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12) 별을 따는 사람들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별을 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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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따는 사람

금을 아름답다고 여기기 시작할 때는 별이 아름답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금은 땅의 것이고 별은 하늘의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아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치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 3:1-10] 함과 같습니다. 

계시록에서 요한 사도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있는 분으로서 이상(異象, vision) 중에 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계 1:16]. 또한 주님 친히 “새벽 별을 줄 것이다”[계 2:28] 약속하신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그룹”이나 “스랍”들을 그와 같은 별들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욥 38:7]. 성경이 이런 동심(童心)과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가리켜 “천국이 이런 자들의 것”[마 19:14]이라 하신 말씀이 기억 납니다.

실상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니, 이 자연계를 밋밋하고 멋없는 세계라고 할 수 없는데 영계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니 우리 인간의 표현대로 하면 실로 환상적으로 좋은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아름답다”는 형용사를 잘 쓰지 않는 성경에서 수목(樹木)을 아름답다고 한 것이 바로 에덴낙원의 식물입니다[창 2:9]. 결국 천국은 사랑으로써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천진 난만한 꿈의 이상세계라 할 것입니다.

그 꿈과 같은 세계가 현실화되어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물론 어린 아이는 어디까지나 어린 아이입니다. 지혜도 지식도 판단력, 추리력 모든 것이 미숙합니다. 발달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과 지혜는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하고 믿고 하는 기본적인 것은 순수 그대로이어서 바로 이런 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라 어른이 되면서 사랑 대신 미워할 줄 알게 되고 의심할 줄 알게 되어 진귀한 기본 소양을 하나씩 버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진화가 아니라 퇴화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순수성은 날 때부터의 것을 지녀야 하는 것이지 진보 발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초 창조되던 당시의 이런 순수성이 영원히 보전되는 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물론 그 때가 되면 지식과 지혜는 모든 능력으로 비상하게 갖추어져 있게 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 때와 같은 그 사랑의 순수성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별을 딴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별을 주시기 전에 나는 별을 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별을 만드는 사람이면서 별을 먹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동시성(同時性)에서 양편은 함께 움직여야 하고 순서상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하는 것이니 주님은 이미 십자가 고난으로써 '나 먼저 움직이는'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요일 4:19]. 사랑은 주고 받음을 번갈아 하는 또는 나누는 교제[사귐]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을 별 사람, 하늘 사람이라고 여기서 불러봅니다. 하늘의 별을 딸 수 있나요? 별보다 훨씬 더 엄청나게 좋은 것을 딸 수 있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니, 별보다 더 좋고 달보다도 좋고 해보다도 좋은 것을 딸 수 있습니다. 해를 따서 내가 소유한다면 온 누리를 밝게 비추고 생명을 주는 햇볕이므로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해가 문제가 아니고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아니, 천하보다 더 좋은 것을 하늘의 별처럼 따서 내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정말 딸 수 있습니다. 왜냐면 별이 아니라 별보다 더 좋고  아름다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마음이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사랑의 화신 아니, 그 본체이십니다. 내가 그 사람을 영원한 나의 반려자(伴侶者)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500여년 전 바벨론 왕국의 고위직을 지내기도 한 다니엘이라는 예언자가 바로 오늘날의 문명 발달을 예언하여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게 되며 지식이 더하게 될 것”[단 12:4]이라 한 바로 그 예언 앞서 이 놀라운 일을 함께 예언한 것입니다. 즉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췰 것이다"[:3].

오늘날처럼 교통 통신이 발달한 적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 선지자(先知者)는, 이런 일이 성취되는 때 곧 지금 이 때를 이 세상 끝날 곧 마지막 때라고 적시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믿고 충실히 따르는 모든 사람 각자를 가리켜 “내가 그에게 새벽 별을 주겠다”[계 2:28]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그 때 의인(義人,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산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마 13:43]이라 하셨습니다.

성경에 하늘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다, 별과 같이 비췰 것이다,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 흥미롭습니다. 엄숙한 현실이면서도 마치 동화와 같은 멋을 풍기는 말씀들입니다.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이 지구상이 아닌 우주의 다른 쪽에서 보신다면 하늘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지 모르나 어쨌든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해같이 빛난다, 별과 같이 빛난다[마 13:43/단 12:3]등의 말씀들이 있는 것을 보면 하늘의 해와 별을 이 지상에서 우리 인간과 같이 쳐다보시며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느낌이니, 이는 인간이 하나님 창조의 중심임을 확인되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가 우주 중심이 아니라고 해서 반박할지 모르나 성경에 이 지구가 “하나님의 발등상”[마 5:35]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서시면 이 지구를 딛고 서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이니 하나님 서신 데 곧 계신 데가 우주 중심이지 다른 데가 중심일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한 점만도 못한 지구를 중심으로 펼쳐진 우주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외계 문명, 외계인 따위를 악령들은 선전할 것이나 성경의 이 사실, 이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거짓임이 입증됩니다.

하늘에, 무슨 사람이 별처럼 있다더냐 하겠지만 '한 굉장한 사람'이 계십니다. 그 사람을 정말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느냐 한다면, 그럼요,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그 ‘사람’을 개별적으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소유 가능합니다. 허튼 소리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참말입니다. 이 분은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또한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소유 가능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시므로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이고 또 사람이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분을 ‘자기의 사람’으로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사람이시니까 사람은 한 사람과만 상종하여 함께 있게 될 뿐 다른 사람 또는 여러 사람과 동시에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이 ‘나의 사람’이 되어 계시게 됩니다. 즉 나만이 소유할 수 있는 내게 주신 나의 선물로서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여기에 감히 견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될 사람을 얻으면 그 아내 또는 남편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내나 남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가 바로 ‘개인적인 선물’이란 말의 뜻입니다. 그렇게 나의 개인적인 선물로서 하늘의 사람을 내 사람으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사람’이시기에 “하늘의 별을 딴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의미로 각 개인에게 그렇게 계십니다.

그래서 그런 모든 사람을 “신부”라 집합적으로 명명하고 주님은 “신랑”이라 성경은 표현합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이제 사람이 되어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현재 사람으로서 계시나 처음부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라는 점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어 계시기 때문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없습니다.

물론 새파랗게 젊은 청춘의 모습이십니다. 젊으시다 해서 앳되거나 어린 티가 나시는 것도 아닙니다. 완숙미(完熟美) 그대로이십니다. 또 영원히 젊으시므로 늙음을 모르는 원기 왕성한 극히 아름다우신 홍안(紅顔)과 미모의 그러나 장부와 같이 늠름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계십니다. 다시 말해 남성미와 여성미를 두루 조화시킨 일찍이 인류 역사상 구경한 적이 없는 사람으로 계십니다.

남자가 되기 이전의 첫 사람 아담이 그러하였다 할지 모르나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아담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젊음의 아름다움으로 모두가 자기 특색대로 장차 변화합니다. 이 분은 인간으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자태와 품위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남성미와 여성미를 완벽하게 두루 갖추신 아름다움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시므로 막강한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죽는 일도 병드는 일도 없으십니다. 공중에도 새처럼 얼마든지 번개같이 달릴 수 있고 바다 속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자유자재하게 지낼 수 있는 신령한 몸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도 장차 그렇게 됩니다. 몸과 머리의 관계이므로 똑같지, 이질적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 당장이라도 꼭 한번만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 구경했으면 좋겠다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추수는 가을 때에 하는 것이고 씨 뿌리는 일은 봄에 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꿈을 실현시켜 종결하는 때가 아니고 마음 속에 고이 품고 막강한 힘으로 삼는 때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을 묘사하기를, “촛대 사이에 인자(人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雪]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fine brass, bronze glowing in a furnace]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칼]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은데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계 1:13-18] 했습니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기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로서 내가 이전에 죽었었지만 보라,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다“ 하신 것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천사를 통해 나타내신 것입니다. 신령한 몸은 그 고유의 모습 단 한 가지 형태로 고정되지 않고 여러 모양과 여러 형태로 자기 의지를 따라 변화무쌍하게 나타낼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쥐고 계신 분, 참으로 별 같으신 사람이십니다.

그리고 새벽 별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한 때 죽으셨던 분이시니 참으로 '나의 사람', 사랑의 사람,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사랑은 내면의 아름다움이니 세상의 모든 가시적(可視的) 아름다움은 이 사랑의 외부적 표현 곧 외형(外形)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은 ‘비정상’투성이라 외부는 그럴 듯하지만 내면이 이를 따라 주지 못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시는 따라서 정상적인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애초 창조된 대로의 모습이 됩니다. ”참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영생으로 보답된다“[롬 2:7]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것입니다. 즉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됩니다. 선[좋은 것]이나 의[올바른 것] 모두 아름다움에 속합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7] 사람들이야말로 심미안을 지닌 사람들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씀과 같이 그 구하는 대로 얻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다시 강조하게 되는데, ”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목표라는 뜻이 아니니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만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논리입니다. 선과 의를 사랑하고 불법, 불의를 미워하여 선을 행하고 의에 순종하는 결과가 그렇다는 뜻이니 우리는 이미 영생하는 생명력[그리스도 곧 성령의 권능-행 1:8]을 소유하여 그 힘으로 선을 행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개막(開幕) 전 입장(入場)하기 위해 예약(豫約)하는 일이 있음과 같이 지금은 말하자면 예약하는 때입니다.

이 놀라운 하늘의 선물, “하늘의 별”을 따는 일과 관련된 예약입니다. 결혼에 약혼(約婚)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을 직접 보게 되는 ‘때’에 대한 예약입니다. 그러나, 직접 보지는 아니하더라도 얼마든지 소유는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소유가 가능합니다. 예약은 미리 약속하는 것이니 예약한 사람은 단지 그 나타나게 되어 있는 때만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됩니다. 가령 예약 티켓이나 증서 같은 것은 얼마든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은 약속입니다[요일 2:25/약 1:12/2:5]. 그리스도 친히 내 생명이십니다[골 3:3]. 그래서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생명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없다 했습니다[요일 5:12]. 그러면 생명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데 또 무슨 약속이냐 하게 됩니다. 이는 바울 역시 같은 논조로 설명한 바 있으니, 즉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이 발견되도록 하려 하고" "부활에 이르려 한다" 한 것입니다[빌 3:8,9,11].

이는 또한 우리가 "몸의 구속"을 얻는다 함과 같으니 이를 가리켜 성경은 또한 "양자될 것"[롬 8:23]이라 한 것입니다. 양자가 되어 있는데[:15] 또 무슨 양자가 됨이냐 반문하겠지만 위와 같은 설명의 성격입니다. 우리가 양자가 됨은 "양자의 영" 곧 성령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받아 모셨기 때문입니다[:15]. 다시 말해 우리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인데 즉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가리켜 이상 모든 것의 "보증으로 주셨다"[고후 1:22] 함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고 발로 밟을 수 있으니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할 수 있음입니다[히 6:6/10:26,29]. 그러면 우리의 구원이고 몸의 구속이고 모든 것이 다 허사, 무효가 됩니다. 그래서 약속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막된 행동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없어야 끝까지 충성되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야 마침내 그 모든 것을 향유하게 된다는 그 뜻입니다.

그 중도에 나는 얼마든지 막된 행동을 할 수 있기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함입니다. 고로 이 경우의 “약속”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뜻 풀이를 하면, 우리 인간이 먼저 올바른 정신을 갖추어야 훌륭한 모습도 갖추게 된다는 바로 그 의미로 빗대어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그 사람을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되면 나도 그런 형상으로 변환됩니다[요일 3:2]. 따라서 나도 그런 훌륭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전에 가장 먼저 그 분의 정신을 소유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즉 그 분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신”[히 1:9] 것처럼 나도 똑같이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것이 선결 과제입니다. 내면부터 닮아야 외형이 또한 닮아집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우리의 구원에서는 이것이 철칙입니다. 정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지금 그 사람을 내가 소유해도 볼 수 없다는 뜻이 여기에도 있다 하겠습니다. 그 아름다운 사람은 하나님이시기도 하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그 사람을 소유하게 되면 하나님으로 소유하게 된다는 그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하나님이시면서도 동시에 똑같이 사람이십니다. 하나님되심과 사람되심이 불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로 하나님으로 오셔도 사람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즉 명백히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지금은 위에 설명한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계신다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을 내가 소유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뜻이니 하나가 됨에는 반드시 그 정신을 이어 받아야 즉 닮은꼴이 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내 것으로 딴다고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따면 얼마든지 따질 수 있고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반드시 조건이 붙으니 방금 설명한 대로 그 조건은 내가 그 사람처럼 깨끗해야 한다는[요일 3:3] 것입니다.

누추한 자리에 그런 지극히 아름다운 사람을 모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말이 안되니 당연히 우리 역시 깨끗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깨끗함이 온전히 이루는지 여부를 최종 판단된 다음에야 내가 그 사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동시에 나도 그와 같이 변화하게 됩니다. 그를 보는 그 날은 나의 몸도 그 분의 모습과 같이 변하는 날입니다. 그 분을 내 것으로 모시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나도 깨끗함을 입증해 보였으므로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 결과입니다.

그러나 내가 불충하여 그 분을 닮지 않고 그 분을 따르지 않고 그 분을 사랑하지 않아 그 분과 다른 불결한 모습을 취하게 될 때 그 분은 영영 내 것이 되실 수 없습니다. 이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그 분을 하늘의 별로서 따 올 때 나도 그 분과 같이 깨끗해지겠노라 약속하고 백 번도 넘게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내 스스로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약속 파기가 되어 그 분은 더 이상 내 것이 되실 수 없습니다.

내가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상하시고 고운 분이신데 오실 자리가 못되므로 즉 더럽고 누추한지라 오시고 싶어도 못오시고 더 계시고 싶어도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를 모시려면 내가 스스로 노력하여 깨끗하게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내가 깨끗해지도록 그 분은 모든 능력을 베풀어 주시며 참고 또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 능력을 사용하기를 내 스스로 게을리 하여 내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무성의로 임하므로 실망하시고 나를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표현하면 더 구체적입니다. 즉 주님 친히 나를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그 분을 무지막지하게 십자가에 또다시 못을 박아대어 죽이는 일을 함으로써 내게 관한 한 영원히 죽으신 그리스도 즉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리스도,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도로 내 스스로 만드는 일이라고 아주 끔찍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히 6:6]. 성경에는 극적으로 표현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진실하게 엄숙하게 나타내는 진리의 말씀이므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표현되는 것은 그것이 실상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렵고 떨지”[빌 2:12]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 분은 사랑의 화신이요 본체이시라 그렇게 나를 참아 주시고 또 참아 주시며 기다려 주셨지만 내가 사랑이 없는 줄을 최종 판단하셔도 그래도 차마 못떠나시는데 내 자신이 무지막지하게 그렇게 그리스도를 또다시 “참살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참살은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실 때 내 죄가 그렇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내 죄 때문에 그렇게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고로 이 두 번째 행위도 다름아닌 나의 죄입니다. 즉 내가 또다시 나 자신을 위해 살 때 바로 그것이 그렇게 끔찍한 완전히 미친 짓을 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감히 어떻게 나의 주님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으랴” 해도 소용 없습니다. 현실 그대로의 묘사입니다. 아담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찌 그 죽음의 선악과를 따 먹으랴" 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 자체가 바로 그런 끔찍한 행위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 때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 때 나를 위할 때 내 욕심대로 행할 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으로써 철저히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지”[고전 9:27] 않을 때 나의 손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되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순간이 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에데낙원에서 인간 아담을 죽음에 빠뜨리는 장면을 연출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 죄이고 죄는 결국 살인 행위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내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끔찍한 일로 상상된다면 죄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행위인지 그와 같이 제대로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정체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절대로 “약하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친히 우리를 약한 자로 창조하셨다는 말이 되니 하나님의 일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서 구원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육신이 약하다”는 말은 성경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바로 그 “육신”[롬 7:5-8:13] 즉 우리로 불가항력적이게 죄 짓도록 만드는 장본인 “죄의 몸을 멸하기”[롬 6:6] 위해 즉 죽이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사람되심으로 우리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즉 파괴시키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했습니다[요일 3:8]. 그리하여 죄 짓는 즉 죄 짓게 하는 “마귀의 일을 멸하시게” 된 것입니다.

고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로서의 결실이므로, 온전하게 거룩하게 강하게 새로 지으심을 받았고, 죄 짓지 않도록 오직 순종하도록 지으신 결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그 자신 다시 출생하지 않았고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고 따라서 구원되지 못하였음을 스스로 천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경을 “풀이하였다”고 자처하면서도 실제는 엉뚱하게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사주로 멸망의 교리만 만들어낸 세상 종교[기독교라는 이름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이 약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육신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의 몸 곧 육신이 멸해졌다는 것은 이론이 아닌 사실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서 아무리 사실일지라도 이를 믿지 않으면 실제 사실이 아닌 것과 ‘똑같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로서 나를 위해 죽으셨지만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지만 믿는 자에게만 그것이 사실 그대로 통하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사실이 되지 않음과 같습니다.

고로 자기 육신이 약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참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말 그대로 육신이 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하고 성경의 의미가 그렇다고 우길 때에는 그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진실을 성경을 통해 배우지 어디서 배우겠습니까. 성경은 모름지기 성령의 계시로 읽어야 익혀지는 글입니다. 나의 불찰이요 나의 탓, 잘못,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나는 정신 바짝 차려 "조심하고"[고전 10:12] 있어야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내가 모신 나의 별은 그 휘황찬란한 모습 그대로 내 안에 나타내시게 되니 그를 내 눈으로 보게 됨과 동시에 내 몸도 그와 같은 동일한 몸으로 변신하는 것입니다. 즉 나 역시 하나의 별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별을 내 안에 지니고 있으니 내가 별이 안되고 무엇이 되리요.

러시아의 노래 중에 영역으로 "shine, shine, my star"라는 노래가 있듯이 사람들은 밤 하늘에 보석 같이 박혀 있는 듯이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저 별은 나의 별"이라고 하며 예로부터 자기의 꿈을 실어 표현하기도 했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했습니다. 실제 세상에 태어나는 대로의 인생들을 각기 상징하는 별이 각 개인에게 해당되는 의미대로 하늘에 모두 깔려 있다는 암시를 성경은 주고 있습니다[신 4:19].

여기서 우리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치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골 3:1-4] 한 성경 대목을 기억합니다.

나의 별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고 내 마음의 눈은 항상 하늘을 향하므로 나의 별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나는 그와 같이 영광의 신령한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나의 별"이라 할 때는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신 사람마다 할 수 있는 말이니, 즉 "저 별은 나의 별"이라 할 수 있게 됩니다. 머리는 오직 한 분이시고 몸의 각 지체는 많고 많은 것입니다. 이렇게 별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땅에 있는 지체(肢體, members[KJV], earthly nature[NIV])를 죽이는"[:5] 것이니 땅의 지체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로서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5,6].

그러므로 하늘의 별을 내 안에 모시려면 내가 우선 깨끗해야 합니다[딤후 2:21/요일 3:3]. 그 분은 아주 깨끗하신 분입니다. 아름다우신 분이므로 깨끗함은 아름다움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의[義, 올바른 것]를 사랑하고 불법(不法, 올바르지 못한 모든 것 즉 죄와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히 1:9]. 따라서 나는 이제까지의 양심에 걸렸고 가책을 받았던 모든 불결하고 누추한 일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필수입니다.

나도 깨끗해서 깨끗한 자리가 되어야 그 깨끗하신 아름다우신 분이 오실 것이 아닙니까. 우선적으로 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나의 죄 용서인데 이 죄 용서에 대한 전제 조건이 나의 회개입니다[행 2:38]. 그러면 나는 별을 따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별이 친히 내게로 오십니다. 사랑의 동시성에서 말하면 내가 별을 따려고 해야 그 별이 내게로 오시는 것이므로 나 역시 두 손 놓고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나 역시 항상 적극성 있게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니 바로 이 움직임이 나의 회개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믿어야 하고 회개해야 하는 등 나 자신에게 달렸으므로 내가 직접 하늘의 별을 딴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면 따집니다. 친히 내게 오심과 동시에 나는 따는 행동을 취하는 그런 동시성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시므로 내가 회개하여 죄 용서 받아 깨끗해진 순간 친히 내게로 오시기 때문에 따면 따질 수가 있다 한 것입니다.

내가 따는 것과 동시에 즉 따는 동작과 동시에 그 분 친히 내게로 오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딴다는 말은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善惡果)를 따 먹고 죄[올바르지 못한 행동]를 지어 오늘날과 같이 인생들이 죽음의 운명에 처해진 것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그 때 생명과(生命果)를 따먹으면 안되므로 낙원에서 추방됨으로써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바로 그 생명과를 따듯이 하늘의 별을 딴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 분 자신이 생명과는 아니십니다. 생명과를 주어 먹게 하시는 분이십니다[계 2:7]. 당시에는 사람이 선악과를 땄으나 나는 그와는 반대로 생명과를 따게 되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영계 곧 하나님 나라를 가리켜 하늘나라[天國]라 하므로 “하늘”의 별을 딴다는 말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는 과거와 같은 불결한 마음[내가 자 자신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결한 것]을 먹거나 언행(言行)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면 그 하늘 별 사람이 깨끗한 분이시기 때문에 나도 깨끗하기를 원하시는 까닭입니다[요일 3:3]. 내가 그러한 짓을 계속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면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 별 사람이 누구냐 하면 육신으로 바로 나의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은 분이십니다. 곧 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부모가 나를 낳으셨으므로 내가 생긴 것처럼 인간을 만드심으로써 내가 세상에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분 역시 아버지가 계시니,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나의 하나님은 곧 너희 하나님, 나의 아버지는 곧 너희 아버지”라 선언하셨으므로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함께 내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아버지”라는 관념에 집착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아들”[요 1:18]로서 성경에 표현되고 있음과 같이 우리 인간의 상식과 표현 방식대로 하면 “어머니 품속”입니다.

주님께서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눅 16:23] 하신 대로 성경은 우리처럼 남녀 개념에 전혀 사로잡혀 매이지 않는 자유 분방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를 남성 우월주의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남녀 차별이 아니라 이미 설명한 대로 근본을 따른 대표성을 나타내는 표현법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장차는 남녀 구별이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근본을 따른다는 말은, 애초 사람[아담]을 지으셨을 때 남녀 한 쌍으로 지으시지 않고 한 사람만을 지으셨으니 이는 천사들처럼 전혀 성별로 나누어져 있지 않은 온전한 육체 구조였던 것입니다.

양성(兩性)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둘로 분리되었다는 뜻이니 둘로 특성이 갈라져 분산되어 있어 개체적으로는 불완전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둘이 하나로 봉합되어야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전하다”는 말을 쓰게 됩니다. 그러면 에덴낙원에서 이미 인간은 남녀로 구분되어 있는데 만약 범죄하지 않고 계속 아담 부부가 에덴에서 살고 있었다고 가정할 때, 거기서 나오는 자식들은 성별이 있는가 없는 것인가 할 것입니다.

성별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있을 수 있다 함은 남성적인 기질과 여성적인 기질로 나누어져 생산되었을 것임을 말하고, 없다는 것은 생식 기능으로서의 성별은 없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가정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설명상 말해본다면, 아담이 만일 당시 범죄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거룩한 천사들처럼 그 상태로써 영원히 확정되고 다시는 범죄하지 않는 존재로 낙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영원한 젊음으로 계속 자식들을 낳으므로 자식들 자신이 짝을 맞추어 그들 스스로 자식들을 낳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들 자식들 중에서 악인과 의인으로 구별되는 것이니, 영물들 중에서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로 구분되어 나타남과 같은 과정을 밟는 것이 필연입니다. 그리고 영계에서의 자식들 생산은 자연계에서의 육체의 방법과는 별개일 것이므로 이리저리 가상해서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기는 하나, 결론부터 말하면 악인과 의인이 구별되어 나타나면 악령들과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의 불 못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또한 모든 남녀는[자식들이 남녀 유별로 생산되었다 할 때] 아담 부부를 포함해서 애초 아담이 창조되었던 그 ‘온전한’ 신체 형태로 복귀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녀 구별로 인한 대칭성에 의한 대소, 주종 관계로서의 격차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이런 변화는 창조도 아니고 따라서 처음의 창조 결과를 번복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므로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가능하다’는 것은 능력 문제를 말함이 아니고 기존 질서에 저촉되느냐의 여부를 따져서 말함입니다.

앞에서 애초 여자가 생긴 것은 자녀 생산이 목적이 아니었고[범죄로 인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하면서 생식의 방편이 되었지만] 단지 교제를 위한 짝의 개념이었다고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이제 자식들이 많이 생겨난 이상 “사람이 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던 때의 사정은 이미 과거지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실 때에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데에는 혼자로서는 안된다” 하지 않으시고 그냥 단순히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를 지으신 것이 아니라 영물들을 지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악인과 의인들을 구별해 내실 때 남녀가 같은 비율이어야 한다는 필요성도 없고 보면 남녀 구별은 더 이상 그 존속 의미를 잃게 되니, 필요 없는 것은 자연적으로 도태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해서 우리가 아는 아버지 어머니 혹은 남녀 개념으로 한정해서 인식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면 당연히 어머니 개념도 함께 포함이 되게 마련입니다. 이럴 경우 앞에서 말한 대로 근본을 따져 표현하는 것이므로 “아버지” 대신 굳이 “어머니”라 할 것도 없는 것이요 그렇다고 “아버지-어머니”라고 복잡하게 말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것뿐입니다. 요즘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하여 무슨 큰 발견이나 한 듯이 소란을 피우는 이단이 생겼으나 이는 잘못하면 기존의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 같은 요사스러운 이단적 표현이 될 수 있으므로 거기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해서 사람이 되셨나 하고 사람들이 묻는다면,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어 죽음에 처해져 모든 인생이 죽은 인간이 되었으므로 이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다시 살리시려고 사람이 되셨다고 우리는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것처럼 무턱대고 살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이면 누구나 그 대상입니다. 사랑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고로 모든 사람이 그 대상이고 차별이 없고 그야말로 말 그대로 누구든지 그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너무 비극적입니다. 그렇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앞에 예를 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렇습니다.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또한 그렇습니다.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을 미워하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요 3:19]. 영생은 누구나 원하고 영원한 멸망은 누구나 두려워하는데도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성경이 명하는 대로 두렵고 떨림으로 그리고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는 가운데[하나님을 몰라서 찾는다기보다 그 뜻을 알고자 하는 차원에서] 말씀대로 행하고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마음 변함이 없이 겸손하게 진지하게 나갈 일입니다.  

우리 어버이가 그 자식들인 우리를 위해 모든 아름다운 일을 해놓고 친히 별이 되어 “나 여기 있다. 나를 찾아보렴. 이 별은 너의 별이다, 이 별은 네 별이다” 하는 것과 같다고 할지. 어째서 사람이신데 하늘에 계시는가 하면 앞에서 말한 그런 능력의 몸[신령한 몸]을 하고 계시므로 이 땅만 아니라 하늘에도 얼마든지 땅처럼 계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만 아니라 바다 속에서도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고 그 몸으로 머물 수 있는 것이 그런 이상적인 몸 즉 신령한 몸입니다.

우리도 그 분을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되면 똑같은 몸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 아니니, 시종 사람으로서 자기를 나타내셨고 항상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 즉 사람)이심을 역설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죽음으로서 그 범죄의 대가를 모두 청산하신 다음이므로 "마지막 아담"으로서 의당히 그 원래의 아담의 신령한 몸으로 복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 얼마든지 모습을 나타내실 수 있지만 이미 설명한 대로 우리의 올바른 정신 상태를 함양하시기 위해서라도 그 모습을 잠시 감추시고 아직 일부러 드러내시지 않고 있는 것뿐입니다[행 3:21]. 물론 그 이유 가운데에는 우리 위해 영원한 처소를 마련하시는 것도 포함됩니다[요 14:2]. 만일 드러내시게 되면, 그 분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마다 바로 그런 몸으로 변신할 것이므로 그러기에는 아직 때가 이른 것입니다.

즉 속은 악하면서도 그런 몸이 되는 것만 욕심이 나서 자기의 악한 생각은 뉘우칠 마음은 없이 그와 같은 몸이 될 수 있는 방법만을 모방하려 들 것이므로 이렇게 되면 누가 진짜 착한 사람인지 아니면 그런 것만 욕심 내는 사람인지 분간하기에 지장이 되므로 이를 일찌감치 가려내자는 뜻입니다. 그런 혼돈을 사전에 방지하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악인이 흉내 낼 정도로 그 방법이 그렇게도 간단한가요? 그렇습니다.

부모의 자정(慈情)으로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 일부러 어렵게 할 리는 없습니다. 단지 그 원리원칙만은 어렵게 하든 쉽게 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리원칙대로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는 타협이나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즉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악은 이웃을 망치는 것이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처럼 만드신 것을 망치도록 허용하시거나 방치하실 리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살겠다고 남이야 망해도 좋다는 그런 심보야 어디서든 용납될 수 없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은 살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일체의 것입니다. 즉 자기 부인과는 반대 개념인 자기중심, 자기 위주, 자기 본위의 개인주의, 이기주의입니다. 이런 것은 인간 세상에서도 누구든 누구에게든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이를 법질서 차원에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가 아니라 철두철미 자기 부인으로 일관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실상 이렇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법칙은 엄밀하고 정확무오해야 합니다. 어중간하고 엉거주춤하는 자세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자기를 위하지 않으려면 철저히 위하지 않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결과가 됩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고로 그렇게 올바른 길을 따라 차후로는 행동하기로 결심하고 그대로 실천하기로 하는 것이 회개이고 그 회개한 대로 열매를 맺으면[눅 3:8] 되는 오직 그것뿐입니다.

부모가 회초리를 들려고 해도 아이가 잘못을 알면 굳이 손대려고 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히 방법이라 할 것도 사실은 없습니다. 상식 차원입니다. 따라서 죽더라도 내가 옳은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믿는 그대로만 나가리라 결심하고 나가면 됩니다. 그 옳음을 어떤 일이 있어도 버리지 않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시험하는 때’에는 그런 영광스러운 몸의 모습이 당분간은 일시 감추어져야[골 3:3]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눈빛에, 눈망울에, 그리고 우리 마음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달고 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꿈꾸고 그 멀지 않아 닥칠 생명의 세계에 대한 넘치는 희망의 별, 나의 영원한 짝이 되시는[육체와 영혼 그리고 몸과 머리 그리고 엄마 품속과 아기와의 관계에서]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반짝거리는 사랑의 별, 장차 영원한 나의 몸[그리스도의 몸 곧 우리 전체의 몸 그래서 나의 몸이라고 넉넉히 말할 수 있는]을 이룰 나의 생명과도 같은 소중한 지체(肢體)들을 찾아 두루 헤매는 반짝거리는 별이 그러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별"을 이야기하니 우리도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낭만적인[현실은 현실로서 환상적인 현실이고 결코 공상적이 아니지만] 생각만 할 것이 아닙니다. 사람 살리고 구원해낸다는 것은 장차 모든 인생들과 영물들을[선하지 않고 의롭지 않고 악하여 자기중심적일 때] 집어 삼킬 마지막 심판의 영원한 고난이 대기 중인 그런 엄청난 현실로부터 구출해내는 것을 말합니다. 결코 안일한 생각으로 노닥거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마 3:7]를 의식하여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진노"[엡 5:6/골 3:6] 그 "진노하심에서 얻는 구원"입니다[롬 5:9].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 하나님의 "장래 노하심에서 건지시는"[살전 1:10] 분이십니다. 단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만 우리 구원을 개념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니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 7:11].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그가 그 칼을 갈으시고 그 활을 이미 당길 채비를 하셨다"[:12] 했고, "투기하시며[jealous] 보복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신다"[나 1:2] 했습니다. 동시에 말하기를 "노하기를 더디하신다"[:3] 했습니다.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신다"[:6] 했습니다. 동시에 말하기를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니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신다"[:7]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인자[goodness, kindness]와 엄위[severity]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롬 11:22]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히 12:29] 했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히 10:31]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라 하면 무조건 우리 위해 목숨까지 바쳐 사랑하신 사랑 일변도로만 생각하는데 성경은 정확히 그 의미를 밝혀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계 6:16,17] 했습니다. 위의 나훔 선지자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양면성입니다. 한 면으로만 생각하면 큰 착오입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섬길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그려놓고 "이것이 하나님"이라 하게 됩니다. 가상(假想)의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패망의 지름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에 대해 잘 교육을 받은 초대교회는 "주님을 경외함[the fear of the Lord]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였다고 했습니다[행 9:31]. 오늘날은 이 "주님을 경외함"이 없어 "배도(背道)"[살후 2:3]의 시대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죽기를 두려워하여 그 때문에 어떤 고난이나 불이익 받는 것을 꺼려하고 악을 짓게 되고 자기 옳다고 믿는 신념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히 2:15]. 자기 신념을 굽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다스리는 이 세상 모든 구조가 그런 식으로 나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이런 특수 구조를 따라, 진심으로 올바른 것이 좋아서 그 올바른 신념대로 나가는 사람과 자기의 욕심을 따라 임시방편으로 선한 체하는 사람들이 또한 골라내지고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했지만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겠다면서도 중간에 여러 가지 유혹이 따를 때 변절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 악한 자들은 아예 처음부터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온 사람들은 진정으로 진리와 올바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스스로 드러내어지도록 그래서 자연적으로 도태되도록 장치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물론 그런 와중에서도 진심으로 회개하여 뉘우치는 사람이 있다면야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도 당연히 한 몫 하는 것이 이 ‘약속’이라는 현실입니다. 애초의 결심대로 악을 미워하고 올바른 것을 좋아하는지, 죽어도 끝까지  한사코 좋아하는지 이로써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증명하는 자에게 그 약속은 더 이상 약속이 되지 않고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을 보게 되고 듣게 되고 만질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 현실로 드러나는 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하는지 어떤지를 보는 때이므로 ‘믿음’의 때로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 2:4]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약속한 상대를 신뢰하는 것도 이 믿음에 속합니다. 약속은 말 그대로 약속입니다. 아직은 현실로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어 이 양심에 비추어 보면 과거 자기가 깨끗했다, 불결하지 않고 누추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입니다. 과거는 그리스도 없이 살던 때이고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때로서 이 둘이 절대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같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은데 이는 그리스도를 폄훼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함이니 알지 못하는데 믿을 수 없고 따라서 구원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로는 구원 받은 것으로 자처하지만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깨끗하지 못함을 뉘우치고 이제부터는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깨끗하게 살기로 작정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마음만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실제 그렇게 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새 생명"[롬 6:4]의 생명력 곧 "권능"[행 1:8]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는 몇 번이나 다짐하지만 그대로 실천해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지만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워하면서 또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완전히 사정이 달라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의미가 되어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고후 5:15].

때문에 보내심을 받아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다”[요 7:18] 하신 것입니다. 즉 죄 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까닭입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죄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하늘의 사람을 내 것으로 소유함에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뉘우치고 또 죄 짓고’ 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주 완전한 "새 사람"[골 3:10/엡 2:15/4:24]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도 함께 죽은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써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시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와 같이 내 생명이 되셔서 내 안에 나와 함께 사시니까 나를 위한 일체의 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친히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또한 능력이 되시는 것입니다. 즉 나를 위해 살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살아 주시니 내가 날 위해 살 필요가 없고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사실은 그가 내 안에 오셔서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심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중, 삼중(三重)으로 그런 능력의 요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나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모든 이웃이 바로 내게 지체 역할을 하므로 모두 나를 위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 진리를 따르는 이들만 그러하나, '이 세상'이라는 주변 상황이 천국과는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는 것이 한 몸 구조에서의 삶의 원리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따라서 나도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고로 내가 그냥 잘못 했다고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구히 다시는 그릇된 길 즉 나 자신을 위하는 믿음 없는 길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며 또한 이것이 방금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실로 천지개벽이 아니라 인간 개벽 즉 새 창조입니다.

어제까지 더럽고 누추하던 내가 오늘 온전히 깨끗해지고 앞으로도 영원히 깨끗해질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하늘 사람을 내 안에 선물로서 즉 내 것, 나의 소유로 모셔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 사람’이라는 뜻은 그 분이 현재는 이상 설명과 같이 하늘에 부득불 계시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분을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내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니 내가 이 분을 믿고 따르기로 작정하여 회개할 때 그렇게 하십니다.

내게 선물로 자신을 주심으로써 이상과 같은 능력이 작동되므로 내가 새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대로 “다시 출생(出生)하는”[요 3:3] 의미입니다. 요즘[과거에도 물론 그러했지만] “환생(還生)한다”는 말이 부쩍 나도는데 그런 환생 따위가 아닙니다. 환생이라는 것은 미신입니다. 실제의 사실이 아닌데도 사실인 것처럼 꾸며 말하는 것을 믿는 것이 모두 미신입니다. 네피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미신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땅의 사람’이 ‘하늘 사람’으로 다시 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시 나느냐, 바로 하늘 사람을 나의 소유로서 영접해 들여 그 분과 내가 하나가 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둘이서 하나가 되면 어떻게 되느냐,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위해 살고 너는 나를 위해 살고, 나는 너만 생각하고 너는 나만을 생각하고 그래서 우리는 둘이면서도 하나다”, 이렇게 됩니다.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 사는 것”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삶의 동반자 관계입니까.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하나 됨입니다.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니 너는 나를 위해 살고 나는 너를 위해 살고 있으므로 우리 둘이는 어디를 가더라도 함께 가고 무엇을 하더라도 함께 하고 어디에 있든지 둘이는 한 자리에 함께 있다” 이렇게 됩니다. “너를 보려면 나를 보라, 나 역시 나를 보려면 너를 보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됩니다. “너는 나의 생명, 나는 너의 생명”, 이렇게 됩니다.

그야말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둘의 하나 된 관계입니다. 흔히 읽는 사랑의 시(詩)가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로 실생활로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경우 이와 같은 아주 절대적으로 친밀한 '둘이 하나되는' 사랑의 관계가 믿는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적용된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사람,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이신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의 생명이시나, 어찌 내가 그리스도께 생명이 되느냐 하면, 사랑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세상[인간]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 외아들까지 주셨다”[요 3:16] 한 대로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자신을 주셨고 당신의 생명 같으신 “외아들”[the only begotten Son-주님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으신 아들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을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친히 만드신 작품이라 해도 그 가치로 따질진대 당연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사랑하시게 되어 마음을 주시게 되면 당신의 전부를 주시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칭하기를 “생명”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만드신 피조물로서의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감히 하나님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사랑하는 자, 사랑을 아는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의 언어(言語)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경고에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그에게 하지 않은 것이 바로 내게 하지 않은 것”[마 7:21]이라 하시고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게 되는 사유가 된다고 하신 뜻입니다.

즉 머리도 자기를 위하고 지체도 자기를 위하는 바로 모두가 자기 자신이라는 의미요 그런 위치인데도 자기 이웃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를 자기와 같은 한 몸의 지체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요 이는 자기도 그가 속한 몸의 지체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함입니다. 그러면 그 머리에도 몸에도 속하지 않으니, 한 몸으로서 생명의 체제가 되어 있는데도 자기 스스로 그 ‘한 몸’ 또는 ‘생명’에 속하지 않음을 입증해 보였으니 그 스스로 선택한 대로 그 결과를 따라 판단하시는 것뿐입니다.

자기 스스로 벌어들인 결과요 재앙이고 화근입니다. 그러므로 갑과 을이 둘이 하나 되면 갑은 항상 을을 위해서만 모든 일을 하게 되고 을도 갑을 위해 그렇게 하게 됩니다. 바늘 가는 곳에 실 가듯이 갑이 있는 곳에 항상 을도 함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의 의지를 그렇게 작동시켜 되는 일입니다. 사랑은 그래서 항상 적극, 능동성을 띠고 주인 의식으로 임한다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둘이 하나되어 있는 공동체 의식인 것입니다. 둘이 하나되어 있으나 반드시 머리와 몸으로 형성되어 있는 주종, 대소 관계로서 이미 설명한 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요 동시에 주인입니다.

§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실 때 어버이의 마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남녀 성(性)은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요즘 또 하나 이단이 생겨 어머니 하나님이라 하는 집단이 있어 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활동이 이러합니다. 세상의 종교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다지도 혼란을 일으키고 어중이떠중이로 이단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런 세상 종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것이므로 자기 것인즉 자기 것을 혼란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세상 종교라고 하는 것은 불교나 천주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른바 "개신교"라고 하는 데에서 그런 이단 사랑이 잡초처럼 무성하도록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만드는 것이니 이로써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와 활동을 그 자체적으로 입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런 혼란은 의도적임이 드러나는 것이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의도로서 곧 하나님의 간명한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혼란시켜 믿지 못하도록 하는 의도(意圖)요 시도(試圖)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홀로 계시다가 그 한 분이 또다른 한 분을 만드시니[낳으시니]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천사도 성별(性別)이 없습니다. 이유는 한 종류의 대표 격으로 만드신 까닭에 하나로서만 충분하고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닮은꼴을 생성할 이유가 없으니 부부로서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뱀이면 뱀, 독수리면 독수리, 사자면 자, 소면 소로서의 그 한 종류의 대표로서 충분한 것입니다[창 2:19].

자식을 낳는 인간만이 그런 구별이 있고 새끼를 퍼뜨리는 동식물에게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자(創造者)는 원래부터 그 피조물에게 어버이 역할이요 바로 그런 위치이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고로 항상 그런 자세로 임하십니다. 인간의 부모 자정(慈情)도 이 하나님의 어버이 특성에서 유래되고 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으므로 사람의 예를 따라 사람처럼 이야기할 때에는, 사람은 누구나 성별이 있고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구별이 있을 수 없으므로 그래서 그냥 편의상 “아버지”와 “아들”로 호칭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도록 되어 있는 창조 당시 처음부터의 구조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 한 몸 체제로 지으셨고 친히 그 모든 피조물의 머리가 되어 계시는 것을 다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 구조를 보면 머리와 몸입니다. 몸에는 팔, 다리, 손 그리고 눈, 귀, 코 등 지체(肢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자기 자신을 위하게 되면 몸의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위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제는 피조물을 만드신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시지 않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영원히 새로 확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기를 위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왜냐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시고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만드신[낳으신] 이상 아버지 친히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아들을 위하시며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만드시기 전 아버지 홀로 계실 때에는 물론 자기를 위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과 둘이서 하나로 존재하시게 되면서 ‘내가 나를 위한다’는 것은 영원히 사라진 것입니다.

언제나 눈은 눈 구실을 해서 다른 지체에게 눈 역할을 해야 합니다. 눈이 만일 스스로를 위하게 되면 쓸모가 없습니다. 눈이 자기를 위해보았자 눈일 뿐입니다. 그리고 눈 혼자만 있을 때는 그것을 눈이라고 인정해 주지도 않습니다. 반드시 한 몸에 붙어 있어야 하고 눈 구실을 할 때에만 눈으로 대접해 줍니다. 머리도 그렇고 몸도 그렇습니다.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한 몸을 이룬 특징입니다.

왜냐면 혼자로서는 행세할 수 없는 것이 한 몸 구조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오직 머리되시는 조물주의 말씀의 지시를 받아 다른 지체 곧 이웃에게 봉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법질서입니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든 자기중심이 아닌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으로 일관합니다. 항상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를 어기고 도리어 인간 아담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입니다.

아담 역시 그 범죄는 당시 그 어느 피조물에게도 스스로 해를 끼치지 않았으나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 자체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범죄와 똑같은 속성을 지니는 것이니, 그렇게 자기를 위하는 이상 그 자기를 위하는 것은 반드시 멀지 않은 장래에 타 생명체를 해치게 되고 파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말해서 무엇하리요”가 됩니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외의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함입니다. 또 이웃이 자기에게 봉사하는 체제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봉사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눈인데 눈인 자기에게 봉사해보아야 눈으로만 남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은 누구나 하지 않는 법입니다. 왜 자기를 위하지 않느냐 하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아도 머리가 나를 위해 주고 다른 지체가 모두 나를 위해 줍니다. 코는 눈에게 코 노릇을 해 주어 냄새 맡는 일을 해 주고 팔은 눈에게 눈이 할 수 없는 팔 역할을 수행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리하게 억지로 나를 위할 필요도 없고 위해 보아야 아무 의미도 없고 시간 낭비, 힘 낭비만 됩니다. 기계적인 우리의 신체는 이런 한 몸의 일을 차질 없이 잘 해냅니다. 그러나 인생들이 이런 한 몸 구성으로 살려고 하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 하면 하고 말면 말고가 되므로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왜냐면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한 몸이 아니라 사랑으로 한 몸 체제를 이루는데 사랑은 자유가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 각자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자유로써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를 주시고도 그 영원한 운명을 하나님 친히 결정하신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 친히 결정하시려면 처음부터 그런 자유를 주시지 않거나, 자유를 주셨으면 그 영원한 운명을 그 스스로 결정하게 하시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당연히 후자에 속합니다.

이렇게 창조된 영적 존재[인간이든 영물이든]가 한 몸이 아닌 뿔뿔이 흩어져 살게 버려두면 서로 자기가 머리되려는 북새통에 싸움질만 나고 그러다가 서로 마음이 비틀어지게 되면 미워하게 되고 급기야는 서로를 죽이려고 덤비고 결국 공동 파멸에 이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아무 이유 없이 오직 자기보다 아우가 더 나은 대접 받는 것을 보고[실상은 자기가 벌어들인 결과임에도] 시기가 나서 그런 살인 행위를 하게 된 것도 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유 선택에 의해 자기 의지력으로 이런 한 몸의 구조 의식을 가지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식을 간단히 공동체(共同體)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이라 합니다. 인간 사회의 모든 윤리, 도덕, 예의, 공공심(公共心) 등이 모두 이 공동체 의식에 기초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기주의, 개인주의, 이기심 등을 싫어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 것만 챙길 줄 알아 함께 일하고 함께 살고 함께 하여 공동의 번영을 누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것은 누구에게나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아는 것은 양심의 판단으로 아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에 임해서는 자기의 욕심 그대로 행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와 같은 죄인됨을 논하면서 바울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인생들이여,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단죄[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롬 2:1]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목조 건물에서 기둥과 기둥 사이를 건너지르는 나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 6:41]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과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아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위해야 즉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허물이 되고, 인정하더라도 나 자신을 위한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빠져 행동한 것도 뉘우쳐야 마땅하고 이런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는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 회개입니다.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는 일체의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용납되지 못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가장 큰 허물은 하나님께서 머리로 계시는데 하나님을 몰라보고 살았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善)과 옳은 것[義]이라 하는 것은 이와 같이 근본적인 것 즉 하나님을 머리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하고 이러한 인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제 위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몸끼리만 아무리 위하고 있어 보아야 머리의 조화로운 통제를 받고 지시를 받지 않고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머리되신 하나님을 몰라보고 하나님을 찾으려고도 아니한 허물은 큽니다. 알고 그랬든 몰라서 그랬든 허물은 허물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을 뉘우치는 것이 회개입니다. 다시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로 약속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약속하고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리원칙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당신께서 친히 그 원칙을 준수하시는 것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수의 피조물로 구성된 세계이므로 법질서 확립이 가장 우선이고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원리원칙이라는 것은 다름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한 몸 체제에서 각자는 자기를 위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철두철미 그 피조물을 위하시고 자기를 위해 무엇이든 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피조물대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위함으로써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이 법질서 준수입니다. 원리원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죄요 악이요 불의, 불법임을 우리는 아주 우리 뇌리에 새겨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올바르지 못한 것이요 죄가 되고 결국 생명에서 끊어지게 되므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이러한 죄인이었습니다.

첫 사람 곧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인간 아담이 그렇게 해서 범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내 딴에는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 해도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과 같이 ‘죽을 죄인’입니다. 아담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어도 앞서 설명한 대로 모든 죄는 결국 남을 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증명이 가인의 살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죽은 자를 낳는 격이므로 그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나는 인생마다 죽은 자입니다.

따라서 다시 출생해야[요 3:3]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자기 스스로 범죄해서도 죽은 자요[엡 2:1] 육체의 무할례로 또한 죽은 자이니[골 2:13], 육체의 “무할례”라는 것은 신령한 몸이 되어 있지 못함으로 인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특성을 말합니다. 즉 인간이 범하는 죄는 자의적(恣意的, 自意的)인 것이 있고 불가항력적인 것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전자에 속하는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영물들의 범죄였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다시금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면서 이 불가항력적이라는 요소가 추가된 것입니다. 아담의 소생으로서의 모든 인생들은 그러므로 이제는 이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영물들 중의 악령들처럼 자의적으로 즉 고의적으로 짓는 죄 다시 말해 스스로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이 있고, 불가항력적이 요소 즉 육신으로 인하여 범죄하는 경우에 속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구원은 전자가 아닌 후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바로 이 불가항력적인 것을 깨뜨리는 데에 있어, 그래서 성경에 이를 가리켜 “육신”[롬 7:5-8:13] 또는 “사망의 몸”[7:24], 또는 “죄의 몸”[6:6]이라 합니다.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가리켜 “죄의 몸이 멸한다[to be destroyed]”한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을 가리켜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요일 3:8]이라 했습니다. 이는 불가항력적으로 죄를 지어 마귀에게 동조하게 되어 있는 죽은 자로서의 구조를 와해시킨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었으므로, 죄를 지으면 당연히 전자에 속하고 후자에 속하지 않습니다. 후자에 속한다고 하는 이들은 그 말 그대로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즉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를 스스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사람은 전자에 속하므로 다시 말해 자기 스스로가 들어 자기를 망칠 수 있으므로 이에 합당한 표현으로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빌 2:12] 하는 것입니다.

현실과 환상

현실은, 인생에게 내일은 없고 오직 오늘만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오늘’만 아니라 ‘이 시간’만 있다는 것이니 다음 시간 내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에 그렇습니다. 갑자기 죽을 수도 있는 것이 기약 못하는 인생의 수명입니다. 환상은 무엇이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이 있는 것처럼 현실을 착각하고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인데 물론 아무 근거도 없습니다. 확률을 따져 그런 생각도 할만 하나 꼭 그러리라 장담은 할 수 없으니 사람 운명을 요행수에 걸어놓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고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지혜로운 방법은 오늘 이에 대처한다는 것이니 모든 인생의 공통분모가 죽음인즉 오늘 생명을 얻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이러 함에도 마치 죽지 않는 것처럼 환상 속에 사는 것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이니, 왜냐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사람 심리를 그와 같이 황당하게 반(反) 이성적으로 작용하도록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니라면 그 정도로까지 환상에 빠져 지낼 인간 이성(理性)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지는 않은 까닭입니다. 이 말은, 이런 황당한 일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탓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그런 조종에 피동적으로 움직인 책임이 있음을 뜻합니다. 스스로 이에 맞서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선 먹기 곶감이 달다고 마음들이 안일 속에 빠져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니 말하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합작(合作)이므로 인생에게도 당연히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두 손바닥이 마주 쳐야 소리가 나지, 나머지 손이 응하지 않으면 한 손 가지고는 아무리 용을 써도 소리는 울리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을 거부하면 되는데 거기에 동조하는 탓입니다. 이는 무슨 불가항력의 것도 아니고 자기의 자유 의지에 달린 문제로서 이 자유만은 절대적인 독자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육신"[롬 7:14-8:13]은 다릅니다. 이는 한마디로 불가항력입니다. 고로 이 육신은 죽어야 그래서 그 쇠사슬을 끊지 않고는 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음만이 끊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니 곧 나와 함께 죽으심으로써 이 사슬을 끊게 하신 것입니다.

이 ‘불가항력’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시고 해방시키기 위함이셨습니다. 다시 말해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심에 있으니 그래서 “다시 난다”[to be born again-요 3:3]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런 불가항력적 요소는 제거되었으므로 오직 남아 있는 것은 자의적으로 짓는 죄입니다. 다시 말해 영물로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그리고 영적 존재로서의 아담이 범죄하던 그 때처럼 우리도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는 제 스스로 죄를 택함으로써 짓는 것인지라 따라서 이제는 심판이 가능하게 됩니다[행 17:31]. 이유는 내 스스로 만들어낸 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그 죄의 대가로서 현재와 같은 인생의 죽음이 왔고[롬 5:12,15]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 범죄로 영원한 죽음[멸망]을 자취한 것이니 바로 그와 같은 상태로 현재 우리가 복구되어 있는 관계로 비로소 심판에 해당되니 심판이 가능하게 된 까닭입니다. 따라서 이전에는 회개하라 하실 수도 없고 심판도 물론 없었습니다[행 17:30,31].

오직 오실 분 그리스도의 때만 기다렸던 것인데 이제 오셨으니 회개하라 명령하실 수가 있게 되고 심판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30]. 다시 말해 불가항력으로 지을 수밖에 없던 죄 때문에 회개가 불가능했고 심판도 따라서 불가능했는데 이제는 그 불가능했던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이제부터 죄를 지을 때에는 자의적으로 짓는 것 즉 고의적으로 짓는 고범죄(故犯罪-히 10:26)에 해당되므로 당연히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마 1:21]. 구원의 의미를 명백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죽음[멸망]’으로부터의 구원도 아니고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과거 지은 죄로 인한 죽음의 대가로부터 구원되고[히 9:15] 동시에 불가항력적으로 죄 짓게 만든 여건으로부터의 자유해방입니다[롬 8:2]. 물론 당연히 이제는 영생입니다. 이제 영생하는 자로서, 자기 스스로 범죄하면 죽음을 자초(自招)하는 것이므로 그래서 심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자초한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으로 끌려 다녔기 때문에 심판이 불가능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그 자초한 그대로 상응하는 결과를 거둠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도 범죄하면 죽음을 자초하는 결과가 됨은 당연합니다. 때문에 “거하든지[살든지] 떠나든지[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쓴다” 하였고, 그 이유로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되어 있다 하였고, “그런즉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한 것입니다.

때문에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보응하신다 하였고 재차 강조하기를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롬 2:7,10] 하였으며, “자기중심이 되어[‘당을 지어’라는 우리말 번역은 오역]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 하였고 다시 강조하여,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다”[:8,9]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를 믿고 아니 믿고에 관한 언급은 일절 없습니다. 왜냐면 선을 행하는 것은 앞의 설명대로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가능한 일이요 믿지 않으면 불가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믿지 않고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가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 선을 행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요 3:18]. 고로 성경에서 “선을 행하라, 악을 행하지 말라” 할 때는 그리스도의 구원으로써 이제는 선을 행할 수 있고 악을 멀리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기준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면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고 구원을 찾으면[단 진심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못할 때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지라 그런 사람에게는 진리를 나타내 주시지 않으므로] 고넬료처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정으로 찾는다는 것은 단지 영생만을 욕심 내어 찾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영생하기를 바랄 때에 그런 의미가 해당됩니다.

왜냐면 아담처럼 혹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다 해도 범죄하면 그 구원이 무의미한 것이 되므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선을 행할 마음이 없으므로 즉 “불의를 좋아하기”[살후 2:12] 때문에 그리스도를 찾지 않았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불신자도 심판대에 이르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어도 ‘선을 행하지 않았다’ 또는 ‘악을 행했다’는 죄목으로 심판에 이릅니다. 선을 행하고 싶어야 행하는 것이고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니 그 책임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말하자면 선을 행했다는 것은 선을 사랑하고 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요, 죄를 지었다는 것은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니 결과보다 동기를 중시하는 것으로서 이는 당연한 결론입니다. 동기만 올바르면 얼마든지 선을 행함이 가능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하셨습니다.

그 이유로서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탓이라 하셨으며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한다”[요 3:18-20] 하신 것입니다. 곧장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국사증’쯤으로 구원을 오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것처럼 ‘자유해방’인 것입니다. "육신"으로 인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노예가 되었던 상태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천국에 곧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 바울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을 우리가 믿고 세례 받고 구원 얻은 사실에 비유했던 것입니다[고전 10:1-4]. 이는 스데반도 성령 충만으로 “광야교회”[행 7:38]]라 말함으로써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전 10:5]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 받고 성령의 선물을 다 받은 다음에도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지 않음으로써 절대 다수가 광야[이 세상을 상징]에서 멸망을 받아 가나안 땅[천국을 가리킴]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경고를 “선악(善惡) 간에 행한 일을 따라 심판을 받는다” 한 다음에 곧 이어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이 단지 자유 해방에만 그치고 영생과는 무관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다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들 60만 장정 중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 두 사람도 모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이집트에서 탈출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차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머지 60만도 여호수아나 갈렙처럼 이집트 탈출에서 충분히 확증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고 믿음으로 나갔다면 절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중도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스스로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만든 결과요 비극입니다. 이집트에서 자유 해방되었으니 그 발걸음은 이제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행보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고 있으니 생명[영생]이 있는 당당히 영생하는 자입니다.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이나 모두 거룩한 천사들처럼 영생하는 자들로 창조된 것과 같습니다. 그들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니 이 사실만 해도 얼마나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떨리는 일입니까.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아 성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계시로써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눅 10:21,22/고전 2:9/요 6:44,45,65/고전 2:13,14/마 16:17]. 여기서 ‘의[올바른 것]’ 또는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함이니 지금까지 설명한 한 몸 구조에서 머리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고 같은 지체로서의 이웃들을 위하는 것을 의미함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 사는 법에 대해 동조하지 않고 스스로 암적 존재로 행세하는 이들은 걸려내지 않으면 전체가 파탄이 나고 위해(危害)를 입게 되는 것이므로 부득이한 조처로서 생명으로부터 격리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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