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31) 초원(楚媛)의 이야기,레오 톨스토이, 멜기세덱, 장기려 박사

                                                                                                                                                                                                                잡록(雜錄, miscell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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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원(楚媛)의 이야기 


당나라 태종의 10째 아들 신(愼)의 형으로서 8째 아들 정(貞)이 그 아들과 함께 측천무후(則天武后)의 15년간 제왕(帝王) 통치 전에 당조(唐朝) 복고를 위한 무력 거사를 했다가 실패하자 태종의 아들들 일족이 거의 다 죽음에 처해질 때의 이야기로서 당시 신에게 초원(楚媛)이라는 딸이 있었다. 아버지의 철저한 가정 교육을 따라 공자가 가르친 대로 유교의 모든 장점을 골고루 몸에 익혀 사람 삶의 모본이 되었다.

하나 그 부친과 형제들이 비참한 결말을 맞았고 그렇게 그 친정이 몰락함에 따라 시가(媤家)로부터도 아주 버림 받는 비참함에 빠졌는데도 그 마음의 평정(平靜)을 유지하여 그 후로도 20년을 더 살았다.황족(皇族)의 공주란 어느 시대에도 그렇지만 경박하고 사치하며 자존심만 높고 낭비벽이 심하고 제멋대로 구는 것이나 그러한 자기 일족의 공주들과는 달리 초원은 어려서부터 엄한 교육을 받아 매사에 조심스럽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다.

출가해서는 병든 시어머니 모시기를 친어머니보다 더 극진히 했고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존경하기를 손님 대하듯이 했다. 남편의 인척들을 마치 자매처럼 대했고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경박한 질투심 같은 것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살림살이를 알뜰히 꾸미기 위해 절약에 힘쓰면서 평소 사치스러운 의상이나 장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여자에게 가혹하다 할 만큼 엄격하기만 한 유교의 부덕(婦德)을 갖춘 전형적 인물이었다. 황족과 귀족 관료 사이에서는 초원의 평판이 자자해 초원을 예로 들면서 아내를 억압하는 남편들도 많았다. 그런 만큼 일족(一族)의 여자들에게는 자연 따돌림을 당했다.

어쩌다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경멸조의 야유에 시달리기도 했다. "신분 높은 사람에게는 자연 나름대로의 생활 양식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당신은 천민 여자들처럼 너절한 옷을 즐겨 입고 장식품도 멀리 하니 알 수가 없는 일"이라고 말하면, "기쁜 마음으로 자진해서 실행하는 것이므로 사치스러운 생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즐거움이 따른다. 옛날부터 여자란 겸손하고 얌전한 처신으로 절약을 미덕으로 삼고 살았으니 방종, 사치, 교만, 게으름, 낭비 등은 악덕이 아니겠는가. 옛 성인이 정한 예교(禮敎)를 따라 부덕을 지키며 살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부귀란 원래 뜬 구름같이 덧없는 것이므로 결코 자만할 것이 아니라"고 타이르듯 말하곤 했다.

남자들로부터 훌륭하다는 칭찬을 들으면 들을수록 여자들로부터는 고립되어 남편의 첩(妾)들조차 함부로 경멸하고 바보 취급을 했다. 천한 여자일수록, 부덕이 어떻다는 등의 교양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타고난 직감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마님이 자신들을 가련하게 여기거나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님 자신의 부덕(婦德)의 평판을 높이기 위한 수작이라고까지 오해했다. 그런데 초원의 그러한 부덕이 제대로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일가 친척들에게 닥친 흉변(凶變) 그리고 이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게 몰아 닥친 재난은 참기 어려울 정도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초원은 그 후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꺼려 할 정도로 외톨이 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차분한 평소의 마음, 인생을 달관한 듯한 자세는 그의 명(命)을 재촉하지 않고 세상에 거의 홀로 남은 그런 처지에서도 20년을 살았다고 기록은 전한다. 한 부녀의 아름답고 지조 높은 덕을 우리는 찬양하는 것이다. 비록 그 개인적인 역사는 화려하게 끝나지는 않았으나 그러한 그의 생애가 뭇 심령에 긴 여운을 남긴 것은 확실하기에, 초원이라는 그 이름만은 이토록 후세에까지 남겨져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지 않는가.

그는 그런 부덕을 실천함에 금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가운데 실천한 것이다. 오직 사람 사는 도리라고 굳게 믿었기에 그대로 따라 산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의 부덕(婦德)을 강조하고 있다(벧전 3:1-6). 그런 아름다운 행실은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함이라고도 가르친다(딛 2:10). 만일 우리 부녀들이 이와 같지 못할진대 그 한 시대에 살았던 초원이란 인물이 우리를 심판하리라고 해도 감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는 아무 대가 없이 오직 그것이 사람 사는 도리라고 확신하였기에 그 소신대로 신념을 따라 산 것뿐이다. 그럼에도 뭇 사람들의 찬탄의 대상이 되어 지금도 우리는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영광스러운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크나큰 약속을 받고 있다. 뿐 아니라 이미 크나큰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는 터이다. 초원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무언(無言)의 스승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중의 많은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도 그 아름다움을 알기에 그 이야기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했는데, 이런 아름다움으로 그 아름다우심을 선전할 의지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
 

§  레오 톨스토이

평소 인물 평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 터이지만, 여기서 러시아 대 문호 톨스토이를 언급하는 것은 그 사람을 평함이 아니라 그가 성경을 이해하노라 하여 알고 있었던 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의 관점과 본질상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서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청빈에 대해 말씀하시고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말씀을 구원 얻는 조건처럼 여기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때문에 그런 관점으로, 행위로 구원 얻고자 하는 세상 종교와 같은 것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간주하고 오해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그런 구원 얻는 조건으로서의 행위로 취급해서, 자기 부인이라는 정작 중요한 알맹이마저 아예 무시하려 드는 또다른 극단주의를 경고해야 할 필요성에서다. 톨스토이는 그런 모든 것을 인생이 구원 얻는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불교나 인도교 승려들이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기를 부정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무저항주의로 나가는 것에 감명을 받고 있었던 그다. 그렇게 톨스토이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이 아닌 것이다.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도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 자기 부인을 바탕으로 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율법 행위로 구원 얻을 자가 없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첫째 그런 행위가 죽은 자의 자기중심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서 무의미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리스도 없이는 어떤 선한 행위로도 그 행위만으로 구원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본질상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행위가 될 수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선한 행위는 헌 누더기 곧 "더러운 옷"(사 64:6)과 같다고 하신 말씀 그대로다.

그리스도 없이는 자기 부인도 불가능하고 악을 선으로 갚는다고 할 때의 그 선이라는 것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래서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되고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음이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정 그런 일을 하게 될 때는 나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요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벌써 되어 있는 까닭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구원 받기 위한 조건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또는 하게 되어 있는 사람 삶의 기본을 나타내신 것뿐이다. 다시 말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당연히 그런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 마땅히 할 일이 되어 있기에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어떻게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정상적인 삶이냐, 그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그 말씀을 듣는 자 중에 내가 과연 그렇게 살아왔다 하는 자는 물론 아무도 없었다. 부자 청년이 자기는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면서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정작 말씀의 본 취지를 듣고는 큰 낙담 중에 돌아간 사실도 그 때문이다. 이유는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아직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아 정상적인 사람이 되면 해야 될 일을 기본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나 그 말씀대로 능히 할 수 있고 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를 혼동하지 말 일이다. 톨스토이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탓에 불교도나 또는 힌두교도가 그런 행위를 할 때 그들의 위치를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이런 톨스토이의 사상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피력하고 강조한 독일 철학자 쇼펜하워의 글을 읽고 더 굳어졌다. 때문에 한 사상가일 수는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아니었다.

성경 가운데 그가 주로 읽은 것은 사복음서였다고 한다. 중세기에 피터 왈도(Peter Waldo)라는 부유한 상인도 이 사복음서에서 감명을 받고 "사람이 하나님과 돈이라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는 말씀에 깊이 승복하고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포기하고 청빈을 강조하였다는 말이 있다. 워낙 그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고 그를 이단으로서 박해한 로마 카톨릭 계통의 자료에 의거하는 것이어서 전폭적인 신빙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성경에는 신구약이 있고 사도들의 서신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사복옴서만을 중시하는 것일까. 이는 예수님의 초상화라고 하여 그려놓고 예수님을 그런 모습으로 항상 생각하는 혼미스러움, 그런 일종의 미신과도 비슷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그런 모습으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읽는 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요한 사도가 계시록에서 대면해 뵌 그런 신령한 모습으로서, 요한의 육체는 그 앞에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이내 실신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구태여 그런 그림을 그려놓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우상처럼 만들어놓고 이것을 위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발동된 연유가 아닌가.

모든 면을 두루 살피고 차분하게 모든 것을 다 생각해보는 그런 여유를 왜 갖지 못하는가. 육신의 마음은 항상 다급하고 초조하여 안정되지 못한 것이 특징이다. 무엇을 결정할 때도 다급해지고 초조한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 올 때는 이 세상 신(神)이 작용하는 것으로 판단하면 거의 들어맞는다. 그럴수록 기도하여 평안하고 안정된 마음에서 결론을 내리고 결정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신(神)은 그 자신이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기도 하다. 성경에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하신 그대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여 사복음서를 더 읽는다면 그것은 명백히 성경을 겉 읽은 증거다. 그래서 성경에도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특별히 그 부분만은 붉은 글씨로 해놓은 것들을 보게 된다. 이는 성경을 너무나 읽지 않고 따라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가령 사복음서의 요한복음서만 읽더라도,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으로(혹은 성령께서) 그 하신 모든 말씀을 기억 나게 하시고 그것을 가르쳐주신다"고 명백히 하신 것이다.


사도들이 그런 편지를 교회에 쓴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게 된 것을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자기 스스로 인간의 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말에는 붉은 글씨로 단장하지 않는 것인가. 예수님 친히 하신 말씀이나 그 말씀을 듣고 깨달아 기록한 사도들의 말이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된 대목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일부러 그렇게 차별화해서 표기해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 톨스토이 같은 이들이 유독 사복음서만 치중해서 읽은 결과 믿음의 오류에 빠져든 것과 같이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내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젊었던 시절의 방종한 생활을 청산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성경도 읽고 한 것인데, 성경은 읽으나 그냥 겉돌기만 한 것이 되어 지식만으로 만족하고 정작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지식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있어 모든 것을 척척 대답할 정도로 알기는 알지만 그 지식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않는 한 바울이 말한 대로 인간을 오만하게만 만들 뿐(고전 8:2,3) 아무 유익도 못되니 그야말로 백해무익이다. 잘 쓰면 양약이고 못쓰면 오히려 독약이 된다는 말과 통한다. 모르면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게 되는 날 그 신선한 충격으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결국 뵙게 되는 은혜의 구원에 이를 수 있지만, 안다고 하면서도 그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뵙는데 실패하면 그 지식이 오히려 자기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적 그리스도로 통하는 "악한 자"가 임함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한 그대로다(살후 2:12). 과거나 오늘날이나 많은 사람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이렇게 구원 얻는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항상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자기 사랑은 그렇게 표현해서 그렇지 실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바로 표현하면 자기중심, 곧 이기심일 뿐이다.

그리스도께 이르는 지름길은 각자 이 자기중심의 죽음의 실상을 감지하고 그 절망 상태에서 스스로 헤어나지 못해 구원을 절규하게 될 바로 그 때에 들어서는 것이다. 행위 또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될 수 있다는 이들이 결단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런 죽음 가운데에서의 단말마의 비명을(롬 7:24)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무엇을 행하면 즉 청빈한 생활을 하면 구원된다는 그런 구원의 수단이 있다고 믿어 거기 의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아예 나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그리스도를 아주 멀리하고 있는 모순적 결과이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만남이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함이요 그리스도를 소유함이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서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내 안에 영원히 모시는 그 기쁨과 만족이 없이는 구원과는 요원한 것이다. 지식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어도 그래서 세세한 것은 몰라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나를 사랑하셨다는(요 3:16) 단순한 이 사실을 아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성령의 가르치심 즉 계시로 나타나는 경우 그런 단순한 말씀 전도만으로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경우(고전 8:3) 그는 훌륭히 구원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진정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사랑의 의미를 모른다고 했거니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사랑을 알고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음이다(요일 3:16). 즉 자기 부인으로 나타나는 사랑이니,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사실을 그 친히 이루시고 보이신 십자가 고난을 통해 가르치시고 입증하신 까닭이다(요 3:16).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자기 부인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아버지께서 그와 같이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없다면 아들 역시 그렇게 우리 위해 자신을 다 바치시는 그 자기 부인의 사랑을 나타내실 수가 없다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같이 사랑은 자기 부인이요 이 자기 부인의 근원은 조물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다시 말해 조물주 하나님이 없이는 사랑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 최종 결론이다. 사랑은 안다고 하면서도 그래서 좋은 줄은 알면서 조물주를 부정하는 것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따라서 시작부터 모두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모순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자비와 인애를 강조하면서도 조물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상 종교들이 그런 부정할 수 없는 모순의 하나다. 그러므로 내가 자기 부인할 수 있는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고 또 지금도 하고 계시고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하신다는 믿음 가운데에서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지 않고는 그 어떤 자기 부인도 청빈도 모든 것 버림도 속 없는 빈 껍질이요 이름뿐이요 형식이요 따라서 생명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고되고 힘들고 벅찰 뿐이다.

톨스토이가 이렇게 그 겉모양만을 따르면서 자기 스스로는 모든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버리나 아내에게는 이것을 강요하는 태도가 되니 다시 말해 그리스도로 충만함이 없이 고되고 힘든 길을 택하라고 하니 그 아내가 따라갈 수도 없거니와 감당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때부터 이들 부부는 가장 불행한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매료된 것은 그런 청빈한 삶의 아름다움, 자기 소유라고 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나누는 이른바 공산주의식 생활 양식인 것이다.

그것이 원래부터의 인간 삶의 형태이므로 아름답고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이는 형태만으로서의 허무함만이 있을 따름인 것을 톨스토이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은 못하고 소위 사회적인 개혁에 관심을 두는 방향으로만 나간 것이다. 딴에는 진리라고 믿어 스스로 강행하였으나 그리스도 없이 된 것이므로 그것은 동력 없는 기계와도 같은 것이었다.

꽃은 아름다워 꺾어 왔으나 그 안에 생명력이 없으므로 잠시 그 아름다움은 감상할 주 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시들어 버리는 운명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생명이신 것이다. 이에 비하여 또 다른 극단주의는 꽃이 이렇게 시든다 하여 꽃이란 원래 시드는 물건이라 지레 판단하고 꽃 자체를 싫어하고 멀리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꽃에 생명력만 부여되면 즉 꺾지 않고 뿌리째 캐어 와서 화분에만 심으면 그 꽃은 시들 이유도 없고 두고두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 부인 자체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한낱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한 말씀쯤으로 치부해 버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는 오류에 빠진 이들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등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래서 자기 안에 성령으로 모신 다음의 일이다.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면 자기 부인이야말로 핵심적인 생명의 이치요 그 원리인 것이다.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수단이요 방법인 것이다. 자기 부인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믿음도 없이 믿음이 있다 하고 구원되지도 못하면서 구원되었다 하는 것이므로 자기를 속이는 일이요, 그리스도 없이 자기를 부인하려 함은 행위로써 자기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함이다. 이렇게 서로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가나 다 같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자신을 자기의 힘으로 구원해낼 수 있었던가. 없었다. 그러면 그 쓸모 없는 자기를 부둥켜 안고 못버려 끙끙 댈 이유가 무엇인가.

모든 악은 욕심에서 나고 이 욕심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말하자면 화약고이고 시한 폭탄인 것이다. 이런 자기가 무엇이 귀여워서 버리지를 못하는가. 자기를 버려 부인한다고 해서 그 자기가 없어지는가. 자기 부인의 비결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음에 있는 것이다. 자기라는 것을 내 자신 어찌하려고 발버둥칠 필요도 없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무덤에 묻혀 있음을 믿음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다음에는, 즉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면 할수록 더욱 더 자기라는 존재가 선명하게 부각되고 살아나는 것이다. 왜냐면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부인하면 할수록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는 운신(運身 폭이 더욱 넓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서도 내가 나를 위하게 되면 그만큼 주님께서 나를 위하시는 폭이 좁아지고 주님을 묶어두는 결과가 되는 까닭에 나는 나대로 점차 쇠약 일로로 치닫기 때문인데 이런 자승자박하는 어리석은 짓을 왜 하려는 것인가.

이 정도가 지나치고 한계를 넘어서면 마침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사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짓밟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무서운 광경이 벌어지는 것이다[히 6:6/10:26,29]. 바울이 눈물을 흘리면서 비통해 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빌 3:18)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이 말을 하면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빌 4:4] 했다) 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하나님의 실재도 믿고 성경의 진실성도 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도 자기 딴에는 모두 믿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성경대로는 믿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같은 미망(迷妄) 가운데 빠져 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앞에서도 잠시 비쳤지만 사람 삶의 정상적인 모습을 알리신 것이니 곧 구원 받은 다음의 우리가 할 일을 말씀하심이다. 우리의 구원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으므로 구원을 받기 위한 사전(事前) 준비 또는 조건 같은 것을 말씀하실 리가 만무하다.

그런 것은 실체이신 그리스도께 대하여 그림자 역할을 한 모세 율법을 통해 그 충분한 사전 정비 작업이 완료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다음의 마땅히 할 일을 가르치신 것이니 곧 자기 부인이다. 다시 말해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만을 적적으로 위하는 삶이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니까 자연적으로 자기 것, 자기의 소유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것이다[행 4:32/눅 14:33/]. 왜냐면 나의 고유(固有)의 개성적인 것은 모두 나의 이웃[공통의 머리께 충성함으로써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을 위한 것이고 그 대신 그 모든 나의 이웃의 것은 나를 위해 있는 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명을 다 지키고 있다는 부자 청년에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하시고 네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흩어 주라"[눅 18:22] 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셨으니 주님의 열두 제자들과 더불어 먹을 것이 있은즉 족하고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한 줄로 아는 것으로써[히 13:5/딤전 6:8] 이 세상에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자기중심으로 뭉쳐져 있는 이 세상은 애초부터 삶의 고장[the home, the habitat, the native place]일 수가 없다.

같은 의미로, 내 것이라 착각하여 내가 현재 가진 일체의 것은 실지대로 말하면 내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쓰여질 이웃의 것이니, 그 대신 이웃의 것이 내 것이다. 내가 영생하려면 지금 이 세상에서 모두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나의 것, 나의 소유는 없는 법이다. 그 대신 전체 곧 하나님의 모든 소유가 내 것이다[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곧 만유의 상속자다]. 그리고 나 자신은 하나님의 것이다.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것이니 이것이 생명의 한 몸[머리와 몸으로 구별되어 있는] 체제다. 머리는 하나님이시고 몸의 각 지체는 모든 피조물[인간과 영물로서의 영적 존재들]이다.

이 세상은 그런 체제로 되어 있지 않다. 모두가 자기중심이므로 마치 맹수들의 정글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를 강권으로 통제하기 위해 3운법칙과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막무가내로 남들의 목숨을 빼앗는 행동을 차단하고 억울하게 남에게 목숨을 빼앗기게 될 자들을 보호하는 강제 수단이다. 왜냐면 제 때가 오기 전에는 절대로 남을 해치거나 해함을 받지도 않도록 사람 일생이 일정하게[단 3가지로] 규격화되어 있는 것이 3운법칙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이 처음부터 죽음의 세계요 죄악[자기중심]의 세계인 고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다[요 3:36].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 7:11-13]. 당연하다. 현재 이 세상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도 물론이고 또한 장차 임할 진노가 있으니[마 3:7] 곧 마지막 심판이다. 현재의 진노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말하지만, 아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눅 13:2-5] 하시며 이를 강조하신 데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이런 진노 아래 있는 것이 이 세상의 현실이요 실상이다. 고로 이 세상에 미련을 두어 살고자 하고 여기서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것처럼 미련한 일은 없다 할 것이다. 삶의 법대로 살지 않는데도 하나님의 분노가 없으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최종적인 진노 곧 마지막 심판을 앞두고 하나님 품성의 또다른 측면을 나타내 보이시고 확증하신 것이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을 통해 명백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면 "구원 받지 못한 톨스토이는 악인이었던가?" 할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것이 없는 것은, 이 세상에서나 "옥(the prison)"[벧전 3:19]에서나 구원의 복음은 충분히 전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톨스토이가 복음에 대하여 충분히 듣지 못하여 그리 된 것이라면 그는 "옥"중에서 복음을 듣고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일이므로 우리가 그의 구원에 대해 가불가(可不可)를 말하거나 시시비비를 걸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충분히 복음을 들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자유 선택에 의해 그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한 것이라면 일단 죽은 다음에는 그 어떤 희망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 한가지 명백한 것은, 가룟 유다라도 양심의 가책으로 자결한 것을 본다면 인간의 선악을 논할 때 양심적이냐 비양심적이냐 하는 것으로써 기준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방금 결론을 내린 것과 같이 마지막 심판 때에 가서야 드러날 것으로서 회개 여부에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했느냐 아니냐 또는 그 "처음 사랑을 지키지"[계 2:4,5] 못했더라도 나중에 회개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판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본인 당사자에 관한 일이지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더라도"[빌 3:18] 회개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음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종말은 필연적으로 "멸망"[:19]뿐임을 바울 사도도 알고 있는지라 그와 같이 눈물을 금치 못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는 회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어느 경우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사실이 되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지는"[히 6:6/10:26,29] 명확히 꼬집어내어 어떤 기준을 정하기는 어렵다. 오직 "선 줄로 생각하는 그 순간 넘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는"[고전 10:12] 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불안해서 어찌 사느냐" 하겠는데, 전쟁에 나선 자가 불안한 마음으로 전투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승패를 장담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미지(未知)에 속하는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최선을 다하는 것뿐으로서 전쟁의 의미를 망각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명백히 아는 것은 불안과 초조함과 안절부절못함은 패배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로 그런 마음을 갖지 않기 때문에 싸움에서는 감투성을 첫째로 쳐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만하여 방심하는 것 역시 패배를 보증하는 첫 걸음인 줄 잘 알기 때문에 두렵고 떤다는 것은 조심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 미리부터 패할 줄을 알기 때문은 결코 아닌 것이다. 우리는 구원 받은 즉시로 사탄과의 전쟁 상태에 돌입해 있는 것이다.
 

"모태 신앙"의 미신

'나의 어머니가 믿음 생활 중에 나를 잉태했으니 나는 모태로부터 신앙생화하는 셈이다' 하는데 그런 말은 성경에 없다. 사람이 지어낸 말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은 주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나 지금이나 매일반이다. 이름만 다를 뿐이지 바리새인도 있고 유대인도 있고 율법사도 오늘날 그대로 존속한다.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그 사랑을 알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 받음이고 그런 삶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모태에서 무엇을 의식할 수 있는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가. 믿을 수가 있는가. 믿음은 사랑이란 열매를 반드시 맺게 되어 있다.


이런 혼란한 생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믿음과 사랑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믿음만 있으면 구원 얻는 것이지 사랑의 행위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그런 생각들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열매가 없으면 그 있다고 생각되는 나무도 뿌리도 실제는 없는 것이다. 나무 없는 열매란 없다. 주님께서는 나무는 그 열매로 보고 안다고 하셨다. 모태에서 하나님을 인식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어린아이면 믿음에 관계 없이 구원 얻는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하고 주님께서 조건을 붙이신 것은 그런 어린 아이들이 의심하지 않고 믿는 그런 마음의 상태 혹은 사랑을 말한 것이다. 어른이 다시 어린 아이로 되돌아가 어린 아이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린 아이 같이 되라" 하셨을 뿐이다. 시편에 죄 중에 '내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그 모친이 특별한 무슨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이 나면서부터 악하고(창 8:21) 죄인임을 가르치심이다. 

그러면 말하리라. "어린아이 즉 갓난 아이가 죽으면 멸망으로 들어가는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의 자유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그런 갓난이가 구원 얻는다 해서 앞에서 강조하여 경고한 대로 구원 얻는 도리만큼은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점만 유의하면 된다. 혹자는 말하리라. "그럴 수가 어디 있느냐. 구원 얻으면 얻는다, 못얻으면 못얻는다고 딱 부러지게 말해야 되지 않느냐". 그러나 그것은 지엽적인 것으로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바울 사도의 본을 따라 말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앞으로도 이런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상호간 금아 가고 분쟁이 날 줄 알고 이미 그 해결점을 제시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이는 특정일을 중하게 여기고 다른 이는 모든 날을 똑같게 여긴다고 했는데 바울은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고 규정하지 않고 단지 "주님을 위하여" 이런 저런 주장을 하느냐 그것만 확인하라고 한 것이다. 왜냐면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는 이가 없다고 한 것이다[롬 14:7-9/고후 5:15].

이 한 점에서만 일치하면 그런 지엽적인 일에서는 피차 용인하고 용납하고 포용하라고 한 것이다. 이같은 잣대를 우리도 기꺼이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 어린 아이의 구원 문제는 그가 아직도 의식도 없이 즉 이성적으로 복음을 듣고 믿고 순종하고 할 결심 여부도 내릴 상태도 아닌데 죽음을 맞았으므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기준해서 판단할 일이다[벧전 3:19,20]. 거기서 그 아이가 복음을 듣게 되는지 여부는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갓난 아이가 죽으면 어른과 같은 그런 완숙한 지성과 이성을 갖추게 될까 하는 것도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다. 우리가 판단하건대 영혼은 육체와는 달라 성장하는 과정이 없으므로 마치 애초에 아담에게 영혼이 조성되던 때와 같은 상태라 할 수 있다[창 2:7]. 차이는 아담은 육체의 성장기가 필요없었고 지금의 갓난 아기는 그렇지 않다는 것뿐이다. 고로 얼마든지 죽어서는 육체로부터 해방되고 영혼은 아담과 같은 상태인지라 직접 복음을 듣고 그 구원을 결정할 일이라 생각된다.
임종시에 회개한 강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회개한 결과 천국에 들어가게 된 강도의 예를 들어 "나도 임종시에 믿으면 되지 않는가" 하고 회개의 날을 지연시키는 이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고의적인 범죄가 되어 구원 받지 못한다. 복음을 들을 때 즉시 회개하지 않으면 그 구원의 날을 영원히 놓칠 개연성이 적지 않다. 물론 말로써 전도하는 것으로는 듣지 않다가 믿는 이의 착한 행실을 보고 믿음에 들어올 수는 있다[벧전 3:1]. 그러나 그런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장담은 못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상에서 회개하고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간 그 강도의 사례는 아마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단 한번뿐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판단하는 데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한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고 따라서 충분히 우리로 영생하게 하시는 새 창조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면 성경에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 등으로 하여, 혹자는 우리 구원이 불완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어 이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죽어서도 복음을 듣게 되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가 공평하게 부여된다면 굳이 이 세상에서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려고 죽음까지 무릅써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할 것인다. 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전 9:16] 했는가에 대한 답을 하게 되면 그것이 그 답변이다. 구원 받은 자로서의 마땅한 할 일을 다하는지 여부를 시험하는 것이 이 세상이지 이 세상 편하게 살라고 우리를 남기신 것은 아닌 것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심을 따라 그 몸의 각 지체된 우리 각자가 지체로서의 소임과 역할을 다하는지를 시험하여 자기중심으로 나갈 때는 가차없이 죽음에 들어갈 수밖에 없도록 정해진 것이 시험 무대로서의 이 세상인 것이다. 영물들 중에 거룩한 천사들과 사탄과 같은 악령들로 구분된 것과 같이 지금 이 세상은 우리 인간들이 의인과 악인들로 구별되는 시기인 까닭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다시 찾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에 동참하는 의미는 분명히 있다[눅 15:32].

그래서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된 이들이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아버지 앞에서 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는 것을 보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아버지의 일이시므로 나도 아들된 도리를 다함이 자연스럽고 만일 그렇지 못할 때 나는 아무리 말로는 "아들되었다, 구원되었다" 하더라도 실제는 아닌 것이 판명 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마 7:21] 하신 것이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 그렇지 못하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이 되고 그 종국은 "멸망"[3:18,19]이다. 전자 없이 후자만 있으면 율법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 된다. 후자 없이 전자만 있으면 위험에 노출되어 자멸행위가 된다. 이상 내용이 바울 사도의 한 편지[빌립보서]에 한 내용으로 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   멜기세덱

아담은 당시 영물(靈物, 우리가 "천사"라고 부르는)들이 지닌 지식에는 미치지 못하여 비록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먼저 지으심 받아 영물들 위에 군림하기는 하였으나 [그룹과 스랍은 이들 영물들 곧 천사들과는 별종으로 6일 창조 이전에 창조된 것] 지식 면에서는 영물들의 보좌를 받아야만 했던 사실이 감안되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으나 자연계의 육체로 회귀하는 것으로 그쳤다. 물론 죽음은 죽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하지 않으면 악령들과 같이 멸망이다.

그래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일정 기간 지내다 죽어 썩어 흙으로 돌아간 아담이나, 이 범죄와 죽음의 과정을 거쳐 모든 것이 종료된 다음에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타나실 그 약속을 따라 그 안에서 다시 이전 상태의 몸으로 복구되어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 왕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존재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이를 개인적인 사견(私見)으로 취급하든 않든 독자의 자유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성경에 "멜기세덱"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고 이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나 해석이 있을까 하여 미리 그 인물의 윤곽을 잡아두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여겨 말해두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것 때문에 불필요한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구원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order-여기서는 종류, 양식 등의 의미]를 따른 제사장 직분이시라 하나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와 관계될 뿐이지 멜기세덱이 우리와 관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하나 하나님의 제사장 직분이라는 그 직분을 보고 한 것이지 그 개인을 보고 한 것은 아닌 것이다. 개인적인 의미로 그렇게 했다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니 당연히 우리에게도 상관될 일이겠지만 하나님 앞으로 낸 십일조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관계는 우리에게는 사람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에 대한 언급은 창세기[14:18]와 히브리서[7:1]에 한번씩 나오고 만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관한 예언에서 단 한번 기록되었을 뿐이다[시 110:4].

그 외에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나오지 않으니 그도 그럴 것은 하나님의 제사장 직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것임이다. 또 이 그리스도를 상징하여 성문화한 율법으로 나타난 것이 모세의 율법이기 때문에 모세 이전과 아브라함 시대 그리고 그 이전에 해당되는 하나님 제자상 직분으로서의 멜기세덱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으로써 하나님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위치를 상징해 나타내기 이전의 필요한 제사장 구실이 멜기세덱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 출현 이후로는 필요가 없어졌고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항구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 항상 있다는 것은[히 7:1]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이제는 위치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큰 의미는 없다. 단 아브라함도 모세도 레위도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 왔다는 그 사실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으로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High Priest]이시고 멜기게세덱은 제사장 중의 하나["a priest"로 영역이 되어 있으므로]임을 참고한다면 그 차이를 알 수 있겠다.

성경에 아담을 가리켜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다"[딤전 2:14]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담이 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사실에서는 여자든 남자든 차이가 없다. 그러나 같은 범죄라 하더라도 둘 다 함께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을 수 없는 '숙명적인' 데가 있다. 즉 여자 혼자만 죄 짓고 벌 받을 그런 처지가 아닌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고 불가분이니만큼 여자가 범죄하였으면 남자 역시 불가피하게 그 범죄에 참여하게 되어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할까.

이래서 아담을 그리스도에, 여자를 교회에 비유하기도 하거니와, 그러나 아담과 여자를 동률 선 상에 놓고 볼 수 없다는 것은 위의 바울의 표명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아담은 여자로 말미암아 희생당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교회의 죄에 주님께서 동참하셔서 희생 제물이 되신 사실을 말하게 된다. "아비,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다"는 것은 아담밖에는 없다. 하와는 다르다. 아담에게서 났기 때문이다.

아담 스스로가 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소재로 하여 지으셨다, 즉 아담에게서 여자를 지으셨다는 얘기다. 여자가 아담에게서 나왔으니, 아담과 부자 관계는 될 수 없어도[하나님이 친히 창조하셨으므로] 적어도 그런 내용이 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시작한 날도 없다"는 것은 시작한 날이라는 것은 이 자연계에서 날을 셀 때 쓰는 말이다. 그러나 신령한 영계에서는 이런 날 수 계산이 통하지 않는다.

아담의 육체가 조성된 것은 자연계의 흙으로 되었으니 자연계의 시간에 저촉되지 않느냐 하겠으나 물론 그렇지마는 그 후로 에덴낙원이라는 영계를 거쳤으므로 그런 시작한 날이 그것으로 일단 끊겨진 셈이다. 다시 말해 그 "시작한" 날로는 종료된 후, 에덴낙원에서 다시 새로운 시작이 된 셈이다. 그러니 자연계의 날 수 계산에 그 영계의 날 수가 포함될 수가 없다. 그러나 범죄하여 다시 자연계에 속한 몸이 되어 자연계로 추방되어 그 날부터 날 수가 다시 셈해지는 것이다.

고로 자연계에 추방되어 거처하게 되기 시작하는 날 수 계산이지 아담의 존재가 시작한 날은 아닌 것이다. 첫 사람 아담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이런 점에서 우리와 같을 수가 없다. 물론 그 아내 하와와도 같지가 않다. 사람으로서는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특출한 존재이다. 이런 아담이니 그런 "첫 사람"으로서 자기의 다음 대에 나오게 될 인류를 위한 제사장 직으로서의 의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불가능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왜 성경이 멜기세덱을 아담이라고 바로 말하지 않았던가. 히브리서는 이 말을 하기 전에 이 멜기세덱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여러분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말했다. 설명은 할 수 있으나, 아담의 범죄로 우리 인간이 모두 죽음에 처해 있는 마당에 아담이 도리어 그렇게 하나님의 제자상으로 되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처럼 들리게 마련이다. 과연 그래서 그럴까. 독자의 판단나름이다.

여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정도로 우리 모두가 한가하지 않다.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리기에는 우리 모두는 본질적인 일을 하기에도 너무 시급한 것이다. 제사장이 필요해지는 것은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인간에게는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사람되신 몸으로써 이를 완성하셨고 이를 미리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한 정지(整地) 작업으로서 모세 율법이 있었고 이 모세 율법 이전에는 불가피하게 어떤 제사장적인 존재가 필요했음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 적임자가 아담 자신밖에 더 있겠는가. 아담이 죽어 그 육신이 썩어 흙으로 돌아간 이후에 어떻게 다시 살아나 그런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겠느냐 하는 것인데,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약속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에녹이나 엘리야나 죽지 않고 그 몸이 곧바로 승천하였다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확실히 그들의 육체는 썩음을 당하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부활 아닌 부활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혹은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약속] 안에서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변화산 상에서 세 제자들 앞에서 변형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 엘리야와 모세는 단순한 환영(幻影)이 아니라 실제 엘리야요 모세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데 그런 특이한 위치의 아담이 새 이름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 그런 제사장으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고 해서 그렇게 무리한 말은 아닐 것이다.

§  인터넷, 스마트폰, 이후에 또 생길 그 무엇

인터넷이란 요사스러운 물건을 두고 아이들의 정신 상태는 더욱 헝클어져가고 있다. 이런 무서운 요람 속에서 길들여지는 안하무인의 욕심은 더욱 짐승처럼 되어 간다. 바울이 예언하기를, 장차 닥칠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자기 영혼을 위해 유익이라 하더니, 오늘날 성경의 토대 위에서 경건하게 자식을 기르려는 부모들은 오만가지 애간장을 다 태우고 있다. 지금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릴 때이다.

그러한 자식들을 위하여 또 자식들을 둔 형제들을 위하여 그들의 영혼의 안녕과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밤새도록 또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 때이니, 이는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또 이를 위하여 노심초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 TV를 겸한 인터넷, 스마트폰 또 이보다 더 진보한 개량품은, 성경에서 그 출현을 예고하고 있는 '멸망의 아들'을 조만간 온 지구상 모든 인간에게 세뇌시켜 주입하는 방편으로서 그 최종 목표를 달성한 모습으로 장차 각 개인에게 제일 요긴한 물건으로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적 그리스도의 모든 거짓 이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의 속임수를 지구 구석구석이 방영해주고 하나님이라 자처하는 그에게 대한 경배심을 전세계적으로 유발해 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것같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자행되든지 간에 온 세계 거주민의 이마나 오른손에 그 악한 자의 인을 치는 수단이 곧 현실화할 것이며 이를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 몇이든지 제거해 버리는 참혹한 광경을 보여주어 많은 사람이 믿음을 버리게 될 것이다.

주님을 배반하고 믿는 형제들을 잡아내도록 유인하는데 결정적 역할도 할 것이다. 적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그를 중심으로 한 세계의 "평안과 안전"을 연호하는 광란의 모습을 연일연야 방영할 날이 멀지 않았다. "궁한 쥐는 고양이를 문다"ㅡ 미가엘 군(軍)과 한 판 승부를 겨루다가 그 대결에서 영원히 참패한 사탄과 그 일당은 최후 발악을 이 시대 이 땅 위에서 자행하고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는 터에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대오각성할 일이다.
  

§  "예수님의 그림"

누구도 뵌 일이 없는 예수님의 모습을 구태여 표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가장 아름다우시고 가장 사랑스러우시고 가장 고결 고상하시고 세상의 그 어느 인간보다 뛰어나신 분이라고 설명하면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일이 아닌가. 상상하기 나름이다. 그럴수록 더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면 났지 이상할 것은 없다. 꼭 눈으로 확인해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되다 하셨다[요 20:29].

사람이 그린 초상화로든 또는 그 무엇으로든 예수님의 그림이라고 나타내고 있는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백해 무익이니, 지금은 영원히 자연계에 속한 모습과는 결별하시고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계시기 때문이다. 왜 굳이 부활하시지 않은 것처럼 이 땅에 계시던 초라한 모습의 자연계에 속한 모습으로 나타내려 하는가. 성경을 전혀 믿지 않는 소행이 아닌가. 따라서 한낱 종교적인 우상으로 그릇 인식시키는 수단이 되고 있다.

장차 영원한 세계에서 사람이 입는 옷이 그리고 그 몸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르고 또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것도 풍부한 인간의 상상력에 맡기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근접하게 묘사한 것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모습이다. 실제 그 모습을 뵙고는 [그것도 이상(異象) 중에 본 것일 뿐이다] 감당하지 못해 요한은 까무러쳤다. 그런 영광스러운 광채 나는 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면 좋다. 그러나 그러하지를 못할진대 아예 손대지 않고 각자의 상상에 내맡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런 그림을 그려놓는 것 자체가 종교행위에 불과하다. 마치 부처의 그림을 불당에다 그려놓고 인간의 상상을 유도하는 것과 같은 행위다. 그렇게 해서라도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인 것처럼 꾸며놓기에는 그런 그림보다 더 그럴 듯한 것은 없다. 중세 시대에 사람들의 신심을 돋구어준다고 하여 그런 것을 장려했으니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믿음이 없는 결과다. 우리 주님은 살아 계신 분이시다.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그런 종교적인 형태로써 사람들을 기만할 것인가. 그 모습이 진정 예수님의 모습인 것처럼 하는 것 자체가 속임수요 거짓이 아닌가. 왜 현실로 나와 함께 계시고 사시는 분을 어떤 상징적인 그림이나 묘사로 나타낼 필요가 있단 말인가. 사탄의 장난, 악의에서 난 저의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일종의 모욕행위다. 신성모독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라고 그렇게 마구잡이로 취급해도 된다는 말인가.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그만큼 더도 덜도 없이 하나님이신 줄 왜 모르는가.

그 당시 사진술을 알았고 또 오늘날처럼 발달해 있어 사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을 예수님이라고 표현하면 웃길 일이다. 왜냐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과거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지금 살아 계신 그리고 나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당시는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사야의 예언에서처럼 "고운 모양도 없는" 한마디로 "우리가 흠모할만한" 모습이 아니셨다. 그러나 지금은 더 다시 그런 모습으로 계실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다.

이 아름다운 우주의 조물주로서 그 분만이 지니신 모든 아름다움의 화신(化身)으로 계신다. 그런 모습을 감히 그 때의 초라하고 누추하신 모습이셨던 형태 그대로 지금도 계시는 것으로 선전한다면 사탄이 아니고는 누가 감히 그런 무엄한 짓을 할까. 자기가 믿음이 없으면 스스로 혼자만 그렇게 알 일이지 왜 그것을 온 세상에 퍼뜨린다는 말인가. 사탄만이 그런 짓을 하지 주님을 사랑하고 자랑한다는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  무신론자가 과학적 실험으로 신의 존재를 발견하다

한 과학자가 그 자신의 실험에 의하여 그가 말한 대로 순수한 "과학적인 관점"에서 창조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발견"하고 "크리스천"[그가 믿게 되었다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므로 이 정도로 표현해 둔다]이 되었다고 하는데 여기 소개한다. 이런 발견은 오히려 신의 존재에 회의적인 사람보다도 하나님을 믿고 이미 신앙생활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무신론자들은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겠지"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는, 3운법칙처럼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는 없는 것이다.

그가 먼저 착수한 것은 인간 뇌의 파장(波長)을 찾아내는 실험이었다. 뇌의 파장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그 결과 알아낸 것이다. 컴퓨터 회로와 같은 뇌의 파장의 회로(채널)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그리고 그 회로는 각 사람 뇌의 각기 다른 파장들을 충분히 여유 있는 간격으로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의 용적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이는 사람의 지문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과학자의 소신으로는, 모든 국민의 지문을 저장해두어 범죄 수사와 각종 조사에 활용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고의 향방과 그 내용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기록, 판독, 보관해두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의 실험은 유물론 자답게 즉 인간을 물질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고 철저히 믿는 신봉자답게, 인간의 생존 상태 그러나 막 죽음의 고비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한 큰 병리 실험실에서 한 부인을 실험 대상으로 선정했다. 그 가족이 정신병원에 보냈던 부인인데 의사들의 진단으로는 악성 뇌종양(암)에 걸렸다는 사실 외에는 전혀 이상이 없어 사실상 퇴원한 상태였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행동의 부자유가 일어나 정신 상태를 의심받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병세가 위중해 임종의 날이 가까워 옴을 본인도 의식하고 있던 터라 그대로 입원해 있었다. 심리상태로 말하면 오히려 남달리 영민한 데가 있기까지 한 그런 여자였다. 부인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연락을 받고 연구원들은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그의 병실에 조그마한 픽업(소리나 빛을 전파로 바꾸는 장치)을 설치해 두었다.

그리고 동전 크기(사실은 25센트 은화)의 마이크로폰을 달아두어 임종시에 혹 무슨 말을 하게 될 경우 그것을 죄다 들을 수 있는 장치까지 해두었다. 이들 과학자 다섯 명은 그 실험에서 일어날 모든 것을 포착하여 기록해두는 기계를 앞에다 놓고 옆방에서 기다린 것이다. 이들이 고안한 계기는 중앙의 0도를 중심으로 플러스 마이너스로 나누어 좌우 500도까지 눈금이 정해져 있는 계기판과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지침을 달아놓은 것이었다.

이전에 이 기계로써 50킬로왓트 방송 출력으로 전세계에 메시지 하나를 보낼 때 사용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지침이 가리킨 눈금은 플러스 9도였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이 부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부인은 지금까지 자기를 홀대해온 모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구하면서, 지금까지도 그러하셨고 앞으로도 변함 없이 그러하실 우주의 유일하신 능력, 살아 계신 능력으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신앙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도였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해주심과 지금까지 베푸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을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절절이 토로하면서ㅡ. 얼음장 같이 차디찬 이들 과학자들은 부인의 마지막 기도에 저도 모르게 넋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실험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서로의 얼굴을 곁눈질해 보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학자 자신도 어릴 때부터 눈물이라곤 흘린 적이 없었는데ㅡ.

그런데 이 때 까맣게 잊고 있던 계기판에서 별안간 찍찍거리는 소리가 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니 계기판 바늘이 플러스 쪽으로 이미 500도까지 치달은 것은 고사하고 그 이상으로 한정없이 올라가려는 듯 몸부림을 쳐대는 것이 아닌가! 측정해보니 이 한 사람 즉 하나님과 대화하는 부인의 힘이 메시지 하나를 50킬로왓트 방송 출력으로 전세계에 내보내던 힘의 55배를 초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반대 방향으로 실험을 시도해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연구소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 남자를 골랐다. 악성 성병에 쓰러진 사람으로 이미 그 뇌는 위축되어 죽음의 문턱에 있었고 사실상 광란 상태였다. 실험 기구를 장치해두고 간호사 중의 하나로 하여금 그를 의식적으로 적대시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척 하다가 태도를 돌변하여 사실은 전혀 그 반대임을 말해주도록 한 것이다. 이에 반응하는 남자의 악의와 욕설은 대단했다. 바늘은 곧장 마이너스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남자는 간호사를 저주하다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기" 시작했다(구미인들이 자제력을 잃고 심하게 욕하는 경우 이런 경우가 생긴다). 그러자 지침은 500도를 뛰어넘으려고 미친 듯 흔들리고 있지 않는가!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께 감사하고 순복하는 일들을 비롯해 인간 복지를 위하는 생각과 언어들은 플러스로 기록되고, 반대로 반인류적이거나 십계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역행하는 생각과 언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마이너스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 엄정히 객관적인 기계 장치에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이 이 과학자의 증언이다.

인간이 이렇게 기록할 수 있을진대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얼마나 엄정하고 정확하게 우리의 모든 사고(思考)와 언행(言行)들을 기록하실 것인가 하고 이 과학자는 두려워 떤 것이다. 사실 우리가 생각해도 이 과학자가 처음부터 믿어 왔던 대로 신이란 개념이 단지 개개인의 선한 방향의 생각들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있는 그런 가상적인 것이지 실존하는 인격적인 실체가 아니라면, 같은 하나님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때 한 쪽은 플러스 쪽으로 다른 한 쪽은 그 반대인 마이너스 쪽으로 완전히 판가름이 난 채 뇌파가 진동할 수는 없는 것.

선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은 플러스 쪽으로, 악의에 찬 것은 마이너스 쪽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그것이 놀랍게도 강력한 뇌파를 이루어 송출(送出)이 된다는 것이니, 그 송출되는 데가 어디이며 그것을 잡아 기록하는 데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분이 되는 것도 무엇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되어서는 어디론가 강력히 출력이 되어 나가도록 되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이 과학자는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낀 것이다.

그냥 단순하게 인간의 좋은 감정은 플러스 반응을 보이고 악감 같은 것은 마이너스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지문처럼 개개인이 다 다른 마치 컴퓨터의 ID와 비밀번호와 같은 그런 뇌의 파장이 일일이 그 생각 그대로를 어디엔가 초강력으로 매순간 내보내는 송신기(送信機)처럼 구조가 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신이 그런 실험을 하면서 면밀히 기록을 하고 있는 순간이었던지라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충격이었음은 당연하다.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초월자이신 절대자가 자기처럼 그렇게 일일이 기록해두고 있다는 사실이 누구보다 그 뇌리에 선명히 부각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람이 내뱉는 무슨 무익한 말이든지 마지막 심판 때 낱낱이 심문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대목이 성경에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심판석에는 영생에 들어가는 이들의 "생명책과 기타 다른 책들"이 있어 ㅡ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을 일일이 기록해둔 모든 개인의 신상명세서요 생활 기록부다ㅡ그런 기록에 의하여 낱낱이 책임을 추궁 당하고 영원한 최종 판결이 선고된다고 단언해둔 것이다.

"책"이라 한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나타낸 표현일 뿐이지, 지금 우리가 말하는 E-BOOK, E-DOCUMENT니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리만치 초강력의 기록 대장(臺帳)이다. 사람의 모든 언어행실은 일단 사람의 뇌에서 생각을 통하여 싹트고 그 다음에 표출되는 것이니만큼 뇌파로써 그 모든 과정들이 일일이 기록되고 단 하나도 빠뜨림이 없이 낱낱이 하늘의 "책들"에 입력되는 것은 당연하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시록 20"12).


§  50년 순애보(純愛譜)  

   
그래도 한두 번 서신 교환을 했다는 장기려 박사와 그 부인. 부인은 적지도 않은 아들딸 키우느라고 홀로 어려운 일에 부닥칠 때마다 남녘에 가 있는 생사도 알 길 없는 분단 상황에서 그래도 살아 있을 것으로 믿고 있는 남편이 마치 옆에라도 있듯이 "이걸 어떡하면 좋아요?" 하며 물어보고 남편이 말했음 직한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남편이 주는 대답으로 알고 그대로 해오며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왔다는 내용을 남편에게 보낸 편지 속에 절절이 담아놓고 있다 한다.

장박사도 여든을 넘은 고령에 타계하기까지 그 아내를 생각하며 홀몸으로 그 아들과 함께 살다 간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옆에 없지만 그나마 소식을 듣지 못하여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면서 옆에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해왔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주님께서는 엄연히 나와 함께 계신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갈 2:20 ] 그토록 사랑스러우시고 아름다우신(현재 그 몸으로는 영광 중에 계시고,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심) 주님께서 자나깨나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니까.

주님께 사사건건 아뢰고 모든 일들을 기도로 말씀드릴 때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그렇지 않고 마치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 듯이 나 혼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홀로 외딴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얼마나 서운해 하실까" 하기에 앞서, 남자[아담]와 상의하려 하지 않고 그 스스로 먼저 결정해버린 에덴낙원의 여자처럼 그것이야말로 범죄의 첫 걸음이라 해도 좋을 만큼 위험천만의 일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자식이 아닌가요? 당신도 자식을 늘 생각하고 있겠지요?" 하면서 아내는 육아 문제에 관하여 남편을 떠올리고 마음 속으로 그런 물음을 물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제게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시잖습니까? 제가 세상에 있는 것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라고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제가 사는 것이 아니요 제 안에 계신 주님께서 사시는 저의 삶이잖습니까? 어떻게 할까요? 제가 오직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방향으로 저를 인도해주십시오" 하고 사사건건 아뢰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일을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반드시 주님께 여쭈어보고 그 뜻을 따러 행할 일이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은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던 의미와 똑같은 것이다. 주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하셨는데 나 역시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음이다. 이것은 엄청난 의미이다. 아버지께서 함께 계셨음은 결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었으니,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올 것인데 이미 왔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하신 것과 같다.

아무개가 그 육신으로 나와 함께 있음과 똑같은 의미와 모양으로 함께 계심을 뜻하심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말씀을 일부러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 자신을 위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장차 주님과 하나되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하게 될 때를 염두에 두시고 우리를 위하여 남기신 말씀이라고 보아야 옳다. 따라서 나도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하게 됨이다. 때문에 바울도,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신다" 한 것이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가리켜 진리라고 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진리"라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시하여 세상 모든 종교 역시 하나로서 뭉쳐질 수 있는 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모두가 한 진리일 때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두고 그렇게 주장할 때는 반드시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를 말하지 못하는 이상 그 주장이 아무 근거 없음을 그 스스로 입증함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는 무엇이라 스스로 인정하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그리스도보다 나은가? 낫지 않은 다음에야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자격이 있다고 하는 천하의 어떠한 자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이미 그리스도 친히 그런 말씀을 앞서 선언하신 이상, 그렇게 말씀하신 바를 진리가 아니라고 입증해야 하는 것이 선결 과제다. 그리고 입증하였으면 진리가 아니라고 따돌릴 일이지 모든 진리는 하나라고 하는 그 범주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끼워 넣지는 못한다.

진리이면 진리이고 아니면 아닐 뿐이지 세상 종교와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이니 왜냐면 '내가 진리'라고 이미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렇게 선언하신 다음이므로 그리스도만이 진리이고 그들 모두는 진리가 아니라 반(反)진리라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들 스스로 진리는 하나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리라고 치부하였으므로 그런 결론이 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리라고 인정해주었으면 그 그리스도께서 내가 진리라고 하셨으니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진리가 아니라고 자인하는 꼴이 되기에 그렇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진리"라 하는 것과 "내가 곧 진리라" 하는 것은 의미가 아주 다르다. 전자는 세상 종교를 만들어낸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오직 그리스도밖에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종교의 창시자들은 피조물 인간이므로 인간은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 양심상 차마 자기 자신이 진리라고는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렇게 말할 자가 생길지 모르나[가령 적 그리스도] 이미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선언하신 다음이므로 나중에 그렇게 말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가짜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로써 그 스스로 가짜임을 증명하는 꼴이 된다. 고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가 아니든지 진리이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니 그 하나만 놓고 따져도 충분히 판단될 일이지 다른 것을 개입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다른 어떤 세상 종교와도 같지 않아 한 묶음으로 취급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이냐, 아니냐 하는 그것만 논할 일이다. 이 말을 하는 까닭은 "내가 생명이라"고도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진리라" 하는 것도 무엇한데 "내가 생명 그 자체"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말은 합리적인 사고력을 상실한 광인만이 혹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두고 그렇게 광인이라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께 대한 정보와 증거는 그에 대한 기록 곧 성경빆에 없으니 이는 성경 자체의 진실성에 대한 논의로 자연스럽게 옮아간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진실성은 그 어느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 내용 스스로가 자체 증명하고 있다는데 있다. 즉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보내어 그리스도를 포박해 오라고 했더니 그냥 돌아와서는 하는 말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일찍이 본 일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 말씀 자체에 위압 당하여 그냥 돌아온 것처럼 성경 자체가 바로 그런 진실로서의 권위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음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생명"이라 하셨는데, 생명이 무엇이냐. 성경대로 하면 아니, "내가 생명"이라 하신 이 말씀대로 하면, 존재하는 것을 생명이라 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지 그 존재하는 것 자체가 생명은 아닌 것이다. 영원한 불 못에서도 존재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존재들을 두고 생명을 누린다고 말하지 않음과 같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도 살기만 잘 산다고 할 것인가. 어찌 그리스도께서 생명이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소리다.

그것은 생명이란 말 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일시적으로 살다가 그냥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인 생명, 생물체이니까 생명이라 하는 것뿐이지 영원하지 않는 것은 인간과 관련되어서만은 성경에서 생명이라 하지 않는다. 단순히 존재한다고 해서 생명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것은 생명은 반드시 생명의 낙을 누리는 것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낙을 누리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만을 두고 생명이라 하지 않는 것임은 명백하다. 생명이 생명의 낙을 누리는 것을 말하기는 하되 어떤 때는 그리스도의 경우처럼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수도 있다 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30여년 간 사시면서 그렇게 고난 받으시는 삶이었지 그 후로는 부활하셨고 지금은 영광 가운데 계시므로 최소한 그런 고난은 이 세상에 위치해 계실 때로 한정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즉 생명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영원하지만 단 이 세상에서는 고난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고 결론을 내려도 무방하다.

왜냐면 그렇게 고난의 삶을 사시면서도 "내가 생명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시장하셔도 목마르셔도 길을 가시느라 피곤하셔도 그것은 고난의 영역이요 죽음의 범주에 속한다. 생명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 고난을 받으셨는가 하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까닭이다. 고로 생명은 사랑과 직결된 것 역시 분명하다. 아무리 살아도 그리고 오래 살아도 행복하지 않으면 사는 보람도 의미도 없는데 사랑이 있음으로써 그 행복의 토대가 되는 것인즉 사랑과 불가분임은 여기서 새삼스럽게 논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내가 길"이라 하셨다. 이것은 "내가 진리"라고 하신 말씀과도 같은 맥락으로서 길은 한 길뿐임이니 그 길을 따라 가야 진리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그런 길은 하나뿐이요 따라서 진리도 하나뿐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하나뿐이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도 진리도 하나이므로 생명은 진리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방법이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정리한 대로 그리스도만이 진리이고 생명이고 길이시고 그 외에는 없고 만일 있다고 나서는 자가 있으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요 속이는 자로서 진리가 그 속에 없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과 세상 종교는 물과 기름 사이로서 절대로 하나로 융합할 수가 없으니 빛과 어두움의 차이요 생명과 죽음처럼 별개이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생명을 영접하는 것이요 누리는 것이나, 지키지 않으면 생명을 걷어차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면 생명이고 순종 않으면 죽음이다. 이렇게 명확한 이분법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생명이 없다.

그 하나뿐인 길을 따라 걷지 않으니 즉 하나뿐인 방법대로 살지 않으니 그렇다. "내가 길이라"는 말씀은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가리키심이다. 삶의 방법과 목표를 말씀하심이다. 구원이란 생명 얻는 일인데 생명을 스스로 마다 하는데 즉 생명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지를 않는데 구원이 있을 턱이 없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은 생명을 그만큼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다.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것은 생명의 도리를 남에게 알리는 일이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에 대하여 열심 내는 일이니 그런 사람에게는 생명은 따놓은 당상 격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는 그리스도 친히 부인하실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의 뜻은, 생명을 부정하는데 생명이 그에게 가까이 할 수가 없다는 그 이치다. 생명을 부끄러워 하는데 생명이 그에게 좋아라 하고 달라붙을 까닭이 없음이다.

무슨 보물이든 또는 물건이든 또는 사람이든 그것 혹은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 그 물건이나 사람이나 속하게 되어 있다. 싫어하는데 거기 가까이 하려 할 이유가 없다. 왜냐면 가까이 하더라도 그것을 지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므로 반드시 조만간에 내다 버릴 것이기에 그렇다. 모름지기 생명은 그 가치를 진정 아는 자에게 돌아온다. 그 가치를 아는 자에게 그 소유로 남는다. 그 가치를 아는 자가 차지하는 법이다.

어떤 경우에든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에게 생명이 붙어 있을 리 없다. 이는 자살하는 경우와 같다. 천국은 침입을 당하게 되어 있고 침입하는 자가 빼앗게 되어 있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 스스로 달려들어 모든 난관과 장애를 밀어붙이고 직접 자기 손으로 움켜쥘 만한 것이 천국이요 생명이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하 없어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이시다. 다시 말하면 주체할 길 없이 넘치는 폭발력이 생명력이라 할 때 그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폭발의 힘은 반드시 그런 식으로 천국을 차지하도록 만든다는 그런 얘기가 된다. 이 생명력이 다름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말씀이시다. 고로 이런 폭발력이 없으면 그것은 생명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가짜이다. 진품이 아니므로 제대로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함이다.

속은 것이다. 구원인 줄 알았는데 구원이 아니라는 그 얘기다. 구원 받은 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속은 것이다.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음이다. 성령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다. 고로 자기의 구원이 진짜냐 가짜냐 그 여부를 가리려면 천국으로 밀치고 들어가려는 그래서 자기 손으로 빼앗아 움켜 쥐려는 그런 자세가 현재 되어 있는지 여부만 살피면 되는 일이다. 물에 물 탄 듯 하는 그런 자세와 상태로는 절대로 천국으로 밀치고 들어갈 힘이 없다는 증거다.

자기의 구원이 진품이 아니고 가짜라는 증거다. 믿음으로 은혜로써 얻는 구원이라니까 그리고 이렇게 믿게 되는 것도 택하심 받았기 때문이라니까, "나 같은 인간도 이렇게 구원 얻게 하시니 참으로 신기하다, 이거 웬 호강이냐" 하고 그냥 세상 살다가 슬그머니 천국 갈 줄로 아는 사람은 사기에 걸려도 보통으로 걸린 것이 아니다. 사기를 친 자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세상 신(神)인 마귀 사탄이다. 이런 마귀의 주구 노릇을 하여 그런 식으로 속이는 거짓 사도들이 세상에 넘쳐 나고 있다.

사기꾼을 원망할 필요는 없다.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에게만 사기꾼이 달려드는 법이다. 마귀는 인간이 아니라 영이기 때문에 누가 그렇게 어리숭하게 보이는지를 다 안다. 다시 말해 성경을 제대로 그리고 열심히 읽지 않는 사람이 바로 그런 궁색이 질질 흐르는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단박에 이 세상 신의 눈에 띄는 법이다. 자기 스스로 불러들인 꼴이 되어 있으니 누구를 탓하리요. 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된 것도 자기 탓이었기에 사탄과 마찬가지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었던가.

스스로 생각해도 내 자신 하는 일이 너무 기가 찰 일이 아닌가. 왜 자기 운명에 달린 문제를 남의 손에 맡겨 두고 있다는 말인가? 왜 내 운명이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말인가? 왜 그가 하라는 대로 해야만 된다는 말인가? 과연 저 사람이 가르치는 것이 진실인가 하고 성경을 들여다보고 확인해 보려는 그런 열심도 없는가? 어찌 사기를 당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렇게 게을러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제대로 하겠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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