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잡록(雜錄, miscellanea)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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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 불쌍한 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이다"[고전 15:19] 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들은 세상에서 모진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사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니[요 12:25] 왜냐면 "여우는 굴이 있고 새는 둥지가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신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하는 것,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할 뿐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삶 자체가 정상이 아니라 비극 그 자체여서 모든 인생들이 예외없이 모두 불쌍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라는 뜻이다. 단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없는 것이 아니니, 오직 그 희망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모든 고난을 참고 견디고 있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단단히 각오부터 해야 함을 망대 세우는 비유로써 경고하신 것이다[눅 14:25-35].

오늘날 사람들[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거의 전부가 이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소위 "축복 받아" 세상에서 보란 듯이 잘 사는 꿈에만 도취되어 있는 현실이다. 주님께서 경고하신 바 자기 부인은 전연 염두에 없다. 그래서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들은 신도들로 차고 넘쳐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를 미리 내다보신 주님은 영생의 길은 문도 좁고 길도 협소하다 하시고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고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고 경고하셨다.

성경을 읽되 편식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지 않으면 안되고 편식하면 영양보충에 문제가 생기듯이 성경 역시 자기 좋아하는 구절만 좋아하게 되면 온전한 진리를 습득할 수 없고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딤후 3:15] 것이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결과가 이르게 될 것은 명백하다. 사람들은 구원의 의미 자체에 대해서도 성경적인 일가견(一家見)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경을 제대로 열심히 읽지 않는데 대한 댱연 결과다.

가령 성경에 구원을 현재 받고 있다는 것, 과거에 받았다는 것, 장차 받을 것이라는 것 등으로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해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혼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애매 모호한 표현이 아닌 것이다. 성경이 우리의 구원을 새 창조라 했고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출생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에서도 그 해답은 분명히 나와 있는 터이다. 즉 우리는 "죽은 자"[마 8:22]다. 죽었으니 살려놓고 보는 것이 급하다. 이렇게 살려놓은 것이 우리 구원인 것이다.

살려 놓아 산 자가 되게 만드셨으니 과거에 내 믿음으로써 그렇게 산 자가 되었었고 이제도[현재] 살아 있는 것이고 이 상태대로 아무 이상이 없이 나가면 산 자 그대로 있을 것이니[미래] 내가 "산 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이 있을 경우, 변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사탄  등 악령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이상이 있었던 경우다. 아담이 죽은 것 역시 이상이 있어서다. 왜냐면 죽도록 아담을 만드시거나[롬 5:12] 영물[천사]들을 만드실 리 없는 것이다.

중도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니 인간에게나 영물들에게나 완전한[완전하다는 것은 간섭이나 강제를 일절 받지 않음을 말한다] 자유를 주시어 모든 일을 그 스스로 결정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자유가 새 창조라고 해서 달리 어찌 될 리도 없다. 똑같은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에 좌우되는 인간의 모든 행위이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과거에 내가 믿어 구원되었으나 현재는 그 믿음을 버릴 수도 있어 구원이 무효화가 될 수 있고, 또 현재 내가 믿고 있으나 이후로 내가 그 믿음 버릴 때 나의 현재 구원은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자유 의지의 의미이다. 결코 헷갈릴 것도 없는데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 성령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친히 가르치심을 받을 의사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교리에만 탐닉해 온 연유다. 가르치는 사람 역시 자기도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격이요 그대로 대 물림하듯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중간 고리를 과감하게 끊는 그런 배포 큰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쓸데없는 미신[이제까지 내려 온 해석상의 전통을 감히 깰 수 없다는]에 젖어 내려 온 타성(惰性)이 초래한 비극적 참화다.

또 성경에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그 속에 없다"는 말이 요한일서 첫머리에 나온다고 해서 이 역시 오해를 하여 인간은 원래부터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같은 요한의 편지에서도 다른 대목에서는 명백히 "죄를 짓지 말라", "죄를 지을 수 없다"[요일 2:1/3:6-10/5:18]고 강조하고 있으므로, 따라서 그런 의미가 아니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살인죄에 해당됨에도 불구하고-3:15] 죄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경우 이를 지적하는 의미임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현재의 죽음의 비극이 온 것이 아니던가[롬 5:12]. 그러므로 명백한 것은 죄를 짓고서는 영생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또 영생을 주실 때에는 즉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는 죄를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주시는 것이니 그래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 회개다[행 2:38/17:30].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도 죄인을 불러 영생을 주시자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게 하시려는 것"[눅 5:31]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인위적으로 자기 욕심대로[자기중심으로 살겠다는] 해석하여 "회개"를 '믿기로 작정하는 것'쯤으로 멋대로 풀이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하여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이라 한 것이다. 고로 전자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하는 나 자신의 결단과 작정을 의미하고 후자는 "과거 옛 죄"[롬 3:25/히 9:15/벧후 1:9]가 용서됨과 앞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육신과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 받음[믿어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해]을 의미하는 것이다.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릴 태세가 갖추어져 있을 때 죄는 없다[요일 3:15]. 이것이 자기 부인인 것이다. 곧 사랑이다. 자기 부인은 사랑의 핵인 것이다. 머리와 몸 관계에서 오는 '한 몸' 의식의 기본인 것이다. 그래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으로 이루어진다["is fulfilled"-KJV] 또는 요약된다["is summed up"-NIV[갈 5:14] 한 것이다. 많은 이들의 착각처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이루게 되어 있음이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고 있다"[롬 13:8] 한 것이 그 때문이다. [롬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어 있다"[:9] 한 그대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10] 했다. 그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마 5:17,18] 하신 그대로다.

성경에서 율법을 말할 때 이런 영원히 변치 않는 생명의 법칙으로서의 기본 율법과 모세의 율법을 [성경을 읽지 않고 사람의 교리만 배우고 그것을 성경이라 착각하기 때문에]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 영원한 기본율을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율법 없는 자가 아니라"[:21] 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기본율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40]이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이를 더 자세히 풀어 "사람이 자기에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라"[7:12] 하셨다. 그리고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12]라 하셨다.

하나님의 율법 또는 계명 즉 그 말씀으로 나타나는 모든 뜻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인생들을 그 몸의 각 지체로 하여 한 몸을 구성하여 사는 데에서 오는 또는 그렇게 살기 위한 필수 요건 또는 준수할 사항들을 인생들에게 가르치심인 것이다. 몸과 머리 관계 곧 어버이와 자식 관계 파생된 자와 파생시킨 자의 관계가 다시 말해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인 것이다. 사람은 "낳는다" 하고 하나님께서는 "만드셨다"는 그 차이다. 이러한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 머리로서의 하나님 곧 창조자로 보아야 창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존을 부정하려 할 아무 이유가 없다. "머리"로서의 그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면 보다 이상적인 인생 삶을 위해서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지금의 세상이 아무 탈 없이 굴러가는 듯싶은 것도 하나님께서 강제로라도 인생 삶을 챙기시고 있기 때문이니 그 증거가 3운법칙이다. 3운법칙의 희한한 구조가 증명하는 것이 3위1체의 원리이니 이 3위1체의 원리야말로 이러한 몸과 머리, 어버이와 자식 관계를 말하는 인과(因果)의 법칙인 것이다. 어버이는 '원인'이요 자식은 '결과'다. 어버이는 머리요 자식은 몸이다.

무신론자들이여, 현실적으로도 맞지 않고 상식에서도 벗어나는 것이 머리 없이 몸으로만 살고자 하고 원인 없는 결과로만 만족하려는 것이니 곧 무신론의 맹점이다. 이제 당신들은 강제적으로도 유신론자가 되도록 되어 있다. 사탄이 스스로 하나님으로 군림하여 강제로 믿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제한다는 것은 믿기 싫은 것을 믿도록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외없이 사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되도록 조종된다는 그 뜻이다.

불자(佛子들이여, 그대들은 스스로 머리가 되려 한다. 스스로 신이 되려 한다. 그것은 한낱 헛된 망상일 뿐이다.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양식(良識)에도 반하는 것이다. 천 길 낭떠러지로 발길을 돌리지 말 일이요 발길을 곧 뗄 일이다. 무슬림[Muslim]들이여, 창조주 하나님을 몸[의 각 지체들]과 한 몸을 이루어 있는 머리로서 제대로 바로 인식할 일이다. 불교도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지만 혈과 육 다시 말해 자연계에 예속된 이런 몸으로는 사람이 절대로 천국 곧 영계에 들어가 영생할 수가 없다[고전 15:50]. 새로 창조되고 성령으로 나야 하는 것이니 이 새 창조, 재차 출생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 불가결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시라 함이 그 때문이다.

천주교도들이여, 하나님과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로써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 이상으로 기대할 것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시다. 머리로서 얼마나 그 몸[의 각 지체]을 위하시는지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롬 5:8]. 몸과 머리의 관계는 하나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내가 한 영으로서 하나다[고전 6:17]. 이미 하나가 되어 있는데 왜 "마리아"와 같은 군더더기를 붙이려는가. 이는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개신교 교인들이여, 몸과 머리가 하나되면 머리는 전적으로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면 거기에는 죄가 개입될 틈이 없다. 죄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고후 5:15].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고 사탄 등 악령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영원 멸망에 처해질 운명에 있으니 우리도 그들처럼 될 수 있기에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머리와 몸 관계에 다시금 들어가게 됨을 뜻함이다.

유교의 조상숭배자들이여, 육신의 어버이의 은혜는 하나님의 어버이되심에서 나온 것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라는 것은 인간 관계를 두고 말씀하신 하나님 정하신 첫째 가는 계명인 만큼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거역하고서 그 어떤 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가장 근본이 되시는 어버이'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효가 기본이다. 다시 말해 머리와 몸 관계에서 머리의 지시를 따라 몸의 각 지체 상호간 위함이 가능한 것이다. 머리를 무시하고 그 지시 없이 몸의 지체끼리만 아무리 죽자 살자 사랑해도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자식의 머리는 부모요 부모와 자식 관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인간의 어버이되시는 이가 우리 모두를 지으신 하나님으로서 우리 전체의 머리이시다. 창조자이시니까 만들었다, 창조한다는 말을 쓰는 것이지 인간으로 치면 우리를 "낳으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말로 표현하여 하나님을 "아버지"시라 하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를 부를 때는 반드시 어버이에 대한 효도를 다해야 그 자식이므로 복종하여 그 뜻을 따를 경우에만 가능하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데 어찌 "아버지"가 되시겠는가. 여기서 아버지는 어버이를 가리킴이다. 인간은 남자 아니면 여자이므로 어버이의 경우에도 성별이 있어 각각으로 부르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으로 영이시라 그냥 대표적으로 아버지라 호칭함이다. 왜냐면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으므로 남자를 기준하여 대표로 삼는 것이다. 양성이 동시에 나는 수는 없으니 이것이 3위1체의 원리다. 즉 인과 관계이니 반드시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대칭형은 닮은꼴이니 닮은꼴은 먼저 존재하는 기본형을 닮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까닭에 인과 관계는 선후(先後)의 차이이기도 하다.

사랑으로 하나됨 즉 둘이 하나됨은 3위1체 원리를 따라 되는 것이니 대등관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큰 것과 작은 것 즉 파생시킨 자와 파생된 자와의 관계에서 큰 것이 본을 보여 줌에 따라 작은 것이 그 본을 따르는 행위인 것이다. 하나라는 것 자체가 이렇게 둘이 되기 전에 하나로 존재했었다는 증거요 그 하나가 다른 하나 즉 자기의 닮은꼴[성경대로 하면 "자기와 같은 형상과 모양"-창 5:3]을 새로 만들었다, 생겨나게 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 하셨는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핍박 가운데에서 이런 "어린 아이 같음"이 드러난다 할 수 있다. 왜냐면 죽기를 각오하고 믿을 때에는 죄 짓는 데에 대해서 역시 결사(決死) 각오로 임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사랑이다.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 오직 산다는 일편단심에서 이루어짐이다. 고로 사랑을 위해서는 죽음도 어떤 고난도 불사하는 것이다.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상대를 희생시키거나 무시하거나 하는 일은 죽어도 못하는 일인 줄 알기 때문이다.

왜냐면 자기의 중심이 사랑하는 상대에게 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상대가 곧 자기 자신이요 자기 자신에 관한 한은 망아(忘我), 몰아(沒我), 무아(無我)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무아와는 다르다. "일체의 존재는 무상(無常, 모든 것이 덧없음)한 것으로 ‘나’라는 존재도 없다"는 뜻으로서 그들이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아는 사랑과는 전혀 무관하기에 그러하다. 여기서 말하는 무아는 사랑에서의 무아다. 나는 없는 대신 상대는 있는 것이니 사랑의 상대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현격한 차이인가.

너도 있고 나도 있고 남도 다 있다. 왜 있는 것을 두고 없다고 하는가. 그런 언어의 희롱이나 혼돈은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실제 없는 것을 두고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것은 "있는 것"이라 할 것인가. 있되 사랑 가운데 있느냐 여부가 중요한 것이다. 사랑이 없으니까 내 것만이 내 것이요 네 것은 네만이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면 내 것은 네 것이고 네 것은 내 것이니 공동의 것이다. 전체 우리의 것이니 한 몸이기 때문이다.

내가 손이라면 눈도 내 것이요 발도 내 것이고 입도 내 것이니 내 것이 아닌 것이 없다. 그 대신 나는 발의 것이요 눈의 것이요 입의 것이다. 모두의 것이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나는 나 외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차지함이니 내가 억지로 강제로 뺏어서 내 것으로 삼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모두 스스로를 나의 것으로 자처하고 나를 섬기는 까닭에 내 것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내 것이라 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의적으로 스스로 자진자발적으로 내 것이 되어 주는 것이 사랑으로 하나됨이다. 이 얼마나 물 흐름과 같은 자연 순리인가.


§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 고난의 의미

일본에 어떤 사무라이가 병이 들었는데 처가 너무 미인이었던지 미인인 처를 두고 죽을 수 없다고 가슴앓이를 하는 통에 병은 더욱 악화되고 거진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여자는 자기 정절을 강조하며 한 여자는 절대로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로 수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을 때는 감동했으나 곧 처의 그 맹세를 잊어 버리고 여전히 이전처럼 가슴앓이를 했다. 정절한 처는 이를 보다 못해 마침내 그 남편이 보는 앞에서 칼을 들어 자기의 이쁜 코를 베어 버렸다.

이것을 본 사무라이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던지 그 바람에 병마저 완전히 나아 버렸다. 병이 나은 남자는 코가 베인 처가 보기 싫어 결국 이혼해 버렸다는 그런 실화가 전해져 온다. 이 아둔한 남자는 이 여자를 그 미모를 보고 처로 맞아들였는데 그 미모가 사라지니 양심의 가책도 없이 헌신짝처럼 내버린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사람 사랑을 모르는 인간의 대표적 상징이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천국에 들여놓으실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되 하나님이시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이러이러하게 유익이 되니까 사랑하다가 그런 것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지는 그런 것은 자기중심, 자기 집착의 전형(典型)이다. 욥의 시험도 바로 이런 성격의 사랑의 시련인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한 대로 하나님은 이제는 필요 없다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솎아내시고 추려내시고 걸러내시려는 인간이 바로 이같은 잣대에 미달하는 모든 이들이다.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14] 하신 의미이기도 하다. 욥은 원망하거나 시비조로 나오거나 하지 않은데 비해 아담 부부는 명백히 그런 자세로 나온 것이다. 물론 "뱀"의 충동질에 의한 것이었기는 하지만 아담 부부는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 우리 인간만이 선악을 모르도록 되어 있는가"였다. 

이런 불만과 원망은 "사탄 곧 옛 뱀"[계 12:9/20:2/2:7]에게서 나온 것은 물론이다. "옛 뱀"은, "우리 영물들이 인간보다 지식 수준이 월등히 낫고 또 처음부터 우리는 신령한 육체로 되어 있음에도 인간의 육체의 근본은 저 하등 세계인 땅의 흙이 아닌가. 그럼에도 어째서 우리 영물들이 인간을 섬기고 그 아래에서 허리를 굽혀야 하는가?" 한 것이다.

말하자면 사탄이나 아담부부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시비조로 나오고 원망한 것이다. 복종치 않는 그 밑바닥에는 항상 이런 시비조로 나오고 원망과 불평과 불만이 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 앞에 시비조로 나오지 않은 것으로 그 특징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욥과 같이 그리고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과 같이 또는 다윗처럼 순종의 사람의 특색인 것이다. 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되 하나님 자체만으로 사랑하였고 '무엇, 무엇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특징을 지닌다.
그 사무라이와는 달리 처를 사랑하되 그 '미모'를 사랑하지 않고 그 '사람'을 사랑한 것이다.  물로 처음에는 그 미모에 끌리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그 인간성을 알고 그 사랑을 알고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사랑하여야 그것이 진정 주고 받음의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사랑을 알았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지 '그것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나쁘다' 하고 불평하고 시비하는 조로 나온다면 그것은 사랑일 수가 없다.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가름하기 위해[하나님께서 아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앞에서 우리 자신을 입증한다는 뜻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이고 그것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런 다목적 의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순종하여 따르는 아름다운 모습이 요구되는 것이다. 욥이나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요셉처럼 믿음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  세상사 믿음 없이 되는 것 없다


사람이 믿음으로 살지 무엇으로 사는가. 누가 이러이러한 보고를 한다. 나는 그 보고를 믿는 것이다. 그가 가보았던 현장에 내가 직접 가보지 않았어도 그의 보고를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만일 무엇이든 일일이 직접 검증하고 답사하고 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 믿으려 한다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오죽이나 그렇게 남의 말을 믿었으면 속기까지도 하겠는가. 그렇게 믿는 것은 그렇게 믿을 만한 제반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증거를 보여주시고 믿으라 하시는 것이다. 증거를 충분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믿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 증거가 충분하는지의 여부는 각자 나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 이상으로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증거를 볼신하는 것일까. 절대로 그럴 리는 없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믿을 수 있는 그 어느 증거보다 확실한 것이 하나님이 제시하시고 확증하시는 증거이다. 이 증거이면 충분하다고 믿으시는 그런 증거만이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사탄의 농락에 꺼둘리지 말 것이다. 사탄이 이리 휘두르면 이리로 따라가고 저리로 휘두르면 저리로 줏대없이 따라가는 것은 자신이 보기에도 민망하고 부끄럽지 않은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다.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님을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이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

"죄를 짓는 이마다 불법을 행하니 죄는 불법이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여러분이 아는 바니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다. 그 안에 거하는 이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니 범죄하는 이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다. 자녀들이여, 아무도 여러분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옳은 도리]를 따라 행하는 이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이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이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다"[요일 3:1-10]. "하나님의 아들되는 것"과 "죄 짓는 것"은 서로 모순이 된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서 죄를 지을 때 그렇게 모순이 된다는 그 뜻이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로마서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이미 선언한 그대로다.
 

§  자기 부인

자기 부인을 무조건 자기를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될 일이다. 세상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자기 인멸이 아니다. 자기라는 실체조차 부정하는 그런 것은 가상의 세계일 뿐이지 현실일 수는 없다. 인간의 공상으로야 무슨 말인들 못하고 무슨 생각인들 못하랴. 자기가 엄연히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느 모로 보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는 자기요 자기가 있는 한에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는"[엡 5:29] 법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은 무슨 고답적이고 실현불가능한 이상주의적인 도덕적 슬로건도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은 자기를 부인하면서도 동시에 부인되지 않는 지혜요 방안인 것이다. 에덴낙원에서의 비극적 사건도 그렇다.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이 자기를 전적으로 없는 것처럼 여기라는 뜻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자기에게 바로 생명이므로 그 인식대로 행한다는 그 의미뿐이다.

무슨 어려운 조건을 내거시고 이것을 지키려 하나 아니하나 보시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으심으로 내게 생명을 주셨으니 내게 이왕 생명을 주신 이상 내게 요구하시는 것은 즉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다 내게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렇게 이해해야 온당하고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것이다. 그런데도 사탄이 유혹한다고 해서 그런 반이성적인 행동을 할 이유가 없는데도 그런 불순종을 한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는데, 그 나를 위하는 방법이 내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왜냐면 하나님께서 바로 내 생명이 되시니까]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는 데에 있다고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결론 내려 행동하면 되는 것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시는데 나는 달리 생각한다고 하자. 그 때는 어떻게 하는가. 그 때 비로소 자기 부인이 필요한 것이다. 에덴낙원의 여자처럼 내 생각대로[실은 사탄이 그 생각을 넣어준 것이지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하는 것과는 반대가 되어 내가 나를 위함이 우선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당장 보기에는 그럴 듯하고 선악과 나무 열매가 아무리 탐스럽게 보여도 해서는 안될 일은 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으면 되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여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위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내 것을 할까, 상대의 뜻을 들어줄까 매양 매사 그렇게 선택한다고 망설이고 뜸들일 것 없이 그냥 곧장 나를 위하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방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정해 버리면 그것이 훨씬 나은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법칙의 핵심이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 역시 그렇다. 결단코 그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행위가 기계적이거나 자동적으로 아무 감정 없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 된다. 분명히 주님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당신 자신의 선택 같으면 그렇게 십자가 고난을 거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 하셨고 그러나 다시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바라고 아버지께 맡기신 것이다.

분명히 "내 뜻"이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얼토당토않은 황당무게로서의 '자기 부인'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즉 내가 나를 위함보다 아버지를 위함이 옳은 것이라는 이 의(義)의 법칙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뜻을 접은 것이요 아버지의 뜻을 수용하신 것이다. 이것은 사람되신 측면에서의 우리의 대표 곧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교훈으로 그런 사실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자기 부인을 무슨 신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일이다.

가장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논리적 결정의 삶의 법칙이요 지혜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여기 보화가 있는데 그 가치를 따져서 그 가치 따라 행동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무슨 큰 일을 감행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평범한 삶의 순리다. 그래서 그 값진 진주가 들어있는 밭을 자기 전재산 다 처분하여 사들인 그런 행동에 불과한 것이다[마 13:44-46].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의 가치가 자기의 전재산의 가치보다 크다는 이유 그 하나뿐이다.

극히 현실적인 이해타산이다. 별나게 동떨어진 법 감정도 아니고 도덕적 안목도 아니다. 더 나은 것, 더 가치있는 것을 따른 이익 추구일 뿐이다. 그래서 성경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한 것이다. 여기서 "선"이란  것은 좋은 것 즉 유익한 것이다.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름이다. 좋은 것도 모르고 나쁜 것도 모르고 자기에게 해가 되는 것도 이가 되는 것도 모르는 그런 것을 가리켜 "자기 부인"이라 하지 않는 것이다.

혹자는 "그렇다면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가 생각보다는 너무 현실적이고 이욕적[利慾的]이고 평범하다"고 할지 모르나, 이 세상 인간으로서 자기 이욕을 따르지 않는 이가 없는 터에 그러면 모두 이런 자기 부인을 실천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결코 그렇게 폄훼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사랑 이상 가는 도덕률은 없다. 최고의 법도가 사랑이다[갈 5:14/롬 13:8-10]. 이 사랑의 기본 바탕이 바로 자기 부인인 것이다.

단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우리 개개인 홀로로서는 아무리 그것이 좋아도 그림 속의 떡이지 실효가 나타나지 않는 실행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설명한 그대로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시니까 그 우리를 위하시는 전제 아래 되어질 수 있는 자기 부인인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므로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다. 여기에는 오직 하나님께 대한 믿음 곧 신뢰 유무가 관건이다.

사탄의 시험도, 하나님을 말씀을 믿지 않고 의심함으로써 시험하게 하는 것이 그 세 가지 핵심되는 것 중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던가[눅 4:9-12].
생명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곧 하나님 앞의 죄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이신데 그 말씀 순종하는 것은 생명의 법칙을 따름인데 순종하지 않음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생명의 법칙에 어긋나니 불법이다. 생명의 법칙을 어기는 것은 자기의 생명만 아니라 남의 생명까지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이유는 자기 홀로 이 우주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가 이 법칙을 어기면 그 파급 효과가 결코 그 한 사람에 국한되지 않고 연쇄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  의리[義理]에 살고 죽고

그리스도인은 의리[義理]에 살고 죽는 사람이다. '의리'를 정의해놓은 사전을 보니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 했고 두번째로는 "남과 사귈 때 지켜야 할 도리"로 되어 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가 무엇인가.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함이다. 그리고 '남과 사귈 때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의 법칙이 아닌가.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해야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의리를 지킴이다. 나를 위해 그처럼 고통 중에 죽음을 당하신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은혜에 상응한 반응을 보이지 아니한다면 누가 나를 의리있는 사람이라 생각할 것인가.

고로 철저한 의리의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남에 베푸는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잊으면 그런 배은망덕의 행위를 누가 의리 있다 하겠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그 받은바 은혜대로 의리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자기 부인이요 육신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의리없는 자란 소리를 듣는 사람이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듯이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그 법질서대로 어김없이 움직이는 하나님의 세계에서야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도 "구원을 해놓았더니 의리가 없어. 의리가 없는 자를 살려두면 뭘 해, 내쫓아 버려" 하시는 것이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을 왕이 잔치자리에서 쫓아내는 현대적 의미의 해석일 것이다. 실상 "의리없는" 인생은 인간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문제만 만들고 덕은 되지 않고 해만 될 터이니 그런 사람을 긍휼히 여겨 생명세계에 살도록 해준다면 그런 존재로 인하여 영원히 행복스럽게 모두가 잘 사는 하나님 나라에서 어찌 될 것인가.

일찌감치 솎아내고, 추려내고, 걸러내는 것이 만 번 옳은 일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는 바로 그런 의리없는 행동을 경계한 것이다. '의리없다'는 말은 자기만 위하는 것을 의미함이다. 자기중심은 어디서나 어느 때나 기본적으로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서로가 자기를 부인하고 상대를 인정하게 되면 거기는 아름다운 인정이 만발하고 인화 단결이 된다. 이 세상 모든 혼탁과 부조리와 불의와 불법적인 행위, 무질서에서 야기되는 모든 꼴불견은 모두 이 자기중심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 뭉쳐진 세계가 존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이 세상이 그런 것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지금까지 존속해온 까닭은 단지 누구든 구원 받을 만한 자는 다 구원 받으라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강제로 유지 보존되어 오는[3운법칙이 그 증거다] 임시적 일방적 조처에 의함이다. 이런 모든 악과 불법을 증오하는 이들은 모름지기 '자기 부인'과 '매일 십자가 짐'과 '모든 것 버림'에 매진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턱대고 누구든 구원 얻도록 바라심은 아니다. 

그리 되면 이 세상은 언제 끝날 것인가. 사람도 계획성이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시랴. 그래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즉 미리 아셔야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믿고 구원받게 될 이가 없을 줄을 아시고 세상을 적기(適期)에 끝내실 수 있는 것이다. 또 그런 미리 아시는 이가 있을 때에는 아무리 주님 다시 오심이 시급하더라도 그 한 사람을 위해 절대로 세상을 끝내실 수가 없는 것이다.
 

§  이 세상에서 의인이 고난 받음은 영광이요 영예

이공(李公) 순신(舜臣)의 예를 보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순신은 세상에서 옳게 살려고 했고 원리원칙을 지켜 살고자 하는 신념에서 확고한 인생관을 가졌던 것이다. 옳다고 믿은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갔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일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런 결과로 그는 세상에서 항상 핍박의 대상이 되었고 미움과 질시를 받았다. 의인[세상에서 말하는 의인]이라야 의인을 알아보는 것이다. 당시 조정이 의롭지 못하니 의롭게 처신하는 충신 이공 순신을 제대로 알아줄 리 없다.

아무리 항명으로 비쳐진다 하더라도 전쟁 마당인데 그를 기어이 잡아다가 족치려 했으니 미련하다기보다 악한 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동료 원균의 시기와 질투 속에 결국 그 손에 넘어가 죽을 뻔했었다. 이런 것이 세상이다. 하물며 모든 의로움의 의로움이요 그 근본이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런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처신하는 것인데 어찌 온전하겠는가. 더군다나 인생 멸망을 금과옥조로 삼는 사탄이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왕]인데 오죽하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인데도 당시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고 그 확실한 실력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삶을 이공 순신이 살았다면 그리스도인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세상의 속성과 본질은 이미 그런 악한 것임을 처음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실에서부터 완연하게 드러났고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교훈은 악한 마귀에게 속하여 그런 짓을 하였다고 정의한 성경이므로[요일 3:12], 악인이라고 무조건 징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고 모쪼록 회개하여 참 사람이 되도록 기다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바임을 명백히 알게 된다. 가인이 자기 위험을 하나님께 탄원했을 때 그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이미 이 때부터 분명히 드러나는 일이 아닌가.

이공 순신의 당시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법통과 질서를 따르지 않고 자기 욕심과 야망을 따라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 같은 인간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사육신의 충성도 그러하고 고려 말 이성계의 왕위 찬탈에 항거한 충신 정몽주 역시 그렇다. 이런 일은 역사에 드러난 두드러진 사례에 불과할 뿐 세상의 색채는 한결같은 것으로서 사탄의 세상이다. 남의 성공을 질시하고 잘됨을 시기하는 세상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이러한 것이 세상이다. 증명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적어도 의롭게 살며 원리원칙을 지키겠다고 하는 사람으로서는 고난 받는 것이 자연스럽다. 의인이 의인됨을 드러내는 것이니 영광이요 영예다. 의로운 세상이라면 그렇게 고난 받는 것이 수치요 불명예지만, 세상 자체가 악하므로 의에 대해 아무 제재나 탄압이 없다면 그 자체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니 그것은 세상에 짓눌려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미욱하고 연약하여 기개(氣槪) 없음의 결과라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상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지낸다는 것 자체가 불명예요 모욕거리가 되는 것이다. 고로 의인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이 의인을 핍박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고 순신은 그런 공을 세웠어도 조정 간신배들의 등쌀로 결코 온전하지 못할 줄 알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죽기를 바라 마지막 전투에서 갑옷을 벗어 버렸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세상이다. 의인을 제대로 대접해줄 줄 모르는 악하고 미련한 세상인 줄 이공 순신은 자신이 그만한 일로 서울로 압송해가서 문초를 받은 사실로써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공은 자기 임무 수행에만 묵묵히 충실했고 충성했다. 조정에 앙심을 품고 세상을 원망하였다면 그렇게 백의종군하면서 그런 충성심을 불태웠겠는가. 그야말로 자기라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임무 수행에만 진력했던 사람 이순신. 진실로 우리의 사표다. 이순신만한 인물이 없어 그를 이렇게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당시 임했던 모든 주위 환경과 사건과 시대 양상이 그런 인생 자세를 아주 극적으로 드러내어주기 때문에 그런 의로운 사람들을 대표해서 이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공의 자세를 우리가 생각할 일이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대하던 이 세상을 생각할 일이다. 그런 정도로 원리원칙[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충실해야 하고 오로지 개인적인 감정[자기중심]은 뒤로 한 채 오직 적[사탄]을 섬멸하기에만[사람들을 멸망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가운데로 건져내기에만] 온 힘을 다 기울이는 그런 충성심과 임무 수행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생각하는 대로 나타나는 것이 사람이다.

의인 다시 말해 자기 믿는 바를 과단성 있게 실천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감당치 못하여 제거하려고 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공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된다. 의인으로서의 흰색을 드러내는데 검은 색의 세상이 이를 용납할 리 없다. 전멸하여 패한 남은 전선 겨우 12척으로써 항전할 때 용의주도하게 빈틈없이 만반대책을 다하고 하나라도 소홀히 함이 없도록 한 것은 차라리 눈물겨운 것이다.

성경 곳곳에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도 그런 물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으로 명확히 답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 앞으로 이루실 일에 대한 확신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다.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에서 "소금"으로서 그리고 "빛"으로서 어엿하게 자리를 잡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위치를 사수(死守)하는 긍지를 지녀 충성된 자가 될 일이다. 바로 이런 것을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다[벧전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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