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4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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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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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성과 양면성

"그리스도께서 지켜 주신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켜 주실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아담도 “지켜 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지켜 주셨을” 것입니다. 범죄의 마음을 먹을 때마다 간섭하시고 강제하시면 “이런 범죄의 마음을 먹고는 도저히 배겨 나지 못할 것 같구나“ 하고 애당초 범죄는 생각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아니하신 것이 아니라 못하신 것입니다.

강제 간섭하지 않으시려고 자유를 주셨는데 이에 반하여 강제나 간섭을 하시면 처음 것을 나중 것으로 변경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앞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은 우리 자신이 우리를 지킬 때에 한해서만 베푸시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입니다.

단 우리가 스스로 지키겠다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지키게 되어 있는 것이니, 지키려고 하는 나의 의지에 맞추어 실질적으로 지킬 수 있게 해 주시는 능력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요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입니다. 우리가 구원되지 않았으면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순종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을 밝혀 주는 것이 바울 사도의 "육신"[롬 7:5-8:13] 해설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을 강조한다든가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 자체가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아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아담 당시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신 것을 ‘그리스도’라고 해서 이를 ‘구실’로 삼아 하실 리 만무하다는 것을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상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임을 하나님 친히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렇게 억지로 강제로 죄 짓지 않도록 막아보아야 결국 어느 시점에 가서는 반드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억지로 하는 것 혹은 억지로 막는 것의 무의미입니다. 소용 없는 일을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때문에 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아니하는 것이 자유의 의미입니다. 악을 좋아 하든 선을 좋아 하든 자기 좋아 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무리하게 억지로 하게 한다고 해서 혹은 막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기계적 생명에 한정됩니다.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를 상대로 해서 강제로 막으면 어느 때든 반드시 걷잡을 수 없이 분출하게 마련입니다.

막으면 막을수록 그 분출하려는 욕구는 강해져서 나중에는 그 누구도 막지 못하게 됩니다. 인간을 아주 기계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그런즉 두렵고 떠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누구도 아담처럼 되지 않는다는 장담을 못한다는 것이고 둘째, 아담이 범죄할 때 하나님께서 강제로 막으실 수 없었다는 것, 이 둘입니다. 물론 그동안 끊임없이 경고에 경고를 거듭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작 고비에 이르러 결정적 순간에 이를 때 강제로 막으시는 일만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도 천사들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하는 동안은 자리를 떠나 있다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을 끝내고 물러간 다음에야 나타나 주님[사람의 대표이시므로 이는 모든 사람에게 적응됨]께 수종 들었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꺼려해서 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 자율성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어서는 안되고 오직 각자 스스로 결정하도록 함입니다. 모세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던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께서 참고 참으셨으나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가서도 여전히 불복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붙드시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이룰 수 있음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기쁨을 항상 누리라는 뜻에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한 것입니다. “두렵고 떨라”[2:12]는 경고를 하고 있는 같은 편지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 기쁨과 평안이 주님의 뜻을 행하여 순종하게 하고 스스로의 구원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따분하다고 느끼게 되어 세상 낙으로 쏠릴 것입니다.

상대적이니 물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기쁨이 없으면 기쁨이 있는 쪽을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일하는 때에 일하며 수고하고 있고, 동시에 시험의 때이기도 하지만, 영생을 받아 현재 그 영생을 누리며[왜냐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써 일하는 보람과 기쁨을 누리듯이] 그 누리는 가운데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니 그렇지 않다면야 어째서 우리가 구원 받았다 할 것입니까.

영생의 낙을 현재 누리지는 않으나 아주 가까운 장래 기대하고 있고 생명의 원동력이신 주님과의 사랑 가운데 있으므로 그 사랑의 기쁨과 평안은 넘치도록 현재로 흘러 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친히 십자가로 나아가시고 있는 길목에서 낙담한 제자들에게 오히려 내 평안과 기쁨을 준다 하신 그대로입니다[요 14:27/15:11/16:33].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과 평안이 없으면 세상 것을 기웃거리게 됩니다.

산 자는 살아 있는 기쁨과 평안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이 시험의 세상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고난 중에 있어도 구원 받아 살아 있다는 진실과 현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매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경고 아닌 경고를 성경은 하고 있습니다. 경고한다고 해서 억지로 없는 기쁨을 스스로 자아낼 수는 없습니다. 얼마든지 항상 기뻐할 수 있기 때문에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니 믿음이 없으면 이런 기쁨과 감사가 생겨날 리 없습니다. 이 생명의 기쁨과 평안이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됨을 항상 명심하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십자가 고난 길에 들어서시면서도 "나의 평안과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요 14:27/15:11/16:33] 하시면서 주님의 고난에 대한 예고를 듣고 낙심 중의 제자들을 도리어 위로하실 정도였음을 우리는 마음 깊이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위의 것을 생각하고 항상 위의 것을 찾는 우리입니다[골 3:1-10]. 그러므로 구원 얻어 그 구원 얻은 기쁨에 젖어 있는 것도 자연스럽고, 범죄함으로써 아담처럼 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자신을 망칠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즉 기뻐하는 것은 기뻐하는 것이고 두려워하고 떠는 것은 또 그대로 두려워하고 떠는 것입니다. 둘은 모순되지도 않고 얼마든지 조화가 됩니다.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구원 받은 기쁨과 평안도 현실이고 시험을 받아 넘어지는 것도 현실이니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고전 10:12] 것도 현실입니다. 부디 조심할 것은, 되먹지도 않은 선입관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다 하면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어설픈 해석을 하여 자멸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경계할 일입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미끼

미끼는 낚시 끝에 꿰어 물리는 물고기의 밥을 말하는데 주로 지렁이입니다. 또는 사람이나 동물을 꾀어 이끄는 물건이나 수단을 말하는데 예를 들어 돈을 미끼로 해서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그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미끼로 가득합니다. 미끼를 물릴 때는 그 고기가 좋아 그 고기를 사랑해서 그 고기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하는 짓은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그 물고기를 죽여 자기 입맛 채우고 자기 배 채우기 위함이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바로 그러합니다.

“이 멍텅구리 물고기들아, 너희들이 좋아서 인간들이 밥 주는지 아니?” 하지 말고, 바로 우리 자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그렇게 농락을 당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신(神)으로서 인간들을 지배하고 있는지라 현실적으로 이 세상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영역입니다. 고로 매혹적이어서 마음 끌리는 것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미끼 아닌 것이 없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쓰고 아린 것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미끼 삼을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쓰지 않은 것 즉 달고 혀를 감치고 드는 알싸한 맛은 모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난 것임을 알면 그것도 지혜입니다.

이 세상은 죽음인데 이 죽음이라는 엄연한 현실의 상식대로 하면 웃을 일이 없고 울 것뿐입니다. 부유하여 살기 좋다고 한다면 한마디로 어리석음입니다[눅 12:20]. 죽음을 앞두고서 희희낙락하니 “미친 마음”[전 9:3]으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렇게 만드니 소름 끼치는 일입니다. 지금 웃는 자 화가 있고 지금 우는 자 복이 있다 하셨으니 다가오는 영원한 죽음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정작 정상입니다. 지식이 없기 때문에 비정상이 됩니다.

정상 상태라야 희망이 있는데, 미친 사람에게 희망이 있을 수 없고 먼저 그 미친 병부터 고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부유한 자도 화가 있다 하셨으니 위로를 이미 다 받아 버렸으므로 향후 다시는 위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유한 자도 이제 그리스도를 믿어 진리 가운데 있으면 스스로 가난하게 될 수 있으니 이렇게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 했습니다[약 1:10]. 고로 우리의 현실이 죽음인 줄 알고 이 질서를 따르는 자 복이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그 지혜로 그는 자기 생명을 건질 것입니다.

죽음의 세계라 이 세상에 생명의 낙이 있을 까닭이 없는데도 생명의 낙이라고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는 무조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미끼인 줄 제대로 바로 파악하는 까닭입니다. 예를 들어 이성간의 사랑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낙(樂)은 반드시 출산의 고통과 식구 부양의 고통과 그 외 각종 고통이 겸해지고 포개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균치를 내어보면 아무 것도 낙이 없다는 답밖에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철저히 상쇄되기 때문입니다[전 12:1]. 이 세상은 죽음의 질서만이 통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주님께서는 사람이십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시고 어떤 면에서 사람이신가 하는 것을 성경을 읽는 중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왜냐면 주님께서는 나와 하나 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나 자신을 알아야 하는 것과 같은 필수적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내가 원하는 대로 여러 조각을 내어-그것이 만 조각, 십만 조각, 백만 조각이 되든 간에-내가 좋아 하는 사람에게 하나씩 선물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조각들이 나와 똑같은 하나도 다름없는 ‘나’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나의 육신과 영혼이 고스란히 그와 같이 그 각 사람에게 분배된다고 생각해봅시다.

물론 나는 그렇게 할 수 없고 인간은 누구나 그런 일이 불가능하니 이것이 육체로서의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 현재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영원히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버지 또한 아들과 함께 똑같이 내 안에 함께 계십니다[요이 1:9]. 다시 말해 주님의 모습이 곧 아버지의 모습이시니[요 14:9] 바로 이것이 성령으로 우리 각자 안에 임하여 계시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계신다고 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 모습[형상]으로 계십니다.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형상”[고후 4:4]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과 내가 합하여 한 영이어서[고전 6:17]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엄연히 아버지 친히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또한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육신으로 된 부친의 육체를 물려받으니 내가 사람으로서의 부친의 씨가 됩니다. 육체 조성은 모친이 분담해 있는 몫이나 애초 여자가 남자[아담]에게서 났으므로 여자의 육체는 남자의 몸을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친의 육체를 물려받는다고 말합니다. 같은 이치로 하나님의 영을 ‘물려받으므로’ “하나님의 씨”가 우리 안에 계신다 하는 것입니다[요일 3:9]. 그러나 영이시므로 육체와 같은 물질이 아니십니다. 이 점만 유의할 일입니다.

정리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여자의 씨"[seed, 우리말 번역은 "후손"-창 3:15]가 되십니다. 적 그리스도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씨"입니다. 우리말 "후손"은 몇 대가 지난 뒤의 자손을 말하는 것이므로 옳은 번역이 아닙니다. 당대의 씨 곧 자식을 말함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여자의 씨"라 하셨지만, 여자의 씨로서는 오직 한 분으로서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여자의 씨가 되시는 것은 여자의 육체를 물려받아 사람되신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씨들은 부친의 씨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모친의 육체를 물려받게 됩니다. 아담의 씨들은 그렇고 네피림은 악령이 인간의 육체[남성]로 스스로를 변환시켜 인간의 여자와 관계할 때 부(父) 역할을 하고 인간 여자는 모(母)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영물들은 능력이 많으므로[벧후 2:11]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는 그런 일은 어림도 없습니다.

거룩한 천사들을 비롯하여 그런 영물들은 창조의 일만은 못하고 이미 창조된 것은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습니다. 그 창조된 과정만 따라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므로 그렇습니다. 우리 같은 육체라도 "복제 인간 운운" 할 정도이니 영물들이야 여부없습니다. 우리 인간을 기준하여 생각하는 버릇 때문에 그들 영물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의아스럽게 생각하나 실제는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래서 이들 네피림은 그들의 부(父)가 악령[영물들은 인간처럼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지 않고 '형상화한 영'이라 할 수 있어 성경은 "영"으로 분류합니다-히 1:14]이므로 그런 '형상화한 영' 곧 악령의 영을 물려받게 됩니다. 물론 육체는 인간 여자의 것을 물려받습니다. 이들은 이중으로 물려받는 것입니다. 반면 아담의 후손들은 모친의 육체를 물려받으나 부친의 영혼은 물려받지 않고 별도로 생성되는데 이는 아담이 애초 육체와 영혼이 따로 조성되었던 것과 같은 과정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영혼이 하나님 친히 숨을 내쉬심으로써 생성된 것처럼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따로따로 조성되고 그리고 영혼은 아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입니다[창 2:7/히 12:9/사 57;16/슥 12:1]. 그러나 네피림은 그들의 부(父)인 악령들의 속성을 받아 그래서 그들의 영혼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로 죽어 영혼만 남게 되면 아담의 씨의 영혼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므로 정처없이 이 세상을 배회하게 됩니다. 이것이 귀신들입니다.

주님은 "더러운 귀신"들이라 하셨는데 그렇게 불법적으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 질서를 따라 났다면 하나님의 작품인데 "더럽다" 하실 리가 없습니다. 또 악령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인생들을 지배하게 됨으로 인하여[이는 아담 스스로 범죄의 결과로 불어들인 화근] 지배권 행사의 범주 내에서였던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 그러한 일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있은 듯합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다"[창 6:4]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짓거리가 방치될 수 있는 성질의 일은 아닙니다. "자기 지위[자리]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유 1:6] 한 대로, 그들은 마지막 심판 후 불 못에 들어가기 전에 그와 같이 현재도 처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떠났다"는 것은 영물로서의 본분과 임무를 버리고 자연계에 속한 인간과 관계함으로써 한계를 넘어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그런 짓을 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는데[창 3:15] 그러면 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처벌을 받지 않았느냐 할 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세상의 지배자로서의 그 위치나 의미가 변경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비를 대신하여 그 자식이 무저갱(無低坑)에 들어가지 않았느냐 하는 그런 관점입니다.

네피림은 자기네 속성이 그러하므로 선한 역할을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무저갱과 같은 곳에 가게 된다면 모든 네피림이 무저갱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소생이 그런 곳에 감으로써 네피림은 여차하면 그런 곳에 가게 된다고 그들 귀신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던 것입니다[눅 8:31]. 그리고 적(敵) 그리스도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소생이라는 것은 "네 후손"[창 3:15]이라 하신 데에서 확인됩니다. 그런데 이 적 그리스도를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계 17:8]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네피림을 생산한 악령들은 그와 같이 응징되었으니 성경은 이 사실을 가리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들[네피림을 생산한 악령들]과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色, 남녀 간의 성적 욕망)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유 1:7] 한 것입니다. "다른 색"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애초의 창조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성적 욕구이니 정상적인 남녀 간의 관계가 아닌 동성끼리의 그런 욕망 충족도 이에 속하여 소돔과 고모라의 범죄가 이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가리켜 "여자의 씨"라 하심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 자신 인간 육체[남성]로 변환하여 부(父) 역할을 함으로써 낳은 자식이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씨"[찬 3:15]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친히 성령으로[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인간 여자의 태(胎)를 거쳐 나오실 때, 당신 스스로 그렇게 해서 여자[그 태의 주인공]의 육체를 물려받은 그 인체(人體)의 영혼이 되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父) 없이 즉 부(父)라는 것이 있어 그로부터 무엇 하나 물려받으심 없이 그 스스로 세상에 오시면서 단지 인간의 육체만 물려받으신 고로 그렇게 육체를 물려준 "여자(母)의 씨"가 되신다는 그 뜻입니다.

왜냐면 모든 인간은 여자의 씨가 아니라 남자의 씨로서 그 부(父)로부터 영혼의 근저(根?·根底)가 되는 것을 물려받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영혼을 받게 되어 영적 존재로서의 한 인간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방법을 따라 네피림도 출생한 것이니, 따라서 악령의 씨들이니 곧 남자[악령들이 남성으로 자신을 변환시켰으므로]의 씨요 "여자의 씨"는 오직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아 자식들을 낳았다"[창 6:2] 한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보고" 그리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인간들처럼 욕정을 이기지 못해 그러했다기보다 자기들도 그런 아름다움 자식들을 생산해내고 싶다는 의욕을 드러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내심으로는 그런 자기 자식들을 많이 생산해내어 인간 세계를 지배하게 함으로써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인간[아담의 씨]들로 하여금 아무쪼록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네피림들은 영물들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담의 씨가 아니므로 얼마든지 소위 "환생', "윤회" 등이 가능하고 따라서 그들로서는 이전의 경우 육체로 살던 때가 "전생"이 되고 이렇게 해서 전생을 되풀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씨들처럼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처음부터 악을 택하고 불의를 좋아했던 악령들의 분신들이므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담의 씨가 아니고 악령들과 같은 속성이므로 사람[여자]의 태에 들어왔다가 그냥 나오기만 하면 되므로 부(父)를 바꾸는 일도 없고 그들의 부[아비]는 원래 애초의 악령 그대로 변함이 없습니다.

단지 여자의 태만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처럼 "여자의 씨"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한번 여자의 씨로서 세상에 오신 후 일단 우리 위해 죽으신 후 부활하시어 영원히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 네피림은 처음의 모(母)로부터 인간의 육체를 물려받아 사람이 된 후로는 그 영혼[악령의 분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모태(母胎)만 번갈아 바꾸어 가며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대리하여 그 소생이 무저갱(無低坑)에 들어갔다 했는데 형벌 차원에서 무저갱에 들어갔는데 어째서 나올 수 있느냐 할 것인 바,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죄가 아니라 그 아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대리한 것이므로 이를 감안하여 잠시 이 한 때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세상에 오래 지체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네피림은 그 아비들 덕에 세상에서 당대의 거인巨人들로서 온갖 호강을 누렸기 때문에, 이 적 그리스도는 이 한번 기회에 소위 하나님으로 자처하면서 그런 영광을 잠시 아주 짧은 기간 내에 누리는 것이 허용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형평 차원에서 그리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네피림이 당대의 거인들이었던 것은 악령들이 직접 관계하여 그렇게 되었고 일단 죽어 귀신으로 떠돌다가 혹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이런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환생" 또는 "윤회") 수가 있어도 이 경우에는 이전처럼 그런 거인의 모양새는 갖추지 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재탕(再湯)이니까 원래의 대단했던 기운은 거의 소멸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유의할 것은, 옛부터 이런 거인들의 실화(實話)가 인간 세계에 알려짐으로서 자기 조상을 신격화하고 미화(美化)하려는 경향이 있어 얼마든지 전설을 만들어 낼 수 있으므로 이는 별도로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소위 난생(卵生) 설화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래서 적 그리스도는 그리고 나서는 곧장 불 못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피조물로서는 가장 먼저 그 곳으로 직행하게 되는 자입니다. 물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적 그리스도를 출현시키는 것은 딴에는 그렇게 하면 성공하리라는 계산이 있어 하는 짓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성공하지 못할 것임을 미리 선언해 두고 있으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생인 적 그리스도가 무저갱에서 나옴으로 인하여 생긴 빈 자리[형벌 받을 자로서의]를 아비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대신 메우게 됩니다.
대신 메운다기보다 그 자리는 원래 자기가 진작 들어가 있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그 소생인 적 그리스도가 대신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역시 한 때 풀려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세상에서 최후발악적인 시도를 해보나 결국 무산되고 영원한 불 못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로써 이 지상 인간 역사의 모든 드라마는 종결되고 새 하늘 새 땅의 시대가 펼쳐집니다. 베드로가 말한 바 "도둑 같이 오는 주님의 날"[벧후 3:10]입니다.

주님의 날도 적 그리스도를 멸하시기 위해 재림하시는 경우와 이 경우와 같이 지금까지의 모든 세상을 종료시키는 주님의 날로 분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는"[:11] 때입니다.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나"[:12] "하나님의 약속대로 의(義)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 드러나게"[:13] 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아담의 씨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아담은 범죄로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아담으로서의 본래 위치를 잃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우리를 모두 아담의 씨라 즉 아담의 아들들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father, 아버지이니 이는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그러함-롬 4:11,16-18]이라 하는 정도로만 그칩니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왕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만일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아담이 당연히 인간 세계의 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나간 과거사일 뿐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당연히 그리스도의 아들들이 아닌가 할 것입니다. 아담은 그 육체를 우리에게 물려주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물려받아 육으로 나는 것과 영[성령]으로 나는 것으로 구분하신 것입니다[요 3:6].

그러나 이 경우 아들께서는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까닭에 아들 혼자 하시는 일도 아니고 이루신 일도 아니어서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함께 하나되시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는 아들께서 만물을 지으셨으나 아버지 친히 아들로 말미암아 만유를 지으셨다 함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의 영을 물려받았으나 동시에 아버지의 영을 함께 물려받은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아들 곧 그리스도이시나 아버지와 또한 엄연히 하나로 계십니다.

그래서 이 경우 당연히 아들의 아들들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들이 우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요일 3:1/요 1:12].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자라면 그 누구든 하나님의 아들되기에 결격 사유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이나, 우리의 경우 "잃어 버린 자를 다시 찾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눅 15:24] 경우이기에 이런 특별한 은혜가 베풀어진 것임이 주님의 탕자(蕩子) 비유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사랑 가운데 주님과 항상 교제의 즐거움을 아는 자가 구원 받은 자입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아들[요 1:18], 곧 엄마 품속에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바로 나의 구원 받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들께서는 나[自己]라는 ‘육체’의 ‘영혼’으로 계심을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께서 내 안에 계셔 그래서 둘이 하나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과, 하나님 친히 그 품속에 나를 안으시고 있어 '아기와 같은 모습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 내가 되어 있는 것과는 느낌에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버지 품속에 계시는"[요 1:18] 주님은 “맏아들”[롬 8:29/히 1:6]이시고 나는 그 “많은 아들”[히 2:10/롬 8:29] 중 하나입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길 때 항상 양손은 정확한 제 위치에 있어야 글자와 문장이 마음 먹은 대로 제대로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정(正) 위치는 영원한 '아기로서의 엄마 품속'입니다. 그래서 '아기와 엄마와의 눈 맞춤'이니 갑과 을 둘이 하나됨의 짝의 원리 곧 양면성의 구조 그대로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과 눈을 맞추고 물 위를 걸을 때에는 주님을 의식하는 것 외에는 전혀 없었습니다[마 14:29-31]. 그러나 그 눈을 떼어 주변의 엄습해 오는 풍랑을 의식했을 때 그 발은 금방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은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둘이 하나됨은 그냥 둘이 하나 같이 움직이는 데에 핵심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작은 자는 무조건 피동적인 자세로서 큰 자를 따라가는 것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 반드시 작은 자는 큰 자를 위해 주동적으로 움직여야 함을 필수 필연으로 하고 있는 것이 그 특색입니다.

그냥 하나로 움직인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작은 자가 주인 의식으로 큰 자를 위해야 큰 자도 비로소 작은 자를 위할 수 있는 그런 구조입니다. 그래서 이를 교제, 교류, 사귐이라 합니다[요일 1:3]. 따라서 이와 같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의지가 항상 그 방향으로 나가도록 부지런히 작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 이를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래서 "내 스스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사랑의 특성상 양편은 섬기는 종이면서 동시에 섬김을 받는 주인으로서, 상대의 섬김을 받기 때문에 주인이 아니라, 섬기되 스스로 주인의식으로 자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도 주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법칙에서 가리키는 '짝의 원리' 그대로이니, 갑과 을이 둘이서 하나를 이룸은 갑은 을을 안고 을은 갑을 업는 모양새로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니 항구적으로 어느 쪽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곧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된 하나이므로 그 둘이 가는 방향도 반드시 한 방향입니다. 즉 갑의 뜻은 을의 뜻이요 을의 뜻이 갑이 뜻이 되어 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입니다. 갑과 을이 두 개의 전연 다른 성질의 상대성(相對性)을 이루고 있으나 한 방향이므로 내용상으로는 동일성(同一性)을 띠게 됩니다. 따라서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나[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고난 받으신 이 세상 삶이셨으니 그래서 "공중의 새는 둥지가 있고 여우는 그 굴이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눅 9:58] 하신 대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 동일한 고난으로 일관되는 삶이어야 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향유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이치입니다.

이렇게 둘이 하나되어 일관성 있게 영원히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도록 사람들을 가르치고 바로 이 원리를 따라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바로 이 뜻을 행하고 이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요 4:34] 우리도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요 20:21,22]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우리 구원의 기본 뜻입니다. 고로 이런 중심에서 벗어나 있을 때 궤도 이탈이 되어 우리는 영원한 우주 미아(迷兒)가 됩니다. 구원과는 무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생만을 얻어 챙긴다는 데에 의미를 두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 가지고는 구원이 되지 않습니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머리의 모든 지시를 기쁨으로 수행하려는 마음이 없이는 구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머리의 지시는 그 몸의 지체로서의 당연히 해야 하는 도리를 말합니다. 즉 자기 부인을 하여 오직 상대를 섬기기 위한 모든 "행함"[약 2:20,26]입니다. 자기 영생만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욕심에 불과한 것으로서 자기중심[self-consciousness]입니다.

마땅히 그리스도 중심,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이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그 '동일성'은 우리가 애초 죽은 자이기 때문에[롬 5:12] 우리와 하나되시는 길은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죽음에 동참하는 길이었고 그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사 53:1-12]. 우리가 가는 것이 죽음의 방향이었으므로 그 죽음의 방향을 함께 가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아들]를 살리심으로써 이제는 죽음의 방향이 아닌 생명 곧 "새 생명"[롬 6:4]의 방향이므로 180도 전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골 1:24]이라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고난이 끝나지 않았음을 명시합니다. 왜냐면 모두가 다 구원이 되어 있으면 고난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나 아직도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고난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들 구원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 아직도 죽음 가운데 있어 구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한 방향으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위치해 있어야 즉 이 세상에서 죽음의 고난 중에 있어야 구원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고로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은 고난 받는 때이지 삶의 낙을 누리는 때가 아닙니다[전 3:1-11,17]. 이 "때"에 순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붙잡혀 십자가 고난의 길로 접어드실 때 말씀하시기를, "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다"[눅 22:53] 하심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호쾌(豪快)한 시원한 청량제 같은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바로 이 사실을 가리켜 "그러나 화 있을 것이다,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릴 것이다.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 것이다"[눅 6:24-25]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는 때이므로[믿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고 구원 받은 다음에는 다른 이들을 위해-히 5:7/눅 19:41/빌 3:18/행 20:31,19/고후 2:4]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으니 너희가 웃을 것"[눅 6:21]이라 하신 것입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음입니다[전 3:4].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요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십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상속 분[몫]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바라리라' 하는 것이요,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니,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이 세상에 있을 때가 그 젊은 때에 해당되는 것]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다. 입을 티끌에 댈지니, 소망이 있을 것이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욕으로 배 불릴 일이다. 이는 주님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다. 주님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다"[애 3:22-33] 함과 같습니다.

§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곧 아들께서도 이 "영원한 아기로서의 아들"이시니 그래서 "아버지 품속에 계신다"[요 1:18] 한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할 때 "거룩하신 아기[Holy Child] 예수님의 이름"[행 4:30]이라 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어찌 "아기"라 할 수 있느냐 하여 "거룩한 종"이라고 우리말 번역도 되어 있고 다른 영역도 그러하나 흠정영역[KJV]의 번역은 "아기"이니 이는 "품속"과도 일치하는 의미입니다.

이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요 14:28] 하심과도 같습니다. 물론 원어로 "아기"를 뜻함도 되고 "종"을 의미하기도 하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을 종[servant]으로 표현한 데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있어도 이제는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혹 그와 같은 표현이 가할지는 모르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실 때도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도 부르실 때에 항상 "아버지"라 하셨으므로 "아들" 외에 다른 별칭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앞에서는 아버지 품속의 '영원하신 아기[아이]'이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우리에게 "영존하시는 아버지[Eternal Father-사 9:6]"가 되십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사람이 되셨으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된 하나님의 아들, 함께 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있는 까닭에 새로이 아버지의 "맏아들"[롬 8:29/히 1:6]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 "아이들[children-요 21:5/막 10:24]"이라 하셨습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부모자식 관계는 갓난 아기로 시작하여 자라나는 과정이 있어 자식도 나중에 장성하면 그 부모와 같이 성인이 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새 창조로 만드신 그 아들들은 영원히 그 품속의 아기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 품속에서의 아기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시편 139편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품속에 안고 그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노래하시며 기뻐하실 것이라"[습 3:17] 하심과 같습니다.

이 역시 품속에 아기를 안고 자장가를 부르며 잠재우는 모습이십니다. "너를 잠잠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은 원어대로 하면 "사랑 가운데 잠잠하신다"는 뜻이니 다시 말해 사랑에 겨운 미소로 품속의 아기를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겨운 감미로운 목소리로 아기를 위한 자장가로 엄마의 아름다운 입술이 이윽고 열려지기 시작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 바로 이 때문에 창조하셨고,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아기로서의 최선의 봉사가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따르는 것에 있음과 같이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러나는 절대적 순종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보내신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으니 죽든지 살든지 그렇게 함에 있습니다[롬 14:7-9/고후 5:15]. 아기[아이]는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금방 울음보를 터뜨립니다.

이는 항상 엄마 안에서의 자기 존재만을 인식한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가리켜 "누구든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마 18:3]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을 배워야 합니다. 갑은 을을 사랑하고 을은 갑을 사랑하는 짝의 개념은 항상 서로를 면대하여 상대만을 보고 상대를 위하여 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평범하지만 영원한 사람 삶의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몸으로서의 삶의 원리를 말하고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삶의 지혜를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들이 [함께] 수고함으로 좋은 응보를 얻을 것이다. 혹시 저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는 것이니 삼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 4:9-12] 함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 의식이 아니라 ‘우리’ 의식, 자기중심이 아니라 머리 중심으로서의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니 곧 머리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삶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일상생활입니다. 이 세상 삶은 자기 혼자로서의 삶이기 때문에 너무나 고달픕니다. 비정상적인 삶을 보내고 있는 까닭입니다. 삶이라기보다 죽음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인생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 산 자가 되어 있는 우리도 "죽은"[골 3:3] 자로서의 시늉이 되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창조하시던 당시의 정상적인 삶의 방법대로 살지 않는데 대한 당연한 보응입니다. 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 든든하고 믿음직한 머리로서의 누군가 존재하면 그 머리 중심으로 살 때 최대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이 이런 이상적인 삶의 총합(總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세운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고 풀무 불에 던져 넣어질 때 왕이 본즉 불에 타 죽지도 않거니와 불 가운데 걸어 다니는 네 사람이 보였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도 주님과 둘이서 동행, 동거, 동역(同役), 동고동락하고 있으니 나 외에 한 사람이 더 존재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새 피조물입니다. 이전에는 이런 모습의 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이런 변화가 감지되지 못하나 귀신들의 눈에는 당장 드러납니다. 60여년 전의 일로 경북 선산의 한 주일학교 학생이 집안에서는 총각 삼촌밖에는 교회 나가는 이가 없는데 하루는 학교 갔다 오다가 노상에서 푸닥거리를 하고 있기에 구경하느라 어른들 틈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무당이 그 소년을 가리키며 “여기 예수 믿는 이가 있어 일이 안된다”고 하더랍니다. 이 말을 듣고 소년은 집에 있는 삼촌에게 부리나케 달려오며 “아제! 나 예수 믿는 거 귀신도 알아봐여!” 하고 기뻐 소리쳤습니다. 그 삼촌이 훗날 이 이야기를 들려 준 것입니다. 우리 모두 곰곰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미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음을 어느 10대 청소년의 편지에서 읽은 일이 있습니다. 믿음이 유달리 강하여 교내에서 전도 그룹을 만들어[당시 우리 나이로 17세] 시간 나는 대로 전도를 하는 학생인데, 한번은 역시 하교 길에 그런 귀신들의 장난질하는 데에 가서 사람들 틈에 끼어 구경하노라니 그 짓거리를 하던 사람[a spiritist]이 갑자기 중단하더니 “여기 이 학생 때문에 일을 못하니 나가 달라” 하더랍니다.

필자의 어머니께서도 한번은 동서 집[필자의 재종숙모님 댁]에 가셨는데 마침 그 집에서 용하다는 점쟁이를 불러 점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방에 들어갔더니 점쟁이가 무척 당황해하므로 동서의 요청으로 다른 방으로 비켜 갔으나 결국 점을 못하고 그 집을 나가더라고 했습니다.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1830-1896)는 귀신을 잘 쫓아낸다고 하여 석승마(席勝魔)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한번은 한 귀신 들린 청년이 교회당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 청년이 석목사를 보고 잠잠하므로 다른 일로 우선 잠시 자리를 떴었는데 마침 그 때 어떤 선교사가 와 있었는데 석목사를 보더니 평소 생활 보조 없이 믿음으로 복음 사업을 하고 있는 석목사에게 개인적으로 거금의 헌금을 하기에 그것을 감사히 받아 넣었습니다. 석목사는 평소의 생활 습관대로 하면 그것을 받기 전에 먼저 주님께 마음 속으로 기도하는 것이었는데 그 때는 기도하기를 잊어 버린 것입니다.
그 때 밖이 소란스러웠습니다. 나가 보니 그 귀신 들린 청년에게 다시 격렬한 발작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청년은 석목사를 보더니 길길이 뛰면서 소리를 벽력 같이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아까는 하늘만큼이나 높더니 지금은 내 발가락 사이의 먼지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석목사는 즉각 깨닫고 급히 내실로 들어가 회개 기도하고[돈을 받을 때 기도로 일단 여쭙지 않고 받아 챙긴 허물-수 9:14] 그 돈을 도로 돌려주고 난 다음 돌아와 그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석목사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석목사 자신이 주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 "떠났다"는 것은 평소에 일일이 주님께 여쭙고 하던 것을 중단한 것을 말합니다. 당시의 그 영적 상태를 석목사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어도 귀신은 민감하게 간파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천만 금 같은 교훈과 생각 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좀체로 얻어 들을 수 없는 진귀한 증언입니다. 믿는 형제들 모두에게 주님은 그와 같이 개별적으로 함께 머리로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형제들이 또 한 자리에 모이면 주님을 머리로 모시고 믿음의 형제들 모두가 한 몸이 되어 있는 교회가 구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20] 하셨고,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참으로 다시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마 18:18,19]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모신 한 가족의 체제입니다. 그렇지 않은 세상 사람은 모두가 다 뿔뿔이 혼자로서의 외톨입니다. 고독한 처량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초 창조하신 대로의 인간이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사람을 대할 때마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고 믿음의 형제들을 이런 안목을 가지고 대할 일입니다. 따라서 나 자신도 그런 측면에서 인식할 일입니다.

주님과 나, 이렇게 하나 된 둘이요 둘이 하나 됨입니다. 이 사실을 이미 성경은 예언해 두고 있었으니, “내가 주 하나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니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한다”[시 16:8]는 말씀인데, 당시 성령 충만했던 베드로가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뵈니 나로 요동치 않게 하시려고 내 우편에 계신다”[행 2:25]고 성령으로 정확하게 그 의미를 지적하여 지금까지 설명한 갑과 을의 둘이 하나 됨의 '동시성(同時性)'을 말한 것입니다.

전자에서는 “내가 주님을 그렇게 모신다”는 뜻이고 후자에서는 “주님 친히 나를 위해 그렇게 내 앞에 계신다”는 의미상의 차이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둘이 하나 되는 관계에서 이런 양면성이 정화한 뜻입니다. 주님 편에서는 나를 위하시고 내 편에서는 주님을 위함입니다. 이 둘이 서로 하나 되는 의미로 항상 나타나는 '양면성'과 '동시성'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것이므로 두루 뜻이 미침을 피력한 것입니다.

즉 주님은 나를 위해 내 우편에 계시고 나는 주님을 위하려고 즉 섬기려고 내 앞에 모십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똑같이 움직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갑은 을을 위하려고 그리고 을은 갑을 위하려는 동시의 움직입니다. 여기에는 똑같이 능동적인 적극성이 요체입니다. 때문에 줌과 동시에 받음입니다. 사랑의 양면성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신다는 말씀을 이 이치로써 이해하게 됩니다.

일방적인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덮어놓고 좋아한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엄연한 법질서가 작용함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사랑은 대칭 원리에서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을 따라 비롯되어진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주님 친히 나를 위하시는 모든 은택을 받으려면 나도 주님을 위하는 사랑의 복종이 동시에 작동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죄 용서하심과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전에 나의 회개가 필수입니다.

이 회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확증된[롬 5:8]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사랑의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앞에서 나는 다시는 하나님의 뜻을 어김으로 하나님을 마음 아프시게 하고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망동을 부리지 않으리라 속으로 다짐함이요 하나님께 약속 드리는 의미입니다. 그런 약속을 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아도 내 스스로 그런 약속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랑의 본성이요 본질입니다.

주님을 위할 때 항상 머리로서 위함이므로 여기에는 내 이웃 즉 나의 지체들을 위함이 함유되어 있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을 위한다는 것은 한 몸의 구조에서 내 이웃을 위한다는 뜻으로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회개를 명하실 때에는[행 17:30] 회개할 수 있는 그래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만반의 조처를 다 취해 주신 다음입니다. 바울은 과거 인간이 회개할 수 없었던 때와 회개할 수 있는 지금의 사정을 ‘한 분 사람’[:31]으로써 그 분깃점이 정해져 있음을 밝히며 복음을 외친 것입니다[:30].

회개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얼마든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심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면야 심판은 있으나 마나 무의미할 뿐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지 여부로써 심판한다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앞잡이 노릇을 하나 그런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오히려 명백히 밝히기를,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고후 5:10]이라 했습니다.

고로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9] 것이라 하였고 이러한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10] 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 하지 않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했으며,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롬 2:6,7] 보답하신다 했습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려 하심”[고후 5:15]이기에 그렇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니 악을 행함이 없고 선을 행함뿐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니 복종뿐입니다.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 곧 사람 살리는 선한 일을 하는 것 외에 달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여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하나 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내가 나를 부인하여 나를 위하지 않는 순간 이미 나는 ‘위해지고 있는’ 것이니 주님께서 나의 삶을 살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성’입니다. 내 스스로 나를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기 시작하면 주님은 더 이상 나를 위하시지 않습니다. 위하실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불가능성이니, 처음부터 믿지 않는 자에게는 이런 불가능성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 3:18]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신다는 그 ‘동시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시나 오직 이 일에서만은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막강하신 능력의 역사가 얼마든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으나 믿지 않기 때문에 도저히 아무 것도 역사하실 수가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막 6:5]. 앞의 주일학교 어린이의 일은 “어린 아이 같이”[막 10:15] 믿은 결과입니다. 누구든지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15]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원불변입니다. 아이 적 일은 그렇지만 어른이 되면 일반적으로 문제가 달라집니다.

대개 어린 아이 적 믿음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교회에 경고하기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림 받은 자”[고후 13:5]라 경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됨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고와 같이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증거는 내 양심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나 자신을 위해 사는가 아니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가를 스스로 살피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고후 5:15/롬 14:7].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나의 것이 되셔서 오직 나를 위하신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믿기 때문에 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곧 자기 부인이니 내게 ‘산다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빌1:21].

우리 중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들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이가 없고 죽는 이가 없다고 확언하고 단정한 대로[롬14:7-9],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예사로 여기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한 그는 믿는 형제가 아니니 이로써 대강 그 믿음 유무를 판단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인지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형제를 판단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형제가 되고 안되는 기본 요건을 말함입니다. 형제가 아닌데도 형제로 여겨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사전 방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일을 자기의 구원 위주로 나가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구원되었다는 사실에만 만족하고 자기 구원만 지키겠다는 생각을 하는 자기중심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구원된 상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실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은 주님의 마음이 되어[한 마음이 되어] 사람 구원하는 일을 하는 중에 더 하려고 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중에 더 당하는 것도 불사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일에서 주인의 마음이 되어 있어, 자기 일을 하는 고로 한정, 한계를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요 정도까지만 해도 충분하다 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종의 마음이니, 주인은 절대로 남과 비교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면 자기의 일이니까 무한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서 나를 주님 곁으로 불러 가 주십시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더 남아 최후의 순간까지 일하기를 바라고 시간과 여력이 미치지 못함을 더없이 안타까이 여기게 됩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주님께서 나로 요동치 않게 하시려고 내 오른 편에 서서 지켜보고 계시는 은혜는 내 스스로 주님을 섬기고자 내 앞에 모시고 있을 때에 한하는 것으로서 그래서 ‘동시성’이라 합니다. 주님과 내가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주님만이 움직이신다고 생각함은 치명적인 착각이 되니 주의를 요합니다. 그것은 구원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항상 능동적이고 적극성을 띠며 주인의식을 발휘하는 것이 그 속성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침입을 당한다 하셨고 쳐서 빼앗는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눅 16:16/마 11:12]. 이런 사랑이 없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 했듯이 구원될 리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 2:9/약 1:12/2:5].

하나님은 머리이신데 머리로써 몸이 유지되고 한 몸으로 유지 존속되는데, 머리를 위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으니 어떻게 지체의 구실, 몸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영생]은 한 몸의 체제로서의 하나 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 구원해 내는 일’ 외에는 이 세상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자(失踪者) 찾고 죽은 아들 살리는 일입니다[눅 15:32]. 이 일에 전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할 일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내 방식으로 일하면 그것은 나를 위하는 것이지 주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니 기필코 기도와 병행해서 하는 것임을 명심할 일입니다. 주님과 항상 둘이 함께 일하기 때문입니다[고후 6:1]. 여호수아의 왼발, 오른발 번갈아 내디딜 때 한 쪽 발은 주님 계시는 자리이니 거룩하므로 네 신발을 벗어라 하신 교훈을 항상 마음에 새길 일입니다[수 5:15].  주님의 일 하는 것을 이 세상 생존의 유일의 의미로 삼는 데에 구원 받은 증거가 있습니다.

이에는 반드시 주님의 의사를 물어 그 인도를 받으며 하는 것이니, 나는 그 종으로서 주인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을 생명으로 삼음입니다. 종이 종 마음대로 주인의 일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이라 부르는 호칭이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라는 뜻으로서 나는 철저히 그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주님께 종이 되어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바로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대하여 친히 그러한 위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다”[눅 22:27] 하심은 세상에 계실 때 즉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 한 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니, 영원히 그러하심을 선언하심입니다. 사랑은 서로 종 노릇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갈 5:13]. 앞에 소개한 석자직 목사도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을 성령으로 배웠기 때문에 매사 매건 주님께 일일이 기도하고 결정한 것입니다. 앞에 소개한 북한의 "21세기 바울 형제“도 마찬가지 자세였습니다.

"너희 중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를 보고 ‘앉아서 먹어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에게 ‘나의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 띠고서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수종 들다가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했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하라”[눅 17:7-10] 하심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되는 말씀을 또한 하셨습니다. 즉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어라.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 것이다”[눅 12:35-37]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다하고 마땅히 취할 자세를 취하는 것이요 주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으로 섬기시는 즉 우리를 위하시는 그 위치를 변하시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임금(王), 이런 주인이라면 목숨을 바쳐 무엇이 아까우리요. 기꺼이 목숨을 바칠 일이 아닙니까. 사랑을 먹고 사랑을 마시고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셔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고전 10:31]. 말에나 일에나 주님의 이름으로 하게 됩니다[골 3:17].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고후 5:15] 이렇게 힘써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끊임없는 고난 중에서도 쉬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살전 2:16-18] 신바람 나게 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고 누구에게든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형제를 대하든 모든 사람을 대하든 항상 선을 따르는”[:14,15]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평안, 기쁨, 선량[자애, goodness], 겸손함[meekness-골 3:12], 온유함[친절, gentleness], 신실함[faithfulness], 오래 참음 그리고 절제[temperance]이니 이런 것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갈 5:22,23].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서 도덕군자이므로 성경은 성인[saints]들이라 한 것입니다. 때문에 당시 초대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은”[행 2:47] 것입니다. 오늘날 “위선자”라고 지탄 받는 것과는 정반대 현상입니다. 그만큼 오늘날 교회는 ‘사이비’라는 뜻입니다. 죄를 지어 여전히 죄인이면서도 구원되는 것을 “은혜”라 곡해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지킴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않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전 7:19] 하였습니다. 할례 말이 왜 나왔느냐 하면 믿는 유대인들 중 율법자주의자들이 그리스도도 믿고 모세의 할례도 받아야 구원된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례 받는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또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구원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 있다는 그 뜻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된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믿는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이고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받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력을 받음입니다. 생명력이라는 것은 이제는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뜻이요 산 자가 되어 있다는 의미이고 영생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영생하는 자는 영생하는 법칙을 따르고 지키는 것이 필수입니다. 자연계에 속한 생명은 자연법칙을 따라야 함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연계에 속한 생명은 대개 자연법칙을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따릅니다. 우리의 신체 조직만 보아도 우리가 직접 의식함이 없이 몸 스스로가 다 알아서 지켜 나갑니다. 즉 우리 스스로 자연법칙을 따르겠다고 그래서 거기 의식적으로 순종하고자 하지 않아도 몸 스스로 순종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은 순수하게 우리의 자유 의지를 따라 순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자연계의 생명[시한부]과 영원한 생명의 차이입니다.

물론 영계(靈界)의 생명체라도 식물과 동물이 또 다릅니다. 식물은 의지 작용이 없지만 동물[영물 즉 천사들이나 악령들]은 있습니다. 자연계의 동물과 식물 차이도 스스로 움직임과 그렇지 않음에 있음과 같습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면에서는 자연계에 속한 동물이나 영계에 속한 동물이나 같습니다. 그래서 영물들은 스스로 움직이되 오직 자기 자유 의지를 따라 스스로 선택해서 움직이는 그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자유 선택에 의해 영물들 중 범죄자가 생겨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같은 악령들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원래 영생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범죄로써 그 자신의 영생을 취소시켜 버린 결과입니다. 아담 역시 영생하는 자로서 창조된 것은 인생의 죽음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성경이 명시하기 때문입니다[롬 5:12].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지만 그러나 어떻게 되었는가. 범죄하니 그 영생이 취소된 것이 아닙니까. 그 스스로 자기의 영생을 말소해 버린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도 새 창조입니다. 영생하는 자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적인 생명이 아니므로 자유 의지를 따라 영생의 법칙을 지키는 경우에 한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아담이 그 법칙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멸망 또는 죽음의 운명을 스스로 만든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으로 전부가 끝난 것이 아니니,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다고 영물들이나 아담이나 무사(無事)한 것이 아니고 생명의 법칙을 지키는지 여부가 남아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의 거룩한 천사들 역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과 같이 그런 시험대에 올려졌지만 생명의 법칙을 지킴으로써 현재의 영광스러운 위치를 보전하게 된 경우입니다. 우리도 생명의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되고 아담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생명의 법칙이 곧 위에 인용한 대로의 "하나님의 계명"인 것입니다. 왜 생명의 법칙이라고 하느냐 하면 영원한 생명의 핵심은 사랑에 있고 사랑은 하나 됨에 있어 모든 피조물이 사랑 가운데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사는 삶의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법질서를 말하고 그 핵심이 자기 부인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으로서 이것이 한 몸 체제에서 모두가 공통으로 지키게 되어 있는 원리원칙입니다. 따라서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으니 곧 우리가 구원된 의미입니다. 이를 어길 때 구원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이 목적에 동의하는 것이 앞의 설명대로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함으로써 한 몸의 기능이 가동되는데 머리든 몸이든 무조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게 되어 있음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몫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자기의 상대가 하게 되어 있는 역할이요 몫입니다. 이것이 각자의 영원한 역할입니다. 그래서 몸은 머리를,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의 각 지체는 머리의 지시를 받아 지체 서로를 위하게 됩니다.

그래서 머리되신 하나님을 위하고 즉 먼저 사랑함이니 그것이 첫째가 되는 계명이고 둘째는 자기 이웃을 위하는 것 즉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마 22:40]이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 즉 아담 때나 그리스도 오신 후나 한결같이 변함없는 생명의 법칙이 이 자기 부인이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면 자기 단 혼자로서의 1입니다. 그러나 내 이웃이 나를 위하게 되면 그 이웃의 숫자가 10000이면 일만 배나 더 잘 위해지고 풍성하게 위해짐을 앞에서도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삶의 최고 지혜라 합니다. 자기의 상대인 머리 또는 자기 이웃이 자기를 위하게 되어 있으니, 이 법칙을 어기는 것 즉 자기를 위하는[고후 5:15] 모든 것이 죄, 악, 불법(不法), 불의(不義)입니다. 생명의 법칙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義]이고 선[좋은 것]인데, 지키지 않고 반대로 나아가 방해가 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므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이 생명의 법칙을 어느 인간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생명의 법칙은 ‘생명이 있는 자’가 원래 지키는 것인데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이므로 생명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구원부터 받는 것이 급선무요 최우선의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은 은혜요 믿음으로 얻는 것으로서 구원부터 얻고 보는 것입니다. 이를 흔히 말하는 대로 ‘공짜’ 개념으로 착각해서는 큰 오산입니다. 생명의 계명을 죽은 자는 지킬 수도 없거니와 지켜도 무용지물이요 허사이니, 왜냐면 지킨다고 해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도 지킬 수 없다는 의미가 되지만 생명력이 있어야 또한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이 있어야 움직일 것이 아닙니까. 이 “지킨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렇습니다. 일단 죽은 자를 벗어나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움직이되 자기를 위해 움직여 죄를 짓느냐, 아니면 머리를 위해 그리고 이웃 지체들을 위해 정상적으로 움직이느냐 여부입니다. 신체 조직에서 세포가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때 우리는 이를 암(癌)이라 합니다.

암은 주변을 온통 암 덩어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당장 제거되어야 마땅하니 내 스스로 회개해야 하고 아니면 강제로 도려냄을 당합니다. 다시 말해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 하는 양자 기로에서 그 바른 길을 택하는 것이니 그래서 선악(善惡)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고 경고한 것입니다[고후 5:10]. 즉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면 악이고 자기를 부인하고 상대[머리 및 머리의 지시를 따라 각 지체들]를 위하는 것이 선입니다. 올바른 일[義]이고 좋은 것[善]입니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해야 영생에 이를”[롬 2:7,10] 수 있음을 성경은 명백히 합니다. 당연히 “악을 행하면” 멸망입니다[:8,9].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하나님의 계명 곧 생명의 법칙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한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가 나올 때마다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상기시키는 대목이 있으니 바울 스스로 증언하기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2,3]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악을 행하면 멸망"[롬 2:8,9]이라 경고한 것은,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릴”[출 32:33] 것을 확언하신 때문입니다. 이는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지우지 않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할 것”[계 3:5]이라 하심과 같습니다. 즉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생명 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져 버린다는 경고입니다.

“이기는 자”[계 2:7,11,17,26/3:5,12,21/21:7]라는 것은 천국은 사람마다 침입하여 들어가는 것이고 쳐서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라고[마 11:12/눅 16:16] 주님께서 말씀하심과 일치합니다. 내가 영생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운명이 내 손 안에 들어있어 내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한번 잘못 먹으면 영원한 멸망이니 어찌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 오늘의 이 세상 시험 무대가 아니리요. 아담도 마음 잘못 먹고 범죄하고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무서운 실례(實例)가 있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나의 영원한 운명이 내 손에 있고 내 마음에 달려 있는 까닭입니다. 때문에 믿어야 구원이요 믿지 않는 한 아무리 크신 하나님의 구원이요 은혜이지만 나와는 전연 무관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내 구원을 이룬다고 해서 내 구원만 의식하고 항상 전전긍긍하는 것과는 전혀 다름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렇게 하면 도리어 멸망에 들어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왜냐면 생명의 법칙 자체가 도무지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데에 있어 자기 부인에 있는 까닭입니다. 즉 머리를 위하고 자기와 함께 된 지체들을 위함에 있어, 자기를 위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을 이루지 못함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을 위하는 것, 자기 구원을 의식하고 자기 구원을 이루려는 생각이 오히려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구원을 이룬다”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쓰고 애써도 자기 구원을 목적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즉 사람들을 건져내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바울의 염원 곧 “내 자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것이 나의 동족의 구원이라” 말할 수 있는 정도라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구원을 보전할 목적으로 전도하고 기도하고 교회 활동하고 선행을 하는 자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는 절대로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과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것과는 하늘 땅 차입니다. 왜냐면 이미 구원을 얻어 놓은 바탕 위에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어느 인간도 자기 구원을 목적하고는 구원을 이룰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구원이 안되는데 어떻게 목적한다는 말입니까. 구원이 이미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구원 받은 행동을 하고 구원 받은 증거를 나타내는 것이 "구원을 이룸"입니다.

씨를 심었으면 싹이 나야 합니다. 씨 자체에는 이미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 싹을 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경우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사랑, 우리의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즉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니 자기 구원은 의식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의식하고[Christ-consciousness]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만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으로서 내가 장차 무엇이 되겠다, 무슨 일을 하겠다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교회에서 가르치고 경고한 것은 각자는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즉 처음 믿게 되었을 때의 그 위치 그대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고전 7:20,21] 함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세상에서 산다는 즉 삶의 낙을 누린다는 개념은 일절 배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살려고 한다면 종으로서 산다는 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인이 될 기회가 오면 얼른 그것을 붙잡아야지 오히려 그 기회를 차버리고 종 그대로 지내면서 주님의 일을 할 때에는, 우리 구원이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주님 친히 밝히신 그 말씀에서 일보도 양보가 있을 수 없다는 엄숙한 사실을 일깨워 줌입니다.

일테면 “내가 대통령이 되어 복음 전도에 이바지하는 구실을 하겠다” 하는 것은 실제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의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되든 무엇이 되든 먼저 기도하고 그리고 이미 나타나 있는 성경의 가르치심에 부합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확고한 바탕 위에서 세워지는 모든 건축물이어야 합니다. 대통령으로 있을 때 믿었으면, 믿었다고 해서 그 대통령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직위에 있으면서 사람 구원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은 후로 즉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새롭게 대통령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은 망상에 흐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종이 되어 믿게 되었으면 종 그대로 지낼 일이지 자유인이 되면 더 잘 주님을 섬기리라 생각함은 자기를 위함이 된다는 그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살기 위함이 아니라 일하기 위함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고로 이 세상의 삶을 사람 삶, 정상적인 삶으로 치부하지를 않습니다.

백안시하고 무시하고 두 푼어치 가치도 인정하지 않으니 완전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 곧 생명을 미워하는[요 12:25] 것이니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습니다. 미워하고 사랑함이 명확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미워해야지 사랑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잃게 된다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누구보다 많은 것을 들었고 보았고 알았습니다. 열두 사도보다 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흉측한 죄를 범했으니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심각한 경고가 됩니다. 돈을 사랑함[요 12:6] 즉 이 세상 살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경고

혹자는 가룟 유다는 택하심을 못받아 그렇다는 무식한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는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했습니까. 물론 유다가 택하심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힘쓰는” 일에서는 택하심을 받고 아니 받고가 아무 상관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택하심을 힘써 굳게 할 바에야 택함 받고 아니 받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意志)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더욱 힘써” 스스로 택하심을 굳게 할 줄을 미리 아심으로써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강조되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더욱 힘써 우리 자신의 택하심을 굳게 하였어도 우리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즉 그렇게 할 줄을 미리 아시고 그렇게 힘쓰는 대로 되도록 미리 조처해 놓으신 그 미리 정하심을 따라 되어진다는 사실이니, 우리가 이에 대하여 자랑할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 점만 강조되는 것입니다. 고로 성경을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내가 택하심을 받았으므로 각별히 “조심하지”[고전 10:12]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인간 구원을 사력을 다해 방해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난 속임수입니다. 영원한 나의 운명이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 나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이 사실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면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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