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6일 일요일

(5)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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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 폐기

성경에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하시는 말씀이 있다. 이는 장차 오실 하나님의 구원이신 그리스도 이전에 그리스도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한 그림자적 성격의 가르치심이니 성인(成人)으로서의 교육을 받기 전 ‘유치원생 지도’인 모세 율법인 것이다. “가이사[케사르, Caesar]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을 마땅히 하나님의 것으로 자각하여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릴 때 하나님 친히 우리를 위하시는 그 아름다우신 뜻을 따라 보응하신다는 가장 기초적인 지식을 밝힘이다.

원래부터 하나님의 것이 따로 있고 우리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복종해야[소유주의 것이니까 그 소유주에게 돌려드려야] 당연하지만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결과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어 육신의 지배를 받다보니 그리고 “죽기를[죽음은 자연계에 속한 일이고 범죄하기 전 아담은 죽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신령한 몸이었다] 무서워하여 죄에게 종 노릇하는”[히 2:15] 결과로 자기 자신을 마치 자기 것인 양으로 여겨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온 죄인이요 죽은 자로서의 우리 실상을 일깨우시기 위해 “하나님의 것”을 가르치는 초보 교육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가르치심으로 해서 모든 진상이 밝혀졌고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시는 분임을 알아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각자에게 영원하신 선물로 주심을 확인한 이상, 무릇 산 자로서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려 하시는”[고후 5:15] 뜻을, 이런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나 일주(一週) 중 하루를 안식일로 떼어 하나님의 날로 정하여 지키는 것 등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각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자신을 선물로 받아 누리게 된 마당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하게 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어 있는 이상 당연히 그리스도와 함께 된 상속자로서, 하나님 지으신 모든 것[또는 아들 친히 아버지의 이름으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물려받으니 도대체 이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는가. 이미 이와 같이 주셨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실로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이다.

고로 미리부터 모든 것을 받았으나 단지 누리지는 않는다는 것뿐이지 사실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우리는 이 믿음으로써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왜냐면 나 자신은 하나님의 것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냥 알아진 것보다 명확한 사실로써 확인해 주셨으니 성경이 이를 가리켜 우리를 그 "피 값으로 사셨다"[행 20:28] 즉 구속(救贖, 代贖, redemption, 되찾음, 되삼, 속전을 내고 죄인을 구제)하셨다 한 것이다.

“속전(贖錢, a ransom, 포로 따위의 몸 값을 치르고 자유롭게 하기)으로 자신을 주신”[딤전 2:6] 것이다. 즉 나를 위해 죽으신 사실은 나를 그 죽으심의 피 값으로 사셨다는 것과 동의어다. 그래서 이렇게 구원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주(主,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라 부르는 것이니 이는 이제부터는 나를 사셔서 소유하신 그리스도의 소유, 그의 종으로서 절대로 주인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하는 일에만 전심전력 평생을 살겠다는 약속 이행의 현재의 순간순간이라 는 뜻이다.

그런즉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르면서 나 자신을 위해 살아 육신대로 살고 죄 짓고 죄인으로 자처하는 것은 여간 모순이 아니니, 진리가 아닌 사람의 생각을 진리로 호도하여 가르치는 세상 종교의 모습으로서 그런 종교의 모순성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이런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고 고집하는 집단은 아무리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표방하여도 우리는 세상 종교의 하나로 취급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주셨으니 다음은 우리가 드릴 차례가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자신을 전부[백 프로] 주셨으니 우리도 전부 즉 100% 드리는 것이다. 단 1%라도 나 자신의 것이 있어서는 절대로 구원이 될 수가, 성립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드림은 약속의 성격을 띠기도 하다. 왜냐면 중도에 즉 이 세상 지내다가 마음이 변해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번 약속했다고 끝날 일이 아닌 것이다.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지의 여부가 관건이니, 약속을 일방이 중도에 파기하면 그것은 상대방에게도 해약의 구실이 된다.

하나님과 나는 이런 약속 관계에 있음이다. 그래서 인류 구속을 구약과 신약으로도 나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즉결 처분도 이 약속 파기 행위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다 바친다고 해놓은 약속에서 자기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다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 일부 감추고 다 바친 것이라고 거짓말까지 한 것이니 하나님을 속이는 죄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을 비롯해 그 지으신 모든 생물들과 하는 약속이 있고 인간만을 상대로 하시는 약속이 있다.

전자는 다시는 홍수 심판과 같은 것이 없으리라는 노아 이후에 주신 것이 대표이고 후자는 우리의 구원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전자의 경우 무지개를 세우시며 그렇게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은 하나님 일방적인 것으로서 그 약속의 대상은 인간도 포함되지만 자연계의 다른 여러 생명체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기계적인 생명체가 아닌 자유 의지가 보장 받은 인간과의 약속에서는 그런 일방적인 의미가 존재할 수 없다.

쌍방 합의하에 체결되는 약속의 성격을 지님이다. 자유 의사, 자유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 이행으로만 착각하는 것 역시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인위적인 교리의 하나다. 성경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분명히 밝히고 있어도 이를 전면 부정하고 무시하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무 지라 하는 것이다.

무지(無知)라기보다 의도적인 무시(無視)에 가깝다. 그러므로 믿을 때 회개하는 것은 이 약속 체결이 된다. 이렇게 약속하는 자에게만 그 약속을 액면 그대로 수용해주셔서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행5:32 ]을 아직 순종의 이렇다 할 행위가 나타나기 전에도 주시는 것이나, 만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처럼 그 약속을 어기는 경우 하나님께서도 부득불 손놓으시는 것이 되어 쌍방의 약속 폐기가 된다.
 

§ 이단 처형’이라는 살인행위

이단이라고 하여 처형하고 마치 악귀나 된 것처럼 처참하게 살인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집단이 마귀의 일을 대행한다는 것을 증명함이다.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절대로 그같은 일을 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이 친히 손을 대시기는 해도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대행한다는 핑계 아래 같은 인간을 죽이는 일은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절대로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시대는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의 그림자 시대이기 때문에 아직 진리로 나타나시지 않은 때여서 그러했지만,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명백하신 뜻을 다 말씀하신 다음부터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라 그런 살인 행위, 증오, 악한 말과 행동 등은 일절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오직 그 이웃에 대하여 선한 것만을 따르기로 되어 있다. 물론 국법을 집행하는 자는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므로 법 절차에 따라 형을 집행하는 것이지만 이외 기타 이유로는 살인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진리를 믿지 않아도 심지어 진리에 어긋나는 것을 퍼뜨리고 다녀도 그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거나 고통을 주는 체형은 가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둘째, 그런 사람도 얼마든지 회개하고 진리 가운데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항상 그 좋은 예가 된다. 그는 자기 말마따나 유대교에 지나치게 열심이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는데 누구보다 앞장 섰고 그런 일을 하던 중에 주님을 뵙게 되고 회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악한 자라도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땅한 자세다. 그러나 이런 진리에 속한 사람들을 도리어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처형하여 왔던 복음의 이단자들은 말하기를 "이단 사상을 퍼뜨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 하는데 이 역시 무지의 소치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다. 그들 자신이 이단들이기 때문에 그런 짓을 감행하는 것이다.

"유혹을 그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심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살후 2:11)이라 한 대로, 하나님은 모든 이단들을 통해서 구원 받지 못할 사람들을 걸러내시는 것이다. 심지어 구약시대에도 그런 시험하는 자들을 보는 족족 처단하라 하시기보담은 그런 자들이 나타나더라도 거기 넘어가지 말라고만 하시고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너희 순종을 다루어보시기 위한"이라는 시금석(試金石)이 됨을 모세의 율법서에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므로 그런 이단 사상들이 교회에 많이 일어나더라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정하시고 그냥 버려두시는 것이다. 핍박이나 세상 유혹과 더불어 그런 이단의 발호는 진리를 믿기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솎아내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활용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꾸로 생각하기를 그런 이단 사상이 있음으로 해서 사람들이 진리로 나오는 길을 방해한다고만 일방적으로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활용하시는 것이다[살후 2:12].

성경에 누누이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아무나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다[3:2]. 처음부터 하나님 마음대로 제한하시고 간섭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미리 보시고 아시는 지식을 근거로 해서 예정[택정]하신다는 말씀과 같이, 절대적인 각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나타나고 이루어지는 일들을 ‘미리 아심’[foreknowldege]으로써 되어지는 일이므로 거기에 우리가 한 점 의혹을 느끼거나 불만 불평을 가질 이유가 없다.

모두가 다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 판단에 따라 우리 스스로 각자 운명을 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 즉 구원 얻어 마땅한 사람들을 미리 보시고 아심을 따라 그 자유의지에 의하여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함으로써 생명의 법질서를 영원히 지킬 그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이므로 다시 찾으시는 것이고 그래서 그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고자 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그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하는 말이 바로 그 내용이다. 즉 "내가 잃어버렸던 자를 찾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로서 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이런 ‘잃은 자 찾고 죽은 자 다시 살리는’ 일이다. 그 일을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목숨을 하나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전도가 그리고 모든 선한 행위가 다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원수 사랑도 그런 작업의 일환임은 물론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을 받았는데 이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어떻게 아버지를 대할 것인가. 그래서 주님은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 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다.

사탄과 나는 동격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인간[아담] 아래에 종속된 천사들로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의 엄청난 격차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의 결과일 뿐이니 따라서 상대적이다. 나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속해 있고 그는 처음부터의 그대로의 영물(靈物)이다. 그러나 이 능력 면에서의 차이는 우리 배후에 진 치고 있는 거룩한 천사들에 의해 모두 상쇄되고 있다. 절대로 한 쪽으로 쏠리는 일이 없도록 만반의 태세로 임하여 있다. 그러므로 나는 능력 면에서까지 대등한 위치에서 사탄을 1대1로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지식을 가진 나로서는 이런 지식이 없을 때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의젓해지고 의연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모든 면에서 대등한 나와 같은 인간과 적대 관계에서 힘을 겨루고 있는 그런 상태로서 제대로 상황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에게 절대로 질 수 없다는 강한 투지력을 발휘하게 된다. 같은 대등한 피조물의 위치에서 왜 내가 그에게 꿇릴 것인가. 주눅들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나 자신 마지막 아담처럼 되어 있는 기세여서 더욱 그러하다. 내 안에 사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나의 주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라도 한낱 사탄 같은 자에게 굽힐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세상 종교

창조자 하나님이 계시는 것부터 아는 것이 비로소 아는 것이요 무엇이든 이루어가는 첫 걸음이다. 창조자가 존재하면 반드시 그 피조물 인간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게 마련인데 곧 성경이다. 성경은 그 진실성에 대한 증거를 다른 데에서 찾을 필요 없이 자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자체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과연 하나님 말씀다우심이라 할 것이다. 자체적으로 그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일 수가 없는 의미도 된다.

그렇게 되면 피조물의 힘을 빌린다는 것이니 조물주께서 어찌 피조물에게 의뢰하시겠는가. 그래서 그것은 결코 진리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릇 진리, 모든 진리라는 것은 조물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의 그 창조하신 창조의 원리인 것이다. 이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사실 가운데, 악령 곧 이 세상 신에 대한 내력과 인간이 이렇게 불행 가운데 빠져 자기 구제[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이유가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인간이든 이런 악령이든 모든 거짓말에는 논리성이 정연한 듯하면서도 그 근본을 캐고 보면 완전히 반(反)논리 즉 헛것임이 드러나게 된다. 고로 큰 줄거리를 가려내어 그 뿌리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딱 한 마디로 밝혀내어 그것으로 끝나야지 그 거짓말이 쳐놓은 세세한 올무 하나하나씩을 따라가다보면 그야말로 오리무중, 끝없는 미궁, 미로 속만 헤매게 된다. 이는 한도 없이 어리석은 것이다. 고로 그 횡설수설[진리가 아닌 것은 모두가 횡수설이다]의 내용을 알려고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겉보기에는 나름대로 논리가 있는 듯이 보여 그 비논리성을 지적해주면 그 잘못됨을 시정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해주고자 노력하지만, 실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논리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모든 거짓말, 속임수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하나님 계시다는 사실, 성 경이 진실의 기록이라는 것, 따라서 악령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에만 집중시켜 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일관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과 세상 종교와의 차이는 종교는 죽음에서 구원 얻고자 하는 것이고 복음은 그런 단계를 뛰어 넘어[구원은 성취되었으므로]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 군림하고 들어가게 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세상 종교로서 자기의 구원 문제에 집착하여 심산유곡에라도 들어가 도를 닦는 일에 정진하자고 외치는 것이 불교이고, 자기로서는 아무리 해도 구원 문제를 못풀겠으니 일개 인간에 불과한 마리아를 신격화해서까지 그 도움으로 어떻게 해보자 하여 전전긍긍하는 것이 천주교이고, 개신교[改新敎, protestant]는 육신대로 살 수밖에 없어 항상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된다는 오직 한 가지에만 무리하게 매달려 “믿음, 믿음”만을 외쳐대는 것이다.

구원 하나에만 매달리니 여전히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죄에게 종 살이 하면서 자기 구원 하나에만 매달리게 되어 바울이 말한 바 “다른 복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면 그 구원하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룸은 당연히 우리가 할 몫이지 하나님께서 대신하실 리는 없다. 바로 이 목적을 이루고 이 목적에 합치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음이요 따라서 우리 구원을 스스로 이룸인 것이다[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

아담의 첫 창조에서 그냥 생명만 부여하시고, 우리의 새 창조에서 죽은 자를 단지 살리시는 데에 우리 구원의 목적이 있지 않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다 함 께 [하나라도 빠짐 없이-마 25:45] 행복하게 살도록 하심이 목적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것이요 너무나 명료한 이치다. 일부러 고생하는 것을 보시려고 생명체를 존재하게 하실 리 없다. 재미나게 귀엽게 사는 것을 보고자 하심이다. 바로 그 방법이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각자는 그러한 구조의 몸 가운데에서 지체(肢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지체 역할에서는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 자 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왜냐면 그렇게 되면 그런 머리도 몸도 그래서 이웃이란 것도 없고 오직 자기 혼자 존재하는 것처럼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런 한 몸으로서의 유기체에서는 각자는[머리까지도 당연히 포함해서]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일이 일절 없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 ‘방법’인 것이다. 처음 창조에서 생명체를 지으시고 새 창조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 다시 말해 우리 위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죽으신 목적인 것이다[롬 8:14:7-9/고후 5:15].

하나님의 외아들[獨生子]을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요 3:16] 의미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즉 그런 의미를 깨달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16]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이라” 하시지 않았다. 조건이 붙는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이다. 그러면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을 믿고 따름은 당연하다. 그의 말씀이 무엇인가, “새 계명을 주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심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 윤곽을 명확히 잡아주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는 자기를 위하시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게 주신”[갈 2:20] 사랑이다. 둘 사이의 사랑은 나의 전체가 나의 사랑의 상대에게 가고 상대의 전체가 내게 오는 교환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이것은 전혀 어려운 것도 없는 상식 수준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기쁘게 아니하셨다고 했다[롬 15:3]. 즉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세가 일절 아니셨으니 이것이 “자기 부인”인 것이다.

한 마디로, 삶의 방법이 자기 부인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은 산 자로서 우리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도록 하려 하심이라[고후 5:15] 했다. “우리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그렇게 위하심으로 자기 부인을 하셔서 본을 보이시고 따라 오게 하셨으므로 우리도 따라서 즉 그 본을 보이신 대로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인데 이보다 더 간단한 이치가 없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가 바로 이 뜻이다. 다시 말해 바로 이것이 “그를 믿으면”[요 3:16]의 의미이신 것이다. 여기서는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거두절미(去頭截尾)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무아(無我)의 경지는 자기 부인과는 차원이 다르며 형태는 비슷하나 본질이 다른 것이다. 전자는 허공에 뜬 것이어서 바람에 날리는 것이 되어 정처가 없고 후자는 착지(着地)하여 요지 부동한 것이다. 가공적(架空的)인 전자에 비해 어디까지나 현실에 입각한 것이다.

세상에 마음 공부, 마음 수련, 수양 등 말들은 많이 하나 자기 세뇌에 그칠 따름이지만 오직 현실에 입각한 것이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통한 즉 “성령 안에서의 평안과 희락 그리고 모든 의의 열매”[롬 14:17] 즉 선을 행함, 의를 행함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나와 함께 하나 되어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평안과 희열이 있으니 그리스도의 평안과 희열이요 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 평안과 희락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나라는 이중 구조이므로 나는 항상 나를 보는 [혹은 보려고 하는] 대신 그리스도를 대하기 때문에 보게 되고, 보니까 생각하게 되고, 자기가 아닌 상대를 생각하니까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게 되는 것이니 자연스럽게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이런 둘의 하나 됨 즉 항상 자기가 아닌 자기 상대를 보는 눈이요 귀요 마음이 아닌가!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나를 [잃어버린 자식을] 거두어 들이신 것이다. 친히 위하여 죽으심으로 써 ‘죽은 자식을 살리는’ 어버이가 되신 것이다. 탕자의 비유 그대로의 절절한 어버이 심정이다[눅 15:32]. ‘둘이 하나 됨’의 성격이 바로 이러하다. 여기서 사람들이 오직 걸림 돌로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현실이다. 즉 사탄이 살기등등하여 이 세상을 지배하는 현장에 우리가 위치해 있음이다. 즉 싸움이고 일함의 수고다. 이 현실을 무시하고 도피하려 하니까 이런 간단한 진리를 억지로 잡아 비틀고 비뚤게 하고 “혼잡하게 하는”[고후 2:17] 것이다.

그러나 발버둥치는 것으로 그치지 이 테두리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다르다. 이미 죽은 상태에서 구원되려는 것이니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불가하고 하나님만이 하시는데 하나님은 살리시는 분이시다. 살리시되 그냥 살리시면 죽음의 법칙[산 자가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을 어기는 것이므로 새로 창조하시는 방법을 취하실 수밖에 없다. 새로 창조하시니 첫 사람 아담처럼 당당히 산 자로서 만드심이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 즉 우리가 성령 받아 모심으로 앞에서의 설명처럼 둘이 하나 되어 항상 ‘너는 나를 대하고 나는 너를 대 하는’ 것을 가리켜 성경은 “다윗이 그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신다”[행 2:22-25] 함과 같으나, 이 관계는 언제든지 돌변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히 6:6/10:26,29] 상상도 못할 광경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떠나시는 것 즉 성령께서 나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을 욕되게 함이다[:29]. 이런 양면성이 있음을 성경은 다시 경고하여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은 나를 위하시니 "나로 요동치 않게 하시기 위해 내 우편에 계신다" 함과 같으나, 내가 ‘먼저’ 밟고 다시 십자가에 주님을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고 나를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게 되니 이러한 비극적 결과가 어디까지나 내가 원인임을 밝히는 것이다.

처음 믿는 것도 나요 순종하는 것도 나요 사랑하는 것도 나요 그리 고 반대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빌 3:18] 것 역시 나 자신이다. 이렇게 내가 “원수로 행함”으로써 원수 관계를 만듦으로써 “멸망”[:19]에 이르게 되니 그 때는 주님 친히 나를 심판하시는 심판자로서의[마 7:21/25:45] 위치로 바꾸어지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딤후 2:12/마 10:32,33/눅 12:8,9]이라 하는 것이다.

갑이 을을 위함으로써 을이 갑을 위하게 되는데 갑이 을을 위하시나 을이 이에 응하지 않고 갑을 위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으니 갑 역시 이제는 을을 위하실 수 없게 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양면성이니 하나님은 사랑만이 아니시고 소멸하시는 불이심이다[히 12:29].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고, 너희가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0-22] 하였다.

오늘날 거의 모든 개신교의 타락상 즉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배도”[살후 2:3]는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에 있다. 그 결과는 “멸망”[:19]이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일개 ‘세상 종교’로 취급되는 것이다. 양면성에서 일면만 강조하고 다른 일면은 전혀 도외시하는 격이니, 그 이면(裏面)으로서의 참상(慘狀)은 위의 경고와 같이 “찍히고” “꺾이고”,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욕되게 하는” 것뿐이다. 위해야 위해지는데 위하지 않으니 위해지지 않게 되는 비극이다.

그리스도를 시인해야 그리스도께서도 나를 위하시는데 나를 위하심에도 나는 위하지 않으니 나는 더 이상 위해질 수 없는 것이다[마 10:32,33/ 눅 12:8,9]. 오늘날 개신교의 교리는 “우리가 일방적으로만 위해지는 구원”에 있다. 천주교의 “마리아를 통해야 안심할 수 있게 되는 구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심지어는 죄인으로 있으면서도 즉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도 다시 말해 “육신으로 살면서도”[롬 8:13]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 받는다는 소리까지 한다.

"육신으로 살면 죽는다"[:13]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음에도 구원은 받는다는 것이다. 성경에 분명히 마리아가 여러 자녀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이를 부정하고 평생 동정녀로 보냈다는 '소설'을 믿고 있는 성경 부정(否定)과 똑같은 것이다. 이는 영락없이 에덴낙원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심에도 사탄의 말을 믿고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꾐에 완전히 빠져 들어 가 있는 모양새다.

그리하여 '산 자로서[그리스도의 구원을 처음에는 믿었으므로] 죽는 자'가 [아담처럼 되어] 속출한다. 아담은 그 죽음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도로 돌아오는 것으로 일단 그쳤지만 우리의 경우 사탄과 같은 “멸망”이다. 하나님의 엄정한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다. 한번 다루어진 사안은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것으로 종결이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지 않는가. 이런 경고를 완전히 외면하므로 “성령의 위로”만 아니라 “주님을 경외함”으로 “진행해”[행 9:31] 나간 초대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고후 11:4]이라 하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에서 한 면만이 박혀 있고 다른 한 면은 비었으니 화폐로서의 가치가 없다.

사랑이 생명의 법칙인 줄은 양심상으로도 알아 그것을 지키면 된다고 세상 사람들은 말하고 그들의 종교도 말하지만 자기 부인이 될 수 없으므로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부인만 아니다. 죽은 자이니 구원을 말하기 전에 가장 먼저 일단 죽어야 하는데 죽으면 그만이니, "서로 사랑하라"는 생명의 법질서를 지킨답시고 아무리 안간힘을 쓰며 애를 써도 헛되이 부여잡고 나뒹구는 초라한 행색이다. 오직 일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수가 나야 하는데 그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다른 복음’으로 ‘다른 예수’를 전하여 ‘다른 영’을 받게 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명의 법칙은 고사하고 양심의 소리마저 묵살하고 완전히 무법자(無法者)의 행티를 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으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벧전 4:17,18] 함과 같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아니하시고 그리고 그 뜻을 변경하심이 없다[히 6:17,18]. 따라서 우리 구원에 대한 그 뜻은 확고불변하시다. 그러나 자동적인 기계적인 구원이 아니다. 앞의 설명대로 우리의 자유 의지, 자유 선택이 주체(主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루신 다음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로서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일단 산 자가 되고서는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미완성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인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바탕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니, “믿어야 구원되는” 이 ‘믿는 것’ 역시 그런 우리의 주체성에 기인한다. 주체성이라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절대적인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도 간섭하시지 않는 자유 선택권을 보장해 주셨다는 의미다. 이것이 자유 의지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는 일을 모두 하시고 완료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뒤로 물러나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혹은 단독적으로는 일하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자유 의사와 선택에 따라 함께 움직이신다는 의미다. 우리가 30을 일하면 30으로 일하시고 60을 일하면 따라서 60을, 100으로 일하면 그 100을 이룰 수 있도록 능력이 되어 주심이다. 그래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라는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 차별을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의지에 따라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즉 의지는 우리의 것, 그 의지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움직인다 함이다.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다고 성경은 명시한다.

우리가 주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냥 밟히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니 그 확고한 증거다. 자유 의지가 바로 이런 의미다. 때문에 첫 사람 아담이 스스로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자 죽음에 이르는 그대로 되어졌고 절대로 이를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았고 따라서 사전에 막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위해 사람까지 되시고 십자가 고통을 당하시는 지경에 이르는 필연적 결과를 내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 불간섭주의는 철두철미하셨으니 이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은 이와 같이 확인되고 있다. 고로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변화다.

사도 바울 이후 현저하게 그리스도 복음의 순수성을 비교적 제대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는[물론 성경 해석상 다소 이견이 있음에도 불구 하고] 요한 웨슬레나 찰즈 피니 같은 이들도 ‘한번 구원 받으면 그 구원은 변함이 없다’고 조심스럽게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복음 사업 진행 중에 한 때 현저한 믿음의 사람들이 나중에 배반하여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현장을 목도하고 이를 가감없이 술회하고 있다.

그들의 구원관 역시 당시까지의[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이라는 그야말로 일방적인 주장의 영향에서 과감히 탈피하지 못하는 테두리에서 엉거주춤 위치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는 논리적으로 간단한 것이니, 즉 내 스스로 믿음으로써 구원 받았으니 그 믿음을 또한 내 스스로 버리면 그 당연한 귀결로서 나는 구원과는 무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 자유의 의미가 아닌가.

그러므로 ‘한번 구원 받으면 그 구원은 변함이 없다’고 말하기보다 ‘믿음으로 받아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도록 되어 있는 구원’이라 함이 성경적이니 성경이 그런 내용으로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히 3:6]이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확실”은 잘못]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될”[히 3:14] 것이라든지,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할 것”[벧후 1:10]이라 함이 그와 같은 뜻이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왜 내가 지키는가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내 스스로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지키지 못한 사탄을 위시한 악령들은 영원 멸망에 처해 있고 아담은 죽은 자가 되지 않았는가. 그 스스로 지킨 결과로서 "거룩한 천사"들은 거룩한 천사들로서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이다. ‘한번 구원 받으면 그 구원은 변함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요 아무 하자가 없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산 자로서 죽는 자가 되니 그것이 나의 탓이니 어찌하랴.

그래서 사탄이 생겨났고 아담이 죽어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받도록 되어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이를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 지켜 주심은 내 스스로 나를 지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역사다. 내가 나를 지킨다고 내 힘으로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능력으로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왜 잊어 버리는가.

이미 앞에서부터 누차 강조해 오고 있는 내용이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의지 표명이요 그리고 그 실천 의지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대신하시지 않는 것이다. 내 스스로 해야 하는 나의 고유의 영역이다. 그래서 자유 의지다. 이상과 같은 "우리 스스로 이루는" 등의 문구가 있다고 해서 과거 한 때 베드로후서, 히브로서, 야고보서 등은 성경에도 편입되지 못할 뻔한 적도 있었다. 당시도 얼마나 '구원의 복음' 자체에 대해 갈팡질팡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 루터가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기본 주장으로 정리한 로마서에는 그런 말이 없는가 하면 전연 그렇지 않다. “너는 믿음으로 섰으나 너도 믿지 않으면 꺾이고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롬 11:20-22]. 그리고“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8:13]이라 하였으니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뜻이 되는 것이야 누가 판단 못하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죄 짓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육신대로 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 용서는 “과거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3:25]이다. 우리의 현재 죄 또는 미래 죄까지 합쳐서가 아니다. 엄격히 과거에 지은 죄다. "과거에 지은 죄"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을 때 또는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이 없었을 때 지은 죄라는 뜻이다. 즉 "육신"[7:24-8:13] 곧 "사망의 몸"[7:24]에 사로잡혀 불가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의 죄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육신 곧 "죄의 몸"[6:6]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 해방을 맞은 것이다[8:2].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알고도 짓는 죄는 있을 수 없으니 그런 죄를 지었다고 생각될 때에는 대개의 경우 실제로는 아직도 믿지 않는 상태[구원 받지 않은 상태]라고 자가 진단을 내림이 정확하다. 그렇지 않고 구원을 받았노라고 스스로 자부할 경우 그럼에도 그렇게 알고도 죄를 지었다고 스스로 인정했을 때에는 고의적으로 지은 죄가 되어 다시는 용서가 없으니[히 6:6] 이를 유념할 일이다. 오늘날 혼돈을 극한 상황에서 실제 구원되지 않았으면서도 인위적으로 구원 받은 것으로 자처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요한 일서에 요한이 말한 "죄"는 형제 사랑에 관한 것으로서 이런 경우 우리가 보통 그 때나 지금이나 제대로 죄로서 인식하지도 않는 것이 현실인데 이를 경고한 것이다. 분명 회개하지 않으면 "살인자"[요일 3:15]로서 심판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 죄인 줄 인식하지 못하고 형제 사랑이 없음을 요한은 그 편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1:6-2:2]. 이렇게 말하면서도 요한은 "죄를 짓지 말라"고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것이다[요일 2:1/3:6-10/5:18]. 이것이 성경 전체의 일관된 논조의 경고다[고전 15:33,34/벧전 4:1/히 2:14,15].

고의적으로 즉 죄인 줄 알면서는 절대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죄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롬 14:7-9] 자세로의 전환이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희망이 없다[마 7:21/25:45]. 즉시 돌이켜 회개하여 다시는 같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생명이다. 그리하고도 다시 지으면 곧바로 고의적인 범죄가 되므로 그 때에는 회개가 무용지물이 된다[히 6:6]. 때문에 요한 사도도 그 편지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요일 5:16,17].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거니와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영원히 멸망하는 것이 두렵고 영생하는 것이 욕심이 나는데 피땀 흘려 그 영생을 얻고자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기만 하면 된다니까 이거 웬 떡이냐 하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감동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 생애 전체를 뒤바꾸는 획기적인 생의 전환점을 이룸이다. 완전히 그 삶을 뒤집어 새로운 것으로 창출해냄이니 그래서 말 그대로 새 창조요 다시 출생함이다.

결단코 가볍게 아무렇게나 간단히 생각하지 말 일이다. 세례 받고 교회에 다니고 그런 정도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겠다는 결단이 믿음이다. 이런 결심은 절대로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 따라서는 죽기만큼이나 힘든 순간이 된다. 물론 일률적으로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사탄이 딴에는 사력(死力)을 다해 방해하고 있다는 측면만 생각해도 절대로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나의 삶의 전체 색깔을 영구히 뒤집어놓는 일대 전기(轉機)가 이루어지는데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이 때까지 세상을 사랑하던 것을 미워하게 되고 자기중심으로 살던 생활 패턴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변하여 바뀌는데 그래서 생의 방향이 180도로 달라지는데 평상시처럼 옆집 나들이 가는 식으로 되는 일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지만 "우리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믿는 것과의 차이다.

나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할 때는 "아 참 고마운 일이구나. 태도를 바꾸어야 하겠다" 정도로 그칠 수 있지만,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 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죽음을 나 자신의 죽음이요 내가 장사되는 것으로 확인하게 되는 시점에 이름에서 죽음 자체에 대한 확 달라지는 인식이 절대 필요불가결하게 되는 것이다. 관념적인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역사적 현실이므로 나의 죽음 역시 현실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니 절대로 격동이 일지 않을 수 없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배우지 않고는 아무도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음을 이미 선언하신 터이다[요 6:45,65]. 이미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기 전에 자기의 죽은 자됨을 자각하지 않는 한 그래서 이 세상 전체가 죽음임을 실감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죽는 몸이구나" 하고 이를 절감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 올 수 없는 것이다. 왜냐면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죽으셨던 그러나 살아나 이제는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나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죽음의 원인과 결과 등 일체의 것을 정도는 다르지만 내 스스로 거기 동참하지 않고는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어찌 감히 아무 느낌도 없이 받아들일 것인가. 상식 수준에서 판단해도 분명 그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님[主]으로 모심으로써 믿으라,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이 구원을 얻는다"[행 16:29]고 안내를 해 준 원인도 빌립보 간수 스스로가 이미 하나님의 진노 앞에 스스로가 노출되어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을 보고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31].

그러므로 이런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 접하지 않고는 목이 마르지 않으니 물을 찾을 마음이 안나고 건강하니 의사와 약이 무의미한[눅 5:31] 것과 같이 되어 그리스도 앞에서 무감각으로 일관하여 무덤덤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단지 영생이 욕심 나는데 또는 있을지도 모르는 영원한 멸망에 대한 불안감이 있기에 미래에 대한 보험 들어 두는 요량으로 믿어도 별 손해는 없겠다고 여겨져서 "믿는" 이마다 죄 용서도 안되고 성령께서 첫째 임하시지를 않는다.

그런 것이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믿는 것이 없는 것이다. 첫째 자기가 죽은 자임을 믿지 않는데 그리스도는 어떻게 믿는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이라는 순전히 인간의 자기중심이 만들어낸 교리, 성경에는 없는 거짓말로 지어낸 교리가 등장한 것이다. 목말라 죽을 지경이고 병들어 죽음에 직면해 있는 이들만의 그리스도다. 그들 외에는 결단코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가 없음을 명심할 일이다.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할 것이니 이는 그[인자(人子, 그리스도)]를 믿는 이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5] 하신 것이다. 모세가 왜 뱀[청동으로 만든 뱀의 형상]을 만들어 그렇게 장대에 높이 달아 들게 했던가[민 21:9]. 광야 가운데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아갈 때 그곳의 불뱀[fiery serpent]들이 사람들을 무는 족족 그 독에 걸려 죽어갔기 때문이다. 그 독사에게 물려 죽음에 처해 있다고 깨달은 자만이 그 장대에 높이 들린 뱀을 쳐다볼 때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현재 죽음에 처해 있다고 믿지 않는 한 천하 없어도 그 뱀은 단지 청동으로 만든 뱀 이상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드렁해서 쳐다보려고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꼭 그러하시다.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이 죽음 곧 비참한 죽음의 현실 앞에 내동댕이쳐진 현실을 자각하고 직시하지 않고서는 천하 없이 그 누구도 그리스도께 관심을 갖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관심이 아주 많다. 아주 흥미 진진한 인물임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것인가? 그래 그 관심이 흥미가 당신을 영생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의 의미는 영생이고 구원이다. 그 영생과는 당신이 아주 남남이라는 그 뜻이다. 때문에 단지 영생 하나만이 욕심이 나서 혹은 막연하기만 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그리스도를 당신의 표현대로 "믿는" 것이라면, 당신은 아무리 주교, 신부, 목사, 장로, 집사, 권사가 되어 있어 몇 십년의 경력을 쌓고 있어도 구원과는 담을 쌓고 지내온 것이다.

그리스도 죽으심의 그 처참한 모습은 이 세상의 죽음의 꼴을 증명함이다. 나의 죽음의 실상을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냄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비쳐진 세상의 실상을 보게 되고 나의 참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빌립보 간수가 영적으로 본 것이 바로 그런 자기의 화상(畵像)이었던 것이다. 그 자기의 현실적인 참 모습을 대하면서 무서워하고 떤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절감하고 비명을 내지르는 판에는 즉각 구원이 아니고는 아무 대처가 없다.

왜냐면 그렇게 죽음에 노출되어 뒹굴고 있는 마당에 현실적으로 생명이 탁 내 눈앞에 나타나 나를 감싸주어야지 그렇지 않고는 그 공포와 고통 속에 단 한 시인들 견딜 장사가 없다. 천천히 구원이 된다든가 죽어야 구원이 된다든가 하는 것으로는 그 불안을 절대로 잠재울 수 없는 터이다. 모세가 세운 뱀의 효과가 즉시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모세의 뱀에 빗대신 것이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그 현장에서 그 즉석에서 구원이다. 영생이다.

죽은 자의 영역에서 벗어나 당당히 산 자가 되었으니 영생이 아니면 무엇인가. 하나님은 한 때 살다가 죽을 것은 아무 것도 창조하시지 않는다. 생명을 주실 때에는 그것은 필연적으로 영생이다. 아담은 영생하도록 지으심 받은 것이다. 그래서 영생하지 못하는 이 시한부 생명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오는 것을 가리켜 에덴낙원에서 "네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아담이 죽음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죽음을 이해하는가, 바로 자연계의 동물들이 그렇게 시한부 목숨으로 죽어가는 것을 현저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그런 충분히 알아듣지 못하는 "죽음"이라는 개념으로써 경고하실 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소위 "영적인 죽음"이라는 막연하고 애매 모호한 개념으로 그런 경고를 하실 리가 없다. 그렇게 되면 아담이 그 죽음의 의미를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범죄했다는 결론일 것이니  하나님은 아담에게 죄를 물으실 수 없고 따라서 그 죽음은 부당한 것으로 낙인 찍혀져 하나님께 불명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일을 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입각한 것으로서 지극히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그와 반대되어 그렇지 않은 것이 거짓말이다. 이런 적나라한 현실을 가리고 그대로 말하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라고 취급해서 아무 하자가 없다. 진실 그대로를 말함이다. 이런 죽음의 현실을 절대로 말하지 않고 그냥 무상(無常) 하나만 말하는 불교는 그래서 거짓된 것이라 하는 것이다. 죽음의 현실을 강조하지 않는 모든 세상 종교가 모두가 그러하다. 소위 "기독교"라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이 죽음의 현실을 실상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종교의 특색은 절대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도대체 죽음의 세상을 죽음인 줄 알고서 그래서 그 죽음을 실감하고 있는데 그런 세상을 사랑할 사람이 어디 있고 거기 연연할 이가 누가 있겠는가. 산중에 들어가 고독과 벗하면서 수도에 정진하는 것이 세상을 미워함인가. 성경에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요 12:25] 하셨는데 자기 생명을 미워함이 곧 세상을 미워함이다. 세상 사람들을 미워함이 아니라 세상 삶 그리고 그런 삶의 낙을 미워함이다.

그렇게 산속에 홀로 들어가 모든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심지어는 부모 자식의 연(緣)까지 단절하고 모진 마음을 품고 득도했다고 하여 산에서 내려 와도 그 신도들에게 절대로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단지 이 세상의 허무함을 알라고만 하는데 이는 근본 의미부터 다르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부인을 말함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실상 자기를 부인할 수도 없다. 자기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영생에 들어가려 하는데 자기를 부인하다가는 말부터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은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분명히 보듯이 나 홀로가 아니라 여럿이 하나됨에서 그리고 그 여럿이 한 머리를 모시고 그 머리를 중심으로 바로 '나 자신'과 같은 '하나'를 이룸에서만 가능해지는 삶의 최고 지혜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제각기 뿔뿔이 자기가 득도하고 자유 해방의 경지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판에 그런 머리와 몸의 개념조차 들어갈 틈이라도 있을 리 없다. 삼윙일체의 원리는 처음부터 최초 원인 혹은 최고 원인 또는 제1원인이신 조물주 하나님을 인정함에서부터 시작되는 원리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롬 4:25] 하셨으니,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즉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확정적으로 드러난다. “살아나셔야 우리가 의롭다 하시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 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고전 15:14,17,18]이라는 결론 그대로다.

다시 말해 ①'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구원된다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통한 구원이 아니나, 그 죽으심을 바탕으로 해서 ②'다시 살아나셔야' 우리의 구원이 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의 구원임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왜냐면 ①의 경우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실질적으로 나의 죽음이 되지는 않고 단지 나의 죽음으로 간주한다, 치부(置簿)한다, 계산한다는 의미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 용서 받는 세례의 의미가[행 2:38]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지는 것에 있을진대 필연적으로 ②의 경우일 수밖에 없다. 이렇기 위해서는 살아 계신 주님과의 관계여야 하는 것이다. 죽으신 것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살아 계신 주님과 상대하므로 앞에서 설명한 대로 둘이 하나 됨으로써 오직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고 다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 살지 않으니 악을 행함이 있을 수가 없고 주님을 위해 사니 선을 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이 뜻이다.

죄를 지으면 무조건 죽는 것이다. 생명의 법을 어겼으므로 즉 생명을 떠난 행위를 했으니 생명을 떠나면 죽음이지 다른 결과를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된 까닭에 도리 없이 그 후로 연이어지는 모든 인간이 죽은 자이다. 고로 구원되기 위해서는 일단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수가 있어야 한다. 인간은 죽은 자로서 죽으면 죽는 것이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친히 마지막 아담이 되시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사람이 되시되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전의 모습이 아니라 범죄 후 죽은 자로서의 모습 그대로여야 한다. 그리고 생명 아닌 죽음이므로 죽음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고통과 고난을 당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살아나시게 되는데[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하는데]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렇게 하심이다. 첫 사람 아담은 육체로 다시 말해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게 함으로써 인간되게 하는 것이었지만[그러나 '죽은 자'로서 태어남], 마지막 아담은 영[성령, 그의 영]으로서 즉 성령을 "물려받게" 하심 다시 말해 성령을 선물로 주심으로써 ‘인간되게’ 하심이니 이 경우 '산 자'로서의 인간 됨이다.

따라서 이를 가리켜 “다시 난다”[요 3:3] 하신 것이다. 그리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이고 성령으로 반드시 나야”[:6] 구원이라 즉 산 자가 된다 하신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 곧 그리스도를 영원한 선물로 내가 받아[영접해] 모시니 새 피조물로서의 나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와 나’라는 이중(二重) 구조가 된다.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됨’이라 하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단 하나로서의 형상이지만 그 내용인즉 그리스도와 나와의 합함, 연합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라 한다. 이렇게 둘이 하나 되는 관계에서는 두 몸이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로 그 하나 됨이 유지되는 것이니, 즉 갑은 을의 소유로서 을만을 위하고 을 역시 갑의 소유가 되어 당연히 갑만을 위하게 되므로[고전 7:4]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다[고후 5:15].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죽으신 즉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즉 뜻임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야 즉 아들 구실을 해야 아들로서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감이다[마 7:21]. 이 세상을 죽음으로 보는 현실 감각과 더불어 논리적으로도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 인한 나의 죽음은 세상에 대한 죽음 즉 세상에 대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이요[갈 6:14], 나 자신에 대한 죽음[2:20]이니 이는 곧 "죄에 대하여 죽음"[롬 6:2]이다.

왜냐면 죄는 자기중심 곧 "자기를 위하여 사는"[고후 5:15] 것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없음은[롬 14:7-9]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기 때문이다[고후 5:14]. 내가 죽었는데 그래서 장사되었는데 무슨 내[과거 자기중심으로 살던 나]가 있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의미로 세례 받은 것은 헛것이요 거짓이고 따라서 죄 용서도 없고[행 2:38] 성령은 더더욱 없는 것이다[유 1:19].

그러므로 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된 것과 같이 모름지기 죄를 짓는 자는 죽음이다. 범죄하여 죽은 즉 죽은 자가 된 아담의 “허리에서 나는”[창 35:11] 모든 인류가 다 죽은 자일 뿐 아니라 각자 개인의 각종 죄로 인해서도 죽어야 하는 죽은 자였다. “선하신 이는 하나 님뿐이시라”[막 10:18] 하심은 모든 인간이 다 악하다는 것이니 곧 죄인이므로 죽음밖에 없다는 의미이시다. 하나님이 선하시니 그 만드신 피조물도 당연히 선해야 즉 선행을 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이유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선을 행하지 않아도 영생할 수 있다면 사탄이 그리고 아담이 범죄했다고 죽음, 멸망에 이르게 하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선’은 좋은 것이고 ‘의’는 바른 것이다. 나쁘지 않고 좋은 그리고 올바르게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므로 당연히 당신 자신께서 그러하시므로 그렇게 만드신 것이며 따라서 그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그와 같이 살기를 바라심은 당연하다.

그와 같이 살지 못하는 피조물은 하나님의 일을 헛되이 돌리는 것이므로 다시 말해 그런 나쁘고 옳지 못한 피조물을 애초 만드시고자 작정하신 것은 아니므로 그 피조물 세계에서 제외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을 만드시기를 일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지는 것으로 만드시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처럼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만드신 까닭에 피조물 세계에서 제외된다고 해서 그 존재가 없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고 버림받은 자들로서 생명과의 대칭 개념으로서의 죽음과 고통의 영역에 잔존하게 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지만 그 죽으심 자체가 우리 구원이 되지는 않는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이 우리 구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위해 죽으심은 그렇게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심이 우리 구원이 되는 까닭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기 위함이다. 이유는 명백하니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우리 위한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이 아니냐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그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는 것은 그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이 나의 다시 살아남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나 위하여 다시 살아나심이 없다면 나 위해 죽으심이 전적으로 무의미하게 된다. 그런즉 내가 어떻게 행동하든지 즉 선을 행하지 않고 의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우리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무조건 이 사실에 의하여 우리는 구원된다는 것은 착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접근조차도 못한 것이다.

우리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우리 구원이라는 오해 저변에 깔린 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함에 있다. 이는 앞서의 죽음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께 나오는 사람은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이 완전히 죽음 일색이라는 사실에 눈 뜬 결과다[행 26:18]. 따라서 그런 사람은 이 세상 삶의 낙이나 자기중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는 것은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어하는 심정이 시종일관하는 정상 상태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중도에 얼마든지 이 인식이 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탄의 시험은 이와 같이 생명과 사랑의 법질서대로 사느냐 즉 사람 삶의 근본 원리를 처음처럼 그대로 지키느냐 여부를 가리는 것임과 동시에, 항상 이 세상에 대한 어떠한 자세냐 즉 처음 믿을 때의 죽음 일색으로 보던 안목이 변함이 없느냐를 놓고 가해진다고 하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 주님의 광야 시험이다[눅 4:1-12]. 이 세상에 대한 올바른 안목은 이미 설명한 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는지를 가리는 첫번째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대로 살면서도”[롬 8:13] 즉 자기중심으로 자기를 위해 살면서도 구원은 얻어 영생 얻자는 것은 자기중심의 악한 욕심에 불과하다. 생명의 법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지 욕심 낸다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은 실질대로 말하면 죽음, 고통, 저주밖에 없는 것인데 사탄이 이 세상 신과 지배자가 되어 눈을 어둡게 하기 때문에 삶, 생명, 생명의 낙 또는 축복쯤으로 착각하고 있을 따름이다.

축복하시리라는 약속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그림자적 형태로서 당시 모세 율법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임한 것으로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모든 축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신 것이요 그리고 그 이전에 생육하며 번성하라고 축복하심은 생육과 번성을 위한 축복인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함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육과 번성의 축복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수 있는 것이고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세상에 오실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더 이상 그런 상징적인 “축복”이 있을 수가 없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축복이 이미 임해지고 이루어진 까닭에 지금은 오직 그런 축복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 오직 그 일만을 하는 것이다. 이런 죽음의 세상에서 누릴 축복일 리가 없다. 그렇다면 부유한 자는 장차 받을 만한 위로를 이미 다 받아 버렸다는 무서운 선고를 내리실 리가 없다[눅 6:24,25/16:25]. 이 세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과 고난과 저주의 질서 아래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렇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이라면 삶의 축복을 받은 세상이므로 급하게 망할 리도 없다. 급하다는 것은 내일이라도 복음만 세상 끝가지 전파가 되면 세상이 끝난다는 언질을 주셨기 때문이다[마 24:14]. 그러니 망하는 것은 오직 시간문제로서 신속히 망할 것이요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복음 전파만을 위해 한시적으로 존재함이다. 그러므로 이는 이 세상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일 수가 없음을 입증함이다. 축복은 단절되는 법이 없고 영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받게 될 핍박과 환난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세상에서 받으신 그대로 세상에서 주님의 것 즉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한 사람들”로서의 우리도 필연적으로 당할 것임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천국을 위하여 고자가 된 자도 있다 하셨고 누구든지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셨으니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축복은 이제 완료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서부터 이 세상은 마지막 때로서 분류됨은 같은 맥락이다.

우리의 구원은 죽은 자가 산 자가 됨과 동시에 산 자가 죽은 자 됨에 있다. 죽은 자가 산 자 됨은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 고 산 자가 죽은 자 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는 산 자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이제 더 다시는 죽음의 세력에 매여 있지 않고 이에서 벗어나 해 방되었다는 것이니 따라서 다시는 죽지 않는다는 의미다.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니 죽음이 완전 무기력화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 자유를 누리는 것이니, 왜냐면 이제는 아무리 죽어도 결국은 다시 살아나도록 되어 있는 구조인지라 이전처럼 “죽기를 무서워하여”[히 2:15] 과거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던 일이 있을 수 없다. 미약하게 구차하게 육신에 매여 종 노릇하는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로 옷 입어”[롬 13:14]]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마치 내가 그리스도처럼 되어 있는 마당에 더 이상 이 세상 생명 또는 그 낙에 연연하여 매여 있을 하등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아니라 그 죽으심에 ‘다시 살아나심’이 마저 맞추어져 양면을 이루어야 우리의 구원이 된다는 의미임을 앞에서 강조했다. 죽으심만 강조하면 동전의 일면만이 되어 화폐 가치가 없는 것처럼 구원의 의미가 완전 배제되는 것이다. 그러면 산 자가 죽은 자가 된다는 것 즉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전히 “죽었다”[골 3:3]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죽은 자로서의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인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임하심과 같이 우리 역시 ‘현재’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여전히 과거 ‘죽은 자’로서의 모습인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구원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다시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20:21]. 이것이 성령 받아 모심 즉 그리스도를 내 안에 영접해 모시는 또 다른 의미이다. 그러나 죽은 자 되어 죽음 가운데 있어 산 자로서의 모든 삶의 향락이 부정되어 있으나 그렇게 죽은 자 가운데에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고 증명이 되어 있는 이상 나 역시 부활하게 될 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즉 다시 살아나심이다. 즉 우리를 위한 ‘대신 죽으심’이 우리 구원의 근간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나의 죽음과 나의 다시 살아남으로 소유하여 내가 죽어 다시 살아난 영원한 불사불멸(不死不滅)을 이루어 있으나 이 바탕 위에 그리스도처럼 산 자로서 짐짓 죽은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뜻[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서 그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신 것처럼] 곧 이제 완결된 하나님의 창조[그리스도로 친히 이루신]를 바탕으로 사람 구원해내는 일에 돌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롬 6:8] 한 대로, 지금은 ‘죽음’의 때, ‘죽음’의 장소로서의 이 세상의 의미다. 우리가 “죽었고”[골 3:3]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3]는 것이 그 뜻이다. 우리가 살아도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니 함께 살면 그리스도의 모든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당히 사는 것이므로, 이런 구차하고 초라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의 막강한 능력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살지 않는 일체의 것은 죽음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빌 3:13,14] 자세가 다름아닌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 다”[:10,11]에서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12] 하였다. 우승하기 위하여 옆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앞을 향해 매진해 나가는 모습을 강조함이다[고전 9:24]. 이렇게 강조한 후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 저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들의 신(神)은 배(腹)요 그 영광은 저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 3:18,19]는 경고를 빠뜨리지 않았다.

성경에 마지막 원수는 죽음[고전 15:26-“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 했다. 그리고 사망의 권세를 쥔 자가 사탄이라 했다[히 2:14,15-“자녀들(children)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므로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러므로 처음부터 죽음도 없었고 영물 중 하나인 사탄이 죽음의 권세를 잡지도 않았음을 나타냄이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 생겨난 것이다 [롬 5:12]. 그래서 원수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이 죽게 되어 있었다면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죽음이 인간의 원수일 리가 없다. 그리고 범죄할 때 인간[아담]이 사탄의 말을 믿고 따르지만 않았어도 사탄이 사망의 권세를 행사할 까닭도 없다. 사탄이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임금”-요 14:30]이기 때문에 또 이 세상이 바로 인간에게는 죽음의 곳이요 죽음의 때이므로 사망의 세력을 쥐고 있는 것이다.

고로 사탄이 척결되면서 죽음도 끝장이 나게 된다. 여기서 죽음이라는 것은 멸망이 아니라 인간이 육신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말함이다. 따라서 멸망[영원한 죽음]과는 구별된다. 영원히 존재하여 영생하게 되어 있는 인간이 자연계의 동물처럼 육체의 썩음을 당하는 것을 가리킴이다. 멸망은 그 육체가 그대로 있으면서 고난만 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는[불 못] 구더기[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하셨다[막 9:48].
 

‘이단 처형’이라는 살인행위

이단이라고 하여 처형하고 마치 악귀나 된 것처럼 처참하게 살인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집단이 마귀의 일을 대행한다는 것을 증명함이다.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절대로 그같은 일을 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이 친히 손을 대시기는 해도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대행한다는 핑계 아래 같은 인간을 죽이는 일은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절대로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시대는 그리스도 오시기 이전의 그림자 시대이기 때문에 아직 진리로 나타나시지 않은 때여서 그러했지만,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명백하신 뜻을 다 말씀하신 다음부터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라 그런 살인 행위, 증오, 악한 말과 행동 등은 일절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오직 그 이웃에 대하여 선한 것만을 따르기로 되어 있다. 물론 국법을 집행하는 자는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므로 법 절차에 따라 형을 집행하는 것이지만 이외 기타 이유로는 살인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진리를 믿지 않아도 심지어 진리에 어긋나는 것을 퍼뜨리고 다녀도 그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거나 고통을 주는 체형은 가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둘째, 그런 사람도 얼마든지 회개하고 진리 가운데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항상 그 좋은 예가 된다. 그는 자기 말마따나 유대교에 지나치게 열심이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는데 누구보다 앞장 섰고 그런 일을 하던 중에 주님을 뵙게 되고 회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악한 자라도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땅한 자세다. 그러나 이런 진리에 속한 사람들을 도리어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처형하여 왔던 복음의 이단자들은 말하기를 "이단 사상을 퍼뜨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 하는데 이 역시 무지의 소치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다. 그들 자신이 이단들이기 때문에 그런 짓을 감행하는 것이다.

"유혹을 그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심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살후 2:11)이라 한 대로, 하나님은 모든 이단들을 통해서 구원 받지 못할 사람들을 걸러내시는 것이다. 심지어 구약시대에도 그런 시험하는 자들을 보는 족족 처단하라 하시기보담은 그런 자들이 나타나더라도 거기 넘어가지 말라고만 하시고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너희 순종을 다루어보시기 위한"이라는 시금석(試金石)이 됨을 모세의 율법서에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므로 그런 이단 사상들이 교회에 많이 일어나더라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정하시고 그냥 버려두시는 것이다. 핍박이나 세상 유혹과 더불어 그런 이단의 발호는 진리를 믿기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솎아내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활용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꾸로 생각하기를 그런 이단 사상이 있음으로 해서 사람들이 진리로 나오는 길을 방해한다고만 일방적으로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활용하시는 것이다[살후 2:12].

성경에 누누이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아무나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다[3:2]. 처음부터 하나님 마음대로 제한하시고 간섭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미리 보시고 아시는 지식을 근거로 해서 예정[택정]하신다는 말씀과 같이, 절대적인 각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나타나고 이루어지는 일들을 ‘미리 아심’[foreknowldege]으로써 되어지는 일이므로 거기에 우리가 한 점 의혹을 느끼거나 불만 불평을 가질 이유가 없다.

모두가 다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 판단에 따라 우리 스스로 각자 운명을 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 즉 구원 얻어 마땅한 사람들을 미리 보시고 아심을 따라 그 자유의지에 의하여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함으로써 생명의 법질서를 영원히 지킬 그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이므로 다시 찾으시는 것이고 그래서 그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고자 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그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하는 말이 바로 그 내용이다. 즉 "내가 잃어버렸던 자를 찾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로서 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이런 ‘잃은 자 찾고 죽은 자 다시 살리는’ 일이다. 그 일을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목숨을 하나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전도가 그리고 모든 선한 행위가 다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원수 사랑도 그런 작업의 일환임은 물론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을 받았는데 이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어떻게 아버지를 대할 것인가. 그래서 주님은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 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다.

사탄과 나는 동격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인간[아담] 아래에 종속된 천사들로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의 엄청난 격차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의 결과일 뿐이니 따라서 상대적이다. 나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속해 있고 그는 처음부터의 그대로의 영물(靈物)이다. 그러나 이 능력 면에서의 차이는 우리 배후에 진 치고 있는 거룩한 천사들에 의해 모두 상쇄되고 있다. 절대로 한 쪽으로 쏠리는 일이 없도록 만반의 태세로 임하여 있다. 그러므로 나는 능력 면에서까지 대등한 위치에서 사탄을 1대1로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지식을 가진 나로서는 이런 지식이 없을 때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의젓해지고 의연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모든 면에서 대등한 나와 같은 인간과 적대 관계에서 힘을 겨루고 있는 그런 상태로서 제대로 상황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에게 절대로 질 수 없다는 강한 투지력을 발휘하게 된다. 같은 대등한 피조물의 위치에서 왜 내가 그에게 꿇릴 것인가. 주눅들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나 자신 마지막 아담처럼 되어 있는 기세여서 더욱 그러하다. 내 안에 사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나의 주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라도 한낱 사탄 같은 자에게 굽힐 이유가 없는 것이다.

§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새 창조로 이제 더 다시 죽은 자가 되지 않고 산 자가 되어 있음을 말함이다. 창조이니까 이 하나님 홀로 이루신 창조의 역사(役事)를 믿으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시고 값없이 받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전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어주셨으므로 그것도 우리가 행한 것은 죄밖에 없어 죽음과 멸망에 해당되지만 이와 같이 산 자가 되게 하셨으니 은혜요 이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산 자가 된 다음에는 우리가 산 자가 되어 넉넉히 할 수 있는 일 즉 마땅히 할 일을 아니할 경우 그것은 아담처럼 범죄하는 것이 된다. 아담의 범죄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우리 역시 죽음이다. 마땅히 할 일을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주님 위해 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첫 사람 아담은 범죄의 결과 신령한 몸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쳤지만 우리는 범죄의 경우 이미 자연계에 속한 육체 가운데 현재 있으므로 멸망밖에 없다[빌 3:19].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나 위하여 죽으셨다는 구원에 관한 한 완벽한 지식에 도달해 있으므로 여기서 범죄하면 고범죄[알면서도 짓는 즉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로서 회개의 여지가 없는]에 해당되므로 다시는 용서가 없다[히 10:26]. 고로 사람으로서 당연히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이나[왜냐면 그것이 사람 사는 방법이므로], 구원을 받은 다음이나 받기 전이나 그것을 구원을 얻는 또는 이루는 방편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되어 자기중심이다.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려는 일편단심으로 선을 행함이다. 그래서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란다”[롬 9:3]는 말이 되기도 하고,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지 않을 의향이실진대 주님의 기록하신 책에서 제 이름을 지워 버려주십시오”[출 32:32] 하는 가식 없는 기도가 되기도 한다.

모두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심장인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을 구원 얻는 방법 정도로 생각함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선한 것으로 만드셨고 단지 강제로 선을 행하도록 하시지 않고 스스로 좋아서 선을 행하도록 하신 것인데[왜냐면 사랑은 자유 의지가 핵심이므로] 이 뜻을 무시하고 자유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피조물들이 있어 악하게 나가는 숫자가 더러 생긴 것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유를 주신 이상 그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므로 단지 불쌍하다고 해서 애초의 뜻을 변경시킨다는 것은 만유의 근본이시고 근원이신 하나님으로서는 결코 합당치 못한 일이 되심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지 않고 의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생명으로부터 이탈한 결과 죽음이 왔으므로 이제 그렇게 하여 죽은 자가 된 인생들을 다시금 산 자로 만드실 때는 이전의 결정[범죄함으로써 죽음의 결과를 거두게 되는]을 번복하실 수 없으므로 반드시 선을 행하고 의를 따르기로 작정하는 이에게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당연하다.

‘작정하는 이’다. ‘선을 행하는 자’가 아니다. 즉 약속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선이라는 것은 가치가 없으니 왜냐면 구원 얻는 것이 목적이라 자기중심이므로 선이 아니라 위선이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성경은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롬 3:12] 한 것이다. 선을 아무리 행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자기[구원]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의 소위 선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히 2:15]이라 한 대로 죽기를 무서워하여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주기를 무서워하여 자기중심이라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 특별히 동물에게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생의 본능이다. 바로 그런 기계적 장치로 해서 자연계 동물들은 자기네 종(種)을 유지 보전해 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니 자기 위주, 본위,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을 보시고 그제서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을 행하기를 좋아할 수 있는 이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선을 행할 수 있을 사람들, 그래서 이제부터는 선을 행하기로 작정하여 약속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하시게 되면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게”[갈 5:25] 된다. 내 능력으로 순종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고로 시종일관 은혜이지 내 공덕으로 얻는 구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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