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9일 수요일

(18)

잡록(雜錄, miscellanea)-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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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신론(神論)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딤전 1:1],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2],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한다"[5:2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다"[딤후 4:1]. 한 편지에서의 이상 세 대목에서 "성령"은 빠져 있다. 또 비슷한 내용으로 "엄히 명령한다"는 어조를 강조할 때 두 편지 모두 한결같이 "성령"은 빠져 있다.

어떤 성경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교리 설명을 보니 거기에 "삼위일체"에 관하여 이런 말이 있었다. "하나님을 숫자적 하나로만 강조하는 단일신론과 각 삼위 하나님의 독립적 존재 를 마치 어느 한 인간이 집에서는 가장이고 교회에서는 장로고 회사에서는 사장이듯 하나님을 각 상황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나타낸다고 보는 양태론이 있는데 둘 다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완전히 상호 독립된 세 분의 실재이시면서도 또한 서로간의 본질이 완벽하게 동일한 일체이시라는 신비한 진리를 왜곡한 것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본질적 속성의 일부 또는 전체를 각기 다른 세 개체가 나누어 가지는 상태 즉 그 세 개체가 공통의 속성을 각각 다른 상태로 지니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세 개체이면서도 독립된 그 세 개체의 모든 본질이 완전 일치하기 때문에 그 본체가 하나임을 말하는 것으로서, 물질세계에서는 그 유례를 전연 찾아볼 수 없는 오묘한 진리다". 위에서 말하는 소위 '단일신론'이나 소위 '양태론'이나 의미는 하나다. 즉 숫자적으로 한 분이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했으니 그러면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는 것인가. 세 분은 세 분인데 그 속성과 본질이 모두 동일하시므로 하나의 본체시라고 하는 것이 이상 편집자의 설명인데, 그 셋의 관계 설정이 전혀 안되어 있으므로 전자 즉 '단일신론'보다 더 혼란스럽다. 그 혼란스러움을 "자연계에는 유례가 없으므로 신비하다"고 얼버무리고 있다. 신비하면 신비하지 오묘하다는 말은 왜 하는가. 여기서는 부적합하다.

설명이 충분히 되고 그 이치를 깨달아야 오묘한지 여부가 판가름되는 것이다. 설명을 못하니 신비하다고만 하는 딱지를 붙여두면 그만인가. 모르면 무조건 신비하다는 딱지 하나만으로 끝나는가. 모르는데 어찌 성경을 안다고 하리요. 삼위일체에 과한 것은 하나님께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그 기본도 모르면서 어찌 하나님을 안다고 하랴. 알지도 못하는데 어찌 사랑하노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신비하다"는 말 자체가 "모른다"는 그 뜻이다. 이해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비하다고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를 사랑할 수 없다. 성경처럼 명백한 설명서가 없다. 사람이면 다 소위 '배운'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못배운'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모든 사람이 알아듣도록 말씀하시는 것이다. '배운'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이나 공통으로 알아듣게 하자면 비록 '못배운' 사람도 함께 알아들을 수 있는 단순한 언어를 구사하면 되는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씌어져 있다.

문자상의 기록만 아니다. 말로 전파되는 말씀이므로 말 역시 그러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실 때 유식한 사람들을 택하시지 않았으니, 장차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교회의 기둥과 같은 열 두 사람인데도 그러나 택하시기를 거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고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그 아들을 주셨다' 함에 있다[요 3:16]. 거기에 무슨 어려운 말이 있는가.

더 자세하게 설명하시느라고 "그 낳으신 외아들"[the only begotten Son]이라고까지 하셨다. 거기서 무슨 말씀을 더 자세히 하실 수 있는가. 유식하다는 소위 '배운' 사람만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어이없는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성경을 어렵다느니, 신비하다느니 등 전혀 쓸모없는 말을 만들어 많은 사람을 진리로부터 격리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탄의 주구 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이 '신비하다'는 딱지를 성경에 붙인다면 평범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감히 그런 '신비'하다고 딱지가 붙여진 성경을 읽을 엄두라도 내겠는가. 고기잡이나 세금 거두는 일을 해 먹어 죄인시되던 그런 하류 층의 무식자들을 주님께서 사도들로 삼았으니 그런 세상의 표준으로 보면 이는 엄청난 역행이 아닌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혜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스스로를 어린 아이로 만들기"[마 18:3] 위해 힘쓰는 것이요, 그런 어린 아이 같은 사람도 안심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아버지께로 나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는 삼위일체니 어쩌니 하는 것은 관심이 대상이 되지 않았고 그것이 어떻게 되는지 흥미 없는 일이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말씀하셨고 아버지께 대하여 가르치신 줄을 알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신 대로 또 기도하라고 하신 대로 "아버지"하고 부르며 매일 새벽 기도회에 나아가 부지런히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죄 짓지 말라는 말씀이 분명히 있으니까 죄 짓지 않는 것이다.

율법 아래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것이 그렇게 말하는 바울 자신의 체험이라고 로마서 7장을 당치도 않게 설교자가 설명을 해도 그것이 그리 마음에 와 닿지도 않는 것은 현재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어 그 모든 말씀대로 순종하고 있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에덴낙원이 영계인지 자연계인지 그런 데에는 그다지 마음을 쓸 필요도 없고 그 옛 뱀이 사탄이라고 해도 또는 아니라고 해도 그것이 별반 그 마음에 와 닿는 것 역시 없고 마귀가 이 세상에서 세력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으니 그런 줄을 아는 것뿐이다.

성경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함도 항상 복종함으로써 그렇게 하라고 한 것과 같이 자기가 현재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고 있고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고 있는[이것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니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시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터라 이것을 "의지한다"고 표현함이다] 줄 알기에 그것으로 대만족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되었다 하니 그런 줄 알고 감사가 넘치는 것뿐이다.

요컨대 그는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성경에 있어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거기에 신경이 쓰는 것보다 현재 나를 사랑하시어 나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아들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분부를 따르고 행하는 것에 힘쓰고 그로 인하여 어떤 고난이 있고 위협이 있고 심지어 죽는 일이 나더라도 그 사랑과 믿음 변치 않으리라는 각오가 단단히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뿐이다.

이렇지를 못하고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을 이른바 성경에 대한 해석 또는 풀이로써 합리화하려 하고 정당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언제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냐면 그는 매일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는 일도 별로 없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음으로 하나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직업적으로는 교회 일만 한다고 해도 생활을 그렇지  않은 것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지식대로 한다 하나 그릇된 지식이 오히려 스스로를 망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킬 것이요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 하셨고[요 14:15,21,23],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하심과 같이[마 7:21], 그 "뜻을 행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부합하게 행함이니 즉 산 자로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5:15/롬 14:7-9]. 그래서 그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는 자는 아무리 무식해도 구원 받음에는 아무 장애가 없다 한 것이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면 자기 부인이 되므로 넉넉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이다[마 16:24/눅 9:23].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을 하신 다음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올 것이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을 것이다"[마 16:27] 하셨으므로 자기 부인을 하고 있느냐 아니면 자기중심이냐[롬 2:7-10, selfish, self-seeking, "당을 짓는다"는 우리말 번역과 "contentious"의 흠정영역은 잘못된 것' 하는데 따라 그 행함이 갈라지는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을 하여 참고 선을 행하면 다시 말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 영생이나 자기중심이면 멸망인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 곧 자기 부인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는 것이기에 그렇다[고후 5:14]. 그와 같이 내가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고 분명한 논리로 성경은 우리 믿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15]. 그럼에도 자의적(恣意的, 자기 마음대로 하는)으로 해석하여 자기 부인을 쑥 빼어 버리고 오직 특정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인위적인 교리 즉 그리스도를 나 위해 죽으신 것으로만 생각하니 구원일 리가 없다.

그렇게 비록 생각은 하더라도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골 2:12/갈 2:20], 또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으로서 나 역시 죽은 것이다"[고후 5:14]는 생각은 못하더라도, 나 위해 죽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주님 위해 죽도록 사랑하여 주님을 위해 살아 그 모든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하겠다고 어린 아이처럼 생각하여 그대로 행동함으로써 실천하면 그것이 구원이다.

영생  얻기 위해 순종이 아니라 또는 멸망을 면하기 위해 자기 부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기꺼이 복종하여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행하면 즉 자기 부인을 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 그것이 구원인 것이요 믿음인 것이다. 사랑으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하느냐 아니면 피동적으로 마지못해서 하느냐, 차이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느 모로 생각해도 믿음은 사랑의 순종임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자기중심으로 살아도 다시 말해 여전히 "육신"[롬 7:14-8:13] 즉 "죄의 몸"[롬 6:6]에 있어도 구원된다는 인간의 종교 교리를 더 중시함으로 멸망에 이르려 하는가.

성경의 엄중한 경고는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이다. 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은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삶을 즐기고자 하고 돈을 사랑하기[돈이 있어야 내로라하고 살 수 있으므로] 때문에 그런 자기를 합리화하려는 시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부터가 정신이 제 위치에 있지 않다. 사탄이 이 세상 신이요 왕인데 사탄에게 절하면서 즉 멸망을 각오하고 살려고 한다는 말인가.

인류를 이토록 죽음의 불행에 빠뜨린 악마 사탄의 영역이라면 한사코 즉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서라도 인생들을 여전히 멸망시키려는 그 의도를 분쇄하고자 해야 마땅한 바이고 사람다움이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도리어 그에게 영합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살고자 하니 어찌 구원이 되겠는가. 사탄은 이 사실을 잘 알므로 그와 같은 교리를 만들어 지금까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영원히 잃는다고 경고하셨다[요 12:25]. 사탄의 그러한 흉계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가감없이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세상의 미움을 받아 핍박의 대상이 되고 탄압의 표적이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함이다[25절]. 그럴 경우 영원히 자기 생명을 존속시킨다고 하셨다[25절]. 생각해보면 알 일이 아닌가.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멸망의 문턱에 있되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그 위험을 알려야 하지 않는가.

그 위험을 알리지 않고 망설이는 이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고전 9:16]. 구원의 좋은 소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는 자에게 화가 있다[겔 33:12,13/3:20/18:24]. 믿지 않는 세상과 함께 악마와 함께 같은 운명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세상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세상에서 삶의 향락을 누리기에는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가 버리되 그러나 구원을 받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당신이 악하니 그 악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회개하여 돌이킴으로써 하나님께 복종하기로 뜻을 세우면 얼마든지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모든 일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하고 사실대로 알리려면 부득불 "당신은 악하다"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죄를 책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요 16:8]. 악하다고 하니 미워하는 것이다.

악하다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악함을 깨우쳐 준 데 대하여 감사하며 구원 얻을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회개함으로써 생명에 들어가겠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당신은 악하다"고 하는 그 지적 때문에 도리어 미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즉 그들의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당신은 입을 다물 것인가. 그러면 당신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고 당신 자신을 위해 삶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마 7:21].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지만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와 함께 죽으심이지만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어 새 생명 가운데 있는 내 편에서 볼 때는 내 편에서 말하고 생각할 때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은 것이라고 여겨야 온당하지 않을까. 이제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한 자로서의 나는 일절 나 자신을 위해 죽거나 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롬 14:7-9].

그래서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어 우리가 죽어 있는"[골 3:3] 것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함인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위함인 것이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이니 따라서 죽는 것도 나 자신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니 "유익"[:21]인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현재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함"[:29]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인하여 내가 현재 죽은 상태이요 자기가 부인되어 있는 위치이지만, 나의 의지가 작동할 때에는 이상 바울의 쾌재라 할까 환호라 할까 그 승리의 환성(歡聲)과 같이[죽음에 대하여 그런 식의 180도 전환이니 이것이 승리가 아니면 무엇인가-고전 15:54] 나는 "날마다 죽는"[고전 15:31] 것이요 날마다 내 십자가를 짐으로써[눅 9:23]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니 날마다의 일상생활이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기에 그러한 것이다[고후 5:15].

사랑에는 무한 기쁨과 평안이 있으니 나는 기쁨으로 날마다 죽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기꺼이 자진해서 즉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자랑스럽게 완전한 자유인의 위치에서 이를 행하는 것이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즉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의 자유가 아닌가. 자기 "마음대로 해도" 그 목적이 선과 의를 따름이냐 즉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선과 악이 가름되어지는 것이다.

쉽게 간단히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하면 악이요 자기를 일절 배제하고 자기 부인으로서 남을 위할 때 그것이 선이요 의이다. 남을 위할 때에는 머리와 몸 관계에서 머리의 지시를 따라 함께 지체된 내 이웃을 위함이니 내 이웃이 바로 한 몸 이치에서는 나 자신인지라 그렇게 위하면 위할수록 내가 창성(昌盛)해지는 것이니 그래서 아니 기쁘고 어찌할 것이냐. 3위1체의 원리로 말미암는 자기 부인이 바로 이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면서도 사실상은 자기의 확대, 확장, 확충을 꾀하는 비법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이 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창 2:18]하신 것이다. 홀로 지내시는 것보다 함께 둘로서 계심이 좋기 때문에 형상으로서의 아들을 낳으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바로 이 순서를 따르심이었다. 곧 3위1체의 원리대로 하심이니 만유가 이 원리를 따르지 않음이 없다. 바로 당신께서 계시는 모습[둘이 하나되시어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는]으로 지으신 증거가 바로 이러한 만물의 뼈대가 되어 있는 3위1체의 원리요 그래서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제조 마크[make mark]를 달고 있는 것이다[롬 1:19,20].

3위1체의 원리를 알기 전에도 양식과 상식이 있으면 누구나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솜씨인 줄 알게 되어 있지만 자기의 양심상 가책을 받는 자기중심의 악을 본성적으로 감추려 하여 합리화하려 하니까 하나님은 없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핑계치 못한다 한 것이다[:20].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그런 억지가 통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엄격히 양심상으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 전환에 있다. 이는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로도 통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하게 되면 보편적인 인간의 구원자로서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정도로만 인식하게 되지만, 친히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인식이 아주 달라지는 것과 같음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는 것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기초로 하는 것이어야지 그냥 말만 따가지고 와서 차용해 쓰는 것은 그것은 사실을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의미하고 진리일 수가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 쓰는 일체유심조가 바로 그러하다.

내가 시퍼렇게 살아 존재하는데도 "내가 없다" 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내가 없다"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하고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말의 유희요 말 자체를  희롱하는 것이어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말의 혼탁을 일으키니 백해무익이다. '가는' 것을 '오는' 것이라고 말의 뜻 풀이를 한다면 사회 생활이 과연 가능해지겠는가. 그런 것은 철저히 배척할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비로소 이 경우 그런 "인식 전환"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인데도 이를 지금까지 몰랐다가 이제는 알게 되었다는 그 뜻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쉬이 끝나고 자기중심의 인간형은 생명의 세계에서는 발 붙일 틈이 없다. 이 세상은 고로 필요악이다. 악이므로 존재할 수가 없지만 현실적으로 나타나 있고 융성(隆盛)하고 있는 것은 말 그대로 필요악이기 때문이다. 필요악은 그 필요만 충족시키게 되면 이내 끝나게 되어 있다. 즉 악이 걸러지고 추려지고 솎아지기 위함이다. 또한 구원 얻을 사람은 다 구원되기 위함이다. 그 악인도 언제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구원될 수 있으므로 악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고로 악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베푸심이니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며 그렇게 악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즉 한 때 잠시 있는 이 세상의 악을 못견뎌 할 필요는 아무 것도 없다. 인내심을 키우는 것도 한 가지 아름다운 일이다. "참고 선을 행하는"[로마서 2:7] 것이야말로 인격 도야(陶冶)다. 불교가 인격 완성을 꾀한다는 말을 불교도들은 하고 있지만 옳은 말이다. 단 진리 안에서 해야 그것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지 허공에다 집을 짓는다는 격이니 말만 무성하고 생각만 하늘을 찌를 듯할 뿐 실제는 말 그대로 "빌 허(虛)"다. 허허 공백인 것이다.

조롱하는 말이 아니라 3위1체의 원리에 명백히 어긋나기 때문이다. 인과율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짝으로 되어 있어 무상(無常)것이 있으면 반드시 상주(常住)하는 것이 있는 법인데 무조건 '무상'만 논하고 '상주'는 인위적인 노력, 인간 완성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니 인간이 무슨 창조신이던가. 창조자라면 왜 처음부터 영생하게 스스로를 만들지는 못했나? 그런 실수와 착오투성이라면, 앞으로라도 자신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역시 여전히 오류투성이가 될 것이요 실패작이 될 것이 아닌가. 무슨 자신이 붙어 그런 일을 감행하겠다는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 하셨다. 아버지와 아들 외에는 아무도 없고 그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둘이 하나가 되어 계시니 그 하나가 되어 계심을 무엇으로 우리가 알아듣도록 나타내실 것인가. 자연히 이 경우 등장하는 이름이 성령이실 것이 아닌가. 왜냐면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 하시면서 분명 "이름"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명시되지 않는 "삼위일체"란 말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성경의 말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도 사탄이 눈을 어둡게 하면 말 그대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게 된다. 요즘 아이들은 낫을 모르는 수가 많은데 성묘하러 가서 묘소의 풀을 깎는 기구가 낫이다. 이 낫을 바로 놓으면 한글 자모의 첫 자 '기역'이다. 바로 그래 놓고도 즉 기역 자를 앞에 만들어두고 있어도 기역 자가 어떤 형태인지 모른다는 것처럼 이토록 간단 명료한 하나님의 말씀이신데도 하나님 친히 가르쳐 주시고 짚어 주시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학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신학[revelation]교에 몇 년씩 그것도 학위를 딴답시고 또 몇 년 더 끙끙거려보아야 '계시(啓示)'가 없는데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신비'라는 딱지만 붙여놓고 자기도 들어가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 [소위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한']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결과론적으로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판에 성경을 아무리 읽은들 무슨 소용이랴.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아버지"와 "아들"은 누구이신가. 사람이신가?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가 되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상식이다. 사람이야 천만년 가도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상징적으로 표현해서 말이야 "하나"라 한다. "마음이 하나다, 몸이 하나다", 그런 의미의 '하나'라는 말은 얼마든지 쓴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하나"가 그런 하나이던가.

그런 하나로 잘못 알까 싶으셔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시기를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하신 그 말씀이다. 우리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쓴 역사가 있는가. 그 부자 관계가 아무리 친밀해도 아버지가 아들더러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다"라는 말을 쓰던가.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못하는 즉 사람으로서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는 절대로 이루지 못하는 그런 '하나' 관계가 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어려움 없이 그렇게 "내 안에 아버지, 아버지 안에 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다. 그러니 하나님으로서는 그렇게 "하나"로 존재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존재하시는데 그 "하나"되심을 어떻게 우리가 부를 것인가. 만날 그 하나되심을 일컬어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라고 번번이 장황하게 늘어 놓아야 할 것인가.

성경에 "성령[Holy Spirit]"라는 단독 명사가 사용되지 않던가. 하나님은 영이신데 굳이 또 "하나님의 영" 또는 "성령[거룩하신 영]"이라고 하나님께서 부르게 하시겠는가. "하나님" 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당연히 영이시라는 생각부터 들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 호칭만으로 족한데 굳이 또 "성령"이라 하실 때는 분명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하나로 계시는 모습 즉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 계시는 모습을 "성령"이라 호칭하는 것이다.

또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 하셨다. 다른 말씀이 아니라 "너희와 나는 하나"라는 말씀이시다[요 17:11,21-23].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하신 표현과 똑같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하나가 되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임은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육체인 사람은 그렇게 하나가 될 수 없다. 어떻게 내서 내 안에 계시고 그리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고 하는가, 처음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말씀 그대로 알아듣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다. 그래서 각자 나름대로 상징적으로 해석해서 지내왔었다. 그러나 벅찰 것도 없고 알아듣기 어려운 것도 없다. 왜냐면 그 이상으로는 더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설명 자체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단지 주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못알아듣는 것뿐이다. 하나님이신 줄을 왜 그리도 더디 믿고 더디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영이시다. 우리는 육체이기 때문에 육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실 수 있고 주님과 내가 하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천사들도 영이지만 무릇 모든 피조물은 그 형체가 있게 마련이다. 천사 곧 영물(靈物)은 신령한 형체이기 때문에 우리 이 자연계에 속한 물질적인 육체의 관점으로 볼 때는 영이라 하는 것이다[히 1:14]. 그런 영물로서의 천사도 천사끼리 하나가 될 수 없다. 또 그들 중의 하나가 인간과 또한 하나가 될 수 없다.

왜냐면 그들나름의 형체 즉 육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에덴낙원의 땅[영역(英譯)은 "ground"로서 "dust"와는 달리 하고 있음]을 소재(素材)로 하여 그들을 창조하셨다 한 것이다. 그러니 형체는 형체요 육체는 육체다. 그러나 이 자연계와는 달리 그런 영계(靈界)로서의 에덴낙원의 토질(土質)이니 곧 우리로 말하면 "영"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신령한 형체이건 자연계의 형체이건 그런 형체가 없으시다.

그래서 만유를 통하여[관통하여] 계시고 안에 계시고 그리고 위에 계신다 한 것이다. 이는 조물주이신 하나님만이 가능하시니 그런 유일무이의 영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내 안에 성령이 임하시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내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부활 즉 그리스도의 계신 그대로의 모든 것이 내 차지가 되는 것이 이 "하나"됨이다. 문자 그대로 말 그대로의 하나됨이다. 둘이 아니다. 나누어 생각할 수가 없다.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 자체가 신비한 것이다. 비로소 신비하다는 말을 쓸 수 있게 된다. 모를 때는 모르는 것이지 그것은 신비가 될 수 없다. 이제 알고 나니 그것이 그렇게도 오묘한 진리인 줄 이제 비로소 아는 것이다. 덧붙여 반드시 말해둘 것은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해오는 바이지만 이 '하나 됨'은 사랑으로 하나 됨이요 사랑의 핵심은 자기 부인이다. 왜 자기 부인이냐 하면 갑과 을 둘이 하나 될 때 가령 갑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와 하나 되어 있는 상대인 을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둘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원리이자 법칙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로 계시는 사실은 아버지께 관련되어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유감없이 다 나타나 있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니 을이 을 자기를 위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을이 자기를 위하는 것보다 갑이 더 잘 위해주는 것이다. 이는 자기가 자신을 들여다볼 수 없고 상대가 더 잘 보아줄 수 있다는 간단한 예에서 잘 드러나는 이치다. 그래서 자기 부인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생명의 풍성한,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 부인과는 반대 개념인 자기 중심 즉 이기주의로 일관한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중심하여 모든 의식구조가 짜여져 있다. 자기를 중심하니 자기라는 우주가 형성되어 운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당연하고도 정상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파멸의 지름길이다. 그런 삶의 자세는 자기 혼자 살 때만 한해서 자연스러운 것이고 옳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 외에 단 둘이만 있어도 그런 식으로 상호간 삶을 유지한다면 그 둘은 영원히 분리되어 있고 따라서 다툼이 일상화되며 종국에는 서로를 파멸시키는 원흉이 각자 되어 버리게 된다. 그런 것이야 오늘날 이 세상이 입증해오는 터이다. 그러니 나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못한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죽음이요 파멸이요 생존 세계로부터의 영원한 단절이다. 그래서 내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소유하시고 계시는 분을 "주님"이라 하는 것이니 "주님"이란 뜻은 나의 소유주 즉 나를 소유하고 계시는 주인님이시란 의미다.

그러면 나는 내 것을 어디서 찾느냐, 영원히 내 것이란 없는가. 잊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왜 믿게 되었는가. 당신에게 내리신 선물로 "아들을 주신"[요 3:16] 것을 믿어서가 아니었던가. 문자 그대로 당신에게 주신 선물이니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선물로서 곧 사람 예수 그리스도시다. 당신에게 주신 당신의 소유로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내 이름으로 부활하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 그리고 내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나와 영원히 함께 사시는 것이 아닌가.

바로 주님 자신께서 친히 나를 위해 사시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고 행하시고 그렇게 하시기를 영원히 하시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내게 주신 선물이시니 당신 자신을 위해 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본래 당신 자신을 위해 하시는 일이 없는 아들이시다. 왜냐면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로 계시는 것이 무엇인 가. 방금 설명한 대로 아버지 친히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하실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으니 어떻게 사시나. 모든 것을 아버지를 위해 사시는 것으로써 사시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와 하나로 계신 아들께서 나를 위해 내게 주시는 선물로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되시니, 이는 내 안에 하나로 계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 가운데 계시는 그 모습, 그 위치 그대로 고스란히 내게 주신 선물 바로 그 의미대로 내 안에 성령으로 오셨으니 성령으로 오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위에서 설명한 대로 그리고 방금 지적한 대로 아버지와 하나 되심이 아닌가. 하나로 계시니 어찌 되는가. 아들께서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친히 마찬가지로 내 안에 오심이다. 아들과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오심"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내게 선물로 주신 사실을 두고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행 2:38]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주님께서 나와 하나가 되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그리고 동시에 사람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말씀 자체에 그리스도께 대한 신성(神性), 인성(人性)에 대한 모든 부질없는 변론을 모두 잠재우는 결론이 들어있다. 사람이시기 때문에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사실 수 있는 내 개인적인 선물이 되실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이신 모든 내용 그대로 나와 하나가 되실 수 있는 것이다. 이 하나됨은 사람이 아니시라도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아니시더라도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아니시면 사람과 사람이 하나되지 사람의 본질이 아닌 이질적인 그 무엇[즉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사람인 나와 본질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이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서 하나됨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이시므로 '한 하나님'으로 즉 하나로 계실 수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작용한다. 동질적이고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 됨이 가능하다는 것이요 그리고 조물주 하나님의 영께서 개입하시기 때문에 하나 됨이 가능하다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천사 가브리엘과 나는 하나가 될 수 없으니 가브리엘은 영물이요 나는 육체에 속한[비록 내게 영혼이 있어도] 것이기 때문이요, 그리고 천사가 아무리 영이라 하더라도 가브리엘 자체는 나와 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조물주라 하시더라도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과 하나 되실 수 없는 것은 만일 그렇게 되자면 하나님께서 천사 중 하나로[사람인 우리 중 하나로 태어나신 것처럼] 다시 조성되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실 필요가 없는 것은 천사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범죄한 가령 사탄이면 구원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사탄은 사탄이기 때문에 구원이 또 되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영물들은 처음부터 영계에 소속되어 영계의 흙으로 조성되었으므로 그 자체가 영이라 영이란 모든 필요한 지식을 함유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은 능력으로도 통한다. 물론 조물주 하나님의 지식에는 미치지 못하니, 같은 하나님이시라도 아버지께서는 아들보다 크시고 또 아들이 모르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아신다는 사실을 주님 친히 밝히신 바와 같다. 사탄을 비롯한 타락한 천사들이 구원이 되지 않는 이유는 이같이 모든 지식이 있으면서도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그만한 지식이 있으면 모두 알 수 있음에도 죄를 지었으니 이는 고의로 짓는 죄에 해당하여 영원히 용서가 되지 못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대하여서도 동일한 경고를 내리시고 있는 것이 바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이다. 그래서 짐짓[일부러] 죄를 범하는[고범죄-히 10:26/6:6] 자는 다시는 용서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얼마든지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이 성경에 있겠는가. 요한 사도도 그런 죄가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터에[요일 5:16,17] 이를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여 그런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다면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겁주기 위해 그런 경고가 있다면 성경 역시 거짓말하는 것으로 낙인 찍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이 섞인 불순한 말이라고 누가 감히 그런 모독과 불경의 말을 함부로 하겠는가. 또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런 고범죄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라면 사탄은 억울하다 하지 않겠는가. 같은 피조물이라도 사람은 그렇게 고의적으로 죄를 지어도 탈이 없고 자기는 고의적으로 죄를 지었다 하여 영원한 심판으로 들어가게 되니 공평과 형평의 차원에서 이것은 불합리이니 하나님께는 일체의 불합리가 통용되거나 용납되지 않는다.

첫 사람 아담이 만일 그런 천사들과 같은 지식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래서 범죄에 이르렀다면 사탄처럼 영원히 용서하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런 지식이 있는 존재라면 사탄이 굳이 와서 거짓말로 꾈 필요도 없는 일이다. 왜냐면 사탄은 사람보다 더 많이 더 잘 안다는 바로 그것 때문에 그렇게 사람에게 접근하여 실상을 알린다는 핑계를 대어 여자를 속였고 여자 역시 그런 영물들의 권위[지식]를 인정함으로써 신뢰하기 때문에[신뢰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해야 함에도] 그 거짓말에 넘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이 없는 형편과 처지에서 범죄한 까닭에 사탄과는 달리 구원의 길이 남아 있었던 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원래의 아담의 위치 즉 범죄하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한다. 되돌아가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 되는 길을 택하시다보니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로 계시므로 아버지 친히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담의 원 위치로 되돌아가되 즉 구원을 받되 이같이 그리스도의 영을 영원하신 선물로 모셔 들임으로써 되는 것이므로 이제 지식 면에서는 옛 아담과 같지 않다. 즉 충분한 지식이 있는 것이니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 필요한 지식과 능력이 되어 주시는 까닭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고 필요한 지식은 생명의 법질서 즉 사랑의 법칙이니, 곧 자기 부인을 핵으로 하여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함"으로써 더 "풍성한"[요 10:10][혼자 사는 것보다 그 여러 수십, 수백, 수만 배로] 삶을 누리는 바로 그 비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식과 능력이 있다고 해서 천사들과 같은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런 능력은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을 때 가능하고 또 이루어지는 것이요 지금은 우리가 자연계에 속한 물질적인 육체를 지니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 가장 긴요하고 핵심이 되는 지식 즉 사랑의 법 질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를 위해 이루신 일을 알고 믿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지식 습득이 되는 터이다. 왜냐 하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다시는 내가 살지 않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곧 구원 얻는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고후 5:15/롬 14:7/갈 2:20/빌 1:20,21].

그러므로 이런 사랑 관계는 자유 의지가 그 중심이요 본령이 되는 까닭에 나의 의지가 간섭 받지 않는다는 것은 언제나 사탄처럼 고의적으로 죄를 지을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탄과 같은 운명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시험은 이 세상으로 한정되는 것이니, 하나님 나라에서는 시험하는 자가 없고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모두가 모든 것을 나를 위하는 것뿐이므로 그리고 사탄처럼 죄를 지을 가능성은 이 세상에서 모두 걸러지고 정리정돈된 상태인지라 그런 일이 영원히 있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만은 다르다. 에덴낙원에서 여자가 사탄의 시험을 받았듯이 그 동일한 시험자가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 지배자로 막강한 능력과 힘을 과시하여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까닭이다. 사탄의 이 막강함이란 것은 물론 상대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자연 계에 속한 몸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하여 그래서 사탄을 이 세상 신(神)이라 하는 것이다. 육체에 비하면 영은 신적 존재이다. 그래서 동일한 시험자가 이 세상에 건재하고 우리의 자유 의지가 여전히 작용하니 우리가 고의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개연성도 여전하다.

따라서 아담처럼 또는 사탄처럼 스스로 멸망할 수 있으니 스스로의 의지로 차단시켜야 하는 것이고 다른 이는 그 누구도 이에 대하여 선의든 악의로든 간섭하지 못하는 것이니 당연히 내 운명을 내가 결정하는 것으로서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의 구원을 이루라[to work out your own salvation]"는 경고이다[빌 2:12]. 이미 그 방법이 나와 있다. 그 경고를 따라 위험한 단계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 방법이니 곧 "항상 복종함"[:12]함이다. 이 순종이라는 것은 사랑의 원리에서 갑이 을을 위하고 을이 갑을 위하는 위치로 볼 때 갑이 그리스도시라면 나는 을로서 을이 갑을 위하는 모든 것을 순종이라 일컫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렇게 생명과 사랑의 법질서를 지키면 지킬 수 있는 것이요, 사탄의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한사코 죽음을 한하고 지키면 되는 그런 간단한 일이다. 간단한 일이로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사탄이 이 세상 권세를 쥐고 있어 그에게 절해야 이 세상에서 내로라면서 살 수 있고 그래서 그 영광과 부귀를 차지하는 것이니 그 고난을 견디고 참는지의 여부에 달렸을 뿐이다. 아무리 험하고 고된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누가 감히 영원한 죽음의 길을 자청해서 택할 사람이 있겠으랴마는 현실은 그렇지를 아니하니 어찌하리요. 에서와 같이 팥죽 한 그릇에 넘어가는 사람이 비일비재하니 그래서 이런 경고가 시의적절한 것이다.

삼위일체와 재림

이 둘은 복음의 진실성과 확실성에 대한 최후 확정적 증거가 된다. 마치 학생이 영작 시험을 칠 때 일껏 훌륭한 문장을 지어놓고도 마지막에 피리어드를 찍지 않아 감점이 되는데 그와 같은 피리어드를 찍는 것과 같은 것이 주님의 재림이다. 그러므로 이것 하나만 보아도 그리스도의 복음의 확실성과 진실성에 대한 확고한 증거가 되고 그 자체 증명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계신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람되심, 죽으심, 부활하심의 사실에 대한 근거가 되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상 사실에 대한 확고한 증거가 되는 그런 빠뜨려서는 안되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삼위일체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서 하나되어 계심을 나타내므로 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에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사실 수 없으면 죽으실 수도 없는 것이다. 또 사람이 되실 수도 없는 것이요 사람이 되시지 못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됨으로 인한 구원이 이루어질 수도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도 이 삼위일체로 계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되심을 바탕으로 하여 그 양식대로 따른 그 복사판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토록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악발[무슬림 영주(英主)]은 그 중요한 대목을 잘 지적하여 질문을 하였으나 당시 천주교 신부들은 만족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만족한 답을 해주었다면 이 답 자체가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과 사람되심과 아울러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증거이므로 그 정도의 논리적인 두뇌의 악발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니 믿었을 리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성경이 그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임을 자체 증명하는 데가 많은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의 사람되심과 하나님되심을 동시에 자체 증명하는 가장 확고한 증거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으니까 그렇게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면 반드시 그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심이 마땅하므로 다시 오시는 것이지만, 우리는 주님과 달라 주님과 함께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이나 그리스도와 이제는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을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실 때와 같이 하여 우리의 부활한 모습도 나타냄이 온당한 것이다.

이는 우리의 고난과 죽음이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을 동참함에 있으니 그 영광에도 즉 그 부활하신 영광에도 동참하는 것이 마땅한 순서이고 당연한 이치이기에 그러하다.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 우리의 몸이 또한 그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와 주님의 재림은 인간이 아무리 거짓말하는 재주가 좋아도 절대로 지어낼 수 없는 영역이 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신다는 정도로 끝나지 철저하게 하나로 계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냥 서술할 성질의 것이므로 그 누구도 그것을 지어낸 거짓말로 말할 수 없고, 또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모습대로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것 역시 그냥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역시 그 사실대로 서술하는 것일 뿐이지, 절대로 그것을 어느 누구도 [인간이든 영물이든] 지어내어 거짓 말로 말할 수는 없는 영역이다.

주님의 재림도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대로 서술한 것뿐이지 절대로 인간이나 영물이나 지어내어 그런 거짓말을 만들 수 없는 성역(聖域)임을 지금 여기서 선언하는 바이다. 물론 우리가 그냥 하나님께서 사람되셔서 우리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는 것은 최고도로 머리 좋은 거짓말쟁이에 한해서 그런 것을 지어내어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을 철저히 새 창조에 결부시켜 거짓말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인간이든 영물이든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나로서 사람이 되시어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내 이름으로 부활하신 후 내 이름으로 사시는 존재가 친히 되신 후 영원히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함께 존재하신다는 이 삼위일체에 근거한 인간 구원의 사실은, 철두철미 과학적인 이치로서 (하나님 만드신 이 과학적인 법칙 아래 운행되는 우주만물에서 모든 사실은 다 과학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니 모든 사실은 과학적인 것으로, 모든 거짓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통한다) 인간이든 영물이든 그 머리 속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거짓말이기에는 한마디로 불가능한 그런 한계 밖의 영역임을 다시 강조한다.

모세가 이집트 '바로'왕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때 이집트의 술사들이 그것을 일일이 모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어 그 한계에 이르러서는 바로에게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라"[출 8:19] 한 것과 같다. 그 어떤 피조물의 지어낸 거짓말도 그 한계가 있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목도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원리도 그렇지마는 주님의 재림이야말로 성경의 진실성, 그리스도 부활의 확실성을 가장 명백하게 자체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이 만일 거짓말로서 꾸며낸 이야기라면 결코 그런 "재림"이란 악수(惡手)를 두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자충수(自充手)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백가지 만가지로 생각해보아도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재림이란 말을 끄집어낼 이유가 전혀 없다. 부활이 진실이라는 이유 외에는 그 어떤 이유로도 재림이라는 것이 통하지를 않는다.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그 부활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런 재림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나셨다는 거짓말을 했으면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부활하신 몸을 나타내셨다고 했으니 그것으로 부활의 증거가 일단 되는 셈인데 또 세상 앞에 증거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고 해놓으면 공연히 그 거짓말이 탄로 날 짓만 장만하는 꼴이 된다. 거짓말이 거짓말로 드러날 그런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세상 끝에 세상에 오신다 했으니 그 부활의 증거로 세상 끝에 세상 앞에 나타날 수 있다고도 말할 수는 있지 않으냐 할 것인가. 막연히 세상 끝이라 했으니까 그런 말도 할 법하지 않은가 하려는가.

그런데 그 때는 구원의 때가 끝나서 세상에 아무리 나타나신다 해도 구원 얻을 사람은 없다. 그 때는 그 부활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을 터이므로 그 때는 구원받기에는 이미 늦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거짓말이 사람들로 믿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그 때 마지막 때 나타나시면 온 세상이 그제서야 다 믿을 것이라 했어야 할 일이다. 그리 되면 오직 부활했다는 증거로서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그 때 가서 온 세상 앞에 부활을 증명할 것이라 해서 더군다나 막연하게 세상 마지막 때에 나타난다는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오늘 현재 안믿을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믿을 사람이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하등 필요없는 군소리라는 것이다. 그냥 부활했다 하고 그것을 믿으면 구원 얻는다 하면 그뿐이다. 세상 마지막 때 그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고 해도 그 때문에 지금 안믿을 사람이 믿는 일은 없을 것인데 그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 부활에 대한 증거로서 세상에 다시 오신다고 하면 웃음거리밖에 될 것이 없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멀쩡한 거짓말을 해놓고는 그것을 믿게 하려고 별의별 짓 다한다는 소리만 듣게 되어 있다.

당치도 않은 거짓말을 해놓고 그것을 믿게 하려고 얼마나 안달이 났으면 저런 따위의 말까지 뇌까릴까 저어해서라도 그런 필요없는 말을 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러나 부활이 사실일진대 그 경우는 부득불 재림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신 것이면 성경의 기타 모든 내용이 진실 그것임이 입증되어 버리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원리에 따른 우리 구원

삼위일체의 원리가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수를 쓴다 해도 우리의 구원이 한마디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서 하나가 되어 계시는 것을 말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신께서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물을 지으셨으므로 우주 만물의 창조 및 보존 원리가 되어 있다. 만물이 다 그 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그 간단한 그리고 알기 쉬운 모양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 하시는 모든 일이 이 원리를 따르는 것이므로 우리의 구원 즉 새 창조로서 새 피조물됨도 이 원리를 따른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 원리를 따르지 않는 만물이 하나도 없으니 고로 만물이 이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만물이 삼위일체로 계시는 조물주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그 만드신 바라는 증명이 되고 증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이런 원리를 따라 되어져 있는 것도 당연하니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하나님의 유일하신 인간 구원의 방책이요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가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한 성경의 선언 그대로다.

이 원리를 벗어나고 이 원리를 따르지 아니한 그 무엇도 아무리 그럴 듯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요 따라서 진리일 수 없고 진리가 아니므로 거짓이요 속임수이고 분명 인류의 원수 악령 사탄으로부터 난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 되어 있다. 삼위일체의 원리가 아버지 계시는 곳에 아들 계시고 아들 나타나시는 곳에 아버지 또한 계시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이제 멀지 않아 그 부활하심 즉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신 증거로서의 당신의 영광스러우신 모습을 나타내실 때, 우리의 몸 역시 그런 영광의 몸으로 일제히 나타나게 됨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삼위 일체 원리를 따름이다.

왜냐면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시는 원리를 따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까닭에, 이제 후로부터 영원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곳에는 항상 내가 있고 내가 있는 곳에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혼자 나타나실 리 없고 나타나실 수도 없으니 이는 나와 그리스도는 항상 언제나 하나로 존재하여 행동하고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 우리의 이 원래 썩게 되어 있는 육체가 주님과 같은 영광의 신령한 몸으로 변화함을 입게 된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그 부활하신 모습을 온 세상에 나타내실 필요성이 있어 나타내실 때 우리 각자 역시 그렇게 부활하게 되어 있으므로, 그 부활하게 되어 있는 모습을 주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증거로 나타내시는 그 날 함께 나타내게 됨은 너무나 지당한 일이다.

이렇게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로 나타나는 경우에도 항상 그것이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둘이 함께 있는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이므로, 바로 이 원리를 따라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둘이 하나될 수 있는 이치이기 때문에 주님과 나는 각각 별개의 존재이지만 주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 그리고 주님의 승천 즉 아버지 옥좌의 우편에 앉을 수 있는 위치가 바로 나의 현재의 위치가 되어 있을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는 것이다.

이같이 둘이 하나가 되는 일이 없으면 주님의 죽으심이 주님의 죽음으로 끝나지 나 자신의 죽음 즉 내가 죽은 것이 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주님께서 나의 죽음을 죽으셨다 해도 나의 구원과는 무관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 점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우리의 구원은 단지 주님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다는 그 사실 하나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아주 잘못 알고 있는데 그러기 때문에 성경의 표준에 미달하고 따라서 사탄이 이 허점을 노리게 되어 있다.

사탄이 노리는 것은 인간의 멸망이므로 그런 사람들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바로 보지 않고 별개로 따로 떨어진 것으로 인식하니 죄를 이길 수 없고 죄를 이기지 못하면 그것이 곧 육신대로 사는 것이요, 육신대로 사는 자는 성경에서 경고한 대로 반드시 "죽는"(롬 8:13) 것이지 살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미치지를 못한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골자는 과거 지은 죄로부터의 해방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 즉 죄 자체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자만 생각하고 후자는 간과해 버린다. 이는 마치 동전을 앞면만 중시하고 뒷면은 갈아 뭉개져도 괜찮다고 하는 소리와 같다. 한면만 있고 다른 면이 없는 동전은 화폐 가치가 없는 것처럼 그런 착각에서 구원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인데 그것은 믿음일 수가 없다. 은혜로 얻는 구원인데 그것은 은혜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은혜란 것은 은혜될 만한 사실을 바로 알아야 그것이 은혜인 줄 알지 바로 알지 못하고 어떻게 은혜인 줄 알겠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 이루신 일의 핵심을 아직 알지 못하는데 그것을 아무리 믿는다고 해보아야 믿음일 수가 없다. 또한 구원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부터 해방되었다 하나 앞으로 계속 그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를 여전히 짓게 되면 그 죄의 결과인 죽음을 계속 만드는 결과만 내니 그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에서부터의 해방이라는 것이 전혀 의미없는 것이 될 수밖에 더 있는가.

가지를 아무리 잘라도 그 뿌리가 남아 있는 한 그 아카시아 나무는 계속 또 금방 자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뿌리가 죄요 가지는 그 결과인 죽음이다. 죄는 그 냥 두고 죽음을 해결한다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거니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는 죽음에서 벗어나 영생에 이른다 하지만 현저하게 죄를 짓고 있는 한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을 성경은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로 누차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죽으심과 나의 현재 위치와 별개가 되어 있어서는 나에게 아무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께서 위하여 죽으셨다는 그 사실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 즉 그래서 과거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내가 죽는 일이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똑같이 내가 죽었기 때문에 다시 또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나를 위할 그 나라는 것이 죽어 없어졌으므로 죄의 뿌리가 완전 절단된 채 있다는 사실을 아울러 믿어야 그것이 구원이다. 물론 이렇게 되어지는 그 결과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데에 있으므로, 이상과 같은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피부에 와 닿는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주님을 사랑함으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 요망하는 바이므로, 그런 사람은 그런 지식이 없어도 주님의 성령이 그 안에 와 계심으로써 그런 실질적인 역사가 이루어지는 까닭에, 지식이 있건 없건 그런 것에는 관계없이 생명의 역사는 그대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런 지식이 있어야 구원이 된다는 그런 흑백 논 리는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 마음에 따라 역사하시는 까닭이다. 단 그런 경우에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절대적이다. 어린 아이같은 믿음이 없으면 어느 때든지 그 믿음이 흔들릴 수 있고, 그런 경우 온전한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지식이란 것은 믿음이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믿음 있는 바탕에서는 그런 지식의 필요성이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얘기다.

믿음은 사랑을 낳기 위함이고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랑이 모든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명시된 바와 같이 내가 죽었으니 나를 위해 살 필요가 없어졌으니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에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영원히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자기에 대하여 살거나 죽지 않으니 자연 그 위하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죽었으니 위하여 욕심을 낼 상대가 없으므로 소극적인 측면에서도 죄를 이기는 것이요, 이제는 하나님만을 위해 사니 그런 적극적인 측면에서도 죄를 이기는 것이다.

과거에는 내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전전긍긍해서 죄에게 종 노릇하였지만(히 2:15) 이제는 영원히 영광 가운데 사시는 그리스도 친히 나의 생명이 되어 계시니 전혀 그런 것에는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서 영원히 사는(고후 5:15) 존재가 되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사니 새롭게 삶을 사는 자요 그래서 새 피조물이라 하는 것이다.

긴가 민가 하는 의혹이나 의심을 가지고 서성거려 그런 것이지 일단 이렇게 사실을 사실 그대로 팍 믿어 버리면 사실이니까 그 사실대로 즉 그 사실을 믿는 믿음에 따라 그 효과가 나타나게 되므로 그 때부터는 믿음 자체에 대해서는 별달리 어려움이 없다. 전류가 흐르는 이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대로 그 이치를 따라 물건을 만들었더니 예상대로의 효과 즉 결과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삼위일체에서 아버지께서 항상 아들과 함께 하셔서 하나로 계시고 아들께서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계셔서 하나되어 일하시니, 하나되어 계시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한계가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이 그와 같다.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항상 하나로서 영원히 함께 사시니 겉보기에는 나란 존재 단 하나뿐이나 성령으로 하나되어 계시므로 뚜렷이 그리스도와 내가 구분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 둘 즉 그리스도와 나이지 나 혼자가 아닌 것이다. 나라는 육체만이 겉으로 드러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분명 나의 영혼과 성령께서 함께 계시는 것이다. 성령은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심을 말하는 '이름'이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심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이신 것처럼 이제는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 친히 내 안에 계시니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구성 인자 새 피조물로서의 구조인 것이다. 물론 내 안에 오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만으로는 불가하다. 영원히 함께 즉 나란 존재의 구성 인자로 계실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함께 사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나와 똑같은 사람이시므로, 나와 함께 영원히 하나가 되어 계심으로 나란 존재의 영원하신 구성 인자가 되어 계실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시면서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도 또한 사람이신 그 특징이 여기서 그 본격적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시니 내 안에 영원히 계시는 이상, 이것은 나 자신이 그 마지막 아담이 되어 있는 의미가 됨은 물론이다. 그리스도인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마지막 아담의 위치에 있음이다. 첫 사람 아담이 실패되어 또 하나의 아담을 만드시는데, 낡은 것에 대한 새 것의 의미이므로 이런 조처는 오직 단 한번뿐이어서 "마지막 아담"이시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아담에 별다르게 특별한 의미는 부여되지 않고 단지 첫 사람 아담으로는 못쓰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새 아담을 지으셨다는 의미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 결국 첫 아담이 자기의 첫 모습을 버리고 이제 다시 새 모습을 갖춘 것이 되는 것이다. 새 모습을 갖추었다고 해서 첫 모습과 아주 상이한 더 나은 모습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피조물은 다 완전한 것이지 중간에 있어 점차적으로 완전하게 나아가는 그 무엇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드시기를 마치자마자 완성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을 개량해서 만드셨다거나 발전한 모습을 취한 것이라든가 하는 의미는 없다. 단지 삼위일체 원리로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시다보니 나와 하나되는 의미의 구조를 채택하셨기 때문에 그 결과 내가 새 피조물이되, 하나님의 아들된 구조를 따랐다는 것만 다를 뿐 자유의지가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 것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질 수가 없다. 자유의지란 것은 선택권이 나 자신에게 일임되어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첫 사람 아담이 유혹을 받아 얼마든지 어느 때든지 자유 선택에 의하여 생명과 죽음 양자 택일의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즉 다시금 첫 사람 아담의 경우가 되어 아담처럼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계시록에 천국에서는 다시는 실족하게 하는 것, 거쳐 넘어지게 하는 것이 없다 했으니 그 천국이 아닌 오늘의 이 현실은 그런 거치게 하는 것이 있고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다는 현실을 말함이다.

지금 서 있으나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경고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많은 사람이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시험하는 것이나 거쳐 넘어지게 하는 것이 없는 천국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다. 분명 계시록의 그런 언급은 천국에 이르기 전의 이 세상에서는 거쳐 넘어지게 하는 것이 있음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거쳐 넘어지게 하는 자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현장에서 그런 거쳐 넘어지게 하는 시험자가 없다 하고 그런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그 스스로 그 죽음의 굴 속에 자진해서 들어가는 어리석음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자멸행위다.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까닭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당신의 형상을 만드시고자 하신 것이다. 자기 형상으로서의 피조물을 만드시기 전에 먼저 자기와 같은 존재 즉 또 하나의 자기를 먼저 만드시니 이 곧 아들이시다.

그래서 계시록에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3:14)이시라 했으니 근본이란 것은 그 시작이 된다는 말로서 흠정영역에도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of God"이라 했다. 그리고 바울도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the Firstborn of All Creation)"(골 1:15)시라 했다. 자기를 소재(素材)로 해서 만드셨기 때문에 아들 역시 하나님이신 것이고 영이시다. 그러나 자기 형상으로서의 피조물을 만드시기 전에 만드신 즉 낳으신 아들이므로 이 아들과의 관계는 앞으로 만드실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그 근본이 되고 기본이 됨은 물론이다.

한 아들로서 충분하신 것은 원래 만드실 때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본 의도가 있으시므로 형상은 하나면 족하지 여럿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성경에 아들을 "말씀"이라 하는데 한마디로 자기 표현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이신 것이다. 형상이나 말씀이나 하나님을 나타내고 표현한다는 사실에서는 동일하다. 이제 이 그 형상이요 말씀이신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아들이 당신의 형상이시고 말씀이시니 즉 당신을 나타내시는 직접 표현이 되시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당신의 형상이시고 말씀이신 아들을 통해서 역시 자기 형상이신 만물을 지으심은 자연스러운 순서다. 아들로 말미암아 지으셨다는 것은 그 아들 안에 계셔서 아들과 함께 창조의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보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 만드신 만물이 그 만드신 조물주를 나타내고 증명하고 그 증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볼 수 있도록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총명과 품성에 대한 증거가 되어 있기에는 넉넉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스스로 계시는 그 모습이 아버지와 아들 둘이서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시므로 그 만드신 만물도 모두 이 원리에 따라 지으셨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런 구조적 측면뿐만 아니라 삶의 원칙 즉 생명의 법질서 면에서도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로서 영원히 계시는 모습을 바탕으로 하고 근거로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사랑의 법칙이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둘이서 하나되어 계시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말로도 당연히 표현된다.

둘이면서도 하나처럼 존재하는 그 구조적 원리는 사랑이다. 사랑이란 둘이 하나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원래는 하나였는데 현재 둘로 나누어진 상태에서 이전 그 하나로 있던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움직임인 것이다. 둘이 애초의 그 하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상호 활발히 움직이는 활동을 사랑이라 하는 것이다. 홀로 있으면 사랑이란 것이 필요 없고 사랑이란 낙도 있을 수 없다. 둘이기 때문에 그 둘이 계속 하나를 유지하자고 피차 움직이는 가운데 여러 가지 이야기도 되고 여러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따라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는데 따라서 남녀 사랑도 남자[아담]에게서 여자가 났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이 홀로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이 둘의 관계에서 아버지 계시고 아들 계시는 둘 사이에서 앞장 서시는 것은 아버지시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대로 즉 보이시고 가르치시는대로 하시는 것이다. 이 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조물주와 피조물이라는 둘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는 기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둘 사이를 규정 짓고 조화시키는 근거가 되어 있다. 그래서 만물을 보아도 둘이 짝을 이루는데 둘 사이는 평등하지 않으니 하나는 앞장 서고 다른 하나는 거기 따르는 동작을 취한다. 즉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고 그 구별이 엄격하다. 남녀 관계도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고 평등함에 있지 않다. 과학 문명이 발달할수록 정신 문화는 반비례해서 세상이 오히려 이런 면에서는 무식해진 관계로 크고 작음의 차이를 분별 못해 오늘날 양성 평등이니 하지만 애초부터 인간 삶의 질서가 그렇지 아니한 것이다. 양성 평등은 둘의 조화 대신 알력만 일고 다툼만 나고 결국 그 가정이란 사회 기본 단위는 붕괴되고 가정이 건실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파멸이다.

둘이 하나되는 기본 골격은 이것이다. 둘이 서로 마주 보는 삶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 하여 인간을 만드신 사실에서도 보듯이 인간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모습과 모양으로서의 인간은 앞에 눈이 있어 동시에 뒤를 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볼 수 없다. 바로 그런 육체적 구조이기 때문에 너는 나를 봐주고 나는 너를 봐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둘이 하나되는 기본 바탕이다. 그래서 나는 네게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고 너는 내게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보지 못하니까 나 자신을 위할 수가 없다. 그 대신 너는 나를 볼 수 있으니까 나를 위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는데 한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 산다면 나는 너 없이는 못하고 너는 나 없이 못사니 너와 하는 하나처럼 되고 한 몸처럼 되어 네가 가는 곳에 내가 있고 나 있는 곳에 네가 있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너도 나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는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아예 처음부터 너는 나를 위해 살고 나는 너를 위해 살면 너와 나는 한 몸처럼 영원히 둘이 하나되어 사는 것이다.

바로 이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그리고 머리와 몸의 관계다. 성경은 이 머리와 몸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리고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됨은 물론이다. 이것이 곧 생명의 법질서인데 영물(靈物)로서의 사탄이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이 아름다운 법질서를 어긴 것이다. 번히 알면서도 어겼으니 자기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서 말하자면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택한 것이 되었으니 이후 어떤 선한 조처를 내려주어 다시 기회를 준다 해도 이미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법질서를 어긴 터이라 앞으로도 그런 마음은 계속 들어 계속하여 어길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고의성이 있는 것은 두 번 다시는 기회가 없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조물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피조물을 위하여 하시게 되어 있고 피조물은 이 조물주의 그와 같은 아름다운 뜻에 맞추어 역시 조물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물주의 뜻을 어기는 일이 있을 수 없고 그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는 터이다. 조물주는 피조물을 보아주고 피조물은 그 대신 조물주를 보아드리는 즉 위해드리는 그런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죄는 그렇게 하지 않고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무엇이든 하는 행위이다. 성경에 말씀 순종하라는 것이 바로 이 뜻 외에 달리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이 생명의 법질서대로 않으니 자연 그 결과는 생명이 아닌 모든 것이다. 즉 죽음이다. 생명의 낙이 아닌 모든 것이다. 즉 죽음의 고난이다. 죄가 무엇이고 불법과 불의가 무엇이며 순종이 무엇이고 의가 무엇인지 하는 것이 모두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생명의 법질서가 이같이 사랑이기 때문에 자유 의사와 의지가 기본이다. 하나님께서 이 자유의지를 간섭하시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 사탄의 방종이 생겨났고 아담의 범죄가 유발되었고 오늘의 비극이 잉태하였다. 인간[아담 부부]은 영물로서의 사탄에 비해 지식이 없었다. 이러한 모든 지식은 영물들이 인간에게 알려줌으로써 아는 그런 체제가 되어 있었는데, 영물인 사탄은 그런 생명에 관한 말은 하지 않고 자기의 임의적인 선택에 따라 이 생명의 법질서를 처음부터 어기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속대로 인간에게 죽음의 길로 나가는 길을 속임수로 훈수해준 것이다. 고로 이런 저런 아는 것이 없이 오직 사탄의 꾀임에 빠져 범죄를 한 인간이므로 재차 기회가 있어 구원의 길이 열려져 있는 것이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복된 좋은 소식]이다. 이 지식이란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그 생명을 주는 지식이다. 그러면 나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역시 사랑하게 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를 자기를 다 바쳐 즉 자기를 부인하시고 나를 위해 자기 전체를 주셨으니 나 역시 당연히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식이고 생명의 법질서대로 따르는 생명의 길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 차려 항상 복종하는 자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룰 이유가 없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의 목적이 항상 복종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혹시라도 복종하지 않는 수가 있을까 하여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조심하지 않아도 나는 아무 탈이 없다 할 사람인가. 성경은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한 것이다. 유혹과 시험은 한 순간에 온다 에덴낙원에서의 파멸은 한 순간에 닥친 것이다.

"뱀"이 나타나 그런 말을 함으로써 여자에게 그렇게 닥쳤고 여자가 그렇게 선악과를 먹으며 줌으로써 아담에게 역시 한 순간에 닥친 비극이었다. 사전 대비를 하라면서 서서히 닥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순간만은 하나님은 손놓고 계신다. 손대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탄이 시험하는 현장에서는 간섭하지 아니하셨다. 여자가 본의 아니게 시험하는 순간에도 아담에게 간섭하시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다 끝난 다음에야 그 행한 대로 심판하신 것이다. 어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이 없겠는가.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곧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때이니 그렇지 않은 경우에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세월을 아끼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5-17], "외인을 향하여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 것이다"[골 4:5,6]. 자기중심의 세상에서 시간 역시 자기중심으로 흘려 보낼 확률이 크다.

그러므로 힘써 시간을 원래의 본디 상태[세상이 악하지 않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그런 상태], 정상 상태로 마땅히 되돌릴 필요가 있다. 항상 자기부인으로 일관하여 나 자신을 위해 시간을 보내지 않고 오직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요 4:34] 위한 일편단심의 목적 아래 선용하도록 힘쓰고 애쓸 일이다. 즉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눅 9:23] 한 걸음, 한 걸음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남이 내게 강제로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지는 십자가라는 듯이니 "세상에 대하여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갈 6:14]죽은 것을 말함이다.

그러니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살고자 할 리가 없다.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미워함이다[요 12:25].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 자체가 바로 이런 의미이므로 무릇 누구든지 구원 얻었다고 자처할 때는 바로 이런 자세를 끝까지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입으로는 구원 받은 자라 해도 구원이 되지 않는다[마 7:21/25:45]. 그러므로 이 경우 "세상아, 너와 나는 이제 영영 이별이다. 나도 두 번 다신 너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너도 내게 일체의 관계를 끊어라", 하는 것이 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죽었는데 다시 더 할 말이 없는 것이다[갈 6:14].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모름지기 이런 단단한 각오가 필요함을 주님께서는 망대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이다[눅 14:25-35]. 일반적으로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 엄격한 주님의 지시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교회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예를 거의 볼 수 없다. 이는 대단히 잘못되었다기보다 '구원' 또는 '믿음'의 개념부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남을 인도하려는 결과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다"[33절]는 것은 자기 재산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림 곧 자기 부인을 말함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첫 발을 딛는 이는 마땅히 이 경고를 최 우선으로 들을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 받을 것인가!" 하려는가. 때문에 생명에 들어가는 길과 문이 결단코 인기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시고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서라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그리로 들어가려고 힘쓰라 하셨다.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기 때문이라 하셨다.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 "광야 교회"[행 7:38]가 상징하듯이 그들[구원 받았노라고 한]의 다수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았다고 했다[고전 10:5]. 이렇게 "조심하며"[:12] 힘쓰는 가운데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할"[빌 4:4]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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