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38)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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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받음은 곧 영광 받음

"영광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않았다"[요 7:39]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러하신 것과 같이 우리 하나님의 아들들은 고난 받음이 영광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이 경우 "기뻐 뛰놀라[to leap for joy]"[눅 6:23] 하셨다. 그래서 열 두 사도들도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매 맞고 나올 때 "기뻐하였던"[행 5:41]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실라가 발에 단단히 쇠사슬에 채워져 옥에 갇혔을 때도 감사 기도와 찬양이 충만했었다[행 16:25].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은 기쁨이다. 고난을 견디게 하는 능력이 이 기쁨이므로 줌님께서도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for the joy set before him]" 십자가 고난을 참으셨다고 했다[히 12:2].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

당시 주님을 따라다니던 많은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행복의 잣대를 따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이 많다. 즉 건강하고, 복 받아 잘 살고 그리고 영생까지 덤으로 얻고자 함이다. 영생도 얻고 덤으로 믿음에 의한 건강도 누리고 잘 믿어 축복 받아 살고-이렇건 저렇건 의미는 같다. 이런 사람들의 속마음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뒤로 돌이켜 그들을 대하시며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해야 할 것이다"[눅 14:25]. 오늘도 이 말씀은 한결같으신 의미로 우리에게 임해져 있다.

인간 구원이 최대 명제이다. 생명이 있고서 부귀영화도 의미가 있듯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지금 이 땅은 사실은 인간 범죄로 인하여 저주 받은 다음의 <애초의 영광을 잃은> 그런 폐물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름다우니 이는 하나님의 솜씨가 처음부터 너무나 아름답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이 온통 자기 위주, 자기중심의 삶이라 어딜 가나 살벌하고 냉기가 감돌아, 첩첩 산중에서는 맹수를 만나는 것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반갑기커녕 더 두렵다는 옛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비록 그런 이기적인 사랑이라도 그것이 이리도 좋을진대 하나님께서 애초 설정하신 사랑의 사람 삶이 얼마나 기가 막히도록 좋을 것인가! 이런 세상에서는 그야말로 이 세상 꼴 같게 막판으로 막가기로 일생을 보내더라도, 장차 임할 그 세계에서 한번 살아보았으면 하는 것이 생각 있는 자라면 누구나 품어보는 바람일 것이다. 베드로는 변화산 상에서 그 분위기만 잠시 맛보았을 뿐이었으나 그 황홀감이 일평생 지워질 리 없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운운"한 것이다.

그러나 고난 다음의 영광이다. 이것이 정규 코스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 상에서 곧바로 생명으로 직행한 두 죄수 중의 하나는 고난을 거칠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들은 예외 없이 그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기로 처음부터 '기쁨으로' 각오해야 한다.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는 것은 이 세상의 소위 '삶'[왜냐면 실제는 삶이 아니라 '죽음'이므로]의 안락을 홀가분하게 등지고, 등을 돌리고, 주님께서 당하신 그 십자가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자는 그 뜻이다.

세상 사람들이야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이 죽음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고난 받음을 헐복하고 박복한 것으로 취급하여 누구나 기피하지만 [왜냐면 인생 70수(壽)도 지극히 짧은데 그나마도 고통 중에 보낸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나 현실-시 90:10], 그러나 그런 이들도 영생을 얻는 대가로 그런 고난을 수십 번이라도 받으라고 한다면 또 그 말을 확신한다면 그리고 그런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은 다 영원한 고통에 들어감을 믿는다면 그런 고난을 외면할 사람 하나도 없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영원한 고난보다는 이 세상의 고난이 수지타산 면에서도 더 낫기 때문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이 유독 우리만이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반화되어 있는 현상 중의 하나로 그 가운데로 우리는 자진해서[왜냐면 믿음의 길을 스스로 택했으므로] 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세상사람이 받는 고난은 자기 신세타령을 하면서 운명이라 여기며 희망이라곤 전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확고한 소망 중에 앞날이 훤히 내다보이는 확신 중에서, 뿐만 아니라 운명의 노예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운명[오는 세상에서의]을 개척해간다는 그런 자부심과 성취감 속에서 스스로 엮어 나간다는 그 두드러진 차이만 있을 따름이다. 고난은 바울 같은 사도들 즉 특수계층만이 받는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데 큰 오해다. 주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당시 사도들은 주님과 함께 있어 시초부터 주님의 말씀도 듣고 하신 일도 보고 그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고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나, 이제 오늘날은 그런 증인들의 증언이 성령으로 집약되어져 성경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있는 터이므로 누구나 성령을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자기가 어떤 경로로 그리스도께 나아왔는지를 증언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목자[牧者]'란 바로 그런 증인들 중에서도 더욱 모본이 되어 있는 이들을 가리킴이다.

모든 부문에 열심이 있어 가히 남이 본받을 만한 그런 인물이어야 한다. 그런 만큼 이런 장로들에 대하여 어떤 비판할 점이 있으면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안되고 두세 사람의 증언이 일치할 때에만 받아들이고 일단 받아들여지면 그는 목자의 위치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러므로 다 한 형제로서 한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계층간의 구별이 없고 오직 남보다 앞서 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 지도자로 자처할 자도 없다. 왜냐면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께서 교회 지도자이신 때문이다. 옛 이스라엘이 '우리도 이방인들처럼 왕을 두자' 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 종교처럼 지도자를 두자'고 해서 소위 '지도자'를 두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왕이 되심을 망각한 것과 같은 반역 행위가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왕을 허락하시기는 했어도 그 부당함과 죄가 됨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실체로 그대로 드러난 이 은혜의 때에, 그리스도를 따돌리고 자기가 교회 지도자인 양 나서고 또 그렇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처사는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움이 된다는 사실을 마땅히 명념할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이런 증인들의 일종의 전략회의[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한 '사탄과의 전쟁'에서]이기도 하여 그 주재자 또는 좌장은 성령이시다. 뿐만 아니라 합동 작전[作戰]이기도 하니 곧 성도들의 합심 기도이다. 모름지기 교회는 모여서 기도할 일이다. 두세 사람도 모이면 세상사람들처럼 잡담 말고 의식 있는 사람답게 사명을 띤 사답들답게 기도할 일이다.
 

고난 받는 것이 뜻이다     

주님께서 왜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는가. 승천 후 왜 하늘이 그를 받아 두지 않으면 안되는[행 3:21]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하여금 제대로 고난 받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주님은 육체로서는 이미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육체로써는 그 몸된 교회가 받는 고난에 동참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영[성령]으로 우리의 고난에 한결같이 동참하심이니, 그만큼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주님의 남으신 고난을 각자의 몸에 채우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그 뜻이다.

이 고난은 더 이상 구원 받을 사람이 없을 때 끝나는 것이니 바로 그 순간이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때이다. 나타나실 때 우리 몸도 역시 주님의 몸과 같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게 된다. 주님과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러하시면 우리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이 땅에 계시면 우리 몸도 자동적으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므로 첫째 우리가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움으로써 사람 살리시는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몸된 교회 차원에서 '고난 받음으로 인한 사람들 구원 사업'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은 시험의 때로서 우리의 믿음이 저울질되는 시기이므로, 중간에 믿음을 버리고 멸망에 이르는 이들도 속출하는 때인즉 우리의 몸은 아직은 구속 받을[롬 8:23] 적기(適期)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주님 일찍이 하신 말씀이 있으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너희 있을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데 예비하면 너희를 데리러 오겠다" 하신 것이다.

고로 지금은 천국이 한창 건설 중이라 할까. 주님은 주님대로 하늘에서 일하시고 우리는 땅에서 일하는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 그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시니[고후 6:1] 양면으로 일하시는 것이다.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양면성과도 부합한다 할까.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때는 이미 그 "예비하시는" 작업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의 시험 기간도 종료되어 이제는 우리 몸의 구속만 남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몸은 주님의 나타나심과 동시에 일시에 신령한 몸으로 일제히 변화하는 것이다.

그 옛날 처음 창조시에 아담의 코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영혼이 조성되고 영적인 존재가 되어 에덴낙원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각 사람은 모든 시험을 끝내고 그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데에 아무 하자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옛날 에덴낙원에 상응하는 천국 즉 주님께서 예비하신 그 처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은 우리의 시험 기간이라 했거니와 우리가 받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주님처럼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을 말함이다.

이 고난과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탈락하면 즉 첫 사람 아담이 유혹을 받고 거기 넘어간 것처럼 시험자[그는 여전히 옛 뱀 곧 사탄이다-계 12:9/20:2/2:7]에게 지는 경우에는 아담이 그 불순종으로 죽음에 이른 것처럼 죽음 이제는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순서를 밟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고난은 필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차원에서도 필수이고 우리의 순종 여부가 가름되어지는 일에서도 필수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종일관 주님의 죽으심을 내 몸에 짊어지는 것이니 꼭 믿음의 순절(殉節)의 시기에만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을 평시에도 항상 그런 마음의 자세로 일관함이다. 그러니 실상과 진리를 모르는 세상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항상 사형수가 자기 사형 틀 곧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생활을 하라고 주님은 엄명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속성상  고난이 필수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그 증명이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된 각 지체이니 머리가 어떠하심과 같이 몸도 당연히 그러해야 하므로 그 교회를 위하여 그 고난을 일부 남겨두신 것이다. 그래서 남은 고난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우리도 당하게 되어 있고 따라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물려받아 계속하게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 세상 삶은 지상 동식물에게나 적합한 것이지 인간에게는 원천적으로 극히 이질적인 것임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죽음의 터이지 삶의 터가 아니다. 그리고 죄의 장소이다. 주님 십자가 죽으심도 이 세상의 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니 곧 시기와 사악한 증오다. 나의 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히 6:6].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자연계에 속한 몸이라 그 모든 악조건에 일방적으로 당하게만 되어 있는 처지에다가 죄까지 넘치고 넘실거리는 세상이니 우리의 처지가 성할 까닭이 없다.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 표본이 악인 가인에 의한 의인 아벨의 죽음이다.

다시 말해 아무 잘못도 이유도 없이 미움 받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의 생리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그 대표가 되어 있고 그 정점이 되어 있다. 성경에 이른 대로 악인이 형통하는 세상이다. 하박국도 예레미야 및 기타 선지자들도 이 사실을 하나님께 여쭈었고 그리고 그 해답을 얻은 기록이 성경에 나와 있다. 그들이 궁금해한 것은 악인의 형통이었다. 그 대신 의인은 매일이다시피 징계를 받는 상태이므로 이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주님께 질문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으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셨다. 믿음의 시련이고 시험이니, 이 믿음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함이고 우리로서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움이 스스로의 온전함을 기하는 지름길인 것이다[히 5:8,9]. 욥의 경우에서도 이 교훈을 나타내시고 있다. 욥이 그렇게 고난을 받은 것도 이상 사실을 근거로 하여 시험을 받은 것이다. 일관된 하나님의 뜻이고 의미이다. 이 시험을 견디고 욥처럼 어리석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이기는 자는 욥이 갑절이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될 것이다. 그것을 확증해주신 것이 욥기이다.

어차피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고난을 통해 고통을 받게 되어 있는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인생이다. 이 고통을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인생들은 알아야 하는데 오직 눈 앞의 이익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눈 앞의 것이 사라지면 연속해서 영원한 고통이 연속적으로 달려드는 것을 모른다. 일시적인 고통보다 어느 순간에라도 닥치고 말 영원한 고통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다.

자연계에 속한 인간 육체의 비극. 어느 순간에라도 끝나는 운명일 뿐 아니라 얼마나 무기력한가는 일상 보고 듣고 아는 바다. 그리고 죄가 넘쳐 나는 이 세상이니 악한 자가 장땡이고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여 없애는 그런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오히려 의인이 되어 죽는 것이 영예다. 죄인으로서 한 때 눈 깜짝 할 사이의 부귀영화를 탐하는 것[단지 탐한다는 것이지 누리는 것도 아니니 이 세상에서 누린다고 해보아야 순간적이 아닌가]보다 모세처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현명할진저[히 11:24].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세 사람의 청년이 두 사람의 젊은 여자와 더불어 원형 경기장의 굶주린 야수들에게 찢기기 위해 경기장 안으로 내쫓겨 순절(殉節, 순교)의 영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만면에 믿음의 승리의 웃음을 머금고 장내로 들어오다가 자기네를 이런 형장으로 내모는 판결을 내린 재판장이 관중석에 높이 앉은 것을 보고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그대가 나를 이 자리로 내모는 판결을 내렸지만 장차 그대를 하나님이 판결하실 것이오".

이 말을 듣고 격노한 관중들은 그들이 짐승에게 내몰리기 전에 실컷 매질을 하라고 주문하므로 매질을 한 후 짐승에게 찢기게 되고 한 차례 야수들에게 찢겼으나 한없이 피를 흘리면서도 죽지 앉자 두번째 짐승에게 내몰렸는데 이번에는 짐승들이 흥미를 잃어 덤벼들지 않으니 그대로 불태워 죽였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기도하시기를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니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시기를" 구하셨고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을 때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기를 기도했다.

인식 전환이 중요하다. 각도를 바꾸어 보면 그 보고 인식하는 데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원수 사랑하는 것도 천지가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도저히 못할 것같지만 인식을 바꾸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청년으로서는 자기를 그렇게 죽음으로 내몬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경륜과 섭리에서 오는 것이므로 이 때문에 누구를 미워할 것도 없고 두고 보자는 식으로 그런 말이 나올 필요도 없다. 증오와 원수 갚는 마음보다 오히려 공중 앞에서 그 판결자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 또는 믿고 구원 얻으라는 권유의 말이나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할 수 있었으면 미친 관중들도 개중에는 감동을 받고 믿음에 들어오는 이들이 있을 것이었다.

기록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여유 만만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는 것을 보고 놀란 나머지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청년의 태도를 관중들은 좋게 보지 않았다. 원수 갚는 마음 또는 증오하는 마음은 그들 자신의 마음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감동이 될 수도 없고 역시 사람에게는 누구나 양심이 있기에 자기 눈의 작대기는 보지 못해도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는 법이다. 양심이란 자기 자신의 도덕적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 주신 잣대이므로 그런 양심에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일에 예민한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 비록 그것을 구경거리라고 하여 몰려든 저들이 야수같고 사람 같지 않지만 양심만은 있어 그 청년의 자세를 판단하여 옳지 않다고 판결한 셈이 된 것이다. 그 그리스도인 청년의 한 때 잘못 먹은 마음보다 그 관중들의 양심이 오히려 심판관이 된 것이다. 어찌 비단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만 해당되는 일이랴. 모든 일에 그리스도인들의 언행은 불신자 앞에서 그렇게 판결되는 것이니 어찌 마음을 다지지 아니하리요. 모쪼록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 받게 되시도록 최선을 다함이 우리 본연의 임무가 아니리요.

어중간한 태도를 취할 일이 아니다. 믿으면 확실히 철저히 믿을 일이다.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 수 없을 바에야 처음부터 사는 것 자체를 일절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올바르고 악함을 버릴 바에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옳다.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움 즉 다른 사람들을 다시 출생하게 하고 새로 창조되게 하는 사람 살리는 것이 목적일진대 끝까지 참아 그리스도께 본을 보이신 대로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公義)로 심판하시는 이께 부탁하셨다"[벧전 2:23] 한 그대로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고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단순히 세상의 미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빌 1:29].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함"이라고 분명히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니 그 "남은 고난"이므로 그것을 채우는 것 역시 분명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베드로도 그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임을 누차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 친히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그 남은 고난을 마저 채우시고자 일부러 그렇게 되도록 정하신 것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그것을 막을 것인가. 로마 카톨릭의 핍박의 대상이 된 이들이 당시 정치 권력을 등에 업거나 혹은 자위수단으로 무력에 호소한바 있었지만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다. 초대교회가 한 대로 따르면 되는 일이다. 초대교회로써 하나님은 앞으로 모든 시대의 교회가 본을 삼아 따를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중요하다. 만일 무력으로 교회를 지켜야 할 것이었다면 당시에 얼마든지 조직화하여 또는 국가 권력을 흡수하여 강력한 권력체제를 확립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그리고 세상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까지는 전적으로 마귀의 체제다[요 18:36]. 그가 지배자이다. 권력으로 맞선다면 그를 상대로 하는 것인데 육체인 인간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까. 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요 하늘에 있는 악령들과의 전쟁이라 한 것이다.

육체적인 싸움은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니, 영인 사탄과 육체인 우리가 적수가 되지 못한다. 오직 믿음의 기도와 말씀 전달로써 우리의 할 일 즉 세상 앞에 제사장의 의무를 다할 뿐이다. 제사장의 임무란 것은 희생제물이 없이는 불가능한데 그렇게 고난 받는 각자의 자기 몸이 그 희생제물인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그 부귀를 거들떠보지 않고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데[요 12:25], 세상 사람이 자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싸우는 것과 같이 자기 방어를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자기 방어를 하지 않아도 그리고 사탄이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어 있어도 우리의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시고[롬 12:19] 또한 그리스도인에 관한 한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일절 손을 못댄다[욥 1:12/2:6].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8]. 합심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일진대 사도 야고보처럼 칼에 희생되는 일이 있지 않을 것이고 베드로처럼 기적으로 탈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한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한 중에서도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 그것이 최고, 최상, 최선이다.  가장 영광 돌리는 방법이 되도록 합심 기도로 대처할 일이다. 순절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힘을 고취시켜 주는 의미에서도 적절한 것이다. 무력에 호소하지 않는 것은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말씀에서도 분명해진다. 5리를 가자는 이에게 10리를 가주고 겉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속옷도 내어주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뺨도 돌려대는 여유와 기개, 사랑 등을 보일 수 있으면 그 상대방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에 촉매제 구실을 할 수도 있는 일이다.

주님께서 "약함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후 13:4] 했지만 그것은 한쪽 면만 본 것이고 나머지 면으로 보면 그야말로 위세당당한 늠름한 기개가 아니셨던가. 즉 초강력(超强力)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 하고 "그러므로 나의 모든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한다"[고후 12:10] 하였다. 이쯤 되면 오히려 세상이 기가 질려 무기력과 약함을 실감하고 극도의 좌절감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진정 강함이 아닌가.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그들이 비겁하게 밤중에 몰려 왔을 때 주님께서 "너희가 찾는 바로 나이다" 하고 나서실 때 완전히 기가 꺾여 제일 먼저 앞에 나와 껍적대던 자 하나가 그만 가위가 눌려 뒷걸음 치며 물러나는 통에 그 뒤에 있던 자들이 연달아 도미노식으로 쓰러졌으니 이 광경을 가까이서 목도한 요한이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인간의 물리력보다 더 강한 힘을 그들은 목격한 것이다. 그런 강함이지만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기 때문에 그들은 손을 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너희 때"[눅 22:53]라 하셨다. 모든 것이 그러하다. 인간의 계획이나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의 계획이거나 간에 피조물 스스로의 뜻이나 계획대로 되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 모두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선상(線上)에서 그 뜻에 일치하게 이루어지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렇다고 분명히 밝히셨지만, 어리석은 인생들이 이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믿지 않아도 좋을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당치도 않은 교만 때문이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고 그들이 아무리 지지고 볶고 별의별 짓 다해도 우리 머리터럭 하나도 상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우리 보화 우리 재산과 재물은 도둑도 뚫지 못하고 좀도 녹도 슬지 않는다는 사실은 일점일획도 흔들림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셔서 능히 모든 시험을 감당케 하신다는[고전 10:13] 사실을 항상 명념할 일이다. 주님 세상에 오셔서 "화 있으라! 화 있으라! 화 있으라!" 연달아 저주를 선언하신 것도 모두 이 교만을 두고 하신 말씀들이다. 진실로, 겸손한 자에게 복이 있다.
 

고난으로 온전케 되는 순종

순종은 양자 사이의 사랑에서 작은 자가 큰 자에게 나타내는 사랑이다. 그냥 마음 내키지 않으나 명령이니 따르는 것은 적어도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은 아니다. 구원 받은 자에게만 요구하시는 것이니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즉 구원 받음으로 인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발로이어야 그것이 순종이다. 억지로 나타내는 것일 때 당자는 아무리 순종이라 하더라도 구원을 받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구원 얻기 위한 행위'로 간주되므로 '구원 얻으려는 종교행위'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양자 관계에서 큰 자가 작은 자에게 베푸는 사랑 역시 "온전하고자" 할진대 고난을 통함일 수밖에 없다. 순종이 고난을 통해 온전해진다고 성경에 명시함과 같다. 고로 사랑의 "온전함"은 고난 즉 어려움과 역경을 통해 완벽한 색깔을 드러내고 그 전부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완전한 자유의지를 확립해주셨기 때문에 이미 인간의 범죄 가능성을 예상하셨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인간 주위로 영물들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인간을 꾈 수 있는 그런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간이 사탄의 꾐에 넘어가자 하나님께서는 친히 고난을 통해 그 사랑을 증명해 보이시지 않을 수 없음을 아시고 즉시 그 준비에 돌입하신 것이 즉 그 순서를 밟아 나가신 첫 손길로서, 인간이 그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엮어 두른 아랫도리 치마를 당장 벗겨 버리시고 피 묻은 가죽으로 바꾸어 옷을 해 입히신 것이다.

이 희생물은 양이었다고 믿어진다. 이로써 죄 있는 자의 죽음을 위해 죄 없는 자가 함께 형벌을 당하는 구원의 의미를 명확히 인간에게 나타내기 시작하신 것이다. 장차 하나님 친히 그와 같은 고난으로 당신의 사랑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불가피성을 친히 드러내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 즉 순종도 고난을 통해 온전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역시 그리고 먼저 고난을 통해 그 "온전함"을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아버지께 대한 순종을 그와 같이 나타내심과 더불어 우리에 대한 사랑의 "온전함"을 동시에 보이신 것이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고난으로 온전케 할 기회가 왔고 그 차례가 온 것이요 이것을 오늘날 단지 이행하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동시에 우리 피차간에 나타내는 사랑을 또한 고난을 통해 즉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 온전함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

에덴낙원에서의 행복은 결국 인간 비극으로 끝났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불행을 서로[하나님과 인간 공히] 사랑을 온전케 하고 확인하고 입증하는 기회로 삼게 하신 것이다. 고로 이 의미를 읽고 이에 정확히 응해야 함이 필연이다. 사랑하는 사이의 사랑의 확인은 어차피 있어야 할 일이 아닌가. 반드시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영원 세월을 통한 사랑의 복락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 것인가.

순종은 고난으로 검증 받아야


애초 에덴낙원을 지으심으로 계획하신 인간 삶은 폐기기 되었고 창세기 첫머리에 기록된 대로의 공허와 혼돈과 암흑이 현재의 이 인간 세계이다. 악이 창궐하고 그 악인이 형통하는 것이 현실이고 성경이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으니 혼돈과 공허가 아닐 수 없다. 그 혼돈 속에서 제6일 창조가 시작되었던 것과 같이 세상이라는 이 혼돈 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피조물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 피조물들이 거하게 될 영원한 낙원인 하나님 나라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장차 전개됨으로써 본격적인 인간 삶이 시작하는 것이다.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지 이 세상 삶이 그대로 연이어져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전 15:50]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입증된다. 세상 종교는 이 세상 생명을 살고 그 연장으로 영생에 들어가자는 것이니 허구요 속임수요 무지이다.

더 다시 이전과 같은 폐기 조처와 새로 시작하는 새 창조가 필요 없도록 이 세상이라는 공허와 혼돈 속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완벽하게 되는 과정이 수료되는 것이다. 영원한 아들들로서의 순종이 영원한 삶의 핵심이므로 그 순종을 "온전하게 함"이 그래서 필요하다는 것이요 주님 친히 그 시범(示範)이 되셔서 고난을 통해 그 순종을 온전케 하신 것이다[히 5:8,9]. 고난을 거치지 않는 순종은 불확실성의 연속일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적당하지가 않다.

그렇게 '고난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순종은 하나님 나라에서 통용될 수가 없다. 이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고난은 순종의 검증 과정인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확실히 하고 있다[:9]. 이 고난을 통한 검증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 죽으심"[빌 2:8], 그리고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계 12:11]로 표현되고 있다. 여기는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다. 오직 "우리가 행한 대로 보응하심"[롬 2:6] 받기 위한 그 "행함"을 나타내기 위한 곳일 따름이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7] 보응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 아들들이 나타나기까지"[8:19]는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여"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때이므로[롬 8:22] 그래서 혼돈과 공허이다. 새 생명 탄생시키기까지의 해산의 수고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감히 어디라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세상이 손이라도 댈 수 있겠는가.

일부러 그런 고난을 받기 위해 사람되신 것이 아니라면 어디라고 그리스도께 세상이 감히 손대어 십자가에 매달겠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고로 "나를 미워하였으니 너희도 미워할 터이요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 하신 것이다. 두 가지 중 하나다.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다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그 하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세상이 구박하니 하나님이 보우하심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시거나 아니면 세상이 너무 강하여 하나님도 어쩌실 수 없다는 소
리를 안들으려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결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정이 되면 이것은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결론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런 고난에서 제외된다면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으로서는 불안의 요인이 아니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당연히 그런 점에서 불안해할 근거가 됨이다.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빌 1:29]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열두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가 하나님 말씀 전파를 이유로 부당하게 매를 맞았을 때 그렇게 고난 받음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 받은 사실에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했었다[행 5:41]. 이런 고난은 또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뜻도 되니 반드시 잘못이 있어 회초리를 받는다기보다[물론 그런 면도 분명히 있지만] 우리의 고난 자체가 그런 징계가 되고 이것은 곧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히 12:1-12]하시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물론 회초리를 맞아도 위의 지적처럼 분명히 "기쁨"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슬프다"[:11]는 사실을 성경도 인정한다. 그러나 연단에 목적이 있으므로 이 연단을 거친 나중 결과는 필설로 형용을 못한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된 하나님의 사랑 등 금덩이 같은 화려한 말씀이 즐비한 장(章)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광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도 함께 짊어지지 않으면 안되는"[롬 8:17] 것처럼, 이 영광스러운 말씀은 영광과 고난으로 '동전의 양면'이 되어 있다.

8장 말미에 "우리가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36]라는 말씀이 바로 이 "세대"[주님이 늘 하시던 말씀처럼] 우리를 가리키신 것이다. 이 시대 우리일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에 기록된 대로[히 11:35-40] 갖가지 고난의 메뉴들을 이미 아벨 때부터 받기 시작한 이 세상에서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양상이다. 성경은 이를 설명하여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함"[:35]이라 했으니 "더 좋은 부활"이란 상반절(上半節)의 "부활"[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육체의 생명이 일단 꺼졌다가 다시 피어나는 현세의 부활-:35]에 견준 것이니 곧 영생, 영원한 부활이다.

"우리가 도살할 양같이 여김 받는다"는 말씀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이 세상에서 받는 것임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심도 "도살당하신 희생 양"이셨기 때문이 아닌가.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이 "도살당하신 희생 양"을 따르는 우리들이니 역시 "도살당하신 희생 양"의 모습이 아닐 수가 없고 세상이 그와 같이 우리를 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예 처음부터 세상을 사랑할 마음, 세상에 미련을 둘 마음은 먹지 말 일이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을 뿐만 아니라 세상 또한 내게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갈 6:14]. 세상이 우리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을 인간세상 취급하지 않기는 일반이다. 사람 살 만한 인간세상이 아니라 마귀와 악령들의 소굴 속에 갇혀 멸망해 죽어가는 인생들의 음산하고 음흉하고 살벌한 감옥이요 움막인 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보나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보나 서로 정상이 아닌 비정상으로 보기는 일반이다. "도살당하는 희생 양"처럼 여김 받았다는 구절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유일한 관심사로서 그런 악령들의 소굴 속에 갇힌 단 몇 영혼이라도 건져내는 것이 급선무이고 그것 외에 세상에서 아무 할 일이 없고 시간을 보내는 의미가 없다. 이와 같이 자기 부인 곧 사랑, 다시 말해 순종을 검증 받는 곳이 이 세상의 의미인 것이다.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예수님께서 그토록 초인적인 능력을 행하셨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셨으나 그리하여 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는 이들은 다 두려워했지만 철저히 약하셨고 그야말로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이셨다. 그래서 아무 항거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의지가 그러하셨기 때문이다. 이 의지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초대교회는 그 핍박 그대로 받으면서도 번져 나갔고 그 후로도 계속되었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고난 받음이 이같이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건만 많은 사람이 의식적으로 이를 무시하려 하고 외면하고 있다.

때문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은 험하다 하셨는데 이 말씀을 외면하여 넓은 문으로 수월한 길로 착각하고 있으니 그래서 사람이 가르친 것으로 구원의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구원의 말씀 전달이 아니라 세상 종교가 되어버렸다. 예수님 당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기만 하면 사정없이 당시 사회에서 매장당했다. 그것이 두려워 그토록 크신 능력을 행하시면 사람들이 놀라워하면서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쉬쉬하였다.

험한 길을 걸어야 하고 좁은 문을 통과하려고 하나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신 것이다. 성경에는 이 외에도 이런 경고가 넘쳐 나지만 예를 들어 이 한가지만이라도 자세히 유의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북한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생각해보면 충분할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분명히 한 대로, 철로 레일과 같은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믿는 것만큼이나[은혜로 믿음으로] 대등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깊이 음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성경을 직접 들여다보고 절대로 사람의 요약해놓은 복음해설을 무턱대고 수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걸러내고 솎아내고 추려내는 자세를 취하여 마침내 아무 것도 걸러낼 것이 없으면 좋고 그러나 있다면 과감하게 잘라내는 안목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성경 기준에서 볼 때 그야말로 세상을 사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연연해할 것이 일절 없다.

단지 경각간에 닥칠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오직 예수님", "오직 예수님", "오직 예수님"만 되뇌는 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이 세상 인간 목숨[삶이라기보다]이란 것을 절감하는 하루하루가 되지 않으면, 정말 무척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그 정을 못끊고 하는 따위는 참으로 너무 사치스러운 축에 속하는 것이다. 세상 끝까지 그야말로 '죽어가는 사람'의 심정이어야, 목말라 물 한 모금 간절히 찾는 그런 자세, 오래 병든 자 의사 찾고, 고된 중노동 속에서 쉼을 찾는 그런 심경을 계속 유지해야 불들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라 생각되는 것이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주님 주신 말씀 한마디한마디에 온 몸을 기대어 그 의미를 찾는 그런 갈급한 심정이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가 충만하고, 사랑의 기쁨으로 기도하며 주님의 심장으로 성령 안에서 제사장의 기도를 남 몰래 또는 형제들과 합심하여 하는 가운데에서 내적인 힘은 키워지는 것이다. 언제나 기억할 것은 이 고난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함께 당하는 일치된 일률적인 고통이라는 사실이니 주님 친히 지금도 그 교회를 통하여 당하시는 남은 고난이시기 때문이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라야 기쁨으로 거둘 것이라고 성경에서 미리 말씀하시고 있다.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해산의 수고. 나와 함께 하는 내 이웃의 아픔을 같이 나누어지는 고통은 아름다운 일이요 거룩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사랑은 본디 아름다움이요 거룩함이요 깨끗함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거룩하심, 깨끗하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 복스러움에 동참하는 이 한없이 행복한 사람이다.
 

고난 다음의 영광

시내 산에서 모세 율법을 주시기 전 하나님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으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될 것이라"[출 19:5] 하셨다. 이는 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너는 나의 것, 나는 너의 것이라는 말씀이신데 이와 같이 "너는 나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이면에는 "나의 너의 것, 너의 소유"라는 사실을 이미 함축하시고 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입증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모세 율법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명의 형태는 지킬 수 있으나 그 속 내용 즉 율법의 "요구"[롬 8:4]는 인생 내면의 "죄와 사망의 법"[7:24]으로 말미암아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아야 했었다. 모든 인생이 생명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죽음 가운데 처해 있음을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모세 율법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죽음 가운데 있으니 생명의 법을 지킬 수가 없다.  생명의 법을 지키지 못하므로 여전히 죄에게 포로되어 있고 따라서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만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하시는 이 곧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대망하게 되는 것이었다. 현재 인생이 생명 가운데 있지 않고 사망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통념인 인생의 죽음은 죽어야 죽는 것이라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지금 비록 살고 있어도 죽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마 8:22] 하신 것이다. 이는 애초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죽음 가운데 있지 않고 생명 가운데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어도 죽은 자로 말씀하실 때는, 아담은 그러면 영생하는 자였다는 사실을 나타내심이 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영생하는 산 인간을 능히 죽일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지닌 것이라면 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신령한 나무이지 이 자연계에 속한 일반 식물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신령한 나무를 내게 된 그 땅도 역시 같은 속성으로서 신령한 땅 즉 에덴 동산 자체가 영계임을 확증함이다. 선악과 나무와 함께 있던 생명나무 역시 마찬가지다. 선악과 나무는 영생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죽게 만들고 생명과 나무는 그 정반대로 영생하게 하는 나무이니[창 3:22]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땅 자체가 신령한 것이고 따라서 에덴낙원이 영계였다면 그 선악과 나무, 생명과 나무를 제외한 다른 일반적인 나무 열매 역시 자연계에 속한 나무는 아니므로 그 과일을 인간이 먹으면 그 먹는 것 자체가 역시 비슷한 어떤 결정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런 각종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인간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신령한 육체로 변환할 수 있었다고 함은 자연스러운 논리다. 그러므로 자연계와 대칭적인 영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딱히 구분해서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성경은 그 모든 기록으로써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동전의 앞과 뒤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단지 한 닢의 동전이지만 대칭적으로 되어 있다는 그 의미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창세기 기록에서 "이것은 영계이다", "여기서부터는 영적인 것이다" 식으로 구질구질한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단지 그 서술한 그대로를 따라 이해해 나가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면서 동시에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선과 악을 기계적으로 알게 되어 있는 본능적 기능이 소멸되었다 할까 축소되었다 할까 퇴화하였다 할까 하여튼 어떤 식으로든 그 기능은 더 이상 작동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아담]이 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만드신 것이 그 땅을 소재로 하여 창조된 "각종 들 짐승, 공중의 각종 새" 등 영물들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짐승들"이 인간에게 선과 악 즉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게 하는 지식 공급원이 되게 하신 것이다. 왜냐면 영계란 것은 그 자체가 자연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그 땅으로 조성된 영물들은 생겨나면서부터 지식면에서는 인간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사랑의 원리에서 보는 바와 같은 둘이 하나되는 한 짝으로서의 개념으로 된 돕는 자[영역으로는 "helper", 우리말로는 "배필"로 마치 남녀 부부 사이를 의미하는 것처럼 잘못 번역되어 있음]를 만들어 주심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동물들 중에서는 그 누구도 아담의 마음에 흡족한 자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지식면으로는 아담보다는 다 월등하나 우선 그 모양새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아담의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여자를 지으시게 되는데, 이 여자는 아담 자신에게서 났고[고전 11:8] 또 이미 선악에 대한 지식에서 아담을 보좌하기로는 영물들로써 충분하므로 아담을 지식 면에서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 아담을 돕는 위치이었다.

다른 측면이라고 해서 자녀 생산하는 일은 아니었으니 아직 자연계의 육체로 되돌아가기 이전이었고 여전히 위치한 곳은 영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계에 있을 때 아담 내외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는데, 이 영계에서의 생육과 번성은 그 방법이 자연계와 같을 수가 없다. 왜냐면 신령한 몸을 하고 있으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와는 달라, 비록 아담이 남자와 여자로 되어 있으나[이들 내외는 아담의 이름으로 불려졌으니 여자라고 해서 따로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위의 영물들처럼 영적인 존재이므로 자연계에서처럼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자녀 생산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영계에서 영물들의 도움으로 신령한 방법대로 자녀 생산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왜냐면 범죄하지 않았을 때는 아담은 항구적으로 청춘 그대로이고 노쇠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그 있었을 법한 영계에서의 자녀 생산을 상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나, 그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냐 하는 결론에는 이를 수 있는 것이니, 자연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막강한 능력의 영계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해서 인간은 죽음에 처해져 죽은 자가 된 것이다. 인간 고유의 신령한 몸을 박탈 당한 것이 인간에는 죽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창조 당시부터 이미 신령한 세계에서 신령한 몸을 입고 있었던 인간인지라 그 고유성(固有性) 혹은 특성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라 영계에서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영생하는 영적 존재라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 아래에서의 이스라엘은 이러한 죽음과 죄의 속박에서부터 구원되는 길을 밝혀주실 구원자 곧 메시아를 하나님께로부터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이 메시아의 특징을 모세 율법은 명백히고 보이고 있었으니 곧 속죄 제물을 중심한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 속죄 제물이 인간의 죄를 없앨 수 없음은 명백해지는 사실이었으니 인간의 죽어 마땅한 죄를 일개 말 못하는 짐승의 피가 대신할 수 없음이다. 그렇다면 짐승과 인간이 모든 면에서 동격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를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짐승으로 바쳐지는 제물은 단지 상징으로서의 의미만 있고, 그런 제물이 상징하는 바대로 실제 인간의 생명이 모든 인간을 위해 바쳐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친히 인간이 되시는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이 역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리고 모세 율법이 상징하는 바에 의해서 이스라엘에게 이미 알려져 있었던 터이다.

그렇다면 그 메시아[구원자]는 모든 인생의 죄를 짊어지고 갈 만한 '사람'이지 않으면 안되고 그 인생으로서의 모습은 죄를 짊어지는 것이므로 당연히 죄인의 모습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기에 이미 이사야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예언한 것이 이사야 53장인 것이다.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사 53:12]이라 한 것이 바로 그러하다. 이렇게 명명백백하게 미리 말씀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중심 일변도로만 치닫던 전반적인 유대인 사회는 이를 마음에 담아둘 영적 여유가 없었다.

과연 메시아는 오셨다. 그 모든 예언대로 철저히 죄인으로서의 모습이셨다. 위풍당당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가끔 그 행하시는 능력에서 말씀에서 그리고 그 자세의 당당함에서 잠깐 비쳐지는 듯했으나 당시 그 순간뿐이었고 일반 대중은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흘러 자기중심으로 나타날 그런 세속적인 메시아만 환상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능력과 말씀으로 보아 "이 이가 그 이가 아니신가?" 했으나 하루 아침에 관헌에게 붙잡힌 몸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상, 세속적인 즉 자기중심적인 그들의 열광적인 환영과 기대는 물거품처럼 꺼져 버린 것이다.

오직 주님의 부활하심을 직접 목도할 정도로 그래도 메시아를 제대로 인식한 사람은 바울 사도의 기록대로 하면 500명 정도였다. 부활하심을 직접 확인케 해주실 정도로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 사람이 그 정도로 소수였던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대로 세례 받은 이가 남자만 해도 3천, 5천이라는 숫자는 그 이후에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왜 이 때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을까.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죽으시기 전에 행하셨던 그 능력이 사도들로 인하여 계속하여 나타남으로 인해 이 사실을 또한 확증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행 14:3/히 2:4/막 16:20]. 반면에 고난 받으시기 전에는 그런 예언[여러 선지자들의 그리스도께 대한]의 합리성을 생각하기보다 자기중심으로 잔뜩 기대를 모았던 그리스도가 맥없이 붙잡혀 무참히 죽게 되자 실망과 아쉬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구원이 되기도 하고 걸림 돌이 되기도 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후자에 속하는 이들은 끝까지 '자기중심'을 회개하지 않는 경우다. 그런즉 구원은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고통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애초 창조하신 생명이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에, 다시 생명으로 연이어지려면 그것이 정상 단계이다. 다시 말해 자기중심의 죽음 속에 갇힌 내게 친히 그리스도께서 임하여 오셔서 나 '중심'의 자리에 그리스도 '중심'의 자리를 만들어, 그 자기중심의 구조를 하나님 중심 즉 그리스도 중심의 체제로 바꿔놓으심으로써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 기초가 죽음이고 토대가 죽음이다. 이 세상이 죽음의 현장이요 현주소인 것이다. 죽음인데 살고자 하니 착각을 해도 유분수다. 죽음 속에 뛰어드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이 세상이 모두 죽은 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하다. 누구든 자기 스스로를 산 자로 인식하는 한 구원은 요원하다.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는 것이지 영광을 보는 것이 아님이다. 고난 후의 영광이다. 영광부터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상황 판단이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하신 다음 엠마오로 가는 길의 두 제자를 만나시고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하신 것이다. 그 두 제자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의 그런 메시아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 상당히 실망 중에 있어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다"[:21]는 탄식을 했기 때문에 "미련하게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25]이라 책망하신 후 대답하신 말씀이신 것이다.

여기서 자기중심과 하나님 중심 곧 자기 사랑 혹은 세상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판별 나는 것이다. 자기중심 그대로 나가려는 사람은 이러한 그리스도 상(像)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사람들은 남김없이 이 세상에서 여과(濾過)되도록 되어 있다. 천국에 절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세상을 사랑하였으므로 세상과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재림도 이와 같은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상태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을 영접하시기 위함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왜냐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히 9:28] 나타나신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영광을 얻으시고 기이하게 여김을 얻으신다"는 것도 그의 백성들 즉 "모든 믿는 자"[살후 1:10]로부터라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적(敵) 그리스도를 폐하시는 의미도 있음은 물론이다. 주님 다시 오실 때는 거의 모든 세상이 적 그리스도에게 경배함으로써 "짐승의 표"를 받고 있는 상황이므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9] 순간이기에 하늘로서부터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는 장관을 구경하고 말고 할 것도 없고 아무 경황도 없을 것이다.

주님 친히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할 것이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며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볼 것이다"[눅 21:26,27] 하셨으므로, 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인지하게 될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까지는 일절 영광이니 하는 따위의 환상을 말끔히 씻어내고 오직 죽음의 고난 속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사업에 부지런히 전력을 다하여 임할 일이다. 이마에 땀 흘려 일하고 새 생명 탄생시키기 위해 수반되는 산고(産苦)의 극통(極痛)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을 잘 견디고 참는 것이 대수다. 그래서 영생의 요건이 "참고" 선을 행함이다[롬 2:7].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하는 것은[눅 21:27] 마치 동화를 읽는 것처럼 착각할지 모르나 이 세상 신(神)인 사탄이 그동안 얼마만큼 인생의 눈을 멀게 하여 보지 못하게 했는지 실감케 하는 대목이 된다. 다시 말해 첫 사람 아담이 바로 그런 모습 즉 신령한 몸으로 에덴낙원에 일시 살았음을 감추어 온 것이다. 오늘날 빈번하게 출몰하고 있는바 소위 UFO[미확인 비행물체]에 대해 아무도 이것을 동화 속의 현실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목도하는 자가 많고 그동안 쉬쉬하던 일부 국가 정부 기관에서도 그 현상들을 포착한 기록 영상들을 세상에 낱낱이 공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우리는 영적인 신령한 몸이 어떤 것인가를 구경하며 확인하고 있는 터이다. 바로 왕년의 영물들 즉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 존재들이 그런 소위 외계인, 외계 문명 또는 외계 우주선으로 가장하여 인간들의 마음을 교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세상 신(神)인 사탄이 그 "네피림"[창 6:1-4] 족(族)의 자기 자식[3:15] 곧 "멸망의 사람"[살후 2:3]을 시켜 자칭 하나님이라 하면서 이 세대 최후 마지막으로 인생들을 속이려는 만반 태세를 갖춘 오늘날이다. 고로 오늘날은 사탄으로서는 그동안 백 프로 효험을 보던 무신론이나 진화론 따위로는 더 이상 안되겠기에 서서히 거두어 들이고 있는 상태에 와 있기 때문에 바로 이런 소위 이런 생명체 또는 물체로 가장하여 악령들이 공중에서 묘기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소위 첨단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외계인으로 자처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실상은 그들 자신이거나 또는 그들이 만든 물체일 따름이다.  

그들은 영물들인지라 거의 모든 형상이나 물체로 스스로를 변모시킬 수 있는 터이다. 영물의 실체에 대하여 무지한 인간들이라 웬 영문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성경을 알고 이 세상 신인 사탄과 이들 악령들의 실체를 안다면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러한 영적인 실체(實體)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에 국한하는 레이더 망에 잡히기도 하고 벗어나기도 하는 등으로 인간의 눈에는 묘기로 나타나지만 이는 식은 죽 먹기의 영물들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면 순식간에 신령한 몸이 되었다가 자연계에 속한 물체로 변신하였다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변신술에 의해 왕년에는 인간이 되어 "네피림"을 세상에 퍼뜨린 것이다.

이같이 영물들이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주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즉 신령한 몸으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신령한 몸의 속성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부활 당시에도 바로 구름 속에 가려져 승천하신 것이 아닌가. 즉 자연법칙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 신령한 육체다. 문을 닫아도 들어오셨고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갑자기 사라지신 모습을 엠마오로 가는 길의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이다.

고난 받으시기 전 물 위로 걸어가시고 또는 변화산 상에서 요한, 야고보, 베드로 앞에서 변형되신 것은 부활하신 후 나타내 보이신 그런 신령한 몸과는 영역이 다르다. 어디까지나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그런 변형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베드로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물 위로 걸어간 것이니 당시 베드로는 물론 신령한 몸이 아니었다. 이런 일은 주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4천명, 5천명을 먹이시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

혹자는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사실을 부정하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환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마지막 아담이시라고 해서 첫 사람 아담이 범죄 전 신령한 몸으로 에덴낙원에 있었다는 설명까지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가정해보자. 주님께서 그런 능력 나타내심으로 하나님의 능력 즉 자신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나타내시는 데에 목적이 있으셨던가?

고난 받으시기 전에는 혹 그런 점을 고려하실 수도 있겠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에 이르도록 하려 하심이나 그러나 이미 그런 기적 때문에 안믿을 사람이 믿는다고 보지 아니하신 것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요 6:36] 하셨고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들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들이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다"[요 15:24] 하셨기 때문이다.

또 부활하신 다음에는 그 부활 자체만으로도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신 것이다[롬 1:4]. 그렇다면 굳이 그렇게 시종일관하여 능력을 나타내려 하실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렇게 부활 자체로써 하나님의 아들되심이 명백히 가름되어졌으니 이제는 사람이심 즉 인자(人子)되심을 강조하시어[항상 당신을 지칭하실 때 "인자"라고 하셨듯이] 일부러라도 그런 능력을 자제하실 정도가 아니신가. 부활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는가.

그러한데도, 오히려 더 빈번하게 그런 능력을 나타내신 결과가 되었으니[능력 과시라고 가정한다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는 그 한 때만 의도적으로 그런 신령한 몸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시는 순간부터 그러하셨음을 나타내시고 있으니 그렇다면 영원히 그런 몸으로 살아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증거는 이렇다. 첫째로 부활 당시만 해도,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는 삼실로 짠 매우 고운 베]는 머리를 쌌던 수건과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요 20:7]고 되었으니 머리를 쌌던 수건을 친히 푸실 필요도 없이 그냥 그대로 몸을 일으켜 일어나심이 입증된 것이다.

그렇게 일어나시지 않고 누웠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셔서 먼저 머리 쌌던 수건부터 풀으셔야 했다면 그 푼 수건을 개켜놓으실 리는 없다. 또 머리 푼 수건과 세마포는 따로 위치하지를 않고 그냥 벗어 버린 그 한 곳에 함께 헝클어져 놓여 있어야 한다. 또 시신의 수족을 동여놓았으므로 남이 풀어주지 않는 한 몸을 일으킬 수조차도 없다. 그리고 일어나신 후 그 육중한 돌 문이 닫혀져 있는 채로 무덤 밖으로 나가신 것이다.

그 돌 문은 천사들이 와서 굴린 것인데 그 때는 이미 예수님은 거기 없으셨으므로 거기 찾아온 여자들을 위하여 그 돌을 옮겨 준 것뿐이다. 그리고 시신을 쌌던 세마포는 무덤 속에 남아 있으니, 부활하신 후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 입으셨던 옷은 어찌 된 것인가. 실 오리 하나라도 남의 것을 손 대실 리 없으니 그 의복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물고기 두 마리에 떡 다섯으로 4천, 5천명을 먹이신 능력도 그 다섯 또는 두 마리를 근거로 해서 베푸신 기적이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 의복을 드렸을 리는 만무하다.

신령한 몸은 광채가 나는데 그 몸 자체가 능력이 있으므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원하는 대로 변환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던 당시는 아직 아버지 앞에 이르지 못하셨으므로[요 20:17] 그런 광채 나는 몸이 되시지 못했다고 볼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나타나시면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등 [나중에는 말이 나기를 "환상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등으로 잘못되게 전파가 될 것인즉] 혼선이 될 것이므로, 그렇게 자연계에 속한 몸의 형상으로 변환시켜 나타낸 것이라 생각해야 옳을 것이다.

오늘날 영물들이 그 자신의 모양을 ufo 등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거룩한 천사들은 사람 앞에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사람의 형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옷도 신령한 몸의 일종의 변형의 한 가지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제자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방 안에 있었는데 그 닫힌 문을 그대로 통과하여 들어 오셨고 두 번이나 그렇게 하셨다[요 20:19,26].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는 제자들이 뭍으로 올라와 보니 이미 떡과 생선이 있었다. 그 떡과 생선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의도적으로 기적을 나타내려 하심이 아니라 이미 신령한 몸이 되어 계시므로 자연적으로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었다는 결론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그렇게 나타나셨던 것도 그러하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에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냥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시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시므로 제자들이 그 광경을 자세히 보고 있노라니 역시 사람으로 나타난 천사가 서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말해준 것이다.

대충 이런 정도이나, 거의 나타나실 때마다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굳이 나타내려 하신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주목할 대목은,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 일변도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시게 됨을 인하여,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하시고, 심지어는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다" 하신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령처럼 행동하시니까 유령인 줄 제자들이 의심하는 것을 아시고 하신 말씀이시다. 그래서 일부러 이 사실을 확증해 보이시려고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그 제자들 앞에서 잡수시기까지 하셨다면, 더욱 그런 "하나님의 능력" 일변도로 나가시지 말고 평상시와 같이 자연계에 속한 몸 그대로 행하시면 될 일이 아닌가. 너무 그렇게 하나님 능력 일변도로 나가시니까 유령인 줄 알고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능력을 나타내시려고 의도적으로 하신 일들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계시니까 이제는 그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밖에는 더 나타날 수 없게 되어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하나님 능력 일변도로 나가신 것도 아니고 오히려 주님은 첫머리에서 밝힌 것처럼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 사람 아담의 그 신령한 몸으로 있던 상태로 환원되신 것을 더욱 명료하게 나타내시려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즉 신령한 몸으로 복구되신 것을 제자들에게 주지시키려 하심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문이 닫혔는데도 유령처럼 들어오시고서는 "나는 영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죽으신 다음 그렇게 부활하신 후 마치 유령처럼 행동하시면 당연히 유령이 아닌가 그래서 의심할 줄을 아시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문을 닫았는데도 그 닫힌 중에 들어오신 것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자들이 의혹을 품을 줄을 미리 아시는 고로, 최소한 승천하실 때까지만이라도 그런 "하나님의 능력" 나타내시는 것을 자제하실 만하다는 그런 얘기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려 하심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의 범죄하기 전 신령한 몸으로 환원되셨음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

구원의 요결(要訣)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인데, 실제 그 뜻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자기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이렇게 된다. 당신 자신을 내게 주신 것이다. 주셔도 영원히 주신 것이다.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확고하게 그런 결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선물로 주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선물"[요 4:10]이시다.

내게 이렇게 영원하신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것이 현실화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성령 받음이다. 그래서 "성령의 선물"[행 2:38]이라 한다. 내가 이 성령 받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위의 말씀대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주님이신 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게 주신 개인적인 선물, 하나님의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나를 위하신 그의 죽음에 내가 스스로 연합하기를 싫어하는 데에 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를 죽어 있기를 영원히 죽은 것이 되기를 싫어함이다.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함이다. 이것이 곧 믿지 않음이다. 모든 것은 죽음에서 시작하고 비롯된다는 것을 명심할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성경은 이 사실을 친절히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그가 나를 위하여 죽었은즉 내가 죽은 것임을 말하고,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심은 내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4,15] 함이다.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개별적인 선물이 되셔서 나의 것 즉 나의 소유가 되심은 주님 친히 나의 주인이 되려 하심이다. 이것이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것이 되는 영원한 생명의 법칙인 사랑의 원리이다. 즉 성경은 다시 설명하기를, "내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내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나의 주인이 되려 하심이다"[롬 14:7-9] 하였다.

이유는 명백하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요 이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때문이다"[갈 2:20]. 이것이 사랑의 하나됨이다. 즉 주님은 나의 것이 되고 나는 주님의 것이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여 서로를 위하는 서로의 것이니 둥근 원(圓)과 같고 구(球)와 같아 모두가 주인이요 동시에 모두가 종이요 머리와 끝의 구분이 없는 것같아 그래서 사랑의 관계에서만 통하는 동시성(同時性), 양면성이다. 머리 자신이 꼬리를 섬기는 한 몸의 구조, 체제이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은 그리스도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선물이시라 하니 얼씨구 좋다 하고 그 주인이 되려 하고 다시 그 종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래 가지고는 하나님의 그 선물을 받을 수가 없다. 어림도 없으니 나를 위하시는 그 은혜가 내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령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신다 한 것이다[행 5:32]. 회개하지 않으면 죄 용서가 없다[:31]. 죄 용서되지 않은 자리에는 성령께서 임하시지 않는다.

회개는 그러므로 믿는 오늘 이 시간부터 절대 순종하겠다는 충심으로부터의 서약인 것이다. 바울이 경고한 대로의 오늘날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은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순종의 의지 혹은 결의 없이 구원 받으려 하고 성령 받고자 하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대로 자기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심은 내가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심으로써 내가 비로소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몸이기 때문에 나 위한 죽으심으로써 나를 자신의 부활하심을 통해 살리신 데에 그 죽으심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같이 자기가 이미 죽은 자임을 시인하지 않는 이는 절대로 그리스도께 올 수 없으니, 자기는 그리스도께 왔다고 믿고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고 구원 얻었다 하나 절대로 그것은 온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부터는 천만리 밖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요 6:44,65] 하신 그 "아무나"의 범주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성경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 하신 것이 바로 그런 상태를 가리키심이다. 하나님의 값진 진리가 그런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모세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힘들여 가르치신 것이 바로 그 대목인데도 이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설명하면 창조 때부터 인생의 원 위치는 영계에서의 신령한 몸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킴이다. 그러나 범죄하여 이 자연계에 속하면서 죽은 자가 되어버렸다. 죄에게 포로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 죽은 자인 것이다. 이 자연계의 육체에 속해 있다는 것 자체가 죽은 것이지 인생으로서의 산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계의 동식물들에게는 그 수명이 개별적으로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전체 종류별로는 창조 때나 현재나 변함이 없지만] 죽음이 아니고 오직 신진대사 작용 정도로 그치지만[죽고 나고 하는 것을 되풀이함으로써 항상 새 것 곧 싱싱한 것으로 갈기 때문에] 인간은 개별적으로 각자 자기 고유의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 육체가 썩으면 영혼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므로 죽음이다.

현재 이와 같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있는 것 자체가 인간의 정상적인 곧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죽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잘 죽었다고 생각해야지 그것을 무슨 큰 변이나 만나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은 실로 한심한 어리석음일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는 것은 바로 그런 신령한 몸으로 지내던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 버린 과거 영광의 잔재(殘滓)를 말함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되 이런 아쉬운 마음을 품도록 하실 리가 없다. 영원을 동경하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마음이랴.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 1:31]고 했는데, 그렇게 지어놓으시고 좋다고 여기실 리가 없다. 좋았다는 것은 완성품임을 뜻하는데 이런 영원성에 대한 동경 다시 말해 한(恨)을 품게 하시고 현재 상황을 한탄하게 만드셨다는 것이니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토록 잔인하시다는 말인가, 무언가. 그러면 하나님은 무한 자비하시고 인애하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제 첫 사람 아담의 범죄를 거쳐 구원이라는 방편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하면 그렇다면 인생을 처음부터 그렇게 죄 짓도록 만드시고 그렇게 조처하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 어찌 인간에게 죄인으로서의 책임을 물으실 수 있겠는가. 인간을 이같이 허술하게 만드신 하나님께 오히려 책임이 더 돌아간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나님을 모순 당착이라고 할 정도로 어수룩하게 창조하신 분으로 또는 영원을 사모하도록 하여 인간을 괴롭게 만드신 분으로 믿도록 가르치는 당신은 도대체 어느 편인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이시다. 즉 생명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생명이 나와 별개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서 삼으시는 것이 아닌가. 내 가족밖에 어디 있는가. 죽으나 사나 가족을 떠나서는 살 수 없으니 가족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오직 이 세상에서의 고난이 좀 힘든다는 것뿐이다. 유일하게 반역을 하는 장소로서 이런 기형적인 세상이 위치해 있는 것도,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 임시로 일시적으로 존속되고 있다.

이 시험 기간이 끝나면 두 번 다시 존립하지 않는다. 이런 한 때를 못참아 영원한 것을 감히 도박한다는 말이니 그것은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이 아닌가. 이 세상 신(神)인 사탄은 위협도 하고 유혹도 한다. 그러나 시험 무대로서의 세상의 성격상 이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무나 자상스럽게도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이를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이다.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4,5]는 말씀까지 주시지 않았는가.

"너를 위로하는 자는 나다. 나다.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생들을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주(主) 하나님을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사 51:12,13].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된다. 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다"[잠 29:25].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는 것이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시어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2].

인간 구원은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다. 여럿이 구원 얻는데 나도 그 중에 하나로 끼인다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분을 사랑함에서 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여러 사람을 많이 만들지 아니하시고 오직 첫 사람 하나를 만드신 의미와 같다. 그리고 영물들도 그 종류 별로 오직 하나씩만 만드신 것이다. 즉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집단 상대가 아니라 개별 상대이다.

"지존(至尊) 무상(無上)이시며 영원히 계시며 그 이름이 '성결(聖潔)'인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처하며 또한 통회(痛悔, 몹시 뉘우치고 가슴 아프게 후회하는 것)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처하는 것이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다"[사 57:15] 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이 마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느끼고 멀리 까마득히 계시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죄악 때문이다.

이 죄악은 창조될 당시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이었으니 따라서 이는 얼마든지 척결될 수 있는 것이다. 곧 "탐심의 죄악을 인함이라" 하셨다[:17]. 바울이 모세 율법을 설명하면서 이 인간의 탐심을 예로 든 것과 같다[롬 7:7]. 곧 자기중심이다. 그리하여 이제 얼마나 가까워지셨는가 하면 바로 내 앞에 주님 계셔서 내 몸을 그 성전으로 삼으시니 나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위치해 있게 된 것이다. 곧 성령의 선물을 받아 모심이다. 이 크나크신 선물을 항상 의식하는 것이,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김으로써 피할 수 없는"[히 2:3]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는 길이다.

왜냐면 구원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즉 그 분과의 생활, 함께 사는 삶이다. 세상에서 나 홀로 또는 나와 같은 그런 개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사람 삶이 아닌 것이다. 이 세상은 사는 곳이 아니다. 구원 받는 곳이고 그리고 싸우며 일하는 곳이다. 사람 살리는 일을 마귀가 한사코 막고 죽음의 고난으로 위협하며 방해하니 싸움이다.  전쟁인데 무슨 삶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사는 곳이 아니라 구원 받는 곳이라 하는 것이다.

우는 자는 복이 있다. 지금 웃는 자는 화가 있으니 장차 울게 될 것이다. 우는 것은 구원 받기 전에 자기 스스로의 죽음에 이른 상태, 병난 상태, 쉬기를 갈망하는 상태,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어 있는 상태를 인식하고 울다가 이제 구원 받은 현재는 다른 사람의 그같은 실정을 너무나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터이므로 그들을 위해 울어주는 상황으로 변한 것이다. 울면서 하나님 앞에서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기도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무엇이 좋아서 웃고 즐기리요.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웃는 것이다. 실상을 외면하고 그 쪽은 아예 보려고도 생각하려고도 않기에 그래서 바보처럼 웃는 것이다.

사람의 인식 작용은 보기 나름이다. 동쪽을 보고 있으면 서쪽을 볼 수 없다. 한 면만 볼 수 있지 양쪽 다 볼 수 있도록 그렇게 구조가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영원한 세계의 실상을 생각할 여지가 없다. 영원한 불행과 행복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일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두 갈래 중 하나이고 양자택일이다. 그 중간은 없다.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하는 방법은 아예 없다. 사람은 자기 눈 앞의 것만 보게 되어 있지 동시에 뒤쪽을 보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쪽을 택하면 반드시 자기 생명을 잃는 쪽을 택하게 마련이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쪽을 택해야 영원히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방법이 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은 엄정하다. 콩 심은 데 콩 나지 절대로 다른 것이 나지 않게 되어 있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분을 사랑함이 우리 생활이요 매일의 삶이다. 그 분만 의식해야 한다. 구원을 의식하면 안된다. 영원한 생명을 의식해도 정상이 아니다. 천국을 의식하며 즐거워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같은 사물을 놓고 보아도 그 보는 시각(視角)이 중요하다.

이 사실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충분히 잘 표현했다.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한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다"[벧전 1:8,9]. 여기서 베드로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을 사랑함" 곧 "즐거움", 이 곧 "우리의 구원", 이렇게 된다. 베드로의 이 언급에서 '예수님을 사랑함'이 '구원'을 언급함보다 먼저 나온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눈 앞에 가장 먼저 뜨일 만큼 가까이 나타나 계시는 상대, 그래서 가장 먼저 인식하는 상대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의식하면 할수록 그것이 그리스도 충만이니 곧 성령 충만이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것은 그래서 무리라고 하는 것이다. 무리를 억지로 고집하면 탈이 나지 결단코 무사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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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기 나름 인식하기 나름이니 항구적인 실패로 보느냐, 악착 같은 끈기로 보느냐, 후자로 본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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