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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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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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음악에 '록'이나 '뉴에이지' 사용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첫째, 의심 나고 자신 없는 것은 아니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은 평안과 기쁨 그리고 확신입니다. 의심스러운 것을 강행할 때는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내 욕심이 개재됩니다. 사람이 어떤 확신이 있어야 행동에 옮기듯이 하나님의 일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의심이 나면 그 의심이 해소되기까지 기다리며 기도하고 행동에 옮기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좋은 기계장치가 있습니다. 곧 양심이라는 바로미터입니다. 웬지 꺼림칙하게 느껴지면 바로 그것이 정상 작동한다는 뜻인데 거기 순응합시다.

그래서 직진하지 말고 일단 정지를 합시다. 대참사를 빚을 위험이 있습니다. 사탄에게서 나는 것과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의 차이는, 하나님 영광 돌리는 일은 그 중에 단 한가지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것은 열이면 그 중 아홉까지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나머지 하나는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하나'를 보고서 그것이 악한 것이라고 분별하게 됩니다. 열 가지 다 악한 것은 여기서 문제 삼지도 않습니다.

악한 것은 선한 것으로 가장하고 나오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다 그럴 듯한 모습을 띱니다. 그러나 원래가 양의 탈을 쓴 늑대라 이빨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고로 핵심은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 '좋은' 것에 있지 않고 극히 일부분의 그 나머지 단 하나 '나쁜 것'에 있습니다. 그 하나로써, 나머지 아홉의 영향력을 능히 상쇄시키고 무력화시켜 악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로 악하고 속이는 것은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표방하고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 도망치고 따르지 않으니 속여넘길 수 없습니다. 선한 것을 가장하고 나서야 그것이 무해하다고 느껴 사람들이 접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선한 것으로 표방한 것을 가지고 "보라, 좋은 것이 더 많지 않으냐. 조금 있는 나쁜 것은 인간의 일이기에 병가상사라 문제 삼을 것 없다" 하는 생각은 세상에서는 통할 수 있어도 하나님 일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둘째, 교회에서 하는 일이라고 무조건 다 성령의 인도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감안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교회에서 하니 우리 교회도 하겠다, 또는 할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사위가 다 흰 눈에 덮여 있어도 홀로 '독야청청'하는 기백이 그리스도의 사람 개개인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따돌림을 당하더라도 내 신념대로 나가겠다는 지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것은 고집과는 다릅니다.

자기중심으로 나는 것이 고집이니까, '고집'과 '신념이 강한 것'과 구분하기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거짓 선지자들이 있어 교계를 어지럽게 했으니 사탄의 이런 물 타기 작전, 김 빼기 작전은 항상 있는 법입니다. 열두 사도 중에 가룟 유다가 있게 하신 것도 그런 경고가 됩니다. 외부 유명 강사를 초빙한다기에 어느 교회 저녁집회에 갔더니 그 준비 시간이라 하면서 각종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네댓 명의 젊은 남녀가 앞에서 '소리'하는데, 그것도 확성기 장치를 해놓아 어찌나 쩌렁쩌렁하게 울리는지 그 요란하고 시끄럽기가 도를 넘어 귀만 멍멍하고 속만 울렁거리는 것을 참느라 용을 쓰는 통에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사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는 것이 없고 그냥 '소리'였던 것이 기억 납니다.

나이 많은 증거라 한다면 교회가 젊은 사람만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젊건 늙건 사람의 마음은 고요한 바탕에서 추스려집니다. 당장 물러나고 싶으나 강사가 강단에 오르는 시간까지는 참아야 하겠기에 애를 먹었습니다. 불신자라도 왔다면 "이 사람들 모두 실성했나"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을 제대로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상한 집단으로 비쳐지게 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사탄은 교회를 세상의 놀림감이 되게 하는데 필사적입니다. 핍박을 받아 조롱거리되는 것은 쌍수를 들어 감사드릴 일이지만 그런 어쭙잖은 일에 욕을 듣는다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셋째, 세상은 과학 문명은 점점 발달할지 몰라도 정신문화는 반비례해서 악화일로에 있다는 사실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로 옛날 것은 시대에 뒤지고 최근에 나온 것은 무조건 진보 발달한 것이라는 선입견은 십중팔구 위험합니다. 음악 부문도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인성(人性)은 더욱 퇴폐 일로에 접어든다는 것은 예술도 그런 정신문화의 한 편린이니 결코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며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기 십상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사랑, 기쁨, 평안, 오래 참음, 절제, 충성, 온유, 양선, 자비 등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는 정신적 분위기를 자아 내는 음악 선율이 있다고 칩시다. 이런 멜로디를 창출하는 음악 또는 그 음악의 주체가, 동시에 또한 전혀 상반되는 것 즉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리, 투기, 술 취함, 방탕"과 같은, 과격하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것, 성급하고 사나운 것을 촉발시키는 그런 정신적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딱 알맞은 음악을 낼 경우, 세상사에 미숙한 피해자는 이미 그 좋은 측면을 맛보았기 때문에 슬그머니 그 부정적인 측면까지도 긍정적인 시선과 안목으로 대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그 부정적인 면에 친숙해지고 맛들이다보면, 한 잔 술이 두 잔술, 열 잔술로 차츰 불어나 마침내 자기도 모르게 술 고래가 되어 패가망신하듯이, 원래 유혹 많은 세상에 악이 판치는 주위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니, 그래서 좋은 것은 더디 배우고 나쁜 것은 속히 배운다는 말대로 득보다 실이 많다면 바로 그 점을 사탄이 노리는데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술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도 "술 취하지 말라"는 성경의 경고도 있지만, 한 잔 술의 그런 잠재적 위험을 주위 어린[믿음의 측면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걸림 돌이나 되지 않을까 함이니,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하면 나는 평생 고기를 입에 대지 않으리라"는 바울의 본을 따르기 때문임과 같습니다.

또 예를 들어 과거 격렬한 박자의 재즈 풍의 몸을 흔드는 등 광란에 가까웠던 록(rock'n'roll)이었던 만큼 지금 변형이 되었더라도 그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기에 '록'이란 이름 그대로입니다. 세상문화는 마귀가 지휘하는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멸망과 죽음의 오케스트라입니다. 고로 세상 문물을 따라가려고 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원래 우리와는 추구하는 바가 다르므로 그 표현상의 차이도 역력합니다.

물론 무조건 과거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니 과거의 천동설을 버리고 지금은 지동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 가리키시는 의미와 방향만은 진리이므로 세상의 것처럼 진보발전 개혁이란 것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용해야 할 척도[잣대]는 분명합니다. 예술이든 그 무엇이든 그것을 통하여 우리로 보다 더 기도하게 만들고 성경 읽게 만들고 이웃의 영적 상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만들고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게 만드는지 그 여부를 보아 플러스가 되면 좋으려니와 마이너스가 된다면 단연 배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존 의의는 이 세상을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봉사하자는 것이므로, 그것이 우리로 '즐기게 하는 것'이냐, '섬기게 하는 것'이냐를 따져 단순히 즐기는 것이라면 또한 배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는다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요 12:25]. 비록 '록[rock]'이란 이름을 가진 음악이라 해도 이상 지적한 그런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라면 필자부터 먼저 그런 음악을 애호하겠지만, 그러나 그런 효과는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어 나는 것이지, 인위적인 것으로 더구나 세상 불신자의 취향에서 난 창작물로서 나오지는 않는 법이므로 단지 말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단언하거니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그 어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음악이든 그 무엇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은 학동들의 학습력을 증진시킨다고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묵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멜로디의 흐름을 따라 마음도 따라 그 쪽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말씀 묵상에도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가니 통성 기도에 음악을 끼워 넣고 찬양한다는 노래를 부르게 하여 흥을 돋우는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게 행동하는데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현대인으로서 우리가 누리는 이런 갖가지의 것이 없던 고대에도 하나님을 잘만 믿었고 순종의 삶을 살았으니 간단하고 질박하고 검소한 데에서 우리가 바라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현대적인 감각이나 기술이라 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해서는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정교한 아름다움은 이 세상이야 내다 앉으라 할 정도이겠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만은 "어린 아이" 같이 단순한 데에서 그 모든 힘이 생겨나는 것임을 명심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부인이 근간을 이룬 사랑에 있지만 이 세상은 그 중심이 자기 집착에 있기 때문에 자기 영광과 행복과 낙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죽음의 세계이므로 근본부터 다릅니다. 고로 최신 유행을 타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현재 흘러가는 쪽은 바울이 말한바 "멸망의 자식" 출현을 위한 준비 단계입니다. 전자 공학 부문의 눈부신 발달도 인류생활을 향상시키려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세계를 신속히 효과 있게 통치하려는 그 "악한 자"[살후 2:12]의 수단화가 되어가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런 문명의 이기를 좋은 목적에 이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세의 흐름은 그와 같은 성격이 주류가 되어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기만 하면 이런 모든 문명의 이기(利器)는 한낱 노리개에 불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구원 받아 영원세계에서 진짜 사는 것 같이 살게 하심에 있지, 이런 부자유스럽고 어색하기만 한 자연계에 속한 흙의 육체로 구차하게 명맥을 유지하게 하시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세상은 점차 악해만 가고 있으므로(마 24:12) 그런 세상[사탄 마귀가 지배하는]이 배출하는 정신문화 역시 그럴 수밖에 없으니 우리가 취할 바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행 9:31]라는 두 레일 위를 달린 열차인데 오늘날 교회는 전혀 그런 것 없이 외가닥 레일뿐이라 차가 움직일 수 없으니, 흘러가지 않는 고인 웅덩이요 따라서 필연적으로 썩게 마련입니다. 교회가 그러하니 교회 음악이란 것도 바늘 가는데 실 따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음악을 들어보아도 요즈음 시대의 특징인 광란하듯 하는 음조의 소란스러운 반주에 맞추는 목소리에 "할렐루야, 지저스" 등의 낱말이 튀어나오나 그런 말만 나오면 소위 크리스천 음악인 줄 아는데 세상의 경건치 못한 사람들이 그들의 경건치 못한 곡에 기독교 낱말들을 뒤섞었다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은 일부러 그런 일을 함으로써 교회 젊은이들의 정신세계를 혼란시키고 들뜨게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곡은 단순하더라도 가사가 은혜로워야 하는 것이 믿는 사람들의 애창곡이고 또 그 특징입니다. 음악에 대해서 전혀 지식이 없어도 좋습니다. 세상의 최신 유행을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가사가 성경적이라야 합니다.

§  눈물 흘리시는 모습의 하나님

그러므로 한 세상 편하게 보낼 생각을 하지 말고 어찌하든 의롭게 선하게 살리라는 확고한 의지대로 이 세상 한 때로서의 '전생'을 사는 것이라기보다 만들기를, 내 스스로 만들어 가기를 힘쓸 일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 살 만한 미래를 만드는 것도 내게 달렸고 죽지 못해 허덕이는[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 허덕이는 것과 달리] 따라서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가 없는 영원한 고난을 만드는 것도 내게 달린 것입니다.

"전생"이라고 했지만 일반적으로 아는 전생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즉 한 세상 사는 생애로서의 전생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삶 아니면 죽음 둘 중 하나를 내 스스로 택함에서 나타나는 '결과'의 그 '원인'을 만들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말하는 전생과는 같은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르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는 올바르고 선하게 살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구조가 처음부터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즉 부귀 영화를 누리면서 사는 삶의 결과를 만들 만한 원인을 스스로 만드는 일에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이 필수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스스로 복을 짓고 화를 짓는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이 역시 용어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와는 다릅니다. 내 스스로 복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든 화를 주시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초 원인이십니다. 주시되 내가 나를 스스로 만드는 결과를 따라 주시는 원인이 되십니다. 처음 창조에서나 새 창조에서나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합니다.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타난 것으로써 하나님의 이 사랑의 "확증"[롬 5:8/요 15:13/요일 3:16]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 앞에서는 우리가 아무 할 말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이라 할까 합리성이라 할까 그런 것을 입증한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요일 4:8] 동시에 심판하시는 소멸하는 불이십니다[히 12:29]. 극과 극의 대립입니다. 그러나 별개가 아니라 모순되지 않고 하나로서 조화 통일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영생에 이르는 이들이야 더 바랄 것도 말 것도 없지만, 그러나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피조물들은 불쌍하니까 그냥 인멸(湮滅)해 버리시고 그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양면성의 원리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유라는 것 자체가 양면을 내포합니다. 즉 이것 아니면 저것을 필연적으로 하게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양단간으로 결정으로 각자 스스로가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자체가 이런 내용을 처음부터 담고 있으므로 죽음의 멸망을 없애려면 생명도 없어져야 하고 애초의 창조 자체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생각할 때 악인도 일정 기간 형벌을 받는 때를 마치면 학습 효과가 있으므로 단계적으로든 어떤 방법으로든 그 고난에서 풀려 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악을 다시는 행하지 않아도 결국 강제와 간섭이 됩니다. 강제에 의해서 즉 형벌이 두려워서 사랑은 없어도 악을 억지로 짓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될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영물인 사탄도 영원 멸망에 처해지지 않게 하셨을 것이요 아담도 죽지 않게 하시면 될 일입니다.

이미 그런 "학습 효과"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현재의 모든 인생의 죽음이 이미 그런 의미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한번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 흘리시면서 우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곧 아버지의 심정 그대로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으로서도 어찌 하실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믿지 않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나 그래서 우시기까지 하면서도 마치 나약한 인간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우는 것과 같이 그렇게 우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오직 "두려워하고 떠는"[행 5:5,11/행 9:31/롬 11:20-22/고후 5:10,11/7:1,15/골 3:22/엡 6:5/빌 2:12/히 4:1/12:28/딤전 5:20/벧전 1:17/2:17/3:15] 것밖에 없으니 하나님도 어찌 하실 수 없는 '법질서의 엄정한 확립' 차원에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도 어찌 하실 수 없는 법질서-이 사실은 하나님의 위엄이라기보다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를 우리에게 심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나 자신 스스로의 결정에 대한 결과를 두고 우리가 "두렵고 떠는" 의미도 함께 포함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처신이 원인이 되어 영원한 세상에서의 운명을 정한다 하여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고후 5:10] 하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앞으로 본격적으로 영원히 살게 될 그 적부(適否)를 따지게 되는 이 세상 기간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즉 머리를 중심으로 머리와 몸 관계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것이 장차 오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 나라에서 살려면 머리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필수이고 그것을 이 세상에서 우리 스스로가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운명을 여기 이 세상에서 각자 정한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에만 의의가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지로 살던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으니 좋은 데에 들어갔고 이 세상에서 내로라하고 살던 부자는 그 처지가 정반대로 되어 있음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유인이 될 수 있어도 차라리 그 종으로서의 기회를 살려 주변의 종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계기로 삼으라 한 것이 그 때문입니다[고전 7:21].

§  철저히 자주 독립성의 인간으로 만드심

하나님은 종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절대로 원하시지 않습니다. 왜냐면 처음부터 그와 같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애초 만드신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로 말하면 폐물입니다. 폐기물로서 버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종속적으로 피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선과 의에 대하여 그렇다는 것이니 그러므로 선이 아니고 의가 아닌 불법, 불의에 대해서는 적극 능동적으로 나간다는 뜻입니다. "불법을 좋아하기"[살후 2:12] 때문입니다.

따라서 철저한 자주 독립성의 인생들로서 만드시되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은 그 특성을 활용하지 않도록 되어 있고 오직 한 몸으로 하나된 이치에서 머리를 위하고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위해서만 자주 독립적으로 나가는 자유인이 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의존적이고 의타적인 인간은 하나님 눈밖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의 자주 독립성의 인간형으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만드신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나님 친히 우리의 머리터럭 하나도 다 세시고 있고[마 12:9-11] 참새 한 마리도 챙기시어 그 하나라도 뜻이 아니면 죽지 않게 하시기 때문입니다[:10]. 그토록 나 자신보다 더 잘 철저히 나를 위하시는데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한 것입니다[히 11:6].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니 결국 내가 나 자신을 위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자기를 위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공연히 헛수고를 할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사탄의 시험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스스로 나를 위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니니 시장하다고 아무렇게나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는 따위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마 4:3,4].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철저히 나를 위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지 의심하면 안되는 것입니다[:5-7].

성경에 말하는 "육신"[롬 7:14-8:13]이라는 것은 기계적인 생물[자연계에 속함으로써]이 자기 종족 보전을 위해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기계적 성향을 말합니다. 기계적이라는 것은 하나님 친히 그렇게 하도록 처음부터 미리 그런 식으로 움직이도록 장치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생물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유를 주시어 자주 독립성으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생활 양식을 따라 살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는 것이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그 행한 대로 갚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히 11:6]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하나님 믿음을 확고하게 표백하는 것이므로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와는 반대로 자기중심으로 나갈 때는 그런 믿음이 전혀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삶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요 무릇 사는 자는 그 삶의 목표가 있게 마련이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당연히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는 법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므로 오직 머리되시는 주님을 위하고 머리의 지시를 따라서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들을 위함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성경은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로서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니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고후 5:9-11]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는"[고전 7:32] 것입니다.

§  날 위해 죽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데 웬 말이 많소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렇게 나를 위해 죽으셨는가 하는 것을 확인만 하면 되는 일이니 아주 간단합니다. 또 하나님의 실존이 의심스러우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민을 해서라도[그것을 고민이라 하고 또 그것이 정작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과연 존재하시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확인해보면 되는 일입니다. 바로 그런 증명을 위해 삼위일체 원리를 말하는 것이고 3운법칙을 알리고 또한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성경의 자체 증명을 힘써 역설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사람의 선과 악, 의와 불법이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런 확인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이는 곧바로 하나님의 뜻 즉 나를 사랑하시든 말든 그런 것에는 아랑곳 않고 나는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 즉 자기중심으로 일관하고 싶다는 의지 표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악이고 죄이고 불의, 불법인 것입니다. 나 위하여 죽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만 확인되면 나는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내가 "사랑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나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즉 내 목숨을 다 바쳐 사랑하면 되는 것, 이뿐입니다.

이와 같이 너무나 단순하고도 더 없이 명료한 일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입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바쳐 사랑하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고후 5:15/롬 14:7-9]. 그 명령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합리성과 정당성을 얻게 됩니다. 불에라도 뛰어들고 물에라도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는"[마 18:3] 것입니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되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 다반사로 경험하고 있는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인데, 이 자기 부인에 대해 반발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이 자기중심 일변도의 세상에서 자기중심으로만 절여지고 찌들어져 있었던 결과일 뿐입니다. 이제는 그런 것을 다 청산해야 할 때입니다. 바야흐로 탈피를 할 그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계심을 스스로 확인하라는 것이요 스스로 확인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그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니 곧 삼위일체 원리요 이를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면 그 생명의 법질서[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우리의 행동 지침]를 동시에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물과 인생을 창조하셨다면 이런 불행 가운데 허덕이는 인간을 만드실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의 이 불행은 피조물들의 범죄의 결과입니다. 생명의 법질서를 어긴 그 열매입니다. 이런 모든 사실을 밝혀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입니다. 이 성경이 과연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 자체가 그 진실성을 입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범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죽음이 하나님의 진노인 것이고 우리가 지금 이런 멸망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나타내신 것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 그 고통 속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의 부르짖음이셨던 것입니다. 이 진실 앞에서 우리는 머리 숙이고 옷깃을 여미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이런 학습 효과를 통해 우리는 죄의 무서움을 알고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런 뜻도 우리의 구원의 의미에 명백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실 그대로를 전달해 주었다 해도 금방 믿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는 이들의 거룩한 행실을 보고 믿음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아내된 자들이여,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順服, 순순히 잘 복종)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벧전 3:1,2] 함과 같습니다. 우리의 행실은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15] 함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덕에 내가 현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위해 나 때문에 그래서 나의 죄의 대가를 치르심으로써[죄인은 반드시 죽는 것이니까] 죽으신 그가 다시 살아나셔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써 그 때문에 내가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나 역시 그렇게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나 현재 살고 있는 그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살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죽은 후의 다시 살아남'입니다. 주안점은 내가 현재 살았다는 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죽었다는 데에 있다고 해야 옳습니다. 왜냐면 내가 죽지 않았다면 현재 살아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지은 죄에 대하여 죽었을 뿐 아니라 죄의 온상(溫床)이었던 "육신"[롬 7:14-8:13]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갖추어져야 나의 그와 같은 죽음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런 육신으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의 법"[8:2]에서 자유 해방되었다고[:2] 선언한 것입니다. 고로 더 이상 "육신" 타령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범죄하기 전 아담의 상태와 똑같이 된 것이고 범죄하기 전 영물들의 상태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 중 범죄자가 생김으로써 사탄과 같은 악령들이 생기고 그 반대로 거룩한 천사들로 분류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제는 완전히 그들과 똑같은 위치에서 거룩한 사람[聖人]들이 되느냐 아니면 죄인[악인]이 되느냐 하는 갈림길에 있는 것입니다.

성인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면 그것이 '거룩함'입니다.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이 이미 구분되어져 있는 것과 같이 악령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기중심으로서 이미 확정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완전하게 사는 이가 누가 있느냐 할 것입니다. 믿으면 그렇게 됩니다.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이니, 따라서 그런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 이들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 처음 믿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선지자도 되었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등 각종 권능을 행했어도 지금은 주님의 부인하심을 받고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이들은[마 7:21/25:45] 그 스스로는 믿는다고 확신하여 마지않았지만 정작 심판대에 가서는 그 "믿음"이 믿음이 아니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믿음 있다고 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께로부터 배워야 정작 그리스도께 올[요 6:45] 수 있는 일임을 친히 밝히신 그대로입니다. 이 경우 처음 믿음이 믿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변질된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처음부터 설명한 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요 그리고 죽은 다음에 그래서 죄를 짓는 장본이 되어 있던 육신 곧 "죄의 몸"[롬 6:6]이 파괴된 이후에 "새 생명"[:5]의 "새 사람"[골 3:10/엡 2:15/4:24]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인즉 자기중심으로 나가고 이를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판정이 됩니다. 믿음이 없다는 판정을 성경은 악을 행하고 자기중심["당을 짓는다(contentious)"는 우리말 번역과 흠정역(KJV)은 틀린 것-롬 2:7-10]이라고 나타내는 것이요, 믿음이 있고 끝까지 이를 유지한 상태를 가리켜 "참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항상 강조하지만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사는 것이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 친히 본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새로 배워야 합니다[요일 3:16]. 요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진정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16].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 온 사랑은 말하자면 이기주의적인 사랑, 자기중심의 한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문제의 핵심은 일주일 하루만을 안식일로서 지키느냐 아니면 7일 전부를 안식일처럼 여기느냐 또는 세례를 받느냐 아니면 침례를 받느냐 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래서 그 때문에 다투어 헤어지고 갈라서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영원한 기준[14:7-9]을 말한 대로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면 그는 내 형제요 내가 목숨을 바쳐 나 자신처럼 사랑할[요일 3:16] "내 이웃"[마 22:39]입니다.

이 영원한 기준을 더나 소소하게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당을 지어 분파하고 갈라져 나가 형제처럼 여기지 않고 남처럼 여긴다면 그렇게 여기는 그 사람이야말로 그것 하나만 해도 죄인이요 심판의 대상입니다[마 25:45]. 말 한 마디 자기중심으로 해도 심판의 대상입니다. "독사의 후예들이여,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定罪, 斷罪)함을 받을 것"[마 12:34-37]이라 하심과 같습니다.

말 하나를 가지고 그렇게 엄중하게 처벌하시랴 하겠지만 주님 밝히신 대로 말 하나쯤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나의 마음의 상태를 여지없이 여과없이 드러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런 것을 두고 하는 표현이 "빙산 일각"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미세한 일부분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중심 일색임을 스스로 증명하여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 것이다'[골 4:6] 함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의식[self-consciousness]이 아닌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으로 살아야 합니다.

몸과 머리 관계에서 완전한 조화 일치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몸을 오직 머리가 위하고 머리를 오직 몸이 위하는 관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뿐이고 완전한 자기 부인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불완전한 사랑이 있고 불완전한 자기 부인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은 사랑이고 그 하나뿐이고 자기 부인 역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3] 하신 그대로입니다.

아내 남편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어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셔서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 것이라"[엡 5:25-28] 한 것입니다. 이러한 남편에 대하여 아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23,24].

즉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는"[:22] 것입니다. 이는 그 남편이 올바른 판단을 할 때에 한해서 그 말을 절대로 따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남편의 머리됨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비록 아내의 판단에 남편의 생각이 어리석다 여겨지더라도 남편과 함께 그 어리석음에 들어간다는 각오로 즉 한 몸이니까 운명을 같이 한다는 뜻으로 남편의 머리됨을 인정하여 확실하게 나타내게 되면, 남편은 그런 아내의 태도에 감동을 받아 아내를 사랑하게 되고[또는 더욱 사랑하게 되어] 나중에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오히려 남편이 아내의 말을 들을 마음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사랑하게 되면 상대의 뜻을 행하고 그 말을 지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요 14:15,23].

아내가 그 스스로 판단해도 상대[남편]의 말이 틀렸다 싶어도 그가 머리이기 때문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절대적 순종, 완전한 순종 그리고 사랑이요 자기 부인의 의미인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옳다고 여겨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을 위해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또한 아내를 위해 사는 삶인 것이니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몸이라고 일방적으로 머리를 위해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 스스로 몸을 위해 사는 것이니 즉 몸의 뜻을 행하고 그 말대로 하는 것이 둘이 하나됨의 사랑입니다. 다만 우리와 그리스도 즉 하나님과의 관계는 항상 강조하는 것이지만 아기와 엄마와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엄마가 아기를 사랑해도 아기가 요구하는 대로 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아기 자신에게 해로운 줄을 알기 때문에, 엄마는 아기를 어디까지나 위함에 있으므로 아기를 위함에는 아기의 철없는 요구를 들어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그런 아이의 요구를 들어 준다고 해서 아이가 이에 감동을 받아 그 후로는 무조건 엄마의 말을 듣는 그런 연령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아이가 끝까지 고집을 부릴 때에는 회초리밖에는 더 좋은 양약(良藥)이 없습니다. 우리를 징계하심이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회초리를 드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심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음이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로 하여금 곧게 걷게 함으로써 어그러지지 않게 고침을 받아 저는 다리가 되지 않게 하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히 12:6-14] 함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말 그대로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즉 완전하게 사랑하는 것이 자기 부인의 의미입니다. 자기 목숨을 다 바치는 정도이니 당연히 여기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느냐, 나의 사랑의 상대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나와 '한 몸'을 이루는 관계에 있는 것이 그 누구든 나의 상대입니다. 삶은 이 한 몸됨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초 여럿을 만드셨을 때 이 사랑 가운데 삶을 유지하도록 정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그 사랑하는 상대를 오매 불망(寤寐不忘) 생각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자기 자신의 기쁨, 슬픔, 아픔, 만족, 불만족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그러한 모든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법칙 준수 차원입니다. 그래서 아내의 "두려워함과 그 정결한 행위를 봄"으로써 말로는 되지 않던 남편의 구원을 얻게 됨이 그런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다 한 것입니다[벧전 3:1,2].

이 생명의 법칙[혹은 한 몸됨의 둘이 하나되는 사랑의 법칙]을 어김으로써 아담은 죽음에 이르렀고, 영물들은 그 중에서 사탄과 같이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는 악령들과 같은 불상사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아니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너희를 부르신 거룩하신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사람 차별을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15-17] 함도 그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엇이냐, 다시 강조하지만 사랑하는 상대를 항상 생각하고 그를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상대를 의식하는 것이니 우리는 이러한 생명의 법칙을 아는 고로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첫 사랑에서 상대가 항상 눈에 삼삼해지는 것은 본능적으로 그러한 것이고 그러나 이런 것은 그 한 때가 지나면 그렇지도 않는 것이 일반이나 우리는 생명의 법칙 준수 차원에서 그러하므로 항상 의식적으로 그렇게 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행위로 구원 받으려 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를 대하여 그렇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대하여 그렇다는 것은 내 이웃 즉 한 몸을 이루어 있는 믿음의 형제에게 모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계시므로 바로 그 안에 계시어 그와 하나가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를 대하여 그렇게 한다는 의미가 됨은 당연합니다. 때문에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않는 것"이라 하심으로써 영원한 멸망의 선고가 내려지게 됩니다[마 25:45].

이런 선한[좋은] 이야기, 올바른 말을 하는 것뿐인 내용의 성경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나타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배척하고 마다하고 꺼릴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자주 독립성을 간섭하시는 것도 아니고 강제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삶과 생명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강제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초개(草芥, 지푸라기) 같은 생애에 한해서입니다. 이 사실은 3운법칙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죽은 자로서의 삶이므로 죽음인즉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3운법칙으로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애가 생명에 관한 한 아무 가치가 없음이 확증되어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왜냐면 인간에게 정작 생명이라는 것은 영원하지 않고는 의미가 전연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릇 삶이란 것은 이상 설명과 같이 사랑으로 한 몸이 되어 있는 구조가 아니고는 역시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중심의 세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 곧 "죄의 몸"이 깨뜨려져야 자기중심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통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강제력을 휘어잡지 않으면 제일 처음 사람 태어나자 [아담 부부는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죽인 데에서 입증되듯이 무법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죽지 않도록 철통 같이 정해 놓으신 것이 3운법칙입니다. 죽을 때가 되어야 사람에게 해를 입어 죽든지 자연 재해로 죽든지 질병으로 죽든지 죽어 나가도록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 생애를 이 3운법칙으로 분석할 때 정확한 생년월일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어 나와 영원하신 짝이 되어 주셨으니 사람으로서 주님보다 내게 가까운 이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영혼과 몸[육체]의 관계요 머리와 몸의 관계입니다. 말 그대로의 불가분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 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습니다"[시 73:25] 한 것입니다. 때문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이웃이라고 그는 나의 지체일 뿐입니다.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내가 내 이웃을 사랑한다 해도 머리의 지시를 받아 그들을 위하는 것이니 그들 지체된 이들의 뜻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머리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 각 지체의 본분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가리켜, 머리되시는 주님보다 그 누구든 더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사람이 되어 계시니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천하를 통틀어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내 안에 계시니 하나님으로서 사람으로서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그리고 천국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 내게 가까운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신 것은 내가 죄인으로서 죽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다시 살아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니, 그래서 "친히 몸의 구주시라"[엡의 5:23] 했고,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하며 주님은 몸을 위하신다"[고전 6:13]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한 짝을 이루고 있는 둘로서의 갑과 을은, 갑의 모든 것은 을의 것이요 을의 모든 것은 갑의 것입니다. 내 영과 육체는 더 다시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내 것처럼 내 마음대로 내 육체의 욕심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 자신의 임자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뜻에 철저히 복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몸 관계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앞으로는 악을 행하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그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대체적으로 동의하나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내 스스로 나의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한다는 점에서는 화들짝 놀라듯이 하는 이가 많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너무나 성경을 잘못 배워 왔다는 증거입니다. 내 스스로 성경으로 읽음으로써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배워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바로 그 증거인 것입니다.

이 모두 믿지 않음에 속합니다. 이제까지 게으름 그대로 부리면서 공짜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값없이 은혜로 믿기만 하면 되는 선물로서의 구원이라는 사실은 만고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은 자였기 때문에 산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친히 새로 우리를 창조하시어 다시 출생하게 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말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 산 자로 처음 창조되었던 아담처럼 되었다는 그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담 범죄의 결과로 죽은 자로 예외없이 태어났던 것입니다[롬 5:12]. 그래서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이니 즉 산 자가 되고자 함입니다. 따라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습니다. 즉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처럼 우리 역시 되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였던 것을 산 자로 되돌려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지은 것이 죄밖에 없고 당연히 죽는 것밖에 없지만 이렇게 우리를 새로이 산 자로 만드시어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으니 은혜요, 구원 받음 곧 선물이요, 이는 하나님의 이루신 이 새 창조의 일을 믿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상태에 우리도 이제 놓여져 있으니 당연히 아담처럼 범죄하지 말고 혹은 사탄 등 악령들처럼 되지 말고 거룩한 천사들처럼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악령들처럼 영원 멸망에 처해지지 않고 거룩한 천사들처럼 영원한 생명을 그 스스로 유지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뜻이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는 것입니다. 약속 이행이요 곧 순종입니다. 왜냐면 영원한 삶의 구조는 머리와 몸의 관계에 있어 머리도 몸도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머리시요 우리는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의 위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랑을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확증하셨습니다[롬 5:8]. 지금은 우리 차례입니다. 즉 우리 스스로 우리 사랑을 확증할 차례입니다. 이것이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룬다"[빌 2:12]는 의미입니다. 이 사랑의 표현이 우리로서는 "복종하는"[:12]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뿐입니다. 머리가 몸을 사랑하여 오직 몸을 위하니 몸 역시 자기를 사랑 않고 오직 머리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자로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오직 산다는 의미입니다[고후 5:15]. 때문에 이것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임을 분명히 했습니다[롬 14:9/고후 5:15]. 목적을 이루는 것 즉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원인은 그리스도의 구원입니다. 나무를 심은 원인은 열매를 맺도록 함입니다. 열매 맺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분명한 인과 관계입니다. 어려운 것도 이해하기 곤란한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선을 행함이요 의를 행함[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계명[새 계명-요 13:34]과 율법[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고[요일 2:3,4/3:22-24/5:2,3/15:10/요 14:15,21,23/15:10,12/13:34/계 12:17/고전 7:19/롬 13:9], 바로 이것이 "항상 복종하는"[빌 2:12] 것으로 나타남이니 이렇게 복종하기로 힘쓰지 않고서 즉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지 않고서[눅 13:24/행 1:14/2:42,46/23:1/24:16/고전 5:9/15:58/고전 16:10/15:58/롬 14:19/12:12,13/고후 5:9/8:3/살전 4:1,11/골 1:29/4:2/빌 4:3/엡 4:3/6:18/갈 2:10/히 4:11/딛 3:8,14/딤후 2:15/4:2/유 1:3/벧후 1:5,10,15/3:14] 무슨 온전한 순종이 될 것입니까.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지 않는 사실을 가리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므로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할 것이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2-44] 하신 것입니다. 즉 자기 부인 없는 자기중심이 불의, 불법, 죄, 악입니다.

한 몸 구조에 머물지 않고 이기주의로 나가는 것이 "자기중심"[롬 2:8-selfish, self-seeking]입니다. 이런 자기중심의 사람은 필연적으로 걸러지고 솎아지고 추려 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몸 체제에서 암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 주변의 남까지 망가뜨리는 것이니 그 예를 우리는 에덴낙원에서의 아담 부부에 대한 사탄, 아벨에 대한 가인의 행위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가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 즉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을 싫어하고 오직 암적 존재로 남아 있기를 스스로 바라는 연고입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들어온다 한들 결국 도태되게 마련입니다. 자기중심의 이러한 해와 악을 아는 사람이 이 세상의 죽음의 세계임과 자신의 죽은 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배워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입니다[요 6:45].

이 세상은 죽음의 바다(死海)입니다. 물에 빠져 있는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이들은 사람 살려 하고 외치게 됩니다. 그 사실을 몰라서 이토록 태무심입니다. 사람 사는 곳인 양 희희낙락합니다. 세상 천지를 분간 못하는 것입니다. 악령 사탄 곧 이 세상 지배자가 그 눈을 멀게 만들어 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고후 4:4].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이요 죽음의 처지를 깨달은 사람들을 우리가 건져내는 오직 이 일밖에 없고 이 외로 이 세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생각을 단순하게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능력의 원천입니다. 왜냐면 분산되지 않고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나뉘어지는"[고전 7:33] 일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산됨이 없이[without distraction] 주님을 섬기게 하려 함"[:35]이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의이고 선이며, 이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이 악이요 죄, 불법, 불의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이에 대하여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이라[마 12:36] 하시고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35] 하셨으니, 하나님 중심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악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경우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하고 판단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람 사는 데로 알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 무익한 것이요 악한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은 사는 데가 아니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산 자가 되는 곳이며 그 기간이요 산 자가 되면 산 자로서 언행을 하는 것이므로 이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이 악한 것이고 무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독사의 후예들이여,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단죄]함을 받을 것이다"[마 12:34,37] 하셨습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 있지 않은 일체의 것이 악이요 불의, 불법이고 죄입니다. 주님의 경고 말씀대로 반드시 그런 무익한 언행에 대해서 심판 날에 무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죄와 악에는 경중의 차이가 없으니 본질이 같기 때문인데 그것은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사는 곳이 아니요 일하는 곳이며 사람들을 죽음의 바다로부터 구출하는 작업장이라는 의미 이외의 모든 말은 무익한 것입니다.

일하는 것, 그리고 이 사람 건지는 일을 방해하는 악령들[사탄을 위시한]과 전쟁하는 일 외로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중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하나님 중심이 아니므로 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것이라 하면 간단하게만 생각하여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만 한정해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하나님 중심이 되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하고 하나님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는 일체의 것이 악입니다[벧전 4:11].

왜냐면 결국 그런 것이 남을 해치는 것으로 발전되게 되어 있습니다. 머리를 위하지 않는 것이 그 한 몸의 지체를 위할 턱이 없고 결국 모으지 않으면 헤치는 것입니다[눅 11:23]. 초대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쳤고 오늘날은 그 가르침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결국 이런 언행은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게 되고 "종교에 미친 사람"[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가 아닌데도 그렇게 비방하면 비방이 되는 것]으로 외면 당하고 "악하다[좋지 않고 나쁘다]" 하여 버림 받게[눅 6:22]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기 전에 미리부터 그런 것을 알도록 가르치라고 경고하신 것이 망대 비유입니다[눅 14:26-33].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게 되어 있으니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요 15:20].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이 세상이 "죽은 자"[마 8:22]들의 죽음의 세상이요 이 세상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탄이 그 지배자로 있는 그의 나라임을 말씀하시고[요 18:36] 세상이 악하므로 심판 아래 있다고 가르치셨고[7:7] 회개하라 하신 것입니다[마 4:17].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자는 처음부터 소수일 수밖에 없으니 이 구원의 대열에서 탈락하게 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이 성경입니다[눅 13:24]. 기드온 300명 용사가 그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자원하는 자는 3만 2천명이었으나 진정 전투에 참예할 뜻이 있는 이들은 불과 천명도 되지 않은 것입니다[삿 7:7]. "두려워서 떠는 자"[:3]는 처음부터 걸러질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성경은 "두려워하는 자들[the cowardly]"[계 21:8]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을 행하는 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과 동류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사는 곳이 아니라 싸우는 곳이요 일하는 곳임을 초대교회에서는 철저히 가르친 것이 성경상으로 드러납니다. 즉 바울 사도는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더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고전 7:40]. 사람 사는 곳이 이 세상이라면 혼자 살아 무슨 삶의 낙을 누린다는 것입니까. 더욱 확정적으로 말한 것은 종으로 믿게 되었으면 그 이후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어도 이를 사양하고 차라리 종으로 있으면 주변의 같은 처지의 종들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라 한 점입니다[:21].

그러므로 우리는 기드온 300명 용사(勇士, 두려워하는 겁약자[怯弱者]가 아닌-계 21:8)를 찾아야 하고 만들어야 합니다. 그 외에는 실상 의미가 없고 소용도 없습니다. 단 얼마가 되지 않는 극소수일지라도 대장부 같은 사람[고전 10:13]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됩니다. 현실적으로 세상은 전쟁입니다. 진리 안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아래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 이를 단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뿐입니다.

조만간에 이 사실은 현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현실을 일찍부터 깨달아 실상 그대로 알고 있다는 그 차이입니다. 하나님 지으신 만물이 아이 낳는 고통[해산의 고통과 치통은 알아 준다는 고통으로 예로부터 인식되어 오고 있어] 중에 처해 있는 현실입니다[롬 8:22]. 우리말 "탄식"은 바로 이런 진통[birth pangs], 산고(産苦) 속의 신음을 말하는데 이를 나타내지 않으니 잘못된 번역입니다. 세상의 실상이 이런 것입니다. 이를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물에 빠져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무슨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있습니까. 오직 살겠다는 일념밖에 없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왔다갔다 하는 판이니 절박하기만 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워 알아야 그리스도께 나올 수 있다 하신 것입니다[요 6:65]. 세상 사람은 전혀 그런 지식이 없어 그렇지마는 지식이 있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그런 세상 사람과 같이 행동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중심의 세상과 한 동아리가 되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밖에 없으니 세상과 함께 멸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제상에 알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믿고 안믿고 하는 것은 말씀을 듣는 자 개개인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말씀을 사람들의 귀에 일단 고하여 일러 주는 것뿐입니다[마 24:14]. 사실대로 말하면 아비규환의 세상이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아닌 악인이 죽어 들어가는 곳이 그렇다고 하여 그런 표현을 만들어냈으나, 성경은 지금 이 세상부터가 그러함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차이는 지금 이 세상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고후 6:2]이라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마치 사는 것과 같이 여기지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런 구원의 때는 역시 시험의 때이기도 하므로 악한 사람들을 여전히 그 악에 붙들어 매어 두는 함정, 덫, 올가미 역할을 하는 것이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것은 강제, 간섭이 아니니 왜냐면 그 스스로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악인들에게는 이 세상이 고통 일색이고 세상에서의 "위로"[눅 6:24,25/16:25]가 일절 없게 되면 바로 이런 것이 간섭, 강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같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일체의 것에서 탈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리석음을 성경은 누차 경고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을 위한 함정 덫 아니라면 악인들이 왕성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현상이 없어야 하는데 성경도 이런 실상을 인정합니다. 왜냐면 악인 가인이 의인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생 역사 벽두부터 이를 명시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런 실상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배우는 것이요 그렇게 배운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장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데 여기서 무슨 살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까. 오직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데 그리스도께서 무슨 말씀이시든지 따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이어야 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고 물러간 "많은' 제자들은 그런 막다른 골목의 세상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즉 하나님께로부터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시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그 가르침을 싫어하고 거부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배우기만 하면 그대로 알아 들을 사람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외면하시겠습니까. 반면에 베드로처럼 "생명의 말씀이 계신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요 6:68] 한 것은 이 참혹한 진노와 저주의 멸망의 도가니로부터 도무지 피할 출구도 탈출구도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깜깜한 세상이요 죽음 일색, 진노 일색, 저주 일색입니다. 불교에서 악인들이 들어가는 곳이 그러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현재의 모든 인생들이 죽은 자가 아닐 뿐 아니라 죄인이 아니라는 그런 내용으로 자기 자신을 최면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 가지고는 절대로 구원이 안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모든 인생의 실상이 어떠함을 그리스도 친히 십자가에 달리시어 죄인으로서의 형벌을 받으시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신 데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처참하고 무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죄인의 실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들이지만[요일 3:1,2]그런 죄인의 모습으로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 이 세상 살고자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 자체가 구원의 진리도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생명을 영원히 잃는다고[요 12:25]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죄인 또는 악인들의 저주와 진노 속에 있는 실상이지만,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라 하는 것뿐입니다. 무저갱(無低坑, bottomless pit, abyss)을 범죄 타락한 그룹[cherub] 아폴룐[Apollyon-계 9:11]이 관장하고 거기 수용되어 있는 자들은 범죄한 천사들[유 1:6] 또는 네피림[눅 9:31/계 11:7]인 것과 같이, 이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것으로 대비대비(對比)된다 하겠습니다.

아폴룐을 가리켜 영역은 "angel[천사]"라 했는데 우리말 번역처럼 하나님 부리시는 "사자(使者)"라 번역함이 옳습니다. 악령이라고 해서 하나님 아래에 있어 하나님이 부리시지 않는 영이 없습니다.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과의 차이는 전자는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자진 자발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 임무를 수행함이고 후자는 그런 사랑의 마음은 없이 단지 시키니까 부득불 행하는 그런 차이입니다. "천사[angel]"라는 말도 원래는 "사자"입니다. 즉 하나님의 부리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  소위 외경으로 되어 있는 에녹서에 보면 사람이 하늘에 올라간[승천한] 에녹에게 무엇을 구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천사들에게 하나님께 대신 구해 주기를 구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인위적인 것이고 사람이 지어낸 거짓말이라는 증거입니다. 이를 근거로 해서 지금도 유력한 세계 종교에서는 소위 "성자"들에게 또는 마리아에게 하나님께 대신 구해 주기를 구하는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천사든 사람[엘리야처럼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간 에녹]이든 하나님께 인간을 대신해서 무엇을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필요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직접 상대하십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그러한 하나님 역할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시는 것은 사실이나, 천사가 감히 무슨 제사장이나 된 것처럼 인간을 위해 대신해서 무엇을 청원하는 것은 황당한 미신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그 안에서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의 제사장들]께서 오시기 전에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레위 지파 사람들 중에서 제사장으로 정한 것 외에는 유일하게 한 사람의 제사장이 있으니 그는 멜기세덱입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내용으로 보면 멜기세덱은 아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물론 죄인으로서 그래서 죽은 자이기는 하나 우리와는 다른 것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은 자"[마 8:22]로 출생하는 것이지만, 아담은 처음에는 죽은 자가 아니었고 영생하는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영생하는 자로서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다가 결국 죽었으니 그 죄 값은 지불한 셈입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그가 살아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장차 오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날 수 있는 토대 혹은 근거는 확실한 것입니다. 왜냐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이나 엘이야나 모두 그리스도의 구속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나 에녹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살지 못하니 그들은 원래부터 죽은 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나, 앞의 지적처럼 처음에는 죄인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니었던 아담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처음부터 신령한 자로 있다가 범죄하여 우리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죽었기 때문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계속 살아 있을 때에는 신령한 몸으로 회복되어 있는 상태로서 이 자연법칙을 초월해 있었음은 명백합니다. 그래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존속한다"[히 7:3] 한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한 것입니다. 제사장은 천사가 되는 법이 없고 오직 사람이어야 합니다.

"시작한 날이 없다"는 것은 이 지상 세계가 아닌 영계인 에덴낙원에서 지내다가 거기로부터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비로소 한 살, 두 살 하고 세어갔던 것이므로 이 세상을 기준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가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으로 호칭되는 것은 이제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아담의 역할을 하시기 시작하는 그리스도의 시대를 앞두고 있으므로 그런 아담의 이름으로는 더 이상 불려지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둘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이루는 것[to work out]

우리가 구원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죽은 자"[마 8:22]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도록 산 자부터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 몫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육신에게 포로되어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저지르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믿음을 의로 정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우리를 이같이 새로 창조하시고 다시 출생하게 하시나 오직 그 하신 일[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믿으면 우리가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것이기에 바로 그런 동일한 믿음의 속성이라는 점에서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나 오신 후나 차이가 없고 같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은 절대적인 복종을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루실 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지만 그래서 그 믿음을 근거로 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그 믿음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는 그 독자 이삭을 아무 이의없이 제단에 바치려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복종으로써 나타내었던 것입니다[히 11:17].

그러므로 무릇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었다고 자처하는 이는 모름지기 아브라함과 같은 절대 순종 곧 하나님의 계명["새 계명"-요 13:34]과 율법["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에 대한 절대 순종을 수반하는 믿음이지 않으면 '구원 받는 믿음'일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들 "죽은 자"를 살려 주는 일을 하나님 친히 "이루심'인데 이는 반드시 나와 같은 사람이 되어 주시어 내가 죽을 그 죽음을 죽으시고[그러나 이를 "대신 죽음"이라고 잘못 인식해해서는 안되는 것]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다시 살아나시는 것으로서 끝난 것이 아니고 다시 살아나심도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심이니 이제는 온전히 자신을 나 위해 바치신 터라 그렇게 사람되신 순간부터 모든 하신 일이 나를 위해서 하시는 의미가 됩니다. 이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됨의 원리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나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의 그 상태 그대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써 말 그대로 나와 하나가 되시니[영혼과 육체 관계로] 내가 이제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나의 몫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몫을 하셨다고 그냥 뒤로 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나와 하나가 되셨은즉 모든 일에 나와 동시에 함께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내 몫이라는 것은 나 혼자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미 시작하셨고 이제는 나 역시 시작함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작을 취하게 됩니다. 이제 나와 그리스도는 불가분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동시성과 양면성입니다. 내 안에 오셔도 내가 이 사실을 믿고 회개함으로써야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이제까지 내가 자기중심으로 살던 것을 오직 그리스도 중심 곧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왜냐면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이 악이요 죄인 까닭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즉 몸은 머리를, 머리는 몸을 위하는 한 몸으로서의 하나됨에서 오는 정상적인 삶, 애초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모습이기에 그렇습니다. 회개는 바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의요 다짐이기에 약속이 됩니다. 내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을 이제 뼈저리게 알았기 때문입니다[히 6:6].

그렇게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회개한 대로 복종할 수 있는 즉 산 자로서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이 곧 성령을 선물로 주심[행 2:38] 곧 그리스도를 영원한 선물로 내게 주심을 구체화, 현실화하시는 것이니 즉 애초 나와 하나되심을 목적으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역사(役事)의 그대로의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곧 내가 회개하는 세례를 받을 때 죄 용서가 되고[죽은 자는 그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이어서 세례 받음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내 스스로 인정하니까] 따라서 성령은 내게 임하시게 됩니다.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이요[아버지와 함께] 이는 다시 말해 "새 생명"[롬 6:4]의 능력으로 오심이어서 나의 모든 순종에 대한 직접 능력이 되시니 이 능력이 발동이 걸려 내가 능히 복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로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되심이지 그리스도 친히 나의 순종이 되실 수는 없으니 이는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브라함이 나타낸 그 순종을 따라 우리도 순종하게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믿음으로 스스로 순종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강제로 그렇게 순종하도록 만드신 것도 아닙니다. 그 스스로의 판단과 결단으로 그리고 그 자신의 믿음으로 그렇게 순종한 것이니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고 하나도 색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즉 어떤 방식으로 순종을 해야 하는지 그 본을 미리부터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보여 주신 실례(實例)라고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움직인다고 앞에서 지적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즉 능력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실제 일의 결단과 시행은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로써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 것은 애초 믿을 때 회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약속 드린 것을 이행해 가는 바로 그런 의미의 "이룸"[to work out]입니다. 이 약속은 끝까지 충실히 지키게 되어 있는 것이요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자기중심으로 나가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게 되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도로무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두렵고 떨라"[:12]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 스스로 마음 잘못 먹으면 하나님의 은혜와는 정반대의 현상으로 되어 버리고 이런 결과가 순수하게 내 스스로 정하는 것이 되는 까닭입니다. 아담이 애초에 영원히 사는 자로 창조되었음에도 죽은 자가 되는[롬 5:12] 비참한 결과를 스스로 맺은 것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물들 역시 다 같이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그 중 일부는 사탄 등 악령들과 같이 스스로 곁길로 감으로써 영원 멸망을 자취한 사실은 우리에게 큰 두려움이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로써 당시 교회가 "크게 두려워한"[행 5:11]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예도 있으니 얼마든지 자신을 가지고 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거룩한 천사들은 악령들과 같이 되지 않고 자기의 위치를 지켰으니 역시 우리에게 훌륭한 본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과 동시에 우리 역시 얼마든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할"[4:4] 수 있습니다. 이대로만 나가면 얼마든지 우리도 거룩한 천사들처럼 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입니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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