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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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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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과 고난의 현실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사실은 우리가 처한 이 세상이 죽음과 고난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사탄에 의해 눈이 감겨져 있어 사는 세상으로 착각하고 그래서 무리하게 '살고자' 하니 남을 해치면서까지 살려고 덤비는 현실이다. 현재 우리가 처한 것이 죽음과 고난임을 증명해주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바로 그 말씀이 이 사실을 극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이 죽으신 것이라"[고후 5:14]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살고' 있는데도 주님께서 우리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 결과로 우리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는 오히려 '산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인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위하여 죽으신 사실 자체가 우리가 현재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고난 속에 있음을 증명해준다는 그 설명이다.

고난은 죽음과 연관성을 맺고 있는 것이지 결코 생명과 관계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과 고난 속에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그 죽음과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그 죽음과 고난 즉 죄의 대가를 모두 치른 것이다. 그 죽음과 고난이란 죄를 지은 결과로서의 죽음과 고난임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선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같은 죽음과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의 죽음과는 다른 유형의 죽음을 보는 것이다. 즉 자기 죄를 인한 결과가 아니라 '타인의 죄를 담당하는' 그런 죽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어 이미 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 둘째 유형의 죽음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첫째 유형의 죽음은 종결되어졌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와 모든 일에 함께 하는 하나가 되어 있는 관계로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되어 함께 받을 고난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기를, "지금 웃는 자는 화가 있으니 장차 울 것이라" 하셨다.

"지금 부유한 자는 화가 있으니 자기 위로를 다 받았다" 하셨다. 그 대신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으니 장차 웃을 것이라"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전에 가장 먼저 인식해야 하는 것이 이 현세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요 그리고 고난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또는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영생에 대한 욕심으로만 그리스도께 좋아라 하고 나오니 시행착오만 거듭할 뿐이다.

믿음 가운데 성장하지 못한다. 바로 이런 것이 "아무나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신 말씀의 근거이다.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운 사람만이 내게 오신다" 하신 것이다. 이제까지 사탄에게 매여 그 눈이 가리워져 이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성령의 책망"으로 현실을 현실 그대로 직시하게 됨이다. 곧 죽음과 고난의 현실이다. 죽음과 고난의 현실이기 때문에 이 현실에서 구출하기 위해서는 아들 친히 이 고난과 죽음의 세상에 오셔서 이 고난과 죽음을 통하지 않으면 안되셨던 것이다.

이 고난과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에게 구출의 손길을 내미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물에 빠진 사람 건지기 위해선 물로 뛰어들어야 하고 불에 갇힌 사람 구출을 위해서는 불로 뛰어듦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우리가 이 죽음과 고난의 세상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사람들을 살리고 건지기 위함인즉 당연히 이 죽음과 고난의 둘째 유형을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자기 죄나 구원을 인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통하는 삶의 자세인 것이다.

사탄은 이 죽음과 고난의 세상을 사람 살 만한 곳이라 선전하고 속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속임수에 말려들어가 속아 지내다가 영원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 실상을 무엇보다 가장 먼저 세상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 왜 죽음과 고난의 이 세상이냐.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이다. 범죄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복이니 곧 자기중심의 태도이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 속에 없다. 항상 자기에 대한 관심만이 그 마음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기중심의 행동이 곧 죄이다. 사랑 없음이 곧 죄인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연장되어지게 마련이다. 이같이 자기중심의 행동을 지양하고 자기 부인의 길을 걸으므로, 사탄에게 눈이 멀어 이 세상을 사는 곳이라 착각하는 주위의 눈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수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리켜 사람들은 "죄인이라 하나님께 매 맞아 저렇게 고난을 받는다" 한다고 그리스도께 대한 예언을 하지 않았던가. 세상이 사탄에게 속아 믿는 것이 소위 "전생 업보"다. 그런 거짓된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정녕 전생에 자기 지은 죄를 인하여 현세에서 그 상응한 고난을 받는 것이라 인식하게 된다. 왜 죽음이냐, 사람이 영생하지 못하니 죽음이다. 고난과 고통이 불시에 닥치고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죽음이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여 행복하지 못하니 죽음이다. 양심은 저마다 있어 무엇이 옳고 그른 줄은 아는데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불문율인 양심대로는 살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사는 악인이 더 형통하는 세상이니 죽음이다. 즉 생명의 법질서대로 살지 않음이다. 생명의 법질서가 관장하지 않으니 이 곳은 죽음의 세계이지 생명의 세계는 아닌 것이다. 악인이 더 잘 되니 거꾸로 가는 세계이므로 죽음의 세계요 질서 정연한 생명의 세계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죽음과 고난의 현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도 그러하고 안에 있은 후에도 그렇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과 후는 그 내용상으로 하늘과 땅 차이로 다름을 말할 뿐이지 죽음과 고난이란 점에서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 즉 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한은 죽음과 고난 일색이다. 고로 죽음과 고난 그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니 극히 경계하고 조심할 일이다. 그것은 사탄의 계략에 자청해서 넘어가는 꼴이다.

죽음과 고난 외의 아무 의미도 없다. 있다면 오직 구원일 뿐이요 그 구원의 방법으로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눈곱만큼이라도 가치 있거나 의미 있는 것은 없다. 죽으면 그만이듯 모든 것은 그렇게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죽는 데에서 무슨 의미가 있고 말고 할 것인가. 인생이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도 그렇게 유한하고 한시적이라는 것인데, 이름 남기고 역사에 공적 남긴들 이 없어지고 말 세상에서 무슨 의미를 찾겠다는 것인가.

§ 이 세상 삶은 죽임 당하는 아벨의 삶


아담이 자식들을 낳자 큰 불상사가 났다. 참극,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인류사의 첫 페이지 일장 일절이었던 것이다. 이것만 해도 비극의 인류사라 불려지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 세상의 성격을 그대로 하나도 숨김 없이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여주신 것이다. 성경은 또 이를 설명하여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했다"고 하였다. 즉 마귀의 사주를 받는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잔해하게 될 이 세상의 본질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바랄 것도 요구할 것도 아무 것도 없다. 때문에 먹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있는 것을 족하게 여김이[히 13:5/딤전 6:8] 정상적인 자세이다. 의인 아벨이 죽는 것으로 종결된 것처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인은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 그 정점을 이룬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아무 것도 얻을 것도 취할 것도 없다. 반면 "악한 자에게 속하여"[요일 3:12] 악인의 대명사가 된 가인은 그 후 상당 기간 세상을 즐기면서 살았다.

의인은 회개할 것이 없으나 악인은 회개를 목적하여 그런 은혜[살인죄로 당장 죽어 처형 받아 마땅하나 오히려 죽은 아벨보다 땅에서 오래 머문 것]를 입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 언제나 소수다. 그렇다고 그 은혜가 거두어질 수는 없다. 그 중에 단 하나라도 회개하여 돌아오면 천하 우주보다 값진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악인들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생명을 부지하는 것은 어느 때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심이다. 그리고 아벨과 같은 의인의 고난은 그런 악인의 회개에 대한 밑거름이 되는 역할을 하기에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라 하는 것이다.

§ 고난 중에 계신 하나님


"In this real world of pain, how could one worship a God who was immune to it?" 타임지에 있던 글귀다. 세상은 예로부터 고해(苦海)라 일러 왔다. 아무도 이를 부인하지 못한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인간 고통에 정통해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인간 고통에 뿌리 박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희소식이 아닌가. 이런 고해에서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누가 즐겨 믿겠는가 하는 것이 위의 글의 의미이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과거만 아니라 현재도 고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그러하다. 그러므로 위의 글은 아래와 같이 고쳐 써야 정확하다. "In this real world of pain, how could one worship a God who IS immune to it?" 이 글을 쓴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모르니까 과거 현재도 구분 못하고 이런 말을 했지만,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 중에도 더러 그런 이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아직 "남으신 고난"[골 1:24]이다.

그 몸된 교회를 통해 그러하시다. 몸은 머리께서 그러한 고난을 받으셨으니까 당연히 함께 그 고난 중에 있지만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의 머리되심을 인하여 아직도 고난 중에 계시는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몸으로 하나님 우편에 영광 중에 계시지만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으로는 그 교회 중에 계시므로 그러하시다. 사람만이시라면 남은 고난이라는 의미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고후 6:1] 또한 함께 고난 중에 계심이다. 그래서 사울[바울]더러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신 것이다. 교회가 당하는 핍박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심이 아니라 실제 우리와 함께 당하시는 고난, 고통이신 것이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므로 그리스도께는 이 두 가지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시다.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으로서의 육체 역할을 하시고 사람으로서 육체이시면서도 하나님의 영으로서 그러하시다.

그래서 나와 함께 성령으로 계시나 육체인 사람으로서의 모습 그대로이시니 즉 나와만 함께 계시는 것처럼 계신다. 사람은 육체가 하나뿐인지라 갑과 함께 있으면 을에게는 함께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바로 그와 같이 '오직 나에게만' 계시는 것처럼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그와 같이 사람으로서 계심이 모든 믿는 이들에게 두루 통하시어, 믿는 이들마다 '나와만 함께 계신'는 의미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특점이 여기에도 있으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죽음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 고통은 고통으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이열치열이 그런 이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죽음을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써 곧장 해결해주겠다는 것이 세상 종교의 거짓인 것이다. 고통을 고통으로써가 아닌 희락으로 곧바로 들어가게 해주겠다는 것은 그것이 진실에 기초하지 않은 까닭이다. 불 속에 있는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이든 기구이든 불 속으로 진입을 해야 하고 물 속에 있는 사람은 물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고난 역시 윙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단순히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당하시는 모든 것에 몸된 우리가 동참하는 은혜만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 자체를 놓고 보아서도 죽음을 이기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 즉 죽음을 맛봄으로써 이기는 방법이 꼼수가 아닌 정수(正手)다. 그리스도인이여, 승리자답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더욱 영광으로 생각하라.

사탄이 죽음의 권세를 쥐고 있다 했으니 죽음이 그의 최강력 무기임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에도 죽기를 무서워하여 죄에게 종 노릇하는 인생임을 보여준다. 그가 자신만만해 하는 이 초강력 무기인 죽음에 대하여 초연해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통쾌한 승자의 모습인가. 그래서 사자 굴 속에 던져 넣어도 태연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고 화형장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순교자의 승리가 있다. 죽음과 그에 부수된 모든 고통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것은 이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자뿐이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고난 당함이 같을 수가 없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인하여 우리가 받을 형벌을 받으심이었고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이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가 죄인으로서 받을 고통과 슬픔과 고독을 그대로 여과없이 받으심이었지만 우리는 단지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그 형식, 겉모양만 따름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위한 어린양으로서 문자 그대로 속죄 제물로 바쳐지신 고난이었지만 우리는 단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하여 주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세상의 미움을 받아 당하는 것일 따름이다.

주님께서는 탄식과 비애와 절망["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속에서 당하신 고난이셨으나 우리는 이제 주님 안에서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당할 수 있는 고난이다. 좌절과 탄식과 슬픔과 고독 등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오히려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기초하므로, 사망을 그의 최대 무기로 삼고 인간을 제압하는 사탄에 맞서 그를 도리어 제압하는 막강한 공격 무기로서의 우리 자신의 고난과 죽음임을 인식하고 이를 구사(驅使)하여 사탄과 죽음을 이기게 하심이다.

우리의 고난은 주님 받으신 고난에는 감히 절대로 비교할 수 조차도 없는 것이다. 주님의 고난은 그 어떤 인간도 모방할 수 없고 맛볼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아시는 고통이었다. 오직 우리는 눈물 머금고 주님의  십자가를 우러러 뵐 뿐이다. '예수님도 자기 피로 사람들을 거룩케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히 13:13]. 그곳이 그리스도께서 지금 계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  "불 세례"의 미신
우연히 국어사전을 보다가 "불 세례"라 해놓고 "성령의 충만으로 마음의 죄악과 부정(不淨)을 불살라 성결(聖潔)하게 됨을 일컫는 말"이라 해석한 것을 보고 탄식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성경에 대한 무지가 이 정도이니 성경이 이 시대를 가리켜 "배도(背道)"[살후 2:3]라 한 것이다. 왜냐면 국소적(局所的)인 현상이라면 세상 사람의 국어사전에까지 이런 단어 풀이를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얼마나 이런 잘못된 해석이 만연해 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무지(無知)"라는 것은 학식의 다과(多寡)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마 18:3]. 일자 무식꾼이던 베드로 같은 사람이라야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니,  하나님의 진리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눅 10:21]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혜롭고 슬기 있어"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이 경고가 해당되니 조심할 일이다.

마음의 죄악과 부정(不淨)은 "불살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寶血, 보배스러우신 피)의 뿌림을 받거나 씻어지는 것이다[계 7:14/1:5/5:9/12:11/행 20:28/요일 1:7/고전 6:11/롬 5:9/엡 1:7/2:13/골 1:14,20/히 9:12,14,22/10:19,29/12:24/벧전 1:2,18,19/요 6:53-56/막 14:24]. 성결(聖潔)하게 됨은,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한 대로 믿음의 회개로써 순종의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구원은 창조 곧 새로운 창조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것으로 창조하시지 악하고 불의하고 더러운 것을 만드시지 않는다. 악하고 거룩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창조된 피조물 자신이 자기의 자유 의지를 잘못 활용하여 혹은 그 자신 불복종의 길을 택하여 그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것이 다 의롭고 거룩하고 정결한 것이나 그 스스로 그 정하신 대로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택하여 반대 방향으로 나간 까닭이다.

성령으로 우리가 부르는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그 영[성령]으로 우리 각자에게 임하시되 항상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까닭에 이를 아버지시라 또는 아들이시라 할 수 없으므로 그냥 편하게 "성령"이시라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임하여 오시는 것으로서, 둘이 완전히 하나가 되니[고전 6:17]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로 문자 그대로 나의 죽음이다. 때문에 내가 죽어 장사 지내졌으므로 나의 "죄의 몸은 와해된(to be destroyed)"[롬 6:6] 것이다.

바로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피 흘리심이 내가 함께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흘린 피의 의미가 되므로 모든 죄의 대가를 지불하였으므로 내가 깨끗해졌고[나의 어떤 행함으로써가 아닌] 또한 나의 육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인해 파괴되어 폐기된 채 무덤 속에 묻히지 않았는가. 그래서 다시는 내가 나를 위해 살 자기중심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니 마음의 죄악과 부정(不淨)은 일소(一掃)되고 성결은 이와 같이 믿기만 하면 되는 은혜와 선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는 이유는 성령으로 내게 임하여 오시는 그리스도를 영원하신 선물로[내가 몸이면 그 머리로, 내가 육체이면 그 영혼으로 이와 같이 불가분으로] 받아 모심으로 둘이 하나가 된 까닭이다. 갑과 을이 둘이 하나가 되면 갑의 것은 을의 것, 을의 것은 갑의 것이 되어 갑과 을로서의 구분이 없어지는 까닭이다. 구분이 없다면 그냥 둘이 함께 있는 것뿐이지 결단코 '하나'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가 아닌데 하나라고 할 리가 없다. 불가분성이다.

이렇게 하나가 되면 갑은 을을 위해 을은 갑을 위해 존재하게 되어 갑은 갑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을은 을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구조가 되니 '하나'이기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됨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나를 위해 승천하시고 일체를 나를 위해 하셨고 지금도 그러하시고 영원히 나를 위하시므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 필요가 없기에 오직 나는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이니 이것이 주님 친히 항상 강조하신 "자기 부인"이다.

성령의 특성이 불이시지도 않다. 형상을 불의 혀 같이 갈라지시는 것을 나타내셨기에 그렇게 착각하는지 모르나 그리스도의 경우 불의 혀 같이 임하신 것이 아니라 비둘기 같은 형상이셨다. 그러므로 그 둘의 공통점을 찾으면 실제 어떤 형상으로 임하셨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 앞서 나타나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면서 말한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특성 즉 '구원자'와 동시에 '심판하시는 재판장'이심을 상징한 것뿐이다.

요한의 그 다음의 말이 역시 이를 강조한다. 즉 알곡은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 한 것이다. "성령"은 구원자로서, "불"은 재판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나타낸 것이다. 성령의 세례는 성령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불의 세례는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세례는 물 속에 들어가는 것 곧 노아 당시 대홍수 때처럼 사람들이 물 속에 함몰되는 것을 나타냄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내짐을 그와 같은 의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은 것이므로 그리스도 친히 바로 이 뜻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례 받음을 생략해서는 안되고 믿을 때 반드시 세례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는 의식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의식[예식] 자체가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됨을 이루어주지는 않는다. 믿음은 마음에 있어 모든 언행은 나의 마음에서 시작되므로 깨닫는 마음 없이 즉 회개 없이 받는 종교 의식으로서의 세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이런 종교 의식으로서의 세례는 우리 구원과 전연 상관이 없으니, 단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자기를 구원 받은 자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행 2:38]는 이 순서는 깨어질 수 없고 생략될 수도 없다. 회개해야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고[고후 5:15/롬 14:7-9] 스스로 다짐하여 하나님 앞에 약속해야 세례를 받게 되고 세례를 받아야 죄 용서가 되고 죄 용서되어야 성령의 세례를 받음이다. 즉 갑과 을의 관계에서 갑이신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전적으로 모든 것을 하신 것을 보았으므로 이 본을 따라 을인 나도 앞으로 영원히 과거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 결심이 서야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비로소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됨이 아닌가.

그래서 성령으로 그리스도 친히 내게 임하실 수 있는 것이니 내 편에서 전혀 그런 약속이나 의지도 없는데 그리스도께서 나와 하나되시기 위해 내게 성령으로 임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스스로 동의해야 그리스도의 사랑이 확증되었으니 나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겠다고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고 이 아름다운 취지에 동조해야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죽음을 그 본래의 의미대로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니 그냥 종전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으니까 나는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므로 감사하게 그 죽으신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그래 가지고는 위의 설명대로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가 성립될 수가 없음이다. 갑이 을을 위하니 을도 반드시 갑을 위해야 둘이 하나가 된다.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죽은 것 즉 이 세상에 대하여 내가, 내가 이 세상 삶에 대하여 죽어버린 것을 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므로 이 사실을 제대로 충분히 알아 수용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다. 

억지로 죽을 수는 없다. 누구나 죽기로 예정된 인생이지만 그러나 단 하루라도 살기를 원할 때는 죽지 않으려고 하는 법이다. 그럴 때에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면 단 하루든 얼마든 도대체가 이 세상이 사는 곳이 아니라 죽음의 처소이고 그 안의 모든 인생들이 "죽은 자"[마 8:22/엡 2:1]라는 것을 실감해야 그 사실을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요 6:45] 수용해야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44,65].

따라서 이 세상 한세상 살면서 덤으로 영생까지 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한 그것은 구원 얻는 믿음일 수 없으니 스스로를 살피고 그런 착각으로 자기를 속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일이다. 이 세상에 대하여 손톱만큼이라도 살고자 하는 미련이 없고 연연하지 않을 때에만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44,65] 선언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로 그런 의미요 그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결단코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인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로 몰린다. 그리스도께서 경고하신바 "생명으로 통하는 문은 좁고[narrow] 길도 협착(狹窄, confined, difficult)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 7:14] 하심을 어떤 번역본(飜譯本)은 "얼마나 좁은 문이요 협착한 길인가!" 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영생 길을 여쭙고자 예수님께 나아온 부자 청년을 두고 말씀하실 때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눅 18:25,26] 하실 때도, "얼마나 어려운가!" 하신 것으로 어떤 역본은 소개하고 있다.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말하기를, 그러니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마 19:25]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눅 13:24] 하신 이상 말씀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든 가르치심을 마음에 새겨 듣고는 "주님, 구원을 얻는 자가 적습니까?"[:23]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하신 말씀이신 것이다. "힘쓰는 것"과 "들어가기를 구하는" 것과는 어느 면으로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힘쓴다는 것은 목표를 정해서 거기서 굽히지 않고 한사코 들어가려 하는 것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은 지식은 있어 사리를 분별할 줄은 알아 자기가 가는 길이 의심쩍은 것으로 여겨 피하려고 하고 벗어나려고는 하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그 길만을 취하겠다는 결연한 의미가 없이 그냥 소원하는 정도로만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사람마다 침입해서 들어가는 것이고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사는 것"[눅 16:16/마 11:12]이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구원 얻기 위해 힘쓰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므로[고후 5:15]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한 대로, 그리고 나의 구원은 그리스도 친히 나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으로서[요 20:21,22] 나의 힘쓰고 애쓰는 것은 오직 그 보내심을 받은 대로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함이다[4:34].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하나님을 사랑하고[고전 8:3]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이렇게도 간단한 일이 어떤 이에게는 거의 불가능처럼 여겨져 "들어가려고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는 경고대로 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미련과 연연해하는 마음 때문이다. 즉 살고자 하고 세상 낙을 누리고자 함이니 여기에는 반드시 돈을 사랑함이 개입된다. 돈 없이는 사람 구실도 못하고 항상 뒤처짐과 따돌림만 당하기 십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돈]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하셨다[마 6:24]. 돈을 사랑하게 되면 돈에게 마음이 가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일에는 관심이 적게 된다. 적은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다. 한 공간을 두고는 두 개의 물질이 함께 있지 못한다는 이치 그대로다. 적고 많은 문제가 아니라 있고 없음의 차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값진 보화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어떤 보화를 발견한 다음에 자기의 전재산을 들여 매입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으니[13:43-46] 꼭 그대로다.

말하자면 맞바꾼 것이다. 세상 사는 것과 영생을 맞바꾸어야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화를 사들인 사람은 장래를 두고 샀으므로 내심으로는 매우 흡족하고 만석꾼이 되어 있는 기분이나 우선 겉으로 보기에는 구차하기가 한량 없다. 그러나 우선 당장 견디기 힘든다고 그 보화를 되물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럴 요량이라면 처음부터 그 보석을 아예 사들이지를 않았을 것이다. 망대를 세우는 비유로 주님은 이를 경고하신 것이다[눅 14:25-35].

보석을 되물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없겠건만 천국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신 것이 위의 경고 말씀이신 것이다. 인식 부족이라 할 것이니 이것은 본인 당사자 탓일 수밖에 없다. 보석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경우 그렇게 되물릴 수 있듯이 천국과 영생과 구원의 의미를 알기 위해 제대로의 노력이 없었다는 데 있다. 영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이 세상 삶을[내일커녕 오늘 이 시간 후의 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천국 곧 영생과 같은 선상(線上)에 놓고 비교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런 실상을 여실히 보여줌이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형 선고가 집행되는 것을 목도하는 바로 그 의미임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 삶에 대한 장례식, 나 자신에 대한 장례식을 치르는 날이 바로 나의 구원의 날, 새로 출생하는 날, 다시 출생하는 날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의 의미대로 똑바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초심(初心)을 따라 내가 숨지는 날까지 변함이 없어야 그것이 곧 나의 구원을 이룸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경고하시는 말씀도 세상 사랑을 경고하신 것이다[눅 8:5/마 13:18/막 4:3]. 바울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빌 3:18,19]에 대하여 말한 것도 이 세상 삶에 대한 미련이요 연연해함이다. 이 세상 삶 또는 세상 사랑이야말로 사탄의 3가지 시험 무기(武器) 또는 도구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르는 생명과 사랑의 법칙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되는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한 몸의 원리에 의한 자기 부인에 과한 것이 사탄의 시험의 첫째와 둘째요 이 세상 삶에 대한 것이 그 셋째인 것이다.

첫째는 을[몸]이 갑[머리]을 위하는 것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니 몸은 오로지 머리의 지시를 따라 움직여야 생명인 것이다. 사탄 자신이 이 길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현재 멸망의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즉 시장하니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갑만을 위하는 을의 자기 부인을 따르는 믿음은 갑이 을을 위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므로 갑이 을을 위하는 것을 확고히 믿는 것이 그 비결이다. 즉 하나님을 신뢰할 일이지 시험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 셋째가 세상 사랑에 관한 것으로서 천하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보이며 "다 네게 주겠으니 내게 절하여 자기중심을 따르라"고 부추김이다[눅 4:5-7]. 사탄 자신이 자기중심으로 나간 아비[元祖]인 것이다.

"세상"-항상 하는 말이지만, 내일 일도 기약 못해 죽을지 살지 모르는 이 세상 목숨이다. 천하를 얻어도 오늘 자기 목숨 잃으면 그 얻음이 무슨 의미가 있다던가[마 16:26]. 정해진 3가지 규격을 따라 생사(生死)가 정해지고 인생의 흥망 성쇠, 부침(浮沈) 과 기복(起伏, rise and fall) 정해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증명해 보이는 3운법칙[트리니 호모, trini homo]이 아닌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잠시 잠깐 동안의 고난 고통을 피하여 영원한 생명과 영광과 맞바꾼다는 말인가.

씨 뿌리는 비유에서 탈락하는 자들도 모두 이 세상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핍박을 받아 무너지는 것도 그러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도 그렇다. 돈을 사랑하여 돈, 돈 하는 것은 "재리의 유혹[the deceitfulness of riches]"이다. 그리고 이 세상 삶의 각종 쾌락[pleasures of this life]이다. 그리고 이 세상살이에 대한 각종 염려, 근심 걱정이니 신경이 온통 거기에만 가 있는 것이다. 모두 일관되게 세상 삶에 대한 것을 단념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비극적 결말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요 12:25]이라 하심도 세상 삶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가시넝쿨에 비하셔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요소라 설명하신 것이다. 사람이 무화과 나무를 심으면 무화과를 기대하여 그렇게 심은 것인데 그럼에도 무화과가 열지 못하면 "그 나무를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눅 13:7] 하게 된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무화과 나무를 심은 단계다. 열매는 그 나무를 심은 사람이 내는 것이 아니라 나무 자체가 스스로 맺어야 하는 것이지 강제해서 내게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열매 맺지 못함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은 우리를 버리심에 있는 것이다. 사탄 등 악령들을 영원히 버리심과 같은 것이다.

만일 맺지 못하면 무화과 나무 임자는 속은 것이다. 열매를 낼 줄로 잘못 판단했다는 결론이 된다. 그래서 잘못이라 인정하고 땅마저 버리기 전에 찍어 없애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회개하였으면 그 마땅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마 3:8]. 그렇지 않으면 이미 도끼가 놓여져 있는데 그 도끼에 의해 찍혀버린다. 도끼가 "이미 있다"[:10]는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다는 뜻이다.

"나무 뿌리에 있다"는 것은 나무를 심을 때부터 나무 주인은 열매를 맺지 못해 여차한 경우에는 사정없이 찍혀버린다는 뜻을 함유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다는 것이니 나무를 심기는 많이 하였으나 제대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적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구원에 들어왔으나 구원 받은 자로서의 마땅한 도리를 아니함이니 곧 열매를 제대로 맺지 않음이다. 결국 찍히는 수밖에 없다.

고로 성경은 "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kindness]와 엄위[severity]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0-22] 하였다.

넘어진다는 것, 믿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않는 것 모두 다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이름이다. 이렇게 넘어지는 자는 말씀을 들으나 지내는 중 이생[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재리의 유혹]와 일락[逸樂]에[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이 막혀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막 4:18,19/마 13:22]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막 4:20]는 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서 지키는"[눅 8:14] 자로서 말씀대로 "항상 복종하는"[빌 2:12] 자다.

"말씀을 듣고 한동안은 지낸다"는 것은 믿기는 믿고 그리스도도 모심으로써 성령에 참예한바 되었으나 즉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하나님 주시는 선물]를 맛보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그러하고도 타락한 자들"이니 이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다"[히 6:4-6].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는 것뿐이다"[:7]. 열매를 맺지 못한 참극이다. 

열매 맺는 것도 30배와 60배와 100배의 차이가 있으니[마 13:23] 우리의 자유 의지에 따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함이기 때문이다. 백배의 결실을 내도록 30배의 결실뿐인 자를 강제하거나 간섭하실 수 없음이다. 마찬가지로 열매 없는 자들을 억지로 열매 있도록 만드시지는 않는다. 그렇게 강제로나마 열매를 맺도록 해주시는 것을 "은혜"라 착각하지 말 것이다. 그런 은혜는 베풀지 않으시니 그것은 은혜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해주실 때 그것이 은혜다. 그러나 이 경우 얼마든지 마음만 있고 결심만 서면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에 달렸고 결심으로 좌우되는 일이기 때문에 100, 60, 30의 차등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결실이 없는 경우는 못해서가 아니라 아니 해서인 것이다. 그리고 결실을 해도 인내로써 결실을 하는 것이다[눅 8:15].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에 들어간다[롬 2:7].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함과 같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주 잘못 배우고 엉뚱하게 알아왔음을 겸허하게 시인해야 한다. 믿기만 하면 되고 선물이고 은혜라니까 공짜로만 생각했고 남들은 그런 공짜를 즐기지 못하는데 나는 왜 이런 호박덩이가 굴러왔는고 하여 그래서 감사하고 기뻐한다고 했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 삶을 즐기면서도 구원되는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참으로 편한 종교라고 생각해왔었다. 상식과 양식을 떠나서는 어떤 구원도 없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도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불찰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왜 상식과 양식을 인간에게 주셨겠는가. 

이 세상 삶의 무의미함 그리고 중차대한 의미가 있음은 3운법칙이 가르치고 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이 세상 삶 자체만으로는 그렇다는 것이요 그런 반면 이러한 무의미로써 정작 의미 있는 것에로 눈을 돌려 참으로 자유 의지를 행사하여 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생명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게 되어 있는 데가 이 세상으로서 단 한번만의 기회뿐이니 그래서 이런 의미로 말하면 그 비중이 가히 영원 세상과도 맞먹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피조물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진노하시고 이미 온 세상을 심판아래 두신 것이다[롬 3:19/요 3:18,36]. 하나님은 날마다 노하시고 있는 사실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시 7:11]. 땅이 인간으로 인해 저주 받아 있는 사실에서도 이는 확증된다[창 3:17]. 그런 심판 아래 두신 세상이지만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나님이 구원으로 나아오게 하신 것이다. 이 구원은 이 우주에서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가장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신 것이니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아들 친히 나 위해 죽으심을 맛보신 결과이니 이렇듯이 막중한 은혜를 무시할 때 그 결과를 어찌 피하리요.

성령은 생명을 상징하시므로 불로 나타내시기보다 물로 나타내시고 있음을 보게 된다. "생명수 강물들(rivers of living water)"[요 7:38]이 그 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자연계를 기준으로 해서 모든 표현이 되기 때문에 지상의 생명체에는 물이야말로 절대적인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을 불로 나타낼 때는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 외에도 또 다른 품성으로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시라 표현하고 있음이 그 예다. 구원자와 재판장으로서의 하나님의 양면성을 나타냄이다. 초대교회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그릴 때도 사도행전은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해갔다"[행 9:31] 한 것도 그러하다. 심판자와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의 면모다.

우리가 회개의 세례를 받음으로 옛 죄가 용서됨이니[행 2:38/롬 3:25/히 9:15]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상징하는 세례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어 죽은 자가 되었으니 그 죽음의 대가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모두 치른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임하셔야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는 그 때에야 즉 성령의 세례를 받은 다음에야 나의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냐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넬료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심령일 때 세례 받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와 하나임을 나 자신 기꺼이 승복하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스도 친히 내게 임하시기 전에도 죄가 용서되는 일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

그래서 고넬료는 "물로 세례를 주기"[행 19:47] 전에도 성령은 고넬료 등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임하신 것이다. 물론 고넬료는 이방인이 회개하여 성령 받는 첫 사례이기 때문에 그러했던 특수한 경우이기는 하나 어쨌든 하나의 의미 즉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서의 "물로 세례 받는" 것이므로 성령 받아 모심 이전에도 죄 용서 받음에는 아무 하자가 없는 것이다. 또 그러한 사실을 물로 세례 주기 전에 성령의 임하심으로써 명백히 보여주신 것이다.

다만 세례 받아 죄 용서된 자리에 성령께서 임하심은 제대로 되는 순서이니, 죄 있는[용서되지 않아] 더러운 곳에 거룩하신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것은 논리상으로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 사실은 성령께서 임하셨음에도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을 생략하지 않은 데에서도 확인된다. 다시 말해 세례 받는 것은 성령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에서 세례는 그 외양 또는 형상이라 할 수 있고 성령 받음은 그 실질적인 내용 또는 실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은 불가분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으로 마음의 죄악과 부정(不淨)을 불살라 성결(聖潔)하게 되는" 것이 아니니, 어떤 경우에도 마음의 죄악과 부정함이 있고 거룩하지 않은 곳에서는 성령께서 애당초부터 임하여 계실 수가 없음이다. 이미 죄 용서가 되어 있는데 또 무슨 "마음의 죄악이니 부정하여 성결하지 못함이니"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죄 용서 받아 그리스도로서의[물론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므로 아버지 친히 함께 계시나] 성령을 모시게 되면 그 자체가 거룩함이다.

그러나 이 거룩함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됨을 일컫는 말로서 양면성과 동시성으로 나타내게 되어 있으므로, 내 스스로 연속적으로 부단히 거룩함을 이루게 되어 있음이다[엡 4:24/벧전 1:15,16/히 12:14/고후 7:1]. 그래서 그 거룩함을 이루게 된 결과가 영생인 것이다[롬 6:22]. 이는 내가 구원을 받았으나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과 같은 것이다.

한번 거룩하게 되면 그것으로 자동적으로 유지되어 내 쪽에서의 수수방관하는 상태에 있어도 그렇게 거룩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 바울 사도가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니, 운동장에서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우승하는 자는 하나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리는 자가 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니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달리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고전 9:23-27]이라 한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데 누가 그 용서를 뒤엎으랴. 하나님께서 "불살라 성결하게 하셨으니" 그 성결은 그 어느 누구도 손대지 못하므로 영원히 성결한 것이다 하는 식으로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기 쉬운 것이다. 이 역시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役事)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일방적일 수가 없음을 이미 증명하셨으니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죽음이었고 사탄 등 악령들의 범죄 행위가 자멸로 여부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대적이다.

아담을 죽는 자 또는 앞으로 죽을 자로 만드시지 않았지만 그 스스로 죽는 자가 되니 하나님도 더 달리 어찌 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악령들이 스스로 범죄를 하여 영원 멸망을 자취하니 그래도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우리 구원을 이룬다고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의식하는 자기중심으로 난 것이 아님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용서를 하셨으면 아무도 그 용서된 상태를 [용서 받은 그 본인이건 남이건] 절대 손댈 수 없어 변경시킬 수 없고 그 용서는 영원히 유지되겠지만, 우리의 회개를 근거로 용서하시고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이 되어 그 용서가 유지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얼마든지 변하여 "처음 사랑을 버릴"[계 2:4] 수도 있고 "처음 믿음을 저버릴"[딤전 5:12] 경우 그 받은 은혜를 내 스스로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이다. 상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두렵고 떪"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성령의 충만으로 마음의 죄악과 부정(不淨)을 불살라 성결(聖潔)하게 된다"고 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일방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하나님께서 "불살라" 성결하게 만드셨으니 그 성결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인데 그것은 성경의 내용이 아니니 성경은 명백히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할 것이요 네가 나를 시인하면 나도 너를 시인할 것이라"[눅 12:8,9/마 10:32/딤후 2:12] 하심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사랑은 항상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동시성이요 양면성이다. 하나님 앞에서 짝사랑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3위1체의 원리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삶이나 삶의 낙을 누리려고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니까 당연한 일이 아니냐 하겠지만, 우리의 구원이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한 몸의 각 지체됨에 있음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이다[골 1:24]. 머리와 몸은 공동운명체다. 몸[의 각 지체]는 절대로 머리와 색깔을 달리할 수 없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고전 12:26,27]이라 함과 같다.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따로일 수가 없다. 때문에 미리부터 경고하시기를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라 하신 것이다. 이 세상은 마귀 사탄에게 속해 있으므로[요일 5:19]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교회는 미움을 받고 박해 속에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이가 그를 지키시므로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한다"[:18]는 것은 범죄와 관련된 언급이고 육체적으로[물리적으로] 받게 되어 있는 핍박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북한에서와 같은 극도의 핍박 속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이 원래의 교회 모습인 것이다. 소위 자유 세계라 하여 신교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처럼 착각되는 것은 사탄이 만든 사이비 종교[기독교라 표방하고 있는]에 한해서 할 수 있는 말일 뿐이다. 그런 종교는 사탄 편에 있으므로 사탄이 이를 박해하는 척 흉내는 낼지 모르나 사탄의 비호 아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북한과 같은 환경이 아닌 곳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교회다운 교회를 찾기 어렵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초대교회부터 극심한 박해를 해온 사탄이 지금이라고 해서 쉴 리도 없고 낮잠을 즐길 리도 없다.

그는 포효하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헤매는 자이다[벧전 5:8]. 지금은 더더욱 기세를 더하는 판국이니 하늘의 전쟁에서 패퇴하여 지상으로 쫓겨난 상태인 것이다[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충돌 사건 참조]. 이제 누구든지 적 그리스도에게 합류하지 않고 그 앞에서 다른 소리를 내는 자는 그 몇이든지 씨앗을 말리려고 덤빌 것이다[계 13:15]. 그러므로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 환난에 대비할 일이다. 대비한다는 것은 자기 믿음 지키는 것에 주력하라기보다 마지막 전도 활동에 급 피치를 올리라는 것이니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과 같이 그리스도의 일에 충성을 다하는 바로 그것이 자기 믿음 지키는 최선의 방도인 것이다.
 
§  제사장의 기도

기도는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가 없을 때 그 가치가 드러난다. 타인의 구원을 위한 기도는 자기의 구원이 달성되어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다. 자기의 구원을 이루지 못한 채 타인을 위한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즉 타인을 위해 기도한다는 그 선행이 아무래도 자기 구원을 위한 선행의 하나로 스스로 인식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한 기도이지 남을 위한 것이 될 수 가 없는 까닭이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보고 믿음"[요 6:40]으로 되는 것이지 기도 등 선행으로 즉 행위로 얻는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종교에서 남을 위한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 참으로 진실되게 타인을 위한 것은 아닌 것이다. 자기의 선행으로 자기 구원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그런 선행 차원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미 구원 받아 다시는 자기의 구원을 위해 관심을 두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야말로 진정한 타인을 위한 기도가 되는 것이다. 곧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서의 기도이다.

찰즈 피니의 강력한 능력의 전도 설교 그 배후에 항상 그림자처럼 따르던 다니엘 네쉬[Daniel Nash]의 기도와 같은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성경이 진리임과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모두 그러하다. 세상 종교 중 그 어느 종교가 그 예배의 대상에게 그렇게 기도, 타인을 영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일이 있는가. 우선 시급하고 화급한 자기 구원부터 해결 못한 상태에서 그런 여유가 있을 까닭이 없다.

물론 그들도 자기 아닌 이웃을 위해 기도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자기의 구원을 아직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의 기도이므로 허구성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런 것을 진정 타 인을 위한 기도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 세상 종교는 혹 다른 것은 모방할지 몰라도 이런 것은 모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방하려 하나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니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 종교인들은 나 혼자만 구원 받지 않고 다 함께 구원 얻기 위해 그렇게 기도한다고 한다. 나 혼자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도 기도한다는 것이 바로 선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선행을 하는 이유가, 그런 선행이 없으면 자기 구원을 위한 공덕 쌓기가 진실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종국적으로는 자기 구원을 위함임을 숨길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내가 나를 위해 욕심 내고 욕망을 품는 그 '나'란 주체를 완전히 파기하는 데에 있다.

그렇게 파기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과거 내가 욕심 내고 욕구하던 것 이상으로 모든 것을 이미 이루고 완전히 소유한 다른 '나' 곧 새 피조물로서[새로운 창조에 의해] 다시 세상에 나게[육으로 나는 것이 아닌 영(성령)으로 출생] 함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복을 빌고 안녕을 빌고 할 아무 근거가 없다.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져 버렸으니 그 이전의 '나'란 것이 파기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만유의 상속자 되었으니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구원이고 믿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세상 종교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종교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이에게는 종교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복음이 된다. 오늘날 그런 종교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글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가르치심을 앙망하는 가운데 "과연 그러한가"[행 17:11] 하여 성경을 제발 읽으라는 뜻이다.

참된 이치는 체득할 뿐이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하여 이를 "불가설(不可說)"이라 하고, 오도(悟道, 불도를 깨침)는 문자나 말로써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고 하여 이를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불교에서는 말하니 바로 그 말 자체로써 불교의 주장이 절대로 과학적 법칙일 수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한다는 데에서는 과학이 절대로 발전할 수 없음이 이를 증명한다.

허공에다 집을 지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있는 것이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은 현실이요 법칙인 것이다. 법칙을 말로 나타내지 그리고 문자로써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 무엇으로 설명하여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 있다는 말인가. 말로 문자로써 표현 못하니까 석가가 그 주장을 발표한 이래 한결같이 구도자(求道者)는 여전히 오늘날도 산중으로 들어가 수도하기에 여념이 없다.

법칙이 아니라면 진리일 수가 없다. 진리는 다름아닌 법칙인 것이다. 법칙을 말로 문자로써 표현 못하면 그것은 현실적인 법칙일 수가 없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것으로서 대표적인 것이 사랑인데 사랑에도 법칙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갑과 을의 둘이 하나됨이 사랑이요 둘이 하나됨에는 반드시 갑이든 을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상대를 위한다는 법칙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선호, 애호일 뿐인데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했을 뿐이다.

이 사랑을 가장 간결하게 말로 나타낸 것이 "남이 네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눅 6:31]는 것이다. 이렇게 훌륭하게 문자로 나타내어져 있는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통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미 진리를 깨달아 자각(自覺)·각타(覺他)·각행 원만(覺行圓滿)의 세 덕을 갖춘 각자(覺者)의 마음이 그 만나는 이들에게마다 다 전달되어야 하는데 왜 전달되지 못하는가.

극히 소수에게만 전달되었다고 우길 것인가. 진리의 특성은 그 보편성에 있다. 극소수에게만 해당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면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처하는 성경이 진리일진대 어찌하여 그것을 진리로 믿는 이들은 소수인가?" 할 것인가. 진리는 보편성에 있다고 한 대로 모두가 양심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사람 사는 진리다. 그러나 자유 의지를 따르는 자유 선택에 의해 그 진리대로 살기를 거부한다면 어찌 되는가.

그것은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따르기로 선택하지 않은 결과다.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선택하고 않음에 따른 차이다. 혼동해서는 안될 일이다. 사람 삶의 진리는, 행복하게 영원히 사는 방법에 있다. 그 방법은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으로 사는 데에 있다. 머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 수준에서 말 수 있다.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이다. 조물주께서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만드셨으나 이 한 몸 관계에서의 머리를 무시하고 몸의 한 지체로서 머리인 양 자행자지(自行自止, 제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함)한 것이 범법(犯法)이었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 아닌 한시적인 목숨으로 변질된 것이 오늘날의 인간이다.

그래서 "진리 운운" 하는 것도 인생이 영원히 살지 못하고 서로 간에 사랑이 없어 불행하게 되어 있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함이다. 어버이 같으신 조물주이신데 그 품을 뛰쳐나간 결과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경우 그런 품속의 아이는 철부지한데 그러나 하나님의 품속의 존재들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데다 양식(良識)이 있어 모든 것을 분별하면서도 스스로 택하여 그리 된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영생의 진리는 단지 이것뿐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이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을 이루어 있는 각자의 소임이요 책무다. 특권이다.

그런데 이를 버리고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이 불행의 장본이 되었으니 이를 뉘우치고 그 품으로 다시 돌아가되 하나님 정하신 사랑의 방법을 따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되는 것이고 이보다 더 이상적인 사람 삶의 방법이 없는데 이를 말로 전하여 깨우치면 되고 회개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지 "말로 표현 못한다, 글로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알쏭달쏭, 애매 모호한 것이어서 설명을 해도 조리가 맞지 않고 논리적인 체계라고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제사장으로서 제사장은 말 그대로 희생 제물과 불가분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제사장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제사장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 각 지체로서의 제사장이다. 곧 제사장 각자가 그 제물이니 이를 상징하여 모세 율법에서 희생 제물로서의 "짐승들의 피"[히 13:11]가 흘려지는 제물의 예법을 진행해온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이를 모방하여 또는 이 의미를 희석시키기 위해 각종 제물을 바치는 따위의 일을 종교적인 행사로서 온 세계를 통해 자행해온 것이다.

이런 근원적인 의미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모든 고난인 것이다. 때가 되어 죽는 자연사가 아닌 타(他)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때 아닌 죽음이니 그 죽음에 그 고통은 필연이다. 자연계의 동물들에게는 그 개체적인 죽음이 오직 그 종(種)을 대대로 유지 존속시키기 위한 신진대사(新陳代謝)의 작용 격이지만 영원히 살도록 처음부터 창조되어 있었던 인생에게는 죽음이 비극인 것이다. 비극적이라 함은 정상이 아니니 생명에는 고난, 고통, 죽음이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미워하고 고통을 주고 죽이는 모든 일이 정상 아닌 비정상으로서 신체적으로 말하면 암적(癌的)인 것이다. 우주 천지 어디에도 발 붙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니 그만큼 이 세상이 버림 받은 데로서 일시적인 특정 목적을 위해서만 한 때 잠시 지탱하는 곳이니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 특정 목적이라는 것은 악인들 가운데에서 의인을 골라내는 것 혹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인을 추려내는 것이다.

의인들 가운데 악인을 걸러낸다는 것은, 본시부터 하나님은 의인들만을 존재하게 하는 아름다운 세계를 만드셨지 악인을 만드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 된 악인인즉 의인 가운데에서 악인들을 솎아낸다는 말이 옳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밭에는 좋은 씨를 뿌리셨지 가라지[밭에 난 강아지풀]를 심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마 13:25-40]. 좋은 세상을 만드셨지 이런 세상을 목적하고 처음 창조를 하신 것은 아닌 것이다.

선을 만드셨으나 악이 자생(自生)한 것이다. 자유는 완전한 자유이지 부분적인 자유는 없다.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스스로 선택해서 무엇이든 하도록 허용하셨다는 의미이므로 이미 그 속에는 선과 악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것이 창조자의 의도는 아닌 것이다. 창조자의 의도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이었을 따름이다. 강제해서 창조자의 의도를 따르게 하시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이 점에서는 그런 자유가 부여된 모든 인생들의 사상과 일치한다. 즉 하나님께서도 그 어느 피조물도 속박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심이다. 속박하실 때에는 그 속박 자체가 그 피조물에게는 더 나을 수 없는 최상의 것이기 때문에 속박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기계적 작용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적 작용마저도 하나님은 완전히 풀어놓으신 것이니 그것이 바로 모든 인격적 존재에게 허용하신 '자유 의지'라는 것이다.

피조물에게 최상, 최고, 최선이 되는 것마저도 하나님께서는 강제나 간섭이라는 방법을 취하시지 않음이라 할 것이다. 창조자의 속박, 구속 때문에 창조의 필연성과 필요성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에게 주시는 역설적이지만 유일한 해답이시다. 여기서 그들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말 그대로 할 말이 없어진다. 그들의 그러한 태도로 오직 입증되는 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악하다"는 것이다. 이 악함이 죄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도리에 맞게 그래서 의로운 것으로 만드셨지만 창조자의 의도를 스스로 따르지 않으니 생명이신 하나님께 역행하는 것은 죽음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셨으니 이에 역행하는 것은 불행밖에 없다. 이런 미친 짓을 감행하게 하는 것은 교만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하나님과 거의 맞먹는 정도의 지식과 자유를 사랑 가운데에서 얼마든지 주실 수 있건만 그것들로 해서 왕청스럽게도 교만으로 흐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지 못하는 것이니 그 증명이 피조물 가운데 일어난 "교만"[딤전 3:6]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탄의 교만이다.

하나님과 맞먹게도 아니고 오직 다른 피조물보다 조금 낫게 만드시니 그런 결과가 되어 나온 것이다. 생뚱맞게도 하나님의 생각만큼이나 자기도 생각할 수 있다는 환상에 젖은 것이다. 그러면 이런 결과를 놓고, 그렇게 그 피조물을 좀 똑똑하게 만드신 하나님께 탓을 돌릴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역시 같은 수준으로 만드신 다른 영물[천사]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천사장 미가엘이 그런 수준이다. 사탄도 현재 악령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보면[계 12:7] 미가엘과 같은 위치였음이 분명하다.

이 사탄이 스스로 암적 존재가 되어 이 세상 신으로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역시 엉뚱한 교만 때문이니 말하자면 사탄의 교만에 함께 물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왕년에는 천사들 위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만물을 다스리고 있던 아담이 도리어 자기 아래 있었던 사탄 아래에 들게 된 것이다. 상하가 뒤바뀐 것이다. 범죄의 결과가 이와 같은 무질서이다. 질서의 아름다움이 없는 이런 추잡한 세상이 절대로 오래 갈 리 없고 시한부 인생처럼 시한부이다.

그런즉 이런 인간의 원수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에서 주님의 경고처럼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 사랑"은 자멸 행위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스스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사탄의 행위에 가담하여 한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사코 이를 거부할 처지에서 그에게 동조하는 결과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원수지간으로서 상극 관계에 있는데[요 15:19] 그리하여 오로지 인간에게 해를 끼치고 그 멸망만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만일 이 세상에서의 우리 목숨을 사랑하여 삶의 낙을 느낄 정도라면 그것은 필시 우리에게 멸망과 죽음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이 정도의 상식적 안목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핍박하고 고난 고통을 가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고로 세상에서 고통 고난을 받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함이니 오히려 기뻐해야 할 상황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다"[요 15:18-20] 하심과 같다.

그러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지 않을 때는 우리가 세상과 한 탕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요 이는 만가지 일을 젖혀놓고라도 극력 회피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 사람 살리는 우리의 일을 사탄이 결코 좌시할 리가 없으니 그가 죽은 것도 아니요 쉬는 것도 아니요 잠자는 것도 아님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태다. 세상의 안목으로 보면 "화"가 아니 미칠 수 없다.

바울 사도는 "복음 전도"라는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행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진 고통 고난을 받지 않았던가. 우리가 우리를 보내신[요 20:21,22]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계승하여 계속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은 자다. 왜 죽은 자가 되느냐 하면 그것이 우리가 "먹을 양식"[4:34]이라고 분명히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법이 없다. 오직 산 자가 들어가는 산 자의 세계다. 죽은 자의 세계는 영원한 물 못인 것이다.

§  고난의 의미


나쁜 것과 좋은 것이 혼재[混在]해 있는 것이 이 우주다. 원래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멸망에 들어가는 자들과 영생의 불사영생(不死永生)의 영복[永福]을 누리는 자가 구별되는 것인데 그런 점에 비추어볼 때 영복에 들어가는 자가 영멸에 들어가는 자의 그 참담한 맛을 조금이라도 맛보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충성 곧 사랑을 입증해 보인다는 것은 좋은 일로서 바람직하다.

즉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입증이다. 그런데 이런 증명은 만사가 잘 나갈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순탄하지 아니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변치 않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다. 즉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움이다.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우셨다"[히 5:8,9]고 한 그대로다. 고난을 통해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내게 고통이라도 하나님을 그리고 그 지으신 피조물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고난 받음이 이런 귀한 의미가 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몸이다. 분명히 일반 동물과 다르게 영혼이 있으면서도 몸은 일반 동물과 같은 구조를 지닌다는 것은 분명 제격이 아니고 비정상이다. 몸 역시 영혼과 부합되게 일반 동물과 달라야 함이 당연한 것이다. 그 이유를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설명하고 있다. 즉 그냥 흙으로 돌아가는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 동물처럼 그냥 죽는다고 해서 즉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다시 말해 "심판의 부활"[요 5:29]로 돌아가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인데 이것을 성경은 멸망이라 한다. 

무릇 영적인 것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의 몸도 이런 영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계인 에덴낙원의 "땅[ground]"으로 조성된 영물들과는 달리 자연계의 "흙[dust]"으로 돌아가는 몸으로 현재 되돌아와 있기 때문에, 그런 영원한 몸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회생할 수 있는 즉 원래의 복된 생명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오늘날 소위 "외계 우주인"으로 자처하면서 인간을 속이려 드는 악한 영물들의 속임수에 휘말려 들지 않기 위해 이 지식은 필수이다.

이 지식이란 에덴낙원이 영계였다는 등의 사실을 가리킴이다. 지금은 과거와는 달리 영물들이 우리 인생들과 함께 거처하는 형편이라 [계시록에 하늘에 전쟁이 있어 마귀가 쫓겨 내려오는 것을 예언하였는데 그것이 실지로 이루어졌음이다-계 12:7], 그런 그네들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런 속임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 그들이 자칭하는바 "외계인"인 것이다. 그 이전에 동양에서는 "신선"[神仙]이란 이름으로 그 따위 속임수를 부렸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주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게 하심이다[빌 1:29]. "은혜"라 함은, 주님을 위해 우리가 일부러 고난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즉 고난 받지 않을 것인데도 충성을 과시하기 위해 굳이 고난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차피 받게 되어 있는 인생 고난이지만 그 고난을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으로 변환시켜 주심이라는 그런 뜻이다. 우리의 인생 고난은 죽음의 몸 즉 자연계에 속한 몸을 지닌 자로서 의당히 받는 고난이다.

불가피한 것이다. 이 죽을 몸의 고난을 이제는 산 자 즉 생명 있는 자로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의미로 전환시켜 주심이 크신 은혜인 것이다. 이런 고난이 아니라면 우리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되었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답게 주님의 부활의 몸과 같이 신령한 몸을 입고 생명이 극락 속에 있어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 명색에 어울리지도 않게 이런 자연계에 속한 구차하고 연약한 몸을 입고 있으니 이는 분명히 그 뜻이 우리도 주님처럼 고난 받아 죽기 위함이고 그 죽음 후에 부활하기 위함인 것이다[빌 3:10,11].

자기중심 곧 자기 집착[我執]에 대한 폐단은 세상 종교도 인정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 인생들이 상식 차원에서 생각하는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세상 종교에서 가르치는바 "심신 중에 사물을 주재하는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 집착"으로서의 소위 '아집'을 끊어야, "해탈(解脫)" 즉 "번뇌·속박에서 벗어나 속세간의 근심이 없는 편안한 심경에 이른다", 또는 "열반(涅槃)" 즉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영원한 진리를 깨달은 경지"에 도달한다 하는데 이것이 인간고(人間苦)를 해결하는 해법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중생 제법(衆生諸法)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임시 화합하여 된 것이므로 불변의 실체가 없다"고 하여 "공(空)"을 말하고, "모든 것은 덧없다" 하여 "무상(無常)"을 말하고 "모든 것은 다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으니 일체의 존재는 무상한 것으로서 ‘나’라는 존재도 없다"고 하여 "무아(無我)"를 말하는데 그러면 물어보자. 인간고에는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포함되지 않는가?

다시 말해 갓나서 죽는 인생은 어찌하려는가? 그런 인생은 "번뇌·속박에서 벗어나 속세간의 근심이 없는 편안한 심경에 이를" 여유도 없고,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영원한 진리를 깨달은 경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냥 어떤 물질적 작용에 의해 사산(死産)되어 나온 것이다. 그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우선 성경대로의 진실을 말하면, 사산되어 나오는 경우 우리는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잉태될 때의 어떤 잘못으로 인해 육체와 영혼과의 결합에서 어긋난 것일 경우 영혼 없는 육체일 때 그렇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그 첫째다.

두번째로는 십자가 상에서 운명 직전에 회개하여 영생하게 된 그 강도와 같은 경우로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자기 자유 의지로 믿어 순종하게 될 것]에서 된 것일 수도 있고, 셋째로는 네피림과 관련되어 있을 경우 처음부터 구원 받지 못할 것이므로 문제시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상 이런 네피림에 관해서도 그렇지만 충분한 지식이 없는 상태다. 성경 기록에 따라 그러려니 할 뿐이다. 이것을 명확히 가려내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 믿음이 흔들릴 것도 아닌 것이므로 이 이상으로 우리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 정도로 설명이 될 수 있지만, 그런 세상 종교의 교리로는 전혀 이러저러한 설명이 없는 것이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생로병사는 인간이 자연계에 속했기 때문에 당하는 인간 육체의 수난이다. 말 그대로 났다가 일정 기간 사는 중에 당하는 인간고로부터의 해탈이요 열반이다. 따라서 갓나 죽든가 나자마자 죽든가 아기로 일정 기간 토닥거리다가 죽든가 즉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 인생들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실을 얼버무리지 말고 똑바로 해명해주어야 하는데도 설명을 못한다. 설명이라는 것은 말을 꿰어 맞춤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서로 모순된 점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설명이 합리적, 논리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전적으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스스로 배웠다고 하여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은 모름지기 그 사고방식이 과학적이어야 한다. 남이 말하니 나도 말하고 남이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따르고 하는 것은 자주 독립성을 구가하는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인간으로서의 취할 바 자세가 아니다. 대학원을 나오고 해도 예사로 "염라대왕 운운" 하는 것을 들으면 어이가 없어진다. "그러면 당신네 기독교는 지옥 천당을 말하지 않느냐"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믿고 성경은 과학적 진실을 말한다.

3위1체의 원리가 성경에 유일하게 소개되어 있고 이 대칭성 원리를 따라 영계와 자연계를 나누어 말하는 것이요 혼동시켜 애매 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 생명이 아니니 죽음이요 죽음이라도 영계에서의 죽음은 자연계에서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함일 뿐이다. 죽 죽음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고 자연계의 육체처럼 흙으로 돌아가는 단발(單發)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갑과 을의 대칭 관계를 말하고 인과율을 따라 말하는 것이다. 매서운 현실을 말함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의 멸망은 말해도 "염라대왕"과 같은 낭만적인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현실적인 것이다. 아집(我執)은 "소아(小我)에 집착하여 자신만을 내세워 버티는 것을 말한다고 국어사전에는 되어 있다. "소아(小我)"에 대해서 살펴보니 철학 용어로는 "우주의 절대인 나와 구별한 자아(自我)"라는 것이고 불교 용어로는 "대아(大我)에 대하여 범부(凡夫)로서의 나"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대아(大我)"가 무엇인가 보았더니 "우주의 본체로서 참된 나"라고 불교에서는 말한다고 되어 있다. 우주의 본체가 어찌 나인가. 나는 나이고 우주는 우주일 뿐이다. 성경은 그런 알쏭달쏭한 말을 하는 법이 없다. 있는 것은 없는 것과 대칭이 된다. 여기서 대소, 주종, 인과 관계는 명백하다. 원인이 대(大)요 주(主)이며 결과는 원인이 있음으로써 되는 것이기에 소(小), 종(從)이다. '없음'이 있기 때문에 '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음'이 원인이 되어 '없음'은 그 결과인 것이다.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 없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없다"는 뜻은 원래는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함께 포함함이다.

그러므로 "없다"는 것으로만 귀착시키지 말고, 없으니까 당연히 있게 해야 한다는 논리로 나가야 하는 것이고, '없음'을 벗어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아야 하든지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덮어놓고 "모든 사물은 공(空)이어서 일정한 형태나 양상이 없다", "중생 제법(衆生諸法)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임시 화합하여 된 것이므로 불변의 실체가 없다", "모든 것은 다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다", 따라서 "나라는 것도 없다" 식으로 "없다"로 일관해서 나가면 결론이 생기지 않고 항상 미궁 속으로만 헤맬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생멸(生滅)의 변화가 없이 늘 그대로 있음을 "상주(常住)"라 하고, "본연진심(本然眞心)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있음을 "상주불멸(常住不滅)"이라 하고, "생겨나지도 않고 또한 없어지지도 않고 상주(常住)인 것"을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하듯이 '없는 것'이 있으니까 '있는 것'도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없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전제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고로 어째서 있는 데에서 지금은 없는 것으로 전락했는지 그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다.

없음의 결과를 낸 그 원인이 있을 것이 명백하다. 그 원인 규명만 하면 일은 제대로 풀린 것이다. 그런데 그런 원인을 밝힐 생각도 의지도 없이 무턱대고 결과만을 붙들고, '없음'의 결과를 다시 '없애기' 위해서만 발버둥치는 꼴이 되어 있으니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시작도 끝도 없다. 영원무궁한 미궁(迷宮)이다. 그리고 물어보자. 부처는 "대도(大道)를 깨달은 성인"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국어사전 편찬자의 개인 생각이 아니라 일반인은 전연 모르는 불교 용어이니 불교 관계자들이 정답이라고 해서 세상에 발표하고 있는 개념 정의이다.

보살(菩薩)은 또 "불도를 닦아 보리[불교 최고의 이상인 불타 정각(正覺)의 지혜]를 구하고 뭇 중생을 교화하여 부처의 다음 가는 지위에 있는 성인"이라 되어 있다. 그러면 어느 정도라야 부처가 되고 그리고 그 기준에 못미치면 보살이 되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기준이 없지 않은가. 평등하지도 않으니 객관성도 전혀 없다. 진리의 생명은 그 객관성에 있다. 주관적인 해석이나 해설을 용납하지 않는다. 성경은 당연히 그 결과에 대한 그 원인을 밝히기에 인색하지 않다. 그리고 그 판단의 기준을 명확히 정하고 있는 것이다. 엄정한 법칙이 그 기준의 정확한 개념이다. 원리원칙에 의한 엄연한 법칙이 개재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진실, 진리일 수가 없다.

성경의 기준은 평등함에 있으니 믿는 이마다 차별잆이 하나님의 아들됨에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한 몸 체제에서 몸의 각 지체로서의 역할 분담만이 있을 뿐 모두가 한 형제들이다. 단지 열매 맺는 것만이 머리와 각 지체된 이웃들에 대한 사랑의 충성 여하에 따라 100배, 60배, 30배 등으로 차등이 생기고 열매가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열매가 없을 때는 자기중심으로 나간 결과이므로 자기 부인만의 세상인 천국에는 당연히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면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로 남아 있으면서 영원 멸망의 세계로 들어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의 아들됨은 반드시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됨에 있다는 기준이 서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터라[히 6:6/10:26,29] 그리스도는 그 사람에 관한 한 죽어 없어진 상태다. 그러므로 답은 저절로 나온다. 따라서 성경은 모든 것을 똑 부러지게 말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기준이 철저하고 엄정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보기 나름 인식하기 나름이니 항구적인 실패로 보느냐, 악착 같은 끈기로 보느냐, 후자로 본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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