들의 '말'로는[사람의 말뿐이지 성경의 진리는 아니다] 이렇게 성령의 세례를 받아 능력으로 덧입혀지면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죄를 이길 수 없었고 죄에게 포로되어 있다는 논리다.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하나되어 계심 다시 말해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 자체가 이미 죄[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짓는 죄]로부터의 완전 단절, 죄를 이기고도 남는 것을 말함이니, 그렇기 때문에 "죄의 몸이 파괴되어졌음"[롬 6:6]을 말하는 것이다.

이 죄의 몸이 깨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기 때문이다[고후 5:14,15]. 그래서 바울만 아니라 베드로 역시 당연히 강조하기를,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다"[벧전 4:1] 하였다. 죽음이 모든 악과 죄의 종결이기 때문이다. 육신이 들어 우리로 하여금 죄에게 종 노릇하게 했으니[롬 7:2-8:3] 육신 곧 죄의 몸이 십자가 죽음으로 파괴된 이상 이는 당연하다. 나 위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이 파괴시키는 역할을 넉넉히 이루신 것이다.

우리가 믿을 때에 받아 모시는 성령을 가리켜 성경은 성령 세례라 하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 모심은 그리스도를 영접해 모심이다.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아무 근거도 성경은 제시하는 바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영접해 모시는 즉시 나의 육신의 죽음은 현실이 되고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이전 옛 육체가 아닌 것이다. 능히 죄를 이길 수 있게 됨은 당연하다. 따로 성령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자기 부인이 없이는 순종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회개하라는 명령을 하실 수 없었음을 바울 사도는 자세히 밝힌 것이다[행 17:30]. 회개가 불가능하니 심판도 불가능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시대에서는 회개는 물론 심판도 가능해진 것이니 회개하여 죄를 짓지 않고 참고 선을 행할 수 있는데도 자기 의지로 고의적으로 그 길을 택하지 않으니 당연히 심판에 해당됨이다.

믿고 나서 일정 기간을 거친 다음에야 하나님을 일을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또 특수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 받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일을 함이다. 보내심을 받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믿는 즉시 하나님의 일을 함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했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 하는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요 6:28,29]. 믿고 구원 받는 것이 곧 성령 세례 받음이다. 성령의 세례가 바로 구원 받음 즉 그리스도와 하나됨이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곧 그의 일을 이룸이요 그 뜻을 행함이니[요 4:34] 곧 일하라고 보내심 받음이다.

산 자는 산 자로서의 일을 함이니 한 몸 체제에서 머리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일차적이요 그 지시를 따라 같은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들을 위해 자기 몫[지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함이 그 다음이다. 이렇게 움직이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참고 선을 행함"[롬 2:7]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곧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니[고후 5:15] 자기 부인이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니 곧 삶 자체가 일하는[Saved to serve.]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거니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자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롬 8:1,2] 때문이라 하였으니, 즉 구원 받은 증거는 죄에게서 해방됨이다. 또는 자기중심에서의 해방이다. 다른 말로, 자기 부인이 이미 나의 죽음[그리스도와 함께]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허둥지둥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해방되었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세상에서 말하는 "해방됨"과 성경에서 말하는 "해방됨"이 다른가? 그러면 그런 것을 누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겠는가? 도대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이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인간이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기록되었으니 누가 그것을 읽겠는가? 성경은 어린 아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록된 책이다. 하나님과 성경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가?

물론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어 죄를 지어도 의를 행해도 자기 임의로 할 수 있다. 이 임의로 행하여 사탄은 사탄이 되었고 아담은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러 전체 인류를 이러한 사해(死海)에 빠뜨렸다. 성경적인 기준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 아닌 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처하고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구원 받은 것으로 오해하여 구원은 관계 없는 오직 기독교라는 종교인만을 양산하고 있는 오늘날이라고 판단하면 정확하다. 이런 대규모의 진리 이탈이 아니라면 성경이 이를 "배도[背道]"[살후 2:3]로 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이 "배도"라는 말을 또 소위 "휴거[Rapture]"라는 교리에 갖다 붙이고 있다. 영역으로 "departure"라고 번역하여 이 세상을 떠나[to depart] 공중으로 들어올려 주님을 영접한다는 그런 뜻으로 억지 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의 성령 받으심이 그런 "특별한" 능력 받음의 선례(先例)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경우 성령의 내재(內在)는 분명한데 오직 복음 전파의 능력을 위해 그 성령 세례를 받으셨다고 억지 풀이를 한다. 

주님의 성령 세례는 주님의 물 세례와 똑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즉 우리와 하나되시기 위함이니 이를 상징하여 나타냄이다. 곧 주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이니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이다[갈 3:27). "누구든지 주님과 합하는 자는 한 영이기 때문이다[고전 6: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물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 받음으로써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와 함께 장사됨을 나타내심이고, 그리하여 그 성령 세례는 역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시는 바 우리의 성령 세례를 상징하심이다[롬 6:3,4]. 이 성령 세례는 그러므로 특별한 사람, 특별한 하나님의 일을 위함이 아니고 우리가 믿을 때에 누구든지 성령을 선물로 받는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킴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특별한 사람, 특별한 업무, 직책이 있을 까닭이 없다. 머리를 제외한 온 몸의 각 지체가 다 서로 평등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들이다. 그리고 이 한 몸되는 이치로서의 삶의 체제는 사랑으로 하나됨에 있으므로 사랑 안에는 모두가 주인이고 동시에 모두가 종이다. 그러므로 머리께서 무엇을 요구하실 때는 모두에게 똑 같이 요구하시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더 나은 일이 있고 못한 일이 있을 수 없으면 더 많이 요구하시는 것도 없고 덜 요구하시는 것도 없으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세례를 받으시기 이전에도 그리스도께는 이미 성령이 그 안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성령 받으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성령이 누구이신가 하는데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시다. 반면 우리가 받는 성령의 세례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영 곧 그리스도시다[롬 8:9,10]. 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그리스도시므로 "성령"이라 부르는 것이다.

고로 내용이 사뭇 다르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성령은 아버지이시고 우리가 성령의 세례로서 받는 성령은 그리스도시니 곧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으로서의 하나님 곧 성령이시다. 고로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모심이다[요이 1:9]. 동시에 모신다고 두 분을 따로따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의 모습이시니 곧 그리스도의 모습이시다. 그러나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심으로 인하여 성령이시라 하는 것이니,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하심과 같다[요 12:45].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이시라는 것과 겉은 의미다. 그 하나되심은 사람이 되셨다고 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이제는 사람이 되어 계시므로 사람 그리스도시다. 사람으로 통하시는 그리스도이신지라 "하나님"이라 할 때는 주로 아버지를 가리켜 말함이 된다. 즉 사람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게 됨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자기 안에 모시지는 못한다. 왜냐면 다 같이 육체이기 때문에 육체가 다른 육체 안에 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고로 이 때는 하나님이신 그 유일무이하신[사람이시고 하나님,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신 분은 영원히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으므로] 메시아적 속성을 따라 내 안에 거하실 수 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성령 세례나 우리의 성령 세례나 공통점은 있다. 그것은 주님의 경우 아버지 친히 아들을 통해 그의 일을 하신다는 의미이고 우리의 경우 그리스도 친히 우리 각 사람을 통해[우리가 성령 받음으로써] 주님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뜻이 된다. 고로 주님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이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일을 함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경우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아들을 내어 주심이 된지라 세상에 태어나실 때는 아들 혼자이셨다. 다시 말해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지 아버지와 함께 사람이 되심으로 아버지 친히 사람되신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혼자 단독으로 떨어져 계시는 기간이 주님께서 30세가 되시기까지 지속되었다 하겠다. 이것이 주님 안에 처음부터 아버지의 영이 계시지 않았다는 근거 중 하나다.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비로소 아버지의 영이 아들께 임하신 것이니 즉 영원 전부터 아들과 하나되어 계시던 모습[아들로서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던]으로 회복하신 것이다.

이 때까지는 주님께서 아무 일도 아니 하셨다. 단지 목수인 요셉의 목공 기술을 물려받아 목수 일을 하신 것뿐이다[막 6:3].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 받으신 후 그리고 즉시 성령께서 임하신 후로 주님의 복음 사업은 시작된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한 사람으로서 다시 말해 내 이름으로 오시고 '또 하나의 내'가 되셔서 나타내신 일들이므로, 모두가 장차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고 성령 받아 오로지 주님의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을 그대로 상징하여 나타내심이다.

내가 오직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내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서만 살기 때문에[고후 5:15] 나의 하는 일이 모두 주님을 위한 주님의 남으신 일을 주님과 함께 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난도 주님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이라고 바울은 분명히 밝힌 것이다. 역시 주님과 그 남으신 고난을 함께 함이다. 현재 내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그렇게 하심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의미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그리 하셨고 이제는 아들께서 나와 그리 하시고 다시 이는 아버지 역시 그 아들[그리스도]을 통해 그렇게 하심이다.

이는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내어 주신 바되어 아버지와 떨어져 계심과 같이 나는 나의 죄를 인하여 나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 과거 떨어져 분리되어 있었음을 상징함은 물론이다. 아들을 "내어 주셨다"[롬 8:32] 한 것이다. 내어 주셨다[to deliver up]는 것은 방출(放出)시키다, 내놓다, 인도[引渡]하여 넘겨 주다, 포기하다 등등의 뜻 그대로다. 따라서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심으로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으신 것처럼, 나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로서 선포됨이다.

왜냐면 내 안에 아들 계시고 동시에 아버지께서 계시게 됨이기 때문이다[요이 1:9].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인하여 아버지를 떠나 단독으로 계시다가 성령 받으심으로써 아버지와 다시 하나되심을 이룩한 것처럼 나는 죽음 가운데 있어 그리고 죄의 종이라 진노의 자식이었으나 성령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이른 것이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사랑으로 하나되심과 내가 그리스도와 사랑 가운데서 하나됨이 동일하고 본질적으로 같다는 사실을 보임이다.

실상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어 계시는 그 이치를 따라 우리를 새로 창조하심으로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어 계심은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변화하지 않는다. 우리 위하여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아들께서는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과 함께 계신 것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 친히 아들을 통해 그 모든 고난을 함께 나를 위해 당하신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아들께서 당하신 고난이 내가 받는 고난으로 적응됨은 그렇게 고난 당하신 주님 친히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심으로써 나와 명실상부하게 하나가 되심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다.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받는 모든 고난이 나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니[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역시 함께 당하시는] 때문에 사울을 부르실 때 "네가 어찌하여 내 교회를 핍박하느냐?" 하시지 않고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실 때 물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서 하늘에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따라서 기도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으로는 내 안에 계시지만 동시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계심이 그리스도께 그러하심이었다. 그리고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눅 23:46] 하실 때도 마찬가지이니, 이는 스데반이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권능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주 예수님, 저의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행 7:59] 한 것과 마찬가지다.

당시 스데반에게 성령께서 계심이 물론이었음과 같이 십자가 위에서의 주님께 역시 아버지의 성령께서 함께 계셨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스데반의 육체를 통하여 그 남으신 고난을 채우시고 있었고 아버지께서는 주님의 육체를 통하여 그 모든 고통을 남김없이 당하고 계셨던 것이다. 둘이 하나됨의 의미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스데반이 우러러 그리스도를 뵌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엄연히 계심이다. 내 안에 계시지만 동시에 하늘의 하나님 우편 보좌가 그 위치이시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났으니 성령을 물려받아 '나'라는 존재의 구조 또는 체제가 영원히 성령과 하나됨으로써 새 창조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성령을 선물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영원한 선물이심을 의미함이다[요 4:10]. 그러므로 주님께서 성령께 대하여 말씀하실 때 "너희는 그를 알고 있으니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하신 것이 이 사실을 가리키심이다. 제자들이 성령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들이 아는 것은 오직 육체로 계시는 주님을 안다는 것뿐이다. 바로 이것이 그 답인 것이다.

즉 아버지와 하나되어 존재하시는 아들이신 것이다. 아들만 아니라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아들이시다. 그래서 아들이신 주님을 제자들이 알고 있으므로 "너희가 그를 안다" 하셨다. "나를 안다"고 하신 것이 아니니 이는 아들 홀로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하나되신 아들께서 육체로 나타나 계시는 모습으로 현재 "그들과 함께 거하시나 장차 성령으로 그들 안에 계실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심이다. 그리스도께는 그 사시는 것이 바로 '나'이다. 이 사실은 이미 그리스도 친히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죽으신" 즉 내게 그 자신을 몽땅 선물로 주신[갈 2:20] 것으로 이미 확증하셨다[롬 5:8]. 이것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계신다"는 말로써 표현된다. 이는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 하심과 같다.

이러한 삶은 친히 아버지와 하나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이 지상에서 나타내신 바로 그런 삶이다. 즉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하신 것이라든가,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다"[7:18] 하신 것이라든가,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한다"[8:28] 하신 것이라든가 등이 모두 그러하다.

이와 같이 보내심을 받아 자기의 것을 일절 구하지 않고 오직 자기를 보내신 이의 영광과 그 일을 행한다고 하면서 고난을 자취하고 이 세상에서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을 추구하지 않을 때, 거기에는 천하 없어도 거짓이나 속임수는 없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아로새겨 둘 일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진실성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자체 증명하는 것 중의 하나다. 장차 마귀가 그 어떤 혹독한 거짓말과 지어낸 속임수로 성경을 공격하고 부정하더라도 이상 사실 한 가지만 마음에 아로새겨 두더라도 그것으로 능히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막강한 힘이 될 것이다. 이는 절대적인 진리이니 이를 꺾을 수 있는 것은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아들과 아버지께서는 둘이 항상 하나로 계신다. 단 한번 그 하나되심이 아니라 각각 분리된 채 계셨으니, 이 세상 햇수로 따져 30년가량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 하나로 계심이 일시 정지되었다는 것뿐이다. 이렇게 하나로 계시니 그 하나로 계시는 것을 아버지시라고도 또는 아들이시라고도 할 수 없으므로 그래서 "성령"이라 일반적으로 통칭되는 것이다. 또 반드시 그렇게 하나로 계셔야만 그런 "이름"[마 28:19]으로 통하시는 것도 아니고, 위에서 보았듯이 아버지의 영도 성령이시고 아들의 영도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또 단지 다른 영[사람의 영이나 또는 처음부터 영인 천사들이나]과 구분하기 위해서 "성령[Holy Spirit]"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나 또 성경은 굳이 성령을 성령으로만 표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영"이라 할 때도 있다. 이렇게 아들 홀로 되셨으나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물론 여전하시니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세 되시던 때 예루살렘에 남아 계셔서 요셉과 마리아와는 상관없이 홀로 떨어져 당시 율법 학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변론하실 때 마리아와 요셉더러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 알지 못했습니까" 하셨다. 난하주[欄下註]에 있는 대로 "내 아버지의 일에 관여해야 될 줄 알지 못했습니까" 하셨다는 의미가 더 정확하지 않나 싶다.

이와 같이 주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심으로써 아무리 인간으로 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해도 비록 어려서라도 당연히 인간을 부모라 생각하시지 않음은 딩연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고 했으나[눅 2:50] 마리아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30세 되셔서 마리아를 부를 때 보통 여자에게 말씀하시듯이 "여자"라고 하셨을 때도 마리아는 아무 이의없이 이를 소화하여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mother of God"이라는 불경과 모독을 극한 표현을 쓰고 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서 주로 표현하고 있는 역사적 기록인 사복음서에나 그런 말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모친"이라 했지만 어디까지나 사람 그리스도로서의 모친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사람이시자 하나님,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그리스도이심에도 일부러 하나님이시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그런 따위의 호칭을 쓰고 있으니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발언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의 물 세례 그리고 성령의 세례 받으심은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시기 위함이었으니 즉 우리가 회개의 세례를 받고 죄 용서 받으면 곧 성령의 세례를 받음과 같은 순서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시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는 음성이 하늘로서 난 것은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음으로써 "아바 아버지"[롬 8:15] 하게 된다 함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나는 것을 가리킴이다. 즉 우리가 "다시[거듭] 나는" 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이니 성령을 선물로 받아 모심 곧 성령의 세례를 받음으로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사야의 글을 펴시고 다음 대목을 찾아 읽으셨는데, 즉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눅 4:18] 또는 "주님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 한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도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므로 그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했다.

그래서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 받으라" 하실 때 이미 하신 말씀이 다름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됨 곧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우리를 보내심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무엇하러 보내시는가? 일하라고 보내심이다.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심이다. 이 세상 남은 생애 편안히 살라고 보내심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으므로 이는 명백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무엇하러 세상에 보내셨던가?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셨다" 하심과 같다. 그래서 주님 말씀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하셨다. 그리고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심의 뜻을 행하려 하여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므로"[요 7:18] 그 속에 불의가 없다 하셨다.

그 속에 불의가 없다 하심은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다시 말해 죄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 죄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위함 즉 자기중심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없음이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했다.

즉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자로서 자기를 위해 사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한다는 뜻이니 바로 이것이 구원 받았다는 의미요 그 실상이요 그 증거가 됨이다. 그래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다"[롬 14:7-9] 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성령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아버지의 영을 받으심으로써 그 안에 아버지께서 계셔서 아버지 친히 아버지의 일을 하심에 이상 각 구절이 나타내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계셔 그 일을 하시게 함이니,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는다" 하심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속한 힘 그래서 일관된 은혜이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를 믿음 생활의 최고봉 또는 무슨 최고 정상인 양 착각하지 말 일이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이전에는 아직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지도 않은 상태였는데 이제 비로소 처음으로 한 발짝 내디딘 격이다. 앞으로가 문제다. 문제라고 하는 것은,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는"[고전 10:12] 것을 두고 말함이다. 즉 순종 여부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는[롬 14:7-9/고후 5:15] 성경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는지가 문제다.

우리가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마리아에게 잉태된 이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했고[마 1:20] "성령으로 잉태되었다"[:18] 했으니 이는 다시 말해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덮으신 까닭이었음과 같이[눅 1:35], 우리 역시 "우리 육체에 성령께서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덮으심"으로 되어지는 일이다. 이 사실에서 주님과 우리의 차이는 주님은 성령이신데 육체를 받으시는 혹은 입으시는 것이었고, 우리는 육체인데 성령 곧 그리스도를 받는 것 혹은 입는 것이다.

주님은 육체를 받으시니까 육체는 태에서부터 시작하고 성장하는 단계가 있었으나 우리는 그런 과정이 생략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주님을 영접한다 해도 이 이치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성령은 즉시 믿는 현장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도 물론 회개하고 세례 받는 과정이 있기는 하나 원칙이 그렇다는 얘기다. 인간의 육체는 30이 됨으로써 최고 절정에 이르렀다가 그 후로부터는 내리막길에 드는 것일까.

어쨌든 그 때까지는 그냥 목수로서 집안 일을 돌보시다가 세례 받으심으로써 성령 받으신 것이다. 그 후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하셨다. 이전에는 복음 전하시는 일을 착수하시지 않았다가 성령이 임하신 후 하나님의 일을 하셨다는 것은 갑과 을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관계에서 갑은 항상 을을 위하고 을은 항상 갑을 위함임을 나타내심이다. 즉 이전에는 세상에 내어주심이 되어 인간이 되신 채 홀로 계심이 되어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계신 것이라면, 성령을 받으신 후로 홀로 계시던 생활을 청산하시고 아버지의 일에 본격적으로 나서신 것이다.

말하자면 영원 전부터 오직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그런 하나되는 관계였지만 사람이 되심으로써 일단 그 하나된 관계가 외형적으로는 중단된 양상을 보이는 그런 의미였으니, 이런 일시적[인생 30년간의 격차] 분리가 바로 아들께서 사람되시는 계기를 이룸이었던 것이다. 왜냐면 앞에서 설명한 대로 아버지께서 아들과 당시 하나로 계셨다면 아버지께서도 사람이 되시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말씀이 응해질 수가 없다. 또 아버지께서 아들을 다시 살리실 수도 없게 된다.

이러한 본을 따라 우리 역시 그러하니 구원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니 바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다. 그래서 비로소 자기 부인으로써 그리스도의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순종 다시 말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면 자기중심 일색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구원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인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지 못해 구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자기의 구원이 우선 순위요 최대 관심사이므로 자연 자기 구원을 목적함 다시 말해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음이다.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요 3:16/4:10]. 그래서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 친히 우리 각자 안에 계심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보다 크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 곧 복종이 그 생명이요 생명의 낙이시다[히 10:7]. 물론 아버지의 뜻을 행하심과 더불어 아들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된 조물주로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것이다. 그런즉 그리스도께는 우리처럼 사람으로서의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곧 처음부터 아들이신 바로 그 아들께서 아들로 계심이다. 아들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니 사람이 되신 것이고 이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사람의 영'이라는 것은 육신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지만 하나님 친히 창조하심으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시는 아들로서 단지 인간 여자의 몸을 통해 태어나심으로써 인간의 육신을 받으시고 사람이 되신 터이므로 이는 당연하다. 처음부터 하나님으로 계시던 모습 곧 성령으로 계시던 그 모습 그대로로서 충분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치면 영혼에 해당되시는 것이다.

아담은 육체가 먼저 생겨난 후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이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계시던 모습대로의 성령에다 우리 위해 사람되심으로써 육체를 덧입으신 것이 되어 역시 이중 구조이시니 영혼과 육체의 형식이다.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특성으로 인하여 사람이시자 하나님, 하나님이시자 사람이 되어 계심이다. 참고로, 그렇다면 네피림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사람의 육신은 입어 인간이지만 그 영은 하나님의 창조로 된 것도 아니고 "영"[히 1:14]으로서의 악령들이 인간 육신으로 스스로를 변신시켜 인간 여자들과 교합하여 낳은 자식들이요 그런 육체의 영이다.

영물들[사탄과 같은 악령이나 거룩한 천사나]은 영이지만 이 영으로 말하면 우리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기준으로 말할 때 "영"[히 1:14]일 뿐이지 사실은 영적[또는 신령한] 육체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씨[후손]와는 차이가 있으니, 후자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영이 그 영혼의 속성을 이루나 전자는 영적인 육체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변환됨으로써[그렇게 되어야 인간 여자와 관계할 수 있으므로] 아담의 후손으로 치면 영혼에 해당되는 것으로 변형되어 그 영혼이 인간 여자의 육체를 입게 되는 현상이라 할까.

좀 혼란스럽고 복잡한 설명이 되나, 네피림이 엄연한 현실이니 이렇게 밖에는 더 합리적으로 설명할 도리가 없게 된다. 따라서 그 네피림의 육체는 인간의 육체와 악령 신령한 육체와의 혼합이라기보다 악령의 신령한 요소는 네피림의 영혼 격이 되고 그 사람으로서의 육체는 아담의 후손들의 육체와 같은 양상이 됨이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이미 지적했듯이 악령들의 육체는 영(靈, spirit)"으로서 그 영 또한 육체와 같은 단일 구조인지라 그런 신령한 요소가 인간 여자의 태를 통할 때 그래서 태어나는 네피림의 육체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네피림들은 힘이 절륜(絶倫)한데다 육체가 장대한 거인들이었고 지능도 월등한 수준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인간으로 나서 죽게 되면 그 육체[아담에 속한]는 썩어지나 그 영혼 즉 악령의 신령한 요소는 그대로 남아 이 자상을 배회하게 되는 바 이들이 곧 성경에서도 인정하는[그리스도 친히 인정하셨다] "귀신"인 것이다. "더러운 귀신"이라 하셨으니 왜냐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악령들의 욕망으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생육하고 번성하는" 방법을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되었으므로 그들[네피림]이 낳은 자식들이나 또는 환생을 통해 다시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애초의 그런 거인적인 요소는 사라지거나 약화되기 시작하여 평상적인 인간들처럼 되어 간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인간이 '그 육체를 물려주는 것'과 같이 악령들의 '영을 그대로 물려주는 것'이 됨이라 할까. 어쨌든 그런 특별한 구조이나 겉모양으로는 완전한 사람이므로 그대로 인류 가운데 [아마 모르기는 하지만 절대 다수가 아닐까] 섞여 있는 것이다.

이 네피림을 식별하는 방법은 그 어느 인간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고로 복음을 전해도 주님은 "모든 인간들에게"라 하시지 않고 "모든 피조물에게"[to every creature] 전하라 하심이니[막 16:15, 우리말 번역은 "만민에게"로 되어 있다], 네피림은 악령들의 분신이므로 구원이 불가능하나 복음은 모두[네피림의 속성을 가진 이든 아니든]에게 전하라는 말씀이시다. 방금 지적한 대로 네피림을 구분하여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은 어느 인간에게도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사실을 보아서도 여자를 통해 인간 육신은 생성되나 그 인간의 본디 핵심이 되는 영은 여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다시 확인된다. 그래서 여자를 예로부터 남자의 씨를 생성시키는 "씨받이"라 한 것이다. 여자 역시 애초 남자[아담]에게서 났으니만큼 여자의 육신 생성의 역할 역시 근본적으로는 남자의 육신을 물려받은 남자의 육신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여자가 남자의 종속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남자에게 여자가 났으나 남자 또한 여자[모친]에게서 나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강조하고 있다[고전 11:12].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다"[:11] 함으로써 한 몸 즉 하나임을 밝혀 이상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하나에는 원래부터 차등, 차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녀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남녀 평등"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남녀 간의 하나로서의 조화"라고 말해야 사리에 맞다. 남자에게서 여자가 난 사실에서 보듯이 남자를 위해 여자가 났으나 원래는 '아담이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하나'였으므로 차등을 두어 차별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음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으니 똑 같은 자기인데 우열을 둘 수 있겠는가.

대칭 원리인 것이다. 대칭성에서는 우열을 둔다는 것 자체부터가 있을 수 없다. 가령 높음이 있고 낮음이 있을 때 높음이 없다면 낮음도 없고 낮다는 개념을 떠나서는 높다는 의미조차 살아날 수 없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 불가결하여 하나를 이루어 한 몸으로서의 하나인데 차별을 두어 무엇에 쓰자는 것인가.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니 필요가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고로 차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차별이 용납되지 않고 차별을 하면 그것은 오직 불법이요 불의, 죄와 악이라는 뜻이다. 질서에 반하는 것이니 무질서로 처리될 수밖에 없다. 위에서 바울이 "주님 안에서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 없다" 한 것은, 머리와 몸의 관계로써 여자와 남자 관계를 설명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몸과 머리는 우열의 관계가 아니니 하나임을 전제하고 표방하므로 하나가 열등하면 다른 하나도 월등하지 않고 열등하다는 뜻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리스도께서 그 몸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심 같이 여자를 위할 것이요 여자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과 같이 남자를 위하게 되어 있음이다[엡 5:25]. 월등한 것이 열등한 것을 위해 그렇게 하지 못하는 법이니 왜냐면 그렇게 되면 열등한 것 때문에 월등한 것이 사라져 없어져버리는 결과가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런 평등 관계에서는 그 어떤 문제도 일어날 수 없다.

머리와 몸 관계는 불평등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서로에 대하여 그 역할이 다르다는 것뿐이니 곧 하나됨으로서의 조화 관계이기 때문이다. 우열을 논할 자리가 아니니 그렇다면 우수한 것만 남고 열등한 것은 없어도 좋다는 말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결한데 즉 머리 없이 몸 없고 몸 없이 머리가 없는데 누가 누구를 버려도 좋다는 말은 통할 수 없다.
 

영물들은 '영'이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로 변신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능력으로 오늘날 소위 우주선이니 외계인이니 하여 여러 가지 형상들로 자신을 나타내는 토대가 되어 있다. 즉 자연계의 물질 같은 것으로나 인간과 같은 또는 동물과 같은 육체로나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처음부터 그들 영물이 창세기의 첫 창조에 관한 기록(창 2:19)에서 보듯이 자연계와 다름없는 구조 또는 체제로 창조되어 단지 대칭성을 이루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첫 사람 아담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되었으면서도 그 후 영혼이 조성되어 영적 존재가 됨으로써 에덴낙원에서 [그 곳의 신령한 과일을 먹음으로] 얼마든 신령한 몸으로 변신할 수 있었고 또 나중에 범죄하여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그 신령한 몸이 다시 자연계의 육체로 환원되기도 했던 그런 것과 같은 것이다. 다만 영물들은 영계인 에덴낙원의 땅[ground-"흙"이라 한 우리말 번역은 잘못된 것]을 소재(素材)로 하여 창조된 까닭에 지식면에서 인간보다 월등하다는 그 차이가 있다.

§ 하나님을 아는 것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27] 하셨다.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 하셨으니,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온다"[:45]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기도하실 때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저는 아버지를 알았고 저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줄 알았습니다"[요 6:45] 하셨으니 이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65] 하심과 같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이건만 세상이 자기를 지으신 조물주를 알지 못한다. 이는 자식이 그 어버이를 알아 보지 못함과 같은 비극이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요 1:10] 함과 같다. 그동안 모세 율법을 통해 힘들여 교육시켜 놓으신 유대인들도 그를 배척했다[요 1:11].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지만"[딤전 2:4] "오래 참으시면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벧후 3:9], 그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우시기까지 하셨지만,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마 23:37] 하신 대로 구원 받을 자가 제 스스로 원하지를 않으니 어이 하리요!

누가 자기 멸망 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 속으로 뛰어들겠는가. 영생을 준다는데 누가 마다 하겠는가. 문제의 핵심은 다른데 있는 것이다. 즉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막 4:12] 한 대로 아무리 구원을 받으려 해도 못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순전히 은혜로써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니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환영할 만한가! 그러면 무엇이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가? 무엇이 위의 말씀대로 "원치 아니하도록" 만드는가? 무슨 까닭으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되는가"? 그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무슨 굉장한 이유라도 있는가? 엄청난 것이라도 있어 가로막고 있는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결단코 성경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처음부터 말하지를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말이 된다. 고로 아주 상식적인 것이고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이 둘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의미인 것이다. 하나로 통해 있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랑의 있고 없음-이것이 열쇠다. 생명은 원래부터 즉 창조 당시부터 한 몸 체제로서의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머리이시고 그 피조물은 모두 그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몸의 각 지체 역할로서 존재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고로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사랑이다. 즉 몸된 피조물은 머리이신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모든 것이 조화되어 여기에 비로소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치 못했다' 함과 같다"[고전 2:9]고 한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대조적이게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해 두신 것이니까 그렇다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치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이 그 대상이다.

눈으로 보지 못한다, 귀로도 듣지 못한다는 것은 눈과 귀가 있어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그 의미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이다. 그와 같이 머리와 몸의 관계를 충분히 인식하기를 거부하고서는 [사탄이 그러한 것처럼] 절대로 이 생명 관계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사탄이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를 꾀어 죽음에 빠뜨린 것처럼 불행만 야기될 뿐이다. 상대에게도 불행이지만 자신도 절대로 무사하지 못함이다.

"날개 아래 모으려" 하지만 "원치 않기 때문"에 못하신다고 하면서, 어째서 하나님 친히 막으신고 하는가 할 필요는 없다. 그와 같이 사랑하지 않는 자를 막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시지만 끝내 고집을 피우고 회개하지 않으니 이런 사탄[악령] 같은 자들을 차단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으로 하지 않은 것이 곧 주님께 하지 않은 것 곧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이라고 하면서 무엇이라고 사형 선고를 내리시는가를 보라[마 25:45].

"저주 받은 자"들이라 하신 것이다. 악한 자 외에는 저주 받을 자가 없다. 다시 말해 악한 자는 제아무리 구원 얻고자 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저주를 자초하기 때문이니 그래서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이다. 오직 요건은 사랑에 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랑에는 아무 차별도 구별도 없다. 그런데 위의 말씀대로 하면 실상은 그렇지 않음이 분명하다. 때문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소하다 하신 것이다. 왜냐면 사랑은 그 핵심이 자기 부인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심이 그 때문이다[눅 14:33].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이 믿음의 특성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 얻는 믿음은 자기 부인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면 그는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심의 의미를 성경은 명백히 나타내고 있으니 즉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으로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한 것이다.

자기 부인이 무엇이냐? 이상 구절로써 그 정확한 개념이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주님의 말씀에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하셨고 "말씀"이신 하나님,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셨으나[요 1:1-5]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고 한 것이 바로 이 사실에 기인함이다. 즉 세상 모두가 자기중심이므로,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시고 자기 부인 일색이신 하나님의 일 곧 신령한 일과는 아주 남남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부인이신가 하면 전적으로 피조물을 위하시고 자기를 위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몸이 있는 이상 머리는 몸 없이는 존재 가치가 없으므로 머리로서 몸을 위하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피조물을 창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이 존재하고 있는 이상, 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신령한 세계 곧 영생과 관련된 모든 일은 자기 부인으로 특성 지어진다.

거기는 앞서의 설명대로 자기 중심이라고는 없다. 자기 자신을 버리시고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자기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들어 성경은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안다"[요일 3:16] 하였다. 자신을 주심이니 말 그대로 자기가 자기를 위하시지 않음이다[고후 5:15]. 자기를 버려 상대에게 죄다 안겨 줌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제 비로소 우리는 '사랑'이라는 정체를 아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랑이 없는 자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 턱이 없다.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하심은 그래서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이 된다. 순수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죽을 죽음에 동참하시는 죄인의 모습으로 오시니 이 사랑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세상이 이러한 모습을 환영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그 스스로 죄가 있으시기 때문에 즉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징벌을 받는다고 착각한 것이다[사 53:4].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모습이 우리 자신 곧 현재 은혜로 된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이라는데 있다.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이 바로 그 의미이다. 이런 죄인으로서의 모습을 원치 않는 이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는 경고성 예언이 적중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이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가 없음을 그 말씀으로 명백히 하셨다.

앞에서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야 즉 아버지께로부터 배워야 그리스도께 온다 하셨는데 바로 이런 사실을 말함이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비로소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음부터 죽은 자로서[마 8:22/엡 2:5/골 2:13] 죽음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그리스도께 나오기 전에 숙지하여야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것이 된다. 이미 죽은 자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라기커녕 도리어 한없는 감사와 감동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미 자기는 죽는 몸이요 죽을 몸인 줄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충분히 알고 있으므로 자기 죽음은 기정사실이지만 감격스러운 것은 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죽으심 즉 나와 하나되심으로써 나의 죽음에 동참하심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고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사실에 눈뜨기 시작하는 까닭이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목 마른 자가 내게 온다" 하심이고 "병든 자가 의사를 찾는다" 하심이고 "모세의 구리 뱀을 장대에 높이 달아놓음으로써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이 그것을 보면 살게 된다" 하심이다.

그리고 값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 전 재산을 다 들여 그것을 사들이는 것으로 비유하셨다. 자기 전부를 다 바쳐 매입하였으니 현재로는 거지와 다름이 없다. 이 세상에서는 그러하다. 그것을 의당히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올 때부터 이런 죽음의 실상을 실감하고 이로부터서의 자유 해방을 바라고 오는 사람은, 이 자기 부인에 대한 밀씀을 듣고 많은 제자가 물러가 다시는 주님과 함께 하지 않게 될 때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신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요 6:68] 한 것처럼 자기 부인으로 말미암는 그 어떤 대가(代價)에도 굴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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