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2일 토요일

하나님은 철저한 '인간의 자주 독립성'을 요구하신다



바울은 자기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빌 3:14)고 하고 교회에 대하여 "그렇게 달려가라"(고전 9:24)고 했습니다.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곧바로 단도직입으로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 즉 천국에서 탈락된다(눅 9:62)고 경고하셨습니다. 타율성 인간이 되지 말고 자율성 인간 즉 주체 의식이 분명한 인간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이 자율성 즉 주인 의식은 둘이 하나됨의 사랑에서 필수 요건입니다.

갑이 을을 위하니까 을은 갑을 위함 즉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입니다. 이렇게 서로 상대방을 위함에서의 주인 의식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의식의 특징은 이 주인 의식입니다. 누가 하라고 시킨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자진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공 순신이 나라에서는 일전 한 푼도 주지 않았고 시키지도 않았고 오히려 유력자들은 반대까지 했어도 홀로 결단하여 거북선을 세 척이나 만들어 임진란에 아주 요긴하게 썼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공을 공동체 의식의 화신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벽한 자기 부인에 비하면 어린 아이 수준이나 여하튼 그 그림자라도 닮았기에 그 그림자뿐인 것이었으나 경천동지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입니다. 스스로 주인 의식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임하는 자세 이것이 자율성입니다. 머리가 되어야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꼬리라 할지라도 자기의 그 꼬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때 그것이 주인 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 주인 의식, 공동체 의식에서의 자주 독립성, 자기 몫을 충실히 다하는 것 다시 말해 둘이 하나됨에서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철저히 위함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것(선)이요 올바른 것(의)이요 법(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단순 간단 명료합니다. 복잡하거나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20대의 관문을 통과하려는 한창 나이의 고등학교 정도의 젊은 나이에는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을 확고하게 다지는 시기입니다. 이런 젊은 영혼들을 위하여 이런 3운법칙으로 검증되는 3위1체 원리라든가 DPA pix라든가 하는 것이 나타나져 있으니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취사 선택, 양자 택일의 판단에 그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처럼 이 자율성이 요구되는 때가 없습니다. 물론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고 영원히 그러하실 것이지만 지금은 아주 경사진 내리막길이 되어 있는 때이기에 특별히 이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동쪽을 보든 서쪽을 보든 양자 택일입니다. 어느 한 쪽만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한꺼번에 양쪽을 다 볼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든 안가든, 하든 안하든 이렇게 둘 중 하나의 선택이 요구됩니다.

동쪽에 관심 거리가 있으면 서쪽으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게 됩니다. 거기 푹 빠져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 거리가 없으면 자연 서쪽 남쪽 북쪽 양 사방으로 눈이 갑니다. 그런 인생 삶에서 실제 그렇게 사방으로 관심이 가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둘 중 어느 하나입니다. 선이냐 악이냐, 의이냐 불의, 불법이냐 하는 스스로의 선택. 그래서 이솝(Aesop)은 만물에 양면성이 있어 반드시 어느 한 쪽을 택하게 되어 있으니(한꺼번에 둘을 차지할 수는 없으니) 둘을 잘 살펴보고 결정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영화관 같은 데를 출입하는 것을 보면 불량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므로 그런 남의 눈초리가 두려워서라도 그런 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지만, 지금은 바로 내 손 안에 그것이 들어 와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자율성이 요구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 아무리 위협하고 유혹해도 내 스스로 옳고 그름을 알고 있다면 자유인으로서의 결정을 하는 것이지 그런 데에 속박당하고 피동적으로 끌려가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가락만 몇 번 누르면 음란물이 홍수같이 쏟아져도 그것을 돈 주고 보라고 하더라도 보지 않는 이것이 자율성입니다. 목표가 한 곳에 정해져 있지 않고 마음이 방황하면 모든 것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질질 끌려 다니다가 일생을 허무하게 그리고 불행하게 마치게 됩니다. 영원한 멸망의 죽음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동쪽을 볼 때 확실한 관심 거리가 있으면 내처 그 방향으로 얼굴이 돌려져 있지 다른 방향으로 눈을 줄 사이, 겨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첫머리에 지적한 "푯대", "쟁기"의 뜻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인데 천국은 생명의 나라인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음부, 음녀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남편을 위해야 하는데(남편도 한 아내만 위함에는 동일) 주위에서 유혹하는 대로 마음이 쏠리면 다름아닌 한눈파는 것 즉 손에 쟁기를 잡고서도 뒤도 옆도 돌아보는 행위입니다.

서로 좋아서 다시 말해 상대에게 어떤 해를 입히지 않는데도 남녀가 자기 반려자 외의 이성과 관계할 때 죄를 묻는 것은 이러한 둘이 하나됨이 문자 그대로 만유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한 몸이 되든 한 영이 되든 마찬가지입니다. 이 법질서를 유린하는 행위는 절대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열에 달아 올라 거의 벌겋게 되어 있는 겨울 난로에 손이 닿았는데도 무사할 수가 없음과 같습니다. 뜨거운 온수 파이프에 피부가 닿았는데도 무사할 수 없음과 같은 것입니다.

동성 성행위를 엄벌하시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둘이 하나됨은 성질이 정반대가 되는 것끼리의 조합 또는 화합입니다. 같은 것끼리 엉기는 것은 이 역시 만유의 법칙에 대한 범법이므로 엄단되는 것입니다. 허용이 안된다는 뜻입니다. 질서 유린 행위, 만물 파괴 행위로 직결되는 까닭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이를 방치하실 리가 없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목표"가 다름아닌 '을'이 상대하는 '갑'이고 '갑'이 상대하는 '을'인 것입니다.

자아중심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위하는)"(롬 15:1,3) 것은 모두가 범법이 됩니다. 다시 말해 나는 내 것이 아니라 나의 상대의 것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나의 상대가 나라는 존재의 주인이다, 상대는 또한 내가 주인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내가 소유한 주인이라 하더라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가 하는 일입니다. 상대가 나를 위해주어야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주체 의식 곧 자율성입니다.

내가 주인이지만 철저히 내가 나를 위해 좌지우지 못하는 것. 상대가 나를 위해 줌으로써 내가 위해지고 그가 나의 소유라는 사실이 현실화되어 작동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것, 주님의 소유이지만 주님께서 나를 강압하시거나 억제하셔서 되는 일이 아니라 내 스스로 주님을 위해야 위해서 살아야 되는 일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존재하시는 사실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그리스도의 나 위한 십자가 죽으심으로 확정된 것입니다(갈 2:20).

바로 이것이 삶의 목표 즉 끊임없이 달려가야 할 "푯대"입니다. 이 달려감은 사랑이므로 피곤할 줄 모르는 것이 특색입니다. 사랑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희열과 넘치는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참으로 자유인으로서의 긍지와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할 것이라 하셨고(요 8:36),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 했습니다(고후 3:17). 악인(생명의 법칙에서 벗어난)이 제 마음대로 욕심 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자주 독립성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에서만, 내가 진정 하고 싶어서 하는 여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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