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일요일

(2) 병역의 의무ㅡ2/남녀의 염색체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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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역의 의무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항상 관건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원 받음"은 피동적이지만 "구원을 이룸"(빌 2:12)은 능동, 적극적이다. 양면성과 동시성이다. 다시 말해 내가 구원을 받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곧 은혜로서, 나로서는 아무 것도 하는 바가 없이 받은 선물이지만 그 선물을 어떻게 선용, 활용하느냐는 나의 몫이다. 이것까지도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는다. 물론 은혜로부터 시작한 것이니까 은혜 일색이요 은혜의 토대 위에서 구축되는 모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어 살게 하심으로써 이제 움직이게 되었으니까 살아 움직이는 것은 나이지 다른 그 어느 누구도 아니다. 어떻게 움직이느냐 즉 하나님의 창조의 뜻 다시 말해 생명을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사느냐 않느냐 여부가 저울질되고 다루어짐은 당연하다. 바꾸어 말해 하나님의 뜻은 각 사람을 만드셨으니까 그 각자 모두가 행복되게 사는 이것이다. 어느 하나라도 불행에 빠지는 것이 뜻이 아닌 것이다. 이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이 선(善, 좋은 것)이요 의(義, 올바른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 불의, 불법, 최, 악이다.

이렇게 다 함께 행복하게 살아 서로 평등하게 골고루 모든 좋은 것의 혜택을 누리게 되는 방법을 말함인데 이것은 머리와 몸의 한 몸을 이루어 사는 체제 즉 공동체 의식에서만 구현된다. 이 공동체 의식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즉 자기부인이요 자아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이다. 서로가 이웃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으면 나는 나를 위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위해지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웃이 많을수록 나를 위해주는 또 다른 나 자신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가 되는 것.

전도는 상대를 위하고 이들을 위하시는 머리되시는 주님을 위함이면서도 양면성과 동시성 차원에서 또한 나를 위함이 되니 그 구원 받은 형제는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영원히 나를 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고 나와 함께 지체될 남을 위하여 그리고 머리되시는 주님을 위해 살아 그에게 전도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전력을 다 기울인 그대로 그도 역시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면 나를 위하여 살게 될 것이므로 그러하다. 원수를 사랑함도 같은 차원이다. 몰라서 진리를 알지 못해서 나 역시 그런 어두움 가운데서 남에게 원망 들으며 원수 노릇하면서 살다가 회개하여 돌아온 것처럼 그 "원수"도 회개하면 이쁘디 이쁜 나의 사랑하는 자가 얼마든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의 목표다. 이 저주와 죽음의 때를 세상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삶"이라 한다면 이것 외에 우리에게 살아 있는 보람과 낙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7장에 종으로서 부름을 받은 자는 구원 받은 후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어도 차라리 종으로 남아 종으로서 그 위치에서 주변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해내는 길잡이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당연히 자유인되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지만 그리스도 사람들의 목적은 오직 단 몇이라도 구원하여 건져내는 데에 이 초라한 자연계 몸을 여전히 추스리고 다니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구원 즉 내가 살인죄를 지어(전쟁을 살인의 난장판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판단이 된다면) 구원을 못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데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을 사람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데에 두면 신바람 나게 군대에 들어가 거기서 이 구원의 하나님 사업에 몸을 던질  일이 아닌가. 적에게 총을 겨누는 것이 살인행위라고 스스로 믿는다면 그러면 적 앞에서 아군의 희생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몸을 그냥 맡겨 두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매여 있으니 그 길로 죽어도 한될 것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전투에 나가면 싸울 생각을 않으니 그 자들은 위생병이나 다른 업무에 돌려야 하겠다"는 인식이 확산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남은 싸워 죽어가는데 나 혼자 "죽지 않는" 데에 빼돌려지자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전투에 나가면 더 수월할 것인데 외려 더 죽을 맛이다 싶어도 그 길로 나가면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세상 편하게 지내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고로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매양 치고 달리는 자세가 긴요하다. 5리를 가자 하면 10리를 가 주는 자세이니 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으로 건져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나의 본무이기 때문이다. 원수를 위해 축복 기도해주라는 말씀의 근본 뜻이 여기에 있다. 병역 거부가 꽤 정의로운 것같아 보여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따지고 보면 자아중심인 것이다.  


§  소돔 고모라가 되어 가는 세상


법칙을 지켜야 하고 질서를 따라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다. 인간이 범죄하여 이런 자연계에 속한 초라한 육체가 되어 있는 것만 해도 하나님의 애초 창조의 뜻을 벗어나 있는데 하는 짓거리까지 악이다. 그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으니 하나님께 근심이 되셨다[창 6:6].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창 6:5] 것이다. 행복하게 살도록 인생들을 만드셨는데 악이 팽배해짐으로써 서로를 해치고 죽이고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를 따르고 순종하는 노아의 가족 도합 8명만 제외하고는 인간들을 모든 짐승들과 함께 지상에서 쓸어 버리신 것이 노아의 홍수다. 가정 교육이 중요함을 여기서도 엿보게 된다. 가정의 질서라고도 할 것이니 노아가 가정을 잘 다스림으로[딤전 3:4,5,12] 그렇게 자기의 아내와 자식 며느리들을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다. 머리와 몸의 관계다. 둘이 하나일 때는 반드시 머리와 몸을 형성한다. 이것이 법질서다.

머리가 둘일 수 없고 몸이 둘일 수도 없다. 남녀가 한 몸이 될진대는 반드시 머리와 몸의 관계인 것이다. 먼저 난 것이 있고 나중 난 것이 있으며 갑과 을일 경우 갑에서 을이 난 것이기 때문에 둘이 하나일 수 있다. 처음부터 저절로 나서 독립된 것이라면 절대로 하나로 존재할 수가 없다. 낸 것을 머리라 하고 난 것을 몸이라 하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내었고 여자는 남자에게 난 것이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의 머리다.

그리고 이렇게 남녀가 한 몸이 되는 것이지 동성끼리 그런 짓을 할 때는 소돔 고모라가 되어 영원한 심판을 받아 우리에게 거울이 된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가리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들과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strange flesh]을 따라 감으로"[유 1:7]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저들"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로 스스로를 변환시켜 인간과 성적 접촉을 하여 "네피림"을 생성시킨 악령들의 처사를 말함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어기는 것이 범죄다. 반드시 직접 해를 입힌 것만이 악이 아닌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것은 모두 피조물들의 선[좋은 것, 유익한 것]을 위해 세우신 것이므로 이를 어기면 종국적으로는 피조물 자신들에게 파멸이 되는 것뿐이다. 당장은 그 해가 나타나지 않아도 긴 안목에서 보면 필연적으로 악으로서 끝나게 되어 있음이다. 이런 법질서 위반이 그런 것이다.

영물들은 자연계에 속한 생물들처럼 암, 수컷으로 나누어져 있어 같은 종류를 생성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종류는 영원히 그 자신이 대표하는 것이니 영원성을 띠고 존재하기 때문에 같은 종류를 생산할 필요가 없어서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사람의 아름다움에 탐욕을 느껴[영물들은 그 생김새가 자기 고유의 말하자면 자연계에 속한 여러 동물의 형상이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아이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형상)보다야 덜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 짓을 자행한 것이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기 때문에[다시 말해 상대를 해치려는 의사가 없이]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를 해도 그것은 악이요 범죄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런 무질서 행위가 종국적으로는 필연코 모두에게 해가 되는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것은 빈 틈이 없고 모든 것이 아우르고 어울려서 완벽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삶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인데 그 하나라도 어기면 전체가 어긋나게 되는 까닭이다. 이런 하나님의 질서 정연한 법질서를 어겼으니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우리에게 거울이 되었다" 했는데 오늘날 세상이 이러한 무질서 행위를 국가 차원에서 용납하고 있으니 이를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노아 홍수 때와 같이 되고 소돔 고모라의 멸망처럼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멸망의 전조(前兆)로서 적(敵) 그리스도의 출현이 임박해 있다. 세계적으로 이 물결을 막을 수는 없다. 오직 희망은 개개인의 구원이다. 노아의 홍수, 소돔 고모라의 저주 및 심판으로부터 각자 자기를 구출하는 일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길이다.

오히려 성경을 모르던 나라들은 인간 양심의 발로 그대로여서 이런 해괴한 짓을 하는 일에 앞장서지 않는데 반해 소위 성경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기독교를 국교로도 삼고 소위 기독교문화를 터전으로 하고 있다는 서구 국가들이 앞장을 서고 있으니 그들의 소위 기독교의 권위가 얼마나 추락해 있는지 알 만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낡은 부대는 버려야 마땅하다. 지금까지 기독교 진리라고 믿어온 것은 그 결과가 이 모양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으니 각자는 모름지기 성경에로 다시 돌아올 일이다.

이와 같이 노아의 홍수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져 있는지라 오늘날 세계가 당시의 세계보다 결코 나을 수가 없으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저주 아래 있는 것이야 이미 아담에게 내려진 그대로로서 변함이 없다. 땅마저 인간으로 인해 저주를 받은 터이다[창 3:17].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로 "죽은 자"[마 8:22]가 되어 있는데다가[롬 5:12] "하나님의 진노"[눅 3:7] 아래 있는 현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알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겠는가.


적 그리스도 곧 "짐승"과 또 그를 위해 온갖 기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는 산 채로 유황 불 붙는 못에 들어간다 하였으나[계 19:20], 그들이 생전에 신령한 몸으로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같이 이런 자연계에 속한 평범한 육체임에는 분명하나 워낙 기적 제일주의로 나가는지라 주님께서 그 형체를 변화하신 것처럼[막 9:2,3] 스스로 자기네 형체를 변형시킬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불 못은 영계인 만큼[:48] 일단 불 못에 들어가게 되면 죽은 자의 몸이 신령한 육체로 변환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주님의 말씀에, 부자는 불꽃 가운데에서 고난을 받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 안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내셨는데[눅 16:24] 마지막 심판이 되기 전에 그러한 것이므로 그런 경우에도 그들은 신령한 몸이 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인지 다시 말해 육체가 없는 영혼으로서만 그렇게 차별되는 상황에 처해지는지 즉 육체가 없는 영혼만으로도 그런 고통이나 안식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지 어떤지 우리가 무엇이라 설명할 수는 없다 하겠으나, 노아 홍수 당시 노아처럼 구출되지 못하고 홍수 속에 멸망한 사람들의 사후(死後) 상태를 "옥에 있는 영"[벧전 3:19]들이라 표현하고 있으니 인간은 육체인데 영이라 지칭하였으므로 아직 신령한 몸이 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런 비유 말씀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시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그런 상태에서 죽은 자의 영혼들이 마지막 심판 때까지 대기 상태에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이와는 반대로 부자는 불꽃 가운데서 고민한다고 하셨으므로 구별이 명확하여 구원되고 되지 않은 것으로 판결 난 것이고 다만 마지막 심판 때까지 대기 상태에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불 못은 적 그리스도가 먼저 들어감으로써 개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어떤 구원도 있을 수가 없음을 감안할 때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의 상황이라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는 부자로서 자기중심으로 일관했고 다른 하나는 거지로 있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의인(義人)이 과연 그렇게 비참하게 거지로서 있을 수 있는가 한다면, 종으로서 믿음에 들어온 사람은 종 그대로 이 세상에서 지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어서[고전 7:1-40] 이 세상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거지로 있으면서 오직 같은 거지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그렇게 거지로 지낼 수 있다고 해도 하자는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대체적인 의미가 교회를 상징한다는 그 뜻이지 당시 유대인들의 모든 행사가 반드시 현재의 교회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끼리는 평균된 생활이어야 하는데[고후 8:14] 형제가 거지로 사는 것을 보고도 교회가 이를 방치할 리도 없다.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 하시면서 "내가 굶주릴 때 혹은 내가 헐벗고 있을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입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 25:45] 하신 것이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도 그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감동

아이가 공부를 잘 안해서 그 어머니가 채근하자 말만 어머니 죄송해요 하고는 그냥 놀기만 하고 공부를 아니하므로 한번은 엄마가 "내게 죄송하다 할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의 장래를 망치는 짓이므로 네 자신에게 '죄송해요' 하라"는 취지로 알아듣기 쉽도록 말했더니, 그 말을 듣고 이 아이가 한참 울고 나서 그 후로는 절대로 다시는 공부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한다. 감동이 있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김익두는 젊을 때 "주먹"으로서 원근 각지에서 악명이 높다가 "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사랑과 죽음"에 대한 희소식에 접하고는 며칠 울며 지냈다. 그 길로 복음 전도자로 나서서 목사가 된 후로 북한과 당시의 만주[현재의 중국 동북 삼성]일대에 걸쳐 능력을 행하여 병자를 고치는 등 복음을 전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다. 그리스도의 나 위한 사랑의 죽으심이 감동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닌 것이다.

믿는 자라야 순종할 수 있기 때문에 믿어야 구원 얻는 것이다. 순종하라고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다. "죽은 자"[마 8:22]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산 자라야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것은 산 자로서의 할 도리를 다한다는 의미이다.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첫 사람 아담은 죽음에 이른 것이요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은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는 것이다. 순종하지 않고도 구원되는 일이 있다면 아담부터 죽지 않았을 것이요 오늘날의 사탄도 마땅히 구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 받아 산 자가 되고 나서 모든 일이 시작되는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자가 이 세상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역할 분담을 하여 우리 육체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어 있는 실상인데, 이런 구원의 의미를 완전히 벗어나 오직 영생 얻는 것으로만 구원의 의미를 한정시켜 죄를 짓는 죄인 그대로 남아 있어도 즉 순종하지 않아도 천국에는 들어간다고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개신교나, 마리아의 기도를 통하고 소위 "성인"들의 기도를 통해서야 겨우 천국에 들어간다는 식의 천주교의 교리나 모두 바울이 말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고후 11:4/갈 1:6-9]인 것이다.

세상 종교의 특징이 모두 그런 것이다. 즉 이 세상은 이렇게 나약하게 살다가 죽어 좋은 데 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새 창조로 창조를 받아 즉 다시 출생함으로써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 받은 자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전 3:9/고후 6:1] 영광을 누림인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고 하면서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상태라면 그것이야말로 구원 얻기 위해 일하는 즉 행위로써 구원 얻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 목적은 자기 구원이고 자기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그 수단에 불과하므로 이는 일종의 거짓이 되어 위선(僞善)이 된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위선자와 일하실 리 없다. 그리고 산 자라야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일하는 법이지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거나 살리려 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먼저 자기 자신부터 사는 자가 되는 것이 화급한 것이 제대로 된 순서다. 고로 남을 구원하려 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산 자가 되고 볼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일절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일을 할 수가 없다. 바울이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을 때 자기 자신을 위해 그렇게 일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의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내 자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바라"[롬 9:3] 한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 아직도 죽은 자가 되어 산 자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산 자 곧 그리스도의 심정이 되어 그 마음을 닮아 성령으로 말할 수 있었던 '자기 믿음의 표백(表白)'인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이 발견되려고 한다", "그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 등의 말을 한 것은, 이미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되어[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데 어찌 구원이 아니며 따라서 구원 받은 산 자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보조를 맞춤이 아닌가] 둘이 사랑으로 하나됨으로 인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나타냄이다.

즉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은 나를 위하심이 되어 있으므로 나는 즉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를 위함이 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고후 5:15/롬 14:7-9]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우리의 구원이 그의 보내심을 받는 것임을 명백히 하시어 "성령을 받으라" 하시기 전 "내가 너희를 보낸다" 하신 것-요 20:21,22]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내 자신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되고[빌 1:21],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갈 2:20] 것을 드러냄이다.

이와 같이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대로의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소식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전자는 구원으로만 그친다. 즉 천국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후자는 이미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있으니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만 오직 목적이 있다. 만일 이 일을 아니할 때 그것은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증거가 되는 고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가 됨으로써 사탄 등 악령들처럼 되지 말고 죽은 자가 되어 버렸던 아담처럼 되지 말라는 경고가 아닌가.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하고 즉 다시는 이전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고후 5:15] 결단하여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심으로써[흔히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산 자로서 새로 창조되고[고후 5:17] 이전처럼 죄에게 세상에게 그리고 마귀에게 얽매여 있던 상태와는 전혀 다른[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거기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롬 8:2] "새 사람"[골 3:10/엡 2:15/4:24]으로 "다시 출생하였는데"[요 3:3] 어찌 여전히 죽은 자이고 산 자가 아니라는 말인가.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런 잘못된 성경 이해의 천주교와 개신교의 역사가 아무리 장구(長久)하고 그렇게 잘못 믿은 것이 수 천년이 아니라 수 만년을 지났다 하더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서 그런 종교 교리로서는 구원이 될 수가 없다. 이 '믿지 않음'의 역사는 이미 아담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역사와 전통"을 논하지 말고 들이대지 말 것이다. 그것은 한없는 어리석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아담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답습함이 되는 것밖에 아무 것도 없다.

사탄이 만든 종교를 믿었지,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가지 속아 왔었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이 아닌 까닭이다. 성령의 인도를 구하지 않고 인위적인 교리로만 만족하였으니 어찌 성령의 계시[요 6:44,45,65/ 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1:25-27/16:17]로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 심은 대로 되는 것뿐이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에 팥이 날 것뿐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감동이 없다. 감동 없는 곳에 생명이 있을 리 없다. 사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감동이다. 죽음에 대비하여 생명을 인식할 때 그렇다. 사니까 그저 사는 것뿐이라고 하는 데에서는 아무 감동이 있을 리 없다. "죽은 자"로서의 죽음의 이 세상 그리고 나 자신의 현실을 바로 직시하지 않고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의 그리고 생명의 감동이 우러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심판 아래에 있는데[롬 3:19] 이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인 것이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지 않고는 절대로 아무나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 아니라는[요 6:45/65] 말씀이 바로 이 심판을 정시(正視)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므로[요 16:8] 그래서 말씀 전파에 기도가 필수라는 것이다. 이미 찰즈 피니와 다니엘 네쉬의 합력(合力) 사역(使役)을 설명한 바 있다.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福音, 복된 좋은 소식,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도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서 전하는 것이 있고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전하는 것이 있다[고전 2:4]. 그러므로 반드시 기도의 지원 사격 아래 말씀의 돌격전이 감행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죽음의 현실이 선명하게 부각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눈을 띄어주셔야 하는 것이다. 빛과 대비, 대조됨으로써 빛의 실상이 제대로 드러나듯이 그렇게 절망적인 죽음의 현실에 직면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사람마다 다 감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의를 미워하고[살후 2:12] 의(善)를 사랑하는 자는 확실히 믿음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간섭과 강제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강제'와 '간섭'이 아니 될 수 없다. 왜냐면 악한 것을 좋아하는데 그에 대한 보응을 하여 응징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악을 방치할 것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악은 그렇게 적당히 제재하면 되므로 모든 인생들 다 영생에 들어가게 할 수 있지 않으냐 하는데, 그런 일은 이 세상에서만 가능하지 자유의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랑의 세계는 완전 자유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불의를 좋아함으로써 자기에게 유익이 돌아가지 않는 것을 아는 지식을 습득하기에는 이 세상으로써 충분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다는 것은 영원을 통해서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칸트의 요청적 유신론이라는 것은 요청을 해서라도 즉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꾸어서 오더라도 만들어 놓아야 조화가 된다는 뜻이니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옳은 것인 줄 알지만 그래서 이성적 판단으로는 아무 하자가 없지만 자기중심의 성향을 버리려고 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의 가치를 앎으로써 세상 모든 것을 버릴 그런 결단이 없는 것이다. 칸트를 비롯해 모든 철학자들은 자기 이성을 자랑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이성적 판단으로는 창조신의 절대 통치가 필요함을 아는 것이다.

세상이 무엇이냐, 아무 것도 아닌데도 이 자기중심으로 흐르는 이들에게는 좋은 매력이 있는 것이다. 있다기보다 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중심의 특성은 눈앞, 코앞의 일만 보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없다는 데에 있다. 우선 배가 고프니 허기부터 면하고 보자는 것이다. 먹어야 하는 것, 안먹어야 하는 것을 가리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따라서 스스로 자진해서[마지 못해서가 아닌] 오래 참는 느긋함도 있을 턱이 없다.
  
현재의 비정상 상태를 깨달아야


우리 인생들이 이제 후로 즉 마지막 심판이 있고 나서는 모두 신령한 몸이 되는데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요 5:29] 하신 그대로다. 그 때부터 모든 인생들이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을 "부활"이라 하신 것이다. 이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벌어들인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범죄하기 전 아담의 신령한 몸으로 복귀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구원도 불가능했고 심판 역시 불가능했던 것이니 인간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영원한 불 못으로 들어감으로써 되는 일인데 영원한 불 못에서는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는 불가한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구원도 받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에는 심판이 또한 가능하게 된 것이다[행 17:29,30]. 생명으로 들어가는 자가 부활할 때에는 거룩한 천사들처럼 찬연한 영광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나 영원한 불 못에서 그렇게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으로 있을 리 없다.

왜냐면 영광스러움이라는 것은 애초 하나님께서 생명체를 만드실 때 부여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과는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죽음의 영역에 그런 영광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생명과 상관되는 것이다. 고로 명망에 처해질 때의 그 심판에 이르는 부활은 같은 신령한 몸이기는 하되 영광스럽지 못한 말하자면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것일 뿐이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말하면 살아 있는 보기 좋은 그런 생생한 육체가 아니라 생기도 없을뿐더러 보기에도 흉물스러운 그런 시체와 같은 그런 모양새일 것이다.

그런 것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경우 한번 그렇게 썩기 시작하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지만, 영원성이 주장하는 곳에서는 결코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그런 처참한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는 것만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는 것이 범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지만, 신령한 몸이 됨으로서 영생하고 영생이라는 것이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을 말함이 아니나,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현재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있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죽은 자로서 즉 자연계에 속하여 썩어질 육체 가운데 있었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영생하는 자가 되었으나 여전히 몸은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의 죽은 자이다. 차이는 과거 죽은 자가 되어 있을 때에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만 있는 것만 아니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서 영생할 수 없는 실상이었으나 지금은 죄에서 해방되어 죄를 짓지 않을 뿐 아니라 내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음으로써 아들과 아버지를 영원히 모시고 있다는 그것이다.

물론 이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자유 의지에 따른 자유 선택에 있어 모두가 나 자신에게 좌우되는 일이다. 이것이 무릇 산 자로서의 당연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원히 그러하다. 다만 이 세상에서만 시험이 있고 천국에서는 이 세상에서와 같이 솎아내고 추려내고 걸러내는 일이 없다는 것뿐이다. 걸러지고 솎아질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 충분히 그 필요한 작업을 마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행한다는 점에서는 영구 불변이다.

말하자면 의인은 스스로 "불법을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기"[히 1:9] 때문에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요 악인은 그 스스로 "불의를 좋아하기"[살후 2:12]에 그리 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되어지는 현상이요 그 전에는 이런 언급조차 불가능했으니 이미 죽은 자로서 그리고 죄에게 포로되어 있어 생명에 관한 것을 일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의인도 즉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악인들의 불의를 사랑함도 그리스도를 믿으면 된다는 완벽한 구원의 방법이 이제는 있어도 그 스스로 믿기를 거부한 때문에 지금은 그 실상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기에 그러하다[요 3:18-20]. 또 일단 믿음에 들어와도 불복종으로 그 마음이 변하여 결과론적으로 불의를 좋아하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마 7:21/25/45]. 고로 이제 그리스도 오신 이후로는 믿어도 안믿어도 '자기 스스로 구원을 이루지 않았다' 또는 '이루었다'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 일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다시 강조하지만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자기 행위로써 구원 얻을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된다고 선포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말 그대로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때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 또는 현재도 그리스도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바 "자기 스스로를 구원한다"고 하는 것과의 차이는, '능력'과 '의지'의 차이인 것이다.

즉 과거에는 그리고 현재 세상 종교인들이 말하는 소위 "구원"은 능력이 없으면서도 죽은 자로 있는 현재 자기의 노력과 힘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망상인데 비해, 이제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그렇게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를 작동시키면 능히 이룰 수 있는 능력이 풍성하게 마련되어져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에서 오는 혼동에 휘말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신 것은 이러한 자유 선택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하도록 하려 하심이다.

어느 정도의 자유이냐 하면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자유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 스스로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내 스스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 때문에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강제로 영원 멸망으로 처단하시는 것도 아니요 소위 "은혜의 간섭"[소위 '예정론'자들 중 절대 다수가 하나님께 미리 구원 받을 자는 택하셨기 때문에 무조건 믿게 하시고 그래서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에 의해 구원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망치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이 진노로 갚으신다, 형벌하신다는 등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양면성이요 동시성이다. 하나님 일방적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정한데 따라서 나타나지는 결과일 뿐이다. 이 역시 삼위일체의 원리에 의함이라 할 것이다. 엄정한 인과 관계다. 이 사실은 로마서도 충분히 강조되어 있다[롬 1:22-29/2:6-8]. 그래서 세례 요한 이후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눅 16:16] 하셨고 "천국은 침노를 당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마 11:12] 하심이 이를 가리키심이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율법과 선지자"의 역할을 "요한의 때까지"[눅 16:26]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각자 스스로 이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시작하는 때이다. 구원을 스스로 이룬다고 해서 자기 구원을 목적하고 의식한다는 뜻이 아니라 순수하게 영생이든 영원한 멸망이든 우리 자신의 의지, 자유 선택에 달렸다는 그 의미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셨고[내 구원을 이루셨고] 현재도 나를 위하시고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것을 믿는 것이기에 나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으니 나의 구원을 목적 삼을 이유가 당초부터 없는 까닭이다.

하나님이 또는 누가 나를 요람[a cradle]에 태워 천국에 들여보낸다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내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막는 자가 있을 경우 내 스스로 쳐들어가 스스로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 천국이다[눅 16:16/마 11:12]. 그럴 경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필연적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주님은 우리가 천국은 침입해서 들어간다 하셨고 쳐서 빼앗아 차지한다 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탄이 지배자 노릇을 하여 온갖 방해를 시도하는 것을 미리 경고하심이다.

그래서 선을 행해도 "참고 선을 행함"[롬 2:7,10]이다. 인내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음이다[히 6:15/10:36]. 온갖 그와 같은 박해와 탄압과 장애를 헤치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사실을 밝히심이다. "제자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하고 사도들이 당시 초대 교회에 미리 경고한 바와 같다[요 15:20/16:33/살전 3:3].

이렇게 역경을 뚫고 나아가는 데에는 나의 의지가 필요 불가결이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대로 이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 절대적이다. 즉 양자가 함께 양면성으로 동시에 발동되는 것이다. 어느 한 쪽으로든 일방적으로 되지 않는 일이다. 의지도 능력도 없는 경우에는 처음부터 말할 가치조차 없어진다. 의지만 있고 능력이 없는 경우가 과거 믿기 전 '육신에 사로잡혀 있던' 상태다[롬 7:24]. 능력이 있고 의지가 없는 경우가 현재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경우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항상 복종하지"[빌 2:12] 않는 경우도 함께 포함된다. 그래서 아무리 "주님, 주님" 하고  불러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경우 천국에 결단코 들어갈 수 없음을 강조하신 것이다[마 7:21].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 구원의 특성을 항상 명심하여 사탄의 온갖 거짓된 이단 사설에도 휘둘리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할 일이다. 사탄이 아무리 이 세상 지배자라 하나 그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그에게 동조하기 때문이니 이 역시 동시성이요 양면성이다.

사탄이 비록 아담 부부를 범죄하게 했다고 하나 남자와 여자 모두 거기에 동조했기 때문인 것이다. 스스로 동조하지 않는 한 절대로 범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야 완전히 죄와 사망의 법에 사로잡혀 있는 때였으므로 문제가 다르다. 또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알지 못함으로써 그런 경우도 있으니 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자기의 자유 의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느냐 아니면 지식이 없어 즉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냐 하는 것은 각자 스스로 드러내어야 할 일이다.

지금 드러내지 않으면 차후 언제라도 드러내어지게 되어 있다. 이런 결판을 내리기에 협조하는 것이 우리의 복음 전파요 기도요 그리고 선행이다[벧전 3:1]. 영물들 중에도 사탄과 같은 악령들이 있어 그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는 사례와 같이 인생들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악인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악인들은 악령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해당되지 않는다. 악령들처럼 처음부터 영생을 주셔 보아야 악행을 함으로써 악령들처럼 영원 멸망에 처해질 것이니 생명을 주나 마나 구원을 하나 마나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들을 미리 아신다 함이다. 그러나 미리 아신다고 해서 즉 처음에는 순종을 잘 하다가도 나중에 가서 복종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아신다고 해서 처음에 복종할 의사가 있든 없든 이를 완전 무시하고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서만 처결하시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처음에는 믿고 순종할 의사가 있고 그 의지대로 나아갈 약속이 분명한 경우에는 그 미리 아심에 좌우되심이 없이 현재 나타나는 그대로 대응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원칙주의요 공평공정하심이다. 이와 같이 순수하게 나 자신의 자유 선택에 따라 하시고 그에 보조를 맞추시니[악이든 선이든] 오직 문제는 나 자신이지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거나 핑계를 대거나 하는 일이 일절 불가능해진다. 오직 "스스로 조심하고"[고전 10:12/눅 13:9/21:34]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룸"[빌 2:12]밖에 있을 수  없다. 이렇게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올바르게 즉 선하게 의롭게 사는 것을 말함이다.

선하고 의롭게 올바르게 산다는데 누가 반대할 것이며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 다시 말해 자기 스스로의 구원을 이룸에 아무 하자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따라[롬 14:7-9/고후 5:15] 올바르게만 살면 되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몸과 머리로 된 구조에서 제각기 자기의 마땅한 역할을 다한다는 의미다. 그 마땅한 역할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한 몸의 지체(肢體) 역할을 하여 머리를 절대적으로 위하고 함께 지체된 이웃을 위하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율법 곧 계명은 주님께서 이것이 율법이고 선지자라 하신 대로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머리의 지시를 따라 이웃 지체들을 위함으로써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이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다. 우리가 이제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롬 14:7-9]. 이와 같이 간단 명료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낙을 즐기는 것 자체다. 단지 지금 이 세상은 그런 한 몸을 이루지 못하고[머리로서의 하나님까지 부정하는 판인데 어찌 한 몸을 구성할 수 있겠는가] 각기 자기중심으로 나가기 때문에 이 자기 부인이 마치 사형선고처럼 여겨져 따르지를 않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이 삶의 원리가 생명인 줄 알기에 사랑하고[그래서 의를 사랑하고 그렇지 않은 일체의 것 즉 불법을 미워한다 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죽음으로써 위협하고 기타 그 어떤 것으로 회유해도 [그래서 바로 이런 내용으로 사탄은 광야 시험에서 주님 앞에서 시험한 것] 한사코 이 생명과 사랑의 법질서를 따르지 결코 불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히 1:9].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런 당연한 일을 한 조각 욕심을 위해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자기 장자 명분을 판 것과 같은 망령된 일을 하는 것이다.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내용으로 목숨을 걸고 나가면 되는데[왜냐면 자기중심은 본성적으로 싫어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니 비극을 자초함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분히 자기 부인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니 악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악함이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남의 이기주의는 미워하고 타기한다. 그런데도 자기의 이기심은 그렇게까지 미워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성경을 여러 가지 말씀으로 책망하는 것이다[눅 6:42/롬 1:32].

남의 이기주의가 가증스러운 줄 알면 자기의 이기심도 가증스러운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 철저히 배격하고 완벽하게 말살시키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그 철저히 배격하고 말살시키는 방법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삼는 것이요 이것이 믿음인 것이다. "그리스도께 나 위해 죽으셨다"는 의미를 똑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나 대신 죽으셨다'로만 알고 '나와 함께 죽으셨다'는 사실로 바르게 알지 못한 까닭이다. 이렇게 이 둘의 차이는 엄청나다.

전자는 유례없는 자기중심으로 만들 수 있다. 후자는 문자 그대로의 자기 부인으로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게 만든다. 전자의 것으로 헛되이 믿기 때문에 오늘날 소위 기독교인들이 "위선자"라는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누명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수치스러운 현실 그대로다. 죽을 것은 죽어야 하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당연히 죽은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신 것이다. 이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죽었는데 무슨 나 자신이 또 있다는 말인가. 자신이 여전히 있다, 여전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 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도록 사랑하셨으니 나도 이제부터는 주님의 말씀을 죽도록 죽는 한이 나더라도 결단코 어기지 않고 순종하리라 결단하고 그대로 나가면 즉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면 그는 구원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이웃[믿음의 내 형제]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그것이 순종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다고 믿지 않아도 좋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다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경우도 허다하기에 그런 이들보다 훨씬 근본적으로 나은 것이다.

몸을 머리가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 이치에서 내가 그 몸된 각 지체 중의 하나가 되어 머리를 위하고 이웃 지체들을 위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나도 어려운 것도 아니고 복잡한 것도 아니고 알쏭달쏭 애매 모호한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것뿐이다. 올바른 삶이 여기서 나오고 성경에서 말하는 의와 선이 바로 이런 내용뿐이다. 남의 이기주의는 미워하면서도 자기의 자기중심에는 관대하여 그런 자기중심이 여전히 되어 있어도 천국 간다고 감히 믿는다는 말인가.

이런 것은 인생들을 하나도 구원되지 못하게 막으려는 사탄의 지어낸 종교 교리일 뿐이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는 자라야 영생으로 보답하신다"[롬 2:7,10] 하였고, 자기중심["selfish"-롬 2:8; "당을 짓는다"는 우리말 및 흠정영역(KJV)은 틀린 것이고 새번역 흠정역(NKJV)과 NIV역은 여기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고 NKJV나 NIV가 모두 정확하다는 것이 아니고 대개의 경우 KJV가 정확할 때가 많다]으로 나감으로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영원한 진노뿐이라고[:8,9] 명백히 바울 사도는 선포했었다.

여기에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믿음의 목적이 자기 부인에 있어 몸과 머리 관계에서 오직 머리를 위하고 머리의 지시를 따라 같은 지체로서의 이웃을 위함에 있기 때문이다[고전 6:13]. 구원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에 영생하기로 창조된 영물들이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고 아담이 죽은 자가 되었다고[롬 5:12] 성경이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올바르게 살았다면 아담이 지금까지 살아 있고 거룩한 천사들처럼 영원한 존재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

단 한 때뿐이고 그것도 지극히 찰라 같은 이 세상에서 내일 또는 이 시간 이후 어찌 될지도 모르는 판에 의를 위해 고난 받고 의로우신 주님과 주님의 이와 같은 생명의 가르치심으로 인해 핍박 받고 죽음까지 당하는 것은 당당히 당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랴[눅 6:23]. 한번 신바람 나게 당해볼 만한 고난이 아니리요. 망극하신 사랑의 은혜를 받고 있는 우리로서 그만한 충성과 절개도 보은(報恩)의 감정도 없다는 것이면 우리 스스로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리요.

사람의 도덕율 또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본 요건을 갖춤은 머리와 몸 관계에서 하나가 되는 것임을 상척 동자라도 알 수 있는 기본 상식이요 양식에 속한 것이기에 "순수 이성 비판[the Critique of Pure Reason]"을 자랑하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도 "요청적 유신론"을 말할 정도가 아니었던가. 스스로 요청을 해서라도 즉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설정해 놓아야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인생 삶임을 어린 아이의 이성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는 일이기에 그런 것이다.

인간이나 원숭이나 한 조상이라고 주장했던 다윈이 나기 전에도 진화론적 사고방식[처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그 백년 이전에는 엠피도클레스) 그 후 이천 년을 격하여]을 퍼뜨린 이들[베이컨, 데까르트, 라이프니츠] 중의 하나가 칸트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면서도 성경은 믿지 않았는가를 알 수 있다. 허황된 진화론적인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성경을 믿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교만이 그런 어리석음을 낳는 것이다. 모든 범죄 행위가 이 교만이라는 뿌리에서 나옴이다.

칸트를 자주 들먹이는 것이 되었지만 인간의 이성으로써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요 그 구원이요 그 말씀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다보니 나오는 소리이다. 그가 57세에 쓴 "순수 이성 비판" 이후 7년 뒤 나온 "실천 이성 비판[Critique of Practical Reason]"에서는 모든 인간은 양심을 지니고 태어났으므로 이는 [그의 말대로 하면 "신을 믿는 것"과 같이] 이성으로 따질 것이 아니니 비록 자기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더라도 이 양심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의 5년 후 저술인 "단순 이성 범주 내의 종교[Religion within the Bounds of Mere Reason]"에서는 종교[기독교를 중심해서 말한 것]나 종교적 작품의 가치는 오직 인류의 도덕적 발달에 기여하는지 여부로써 판단되어야 한다고 썼다. 다시 말해 그 때나 지금이나 단지 영생 얻기 위해 믿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아는 종교로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소리다. 이는 그의 말마따나 평범한 인간 이성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알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

양심의 소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이런 것을 이성으로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당시의 종교[지금도 마찬가지 그대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즉 기독교를 영생 얻는 수단과 방법으로만 교회에서 가르치고 구원 받음이 올바르게 살아 그 결과로서의 영생에 이르는 것을[롬 6:22]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가르치지도 못한 데에서 오는 결과로 빚어진 그의 오해라 할 것이다. 이성으로 따질 일이 아니라면 왜 하나님이 인간에게 양심과 더불어 이성을 주셨는가.

"덮어놓고 믿기만 하라"는 말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한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니다.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으니 그 누구도 모르고 오직 순종할 만한 자에게 아들께서 계시하여 주심으로써[마 11:27]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된다[요 6:44,45,65/ 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1:25-27/16:17]. 순종할 수 있는 이에게만 계시하여 주신다는 뜻은[행 5:32/히 5:8], 지식으로 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써[고전 8:1-3] 안다는 말씀과도 같은 것이다[고전 2:9/약 2:5/1:12].

이성으로 믿는 것과 지식으로 믿는 것과는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이성에 속한다. 그저 덮어놓고 좋아하는 감정도 알고 보면 이성의 작용이다. 왜냐면 어느 인간이든 자기에게 해독이 되는 것을 사랑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함이다. 고로 반드시 이성을 지식으로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나 위의 칸트의 주장에서 당시나 오늘날의 영생 취득 일변도의 종교 교리는 이성적 결론이 될 수 없다는 정문일침을 받은 것이다.

올바르게 살지 못해 즉 죄를 지음으로써 아담이 죽음에 이르고 오늘날 인생들이 이 죽음의 고통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어찌하여 올바르게 사는 것 없이 즉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방법으로서의 하나님 구원을 생각하지 못하고 영생 얻는 것에만 급급하여 악령 사탄에게 휘둘리고 있는지 생각할수록 답답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반드시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함이 있어야 구원이고 영생이라는 말은 아니니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로써 하나님은 우리 구원의 실상을 명백히 나타내신 까닭이다.

즉 영생하는 자로 만드신 것이 우리 구원이고 그래서 "새 창조"[고후 5:17/엡 2:10/갈 6:15]라 하고 "다시 출생함"[요 3:3]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믿어 당장 죽어도 영생이고 천국 가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완벽한 구원이다. 바로 이 사실을 그 회개한 강도로써 확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서 완전하지 않는 것이 없다. 동시에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완벽하게 창조하셨지만 거룩한 천사들은 그 완전하신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지켜 오늘날에 이르렀고 같은 창조를 받았음에도 사탄 등 악령들은 그들의 생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결과 이제는 불가피하게 영원 멸망에 처해 있다는 엄연한 전례, 선례, 사례가 있어 이를 기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도 판단하신다는 엄연한 현실에 있다.

그 회개한 강도는 하나님의 편향적인 조처가 아니라 미리 아심의 결과임을 이미 설명했다. 그 미리 아시는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 알 수 있게 되어 있다[고전 13:12]. 우리 인생에 관한 일로서 우리에게 비밀로 남겨 두실 리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까닭이다. 단지 우리로서는 철두철미 원리원칙대로 나가시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확인되었으니 그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으로써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다.

오직 우리가 마땅히 할 본분을 다하는 것이니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는가. 한 몸의 구조에서 각자는 자기 소임을 충실히 하는 것 이상으로 더 바랄 것이 없다. 사람 살려 구조[구조]하는 일밖에 없는 것이다. 영원히 제2의 나 자신, 또 하나의 나 자신으로 위치하여 나를 위해 줄 그 사랑하는 나의 지체를 만드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동창, 동역(同役)하는[고전 3:9/고후 6:1] 것인데 비록 그 대가가 만신창이(滿身瘡痍)의 죽음의 고난이라 할지언정 어찌 신바람이 나지 않으리요.

우리가 다시 출생하는 것을 "성령으로 출생하는"[요 3:6] 것이라 하시고 육으로 나는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나는 것은 영이라 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시기 때문에 이와 같이 우리가 구원되는 것 즉 성령으로 출생함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새로 창조되는 새 구성의 과정은 영혼과 육체 관계에 있어 친히 그리스도께서 나의 영혼 격으로 나를 그 육체로 삼으시고 오심이다.

아담이 먼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창조된 후에 하나님 친히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심으로써[(呼氣, 날숨)] 영혼을 만드셨던 그 동일한 과정대로 하심이다. 이 일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때문이니 하나님은 천지 우주 간에 충만해 계시는 영 곧 성령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시지만 따라서 사랑으로서의 모든 의미와 위치 모습 그대로 오시는 것이나, 성령으로 오실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사람의 육체로 계심과 동시에 영원하신 영 곧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로써만 우리가 구원될 수 있음이다. 성령으로 내게 오시면 아버지 친히 내게 아들과 함께 오심이다[요이 1:9]. 아버지 친히 내 안에 오시니 이는 나를 엄마 품에 품으심이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신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므로 동일하신 모습 족 어머니의 품속에 우리가 안김이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현재 그러하다[요일 3:1,2]. 굉장하지 않은가. 문자 그대로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모든 영광과 함께 하는 아들들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이 뒤따른다. 누가 이런 영광의 현실 앞에서 이런 고난인들  마다하리요. 만일 이런 고난을 기피하고 "부끄러워하여"[막 8:38] 담대하지 못하다면 믿음이 없다는 이유가 되어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어 요한 계시록은 "두려워하는"[timidity, coward] 자로 표현했다[계 21:8].

그러므로 성경의 이러한 모든 숱한 표현들로써, 단지 믿기만 하고 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죽음을 그저 마음 가운데 수용하기만 하면 영생에 들어간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인간의 교리요 멸망의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인가를 알 수 있는 일이다. 왜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 왜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취하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자기 구미대로 챙기는 이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이성으로 얼마든지 넉넉히 깨달을 수 있는 일이다.

반(反)이성적으로 나가니 성경을 반이성적인 해괴한 책으로 세상에다 선전하는 꼴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 사탄은 처음부터 우리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다. 여자[하와]가 뱀의 말을 들은 것도[고후 11:3] 이성에서 벗어난 것이다. 여자는 이성보다 감정 즉 먹음직, 봄직, 그러니 결국 지혜가 있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으로 발전한 것이다. 아담이 여자의 요구에 응한 것도 마찬가지로 반이성적인 것이었다. 이성과 대치되는 것이 감정인데 감정은 어디까지나 이성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성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믿음을 인식하도록 만들기에 사탄은 지금까지 성공한 셈이다.그래서 그 한 가지 예로 사탄이 하나님과 적대시하여[이것은 사탄 자신이 교만한 마음으로 그와 같이 자기를 설정해 놓고 그렇게 인식되도록 만든 까닭임을 말할 필요도 없다] 뱀을 시켜 말을 하게 만들었다는 등등의 아주 비이성적이고 반이성적인 성경 해석으로 지금까지 일관되도록 한 것이다. 이로써도 사탄의 실존과 그 활동이 입증되어 있음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이 성경대로의 이 진상을 밝혔고[롬 5:12] 성경이 창세기[창 2:8-3:24]로부터 시작하여 계시록[[계 12:9/20:2/2:7]에 이르기까지 이 사실을 명백히 설명하고 있건만 "에덴낙원은 자연계가 아니라 영계였다"는 한 마디가 성경에도 또는 기타 그 누구의 저술에도 없다 하여 오늘날까지 [기록상으로는] 이에 관한 한 전혀 무지 가운데 지내고 여전히 "사탄이 그 뱀이 아니라 뱀을 시켜서 말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진상[에덴낙원이 영계이고 아담이 천사들을 다스리고 있었다는 사실 등]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탄을 우리 각자와 동격으로 제대로 알아 효과 있게 대처하는 데에 개인에 따라 정도에 다를지는 모르나 상당한 중요성을 띠기 때문이다. 물론 능력 면에서는 우리가 그에게  필적할 수 없다. 이는 우리의 비극적 참상이 어느 정도인가를 실감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평형되지 못한 것은 우리의 배후에 막강한 거룩한 천사들이 눈에 불을 켜듯이 악령 일당을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으므로 조금도 개의할 필요가 없다.

천사가 존재하는 것이 그 때문인 것이다[히 1:14]. 그러므로 사탄을 과대평가하던 옛날의 잘못된 인식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얼마든 일대 일로써 대결할 상대인 줄을 알아 절대로 위축되지 말고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대척하여 상대할 일이다. 우리 각자가 마지막 아담을 모시고 있는 터이므로 우리는 얼마든지 근본적으로 사탄 위에 임해 있어 모든 영물들을 그 지배 아래 두었던 첫 사람 아담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런 위치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시던 것과도 또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당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우리 위한 죽으심을 마치시기 전이라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원래 위상(位相)을 회복하시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담의 죄로 인한 죽음을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완전 극복하고 그 증거로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닌 영광스러운 당당한 영적인 몸 즉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누렸던 그 신령한 몸을 차지하셨고 바로 그 모습으로 내 안에 계시는 까닭이다. 그래서도 내 안에 계시는 이는 세상에 있는 자 곧 사탄보다 크시다 하는 것이다[요일 4:4]. 인식의 변화라는 것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기에 예로부터 중요시해 온 것이다.

세상에 보내심 받은 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더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눅 24:48] 하셨다. 증인[witness]이라는 것은 말씀을 전달하는 자로서의 자기 생각이나 의견 같은 것을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대로 본 대로 전달한다는 것뿐이라는 의미가 되니 여기에는 스스로 지어낸 거짓말은 없다는 증거다. 진실이 아닌 거짓말이 그 특성으로 되어 있는 세상 종교 중 그 어느 하나도 이런 "증인이 되라"는 말은 쓰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그렇게 세상에 자기 종교를 전달하는 자가 거짓말을 지어낸다는 뜻은 아니다.

그를 시켜 각종 거짓된 환상 등을 통해 거짓된 말을 만들어 내어 보여 준 다음 말하라고 조종한 악령이 그렇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에도 악령들은 그렇게 거짓말을 지어낸 후 "사실은 이러이러하니 이 사실대로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말은 하였지, "이를 증언하는 증인이 되라"는 말은 아닌 한 것이다. 이에는 억지로라도 믿도록 만들라는 의미는 일절 배제되어 있다. 반면에 세상 종교는 억지로라도 믿게 만들라는 뜻이 분명하니 이는 세상 종교 치고 국가 종교가 되는 것을 마다할 종교는 없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만은 그런 국가 종교가 되는 것을 금하신다. 왜냐면 사람을 억지로 믿게 하는 것을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은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음이 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죽음이 온 것은 몸과 머리 관계에서 생명이신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하나가 되어 사는 것이 영생의 삶인데 하나님의 머리로서의 지시를 듣지 않아 스스로 이 한 몸 체제에서 이탈했으니 이는 곧 생명에서 벗어난 것이라 생명과 대립된 것으로서 죽음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하나되어 서로 상대를 위하는 것 즉 몸을 머리가 위하고 머리는 몸이 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믿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하는 이유를 밝히셔서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너희가 자기 중심이 되어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산다"[요 5:42-44]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해서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자기 스스로 이 세상에서 결정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자기 스스로 요리(料理)하는 것이고 그 누구도 강제하는 것이 아닌데다가 영원히 자기 운명을 그렇게 해서 망쳐 버린 사탄 등 악령들의 선례(先例)가 있는지라 그래서 우리가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떪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그렇게 거룩한 천사들로서 자기 자신을 만든 결과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을 나누어서 만든 것이 아닌 것이다.

악령들도 그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잘못 선택했고 끝끝내 그 잘못을 뉘우치지 않은 결과다. 영물들이라 해서 차별하시거나 우리라고 해서 더 잘 보아 주실 리 없으니 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룩한 천사들처럼 되느냐 아니면 사탄과 같은 악령들처럼 되느냐 하는 것이 순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으니 그래서 영원한 미래를 두고 판단할 때 어찌 아찔한 느낌이 들지 않고 그래서 두렵고 떪이 없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어 구원되는 것이 절대로 강제로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순수하게 각자의 판단과 결정을 따라 되는 일이므로 강제가 되고 억지가 되는 국가 종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즉 권력을 만들어 그 힘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은 복 주시고 안믿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신다면 그 역시 억지이고 강제다. 오히려 선하고 의로운 사람 즉 구원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안믿는 사람은 차라리 이 세상에서 형통해야 그런 강제나 억지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도 믿고 구원 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따라서 세상에서 악을 행하고 남을 해치는 일을 해야 우선 성공하고 형통해지는 이 세상의 풍토가 그래서도 필연적이라 하는 것이다. 강제와 간섭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따라서 국교로 삼아지고 세상 권력 위에 군림하였던 과거가 있는 것은 그 아무리 기독교로 치장을 하더라도 성경의 진리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것임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로마 카톨릭이 그러하고 신교로써 국교를 삼을 경우 그 신교의 교리가 그런 억지로 된 것이어서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 칼벵은 그 스스로 도시 국가를 형성하여 그런 일을 자진해서 했던 인물이다. 이런 모든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이야 아무리 신의 국가, 정의가 통치하는 권력을 표방했다 해도 구원의 본질을 놓치고 성경의 진리를 몰이해한 것이니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이렇게 가짜가 세상에서 세력을 피워 왔다는 것이야말로 성경의 진리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이 세상이 마귀 악령의 지배 아래 있다는 증거가 오히려 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고 마귀가 이 세상 지배자로 있지 않으면 절대로 이렇게 가짜가 진짜를 능가하는 권세를 향유할 수 없는 터이다. 이렇게 진리이다보니 진리 그대로 즉 보고 들은 바 그대로 전달하기만 하라는 것이니 그래서도 성경은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할 뿐 아니라 기도함으로써 이와 같이 수고함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혹은 산고(産苦)의 진통(陣痛)으로써 사람을 생산해내는 일]을 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이 우리의 구원임은 항상 명심해야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으니 세상에 군림하는 자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희생 제물로 보내신 것이니 우리 역시 같은 모습을 띰은 당연하다.

이러한 보내심을 받으신 어린 양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신 머리의 일을 몸으로서 우리가 그 일을 반드시 계승해야 한다는 그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골 1:24]이라 한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그 보내심 받은 그 일 외에 할 일은 없고 또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하나되어 원천적으로 신령한 몸이 되어 있지만[그리스도께서 그러한 몸으로 하나님 우편에 위치해 계시므로] 여전히 이 자연계에 속한 초라한 육체 그대로 남아 있음이 그 때문이다.

과거 첫 사람 아담이 창조될 때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으로 만드셨고 현재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부활처럼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는 신분이요 위치일진대 이러한 범죄의 결과 죽음의 몰골인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삶을 증오하면 증오했지 결코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취하여 산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목숨]을 사랑하면 잃게 되고 미워하면 영원토록 보존하여 영생하게 된다 하신 것이다[요 12:25].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에 먼저 자기 부인부터 하라는 경고 말씀을 주신 것은[눅 14:26-35] 자기 부인이 생명의 법질서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죽은 자들의 세계로서의 특성상 자기중심이므로 서로가 배치되어 화합될 수가 아예 처음부터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자기중심의 세상에서 사는 것은 자기 부인의 견지로 보아서는 죽은 것이요, 자기 부인의 삶의 원칙대로 사는 것은 자기중심의 이 세상 안목으로는 죽는 것이다.

마귀 사탄이 시험할 때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을 들먹이고 나온 것은 그만큼 우리의 생사(生死) 선택에서 그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즉 세상을 사랑하면 기필코 구원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전부가 아니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이 사랑과 생명의 원리를 따라 행하지 아니할 때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되면 비록 세상에서의 안락을 일절 취하지 않는다고 해도 멸망이기는 마찬가지다. 즉 영적으로 교만하다든지 할 때 "천국에는 들어가지[마 7:21] 못하는 것이다.

고로 일편단심 주님의 보내신 일만을 하고 일절 다른 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 고무하며 경고하며 책망하며 위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매일이라도 모여 서로가 서로의 힘을 북돋우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어 산 자가 됨으로써 다시 말해 세상에 특정 목적을 이루기만을 위해 파송된 자들로서 일단 "손에 쟁기를 잡은"[묵 9:62] 자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뒤를 돌아보는"[:62] 일이 없이 일로매진해야지 뒤로 돌아보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 그 말씀은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갈"[마 7:21]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죽은 자였기에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나와 하나되시기 위해 나와 함께 죽은 자가 되신 것이다. 죽지 않도록 다시 말해 멸망하지 않기 위해 대신 멸망 받으시는 죽음이 아닌 것이다. 멸망으로서의 죽음은 아직 이르지 않았으니 그것은 심판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 즉 산 자로 있을 당시의 아담 수준으로 회복시키심이 우리의 구원이다. 이 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이 자기 범죄로 죽은 후에 그 죄의 대가를 다 치른 모양새로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후 부활하실 때는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모습 곧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고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었으나 육신에 대한 죽음 그리고 세상에 대한 죽음으로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한 마디로 "죄에 대한 죽음"[롬 6:2/벧전 2:24]이다. 세상에 대하여 죽었으니 사탄의 세 번째 시험 즉 천하 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보이면서 "이것을 네게 다 주겠다, 오직 내게 절하여 나의 자기중심을 따르라"[눅 4:6,7]는 시험과 유혹이 나를 제압할 힘이 없다. 오직 내가 믿음에 벗어나 있을 때에만 그런 시험이 먹혀 들게 된다. 그러면 나는 그 결과 사탄과 함께 멸망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랑은 사탄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선택인 것이다. 그래서 한사코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X염색체와 Y염색체

동물의 양성 구조에서, 암컷은 같은 형의 성(性) 염색체를 두 개 이상 가지는데 그 성염색체를 X(엑스)염색체라 한다. 수컷은 암컷에는 없는 것으로서 염색체 이외의 또 하나의 ‘특수’ 염색체를 지녀 외짝으로 들어 있는데 이를 Y(와이)염색체라 한다. 염색체는 세포가 분열할 때 생기는 실 모양의 물질을 말하는 바 유전자를 포함하며 유전이나 성의 결정에 중요 구실을 한다. 에덴낙원으로부터 지상계로 추방당한 인간도 물론 그 구성은 마찬가지다.

즉 사람은 23쌍의 염색체가 있는데 그 중 1쌍이 성염색체다. 남자는 서로 다른 XY로 짝을 이루고 있고 여자는 동종의 X가 짝을 이루어 있는 그런 차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고 흔히 말하는데 물론 닭이 달걀을 낳는 것이다. 먼저 수탉이 창조되고 다음에 그 수탉으로부터 암탉이 창조되어 그 둘이 교배하여 첫 달걀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성염색체가 바로 그 설명을 하고 있음에 유의할 일이다. 즉 위와 같은 암수 염색체에 대한 설명이 그것이다.

되풀이하면, 수컷(또는 남자)의 성염색체 구조는, 암컷(또는 여자)의 경우처럼 염색체가 짝을 이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암컷에는 없고 수컷에만 외짝으로 들어 있는 또 하나의 특수 염색체와 그 일반 염색체(여자에게는 짝으로 되어 있는)가 대칭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이를 Y염색체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설명이다. 이를 3위1체의 원리에 따라 설명하면, 수컷으로서 대표가 되는 그 종(種)의 구성 인자(因子)가 바로 XY가 짝으로 되어 있는 Y염색체인데, 이 수컷을 보완하고 보조하여 같은 종을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암컷으로서 이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암컷의 성염색체 구조이다.

즉 짝으로 된 염색체로되 같은 형의 성염색체를 두 개 이상 가진 경우이므로(XX) 이를 X(엑스)염색체라 하는 것이다. 이같이 남자가 그 종의 본원(本源)으로서 그 성염색체 구조는 3위1체의 원리[대칭성 원리]에 의해 이를테면 XY로 고정되어 있는 그런 고유의 염색체인 반면, 암컷은 수컷처럼 그 종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와 같은 수컷의 보조 역할이므로 남자 염색체의 XY중 하나인 X만을 취하여 그 X를 겹(double)으로 또는 그 이상의 복수로 받아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암컷이 그 종의 또 다른 대표일 필요가 없고 그 대표 격인 수컷의 단순한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수컷에 있는 Y까지 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수컷처럼 X와 Y를 아울러 가질 이유가 없고 X면 X, Y면 Y 하나만 가지고 그것을 비록 같은 형이기는 하지만 수컷처럼(수컷은 대칭형으로서의 짝) 짝으로 지니거나 그 이상의 복수로 지니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암컷이 절대로 수컷과 대등한 존재로서 즉 수컷처럼 해당 종의 대표 또는 상징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 종을 대표하는 수컷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실을 가리킴이다.

즉 수컷이 그 자자손손을 퍼뜨릴 때 암컷은 그 일을 돕기만 하는 것이다. 그 몸 안에 그 씨를 잉태시켜 세상 밖으로 내보내고 세상 밖으로 나온 수컷의 종자들을 잘 보육하는 일을 하는 것이니, 다시 말하거니와 인간 성염색체로서의 구성 인자 x염색체 및 y염색체는 남성 고유의 것이다. 바꾸어 말해 인간이 만일 남녀라는 성적인 구별이 없었다면 지닐 수 있는 그런 '성염색체'라 하겠다. 즉 동일 체내(體內)의 양성(兩性) 구조일 경우다. 처음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그런 형태였다.

자기 한 몸 안에 그런 양성 구조를 갖춘 격이다. 그러나 그 후 여자가 지으심 받는다. 체외(體外) 양성 구조 즉 양성(兩性)이 제각기 자기 몸을 따로 지니는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 남자의 몸(갈빗대 하나)을 소재(素材)로 하여 그것을 표준해서 "같은 사람"을 만드시므로 어디까지나 먼저 존재하게 된 남자를 위한 것이지 각각 따로 독립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남자를 <위해> 여자가 지으심 받은 것이다[고전 11:9]. 동등하게 존재할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종속된 위치인 것이다. 종속되었다 해서 마음대로 부리는 그런 주종관계라는 뜻은 아니니, 이미 지어진 각종 에덴낙원의 "짐승들"은 인간과 주종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여자만은 비록 먼저 있었던 남자의 몸에서 나와 그런 종속 관계를 이루기는 했으나 실제 자기 몸의 일부분으로 지으심 받았기 때문에 바로 자기 자신의 분신(分身)인지라 주인과 종, 손위와 손아래의 관계는 아닌 것이다. '분신'이라면 '몸'과 '머리' 관계인 것이다.

몸과 머리 자체로 따지면 반드시 몸은 머리를 따라야 하는 의미의 그런 주종관계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머리는 그 대신 몸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낄 책무를 띠게 되는 것이니 왜냐면 그 몸이 자기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남자와 여자 관계가 아닌 가령 인간과 그 에덴낙원의 '짐승[靈物]'과의 관계에서는 그렇게 자기 몸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또는 사랑해야 하는 그런 관계는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분신 격이 아니라 각기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래서 인간의 남녀 관계는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종속관계이면서도 역시 그와 동시에 남자가 여자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당연성과 필연성이 병행되어야 하는 점에서[엡 5:22-25] 여타 종속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 동시성(同時性)을 지킴이 핵심이고 이를 무시할 때 그 심각한 후유증은 걷잡을 수 없으니 곧 상대를 다스리거나 넘보려는 알력과 쟁투가 벌어지는 것이다.

가령 남자의 일부 신체를 소재로 하여 여자가 지으심 입은 경우라 하더라도 성염색체 배분에서 남자가 처음 XY로 있다가 여자가 생김으로써 여자는 그 XY 중에 하나씩 평등하게 나누어 가져 예컨대 남자는 YY가 되고 여자는 XX로 되어 있다면 문자 그대로 남녀가 평등의 위치가 될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남자는 XY를 모두 구비하고 있는 반면에 여자는 그 반분(半分)인 X만을 지니고 그것도 남자의 XY와 구색을 맞추느라 XX 겹으로 된 구조로 형성되고 있다면, 이것은 어느 모로 보나 여자는 남자에 종속되어 평등일 수가 없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3위1체 원리에서의 주종, 대소 관계가 명백히 그대로 드러내지고 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원래 부유하였고 또한 국가의 보조를 받고 있어 그 여유로 해서 그의 생물에 관한 연구는 광범위한 것이었고 심오했다. 동물의 각 부분, 작용, 행동, 생식, 수명 등을 연구한 것 중에서 간단한 예를 들면 음란한 수컷 참새는 암컷보다 훨씬 단명하다고 한 대목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성생활을 즐기는 즉 음탕한 남자는 단명하다고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단명하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하고 묻기 전에 모든 인류가 모두 남자의 씨이지 여자의 씨가 아니라는 사실만 알면 해답은 명백해진다. 다시 말해 수컷은 자기 종족을 유지 보존하기 위하여 자기 씨 곧 자기 ‘생명력’을 암컷을 통해 배출해내기 때문에 그런 생명력의 단축 현상을 빚어내는 것이다. 여자는 이같이 남자의 씨를 받는 일만을 할 뿐이지 스스로의 씨를 이어가는 그런 역할은 없다는 뜻이다.

남자의 오직 보조 역할로서 남자의 씨를 받아내고 그 씨를 양육 보존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 여자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 하였다. 남자가 먼저고 여자는 그 나중에 지으심 받았고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담 스스로 그렇게 했다면 남자에게서 나온 것은 여자가 아니라 그 자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에 자식이 아니라 여자가 된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명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와 동등일 수가 없다.

이것을 동물은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원숭이를 애완용으로 기르고 있는 한 여자 사육자의 말에 따르면 원숭이는 사람을 아이, 여자, 남자를 구별하여 인식한다고 한다. 즉 여자와 아이를 동등시한다는 흥미 있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는 아무리 여자가 남자처럼 장대해도 곧바로 원숭이 앞에서는 아이 취급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숨길 수 없고 거짓이 없는 본능적 인식[하나님이 기계적으로 장치하신]이니 누가 이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그러나 사탄의 충동질에 불가항력일 수밖에 없는 인간만이 이에 이의를 내고 무지몽매하게 양성 평등을 말한다. 사탄이 이런 당치도 않는 수작을 하는 이유는 성경을 부정하려는데 있다. 즉 이상과 같은 성경의 창조 기록을 믿지 못하도록 충동질하는 것이다. 성경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사실을 가르치므로 이를 엎어 버리고 따라서 그 성경이 말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간 구원을 구시대적 발상으로 인식하게 만들자는 획책이다.

덧붙여 말하면, 이같이 인간의 23개 염색체도 다 짝으로 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그런데 숫자 22라는 것은 짝수인 반면 23은 홀수이다. 짝의 개념으로 말하면 22외에 가외로 1이 더 있는 셈이다. 모두 짝으로 되어 있는 우주만물에서 22가 아니라 23이 되어 있으니 22가 정상이고 나머지 1이 임시 또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부가적으로 첨가되어 있다는 의미가 되겠다. 이렇게 임시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성염색체로서 이는 인간의 성적 개념이란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이 되어 결혼하는 일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결혼하는 일이 없다면 성적 개념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아닌가. 남녀라는 것은 자녀 생산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녀 생산을 위해서만 짝의 개념 즉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라고 되어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이 육신으로 한 몸 됨이 <영으로 하나 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후자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고로 후자가 온전하고 전자는 일시적인 성격의 임시 방편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이 "한 영"됨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한 영됨으로서의 삶의 원리는 한 몸이 됨으로서의 삶의 구조를 원용(援用)하면 금방 알 수 있는데 성경은 이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즉 한 몸으로 하나 됨에서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으로서 남자가 이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여자가 남자의 몸을 주장한다고 한 것이다[고전 7:4].

그리고 여자의 몸은 남자의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의 것인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하여 다른 남자와 관계한다면 음부가 되는 것이다. 남자가 다른 여자와 관계한다면 그 하나 됨은 깨어지는 것이다. 음행은 여기서 일어나는 범죄행위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형상은 당연히 그 본체와 짝이 된다. 즉 본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서 이 사실은 완벽하게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때문에 성경에 하나님을 떠나서 피조물을 섬기는 일체의 행위(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도 같은 범주에 속할 수밖에 없다)를 음란한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나의 영원하신 짝은 예수 그리스도시니 몸이 아니라 정작 중요한 것 즉 근원적인 것은 삶 곧 생활에 있음이다. 즉 몸으로 하나 됨이 아니라 삶 자체로써 하나 됨이니 나의 삶은 주님의 것으로서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좌우하시는 것이 되어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되고 있음이다.

왜냐면 나의 삶을 주님의 삶으로 간주하심이니 이러한 둘이 사랑으로 하나 됨을 이루셔서 나와 함께 죽으시고 나와 함께 다시 살아나심이 되어 그 후의 모든 하시는 일이 내 이름으로 하심이 되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도 나와 함께 앉아 계심으로써 온전히 나를 위하심이요 주님 계심이 온전히 영원토록 나를 위하시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삶을 살아 이 지극히 복스러운 하나 됨, 짝으로서의 삶을 깨뜨리는 자살행위를 왜 할 것인가. 고로 구원은 한마디로 <교제, 사귐> 곧 이상과 같이 둘로서 하나 됨의 사랑의 삶 자체를 말함이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기를 구원만 받으면 된다고 하여 영생이 전부인 줄로 생각하는데 하나님과 이와 같은 하나로서의 교제에 모든 핵심이 있다. 하나님과의 원활한 교제 즉 하나님과의 원만한 조화 일치가 되어 있으니까 영생은 자연적으로 수반되어 오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 생명의 교제가 충실하지 못하는데 어찌 영생하기를 바라겠는가. 영원한 생명이란 생명의 법칙 아래에서의 삶의 유지를 뜻함인데 이 생명의 법칙이 곧 하나님과의 이와 같은 하나로서의 교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뿌리가 충실하지 못하면 그 나무는 열매는 고사(姑捨)하고 고사(枯死)하고 마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빌 2:12] 바로 여기에 터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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