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0일 목요일

(37)

잡록(雜錄, miscellanea)
--------------------------------------------------------------------------------------------------------------------------- 


§ 시종일관 고난 받음을 강조하는 복음의 특색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실로 하나님의 거짓없는 말씀 그 자체임을 입증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박해의 대상이 되는 사실을 강조한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 어느 종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없다. 이런 깜짝 놀랄 일이지만 그동안 세상의 눈에 감추어진 것은 사탄이 그리스도 복음을 가장한 종교 집단을 만들어 그것을 세상 앞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꾸며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 집단은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대로 세상 권력 위에 군림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교회의 이같은 고난의 측면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이라면 시종일관 하나님의 뜻이 교회의 고난에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거짓말로 꾸며낸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고난을 말할 리가 없다. 세상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오히려 치장했을 일이다. 그래야 그 거짓말을 하는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종일관 고난 받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려놓으면 아무도 그런 거짓말[성경을 거짓말이라 가정한다면]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믿도록 유도하는 것이 그 목적일진대 이는 당연하다. 진실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이 세상에서의 무자비한 고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으려 할 것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리스도 복음의 진실성 규명을 다른 데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 바로 이 고난 받음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시종 고난 받음을 역설한 데에 있다. 교회의 이 고난 받음은 그렇잖아도 세상에서 멸시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새 창조[인간]의 바탕으로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 역시 그 새 창조의 일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탄이라는 악령의 존재를 부각시키면서 그 사탄과의 전쟁의 일환으로 교회가 끝까지 고난 받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다.

세상 종교로서 지어낸 거짓말로서 진실이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꾸밀 리가 없다. 그것은 이 세상 악마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고 어찌 보면 그 세력을 하나님만큼이나 강한 것으로 오해하도록 만들 소지가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지배자인 사탄의 충동으로 끝까지 교회가 증오와 박해의 대상이 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세상의 안목으로 볼 때는 패배주의다. 이런 패배주의를 누가 환영하고 목숨을 걸고 믿으려 할 것인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런데도 초대교회 이후 그리스도의 복음은 들 불처럼 번져 갔다. 때문에 사탄은 할 수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체하는 가짜를 내세워 거대한 종교 집단으로 만들어 이 세상에 군림하도록 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박멸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타락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데에 한 몫 하도록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무신론을 촉발시켰다고 할까. 사탄은 이렇게 무신론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한 종교집단으로, 양면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공략해온 것이다.

이 세상 역사의 무대는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탄과의 싸움이 그 핵심이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물리적으로는 사탄에게 항상 일방적으로 당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그려지고 있다. 약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 구원 즉 인간 새 창조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이다. 이것을 어느 평범한 사람이 믿을 것인가. 어느 거짓말쟁이가 이런 거짓말로써 자기 목적을 달성하겠다고 이런 거짓말을 지어낼 수 있겠는가, 감히 지어낼 엄두를 내겠는가.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실로 하나님의 진실된 말씀임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 중의 하나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고 해도 좋다. 어느 인간이 고난 받기를 자청하고 이런 거짓말[성경이 그들의 주장대로 지어낸 것이라면]을 믿기로 하고 나서겠는가. 교회가 잠시 한 때만 그렇게 고난의 표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런 대상이 된다고 하겠는가. 바울이 당장 주님께서 재림하실 듯이 그 편지에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성경의 특성에 대해 무지한 탓이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졌다는 것은 그 안에 일정량의 예언도 포함되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로 바울이 마치 자기 살아 생전에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듯이 기록한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으로서 예언인 것이다. 앞으로 이루어질 일이지만 그것을 예언으로 기록하다보니 그렇게 마치 그 당시에 임하시듯 하는 문체와 문장으로 묘사되었을 뿐이다. 어쨌든 오늘날까지 이천 년 넘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지탱해오면서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은 역사가 없다.

때로는 세상에 영합하여 세속화함으로써 세상의 핍박을 면한 예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세상의 박해를 아니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일부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였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니 이는 전쟁 용어로 말하면 적에 대한 투항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교회가 세상에서 따돌림 받지 않은 예가 없다. 잠시 부흥하더라도 곧장 핍박과 환란이 교회를 맞은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미리 말씀해두신 그대로이다.

그리스도 교회의 고난은 단순히 사탄과의 싸움 때문이기도 하고 또 사람들 살리는 일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이유도 있지만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이요 파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이니까 죽음의 고난 일색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일관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런 것을 거짓말로 지어낸다면 그 속이는 자는 무슨 소득이 있기에 이런 거짓을 꾸며댈 것인가. 사탄은 당연히 이 세상을 인생 삶의 본고장, 생명의 터전으로 속이려 드는 것이야 뻔하다. 이것은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서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내게 넘겨준 것인데 내가 원하는 대로 준다"고 유혹한 것과 같다.

인간이 이런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육체를 쓰고 있는 것 자체가 죽음이다. 이런 육체이기 때문에 죽음 역시 일정하지가 않고 태어나자마자 죽는 인생도 있고 한창 나이에 죽기도 하고 아직 철도 들기 전에 죽어가기도 하는 것이니 불안 그 자체이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불확실하기 짝이 없다. 점을 칠 것인가, 사주 팔개자를 보고 점성술사를 찾을 것인가. 비록 그렇게 하더라도 짧은 수명을 연장할 재주는 인간에게 없다.

그나마 살아 생전에 행복한 것도 없고 있다 해도 잠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에 몰두하여 전 생애를 거의 다 소모한다. 그 무엇인가도 지나놓고 보면 별 것도 아니다. 어릴 때는 공부에, 청소년기에는 사춘기로 보내고 짝을 찾기에 바쁘고, 그러다가 가정이나 이루면 식솔들 먹여 살리느라, 아이들 공부시키느라, 아들딸 장가 시집 보내느라 한창 시절 다 보내고, 그러다 보면 힘 떨어지고 의기소침하고 자식들에게 냉대 받고 그러다가 아차아차 하는 사이에 죽음을 맞는다. 죽음을 맞아도 준비없이 얼떨떨하게 맞는다. 죽음을 맞는다기보다 별안간 끌려간다는 표현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 고난 받음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시험에서 무너지고 넘어지는 직접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인 까닭이다. 사탄의 시험의 본질이 3위1체 원리에 의한 생명과 사랑의 법칙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되는 이치로서의 자기 부인 외에 바로 이 세상 사랑에 그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러한 내용은 이미 처음 범죄할 때 여자가 사탄이 가리키는 대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창 3:6]고 인식한 데에서부터 드러난다.

바로 그것이 세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시험의 성격과 그런 시험에 넘어가는 이유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서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요일 2:15-17] 함과 같다.

아담 역시 여자 앞에서 바로 그런 광경을 목도한 것이다. 여자가 맛나게 씹어먹고 있는데다 역시 그 과일이 봄 직하고 탐스러웠다. 무엇보다 눈앞에서 남자를 먹도록 권[유인]하는 여자의 자세가 더욱 사랑스러워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는"[롬 1:25] 시초가 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 역시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는 것임에는 차이가 없다. 사탄이 그런 예다. 그런 아름다운 피조물을 만드신 하나님이야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신 아름다움의 근본이실 줄은 미처 생각이 돌아가지 않는 허물이 완연하다. 세상 사랑 역시 피조물 경배요 섬김인 것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허락하심이 없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므로 변함이 없다. 우리를 박해하는 피조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하는 일을 허락하실 리 없고 참새 한 마리도 허락하시지 않는 한 땅에 떨어져 죽는 일이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된 신분인 우리 각 사람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다 세시고 있다. 바울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느라 여러 가지 박해와 시험을 받았는데 그 중에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으면서도 그 복음 전하는 일을 결코 쉬지 않았으니 자기를 미워한 것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절대로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우리 각자의 몸에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죽을 때 죽고 고난 받아야 할 때 고난 받는 것이 참 사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참 사는 일의 한 부분이다. 사는 것에는 단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쓴 것도 있다. 영원을 통해 그런 것이 되풀이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통하여 그런 구분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비록 이 죽음의 세상에 있어도 이미 구원을 받아 생명 있는 자가 되고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어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산 자로서 이러한 생명의 양면성 가운데 그 어두운 면 즉 쓴맛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이 쓴 맛의 부분은 이 세상에 한한다. 영원한 세계에서는 자취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는 것으로 착각하여 주님의 일을 할 시간과 때를 허송세월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일을 하여야 할 때 세상 일에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관심은 마음이요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고 즐기는 것이 그에게는 생명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거쳐야 한다 하셨으니 인간적으로 보면 험난한 하늘 길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 은혜로 얻는 구원이라고 수월하고 간단하게 생각함은 큰 착각이다. 구원 받는 이치야 그렇게 간단하고 쉬우나 그 구원을 유지하고 끝까지 지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그 '믿음'과 '은혜'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문제다. 한번 믿었다고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그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다.

그 믿음, 그 받은 바 은혜를 지키는 것이 내게 달려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내게 달려 있기 때문에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한 것이다. 내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그런 말을 아예 처음부터 할 리가 없고 다만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니까 그렇게 알고만 있으라는 정도의 말씀만 있었을 것이다. 이상 말씀처럼 천국에 들어가는데는 많은 환난을 거쳐야 하는 것을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환난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은 그 환난을 피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그 뜻이다.

피하려면 자연 믿음을 철회하거나 자기가 믿는 주님을 부인해야 하는 것이다. 부인해도 일단 자기가 구원 받은 것만은 확실하니 그 구원은 변치 않는다고 망상에 젖어 있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하고 나를 시인하면 나도 시인하리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천국은 쳐서 빼앗는 것이라 하셨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것이고 쳐들어가는 자가 폭력으로 강탈하는 것이란 말씀의 뜻이 바로 그 여러 환난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믿음으로 그 받은바 은혜를 보존하는 것을 말한다.

고로 믿음은 자기 자유의지에 속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 선물이다.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유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믿는 자는 즉 누구든지 믿어야 구원 얻는다. 선물로서의 믿음은 있다. 그것은 "은사"[은사나 선물이나 영역으로는 "gift"]로서의 믿음이다. 즉 교회적 차원에서의 봉사를 위한 남달리 믿음의 선물을 주셔서 각종 능력을 '행하게' 하시는 그런 믿음이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철저히 자기의 몫이니 이를 혼동치 말아야 하는 것이다. 심판 때에 주님은 [그  비유에서] 분명히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시는 말씀을 하시고 있다[마 7:23].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으니 그들을 모르실 리 없다. 그러나 모른다고 부인하시는 것이다. 이는 알면서도 모른다는 거짓말이 아니라 "네기 나와 전연 관계가 없다"는 말씀이시다.

붙잡혀 욕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와 전혀 관계 없음을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당하시는 모든 것이 "성경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여 그대로 순응하셨듯이 우리 역시 이런 모든 환난과 고난과 죽음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되어가는 필수 과정인 줄 알고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이" 할 일이다. 베드로의 말처럼 놀라지 말 것이며 당황하지 말 것이다. 천국 가는 길이 그런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냥 편안하게 천국 가려 한다. 얼마나 성경에 무지한 것이냐. "성경에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했는데 그런 지혜를 무시하니 무사하게 천국 가기 바란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불가능하다. 이것은 우리 노력으로 구원 얻는 것도 내 힘으로 천국 가는 것을 말함도 아니다. 다만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함에서 오는 불찰이요 혼돈이다.

믿음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믿음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 하겠는가. 믿음을 하나님 주시는 선물로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이루어놓으신 구원을 내가 믿고 내가 지켜야 하는데 지킨다는 말의 배경에는 갖가지 장애와 방해와 난관에도 불구하고 믿는다는 의미다.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내가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그것을 내가 구원 얻기 위해 힘쓰고 애쓰는 것이라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점을 혼동하는 이 많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내가 믿는데 그 믿음을 지키려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니 그 믿음을 내가 부정하고 버리면 그 믿음은 다시 있지 아니하니 구원 역시 똑같은 모양으로 버림을 당한다. 구원이 자동적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누구에게나 저절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란,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셔서 나와 영원히 함께 사시는 것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둘이 되는 관계에서 필수적인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없이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삶의 낙이 아닌 고통이다. 생명이 아닌 것이다. 고로 믿음이란 그 결과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당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는 숨길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 이 속성을 나타내지 못할 때 그것은 단적으로 믿음이 없다는 증거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가. 바로 그 의미이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거저 주시는 것이라 해서 수동적으로 피동적인 것이라 착각하는 이가 많은데 이는 큰 오산이다. 사랑으로 직결되어 있는 관계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양상을 띠는 것이다. 그것을 천국은 침노 당하고 쳐서 빼앗는 것이라 묘사하신 것이다. 구원을 얻어놓고 그 믿음을 지키는 것과 구원을 아직 얻지 못하고 그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그 결과를 놓고 볼 때는 비슷한 것처럼 보이나[그 결말이 구원 자체이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차이는 아주 현저하다.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 받은 모든 특권과 은전을 그대로 향유하는 것이다. 향유하는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사랑을 지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자유의지만은 홀로 독립적이니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나의 소관사요 내 몫이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전혀 그런 것이 없다. 그런다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상황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니 내가 내 자유의지로써 그런 고난과 죽음을 무릅쓰고 나간다는 것만 내가 취할 행동이지 실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온갖 능력은 내가 이미 구원 얻은 그 사실에서 오는 풍성한 은혜와 능력 그대로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움직이겠다는 의지는 내게 있으나 실제 그 의지대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은 내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구원 얻음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공급 받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이런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이 고난의 나그네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구원 받은 상태에서의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 고난을 경감해주시거나 그 과정을 단축해주시거나 하시지는 않는다. 그 전 과정을 이수토록 하시되 함께 하심으로 한결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시지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도 아니다] 수월하게 하시고 견디기 어렵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않으신다"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도 오해하는 이가 많다. 육체인 인간의 경우를 빗대어 생각하기 때문에 그르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아들이란 것은 육체적인 것이므로 일단 낳아 자식이 되면 그 아들되어 있는 사실이 영구불변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아들된 것을 오해, 착각하는 것이다. 주님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외아들로 계시는 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그런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친히 당신 자신으로부터 아들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된 구조로서의 새 피조물됨에 있는 것인즉 어디까지나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이 교제가 무너지면 내가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가 되므로 이는 다시 말해 내가 나의 구원을 즉 하나님의 아들됨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아 무효화시키는 행위로 직결된다. 그러므로 철저히 나의 행위에 따라 얼마든지 그 상황이 변할 수 있고 달라질 수 있다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만 국한되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만 국한한다고 해서 그러면 천국에 가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관계없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살 인간 같으면 그 속성이라 할까 본성이라 할까 하는 것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다. 고로 천국은 그렇게 충분히 솎아낸 이들만 들어가는 곳이다. 우리가 많은 환난을 거쳐야 하는 이 과정이 어느 측면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을 가려내고 솎아내고 추려내고 걸러내는 구실도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주님의 남으신 고난을 주님과 함께 마저 채워 나가는 측면이 주류를 이루나 그런 부차적인 의미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다 걸러지므로 천국 가서 사탄과 같은 그런 난동을 부릴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런 측면에서도 우리의 이 세상 고난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희망, 역경을 견뎌야 하는 어려운 환경에서 이처럼 좋은 말은 없다. 성경에 말했듯이 농부는 가을의 추수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땀흘리며 일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고생하는 어머니도 아이들을 통해 장래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모든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견뎌 나간다. 주님께서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 고난을 참으셨다고 한 대로, 구원 얻을 모든 사람이 구원 얻어 행복하게 살 것을 미리 바라보시는 즐거움이었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모든 노력 역시 그런 차원에서 힘을 내고 용기 백배하여 주님의 일에 임할 일이다.

개인적인 구원에만 이기적으로 한정해서 생각을 하니 힘든다고 생각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 일을 위한다고 생각할 때 아무리 역경이라도 힘은 절로 나게 마련이다. 자기 구원에만 급급해하는 이들은 절대로 구원되지 못하고 구원 받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다. 그런 이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는 의미다.

자기 구원에만 머무는 것은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주님 말씀하신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 달란트를 땅에 파묻은 결과이니, 스스로 있다고 생각된 그 한 달란트마저 결국 남에게 빼앗기는 결말이 된다. 천국 건설을 위하여 일하는 자, 가을 추수를 바라고 농사 일을 고되다 하지 않고 쨍 볕에 나가 일하는 농부, 모두 그 일하는 보람이나 즐거움은 같다. 부지런히 일하는 그 부지런함은 같은 것이다.

"앞에 있는 즐거움은 위하여" 십자가 고난을 참는 우리는 그 "참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즐겁게 지내도록 즉 삶의 즐거움을 누리는 존재로 만드셨다. 비록 이 죽음의 세상에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통을 당하는 이 시점에 겪는 고난이지만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전단계 조처로 맛보는 고난인 줄 알고 변함없이 삶의 낙을 누리는 차원에서 이 쓴맛을 맛보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세상 낙을 즐기는 것은 멸망뿐이다[딤전 5:6].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쉽게 말하기도 하고 그런 노래를 지어 즐겁게 부르기도 하나 과연 진정 사랑할진대 과연 그런 말을 하는 나의 위치가 현재 어디일까. 주님께서는 지금 영광 가운데 편안하게 계신다고만 착각하지나 않는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씀처럼 지금 주님께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과 더불어 고난 가운데 계신다. 사울이 교회를 무차별적으로 무자비하게 박해할 때, 주님은 "네가 왜 내 교회를 핍박하느냐?" 하시지 않고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다.

주님과 교회가 한 몸의 원리 안에서 하나일진대 이는 당연하다. 오늘날도 주님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깨어 기도할 수 없더냐?"이다.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이지 말로써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삶 그 자체이니까. 사랑이 삶 자체이지 못할수록 즉 순수하지 못할수록 그것을 의식적으로 나타내려 하는 법이다.

진실한 사랑은 말이 필요 없다. 마음과 마음으로 이미 다 통하고 있는 사이니까. 구태여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주님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내 백성처럼...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利慾>을 따름이라"[겔 33:31] 함과 같다. "자기만 배불리는 이스라엘 목자[牧者]들은 화 있으라!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목자가 없으므로 양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는구나...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다"[/34:5].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피차간에 대하여 목자 역할이다. 가령 북한 땅에 단 한 형제라도 고난 가운데 있다면 그 한 형제를 인하여 전세계 모든 형제들이 그가 받는 고난 때문에 그 고난에 함께 동참하여 결코 안일 가운데 있을 수 없는 것이 한 몸으로서의 하나 된 당연 이치이다. 하나님께서 강한 혐오감을 나타내시는 것을 다음의 대목이 잘 증언해준다.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아모스 6: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랑하여 기꺼이 순종함에 있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뻐함에 있고 인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데 있다. 순종함이 없이 제아무리 소리 높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외쳐도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요즘 교회에 가보면 그래도 건실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곳도 마찬가지로 예배할 때 시끌벅적하는 악기들을 들여놓고 귀가 째질 듯한 굉음으로 소위 복음성가를 불러대는 것을 자주 대하게 된다.

기가 막힐 일이다. 그 자리에는 진리를 탐구할 목적으로 혹 불신자도 참석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런 분위기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귀신 소굴 미치광이 집단 속으로나 잘못 들어오지 않았나 하고 도망치듯이 교회당 문을 나설 것이 아닌가. 그리고 교회에 대한 인상을 아주 영원히 구겨놓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을 당자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명색으로 시작한 것이겠지만 본말전도도 유분수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 '나타낸다'는 의식 있는 행동보다 오히려 삶 가운데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움이 불신자들로 하여금 더한 매력을 느끼게 하고 그리스도로 나아올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성경 말씀이 언제 어느 곳 어떤 경우에서나 우리 마음에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질 정도로 돼 있어야 한다. 그리 되자면 성경을 늘 읽고 또 읽은 그 말씀을 조용한 시간에 묵상하는 등의 부지런이 필요하다. 마르다처럼 아무리 명분이 선 일이더라도 이것저것 하느라 바빠서 마리아와 같은 "그 제일 좋은 것을 택하여 누리는" 자리에 한 번도 끼일 수가 없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다.
 

주님의 죽으심을 짊어져야 주님의 생명 나타나     

우리가 구원 받음은 하나님의 아들됨이요 아들됨은 아버지의 상속자됨이니 이는 만유의 주인으로서 아버지의 일이 곧 자기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 살리는 일에 전념하는 때가 이 세상이다. 그런데 사람 살리는 이 일은 인간의 생명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은 그의 죽으심을 짊어져야 가능함을 바울은 교회에 보낸 그 편지에서 분명히 밝혔다.

"우리가 항상 예수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고후 4:10,11]이라 한 것이다. 우리의 죽을 육체에는 아무런 영적인 생명도 없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아니고는 이 육체는 무의미한 것이다. 오직 주님의 모습을 따라 희생제물로서의 의미가 살아 있을 때 생명을 낳는 위업을 성취할 수 있다.

고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생명이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음"[빌 1:29]으로써 사람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의 일군들은 명심할 일이다. 고난 받음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이 없이는 구원의 역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고난 받는다는 일념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누릴 것 다 누리고 다 맛보고 챙기고 한 다음 그 여력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땅치 않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도 잘 살면서 천국 간다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다. 실상 그런 식으로 나가면 언제 이 세상을 복음화하여 땅 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루겠는가. 당신이 여전히 그런 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복음화는 이루어지더라도 당신은 "예복"[마 22:12] 입지 않은 자로 취급되어 제외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사람 살리는 일은 되지 않는다. 농사 짓는 사람이 그 농사 짓는 법대로 지어야 가을에 추수를 할 수 있다. 모든 일이 다 그러하다. 일치고 그렇지 않은 일이 없다. 사람 살리는 일, 즉 주님의 일하는 것도 그 하는 방식을 따라 하는 법이다. 주님의 방법은 바로 십자가의 방법밖에는 없다. 안일하게 편안한 마음으로 복음만 전하면 된다고 아예 생각하지 말 일이다.

잘못하면 그것은 사람 살리는 일이 되지 못하고 사람을 속이고 결국 멸망케 하는 일이 된다. 말씀을 따라 일해야 결실을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하여 결과가 없으니 사람들로 거짓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사탄이 즐기는 속이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주님의 경고는 언제나 명백하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도리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각자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이 경고는 너무 명백하여 연거푸 설명할 필요조차도 없는 표현으로 되어 있다. 비유 말씀도 아니다. 단도직입으로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얻는다. 이것은 구원 얻는 행위로 또 착각하지 말 것이다. 이것은 구원 얻은 다음의 당연 결과인 하나님의 일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은혜로 구원 얻는 일에 적용되는 비유로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다가 왕의 잔치 자리를 채우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과 그리고 그렇게 반 강제이다시피 초청 받아 들어온 사람들의 마땅히 할 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짐을 알아야 한다. "예복"이란 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 미워함이다. "예복" 입는 것은 간단한 일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 미워하는 것은 엄청난 일인데 그렇게 비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려는가. 그 생각부터 잘못이다. 내가 구원 얻는 것도 내 마음대로 내 노력으로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내가 죽는 것, 내 목숨을 미워하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임을 모르는가.

내가 내 힘으로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 믿음의 영역이다. 믿음과 행위를 혼동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다. 내가 죽은 것을 믿는 것이 나의 구원 얻는 믿음이다. 내가 죽은 것을 믿는데 왜 또 죽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자기 목숨 미워하는 것을 엄청난 것으로 생각하는가. 내가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은 별개고 그 믿음 따라 이 세상에서 자기 '죽은' 목숨 죽은 것으로 미워하는 것은 또 별개더란 말인가.

이 세상의 모든 비리[非理] 비정[非情]을 보라     

이 모든 것이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기중심, 자기 집착이 무엇이냐, 자기 목숨을 사랑함이 아닌가. 자기 목숨 자기가 사랑하다보니 최우선 과제가 항상 '자기'다.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는 모든 것은 버리고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려 한다. 이것을 욕심이라 하는 것은 어린 아이라도 다 아는 바다. 모든 악은 자기 집착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런 자기 본위에서는 사랑이란 없다는 것을  모두 경험으로 알지 않는가. 때문에 자기 집착을 버리는 것을 교리로 삼는 종교도 나오지 않았는가.

또 그 결과를 신물 나게 보아오고 있다. 이 세상의 정체가 바로 이 자기중심인 것이다. 나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는 것은 이런 자기란 것이 죽은 것을 보는 것이다. 이것 보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물론 구원도 없다. 죽으면 모든 욕심이 끝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내가 함께 죽은 것을 보는 것이 나의 구원이다. 대신 죽으심이 아니라 나와 함께 죽으심이니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다.

이렇게 후련하게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난 것이다. 주님과 함께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그 자기중심의 내가 또 살아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번 죽었는데 어찌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살아난 것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주님과 함께였음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혀 따다. 별개다. 죽은 것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 육체의 자기중심적인 삶의 죽음이다.

이에 반하여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내가 다시 사는 것은 에덴낙원에 있던 아담의 범죄하기 전의 그 생명의 법질서 지키던 때의 상태이다. 범죄하고 있는 육체와 범죄하기 전의 몸의 차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중심의 삶의 죽음'과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는 삶'의 '다시 살아남'이다. 그런 명확한 구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그대로 즉 이 믿음대로 이 세상에서 나머지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내 목숨을 미워함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근거로 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연속이다. 내가 구원 받기 전에 이 세상 삶을 부정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래서 자기 목숨 미워하라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가능 그 자체일 것이다. 아무도 그런 일을 이행할 만한 인간이 없다. 자기 목숨 버리고 자살하는 사람도 나기 목숨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바 "자기 목숨 미워하는"[요 12:25] 것은 자기 부인을 말씀하심이다.

자기 목숨 미워함은 자기의 십자가 죽음을 근거로 하는 것인데 이 십자가 죽음은 그 후의 부활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즉 죽었으나 다시 살았다는 믿음, 죽으나 다시 산다는 믿음, 죽으나 실상은 죽지 않는다는 믿음, 미워하나 그 미워하는 목숨은 죄의 뿌리인 자기 집착에의 죽음임을 아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자기 자신에게서의 해방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 목숨 미워함이 바로 자기 집착에서의 해방이라는 인식 전환이 그 핵심이 된다.

이 해방은 죽음에서의 해방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죽음에서의 해방이라는 것은 생명에의 진입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것이야 명백하고 자연스럽다. 두 가지를 함께 동시에 의미함이다. 일면만 보고 인식하는 잘못을 범하는 일이 많다. 양면을 동시에 보아야 바로 보는 것이다. 한 쪽만을 치우치게 보기 때문에 이지러지고 균형 잡히지 않은 편향된 주장과 인식만 낳는다. 십자가 죽음은 필연적으로 십자가 죽음에서의 부활이 그 전제 또는 배경이 되어 있다.

부활이 밑받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을 자연스럽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미워하라는 말씀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를 능히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분부를 하실 수 있음이다. 자기중심의 폐해를 너무나 잘 아는 것이 이 세상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승리의 첫걸음이다. 인간 삶의 불행의 장본이 자기 집착에 있다고 결론 내린다면 그리고 이 자기 목숨을 미워함이 자기 집착에서의 자유 해방을 의미하는 것일진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면 건지고 사랑하면 잃어 버린다 하신 것은 마치 그것이 조건이 되어 구원여부가 결정되는 것으로 인식되기 쉬우나 구원 받은 다음의 순종 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구원도 믿음으로 얻는 것이고 순종도 믿음으로 되어지는 일이다. 뿌리는 같다. 고로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 단정하게 되고 이는 구원 얻지 못하는 것으로 낙인 찍혀지게 됨은 당연하다.

그 구원 얻은 믿음으로, 자기의 죽음[자기중심으로 나가는 육신의 죽음]과 부활[더 다시 자기 중심으로 나가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중심으로 나가는 삶-고후 5:15]을 믿어야 하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니 여전히 생활은 자기중심적이고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 하나에 연연하는 것이니 미워할 수가 없다. 이것은 '믿음' 없음이다. 자기부인은 구원 얻는 조건이 아니라 구원 얻은 믿음의 당연 결실인 것이다.

결실이 없다는 것은 나무가 그런 열매 맺는 나무가 아니라는 증거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으로 이미 넉넉하고 든든하고 그득하고 느긋하니까 이 세상 목숨에 하등 미련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미워하게 되어 있다. 죽어도 살고, 죽어도 그것이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인 줄 알기 때문에 자기부인에 대한 위축될 아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탄식(신음)과 고통의 산고(産苦)의 시기(계 12:2)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신음]으로 택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롬 8:26] 하였다. 또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히 7:25]이라는 말씀도 있다.


성령께서 기도하신다 했고 주님께서 기도하신다고 했다. 같은 의미다. 아버지께 아들께서 기도하시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기도하심이다. 사람이시지만 하나님이시므로 그래서 성령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했으니 말하자면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라면 이미 예정되어 있으므로 그냥 구원만 하시면 되는 일인데 이렇게 하나님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실 정도이니 이 사실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먼저 미리 아시고 그래서 미리 택하심이 분명히 나타나는 대목이다.

우리의 자유 의지로 믿고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킬 것을 미리 보시고 모쪼록 그 의지대로 될 수 있도록 미리 선처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하신 주님의 기도가 또 필요하다 했으니 여기서 더 무엇을 말하겠는가. 기도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미리 정하신 하나님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기도하시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기도가 그렇게 급박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것일진대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그렇게 기도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경우라면 우리가 어떻게 감히 기도가 없을 수 있는가.

여기서는 그런 문제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롬 8:22]고 한 대로 지금은 탄식과 고통의 시기라는 것이다. 하나님 창조의 행복과 희열이 넘치는 모든 일이 끝나고 그 즐거움을 영원히 누리기 전의 마지막 창조[새 피조물로 다시 출생하는 인간들로 인해]의 시기로서 영원한 희락에 대비되는 일시적인 고통과 탄식이나마 반드시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이제 앞으로 영원한 생명의 희락을 누리게 되어 있으니 그 전에 그 대칭적인 것으로 되어 있는 고통과 탄식을 일시적이나마 맛보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일부러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것은 아니나 그 하시는 모든 일이 지혜 그 자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역시 하나님의 하시는 일로서 아름다운 것이다. 친히 그 고통을 조물주 하나님으로서 우리 피조물들을 위해 맛보심이 되셨으니, 우리 인간이 아니더라도 다른 모든 피조물이 이 고통에 동참한다는[롬 8:22]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고난을 통해 친히 그 고통에 동참하신 것은 물론이고 지금도 우리를 통해 그러하시다.

고로 지금 이 시기는 우주 전체를 통한 고난의 시기다. 이 사실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이 세상 인간들만이 내 세상, 한 세상이라며 희희낙락할 뿐이다.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도 이 시기가 어떤 때임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에게도 동일한 고통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단지 그들은 미래의 본격적인 고난을 미리 맛보는 극히 절망적인 성질의 것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이 세상 사람들의 무지 가운데의 '철부지'라 할까, 그런 것에 참예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모르니까 철부지 아이들과 같음이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잔치 자리에 가 있지 않고 초상집에 가 있다고 하는 말을 솔로몬의 지혜는 말하고 있지 않는가. 때와 시기를 정확히 볼 줄 알아야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무지 속에서의 환락도 이 세상에서만이라도 환락이라 부를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옛사람들도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했겠는가.

일시 환락이라 생각했던 것도 다음 순간에는 고통으로 되어버리는 것을 너무나 흔히 보아오고 겪고 있기 때문이다. 환락도 잠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대[세상]의 본질이 죽음이요 그 죽음에 딸려 있는 인간고(人間苦)이기 때문이다. 이 새 창조의 기간이 우리 새 피조물로서는 전쟁 기간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이상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불의와의 전쟁, 사탄과의 싸움. 그래서 계시록에도 있듯이 구원 얻는 자는 "이기는 자"임을 분명히 하셨다.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 2:18,19] 함과 같으니, 이 세상은 승패(勝敗)를 좌우하는 결전장(決戰場)인 것이다. 마귀 사탄을 이기고 그 시험을 이겨야 하고 그 지배하의 세상을 이겨야 하는 것이니 세상이 말하자면 사탄의 화신(化身)처럼 되어 있는 격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요 15:19/요일 3:13] 하심과 같다.

요한의 기록에도 보면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사람 곧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역시 세상과의 전쟁에서 세상을 이기는 이김으로써 구원 얻는 자가 되는 것임을 밝히심이다. 우리의 구원이 이 세상을 이기는 것으로써 조건을 삼는다는 뜻으로 또 오해할 필요는 없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연히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관문으로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신 말씀이신 것이다.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가 아니라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 역시 사람으로서의 하나님 아들 즉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의 마땅한 자세 즉 이기는 자로서의 당당한 자세를 나타낼 것을 요구하심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냥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 기계적으로 아들 행세를 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아들답게 사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다.

왕의 잔치 자리에 초대했으니 초대 받은 대로 아무렇게 있어도 쫓아내지 않아야 그런 식의 구원이 된다. 그러나 예복 입지 않았다고 쫓아내는 것을 강조하셨으니 이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초대받은 자답게 처신하는 것을 강조하심이다. 성경이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하게"[살후 1:11] 행하라는 경고를 주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택하심이 "열매 맺게 하심"이라 분명하게 밝히시고 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곧 불의한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이긴다는 것은 전쟁 용어가 아닌가. 반드시 무기를 들고 싸워야 전쟁이 아니다. 우리를 바울은 "그리스도의 군인"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전쟁은 항상 고난을 수반한다. 전쟁은 평화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한마디로 목말라 죽어가는 세상, 죽음의 뱀 곧 독사에게 물려 죽음이 경각간에 닥치고 있는 그런 세상, 병들어 이제는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 무거운 노예의 멍에와 짐을 지고 뼈빠지게 종일 노역에서 허덕이는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구원자 곧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런 실상을 보지 못하는 자는 그 실상을 보도록 한 다음에야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다. 세상의 실상을 먼저 바로 보는 것이 급선무다. 이 세상의 실상은 곧 나 자신의 실상이요 현위치이다.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듯이 나의 이 현재 실상을 아는 것이 급선무다. 모든 것에 앞선 선결과제다.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다 무엇이냐. 모두 그런 실상을 모르는 소치이다. 오직 오는 세계에서의 삶 바로 그것을 위하여 오늘의 이 시간이 있을 따름이다.

내가 어디서 왔으며 왜 현재 이 시간 존재하며 그리고 장차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고 많은 사람이 의문을 내었으나 성경 외에는 그 어떤 해답도 정답일 수 없다. 이 세상은 옛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 살이 하면서 죽을 변을 치르던 것과 같이 사탄에게 노예의 삶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실상을 알아야 자기 자신을 바로 의식하는 것이 된다. 이 세상 신에게는 종 노릇하면서도[그 사실을 모른다] 정작 자유를 주시고 자유의지가 핵심인 사랑을 주시고자 하는 조물주께는 도리어 자유 억압이라고 오기를 싫어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마저 부정하려 드는 이 세상의 무지함이여! 이 노예의 상태를 바로 깨닫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기도하는 것이다. 이들을 위하여 그들의 눈이 띄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의 터전 위에 부지런히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기는 자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동일한 발자취를 주님의 뒤를 이어 따라가는 그 정확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새 창조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되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심으로써 구원하신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아들께서 보내심을 받으심 같이 우리도 세상에 보내심 받은 위치가 되게 하셨고 동일하게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는[히 5:8] 자리에 함께 하게 하셨고 또한 마귀와 세상을 함께 이기는[요 16:33] 자리에 동일한 모습으로 함께 임하게 하신 것이다. 결국 구원 받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 마귀를 이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계 2-3]. 마귀와 세상을 이기는 자가 마귀에게 지고 세상에 넘어가 죄를 짓고[롬 6:1,2] "육신대로 살"[8:13] 수 있는가.

"귀 있는 이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할 것이다"[계 2:7]. "이기는 이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 할 것이다. 귀 있는 이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1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으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1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줄 것이니 그가 철장[iron rod]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할 것이다.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줄 것이다. 귀있는 이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26-29]. "이기는 이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다 . 귀 있는 이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3:5,6].

"이기는 이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할 것이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 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도시[city]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할 것이다. 귀 있는 이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12,13].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할 것이다. 귀 있는 이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21,22].

위에서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라 하신 대목이 눈에 띈다. 이것은 나를 부인하는 자는 나도 그를 부인하고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할 것이라 하신 그대로다. 이런 말씀은 분명히 불신자를 상대한 경고는 아니다. 불신자는 시인하고 부인하고 할 것도 없다.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은 그렇게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를 지켜보신다는 의미가 되는데 불신자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실 리는 만무하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 얻은 것이 확실하면 무조건 하고 그것은 천국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은 사람의 망상이고 사탄의 속임수일 뿐이다. 그래서 성경에 "믿지 않는데 어찌 주님을 부르리요"[롬 10:14] 함과 동시에 "'주님, 주님' 부른다고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이기는 자,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자, 더 분명히 말하면 "육신대로 살지" 않는 자라야 하나님 아들로서의 당당한 자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처음부터 자격 있는 자가 구원 얻는 것으로 또 오해하지 말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드셨기 때문에 그 자격을 묻는 것이다. 자격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 아들되는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먼저 자격이나 요건 등에는 전혀 관계없이 누구든 "믿는" 자, 누구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기로 작정하고 약속하는 자이면 무조건 주신 "은혜"로서 하나님 아들로서 삼으신 것이다. 그 다음에 자격을 묻는 것이다.

이렇게 자격 묻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말할 사람 천하에 누가 있겠는가. 이런 것을 행위로 얻는 구원이니, 믿음으로 은혜로써 얻는 구원이 아니라느니 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것이 바로 주님의 비유 곧 "길거리에 나가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쓸어 와서 내 잔치자리를 채우라" 하는 임금과 같은 것이다. "그래 놓고서는 예복 입지 않았다고 쫓아낸다는 말인가" 하고 불평할 사람이 있겠는가. 똑같은 이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로 삼으신 것은 이름만의 아들이 아니라 그 충분한 능력을 주신 것이다. 그 능력이 바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신가. 그 이상의 완벽한 능력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가.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구원에 관한 한 모든 문제를 깨끗이 해결한 것을 입증한다. 그 이상 증거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바라시거나 우리들 자신이 기대하는 것이거나 간에, 그런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과 행동을 보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천국에서 그런 것을 보기 원하겠는가. 가장 핵심이 되는 하나님의 일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이 세상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는가. 당연히 이 세상에서의 순종 여부, 믿음 지키는 여부가 시험 대상이 됨은 당연하다. 은혜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 하나님의 결정이 옳다는 것, 결코 그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증명하는 것이야 백 번 타당하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그런 시험의 대상이 되는 일없이 무조건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시는 것이 은혜가 아닌가" 하고 오해하는데 생각해보라, 순종치 않는 아들, 거역하는 피조물, 또는 순종하지 않고 뜻대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묵과하는 것이라면 에덴에서 사탄은 왜 그 범죄로 멸망이 예정되어 있고 아담은 왜 그 곳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었느냐 그것부터 해명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을 그렇게 억지로 해석하여 스스로 멸망에 이르지[벧후 3:16] 않도록 "조심할"[고전 10:12] 일이다. 위에서처럼 구원 얻은 자를 "이기는 자"로 표현하고, 표현 정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이기기를 요구하시는 것 자체가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자격 유무를 따지는 말씀이신 것이다. 당신께서 고난을 통한 순종으로 온전하게 되셨으므로 우리 또한 그렇게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는 말씀이 바로 그러하다[히 5:9]. 명백히 하나님의 뜻임이 이로써 확증된 것이다.

내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건재해 계시는데 그렇게 요구하심은 당연하다. 이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나의 믿음 문제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으면 사용하게 되어 있고 없으면 자연히 사용하지 않게 되어 있음이니 그래서 결국 믿음이 없어 즉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위의 사실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창조에 의하여 하나님 아들 삼으시는 과정이 그림같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문자 그대로 그림같은 묘사다. 에덴낙원이 영계이고 이런 자연계가 아니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처음에 이 자연계의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을 만드시고 다시 그 코에 숨을 내쉬심으로써 영혼을 만드심으로써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다. 이 자연계는 그런 영적 존재가 살 곳이 못되는 것은 그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시한부이고 영원히 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람이 영적 존재가 되니 더욱 그러하다.

고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계가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에덴낙원을 지으신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신령한 것으로 변환되어 있던 인간의 몸이 자연계의 몸으로 되돌아와 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신령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선악과를 일단 먹어 그 내용물이 인간의 몸에 들어와 신령한 상태를 자연계에 속한 원상태로 복귀시켜 버렸으므로] 부득불 생명과를 먹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렇게 되면 영원히 인간은 사탄처럼 되어 버리고 그들처럼 구원의 길이 막혀 버린다.

하나님께서 "영생할까 한다" 하신 것은 자연계의 동물들처럼 본능으로 사는 그래서 자기중심으로 사는 삶이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상황으로 고착됨을 염려하심이다. 그래서 부득불 자연계로 축출하신 다음 인간들을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시는 방법으로 구원하시려 하신 것이다. 일단 이렇게 자연계로 쫓겨난 이상 철저히 원리원칙에 의하여 우주 만물을 운영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이것을 번복하여 다시 신령한 세계로 인간을 복구시키시지는 못한다.

철저한 일사부재리다. 일사부재리가 아니고서는 법질서 집행 또는 원리원칙에 의한 우주 경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원리원칙대로 척척 돌아가야지 만일 이렇게 하다가도 이것을 뒤집고 저렇게 하다가 뒤집게 되면 그 원리원칙대로의 법질서 집행이 불가능해진다. 언제 번복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느 피조물이 그것을 신뢰하고 그 법질서를 따르겠는가. 그래서 성경에서도 다니엘을 관여하던 다리오 왕이나 세례 요한에 대한 헤롯 왕의 경우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왕의 일언(一言)은 바로 법령이므로 그것을 절대로 번복할 수 없는 것이다. 번복하는 순간 그 왕국은 붕괴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자연계에 돌아온 인간은 현재의 상태로는 즉 지금까지의 기존 질서 아래에서는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 영생할 수가 없다. 새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 새 질서란 것은 과거와 같은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들"로서의 질서이다. 다시 말해 새 창조가 이루어져야 하고 인간은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7일째 일단 쉬셨던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다시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이 새로 창조하셔서 새 사람을 만드시는 작업은 이전과 같지 아니하니 조물주 하나님 친히 피조물의 위치에 영구적으로 서시는 길이다. 한번 자연계로 되돌아와 자연계에 속한 존재가 되어 버린 인간이 영생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상태로는 절대로 신령한 세계로 들어갈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된 근본적 이유가 범죄한 사실에 있는 관계로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는 근본적 치유가 불가피하게 되어 있음이다.

이런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셔서 다시는 죄짓지 않고 다시 말해 자기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애초 사람이 창조되던 동일한 과정을 밟아가는 수밖에 없다. 즉 지금 아무리 인간이 영혼을 지녔다 하여도 신령한 세계에는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는 처지이므로 그 때 당시 자연계의 흙으로 지어져 있던 인간의 육체로만 있던 상태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그 코에 숨을 불어넣어 영혼을 만드신 것처럼 인간 안에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이 계시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받으라 말씀하실 때 "숨을 내쉬셨다"는 사실이 아니,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비슷한 기록이 없고 오직 요한의 이 기록뿐이지만 그 갖는 의미는 이토록 엄청나다. 그렇게 코에 숨을 내쉬셔서 인간의 육체에 영혼을 조성하시고 신령한 세계인 에덴낙원을 지으셔서 거기 거하게 하신 것처럼, 그 신령한 세계에 해당하는 것이 천국이다.
똑같은 과정이요 순서요 진행이다. 그러나 그 때는 에덴낙원에서 그런 불상사를 만났으므로 이제는 천국에서 같은 종류와 성질의 불상사를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아예 이 자연계인 세상에서 그런 과정을 치르고 마무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래서 주님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하신 것이다[요 20:21,22]. 그러므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 하셨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여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없다" 한 것이다[고전 15:50]. 천국은 무엇인가. 무슨 동화에나 나오는 이상향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썩어져 없어지는 것과는 무관하게 영원히 생명의 낙 가운에 살 수 있는 인간을 위한 본연의 삶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정상이기 때문이다. 그 천국이라 일컫는 곳이 정상적인 인간 삶의 본고장인 것이다.

에덴낙원이라는 이름은 이 지구가 존재해 있을 때의 이름이고 이제는 이 지구는 없어져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게 되어 있으므로 이전처럼 그 곳을 에덴낙원이라 이름하지 않고 천국이라 하는 것이라 설명해도 하자는 없으리라. 앞에서 조물주 하나님 친히 피조물이 되심으로써 새 피조물을 만드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나같은 존재 다시 말해 제2의 나 자신을 하나 더 만드시고[아버지께서] 즉 그 제2의 내가 되시고[아들께서] 그 제2의 나를 나 자신에게 '갖다 붙이시고' 하나의 존재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다.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 그 아담의 몸의 신체 일부 즉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것으로 여자를 만드신 것과 같은 과정이기도 하다. 그 때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그 자손들이 나오게 될 것이므로 여자 하나만 그렇게 해서 만드시면 되는 것이었지만, 이 마지막 아담께서는 성령으로 계시므로 그리스도께 절대 복종하리라 약속하는[이것이 회개다] 이라면 누구든지 성령으로 임하시어 새 피조물로 만드시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출생함이다[요 3:6].

혼동하지 말 것은 첫 사람 아담의 경우 육체인 물질이라 그런 인격성이라고는 전연 없어 그냥 기계적으로 그렇게 만드신 대로 존속이 가능하지만, 마지막 아담의 경우 그런 물질로서의 육체가 아니라 성령 곧 하나님 자신이시므로 필수적으로 이 하나됨에는 원활, 원만한 사귐이 그 핵심, 즉 하나됨의 요체가 되므로 이 점을 백 번 강조해도 무리일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죽으심으로 내가 죽었고 부활해야만 할 것을 역시 부활하심으로 내가 다시 살아나 다시 출생하였으니 이는 내 안에 친히 성령으로 오시어 나란 존재의 영원 불변한 한 부분이 되어 계심으로써다.

영혼과 육체 관계와 같은 이중 구조[첫 사람 아담이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이었던 것처럼]요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 체제다. 이렇게 불가분으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니, 내가 죽은 것이요 내가 부활한 것이요 내가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아들됨이다. 이것처럼 명백한 사실이 없다. 창공에 비치는 해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로 되어 있다. 이런 든든하고 넉넉하고 푸짐하고 그득하고 느긋한 배경이 되어 계시니 하나님의 아들답게 이기는 자가 될 수 있고 고난을 통한 순종으로 주님처럼 온전하게 될 수 있음이다.

될 수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탄의 시험의 대상이 되고 이 과정에서 부인하는 자에게 부인으로 갚으시고 시인하는 자에게는 시인으로 포상하실 수가 있게 되심이다. 불가능한 일을 가지고 시험하시지도 않고 요구하시지도 않는다. 충분히 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하시고 오직 믿음 하나에만 달려 있기 때문에 엄정히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당연히 "사람"이다.

사람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 우주에는 없다. 아들 친히 사람이 되어 계시니까 그러하다. 여자의 태를 통하여 인간의 육체를 받으시니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으로서의 하나님 아들이시다. 나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니 또한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데에서 주님이나 내 형제들이나 다 똑같다. 구별이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되셨다.

나는 땅에서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다. 그 차이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하늘에나 에덴낙원에는 있어보지 못하였지만 믿음으로 그 곳에 있었던 것과 같이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하고 가보지 못했다고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믿음이 믿음되기 위해서는 이것이 가장 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상에 보내심 받은 사실은 명백하다.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주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받으심으로써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같음이다. 똑같이 그런 상태에서 세상에 있으니 주님 세상에 계시던 것과 같이 나도 주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그 뜻을 행하기 위해 이 땅에 있는 것이다.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이김에 동참하고 고난을 통한 순종으로 온전케 됨에 동참함은 지당한 결론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아무리 사람으로서의 하나님 아들이지만 첫 창조에서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순종 여부에 대한 시험을 치르고 불합격임이 판명 났던 것과 같이 새 창조로서 새 피조물된 나 역시 그 때 당시 아담처럼 순종 여부에 대한 시험을 치러야 함은 당연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부터 먼저 된 것은 우리의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가 되기 위함이고 또 차후에 우리 스스로 이를 증명하기 위함인 만큼 이런 순종 여부를 가리는 시험 받음이 생략될 수 없는 터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은 그 선악과를 먹는지 않는지로써 가름되었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육신대로 사는지" 않는지의 여부로써 가름된다. 그 두 가지의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즉 자기 부인이 아니면 자기중심이요 자기 집착이다. 또다시 선악과를 먹는 어리석음에 빠지려는가. 그런 사람에게 더 이상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는 없다. 대칭 원리에서 이것이 두번째이자 그 마지막이므로 더 이상 여유라고는 없고 곧장 멸망뿐이다. 하나님의 일사부재리에서 더 이상의 구제는 없다.

첫 창조에서 아담은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고 그 짝이 되는 여자를 지으심 같이 이 새 창조에서는 주님 친히 성령으로써 각 사람에게 그 영원하신 짝이 되어 계심이니 곧 성령을 우리가 영원하신 선물로 받아 모심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단짝으로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다[살전 5:10]. 그리고 첫 창조에서 아담이 영물들인 천사들의 보필을 받은 것과 같이, 오늘날도 여전히 "구원 얻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 한 그대로 거룩한 천사들의 막강한 배경이다.

사람이신 그리스도시다. 부활하신 뒤로는 남녀 개념이 없다. 지금까지의 인간은 남녀로 구분된 육체이나 향후 영원히 그런 구별이 없다. 천사들처럼 된다[눅 20:34-36]. 천사[영물]들은 그런 구별이 없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로써 보완되고 여자는 남자로써 보완되어야 하는 그런 불완전이 없고 자체적으로 완전해지는 까닭이다. 따라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내가 볼 수 있다면 남녀 양성의 특점을 두루 겸비한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사람이신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셔서 지상에 계실 때에는 남자만의 모습이셨으니 그런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사 53:2]고 한 그런 형상은 다시는 찾아볼 길이 없다. "예수님 그림"이라고 하여 이천 년 가까이 옛날부터 나도는 것들은 필요없는 장난질일 뿐이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모습은 아직 아버지 앞에 나아가시기 전이므로 몸에 광채도 없으셨으므로 그 아름다움이 감추어져 있었음이다. 신령한 몸의 한 가지 특성은 여러 모양 여러 형태로 스스로를 변환시킬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제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심으로써 내 안에 나의 죽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찌 이 사실에 반(反)하는 일 곧 육체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육신대로 사는"[롬 8:13] 삶을 택할 것인가. 이미 이것['나는 죽었다'는 사실]은 법칙이 되어 있다. 기정 사실이니 법질서로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말을 오해하여 구원만 얻으면 되었고 은혜로 구원 얻은 만큼 별다르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단지 그 은혜 감사함으로써 일정한 날 특정 장소에 가서 예배라는 이름으로 최소한의 믿음의 표시만 내는 정도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인위적인 종교 교리를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처럼 착각하는 이가 거의 전부다.

그래서 "육신대로 살지" 말라는 것도 과도한 짓은 하지 말라는 정도로 알아들으면 무난하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나는 왕이나 주인 노릇 같은 것은 흥미 없으니 남의 종으로나마 목숨만큼은 부지하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과 같다 할까. 하나님의 구원에는 그런 것은 없다. 구원 얻으면 하나님의 아들됨이요 하나님의 아들되지 않으면 구원도 되지 않도록 확고하게 정해져 있다. 오직 양자 택일이다.

그런 소리는 겉으로 듣기에는 욕심 없는 소리 같이 들리나 사실인즉 영생에 대한 욕심만 들어있는 극도의 자기중심으로서 사랑은 아예 없는 것을 스스로 입증함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상 구원은 천만리 밖으로 떨어져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고 홀로 살 수 없어 여럿이 사는 데에는 사랑이 필수이다. 사랑에는 다 아는 바와 같이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동고동락이다. 한 몸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함에서 오는 사랑으로 최대 행복을 목적함이다. 하나됨의 사랑으로 최대 행복을 꾀하지 않으면 불행으로 급전직하로 떨어지는 것뿐이지 그 중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이다. 이 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서 특별히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공동체 의식에서 우러나는 공익정신 외에 요구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공익정신을 마다한다면 자기 홀로 살자는 것이요 그 뿌리는 곧 자기중심, 자기 집착인 것이다. 사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모든 악과 범죄가 거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당하는 그 고통으로써 하나님 친히 고통을 당하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입증되었고 이에 따라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 당하고 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께서 왕이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그런 자기중심의 패기를 원하실 리 없다.

에덴낙원에서의 사탄이 그런 패기의 추종자였다. 사랑의 나라에서는 패기니 야망이니 하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다. 이유는 단 하나, 사랑만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사랑이 없는 경우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수가 없다. 지금은 고통 당하고 있는 때이다. 이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현실을 무시하고서 옳은 판단을 할 수 없고 그런 옳은 판단이 막힌 상태에서 미래란 것은 없다. 지금 이 세상은 삶을 즐기는 때가 아니다.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악을 좋아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걸러내고 또한 앞에서 말한 시험하는 무대로서의 이 세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가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된 영광이 세상에 나타난다면 누가 믿으려고 하지 아니하리요. 가시적으로 그런 것이 나타나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강제가 되고 자유의지를 간섭하는 것이 된다. 오직 진리 그 자체가 좋아서 그 원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고난을 견디고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야 함이다.

믿음으로 나지 않고 오관으로 감지하는 것이라고 해서 절대로 믿지 않을 사람이 믿게 되고 순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에덴낙원의 비극적인 결말로 증명이 되어 있는 마당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고 하나님을 감히 시험하고 또한 증명한 예가 없는데 여전히 아니 오히려 다른 이방인들보다 더한 죄를 지어 그리스도의 때까지 이른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일관한다는 것은 반드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초년 고생은 사서라도 하고 말년 복이 좋아야 좋은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역전(逆轉)의 기쁨은 그 어느 기쁨보다 나은 것이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해야

성경은 성령으로 사는 것과 성령으로 행하는 것을 나누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4,25] 한 것이다. 자동적으로 성령으로 행하게 되면 그런 경고를 할 까닭이 없다. 우리의 의지, 선택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이제 구원 받은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갈 5:16]. "육체의 소욕(所欲, lust, desire)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는 것이니 이 둘은 서로 대적하는"[:17]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갈 5:18]는 것의 차이는 전자는 자기 구원을 더 다시 목적하지 않음이니 이미 구원되었기 때문이요 후자는 율법을 행하는 목적이 자기 구원에 있기 때문에 자기중심인즉 원천적으로 죄만 가중될 뿐 구원일 수가 없음이다.

전자는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히 1:9]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 곧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대로 행하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자기중심인지라 자기를 사랑하지 자기 외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는 본질이다.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갈 5:17]는 것은 자체 분란[自中之亂]을 말함이 아니니,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기"[:18] 때문이다.

백이 아니면 흑이요 흑이 아니면 백이니 백과 흑이 공존할 수 없음을 가리켜 이기는 자와 진 자를 구분함이다. 갑과 을이 결코 대등할 수 없다는 것이 3위1체의 법칙이다. 반드시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작은 것이다. 주종(主從) 대소(大小) 인과(因果) 관계다.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를" 때는 육체의 영향력이 크고 성령의 영향력은 작다. 힘이 큰 쪽 앞에서 작은 쪽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성령의 소욕이 육체를 거스를 때에는 성령이 주요 육체는 종이다.

이러한 상극 관계를 가리켜 "이 둘은 서로 대적한다" 한 것이다. 고로 평등하지 않다. 여남(女男) 양성 평등이 존재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를 따른다. 단체에 단체 장(長)이 둘이 있으면 그 집단은 아무 일도 못한다. 한 몸에 머리가 둘이면 생존 불가능함과 같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면" 당연히 "성령"이 크고 "육체"는 작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전 9:27]고 하였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 7:15]이라 하던 때와는 정반대다.

반대일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은 성령이 육체를 거스르는 때요 과거는 육체가 성령을 거스르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원이나 육신이 약하다[마 26:41] 하신 것은 아직 고난 받으시기 전이라 성령께서 제자들 안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반드시 그런 의미라고는 할 수 없고 자연계에 속한 우리 연약한 육체의 한계를 말씀하신 것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 '육체'는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는 말을 서로 대등하여 싸운다는 의미로는 알아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사는"[갈 5:25] 것은 원인이니 "성령으로 행하는"[:25] 것은 그 결과다. 원인이 원인으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주어야 한다. 만일에 그 결과가 없다면 원인도 원천적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써 영원한 3위1체 원리의 확고부동성은 나타난다. 왜냐면 원인만이 있을 수 없고 결과만이 있을 수 없어 반드시 원인과 결과라는 양자 관계로 만물 만상이 구성되어 있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구원 받은 것'과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빌 2:12/딤전 4:16/고전 9:24-10:12/15:2/빌 3:8,9/딤후 3:15/벧전 2:2/히 3:6-17] 것과는 본질은 같은 것이면서도 원인과 결과로서 별개인 것이다. 회개했으면[원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결과] 것이다[마 3:8].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지"[엡 4:1/빌 1:27] 않으면 원인 무효가 되니 그 표현이 "내 스스로 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댓글 없음:

댓글 쓰기