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9일 수요일

(19)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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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시는 하나님. 마귀가 그렇다고 그냥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원리원칙을 따라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죽음의 권세를 쥔 마귀를 무력화시키시고 그리 하심으로써 죽음의 공포로부터 인생들을 구출하시어 죄를 짓지 않게 하심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요일 3:8]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하심만 아니라.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달리 그 무엇이 있을 수도 또한 없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이마저 없애 버린다면 상식마저도 우리 세계에서 사라져야 한다. 생각해보면 금방 알 일이 아닌가. 하나님 사랑하지 않고 이웃 사랑할 수 있을까. 이웃 사랑은 이 세상에서도 모든 인류의 희망 사항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 그런 것이 없다는 얘기인가.

사랑 없는 하나님 나라, 여기서 무엇을 기대하겠다는 얘기인가. 하나님 사랑이 없이 그 말씀은 어떻게 순종하겠다는 것인가. "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하고 서로 거짓말을 하면서 속이고 그래서 죽도록 미워하고[거기는 아무도 죽지는 아니할 터이니까] 사는 것일 터이니 그것이 과연 사랑의 나라인가. 어린 아이라도 능히 알아 들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연약하고 부족하여"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기본 계명이다. '기본'이라고 하면 그 외에도 잡다한 것이 더 있다는 의미가 되니 그 말도 필요 없다. '유일한 두 계명'이다. 그것마저도 하나로만 줄이면 '하나님 사랑'이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이 있으면 자연 이루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고 뜻이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여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그 분부를 지키게 되어 있다. 대관절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하지 않아도 그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하는 그 얘기가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친히 그와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닌가.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이 힘들어 지키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언필칭 "연약하고 부족하다"고 한다. 그런 "연약하고 부족한 가운데서도" 그러나 구원은 받는다고 한다. 이것이 사탄의 가르침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은 상상 속의 하나님이다. 실존하지 않는 하나님이다. 불신자들 혹은 무신론자들이 하는 말대로 인간이 지어낸 하나님이다. 세상 사랑 때문에 이런 모순투성이의 얼토당토않은 지어낸 이야기를 마치 그리스도 복음의 진실인양, 정수[情髓]인양, 진리인양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까 닭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을 것이요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는 경고를 하셨건만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은 옛 에덴낙원에서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해석을 달아서 받아들인 것과 한 점 차이도 없다. 여전히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는 반역이고 거역이고 불신이고 사랑 없음이요 자기 이익 챙기기에만 바쁜 사탄의 짓거리요 아담 부부의 어리석음이다. 무엇 하나 다른 것이 없고 차이가 없다.

에덴낙원에서의 그 "뱀"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임금[prince]"이요 "신[god]"이다. 그 사탄의 말대로 따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는가. 어쩌면 그렇게도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는 말인가. 세상 사랑 때문에 롯의 아내는 영생의 문턱에 서서도 멸망 당했다. 주님 친히 이 롯의 아내를 들어 다시 경고하신 것이다. "롯의 아내를 생 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릴 것이다"[눅 17:32,33]. 사도들도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 고한 것이다.

그 대목도 자기 해석 아니, 사탄의 시키는 말을 따라 제멋대로 생각해서 그런가.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난을 기피한다는 뜻과도 같다. 그렇게 집요하게 모세 율법을 주장하며 바울로 하여금 서신 거의 전부를 이 모 세 율법 설명에 할애하게 만든 그 할례 주장도 그 속 내막의 이유가 "핍박을 면하려는"[갈 6:12] 세상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오신 후에는 한낱 세상의 종교인들로 전락한 유대인들이 그 어느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종교인들의 그리스도 복음 핍박'의 전형적인 특징을 노출시켜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 복음의 원수로 행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주역이었으므로 그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그들과 동류임을 과시하고 그들과 타협하려는 어쭙잖은 시도를 한 것이다.

일부 수용이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부를 변질시켜 "다른 복 음", "다른 예수"를 전하는 것이었기에 바울은 그토록 일심으로 그런 사이비의 풍조로부터 교회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 이 글을 통해 힘들여 설명하는 것도 바울 당시 그런 모세 율법주의자들과 상대한 그 고충과도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당시는 "율법"[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더니 오늘날은 "율법"[율법의 요구]을 무시해도 된다는 율법폐기론자[antinomianism]들과의 대결 국면을 연출하고 있는 꼴이다. 사람의 탈을 쓰고 차마 도덕률 초월론을 고집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연약하고 부족하니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더라도 구원은 받는다" 하는 바로 그 주장이 그 주장 아닌가. 히브리서에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12:14] 하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연약하고 부족" 타령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감히 "거룩함"에 있다고 자 처할 수 있는가. 이 경고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역설한 바울의 말이 아니라고 감히 이의를 달려는가. 그렇다면 "그러나 이제는 죄에게 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게 되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는 대목은 무엇인가. "거룩함에 이르렀고 그래서 영생이다"라는 뜻이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거룩함"이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죄에게서 해방", "하나님께 종", "열매" "마지막" 등의 표현이 가리키듯이 모두 우리의 '믿음대로 행함'[롬 2:7,10]을 말하는 것이다. "행하는" 것은 '행하는 것'이지 이 것도 억지 해석하고 자기류대로 해석하고 사탄이 시키는대로 해석하려는가. 왜 고난을 기피하려는가. 베드로는 명백히 그리스도인의 고난[세상 사람들도 당하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당하는]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베드로만 그런 말을 했는가. 은혜로 믿음으로써 구원 얻는 사실을 역설한 바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가. 바울은 더 명료하게 밝혔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다"[빌 1:29].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 중 그 누가 감히 "그 둘 중 첫째 것은 받겠으나 둘째 것은 싫습니다. 받지 않겠습니다" 하겠는가. 고난을 기피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비상식적인 말을 주님께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바울은 더욱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다. 다시 말하거니와 "위하여"서다.

즉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인데 그 고난 감히 안받겠다고 한다면 우리 중 그 누구든지 "이런 천하 고약한 것 같으니라고" 할 것이다. 바로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 주님의 비유 말씀에 나타나는 "예복" 입지 않음이다[마 22:11]. 그 예복은 잔치 자리에 초청해준 잔치의 주인인 왕을 '위함'이다. 초청 받은 사람 자신을 위함이 아니다. 왕은 초청받은 사람을 위했다. 아 무리 잔치 자리에 나올 사람이 적합하지 않아 비어 있어 그 자리 채운다고 불러들여 결과론적으로 왕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그러나 일방 적으로 왕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왕의 잔치를 구경하였다는 사실 말고라도 그 음식을 먹고 선물도 받고 여흥도 즐기고 거기 참예하고 등등 누가 그런 한 때나마 그런 호강을 시키겠는가.

분명 초청 당한 자를 위한 것이다. 고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형식적이 나마 왕을 '위해서' 예복은 궁궐에서 준비해서 입혀주는대로 입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깨끗하게 일정한 예복을 입어 보기 좋았는데 왕이 눈을 들어보니 눈에 탁 드러나는 영 어울리지 않는 평상복이 앉아 있는 것이다. 누가 이것 을 '흠'이라 하지 않겠는가. 보기 싫은 것이다. 왕의 잔치 분위기를 흐려놓고 망쳐놓는 것이 아닌가. 고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거부행위이다. 받으면 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받는 것이다.

주님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은 주는 것 즉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고 기뻐하시는 사랑의 법 질서이기 때문에 이같이 "남은 고난"을 자기 교회로 하여금 각자 몸에 채우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한다면 내가 '드리는 것'은 고사하고 내가 '받을 것'도 거부함이 아닌가. 사실은 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음'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생각해보면 알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와 나는 이제 "한 영"[고전 6:17]이라 하나이다.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하는 것이요 나를 위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위하는 이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요, 하지 아니한 것이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나를 위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닌 나 외의 다른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 고 이웃을 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도 결국은 나를 위함이요 이웃을 위하는 것도 결국 나를 위함이다. 나를 위하되 과거처럼 직접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함으로써 또는 이웃을 위함으로써 나를 위함이니 이것이 '우리'라는 개념이다.

그리스도를 위 함으로써 나를 위하니, 나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포함해서 또는 그리스도만 아니라 나를 포함해서 위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함인 것이다. 이웃 사랑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기 때문에 위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와 내 이웃과 나 자신을 전부 위하는 즉 '우리'를 위하는 위함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랑의 법칙이다. 생명의 법칙이니 다 같이 행복하게 사랑 가운데 한 몸처럼 사는 법질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하고 자연스럽게 명백해지는 것은 절대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이다.

왜냐 하면 내가 나를 위하는 순간 나 자신 즉 나 하나만 위하는 것으로 끝나고 그리스도도 내 이웃도 우리 전체도 위하는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오로지 사랑하고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말씀과 뜻을 따라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모두 한 몸의 구성체니까] 사랑하면 전체를 위하는 것이 되지만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위하면 그 모든 것이 깨어지고 절대로 전체가 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 뿐만 아니라 나 외의 다른 사람도 그렇게 자기를 위한다면 그 결과야 불을 보듯 하지 않은가. 그런 세계에 평화도 없고 행복도 없고 더더군다나 사랑은 없다.

사탄이 에덴낙원에서 그렇게 자기 자신마을 위했고 거기 물들어 인간 역시 자기를 위하는 마음에서 결국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죽음에 이 른 것이다. 고로 주님께서 우리 '위하여' 고난을 다 채우시지 않고 우리 각자가 담당할 몫을 조금 남겨두신 것은 이런 사랑의 법질서 차원에서 그 준수 여부를 확인하시고자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난 받음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다 고통 받고 고난에 참여하는 마당에[롬 8:22] 그 '우리[we]' 속에서 홀로 빠져 나오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으로서 생명의 법칙에 대한 위반행위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찾지 않으니 그래서 자기 부인이다. 이 자기 부인이 없으면 주님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이 자기 부인인 것이다. 자기 부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고 영원히 이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법질서임을 마 음 속에 확정하고 아로새겨놓을 필요가 있다. 이 외의 생명의 법질서는 없다. 다시 말해 이 법질서를 떠나서 살길은 없다. 이 세상의 구조 자체가 이 생명의 법칙을 지키면 고난을 받게 되어 있다. 죽음의 세계인데다 사탄이 그 지배자로 활동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듯해도 자연계에 속한 육신의 삶으로서 신령한 몸이 누리는 신령한 세계에서의 생명 또는 삶에 감히 비할 수도 없다. 우리가 아는 지식은 이 자연계에 속하는 것이지 영계 또는 신령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 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 존재는 알고 또 말씀을 믿음으로써 자연계에 나타난 제반 법칙으로써 미루어 확인할 수 있는 그 정 도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루어보시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가서는 두 번 다시 범죄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 때 가서 추려내거나 솎아내거나 걸러내지 않고 이 세상에서 다 확인 절차를 거쳐 마무리하시는 것이다. 이런 고난 저런 고난 할 것 없이 이 세계 자체가 고난의 세계 아닌가.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받는 정도의 고난도 아니지 않은가. 단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받는 고난인데 그게 무엇이 어떻다는 말인가. 다른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또는 상대의 미움을 받아 지독한 증오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 중이라 서로 쌍방간에 불붙는 적개심 때문에, 기타 무엇무엇 때문에 조건과 이유를 달아 그런 고난으로 서로를 고통 주고 받는 것이 인생사요 이 세상의 양상이다.
그리스도 양편에 두 강도가 똑같은 형태로 고난 받은 것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물론 악형을 받게 되어 있는 그들 가운데 주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은 나 위해 나 대신 죄인으로 죽음의 고난 받으시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자로서 그런 색다른 안목으로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얘기일 뿐이다. 그 뿐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이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정확한 이해, 인식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왜냐면 내가 현재 하나님의 새 창조로 새 피조물이 되어 있는 의미의 중심부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그런 표현도 설명도 없으나 그리스도께서 '또 하나의 나'가 되어주신 것이 새 피조물됨이다. "내게 주신 영원한 선물"이시니, 또 나와 "한 영"으로 계시니 '또 하나의 나'가 아니신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바로 '나'란 의미가 되는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니" 이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내 가 살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여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백 번 고난을 받는다 한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어 있는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중에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데 즉 '또 하나의 내'가 그렇게 앉아 계시는데, 세상이 나를 어찌 하랴[롬 8:31/히 13:6].

이미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하게 예정되어 있음은 다음 말씀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롬 8:36]. 그러므로 "믿음"이다. 보지 못하나 믿는 것이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을 믿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없다. 믿으면 모 든 것이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모든 유혹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버티어 나가는 저력이 필요한데 이 힘은 믿음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안의 주님 모든 것의 핵심은 내 안에 계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시다.

육신으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그리고 우리가 "있을 곳을 준비하시며"[요 14:2] 계시지만 성령으로는 이 우주 천지 간에 충만해 계시는 것이다.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신 때문이다. 항상 주님의 이 양면성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로서의 성령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삼위일체로서의 그리스도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사람이시다. 그리고 변함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사람이시므로 '또 하나의 나'로서 계셔서 내 안에 계시고 영원히 나의 '짝'이 되어 내 안에 나로 더불어 함께 사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계시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그렇게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언제나 하나이신 때문이다. 사람이 되시고 동시에 하나님이시고 이런 양면성은 첫 창조에서 아담의 몸이 이 자연계의 흙으로 지으심 받은 후 그 코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신 것과 같은 양면성이라 할 수 있다. 육체는 자연계에 속하면서도 영을 지닌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 첫 사람 아담이다. 이제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태어나셨으나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시라 그 하나님이신 사실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니 이제 이렇게 자연계에 속한 몸을 입으심으로써 양면성으로서의 첫 아담을 닮으신 마지막 아담, 첫 창조에 대한 새 창조로 서로 대비되는 것이다.

첫 창조와 새 창조의 대비이다. 이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것 자체가 새 창조에 포함되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이심을 나타냄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으로서 사람되심이 새 창조의 역사이시므로 그 사람되심은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는 자마다 그 '사람되심'을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냄이다. 말하자면 조물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으로 만드신 즉 창조해내신 셈이시니, 그 '사 람' 되심 그 안에는 첫 사람 아담 이하 마지막 사람 곧 이 세상이 멸해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불 못이 영원히 구분되어 더 이상 사람이 사람을 낳는 일이 없어질 때까지의 그 마지막째 사람까지 포함한 모든 인간의 이름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들에 해당하는 그 누구든지 무릇 인간된 자는 그 '사람'되심을 보고 "앗, 저 '사람'은 바로 '나'다!" 하고 외칠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그 뜻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조물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정확한 의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을 내게 주시는 영 원하신 선물"[행 2:38/요 14:16]로 받아 모실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근거가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니 곧 그리스도 시다. 하나님이신 측면으로서의 그리스도시요 동시에 사람이신 측면에서의 그리스도이시다. 내게 선물로 오셔서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심 은 사람으로서의 측면이시지만 마치 내게만 계셔서 항상 나와만 함께 계시는 것처럼['것처럼'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계시는 것은 하나님으로서의 측면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오직 내게'만' 계시는 의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육체이므로 다른 사람 안에 있을 수가 없다. 육체가 제각기 따로따로인데 어찌 안에 있을 수가 있는가. 기껏해야 함께 자리를 같이 한다는 정도인데 이 역시 매일 매시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한 사람에게만 그렇게 함께 할 수 있지 다른 사람에게는 단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동시에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니까 사정은 아주 다른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만 같이 하시어 함께 계시고 다른 이에게는 동시에 함께 할 수 없는 그런 극히 개인적인 상황을 나에게만 아니라 동시에 여러 백억의 백억 갑절 이라 하더라도 동시에 한 날 한 시에 그렇게 만드실 수 있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시간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오직 나에게만 주신 은혜와 은총으로 나와만 함께 사시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나와 똑같은 상황을 나 이외의 수억 명의 형제가 동시에 영원히 언제 어디서나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을 "선물로 받음"이라고 앞에서도 설명했다. 이렇게 되어 나는 그리스도께서 양면성의 사람 즉 첫 사람 아담이 양면성의 존재로 창조되었던 것처럼 양면성의 존재로 새 창조의 전단계를 이루신 것처럼 그 새 창조로서의 양면성을 지닌 피조물로서 그 후단계를 이루 어 새 창조는 전체 단계가 마무리된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 더불어 그 영으로 양면성을 이루었지만 새 창조에서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 안에 성령께서 계심으로 양면성을 이루고 있다는 승화된 격이 한없이 높은 양면성을 이루어 있는 것이다. 마리아를 통하여 사람되신 육체에 성령께서 계시는 모습이시니 그리스도께서 그런 양면성이요 바로 그런 양면성으로 계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되니 내가 바로 그런 양면성의 존재로 새 창조를 입어 다시 난 것이요 성령으로 난 것이요 위에서 난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영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뜻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바 전체 내용이 나의 것이 되어 있다는 그 사실에 있는 것이다.

곧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및 하늘에 오르신 그 하나님 우편에 앉은 위치인 것이다. 바로 그 모든 내용을 나의 것으로 하였다는 그 사실이 아닌가. 또 내 것으로 하였다는 그 사실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영원토록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부터 이 지상[地 上] 생활에서부터 영원토록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바로 그 사랑의 생활을 매일 매시 누리고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대로 사랑에는 자기 부인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님과 나와의 하루하루 - 이것이 모든 것의 요체이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은혜'로 얻는 구원의 그 핵심부이다. 구원을 얻는 것이 목적 아니다. 구원을 얻었다고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아닌 것이다. 구원 받았다는 이 하나에만 모든 무게를 두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그릇치고 그리스도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하는 것이다. 억지 해석을 하게 되고 자기만 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다 른 사람들까지 망하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함을 입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요 따라서 값없이 얻은 이 은혜를 따라 끝까지 이를 믿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데에 더 정확히 말하면 일하는 데에 있는 것이고, 일이 끝난 다음에는 영원세계에서 모든 영광과 능력 가운데 명실 상부하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삶을 사는 데 있는 것이다.

현재는 하나님께 적대적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에 적대적인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다. 적대적인 세계에서 어찌 삶의 낙을 구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잠꼬대에 불과하다. 삶의 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고 사탄의 올가미에 씌어져 들어 오는 함정이고 덫이고 올무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됨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셔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시는 이 복된 은혜스러운 새 피조물로서의 새로운 생명체 구조 때문이니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므로 다시 말해 나를 위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시므로 나는 절대로 영원히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의 것을 찾지 않으며 구하지 않는다는 이 생명의 법칙 곧 법질서를 절대적으로 준수하고 이에 충성하고 이 절의를 변하지 않는 것이요 이 절 개를 끝까지 드높이는 것이다.

절의[節義]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른 도리를 끝내 지키는 굳은 뜻. 의리를 지키어 한번 품은 뜻을 바꾸지 않는 일을 말한다. 절개[節槪]는 옳은 일을 지키어 뜻을 굽히지 않는 굳건한 마음이나 태도를 말함이다. 절개를 지켜 죽는 것을 절 사[節死]라 하는데 '순교'라 하지 말고 이 '절사'란 말을 씀이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종교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고 구원 자체를 위해 목숨을 아깝지 않게 던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교'란 그런 종교와 관련시켜 세상이 아무 생각없이 지어 부르는 말인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절개를 생명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그답게 그런 말을 씀이 지당하다. 우리는 이 지존[至尊]한 믿음의 지조[志操]를 지켜야 하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사람다움이라 할 것이다. 남녀가 부부 관계를 형성함에서 그 절개를 지키는 것을 여자인 경우 열녀[烈女]라 하고 남자인 경우 열부[烈夫]라 한다. 이런 부부관계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에 비할 때 그 그림자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그런 그림자가 나타내고 있는 가장 완전하고 완벽 한 실체인 것이다. 그림자가 아름다운 것이면 실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열녀 열부가 생기는 것이라면 더 욱 아름다운 실체에서야 말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이 부부관계의 한 몸되는 이치를 바울은 다음 마로 명확히 정의했다.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 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는 것이다"[고전 7:4]. 둘이 하나됨 그 하나되어 있는 관계를 이처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을 다른 데에서 찾기 어렵다. 이것은 육체로 한 몸됨이다. "한 영"이 되는 관계를 표현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된다.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시며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같이 자기 삶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내가 하는 것이니 곧 나를 위해서 그 삶을 주장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철저히 그리고 영원히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나를 위하시는 사실은 십자가 사랑으로 이미 영원히 확증되어 있는 것이다. 십자가 고난으로 죽으셨다는 영원 히 그 삶을 나를 위한 것으로 '종료'하셨다는 의미이다. 종료가 되었으므로 이를 다시 번복할 수 없다. 영원히 그렇게 확정되어 버린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다시 살아나셔도 이 확정 속에서 진행되는 부활이요 똑같은 상황에서 승천하신 것이 됨이다.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삶임을 증명하심이다. 죽으심도, 부활도, 승천도, 지금 하늘에 앉아 계심도 모두가 다 일체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자연적으로 자기 부인이 되어야 그리스도와 한 영으로서의 일치와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복된 사실은 몇 천만번 강조해도 좋다. 명상의 제목이 된다. 무한한 힘의 자원이 된다. 둘의 하나된 삶, 새 피조물로서의 삶, 새로운 삶 이다. 영원한 영광의 삶이다. 하나님 아들로서의 삶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항상 인자[人子],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역설하셨는데, 사람의 아들인 나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생각마다 사색마다 "하나님의 아들", 또 "하나님의 아 들"임을 스스로에게 강조하고 역설하여 마땅한 것이다.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하리라 위에 말한 대로 남자와 여자가 그 부모를 떠라 한 몸이 되는 관계는 한 몸이 되는 법칙으로서 어찌 그 한 몸되는 일에만 그치겠는가. 곧바로 그리스도와 나와의 "한 영"이 되어 있는 법질서를 상징적으로 그림자적으로 나타내는 것임을 위에서 밝혔다. 즉 여자의 몸은 남자의 것이고 더 다시 여자의 것이 아니며, 남자의 몸 또한 이제 여자와 한 몸이 된 이상 여자의 것이지 남자 자신의 것이 아님으로써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여기서 어느 한 쪽이라도 자기 몸이라 하여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을 써서 다른 여자나 남자를 보고 관계한다면 그것은 그 한 몸되는 관계를 스스로 일방적으로 깨뜨리는 것이 된다.

그러면 그 하나됨 즉 한 몸됨은 그 둘 사이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 몸이 아니므로 그런 간음한 여자를 버려도 좋다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 외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버려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못 박으셨다. 또한 육체 관계에서 창기와 합하는 자도 그 창기와 한 몸이 되는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한 몸되는 원리가 바로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 여자의 몸은 남자의 것에 있음이다. 그러므로 여자든지 남자든지 그 몸의 상대방의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니니 이는 엄연한 법질서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이니 팥 심은 데에 콩 나지 않고 콩 심은 데에 팥 나지 않는 것이니 이는 법질서로서 그 법칙대로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것은 내 것이고 내 것은 주님의 것이다. 나의 삶은 주님의 것이고 주님의 삶과 생명을 내 것으로서 주님의 십자가가 곧 그 확고한 증명이 되어 있다. 자의 삶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여자나 남자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과 같이[여자의 몸은 남자가 그 주인으로서 여자의 몸을 자기 마 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 반면 남자의 몸은 여자가 그 주인으로서 여자가 자기 마음의 소원대로 그 남자 몸을 쓸 수 있는 것이고 자기 외의 다른 여자는 절대로 손대지 못하는 것이니까 즉 다른 여자가 손대도록 남자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삶을 내 마음대로 내 좋아하는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주님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니 주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시고 주님만이 그 뜻대로 나의 삶을 좌우하시고 사용하실 수 있고 운영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람으로서의 주님의 삶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위한 일변도로 진행되었고 완수되었고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나와의 '한 영' 됨은 남자와 여자가 '한 몸' 되는 것처럼 내가 나 자신을 위할 때는 이 한 영 됨이 깨어지는 것이다. 내 스스로 깨뜨리고 파기하는 것이 된다고 앞에서 말한 그대로이다. 주님은 파기하실 리 없으니 내가 언제나 문제다. 내가 내 스스로 파기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이 자유의지는 조물주이신 하나님께서도 간섭하시지 않으신다. 인권이란 것은 이 자유 의지의 보장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이 강제할 수는 없다. 조물주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만일 그렇게 하시면 창조하신 그 창조의 법질서를 친히 파기하시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유의지가 없는 인격적인 피조물을 만드실 리가 없는데 그 자유의지를 강제하신다면 그 창조하신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그런 모순되는 일을 아니하신다는 그 의미이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결정한다는 말이 옳다. 그 누구도 자기의 운명은 간섭할 수가 없다. 조물주 하나님께서도 절대로 손 대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이 엄청난 복을 자기 손으로 깨뜨리는 것이다. 오직 눈 앞의 이익만을 위해 그렇게 어리석은 일도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하겠지만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기에 성경은 그 사 실을 들어 경고하고 있다. 사탄과 같은 영물들이 조물주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서는 살 수가 없음을 잘 알 것인데도 그런 범죄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남자나 여자가 자기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 즉 자기의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와 한 몸을 이룬 상대 외에 다른 여자/남자를 상대할 때 그 한 몸으로서의 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듯이, 그래서 더 다시는 자기 몸이 자기와 한 몸 이룬 여자/남자의 것이 되지 않듯이 나와 그리스도의 한 영 되어 있는 관계 역시 내가 내 마음대로 나의 삶을 살고 자기부인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것은 더 다시 나의 것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해지는 일이다.

내가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 즉 나의 삶이 주님의 뜻대로만 살아지는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거부하고 부인하고 도리어 내가 나의 삶을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그리스도와 내가 이 한 영 되어 있는 관계를 파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 그리스도와의 이 하나 됨을 파기하니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내 스스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깨뜨려 버리는 결과가 아닌가. 내 자신의 구원을 파기하는 것이다. 이를 분명히 마음에 새겨두고 깊이 인식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 루라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내 자신의 구원을 내가 이룬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나타나는 이 뜻인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와 하 나됨으로써 이루어져 있는 구원을 내가 내 자신이 들어 깨뜨리는 것이다. 그 파기하는 원리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한 영 됨을 그림자적으로 나타내는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이 하나를 이루어 한 몸되는 관계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과연 그리스도께서 나 스스로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나를 버려두실까 하고 의아해할 아무 이유도 없지만 그래도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의 대답은 아주 명확하다."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 서 그를 부인할 것이다"[마 10:33].

"신실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딤후 2:11-13].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 존재를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소용없고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나의 주인,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 있는 상대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가 나의 주인이요 나의 삶의 주인이요 그래서 내가 그를 위해서만 산다는 사실 을 인정하지 않음이니 그것은 곧바로 내가 나의 주인이요 나의 삶은 내 것이요 내가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경 우 어떻게 되느냐, 주님은 내게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요 주님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부활하신 것을 더 다시 내 것으로 삼지 않겠다는 선언이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내 것이 주님의 것임을 방금 부정하지 않았는가. "나를 시인하면 나도 너를 시인하고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할 것이다 즉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는 이 말씀은 단지 이상 밝힌 하나됨의 법칙을 말씀하심일 뿐이다. 때문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복종이 무엇이냐. 내 가 나의 삶을 내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그 뜻대로 하는 그 원하시는대로 사는 바로 그것이 아닌가. 즉 내 삶이 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면 그렇게 영원히 살면 주님의 것은 내 것, 주님의 모든 것은 내가 주장하는 것이 되어 주님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이요 주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요 주님의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 편에 앉으신 것은 내가 그렇게 앉아 있는 위치가 되니 즉 주님의 공로가 일체 내 것이 되어 그래서 나는 이미 얻은 구원을 유지 존속시키는 결과가 되니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진리 말씀은 이렇게 간단 명료하다. 단 하나도 애매 모호한 것이 없다. 알고 나면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다. 콜럼버스가 아메리까 대륙 발견한 것만큼이나 간단하다. 그가 그런 발견을 하기까지는 그 누구도 대양 횡단에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지구 끝 혹은 대양 끝은 굉장한 낭떠러지나 되는 듯이 혹시나 당할 재난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지구는 둥그니 까 무조건 배를 띄워 가기만 하면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을 알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다.

콜럼버스의 달걀 세우기 일화도 같은 내용이다. 달걀을 곧추 세울 수 있느냐고 했을 때 아무도 못했다. 그러나 공기집이 있는 쪽의 달걀 끝을 톡톡 깨어 세웠더니 달걀은 섰다. 그런 것을 시범해 보인 다음에야 그것 누가 못하겠느냐 했지만 그러나 그런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그 이전에는 아무 도 못한 것도 또한 엄연한 사실이지 않은가. 성경의 진실도 마찬가지다. 너무 간단해 이거 어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진실 그대로를 단지 바로 읽을 줄 몰랐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될 수가 없고 그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될 수 없으니 그리스도와 나는 하 나가 아니라 남남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자기 부인이란 것은 내 '노력'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 것으로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런 착각으로는 구원커녕 그 언저리에도 가까이할 수 없다. 내 '노력'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사실을 사실대로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 고 사랑의 측면에서는 자기 사랑의 상대방을 전폭 신뢰한다는 그 뜻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있는 사실 그대로를 사실로 받아들여 그리고 주님의 그와 같은 사랑을 액면 그대로 신뢰하여 거기 상응하게 나도 따르는 것을 말함이다.

'노력'하는 것도 행동, '따른 다'는 의미에서의 행동 역시 행동임에는 다름이 없다. 그러나 근본적인 엄청난 차이가 있다. '노력'은 시도한다는 뜻도 포함하는 것으로서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그 노력하는 바 목적 달성이 아주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내 스스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는 아무 것도 없다. 이미 그 목적한 바 목적은 달성되었음을 확신하고 그 확신에 따라 그 사실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다. 어떤 동기로 움직이느냐 가 문제이지 그 움직이는 자체를 두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해괴하게도 움직이는 자체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살아있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움직이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움직이지도 않는데 살았다고 할 수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따라 행동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것은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니면 그런 믿음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특정 사실을 알기는 알아도 그 사실이 내포하는바 의미의 중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이나 그 사실 자체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나 그것이 그것일 뿐 전연 차이가 없다.

덧붙일 것은 이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며 그리고 또한 따라서 자기 부인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부인함이 되고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를 시인함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감 히 부인하겠는가. 그러면 자기 부인으로 일향[一向] 매진하라. 앞뒤 잴 것도 없다. 이 경우는 '저돌적이어라'는 말이 딱 적합하다. 자기 부 인하지 않고서 그리스도와 '한 영'되기란 마치 하늘의 별 따기처럼 절대로 현실적일 수 없음을 명심하라. 성경의 "자기 부인"은 그렇게 이 해해야 "멸망에 이르는 억지 해석"[벧후 3:16]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일상생활에서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모든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변명과 함께 모든 "육신의 일", "육체의 정욕", "육 신대로 사는 것"은 이 자기 부인이 없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다[벧후 1:3]. 우리가 부족과 연약을 불평할 만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족하시단 말인가. 그러하시지 않을진대 오직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다가 바울처럼 "내가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선한 싸움을 싸웠다"라고 간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숨질 때는 "주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면 그 이상 더 무엇을 말하겠는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겠는가.
§  불교의 모순점-"부처가 사람이냐, 신이냐"

3위일체 원리가 말하는 것이 양면성의 법칙이고 인과의 법칙이다. 모든 것은 결과이고 그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이 현실이고 이에 대립되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이 기본 원리를 알고 나면 모를 것이 없고 해결 못할 것이 없다. 불교의 기본되는 것이 연기론(緣起論)이고 무상(無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그들의 말대로 하면 모순 덩어리다. 인과론을 강조하면서 현재가 결과일 뿐이고 그 원인이 있음을 말하지 않으니 곧 제1원인이신 창조자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또 "무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다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음을 말하는데 이는 양면성을 부정하고 역시 결과만을 말하는 것이니 나고 죽고 하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일일 뿐이다. 인간이 육체와 인간으로서 이중 구조로 되어 있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힘이 통 없다. 그저 영혼이 있고 육체가 있는 인간이라는 주먹구구 식의 인식뿐이다. 비단 불교만 아니라 영계라는 양면성적인 세계를 부정하는 모든 과학적 소견과 주장이 모두 그러하다.

영혼이 실험 대상이 아니라며 영혼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이나 불교가 창조자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나 뿌리는 같다. 즉 비(非)과학, 반(反)과학이다. 과학을 자랑하고 과학자로 자처하면서도 그런 비과학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헤어날 줄을 모른다. 그런 과학자들이 장차 초자연적인 현상이 악령 사탄에 의해 대대적으로 나타나면 반드시 거기 머리를 숙이게 되어 있지만, 불교가 바로 그런 사탄의 초자연적인 소위 기적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다.

즉 그런 것을 두고 영험이 있다 하고 신묘하다 하고 그래서 그런 것에 능력과 권위를 부여한다. 그래서 그런 소위 기적을 그 종교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양으로 대견스러워한다. 이미 성경은 그런 기적은 벌써 인류사에 나타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오늘날 유대인들로 표방되는]가 그 증명이다. 이 민족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각종 기적으로 잉태되었고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적 때문에 그들이 과연 하나님께 순종하고 잘 되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런 기적을 목도하지 못한 이방[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타민족] 나라보다 더 타락했음을 성경은 증언한다.

각종 초자연적인 기적이 사람의 영원한 미래를 결정 짓는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올바른 것, 이치에 합한 것, 논리적인 것,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사랑하느냐 않느냐 하는 데에 있으니 이를 마음에 새길 일이다. 기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를 기준해서 하는 말이다. 그것 자체가 어떤 신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나타내신 능력 또는 기적은 거룩한 천사들이 나타낸 것이로되 그들의 하는 일은 무조건 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우리들도 이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언행인 것과 마찬가지다[골 3:17]. 영물들은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와는 달리 능력이 출중하다. 그렇지 않다면야 자연계와 영계의 양면성으로 나누어질 리가 없다. 하나가 능력이 없으면 다른 하나는 능력이 뛰어난 그런 차이를 두고 우리는 양면성이라 하는 것이다. 이 양면은 반드시 대소, 주종, 인과 관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룩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능력을 베풀 수 있을진대 악령들이 그런 능력을 자기 사사로운 목적 즉 악한 의도로 여러 가지 능력을 베풀고 있는 것이야 상식에 속한다. 이런 세상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런 악령들의 속이는 능력에 이끌려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신(神)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창조신이 아니라 피조물 신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신들이다. '신'을 다른 말로 '영'이라고도 한다. 우리 인간도 신적 성향 또는 요소를 가지고 있느니 우리 영혼이 그러하다. 하나님 친히 숨을 불어넣으셔서 첫 사람 아담에게 영혼을 주입하심으로써 인간은 영적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연달은 조처로 영계가 창설되면서 거기서 인간[아담]은 신령한 몸을 입게 된다. 이런 몸은 신들로서의 영물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5백명 가량의 당시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이기도 했다.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 사람 아담믜 "죽기" 전 다시 말해 이 자연계의 몸으로 되돌아오기 전의 [신령한 몸으로부터 이런 자연계의 몸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담의 죽음이었으니 왜냐면 범죄 전에는 아담은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신령한 몸으로 환원하신 상태이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창조주시다. 다시 말해 당시 인간들은 자기들 및 천하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 아니,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을 목도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그 때 당시에 우리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그에 대한 기록[4복음서]을 통하여 거의 모든 당시 상황을 직접 보는 듯이 친숙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해서 유별나게 특징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고 그저 모든 가지각색 인갱들 중의하나로 그렇고 그런 모양새로 나타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직 두드러진 것은 그 말씀 그리고 가르치심 또한 그 행하신 각종 기적을 통한 선한 일이었을 뿐이다.

원래 첫 사람 아담은 그와 같이 신령한 존재로 그 에덴낙원 곧 영계에 있었는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인간을 기준하여 오늘날 우리가 천사라고 부르는 영물들이 그 영계에서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당시 그런 신들의 장자(長者) 격으로 그들 위에 군림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범죄하여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돌아옴으로써 이런 현격한 차이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신과 우리 육체는 상대가 안되니 약령들은 각종 기적을 나타냄은 당연하다. 단지 지금까지는 오늘날처럼 대대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성경에 밝히고 있는 대로 "막는 자가 있어 막았기"[데살로니가후서 2장 6,7절]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되었으므로 봇물 터지듯이 각종 기적이 횡행하게 될 전망이다. 이 모두 악령 사탄의 조화인 것이다. 그런 기적을 나타내는 개인의 무슨 능력이나 신통력이 아니라 악령이 그런 지식이나 능력을 주면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터이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 곧 거룩한 천사들의 기적 행함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할 때, 기적의 크고 작음과 같은 외형적인 것으로는 분별이 되지 않는다. 왜냐면 거짓 기적까지 행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9절]. "거짓"이라는 말의 뜻은 진짜와 방불하여 얼른 구분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그런 것으로 판별하려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어긋나는 내용으로 가르치고 또는 그런 기적이 나타날 때 그것이 악령 사탄의 조화(造化)이다.

그러므로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일어나는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불교 및 타종교에서 나타나는 것은 악신의 능력이라는 것은 여기서 통할 수 없다. 다 똑같이 악령 사탄의 짓거리인 것이다. 단 그 능력이 성경의 진리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이상 그렇다는 뜻이다. 그러면 다 저마다 표방하기를 "성경적 진리"라고 하는 판인데 그 진위(眞僞)를 어떻게 가름하느냐 하면, 여기서는 이런 말로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오늘날까지 기독교로 자처하며 세계의 최대 교단으로 군림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적 진리이기 때문에 그리 되었던가?" 할 때, 그 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가 드러난다. 진정 찾고 구하고 두드릴 때에 나타내어 주시는 진리이므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코 이를 외면하시지 않으므로 오직 각자의 믿음에 좌우되는 것이라도 단언할 수 있다. 이것은 "주관적인"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단순히 사람의 주관적 심리 자굥에 불과하다고 말할 사람은 우리 믿는 이들 중에는 아무도 없음과 같다. 하나님을 모르는 무신론자들이야 자기 아는 바가 없으니 무슨 말인들 못하랴.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은 각종 기적 자체에다 어떤 권위든 두지 말 것이다. 이 세상 신이 악령인 이상 그리고 지금은 자기 때를 만났으므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 경우에 이렇게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즉 그런 기적 하나만으로 그것을 참이라 또는 진실이라 할 수 없으니 기독교의 성경도 충분히 그런 기적들을 처음부터 나타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똑같이 기적을 나타내고 있는 마당인데도 그 가르침의 내용은 서로가 완연하게 차이가 있다. 그러면 둘 중 하나는 진리가 아니다. 즉 기독교는 창조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불교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고 사리 판단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계심을 알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불교의 기적은 악령 사탄이 노리고 있는 거짓된 것으로 인생들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 술수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러면 기독교의 기적은 어떻게 설명되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해서 그렇게 기적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불교는 부처의 힘이라 하고 부처가 지금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런 기적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 경우 문제는 새로운 각도로 부각된다. 즉 부처가 신이냐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석가가 죽을 때 그 제자들에게 "나는 떠나지만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진리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죽으시기 전 제자들에게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볼 것이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요 16:22] 하셨다. 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居處)를 그와 함께 할 것이다"[14:23] 하셨다.

성령으로 즉 아버지와 함께 하나된 모습으로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때문에 "내가 너희를 고아[orphan]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나 너희는 나를 볼 것이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다"[:18,19] 하셨다. 사람이시니까 세상에 태어나셔서 그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친히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니까 또한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엄청난 말씀이 아니신가. 다시 살아 제자들에게 오신다는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3위1체의 원리로 나와 하나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렇게 죽으셨으며 또한 같은 원리로써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으로서 살아나셨으므로 그 살아나신 상태와 위치와 의미 그리고 기타 모든 것으로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제자들 각 사람에게 그리고 현재 나에게 임하셔서 성령으로 "내 속에 계심"[:17]이다.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하신 말씀 그대로 우리에게 '아기[아이]의 품속'이 되어주시려고 오심이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다 하신 말씀과 같다[1:18]. 아이에게는 엄마 품속이 최고의 잘이다. 세상 그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명함도 내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 "진리"가 내 안에 있고 나와 함께 하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친히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이신 분 자신께서 내 안에 영으로 계심이 더 나은가.

물론 이는 앞서의 석가가 한 말을 두고 하는 말 뜻이다. 쉽사리 판단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러면 부처도 그 신도들 안에 들어온다고 말할 것인가. 그가 신이 아니고 영이 아닌데 [하나님은 영이시다]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이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어느 쪽이 참으로 진리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부처를 신이라 하자니 지금까지의 불교의 교리가 그러면 완전히 해체되어 버릴 터이니 그런 말을 할 수도 없다.

사람이라 하자니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물리적인 죽음을 당한 인간이 계속 산 자로 남아 있을 수 없는데도 현재 불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해탈, 열반에 이르러 영원히 산다고 하니 도저히 사리에 맞지도 않는다. 과학하는 정신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된다. 아인슈타인이 결론 내린 것처럼 자연법칙 아래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그래서 "불교를 과학적이라" 말하면서도 불상 앞에 절하고 기도하는 것을 [불교만 아니라 그 어떤 종교라도-물론 기독교를 포함해서] 미신이라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과거에 존재했던 한 종교의 교주가 현재에도 인격자로 남아 있는 것을 그의 지성과 이성으로는 도대체 용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가 절대 배격한 "인격신(人格神)"으로 부처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에 그러했다. 이와 같이 불교의 주장은 설명에도 궁하고 그 논리성에도 궁하여 빈약하기가 이를 데 없다. 처음부터 논리적이지 않으니 합리적인 설명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은 미신이었다는 결론밖에 얻을 것이 없다.

나무 앞에 절하고 돌 앞에다 머리 숙여 경배하며 소원을 비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논리였다. 하기야 오늘날도 차디찬 거대한 고체 덩어리인 달 앞에서 소위 이성적이고 지성적이라 자처하는 인생들이 소원을 빌고 있는 세상이니 불교도만 나무랄 일은 아니다. 이와 같이 부처가 사람이라고만 하게 되어도 모순이어서 과학적이 되지 못하고, 신이라고 한다 해도 용납이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갑자기로든 또는 치성을 드려서든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공상이요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둘 다 자연 법칙을 간과하고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인간이요 자연법칙을 초월해야 우선 신의 반열(班列)에 끼일 수가 있음이다. 신 또는 영은 자연계와 대칭되는 영계의 존재들로서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지배를 초월하는 것이다. 자연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부처가 살아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닌가. 자연법칙대로 하면 그가 지금도 살아 있을 턱이 없다. 그 자체가 이미 그는 자연법칙을 초월해 있다는 뜻이 된다. 아인슈타인이 그런 인격신 즉 자연법칙을 초월해 있는 것을 일절 부정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법칙과 원리를 생명처럼 여기는 것이 과학이다. 그런 것을 떠나서는 과학이 존재할 수가 없는 터이다. 단지 그들 과학자는 이 3위1체의 원리에 대해서는 무지했다는 그 차이뿐이다. 즉 자연계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이 자연계와는 대칭을 이루는 초 자연계가 있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3위1체의 원리다. 지금까지 그들은 말이야 "만유(萬有, 무릇 존재하는 것)"라고 하지만 그 양면을 함께 보지 않고 일면만을 보아 온 것이다.

짝의 원리, 양면성의 원리, 대칭 원리, 인과율 등이 모두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법칙이나 원리 자체가 원인에 속한다. 그래서 그런 원리가 일구어내는 모든 현상이 바로 그 원인의 결과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인격신을 부정하는 이유를 말할 때 "보편적인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아는 자라면 세상사를 간섭하는 존재가 있음을 한 순간도 인정할 수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사실을 가리킴이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은 그러한 원인으로서의 현존하는 모든 법칙과 원리 역시 일종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그런 원리와 법칙이 있음으로써 그런 결과를 내도록 처음부터 그런 원리와 법칙이 존재하도록 한 즉 그런 결과를 있게 한 원인이 또한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불찰이다. 이를 부정하면 논리가 아니다. 원리나 법칙은 엄정한 객관성을 지니는 것이므로 내 스스로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일체의 주관과는 일절 상관이 없다. 주관적이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원리나 법칙으로서의 의미는 없어진다. 아무도 그런 것을 원리 또는 법칙이라 여겨주지 않는다.

자꾸 한도 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이다. 결국 한도 없이 올라간다 하더라도 반드시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최초의 원인, 제1원인으로서 끝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다고 해서 그것이 비논리일 수는 없다. 왜냐면 어차피 그런 모든 것을 한데 뭉뚱그리면 하나의 현상으로서의 현존하는 결과로서의 의미밖에 없는 것이요, 그런 것을 하나의 결과라 하면 그 하나의 결과에는 오직 하나의 원인밖에 더 있겠는가.

다른 원인이 있을 수가 없다. 다른 원인이 있다면 그 역시 현존하는 현상[결과를 이루어 있는]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오직 하나의 원인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창조자, 조물주, 창조신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논리적 하자가 있는지 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엄정한 객관성에다 구차하게 주관을 자꾸 겹쳐 보려 하고 개입시키려 하니 판단은 혼미해지고 막혀지고 도도 개도 아닌 것이다.

3위1체의 원리는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 이외의 것 즉 인과율에서 벗어나는 것은 일절 차단시키고 배제해 버려 그 이상은 불용(不容)하는 것이 이 원리의 엄정성이다.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이와 같이 최종적인 정리를 해주는 것이 3위1체의 원리다. 완전한 이분법으로만 처리된다.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지만, 절대로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빛을 설명하는 데에는 파동성(波動性) 아니면 입자성(粒子性)뿐이다. 그 외에는 없음을 단정하게 된다. 고로 둘이 함께 설명이 됨으로써 전체가 설명이 된다.

소위 "중생이 해탈을 얻을 때까지 그 영혼이 육체와 함께 업(業)에 의하여 다른 생을 받아, 끊임없이 생사를 되풀이한다"는 "윤회(輪廻)"라는 것은 인과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자체가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반복이 아닌 것이다. "네피림"[창 6:4]에 속한 영혼이 지상을 방황하다가[마 12:43] 그들 나름의 일정 요건에 맞추어지면 다시 아무 인간의 태에 들어와 육체를 입는[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혹 동물을 통해서도 그런 짓거리가 가능한지는 불명이나] 말할 뿐이다.

인간의 악행이 불의, 불법인 것과 같이 그들 악령들이 저지르는 불법 행위일 뿐이다. 그들은 자연계에 속한 인간들과는 달리 능력이 있으므로[이들 영물(靈物)들은 '짐승'으로서 그러하지만 '식물'일 경우 인간을 영생하게 만들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등의 능력을 과시할 정도이니까-창 2:17,19/3:22]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그런 일이 가능하나, 그 대신 영원한 멸망에 곧 처해질 운명이다. 이런 "네피림"이 아닌 경우 사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고 오직 죽음 아니면 생명, 생명 아니면 죽음 둘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 양면성을 이루고 있어 이 세상 목숨이 끝나면 영원한 세계에서의 죽음[영원한 고난 즉 "네피림"과 악령들과 함께 들어가게 되는]과 영원한 생명 둘 중 하나로만 가름될 뿐이다. 그들 악령들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인생들로 하여금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 한 가지 책략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이면 무슨 말인들 못하랴. 오직 시간만이 해결해 줄 뿐이요 그 이전에는 진리에 속한 이들만이 진리를 알게 될 것뿐이다[요 18:37].

성경은 이러한 악령들의 불법적인 행위를 장차 나타날 적(敵)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인정하고 있다. 즉 그는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無底坑, bottomless pit)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계 17:8]라 했기 때문이다. "전에 있었다"는 것은 이 지상에 한 때 살고 있었다는 것이요, "시방 없다"는 것은 지금은 죽고 세상에 없으나 다시 세상에 태어나 출현하게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악령들에 한하고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용어가 "환생", "윤회", "전생(前生)" 또는 "전생(轉生)"이다.

그들은 우리[아담의 후손으로서 구원의 대상이 되어 있는]와 적대적인 위치에 있고 우리 인생들을 망가뜨리기 위한 술책으로써 취하고 있는 계략인 것이다. 이들 악령(惡靈)들과 대치하고 있는 이들이 거룩한 천사들로서 이미 악령들은 하늘에서의 전쟁으로[계 12:7] 마지막 승부수도 이미 패착으로 끝난 다음이다[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Tungus) 대충돌 사건]. 그러므로 지금은 정히 적 그리스도의 때로서 곧 그의 활동무대로 이어질 것이다. "네피림"은 구원의 대상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죽으면 그 넋이 지상을 방황하는 것이요 이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 악귀[evil spirits],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신들이다.

이렇게 인과율에 의하여 원인을 찾으면 현재의 결과에 대한 해답이 나오게 마련인데 무턱대고 현재의 상황을 부정하는 식으로만 일관하는 것으로 보이지 달리 나타나질 수가 없다. 무상(無常), 무상(無相), 무아(無我) , 연기(緣起), 열반(涅槃) 등 불교 용어를 국어 사전에서만 찾아 읽어도 대략 그런 식이다. 즉 "모든 것은 다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음", "번뇌·속박에서 벗어나서 속세간의 근심이 없는 편안한 심경에 이름", "일체의 존재는 무상한 것으로 ‘나’라는 존재도 없다는 말", "모든 사물은 공(空)이어서 일정한 형태나 양상이 없음",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서로 관계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으로,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도리", "불법의 참된 이치를 깨달아 고뇌의 지경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음", "모든 존재의 공(空)과 무아(無我)의 이치", "중생 제법(衆生諸法)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임시 화합하여 된 것이므로 불변의 실체가 없음",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러 망상(妄想)이 없음", 등. 

자연계는 여전히 있고 영계도 여전히 있으며 둘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영속한다. 처음부터 함께 창조되어 존재하는 것이며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멸 전변하여 상주함이 없는 것"을 내 스스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는 그대로 두고 이를 벗어나면 되는 일이다. 내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속해 있음은 '결과'로서 범죄의 '원인'으로 된 것인즉 이 '원인'을 제거하고 "상주하는" 세계 곧 영계로 들어가면 되는 일이다.

영계에 속한 육체를 입어 하나님께서 애초 인간을 창조하셨던 그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면 되는 것이다. 단 엄정한 하나님의 법질서 안에서는 한번 이지러져 버림 받은 것은 그대로 버려지고 그것을 고쳐 쓰는 등의 의미가 되는 복구라는 단어는 합당하지 않다. 복귀가 아니라 처음부터 새로 창조하는 것이요[고후 5:17] 죽을 것은 죽은 다음에 "다시 출생시키는"[요 3:3]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만유를 회복하신다"[행 3:21]는 표현이 있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아담의 원래 모습으로 회복한다 했지만 실제 의미만은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이다.

고로 죽은 자가 되어 있으니 죽은 자에서 벗어나 산 자가 되면 끝나는 일이다. 산 자가 되는 길은 애초 인간[아담]이 창조된 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다 영원성의 영혼을 주입하는 것이니, 즉 우리는 이 새 창조의 단계에서 당시의 아담으로 치면 '육체'가 되는 것이요 그 '영혼' 격으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는 일이다. 그냥 "영혼"이라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오심으로써 되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그 영으로 내게 오심으로써만 나와 문자 그대로[영혼과 육체 관계를 따라] 하나되시는 모습이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시라 함은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이시니 바로 이 하나되심을 인하여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갈 2:20]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면성으로 표현하게 되는 창조와 같이[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셨다든가(히 1:2) 또는 아들 친히 만물을 창조하셨다든가(골 1:16)] 새 창조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라고도 하고 "하나님과 한 사람 그리스도의 은혜"라고도 한다[롬 5:5].

즉 '나[自我]'라는 내용을 친히 이루시고 '또 하나의 나'가 되시어 친히 성령으로 내게 임해 오시는 것이다. 즉 사랑이 되시어 사람으로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내 영혼으로서 임하여 오심이다. 내가 사람이므로 나와 본질적으로 같은 모양새가 되시기 위해서는[히 2:14] 사람이 되셔야 함이다. 그러나 사람만 되신다고 전부가 아니다. 나는 아담의 범죄로 처음부터 죽은 자로 세상에 왔으므로 나처럼 죽은 자가 되심이 필수이다. 그래서 나 위해 죽으신 것이 십자가 죽으심이다.

죽으신 채 그대로 계셔도 나의 모습이실 수 없다. 내가 살아야 하므로 그래서 나 위해 살아나셔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런 내용으로 사람이 되시어 내 영혼의 역할로서 오시니 즉 그 영혼에 대한 육체 격인 내 안에 임하여 오시니 '육체와 영혼 관계'를 이루어 내가 다시 출생한 것이요 새로이 창조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하여 이제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영원히 절대적으로 복종하기로 약정하는 경우가 아니면 영원히 죽은 자가 되고 산 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약속했다가도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기 부인이 없을 때 멸망을 자초하는 것은 물론이다.

선행을 하면 천국에 악행을 하면 불 못으로 처벌 또는 처형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미 예정되어 있는 멸망으로 들어가는 그런 순서이다. 그렇게 멸망하게 되어 있는 중이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출하시는 것이 우리 구원이요 영생인 것이다. 범죄하기 전 아담은 그냥 영혼과 육체로서의 이중 구조로 지금 우리 각자와 같이 되어 있었고 우리는 이제 성령을 모시고 있으니 그러면 새로 창조된 우리의 구조가 비교적 복잡하게 되지 않았다 할 필요는 없다.

이유는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하나님은 영인신지라 이 우주 천상 천하에 안계시는 데가 없이 충만히 계시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그런 구조로서 영계인 에덴낙원에 있을 때나 [물론 범죄하기 전] 우리가 성령을 모시고 현재 존재하는 것이나 아무 차이가 없다. 단지 굳이 말할 수 있다면 범죄하기 전 아담에게 하나님은 영으로 계셨지만 [왜냐면 아니 계신 데가 없으므로] 범죄할 당시에는 아담의 마음에만은 계실 수가 없었고 [왜냐면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행위였으므로] 현재 죽은 자로서의 모든 인생들의 마음에는 전혀 계시지 않는다는 그것이다.

이제 성령으로 우리가 출생함으로써 영원히 그리스도의 영을 내 안에 모심으로 인하여 이전 범죄하기 전 아담 안에 계셨던 하나님의 영으로서 내 안에 계심이나 [이전 상태를 회복함이므로] 이제는 그 내용이 다르니 즉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람 그리스도의 영이시고, 그러나 사람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으로써 사람이 되셨다는 것뿐인지라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심은 불변으로서 아버지께서는 항상 아들[아들께서 그 형상이시므로-고후 4:4]로써 자기를 나타내심이다.

그러므로 외견상으로는 이전 범죄하기 전 아담의 모습과 우리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내용면으로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왜냐면 사람이 되시어 나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영원히 항상 말씀하시기를, "내가 물론 현재 산 자이나 내가 전에 죽었었다"[계 1:18]고 자기를 표현하시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항상 이 세상에 있을 때 "내가 현재 살아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었다" 하게 된다. 이것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나의 확고한 결의가 되고 또한 그 능력이 되는 것이기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만일에 지금이라도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게 됨으로써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퇴색하게 된다면[고후 5:14,15], 나는 분명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의 죽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 때에 그래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때 나는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능력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요 그렇지 못할 때 나는 성령이 없는 것이다. 왜냐면 이미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그리스도와 결별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망동을 이 세상의 시험 무대에 처해 있을 동안에는 언제든 자행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자기가 그렇게 먹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신 선악과를 입에 넣어 씹고 있게 될 줄이야 처음에는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러나 현실이 되어 나타나지 않았던가. 한번 쏟은 물은 다시 담을 수가 없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천주교를 우리가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상이 천주교를 기독교로 간주하여 하나님이 교회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종일관 즉 주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기까지 핍박을 받게 된다 하셨는데 천주교는 이 세상에서 천년이 넘도록까지 세상에 군림하여 세력을 피움으로써 처음 성경을 읽는 자들에게 혼돈과 혼동을 주기에 천주교는 처음부터 성경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와 같은 세상 종교에 불과할 뿐임을 불가불 밝혀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신교 역시 무조건 특정 사실 즉 그리스도께 우리 각자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만 인정하여 사실로써 마음에 새겨놓으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구원된다 하므로, 이런 것은 산속에 들어가 정진하지 않더라도 염불만 일정한 횟수로 외워도 된다는 불교의 소위 "쉬운 불교"와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을 속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제1원인이신 창조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이렇게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다. 개신교 역시 결과만 붙들고 원인은 무시하기는 똑같다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현재 이러한 불행한 죽음의 결과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결과인데 따라서 원인을 제거해야 결과에서 벗어날 수 있음인데 여전히 죄인으로서 자기를 위해 사는 죄를 지으면서도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원인 없이 결과만 강조하기로는 불교와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가장 이기적인 인간이 개신교 교인이라는 악평을 받아도 도리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교리는 세상 종교 교리요 절대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시 불가불 일깨우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개신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이렇게 되면 주님께서 세상을 악하다고 증언하심으로써 세상의 미움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이러한 세상 종교를 악하다고 증언하는 것이 되어 있으므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 천주교도들, 개신교도들의 미움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들 중의 더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상 지적과 같이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킴으로써 성경에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그들을 "악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항상 진리를 믿는 이들은 소수다. 그러므로 이런 소수에 속하는 사실을 우리는 굳이 외면하려 하지 않는다. 말씀대로 되어지는 것뿐임을 알아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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